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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만화가

醉月 2011. 1. 31. 08:43

 

 

 


 

 

 

 

데뷔 이후 그녀가 발표한 작품의 수는 대략 60여 편. 거기에는 <레드문> 같은 장편뿐만 아니라 <상실시대>와 같은 단편도 포함된 것이니 의외로 많지 않은 수다. 더욱이 생존을 위해 다작(多作)이 빈번한 만화계의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오히려 적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덕분에 그녀의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확히 창작연대기가 이루어진다. 어린 시절, 그녀의 작품을 보고 성장한 독자라면 데뷔 이후 4~5년을 우선 1기로 꼽게 될 것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그녀는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만화 베끼기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라면서, “특히 외국시대물이 큰 인기를 모았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작품들을 보고 자랐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초창기에 발표된 작품들은 주로 서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비슷한 시대물일지라도 그녀가 생각하는 바는 달랐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란 생각이 들게 된 것은, 내가 이야기 하는 것과 실제 독자들이 보는 것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비록 외국이 배경이고 외국인이 등장한 이야기일지언정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곧 작품에 담기는 생각과 가치관은 ‘한국인’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서양 배경의 이야기 속에서 유독 ‘러브스토리’에만 집중해서 보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국인’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이다. 하지만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에는 너무 힘든 시절이었다. 그 때의 시대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에피소드가 그녀의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어느 날, 심의를 받던 가운데 이 작품은 출판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봤더니 등장인물 가운데 악역으로 나오는 캐릭터가 있는데, 그 인물이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요. 결국 ‘두목은 나쁜 놈이야!’이라는 대사를 넣어서 수정했지만, 그 이후가 더 문제였어요. 여주인공 남자친구의 부모가 이혼했는데 그게 문제가 되기도 했고, 판자촌도 등장하면 안 되었죠. 돈을 못 번다는 이야기도 안 되었고, 내용상에 부익부 빈익빈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도 안 되었어요. 나중에는 ‘(등장인물의) 걸음걸이가 허무하다’라는 이유까지 나왔죠.” 이처럼 우여곡절을 경험해서인지 오랫동안 이 작품은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 되었다.

 

 

 

 

 

 

 

얼마 뒤, 그녀의 작품 창작에 큰 변화가 온다. 1988년부터 소년잡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름만 황미나일 뿐 황미나 ‘아저씨’로서 작품을 발표”했던 때다. 출발점이 된 작품은 <아이큐점프>에 발표한 <무영여객>이었다. 매체가 바뀌자 장르도 바뀌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은 대체로 코믹과 액션이 어우러지는 작품들로서, 덕분에 여성독자 뿐만 아니라 남성독자까지 아우르는 작가가 되었다. 변신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기존 독자층을 잃어버리거나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정작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질문을 받은 다음에서였고, 작품을 연재할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전달하고 싶은 방식을 찾아서 한 것이었어요. 순정작가이기 때문에 순정작품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 작품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거든요.”


요컨대, 작가가 독자의 입맛에 맞춰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품을 내놓고 독자들이 나름대로 그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그녀의 일본진출 역시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한국만화가의 해외진출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시절, 그녀는 일본 대형출판사의 만화잡지인 <모닝>지로부터 연재 제의를 받게 된다. 당시 그녀는 <만화광장> <주간만화> 등 성인잡지에도 자주 단편들을 발표했고, 그러한 작품들을 모은 작품집 <상실시대>가 나왔는데, 이것을 일본 편집장이 보고서 그녀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모닝>에 <윤희> <이씨네 집 이야기> 등을 10년 가까이 연재하게 되었다.

 

 

 

 

 


데뷔 이후 그녀의 시간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그녀의 역할이 우리 만화계에서 ‘첨병(尖兵)’이었다는 이야기에 결코 이견을 두지 못할 것이다. ‘남들보다 먼저’ 가는 그녀의 모습은 데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일본만화 해적판, 특히 <캔디 캔디>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과 같은 작품들이 엄청난 인기를 모은 가운데 여성만화가의 활동이 매우 드물었다. 요컨대 ‘엄희자’, ‘민애니’ 이후 여성만화가에 있어서 세대의 단절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1980년대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황미나는, 말하자면 ‘여성만화가의 새로운 1세대’의 출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어린 나이 때부터 만화계 일로 쫓아다니게 되었다.

 

“만화가협회 부회장직을 맡게 된 것이 2006년이었지만, 그 이전부터 이사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현실적으로 여성만화가 선배가 없는 상태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었고, 어느새 여성작가로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표격이 된 듯 했지요. 이후 아시아만화가대회나 청소년보호법 사태 등 만화계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어요.”

 

 

 

물론 이와 같은 ‘만화계 큰언니’ 역할이 공식석상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출판사와 문제가 생기거나 개인적인 어려움을 지닌 후배들, 특히 여성 작가들은 그녀를 자주 찾게 되었다. 2000년대 초에 발표한 <황미나의 포토샵 만화 감잡기>도 이와 같은 ‘역할’에서 비롯된 일이다. 1990년대 후반에 이미 컴퓨터로 원고를 작업하는 것에 적응했던 그녀에게 다른 작가들의 문의가 줄을 이었다. 간혹 출판사에서 파일로 원고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아직 수작업 원고가 대세였던 당시에 자세한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작가들의 질문이 빈번해지고 주로 전화로 가르쳐주다 보니 한계가 느껴져서 어느 순간 책을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소년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은 빛을 발했다. <아이큐점프>가 창간했을 때 그녀는 직접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갔다. 이미 여러 매체로부터 청탁을 받고 있던 소위 ‘잘 나가는 작가’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순정만화가로서 활동을 하다가 소년지로 진출하고자 했을 때에는 어느 정도 목적의식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순정만화들이 소년만화에 비해 인기가 없었고, 잡지에서는 일종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순정만화를 넣는다는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편견들을 깨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녀의 선택과 판단은 적중했다. <아이큐점프>에 발표한 <무영여객>, <슈퍼트리오>와 <보물섬>에 발표한 <녹색의 기사> <태백권법> 등이 연이어 인기몰이를 했다.

 
1990년대 초반, 일본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뚝심은 빛났다. 일본 편집부에서 <윤희>의 첫 원고를 보더니 ‘이건 이렇게 고치는 게 낫다’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녀는 그와 같은 수정 요청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정이 아닌 전혀 다른 ‘윤희’를 만들어서 보냈고, 다시 재수정 요청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른 ‘윤희’를 만들어 보냈다. “그랬더니 일본 편집부에서도 황당해 하더라고요. 자기들 기준에서는 이런 작가를 만나본 적이 없었을 테죠. 매번 수정이 아닌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서 보냈으니 말이에요.” 결국 편집부에서 투표를 하여 마지막 원고로 진행하기로 했고, ‘이 사람한테는 수정을 요청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최근의 많은 만화가들이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황미나 역시 일본만화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이렇게 밝힌다. “중학교 시절에 <캔디>를 너무 재미있게 보면서 인물들이 생생하게 연기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데뷔 초기 사진자료를 기대하고 있던 그녀에게 출판사가 샘플자료로 보내온 것이 ‘일본 만화’였던 기억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요즘 우리 만화의 현실도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당시에는 일본만화를 아예 베끼거나, 혹은 자기 만화를 그리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였어요.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 더욱 나빠졌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단순히 영향을 넘어서서 ‘만화는 이렇다’의 표본으로 일본만화를 삼고 있다는 것이에요. 가령, 작가는 분명 한국인일 텐데 캐릭터는 물론 스토리에서 ‘일본’이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봐요.” 이러한 모습들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작품 속에서 형상화되는 것이 서로 별개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창작자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지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창작자들이 ‘자신’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하여 ‘나’를 먼저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자서전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자신의 생각들이 투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창작 자체는 작가에게 일임되어 있었죠. 비록 심의로 인해 마음 졸인 것은 있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싸우고 있다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어요. ‘나는 이렇게 억울한 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죠. 헌데, 지금은 모든 것이 상업적인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최근의 만화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그녀가 느끼는 점은 이처럼 명확하다. 과거에는 억울한 측면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작가들 스스로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많은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는 꾸준하지만, 예전처럼 작가에 열광하는 독자들은 많이 사라졌다는 거죠. 가령, 예전에는 누구누구의 작품이라서 본다는 독자들이 있었고 그와 같은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더라도 실망하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작가에게 열광할 때 독자들은 ‘이 작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작품을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라는 식으로 작가의 뇌 구조를 궁금해하고, 그러면서 작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작가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작가들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한다.

 

 

 

지나온 30년의 시간이 그저 3년 같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는 지금도 연재가 시작되면 하루 평균 16~7시간을 꼬박 일한다. 사흘에 두 번 자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그녀가 최근에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에 있다. 조만간 독자들과 만나게 될 이번 작품 역시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다. “40대 여성이 주인공인데, 일반적일 수는 없는 경험을 지녔지만 동시에 그녀가 겪는 상황들에 대해 모든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밝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설렘이 느껴진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난다는 그녀, 황미나는 조만간 우리들에게 또 다른 ‘나’를 보여줄 것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처음 공개한 후 올해부터 SBS와 케이블TV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는 《NEW 아기공룡 둘리》(이하 《NEW 둘리》). 김수정이 직접 애니메이션 제작과 캐릭터 라이선싱을 위해 ‘둘리나라’를 세우고 극장판 《아기공룡 둘리-얼음별 대모험》(96)을 만든 이후, 다시 한 번 총감독을 맡은 작품이 바로 《NEW 둘리》다. 현재《NEW 둘리》는 공중파와 케이블TV에서 동시간대 시청률 상위에 오르며 《도라에몽》과 《짱구는 못 말려》를 능가할 만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래서 진두 지휘하는 입장이자 원작자로서 김수정에게 감회가 남다르리라 생각했건만 정작 아빠 된 사람으로서는 준비가 너무 길었던 점이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드디어 나오긴 나오는구나’는 심정이었다고. 김수정은 “감회보다는, 그 동안 내 할 일을 좀 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고백한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둘리라는 공룡 캐릭터가 처음 나오게 된 건 시대의 아픔(?)이 주효했다. “작품을 내던 1980년대 초반은 만화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사회적으로도 만화가 자체에 대해 색안경 끼고 보는 정도가 아니라, ‘왜 이런 만화가 나와야 하는지’ 정치인들이나 기득권자들이 모두 안 좋게 보던 시절이었죠.” 김수정은 아동 본연의 모습을 만화에서 그대로 보여줄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아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결국 둘리라는 공룡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건 현실적인 제약을 의인화를 통해 넘어보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이야기. 또 그는 남들이 아무도 하지 않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 ‘공룡’을 끌어들였다고 둘리의 탄생 비화를 밝힌다. 이렇게 해서 나온 둘리는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반사회적이고 까칠하며 반항적인 성격에 비교육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이에 대한 김수정의 생각은 오히려 확고했다. 둘리가 가진 그 면면은 사실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이고, 27년이 지난 지금도 아이들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방영되고 있는《NEW 둘리》는 어찌 보면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사실 1983년 원작을 처음 발표할 당시의 주 독자층이 기억하는 ‘둘리’와 1987년 TV 특집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만난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둘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요리 보고~ 조리 봐도~”로 시작하는 주제가로 익숙한 첫 TV 시리즈의 둘리는 원작의 악동 같은 둘리와는 달리 제법 착하고 순하다. 여기에 또 20년의 시간이 흐르다 보니, 왕년에 TV로 처음 둘리를 접했던 세대와 이번에 처음 접한 세대가 완전히 달라진 것. 하지만 올해 방영되고 있는《NEW 둘리》는 원작 만화가 지니고 있던 ‘악동’ 같은 둘리의 면모와 일상을 고스란히 살렸다. 결국, 둘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에게 《NEW 둘리》는 오히려 원작 거의 그대로를 전해주고 있는 셈이다.

 

 

 

《NEW 둘리》가 나오면서, 둘리 팬들 사이에서는 한가지 재미있는 논란이 일었다. KBS에서 방영된 첫 TV판 애니메이션에서의 둘리가 착하고 순수해 보이는 데 비해, 이번에 나온《NEW 둘리》는 원작의 악동 같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다 보니 ‘어느 쪽 둘리가 맞는지’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 하지만 김수정은 둘리의 악동 같은 면모 역시 아이들의 성장 과정과 같을 뿐이라 역설한다. “KBS판 둘리는 공영방송에 맞게 교육적인 면을 넣어야 했고, 작품으로서도 원작의 초반 부분만을 따 만든 것이기에 착한 둘리가 나온 것뿐이에요. 만약 특별편 몇 부작이 아닌 50부작 100부작이었으면 갈수록 둘리의 ‘까칠한’ 면이 나왔을 거예요.”

 

 

 

즉,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차 사회와 부딪혀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둘리 일당들의 모습도 세상을 공부하며 깨닫고 살아가는 성장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수정은 이렇게 강조한다. “이 기회에 말씀드리자면 KBS판 둘리는 나름의 둘리로 즐거움을 갖고 보시면 되고, 《NEW 둘리》의 둘리는 새로운 대로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시면 됩니다. 둘을 계속 비교하면서 어느 쪽 둘리가 맞다거나 어울린다고 하면 저로선 난감해요.”

 

 

 

 

 

《둘리》라는 작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고길동 씨다. 자기 자식 둘도 있는 판에 인간도 아닌 초록색 괴물(?)에다, 타조에, 외계인을 자처하는 녀석, 거기에 팔자에도 없는 조카까지 떠안은 인물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만 부리는 이 녀석들을 쫓아내고 싶어 안달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다 거둬 먹여 살리는 이 시대 만년 과장의 표상. 재미있는 점은, 어렸을 적 작품을 봤던 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이 작품을 보고 난 후에는 하나같이 길동이 아저씨를 욕했던 자기 과거를 ‘참회’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썽쟁이들을 거두는 길동이 아저씨는 대인이며, 돌아가셔서 화장을 하면 사리가 쏟아질 것, 새침부끄(평소엔 싫은 듯 트집 잡고 화내지만 사실은 애정을 품고 있음을 일컫는 일본어 조어 ‘츤데레’의 우리말 대체어) 하다”며 칭송하기도 한다.


길동이 아저씨가 이 불청객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모습, 한 상에서 함께 밥을 먹거나 ‘차려 오라’ 시키는 모습,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속을 끓이면서도 가끔은 능청맞게 곯려주며 버릇을 잡는 모습들은 단순히 집주인이나 어른이라는 위치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둘리》가 등장했던 1980년대 초중반은 2009년 현재와는 정 반대로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한창 벌어지던 때다. 즉 핵가족 시대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 길동이 아저씨네는 항상 아이와 조카와 악동들에 늘 북적이고 있다. 또한 길동이 아저씨도 갈수록 불청객들을 쫓아내기보다는 같이 놀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등 어떻게 봐도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둘리 일당들에게 길동이 아저씨는 단순히 《톰과 제리》의 톰 역할이 아니라 대가족 시대의 아버지로서 이들을 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구도가 《둘리》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화 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던 《일곱 개의 숟가락》도 한 가족의 왁자지껄하면서도 조금은 슬픈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핵가족 시대에 막 접어들던 그 시점에, 가족 그것도 크지 않은 집구석에 적지 않은 인원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사는 서민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김수정의 만화. 김수정에게 가족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

 

 

 

 

 

김수정은 1950년 열한 남매 가운데 여덟째로 태어났다. 전쟁을 치른 직후로 매우 궁핍한 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중2 이후로 어머니가 장사를 하며 생활을 꾸려야 했던 시절, 김수정은 ‘아르바이트가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속에서 아옹다옹 다투고 보듬는 삶을 살아왔던 그로서는 은연중에 가족들이 함께 비비고 살아야 했던 시절을 《둘리》와 《일곱 개의 숟가락》 같은 작품들에 투영했다.

 

《둘리》가 한 가족의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냈다면, 《일곱 개의 숟가락》은 희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려운 삶 속에서 울고 웃으며 희망을 찾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그 작품들 속 가족의 모습은 사춘기 소년 김수정의 감수성을 자극했던 삶의 일부분, 일상 속 인물과 풍경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김수정은 또 등장인물도 모두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물상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둘리도 도우너도 또치도, 나아가 ‘성공할 생각도 별로 없고 내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플 뿐인 3~40대 직장인 가장’ 고길동도, ‘스타가 되고 싶은 20대’ 마이콜도, 모두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사람이 아닌 우리가 다들 지니고 있는 면을 담고 있는 인물상이라는 것. 김수정은 결국 우리네 삶과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온 것이다.

 

‘둘리 아빠’로 늘 성공사례로 거론되곤 하지만 물론 김수정에게도 물론 굴곡은 있었다.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BS(베이비 사우르스) 돌리》나《티처X》는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소위 ‘흑(黑) 역사’로 취급될 정도다. 이 작품들이 나왔던 1994년을 김수정은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최악의 시간, 인생에서 가장 피곤에 절어 있던 절정기”라고 토로한다. 지금에서야 웃음을 띠며 되돌아보지만, 그 당시에는 한 아이템을 여러 모로 고민해 이야기를 끌어내던 자기 스타일도 유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서 안 했어야 하는 작품 아닌가 하는 점은 동감해요. 10년 이상 《오달자의 봄》, 《소공자 블루스》, 《크리스탈 유》 등으로 내달리다 보니 《티처X》에 이르러서는…. 요즘 막장 드라마 막장 드라마 하는데 인생 막장에 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잘못됐다기보다 작품 중에서 이러한 경력도 있었다, 그리고 잘 만든 건 아니다, 그건 인정해요.”

 

 

 

 

 

사람들이 김수정 표 만화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먼저 꼽는 것이 바로 맛깔스러운 대사다. ‘우리말’로 오밀조밀하면서 입에 짝짝 달라붙는 특유의 대사감각은 김수정 만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중요 요소다. 첫 TV 시리즈와 극장 판으로 오면서, 원작 팬들은 그 대사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는 불만을 품기도 했다. 특히 만화와는 달리 실제 작품 진행 시간(러닝 타임)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가 마음대로 대사를 만들기가 더욱 힘들다. 게다가 극장판인 《얼음별 대모험》 개봉 당시엔 음향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 실제 대사의 6할 정도가 들리면 잘 들리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극장판 제작 당시엔 아이들이 적어도 그림만으로도 내용을 따라가고 웃을 수 있게끔 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한다. 이번《NEW 둘리》는 26부작이라는 길이도 확보해 맛깔스러운 대사를 소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지만, 대사를 너무 많이 쓰면 오히려 주 시청자들에게 역효과가 날 수 있어 원작 만화와 극장판의 중간 정도로 절충하고 있다.


또한 김수정에게는 대사와 더불어 꼭 관철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 “일본 작품의 홍수 속에서, 나름대로의 민족관과 애국심이 생기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내세울 만한 우리 것이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워요.” 김수정은 이를 위해 아직 양적 질적으로 부족하더라도 우리 애니메이션을 보고 가슴을 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일례로 간판이나 상표 등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에도 우리의 거리나 우리 나름의 것들을 넣어, 아이들이 우리 것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김수정에게는 자식보다도 더 오래 동고동락한 사이로, 이젠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만 하게 됐다는 둘리. 하지만 만화가로서도 또 애니메이션 업체의 대표로서도 김수정은 여기까지만 적당히 잘 하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다.  빈말이 아니라 ‘내년이면 환갑’인 이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총감독에겐 여전히 뭔가 또 만들어내려고 생각 중인 것들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가득’하다.

 

 

 


《NEW 둘리》는 TV시리즈 또는 극장판 시리즈가 후속으로 예정돼 있고, 여력이 생긴다면 작은 악마 이야기인 《아리아리 동동》을 3D로 만들고 싶단다. 여기에 할 수 있다면 《일곱 개의 숟가락》을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따뜻한 색감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고 싶고, 나아가 자기 작품은 아니지만 김원빈의 고전 명작 《주먹대장》을 제작하고 싶은 포부를 밝힌다. 또 만화가로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 아름이다. “동자승을 통해 인생에서 품는 여러 의문에 대해 철학적인 느낌으로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고요. 현대판 일지매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다뤄보고도 싶어요(일전에 한 인터뷰에선 ‘일지매’가 ‘일진회’로 나갔다고 한다). 나이가 더 들면 짠내에 옷냄새에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성담론을 그려보고 싶기도 해요.”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길을 개척해 왔지만 그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이고 해야 할 일도 많아 보인다. ‘김파마’라 불릴 정도로 풍성했던 파마 머리도 싹둑 자른 채 부단히 뛰어다니는 그 모습이 열정과 패기 넘치는 젊은이 못지않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시절을 대표했던 강한 사내, 부서질 줄 알면서도 돌진하던 까치. 그 까치를 그렸던 이현세는 요즘 아이들을 위한 학습만화 <만화 세계사 바로보기> 시리즈와 성인이 된 그 시절의 독자들을 위해 골프 소재 기획만화 <버디> 시리즈를 그리고 있다. 정통 성인극화의 장을 열었고 작품 발표가 곧 대중문화사적 사건이었던 전작들에 비하면 매우 소프트한 근황이다. 그는 “학습만화를 하니까 사인회에 가도 아이들이 까치를 그려달라고 해요. 일본만화 주인공 그려달라는 소리하지 않아서 좋죠. 골프만화를 그리니까 아빠랑 아이가 함께 내 책을 읽고 있다는 소리도 들어요”라며 웃는다. 그의 눈은 여전히 호랑이처럼 강렬한데 웃음소리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부드럽다.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이현세. 쉼 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타성에 맞서 싸웠던 야성미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현세는 고교 졸업 후인 1974년 서울에 올라왔다. 첫 상경 때는 만화가 화실이 많았던 모래내(남가좌동)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 “어릴 때는 만화가 중에 손의성을 제일 좋아했고 오명천, 이종진의 작품을 즐겨 봤어요. 그 선생님들의 작품은 빠짐없이 봤죠. 펜 선이 칼처럼 날카롭고 율동미가 넘쳤어요. 그림을 흉내 내서 화실에 보내면 책 맨 뒤에 있는 독자만화 코너에 단골로 실리곤 했죠.” 만화를 좋아했고 그것 밖에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현세였지만 만화계 입문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스무 살인데도 몸에 털이 많아서 나이가 더 들어 보였는지 늙었다고 안 받아줬어요. 진짜 스무 살이라니까 ‘금방 군대 가야 되니까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독자라 군대도 파주에서 6개월만 있었는데…. 아마도 부리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순정만화를 그리는 나하나 선생님이 받아줬어요. 그 뒤로는 하영조 선생님과 이정민 선생님 문하에 있었고.” 이현세는 자신이 애타게 쫓던 활극만화가 아닌 여성의 섬세함을 담아야 하는 순정만화와 아기자기한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는 명랑만화로 출발했다.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만화였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부족한 곳에서 출발했다. 그 부분을 채우자 자기만의 만화를 갈망하게 된다.

 

 

 

“극화 쪽으로 옮겨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선생 밑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 시절에는 작업 속도가 다른 문하생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고 한번 본 것을 모사하는 것에도 능했죠. 당시 ‘새소년’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어요. 선생은 그 잡지사에 가서 유행하는 일본만화나 미국만화를 가져왔고, 내 역할은 그걸 보고 그림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어요. 만화 아니면 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시키는 대로 그림만 그리던 때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그때, 이현세는 고향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선생은 그를 잡으러 오기도 했다. 배도 고프고 술과 담배도 고팠던 시절, 그는 모든 허기를 만화 그리는 것으로 채웠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니까 내 만화를 하고 싶어졌어요.”

 

 

 

 

 

이현세가 데뷔작으로 꼽는 작품은 1978년 발표된 <저 강은 알고 있다>이다. 이 시기 이전에도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순수 창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전에 했던 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어요. 조금 인기를 얻자 어떤 출판사 사장이 당시 원고를 사겠다고 했어요. 부끄러운 일이었죠. 이후로도 이런 유혹에 흔들릴 것 같아서 태워 버렸어요.” 이현세는 그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의 만화를 섭렵할 수 있었고, ‘까치’와 ‘이현세’는 그 시기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만화주인공 까치가 처음 등장한 작품은 1979년 발표된 <시모노세끼의 까치머리>였다. “좀 독특한 주인공을 만들고 싶었어요.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 내가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나였고, 그래서 까치의 모습에 나를 담았죠.” 하지만 까치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공포의 외인구단>부터였다. 당시 프로야구는 최고의 선수들이 돈의 가치를 중심으로 우열을 가리는 공간이었다. 승자만이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외인구단은 패자들이 모인 곳이다. 까치 역시 승리만 하는 히어로가 아니라 패배를 경험한 독한 사나이였다. 이현세는 이 ‘까치’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까치는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에요. 깨질 것을 알면서 달려드는 사나이죠. 못났지만 잔머리 굴리지 않는 사나이. 까치는 의지의 사나이에요. 그래서 까치의 이야기도 결과의 승리가 아니라 의지의 승리로 풀어갔어요.”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는 ‘의지’만 있다면 상황은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의지만 있다면 어떤 부분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까치고 내가 살아온 방식이에요.”

 

 

 

 

 

이현세의 작품에는 남성중심적 영웅주의와 과도한 민족주의가 판을 친다. 이 같은 독자들의 판단은 인기 스타가 된 후 출연한 CF를 통해서 더 분명해졌다. 그는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사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이현세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자배구를 소재로 했던 <불새의 투혼>부터 시작해, 시골 소녀의 서울 상경기를 그린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여자형사를 등장시켰던 <블루엔젤>, 여자 골퍼의 성공기를 다룬 <버디>까지. 하지만 겉모습이 여자일 뿐 주인공은 남성적이거나 극의 후반부로 가면 남자 등장인물의 매력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날 보고 마초 같다고 해요. 그래서 각성도 해보고 여자의 마음을 작품에 담아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어요. 로맨틱코미디에 도전하기도 했는데 잘 못하겠더라고요.” 일부러 까치를 그리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까치가 나와야만 만화가 되더라는 이현세. “내가 나를 보고 만든 까치였지만 까치를 이긴 적이 없어요. 까치가 아닌 다른 캐릭터를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고, 그 때문에 방황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고, 내 만화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어요. 영화감독 곽경택과 친하게 지내는데, 같이 작품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렇게 잘 통할 수가 없어요. 둘 다 마초라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까치가 인기를 얻자 곳곳에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 중 하나는 만화방 상호에 까치가 등장한 것이다. 어딜 가나 ‘까치만화방’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까치만화방’에는 이현세의 만화를 따라 그린 실로 수많은 ‘까치 만화책’이 쌓여 있었다. “한때는 만화방에서 책을 내는 대부분의 만화가가 까치, 엄지, 동탁을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렸어요. 이름은 달랐지만 겉모습과 성격은 같았죠. 독자들도 내가 그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작품을 소비했어요. 해도 너무 한다 싶어서 세 명의 주인공에 대해 의장등록을 하기도 했어요.”


<공포의 외인구단>이 인기를 끌자 이를 원작으로 한 이장호 감독의 영화가 제작됐다. 당대의 아이돌 스타 최재성이 까치가 됐고 에로스타로 각인됐던 이보희가 엄지 역을 맡았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까치의 작품 속 대사는 당대의 톱가수 정수라의 입을 통해 불려졌다. “만화에 이어 영화, 주제가가 히트를 치면서 나도 스타 대접을 받기 시작했죠. TV에도 여러 번 출연했지만, 내 모습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TV 맥주광고 탓이 커요. 첫 반응이 좋아서 총 세편을 찍었는데, 밖에 나가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광고 영상은 상당히 여유로운 남자로 그려졌었는데 까치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그런지 강한 사내의 모습으로 기억된 것 같아요.”

 

 

 

 

 

인기만화가라 좋은 것이 있다면 남들보다 많은 기회가 온다는 점일 것이다. 그 중 누구는 무난한 것을 고르고, 누구는 쉽지 않은 것을 택한다. 이 부분에서 이현세는 도전자였다. 늘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모두 명중시켰던 것은 아니다. 화살이 과녁을 한참 벗어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영역을 우리 만화계의 전선으로 확장시켰다. “인기가 생기면서 일이 많아지고 우쭐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점점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됐어요. 첫 번째 실패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아마게돈> 제작이에요. 당시 스포츠 신문에 <남벌>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한국이 북한과 함께 일본을 침공한다는 이야기에 흠뻑 취해있었죠. 더군다나 만화는 내가 결정하면 됐지만, 애니메이션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작팀 전체의 의견을 조정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어요.” 


<천국의 신화> '무죄' 판결 당시 일본 만화가들이 보내온 축하 메시지

 

 

 

당시 <아마게돈>은 순수 국내 기술과 자본만으로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는 많은 이들의 의지가 모였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졌고, 결과적으로 ‘한국창작애니메이션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평가를 받아 모처럼 조성했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 열기도 사라져 버렸다. ‘이현세가 해도 안 되는데’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그는 “진짜 숨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기대했던 프로젝트를 망가트렸다는 자책감이 크게 느껴졌다.

 

<천국의 신화>도 큰 실패 중 하나예요. 한국의 상고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겠다고 선언하고 100권짜리 기획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런데 6권이 나왔을 때 검찰에서 음란물 배포 혐의로 기소했다. 동물과 사람의 구분이 없던 때, 도덕이라는 기준이 서있지 않은 원시 자연을 음란하다고 기소한 것이다. “천지가 창조되고, 동물과 사람이 구분되고, 도덕과 법이 형성되어가는 원시시대를 표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라 생각했는데 이를 음란물로 낙인 찍어버렸죠.” 이현세는 이것이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의 문제라면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섰을 것이지만 그마저 피해버린다면 만화창작의 자유와 만화표현의 수위는 한층 더 위축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래서 걸어온 싸움에 응했죠.” 금방 끝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법정 싸움은 6년간 계속됐고, 그 결과는 법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뜬 ‘이현세 무죄’라는 한 줄이 전부였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큰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그가 이 작품을 시작할 때 지니고 있었던 신명이 사라져 버렸다. 40대에 시작한 작품을 50대에, 그것도 50권이 조금 넘는 반토막 상태로 완결해버렸다. “무엇보다 50대가 되고 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40대 때는 중국의 요 황제를 천족의 자손이라고 표현할 만큼 기세 등등 했지만 50대가 되니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전체 서사에 일관성이 부족해졌죠.”

 

 

 

 

 

<천국의 신화> 음란물 시비에 대한 이현세의 분노는 여전해 보였다.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를 인정하라 하고, 자신은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사회적으로는 이미 죄인이 되어버렸던 6년 간에 대한 분이었다. “내가 가진 무기는 만화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낙천성이에요. 실패가 두렵지 않은 이는 없어요. 하지만 실패가 곧 패배여서는 안 되죠. 어차피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니까, 조급할 필요가 없어요. 젊을 때는 여유가 없기 마련이어서 속도를 내 달리지만, 지쳐서 몇 번 멈춰 보면 여유 있게 걷는 법을 알게 돼요. 한 걸음씩 천천히 걷다 보면 결국 원하는 지점까지 갈 수 있어요. 다른 방법은 없어요. 천천히 집중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향해 걸어야 해요.”

 

이현세는 최근 몇 년간 작품 활동보다는 만화가 협회 업무에 더 집중했다. 데뷔 후 작품에만 매달리느라 주변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부족했다고 느낀 것일까.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협회장으로서 만화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뛰었다. 그 뒤부터 이현세는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화 주인공 뒤에서가 아니라 신문 칼럼이나 만화작품의 서문을 통해 더욱 직접적으로 대중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사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다르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것 같아요. <버디>는 그런 생각 속에서 나온 작품이죠. 나를 처음 만났던 독자들이 이제는 골프를 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른이 됐어요. <버디>는 그런 독자들을 위해 기획된 거예요.” 이 만화에서 그는 여자 골퍼의 성공담을 빌렸지만 이현세 나름의 인생론을 담고자 했다고. “누구에게나 기회는 찾아와요. 또 성공 뒤에는 위기가 있기 마련이에요.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결국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에요. 오만해서도, 흥분해서도 안 되죠. 위기라는 것은 서둔다고 해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득, 세간에 성인만화의 라이벌 구도로 회자되는 만화가 허영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상무 선배가 빠지면서 허영만 선배와 내가 성인만화의 라이벌로 부각됐어요. 허선배나 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언론이나 평론가들이 그렇게 붙이기를 좋아해요. 스포츠신문 간에 경쟁을 하니까 거기에 연재하는 허선배와 내 만화가 붙기도 했고, 작품 스타일부터 사는 방식까지 어쩌면 허선배와 나는 정반대기 때문에 더 비교되는 것 같아요. 사실 술을 먹더라도 허선배가 관리형이라면 나는 두주불사형이에요. 나고 자란 배경과 정서에도 영호남이라는 지역색이 있고요.” 후배만화가 양영순의 표현을 빌자면, ‘허선생님은 깨끗한 포장육 같고 이선생님은 아무렇게나 막 자른 돼지고기 같다’고. “허선배가 모범생이라면 나는 불량배죠.(웃음)”

 

 

 

 

 

항상 새로운 시도로 한국 만화계의 전선을 확장해온 그이지만, 요즘은 독자들이 만화에서 찾는 재미도 달라졌다며 그에 맞춰 창작 스타일도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현세는 자신의 변화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쉬운 듯 쓴 웃음을 지으면서 학습만화와 골프 소재 기획만화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곧 이어 ‘하고 싶은 건 해야 한다. 그래서 무협극화라 할 수 있는 <창천수호위>를 하고 있다’며 또 한 권의 작품을 펼쳤다. 거기에는 허기진 야수의 모습을 한 까치가 있었다. 마치 ‘옛날에는 직구만 던졌지만 지금은 변화구를 섞어서 던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배포 큰 사내의 관록을 본다. 신뢰할 수 있는 야성을 본다.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현세의 눈은 여전히 야수의 눈동자처럼 빛났다. 거친 말투와 무심한 듯 던지는 유머 역시 그대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활짝 웃는 입 모양이었다. 주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는 여전히 시간에 쫓기고 있었지만 연신 웃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웃으며 살기로 계획한 사람처럼. 여느 때처럼 분주한 연구실에서 조교는 프로젝트에 사용할 일러스트 시안을 잡아달라며 기다리고 있었고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렸다.

 

이현세는 입과 눈으로는 인터뷰에 응했고 손과 머리로는 일러스트를 그려냈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A4지에 쓱쓱 그린 그림은 호랑이가 됐다.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호랑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호랑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호랑이였다.

 

 

 


 

 

 

 

‘만화’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다.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즐겁고 신이 났던 시절이었는데 은사님의 소개로 어느 출판사를 알게 됐고, 정식으로 128p짜리 한 권 분량을 그려보라는 제의를 받게 된 거죠.” 그게 인연이 되어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모두 4권의 만화를 선보이게 된다. 첫 작품이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이었던 반면, 두 번째 나온 <길>은 한국전쟁이 끝난 당시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현대물이었고 세 번째 작품 <등불>은 괴기물, <태양을 향하여>는 원시시대 인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조선시대를 보여주는 이두호’의 모습만 보아온 지금의 독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뜻밖의 모습이다.

 

그 시절에는 의식적으로 만화를 그린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때 나온 작품들은 만화가로서 자신의 데뷔작품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속내다. 하지만,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대로 진학한 이후에도 그의 생계를 지켜준 것은 다름 아닌 ‘만화’였으니, 만화가로서의 그의 숙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듯하다. “대학을 1년 반 정도 다니다가 경제적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영장이 나오자마자 반가워하며 입대했죠. 하지만 제대 후에도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었고, 그때 박기정 선생님의 화실에 들어가 1년 동안 일해서 등록금을 마련했지요.” 그러나 복학을 하려고 학교에 갔더니 이미 제적된 상태였다. 힘겹게 학교를 다시 다녀야 될 일이 없어진 것에 대해 그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소년중앙」이 창간되었고, 그에게는 만화뿐만 아니라 잡지 안에 실리는 삽화, 일러스트까지 일이 쏟아졌다. 오죽하면 ‘이두호 한 사람만 있으면 잡지 하나 만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일이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마음 속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학교에 다니지 않게 된 것 자체는 상관없지만, 화가에 대한 꿈은 여전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두호는 이때를 떠올리며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상태’였다고 기억한다. 먹고 살기 위해 만화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꿈은 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갈등 끝에 작업실을 함께 쓰던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원고가 아닌 캔버스에 매달렸다.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하면 적절할까요. 갈피를 못 잡고 있던 터라 화가의 열망을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생각이 명확했던 것도 아니고, 다시 만화로 돌아간다는 확실한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죠.” 단지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에 미친 듯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 동안 ‘한풀이’를 하고 나니 어느 날 갑자기 만화가 그리워졌다. 본격적으로 만화가 그리고 싶어졌고, 펜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캔버스에는 만화를 그리면 안 되는가’라는 생각이 따라온 건 ‘한풀이’의 끝에서 스스로에게 심어준 만화에 대한 확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만화가로서 이두호의 2막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보여주게 된다. ‘만화를 그리자’라고 마음을 먹자, 곧바로 ‘어떤 만화를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고, 그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바지저고리 만화’(조선시대 역사와 민중들에 대한 만화를 그려 붙여진 이름)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결심은 처음에는 고생을 요구했다. 하지만, 1년여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주변에서도 그의 만화를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만화를 싣는 잡지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어느 잡지에 누가 무슨 작품을 하고 있는지 편집자나 독자 모두 알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작품이 어떤 작품일지 대체로 윤곽이 그려지게 된 것이죠.” 일반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 작가와 편집부가 어떤 작품을 하자고 논의를 거치기 마련인데, 이두호의 경우 청탁이 들어올 때 마감날짜와 분량만 이야기하면 되었다. 이미 ‘이두호 만화’에 대한 기대치가 자리 잡혀 있었고, 그에 따라 작품의 진행은 순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만화는 만화가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 명함’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한 가지 장르에 대한 고집은 작가에게 있어서 강점도 되는 반면 한계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우려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해요. 그러나 나의 경우 만화를 그리겠다고, 만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이미 시대물 즉 ‘조선시대’만을 그리겠다고 다짐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을 한계로 여기지는 않아요. 처음부터 ‘무슨 만화를 할 것인가’가 중요했으며, 지금도 만화가는 ‘어떤 만화를 그렸느냐’에 따라 판단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역사’ 소재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광범위하다고 생각했으며, 표현하기에 벅차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문제의 중심은 더욱 진지해졌고 자연스럽게 ‘조선시대’로 한정지은 것이다. 그와 같은 뚝심은 작품활동 내내 빛났다. 지금까지 발표된 ‘바지저고리 만화’의 작품 수는 대략 30여 편. 하나의 작품을 시작하면 그 작품에 대해 적어도 평균 1년 이상 매진했다는 얘기다. “연재를 해본 경험에 비추어 월간지는 1년에서 1년 반 정도, 주간지는 열 달 정도가 작품 하기에 알맞은 기간이라고 생각해요. 헌데, 실제 연재를 하다 보면 대체로 그 기간을 훨씬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내 경우 3년 연재한 작품들이 꽤 많은 것 같네요.” 이러한 사실은 이두호 만화의 꾸준한 인기를 반증하는 셈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잡지연재의 경우 작품이 재미가 없으면 서둘러 종료하거나 내용을 바꾸거나 심지어 중단되기까지도 한다. 그 때문에 만화는 그 시기에 유행하는 소재를 다루는 경향이 많은데, ‘바지저고리 만화’는 유행이나 사회적 분위기를 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스스로는 ‘무식하게 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뚝심이 있었기에 이두호만의 고유한 만화가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두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머털도사’다. 때로 머털이의 유명세는 이두호라는 이름보다 앞서기도 한다. 하지만, 머털이의 탄생은 의외로 우연적이다. 작품을 청탁받던 당시 이두호는 무려 예닐곱 개의 매체에 연재할 시기라서 정신 없던 때로 기억한다. 일주일 가운데 이틀은 밤을 꼬박 샐 때였고, 그래서 그는 작품 연재를 청탁받고서도 뭘 할지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편집장과 미팅하던 당일 날 갑자기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외갓집이 산 넘어 있었는데, 거기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도술을 부려 구름 타고 훌쩍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는 것. 머털이의 모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반면, <임꺽정>은 작심하고 준비를 했던 작품이다. 언젠가는 한번 그려보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스포츠조선>에서 연재 제의가 들어왔고 ‘임꺽정’이라면 하겠다고 답했다. 고우영, 방학기 등이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서 내심 ‘안 되겠지’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단번에 하자는 답변이 돌아와서 연재는 시작되었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장장 5년여의 시간이 흐르게 되었다. 말이 5년이지, 일간지 지면에 일주일 가운데 엿새를 연재했으니 투철한 작가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덩더꿍>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불만해소’가 된 작품”이라고 밝힌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한다. 주인공이 세조 즉위 당시 오른팔 역할을 했던 실존인물 ‘홍윤성’을 모델로 했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의 비호 아래 갖가지 패륜과 비리를 저질렀다고 한다. “헌데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가 특별한 하자 없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죽을 때까지 편안한 삶을 영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죠. 그러니 화가 나지 않겠어요. 그 때 마침 「주간만화」가 창간되면서 연재 제의가 들어왔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군요.” 연재 초기 ‘역사에 없는 이야기’라고 밝힌 뒤, 등장인물의 이름을 ‘홍성윤’으로 하여, 온갖 나쁜 짓을 일삼은 그를 결말에 이르러 장독대의 손에 처단당하도록 했다. 이두호는 이 작품을 하면서 ‘만화가가 좋다’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됐다고 한다.

 

<객주>는 애초에 목적의식을 지니고 시작한 작품이다. 마음먹고 읽어보자며 소설책을 샀는데, 순우리말이 어찌나 이해하기가 힘든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사전을 옆에 두고 소설책을 보면서 “이걸 만화로 그려본다면 어떨까” 생각하던 차에 잡지사로부터 <객주>를 만화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의가 들어왔다. 사정이 생겨 곧바로 시작은 못했지만, 일 년 뒤 작품을 연재하기에 이른다. 만화를 준비하며 소설책을 거의 통째로 외다시피 했다는 일화도 있다. “만화로 그리려면 소설을 완전히 해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문하생들에게 테이프에다가 소설을 전부 녹음시켜서 그것을 반복해서 들었죠.” 나중에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웬만한 용어들을 사전에서조차 나오지 않는 순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선지 그는 “말하자면 <객주>는 말하자면 다른 작업들을 가능케 한 ‘밑거름’이 된 작품”이라고 밝힌다.

 

 

 

 

 

이두호는 타인의 장점을 받아들이는데도 주저함이 없다. 그는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을 차례로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는데 거기에는 모두 특별한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이현세와 함께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이현세에게 사인을 요청하더군요. 그가 기분 좋게 사인해주는 모습을 보았고, 사인이 끝나고 난 뒤에 귀찮지 않냐고 물어봤어요. 왜냐하면 당시 나는 사인하는 게 귀찮게 느껴져 사인회에 초청을 받고도 거절하던 때였거든요.” 그랬더니 이현세는 그에게 정색하며 “그게 왜 싫어요? 저런 독자들이 계셔서 내가 활동할 수 있고 먹고 살 수 있는데, 오히려 너무 고맙죠!”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뒤 이두호는 “한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후부터 사인 요청이 들어오면 언제나 기분 좋게 해주게 되었다.

 

 

 

허영만에게도 ‘한방 먹었던 사건’이 있었다. “주간지에 연재할 때인데, 잡지사로부터 원고료를 깎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차라리 공짜로 그리면 그렸지 그렇게는 안 한다고 했죠. 언젠가는 그 사실이 누군가에게 알려지게 될 텐데, ‘이두호도 깎아줬다’라는 이야기가 반드시 나오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다음날 허영만과 통화 중 그는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 있는데, 허영만의 설명이 이두호를 두 손 들게 만들었다. “형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스토리가 이미 모두 나와 있는데, 연재 도중에 돈 몇 푼 때문에 중단해서 이거 반푼이 만들 수는 없지 않겠어요. 자식 하나 낳았는데, 돈 때문에 병신 만들어야겠어요?”라는 것이다. 만화의 속성상 한번 연재가 중단되면 작품을 종료시키는 것은 대단히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두호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도 작품은 계속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다행히도 그 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김수정은 ‘둘리’ 그릴 때 한 번 봤더니, 이 사람은 항상 원고가 인쇄실로 직행하더군요.” 일반적으로 원고는 편집부로 마감되어서 인쇄소로 넘기게 되는데, 김수정은 편집부로 넘겨야 할 마지막 순간까지 원고를 잡고 그리다가 정말 막바지에서야 인쇄소로 바로 넘긴다는 얘기였다. “내 경우, 마감시간이 닥치면 아무래도 날리게 되는데 김수정은 그렇게 안 한다는 것이죠. 그걸 보고서 내 스스로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더 열심히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강단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지만,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동료들에 대해서는 ‘프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만화가 이두호. 그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1997년부터 세종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이두호가 학생들에게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바로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작품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스로도 때때로 초심이 없어지는 것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밝히는 그는, 그 때문에 학생들이 처음 만화를 하고자 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되살펴 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짧은 시간이어도 좋고,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자기의 만화관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요. 주관이 뚜렷하고 생각이 확고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속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죠.”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는 다른 학교, 다른 학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행사가 있다. 매년 여름이면 치러지는 ‘지옥캠프’가 그것인데, 이두호가 제안하고 동료작가들도 참여하여 10여 년 전부터 지속되어 오고 있는 행사다. 

 

 

 

“만화가들이 어떻게 그리는지 함께 생활하며 실제 체험해보라는 의미를 지닌 행사예요. 가령 원고작업에 들어가면 보통 하루에 열서너 시간씩 일하고는 하는데, 그게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웬만한 만화가라면 그 정도는 다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학교에서의 수업은 고작해야 일주일에 세 시간이고, 한 학기 다해봐야 40시간에 미칠까 하는 정도니 그런 경험을 보여주기에는 많이 부족하죠. 그러니 캠프를 통해 학생들이 작가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함께 생활해보면, 강의시간에는 배우지 못한 여러 가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캠프를 다녀온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의 대학생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으로 ‘지옥캠프’를 자주 이야기한다고 하니, 캠프의 성과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에 내내 자리잡게 될 것이리라. <피리를 불어라>로부터 올해까지 정확히 50년. 그러니까 이두호의 만화인생은 반세기의 시간을 쌓아 올렸다. 이처럼 ‘역사’를 가진 이두호지만, 그는 올해도 여전히 학생들과 함께하기 위해 지옥캠프에 참가할 계획이다. 올 여름에도 만화가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이 그 ‘역사’를 옆에서 경험하며 자신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강도하는 2004년 포털사이트 엠파스에 <위대한 캣츠비>를 처음 연재했다. 강성수라는 본명과 과거의 작품활동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강도하라는 이름은 가면이었고 <위대한 캣츠비>는 의식 없는 로맨스 만화에 불과했다. 어떤 이들은 상업만화계의 이면에서 우리만화계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상징하며 활동했던 ‘독립만화계의 기수’ 강성수의 변절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달랐다. 2000년부터 꾸준히 등장하고 있던 웹만화계의 새 얼굴 중 하나로 강도하를 맞이했다. <위대한 캣츠비>가 들려주는 청춘의 고뇌와 사랑에 열광했다. 엠파스가 웹툰 사업을 종료하면서 <위대한 캣츠비>는 포털사이트 다음으로 자리를 옮겨 연재된다. 캣츠비를 둘러싼 주변인물들 간의 삼각 연애가 절정을 향하면서 독자들의 반응은 배가됐고, 숨이 멈출 것 같은 반전에 인터넷은 온통 강도하의 이야기와 강도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강도하가 인기를 얻을수록 인디 만화가 강성수는 사라지기도 했고 다시 주목 받기도 했다.

 

“그 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인디라고 불리던 시절이나 인기 웹툰작가라고 하는 때나 달라진 게 없어요. 제가 원하는 형태의 작품을 하죠. 과거에는 그런 형식과 의미를 담은 작품활동이 필요한 때라고 믿었어요. 저는 90년대 중·후반에 했던 그림작업이나 설치, 퍼포먼스 같은 것을 만화라고 생각했죠. 그것을 언더나 인디라고 주장하는 것, 그런 틀에 가두는 것은 원하지 않았어요.” 강도하는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생각과 입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실험만화, 언더그라운드만화라는 타이틀로 <모던코믹스 봄>이라는 잡지를 냈어요. 같이 활동하던 작가들이 신일섭, 오영진 등이었어요. 후에 이경석, 박형동 등이 합류했죠. 만화에 대한 산업적 관심이 집중되고 정부가 만화를 육성하겠다고 나서던 시기였어요. 만화의 다양성이 필요했던 때였고 세계 만화의 여러 지점들이 한국형으로 제시되던 때였죠. 저도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고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 <모던코믹스 봄>이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 작업을 한 것이죠. 생각과 행동을 일체하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의도와 결과가 동일하게 나오지는 않았어요.”

 

 

 

당시 우리 만화계는 산업 규모의 확대와 함께 만화의 문화적 가치 확산이라는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른바 상업만화로 불리는 코믹스가 시장의 규모를 늘리는 역할을 했지만 폭력성이나 선정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면, 인디만화는 우리만화의 건강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각종 전시행사와 이벤트에 초대됐고 언론은 그들을 과도하게 포장했다. 이로 인해 인디만화는 내용의 성숙보다 형식과 이벤트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모던코믹스 봄>은 <히스테리>, <바나나> 등으로 발전했죠. 저는 내용을 채우고 싶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2001년에 만화웹진 ‘악진’을 열었어요. 웹이라는 공간을 실험했던 거예요. 웹을 통해서 색다른 감성을 지닌 작가들을 만나고 그런 만화를 에디팅 하면서 네티즌을 만났죠. 그 때의 슬로건이 ‘만화인큐베이팅시스템’이었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포털사이트의 ‘나도만화가’나 ‘도전만화가’ 같은 것이죠.”


 

 

 

강도하가 이끈 ‘악진’은 김수박, 권용득 등 일군의 작가군을 등장시켰다. 여전히 상업만화와는 달랐지만 <모던코믹스 봄>과도 달랐다. 실험적 연출과 과격한 표현보다는 안정된 형식과 작가의 시선이 강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올 때쯤 강도하는 ‘악진’을 해산시킨다. “포털이 더 근사한 인큐베이팅시스템을 운영하게 됐어요. ‘악진’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했죠. 미련 없이 운영을 중지했어요. 대신 그 때의 에너지를 창작에 담았죠. 그것이 <위대한 캣츠비>가 됐어요.”

 

2004년 웹만화계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일상의 유머와 감성을 전하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정치적 논평과 서사를 담아낸 강풀의 만화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웹툰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기였던 셈이다. 강풀이 장대한 이야기 구조를 웹툰에 담아내면서 서사웹툰의 전형을 마련했다면, 강도하는 이를 토대로 웹 환경에 적합한 연출 방식을 구조화했고 서사웹툰의 미학을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고정된 것을 거부했던 강도하의 전복적 사고와 그것마저 경계하며 스스로의 틀을 파괴했던 강도하의 정신이 이끌어낸 결과였다.

 

 

 

 

 

“중2 때 낙서부터 시작했어요.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또래들보다 잘 그리지 못했어요. 좋은 자료가 없었죠. 친구들은 헌책방이나 외국서적 판매하는 곳에 가서 일본만화나 애니메이션잡지를 사왔는데…. 집이 가난해서 그런 자료는 구하지 못했죠. 겨우겨우 ‘보물섬’을 한 권 구해서 보고 그렸어요.” 강성수는 만화잡지 ‘보물섬’을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그대로 모사했다고 한다. 당시 ‘보물섬’은 만화 형식과 장르의 보물섬이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잡지를 통째로 모사하고 이를 반복했다면 수많은 작가들의 장점을 흡수했을 것이다. “그 때 ‘보물섬’에는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이두호 등 기라성 같은 선생님들의 작품이 연재되고 있었어요. 너무 좋아했죠. 그래서 따라 그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후회하는 측면도 있죠. 그때 일본만화 보고 그린 친구들의 그림에서 일본 물이 빠지지 않듯, 저한테는 ‘보물섬’의 물이 빠지지 않는 것 같아요. 아내(<풀하우스>의 만화가 원수연)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인데 어느 날 ‘언제까지 이렇게 크게 귀를 그릴 거냐’고 묻더군요. 저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차’ 싶었어요.” 80년대 초반의 아동만화는 대체로 귀를 크게 묘사했다.

 

강도하는 자신의 그림 속에 과거에 훈련했던 부분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따라 그린 것이 과정이었다면 결과는 자신의 것으로 나와야 하는데 아직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자기 것’,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면 지금도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요. 일관성이 없어요. 작품마다 그림체를 조금씩 달리 가져가는 것은 의도하는 것인데, 작품 내부에서 일관성 없는 선이나 형태가 나올 때가 있어요. 훈련했던 것이 나도 모르게 나타나는 거죠. 자기 것으로 이걸 틀어막아야 하는데, 아직 부족해요.”

 

 

 

 

 

강도하는 ‘고교 데뷔’를 이룬 만화천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서 스토리에 주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받아보고 싶다는 이유로 바쁜 고교 시절에 120페이지나 되는 원고를 그리는데 투자한다. “응모는 ‘보물섬’에 했는데 겨우 입선을 했어요. <뛰어라! 빠가사리>라는 작품이었는데 본지에 발표되지는 못했죠. 그래서 공식 데뷔작은 <아버지와 아들>이 됐습니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자신이 뭔가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이 작품도 ‘아빠가 나의 친아빠일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했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서로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예요. ‘보물섬’, ‘아람’, ‘보이스클럽’에 각 1년씩 연재했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테마를 생의 작업으로 이어갈 생각이에요.”

 

 

 


그 때나 지금이나 강도하는 생각이 있으면 집중했고 결과와 상관없이 목표했던 것을 하나씩 수행해 갔다.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다. “당당하게 살았어요. 정말 가난해서 당당할 수 밖에 없었어요. 잃을 게 없어서 아쉬운 것도 없었고.” 강도하는 어린 시절을 반지하실 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햇빛의 소중함을 알았고 <위대한 캣츠비>에서 등장인물들이 햇빛과 하늘을 보며 희망을 얻는 대목은 자신의 삶이 반영된 것이라 했다. “월계동에 산 적이 있어요. 지하실을 벗어나서 부모님이 처음 얻은 집이었는데 장마로 강물이 범람하면서 집이 떠내려갔어요. 거짓말 같았죠. 집이 떠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어요. 사람이 집을 떠나는 것인데 집이 가족을 떠났죠. 집이 부유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 정착하지 못하고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에 공포를 느꼈죠.”

 

 

 

강도하는 ‘청춘3부작’이라고 명명한 세 편의 작품 <위대한 캣츠비>, <로맨스킬러>, <큐브릭>에서 배경이나 공간이상의 의미를 지닌 집을 등장시킨다. 절망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한 집, 한없이 포용하는 어머니이기도 하고 과감하게 단죄하는 아버지이기도 한 집이 등장한다. 그 집에서 관계를 맺으며 등장인물들은 가족이 되기도 하고 가족은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래서 ‘청춘3부작’은 행선지 없이 떠다니는 가족에 대한 드라마로 읽히기도 한다.

 

 

 

 

 

가난한 만화가 지망생이 얻었던 ‘보물섬’처럼, 강도하는 위험천만한 이 시대의 연인과 가족을 한 페이지씩 따라 그리고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이 도발적인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고 그것이 과한 욕망의 변주로 들려서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만화를 보는 인식의 틀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만화를 보면서 불편한 진실이나 결론을 기대하지 않고 편한 것만 찾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독자들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조금만 진지해지려고 하면 ‘만화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쏘아 붙여요. 저는 그런 기준이 더 부담스러워요. 제게 만화는 모든 것이죠. 제 삶이니까 그만큼 진지하고 한계가 없어야 됩니다. 어떤 ‘형’도 ‘식’도 정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게 만화죠.”

 

 

 

강도하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자신의 만화철학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웹툰을 그리면서 작품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펜과 종이를 버리고 디지타이저에서 그림을 그렸고 스크린톤과 칼 대신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해 색상을 입히고 효과를 넣었다. 페이지 단위의 연출도 웹브라우저의 속성에 맞춰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형태로 바꾸었고 스크롤 마우스의 이동 속도에 맞춰 컷의 크기와 위치, 색상의 농도 등을 조정해 갔다. 극의 전개에 따라 주인공의 외형을 강렬한 극화체로 묘사해가며 독자의 몰입도를 조율하기도 했다. 전체 서사의 긴장과 생명력을 유지하게 만드는 기막힌 반전을 감춰둔 채 흔들림 없이 극을 주도했다.


 

 

 

그렇게 <위대한 캣츠비>라는 강도하의 도전이 마무리되었을 때 독자들은 환호했고 만화계는 기꺼이 기립박수를 쳤다. 만화미학의 위대한 탐험가이자 파괴자이며 도전자였던 강도하는 이 작품으로 그 해 최고의 작가에게 수여하는 대표적인 만화상 3개를 독차지했다. 누구도 이루지 못한 만화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것이다. “강성수라는 이름이 어떤 한계가 됐던 적이 있어요. 벗어나고 싶었죠. 새로운 작품으로, 새로운 이름으로 나서고 싶었어요. 지금은 강도하라는 이름이 서서히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것에 불안감이 있어요. 고착화되는 것. 벗어나야죠. 제가 하는 일, 만화가는 10년 하는 장사가 아니니까요.”

 

 

 

 

 

강도하는 새로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멈추지 않을 것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저는 과거에 우수한 작품을 쏟아낸 작가보다 지금 신작에 매진하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나이 때문에 손이 떨리는데도 요즘 신작을 기획하고 있다고 말하는 원로 만화가들을 만날 때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죠.” 또 자신의 도전이 질투로부터 출발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볼 때마다 경이로움에 빠져요. ‘어떻게 이렇게 그리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같은 질투심에 빠지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밤새도록 고민해요. 그리고 또 밤을 새워서 집중합니다. 내 것을 찾기 위해서. 그래야 맘이 편해져요. 제게 자유는 새로워지는 거죠. 내가 만든 것으로부터도 새로워지고 싶어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이전 작품에 대해서도 멀어지려고 합니다.”

 

 

 


강도하는 최근 발간한 <큐브릭>에서 방황하는 10대들을 이야기했다. “약한 영혼이 너무 많아요. 영혼이 약한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강한 영혼이란 것이 뭘까 싶은데…. 저는 용기 있는 선택과 결정 그리고 지금이 아닌 새로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 좋은 결정, 지금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은 결국 손 쉬운 결정이고 회피일 때가 많죠. 그래서 길게 봤으면 좋겠고, 뭘 해도 괜찮으니 부끄럽지 않게 용기 있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강도하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듯, 마치 자신에게 또 하나의 확신과 신념을 심듯, 담담하게 ‘용기 있는 선택’을 이야기 했다. 새로움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성과마저 파괴하고 또 다른 새 것을 찾아 나섰던 강도하. 만화미학에 대한 그의 탐험이 또 한번 우리를 저 너머의 세계로 안내하길 기대해 본다.

 

 

 


 

 

 

 

우리네 사회를 뒤흔든 굵직굵직한 사건사고들을 사회고발적 시선으로 엮어낸 <야후>와 노인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담아낸 <로망스>, 그리고 인과응보라는 주제를 소름끼치게 표현해내고 있는 최근작이자 화제작 <이끼>에 이르기까지. 윤태호의 작품들은 각기 장르는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정 범위로 지정한 ‘사회(세상)’와 그 구조,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 군상들의 내면과 심리를 관찰하고 이를 표현해내는 데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렇듯 일반적인 상황 전개만이 아닌 ‘조명하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일관된 방식은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윤태호 특유의 색깔로 독자들에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을 갖추기까지는 순탄치만은 않은 성장기와 시대를 거쳐야 했다. 올해로 마흔 하나. 윤태호는 “제대로 대학엘 갔으면 88학번”이었던 바로 그 세대이자 광주 출신이다. 1987년이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한 6월 항쟁과 6·29 민주화 선언이 있었던 시기. 윤태호는 5·18의 도시 광주에서 고등학생의 몸으로 시위에도 나가고 형사한테 쫓겨서 남의 집 간판 가게에서 자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눈으로 보는 환경 자체에 대한 비판 의식을 익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시대 배경만이 그를 만든 건 아니었다. 윤태호는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박탈감’과 ‘이질감’이라는 화두로 설명한다. 학교 가면서도 차비를 옆집에서 빌려서 갈 정도로 집안 사정이 너무나 어려웠던 그때, 윤태호는 선천적으로 약했던 피부 탓에 아이들 속에 끼지 못한 채 개울가에서도 옷 한 번 벗고 같이 뛰어들 수도 없었다. 그런 그를 지탱했던 것은 스케치북에 그리는 그림들뿐이었다. 게다가 작은 시골 학교에서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학생에게 쏟아진 선생들의 언어폭력과 멸시는 어린 시절 윤태호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다. 그 때 윤태호가 느꼈던 감정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 이는 ‘왜 나에게 오는 게 없지? 난 그림 열심히 그리고 산 것뿐인데’라는 박탈감에서 오는 이질감이었다. 이러한 성장기에 쌓인 자기 위치에 관한 감각과 적의는 시대 배경과 함께 사회의 흐름과 구조를 보는 시선이 되고, 이 시선은 이후 아스트랄로지(점성술)와 도 등을 접하면서 이성적으로 성숙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신문에 네 칸 만화를 연재할 만큼 어려서부터 만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윤태호. 하지만 미대를 가기 위해 입시미술에 매진하던 고3 때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지면서 아버지는 결국 미대를 포기하면 안 되겠냐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체육특기생처럼 마냥 그림만 파던 윤태호는 이 말에 ‘난 대학에 못 가겠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결국 국립대 미술교육과로 시험을 치긴 쳤는데 실기가 1할밖에 안 되는 판에 ‘여기 가면 좀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행히’ 떨어졌다고 한다.


그 길로 윤태호는 『만화광장』 부설 만화학원 광고를 부욱 찢어 아버지한테 보였고, “속는 거다. 이런 데 가 봤자 안 된다”며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학원 졸업할 때까지만 학원비를 책임져 주시면 알아서 다 하겠다”고 밀어붙여 서울로 올라온다. 처음엔 생판 처음 보는 사촌 형님 댁에서 얹혀살았지만 이윽고 집을 나와 만화학원에서 라면 삶아 먹으며 살았다. 하지만 이도 오래 못 가 건물 주인에게 들키고, 그때부터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바람에 졸지에 노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재미있는 건 무슨 인연인지 이 노숙 생활이 ‘그토록 밑에 들어가 만화를 배우고 싶었던’ 허영만 선생을 만나게 하는 실마리(?)가 됐다는 점이다.


 

 

 

마침 윤태호가 자랐던 곳은 워낙 시골이어서 마을에 만화가 몇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운 좋게 허영만 선생의 만화는 많았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허영만 만화만 보고 자랐던 윤태호는 “난 허영만 선생에게 만화를 배워야지!”하고 있었더랬다. 한데 마침 학원이 대치동으로 이사를 하며 노숙장소도 은마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마침 그 아파트에 허영만 화실이 있었다. 연락처도 못 찾고 그저 허영만 선생 화실에 어떻게 들어가나 고민하고 있던 윤태호는 마침 노숙처에서 우연히 허영만 선생 문하생을 만나면서 기회를 잡는다.


물론 운이 좋다고 기회란 게 바로 철떡 달라붙진 않는 법인지, 한 번에 문하생이 된 건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 그림을 들고 달려갔건만 무려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갔다. 전전날까지 자리가 있었건만, 하필 그 전날 자리가 채워졌기 때문이었다. 윤태호는 실력이 없어 안된 줄 알고 그림을 다 찢고는 다시 잔뜩 그려 찾아갔다. 이번엔 바로 앞서 들어갔던 사람이 1주일 후에 나갔다가 “아이고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하고 도로 들어오는 바람에 자리가 또 모자랐다고. 풀 죽어 있는 그에게 얼마 후 전화가 왔다. “그 사람 다시 나갔으니까 또 들어오기 전에 빨리 오라.”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들어간 허영만 화실은 무지막지하게 바빴다. 당시 허영만 화실은 <망치> <오! 한강> <벽> <대머리 감독님> 등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던 터였다. 윤태호도 당연히 잠 한 숨 못 잘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자연히 자기 만화를 연습할 시간조차 없었고 ‘여기 있으면 내가 데뷔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윤태호의 목표는 문하생으로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허영만 선생 화실이었지만, 자기 작품을 하고 싶었던 윤태호는 조운학 선생의 화실로 자리를 옮긴다. 윤태호는 이때 처음으로 자취방을 얻어, 방학 때 만들었던 ‘동그라미 시간표’를 그려 거의 그 일정대로 살았다. 윤태호는 이 시기를 가장 그림을 많이 연습한 시기로 꼽는다. 상황 설정을 해놓고 두 쪽 안에 모든 전개를 마치는 만화로 꾸준한 습작을 그리면서, 배경·인물·데생 연습을 각각 한 시간 단위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손을 터는 방식의 연습을 진행했다. 차곡차곡 쌓이던 종이는 어느덧 라면상자 단위로 끝도 없이 불어났다. “그 정도로 그리면 실력이 안 늘래야 안 늘 수가 없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죠.”

 

그렇게 스스로를 향한 자신감을 쌓아가던 윤태호는 25살이 되던 1993년 <비상착륙>으로 『월간 점프』를 통해 첫 데뷔를 한다. 하지만 막상 윤태호는 인쇄돼 나온 자기 원고를 보고 창피했단다. “스토리가 너무 빈약했어요. 그림은 너무 공을 들였는데 스토리가 빈약하니까…….” 스스로의 빈약함을 자각한 윤태호는 다시 조운학 선생 화실로 들어가 수련에 매진한다. 화실 일이 끝나면 송지나 씨의 대표 드라마 <모래시계> 대본을 베껴 쓰기도 하고, 최인호 씨의 시나리오 전집이나 관상학 책 등을 읽으며 그림보다도 이야기 공부에 파고들었다. 이윽고 윤태호는 1996년 말에 『미스터 블루』를 통해 <혼자 자는 남편>이란 작품을 발표하고, 이후 <연씨별곡> <춘향별곡> 등을 거쳐 <야후>로 자기 색깔이 분명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윤태호는 손금을 볼 줄 안다. 고백하건대 필자도 한 술자리에서 복채도 안 내고 손을 내민 적이 있다. 그뿐 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점성술, 별자리에 사주, 풍수까지 볼 줄 안다. 한창 이야기를 공부할 때엔 도나 관상까지 익혔다. 이쯤이면 철학관 차려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본격적(?)이다. 이야기를 다시 돌리자면, 윤태호는 성장기 시절부터 ‘이질감’을 느꼈다고 했다. 어째서 나는 남들과 다른가, 나는 왜 내가 설정한 일반인의 범주 안에 못 들어가는가, 이게 어디서부터 왔을까? 나는 왜 인내심이 적고 내면에 울화가 있는가. 윤태호는 그러한 자신이 너무나 못마땅했다고 한다. “같이 미술부 했던 친구를 스무 살 때 지하철역에서 만났는데, ‘너 뭐 하냐’ 그랬더니 홍대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 충격이란! 난 대학 포기했는데 나보다 상도 못 받고 그랬던 애들이. 그때는 많이 속상하고 그랬어요. 그걸 긍정적으로 넘길 수 있어야 하는데, 난 왜 자꾸 날 힘들게 하는 도전과제 같은 설정을 하냔 거지.”

 

 

 


처음엔 남을 알려고 그런 공부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앞에 거울이 생기는 것 마냥 자기만 보였다고 한다. 남 탓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모순들은 모두 자기 안에서 나온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들을 스스로 탐색하는 과정에서 윤태호는 일종의 노하우를 체득한다.

 

“전지전능한 인물을 세우면 만화가 재미없어져요. 한계를 주는 것이 그 등장인물에 가능성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저는 한계로 점철된 사람이니까 등장인물에게 100가지 한계 중에서 인물별로 한두 가지 설정을 뽑아 주는 거죠. 저는 그런 작업들이 재미있고, 그런 예민함 때문에 남들은 쉽게 지나가는 부분들을 설정해서 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참고로 사회인 야구 만화인 <발칙한 인생>의 경우 원래 야구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나온 소재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니어그램(인간학의 일환으로 인간 유형을 아홉 가지로 나누는 분석법)’의 유형 수와 야구선수의 수가 딱 들어맞아 적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성격 하나하나가 각각 애니어그램이 분석하는 아홉 가지 인간 유형을 담고 있다. 한편 윤태호의 이 ‘예민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장모님이 궁합을 봤는데 점쟁이가 “이 사람은 여자보다 몇 배로 예민하다”라고 했단다. 하지만 정작 펜 같은 ‘작업도구’에는 크게 예민하지 않아서 웹툰으로 본격 진입할 때 컴퓨터 작업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도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윤태호가 포토샵 프로그램을 나름대로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이를테면 ‘글씨에 하얗게 라인 따는’ 작업도 지난해에서야 알았고, 처음엔 원고를 스캔 받은 후 식자만 붙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윤태호는 “이 정도도 모르는데 어색한 건 당연”하다면서 강도하, 양영순 등 주위 작가 친구들에게 묻고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그런 건 적응하면 되는 문제’라는 윤태호가 웹툰계에 들어설 때 어려웠던 점은 오히려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자기와 같은 기성작가가 무혈입성을 해도 되는가’ 하는 고민이었다. “네이버나 다음 같은 웹툰 영역은 나도 만화가 같은 재야의 아마추어 작가군들이 포털의 유머게시판 등을 잘 이용해서 유저들하고 같이 놀면서 만든 공간이란 생각이 강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탄탄하게 닦아놓은 공간에 기성작가인 내가 무혈입성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당한가? 그것도 그네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가면서? 이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죠.” 지금은 없어졌지만 처음 <이끼>를 연재한 곳은 지금 연재중인 미디어다음이 아닌 ‘만끽’이라는 유료 웹진이었다. 불편하고 미안했던 감정을 품고 있던 윤태호에게 유료 웹진은 ‘좋은 변명의 구실’이었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고.

 

 

 

 

 

그림 연습한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라던 윤태호에게 만화를 버리려고 했던 때가 있었을까? 분명 슬럼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해 예상답안을 준비하고 기대했으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윤태호는 ‘제일 잘 하는 게 이거고 다른 일은 할 수도 없다’며, ‘실력이 안 되어 밀려나 본 적은 있지만 버리려고 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또 어릴 땐 만화가 ‘그림’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점차 이야기에 관한 욕구가 강해져, 일러스트나 삽화만으로도 먹고 살 순 있겠지만 그쪽으로 방향전환을 생각하진 않았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런데 그런 윤태호조차 만화를 그리기 어려운 때는 있었다. ‘오호라 이번엔 슬럼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하고 귀를 쫑긋해 봤지만 윤태호는 역시나 기대를 시원하게 부숴준다. 그림 쪽으로 슬럼프를 겪은 적은 없다고 단언하는 그가 만화를 그리기 어려웠던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들 때문이란다. 흔히 창작자들이 겪는 ‘아이 키우느라 힘들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란다. 세상에나,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란다. “아이들이 너무 예쁜 거야. 행복하고. 그러니 세상에 별로 건넬 이야기가 없어요. 마이너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 확 채워져서 채색이 되다 보니까. 세상에 대해 내가 말해왔던 어법이 사라지다 보니까 별로 창작욕이 안 생기고. 아이템이 안 떠오르고. 그땐 진짜 아이들하고만 놀았어요. 애 무릎에 앉혀놓고 그림 그리고.”

 

 

 

“지금도 타블렛(펜 모양으로 생긴 디지털 입력 도구) 판 비닐이 다 벗겨졌는데. 이게 딸내미가 아기 때, 내가 여기서 그림 그리니까 자기도 한다고 샤프로 긁어서 그런 거거든요. 아이들 처음에 낳고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감을 느꼈어요. 우리 아버지도 내가 이리 예쁘셨을까? 이런 생각도 하고. 난 그런 사랑을 못 받았는데.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겐 주고 싶고. 애가 네발자전거에서 바퀴 두 개 뗀 날엔 네 시간을 붙잡고 가르쳤거든요. 애는 그 날 바로 바퀴 두 개로 탔어요. 아, 그 쾌감들. 그게 창작욕을 넘어서는 거죠. 그때 작업적으로는 참 힘들었어요.” 듣는 사람이 얼굴이 다 빨개질 정도로 행복감을 표시하는 윤태호. 슬럼프 이야기를 들어보려던 속셈이 부끄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것도 슬럼프라면 슬럼프인데 지금은? “지금은 그런 건 벗어났고 오히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또 다르게, 다른 차원에 많이 생겼죠.”


 

 

 

 

 

윤태호는 요즘 <이끼>로 일부 어린 독자들에게 ‘혜성같이 등장한 참신한 신인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이끼> 이전을 알던 독자들도 <야후>와 같은 다소 묵직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들로만 윤태호를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윤태호는 특유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빼면 소재나 표현 방식에서는 늘 한계를 두지 않아 왔다. <로망스>의 “늙어봐라!”는 익살맞은 일갈이나 <발칙한 인생>의 3류스러운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보면 <이끼>나 <야후>만으로 윤태호를 이야기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야후>로 전력투구를 하던 도중 작품 하나 더 하자는 편집자의 말에 ‘너무한 거 아니냐’는 심정으로 펜촉도 아니고 사인펜 하나 들고 찍찍 그어 그렸다는 <수상한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실험적이고 컬트적이라는(?) 반응을 얻고 말았다지만,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윤태호는 스스로 동어반복을 싫어한다. <연씨별곡>의 인기를 등에 업고 편집부에서 50권짜리 시리즈물로 내자고 해서 낸 <춘향별곡>도 바로 그 동어반복 때문에 하기가 싫어졌던 작품이란다.

 

윤태호는 현재 2년여에 걸쳐 구상한 인천상륙작전 이야기를 2년 정도 지나면 웹툰으로 해 보고 싶다는 한편으로, <이끼> 후속작으로 바둑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를 그려볼 생각이다. 인천상륙작전 이야기는 과거 무조건적인 역사비판적 시각에서 벗어나 ‘50~60년 지나보니 그건 또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측면과 맥아더에 대한 평가, 6·25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등을 다루고 싶다고. 또 바둑이야기에선 처세, 사회와의 관계, 인생을 어찌 설정하고 갈 것인가에 관해 논해볼 예정이다. ‘돈이 좀 들어오면’이라는 전제를 달고는 있지만, 아예 <블랙호크다운> 같이 서사와 드라마에서 도망가 철저하게 비주얼만을 추구하는 작품을 내 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3D 모델링하는 이에게 아파트 단지 하나를 전부 3D로 구축하도록 하여,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총격전을 비주얼로 특화해 오오토모 카츠히로(大友克洋)의 <동몽(童夢:도무. 1983)>처럼 한 권짜리로 그려내고 싶다고. 탈영병들이 아파트 곳곳에 숨어 있는데 이 소대가 어떻게 배치되고 투입되는지 그 동작 하나하나 배치 하나하나에 치중해 ‘보는 카타르시스’ 자체로 만들고 싶단다. 이를 위해서 군사 전문가도 섭외할 생각이다.

 

 

 


“그림이 늘 때엔 아무리 힘들더라도 정점을 쳐 줘야 늘거든요. 그래야 단계가 올라가게 되는데 지금까진 그 동안 ‘주머니에 든 돈’ 만으로 잘 써 왔다는 거죠. 이제는 좀 ‘남한테 융자를 받아서라도’ 뭔가 센 걸 해 봐야, 극한을 해 봐야 제 그림 그리는 스타일이라든지가 한 차원 높아질 거 같아서요.”

그림에 매진할 때도 이야기를 매진할 때도 언제나 자기의 현 지점을 알고 그 다음 단계를 밟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 온 윤태호. 종이만화에서 웹툰으로 무대를 옮겨온 이 시점에도 단순히 남들이 다 하고 있는 ‘스크롤 만화’가 아닌 ‘디지털 만화’라는 화두를 견지하고 연구하는 그는 자신이 한계로 점철돼 있다는 말과는 별개로, 남이 설정한 한계에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폭을 맞출 생각은 없어 보인다. 갈수록 급변하는 만화시장이지만 본인 말마따나 적응력이 강한데다 동어반복도 싫어하는 윤태호의 작품은 어떤 형태로 나오든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 끌 것이다.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그의 시선만큼이나 말이다.

 

 

 


 

 

 

김동화의 작품세계는 경이로울 만큼 다채롭다. 1975년 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데뷔했으나 이내 일본식 소녀만화의 전통을 받아들인 순정만화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순정명랑이라는 색다른 컨셉트의 작품을 발표했고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소년만화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 생활 20년을 맞이하는 해에는 기존의 작화 형식을 통째로 바꾼 ‘한국형 순정만화’를 창안했고 중장년층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실버코믹스의 한국형 사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만화계 입문은 19살 때 했어요. 당시에는 약화 스타일이 유행이었죠. 등신비는 극화체와 같은데 선을 간소화 시킨 그림을 약화체라고 했죠. 김기백 선생님이 으뜸이었어요. 김선생님 댁에서 일을 처음 시작했고 남자 순정만화가로 유명한 권영섭, 차성진 선생님 일을 돕기도 했죠. 차선생님은 순정극화 분야에서 빼어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았던 작가였어요. 연배 차이는 많지 않았지만 많은 걸 배웠죠.”

 

김동화는 어린 시절부터 만화에 대한 열정이 컸다. 한 동네에 살던 만화가의 집 앞을 서성이며 작가가 될 것을 결심했고 만화계 입문 후로는 다양한 스타일을 지닌 만화 스승을 만나 그들이 지닌 장점을 흡수했다. 감성적인 것을 좋아했고 동경하는 마음이 컸던 김동화는 꿈꾸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끝없이 도전했다. 소녀 대상의 순정만화와 소년 대상의 활극만화, 성인 남성의 시대극과 중장년층을 위한 드라마는 저마다 다른 정서를 필요로 한다. 화풍은 말할 것도 없고 연출과 대사도 달라야 한다. 직업적으로 특정 형식의 작품 창작을 지속했던 작가가 이를 의도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김동화는 이 같은 변신을 수없이 반복했고 매 분기마다 주목할만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초기에는 감성적인 내용의 소년만화를 했어요. 그러다가 일본에서 발행된 소녀만화잡지를 보게 됐는데 충격을 받았어요. 그림과 스토리가 너무나 다양했고 무엇보다 아름다웠죠. 이런 걸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시 출판만화계는 여성독자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순정만화를 내지 않았다. “70년 초쯤 일본만화 <캔디>가 해적판으로 나왔어요. 일반 출판유통을 타지 않고 문방구에서 팔렸는데 굉장했어요. <캔디>가 인기를 끌자 순정만화를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생겼죠. 때마침 한승원(동료만화가이자 김동화의 아내)이 문하생으로 들어왔어요. 인기도 없는 만화가였던 제게 만화를 배우겠다고 하니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죠.”

 

 

 

김동화는 한승원과 함께 79년 <우리들의 이야기>를 발표한다. 물방울 눈과 12등신 꽃미남, 꽃미녀로 대표되는 순정만화의 필치를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든 김동화의 풋풋한 그림과 한승원의 감성적 스토리가 어우러졌던 첫 작품이다. “순정처럼 그릴 수는 있어도 쓸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진짜 여자의 가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한승원이 그 역할을 해줘서 김동화의 만화가 된 거죠. 지금도 김동화는 패밀리네임이라는 생각을 해요.” 김동화는 곧이어 ‘평범한 소녀의 신데렐라 되기’를 테마로 한 작품 <내 이름은 신디>를 잡지 ‘여고시대’에 발표한다. 스승이기도 했던 차성진의 추천으로 파격적인 조건 하에 연재를 하게 됐고 연재 중 원고료가 네 번이나 올랐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아카시아>를 연재할 때는 더 굉장했죠. 월세 살다가 집을 샀으니까요(웃음).”


 

 

 

 

 

순정만화가 김동화의 첫 변신이었다면 <요정핑크>는 두 번째 변신이다. 이 작품은 전설적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됐던 작품이다. 여고생 잡지 ‘여고시대’와 달리 ‘보물섬’은 아동 독자 중심의 가족 교양잡지였다. 여고생 독자가 아닌 아동 독자를 염두에 둬야 했고 로맨스보다는 유머가 필요 했다. “당시 ‘보물섬’의 인기는 대단했어요. ‘보물섬 연재작가’라는 것이 자랑처럼 여겨지던 때였으니까요. 저도 그곳에서 연재를 하고 싶었죠. 그런데 똑 같은 걸 하기가 싫어졌어요. 변화를 주고 싶었고 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죠. 그래서 <요정핑크>를 했어요. 순정만화 형식이었지만 판타지와 명랑적인 요소를 가미했죠.” 연재 매체의 성격에 따른 변화이기도 했으나 정통 순정만화의 장식적 연출과 탐미적 묘사를 배제한 깔끔한 펜화와 유머는 이전의 작품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김동화는 이 같은 변화의 즐거움을 만끽이라도 하듯 순정만화와는 정반대 정서를 담아야 하는 소년 활극 만화를 시도한다. “좀 활동적인 것을 해보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곤충소년>이에요. 몸이 허약했던 터라 어린 시절에 친구들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죠. 그래서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곤충을 보면서 별별 생각을 다했는데 그 때 했던 공상을 그대로 작품에 담았어요.” 곤충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초능력 소년의 이야기는 당대의 소년 독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곤충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곤충의 능력을 위기 상황에 사용하는 소년 히어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김동화 만화에 대한 이전의 이미지를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여고생 독자를 향했던 김동화의 펜 끝이 소년 독자를 향했으나 <곤충소년> 이상의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소년만화를 더 해보고 싶었는데 이후로는 생각처럼 되지 않았어요. 당시 홍콩영화 중에 ‘강시시리즈’가 인기였는데 잡지사에서 이걸 만화로 해보자고 해서 한 적도 있어요. 안 해야 할 것을 하면서 많이 괴로워했죠. 밥 먹는 것 때문에 만화를 그려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에 만화는 접고 카페나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제주도에 내려가서 땅값을 알아보고 다닌 적도 있어요(웃음).”

 

 

 

 

 

김동화의 소년만화는 해를 넘기면서 시들해졌다. “슬럼프였죠. 그때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개봉했어요. 별 생각 없이 봤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어요. 단성사에서 했는데 4일 연속으로 봤죠. 우리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충격을 받았어요.” 김동화는 <서편제>에서 받은 충격을 자신의 작품에 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고 창작과 표현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대의 순정만화는 이름만 한국사람이고 서양사람의 얼굴과 신체를 그리고 있었다. 아예 배경과 주인공이 유럽인 작품도 여럿이었다.

 

 

 

“남의 나라를 무대로 펼치는 로맨스나 공상으로 가득한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어요. 6개월간 그림 연습만 했죠. 그런데 아무리 해봐도 우리 느낌이 안 났어요. 마론인형에 한복을 입혀 논 것 같았죠.” 김동화는 연습을 통해 달라질 것이 없는 완성된 스타일을 지닌 작가였다. 그가 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성과를 부정해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내 뻗는 펜 선 하나까지 조율해야 기존의 순정만화나 소년만화의 느낌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동그란 눈을 찢어진 눈으로 그려봤어요. 눈이 옆으로 길어지니까 키도 작아졌고 전체적인 비례가 맞아 떨어졌죠. 당시 만화잡지 편집장으로 있던 황경태(현 학산문화사 대표이사)씨랑 같은 아파트에 살았어요. 성인만화잡지를 창간한다면서 작품 하나 달라고 하더군요. 순정하고 아동물만 했는데 어떻게 성인물을 하냐고 했더니 연습하던 그림을 봤던지 ‘그런 거’로 하면 된다고 했어요. <못난이>, <황토빛 이야기>, <기생이야기>가 그렇게 나온 거죠.”


 

 

 

 

 

<못난이>로 시작된 김동화의 어른만화는 물방울 눈으로 대표되는 순정체 그림으로 한국사람의 얼굴과 신체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특히 유럽의 귀족사회나 도시화된 현대를 배경으로 했던 순정만화의 세계를 한국의 역사 시대로 전환시켰다는 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다. 김동화는 일련의 한국형 순정만화의 창작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아시아 만화대회에서 최초 창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앙굴렘 만화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파리의 만화전문서점을 갔어요. 노부부가 만화가게에 와서 바구니를 하나 들고 만화를 고르고 있더군요. 70살도 더 된 사람이 만화책을 펼쳐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어요. 귀국길에 젊은 작가 양영순한테 한국가면 진짜 어른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말했죠. 원래는 ‘기생열전’을 그리려고 했는데 중장년층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만화를 하고 싶어졌어요.”

 

김동화는 힘겹게 얻어낸 한국형 순정만화라는 세 번째 변신을 과감하게 중단하고 또 다른 변화를 모색했다. “한국의 중장년층이 그리워하는 것이 뭘까? 이런 걸 고민하다가 고향, 부모, 자식을 테마로 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빨간 자전거>라는 작품을 신문에 연재했어요. 6개월이면 성공이라고 했는데 3년 넘게 했죠. 이 작품으로 만화를 처음 봤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펜레터도 많이 받았는데 어디에서 누구누구 할머니로 끝나는 것이 많았어요(웃음).” 김동화는 잊혀진 직업이라 여겼던 우편배달부를 되살려 냈고 주인공의 이동경로를 통해 아름다운 한국의 전원과 그 속에서 서로 위로 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무엇보다 서사만화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던 중장년층을 새롭게 우리 만화의 독자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동화는 현재 한국만화가협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만화에 대한 각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몸이 두 세 개 있어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협회장이 된 후 세가지를 이야기하고 다녀요. 먼저 만화가 고급화되어야 해요. 소재 선택은 물론 외적으로도 고급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어요. 요즘은 사정이 좀 괜찮아졌지만 아직도 우리 만화는 너무 싼 종이와 장정으로 만들어지고 있어요. 다음으로 독자의 다변화가 필요해요. 아동과 청소년만 만화의 독자는 아니잖아요. 청년층, 중장년층이 볼 수 있는 만화가 있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세계화를 생각해야죠. 우리 작가들의 경쟁력은 세계적 수준이죠. 내수 시장의 안정화가 선행되어야겠지만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현지사정에 적합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야 해요. 내보내주면 우리 만화, 우리 문화와 상상력의 영토를 넓힐 수 있어요. 이를 하나씩 현실화 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죠. 이 과정에서 포털사이트와 웹툰의 역할이 강조될 것으로 생각해요. 포털과 만화계가 좋은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야죠.”

 

 

 

김동화는 자신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한 어조로 우리 만화계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즘 우리 만화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깊어지고 있어요. 유럽, 아시아 등 여러 나라로 수출되고 있죠. 그래서 이전과는 좀 다른 고민으로 창작에 임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준비 중인 작품은 앨범 형태로 내고 싶어요. 고급화죠. ‘소년과 병사’를 가제로 생각 중인데 현재 캐릭터를 잡고 있어요.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 이야기예요. 소재와 독자의 다양화죠. 프랑스에서 먼저 출판할 거니까 세계화네요(웃음).”

 

 

 


 

 

 

 

최근에 온라인을 통해서 만화를 자주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충호’라는 이름은 미디어다음에서 연재된 <무림수사대>를 떠오르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이와는 반대로 그의 이름을 듣고 <마이 러브>와 <까꿍>을 먼저 떠올리는 독자들에게는 온라인을 통해 마주하는 그의 이름이 다소 생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 만화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1990년대에 혜성같이 등장해 만화도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뒤, 다시 웹툰에 도전장을 내민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충호’라는 이름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는 작가’라는 점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충호’를 기억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바로 ‘밀리언셀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잡지에 연재된 작품을 단행본으로 묶어내는 것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다. 이처럼 ‘연재작품의 단행본 출판’이 정착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이충호의 역할은 남달랐다. 첫 장편이었던 <마이 러브>가 백만 부 신화를 일으키며 시장의 반응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3권 분량을 연재하던 시점에서 1권 단행본이 나왔는데, 그때 시장의 분위기를 알게 됐죠. 그 이전에는 아직 ‘단행본 시장’이라는 것이 없었던 때라 짐작을 할 수 없었어요.”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스스로도 놀랐다고 말한다. 그의 ‘성공신화’와 함께 만화잡지에서 연재되는 작품들이 기본적으로 초판을 1만부 찍는 시대가 열리게 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단행본을 내놓기만 하면 팔리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죠. 당시에는 잡지에 연재되는 작품은 초판 1,2만부를 기본으로 찍었던 시기였어요.”


 

 

 

1993년부터 <아이큐 점프>에 연재한 <마이 러브>가 3년만인 1995년에 완결된 후, 그는 곧바로 <까꿍>의 연재를 시작해 1999년까지 이어갔다. <까꿍> 역시 단행본이 백만 부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고, 덕분에 그는 ‘대박작가’로서 명성을 굳히게 된다. 이에 관해 그는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예상을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연이은 성공은 그에게 있어서 큰 선물인 동시에 족쇄이기도 했다. 동전의 양면처럼 성공은 또한 그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다. “연거푸 작품이 그와 같은 반응을 얻게 되자, 주변에서 제게 가지게 되는 기대치가 순식간에 높아진 것 또한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그와 같은 환경이 제 자신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된 측면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스토리작가였던 엄재경은 저와 초등학교시절부터 단짝이었죠.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 모두 이야기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어요. 방과 후, 둘이 골목길에 앉아 수다로 한 시간을 채우는 것은 흔한 일이었죠. 그러다가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우리끼리 ‘내가 그리고, 너는 스토리를 써!’라는 이야기를 농담으로 했는데, 그게 <마이 러브>를 통해 현실이 된 것이죠.” 원래 <마이 러브>는 그가 혼자서 시작한 작품이지만 단행본 3권 이후부터 엄재경이 스토리를 담당하게 되었고, <까꿍>은 처음부터 두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 시작했던 작품이다.

 

그렇게 친구와 함께했던 작업들이 연이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지만 작품에 대한 그의 목마름은 계속됐다. “오랜 시간 공동 작업을 계속 하다 보니, 마음이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시기가 자연스럽게 오게 됐죠. 재경이의 장점은 밝고 경쾌한 부분을 잘 살리는 것이었던 반면, 전 좀 더 진지한 모습을 담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마침 어느 출판사에서 만화잡지를 창간하며 그를 필요로 했고, 그는 그곳에서 <눈의 기사 팜팜> 〈Blind Fish〉 등을 발표한다.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지에서 출발했던 작품들이었는데, 도중에 그는 만화계 환경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잡지-단행본 시장이 갑자기 축소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존의 위험까지 느끼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시장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급격하게 축소되는 출판만화 시장을 지켜보며 그가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닌 ‘변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상실감을 느끼기보다는 스스로 빨리 움직이게 되는 편이에요.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내 작품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는 이것을 스스로 ‘촉수가 날카롭게 서서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 움직이게 된다고 일컫는다.

 

이와 같은 생존본능이 그를 이끌었던 곳이 바로 소설가 황석영의 원작을 만화로 옮긴 <삼국지> 작업이었다. 원작이 주는 무게감이 적지 않아서 2003년부터 시작된 원고는 2007년에야 마무리되었다. 햇수로 꼬박 5년이 걸린 셈이다. “손이 느리고 체력이 강한 편이 못 된다”고 밝히는 그는 “게다가 작품에 대한 욕심은 강한 편이어서 동시에 여러 작품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그 때문에 데뷔 이래 두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던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마이 러브> 연재 초기 다른 월간지에 몇 달간 작품을 동시에 연재했던 것과, 최근 <무림수사대>를 연재하면서 <어린이과학동아>에 <내 친구 코봇>을 발표한 것이 1992년 데뷔 이후 같은 시기에 다른 작품을 함께 작업한 사례의 전부라고 하니 작품에 대한 그의 집중력은 가히 놀랄 만하다.

 

 

 

 

 

“난 크로캅을 좋아한다. 헌데, 그가 UFC에 가서 이름도 모르던 신인한테 깨졌다.”
최근의 작품 <무림수사대>에 대해 그는 먼저 이종격투기 선수 크로캅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연다. 오프라인 만화잡지에서 데뷔하여 코믹스 시대의 황금기를 지나왔던 그가 웹툰을 발표하며 온라인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크로캅이 일본을 떠나 새로운 무대인 UFC로 옮겨가던 시기와 겹쳤던 것이다. “아주 미묘한 변화도 크게 느껴졌을 거예요. 4각이 아닌 8각으로 된 링에, 팔꿈치 공격 혹은 킥 공격의 허용 유무 등…. 게다가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의 태도도 사뭇 달랐을 것이고. 그런 룰과 환경 때문에 크로캅이 힘겨웠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헌데, 내가 크로캅의 모습과 흡사하더군요.” 웹툰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그가 온라인에 연재를 하며 느꼈던 기분을 이종격투기의 룰과 환경에 비유한 것이 사뭇 흥미롭다. “스크롤은 이어짐이 중요하고, 코믹스는 끊어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코믹스에서는 페이지에서 페이지가,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끊고 맺음이 중요했던 반면, 웹툰에서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지죠. 그렇기 때문에 ‘액션’보다는 ‘감정’이 잘 전달되는 것이 웹툰의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그는 다시 하나씩 배워가는 자세로 웹에 적응해나갔다. 물론,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십 수 년 동안 해왔던 방식을 바꾸었으니 힘들었죠. 머릿속에서 구상하던 것을 컴퓨터로 옮기고 나면 왠지 내가 생각했던 느낌과는 다르더군요.” 독자들의 반응도 오프라인 시절과는 달랐다. 왠지 모를 ‘이방인’ 같은 느낌은 ‘이충호’가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고 1년 동안 <무림수사대>를 연재해 완결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온라인 세상에 선보일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조만간 독자들을 만나러 갈 새로운 작품은 <수호지>를 색다르게 해석한 작업이라고 한다. “크로캅은 UFC에서 두 번 지고 나 뒤,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죠. 하지만 나는 어렵게라도 적응했으며, 앞으로도 물러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충호는 ‘세계(世界)가 재편(再編)’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생존한 작가다. 요컨대, 잡지연재로 대표되는 코믹스만화의 전성기를 거쳐 웹 기반 속에서도 ‘살아남은 작가’는 매우 드문 형편인데, 이충호는 잡지만화와 웹툰 모두에서 그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이충호가, 그리고 이충호의 만화가 현실에 안주하고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다.

 
이충호의 만화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밀리언셀러라는 타이틀을 가졌을지언정 그 타이틀로 ‘기억되는’ 작가가 되기엔 그는 아직 너무 젊다. 여전히 ‘변화에 관한 가능성’을 열어둔 채, 분열하는 세계 앞에서 스스로를 진화시켜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상무를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독고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까까머리 독고탁이 그의 작품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도의 일이다. <주근깨>라는 작품이었는데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구를 하고 싶었던 주인공이 변장해서 얼굴을 바꾸어 야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만화계가 큰 변화를 겪으면서 신인작가들이 많이 등장했던 시기였어요. 하지만,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대다수의 신인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버리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독고탁’의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에는 대본소 체제와 문하생 제도를 통해 한 달에도 수백 권의 만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그 속에서 기성작가가 아닌 신인작가들이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독고탁은 대단히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내 작품을 읽히게 만들어 내 목소리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작품을 보게 만든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보니 나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어요.”

 

일반적으로 주인공은 얼굴도 잘 생기고 이름도 멋있는 반면, 조연급은 주인공보다 모자란 외모와 특징 없는 이름을 지니게 된다. 그는 이러한 일반성에 반기를 들었다. 독고탁은, 말하자면 역발상의 결과였다. “주인공의 머리를 빡빡 밀어서 개성을 강하게 표현했지요. 이름을 정할 때도 ‘성(姓)을 두 자로 하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두 글자 성 가운데 가장 센 발음이 나는 것을 택했고, ‘탁’이라는 이름도 동적인 맛을 적절하게 주기 위해 정하게 되었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독고탁은 멋있고 정의로운 모습의 평범하고 건조한 주인공이 아닌 ‘반항심과 질투심을 지닌 말썽쟁이’의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름과 외형 그리고 성격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형성을 깬 독고탁에 대해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색함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츰 캐릭터가 지닌 ‘현실적인 인간미’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아가 독고탁이 캐릭터로서 자리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에는 대본소 체제 아래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준 ‘시리즈’ 형태의 작품발표에 있었다.

 

“작품의 제목을 모두 ‘독고탁의 OOO’라고 지었죠. 이러한 방식이 나오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성공했던 셈이었어요. 서로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캐릭터를 통해 연속성을 부여하여 ‘이상무’도 알리게 되었죠. 사람들로 하여금 ‘제목이 뭐 이래?’하면서도 한 번 더 시선을 주게 만든 것이죠.” 독고탁이 이상무의 페르소나가 되어 우리 만화를 대표하는 주요 캐릭터로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에는 이처럼 작품 전체를 하나의 큰 틀로 묶는 ‘디자인’적인 측면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한 지인으로부터 식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어요. 그 분은 내가 만화가라는 사실도 잘 모르는데, 그 따님이 내가 이상무라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에게 식사초대를 부탁한 것이었지요. 알고 봤더니, 그 따님이 학생시절이었던 1970년대에 ‘한국인 시리즈’를 감명 깊게 보았고, 시간이 흘렀어도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성장기에 이상무 작품을 보았던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그의 만화에 얽힌 에피소드를 한, 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설령 ‘한국인 시리즈’를 보고 난 뒤 인생관이 바뀔 정도의 큰 파장은 아니었을지라도, <달려라 꼴찌>를 보고 작품 속에 등장한 ‘더스트 볼’에 대해 과학적 진실을 탐구했다거나 <비둘기 합창>에 등장한 일곱 명의 가족 캐릭터를 실제 자신의 가족 구성원에 대입시켜본 기억이 있다거나 혹은 <포장마차>에 등장하는 애절한 삶의 주인공을 자신의 처지로 감정이입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만화에는 허구 속에서도 현실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과 연결되는 정서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만화는 단순히 웃음을 전달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정서적 감응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힘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는 형제 혹은 가족 등을 주요소재로 다루다 보니 좀 진부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요. 신파가 짙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그와 같은 ‘이상무의 냄새’가 배어있었기에 작품을 보고 난 후 거부감이 아닌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엄희자(1960,70년대 대표적인 여성만화가)는 여자를 울리는데, 이상무는 남자, 여자 모두 울린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주로 감성에 기댄 스토리를 많이 보여주었죠.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다른 성격의 작품을 해봐야지’라고 마음은 먹으면서도 또 비슷한 감정선을 보여주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상무의 이야기는 이상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자신보다 독자들이 먼저 알았다. “내가 직접 스토리를 안 쓰고, 스토리 작가로부터 받아서 한 작품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왠지 낯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의 만화 가운데 스토리 작가와 함께 한 결과물이 드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상무의 이야기, 이상무의 감성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본소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독고탁’이 잡지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으로부터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어린이잡지가 많이 등장했어요. <소년중앙>에 <우정의 마운드>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1976년도였는데, 그 이후 조금씩 잡지 연재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지요.”

 

 

 

<우정의 마운드>가 인기를 모은 후, <비둘기 합창> <울지 않는 소년> <아홉 개의 빨간 모자> <달려라 꼴찌> 등 10여 년 동안 잡지에 발표하는 작품마다 만화독자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 명작이 된다. 대본소 활동을 통해 중고등학생 팬이 많았던 그에게 잡지는 어린이 독자층까지 확고히 만들어주었다. 더욱이 1980년대 초에는 <태양을 향해 던져라> <다시 찾은 마운드> <내 이름은 독고탁> 등이 극장용 만화영화, <비둘기의 합창>이 TV용 만화영화로 제작되면서 독고탁의 인기몰이를 반영해주었다. 특히, 독고탁이 등장한 <달려라 꼴찌>는 당시 대표적인 야구만화였는데, 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개인적으로는 고교야구를 좋아해서 <달려라 꼴찌>도 고등학교 야구를 배경으로 하여 그렸지요. 2여 년 동안 연재를 하다가 완결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출판사로부터 2부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등장인물을 그대로 프로야구로 가져와 진행하게 된 것이죠.”

 

스포츠 가운데서도 야구를 좋아했던 그의 취향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이 된 셈이다. 하지만, 스포츠만화 속에서도 ‘한국인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이상무의 감성’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가난한 주인공 혹은 고아였던 소년이 야구와 스포츠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은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영웅의 모습이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삶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 같은 감성에는 특히,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 많이 녹아 들어가 있었다.


 

 

 

“어린 시절, 전쟁 직후여서 고아들이 많았고 고아원도 가까운 곳에 여러 곳이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가까운 고아원에 자주 놀러 가서 그곳의 아이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고아들의 모습들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 것 같아요.” 고아들의 이야기가 작품 속에 사실적으로 표현되자, 한때는 독자들로부터 고아 출신이 아니냐는 오해도 받기도 했다. 이처럼 현실에 기반을 둔 묘사는 1974년부터 약 3년 동안 발표한 ‘한국인 시리즈’에서부터 특히 두드러졌다.

 

“재일동포에 대한 이야기로서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두 형제가 등장해요. 형은 귀화해서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가장 보편적인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다고 해서 형에 대해 반감을 지닌 동생 독고탁은 조국이나 동포 등 거시적인 정체성이나 문제의식을 지니고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골방에서 초라하게 죽어가는 아버지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조국이니까 아버지 편을 든 것이었죠. 요컨대, 그에게도 ‘조국’에 대한 실체는 없었던 것이죠. 그에게 조국은 아버지가 골방에서 듣던 레코드판 속의 가요 몇 소절로 기억되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이처럼 주인공들의 입장과 감정에 대해 현실적인 측면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인 시리즈’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어질 수 있었다. 동시에 아동만화가 대부분이었던 시대 속에서 청소년과 성인독자까지 만화독자로 불러들일 수 있었던 특별한 작품으로 기록되어진다.

 

 

 

 

 

최근 들어 그는 골프와 관련된 만화를 자주 발표하고 있다. 평소에도 스포츠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지만 골프와는 무관했던 그가 골프만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1990년대 초, <스포츠조선>이 창간하면서 골프레슨 만화에 대한 청탁이 들어왔어요. 처음엔 나도 극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연재를 하다 보니 자료를 찾아 다니면서까지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것이 5년 동안 지속되었죠.” 얼마 뒤, 어느 공중파 방송에서 그가 발표한 골프만화와 동일한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생겼고, 레슨 하는 장면을 즉석에서 스케치 하는 형식으로 방송에까지 참여하게 되면서 그는 골프에 관한 전문작가가 되기에 이른다. <불타는 그린> <운명의 라스트 홀> 등을 발표했고, 지금도 각종 매체에 골프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최근에 그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페인터 등 다양한 그래픽 프로그램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두 가지 확고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그러니까 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어요. 내 친구들이 등장하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해보려고 하는데, 극적인 재미는 크게 없을지라도 당시에 우리 세대가 성장한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은 것이죠. 다른 하나는 어느 시대에 누가 읽어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읽었을 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줄 수 있는 만화를 준비해보려고 해요.” 새로운 작품에 대한 구상을 밝히면서, 그는 세상의 변화에 너무 애써서 적응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더욱 적절한 방식이 아니냐고 말한다. 어쩌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독고탁’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게 되는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이상무의 냄새’가 짙게 배여 있고, 그래서 독고탁이 뛰어 놀던 만화를 기억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감성과 정서를 어린 시절의 그것으로 환원시켜 주는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강풀(본명 강도영)의 등장은 소박했다. 대학 졸업 후 만화를 그리고 싶다며 수 많은 잡지사에 이력서를 냈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혼자라도 해보겠다며 2002년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대학 다닐 때 풀색 옷만 입고 다닌다고 후배들이 ‘강풀’이라고 불렀어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강풀을 인터넷 아이디와 도메인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진짜 이름보다 더 친숙해졌어요.” 네티즌들이 하나, 둘 덧글을 달기 시작했고 사이트가 다운되는 등 화제를 불러모았다. 하지만 당대의 ‘인터넷만화스타’였던 스노우캣, 엽기토끼, 마린블루스, 파페포포 등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까지 인터넷만화는 캐릭터 비즈니스를 위해 전략적으로 운영되거나 비주류 성향 작가들의 놀이터 또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수련장 정도로 인식됐다. 캐릭터 중심 에피소드형 만화의 상업적 ‘매끈함’과는 거리가 있었던 강풀의 만화는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위치에서 이해됐다. “중·고교 시절에 만화를 많이 읽은 편도 아니었고 만화를 연습한 적도 없었어요. 만화를 전공한 것도 아니어서 그림을 잘 그리진 못해요. 다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만화 형식으로 표현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엽기’ 코드가 유행하던 때였고 강풀은 구토, 오줌, 변 등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 중심의 창작에 집중했다. 주류에서 다루지 않는 소재였고 프로가 지향하지 않는 형식이었다. 강풀은 그렇게 ‘배설물 만화가’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첫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 또는 작품의 이미지를 손쉽게 각인시킬 수 있는 에피소드 중심의 창작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강풀은 장편 서사만화를 준비했다. 소재 역시 엽기 이미지를 벗을 수 있는 연상연하 커플의 로맨스였다.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사랑인지라 대사보다 내레이션이 더 많은 강풀 표 순정만화, 제목마저 <순정만화>였던 직장인 연우와 여고생 수영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인터넷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세로보기 형태의 웹툰은 존재했어요. 하지만 에피소드 형태였죠. 인터넷에서 세로보기 형태로 장편 서사물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남들이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고도 하고 파괴했다고도 하는데 어찌 보면 만화를 몰랐기 때문인 것 같아요.

 

대학 다니면서 학생회 활동을 했어요. 대자보를 많이 썼는데, 그때 글로만 설명하면 전달이 잘 안될 것 같아서 그림을 그려 넣었어요. 개인 홈페이지에서 제가 했던 작품의 형식 그대로였죠. 칸이 없고 세로가 긴 만화.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형식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 처음부터 어떤 맥락 하에 작업 형식을 결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웹툰계의 콜럼버스라고 하던데요(웃음).”


강풀 작가가 그린 '강풀 캐릭터'

 

 

 

배설물만화가에서 연애만화가로 변신한 강풀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풀은 차기작을 통해 또 한번 인터넷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차기작 <아파트>는 배설물 만화에서 보여줬던 에피소드 형식과 <순정만화>에서 보여줬던 서사 형식을 적절하게 배합한 미스터리 스릴러물이었다. 일명 ‘미스터리심리썰렁물(미심썰)’로 명명된 이 작품은 강풀이 지닌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을 만천하에 알린 계기가 됐다. <순정만화>가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강풀에 대한 비판의 수위도 높아졌다. 상대적으로 ‘짧은 만화 이력’과 ‘미흡한 그림 실력’에 비해 과도하게 주목 받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미흡한 그림 실력’은 ‘순수하고 친숙한 것’으로 바뀌었고 ‘짧은 만화 이력’은 한국만화의 역사적 전통과 다른 영역에서 탄생한 새로운 시대의 만화가라는 평가로 바뀌었다. 강풀은 만화계의 마이너 리그에서 한국만화의 뉴타입, 웹툰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주인이 됐다.

 

 

 

 

 

강풀의 작품은 감성적 소재와 극적인 구성으로 인해 대부분의 작품이 영화나 연극으로 제작됐다.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처음에는 제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막상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짜증을 내더라고요(웃음). 기본적으로 영화보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여러 에피소드를 제거해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인물 간 갈등이나 극의 개연성이 떨어져요.” 그런 탓인지 강풀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아직 대중적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생각하는 작품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영상화 된 작품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판권이 팔리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분들의 작품이니까요.”

 

강풀은 자신의 작품을 극장에서 보는 것에 대해 ‘신기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론이나 독자들 역시 이 부분을 신기하게 생각한 탓인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만화 작품의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는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강풀 만화가 인기를 끌고 다수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는 것에 대해서 응원을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경계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강풀이 판권 판매에 집중하다 보니 만화적 연출은 사라지고 영상화를 전제로 한 연출만 남아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제 작품이 다른 매체로 나가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영화화 됐으니 좋은 만화라는 기준은 아닌 것 같아요. 영화가 만화보다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우월한 매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만화를 그릴 때 영화화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억측입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오기가 생겨서 도저히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어요. 그래서 나온 것이 <그대를 사랑합니다>였죠. 어르신들의 로맨스에는 흥행 코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작품도 영상화 판권이 팔렸어요. 제 작품은 2시간 안에 담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읽을 때는 2시간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나 봐요(웃음).”

 

 

 

 

 


강풀은 다수가 고민하고 있는 소재를 끄집어내어 이를 보편적 일상 속에 녹여 극적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한편,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공동의 주제로 이야기를 몰고 간다. 이 같은 강풀 식 서사의 골격은 어찌 보면 의견 개진과 토론이 가능한 인터넷 미디어의 커뮤니케이션 형식과 닮아 있다. 그래서 강풀의 만화는 인터넷에서 볼 때만 100% 이해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출판이나 영화 등의 미디어는 여전히 강풀 이야기의 흡입력에 매료되어 그 긴 호흡을 자신들의 매체에 담으려 하고 있다. 그 같은 매력적 서사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중학교 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도서관에 갔어요. 책이 너무 좋아서 한번 잡으면 단숨에 읽었죠. 집 근처 도서관의 경우 한번에 3권까지 빌려주도록 되어있었는데 저한테는 한번에 10권도 빌려줬어요. 고전도 좋아했지만 대중문학을 즐겼습니다. 장편서사물에 심취되어 있었죠. 김용의 작품은 나오기가 무섭게 읽었어요. <영웅문>은 최고였던 것 같아요. 김성종의 추리소설이나 황석영의 <장길산> 등 대하소설도 즐겼습니다.”

 

 

 

강풀은 책 읽기만큼이나 영화도 좋아했다고 한다. 공상하는 것을 즐겼고 특히 거꾸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읽고 생각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전개의 힘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하고 서른에 만화를 시작했어요. 한 2년 간 백수생활을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지도 않았고 눈치를 주지도 않았어요. 절 믿어주신 건데 그게 지금도 너무 고마워요.” 강풀은 23년간 목회활동을 하다가 얼마 전 은퇴한 목사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고 한다. ‘목사 아들’이라는 주변의 시선이 있어서 행동 가짐이 조심스럽기도 했고 술 담배 모르는 ‘범생이’로 자랐다고 한다. “어릴 때는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크면서 생각해 보니까 너무 고맙더라고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환경에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은퇴 후에 전원생활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좋은 환경을 제공해 드리고 싶어서 그 동안 모은 돈을 몽땅 털어서 작은 펜션을 사 드렸어요. 이름도 ‘강풀펜션’입니다. 아직은 절친한 만화가들이 1박2일 회식 코스로 이용하는 정도예요(웃음).” 강풀은 돈에 대한 생각도 분명해 보였다. 불편하지 않을 만큼 있으면 좋겠다고 했고, 쓰고 싶은 곳에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웹툰작가들이 중심이 된 자선모임 ‘럽툰’도 그렇게 출발했다. “뭔가 조직화한다는 생각보다는 혼자 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줬어요. 저 역시 네티즌이나 독자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한 작가예요. 그래서 그만큼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만화로 하는 것은 제 직업이고 직접 몸과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 있잖아요. 럽툰은 그렇게 시작했어요. 만화가들이 모여서 독자들과 함께 즐겁게 놀고 성금을 모아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주자는 취지였죠.”

 

강풀은 대학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그 동안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정의롭지 않은 일, 평등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에 ‘한겨레신문’에서 박재동 선생님의 만평을 보게 됐어요. 뒤통수를 강타 당한 느낌이었어요. 칼처럼 날카로웠지만 여유도 있었고 뭔가 찐하게 남게 되는 것을 느꼈어요. 이런 것이 만화의 힘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졸업하면 만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죠.” 강풀은 처음 작업실을 내고 전화기를 놓자마자 박재동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절 잘 모르시겠지만 1년 후에 단행본을 내서 찾아 뵙겠다’고 했고 박재동은 ‘지금 자장면이 왔다’며 ‘잘 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 ‘이건 아니다’ 싶어서 문화행사를 하는 곳에 가면 박재동 선생님이 늘 먼저 나와 계셨어요. 표나지 않게 실천하는 모습에 늘 감동을 받아요. 닮고 싶은 분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 박재동 선생님이 만평을 다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기실 오늘의 강풀을 있게 한 요인 중 하나는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이 발발했을 때였다. 강풀은 이 사건을 만화로 그려 인터넷에 올렸고, 사람들은 강풀이 ‘효순이와 미선이’의 영정 앞에서 되뇌었던 ‘미안하다’는 의미의 진정성에 공감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니까 만화로 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의 다른 작품에 대한 오해를 만들기도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거죠.”

 

 

 

 

 

 

“만화 그리면서 20킬로그램 정도 불었어요. 원래도 작은 체구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 거구가 됐죠.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직업이 뭐냐고 묻더라고요. 왜 그러냐니까 운전기사나 낚시 좋아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래요(하하).”

 

강풀은 시원하게 웃었지만 앉아있는 자세는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정말 오래 앉아있는 편입니다. 앉아있는 것 때문에 병이 걸렸지만 앉아있지 않으면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죠. 제가 써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글감을 붙들고 있느냐에 따라 좋고 나쁘고가 갈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야기 설정이나 구성이 끝나면 곧바로 뛰어 다녀야 해요. 현장취재를 해야 공상과 현실을 일치시킬 수 있고 작품이 생동감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누군가 강풀을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했지만 그 스스로는 노력과 집중을 강조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초빙교수라는 이름으로 성심 성의껏 했어요. 학생들을 만나는 기쁨이 컸죠. 그런데 연재를 하면서 강의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학생들에게 쏟을 수 있는 시간도 줄고 작품에 넣을 수 있는 시간도 줄 수 밖에 없었어요. 양쪽 다 죄 짓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가르치는 일은 그만 뒀습니다.” 강풀은 작품에 쏟는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챙기고 있었다. “연재를 하고 있을 때는 나름의 철칙이 있어요. 일단 작업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죠. 약속은 안 잡으려고 합니다. 특히 시간 조정이 안 되는 술자리에는 나가지 않습니다.”


 

 

 

 

 

강풀의 홈페이지는 현재 공사중이다. “홈페이지 서버에 누군가 바이러스를 심어뒀어요. 해결 방법을 찾았지만 쉽지 않아서 일단 홈페이지 운영을 중지했어요. 독자들과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블로그 형태의 홈페이지로 개편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강풀은 얼마 전 절친한 만화가들과 함께 누룩미디어라는 만화콘텐츠에이전시 업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박철권, 양영순, 윤태호씨 등의 만화가가 뭉쳤어요. 연우 등 신진작가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창작과 저작권 관리를 일원화 해보고 싶었어요.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하겠지만 좋은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한동안 집중할 생각입니다.” 6월 중으로 새로운 작품의 연재도 준비하고 있다. “스토리는 다 나왔고 지금은 그림 작업 중입니다. 제목은 <어게인>으로 할 계획입니다. <타이밍>의 2번째 이야기라고 보면 되죠. 매번 시험대 위에 오르는 느낌입니다. ‘강풀 다 됐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죠. 저는 생각만 하고 연습만 하는 것은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시도하지 않으면 과정도 결과도 없습니다.”

 

축구장에서 공을 잡는 것만으로 관중을 설레게 하고 환호하게 만드는 축구선수를 판타지스타라고 한다. 그가 펼쳤던 이전의 창조적 플레이에 대한 경험치가 공을 잡았을 때의 기대치로 이어지면서, 관중들은 ‘환호’라는 이름의 즉각 반응을 하게 된다. 판타지스타는 그 반응에 답하듯이 또 한번의 창조적 플레이를 펼쳐 보인다. 때로 그것이 탄성으로 끝나는 일이 있더라도 기대치는 유지된다. 어느덧 강풀은 신작 소식만으로도 우리 만화계와 독자들을 설레게 만드는 판타지스타가 됐다. 그는 또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까? 우리 사회는 또 어떻게 그의 만화를 소비할까? 벌써부터 두근두근거린다.

 

 

 

 

 

 

“처음 교편을 잡았던 곳은 밀양의 어느 시골학교였는데, 1년 뒤 만화를 그리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지요.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시험을 쳐서 다시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만화에 대한 생각으로 재차 교직을 떠났고, 얼마 뒤에 힘들어서 또 취직을 하게 되었죠.” 만화에 대한 박수동의 열정은 이처럼 그의 이력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젊은 시절, 그는 만화가가 되기 위해 두 번이나 ‘선생님이 되기를 포기’했다. 아이들과의 생활도 즐거웠지만 만화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활은 꿈보다 가까워서 밥벌이와 만화 사이를 여러 번 오가야만 했다. “하루는 외출을 하기 위해 양복을 찾았는데, 아내가 전당포에 옷을 맡겨두었더군요. 집에 쌀이 다 떨어져서 돈을 빌리기 위해서였죠. 그만큼 사정이 안 좋아졌으니 다시 취직을 해야 됐어요. 그 즈음 한 일간지에 시사만화가로 들어가게 됐지요.” ‘월급 받는 만화가’가 되었으니 이번엔 자리 잡을 법도 했지만, 수정과 교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시사만화는 보다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은 그의 만화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몇 달 만에 신문사를 나왔고 얼마 뒤 교육관련 잡지사에 다시 취직을 하기에 이른다.

 

직장인과 만화가 사이를 오간 10년 세월이 흘러 마침내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75년도의 일이다. 직장에 다니고 있던 1972년, <선데이 서울>에 <고인돌>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이후 몇 개의 매체에 지면을 가지게 되면서 ‘마지막 사표’를 내게 된 것이다. 데뷔 시절, 그가 이처럼 직장과 만화를 오간 배경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만화가가 되는 코스’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1960,70년대 만화가가 되는 기본적인 과정은 기성만화가의 문하생이 되어 입문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선생님 없이 혼자서 그리다가 만화가가 된 경우”였다. 하지만, 이러한 평범하지 않은 과정은 오히려 그의 만화가 ‘독창적인 만화’로 자리 잡는데 장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성인만화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성인’을 ‘외설’로 받아들이는데 있으며, 특히 성(性)에 대해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자주 빚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혹시 <고인돌>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있었다면 그것 역시 이러한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에 대해 박수동은 “대개 성인만화라고 하면 ‘야한 만화’로 생각하지만, 고인돌은 ‘야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성(性)’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요컨대 만화도 문학처럼 인간의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성인만화 역시 다양한 가치관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한 점을 인식한 뒤라면 <고인돌>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달라진다. 단순히 하나의 작품, 하나의 캐릭터를 넘어 우리 만화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는 ‘명작’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게도 스승이 있다고 한다면 미국의 ‘조니 하트(Johnny Hart)’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1960년대 당시 미국만화가 서울 시내 뒷골목에 꽤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조니 하트가 그린 〈B.C(기원전)〉라는 만화를 보게 됐죠. 미국만화지만 전체적으로 동양적인 냄새가 짙은 작품이었어요.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그의 작품을 구할 수 있는 데까지 모두 구해서 보았고, 그의 작품을 교재 삼아서 공부했지요. 그 때 원시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화를 구상하게 되었으니까 말하자면 <고인돌>의 최초 모티브가 된 셈이죠.”

 

 

 

같은 원시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B.C〉에 비해 <고인돌>은 대단히 ‘한국적’이다. 표현은 직설적이지 않으며 묘사는 언제나 은유적이다. 마치 한편의 시(詩)처럼 아름다운 성(性)을 이야기한다. “성(性)에 대한 만화를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전부를 드러내지 않은 채 숨기기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적인 운치가 아닐까요. 은근하게, 그렇게 말해야지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 오히려 재미가 없잖아요.”

 

그렇게 신토불이로 탄생한 고인돌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의 성은 건강한 남자와 건강한 여자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 했으며, 또한 “그는 성을 남녀의 정상적인 사귐에 필요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이 무서운 것도 피해야 할 것도 아니며, 정당하게 마주쳐 봐야 할 것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그의 에로틱한 만화는 성교육에 필요한 건전한 만화일지도 모른다.”(<고인돌>의 서문 ‘우리 사회의 건강한 에로티시즘’ 중에서, 1978)라고 평하기도 했다.

 

1970년대 당시 만화에 대해 사회 전반의 인식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은 만화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평론을 자주 발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박수동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이 <고인돌>의 단행본 서문을 쓰게 된 배경에는 시인 오규원이 있었다.


 

 

 

“오규원 씨와 김현 씨가 친했는데, 제가 오규원 씨를 잘 알다 보니 오규원 씨를 통해 김현 씨가 <고인돌>의 서문을 쓰게 된 것이죠.” 오규원 역시 부산사범학교 출신으로 박수동의 한 해 후배였고, 그 같은 인연을 통해 김현이 <고인돌>의 서문을 맡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발표된 ‘우리 사회의 건강한 에로티시즘’은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서점 판매용으로 발행된 최초의 기획단행본 <고인돌>은 문학평론가의 서문이 실리면서 여러모로 의미를 지닌 작품이 되었다.

 

 

 

 

 

만화가 박수동에 관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특징적인 부분은 아마도 그가 성냥개비로 그림을 그린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기법을 지니게 된 데에는 소설 <수난 이대>로 유명한 하근찬과의 특별한 인연이 숨어 있다. “하근찬 선생님도 사범학교에 다니셨는데, 제가 밀양에 있던 시기에 교육관련 잡지사에서 근무하고 계셨지요. 언젠가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서 만화를 그려보라고 제안해주기도 하셨어요. 어느 날, 잡지 편집과 관련해 마감을 하시던 중이었는데, 급히 글씨가 필요한 부분이 있었고 하 선생님께서 성냥개비로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을 마침 함께 있던 제가 목격하게 됐어요. 헌데, 성냥개비로 쓰는 그 글씨가 그렇게 매력적이더군요. 집으로 돌아와 나도 성냥개비로 글씨를 써 보니 또한 매력이 있었고 그 후부터 그림도 그렇게 그리게 되었지요.”

 

그렇게 시작된 성냥개비 화법은 그 이후 작품의 제목과 한 컷 만화를 모두 성냥개비로 작업하면서 그의 전매특허가 되었고, 박수동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원고 작업 시 데생 후 펜 터치가 진행되는데 반해, 성냥개비로 그릴 때는 데생 없이 바로 그림 작업에 들어간다는 점 또한 특별하다. 그 이유는 “데생을 하고 작업을 하면 그 독특한 맛을 살릴 수 없기 때문”인데, 덕분에 “성냥개비로 작업을 할 때는 파지가 수없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또, “한 번 사용한 성냥은 다시 사용하지 않는데, 사용한 성냥을 또 쓰게 되면 ‘맛’이 틀려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성냥이 소비되었으며, 술자리에 있다가도 테이블 위의 성냥 곽에서 모양이 예쁜 성냥이 보이면 주섬주섬 챙겼다는 일화도 독특한 기법으로 인해 생긴 에피소드다.

 

 

 


그가 이처럼 성냥개비로 그림을 그리게 된 바탕에는 글씨에 대한 오랜 관심도 작용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글과 그림을 함께 배치시켜서 뭔가 재미난 것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왔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할머니께 부적을 많이 써 드리기도 해서 글씨에 대한 호기심은 오래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처음 그가 만화를 시작하게 된 동기도 글씨와 관련된 이와 같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연관성에 대해 그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글과 그림을 합쳐 하나의 재미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만화를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네 번의 이직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만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끊임없는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필연적으로 동반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TV를 켜면 우리는 ‘빠삐코, 스크류바’ 등 고인돌 캐릭터가 등장하는 광고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고인돌이 처음 TV에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놀랍게도 지금부터 30년 전의 일이다. “1979년으로 생각이 되는데, ‘마니나’라는 상품의 광고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것으로 기억해요.” 30년이라면 한 세대를 이루는 기간이며, 강산도 세 번이나 바뀌었을 시간이다.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도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박수동 만화의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와 관련 그가 생각하는 만화의 핵심은 ‘유머’다. “만화에 담긴 유머는 만화 안의 그림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같은 유머라고 해도 표현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만화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또한 하나의 매체에서 오랜 기간 연재를 이어올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히 1980,90년대 각종 사보에서 그의 그림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부분의 지면에서 등장했으며, 하나의 지면에서 10년 이상 연재하는 것 또한 그에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최근 새로운 작업을 계획하며 그 동안 활동해왔던 사보, 잡지 등 여러 매체의 연재를 차례로 정리하면서 마지막까지 애착을 두었던 바둑관련 잡지는 무려 40년간 연재를 이어왔다. “어쩌면 만화보다 오히려 바둑 쪽에서 박수동을 아는 이가 많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만화가로서 그의 대중적인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만화가 박수동은 시(詩)를 좋아한다. 여전히 마음에 드는 시가 눈에 띄면 수첩에 그 시를 옮겨 적는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만화는 시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선과 직설적인 표현 대신 은유와 풍자가 어우러진 유머를 통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박수동 만의 시(詩), 그 절묘한 화법에 매혹되어 세상이 변하고 세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그의 만화를 보며 웃음을 짓고 박수를 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희재는 명랑만화가 이정문과 시대극화의 대가 김종래의 문하를 거쳐 만화계에 입문했다. 그가 만화계에 발을 들여 놨던 시기에는 작품의 내용 측면에서 군사정권의 검열을 받았고 유통 쪽에서는 특정 기업의 독점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만화나 만화가를 대하는 대중의 인식도 ‘불량’ 했다. 모든 것이 만화가를 억압하는 구조였다. 그 역시 당대 만화계의 병폐로 꼽히는 대본소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생활의 곤궁 사이에서 지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선택했다. 만화가 환상의 세계만 쫓고 있을 때, 만화가 도처에서 유린당하고 있을 때 이희재는 ‘바른만화’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한 만화를 발표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리얼리즘 만화가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소중한 꿈을 향해 정진한 결과다.

 

 

 

 

 

이희재는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더 가야 하는 신지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어촌에서 이희재가 할 수 있던 것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지게를 지고 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섬마을까지 들어 온 만화책을 친구에게 빌려 읽는 일이었다. "섬마을에 들어온 만화책은 다 낱권이었어요. 앞뒤 편이 없으니 뒷이야기가 얼마나 궁금했겠어요. 미칠 것 같았죠. 몇 번을 다시 봐도 앞뒤를 모르겠더라고요. 그 때 본 작품이 김산호 선생님의 <라이파이>예요. 그런데 어느 날 먼 바다를 보고 있으니까 라이파이가 '짠'하고 나타나서 뒷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웃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부모님과 함께 섬마을에서 살았다. 여느 아이들처럼 뭍으로 나가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지 않았을까. "부모님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읍내에서 열리는 축구대회에 우리 동네 초등학교가 출전을 하게 됐어요. 사람이 모자라서 따라갔다가 시합에도 나가고 엉겁결에 중학교 진학시험도 보게 됐죠. 큰 기대를 안했는데 시험에 붙어서 광주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됐어요. 섬마을을 벗어나 처음 뭍에서 살게 된 거죠." 광주에 사는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 집과 학교 외에 다른 곳은 갈 생각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형이 만화방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낱권으로만 만났던 영웅, <라이파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나게 된다. "거기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꿈 같았죠."

 

 

 

이희재는 만화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이상석 선생님의 <철인삼국지>라는 만화를 따라 그려서 출판사에 보냈어요. 처음 보낸 것이 2등으로 뽑혀서 책에 나왔죠. 뭐라 형언할 수 없이 기뻤어요. 친구들한테 은근슬쩍 자랑도 했죠." 이희재는 여느 만화가들의 학창시절처럼 독자만화란에 열심히 투고했다. 이런 이희재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이가 있었다. 명랑만화 <심술천지> 시리즈로 유명한 이정문이었다. "이정문 선생님이 제가 그린 독자만화를 보고 우리 집에 편지를 보냈어요. '재주가 있으니까 서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고 아버지가 선생님한테 '잘 부탁한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어요. 붕 떴죠. 진짜 만화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중학교 졸업식도 참가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갔죠. 그런데 이정문 선생님이 새로 하기로 한 일이 틀어졌는지 절 책임질 수 없게 됐어요."

 

현실은 만화처럼 멋지게 전개되지 않았다. 이희재는 1주일 만에 왔던 길을 되물어 집으로 향해야 했다. 실패한 귀향인 셈이다. 이후 온 가족이 서울로 상경했고 이희재는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낮에는 만화 선생님을 찾아 다녔다. 신문 단칸 광고를 보고 찾아간 화실에서 이희재는 당대 최고의 시대역사만화가 김종래를 만나게 된다. 섬마을의 고단한 삶을 위안해줬던 만화, 바깥 세상에 대해 모르는 촌놈에게 환상적인 세상을 보여줬던 만화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탓이다. 현실은 늘 생각과 달랐지만 이희재는 가슴 속에 품었던 꿈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이희재는 <눈물의 수평선>, <엄마 찾아 삼만리>, <암행어사> 등 6, 7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을 탄생시킨 김종래 화실에서 박상호, 한재규, 김종옥(김종래 동생) 등과 함께 먹을 갈고 배경을 그렸다. 이정문은 이희재를 문하에 들이지 않았지만 만남을 유지하며 틈틈이 일거리를 주선해 줬고 많은 가르침을 전했다. 그 인연으로 당시 유행하던 '명랑' '야담과 실화' 등의 잡지에 2페이지짜리 명랑만화를 게재하기도 한다. 부당한 것을 참지 못했던 심술통식 폭소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내용으로 감동을 전했던 두 선생의 작업은 그대로 만화가 이희재를 만들었다. "이정문 선생님이나 김종래 선생님은 언제나 공부를 강조했어요. 배우지 않으면 반쪽짜리 만화가가 된다고 했죠. 그림재주가 있어봐야 이야기를 부리지 못하면 쓸모 없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형편이 안 좋아서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해서 검정고시학원을 다니기도 했는데 이런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헌책방을 돌면서 작문기초부터 읽기 시작했죠. 문학, 사회학, 철학 관련 책들을 쉬지 않고 읽었어요. 그 속에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죠."

 

스무살 청년 이희재는 그렇게 만화를 시작했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섬마을을 나서고 서울에 올라왔던 것처럼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고, 생각했던 만화작업 역시 원하는 것처럼 되지 않았다. "성인이 됐으니 돈을 벌어야 하는데 방 안에 틀어 박혀서 끄적거리고만 있으니까 눈치도 보이고 싫더라고요. 그래서 남서울이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의 데생 일을 했어요. 2년 하면 독립시켜주겠다고 해서 열심히 했는데 이후로 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출판사에 찾아갔죠." 당시는 만화책을 만화방에 공급하는 총판이 독점적 위치에 있었다. 모든 출판사가 총판에 소속됐고 이 총판이 만화책 생산과 유통을 총괄하고 있었다. 독점 체제 하에서 작가들은 총판이 요구하는 대로 작품 활동을 했다. 심지어 필명까지 지어줬다. "그 회사 사장이 작가들 필명을 다 지어줬어요. 부동산 투기에 해박했던 양반인데 땅값이 오를 것 같은 동네나 지역 이름을 작가들의 필명으로 사용하게 했죠. 오르는 이름이라는 거예요. 남서울도 그 분 솜씨고 저한테는 남제주라는 필명을 줬어요(웃음)."

 

 

 

특정 기업이 만화유통 시장을 독점하게 되면서 웃지 못 할 일도 많이 생겼고 만화가에 대한 횡포도 심해졌다. 이희재는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모래알'이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 만화를 2년쯤 그렸다. "그 때는 만화가 이상무 하면 독고탁 하는 식으로 작가마다 캐릭터가 있고 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작품을 했어요. 저도 별로 재미가 없었고 독자들 반응도 안 좋았죠. 어느 날 출판사 사장 아들이 이소룡을 주인공으로 해보라는 거예요. 못하겠다고 했더니 짤렸어요." 이후 이희재는 팬시 회사, 애니메이션 회사, 학습지 회사 등을 전전했다.

 

그렇게 70년대가 가고 80년이 됐다. 만화총판과 출판사의 독점체제가 깨지면서 새로운 출판사가 등장했고 높은 원고료를 주면서 작품을 모집하고 있었다. 만화에 뜻을 품었던 스무살 이희재는 서른이 되어서야 하고 싶었던 만화를 하게 된다. "81년에 <명인>과 <억새>라는 작품을 냈어요. 실질적인 데뷔작이죠. 지금 생각하면 만화예술이라는 것에 너무 매몰되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외줄타기 서커스를 하는 가족과 공장에 다니면서 고학하는 남매 이야기였죠." 두 편의 작품은 기존의 만화가 추구하는 세계와 만화를 통해 독자가 얻고자 하는 가치와는 많이 달랐다. 웃음과 환상보다는 뼈아픈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겼다. 이희재식 만화는 새로웠으나 독자의 관심보다는 검열기관의 관심을 끌었다. 만화책을 사전 심의했던 검열기관에서는 '암울한 현실을 그렸다'는 이유로 이희재의 원고를 난도질했다. 그러나 그의 만화는 통제되었을지언정 길들여지지는 않았다. 시장을 독점했던 사업자의 요구와 회유도, 날 선 검열기관의 지적과 칼질도 이희재를 시스템 안에 가두지 못했다.

 

 

 

 

 


"손이 느려서 많은 량을 작업하지 못해요. 혼자 하기 때문에 몇 권씩 한꺼번에 작업해야 하는 대본소용 만화는 저한테 맞지 않았어요. 잡지는 정기적으로 적은 량을 그리면 되고, 단행본보다 상대적으로 심의에서 자유로운 만화잡지가 편했죠." 어린이용 만화전문잡지 '보물섬'이 창간됐고 이희재는 83년부터 <골목대장 악동이>를 연재한다. 당시 '보물섬'은 창작만화와 명작만화(아동교양물 형식을 취한 소설이나 동화를 각색한 만화)를 절반씩 게재했고, 심의기관에서 이를 통제하고 있었다.

 

"편집부에서 명작만화를 해야 한다고 해서 빅토리아 빅터의 '악동일기'를 한국식으로 각색해 보겠다고 했죠. 그러고 나서 내용을 맘대로 바꿔서 그렸어요. 연재하면서 반응이 좋으니까 편집부에서도 별 말이 없었어요." 최고 권력자였던 골목대장 '왕남이'를 이사 온 '악동이'가 박치기로 제압하고 혁명에 성공한다는 기둥 줄거리를 가진 이 작품은 당시의 군부독재 아래서 권력에 아부하며 기생하는 현실 정치판과 이에 눌려 살아야 했던 민중의 삶을 성공적으로 패러디 했다.

 

 

 

이희재는 '악동이'를 연재하는 한편 성인을 위한 여러 편의 단편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잡지가 등록제여서 누구나 만들 수 없었어요. 그런데 86년쯤 되면 아시안게임도 열리고 해서 매체 환경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어요. 등록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 다양한 성향의 만화전문잡지가 생길 거라 믿었죠. 그때가 되면 제가 원하는 형태의 만화가 읽힐 거라 생각했어요." <새벽길>, <간판스타> 등 이희재 만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단편은 이 시기에 작업 된 것이다. 이희재는 86년 성인만화잡지 '만화광장'이 창간되자 모아뒀던 단편을 한편씩 공개했다. 실업자, 실직자, 샐러리맨, 여공, 술집종업원, 청소부 등 급격히 산업화 된 도시에서 도시 빈민 또는 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삶을 가감 없이 그렸다. 일하면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고, 아무리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이 이희재의 준엄한 시선을 통해 낱낱이 공개됐다.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은 그 자체로 깊은 충격과 감동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희재 식 만화는 사실주의만화 또는 현실참여만화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희재는 바스콘셀로스의 성장소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이윤복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위기철의 소설 <아홉살 인생> 등을 원작으로 한 이희재식 만화를 다수 발표했다. 연재 당시부터 길게는 20여 년이 흐른 이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는 스테디셀러이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따듯하면서도 강한 모습은 원작의 감동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제가 한 작품들을 보면 대중적으로 크게 사랑 받았던 작품들은 대부분 원작이 있어요. 오리지널리티가 좀 부족한가 싶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 작품들이 제가 좋아하는 것이었고 열심히 하다 보니 그렇게 됐던 것 같아요. 원작을 각색하는 일이라는 것이 저도 좋아하고 사람들도 좋아하는 작품의 설정을 빌려오는 일이잖아요. 그것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될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이희재는 88년 바른만화연구회를 결성 이른바 만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전후로 간행물에 대한 심의 기준이 완화되면서 좋은 만화창작 환경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작가는 일본만화 해적판이 폭력만화와 음란만화 시비를 불러 오는 것을 보고 크게 낙담했다. "너무나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만화에 대한 기준과 출판업자나 돈만 보고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행태가 너무나 달랐죠. 그래서 바르게, 상식적으로 만화를 그리자고 했던 거예요. 당시 만화계에 넘쳐나던 만화공장, 일본만화표절, 문하생 착취 구조 등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희재는 ‘독소와 공해가 없는 만화, 윤리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만화, 자유분방하면서도 만화가 갖고 있는 고유영역을 활용하는 만화가 좋은 만화’라며 바른만화론을 펼쳤다.

 

이후 만화관련 소그룹들을 모아서 우리만화발전을 위한 연대모임(현 우리만화연대)을 결성하는데도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만화창작을 통한 현실비판과 사회참여, 만화창작교육 등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작품 외적인 활동에서도 이희재는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수년간 열의를 다해 10권 전집으로 그려낸 <이문열 이희재 만화 삼국지>는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작품 자체는 두 작가의 공력과 역할에 빛을 더 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판매성과 역시 슈퍼 베스트셀러급이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보수 문학인으로 통하는 이문열의 작품을 ‘진보 만화가 이희재’가 만화화했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 따랐다. "사람들이 왜 이 작품을 하냐고 수군거리기도 하고 대놓고 비난하기도 했어요. 저 역시 출판사가 처음 요청했을 때 그런 시각에 대해 고민 했었죠. 사실 정본 <삼국지>와 <이문열 삼국지>의 차이는 ‘이문열의 시각으로 서술한 부분이 얼마만큼 포함 되었나’였어요. 만화 작업을 할 때는 분량 문제도 있거니와 인물과 사건, 전체적 이야기의 흐름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이문열의 시각은 많이 빠질 수밖에 없었죠. 제 그림으로 <삼국지>라는 고전을 아이들이 봐도 재미있도록 구성하자는 생각만 했죠."

 

 

 

 

 

지난해 부천만화대상의 대상작으로 선정됐던 <아이코 악동이> 이야기를 꺼내자 이희재는 '부담스러운 상'이었다는 이야기부터 했다. "개인적으로 수줍음도 많이 타고 그래서 상 받는 걸 안 좋아해요. 저보다는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많고요.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서로 좋아해야 하는데 전 부담되더라고요. 옛날에는 안 받겠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준다는 사람들이 불편해지잖아요. 그래서 받았죠(웃음)." <아이코 악동이>는 2005년부터 '개똥이네 놀이터'라는 어린이 잡지에 연재됐던 작품이다. <골목대장 악동이>를 기초로 새롭게 창작한 작품으로 2008년 단행본으로 나왔다. 과거의 악동이가 골목에서 현실사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면 새로 나온 악동이는 아이코라는 캐릭터와 함께 역사와 신화, 옛 이야기의 현장을 모험하며 우정, 인권 등 다양한 주제를 전한다. "옛날에는 그런 생각을 안했는데 <도라에몽>를 보면서 우리한테도 저런 만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라에몽은 과학이라는 코드로 주인공 소년과 모험을 하잖아요. 그래서 전 아이코가 인문학이라는 코드로 악동이와 모험을 하는 설정을 잡았어요."

 

이희재는 ‘상을 못 받을만한 작품은 아니다’라면서도 여전히 상금이 있는 상은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상금 역시 직접 수령하지 않았다. '어린이 만화 발전'을 위한 사업 기금으로 사용해 줄 것을 청했고 주최측인 부천만화정보센터는 아동들의 일기를 공모 받아 만화작가들이 이를 만화로 그려서 출판하는 형식의 사업에 사용하기로 하고 관련 업무를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의 결과물은 오는 9월 23일 열리는 부천만화축제 이희재 특별전(부천만화대상은 그해 수상자의 특별전시회를 다음 해에 개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을 통해 공개 될 예정이다.


 

 

 

 

 

"몇 년 전에 프랑스의 카스터만 출판사 편집장이 집에 왔어요. 일본작가 다니구치 지로를 만나고 오는 길이라며 작품을 직접 해보자는 제안을 했죠. 4, 50페이지 분량의 앨범을 하자고 했어요. 지금 제 나이에 작업할 수 있는 최상의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전처럼 정기적으로 연재를 하거나 전집만화를 그리는 식의 ‘양’ 중심 창작을 하기는 힘들어요. 기량이 높아졌을 때 최고의 집중력으로 1년에 한 두 권정도 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 못하고 있어요(웃음). 올 초에 또 왔길래 '확실하게 기다려 달라'고 했죠." 이희재는 개인 작업은 뒤로 미루고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만화의 생일잔치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100주년 집행위원장을 하고 있어요.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시간은 다가오고 늘 아쉬운 상태에서 문을 열어요. 그런데 이런 기회가 있어서 만화 100년을 돌아보니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만화는 일제 때 시작해서 해방, 한국전, 군사정권, 유신과 독재를 거쳤어요. 자유로운 상상과 풍자가 만화의 매력이다 보니, 시기별로 필화도 많았고 검열도 극심했죠. 양식 없는 출판장사치들의 잇속으로 인해 만화시장이 초토화되기도 했고요. 만화는 기도 못 펴고 매일 두들겨 맞았죠. 그런데도 100년을 살았으니 이게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이희재는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6월 3일부터 전시되고 있는 '한국만화100년전'(8월23일까지)에 많은 분들이 찾아와 줄 것을 당부했다. "우리만화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찬찬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50년대 말과 60년 대 초 우리 만화를 눈여겨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죠. 정말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봐도 진기할 만큼 독특한 소재가 많습니다. 지금 세대들에게도 뭔가 색다른 영감을 제공하리라 믿습니다. 또 최근에 만화창작과 소비환경이 디지털로 많이 전환됐어요.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창작 방향에 대해 묻자 이희재는 화실 한 쪽에서 그간 틈틈이 작업했던 그림을 꺼냈다. 지난해 촛불 집회 현장에서 박재동과 함께 그렸던 작품도 있었고 중국이나 한국의 유명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그렸던 그림도 있었다. 병풍식으로 접히는 화첩 한 권에 한 장소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화첩을 펼치자 2, 30면 가량의 그림이 기다랗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한 면 한 면 현장에서 붓을 이용해 그린 화첩을 펼치자 거대한 산이 되고 바다가 됐다. "나중에 특별전 할 때 공개할 생각으로 짬 날 때마다 작업하고 있어요. 옛날에 김용환 선생님이나 김성환 선생님이 그린 풍속화를 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그 시절이 그림 속에서 숨 쉬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부분이 있죠. 그래서 더 나이 들기 전에 우리의 도시나 자연 풍경을 이런 식으로 담아두고 싶어요. 이 작업을 하다 보니까 세로로 길게 작업하는 웹툰이 생각나더군요. 웹툰도 이렇게 가로로 길게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이희재는 서정성 넘치는 유럽식 앨범만화와 함께 풍부하고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접이식 화첩만화를 중심으로 차기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환경이 변해서 웹툰이 유행이지만 ‘디지털형식보다 디지털적 사고가 중요하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 만화계에서는 웹툰의 발전과 함께 인터넷이 수용하지 못하는 형식의 만화가 새롭게 부각될 수 있다는 취지의 논의가 등장하고 있다. 그 시절의 ‘바른만화’처럼 그의 손을 통해 우리 만화계를 긴장시킬 수 있는 색다른 ‘만화선언’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만화에 얽힌 박재동의 시간은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가 10살 전후 부산으로 이사를 가 새로이 살게 된 집이 만화가게였다. “우리 집이 만화방이었으니 그때부터 대학시절까지 쭉 만화와 함께” 할 수 있었고, “만화가게 아들이니까 당연히 만화를 많이 보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에 본 작품들은 너무 재미있어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만화를 워낙 많이 보다 보니, 나중에는 책 귀퉁이에 있는 선만 보고도 누구 작품인지 알게 될 정도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감별력이 생긴 것이다. 이처럼 만화 속에 파묻혀 살았던 시절에 대해 그는 “엄청난 자양분이 배양”되었던 시기로 기억한다. 만화를 알기 전부터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운 취미였던 그에게 만화 습작 역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만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며 성장한 그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그림 외에 다른 꿈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면서 “한편으로는 당시에 만화를 전공하는 대학이 없으니까 미대에 진학한 것일 수도 있다”고 밝힌다. 요컨대 그에게는 “만화와 미술이 따로 구분되는 장르”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림만을 생각하던 그가 잠시 다른 일에 행복했던 적이 있다. 대학원을 마치고 고등학교 미술교사가 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고 고백한다. “단순하게 그림을 가르치는 수업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즐겁게 교사생활을 했었지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인가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있는데, 문득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고. 그런데, 그 순간에 마음 한쪽에서 또 다른 불안감이 생겼죠.” ‘그림쟁인데, 그림을 안 그리면 불안해야 하는데 왜 불안하지 않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와 같은 상황은 “교사로서는 행복할지는 몰라도 그림쟁이로서는 불행한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함께 해오면서 그림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승부하려 했던 그에게 그것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그림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한 행복은 도리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곧바로 교사를 그만두게 된다.

 

 

 

 

 

그림을 위해 ‘행복한 선생님’이 되기를 포기한 그는 교사를 그만두고 일러스트 회사에 들어갔고, 거기서 한동안 “정말 열심히 그림이 그렸다”고 한다. “원래 저는 예술지상주의적인 측면이 강했어요. 대학시절, 유신정권 아래에서 자주 휴교령을 경험했고, 그러면서 정치에 대해서는 대단히 불신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고 스스로 밝히는 그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1980년 광주’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예술이라는 것이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삶을 다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와 같은 생각의 변화에 대해 그는 “공중에 떠 있다가 땅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고 비유한다. 이후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한겨레신문에 시사만화가 모집 공고가 나면서 그의 ‘만화를 통한 현실참여’는 본격적인 무대를 지니게 된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만화 혹은 만화가에 대한 생각보다 시대의 화두인 ‘민주화’에 대한 생각이 더 컸어요. 시사만화가가 되면서도 ‘군사정권 아래에서 만화로 민주화 운동에 동참한다’는 생각이 더욱 컸던 셈이죠. 요컨대,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만화를 통해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다는 말이 적절했던 시기였어요.” 만화를 통한 민주화의 참여는 그로 하여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게 만들었고, 그가 맡은 ‘한겨레그림판’은 시대의 고민과 아픔을 담아내는 발언대가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상황은 그로 하여금 “역사의 한 가운데 있다”는 자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회화를 하면 대개 화랑에 전시해서 몇몇 사람”이 보게 되는 반면 “만화는 신문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수십 만 명”이 보게 되는데, “그러한 사실을 실제로 경험했을 때는 엄청난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압박감과 쾌감, 고통과 기쁨은 굉장한 것”이었다면서 이처럼 일간지 신문에 만평을 연재하며 마주하게 된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치열함과 매력을 동시에 부여”했던 일이라고 고백한다.


 

 

 

 

‘한겨레그림판’에 ‘박재동’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1988부터 약 8년간 계속되었다. 때로 힘들고 때로 고통스럽기도 했을 그 시간 동안 그를 만평 속에 붙잡아두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그는 ‘독자’와 ‘매체’의 힘이라고 밝힌다. “무엇보다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의 힘이 바탕이 되었고, 두 번째는 그 시민들의 힘에 바탕을 둔 언론의 힘이겠지요. 한겨레신문처럼 시민들이 직접 돈을 모아 만든 민주언론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요컨대, “한겨레신문 자체가 민주화에 대한 강력한 열망으로 만들어진 언론이었고, 그 안에 있던 자신은 너무나 행복한 시사만화가”였다면서 “그런 만큼 스스로의 양심과 상식에 기반 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행복한 시사만화가’로 활동했던 그가 1996년 돌연, 한겨레그림판을 떠난다. “편집장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돌게 할 만큼 자유롭게 표현”하고 독자들과의 소통을 즐기던 그가 만평을 떠나게 된 것에도 그만큼의 이유가 있을 듯하다. “첫째는 민주화 운동이 많이 진척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에 따라 한겨레그림판에 대한 스스로의 동기부여가 많이 줄었죠. 두 번째는 아이디어가 바닥이 났기 때문인데, 8년을 하고 나니 내 수(手)를 이미 내가 다 알게 됐어요. 그 이전에는 고민하고 열심히 찾다 보면 뭔가가 나왔고 그때의 쾌감, 즉 스스로에 대한 재발견이 나를 기쁘게 하는 측면이 있었어요. 말하자면 어제의 나와 경쟁하는 식이랄까. 그러한 측면이 사라지게 된 것이죠. 마지막으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계속 가지고 있었고, 그에 관해서는 그만두기 몇 년 전부터 편집부에 계속 이야기를 해왔던 상태였지요.” 한편으로 더 머물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그만두는 것이 독자들로부터 좋은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측면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좋은 시사만화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명쾌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의 본질과 정체가 무엇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마치 “아주 노련한 의사가 병의 근원을 진맥”하듯이 찾아내야 하며, 그럴 때에 만화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한 느낌”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속에 나타나는 표현들이 “사람들의 삶과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본적인 인류의 선(善), 이를테면 자유롭고, 자랑스럽고, 아름답고, 배려하고, 억압하지 않는, 그와 같은 인간들의 기본덕목을 지켰으면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핵심이 있되 표현에 있어서 좋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되, 그 안에 ‘유머가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그래서 만화를 보는 독자가 웃음 속에서 통렬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표현이 아주 고도의 기법으로 표현되어야 하겠죠. 표현 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혹은 사건에 따라 슬플 수도, 아플 수도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기본 바탕에는 유머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죠.”

 

이처럼 시사만화가 핵심과 좋은 방향성 그리고 유머를 지니고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표현하는 시사만화가도 특별한 자질이 요구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이 한겨레그림판을 연재할 당시 스스로 세웠던 몇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첫째는 정확한 팩트(fact), 즉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라 여겼으며, “두 번째는 인신공격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령, 어떤 인물을 비판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위로 인해 벌어진 일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의 눈이 하나 작아서 나쁜 놈이다 혹은 원래 못된 놈이다 이런 식은 안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대안 없는 비판은 자제하는 것”이라 말한다. 물론, 모든 일에 대해 대안을 다 가질 수는 없지만, “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요컨대, 무책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지양하자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그는 연재를 할 당시 ‘역사의 심판’을 매번 떠올렸다고 한다. “나중에 ‘이 때 왜 이렇게 그렸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에 대해 명확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재동이 우리 시사만화에서 이룬 성과에 대해 누군가는 ‘우리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박재동 이후로 나누어진다’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만큼 그가 보여준 시사만화의 세계는 표현방식에 있어서 독창적이었으며, 수준에 있어서도 독보적이었다. 신문의 일개 구성요소였던 만평을 독자들로 하여금 신문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기사의 핵심으로 만들었고,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시사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조그만 사각형 속에 세상의 슬픔과 분노, 우리 사회의 고민과 아픔을 웃음과 눈물로 담아낼 수 있었던 밑바탕에 대해 기본적으로 만화에 대한 신뢰가 있었음을 그는 고백한다.

 

“만평에다가 말풍선과 액션을 넣었는데, 그러한 연출은 소년만화에서 자주 보이는 방식을 만평에 가져온 것이에요. 그 전에는 그런 표현이 드물었거든요. 헌데 그러한 연출을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었던 바탕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보아왔고 그로 인해 ‘만화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즉 “만화는 좋은 것이다, 만화에 등장하는 표현방식들, 요컨대 말풍선, 과장, 액션 등이 유치하거나 속된 것이 아니라 멋지고 좋은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박재동의 만화에 대해 독자들이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분노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기본적으로 만화가 가진 장점들에 대해 사람들 모두가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사만화가가 보여준 만화에 대한 따뜻한 신뢰가 때로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보듬을 수 있었던 사실, 그것은 우리 시대 독자들도 만화에 대해 깊은 공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데뷔작인「누들누드」를 비롯해「정크북」,「기동이」,「아색기가」에 이르기까지 양영순은 ‘섹스’의 시옷 자만 들어가도 ‘어흠, 험험’ 하면서 불경하다고 손짓하는 한국사회와 그 사회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 만화계 어디에서나, 말 그대로 ‘어디선가 뚝 떨어진 외계인’이었다. 성적인 화두를 생각지도 못한 발상으로 표현해내는 기발함과 대담함 그리고 엽기발랄함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격이었고, 그렇기에 양영순이란 이름은 「누들누드」란 작품 하나로 이미 한국만화의 작가군을 꼽거나 구분 지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명이자 구분명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런 양영순이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안 그래도 한창 불끈거리는 청춘이었을 고2 시절. 초등학생 시절 다들 그렇듯 막연히 「로보트 태권V」를 좋아하던 시기를 보내며, 역시 막연히 만화를 하겠다 생각하던 양영순은 한창 88서울올림픽이 열리던 고2 때 대거 쏟아져 들어오던 해적판 일본만화에 큰 자극을 받는다. 당시 해적판은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어 번역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마치 관례처럼 작가명을 정체불명인 ‘구호’로 붙인 책들이 많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구호 성인만화’로 불리던 이 책들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이 많았다. 츠카사 호조의 「시티헌터」, 오기노 마코토의 「공작왕」과 같은 주옥같은 성인향 작품들이 이 당시 쏟아져 나왔는데 양영순도 이 작품군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다만 전에 없이 강렬한 장면들에 많은 이들이 흥분‘만’하던 그 당시에 양영순은 이렇게‘도’ 생각했다. “나도 이런 자극적인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쾌감을 주고 싶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만화가를 목표로 삼은 양영순은 책을 사서 보고 베끼다가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한다. 원래 “만화가 선배들은 고교만 나와도 성공하는데 내가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하던 그에게 한 편의 만화가 다가선다. 역시 ‘구호 성인만화’ 가운데 하나로 소개된 바 있는 이케가미 료이치의 「크라잉 프리맨」이 그 작품이다. 이후 실사 영화로도 제작된 이 작품은 정교한 인체 묘사가 특징인 이케가미 료이치의 대표작이다. 양영순은 이 작가의 그림은 전통적 미술교육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고, 막연하게나마 미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고3 말에 결정을 내렸다. “운 좋게 합격했다”라고는 하지만 쉽지 않은 선택을 내리고 단번에 실행에 옮겼다는 점은 일반적인 진학을 꾀하는 이들로서는 ‘뜨악’할 법도 하다. “시각디자인 쪽이 만화 쪽하고 맞을 거야”라는 지인의 충고 한마디로 국민대 시각디자인과를 택한 양영순은 학보사 생활을 하다 새로 생긴 만화 아카데미에 들어간다. 마침 이 90년대 초반, 일본만화가 거세게 밀려들어오는 점을 우려한 중견 만화가 열두 명이 모여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특강을 한두 달 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양영순은 이두호·이희재·김형배·오세영·탁영호 선생 등 한국 만화계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이들과 사제의 연을 맺는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두호·이희재·김형배 선생이 특히 신경을 많이 써 주어 지금도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다고 한다.

 

 

 

 

 

한편 양영순의 데뷔 무대는 『미스터 블루』(현존하는 동명 웹진과는 다른 곳임)였다. 한국 성인만화의 방향을 보여주던 이 잡지는 이현세 선생 등 중견 만화가들이 직접 주주로 참여하는 형태로, 1995년 창간해 98년 3월 폐간하기까지 제법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뤄낸 국산 성인 만화지다. 당시 아직 『미스터 블루』가 창간한 줄 몰랐던 양영순은 자기가 하고 싶었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잡지로 『핫윈드』를 생각했었다고 한다.

 

당시 성인 남성지로 ‘색기 어리면서도 천박하진 않은’ 표지를 선보여 유명하던 『핫윈드』였지만, 문제는 「누들누드」의 전신이 된 단편 「곤충채집가 K와 L」의 고료를 『핫윈드』에서 전혀 받지 못하면서 일어났다. “그때 만약에 거기서 고료를 제대로 받았더라면, 그게 『미스터 블루』로 안 넘어갔을 거예요. 저한텐 전화위복이 됐죠. 고료를 못 받으니까 약이 올라서….


 

 

 

원래는 『핫윈드』에 내야 하는데 『미스터 블루』로 갔어요. 근데 선생님들이 그걸 보시고 공모전에 응한 걸로 돌리셔서 상금을 500만원을 주셨어요.” 그에게 이 상금 500만원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고, 또 싸울 힘을 낼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 나온 「누들누드」는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자 한국 만화계에 혜성같이 등장… 아니, ‘UFO를 타고 홀연히 나타난 국수별 외계인의 오버테크놀로지(?)’로 두고두고 회자되기에 이른다. 연재 당시와 책이 나왔을 때의 반응은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양영순은 이때 이두호 선생을 비롯해 잡지의 주축이던 이현세 선생의 도움이 매우 크고 또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후배한테 힘 좀 실어주자”며 힘껏 밀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아카데미 때부터 데뷔에 이르기까지 양영순은 그 출중함을 눈여겨본 선배이자 스승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감사하다고 말한 적은 별로 없단다. “건방진 얘긴데, 작가로서 좀 더 성장한 뒤에 말씀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럼 상금은 어떻게 했을까. “마치 지금의 5천만원 정도 되는 느낌으로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나머지, 받은 수표가 진짜 맞는지 계속 세어 봤다”던 상금 500만원은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드렸다고.

 

 

 

 

 

상금을 부모님께 드렸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양영순과 부모님 이야기를 더 해 보자. 「누들누드」의 누들은 noodle, 즉 국수다. 이 제목이 나오게 된 연원은 양영순의 부모님이 꾸리시던 칼국수 가게에서 찾아야 한다. ‘옹기종기’라는 칼국수집 주인 양융부 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양영순에게 면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을 터다. 현재 양영순의 주 연재처가 된 일간스포츠의 만화전문기자 장상용은 저서 『18 - 한국 대표 만화가 18명의 감동적인 이야기』에서 먹는 행위와 성적 코드를 연결 지으며 양영순 만화 속 상상력의 근원과 의미를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주시고 그랬기에 먹는 데 일가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면’에서 찾았다. 그랬던 아버지가 한 자리에서 20년을 꾸려오던 칼국수집을 정리하고 은퇴, 고향인 여수로 내려가게 되자 양영순도 부인과 함께 짐을 꾸렸다. “사실 허 선생님(허영만 선생)도 여수세요. 예전부터 선생님한테 저도 여수라 말씀하시면 ‘이놈자식 나한테 잘 보이려고 여수라 이야기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셨던지 별로 안 믿으시더라고요. 근데 이번에 여수 내려가니까 ‘어, 너 정말 여수구나’ 하시던데.”

 

‘아버지와 면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하고 ‘면발만으로 아버지의 그 날 기분을 알 수 있었다’고까지 하던 효자 아들은 장남으로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 함께 내려가게 됐다. 하지만 여수는 서울에서 새마을호로 거의 대여섯 시간이라 비행기를 타는 편이 나은 거리라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 여기서 양영순의 아내가 조용히 등을 밀었다. “집사람 결정이 가장 컸죠. 부모님 모셔야 하니까 가자고. 너무 고맙죠 그런 건.” 그럼 여수 생활과 원고 마감은 어떨까. “참으로 차분하고 ‘일하기엔’ 너무 좋아요”란다. 다만 신작인 일간스포츠 연재작 「플루타크 영웅전」을 하면서 운동을 두 달 이상 못해 살이 너무 쪘다고.

 

 

 

 

 


양영순이 현재 몰두하고 있는 작품은 네이버와 일간스포츠에서 동시 연재 중인「플루타크 영웅전」이다. 역시 연재지인 일간스포츠 장상용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인어른이 추천해주셔서 (원전을) 읽게 됐다”고 밝힌 이 영웅전기는 양영순의 재해석을 거치며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1001」부터 시작해「라미레코드」,「란의 공식」, 게다가 이번의「플루타크 영웅전」에 이르기까지 서사에 집중하기 시작한 일련의 양영순 표 작품 속에서는 미묘하게 우리사회의 현실 속 일면이 진하게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양영순은 이 점에 대해 “‘판타지를 한다’ 했을 때 그 판타지가 사람들한테 먹히려면 판타지 안에서 현실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판타지를 통해 현실을 이야기하는 작업이 좀 매력적인 것 같아요. 비유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상징적으로 뭔가를 표현하거든요. 사실 ‘만화적이다’라는 말을 본의 아니게 좀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요. 표현은 ‘만화적’이지만 그 안에서 현실을 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으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최근 「플루타크 영웅전」 연재분의 주역을 맡고 있는 테세우스 이야기를 전개하며 ‘영웅’이라는 화두를 들고 있지 않는가를 물었다. 최근 연재분의 테세우스를 통해 양영순은 분명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양영순이 말하고 싶은 영웅이란 뭘까? “살아남는 사람.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영웅이라 생각해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바람이 있겠지만. 살아남아 있어야 가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 그게 영웅이라 생각합니다.”

 

종교와 정치적 설정을 한 데 뒤섞어 방대한 세계관을 선보였던 「라미레코드」가 중도 하차하고 나서, 그에 쓰였던 아이디어 노트들을 잡다하게 정리해 올렸던 게 「양군잡상」이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구상이 실로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을 몰아쳐 터트렸구나’라는 인상이 강하다. 양영순은 이러한 아이디어들을 짜내는 과정에 관해서도 다소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아이디어란, 있는 사물을 분해하고 새롭게 짜 맞추는 거잖아요. 폭력적인 과정이라 생각해요.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걸 보면 조합이 안될 것 같은 것들을 억지로 충돌시켜 조합을 만들어내잖아요. 그러려면 분노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어떤 형태의 분노일지는 모르겠지만…….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랄까? 그런 분노들이 안에서 사물, 사람, 사건을 바라볼 때 폭력적으로 찢어발겨서 이렇게 붙이고 저렇게 붙이는 작업.”

 

이러한 독특한 관점은 으레 후배나 지망생들에게도 남들과는 살짝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갈망을 하라, 원하는 바가 있으면 원하는 대로 될 테니, 자기 갈망에 집중하라”고 일갈한 양영순은 그림에 관해서도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이야기를 쏟아낸다. “전 인체 데생이랍시고 누드크로키를 했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해서 나오는 형태들은 굉장히 갇혀있고 뭔가 답답해요. 지금 만화가 하겠다는 친구들한텐 크로키 같은 쓸데없는 데에 시간 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 시간에 상상해서 그리라고. 손에서 익은 형태는 정말 작가의 색깔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 내거든요.”

 

 

 

 

 

양영순에게는 본의가 아니었다 해도 어쨌든 독자에게 지고 있는 큰 빚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잦은 연재 중단, 그리고 또 하나는 모 법무법인으로 말미암은 독자 고소 사건이다. 먼저 연재 중단에 관해. 양영순은 이와 관련한 질문을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생각이 없다랄까?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당장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준비가 안 되고, 준비가 안 됐으니까 중간에 퍼지는 거죠. 연달아서 계속 그랬던 것 같은데…. 「1001」은 어떻게 끝냈나 몰라. 「라미레코드」도 사실은 아무 생각 없었어요. 낚싯밥 던져놓고 가만있어봐, 어떻게 하지? 이런 식으로.”

 

 

 

“다른 작가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세팅한 다음에 가는 게 아니라 떠오르는 것을 아무거나 잡은 다음에 ‘될 것 같은데?’라 생각되면 시작해요. 체계가 없이 하니까 실수들이 반복되는 거죠. 게다가 「라미레코드」는 중간에 체력적으로 퍼졌어요. 사람은 힘이 좋아야 해. 체력이 안 되니까 너무 힘들어요.” 어찌 보면 질문을 던진 사람은 물론 독자들까지 당황스럽게 만드는 답변이다. 양영순은 이 지점에서 자신을 설명하는 최대 키워드가 “즉흥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영순은 그로 인한 문제도, 그에 따른 독자들의 반응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맞아요. 그렇게 작품을 구상하니까 중간에 퍼지지. 그때그때”라는 그는 “제 태도니까, 그에 관해 평가나 비판 같은 건 제 몫이죠. 100%”라며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 따른 고민일까, 최근 연재작 「플루타크 영웅전」에 관해선 명확하게 마무리 시기까지 정해놓고 강조한다. 지금부터 1년 반 후에 마칠 거라고, 꼭 강조해서 써 달란다.

 

독자들을 향해 변명하지 않는 태도는 저작권 고소 건에 관해서도 이어진다. 만화 저작권 고소 사태란, 2년 전 한국만화가협회가 소속 작가들의 작품에 관한 저작권 침해를 단속하고자, 한 법무법인과 위탁 계약을 맺었다가 법무법인의 다소 지나친 단속으로 말미암아 거센 반발을 샀던 일을 일컫는다.


 

 

 

저작권 침해는 워낙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고 오프라인 만화·소설 시장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해당 법무법인의 단속 방식은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워낙 지나쳤던 것도 사실. 물론 이 문제에 관한 쟁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고, 작가에 따라서는 이번 기회에 더더욱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며, 실물 판매가 1차 시장이자 거의 전부인 오프라인 만화의 실제 피해사례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기에 이러한 반응이 틀렸다고 보는 것은 분명 무리다.

 

하지만 양영순의 경우는 웹에 연재한 작품이 조회수를 높여 수익을 얻는 이들에게 경고하는 수준을 넘어 학생, 개인 단위까지 무차별적으로 단속해 본인 이름으로 고소장이 날아가 그로 말미암아 거센 분노가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고, 이에 놀란 그는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단다. 항의메일과 전화에 놀랐던 그는 「란의 공식」 연재분에 독자를 향한 공지를 띄우기에 이른다. “뭐랄까, 과정이란 생각이 들어요. 콘텐츠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씩 조금씩 발전시킨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콘텐츠를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과도기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요. 동료작가들 도움 없었으면 작가 생명에 치명적인 일이었을 거예요. 동료 작가들이 많이 도와줬죠. 저를 위해 대신 변호해줬고. 기본적으로 감정 같은 건 사실 남아있지 않아요. 그게 한 번 거쳐 가야 할 일었다는 생각은 들었거든요. 그 정도.”

 

업체에서 난리쳤다는 관점은 비겁한 것 같아요. 동의한 건 작가기 때문에, 작가의 책임이에요. 이건 꼭 밝혀주세요. 한국만화가협회에서 하는 것에 동의를 했고, 사례를 알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저로 인해서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은 저한테 있다 생각해요. 업체의 잘못은 아니에요. 업체는 룰대로 했어요, 룰대로. 단지 작가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원고료 받고 무신경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법무법인에 고소당한 분들께는 일단 죄송하단 이야기를 전합니다. 100% 작가의 책임이라는 거. 업체의 책임이라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제 개인적으로는요.” 단속 방식의 문제와는 별개로 불법복제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 많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어디까지나 경우에 따라 다른 문제. 하지만 양영순은 어쨌든 그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안에 관해 ‘작가가 제대로 알고 허락했어야 하며, 그에 따른 결과는 작가의 책임’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생각 차이와는 별개로 태도는 분명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양영순을 만나며 느낀 인상은 참 ‘날것 그대로다’라는 점이다. 정제되어 있다기보다는 작가 스스로가 말하듯 상당수 부분이 즉흥적이며, 깊이 생각하기보단 그때그때 떠올라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이디어를 잡아채는 데 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탓에 자주 문제가 생겼고, 작가 자신도 이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변명을 하지 않으며, 어떤 점으로는 오해나 곱게 볼 수만은 없을 법한 심정도 시종일관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있었다. 솔직담백도 모자라 감추거나 피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필자는 인터뷰를 진행하며 순간순간 ‘이걸 어떻게 정리하나!’란 심정이 들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양영순을 ‘UFO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 출신 만화 천재’라던 평가가 그냥 찬사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전파를 수신하는 안테나의 감도와 각도 자체가 다른 이와는 많이 다르고, 이를 소화하는 방법도 다른 그런 사람. 그래서 한없이 즉흥적이고 감각적이며 어떤 면에선 한없이 동물적이기도 한 사람. 내 눈에 비친 양영순은 말로 왈가왈부 설명하는 게 불가능한, ‘순수’한 천재의 일면을 지닌 사람이었다.

 

 

 

동료 작가인 강도하는 양영순에 관해 “여전히 주목 받는 작품을 내놓고 있고, 여전히 세간의 이슈를 받을 만한 작품을 내놓으며, 항상 그래픽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작가”라고 말한다. 웹이란 공간에서 한때 이슈가 되었던 “만화는 역시 스토리야, 그림은 서툴러도 스토리가 있으면…” 식의 화두가 품고 있는 무자비한 폭력성을 작가들 스스로가 후배들 앞에서 써 온 이 시점에서, 양영순은 ‘만화란 그래픽과 문장의 이상적인 결합’임을 알려주는 작가군의 맨 앞에 놓을 수 있는 ‘소중한’ 작가란다. 아무리 매체와 무대에 따라 간소화한 그림을 선보여도 “못 그렸으면 어때요 내용 보세요”라고는 하지 않는 작가란다. 이렇듯 화두에 휩쓸리기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우직하게 파고 들어가는 일면을 보면, 양영순이 지닌 자산이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다만 더 이상 연재 중단의 늪에 빠져 독자들을 아쉽게 하는 일은 없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만은 품어 본다. 1년 반 후에 끝내겠다고 공언한 「플루타크 영웅전」의 마무리가 그래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어떤 작가로 독자들에게 남고 싶냐는 질문을 던지자 양영순은 이렇게 답했다. “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만화 시작했을 때 동기들이 많았거든요. 근데 어느 순간 보니까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데, 주변에 만화 연재했던 분들이 안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조금 충격이 있었거든요. 물론 훨씬 잘된 분들도 많고, 다른 일 해서 오히려 더 잘된 분들 많긴 한데. 그게 좀 씁쓸하더라고요. 그냥 어느 순간엔가. 나랑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이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하는 건 굉장히 큰 위안이거든요. 그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악착같이 살아남자. 그 사람은 나이가 몇인데 지금도 어디서 뭔가 하고 있어’라는 말을 듣는 사람. 계속 뭔가를 하고 있는 거야. 만화원고를. 계속 뭔가

 

 

 

 

 

 

 

 

현재 순정만화계의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는 강경옥이 어린 시절 만화와 만난 것은 주로 만화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덕도 한 몫 한 모양이다. 한 신문사에서 내던 아동 잡지 인쇄부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 덕에 강경옥은 그 잡지를 매달 볼 수 있었고, 그 아동 잡지의 부록들에 실려 있던 작품들을 보며 만화와 가까워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접했던 만화가 너무나 좋았던 강경옥은 초등학교 때부터 나름대로의 만화를 끄적끄적 그리기 시작했고, 중학교 때부터는 한 페이지 안에 칸을 나눠 스토리 만화를 연필로 그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펜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습작기에 들어섰고, PAC라는 만화 창작 동아리를 조직하기도 한다. 졸업 직후엔 <하니>시리즈를 그리던 이진주 씨 문하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이 문하생 생활 도중 《여학생》이라는 잡지에서 연락이 온다. 다름 아닌 연재 의뢰였다. 강경옥은 당시 이 잡지에 종종 그림을 투고했고, 보통 일러스트를 뽑아 싣는 식이었던 잡지사가 그걸 보고 직접 작품 연재를 의뢰해 온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현재진행형 ing>. 한데 이 작품은 4회 만에 중도 하차하고 만다. “‘그쪽 사정’ 때문에 4회로 끝났어요. 그건 좀 말로 하기가 곤란한 게 있는 거 같아서. 사회의 비리를 그 때 알았지. 아하하.”

 

그래서 실질적인 데뷔작은 <현재진행형 ing>보단 이듬해 나온 <이 카드입니까>인 셈이다. 1년이 채 안 된 문하생 생활을 거쳐 바로 프로로 데뷔한 셈이고,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만화가가 된 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다른 건 쳐다도 안 본다는 그런 게 아니라, 상황이란 게 있잖아요? 집이 어려우면 돈을 벌어야 되잖아요. 나도 상업계를 나왔으니까 취직할 수도 있는 건데, 이걸로 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 이 정도 수준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죠. 좋게 말하면 저는 만화 인생을 ‘에스컬레이터’ 했어요, 솔직히. 데뷔도 그쪽에서 오고. 제가 먼저 쫓아간 적이 없어요. 단계적으로 계속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솔직히 이런 계기로 데뷔하게 됐다, 그렇게 말할 게 없어요.”

 

 

 

 

 

말이 나온 김에 앞서 언급한 동아리 PAC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보자. 1983년 PAC는 국내 만화 동인계(아마추어로 만화 활동을 하는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 아마추어 만화계)의 태동기를 장식한 동아리로 1982년 등장한 KWAC와 함께 국내 만화 동인계 최초의 만화 동아리 연합체 ‘크레파스’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초기 합동지 기획에서 출발해 점차 유대관계로 엮이며 목적성을 얻어 출범한 크레파스는 이후 전국아마추어만화동아리연합(Amateur Comics Asso ciations), 줄여서 ‘아카’라 부르는 ACA로 발전한다. 다시 말해 국내 만화 동인계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게 바로 강경옥이 창설한 PAC였던 셈이다. 이 당시 PAC의 멤버는 유시진, 박희정, 나예리, 이태행, 김준범, 이강주 등으로 이름만 들어도 ‘아하’ 할 법한 인물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당시 PAC는 아마추어로서는 독특하게 가입 시 심사과정을 거쳐 가입희망자가 그림을 넣으면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입할 수 있었고, 강경옥의 편집과 주도로 한 달에 한 차례 무조건 책을 내면서 활동량 면에서 제 때 책을 내지 못하던 다른 동아리들과는 차별성을 보여주었다. 결과론적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점이 PAC 출신 프로 작가들이 대거 등장한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비록 ACA가 현재는 그 세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초창기 ACA를 중심으로 한 만화 동아리들의 활동 방향에 영향을 끼쳤다고도 할 수 있다.


 

 

 

 

 

강경옥 만화의 팬들이 모이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강경옥 표 만화를 처음 읽을 땐 지루하다는 오해를 하기 쉽다. 캐릭터가 아주 미려하고 섬세한 필체로 그려진 편은 아니요, 그림 자체가 예쁜 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힘으로 몰아치는 전개가 두드러지지도 않고, 호흡이 길다 하여 거대한 서사와 주제로 독자를 묵직하게 잡아 끄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읽다 보면 재미있고, 또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며, 다시 읽다 보면 흠뻑 취해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다고들 한다. 마치 밥을 한 숟갈 입에 떠 넣고 우물우물하고 있으면 씹을수록 슬금슬금 단맛이 느껴지는 듯한 느낌이다.

 

강경옥 만화의 매력은 이렇듯 단순히 거대한 이야기의 힘이나 소재의 독특함, 또는 잘 된 그림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강경옥 만화는 작품마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호흡을 지니고 있지만 그 많은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읽을 수 있는 화두가 있다. 바로 ‘인간’이다. 외계건 지구건 사람 사는 곳은 같다던 <별빛 속에>나,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결국 인간이 있어 생기는 일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던 <라비헴 폴리스>를 보면 강경옥 표 작품들이 어떻게 해서 독자들에게 다가서는지를 알 수 있다. 강경옥 작품의 인물들은 거대 담론이나 시대에 매몰되어 수동적으로 움직이거나 휩쓸려 다니지 않으며, 설정에 매여 허덕이지도 사건에 휩쓸려 다니지도 않는다. 강경옥은 작품과 그 안에 자리한 인물들에게 다양한 현실을 주고, 그 일상 안에서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보이게 한 다음, 이를 관찰하듯이 그려낸다. 서사나 캐릭터의 설정을 중심으로 매력을 끌어내는 방식과는 확연하게 다른 강경옥만의 개성이다.

 

“일단은 인간이죠. 이 세상에 모든 스토리는 인간에 관한 스토리니까. 심리도 결국 인간에 속한 거고. 거기서 어떤 갈등구조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전개가 달라지니까요. 사실 스토리의 중점은 갈등구조예요. 갈등구조 없는 스토리란 없어요. 그냥 아기가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이거엔 아무런 갈등구조가 없잖아요. 자연사를 보여주는 것과 갈등구조 안에서 뭔가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움직이는 심리들. 파도처럼 춤추는 심리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는 거고. 아닌 이들은 아닌 거고.”

 

“대화를 할 때라든지, 생각을 한다든지 할 때 어느 순간엔가 자각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런데 원래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알아서 자각해요. 대부분 일상이거든요. 사실은 어디에나 있는 일상이고 그건 사실 아무 문제도 아닌데. 옛날에 니콜 키드먼이 나왔던 영화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있었는데…, 뭔가 하나에 몰입하는 순간에 화면이 그 부분만 남고 입자화되는 그런 게 있어요. 하나만. 이걸 한군데로 놓고 보면 문제가 확 부각되게 하는 거. 그런 거라고 보면 돼요. 사실 그 문제가 다는 아니에요 절대로. 그런데 그걸 부각시켜놓으면 이 문제는 큰 문제가 되는 거죠. 전체에선 작은 부분인, 이것만 크게 만들 수 있어요. 관찰이란 건 그런 의미에요. 하나의 문제로 지나갈 수 있는 걸 확대시켜 볼 수 있는 그런 거죠.” 강경옥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일상성을 확보한 인물들의 심리는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판타지라 하더라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사안이라도 독자에게 현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힘, 그것이 강경옥식 만화의 최대 무기다.

 

 

 

 

 


이와 같은 궤로 읽힐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 진행방식. 강경옥은 모든 이야기를 다 미리 짜놓고 작업하기보다는, 시작과 끝의 큰 기둥을 네 개 정도 세워두고 나머지는 풀어놓은 채 맞춰간다고 한다. 설정 또한 아주 기본적인 것만 정해놓고 서로 대화를 시켜가면서 잡아간단다. 다만 시작과 엔딩 장면은 정해놓는데, 결말을 잡는 게 아니라 마지막에 보여줘야 할 이미지를 정해두는 식이라고 한다. <별빛 속에>의 마지막을 장식한 블랙홀 장면도 이미지로 잡아둔 것이란다. 나머지는 하면서 만들어가되, 큰 기둥에만 맞으면 될 뿐이라고 한다. ‘자잘하게 변동은 있을 수 있어도 결국엔 큰 그림으론 돌아와야 하는’ 것이란다.

 

그렇다면,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작품을 시작하는 것일까. 강경옥은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초기엔 역시 하고 싶은 이야기(스토리)를 생각했지만 지금은 상황과 감정을 한꺼번에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어떤 감정에 관해 무엇을 느껴보고 싶은가’에서 시작하고, ‘어떤 상황과 어떤 조건이 있으면 무엇을 느낄 것인가?’를 위해 갈등을 만들고, 기둥을 세우고, 대화를 시킨다는 것. 강경옥의 심리묘사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갈등상황을 만들려면 사람이 독해져야 해. 세상을 아름답게 봐야 살기 편한데 스토리는 아름답게 보면 안 나오거든. 작가는 독해져야 해. 어떤 사건에 집중해 하나를 독하게 파고 들어가서 내밀한 층을 다 하나하나 짚으면 문제가 나와요. 덮고 있던 문제가 튀어나오면 그게 진짜 문제가 되고 스토리가 힘이 생기죠.”

 

여담이지만 필자는 <노말시티>의 팬이다. 심지어 블로그 제목도 ‘핏빛 화성하늘 아래’다. <노말시티>의 주인공 마르스 헤븐(Mars Heaven)에게서 따온 표현이다. 자연히 <노말시티>에 관해 궁금했는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강경옥은 “힘들었어요. 하하, 힘들었어”라며 손사레를 친다. “<별빛 속에>보다 더 힘들었어요. 계속되는 마감하고. 마감이라는 것도 있고 길기도 했고. 힘들었던 작품이에요. 전반적으로 힘들었다는 말 말곤 할 말이 없어.” 혹시 <노말시티>가 힘들어서 더 애정이 있느냐고 묻자 그렇진 않단다. “힘들어도 <별빛 속에>가 애정이 더 크죠. <별빛 속에>는 초창기였기 때문에 열정적인 피곤함이라든가 그런 게 있는데 <노말시티>는 피곤함이 그 자체로 힘들어서 피곤했어요. 이렇게 너무 작품을 격하하는 거 같지만 그건 아닌데. 이를테면 모든 작품이 다 그래요. 앞 부분에서 뭔가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 다음이 힘들어져요. “그런데 <노말시티>는 그 케이스였어요. 처음에 시작을 할 때 안 좋은 도입부를 가지고 있었어요.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적으로 내가 이걸 하겠다고 하는 시기가 딱 맞아떨어진 건 아니었어요. 시기가 할 수밖에는 없는데, 내가 해야겠다는 마음 준비가 좀 덜 돼 있었던 것도 있었던 거 같아서 힘들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노말시티>는 끝을 냈다. 끝을 낸 게 스스로 대단하다는 강경옥은 끈질기게 붙들어 원하는 만큼 끝을 냈다고 자평한다. 참고로 작품 스타일이 그 즈음 변하지 않았냐는 질문엔 “그림은 좋게 변하든 나쁘게 변하든 똑같은 그림체로 있는 사람은 없어요”란다.

 

 

 

 

 

강경옥은 현재 팝툰을 통해 최소 단행본 10권 가량 분량으로 예정 중인 <설희>를 연재하고 있다. 다양한 장르가 복합되고 다층적인 묘사가 인상 깊은 <설희>는 본래 3년 전 쯤 서울문화사에서 잡지가 새로 나올 뻔하던 때 준비했던 작품이었으나, 잡지가 나오지 않으면서 다른 연재처인 팝툰을 통해 발표를 시작한 것이다. 구성도 처음 작업했던 분량과는 다소 다르게 됐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이를 좀 더 먹고 난 후 작업해서 더 잘 된 경우라고 한다. 강경옥에게 <설희>는 나이를 먹어서밖에 할 수 없는, 웬만한 공력으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고 한다. 다만 작가 안에서 잡아둔 엔딩의 이미지가 꽤 큰 작품인데, 이런 경우 대체로 진행하기가 좋더란다. 그러나 <설희>가 워낙 묵직하게 진행이 되고 있고 작품이 보여주는 규모도 워낙 커서, 매체도 조건도 안 맞긴 하지만 팬 사이에서 연재 중단이 풀리길 가장 기대하는 작품인 <퍼플하트>와의 병행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한편으로 한 영화제작사와의 계약 관계로 곧 내야 하는 단행본이 한 권이 있지만 웹툰이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의중을 비치기도 한다. 어쩌면 독자들은 강경옥 표 웹툰을 구경할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강경옥은 심리 묘사에 뛰어난 작가로 알려져 왔지만, 이는 치밀한 논리적인 설계라기보다는 인간이란 화두를 끊임없이 예민하게 관찰하고 나름의 현실 위에 세우는 과정을 반복한 결과에 가깝다. 비록 계산된 맛은 다소 떨어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 자체가 강경옥 작품의 근간인 인간 이야기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내내 “설명이 잘 될는지 모르겠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며 말하던 작가의 말마따나, ‘설명이 잘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면면을 채워나가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 그것이 강경옥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뷔 때부터 잊지 않고 응원해주는 독자들을 향한 인사를 잊지 않은 강경옥. 요즘 쉽게 보기 드문 장편 연재인 만큼 체력 싸움에서 지지 않고 무난히 완주해내길, 아울러 <두 사람이다>에 이어 <설희>의 영상화 소식이 조만간 들려올 수 있기도 함께 기원해 본다.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32권이라는 막대한 분량으로 출간된 장편물로, 독특한 상상력과 감각이 어우러진 영웅물이자 국내 SF 만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필자는 올해 나이 서른하나로 당연히 그 당시 선생의 작품들을 실시간으로 접했을 리 없는 세대지만 2003년 1000부 한정으로 복간된 <라이파이>를 보면서 과연 명불허전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봐도 촌스럽기는커녕 세련미가 묻어나는 설정과 연출 때문이다. ‘한국인’ 인터뷰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앞서서 김동화, 박재동 선생 등의 이야기를 보았을 것이다. 김산호는 바로 그런 선생들이 선생으로 모시는 인물이다. 여러모로 기대와 긴장이 어우러진 마음으로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작업실로 찾아갔다.

 

보통은 집안에서도 한복 차림이라는 김산호 선생은 그날따라 선생의 모습으로는 보기 힘든 진귀한(?) 셔츠 차림을 선보이고 있었다. 젊은 것들이 와서 이야기를 듣겠다는 것에 선생 나름의 배려였던 셈. 다소 지각을 하고 만 필자를 넉살 좋게 맞아주신 선생은 질문을 채 던지기 전에 앞서서 묵직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한국의 이미자가 세종문화회관에 노래하는 데 기다리는 데 50년 걸렸다잖아. 한국 만화는 100년 만에 미술관에 정식으로 데뷔했잖아. 올해는 만화가 예술로서 인정받은 해라고. 아울러 라이파이가 탄생한지 50주년이야. 그래서 내가 굉장히 큰 이벤트를 하나 구상하고 있다고. 될지 안 될지 몰라도 라이파이 팬클럽은 대한민국에서 55세쯤 된 어른들이 가입한 유일한 팬클럽이야. 팬클럽 회장이 박재동이고. 장학순이라고 하는 사람이 부회장이지. 올해 50주년 기념행사를 내가 아주 대한민국의 심장 한복판에서 하려고 해. 내 꿈은 시청 앞, 그 말썽 많은 광장에서 만화 행사를 공개적으로 한 번 하겠다-라는 거야.”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이야기다. 시청 앞 광장에서 라이파이 50주년 기념 행사! 게다가 구체적인 시간까지 제시한다. “어저께 박재동이랑 김동화랑 이야기를 맞췄어. 오늘(주: 인터뷰한 날짜는 7월 13일이었다)부터 D-100. 그러면 올 10월 첫 주 이렇게 하겠지? (주: 10월 20일) 그럴 구상을 갖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50주년이란 게 중요한 거거든.”

 

 

 

 

 

선생은 누가 취재를 왔다 하면 라이파이 쪽으로만 시선을 맞추려고 하는 점에 조금은 아쉬운 듯한 모습이었지만, 미국에 건너가기 전 김산호가 남겼고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이 라이파이임을 부인할 수 없기에, 역시 라이파이 이야기에 조금 더 비중을 둘 수밖에 없겠다. ‘ㄹ’ 글자 박힌 두건을 쓰고 종횡무진 날고 차는 정의의 사자는 당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라이파이는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됐을까. “우리 어렸을 적에, 한국이 처참하던 시절이잖아. 그래서 미국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줄 알아. 버터만 봐도 맛있고 별별 게 미국 거면 좋았던 그런 시절이야. 실제로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나라잖아? 마릴린 먼로도 있지,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있지. 미국 가면 그 여자들이랑 만나는 거 같잖아. 미국만 가면 그런 줄 알아. 근데 그 미국을 누가 지켜? 수퍼맨이 지킨단 말야. 또 배트맨이 지킨단 말이지. 일본만 해도 그 당시 아토무(주: 아톰)가 지킨단 말야. 근데 우리나라는 장화홍련전? 심청전? 이건 아니잖아. 한국을 지키는, 우리를 상징할 수 있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심볼. 우리를 상징하는 그런 자랑스러운 수호신 그런 게 하나 필요했어. 거기서 나타난 게 라이파이야. 수퍼맨은 S자 붙었지만 라이파이는 ㄹ이지. 사실 난 미국에서 만화 그릴 때에도 제목은 한국어를 쓰고 영어 서브타이틀로 번역하는 식으로 반대로 해 놔.”

 

 

 

라이파이가 한국 만화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큰 까닭은, 국내 최초 SF물이라는 상징 때문이 아니라 그 작품 속에서 시도된 요소요소들이 지니는 의미 때문이었다. 라이파이 시리즈는 지면을 넓게 활용하는 영화적 연출을 현란하게 보여주는 한편, 지면에선 보여줄 수 없는 효과음을 한글을 이용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만화적 효과를 우리 식으로 소화했으며, 스토리 배경에서 오대양 육대주를 다 돌고 다니면서 국내 안쪽에서 벗어난 시각을 갖추게 해 주었다. 전쟁 후 실의에 빠져 있던 많은 어린 독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마야 이야기라든가 잉카라든가 그런 게 다 나와. 그런데 라이파이 책을 보고 몇 년쯤 지나서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그래. 마야라는 게 진짜 있어요? 마야의 역사 문물을 알기 시작한 거야. 그때 한국엔 마야도 잉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지.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손발 묶어서 하지 말란 말이지. 전 세계 무대를 놓고 맘대로 뛰어 놀 수 있어야 된다는 거야. 그렇게 하면 스토리도 한도 끝도 없이 넓어. 난 아직 답답해. 다들 스스로 갇혀 있어. 만화가들의 상상력의 날개가 너무 난 꿈이 적다는 표현을 하는데 꿈이 웅대하고 크고 엉뚱한 발상도 괜찮아. 왜? 만화니까.”

 

이 ‘엉뚱한 발상’의 예로 그 시기 라이파이에 등장했던 연락기나 날틀, 로켓벨트, 홀로그램 등은 이미 다 휴대전화나 나는 자동차 등으로 실용화하거나 실현을 앞두고 있으며 이후 나온 영화 등의 영상물 등에서도 설정 등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김산호는 이를 자랑스럽게 말한다. “한국만화가협회에 기증한 라이파이 로켓벨트는 마이너리포트에 나오는 거와 똑같아. 당시 라이파이를 보던 많은 이들이 미국 건너가서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어. 그래서 그 때 아이디어가 다른 쪽으로도 간다고. 라이파이는 그런 이야기들의 근원지란 말이야.” 참고로 라이파이의 이름을 두고도 한국 사람인데 왜 이름이 라이파이냐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배경이 2100년인데, 호주법이 개선돼 호주가 여자가 될 수도 있고, 전처 아이의 성을 바꿀 수도 있고, 형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오누이가 혼인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시기에 식별자인 자기 고유 아이디만 있으면 됐지 한자 뜻을 풀어 설명할 것도 아니지 않나”라는 게 선생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ㄹ’이 박힌 것은 민족과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부각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고.

 

 

 

 

 


그런 라이파이지만 선생의 안에서는 한 번 묻혔던 캐릭터였다. 라이파이가 수퍼맨처럼 흥행을 했더라면 우리는 S를 가슴팍에 단 근육질 마초가 아닌 ㄹ을 이마에 단 늘씬한 청년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작품을 발표할 당시의 한국은 그다지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땐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미국에 가서 해 보려고 했는데 살기 위해서 그쪽에 맞추다 보니까… 죽었지. 그러니까 내가 50년 만에 라이파이를 윤회(輪廻)해서 다시 살릴 거야.” 앞서 언급한 50주년 기념 페스티벌은 바로 그런 부활의 의미가 담긴 행사가 될 거라고 한다. 라이파이 골수 팬을 자처하는 가수 최백호는 라이파이를 직접 그려서 판도 내고, 라이파이 노래 같은 걸 작곡해서 부르겠단다. 재미있게도 양희은, 전유성, 강석 같은 연예계 유명인사들도 라이파이 팬이라 하고, 팬클럽에 들어가 보면 나잇살 먹은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선생은 이걸 그냥 지나쳐 보지 못했다.

 

“근데 문제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첫사랑 만나려 하는데 만나면 꼭 실망하거든. 라이파이 같은 것도 이 사람들이 갖고 있던 환상을 깨뜨릴까봐 무섭고 두려운 거야. 부천에서도 라이파이 책을 내보내는 거, 옳은 건지 아닌지 고민됐어. 근데 팬클럽 열어봤더니, 이 향수가… 이걸 내가 무시하면 그건 범죄란 말야. 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리메이크를 해서라도 그 사람들의 꿈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윤회하기로 결정했어. 동서울대학에서도 5분짜리 티저 만드는 게 있고. 애니로 할 건지. 생각해야지.”

 

 

 

 

 

작가 김산호를 이야기할 때 라이파이만을 이야기하는 건 작가 개인에게도 섭섭한 일이지만 김산호라는 작가의 절반을 빼고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당시 ‘산호’라는 이름을 달고 작품 활동을 하던 선생은 1966년 훌쩍 미국으로 건너간다. 사실 이유는 좀 가슴 아픈 이야기다. 바로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서슬퍼런 ‘검열’ 때문이었다. 멸공을 국시로 삼던 그 시절, 작품 속에 인민해방군에 인공기도 나오고 하니까 당시 중앙정보부(훗날 안기부, 국가정보원)에서 선생을 데려다가 1주일 쯤 용공사상이 있는지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는 조사를 받고 난 후 한국이 싫어졌다고 한다. “난 자유롭게 작품을 하는 사람이잖아. 내가 판단해서 하는 거에 검열을 하는데, 그 땐 자율위원회라 해서 어린 아이들 만화에 칼끝을 그렸다고 자르던 시절이야. (주: 1961년 5·16 쿠테타 직후 같은 해 8월 설립된 한국아동만화자율회를 뜻함. 만화에 사전심의를 했다) 자유롭지 않아. 거기다가 작품의 내용에 관해서도 졸렬한 마음으로 자꾸 취조를 하니까 작품생활 하는 게 안될 일이지. 그래서 작품을 접고 미국으로 갔어. 미국은 무슨 책을 내도 검열이 없거든.” 이 시기 심의기관의 검열과 수정 조치는 정도가 심각하고 기준도 멋대로여서 작품 내용은 물론, 사람 이름임을 알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캐릭터 이름과 작가 이름까지 바꾸던 시절이었다. ‘산호’라는 필명을 쓰던 선생도 김산호로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게 이때다. 재미있는 건 바로 그 중앙정보부 건물이 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고, 명예의 전당 제1호로 오른 게 김산호 선생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선생은 해외에 나가서도 한국의 정서와 소재를 중심으로 만화를 그렸고 이를 해외시장에 직접 내놓았다.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작업을 진행하는 지금도 이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후 중국, 대전, 일산 등지에 세운 스튜디오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는 요즘 선생이 진행하는 작품인 문대원 전기는 대사 자체가 스페인어다. 멕시코의 ‘태권도 그랜드마스터’ 문대원을 소재로 한 이 책에서 그는 라틴아메리카 계열 히스패닉의 주요 언어인 스페인어를 직접 쓰고 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넣고 한국엔 나중에 들여올 예정이다.

 

“이걸 보면 김산호가 가는 방향을 알 거야. 남들은 첫 번째 책을 한국에서 내고 번역해서 수출하는데 나는 반대로 가잖아? 왜 이리 작은 시장에서 복닥거리고 난리야. 이게 초판 나가는 게 1만이야. 추가로 4만 부 나간다고. 미국 나가지, 남미 스패니쉬 거의 다 나가지. 그럼 부수가 얼마냐고. 그런데 그걸 왜 작은 시장에서 난리냐 이 말이야. 불황이다 뭐다 떠드냔 말이지. 크게 보고 멀리 보고 세계를 놓고 이야기하잔 말이지. 과학기술이 모자란다는 건 우리가 늦어서 그렇다 치지만, 그림은 그렇지 않아. 그러나 만화가들이 공부를 안 한단 말이지. 안목을 넓혀야 해.” 문대원 다음으로는 영어권에 직접 집어넣기 위해 영어로 작업한 그랜드마스터 준 리의 전기라고 한다. 곧바로 미국에 수출할 작품이라고. “우리 걸로 먼저 해서 나갈 필요는 없단 말이지. 오늘 마침 한국하고 EU하고 FTA가 체결될 거야. 그럼 전 유럽이 우리 시장이잖아?"


 

 

 

 

 

김산호가 말하는 ‘김산호’는 ‘만화가로서의 김산호, 사업가로서의 김산호, 그리고 역사가로서의 김산호’ 셋이 있다. 만화가로서의 김산호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대로고, 사업가로서의 김산호는 사이판과 제주도에 해저관광 잠수정을 취항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 ‘Sanho Group CEO’로서의 김산호다. 그런데 지금 김산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일을 벌이고 있다. 역사가로서의 김산호. 역사회화라는 형태로 우리가 정사라는 이름으로 배우고 있는 역사관의 잘못된 점, 보여주지 않는 점 등을 직접 화폭을 통해 그려내는 작업이다. 한국에선 소위 재야사학·민족사학, 또는 일부에서 유사역사학이라 부르고 있는 분야다.

 

김산호는 1988년부터 만주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의 무대들을 직접 답사하며 한민족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재야사학 쪽에서 ‘식민사학’이라 부르는 계열과는 달리, ‘우리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과 세계를 보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민족사에 대해 만화와 회화를 넘나들며 담아내기 시작한다. 화실에는 큰 넓이를 차지하며 놓인 유화부터 시작해, 만화에만 머무르지 않는 양식으로 표현한 우리 역사가 수두룩하다. 그가 회화체를 선택한 까닭은 논란의 여지를 잠재우기 위한 것도 없진 않았던 듯하다.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는 모습을 여러 갈래로 보여주기 때문에 다 아는데, 단군은 신화로만 보는 시각이 안타까워 ‘단군 왕검 할아버지’ 이외의 모습들을 단순화한 그림이 아닌 유화로 표현함으로써 목적성에 맞췄다. 이는 동양화·서양화·만화·세필화 등은 물론 극장 간판을 그리면서 속도성 높은 그림을 익힌 선생다운 발상이다. “단군왕검 이후에도 47명의 단군이 있단 말야. 그 이후에. 그런 걸 생각할 적에, 누군가 그려야지. 왜 김산호가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업보 같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지. 한국역사를 뒤집는 길이 될 거야. 한 만화가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갔는지 봤잖아? 어찌해야 할지는 모르지. 일단 거기까지 와 있는 상태야. 머지않아 재단법인으로 한민족역사문화연구원을 만들 거야. 그 일을 하고 있어. 깨어 있는 사학자들 동원해서 잘못 정리된 우리 역사를 뒤집는 민족사관에 의한 민족교과서를 만들 거야. 이런 일도 한단 말이야.”

 

 

 

 

 

 


김산호의 호는 만몽(卍夢)이다. 용인의 작업실 겸 자택의 이름은 만몽재(卍夢齋). 빌라 한 층을 개조해 마치 한옥 같이 꾸며놓은 만몽재는 마치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그 층만 전혀 다른 세계인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만몽. 수많은 꿈. 김산호에게 꿈이란 마치 호흡과도 같은 존재란 인상을 준다. 동행한 후배 작가들에게 선생은 끊임없이 주문한다. ‘꿈 꿔라, 세상에 그거 하나 공짜’라고. 만화는 그런 그의 꿈을 펼쳐 보일 수 있는 매체였다. “내 호가 만몽이지. 만 가지 꿈을 꾼다 해서 만몽이야. 내가 학예사라는 절의 스님하고 친해서 허망한 이야기도 하고, 그랬더니 ‘너는 만몽’이래.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나더라고. 내가 그랬잖아? 꿈꾸는 데 돈 안 든다고. 꿈을 화폭 위에서 현란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게 만화가의 축복이란 말야. 딴 사람은 못해. 얼마나 축복이야. 그런 걸 할 수 있는 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영화도 스펙터클한 건 만화가들이 감독이잖아. 아니면 만화가적인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이 하지. 하고 싶은 얘기를 쓰라고. 이 세상에 겁나는 게 하나 없잖아? 왜? 난 만화가니까. 내가 생각하는 건 내 맘이지. 책에 들어오면 내 맘대로 할 수 있잖아. 세상에 그렇게 축복 받은 사람이 어딨어?”

 

게다가 김산호는 언제나 그 꿈을 현실화해 왔다. 사업가로서의 김산호가 선보였던 것은 물 바깥에서 어항을 보는 게 아니라 어항 속에 들어가 보게 하는 개념인 해저관광잠수정이었다. 수영을 못하는 부인을 물 속 구경을 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과 남들이 건드리지 않았던 점을 떠올리는 상상력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물속에 들어가 새로운 관광시대를 연 셈이다. 김산호는 하고자 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그것을 해 온 사람이다. 그런 그는 요즘 또 한 가지 어마어마한 꿈을 꾸고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그림을 하나 그릴 거야. 얼마만큼 크냐면 높이가 한 6층쯤 되고 폭이 150m. 원형 풀 서클. 그걸 계획하고 있어. 계약단계에 갔는데. 한국 최고의 해전은 울돌목 전쟁이야, 명량해전. 쳐다보면 기절하지. 근데 해전에 관한 그림이 없어. 우리는 한 장도 없어. 그럼 그릴 바에는 저 정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걸 계획하고 있어.” 6층 높이에 길이 150m의 원형 풀 서클로 그린 명랑해전.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엄청난 크기로 되살아날 것 같다. 젊은이조차 미처 상상하지 못할 스케일을 끝도 없이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만몽, 만 가지 꿈의 결정체라 할 수밖에.

 

인터뷰어로서 제법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다 마치고 나서 “졌다!”라는 단발마 비명(?)이 터져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워낙 많은 질문을 받아 봤던 이 역전노장의 관점에서 모범답안은 정리가 되어 있었고, 필자가 준비해 간 질문은 이 모범답안 앞에서 철저하게 격파 당했다. 이토록 이쪽의 말수가 적었던 인터뷰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이다. 하지만 그만큼 치열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대가의 삶은 그 자체로 묵직한 무게감을 선사했다. “난 내 삶을 내가 스스로 개척해 갔던 사람이야!”라는 선생의 말마따나, 선생이 해 온 일들은 누가 간 길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자 한 일, 꾸었던 꿈을 현실로 만들어온 과정 자체였다. 이번 인터뷰는 인터뷰도 인터뷰지만 그 자신감과 긍지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한껏 얻어 돌아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무척 즐거웠다.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후배 작가들에게 남긴 선생의 한 마디로 이번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만화가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주효한 말이다.

 

“난 도깨비야. 남들하곤 다르지. 목표한 대로 갔을 때 감사한 마음. 스스로 만족한 마음. 산 꼭대기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 그런 기분은 산 안 오른 사람은 모르잖아. 난 그래. 하고 싶은 때 난 가. 아주 쉽다고? 스토리 만들고 그런 것도 마찬가지야. 통상적인 거 말고, 슬쩍 옆으로 가 봐. 딴 세상이 있어. 난 맨날 같은 길로 안 가잖아. 옆길로도 가 보고. 그럼 또 다른 세상이 있어. 새로운 세상에 나를 적용시켜보는 것도 괜찮아. 내 스타일을 만들어. 남의 그림 보고 그 스타일 대로 그리지 말고. 남의 스타일로 그리고 하면 아무리 잘 그려도 거기서 거기야. 잘 그려도 못 그려도 괜찮아. ‘내 특징.’ 그게 참 중요한 거야. 자기 거. 내 길로 가란 거야. 그 길이 바르면 남보다 한 발 앞서서 작품도 만들 수 있고. 남 따라 가지 마. 따라 가는 건 기초공부할 때나 하는 거지. 어느 수준 넘어갔으면 내 길로 가야 해.”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명랑만화라는 장르명이 익숙하게 들린다면 나이가 아주 어리진 않을 것이다. 명랑만화는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 또는 ‘유쾌하고 활발함’이란 뜻을 지닌 명랑(明朗)을 붙인 장르명으로 ‘순정만화’처럼 우리나라에서 나온 표현이다. 명랑만화는 대체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며 단순화한 선과 과장된 등장인물들의 움직임, 효과음이 경쾌한 느낌을 준다. 1960년대 중반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했던 다양한 아동 잡지들을 기반으로 뿌리를 내렸던 이 장르의 대표 작가로 <꺼벙이>의 길창덕 선생과 <맹꽁이 서당>의 윤승운 선생, 그리고 바로 이번에 만난 <로봇 찌빠>의 신문수 선생을 들 수 있다. 이제는 장년층이 된 이들 가운데 이들의 만화와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가운데 신문수 선생의 <로봇 찌빠>는 최근 애니메이션화를 비롯해 후배들의 손으로 웹툰으로 리메이크되는 등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캐릭터로서도 단일 작품으로서도 독자들의 뇌리에 유난히 깊게 남아 있다. 그 뿐이랴, 얼마 전엔 인기 온라인 대전액션 게임 <던전앤파이터> 광고 만화에 찌빠가 등장해 올드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한 작품의 캐릭터가 등장한지 35년이 지나서도 대중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만화를 시작하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신문수 선생도 소싯적엔 시절 공부시간에 공책에다 만화 좀 그리던 ‘그림 좀 그리는 학생’이었다. 동양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중학 시절, 초가집을 전문으로 그리던 유천 김화경 선생(1922~1979)에게 동양화를 배우며 홍대 주최의 전국대회도 나가 특선 입상하는 등 성과를 올렸지만, 막상 고향인 천안을 떠나 서울 쪽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미술 선생이 서양화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1학년까지 천안을 오가며 배우다 2~3학년 동안엔 그림을 안 그렸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터라 대학에 가지 못한 신문수는 조종사가 되겠다고 공군사관학교에 갔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고향으로 내려가 6개월 가량을 쉰다. 하지만 얼른 군대부터 다녀와야겠다고 공군에 자원입대, 3년 후 제대하고 다시 고향에 온다. 이때 진로를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그림을 잘 그리니 만화를 해보자는 것. 문제는 이 당시에 만화를 어떻게 그린다 하는 지침서도 없었고 그리는 방법도 몰라 혼자 집에서 습작을 통해 독학을 했다. 투고용 원고를 한 페이지를 할 때 다 그리다가 끝부분 틀리면 수정액으로 지우면 될 것을 수정액 쓸 줄 몰라서 처음부터 모두 다시 그리는 식이었던 것.

 

 

 

그렇게 제대 후 6~7개월 정도 혼자 습작을 하며 독학을 하던 것이 20대 초중반 무렵. 신문 독자만화란에 투고를 하던 것이 <고바우> 김성환 선생의 눈에 띄고, 이윽고 대중 오락잡지에 투고한 것이 당시 명랑만화의 최강자로 활동하던 길창덕 선생의 눈에 띄어 길창덕 선생의 신인만화가 추천으로 정식 만화가로 데뷔한다. 이때가 1964년이다. 당시 김성환 선생은 내용으로 볼 때 아동만화를 하면 비전이 있을 것 같다고 했으며, 길창덕 선생은 모처럼 괜찮은 명랑만화 작가가 하나 나타났다면서 잡지에 추천사를 써 주었다.

 

이 길창덕 선생을 중심으로 얽힌 인연이 묘하게 재미있다. 프로작가 데뷔에 큰 역할을 해 준 셈인데, 당시 길창덕 선생은 잡지만화만 했었는데 단행본을 그리면 인기가 좋을 거라 생각한 출판사들이 그를 섭외한다. 이때 신문수 선생은 이미 길창덕 선생과 먼저 알고 있던 윤승운 선생과 3각으로 얽혀 길창덕 선생의 후배이자 제자로 서로 교우를 쌓기 시작했고, 이 셋이 길창덕 선생에게 들어온 단행본 작업을 일손을 나눠 작업했다. 그런데 길창덕 선생이 당시 단행본 만화시장의 주축이었던 신촌 쪽 만화 출판사들과의 생리가 맞지 않아 오래 안 가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그만 두게 되었고, 이때 신문수 선생을 스카우트한 사람이 당시 단행본 계열의 최고 인기 작가이자 불세출의 아이디어 뱅크로 이름을 날렸던 고 김경언 선생이다. 고 김경언 선생은 한 달에 50~60권을 쏟아내는 다작에 아이디어를 쏟아내기로 유명했는데, ‘생각하는 장소’로 꼽는 화장실을 응접실 수준으로 꾸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신문수 선생은 고 김경언 선생의 문하에서 일을 돕다가, 평생 남의 일만 도울 순 없다는 생각과 대중만화 작가로 데뷔했다는 생각으로 중간에 그만두고 나오게 된다.

 

 

 

 

 

이 당시 젊은 만화가들을 중심으로 뭉친 만화가 모임이 바로 창작만화가회(창만회). 이후 낚시 모임이자 국내 최고(最古) 만화가 모임이 된 ‘심수회’의 전신이다. 야구모임을 빙자해(?) 만들어졌다는 창작만화가회엔 윤승운 씨도 있었는데, <따개비>의 오원석 선생과 <시인이로소이다>의 허어 선생이 합세해 종로5가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내 공동작업을 했다고 한다. 1972년까지 약 5~6년 전문작가가 함께 활동하다 보니 일거리가 많이 늘었고, 이 시기 드디어 신문수 선생의 대표작인 <도깨비 감투>가 《어깨동무》에 60페이지짜리 단권 부록으로 실리기 시작하며 크게 흥행한다.

 

이 인기를 본 《소년중앙》의 의뢰로 연재를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로봇 찌빠>. 이 작품 반응도 굉장히 좋았고, 당시 새로 생기기 시작하던 잡지들이 너도나도 의뢰를 해 오게 된다. 당시 《소년생활》 《소녀생활》 《보물섬》 등등 온 잡지들이 부록뿐 아니라 본지 연재만화로도 작품을 싣기 시작해 분량이 많아지게 된 것. 선생은 <도깨비 감투>와 <로봇 찌빠> 때도 혼자서 문하생 없이 두 부록 만화를 하기 위해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었고, 급기야 새벽 2시에 끝나면 그 다음 것을 뒤져서 하기도 하면서, 저쪽 주인공이 이쪽에 있는 등 이름도 헷갈릴 지경이었다고. 이 때문에 선생은 훗날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그때 여러 군데 자리 잡으려다 보니 많이 한 것도 있었지만 조금 더 작품을 선택해서 조절해서 조금만 했었으면……. 다작을 하지 않았으면 그 당시 머리 팡팡 돌아갈 때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거 같은데. 70년대 80년대 너무 많이 작품 연재를 많이 해서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한두 권 작품에 열중했으면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까 생각이 드는데.”

 

선생은 단행본 다작을 하는 후배 작가들에게 “극화체 만화가 손이 들긴 하지만, 그걸 넘어서 ‘닭장처럼 일사불란하게 공장처럼 차려놓고 하는’ 작업 방식이 당장 돈은 벌지 몰라도 작가 생명이 오래 못 간다”고 충고한다. 선생 자신도 한창 바쁠 때는 원고 갖다 주는 직원 하나는 있어도 실제로 자기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안 썼다고 한다. 이런 공장 시스템으로 돌아가던 당시, 신촌의 만화 출판사 쪽으로부터 윤승운 선생과 함께 이름만 빌려주면 책을 알아서 찍어내고 월 1천만씩 입금해 줄 테니 계약하자고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솔깃했던 건 사실이지만 안 하길 백 번 잘했다 생각한다고. “오랫동안 작가 생활을 하려면, 자기 작품을 자기가 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은 ‘절친한 친구’를 그냥 ‘절친’이라고들 한다는데 아마 신문수 선생과 ‘절친’이라고 하면 인터뷰 내내 이름이 나온 윤승운 선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화 이야기하면 윤승운 씨를 빼놓곤 이야기할 수 없어요”라고 할 정도면 말 다 한 셈. 함께 공동 작업실 꾸려 쓰던 당시 신문수 선생의 <도깨비 감투>가 인기가 있으니 연재지였던 《어깨동무》에서 윤승운 선생에게 다른 거 같이 해 보자고 제의해 <요철발명왕>이 같은 시기 함께 부록으로 제공되기 시작했다. “<도깨비 감투>가 인기가 있었는데 윤승운 씨 들어오니까 한 달은 <도깨비 감투>가 조금 더 엽서가 많이 들어오고 다음 달은 <요철발명왕>이 더 많이 들어왔어요. 근데 한 사무실이니까 마감도 똑같고. 시작도 같고. 그게 선의의 경쟁이랄까 어느 정도 서로 라이벌 의식도 있고 하니까. 나는 나중에 생각했는데 내 만화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윤승운 씨도 마찬가지고. 나로 인해서 더 분발하고.”

 

앞서도 언급한 부분이지만 윤승운 선생은 초기 길창덕 선생 일을 같이 돕기도 하고 대중잡지 연재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신문수 선생과 함께 해 온 사이다. 작업실을 함께 하다 보니 심지어는 서로 원고가 먼저 끝났어도 기다려주는 끈끈한 우정(?)을 발휘했다고.

 

 

 

“《보물섬》 《소년중앙》 원고를 하고 있으면 난 끝나도 저 사람은 아직 하고 있고. 마감날이면 그렇잖아요. 그럼 내가 먼저 끝나도 안 갖다 줬어요. 전화와도 안 끝났다 하고. 윤승운 씨도 자기가 다 끝나서 다 꾸려놨어도 내가 못 끝냈으면 오늘 다 못 그렸다 그래서 둘이 다 끝나야 갖다 줬거든. 나중에 둘이서 짜고선 원고 늦게 준다는 소리도 들었죠. 허허허.”

 

선생의 작업실 한 쪽 사진 속에 낚시대를 들고 서 있던 심수회 멤버들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원고하는 자세에서 많이 배웠다던 고 고우영 선생의 이야기도 무척이나 반갑다. “1983년에 역삼동에서 윤승운 씨랑 고우영 씨랑 셋이서 화실을 같이 썼었죠. 고우영 씨는 중국 고전이나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다 외워서 종이만 있으면 될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때 같이 작업 많이 가 봤거든. 고우영 이정문 윤승운 박수동 이렇게 해서 술 먹으러 가고는 싶은데, 일 되든 안 되든 싸들고 가자 해서 아침부터 6시까지는 반드시 일하고. 6시 딱 되면 ‘됐다 술 마시러 나가자~’ 하곤 했는데. 그렇게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 옆에서 보면 고우영 씨는 같이 일하러 가도요, 책을 참고서적 가득히 한 배낭 메고 온다고. 다 볼 수도 없지만 그 사람 수호지 초한지 그릴 때 머리에 다 있지만 참고서적으로 이 책 저 책 다 보고 모든 자료를 종합해서 그리는 거지. 다 꿰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해. 옆에서 보면서 작품 하는 거 영향을 받았죠.”

 

 

 

 

 

신문수 선생은 스스로 “몸만 늙었지 철이 안 들었다, 정신연령은 손자랑 딱 맞는다”면서 너털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선생은 언제나 눈높이를 아이들에게 맞춰 왔다. <로봇 찌빠>의 찌빠가 왜 로봇 주제에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엉성한 ‘고장난 미제 로봇’인가도 다분히 이러한 시점에 기인한다. “(명랑)만화 그리려면 아동심리를 파악해야 하거든. 음식점에 가서도 사장이 너무 근사하고 그러면 괜히 주눅 들고 그렇잖아요? 팔팔이보다 찌빠가 너무 완벽하고 그러면 팔팔이가 주눅들어서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그에게 요즘 상황은 조금 우려스러운 듯하다. “애들이. 정말 공부에 애들이 너무 공부에 지쳤는데 만화 볼 때만큼은 만화에서 학습을 찾지 말고. 그냥 만화 보고 크게 웃고 신나게 재밌게 보고 덮고 공부하면 되는데. 요즘은 학습만화라 해서 학습하고 만화를 짬뽕해서, 부모들이 학습이라면 만화도 보고 공부도 된다고 하니까 사 주죠. 지금 시대 어린이들이 더 불행하다고. 어린이용 만화책 하나도 없습니다. 애들이 한다는 게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몰두해 있는데. 아이들이 NDS 한다 해서 막~ 해봐야 걔 머릿속에는 기계적 기술만 늘어나는 거지. 하늘을 쳐다보고 우주는 어떻게 생기고 무슨 생물이 있을까, 그만한 나이에는 상상력 사고력을 키워줘야 하는 거거든요. 사고력이 곧 창의력을 유발하는 거니까.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머릿속에 꿈도 많고 상상력도 많고 해야 하는데, 이게 너무 그냥 기계적으로 주입식으로 공부만 하고 말예요.”

 

어린이용, 특히 명랑만화의 역할은 바로 단순과 과장 속에 이러한 상상력의 세계를 담아 아이들로 하여금 사고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것. 그런 점에서 만화조차 학습효과에만 매달리려 들고 아이들에게 그런 쪽만 읽히려 드는 어른들의 생각도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선생은 이와 관련해 대기업들이 사회사업으로서 사명감을 지니고 어린이 교양잡지를 내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학습만화나 고전작의 리메이크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어린이용 만화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과연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고래가 그랬어》와 같은 잡지들이 시도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현 시대에선 쉽지 않아 보인다.


 

 

 

 

 

분당에 자리한 신문수 선생의 원룸 작업실에는 그 동안 작업해 온 손 원고들부터 선물 받은 그림, 작업물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최근엔 사보나 홍보물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얼마 전엔 ‘던파(게임 <던전앤파이터>)’ 광고 만화도 그리는 등 여전히 정열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재밌는 건 그 연세에 포토샵을 직접 다루며 CG로 채색을 하는 등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 작업엔 작업실이 바로 근처인 윤태호 작가에게 종종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바뀌어가는 환경과 경향에 관해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돌리기보다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는 대목에선 탄복할 따름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오히려 쉽사리 못 품는 마음가짐이란 점에서 더욱이 그렇다. 생각해 보니 인터뷰 내내 신문수 선생은 윤승운 선생을 아이디어 뱅크로 칭찬했지만, 신문수 선생도 그 당시 인공지능 로봇이란 소재를 떡하니 등장시킬 만큼 앞서나가는 사람이었다. 물론 인터넷 덧글 같은 것을 보고선 무서웠다지만.

 

선생의 대표작인 <로봇 찌빠>는 리메이크 웹툰으로 또 애니메이션으로 다시금 새 독자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선생 스스로는 여태 가만히 있다가 놓쳤었다는 안타까움을 드러내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방송사의 제작비 지출이나 편성 등 고질적인 문제 앞에서 올해 말 편성 일정을 잡아냈다고 한다. 선생이 직접 돈을 더 보태기까지 했다니, 그야말로 잘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남 말이 아니다.

 

고우영, 박수동, 윤승운을 비롯해 그 자체가 국내 만화계 역사라 할 수 있는 심수회 일원들을 모아 심수회 만화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의중을 밝히는 신문수 선생. 선생 자신은 아이 같다면서 허허 웃지만 연세를 의식한 듯 늦기 전에 지금까지의 발자국들을 정리하길 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치료를 끝낸지 7년이 넘었다지만 신장암에 걸린 적도 있는 만큼 앞으로도 건강을 챙겨 더욱 오래 작품들을 선보여주길 독자로서 바라마지 않는다. 아울러 고향땅인 충남 천안에 박물관을 꼭 세울 수 있기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말씀. “나이가 있어서 작가 생활도 접어가는 상황이지만. 항상 고마운 건, 지금도 옛날 작품을 기억해서 어디 행사장이나 전시장 가서 로봇 찌빠, 도깨비 감투 팬이었단 이야기를 해 주면 고맙고. 한편으로는 섭섭한 건, 시대가 흘러가서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전혀 몰라줄 때. ‘할아버지 옛날에 만화 그렸어요? 뭐 그렸어요’ 그러는데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고 하는 거죠. 항상 옛날 만화 기억해주는 팬들에게 감사하고. 그리고 항상 나이 먹어서 내가 이 세상을 뜨더라도 옛날 어린이만화 순수하게 그렸던 거, 신문수는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기억해주었으면 고맙겠어요.”

 

 

 

 

 

 

“신문연재를 안하고 있으니까 되게 한가한 줄 알아요. 그러다 보니 자꾸 이거 저거 하자고 그래요. 그걸 다하면 너무 힘들어요. 하고 있는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서 안돼요. 다 계획대로 하는데 갑자기 뭘 하자고 하면 제가 순순히 응할 수가 없어요.” 김성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수 차례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던 김성환은 잠시도 한 눈 팔 수 없는 최근의 근황을 알렸다.

 

“2010년에 개인전을 해요. 신작 30점 가량을 내놓을 거예요. 고바우를 테마로 한 동양화 전시회(2000년)와 한국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풍속화 전시회(2004년)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요. 덕분에 그림 값도 많이 올랐어요(웃음). 그런데 새 전시회를 할 때마다 보통 신경 쓰이는 게 아니더라고요. 이번에는 캐릭터가 없는 파스텔화를 선보이려고요. 할 일이 많은데 그간 했던 것을 정리하는 일도 게을리 할 수가 없어요. 인천시가 ‘김성환 박물관’을 건립하자고 해서 소장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 일 역시 만만치가 않아요. 시에서 지정한 건축부지가 개발제한이 묶여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하는데 잘 되겠죠.” 60여 년 간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은 77살의 열정가는 여전한 기력으로 자신의 시선과 고민을 그려내고 있었다. 네 칸 만화원고지 대신 대형 캔버스로 장소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각종 생활사 자료에 대한 수집가로서의 열정은 오히려 젊은 시절을 능가했다.

 

 

 

 

 

김성환은 1932년 이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동순은 1920년경 김상옥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0여 년 동안 청진감옥에 수감됐던 독립투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주의 돈화라는 곳에 살면서 지역유지로서 귀농조합을 결성하고 오족협화회의 지부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가 아닌 친일 인물로 낙인이 찍히고 만다. ‘해방이 됐으니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거’라고 믿었던 김성환 일가는 개성을 거쳐 서울로 내려왔다. 하지만 조국에서의 생활은 더 혹독 했다.

 

김성환은 만주에서 돈화국민우급학교를 거쳐 길림6고(지금의 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로 전학한다. 당시부터 학교 미술부장을 지내는 등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김성환은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네 칸 만화를 그려서 ‘연합신문’에 보냈다. 김성환은 외국신문에 있는 만화란이 한국신문에는 없는 것을 보고 ‘아무리 보아도 창문이 없는 집 같아 보였다’고 회고했다. 신문사에서는 ‘학비를 대주겠다’며 만화를 계속 그려 달라했고, 김성환은 얼마 되지 않아서 <화랑>잡지와 선배 만화가 김용환이 편집을 맡았던 <만화뉴스>에서 매달 1만원씩을 받는 전속만화가가 됐다. 1949년, 열일곱 나이에 김성환은 만화계에 데뷔하며 만화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됐다. 하지만 곧 한국전이 터졌고 다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한영주, <한국만화사구술채록연구-김성환>편, 부천만화정보센터 간, 참조).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눈에 뛰는 젊은이는 모두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갔어요. 김용환씨한테 월급 받으러 갔더니 ‘수금이 안되어 돈이 없다’며 쌀 배급해주는 데를 알려줘요. 가보니까 조선미술동맹이에요. 이승만이 도망가고 김일성이 탱크 몰고 달려가고 맨 이런 거 그리고 있어요.” 김성환은 9.28 서울수복이 될 때까지 공산군을 피해 숨어 지냈다고 한다. 전쟁이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자 조각가 윤효중 등이 발행한 ‘만화신보’에 참여했고, ‘신태양’, ‘희망’, ‘학원’ 등에 작품을 게재했다. 김성환은 전시에 김병기 화백의 추천으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 근무하면서 계몽포스터와 삐라, 주간만화잡지 ‘만화승리’, ‘육군화보’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미술대 내에는 화단의 중진들로 구성된 종군화가단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김성환은 이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다.

 

1951년 대구에서는 아동만화를 주로 작업했는데 소설가 방기과 함께 했던 <도토리용사>, 남향문화사에서 발행한 <사육신>, <도마스목사얘기> 등이 호평을 받았다. 특히 붓으로만 작업한 <사육신>을 보고 당대의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이 찬사를 보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52년에는 시인 김소운 등과 함께 성인만화잡지 형식을 취한 ‘만화만문전람회’, ‘만화천국’을 도 맡아 발행했고 1953년에는 학생잡지 ‘학원’에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청소년층은 물론이고 성인층에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고 1977년 석래명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고교얄개> 시리즈로 유명한 이승현과 김정훈이 주연을 맡았다. 김성환은 한국전 시에 미술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참혹상을 스케치에 담는 한편,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웃음을 전했다.

 

 

 

 

 


김성환을 대표하는 캐릭터인 ‘고바우’는 피난 중에 탄생한다. 김성환은 고바우 외에도 피난 중 다락방에 숨어 살면서 200여 명에 달하는 만화주인공을 습작노트에 기록했다고 한다. 고바우는 그 중 하나로 ‘높을 고자를 쓰는 성씨에 바우라는 이름을 붙여, 친근한 이웃 같지만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을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과장된 얼굴 표현을 담아내려 노력했던 당대의 만화 캐릭터와 달리, 표정을 없애고 한 가닥 있는 머리털로 심리상태를 표현했던 것도 이 같은 고민의 결과였다.

 

고바우 캐릭터는 다양한 매체와 작품을 통해 등장했는데, 1950년 12월 30일 발행된 ‘사병만화’가 첫 시작이다. 고바우가 폭 넓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당시 9만부를 발행했던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부터이다. 문화면을 담당했던 시인 이상노의 청탁으로 1955년 2월 1일부터 ‘고바우’가 연재됐다. 만화를 신문에 게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언론계에서는 고바우의 인기를 확인한 이후 잇달아 연재만화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김경언의 ‘두꺼비’를 시작으로 김기율의 ‘도토리’, 신동헌의 ‘주태백’이 등장했다. 거리에서는 어린이들이 ‘고바우 영감이/ 고개를 넘다가/ 고개를 다쳐서/ 고약을 발랐더니/ 고만 낳더래’라는 작자미상의 노래를 불렀고 ‘고바우’를 간판으로 내 건 각종 상점이 전국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여류시인 이영도는 ‘석간을 펼쳐 들면/ 손주놈 고바우를 묻는다./ 혀끝에 진득이는 이 풍자 감칠 맛을/ 전할 길 없는 내 어휘/ 모국어도 가난하네’라며 고개를 숙였고, 시인 고은은 ‘저 유신 시절/ 며칠 동안 아무도 모르게/ 고바우는 끌려갔다./ 우리는 그가 어디 있는가 모른 채/ 그의 빈칸 신문을 넘겨야 했다’며 ‘네 칸 짜리 고바우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를 이루었다.’고 노래했다.

 

김성환과 고바우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했다. 유신독재와 군사정권 하에 잃어버렸던 풍자와 비판의 정신을 살아남게 했다. 그리고 고은 시인이 고백한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의 시대를 이루’기 위해 권력과 싸웠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의 웃음을 짓기도 했고, 그가 싸워주는 것에 대해 위안의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사이 김성환은 각종 필화 사건을 겪어야 했다. 검열에 의한 삭제와 정정은 수백 차례였고, 즉결재판과 벌금형에서부터 괴청년들의 미행, 정보부 요원들에 의한 취조, 이민이나 가라는 공갈 협박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1963년 AP통신이 ‘말을 함부로 못하게 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군사정부의 언론탄압 소식과 함께 고바우 만화를 소개한 후로는 그 강도가 더욱 심해졌다. 1973년 산케이신문은 고바우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토픽으로 전하기도 했고, 이후 ‘고바우 영감은 살아있다’는 기사를 통해 김성환의 건재를 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성환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갔을 때는 세계의 외신기자들이 김성환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김성환은 그렇게 14,139건의 사건사고를 소재로 고바우라는 만화를 그렸다. ‘독재라거나 민주주의의 제한이라거나 하는 것이 싫을 뿐’이라는 이유로 누구보다 용감하게 오늘의 우리 사회를 만들어 냈다.

 

 

 

 

 

 

“신문 연재를 그만두고 2001년쯤 이곳(분당의 화실 겸 자택)에 왔어요. 지하는 꽤 큰 공간인데 거기서는 작은 그림을 그려요. 2층에 작은 작업실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서는 큰 그림을 그리죠. 세밀하게 그리려면 큰 데가 편하고, 크게 그리려면 작은 데가 편해요.” 김성환의 최근 작업실은 그렇게 나뉘어 있었다. 100여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지하실은 앉은뱅이 책상이 놓여있는 작업실이자 작은 갤러리였고, 개인박물관이자 수장고였다. 책상 위에는 현재 작업 중인 A4사이즈의 파스텔화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누군가에게 팔린 그림이 포장되어 있었다. 벽면에는 개인소장용 작품 10여 점이 걸려 있었고 최장수 연재만화를 증명하는 인증서와 각종 기념사진도 있었다. 철제로 된 옷장 크기의 함에는 그간 그렸던 각종 만화의 원고가 보관되어 있었고 유리장에는 옛 것으로 보이는 각종 물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작업 중이던 그림과 벽에 걸린 그림에 대해 설명하던 김성환은 유리장에서 화첩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김환기, 김용환, 이상범, 김승옥, 정현웅 등 5, 60년대 활동하던 작가들과 이현세, 허영만, 이두호 등 요즘 활동하는 작가들의 원화가 수 백장 들어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장편만화의 원화 한 페이지가 김성환의 품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사 수집가로서도 명망이 높은 그의 수집 품목들을 보노라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세계적인 우표수집가로 1986년 스웨덴 국제우표전에서 대금상을 받기도 했다. 우편봉투에 그림을 그려 유명 화가들과 서신을 주고 받은 것을 ‘까세’라고 하는데 김성환은 40여 년간 150여 명의 화가들과 까세를 주고 받았고 이를 <나의 육필 까세집>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어 내기도 했다.


 

 

 

유리장에는 소문과 목록으로만 접했던 각종 고서적들이 세월의 풍파를 견딘 당당한 모습으로 책 등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 한 켠으로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질의 만화책이 있었다. <슬램덩크>로 유명한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를 극화한 <배가본드>였다. “누가 추천해줘서 봤어요. 고증에 철저를 기한 모습이 좋았어요. 우린 이런 게 좀 부족해요. 이순신이고 거북선이고 그렇게 좋아하면서 조선 수군 옷은 왜 다 일본에 가 있어요.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그걸 또 제대로 후손들이 써야죠.” 2층 작업실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한국전 이후의 남루한 초가집을 묘사한 그림이다. 토방 마루 밑에 아무렇게나 벗고 들어간 고무신이 놓여 있고 창호지에 비친 여인네가 아이에게 젓을 먹이고 있다. 그런데 캔버스 옆쪽으로 놓인 작은 선반에는 진짜 고무신이 놓여 있었고 50년대의 서울 풍경과 도심의 초가집 사진이 놓여 있었다. 김성환은 그렇게 역사를 수집하고 후대가 보지 못한 당대의 사실과 한 때의 시간을 그림으로 살려내고 있었다.

 

 

 

 

 

“만화를 오래 그렸다고 회화적 역량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고바우를 넣어서 그렸더니 만화 같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럼 캐릭터 없는 거 사 가라고 그래요(웃음).” 김성환은 시사만화나 아동만화에서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동양화와 서양화 개인전을 11회 열었고 지금 12회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풍자와 비판이라는 시사만화의 세계에서 살던 이에게 동심과 기지라는 아동만화의 세계를 바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다가도 이를 완벽하게 해낸 그의 창작 목록을 대할 때면 필부의 기우가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초충도와 동물화에서는 미물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고 풍속화에서는 풍자적이고 과장된 선묘를 사용하면서도 어떤 기록물보다 사실적으로 당대를 읽어낼 수 있게 하고 있다. 사실 그대로를 비판해왔던 시사만화가의 시선을 만나는 듯 했다. 반면, 풍요로운 삶의 한때를 묘사한 산수화와 서화에서는 먹의 고풍스런 멋과 함께 그림 곳곳에서 해학과 기지 그리고 동심으로 가득한 아동만화가 김성환이 느껴졌다. 재료와 기법에도 제한이 없고, 관습과 형식으로부터도 구애 받음이 없어 보였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화가 김성환의 세계였다.

 

“50년간 고바우를 그렸다고 하니까 아무개는 제가 무슨 성공가도를 달린 것처럼 말하기도 해요. 편하게 언론사 고위직에 앉아서 쓱쓱 만화만 그린 줄 아는 사람도 있어요.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건데요. 그런 걸 인정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그런 데 인색해요.” 김성환은 2007년에 연 ‘고바우 서화 소품전’의 첫 머리에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다’는 의미를 지닌 서화 ‘마부작침(磨斧作針)’을 걸었다. 뭐든지 꾸준히 하라는 뜻이다. 이태백이 냇가에서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려고 하는 노파를 보고 비웃자 ‘중도에 그만 두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 있단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김성환은 그처럼 만화를 그렸고 우리사회에 고바우의 정신이 살아있게 했다. 우표를 모으고 각종 생활사 자료를 모아서 우리의 과거사가 기록으로서 살아있게 했다. 만화로 이룬 업적에 만족하지 않고 ‘만월은 지기 마련’이라며 화업을 멈추지 않아 또 다른 예술의 길을 열고 있다. 77살, 그만큼 열심히 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인간의 삶을 그리다

 

김혜린이라는 이름 석 자가 만화 독자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척이나 각별하다. 흔히 김혜린을 무게감 있는 작품들을 그려낸 작가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작품의 무게란 단지 배경의 규모(스케일)로 재는 것이 아니다. 규모만이라면 지구를 몇 번이고 들어 엎고 쪼개는 작품들이 즐비한 판국이니 말이다. 많은 이들이 김혜린의 작품에 ‘무게감 있는’ 또는 ‘선 굵은’이란 수식어를 적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까닭은, 김혜린 표 작품이 단순히 무대가 되는 배경만 큰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배경 속 시대와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담으면서 그 거센 흐름 속에서 발버둥 치며 자기자신으로서 살아가려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깊이 있게 또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북유럽의 가상 국가 보드니아에서 일어나는 시민혁명을 그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던(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북해의 별>이나, 프랑스 대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를 무너뜨린 혁명력 9일(1794년 7월 27일)의 온건파 쿠데타 ‘테르미도르 반동’을 그린 <테르미도르>, 원명 교체기 중국 대륙에 휘몰아쳤던 권력쟁탈전이 무대인 <비천무>,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던 시기의 부족 전쟁 과정을 그린 <불의 검>에 이르기까지, 김혜린의 작품들은 격렬한 시기와 그 시기를 살아가던 이들에게서 눈을 돌리질 않아 왔다. 게다가 <아라크노아>처럼 우주에 날아가든 <우리들의 성모님>에서처럼 광산촌에서 노동운동을 하든, 어느 시대를 무대로 삼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이루는 사회와 제도 및 권력관계의 흐름을 짚어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흐름에 휩쓸린 이들, 주류에서 벗어난(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 또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흐름을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에게 시선을 맞춘다.

 

김혜린이 그리는 만화의 매력은 바로 이렇듯 그저 단순히 굵직한 역사나 시대를 담아냈다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인생과 그들의 고뇌를 시대 배경 속에 제대로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SF였든 대하 서사든 김혜린 만화의 중심은 인간 사회 그리고 그 사회의 틀거리 안에서 살아가며 좌충우돌하는 인간들이고, 그들을 둘러싼 ‘틀’이었으며, 나아가 ‘틀 안의 인간들’ 사이, 또 ‘틀과 인간’ 사이사이의 부대낌이었다. 김혜린이 독자들로 하여금 큰 이야기를 하는 작가로 각인된 건 이렇듯 단순한 무대와 배경 시대의 크기가 아닌 인간의 삶을 펼쳐놓을 줄 알기 때문이다.

  

 

“큰 이야기를 하는 거요? 사실 뻥을 잘 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독자로서 팬으로서 사랑하는 작가에 관한 편애 가득한 소개. 그래서 지금껏 작품들을 보자면 ‘큰 이야기’를 하는 게 체질인 것 아니냐고 작가 본인에게 물어보니 정작 이렇게 말하며 껄껄 웃는다. “뻥을 잘 치는 거지 무슨……. 딱히 스케일이 크진 않잖아요? 세계를 날아다니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하하.”

 

인간을 화두로 삼는 작가를 만나보았으니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 인간관. 질문을 던지자 인간이 좋기도 하고 좀 징그럽기도 하단다.

“만화 속에선 이상적으로 다뤄진 부분이 있다고 스스로 판단을 해요. 그게 장점이기도 하면서 일종의 한계점이기도 하겠죠. 근데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사람은 딱 이렇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다양한 듯하면서도 비슷하기도 하고. 흔히 말하는 보편성과 개인의 특수성 같이 어우러져 있는 거니까. 그래서 인간이 참 좋기도 하고요. 좀 징그럽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가 있죠, 제 작품엔. 좋은 인간도 나오지만 살다가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도 나오게 돼 있고.”


 

 

 

소프트한 이야기는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김혜린은, 이야기의 규모에 관해선 “성향인 거죠”라며 이렇게 말한다. “작고 아담한 공간에서 아기자기하게 벌어지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들을 하는 것보다 제가 이쪽(대하 서사)에 더 재미를 느낀다는 얘기기도 하고, 이쪽을 더 잘하는 것이기도 할 테고요. 제가 즐거워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는 걸로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렇지 않은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저보다 훨씬 잘하는 분들 많을 텐데. 성향인 거 같아요.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뻥을 많이 쳤는데……. 그 때도 글짓기 같은 걸 하긴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사극적 취향이라든지, 타고난 부분과 자라면서 형성되는 부분들이 자연스레 합쳐진 거 같아요. 굳이 꼭 서사적인 그런 게 아니더라도. 야사 스타일, <전설의 고향> 같은 거 좋아하고. 사극의 탈을 쓰면 좋아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취향이에요. 에픽극(epik : 서사극) 같은 거 극장에 나오면 보러 가거든요. 요즘은 잘 안 나오던데요. 만드는데 자금이 많이 들다 보니까. 그런 거 참 좋아하는데.”

 

그렇다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간들을 주로 그려내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변혁의 시기에 아무래도 좀 더 다양한 군상들이 나올 수 있겠고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겠죠. 평화로운 시기에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낼 재주는 없나 봐요. 좀 더 극적인 시기에 극적인 이야기가 좀 더 잘 떠오르든지, 그쪽에 흥미를 느끼는 게 있겠죠. 사회가 변화되는 시기는 정치적인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것 문화적인 것 모든 분야에서 전환이 일어나잖아요? 그게 흥미 있기도 하고요.”

  

 

“황미나 선생님한테 보낸 5장의 편지, 8장의 답장이 되어 왔죠”

 

김혜린은 1983년 <북해의 별>로 첫 데뷔를 했다. 올해로 데뷔 26년인 김혜린의 데뷔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본래 사범대를 다니고 있던 김혜린은 처음엔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 없이 만화를 취미이자 오락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다 대학 2학년 초 무렵 여성만화가로 앞서 데뷔해 인기를 끌고 있던 황미나(1980년 <이오니아의 푸른별>로 데뷔)에게 편지를 보낸다. 당시 5장을 써서 보낸 편지는 8장짜리 답장이 되어 돌아왔다. “끄적거리는 거 좋아하고 낙서하는 거 좋아해서 그 두 개가 결합한 거죠. 그땐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는데, 취미였죠. 대학에 들어가서 만화가란 것에 관해 생각을 했어요. 대학 1학년 초 정도? 그때 제가 진주에 있었고. 진주에 있으면서 황미나 선생님한테 편지를 보내서, 모르니까 여러 가지 질문을 했죠. 그 분도 그 때엔 꽃다운 나이(주: 황미나는 김혜린보다 1살 연상으로 당시 20대 초반이었음)셨기 때문에 답을 주시고. 제가 올라가서 만나 뵙기도 하고. 원고를 만들어서 가면 출판사 섭외를 해 주시기도 하고.” 이후 서울에 올라오면 밥도 함께 하고 황미나 화실에 묵기도 하면서 화실 분위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 김혜린. 하지만 누구에게 별도로 배운 것은 아니어서 시작은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니까, 앞 뒤 생각할 거 없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까 덤벼든 거죠. 특별히 엄청난 계기라든지 그런 게 있었던 건 아니고요. 자연스럽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용감한 짓이었는지도 모르죠. 특별한 훈련을 한 상태도 아니고. 저 나름대로는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쓰고 그렸던 게 훈련이었는지도 모르고. 굉장히 미숙한 상태로 시작했죠. 요즘 같으면 그런 상태로 시작은 못하겠지.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을 했어야 하겠지만 그땐 80년대 초니까. 그렇게 해서 시작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전형적인 코스도 아니고 제 마인드도, 작품도 들쑥날쑥, 제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편수가 많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저 자신은 즐기면서 한 셈이죠. 결국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하고 싶어서 다들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렇게 치면 운이 좀 좋았던 거고요.” 만약 만화가가 안 되었다면 무엇을 했을까? 사범대를 다니다가 데뷔 후 그만두었던 김혜린은 만화가가 안 되었다면 교단에 섰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계속 즐겼을 것 같단다.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는 김혜린 만화 속의 여성들

 

김혜린의 작품이 여성 독자들의 큰 호응을 끌어냈던 요인 가운데에는 ‘인간’과 더불어 ‘여성’이라는 화두를 작품의 중심에 끌고 들어왔다는 찬사가 한 몫을 했다. 요즘에야 순정만화의 순정(純情)이 여성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장르를 일컫는 일반명사마냥 쓰이고 있는 편이지만 많은 순정만화가 여성이 그리고 읽으면서도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성을 답보하고 있었던 데 비해, 김혜린의 만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매우 당당하게 세상에 자기 발로 서고 맞선다. 다소 수동적인 여성성을 답보하던 <북해의 별>의 에델라이드를 지나 <비천무>의 설리나 <불의 검>의 아라와 소서노, <아라크노아>의 지나에 이르러서는 자기 의지를 분명히 하는 여성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러한 열광에 관해 작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작가의 여성관을 물어보았다.

 

“제가 <북해의 별>을 5년여 했으니까 그 동안에 저 자신도 자랐고요. 어린 나이에 시작을 했으니까 당연히 이런저런 생각들도 자라죠. 바뀐다기보다 좀 자라고, 좀 더 생각하게 되고, 좀 더 느끼게 되고 그런 거 아닐까요? 설리가 여자들이 보기에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을 골고루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은 해요. 소녀적인 것에서 여성으로 가고 있는 그런 단계. 그런 제 느낌들이 여자에게 투영되었겠죠. 계산해서 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저 자신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레 배어드는 것. ‘얘는 이런 애니까’ 하고 계산해서 캐릭터를 만들어 본 적은 없거든요. ‘어떤 인물이다’라고 하면 그 인물의 마음 속을 생각해 보죠. 제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환경이 있잖아요? 그 환경에서 이러이러하게 자랐을 적에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그런 점에서 <북해의 별>은 제가 어린 나이에 시작하면서 소녀적인 그런 게 들어가 있는 거고. <비천무> 같은 경우는 제 자신이 일종의 여성으로서 나타낸 부분이 있을 거예요. 계산서 써서 한 건 아니에요. 맨 처음 시작했다가 그 인물들 자신이 스스로 움직이게 되는 측면도 있어요. 그 안에서 세계가 만들어지잖아요. 제가 그리면서도 ‘넌 이러지 좀 마라~’ 그런 것도 생기죠. 하하. 첫 사랑에 목을 매다니 바보 같은 것! 이러기도 하고. 하하하.”

  

 

고려 말을 배경으로 한 신작 <인월>로 돌아오다

 

 

김혜린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기뻐할 만한 소식 하나. 《팝툰》 10월호부터 김혜린이 11년 만에 새로 시작하는 완전 신작 장편의 연재가 시작된다. 이름하여 <인월>.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 이 소식과 함께 김혜린 인터뷰 소식을 전하자, 작가에게 전해달라며 도착한 편지와 덧글 가운데엔 현재 중단 상태인 <광야>와 <아라크노아>에 관한 ‘피 끓는 외침’이 여럿 있었다. 그 중 가장 눈길이 갔던 건 “<아라크노아>는 할 수 없더라도 <광야>는 뒷얘기를 꼭 그려주셔야 해요. 2권에서 얻어맞다가 끝났는데, 그 뒤를 그리지 않으면 앞으로도 영원히 고문 받고 있을 거 아녜요. 적어도 고문 받는 데선 꺼내주세요”라는 글. 먼저 연재 중단작에 관한 작가의 확실한 답변부터 전하고 신작 이야기를 마저 전하도록 하자. <아라크노아>는 손에서 떠났지만 <광야>는 ‘언젠가는’ 할 예정이라고 한다. <광야>에 관해선 “먹다 남은 가시처럼 걸려 있어요. 아프고 짜릿짜릿한 가시 있잖아요. 잊을 수 없는 가시처럼”이라고 말한다. 김혜린은 그 작품에 관해 잊지 않고 있고 언젠가는 할 거라고, 그걸 거기서 멈추기엔 너무 많이 남았고 너무 많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아라크노아>의 오랜 팬으로서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광야> 팬은 앞으로도 희망을 놓지 않아도 되겠다.

 

 

 

그럼 신작인 <인월(引月)>은 어떤 작품일까. ‘달을 끌어들인다’라는 이번 작품은 고려 말을 배경으로 한 시대 사극으로, (일제시대 배경인 <광야>가 있긴 하지만) 돌고 돌아 드디어 김혜린이 한국의 옛 역사를 건드렸다 싶은 작품이다. 작가 본인은 그런 부분을 인식하진 못했다고 하지만 작품과 함께 북유럽에서 프랑스, 중국대륙과 만주 벌판을 내달렸던 독자들로서는 왠지 모르게 감개가 무량할 법도 한 대목이다.

 

‘인월’은, ‘날은 저물고 달은 뜨지 않아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이성계가 달을 미리 뜨도록 끌어다 놓고 밤늦게까지 왜구가 하나도 안 남을 때까지 싸웠다’는, 요즘 식으로 치면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식으로 통할 법한 황산대첩의 약간 과장된 전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비슷한 것으로 이성계가 바람을 끌고 다니며 싸웠다는 ‘인풍’도 있다. 둘 다 현재까지 지명으로 남았음). 김혜린은 이 단어를 고려 말 청춘극장풍으로 그릴 작품의 제목으로 붙여 ‘무모한 이야기’, ‘불가능한 꿈’ 같은 인상을 담아냈다. 예쁘고 짧으면서도 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작품에 어울린다 여겼기 때문이라고. 구상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했다는 이번 작품에 관해 김혜린은 “이미 끝냈어야 하는 건데 이제 시작을 하고 있다”라면서 출판사(허브)를 많이 애 먹였다고 고백한다. 연재는 씨네21의 만화잡지 《팝툰》에서 진행하며 내년 3월경 단행본 1권을 발행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팝툰》은 10월호를 김혜린 특집호로 꾸며 뒷면을 광고 대신 <인월> 표지를 넣는 특별 편집을 예정하고 있기도 하다.

 

자료에 따르면 이번 작품은 고려 말인 1370년경에서 조선 개국시점인 1392년 무렵까지를 이야기의 시간배경으로, 남서해안 일대와 남원부, 개경 등지를 공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왕조 말기의 어지러운 사회상과 거듭되는 왜구들의 침탈, 신진 사대부들의 개혁 의지 등이 뒤얽힌 가운데 각자 다른 신분과 환경을 가진 젊은이들의 사랑과 갈등, 희망과 절망 등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분량은 4권 가량이 될 것이라고 하니 김혜린 표 대하 서사에 목말랐던 이들이라면 기대를 해 봐도 좋을 듯하다.

 

  

추리소설, 록음악과 국악을 오가는 다양한 취향이 창작의 바탕

김혜린의 작업실에는 여타 만화가들의 작업실과는 또 다르게 다양한 자료와 더불어 만화책들이 책장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장에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장르의 책이 꽂혀 있었다. 국내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소년탐정 김전일>과 <베르세르크>와 <크르노 크루세이드>, <갤러리페이크>, <바람의 검심>, <후르츠 바스켓>과 <이누야샤>가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는 책장을 보고 있노라니 대하 서사물, 시대극, 여성 만화의 대가라는 인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이뿐만이 아니라 김혜린은 “홈즈 전집, 작은 건 (집에) 있는데 애장판 전집이 나왔더라고요. 사서 모셔놓나 어쩌나~”라면서 들떠 하는 추리소설 팬이자 헤비메탈에서 하드록, 가요에서 국악, 트로트까지 종횡무진 오가는 음악 취향까지 지니고 있다. “요즘은 체력이 달려서 콘서트는 못 가요. 스탠딩할 자신이 없어요. 다음날 다다음날까지 후환이 두려워서…. 그래도 지금도 기타리프 들으면 우오오~하는데”라는 모습을 보면 문화 장르를 마음 가는대로 즐길 줄 아는 향유자였다. 그것도 엄청난 잡식. <아라크노아>의 기타맨 블라디미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새삼 실감이 되는 대목이었다.

 

마지막으로, 워낙 오랜만에 작품을 들고 돌아오는 작가인지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독자들에게 복귀 소감을 겸해 한 말씀 전하길 청했다. 다른 누구보다 김혜린이기에 인사말 한 마디가 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오랫동안 인사 못 드려서 죄송스럽습니다. 일단 독자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제 스스로한테도. 왜냐면 제가 만화라는 걸 통해서 그 분들하고 소통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소통할 수 있는 걸 제가 내 드리지 못한 그런 데에 관한 아쉬움은 있죠. 활동을 하건 안 하건 제가 만화가인건 사실이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고. 지금 신작의 행로에 관해선 정확하게 말은 못하겠어요. 연재 건은 말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부분은 아직 확정짓지 못한 부분도 없진 않아요. 그래서 작품이 자꾸 미뤄진 것도 있고. 하지만 전 앞으로 만화가겠죠. 입에 발린 소리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아직 못하겠지만요.”

 

 

 

 

 

허영만 월드에 서다, 태껸에서 관상까지

 

만화가 허영만과 함께 <식객>에 소개됐던 한우설렁탕 전문점을 찾았다.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입구부터 도로 앞까지 자리를 잡지 못한 ‘식객’들이 줄을 서있다. 간판과 입구 곳곳에는 각종 언론 매체에 보도됐음을 알리는 홍보물이 부착되어 있었다. 만화 <식객> 중 이 식당과 요리사를 소재로 했던 부분도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손님들은 맛에 대한 기대감으로 상기된 얼굴이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이 음식점과 요리사의 유명세에 대해, 그리고 이를 촉발시킨 허영만의 만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허영만의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어서 혹시나 ‘급행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종업원은 열 몇 번째라고 적힌 ‘대기표’를 내밀었다. 허영만은 “맛 집은 함부로 소문 내고 다니면 다음에 가기가 힘들어져요”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기 숫자가 두 자리이고 보니 저녁 시간도, 인터뷰 시간도 놓칠 것 같아 조심스럽게 다른 쪽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다. 허영만은 바로 옆에 있는 한우갈비집을 추천했다. 같은 사장이 운영하는 곳이다. 허영만이 등장하자 지배인은 외근 중이던 사장을 불렀고 사장은 한걸음에 달려와 ‘자체 목장에서 직접 기른 한우’의 맛과 특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음식은 경험이고 추억인데 이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면서 만화 <식객>이 지닌 의미와 가치에 대해 평했다. 또, 정부 주도 하에 여러 기업인들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한우의 세계화’에 대해서 허영만의 각별한 관심을 요청하기도 했다.

 

음식을 먹는 중간중간 사람들이 찾아와 허영만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사람들은 각자가 기억하는 허영만 만화를 이야기했다. 중년의 손님은 <각시탈>을 꼽았고, 꼬마 손님은 <날아라 슈퍼보드>를 이야기했다. 얼마 전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됐던 <타짜>와 <식객>을 말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최근 연재작 <>에 대해 논하며 ‘관상을 좀 봐달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허영만은 데뷔 이후 현재까지 색다른 소재를 찾아내 우리 사회의 관심사를 주도해왔다. 태껸으로 민족성을 이야기하고 권투로 의지를 논했다. 야구로 승리에 대해 말했고 자동차로 세계 속의 한국을 주장했다. 말과 화투, 골프, 바둑, 패션, 관상 등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을 그려냈다. 40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대와 세대를 잇고 있었고, 작품 속 공간과 현실 속 공간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그의 세계는 특정된 공간이나 문화사회적 지점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가 서있는 곳, 그의 작품이 이야기하는 곳, 그리고 그의 독자들이 만들어가는 공간이 곳 허영만 월드이고 그 곳에는 한국 만화의 현재가 있었다. 우리가 있었다.

 

 

꼴은 운명이다, 그러나 개척할 수 있다

 

 

 

“옛날에는 어디 가서 만화한다는 이야기를 못했어요. 예비군 훈련 가서도 만화한다고 말 못했죠. 아내도 주변사람들한테 아이 아빠가 만화 그린다는 소리는 안 했다더군요(웃음).” 허영만은 ‘만화가’라는 직업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간혹 만화가의 극존칭처럼 인식되는 ‘화백’이라고 부를 때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고 할 정도다.

 

‘만화가’라는 호칭이 뭐가 모자라 다르게 부르냐는 거다. 그런 그도 문화적 엄숙주의가 드높던 유신시절, 만화를 사회악 중 하나로 치부하며 5월이면 각급 사회단체들이 ‘만화 화형식’을 치르던 때에는 만화가라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고 했다. 데뷔하던 해가 곧 인기 만화가가 된 해였고, 기복 없는 창작 생활로 매 작품마다 부와 명성을 더했던 그도 그랬으니 그 시절의 만화가들은 얼마나 큰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었을까.

 

“환경이 많이 좋아졌어요. 정부도 그렇고 부천시 같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만화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쳐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고 싶다고 해서 그냥 퍼주는 식의 지원이 되어서는 곤란해요. 방법을 알려주는데 최선을 다하고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 지원일 것 같아요. 우리 때는 그런 거고 뭐고 없었어요. 문제는 그렇게 배출된 인재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이 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아요.”


 

  

 

허영만은 늘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만화가다. 그처럼 허영만의 문하에서, 허영만의 화실에서 창작을 배웠던 이들은 허영만을 최고의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다. 만화가라는 자기 형상을 만들어내고 경험된 학습법을 통합적으로 실천해 보이는 허영만의 도제식 교수법은 교육 내용을 분절화시켜 가르치는 학교시스템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왔다. <파이팅 바람이>의 김종한, <기계전사109>의 김준범, <이끼>의 윤태호 등이 허영만의 문하를 거친 만화가들이다. 문하생의 숫자로만 보면 대규모 창작 시스템을 갖춘 여느 만화가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다른 문하생 출신들이 자기만의 개성을 평가 받지 못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하나같이 독자적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허영만의 화실은 단순히 작품을 생산하는 공간으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다수의 만화가들이 현장 교육을 받는 만화학교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허영만은 우리 만화계의 든든한 뿌리이자 여전히 열매를 맺는 나무로 통한다. 이는 정해진 운명처럼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며 ‘만화하는 삶’을 받아드리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화의 길’을 찾았던 허영만의 개척가 정신 때문일 것이다. 

 

“만화가니까 다른 것보다 만화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만화를 그리면 중장년 독자층을 확대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히 아동독자들도 다시 성장하고 있고요. 청소년 독자층이 취약해졌다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청소년을 위한 만화를 그리기는 힘드니까 젊은 작가들한테 기대해 봐야죠.” 허영만은 현재의 작품 배출 시스템을 인력 배출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싶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 같은 역할을 대행해줄 수 있는 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직접 나서는 것이 곧 ‘작품 할 시간을 까 먹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탓이다.

 

 

대중문화계의 믿음직한 타짜, 현재가 아닌 더 나은 미래

 

 

 

허영만 특별전 중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만화입니다. 만화를 그리고 있을 때 제가 행복하고, 현장에 있을 때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있을 겁니다. 좋은 만화라는 건 욕심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만화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라도 탐구욕이 강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봅니다. 저는 만화를 택한 건데, 만화의 산은 하나라고 봅니다. 목표가 정해졌다면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요. 걸어야죠. 쉬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허영만은 딱 두 달 쉬어봤다’더라는 식의 언론 보도가 나간 적도 있어요. 기자가 좀 강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쉴 시간 같은 걸 따로 정해 놓은 적도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하면서 노는 법도 터득 해야죠.” 허영만은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가만 보면 여느 만화가들에 비해 일을 많이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매우 규칙적으로 하고 스스로 정한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보다 많은 양의 결과물을 내놓고 그만한 성과를 인정 받는다.

 

“화실에서 밤새 일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밤을 새워 일하면 제 일을 받아서 그 다음에 일을 해야 하는 문하생들은 이틀 밤을 새워야 해요. 제 일이 끝나면 그 다음에 그 친구들이 일을 해야 하는데 무슨 힘이 있어서 그림을 그리겠어요. 그렇다고 선생이 일하는데 쉬고 있을 수도 없을 거고. 안되겠다 싶었죠.”

 

 

 

허영만은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하는 만화를 주로 창작했다. 연재는 매일 또는 매주 정해진 분량의 작품을 마무리해야 한다. 인쇄 시간을 지켜야 하는 이 세계에서 마감을 지키지 않는 것은 스스로 경쟁력을 깎아 먹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만화가는 이 마감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건강을 깎아 먹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과 자신을 돕는 문하생들의 건강을 깎아 먹었던 허영만은 이런 시스템이 좋은 작품을 담보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만의 시스템을 개발한다.

 

허영만은 사전조사를 통해 자신이 스토리를 쓰고 칸 연출을 한 뒤, 데생(밑그림)을 한다. 데생 원고와 사전조사를 통해 얻은 각종 배경자료들을 문하생에게 넘기고, 문하생들은 펜터치와 잉크칠, 스크린톤 작업 등을 한다(최근에는 이 같은 작업을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처리하기도 한다). 이를 자신이 직접 검수하고 신문이나 잡지사에 전달하면 그 날의 작업 분량이 마무리 된다. 즉, 자신이 언제 데생 원고를 넘기느냐에 따라서 문하생들의 작업 시간이 정해지고, 자신이 다음 작품을 준비하거나 문하생들이 스스로의 역량을 넓히기 위한 학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허영만은 이 같은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처음에는 직장인처럼 정시 출퇴근을 생활화했다. 이후로는 자신이 새벽 4시에 화실에 출근하기도 했다. 스토리를 쓰는데 2시간, 데생을 하는데 2시간을 보내면 8시가 된다. 데생 원고를 문하생들의 책상에 올려놓고 잠시 오침을 하기도 하고 각종 사무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10시에 출근한 문하생들이 작업에 들어가면 신문이나 잡지사에 넘겨야 할 원고가 오후 3시 전에 완성된다. 자신은 이후 시간에 대외 활동을 하기도 하고 취재를 나가기도 한다.

 

“재주 있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재주가 가만있지를 않아요. 발견됐을 때 집중해서 잡아둬야 해요. 주변에서도 재주가 발견되면 강하게 가르쳐야죠. 아니면 금방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요. 어떻게 보면 재주나 기회나 매 한가지죠.” 허영만은 재주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노력만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맞춰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짜>에서 보여줬던 화투 사기꾼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다. 밑바닥 삶을 미화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치 장인처럼 기술 연마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어느 작품에서보다 선명하게 묘사됐다. 그것이 허영만이 생각하는 삶에 대한 태도였을 것이다.

 

 

맛과 멋을 찾는 식객, 여전히 탐험하기 바쁘다

 

 

“얼마 전에 원수연 작가를 만났는데 몇 살까지 할 거냐고 묻더군요. 일하는데 나이가 정해진 건 아니죠. 벌써 그런 걸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됐나 싶어 서운하기도 했는데, 너무 오래한다고 하면 욕 먹을 것 같아서 70살까지만 한다고 했어요. 그래 놓고 보니까 덜컥 겁이 나는 거예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뱉은 말 속에서도 허영만은 자신의 창작 수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10년 남짓. <타짜>, <사랑해>, <식객>, <>로 이어졌던 그 동안의 작품 스타일로 보면 두 세편 가량의 장편 만화를 연재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셈이다. “요즘 정말 바빠요. 그래서 바쁘다는 소리는 안 해요. 대신 남들이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알 수 있게 연재를 많이 하죠. 하루에 10페이지 가량 그려요. 하루에 만화 10페이지 그리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간간히 놀러 다닌다는 기사가 나가고 그래서 곤란할 때도 많아요.” 허영만은 ‘놀 줄 알아야 새로운 만화를 할 수 있다’며 ‘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중 한 명이다. 일 할 때는 집중력 있게 하고 쉴 때도 일에 맞춰서 전략적으로 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화 같은 소재’가 아니라 ‘색다른 소재’를 만화화하는 허영만의 작품세계는 모두 그가 ‘쉼’ 속에서 일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취재와 여행뿐만 아니라 취미생활이나 대외 활동에서도 허영만은 만화 소재를 찾았다.

 

 

 

“<식객>을 하니까 전국 각지에서 연락이 와요. 특히 지방자치단체에서 고장 특산물을 소개해달라거나 관련된 축제를 한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요청을 해요. 그런데 이걸 다 받아 줄 수가 없어요. 다른 계획도 중하지만 제 계획이 있어요. 다른 계획에 맞추면 제 계획이 엉클어져요. 이걸 다시 짜 맞추려면 남은 시간이 모자라요. 가까운 친척 어른이 음식박람회 홍보대사를 맡아 달라는 거예요. 고향에서 하는 터라 꼭 해야겠다 싶으면서도 사정을 이야기하고 ‘한번 봐달라’고 했어요. 이해해줘서 너무 고마웠죠. 그런데 그 뒤 세계요트축제 홍보대사를 하게 됐어요. 계획에 있던 거였죠.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무거울 수 없더라고요. 한때 야구를 즐기고, 골프를 즐기고, 산을 즐기고, 음식을 즐기고 하다못해 도박을 즐겼던 것도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요트는 개인 소득 3만불 시대가 오면 대중화 된다고 해요. 작은 걸 하나 사서 지인들과 경험해 보고 있어요. 무슨 호화유람선 같은 것은 아니고 몇 만원 들고 여럿이 모여서 몇 일 나갔다 오는 정도죠.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거예요.” 그러면서도 요트만화를 준비하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인터뷰 때마다 못 지킬 약속을 하는 것 같다’면서 즉답을 피했다. 준비하고 있지만 작품화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라는 뜻이다. 어느 중년 만화가가 최근 젊은 만화가들에 쓴 소리를 했다. ‘우리들처럼 젊은 만화가들이 노력하고 있는지 의심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허영만은 그렇게 노력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최고에 대한 예우, 세상은 그렇게 커지는 것

 

“오래 전에 야구기자들 모임에 간 적이 있어요. 선동열이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때였어요. 억대 연봉 문제로 이야기들이 많았죠. 구단 예산은 정해져 있는데 한 사람이 너무 많이 달라고 하니까 다른 선수들 연봉이 줄어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자들이 부정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어요. 저한테 의견을 묻더군요. 그랬죠. ‘선동열을 데리고 있는 구단에서 예산이 적으면 올려야지, 다른 선수 것을 빼서 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그건 ‘선동열의 문제가 아니고 구단의 문제’라고. ‘왜 선수를 욕하냐’고.” 허영만은 늘 ‘8홉론’을 이야기한다. 병을 꽉 채우면 결국 넘치게 되니까 적당히 여유를 둬야 한다는 것이다. 1등보다는 2등이나 3등으로 사는 편이 삶에 긴장과 여유를 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최고는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하고 그런 것에 인색하거나 터부시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최고는 최고의 몸값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 분야를 이전보다 크게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 것에 대한 기준이 몸값인데 여기에 인색하면 그 분야가 발전하지 못해요. 그래야 후배들도 들어오고 열심히 할 이유가 생기죠.”

 

허영만은 한국 대중문화의 중심에 서있다. 숱한 작품이 영상화됐던 것처럼 여전히 다수의 작품이 대기 중이다. 최근에만 해도 영화 <식객2>가 촬영을 시작했고 드라마 <식객> 세트장을 이용해 꾸민 전통음식점 ‘운암정’이 작품 속 요리를 주 메뉴로 영업을 시작했다. 허영만을 선장으로 1년 간 전국 해안선을 요트로 일주하는 ‘집단가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고, ‘허영만 와인’으로 명명 된 LG상사의 트윈와인 시리즈도 출시됐다. 허영만은 이 같은 대외 활동을 통해 얻은 수익을 함께 나누는 것에도 인색하지 않다. 사회적 기부 활동에도 적극적이고 우리 만화계의 원로들을 챙기는 일에도 선뜻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와인 판매를 통해 얻는 수익으로 ‘허영만 만화상’을 제정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허영만의 작품을 앞세운 콘텐츠가 출판만화에서 영상 소재로 확장되고 각종 문화상품을 만들어내더니 이제는 허영만 자체가 콘텐츠가 되고, 허영만에 대한 신화가 곧 가치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 갈수록 위대해지는 만화가의 힘과 역할이다. 허영만의 키만큼 한국만화도 커져간다. 그래서 자꾸 만화가 허영만을 본다. 세상이 허영만을 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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