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月刊朝鮮_경제개발 50년

醉月 2011. 1. 27. 08:43

경제기적의 과거와 미래를 정리하며…

글 : 崔秉默 편집장

  2011년은 1961년 대한민국이 경제개발계획을 만들어 실행에 옮긴 지 꼭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1년이 어떤 해입니까. 50이 넘은 제가 젖먹이 때이니 정말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태어난 지방 중소도시 중심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계란 프라이를 도시락에 얹어 오는 학생이 한 반에 1~2명이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당시엔 어린 마음에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입니다. 학교에선 미국이 원조한다는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나눠 먹던, 뻑뻑한 그 빵 하나 먹는 것을 침 흘리며 보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대한민국이 50년 만에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의 한 사람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육박합니다. 정말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됐습니다. 몇 배라고 따지기도 벅찹니다. 아프리카 개발도상국들은 지금 ‘코리아 모델’을 배우려고 난리입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전쟁의 상처를 씻고 세계 무역대국 10위권에 들어간 유일한 나라입니다. 이게 다 누구의 덕입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진두에서 지휘하고 부추기고 앞장선 사람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 몸과 가족을 생각하기 이전에 나라를 생각하며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사람들입니다.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최종현….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월간조선>은 경제개발계획을 만든 지 반세기를 맞으면서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주역들을 살펴봤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세계의 변방(邊方)에서 ‘개발도상국’이란 딱지를 아직도 떼지 못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몇몇 분은 이승에 있지 않지만 이들의 공로를 점검하고 되새기는 일을 더이상 늦췄다가는 우리의 미래도 없습니다.
 
  그 주역들의 공로를 본인의 육성으로, 아니면 오랫동안 모셨던 사람들의 입을 빌려 정리해 보았습니다. 약간의 공치사나 과장이 있을지 모르지만, 후진국 대한민국을 선진국 문턱에 올려놓은 감격의 결과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앞으로 우리의 50년을 책임질 주인공들은 누가 돼야 할까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을 풀 선구자들을 지목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그 분야만은 어렴풋하나마 짐작할 만합니다. 바닥을 드러낸 자원을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 기존 에너지원의 효율을 높일 고도 기술, 우리의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할 신기술 등이 되지 않을까요.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이 선정한 5대 신산업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도전분야와 도전자들을 알아봤습니다. 이들은 오늘도 대학에서, 연구소에서 밤을 잊은 채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의 노력이 끊어진다면 대한민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또 주저앉고 말지도 모릅니다. 첨단 과학의 세계라서 얼마나 쉽게 접근했는지 두렵긴 합니다만 앞으로 이런 분야에서 이런 과학자들이 열심히 뛰어 대한민국의 미래 식량을 수확할 것이란 관심과 기대를 갖고 성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내가 본 朴正熙

시행착오로부터 배운 경제대통령

글 : 金正濂 전 대통령 비서실장
정리 :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 1964년 장기영 부총리 때 수출지향적 공업화로 방향전환
⊙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일임, 회의에서는 참석자 의견 경청 후 결단 내려
⊙ 결재와 회의에 시간 낭비 안 해, 사색시간 많이 가지면서 국가발전 위한 ‘그랜드 디자인’ 힘써
⊙ 박 대통령, 현실과 괴리 있는 경제개발계획에 큰 의미 안 둬

金正濂
⊙ 1924년생.
⊙ 일본 오이타(大分)고등상업학교 졸업. 美클라크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재무부 이재국장,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 재무부 차관, 상공부 차관,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주일대사 역임. 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
⊙저서 : <한국경제정책30년사> <아, 박정희> 등.
광양만 공업단지 예정지를 해상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내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1962년 5월 17일, 신당동에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였다. 5·16 당시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는 그해 10월 귀국 후 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5·16 주체들과는 일면식도 없었던 내가 중앙정보부에 차출된 것은 천병규(千炳圭) 당시 재무부 장관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1962년에 접어들면서 유원식(柳原植) 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은 내게 통화개혁 실무작업을 맡겼다. 유 위원장은 실제 통화개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참고작업이라고 둘러댔다. 내게 그 일이 맡겨진 것은 1953년 제1차 통화개혁 작업에 참여한 경험 때문이었다. 당시 혁명정부가 통화개혁을 추진한 것은 퇴장(退藏)되어 있는 자금을 끌어내 산업자금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첫 만남 자리는 바로 통화개혁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송요찬(宋堯讚) 내각수반, 천병규 재무부 장관, 유원식 최고회의 재경위원장 등이 있었다.
 
  나는 산업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통화개혁을 할 필요가 없고, 만일 한다면 충분한 사전 준비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때까지 금융기관의 고식적 자세, 담보 위주 경영의 타성(惰性) 등을 열거하면서 획기적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해야만 하는 국가적 견지에서 볼 때 통화개혁과 같은 극약 처방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제1차 통화개혁 때의 경험을 들어 미국 원조당국과의 사전 협의를 통한 원조물자 비축과 사후의 원활한 도입이 통화개혁 성공의 필수 전제라고 역설했다.
 
  이 자리에서 다음날 통화개혁에 사용될 새로운 은행권이 부산항에 들어오며, 법령, 공문서, 해설서 등 제반 인쇄 등을 감안해 그해 6월 10일자로 통화개혁을 단행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단순히 통화개혁을 위한 참고작업으로만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6월 10일 제2차 통화개혁이 단행됐다. 하지만 제2차 통화개혁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군사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던 미국이 협조하지 않았고, 통화개혁으로 기대했던 만큼 돈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사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시행착오로부터 교훈을 얻은 박 대통령
 
군사정부가 단행한 제2차 통화개혁 직후 은행으로 몰려든 시민들. 박 대통령은 통화개혁 실패 등을 겪으면서 경제에 대해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통화개혁엔 실패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 교훈을 얻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혁명공약에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시달리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립경제 건설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구체적인 정책수단이 없었다. 경제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주위의 자문교수 등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아이디어를 들고 오면 솔깃해했다. 통화개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퇴장자금을 끌어내 산업자금화한다는 정책도 그래서 나왔다. “좋은 위락시설을 만들어 주한미군(駐韓美軍)이 가진 달러를 벌어들이자”는 얘기에 워커힐 호텔을 만들었고, “자본주의의 꽃인 증권시장을 육성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증권거래소를 만들었지만(1962년 종래 공영제였던 증권거래소를 주식회사로 개편한 것을 말함, 증권파동 이후 1963년 다시 공영제로 전환-기자 注) 그런 것들이 모여 ‘4대(大) 의혹사건’이 됐다.
 
  박 대통령은 5·16 혁명 이후 2년 반 동안 그런 시행착오들을 겪으면서 일방의 얘기를 듣고 설익은 아이디어를 정책화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 후 박 대통령은 정책을 결정하기까지는 전문가들의 다양한 조언을 얻어 신중하게 결정하되, 일단 결정되면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도 대학교수들 대신에 1·2공(共) 시절의 경제엘리트들을 쓰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도 이때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박 대통령은 살벌하던 군정(軍政)시대에 군인들 앞에서 할 얘기를 하고, 또 내가 지적한 문제점들이 나중에 현실화되는 것을 보면서,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수출중심 경제로의 전환
 
경제정책을 수출지향형 전략으로 전환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일(韓日)국교정상화 교섭이 한창이던 1964년 3월 나는 대일(對日)청구권 대표위원으로 임명돼 일본으로 건너갔다. 실제 임무는 비(非)공식적으로 어업협력자금 및 선박관계자금 교섭 협상을 벌이고 있던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도쿄(東京)에서 1개월간 같이 지내면서 우리는 시간 나는 대로 우리 경제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1953~54년 미국 뉴욕연방준비은행에서의 연수 및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설요원으로 1년간 미국에 머물렀고, 1958년에는 미 클라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미국경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 관해서는 1951년 한국은행 도쿄지점 참사로 1년간 근무했고, 한일회담 관계로 1960년에 2개월, 그리고 1964년에 1개월여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경제의 부흥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경제 관련 서적을 많이 수집하고 읽어 볼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소위 ‘산업정책’에 의해 수출지향적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 부문, 즉 자원의 소모량이 적고 외화가득률이 높으며 수출에서 거의 장벽이 없는 고도공업부문에 치중해 경제발전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나는 장기영씨에게 “우리도 일본처럼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해야 경제가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어느날 장기영씨는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겠으니,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메모 형식으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나는 내가 생각해 온 바를 정리해 장기영씨에게 주었다.
 
  1964년 5월 9일 제3공화국 초대(初代) 내각이었던 최두선(崔斗善) 내각이 총사직했다. 그날 오후 늦게 장기영 사장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入閣)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면서 당면한 주요 경제문제와 그 대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요약해 메모로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IMF(국제통화기금)는 매년 우리 정부와 연차(年次)협의를 할 때마다 수입대체산업에 대한 각종 보호정책의 시정, 즉 환율과 금리 현실화, 수입자유화, 관세율 인하 등 ‘시장자유화 정책’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관련 업계의 반발과 우리 산업에 미치는 영향 등을 생각해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나는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시장자유화 정책을 단행해야만 우리 산업의 체질개선과 국제경쟁력 강화가 이루어져 수출입국(輸出立國), 공업입국(工業立國), 더 나아가 지속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은 메모를 작성해 장기영씨에게 주었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
 
수출 1억 달러 목표를 달성한 박충훈 상공부 장관.

  5월 11일 정일권(丁一權) 내각이 발족했다. 장기영씨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이틀 후 장기영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자신이 수출지향적 공업화의 필요성, 특히 시장자유화정책의 중요성, 긴급성과 함께 이를 위해서는 경제팀의 일사불란한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해 박 대통령과 정일권 총리의 동의를 얻었으며 경제팀의 인사(人事)에 관한 전권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후 장기영 부총리는 재임 3년 동안 재무부 장관만 5명이나 교체할 정도로 힘을 쓰면서 자유화정책을 밀어붙였다.
 
  그해 6월 나는 장기영 부총리의 천거로 상공부 차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상공부 장관은 박충훈(朴忠勳)씨였다. 박 장관은 연간 수출목표 달성,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책정된 공장의 순조로운 건설, 각종 인허가 및 승인행정에 따른 부조리 제거를 3대 목표로 내걸었다. 나는 박충훈 장관을 보필해 수출입 링크제 폐지, 수입쿼터 품목의 대폭 폐지 등 수입자유화, 수출특화산업 지정 등을 추진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수입대체 전략에서 수출지향 전략으로의 전환은 박정희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 것이라기보다는, 국제시장의 흐름에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단, 박정희 정부가 그런 흐름을 놓치지 않은 것은 평가할 만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수출지향적 공업화로의 전환은 박정희 정부가 확고한 의지를 갖고 추진한 것이었지, 시장의 흐름에 피동적(被動的)으로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의 일본·만주 경험
 
  사실 자주·자립을 강조하고 통제에 익숙한 군인들이 정권을 잡을 경우, 수입대체 정책과 통제경제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제3세계 국가의 군사정권들이 대부분 그런 길을 걸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뿐 아니라 당시 경제학자·관료들은 1930년대 전(全)세계적인 블록경제, 일제말(日帝末) 전시(戰時)경제 아래 형성된 통제경제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도 건국 이래 1960년대 초반까지 통제경제 정책을 썼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지향 전략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집권 초기 시행착오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제하의 경험을 통해 박 대통령이 일본의 경제발전 과정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도 근대화 초기에는 생사(生絲)와 차(茶) 수출부터 시작해 경공업-중화학공업의 단계를 거쳐 일제 말에는 미국 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박 대통령은 일제하에서 사범학교 및 일본육사(陸士) 교육, 폭넓은 독서를 통해 이러한 일본경제 발전과정을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대 초, 만주에서는 기시 노부스케(나중에 일본 총리 역임), 시이나 에스사부로(후일 일본 외무장관 역임) 등 일본의 혁신관료들이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고 있었다. 이때 허허벌판에 공장들이 올라가는 모습을 본 박 대통령은 후일 중화학공업을 건설할 때 ‘우리라고 못할 것이 있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1960년대 중반 실시한 ‘시장자유화’는 오늘날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얘기하는 ‘시장자유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정책은 자유경제도, 통제경제도 아닌, ‘박정희식 정부주도 경제’였다. IMF나 IBRD(세계은행)에서 요구하는 자유주의 경제모델로는 후진국 경제가 ‘테이크 오프’(Take-off·이륙)할 수 없었다. 경제가 도약할 때에는 정부가 이끌어 줘야 했다.
 
  예를 들어 경쟁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독점(獨占)이나 과점(寡占)에 반대한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과 자금으로 산업을 일으키는데,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고 자유경쟁에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와 후일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던 오원철(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우리 산업이 국제경쟁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문을 열겠다”는 생각이었다.
 
 
  수출 1억 달러 돌파의 감격
 
산업체부설학교에서 공부하는 여공들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정부가 수출지향 전략으로 전환한 1964년 11월 30일, 우리나라의 수출은 1억 달러를 돌파했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은 11월 초부터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유럽 장기출장 중이었다. 그 며칠 전부터 11월 말이면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밤 11시30분 경 “드디어 1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두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나는 이 소식을 지금 당장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할지 여부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부속실 직원에게 “상공부 차관인데, 수출 관계로 대통령께 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고 하자, 박 대통령을 연결시켜 주었다.
 
  ―각하, 수출 1억 불(弗·달러)을 달성했습니다.
 
  “정말이오? 1억 불, 1억 불을 달성했단 말이지…. 1억 불, 1억 불…. 정말 수고했소. 상공부 직원들에게 수고했다고 전해 주시오.”
 
  박 대통령은 감격에 겨워 “1억 불, 1억 불”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날을 기념해 11월 30일을 ‘수출의 날’(지금은 ‘무역의 날’)로 지정했다.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자 자신감이 붙은 박정희 대통령은 “내년 1월부터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달 열고, 내가 직접 회의를 주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1979년 서거(逝去)할 때까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이 회의를 주재했다.
 
 
  수출진흥확대회의
 
  초기에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청와대 본관에서 상공부 관계관들과 무역협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얼마 후 수출진흥확대회의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외무부·재무부·상공부·농림부·교통부 등 유관 부처 장관, 수산청·해무청(海務廳) 등 유관 청장, 수출조합장, 방직협회장 등 업종별 단체장, 시중은행장 등이 참석하는 회의로 확대됐다.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국회 상공·농수산·교통위원장도 참석했다. 평가교수단이 배석(陪席)했다.
 
  먼저 상공부에서 품목별 지역별 공관별 수출실적을 보고하면, 업계 관계자들이 애로사항이나 건의사항을 이야기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처음에는 대통령과 감독기관 장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하지만 한번 말문이 터지자 기탄없이 애로사항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로 금융관련 사항이 많았고, 열차수송·해운 등 물류(物流)관련 사항도 빠지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들이 발언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꼼꼼하게 메모했다. 그들의 발언이 끝나면 박 대통령은 관련 부처 장관에게 답변을 지시했다. 그 자리에서 답변하지 못할 경우, 장관들은 “다음 번 회의 때 보고드리겠다”고 말미를 청했다. 장관이 답변을 내놓지 못할 경우에는 배석한 차관, 심지어 국장·과장이 답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관이나 은행장들은 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관심을 체감하자, 문제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업계 관계자들도 대통령이 임석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자 더욱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지금도 인상적인 것은 그 자리에서 업계 관계자들이 자기 회사의 이익을 위해 무엇인가를 건의하는 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업계 전체의 이익을 위해 발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끔 경제부처 공무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 식사를 같이 하거나, 막걸리 파티를 했다. 가장 많이 초대받은 부처는 상공부였다. 이 자리에는 상공부 내 상역(商易) 부문과 공업 부문 국·과장들이 각각 5~6명 정도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발언했거나, 청와대에 불러 식사했던 공무원들의 이름을 꼭 기억했다. 부처 초도순시 등에서 그들과 마주치면 박 대통령은 “○과장, 요즘 열심히 하고 있지?”라며 격려했다. 대통령의 관심에 감격한 그들은 물불 안 가리고 뛰었다.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
 
1969년 10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는 김정렴 실장.

  1969년 10월 20일, 내각 총사퇴로 상공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나는 청와대로 불려갔다. 박 대통령은 내게 “비서실장으로 발령 낼 테니 그리 알고 열심히 일해 달라”고 했다. 한국은행·재무부·상공부 등 경제부처에서만 일해 온 내게는 뜻밖의 하명이었다. 나는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전혀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박 대통령은 “경제야말로 국정(國政)의 기본이야. 경제가 잘돼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무장공비 침투 등 긴박한 안보상황을 설명하면서 “나는 국방과 외교안보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어 경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으니, 경제문제는 비서실장이 대신 잘 챙겨 달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경제현안으로 수출증진과 농업개발을 강조했다.
 
  이후 나는 9년3개월 동안 비서실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는 오일쇼크를 이겨 내면서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리더십과 관련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사’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지명하는 국방·내무·법무·무임소장관(지금의 특임장관) 을 제외한 나머지 장관은 비서실장에게 복수(複數)로 추천하도록 했다.
 
  장관 추천시(時) 기준으로 삼은 것은 ▲해당 분야에 필요한 실력을 가졌는지 ▲정치적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 ▲평판이 깨끗한지 등이었다. 병역이행 여부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 밖에 재산관계나 사(私)생활 등은 따지지 않았다.
 
  비서실에서 추천한 장관 후보자는 90% 정도 받아들여졌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진흥확대회의나 월례경제동향보고회의 등을 통해 장관 후보자의 자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 추천이 원칙이었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단수(單數) 추천을 하기도 했다. 1975년 최규하 (崔圭夏) 내각 출범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은 “특히 의료보장제도 실시, 노사(勞使)문제, 근로자 권익옹호와 처우개선 등 어려운 현안들을 안고 있는 보건사회부 장관 인선에 각별히 신경을 써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정치·경제·사회적 식견이 높고, 넓고 균형 잡힌 시야를 가지고 있으며, 치밀하고 조직적이며 추진력이 강한 인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수석비서관 및 장관 몇 사람과 상의해 본 결과 당시 국회의원이던 신현확(申鉉碻)씨를 단수로 천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훌륭한 적임자를 추천했다”며 기뻐했다.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일임
 
농수산부의 업무보고. 박정희 대통령은 각 부처 초도순시 등을 통해 인재를 발굴했다.

  박 대통령은 차관 이하의 인사는 각부 장관에게 일임했다. 서기관 승진부터 차관까지의 인사권을 확실하게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관의 영(令)이 섰다. 장관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면 출세가 보장되므로 공무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이렇게 장관에게 인사권을 보장하는 대신, 밑에서 잘못이 있으면 함께 책임지도록 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비롯해 대통령이 주재하는 각종 회의와 초도순시는 박 대통령이 인재를 발탁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런 자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공무원들은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주요 청장의 경우는 박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징세(徵稅)를 담당하는 국세청장, 밀수를 단속하는 관세청장, 물류를 관장하는 철도청장과 해운항만청장, 노사분규를 담당하는 노동청장 등이 그러했다. 여기서도 박 대통령의 관심사항을 엿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번 능력을 인정한 사람은 오랫동안 썼다. 최형섭(崔亨燮) 과학기술처 장관은 7년6개월,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8년, 김인환(金寅煥) 농촌진흥청장은 11년5개월(1980년 6월까지 근무해 총 재직기간은 12년1개월), 손수익(孫守益) 산림청장은 5년8개월 동안 재직했다.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는 박 대통령 시절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9년3개월 동안 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었다. ‘잘살아 보자’는 비원(悲願)은 강했지만, 경제전문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경제대통령’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기간 중의 경제성적표를 보자. 1인당 GNP는 1961년 89달러에서 1979년 1510달러로 17배 늘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던 1962년에서 1979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9%였다. 산업구조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1년 39.1%이던 것이 1979년 19%로 줄어든 반면, 광·공·건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에서 38.8%로 늘어났다. 절대빈곤층은 1960년 48.3%에서 1980년 9.8%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한국경제는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했던 중화학공업에 의존해 먹고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대의 사고(思考)를 뛰어넘는 ‘그랜드 디자인’에 능했다. 국도(國道)조차 변변히 포장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고속도로를 생각했고, 경공업을 기반으로 갓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중화학공업 건설을 생각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사색(思索)하는 인간’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심하게 국정을 챙겼지만, 회의나 서류결재 등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사색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고, 덕분에 국가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도록 하시오”
 
  첫째, 박정희 대통령은 회의를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주일에 네 번 정도 중요한 회의를 열었다. 회의 때면 사전에 관련 안건을 읽고 그 내용을 숙지한 후 회의에 나왔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을 미리 얘기하지 않았다. 장관들에게 자기 주장을 말하게 하고, 본인은 메모만 했다. 귀로 듣는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컨센서스가 이루어지면 결정을 내렸다. 때문에 회의는 중구난방(衆口難防) 식으로 흐르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운영되었다. 대개 2시간 정도 회의를 하면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1977년 6월 13일 부가가치세 도입 관련 당정회의 때였다. 부가가치세는 1971년부터 6년여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그해 7월 1일부터 도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입시기가 다가오자 중소상공인들을 중심으로 반발 움직임이 일었다. 이듬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던 공화당에서 반대가 심했다. 국무회의에서는 시행연기론이 강력히 제기됐다.
 
  당정협의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나와 김용환(金龍煥) 재무부 장관, 최각규(崔珏圭) 농수산부 장관은 찬성했다. 장예준(張禮準) 상공부 장관은 반대였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연기를 주장했다. 7년 전 재무부 장관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을 선도(先導)했던 남덕우(南悳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까지 연기를 주장했다. 회의의 흐름은 연기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환 재무장관에게 “부가가치세를 지금 꼭 도입해야 하느냐”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다. 김 장관은 부가가치세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단안을 내렸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도록 하시오.”
 
  둘째, 대통령이 직접 결재하는 서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하루에 500페이지가 넘는 서류를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미국 역사에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제조업은 영원하다
 
  박 대통령 시절 많은 문제는 차관회의에서 결론이 났다. 중요한 현안들만 국무회의에 올라갔다. 주요 현안에 대해 보고할 때에는 구두(口頭)보고를 많이 활용했다. 내가 대통령께 먼저 요점을 보고하면, 배석한 수석비서관들이 보충설명을 했다.
 
  회의나 서류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은 박 대통령은 주요 국책사업의 진행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국가를 위한 큰 구상을 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 32년이 흘렀다. 우리 경제는 그 후로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이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경제운용과 관련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첫째는 정부에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기술관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1980년대 이후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들이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잡았다. 경제기획원은 속성상 거시(巨視)경제를 중시한다. 어떤 일이 생기면, 외국 연구기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한다. 외국의 연구기관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연구결과를 내놓는데, 그게 우리 현실과 안 맞는 경우가 많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은 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후로는 경제개발계획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계획과 구체적인 실천 사이의 괴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향후 5년간 국가가 지향하는 경제목표를 제시해 주는 비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엔지니어 출신인 오원철 수석은 일을 하면서 한국적 특수성을 살피고, 거기에 맞는 방안을 내놓곤 했다. 이렇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일하는 창의적인 관료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제조업의 중요성을 점점 잊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IT(정보통신), BT(생명공학), NT(나노공학)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자·철강·조선·자동차 등 현재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산업들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제조업은 영원하다. 많은 제조업체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로 떠나고 있는데, 정부·기업인·노동자들은 “제조업이 무너지면 우리 경제가 무너진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朴正熙 경제참모의 증언

南北 경제전쟁, 중화학공업으로 승리의 쐐기를 박다

글 : 吳源哲 전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정리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 중국, 인도 경제발전 모델의 원형은 한국의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EOI) 개방 경제
⊙ 최종제품→중간제품→중간원료→기초원료 順 ‘피라미드型 개발전략’ 채택으로 한국型 산업혁명 완성
⊙ ‘자력갱생ㆍ자급자족’의 주체사상 외치다 망한 북한
⊙ ‘중화학공업 진입 마지막 버스’ 탄 한국, ‘진정한 기술강국’으로 성장

吳源哲
⊙ 1928년생.
⊙ 북한 해주동공립중ㆍ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 졸업.
⊙ 공군소령 예편,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 상공부 화학과장ㆍ공업제1국장ㆍ기획관리실장ㆍ
    광공전 차관보,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등 역임.
⊙ 現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
⊙ 저서 : <한국형 경제건설>(7권)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더 코리아 스토리> 등.
1971년 지하철 공사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임자! 100억 달러 수출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지?”
 
  1972년 5월 30일 오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서재 소파에 앉은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항상 정확한 질문을 했고, 참모들은 정확한 답을 제시해야 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산업구조 고도화에 대한 전략’을 밝힐 때가 됐다고 결심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답변은 육하원칙으로 짧고 명료해야 했다.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해서(Why), 중화학공업 육성을(What), 일본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을 국가 중요시책으로 추진한 것과 같이(How), 대한민국도(Where), 앞으로 10년간(When), 정부 주도 아래 민간 기업체가 담당해서(Who)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중화학공업 진입을 위한 마지막 버스’
 
박 대통령이 직접 작성해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한 ‘전 산업의 수출화’ 휘호.

  이날의 짧은 대화는 역사가 됐다. 한국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그해 우리나라 수출 목표는 18억 달러로, 15년 전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본은 수출액이 20억 달러였던 1957년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했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다음 보고는 며칠 후에 이뤄졌다. 나는 일본의 중화학공업 정책과 수출 목표 달성 관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한국은 1960년대 ‘선진국에서 사양화돼 가던’ 섬유산업 등 경공업을 유치, 수출산업으로 육성했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의 적기였다. 나는 “경쟁 관계에 있던 동남아국가보다 먼저 출발해야 한다”며 “현 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을 위한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한참 동안 도면을 들고 지켜봤다. 몇 분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각하! 우리나라는 이미 중화학공업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종합제철과 석유화학입니다. 그런데 그 규모는 국제 규모의 3분의 1입니다. 하루속히 국제 규모의 공장을 건설해야 수출도 가능합니다.”
 
  조선공업, 전자공업, 자동차공업, 방위산업 등에 대한 현황과 계획도 함께 이어졌다. 그러자 박 대통령의 눈이 빛났다. 아마 ‘이 정도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듯했다. 이때 함께 회의에 참석한 김정렴(金正濂) (대통령)비서실장이 “자금 문제 중 내자(內資)는 문제없다. 외자(外資)도 수출이 순조롭게 증가하는 한 차관이 가능하다”며 성공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또 잠시 말이 없던 박 대통령이 한마디를 던졌다.
 
  “오 수석! 우선 중화학기획단 같은 것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보도록 하지!”
 
  비서실장에겐 기획단 구성에 대한 내각 지시 명령이 내려졌다. 이 간단한 지시가 ‘중화학공업 발진 명령’이었다. 대한민국이 ‘승부수’를 거는 상황이었다.
 
 
  북한의 실패
 
2010년 8월 비날론 공장을 시찰하는 김정일. 북한의 잘못된 경제정책은 주민의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했다.

  2010년 8월, 김정일(金正日)이 함경남도 비날론 공장을 시찰한 사진이 북한 매체를 통해 보도됐다. 나는 사진을 보며 “북한이 완전히 망했다”고 확신했다. 비날론은 한국에선 더 이상 찾아보기도 어려운 섬유다. 그 공장을 재가동한다고 떠들썩한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전후(戰後) 기반시설과 자원 환경에서 남한을 월등히 앞섰던 북한 경제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1952년 4월 27일, 북한에서 과학자대회가 열렸다. 핵심과제는 ▲전력 및 지하자원 개발 ▲기계공업과 철강공업 육성 ▲식량문제 해결 ▲의류문제 해결 ▲과학원 창설이었다. 김일성은 이를 자력갱생, 자급자족 원리로 이루겠다며 주체사상을 내놓았다. 북한경제의 고립화와 후진성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순간이다.
 
  약 60년 후, 결과는 참혹하다. 가장 기본적인 식량문제와 의류문제부터 북한은 실패했다. 1인당 농토가 남한의 2.4배에 달했지만, “인민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는 김일성의 약속은 어느새 손자의 몫이 됐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주체농법이다.
 
  결과가 평등한 집단농장체제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었다. 남의 배부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은 개혁ㆍ개방 이후 집단농장을 포기하면서 6할 증산이란 성과를 이뤄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자신의 먹을 것과 별로 상관없는 농장보다는 개인 텃밭을 가꾸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의(衣)와 식(食)뿐 아니라 주(住)도 실패했다. 주택문제의 가장 기본은 난방이다. 북한은 석탄 등 지하자원이 우리보다 훨씬 풍부하다. 하지만 북한은 땔감 쓴다며 산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면 남한은 연탄 보급 정책으로 에너지와 산림녹화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북한의 전기 사정은 최악이다. 도시를 벗어나면 전선 가설이 제대로 안되어있고, 전봇대도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사회에서 전기는 곧 ‘문명’을 뜻한다. 전기는 정보교환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전기가 없으면 신문부터 보기 어렵다. 배달만 이틀 걸리는 신문을 누가 보겠는가. 라디오와 TV방송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型 산업혁명과 전화 보급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확정을 보도한 1973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우리나라 경제발전 요인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많이 꼽는다. 나는 고속도로보다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이 국민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경부고속도로는 km당 1억원, 총 429억원의 건설비가 투입됐다. 농어촌 전화사업은 만 15년간 926억원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이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4년 서독에서 농민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크게 자극을 받은 그는 우선 우리나라 농가에 전기부터 가설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귀국 후 농어촌 전화사업, 즉 전기가설 사업을 전개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의 전화율은 고작 12% 정도였다.
 
  석유 판매 세금 전액을 농어촌 전화사업비에 투자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 추진 결과, 새마을농촌에서 전화사업 붐이 일었다. 농촌 출신 여공(女工)들은 월급의 일부를 시골의 부모님에게 송금하면서 전기라도 놓고 살라고 권했다. 휴가 땐 라디오와 전기다리미를 선물로 사갔다. 이런 일들이 유행처럼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화사업은 급진전하게 됐다.
 
  전기와 통신 분야에서 고속 성장을 이룬 한국은 노동시간 확대, 학습능력 증대, 고속 정보 교류 등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북한은 이 모든 부분에서 ‘미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 경제 정책의 가장 큰 차이는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섬유제품을 예로 들면, 피라미드의 최하부는 의류다. 그리고 위로 직물, 합성섬유, 석유화학이 자리 잡고 있다. 아래에서부터 최종제품→중간제품→중간원료→기초원료다. 위로 올라갈수록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이 구도는 곧 한국의 수출 전략 순서가 됐다.
 

  한국은 처음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지 않았다. 와이셔츠와 같은 최종제품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직물과 같은 중간원료 공장을 세워 수출했고, 이후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합성섬유를 개발했다. 이 피라미드의 마지막 단계가 석유화학공장 및 종합제철 건설이다.
 
  북한은 반대였다. 처음부터 “자급자족하겠다”며 그네만의 틀로 전략을 세웠다. 석유를 석탄으로 대체하는 등 세계 조류와 동떨어진 정책을 밀어붙였다. 출발부터 비현실적 정책을 추진한 1957년 제1차 5개년계획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김일성은 “5개년계획을 2년 반 만에 완수, 공업 총생산이 2.6배로 증가했고 공업생산 증가율이 매해 36.6%에 달했다”고 자평했지만, 통계치를 분석해 보면 의혹투성이다. 결국 북한은 1960년에 심각한 식량난을 경험했고, 이는 50년 후인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공업 수출을 통한 산업개발 전략으로 ‘산업혁명’에 돌입한 한국의 실험 결과는 수출액 증대로 나타났다. 1964년 12월 31일 저녁 10시경,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해 ‘수출산(山)’ 정상 정복의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바로 제1단계 산업혁명이다. 밤늦게 대기하고 있던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박 대통령에게 상공부장관이 전화로 보고를 시작했다.
 
  “각하! 수출대전(代錢) 1억2000만 달러가 입금됐습니다. 이로써 금년도의 목표를 달성했음을 보고 올립니다.”
 
  3년 후인 1967년 말, 한국은 수출 3억 달러를 돌파했다. 3억 달러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연간 원조금의 최고 수준이었다. 1965년 방한(訪韓)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스토(Rostow)는 한국이 경제성장의 결정적 전환기인 ‘이륙(take off)’ 단계에 진입했다고 말해 우리 국민에게 도약의 용기를 심어줬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제2단계 산업혁명이다. 수출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주로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였지만, ‘원료의 국산화’를 위해 기초원료 공업과 제철공업 건설이 시작됐다. 대망의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던 날 풍경은 이랬다.
 
  1969년 12월 31일, 대만 소형어선 20척 수출 작업이 끝났다. 인수증 서명도 받았고, 한국에 갖고 오면 수출 절차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 큰 눈이 내려 항공기 운항이 중지됐다. 인수증을 든 직원은 자동차 비상등을 켜고 서울까지 달려왔다.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였고, 종무식은 이미 12시에 시작해 끝난 상황이었다. 은행은 마감시한을 연장해 그를 기다렸다. 당시 상공부에선 장관과 모든 직원이 이 순간을 애타게 지켜봤다. 은행으로부터 ‘입금완료’란 통보가 오는 순간,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제3단계 산업혁명이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분야로 주력산업이 옮겨갔다. 제1단계는 여자 단순기능공의 공이 컸던 반면, 제3단계는 남자 기능공의 역할이 커졌다. 기술자와 과학자도 양성됐고, ‘기계의 국산화’가 이뤄졌다.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제철소와 석유화학공장이 증설됐고, 조선소, 자동차공장, 공작기계공장, 전자공업공장 등이 건설됐다. 수출액이 크게 늘어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룩했다.
 

 
  南北 간 제2의 전쟁은 경제전쟁
 
중화학공업 건설은 방위산업 육성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1978년 국산전차 생산현장.

  1977년 이후 제4단계 산업혁명은 중화학공업에 정밀공업과 두뇌공업이 더해졌다. 산업구조 개편을 끝내 내실을 다진 단계다.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는 정책이 세워졌다. 수출은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기적에 가까운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핵심 키워드는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EOI(Export Oriented Industrializationㆍ수출주도산업화)’다.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은 CEOI(The Construction of Pyramid type EOI)다. EOI가 “노동집약적 상품의 수출을 장려하는 정책만으로도 수출이란 견인력에 의해 공업을 선두로 경제가 발전한다”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적 관점이라면, CEOI는 “공업기반이 없는 한국에서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구조(피라미드)를 정부 주도하에 새로 구축한다”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적 관점이다.
 
  한국은 경제개발 모델이 다른 나라와 완전히 달랐다. 당시 대부분 선진국은 공업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화학공업화가 이뤄졌고, 수출도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먼저 수출 목표를 수립해 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다.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1972년 5월 30일, 상공부가 개최한 수출확대회의를 마친 후 수출 상품 전시장을 시찰했다. 마침 자동차 부품이 전시됐는데, 박 대통령은 기계제품 수출에 관심이 컸다. 피스톤 핀(piston pin)의 정밀도에 대한 그의 질문에 한 관계자가 “1/100mm 정도 되는, 아주 정밀한 부품”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M16 총열의 정밀도와 비슷하구먼”이라고 해 함께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내게 수출 100억 달러 달성에 관한 ‘역사적 질문’을 했다.
 
  중화학공업 발진 명령 직후 나는 우리나라가 공업을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정리, 종합해서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중화학공업화와 80년대의 미래상’이란 제목의 보고로, 후진국 경제개발 전략, 공업화 발전의 5단계, 경제개발계획의 계획상 문제점과 대안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날 보고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각하!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것은 ‘남북 간의 경제전’에 돌입한다는 뜻입니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 패한 쪽의 체제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중화학 건설의 성공 여부로 남북문제는 결판이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국민은 앞으로 10년간 ‘제2의 한국전쟁’을 치른다는 단단한 각오로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정부나 기업가나 국민이 모두 필승의 신념을 갖고 분투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을 개시할 때 선전포고를 하는 식으로, 각하께서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국민에게 다짐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올립니다.”
 
 
  ‘중화학공업화’와 ‘국민과학화’
 
  박 대통령은 이날 보고에 만족했다. 그는 “기능자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라고 했다. ‘기능자→중화학공업 건설→조국근대화→민족중흥’이란 행정 식이 성립된 셈이다. 그는 또 공단계획을 수립할 때 주거지역에 대한 도시계획까지 포함하라고 했다. 공단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토 전체를 놓고 보라는 의미였다. 기술인력 양성 문제와 국토개발 문제 등 중화학공업 건설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계획에 포함하라는 지시다.
 
  이는 우리나라의 공업구조를 완전히 개편하는 계획이다. 군대식으로 표현하면 ‘작전계획’이 아니라 ‘전략계획’을 수립하란 의미였다. 박 대통령은 이미 결심을 굳혔고, ‘남북 간의 경제전’은 이미 개시됐다. 나는 임무의 중대성과 책임의 막중함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10월 유신)’을 발표했다. 이를 체제개혁에만 한정해 보는 것은 옳지 않다. 10월유신에서 ‘체제개혁’과 ‘혁명과업’은 차량의 두 바퀴와 같은 개념이다. 이제 중화학공업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와 ‘국민과학화’를 선언했다. 그날 회견 내용 중 일부다.
 
  “우리나라 공업은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내가 제창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과학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국력이 급속히 신장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 우리는 절대 선진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80년대에 가서 우리가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공업의 육성’ 등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범국민적인 ‘과학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되겠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은 그 의미가 크다. 목표가 달성되면 우리나라 국력은 북한을 완전히 압도하게 되고, 국민 생활 수준이 북한 주민보다 월등히 윤택해진다. 방위산업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북한을 능가해, 감히 6ㆍ25전쟁과 같은 도발을 하지 못하게 억제할 수 있다. 남한의 자유경제체제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돼 남북한 간 ‘체제 경쟁’에서 완승하게 됨을 의미한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1973년 1월 31일,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 태완선(太完善) 부총리, 남덕우(南悳祐) 재무장관 등 주요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업구조 개편론’에 대해 최종 브리핑을 했다. 중화학공업 계획, 방위산업과의 관계 등 핵심 사안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브리핑이 끝난 후 박 대통령의 짧은 네 문장의 말이었다. 엄숙하고 조용한 말투였는데, 한마디 하고 말을 끊고, 한참 후 다음 말을 하고 또 말을 끊었다. 이때 박 대통령의 표정은 중대 결심을 앞둔 군사령관과 같았다. 입은 굳게 다물었고, 시선은 줄곧 정면을 향했다. 부동의 자세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최종 결단에 앞서, 또 한 번의 정리를 하기 위해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는 계속 먼 곳만 바라봤다. 질문인 동시에 대답이었다. 이 말의 뜻은 “나(박 대통령)는 6ㆍ25와 같은 전쟁의 재발을 막으면서 평화통일을 하자는 것이지, 동족상잔의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적 아래 중화학공업을 추진코자 하는 것이다”란 의미였다. 독백은 천천히 이어졌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이 기꺼이 따라줬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줘서야 되나.”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대한 그의 결론이 나왔다. 마지막 한마디 말의 뜻은 “중화학공업은 꼭 해야만 한다. 그 결과는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최후의 결단은 국가원수인 내가 혼자서 내려야 한다”였을 것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2월 12일, 박 대통령은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목적은 수출에 있다는 명령이었다. 중화학공업기획단은 이 휘호를 액자로 만들어 단장실 정면에 걸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이룩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조국의 국운(國運)을 건 민족적, 역사적 과업이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 국가가 된다는 것은 “우리도 산업혁명을 이룩했다”는 의미다.
 
  1970년대 세계정세는 우리에게 크게 유리하지 않았다.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됐고, 석유파동에서 시작된 에너지 위기로 물가가 인상되는 등 경제불안이 이어졌다. 당초의 3차 5개년계획은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을 우리나라는 슬기롭게 극복해 냈다.
 
 
  진정한 기술강국
 
  1973년 원유 값 폭등이 수입상품 가격 인상을 불렀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1960년대 ‘달러 고갈’이 몰고 온 위기 후 두 번째 경제위기였다.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 불안 심리를 안정시키고 중동 진출로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우리 역사엔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스스로 목숨 걸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의병(義兵)이라 부른다. 삼국통일 때의 화랑, 임진왜란 때의 어린 의병, 6ㆍ25전쟁 때의 학도병은 모두 10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다. 1973년 석유위기로 나라 경제가 파국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린 용사들은 분연히 나섰다. 중동에 파견된 17~18세 청소년 기능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수만 리 이국 땅의 경제전쟁의 최전선에서 나라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했다.
 
  1974년,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동안 한국은 GNP 8.1% 성장, 수출 38.3% 성장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기능사와 기술자를 양성해 중화학공업과 엔지니어링 산업을 육성했다. 공업구조를 선진화해 해외에 플랜트까지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수출 100억 달러와 중화학공업 비율 50% 이상을 이룬 한국은 완전한 선진공업국으로 성장했다. 기적 같은 업적을 국민이 이뤄낸 것이다. 방위산업의 육성은 자주국방 실현 의지를 한 발자국 앞당겼다.
 
  세계는 ‘불굴의 도전’으로 이룬 ‘한강의 기적’을 주목했다. 20세기 후반 경이적으로 발전한 4마리의 용(龍ㆍ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중 선두주자로 한국을 꼽았다. 1977년 미국 <뉴스위크>는 커버스토리로 한국을 다뤘다. ‘한국인이 몰려온다(The Koreans are coming)’란 제목의 이 특집기사는 한국인을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공업구조와 국민 생활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는 세계 유일한 국민”이라고 소개했다.
 
  33년 후, <뉴스위크>는 또 하나의 특집기사를 내놨다. 미소(美蘇) 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 지형도를 인종ㆍ종교ㆍ문화적 요인을 기초로 재조명한 기사다. 미국 채프먼 대학의 조엘 카트킨(Kotkin) 석좌 연구원이 분류한 북미동맹, 중남미 자유주의국, 이란 권역, 중화 왕국 등 복잡한 구도에서 한국은 일본, 프랑스, 브라질, 스위스 등과 함께 ‘자립국가(stand-alones)’로 구분됐다. 중요한 대목은 그들이 한국을 ‘진정한 기술강국(true technological power)’으로 규정한 부분이다. 40년 전 아프리카 가나보다 경제 수준이 낮았던 나라가 일본과 대등한 힘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그들은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여전히 위기는 존재한다. 인접한 대국(大國) 중국의 경제는 무섭게 성장하고, 일본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을 통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한다.
 
2010년 9월 미국 <뉴스위크>가 보도한 새로운 세계질서 지도. <뉴스위크>는 한국을 ‘진정한 기술강국’으로 규정했다.

 
  2061년의 대한민국
 
  한국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새로운 국가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국태를 위해 자주국방과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을 확립하고 국민생활 안정 및 향상이란 민안을 이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핵심정책으론 우선 전 국민의 정신무장이 필수다. “하면 된다” 정신과 근면ㆍ자조ㆍ협동ㆍ저축 정신이 부활해야 한다. 그리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안보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1970년 닉슨독트린에 의한 주한미군 7사단 철수 당시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란 협의가 있었다. 한국 측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25억~3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결국 15억 달러로 낙착됐다. 당시 경제 규모로도 우리는 ‘자위(自衛)’에 경주했다. 지금은 훨씬 큰 경제규모와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안보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하면 국민 총생산은 1조8000억 달러가 된다. 국방비로 5%를 쓴다면 900억 달러를 지출할 수 있게 된다. 한 해 1000억 달러 정도의 시장이 형성되면 최첨단 군 장비의 연구, 개발, 생산이 가능해진다.
 
  국가안보 확립과 국부창출을 통해 후손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국토개발과 경제개발을 이뤄야 한다. 전 산업의 수출화와 전 국민의 과학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선진 최첨단 기술공업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위한 인력 양성을 지속해야 한다. 과학기술 발전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조건이다.
 
  50년 전 경제개발계획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근로자들의 희생으로 시작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땀은 세계사(史)에 유례없는 초고속성장을 이뤄냈다. 경제사령관 박정희는 조국을 경제강국으로 만들었다. 경제개발계획 100주년이 되는 2061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 우리의 선택과 노력이 후손에게 잠시 빌린 조국의 흥망(興亡)을 결정한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경부고속도로 건설 참여자의 증언

“도로혁명 없이 산업혁명 없다”(박정희)

글 : 尹永浩 신영기술개발주식회사 회장
정리 : 徐喆仁 月刊朝鮮 기자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첫 삽을 뜬 후 2년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완공됐다. 서울 양재동에서 부산 금정구 구서동까지 428km에 이르는 대역사(大役事)였다. 고속도로 개통 후 서울-부산 간의 거리가 15시간대에서 5시간대로 단축됐고, 자동차 산업 발전, 제철 수요 증대, 인접 도시 발전, 지방 공업단지 연결, 국토 균형 발전 등 다양한 시너지 효과가 창출됐다.

⊙ 군인 신분으로 국토 대동맥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준 행운
⊙ 박정희 대통령, 1·21 사태 불구하고 기공식 예정대로 진행
⊙ 육군 현역 장교 64명 현장 감독관으로 활약, 하도급자들 “감독관 지독하다”며 삽자루 내던지기도

尹永浩
⊙1925년생. 육군대 졸업. 한양대 토목공학과 졸업.
⊙제1102 야전공병단장, 제6군단 공병 여단장, 국방부 조달본부 건설국장, 제2군 사령부 공병부장,
    군수기지 사령부 종합보급창장 역임. 육군 준장으로 예편.
⊙상훈 : 보국훈장 천수장, 보국포장, 무공훈장 등 다수 수훈.
1969년 12월 부산-대구 간 고속도로 개통식에서 축하의 샴페인을 뿌리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역사적(歷史的)인 고속도로(高速道路) 공사(工事)에 나와서 훌륭한 업적(業績)을 남기고 원대복귀(原隊復歸)하는 것을 축하(祝賀)합니다. 앞으로도 군(軍)의 발전(發展)을 위하여 더욱 정진(精進) 있기를 빌며 성공(成功)을 기원(祈願)합니다.’
 
  1969년 2월 12일, 경부고속도로 건설 서울-수원 구간이 완료된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써준 친필 서한이다. 이제 그만 군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일종의 귀대(歸隊) 허가서였다.
 
  육군본부 조달감실 검사과장(대령)이었던 나는 1967년 11월부터 1년 3개월 동안 경부고속도로 노선 선정 및 건설 현장 감독으로 복무했다. 돌이켜보면 군인 신분이었던 내가 국토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준 행운이었다.
 
  내가 경부고속도로 건설 준비를 위한 ‘청와대 파견단’으로 차출된 것은 1967년 11월 23일이었다. 그날 오후 공병감이던 박병순 장군이 급히 나를 호출했다. 그는 “윤 대령, 내일 아침 청와대에 들어가 봐야겠소”라고 말하곤 의아해하는 내게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해 줬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할 예산을 놓고 고심 중이었다. “먹고살 것도 없는 마당에 고속도로가 웬 말이냐”며 여야 정치인은 물론 언론의 반대가 극심한 가운데 추진된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였기 때문. 대통령은 가능하면 예산을 줄일 목적으로 5개 유관 기관에 고속도로 건설 추정 예산을 산출하도록 했다.
 
  그런데 건설부(650억원), 서울시(180억원), 재무부(280억원), 육본 공병감실(490억원), 현대건설(289억원) 등 추정액이 제각각인데다 격차가 많이 났다. 대통령은 추정 예산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제출한 박병순 장군을 앞에 두고 “유관 부처에서 올린 추정 예산안이 모두 달라 내가 직접 재검토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재검토 작업을 도와줄 보좌관이 필요하니 감실(監室)로 돌아가거든 우수한 공병대령 한 사람과 중령 한 사람을 차출해 보내달라”고 했다. 박병순 장군은 귀대한 직후 과장들을 불러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을지’ 회의를 했고, 만장일치로 내가 적임자로 추천됐다는 내용이었다.
 
 
  군인 신분으로 청와대 파견
 
1968년 2월 1일 서울 원지동에서 거행된 경부 간 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다음 날 청와대로 향하는 내 마음은 복잡했다. 대통령을 도와 민족 대역사(大役事)에 참여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지만 여론의 반대를 무시하고 밀어붙여야 하는 상황이라 부담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다.
 
  솔직히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이나 여건 등을 감안해 볼 때 고속도로를 건설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에 나 역시 동조하는 바였다. 1967년 한국의 경제지표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 142달러, 수출 3억2000만 달러로 낙후돼 있었다. 국민소득이 북한의 절반 수준일 정도로 경제 기반이 열악했다. 고속도로보다는 벼농사 기술 개발이 시급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청와대에 도착, 김학렬(金鶴烈) 비서관과 함께 대통령을 영접하러 갔다. 마침 비서실에서는 그해 3월 27일에 착공한 경인고속도로 공사의 문제점들을 검토하는 회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김 비서관은 “관계 부처의 장차관이 참석하는 대통령 주재 회의이니 함께 참석해 경청해 보자”고 했다. 내가 지정석에 앉으려 할 때 대통령이 입장했다. 대통령은 내 명찰을 보곤 “윤 대령 잘 왔시다, 같이 잘해 봅시다”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회의가 끝난 후 대통령을 따라 집무실로 갔다.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대통령 집무실이 너무 초라해서 놀랐고, 또 한 번은 집무실 벽이 한반도 지도로 도배돼 있다시피 해서 놀랐다. 대통령은 “여보, 당장 급한 것이 두 가지”라며 “하나는 각 기관이 제출한 추정 예산안을 분석해 적정가를 산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디로 도로를 낼지 노선을 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우선 육군본부에 가서 서울-수원 간 지도를 100만분의 1에서부터 1200분의 1까지 각각 1부씩 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그것이 청와대 입성 후 내 첫 임무였다.
 
  그날 오후 지프에 단 트레일러 가득 지도를 싣고 청와대로 돌아왔다. 지도를 본 대통령은 “윤 대령, 육군대학 나왔지? 가지고 온 그 지도에 육군대학에서 배운 대로 색칠을 해다 주게” 라고 말했다. 나는 함께 차출된 박찬표 중령과 늦은 밤까지 색칠 작업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완성된 지도를 본 대통령은 “바로 이거야”라면서 “이래야 정확한 도상 연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100만분의 1 지도로 시작해 작은 단위로 내려오면서 보면 확실히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대통령은 100만분의 1 지도를 내밀며 “이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을 참고로 해서 채색된 지도에 그려 넣어주게”라고 말했다. 펼쳐진 지도를 보니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예정 노선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는데, 얼마나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했는지 지도상에 인쇄된 글자들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지도의 귀퉁이는 아예 닳아 없어진 상태였다. 선 한 줄 긋는 데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 흔적이 지도 곳곳에 역력했다.
 
  이날 건설부 소속의 박종생 기좌가 합류했고, 얼마 후 육군본부 공병감실 소속의 방동식 소령이 합류해 청와대 파견 요원은 4명이 됐다. 우리는 편의상 ‘청와대 파견단’으로 불렸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1964년 訪獨 후 싹튼 고속도로 건설
 
완공된 직후의 경부고속도로.

  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이 계기였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 대통령은 전용기가 없어 극동지역에 취항하고 있던 서독의 민항기 루프트한자를 일반 여행객들과 함께 타고 본에 도착했다. 박 대통령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 발전 상황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중 가장 관심 있고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독일 나치 정부 시절 건설된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이었다. 뤼프케 대통령은 당시 아우토반을 “독일 부흥의 상징”이라고 자랑했다.
 
  박 대통령은 수도 본에서 라인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쾰른시(市)를 자동차로 방문했다. 당시 자동차는 시속 160km로 달렸다.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박 대통령은 쾰른시를 왕복하는 동안 두 차례나 차에서 내려 노면 상태와 중앙분리대, 교차로 시설 등을 꼼꼼히 살폈다. 또한 안내를 담당했던 뤼프케 대통령의 의전실장에게 독일이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된 동기부터, 건설비용, 관리 방법 등을 쉴 새 없이 질문했고, 수첩에 기록했다.
 
  서독 방문 중 박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의 말 중 두 가지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왔다. “국가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도로, 항만 등과 같은 기간시설의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는 말과 “분단된 국가로서는 경제 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이었다.
 
  가슴에 품었던 이때의 구상을 구체화하고 밖으로 표출한 것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때였다. 박 대통령은 그해 4월 29일 장충단 공원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 공약으로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5월에는 합동 기자회견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복안까지 발표했다.
 
  고속도로 계획이 발표되자 정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요동쳤다. 당시 김대중(金大中) 후보는 “전국의 도로 상태가 말이 아닌데, 지금 국가에서 외국 차관도 얻고 갖은 재원을 총동원해서 경부고속도로에 투입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했고, 김대중 후보 지원 유세를 했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좁은 국토에 무슨 넓은 길이냐”며 반대했다. “국내 보유 자동차 수가 4만 대에 불과한데 무슨 고속도로냐, 부자들을 위한 도로가 될 것이다”며 목청을 높이는 지식인도 상당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결심해 온 일인 듯했다.
 
 
  극비리에 노선 정찰 지시
 
  5개 관계 기관이 낸 예산안을 분석한 결과 내가 공사비의 적정선이라고 산출한 금액은 360억원이었다. 이 내용을 보고 대통령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육군 공병대를 투입하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공사비가 많이 절감될 것이고 공사 진척도 빨라질 것 같은데 말이야”라고 말했다.
 
  마침 공병들의 교육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심하고 있던 터라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우리 공병이 훈련 실습을 겸한다면 일석이조(一石二鳥)가 따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라고 답했다.
 
  대통령은 곧바로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을 불러 “여보, 이거(고속도로 건설) 예산이 많이 드는데 공병을 투입하면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렇게 추진해 봐”라고 지시했다. 이후락 비서실장은 “알았다”면서 “군 병력과 장비는 미국 고문관들이 권한을 쥐고 있어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병력과 장비 차출을 협조해 주는 대가로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미 군용 차량의 고속도로 사용료는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그러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 말이 계기가 되어 미 군용 차량은 현재까지도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받고 있다.
 
  공병부대 차출과 고속도로 추정 공사비가 결정된 어느 날 아침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집무실로 호출했다. 대통령은 “지난 일요일에 혼자 말죽거리까지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알아보고 몰려들어서 더 이상 가지 못했다”며 “윤 대령이 나 대신 수원까지 노선 정찰을 다녀와 어디로 길을 내면 좋을지 보고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날 박찬표 중령과 건설부 박종생 기좌를 지프에 태우고 박정희 대통령이 그린 노선을 따라 정찰에 나섰다. 출발하기 전 박 대통령은 두 가지 약속을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하나는 노선이 노출되면 주변 땅값이 오르니 정찰 중에는 아무도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좀 늦더라도 오늘 중으로 보고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수원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서둘러 차를 몰아 한남동 부근의 한강변에 도착했다. 제3한강교가 놓이기 전이라 사공에게 “지프를 배에 실어 건널 수 있느냐”고 물으니 “처음이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지프를 겨우 실어 한강을 건넜다. 한강 이남은 도로도 없는 황량한 모래벌판이었다. 구불구불 우마(牛馬)차가 다니는 농로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가급적 높은 곳에 올라가 머릿속에 조감도를 그리고, 장차 공사를 진행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을 빠짐없이 지도에 표기했다. 경사도와 토질, 골재를 채취할 만한 위치, 개천의 수량과 폭, 교량 건설 위치 등이었다.
 
  그렇게 수원 부근의 신갈 저수지에 도착하니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신갈로, 오른쪽은 수원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우리는 고속도로가 복잡한 수원 시내를 관통하는 것보다는 신갈로 빠지는 것이 낫겠다 싶어 왼쪽 길을 택했다.
 
  점심도 거른 채 답사를 했지만 수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서둘러 국도를 타고 청와대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대통령은 이미 퇴청할 시간인데도 집무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도를 펼친 뒤 정찰한 곳의 이모저모를 보고했다. 대통령은 “내 생각도 그래, 내가 지도상으로 판단하고 구상했던 것과 비슷하군”이라고 말한 후 이후락 비서실장을 불렀다. 그러곤 “내일 건설부 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경제수석비서, 이후락 비서실장, 행정관리비서관들을 모두 소집해 주게”라고 지시했다. 이 비서실장이 “그럼, 내일 10시경으로 할까요?”라고 묻자 대통령은 “아니 10시라니, 한 시간이 아쉬운 이때 그렇게 늦으면 안 되지, 더 빨리 9시로 해”라고 말했다. 또한 내게도 참석하라고 했다.
 
 
  용지 매입 일주일 만에 끝내
 
  다음 날인 11월 28일 오전 9시 정각, 예정대로 대통령 주재하의 회의가 시작됐다. 대통령은 미리 준비해 놓은 5만분의 1 지도판 앞으로 다가서더니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 건설 예정 노선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나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게 용지 매입을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경기도지사가 “땅이 얼마나 소요될지, 땅값이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구입을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독도법(讀圖法)을 통해 면적 구하는 법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 후 나를 보면서 “윤 대령, 내가 설명한 것 중 틀린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게”라고 말했다. 단 한 군데도 틀린 곳이 없었을뿐더러 복잡한 계산법을 간결하게 설명해 내는 대통령의 숨은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나온 질문은 용지 매입 시 평균지가를 얼마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내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미리 지가 조사를 해놓았다”며 캐비닛에서 서류철 한 권을 뽑아냈다. 시중의 두 개 은행이 고속도로 예정 노선의 지가를 비밀리에 조사한 자료였다. 이 자료에 따르면 고속도로 건설 예정지의 평균지가는 논이 평당 150~200원 내외이고, 임야는 100원 이하였다.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사전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이 시세로는 땅을 매입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나는 자료에 나온 가격대로 땅을 사려는 것이 아니오, 전답과 임야를 모두 합쳐서 평당 300원으로 예산을 배정해 줄 테니 평균 300원 이하로 매입하도록 하고, 남으면 농지구역 정리와 고속도로 진입로 건설에 쓰도록 하시오”라고 답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땅값이 춤을 출 것이기 때문에 용지 매입은 일주일 만에 끝내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당부 사항이었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일정이 너무 짧다”며 난감해 하자 이번에도 대통령이 해법을 내놓았다. 해당 군수와 면장, 이장들에게 얘기해 주민들을 설득시킨 후 동의를 받아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용지 매입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 대통령은 건설부 장관에게 “예산은 부족하나 공사는 서둘러야 하니 설계상의 묘(妙)를 기해 예산을 최대한으로 절약하는 방법을 모색해 보라”고 했다. 개통 후 완공 보수를 하는 식으로 공기를 단축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보라는 것이었다.
 
  회의 다음 날인 12월 14일 고속도로 공사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조직이 발족됐다. 안경모(安京模) 전 교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이하 계획조사단)이다. 기술반원 임명장을 받은 나 역시 이 조직에서 일을 하게 됐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고속도로 노선 선정’이었다. 서울-수원 구간은 이미 결정된 터라 수원-대전 구간 노선 선정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이한림 건설부장관이 1970년 7월 7일 아침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준공테이프를 끊었다.

 
  유사시 군사적 목적에 부합되도록 설계
 
  이듬해인 1968년 1월 초 수원-대전 구간 역시 철저한 보안 속에 노선 선정 작업이 이뤄졌다. 선정에 앞서 우선 건설부가 제시한 안부터 검토해 봤다. 이 안은 기존 국도를 따라 고속도로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공사도 수월하고 공사비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농토가 지나치게 많이 소요되고 국도와 고속도로가 인접하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었다. 북한의 충동적인 침투와 파괴 공작 등으로 국도와 고속도로가 동시에 파괴된다면 안보상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요소였다. 이 점은 박 대통령이 수시로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고속도로는 교통 기능뿐만 아니라 유사시 군사적 목적에도 부합할 수 있도록 건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부고속도로 2개소를 비상 활주로로 겸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같은 의지에서였다.
 
  서울-수원 구간과 마찬가지로 농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수원-대전 구간 노선 정찰을 마치고 결과를 보고했다. 다음 날 대통령은 내가 답사한 구간을 직접 보겠다며 헬기 2대를 동원했다. 대통령은 책임자들을 분승시킨 후 “윤 대령, 자네는 선두 헬기에 타고 안내하게”라고 말했다.
 
  헬기가 평택 평야에 도달했을 즈음 뒤에 따라오던 헬기에서 착륙하라는 신호가 왔다. 헬기에서 내린 박 대통령은 “이 지역은 모두 농토인데, 고속도로가 이곳을 지나가면 농민들이 얼마나 싫어하겠는가.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안경모 단장이 “평택은 평야 지대라 어디로 가든 농토라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금세 수긍했다 한다.
 
  헬기 답사를 마친 일행은 대전 비행장에 착륙해 유성온천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안경모 단장과 예비역 허필연 장군(후에 도로공사 사장)에게 “서울로 바로 가지 말고 왔던 길을 다시 한 번 훑어 보면서 가되 영동까지 갔다가 거기서부터 가자”고 했다. 대통령의 답사는 이렇듯 치밀하고 꼼꼼했다.
 
  그렇게 수원-대전 구간 노선이 확정되자 곧바로 대전-부산 구간 노선 선정에 들어갔다. 대통령은 험준한 산악지대인 대전-추풍령 구간 답사에 신경을 많이 썼다. 나는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L-19 경비행기를 타고 두 번이나 정찰을 했다. 그 과정에 급변하는 겨울철 기상 관계로 추락 직전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노선 선정은 고속도로 건설만큼이나 험난하면서도 빠르게 진행됐다. 전 구간 노선 선정이 확정되자 대통령은 고속도로 기공식을 1968년 2월 1일에 하기로 결정했다.
 
 
  기공식 9일 앞두고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
 
  이후 기공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1·21사태로 불리는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1·21사태는 북한의 124 군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다.
 
  기공식이 불과 9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발생한 사건인데다 토벌 작전이 한창인데도 박 대통령은 일정을 바꾸지 않았다. 시공 일정이 결정된 이상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정해진 날에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결국 계획했던 2월 1일 서울 영등포구 원지동(현 서초구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부근)에서 박 대통령을 비롯한 각 부처 정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이 거행됐다.
 
  식장에는 공사에 투입되는 공병부대의 각종 토건 장비가 도열돼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 건설회사에는 이렇다 할 장비가 없어 군 장비를 동원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기공식에서 “고속도로 건설이 1970년대를 향한 한국 경제의 위대한 전진을 상징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공식이 끝나자 육군 제1201 건설공병단 220공병대대가 차출돼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공병부대의 활약상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통령은 이들 공병대원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수원-대전 구간에는 1202공병단에서 건설공병 1개 대대를, 대전-부산 구간에는 1203 건설공병단에서 1개 대대를 차출하여 현장에 투입했다. 이들 공병단은 어려운 공사 구간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원대 복귀했다.
 
  1980년 2월 15일 한국도로공사는 공병단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길이 남기기 위해 서울 한남대교에서 12.2km 떨어져 있는 곳에 20톤이 넘는 자연석으로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서울-수원 구간 구역별 감독관은 64명의 현역 장교들이 맡았다. 고속도로 계획 단계 때부터 나는 대통령께 감독 임무를 현역 장교에게 맡길 것을 건의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육군본부에 병력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젊은 위관(尉官)급 장교들이 공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현역 장교 출신의 감독관 선발 기준은 미혼이어야 하고,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책임감이 강할 것 등 세 가지였다. 솔직히 까다로운 이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킬 장교들이 과연 있을까 걱정됐다. 그런데 육군총장이나 공병감을 비롯해 군 수뇌부가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보람된 일에 참여하는 것이며, 전선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며 최선을 다해 병력을 차출해 준 덕분에 한숨 덜게 됐다.
 
  내가 현장감독으로 현역장교를 추천한 것은 열악한 업무 환경을 이겨내고 임무를 완주할 사람은 젊고 패기 있는 군인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이들은 원리 원칙을 준수하려 노력했다. 시방서를 들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시방서에 어긋나거나 차질이 발생하면 가차없이 재시공 내지는 공사를 중단시킬 정도로 철저히 관리 감독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 하도급자가 “내가 공사판 노동생활 30년에 이렇게 지독한 감독관은 처음 본다”며 삽자루를 내던지고 가버린 일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장에 수시로 방문했다. 그때마다 내가 직접 공사 현황을 브리핑 했다. 박 대통령은 건의사항을 얘기하면 현장에서 바로바로 해결해 주곤 했다.
 
 
  현장에서 만난 정주영과 이명박
 
완공 40년이 흐른 2010년 경부고속도로 신갈 인터체인지 모습.

  1단계 구간 시공을 담당한 현대건설과 얽힌 일화가 많다. 한번은 현대건설이 달래내 고개에서 아스팔트 포장공사를 진행 중인데 감독관과 시비가 붙었다. 시공사 측은 완공이 눈앞이어서 밀어붙이려 했고, 감독관은 시방서대로 공사를 하지 않았으니 시정하기 전에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며 가로막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마침 정주영(鄭周永) 사장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 정 사장은 포장된 아스팔트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면서 “왜 이렇게 까다로운가”라며 짜증을 냈다. 그러곤 감독관의 지시대로 할 것을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현장을 떠났다.
 
  내 기억에 정주영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 못지않게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새벽 공사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에 나갔더니 정 사장의 검은색 지프가 세워져 있었다. 차 안을 들여다보니 밥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운전기사에게 “밥그릇은 뭐고, 정 사장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정 사장이 몸이 불편해서 죽을 먹고 있으며, 지금 중장비 정비소에 있다”고 답했다.
 
  잠시 후 현장에서 만난 정 사장에게 “사장님, 몸이 불편하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침 새벽같이 나오셨네요”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정 사장은 “나보다 더 일찍 나와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요, 뭘”이라고 답했다. “그분이 누군데요?”라고 묻자 그는 “이병철(삼성 창업주) 사장은 운전기사를 옆에 재우며 새벽 2, 3시에도 출동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내가 “한 분(대통령) 더 계시는데요”라고 했더니 금방 알아차린 듯 “그분이야 더할 나위 없고요”라고 받아쳤다.
 
  당시 현대건설에는 정 사장 못지않게 부지런한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중장비 정비과장을 맡고 있던 이명박(李明博) 현 대통령이다. 그는 고장 난 중장비를 밤새 분해하고 조립하는 방법으로 연구해 정비 요령을 깨쳐 갔다. 외국에서 임차한 중고 중장비가 많아 고장이 잦은데 정비 전문가가 없어서 그가 직접 팔을 걷어붙인 것이었다. 그는 정 사장보다 현장에 먼저 나와 있는 유일한 직원이었다.
 
  이후 1단계 서울-수원 구간 공사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정주영 사장을 만났다. 그에게 “정 사장님, 이 공사에서 재미 보기는 틀린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재미는 무슨 재미요”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데 돈도 안되는 일에 왜 그토록 정성을 쏟아붓지요?”라고 물으니 그는 “장사란 게 그렇게 항상 남을 수야 있나요? 이익이 날 때도 있고 밑질 때도 있는 게지요. 아마 다음에는 좋은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고속도로 건설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얘기였다.
 
  투자 성과는 몇 년 후 엄청난 결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세계적으로 가장 저렴한 공사비를 들여서 가장 빠르게 건설됐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현대건설이 해외 건설 프로젝트를 수없이 수주한 것이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1968년 12월 21일 마침내 서울-수원 구간(31.3km) 공사가 마무리됐다. 시공 10개월21일 만이었다. 이와 별도로 1967년 3월 24일 착공한 서울-인천 간 고속도로(23.4km)도 같은 날 준공돼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는 당중초등학교 교정에서 성대한 개통식이 거행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축하연설에서 “근대 산업국가에 있어 도로의 혁명 없이 산업의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도로의 근대화 없이 산업의 근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며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는 1970년 7월경에는 서울-부산 간의 거리가 4시간대로 단축돼 우리나라 산업이 무한한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연설이 끝난 후 유공자에 대한 훈장 표창이 있었다. 나는 4등 보국훈장을 받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30년 군 생활은 물론 80평생 중 가장 영광스러운 일로 남았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1970년대 전설적 새마을운동 지도자 河四容

“내 소원은 가난과 싸워 승리하는 것”

글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산증인이십니다”(朴正熙 대통령)

河四容
⊙1930년생. 초등학교 2학년 중퇴.
⊙동탑산업훈장·국민훈장 목련장 수훈.
하사용씨는 지금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중앙새마을연수원 등에서 새마을운동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하사용씨다.
  2010년 10월 25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박정희(朴正熙) 전(前) 대통령 묘역 앞. 70대에서 80대까지 노인 40여 명이 모였다. 해마다 박 대통령 서거일 하루 전날인 이날이면 이들은 이 자리에 모여 박 대통령을 추모한다. 박 대통령 서거 6년째인 1985년부터 시작했으니까 지난해가 26번째 추모행사였다.
 
  이들이 추모행사를 열기 시작한 이유는 “생전 박 전 대통령에게 술 한 잔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이처럼 박 대통령에 대한 애틋함을 서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걸까.
 
  이들은 박 대통령이 살아생전 그토록 애정을 쏟아부었던 새마을운동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농부도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전설적인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알려졌던 하사용(河四容)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올해 만 81세인 그는 지금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날 추모행사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어 생산한 수박 두 통을 짊어지고 왔다. 추모행사가 시작된 후 한 해도 거르지 않은 일이다.
 
  하사용. 그는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눈가에 눈물이 먼저 맺힌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을 하며 느꼈던 벅찬 감격의 눈물, 어처구니없이 일찍 떠나보내야 했던 아쉬움의 눈물…. 어떤 인연이기에 하사용씨의 가슴 속에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그처럼 강하게 박혀 있는 걸까.
 
 
  공무원이 써준 원고를 버리고
 
  1970년 11월 11일 서울 시민회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농어민 대표 등 3000여 명이 시민회관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날의 행사명은 전국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 대회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국에 중계되고 있었다.
 
  모든 참석자가 정장 차림인 가운데 남편은 점퍼 차림, 아내는 스웨터 차림인 부부가 눈길을 끌었다. 이 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한 하사용씨 부부였다. 하씨는 이 자리에서 성공사례 발표와 함께 박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게 돼 있었다.
 
  대회 참석 전 하씨 고장의 공무원들은 대통령 앞에 서는 자리인 만큼 양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하씨에게는 양복이 없었고, 양복이 필요 없었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양복은 필요 없는 차림새였다. 끝내 고집을 피우고 깨끗이 빨아 입은 점퍼 차림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대회가 시작되면서 그는 성공사례 발표 내용이 담긴 원고를 만지작거렸다. 공무원들이 며칠을 밤새워가며 작성해 준 원고였다. 원고에는 소득액을 부풀려 적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을 마을 사람들과 거짓 없이 살기 위해 애를 쓰는 농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옆에 앉아 있는 청원군수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씨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군수는 옆자리에 앉아 “나가서 말씀하실 때는 정신 차려 가지고 요거(공무원들이 작성해 준 원고)를 잘 보고 하셔야지 말을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며 자꾸 주의를 주었다. 무섭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식순에 따라 성공사례를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하씨는 연단을 향해 갔다. 만지작거리던 원고는 그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서였다. 등 뒤로 경악하는 군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진실과 사실만을 말하기로 결심하자 더 이상 떨리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온 하사용입니다”라는 말로 하씨의 성공사례 발표는 시작됐다.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설움에 북받쳐 울먹이기도 했지만 그는 아무 꾸밈 없이 자신의 ‘가난 탈출기’와 그동안 체득한 ‘자신만의 농법’을 소개했다.
 
 
  박 대통령도 원고 없는 연설로 화답
 
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하사용씨(맨 왼쪽).

  발표가 끝났을 때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동이 물결쳤다’는 말은 그런 장면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일 것이다.
 
  박 대통령이 2층 특별석에서 내려와 하씨 앞에 섰다. 하씨의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했다. 하씨는 박 대통령의 눈을 바라보았다. 박 대통령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산증인이십니다.”
 
  박 대통령의 농민에 대한 따뜻한 사랑. 하씨는 대통령의 눈물과 격려의 말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하씨의 목에 동탑산업훈장을 걸어 주었다. 곧바로 이어진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치사문은 인쇄된 것이니 가지고 가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충청북도에서 오신 농민 하사용씨의 성공사례가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기에 본인의 소감을 말하겠습니다.”
 
  한 농민의 원고 없는 진솔한 성공사례 발표에 박 대통령도 즉흥연설로 화답한 것이다.
 
  이후 하씨는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한 1971년부터 체험으로 느낀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전파하는 최고의 ‘전도사’가 됐다. 수원에 있는 새마을 연수원은 물론 각 기업체, 관공서, 학교 심지어 교도소에서까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은 감동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국민들에게 ‘나도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이날의 동탑산업 훈장은 새마을운동 첫 성공사례 발표에 대한 상이었다.
 
  하씨는 1970년대에만 1500여 회의 강연을 했다. 강연을 하는 그의 모습은 1970년 11월 11일 서울 시민회관에 섰던 그 모습 그대로 점퍼 차림이었다. 하씨의 성공사례 발표가 대통령의 눈가를 젖게 하고 전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일관됨과 진솔함에 있지 않았을까. 그는 지금도 틈만 나면 새마을운동과 관련해 강연을 다닌다. 중국 측의 초청으로 해외 강연을 다니기도 하고 해외 수십 개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강연을 한다. 청원군 중외면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도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에게는 훌륭한 교육장이 되고 있다.
 
 
  머슴살이 새경으로 땅 장만
 
버려지는 종이컵을 수거해 묘종을 기르는 것도 하사용씨의 주요 일과다.

  하사용. 1930년 4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두부집에서 나오는 비지나 엿집에서 나오는 엿밥,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지게미를 얻어먹으며 컸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할 때는 들판을 배회하며 올무(일찍 자란 무)를 뽑아 먹었다.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열 살 때부터는 고물수집, 엿장수, 나무장사, 채소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채소장사를 하면서 그는 채소농사를 짓는 화교(華僑)들의 수입이 높은 것에 놀랐다. 당시의 채소농사는 하씨의 마을뿐만 아니라 서울 근교에서도 주로 화교들이 지었다. 하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채소농사를 왜 짓지 않는지 의아했다. 직접 채소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단 한 평의 땅도 없었다.
 
  6·25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에 한 번 끌려갔다가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후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20사단에 배치되었다. 전투에 참가해 적들과 교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부상을 치료하던 중 폐결핵이 발견됐다. 치료 불가능 판정이 나왔다. 의병제대를 했다.
 
  삶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인가. 육군병원에서 치료불가라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그의 병은 호전되었고, 하씨 못지않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딸(신경복)과 결혼을 했다. 혼수는 홑청 없는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가정을 제대로 꾸리려면 제대 후에 그가 해온 품팔이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화교들이 짓던 채소농사가 떠올랐다. 땅이 필요했다. 땅이 있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지어서 갚겠다며 땅을 몇 평만이라도 빌려달라고 애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서라도 직접 땅을 살 밑천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내 몰래 집을 나왔다. 걸식을 하며 춘천까지 갔다. 춘천을 목표로 삼아서 간 것이 아니라 머슴 살 집을 찾다 보니까 그곳까지 흘러간 것이다. 3년간 정말 ‘죽어라 하고’ 일을 했다. 쌀 열다섯 가마를 새경으로 받아 고향 청원군 정중리로 돌아왔다.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봉급 대신 끼니만 해결해 주는 식모살이였다. 아내의 모습에 설움이 북받쳤다. 목놓아 울지는 못했다. 천형(天刑) 같은 가난에 대한 증오가 더 컸다. 반드시 이놈의 가난을 이겨내리라고 이를 악물었다.
 
 
  아! 내 땅, 내 집
 
  1957년에 쌀 열다섯 가마로 밭 270평을 구입하고, 그 밭 한쪽에 두 평 남짓한 움막을 지었다. 처음 가져보는 내 땅과 내 집이었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퍼날랐다. 인근 조치원읍에 가서 인분을 퍼다 밭에 뿌렸다. 인분을 퍼오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개똥도 주워다 거름으로 썼다.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멀리 갈 수 없게 노끈으로 묶어 놓았던 어린 자식이 울다 지쳐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울지는 못했다.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밭에 채소를 심은 후 콩기름을 바른 종이를 씌워서 보온을 해주었다. 나중에 하씨의 농법은 농촌에서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주위 사람들은 종이 속에서 어떻게 작물이 자랄 수 있느냐며 조소를 보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채소를 일찍 수확할 수 있었고, 일반 농사보다 열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선대(先代)들이 단 한 평도 갖지 못했던 땅. 땅을 더 사야 했다. 1원도 헛되이 쓸 수 없었다. 저축을 했고, 그 돈으로 매년 땅을 늘렸다. 하늘의 시샘인가. 덜컥 폐결핵이 도졌다. 아내가 거름통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누워서만 지켜볼 수 없었다. 똥통을 지고 다시 조치원 읍내로 갔다. 똥통을 지고 오는 길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도 했다. 멈출 수 없었다. 가여운 아내와 가여운 자식들 때문에라도 쓰러질 수는 없었다.
 
  하늘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결핵을 이겨냈고,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해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함으로써 대한민국 최고의 농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270평으로 시작한 하씨의 농토는 1만2000여 평까지 늘어났다. 땅을 더 늘릴 수도 있지만 늘리지 않고 있다. 그만하면 농사를 짓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自助정신
 
2007년 4월 18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관련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하사용씨(맨 오른쪽).

  하씨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자조(自助)정신이다. 그는 이 자조정신 때문에 박 대통령에게 불경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동탑산업훈장 상금으로 대통령이 재가(裁可)한 포상금 1000만원 수령을 거부했던 것이다.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하씨의 성공사례에 감동한 박 대통령은 이튿날 하씨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하씨가 기억하고 있는 박 대통령과의 만남 장면이다.
 
  “나와 아내는 전날 복장인 점퍼와 스웨터 차림으로 청와대에 갔어. 박 대통령께서 반갑게 맞아주셨지. 대통령께서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살아왔느냐’고 내게 물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이 나. ‘한이 맺힌 게 가난이니까, 소원이라면 배고픔과 싸워서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고 했지.
 
  박 대통령은 그 말에 감동하는 눈치였어. 그때 박 대통령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어. ‘나도 대통령을 그만두면 하사용씨 같은 새마을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여. 대화 중에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어. ‘우리 민족을 위해서 내가 무얼 하다가 간 사람인지 죽은 뒤에는 알 것이다’고 말여.
 
  크기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얘기를 나눠 보니까 나하고는 배짱이나 성격이 잘 맞는 분이셨어. 나도 당시에 내 목표를 위해 가족을 강하게 끌고 가다가 보니까 가족의 불만들이 있었거든. 그래도 나는 나중에 가족이나 근동 사람들이 가난과 싸워 이긴 후에 죽으면 제대로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하는 확신이 있었거든.”
 
  청와대를 방문한 후 하씨에게 1000만원의 포상금이 내려졌다.
 
  하씨의 당시 농토는 3000여 평이었다. 영양실조로 결핵에 걸릴 정도로 먹지도 쓰지도 않으며 돈이 생기는 대로 저축만 했던 하씨가 270평의 땅을 3000평으로 늘리는 데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1000만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땅은 2만 평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씨는 포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처음에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1000만원 수령을 거부했다는)를 하면 후라이 까는(거짓으로 과장하는) 걸로 알았어. 왜 안 받았느냐. 나는 목표한 것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한다 하는 결심 말야. 그때 당시 1000만원을 받아다가 내가 땅을 샀으면 좀 더 쉽고 편하게 부자도 될 수 있었겠지.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었겠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내가 내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그 결심을 허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또 하나는 내가 그런 것을 받고 이웃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그럴 거 아냐. ‘저 자식도 별 수 없이 정부에서 돈을 주니까 저만큼 큰 농장도 갖고 그러고 어쩌고 다니는 거지, 제까짓 놈이 무슨 재주로 그런 걸 하느냐’는 소리를 듣는 건 뻔한 이치였거든. 난 그게 싫었어. 난 가난과 싸워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그 사람들도 열심히 일을 할 거 아니겠어?”
 
 
  의지하려는 맘 버려라
 
  “세상에 버릴 것은 없다”는 하사용씨. 그는 지금도 농사를 짓는 한편으로 지역 관공서나 금융기관을 돌면서 1회용 종이컵을 회수한다. 종이컵에 흙을 담아서 호박, 오이, 참외 등의 모종을 키운다. 버려진 종이컵을 활용한 이런 육묘(育苗)를 통한 수입도 만만치 않다.
 
  그는 매년 10만 개의 종이컵을 모아 육묘를 한다.
 
  “종이컵 종묘 한 개에 100원인데 남이 보면 우스워 보여도 한 개에 100원이지만 10만 개면 얼마여. 1000만원이여. 1000만원 줍는 거 쉽거든. 길바닥에 서 1000만원 줍는 거 아녀. 거기에 뭐 10원이나 투자되는 거 있어? 씨앗 값 조금하고 노동력만 있으면 되는 거여. 농사짓는 틈틈이 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말여. 2000년에는 1400만원을 벌었어. 인건비 농약 들어간 것 다 빼고도 1000만원 남았어.”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종이컵을 재활용하니까 쓰레기 감량에 도움도 되고 모종도 튼튼해져 일석이조야. 일거리가 없어서 굶어죽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돼. 아,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어야지. 그런데 자꾸 큰 것만 보기 때문에 일거리가 안 보이는 거여.”
 
  공짜를 바라지 않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 단돈 10원도 빚을 지지 않았던 하사용씨가 바라보는 요즘의 농촌 모습은 어떨까. 빚더미에 올라앉아 부채탕감 문제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농촌의 현실이 그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의지하려고 하는 맘을 버려야 돼. 사람이나 모든 것이 자꾸 남에게 무엇을 바라게 되면 불만을 가지게 돼. 내가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농촌에 정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아. 그런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부로부터 가장 많이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야. 정부가 돈을 싸게 주고 공짜로 주고 하니까 무조건 갖다가 쓰고 보자 하다가 빚을 짊어지게 된 거라. 거의가. 그래서 정부에 ‘농민들에게 덮어놓고 돈만 주면 성공할 줄 아는데 그건 착각이다. 자식을 키울 때도 아비가 돈을 많이 주어가지고 하면 절대 성공 못 하는 거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줘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지만 어디 듣나, 그 사람들이.”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정부가 자꾸 농민에게 무얼 주겠다고 그러는 걸 식물에 비유하면 ‘질소과다 현상’을 일으키는 거여. 질소과다 현상이라는 게 뭔지 알어? 질소를 많이 주면 당장은 빨리 자라지만 금방 썩어버리는 게 질소과다 현상이여. 내가 젊은이들한테 ‘농업은 투기가 될 수 없다. 돈 많이 들여가지고 쉽게 돈 벌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하면 90% 이상이 실패다. 농업이라는 것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사를 지으려면 열심히 일한다는 마음 자세부터 가져야 된다’고 얘기하지만 소용없어. 지금 젊은 사람들 농사짓는 것 좀 봐. 거의가 건달 농사야. 자가용 타고 다니고, 아니 자기 돈이 있으면 타고 다녀도 되는데, 자기 돈도 아냐, 빚이라고.”
 
  새마을운동의 전도사였던 하씨에게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이 무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을 시켰다는 거야. 지금처럼 돈 타내기 경쟁이 아니라 잘살기 경쟁을 시켰다는 거야. 농촌에서 퇴비증산 경쟁처럼 잘하면 조금 더 주고, 못하면 덜 주고 서로 경쟁을 시켰잖아. 경쟁을 통해서 자조정신을 심어준 거, 그게 새마을운동을 성공시킨 거야. 우선은 내 스스로 나를 도와야 남도 나를 도와주는 거 아니겠어.
 
  지금 농민들은 너무 의존적이야. 자조정신이 사라졌어. 부채탕감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래서 나오는 거야. 나를 봐. 난 IMF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자신 있어. 빚이 없거든. 왜 빚을 안 지었겠어. 자립과 자조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산림녹화의 기적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정리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 “치산녹화 사업에 새마을운동과 똑같이 내무부 공무원을 총동원하라!” (朴正熙 대통령)
⊙ 1973년부터 시작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6년 만인 1978년에 완료

[증언자]
金演表 전 산림청 차장
林鍾潤 전 산림청 조림국장
李柱聖 전 산림청 임업연수원장
安昇煥 전 산림청 동부산림청장
1980년 4월 5일 경기도 광릉에서 열린 제35회 식목일 행사 모습. 산림청은 산림녹화 제1차 10개년 계획을 4년이나 앞당기고 2차 10개년 계획(1979~1988)을 시작했다.
  1964년 12월 중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대한해협을 건너 경북 포항의 영일만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파독(派獨)광부를 만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하는 길이었다. 대통령의 눈에 비친 영일 지구는 거대한 황무지였다. 뻘건 민둥산 천지를 내려다보던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헐벗은 산을 두고 조국의 근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밥 지어 먹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땔감조차 없는 현실이 문제였다. 춘궁기 소나무 껍질로 죽을 만들어 연명하던, 두껍고 단단한 가난의 껍질을 어떻게 벗겨 낼지 막막하기만 했다. 대통령은 답답했다. “나무를 많이 심으면 된다는 희망으로 마음을 추스르면서 비행기의 좌석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앞날의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왔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1965년을 ‘일하는 해’로 정하고 나무심기에 많은 예산을 편성했다. 민둥산에 나무 심는 일을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로 만들었다. ‘치산녹화(治山綠化) 정책’이라 부르는 거대한 국책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해 6월 농림부 산림국은 ‘산림부’로 승격됐고 1966년 7월 ‘산림청’ 발족 법안이 임시국회를 통과했다. 이듬해 1월 마침내 산림청이 탄생했다.
 
  초대 산림청장으로 김영진(金英鎭) 청장이 취임했다. 김 청장은 1월 9일 대대적인 개청식을 갖고 치산치수를 제1목표로 청와대와 핫라인을 구축, 본격적인 나무심기와 사방(砂防·산·바닷가·강가 등에서 모래나 흙이 비·바람에 씻기어 떠내려가는 것을 막는 일)사업에 돌입했다.
 
  ‘차관급’ 공무원이 수장인 ‘청(廳)’ 단위의 정부기구에서 청와대에 직통으로 업무현황을 보고하는 기관은 정보기관을 제외하고는 산림청이 유일했다. 산림청은 먼저 정부에서 시행하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의 첫째 목표인 ‘식량을 자급하고 산림녹화와 수산개발에 주력한다’는 계획완수에 착수했다.
 
  사방사업과 연료림(燃料林·땔감용 나무) 단기조성 등 산림녹화를 조식에 완수해 자연재해 때문에 해마다 겪는 흉년 농사를 치유하는 정책을 폈다.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을 비롯한 경인지구에 땔감 나무의 반입을 금지하는 강경책을 도입했고 수도권 가구에 무연탄 보급을 확대하는 정책을 폈다. 또 농촌지역의 아궁이를 개량해 최소량의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힐 수 있게 할 방안도 추진했다.
 
  어느덧 황량한 민둥산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무심기 사업에 참여한 작업인부나 마을 주민들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사업성과를 높이기 위해 산 밑에서 좋은 흙을 한 짐씩 짊어지고 올라가 사방사업지의 씨 뿌릴 자리와 나무 심을 자리에 깔았다. 심은 나무가 잘 자라도록 정성을 다한 것이다.
 
  작업인부로 참여한 마을 주민들의 임금은 정상 임금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밀가루로 노임을 지급했다. 그런데도 인부 동원에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밀가루를 받는 일자리마저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밀가루 한 됫박을 받아갈 때 발걸음이 날아가는 듯 가벼워지는 그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참고 열심히 일했다.
 
1975년 4월 18일 경북 포항의 영일 사방사업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영일지역은 나쁜 토양 탓에 사방 4538ha가 폐허였으나 5년여 만인 1977년 대역사를 완료하고 푸른 숲으로 탈바꿈했다.

 
  孫守益, 서울~춘천 국도를 1년 만에 정비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관한 연두기자회견에서 나무심기 성공을 위한 새로운 각오를 밝혔다. 나무심기를 강도 높게 추진해 확실한 국토녹화를 이끌겠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전 국토를 녹화하기 위한 10개년 계획을 세워 푸른 강산으로 만들겠다”고 국민과 약속했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선언은 국토녹화의 전담부처인 산림청과 사전에 어떤 협의도 거치지 않은 선언이었다. 산림청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언급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당장 만들어 국민 앞에 세부적인 추진내용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산림청 조림과장이었던 김연표(金演表) 산림청 차장은 대통령의 선언을 듣고 즉시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농림담당 비서실 직원들조차 “그 내용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기다려 보라”는 말뿐이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대통령의 선언이 선포되고 사흘이 지난 1월 15일 산림청장 인사가 단행됐다. 당시 실세로 통했던 손수익(孫守益) 경기지사가 산림청장으로 부임했다. 김연표 과장은 이때야 비로소 ‘대통령의 약속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손 청장은 내무부 지방국장 시절, 새마을운동 창안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서울~춘천 간 국도변을 시범적으로 정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1년 만에 대대적인 정비를 끝낸 불도저였다.
 
  신임청장 취임식이 있던 1월 16일은 때마침 농림부가 대통령에게 국정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취임식 전 손 청장은 농림부 보고회의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농림부 보고에서 산림녹화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속마음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날벼락이 떨어졌다. 1월 22일의 일이다. 내무부 국정보고에 대통령으로부터 느닷없이 산림정책에 대해 신랄하고도 엄한 질책이 내려졌다. 산림행정의 주무부처는 산림청이 아닌가. 박 대통령은 이날 내무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구태의연한 정책을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동안 산림청에 배정한 예산은 적었지만, 그 범위 내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지도해 나갔다면 산은 푸르러지고 나무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또 산림을 연구하는 직원들의 자세도 고쳐야 한다. 우리나라의 기후와 토양에 알맞은 수종을 연구개발해야 하고, 개발한 묘목을 많이 생산해 인근 부락에 공급해야 하는데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자세는 고쳐야 한다.”
 
  손 청장은 물론 산림청 직원들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산림청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68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나무를 심고 있다. 박 대통령은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입안, 민둥산을 푸른숲으로 만들었다.

 
  박정희, “산림청을 내무부로 옮길 테니 산림녹화하세요”
 
1970년대 강원도 인제군에서 줄을 띄워 나무를 심는 모습. 작업인부나 마을 주민들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산 밑에서 좋은 흙을 한 짐씩 짊어지고 올라가 사방사업지의 씨 뿌릴 자리와 나무 심을 자리에 깔기도 했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흘렀다. 2월 13일 충청도 도정 순시차 충남도청에 들른 박 대통령이 갑자기 손 청장에게 도정보고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김연표 과장도 손 청장을 수행해 충남 도정보고에 부랴부랴 참석했다. 보고가 끝날 무렵 “산림청장 참석했소?” 하며 박 대통령이 확인까지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런 하문이나 지시가 없었다. 대통령의 귀경길에 손 청장도 따라나섰다.
 
  대통령 차량 행렬이 도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렸다. 손 청장의 차량도 그 행렬에 끼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의 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비서진이 내려 손 청장이 탄 차량으로 다가와 그를 대통령 차로 옮겨 타게 했다. 대통령 차에는 김현옥(金玄玉) 내무부 장관이 동승하고 있었다. 차는 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박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었다. 5분가량 지났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이 차창 밖을 계속 내다보면서 뭔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듯했다. 손 청장은 오금이 저렸다.
 
  이때 박 대통령이 “손 청장!” 하고 불렀다.
 
  “네, 각하” 하고 대답하자 박 대통령은 무뚝뚝한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림청을 내무부로 옮길 테니 최선을 다해 산림녹화를 이룩하세요. 김현옥 장관이 적극 나설 테니 강도 높게 진행하세요. 국무총리에게 바로 보고하여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고 김 장관과 협의해 산림녹화를 완수하세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던 지시가 내려졌다.
 
  이튿날 손 청장은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에게 대통령 지시 내용을 보고하고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김 총리는 이때 “그럼 그렇지! 그래서 일 잘하던 경기지사를 산림청장으로 발령했구먼”이라며 이제야 궁금증이 풀리는 듯 손 청장을 격려했다.
 
  김연표 과장은 이제야 확실한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국토녹화를 선포했던 것부터 산림청장을 새로 발령한 것, 농림부 국정보고 때 산림청 보고에 대해 언급이 없었던 것, 충청도 도정 순시에 느닷없이 산림청장을 불러들인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김연표·범택균 산림청 과장들이 녹화계획 마련
 
1967년 1월 9일 산림청 개청 현판식 장면. 당시 청사는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 삼영빌딩에 있었다.

  산림청을 내무부 산하로 이관하는 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됐다. 산림청장이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지 일주일 후인 1973년 2월 23일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조직법이 통과돼 3월 3일 공포와 동시에 발족 6년 만에 산림청의 운명은 바뀌었다.
 
  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되면서 치산녹화 10년 계획은 내무부에서 짜게 됐다. 산림청에서는 김연표 과장과 범택균(范澤均) 기술보급과장이 계획서 작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내용은 당시 새마을국장이던 고건(高建) 전 총리가 전담했다. 산림청장과 협의해 기본 뼈대를 만들었고 주요내용은 10년 내에 국토를 완전히 녹화한다는 것이었다.
 
  김연표 과장, 범택균 과장을 중심으로 한 계획서 작성팀은 산림청에서 가까운 곳에 여관방을 빌려 야근 사무실을 차렸다. 물론 손 청장의 야간 집무실도 만들었다. 낮에는 청사에서, 밤에는 여관에서 작업이 열흘간 계속됐다. 이렇게 해서 ‘절대녹화, 절대보호’라는 전대미문의 치산녹화 10년 계획이 만들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기녹화를 속성수와 장기수 비율을 7대 3으로 하고 국민식수 편의를 위해 10대 수종을 표준화한다. 양묘는 마을 주민의 소득에 보탬을 주면서 협동심을 배양하기 위해 현사시나무(버드나뭇과), 이태리포플러 등 양묘를 전량 마을 주민들이 협동해 생산한다. 또 주민들에게 소득이 돌아가도록 하는 마을 양묘를 도입한다. ‘절대보호’지에 산불이 발생, 100ha 이상의 임야가 불타면 시장·군수를 면직한다.>
 
  내무부 행정력의 초강권 위에 산림정책이 놓이게 된 것이다. 김현옥 내무장관은 10년 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전국 각 도지사, 시장, 군수, 경찰서장, 산림관계관 등을 내무부로 불러 모았다. 그때가 3월 16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 장관은 “첫째도 산, 둘째도 산! 첫째도 새마을, 둘째도 새마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부터 치산녹화 사업은 새마을운동과 똑같이 내무부 공무원을 총동원하게 됐다. 박 대통령도 내무부, 산림청에 힘을 실어 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해 식목일 행사가 열렸던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에서 기념식수를 한 뒤 “치산녹화 사업에 정부 각 부처의 행정력을 총력 지원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이날 식목행사에 참석한 재일본 거류민단 소속 청소년 100여 명에게 “여러분이 앞으로 10년 후에 고국에 오면 푸른 강산을 보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현옥 내무장관, “난 산림장관이야”
 
  김현옥 장관은 불시에 산림청에 출근, 나무심기 추진상황을 확인하곤 했다. 그는 “나는 산림장관이고 정성모 차관(당시 내무부 차관)이 치안장관이야”라는 농담까지 하면서 치산녹화사업에 열정을 보였다. 산림청이 내무부 소속이 되고 내무부 장관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면서 치산녹화 사업은 유신(維新) 과업으로 격상됐다. 따라서 비상 국무회의나 새마을 국무회의에 산림청장이 자연스럽게 배석했다. 당연히 예산문제 등 관계 부처와의 협조도 원활해졌다. 산림청에 막강한 힘이 실리면서 전국 각 도에 ‘산림국’이 신설됐고 각 시·군에 ‘산림과’가 신설됐다. 산림부서가 최고 인기 부서가 됐다.
 
  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되면서 ‘경찰 자동전화’가 설치됐다. 당시만 해도 통신시설이 부족해 지방행정기관과 전화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별도의 결재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경찰 자동전화’가 생기면서 전화 다이얼만 돌리면 일선기관과 바로 통화가 가능해졌다.
 
  산림청에서는 새 출발을 상징하는 새로운 표어를 내걸었다. 손수익 청장이 직접 만든 표어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현수막을 만들어 전국 곳곳에 내걸었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대형 아치를 세웠다.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는 토씨도, 접속사도 없는 아리송한 표어였지만 많은 국민이 산사랑, 나무사랑, 나라사랑을 떠올리게 하였다.
 
  새마을운동과 병행한 치산녹화 사업은 세계 각국에 알려지게 됐다. 세계은행(IBRD)에서 차관으로 돈을 빌려 나무를 심는다는 사실이 세계적 뉴스거리로 등장했다.
 
  1976년부터 77년까지 2년 동안 12만7000ha의 연료림을 조성했다는 점, 새마을사업 차관으로 416만3000달러를 빌려다 나무 심는 데 드는 비용과 인건비로 지불했다는 점이 외국인을 놀라게 하였다. 미국 CNN 방송은 아예 취재팀을 파견했다. 1977년 봄이었다.
 
  CNN은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들여다가 산에 나무를 심는 현장을 둘러보겠다고 밝혔다. CNN 기자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차관이 진짜 나무 심는데 투입되는지’ 추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취재를 할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농촌 마을에 찾아가 아궁이를 직접 들춰 보고 구들장과 온돌 중심의 난방구조도 세밀하게 취재했다. 나무 심는 이와 식재 현장을 지도하는 산림 담당 공직자와 만나 인터뷰를 했다. 사방사업 현장에서 조림하는 장면도 꼼꼼하게 촬영했다. 미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됐다. 물론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대부분이었지만 정부에서 부역(賦役)으로 출역하도록 종용했던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니까, 치산녹화 조림이 농촌주민들의 무보수로 봉사하는, ‘부역’으로 상당 부분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1963년 2월 9일 법률 제1266호로 제정한 ‘국토녹화촉진을 위한 임시조치법’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하되 ‘부역’을 과(課)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CNN은 모든 취재를 마치고 돌아갔다. 정확한 보도내용은 알 수 없지만,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국가재건에 나선 한국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방영했다고 한다.
 
  이후 유엔의 세계식량농업기구(FAO)에서 한국의 치산녹화 현장을 시찰하러 오겠다는 통보가 이어졌고 동남아 국가에서도 시찰단이 내한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CNN의 보도 덕분이었다.
 
산림녹화 증언자들. 오른쪽부터 김동호·임종윤·김연표·이주성·안승환.

 
  박 전 대통령에 절망을 안겨줬던 영일만은 지금…
 
  1973년부터 시작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6년 만인 1978년에 완료됐다. 108만ha에 나무를 심었고 420만ha의 육림(숲을 가꾸는 일)을 조성했으며 4만2000ha의 사방사업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30억 그루의 양묘를 생산해 조림했다.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사업에는 전국 3만4000여 단위마을 전체가 총력을 쏟아 참여했다. 새벽종이 울리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뛰었던 덕분에 치산녹화에 성공한 것이다. 치산녹화는 조국 근대화의 중심사업으로 뿌리내리며 조국 근대화의 유지 계승 토대를 확고히 다졌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에게 절망감을 안겼던 포항 영일만 지역은 어떻게 변했을까. 영일만은 나쁜 토양 탓에 산림이 훼손돼 사방 4538ha가 속살을 훤히 드러낸 폐허였다. 그러나 5년여 만인 1977년 대역사를 완료하고 푸른 숲으로 탈바꿈했다. 동원된 인력만 360만명, 석재 230만 점, 토지객토 313만t, 사방용 묘목 2400만 본이 소요됐다.
 
  1979년은 우리나라 치산녹화 역사에 매우 뜻깊은 해다. 제1차 10개년 계획을 4년이나 앞당기고 2차 10개년 계획(1979~1988)을 시작한 원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9년은 박 대통령이 서거한 해이기도 하다. 그의 집념이 담긴 치산치수의 결실을 매듭짓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복지정책 50년

경제발전과 함께 발전한 복지정책

글 : 金鍾大 전 보건복지부 기획관리실장
정리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 “박정희 대통령, 신현확 보사부 장관에게 의료복지정책 수립을 특별 당부”
⊙ 사회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의료보험 통합을 강행… 의보 재정파탄

金鍾大
⊙ 1947년생. 서울대 정치과 졸업. 대구한의대 명예보건학 박사.
⊙ 보사부 사회보험국장, 의료보험국장, 보건복지부 기획관리실장 역임. 현 대구가톨릭대 의과대 교수.
의료보험 제도 실시 직후 병원에 몰려든 환자들. 1977년 7월 1일 처음 시행된 의료보험 제도에는 513개 조합 314만명(전 국민의 8.8%)이 가입했고 점차 가입자가 늘어 12년 후 전 국민으로 확대됐다.
  한국의 정책 역사는 1961년 5·16에서 시작된다. 4·19 이후 장면 과도정부에 분출된 사회개혁에 대한 요구들이 5·16 군사정부의 ‘혁명공약’으로 실천됐기 때문이다. 4대 사회보험(산재보험·건강보험·국민연금·고용보험)과 공공부조(생활보호제도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정책결정 과정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의지와 고민이 배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2년 7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은 내각수반에게 “사회보장 제도를 확립하라”는 지시각서를 내렸는데 3공화국이 들어선 1963년 11월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과 산업재해보상법이 마련되고 그해 12월 의료보험법이 제정돼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사회보장 제도 연구를 통해, 혁명공약이었던 사회개혁이 지지부진한 것을 만회해 보려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먼저 4대 사회보험 중의 하나인 의료보험법을 들여다보자. 이 법은 1963년 12월 제정됐다. 박정희 의장이 1962년 시정연설에서 ‘복지국가건설’을 기본정책으로 공표한 뒤 본격적 연구가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 의료보험법은 ‘강제조항’이 삭제된 채 근로자와 농·어민의 ‘임의가입’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제도적 골격만 마련된, 실효성 없는 법안으로 남게 된 셈이다. 사실 5·16 이후 집권세력이 국민적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 의료보험 가입을 권할 상황이 아니었다. 국가의 경제적 여건과 사회적 성숙도 역시 강제가입은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또한 군사권력으로 집권한 통치자의 정치적 부담이 컸던 당시는 경제적 상황도 대단히 어려웠다. 당연히 의료비에 대한 가계 부담 또한 높았다. 논밭을 팔고, 집을 팔아 병원비를 내야 할 판이었다.
 
  그러다 1976년 12월 의료보험법 2차 전면개정과 이듬해 7월 동법이 시행되면서 자리를 잡게 됐다. ‘강제가입’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비로소 정착된 셈이다.
 
  박 대통령은 1976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국민의료 제도 확립을 밝힌 데 이어 그해 2월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연두 순시에서 거듭 의료보험 실시 검토를 지시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5년 12월 개각 당시 의료보장 제도의 실시, 노사문제 그리고 근로자의 권익옹호와 처우개선 등 어려운 문제가 많은 보사부 장관의 후보 인선에 각별히 신경을 써 달라는 분부가 있으셨다. 박 대통령은 신임 신현확(申鉉碻) 보사부 장관에게 의료복지정책을 쓰되 국방력 강화와 경제의 고도성장이 계속해서 요긴한 우리 현실에 비춰 우리 실정에 맞는 건전한 제도를 마련해 달라고 특별히 당부하셨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신임하던 신현확 장관에게 의료보험법 시행을 맡긴 것이다. 그만큼 대통령의 의료보험 도입 의지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신현확 對 남덕우의 의료보험 논쟁
 
1978년 2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보사부를 순시, 신현확 보사부 장관으로부터 영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강제가입’ 조항이 담긴 의료보험제 시행을 두고 정부 내 논쟁이 컸다. 신현확 장관과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남덕우(南悳祐) 장관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시 남·신 장관은 한국 경제를 이끄는 양대 산맥이 아닌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을 착실히 입안해야 했던 남 장관으로선 의보 시행이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폈다. 경제여건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1976년 당시 국내 상황은 최악이었다. 오일쇼크 위기가 몰아쳐 국민의 가계소득이 줄어 의료비 지출이 막막했다. 서민들은 집에서 재래적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거나 동네 약방이나 약국에서 산 약으로 대증(對症) 치료에 그칠 뿐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을 압도, 사회주의 체제가 우위를 점하는 시대였다. ‘모든 북한 주민은 무상의료를 받는다’는 북한의 대남(對南) 선전이 박 대통령으로선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일간지 사회면은 연탄가스에 중독됐지만 돈이 없어 병원을 전전하다 숨진 서민의 절절한 사연을 중요 기사로 다뤘다. 국민들을 잘살게 해 주겠다며 군사혁명을 일으킨 박 대통령으로서는 굉장히 아픈 대목이었을 것이다.
 
  신 장관은 “사회보험 제도 시행을 더 지체하면 사회불안이 온다. 사회가 안정돼야 경제개발도 안정적으로 달성한다”는 논리로 남 장관을 압박했다. 박 대통령은 신 장관 손을 들어 주었다. 매우 큰 결단이었다.
 
  당시 신 장관은 전체 보사부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했다.
 
  “사회보장 제도 도입이 늦으면 사회가 불안해진다. 비 오는 날, ‘경제’라는 큰 수레가 지나고 나면 무른 땅에 바큇자국이 깊이 팬다. 경제발전 이면의 바큇자국을 지우는 게 공적부조이자, 사회개발이다. 그대로 놔두면 땅이 굳어 버려 바큇자국을 영영 못 지운다.”
 
  보사부 직원들은 신 장관의 말에 100% 공감했다. 사명감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신현확, 차 안에서 일본 의보책 번역하기도
 
1977년 당시 ‘강제가입’ 조항이 담긴 의료보험제 시행을 두고 정부 내 논쟁이 컸다. 신현확 보사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남덕우 장관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4월 청와대에서 신현확(앞쪽), 남덕우 전 장관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1976년 11월 12일 조달청에서 보사부 복지연금국 연금기획과로 발령이 났다. 신 장관이 직접 조달청장에게 전화해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행정고시 출신 젊은 공직자를 신 장관이 직접 ‘리크루팅(recruiting·충원)’할 정도로 의보개혁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단단했다.
 
  연금기획과의 주된 업무는 의료보험 문제였다. 1977년 7월 1일 의료보험이 시행될 예정이었던 만큼 남은 시간이 6~7개월에 불과했다.
 
  필자는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 의료보험 실시사례를 수집하고 꼼꼼하게 분석했다. 각국 의보(醫保) 제도를 비교·검토하며 한편으론 입법도 챙겨야 했다. 한국 의료보험법령의 주춧돌은 그렇게 놓였다.
 
  눈코 뜰 새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산적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연금기획과(나중 보험관리과로 분리되면서 첫 보험관리과장이 되었다) 직원들은 더위를 참아 가며 의료보험법을 두고 씨름했다. 신현확 장관도 승용차 안에서 일본 의료보험 관계 서적을 읽으며 제도를 검토하고, 자신이 직접 읽은 내용을 번역해 실무자에게 보내줄 정도였다.
 
  ‘의료보험은 사업장 근로자부터 시행한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간다.’
 
  우리는 이런 원칙부터 정했다. 먼저 500명 이상의 사업장부터 시행하고 다음으로 300인 이상, 100인 이상 순으로 점차 확대하는 직장 의료보험 사업을 전략적으로 시행키로 했다. 그렇게 하여 얻어지는 노하우를 바탕으로 농어촌 의료보험 사업과 도시지역 의료보험 사업까지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물론 한꺼번에 시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이 여의치 못했다. 시행이 가능한 분야부터 재정상황을 감안해 단계적으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500인 이상 근로자가 있는 사업장부터 의료보험을 시작했을 때, “왜 돈 있는 사람들부터 먼저 시작하느냐”는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500인 이상’이라 해도 모두가 돈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장도 전무도 있지만 일반 사원이나 생산직 사원이 대부분이다.
 
  사실 1977년 7월 의료보험이 시작되기 전인 그해 1월 저소득 영세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호’ 제도가 먼저 시작되었다. 보험료 내기가 버거운 영세민과 생활보장 대상자에게 공적부조 제도로서 ‘의료보호’ 제도를 우선 시행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 가지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장맛비가 몹시 내리던 1977년 여름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기도 안양 만안교 근처에 있던 집으로 퇴근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당시 보사부는 서울 광화문에 청사가 있었다. 폭우 탓에 안양행 버스가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서울역까지 걸어갔다. 서울역에 가면 버스가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려 주머니를 뒤적였으나 텅 비어 있었다. 그때가 밤 10시쯤이었다. 비를 맞으며 새벽이 돼서야 안양에 도착했지만, 우리집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가재도구와 함께 집마저 떠내려가고 없었다. 아내와 어린아이들은 동네 중국음식점 2층에 대피하고 있었다. 바깥일에 매달려 가족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에 목이 메었다. 지금도 장마가 쏟아지거나 의료보험 제도에 문제가 생겨 괴로울 때면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필자에게 의료보험은 그렇게 밥 굶어 가면서 만든 제도다. 비가 폭포같이 쏟아 붓는데도 가족 걱정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은 무심한 가장이 만든 제도였다.
 
 
  전두환, 의보 통합 논의에 제동
 
  1977년 7월 사업장 근로자 의료보험 시행을 시작으로 1979년 1월부터 공무원·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이 적용되고, 1981년 7월부터 지역주민의료보험 시범사업까지 시행됐다.
 
  그러나 1982년 당시 사업장 근로자(1종), 지역주민·자영자(2종), 공무원·교직원 의료보험에 포함되는 인구는 전 인구의 32.3%(1268만900여 명)에 불과했다. 의료보험 대상이 아닌 이들 대부분이 농어민, 도시 자영자, 영세 사업장 근로자들이었다. 의료보험에서 소외받고 있던 이들 또한 대부분 의료시혜가 절실한 저소득층이었다. 그들은 의료보험 수가보다 157% 수준이나 되는 일반 의료수가를 적용받고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2종 의료보험 시범사업 결과, 1년간의 보험료 징수실적이 61.9%인 것도 고민거리였다. 의보재정 적자도 느는 상황이었다. 현 체제로 전 지역 주민에게 의보 적용을 할 때에는 정부의 재정 부담이 가중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1982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의료보험 일원화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당시 정부 측에서는 민정당 이종찬(李鍾贊) 원내총무, 최영철(崔永喆) 보사위원장, 김정례(金正禮) 보사부 장관이 의료보험 일원화에 대해 보고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보사부가 작성한 보고서를 이종찬 총무가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점이다. 당시 이 총무는 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실력자였다. 청와대에서는 김태호(金泰鎬) 정무2수석비서관과 윤성태(尹成泰) 비서관이 검토보고를 했다. 필자 역시 청와대 행정관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이 총무가 주장하는 통합일원화 주장의 요지는 이러했다.
 
  <전 국민을 상대로 조기에 의료보험을 확대실시하기 위해서는 피용자(被傭者)와 자영자를 통합해 단일 관리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피용자 의료보험의 재정 적립금 내지 재정 흑자 분을 자영자에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의료보험 확대가 용이하다.>
 
  이 총무의 보고를 들은 대통령은 윤성태 비서관에게 의견을 물었다. 윤 비서관은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반대 입장을 개진했다. 논리는 이러했다.
 
  <근로자·자영자·농민을 하나의 잣대로 보험료 기준을 마련해야 하나, 소득 파악률이 낮은 게 문제다. 여러 직업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일되고 형평성 있는 보험료 부과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윤 비서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구구절절 맞는 얘기 아닌가? 당에서 공부 좀 해요.”
 
  결국 1983년 의보통합 논의는 표면적으로 잠잠해졌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도 의보통합 법안에 거부권
 
2000년 7월 의료보험통합과 의약분업으로 2001년 3월 건강보험재정이 파탄 나자 김대중 정부는 우선 은행차입(2001~2004년, 35조원)으로 진료비를 지급하면서 보험료를 대폭 인상(3년간 22.5%, 23.4%, 25.7%)했다. 사진은 의약분업 초기인 2001년 8월 서울 성북구 한 동네약국 모습.

  노태우(盧泰愚) 정부 출범 이후 2대 보사부 장관으로 의사협회 회장 출신인 문태준(文太俊) 장관이 취임했다. 문 장관은 1989년 1월 필자를 보사부 공보관에 임명했다. 이른바 여소야대 시절이었다.
 
  1989년 3월 9일 야 3당인 민주당, 평민당, 신민주공화당은 야당 단일안으로 통합법안인 국민의료보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통합 법안은 전국을 단위로 직장·직종·지역에 관계없이 전 조합원의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납부하도록 하는 의료보험 법안이다.
 
  그러다 당시에도 자영업자에 대한 소득 파악률이 몹시 낮았다. 도시 자영업자의 경우 소득 파악률이 11%(농어촌은 60%)에 불과했다. 이렇게 낮은 소득 파악률 때문에 표준소득을 기준으로 보험료가 부과될 경우 소득 노출도가 높은 도시 근로자의 보험료 부담이 자영업자들보다 2.8배 정도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필자는 야당 의원들에게 “통합법안이 시행되면 법 개정의 경과조치 기간인 2년6개월 동안에, 그나마 지금까지 이뤄 놓은 의료보험 체계가 전반적으로 붕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의료보험 통합법안의 곡절 많은 논란이 불가피했다. 그리고 1989년 3월 16일 노태우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열어 ‘통합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가결했고, 노 대통령은 3월 22일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야 3당 단일안으로 국회를 통과한 통합의료보험법안은 그 시행을 멈추었다.
 
  당시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한 일을 두고 뒷얘기가 많았다. 통합법안의 문제점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 필자였기에 대통령의 거부권을 두고 ‘보사부 김종대 공보관의 거부권 행사’라는 말이 회자됐다.
 
 
  김대중, 의보통합으로 건강보험 재정 부실화 초래
 
  필자는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대선 공약인 의료보험 통합이 ‘국민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정책’이라 맞서다 25년간 일하던 자리에서 ‘직권 면직(職權免職)’이란 형태로 쫓겨났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7월 1일을 기해 지역의보, 공무원·교직원 의보, 직장의보를 하나로 통합하고, 단일 보험자(보험회사)로 건강보험공단을 설립했다. 지금까지 사업장 또는 시·군·구 지역별로 노사합의나 주민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의보시스템을 국가관리하에 건강보험공단에서 획일적으로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배제한 국가관리의 획일적 보험방식을 ‘사회주의에 경도된 정책’이라 생각한다. 보험은 수지(收支)를 맞추는 것이 우선이라는 교과서적 논리를 무시하고, 소득 재분배를 우선으로 한다는 사회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의보통합을 강행함으로써 의보재정 파탄을 가져왔다.
 
  국민은 건강보험 파탄으로 4중고를 겪고 있다. 보험료 부담이 늘어나지만, 오히려 보험혜택이 줄어들고 있다. 정부가 파탄 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수가나 급여기준을 재정 절감에만 맞추다 보니 의료의 질과 서비스도 급격히 저하되는 4중고를 맞고 있다.
 
  2000년 7월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으로 2001년 3월 건강보험 재정이 파탄 나자 김대중 정부는 우선 은행차입(2001~2004년, 35조원)으로 진료비를 지급하면서 보험료를 대폭 인상(3년간 22.5%, 23.4%, 25.7%)했고 여기다 국고지원 대폭 확대(2001년 69.1%), 담뱃값에 보험료부담제도(500원) 신설, 의료수가 인상억제, 의료기관 심사강화 등으로 고육책을 써 왔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현재 건강보험 제도 운용의 틀을 선진국의 경쟁방향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 건강보험공단 지역본부(6개)를 상호 경쟁시켜 관리의 효율화를 도모하면서 단계적으로 경쟁과 자율의 폭을 확대하는 방안과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의약분업으로 인해 매년 보험재정 순 지출증가액이 3조원 내외가 되어 이에 대한 개선 없이는 보험재정 파탄 극복과 건강보험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의 또 다른 핵심이다.
 
  현재 매월 1000억~2000억원의 건보재정 적자가 쌓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2012년에 재정이 고갈될 수 있다는 추산이 나오는 상황이다. 2012년은 대선의 해다. 야당이 자신들의 건보재정 파탄을 호도하기 위해 또 다른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울 공산이 크다. ‘무상급식’에 이어 ‘무상의료’다. 무상의료는 건보재정을 완전히 거덜낼 무시무시한 무기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IMF 사태를 넘어

“합의서명 사진 보며 당시의 치욕과 부끄러움 되새긴다”

글 : 鄭德龜 니어재단 이사장
정리 : 徐喆仁 月刊朝鮮 기자

피를 흘린 전쟁은 아니었지만 외환위기는 우리 역사의 가장 참담했던 경제적 수모 중 하나다. 외환위기는 그야말로 ‘국난’(國難)이었고, IMF 협상 테이블은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당시 한국은 잠시 몸을 피할 참호 하나 파 놓지 못한 상황에서, 국제적 룰과 심판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강력한 상대와 협상을 해야 했다.

⊙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으로 인한 금융·기업부실 누적돼 오다 외부 충격으로 폭발
⊙ 기아그룹 문제 해결 시간 끈 것이 가장 뼈아픈 패착
⊙ IMF 측 ‘협약 내용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3당 후보의 각서까지 요구
⊙ 성공보다 실패가 우리 삶에 더 큰 교훈을 준다는 것 뼈저리게 느껴
⊙ 개방화·세계화 통해 우리 경제구조 시장형으로 변해

鄭德龜
⊙ 1948년생.
⊙ 고려대 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교 경영대학원 졸업.
⊙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기획관리실장, 제2차관보, IMF협상 수석대표,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 제17대 국회의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및 국제금융연구센터 소장 역임.
⊙ 저서: <거대중국과의 대화>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 <외환위기 징비록> 등 다수.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가운데)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가 1997년 12월 3일 오후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내외신 보도진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지원 최종 협상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 끝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개인적으로 내가 겪은 외환위기 경험은 아주 특별하다. 우선 위기발생 원인의 생성과 축적, 위기의 확산, IMF 협상, 뉴욕외채협상, 외평채 발행, 저금리 체제 전환, 금융·기업 구조조정, 중소기업 긴급보호 등 외환위기의 전 과정에 현역 경제관료로 직접 참여했다.
 
  소를 잃는 데도 기여하고, 외양간을 고치는 데도 기여한 셈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배를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고, 호수의 물이 완전히 말라 바닥이 드러난 뒤 밑에 널려 있는 수많은 쓰레기를 치우는 경험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1997년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못지않게 아쉬움도 큰 해였다. 당시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온 국민에게 지독한 고통을 안긴 IMF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말이다. 위기가 목전에 닥치기 전까지 수차례에 걸쳐 경보음이 울렸건만 그때마다 이를 무시했다는 후회도 막급했다. 1997년 말 서울 힐튼호텔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IMF와 자금지원 협상을 벌일 때, 그리고 1998년 초 뉴욕외채협상 테이블에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들을 받아들여야만 했을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울분으로 잠을 설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초동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1980년대 초부터 누적돼 온 위기
 
1997년 10월 19일 당-정 정책협의에서 강경식 부총리(가운데)가 재정경제원 정덕구 기획관리실장(왼쪽),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오른쪽)과 함께 증시 추가 부양책을 신한국당 이해구 정책위의장 등에게 설명하고 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환란이 아니었다. 과거로부터 서서히 누적돼 왔던 것이 외부 충격으로 한순간에 폭발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 특히 우루과이라운드가 시작된 1987년부터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방을 통한 경쟁체제로 급속히 바뀌었다. 국제정치 또한 냉전체제에서 탈냉전체제로 이행되면서 경쟁을 가속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세계 각국의 최우선 과제는 바로 생존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물론 기업과 개인 모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1987년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과 함께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를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었다. 5년 대통령 단임 정치의 폐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세계는 급격히 탈냉전화하고 있었으나 한반도에서만은 여전히 남과 북이 대치하는 냉전체제가 지속되고 있었다.
 
  국내의 정치·경제 지배구조 역시 낡은 면모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내외 상황이 변함에 따라 국내 정치와 경제구조 역시 그에 걸맞게 바뀌어야 했음에도 전혀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박정희식 개발 모델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었다. 더욱이 정치인-관료-재벌로 이어지는 트로이카 의사결정구조는 건재했고, 이를 대체할 시장형 의사결정기구와 새로운 정부기능은 아직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5년 단임 대통령들은 자기 임기 동안의 전환기 관리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이연(移延)시키면서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특히 집권 말기에는 권력누수 현상으로 위기에 거의 손을 쓰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취약 시기에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쳐 왔던 것이다.
 
  전환기적 상황에선 대의(大義)를 위해 소리(小利)를 희생시키는 다소 잔인한 선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5년 단임 대통령, 또는 그 뒤를 이을 대통령 후보들은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쪽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위기에 대한 근본적 처방을 내놓기보다 ‘표와 국민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국 정치권과 정부가 1997년 8월 또는 9월에 집중력을 발휘해 위기를 관리했었다면, 또한 국회가 제때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종종 생각해 본다. 아마 환란을 외화유동성 위기단계로 축소하고, 그 발생 시점도 1998년 이후로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며, 1998년 4월의 러시아 위기와 1999년 7월의 대우그룹 부도 사태, 그리고 그 이후 수차례 이어진 여진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두 번의 경보음 외면
 
한보사태로 구속되는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한보사태는 IMF사태로 가는 예고음이었다.

  한국 경제가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던 1997년, 위기를 알리는 징후는 여러 차례 있었다. 첫 번째 경보음이 울렸던 시기는 한보철강 부도 이후 기아그룹 부도유예 적용 전까지라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대기업 부도’라는 경제 문제는 국회 청문회를 거치며 정치 문제로 비화됐고, 그 과정에서 시중은행장들이 구속됐다. 특히 한보그룹의 여신을 맡았던 은행 임원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일련의 비정상적인 사태가 이어지면서 금융권의 기능은 마비됐고, 이는 결국 기업 연쇄부도의 단초를 제공했다.
 
  두 번째 경보음은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였다. 이는 나라 밖에서 울려온 사이렌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비슷한 경제구조와 성장역사를 갖고 있는 동남아시아 각국이 외환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 정부는 한보와 기아사태로 인해 밖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기아그룹 문제를 이런저런 이유로 단숨에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을 끈 것이 가장 뼈아픈 패착이었다.
 
  한보철강의 자금난과 부도설은 이미 1996년 7월부터 주식시장과 주변에 유포되고 있었다. 다만 1996년 9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시중은행들이 4000억원을 지원한 데 이어 1997년 1월 초 다시 1200억원을 긴급 지원해 간신히 시간을 벌고 있을 뿐이었다.
 
  한보철강의 부도는 금융시장 경색이라는 후유증을 낳았을 뿐 아니라 한국 경제 전체에 큰 부담을 안겨 줬다. 부도를 낸 한보철강의 1997년 2월 기준 자산은 5조원이었다. 하지만 총부채는 그보다 1조6000억원이나 많은 6조6000억원에 달했다. 이 차액은 고스란히 금융기관의 손실로 돌아갔다.
 
  3월 초에는 쌍용, 두산, 한일, 진로, 거평그룹 등이 위험하다는 루머가 증권시장 주변을 맴돌았다. 금융시장의 악순환으로 삼미특수강과 진로그룹이 부도를 냈다. 금융시장이 극도의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하자 은행들이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의 어음을 일정 기간 돌리지 않기로 약속하는 부도유예협약을 맺었지만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했다.
 
  대농, 한신공영, 부산 태화백화점 등이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기아그룹도 자금압박으로 위태위태했다. 한보그룹 부도 이후 신용위험에 민감해진 제2금융권이 부실기업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기아그룹이 자금난에 빠진 것이다. 기아그룹은 과잉투자와 판매부진으로 부채가 많은 데다 단기부채비율이 50%가 넘었다. 기아그룹도 부도유예협약 대상으로 전락했다.
 
  정부와 채권단의 기아 처리 방안은 단순 명확했다. 다른 부실기업과 마찬가지로 먼저 경영진을 퇴진시킨 뒤 채권단이 중심이 돼 각 계열사에 대한 정밀실사를 벌여 회생 가능한 기업은 살리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정리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부실기업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김선홍(金善弘) 기아그룹 회장은 채권단의 퇴진 요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따돌렸다. 그러는 사이 시장에 악성 루머가 유포됐다. 금융시장에 불안이 커져 가자 정부는 기아자동차를 법정관리에 넣은 뒤 산업은행이 출자전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를 기아의 공기업화, 국유화로 받아들여 주식을 대거 매도했다. 그로 인해 주가가 폭락했고, 한국의 대외 신인도가 크게 추락했다.
 
  기아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무디스와 S&P(스탠더드앤드푸어스)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낮췄다.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자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자본은 기다렸다는 듯 서울을 빠져나갔다.
 
 
  국가신용등급 추락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1997년 11월 30일 밤 서울 힐튼호텔에서 ‘IMF와의 협상이 타결됐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 금융시장은 1997년 10월 말부터 일대 혼란에 빠져들며 붕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태국에서 시작된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마침내 서울에 도달한 것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기아사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사태수습에 나섰으나 국제 금융계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 한국을 떠난 상태였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서서히 북상해 홍콩 주식시장마저 폭락을 거듭했다. 8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던 홍콩도 국제 투기자본의 공격에 흔들리고 만 것이었다.
 
  재경원은 10월 29일 채권시장 조기 개방과 현금차관 도입 확대, 예치 및 소지 목적의 외화매입 금지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금융시장안정대책’을 서둘러 내놓았다. 한국은행은 달러화에 대한 시중의 수요를 잡기 위해 시중은행에 1만 달러 이상의 달러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실수요증명서를 받도록 긴급 지시했다. 외환시장의 안정을 겨냥한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한번 신뢰를 잃은 외환시장은 정부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환율이 급락하며 좀처럼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재경원은 더욱 강력한 처방을 했다. 금리나 환율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는 대신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 중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것을 투입해서 환율을 방어한 것이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0월의 마지막 날 무디스는 국내 4개 주요 은행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외환은행의 장기신용등급을 Baa1에서 Baa2로,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상업은행의 장기신용등급을 Baa2에서 Baa3로 떨어뜨렸다. Baa3는 투자부적격 단계인 정크본드(Junk Bond) 바로 위 등급이었다. 이날 환율과 코스피는 더욱 폭락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이었다. 재경원은 달러 이탈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확대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다급해진 정부는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는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들며 거절했다.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확산되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11월 초 일본 총리에게 보낸 공식서한을 통해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생기더라도 양국 간 해결방식을 취하지 말고 IMF를 통해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요청했다.
 
  마지막 탈출구였던 일본으로부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정부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길밖에 없었다.
 
 
  강경식 재경원 부총리 전격 교체
 
  1997년 11월은 숨 가빴다. 일요일에는 캉드쉬 총재와 강경식(姜慶植) 부총리의 극비 회동이 있었고, 화요일에는 금융개혁법안의 국회통과가 무산됐다. 가장 바쁜 날은 19일이었다. 이날 아침 재경원 금융정책실은 오후 강경식 부총리가 발표하기로 예정돼 있었던 금융시장안정대책 보도자료를 만들고 내용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10시 쯤 청와대에 보고하러 들어갔던 강 부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으로 임창렬(林昌烈) 통상산업부 장관이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 사태였다. 금융시장안정대책을 준비하느라 바삐 움직이던 금융정책실 직원들은 강 부총리 이임식에 참석하랴, 신임 임 부총리에게 보고할 현안자료 챙기랴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여야 했다.
 
  당시 나는 재경원 살림을 총괄하는 기획관리실장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부총리 이임식과 취임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 임 부총리는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부총리 집무실에서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으로부터 전임 부총리가 준비해 놓은 금융시장안정대책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임 부총리는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수긍했으나 환율변동폭을 15%로 확대한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환시장의 상황으로 미뤄볼 때 환율변동폭이 늘어나는 만큼 원화가치가 절하될 것이 분명한데 확대 폭이 너무 크지 않으냐는 의견이었다. 임 부총리는 환율변동폭을 일단 10%까지만 확대해 놓고 시장상황을 지켜보자고 제안했다.
 
  임 부총리는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금융시장안정대책이 외국 기관투자가들의 호응을 얻어 외채상환 기간이 연장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낙관론을 폈다. 강경식 전임 부총리는 이날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한다”는 입장을 밝힐 예정이었다. IMF행을 부인했다는 점에서 임 부총리는 전임 부총리와 거꾸로 간 것이었다.
 
  당시 재경원 직원들은 임창렬 부총리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그가 일부러 IMF행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임 부총리는 일단 뭔가 노력을 해 본 후 그래도 안되면 IMF로 가겠다는 판단에 그같이 발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위기대응에 실패하면서 그동안 묻혀 있던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각 부문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악순환의 고리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외화유동성 위기는 금융위기로 이어졌고, 이는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산됐다. 아울러 대량 실업과 자살 등 심각한 사회문제도 야기했다. 외화유동성 공급만으로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위기가 너무 깊고 넓게, 그리고 길게 진행됐던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나라는 3개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 터널은 IMF 등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부족한 외화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구조개혁을 단행해야 했다. 그것이 두 번째 터널이다. 세 번째 터널은 미시·거시경제를 선순환 궤도로 재진입시키는 것이었다.
 
  1997년 11월 당시 한국 정부의 외환보유고는 계정상으로만 볼 때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장 사용가능한 외환보유고는 100억 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IMF의 가혹한 협상 조건
 
임창렬 부총리(오른쪽)가 1997년 12월 3일 정부제1청사에서 자신이 서명한 IMF 구제금융신청 의향서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에게 넘겨주면서 악수를 하고 있다.

  1997년 11월 26일, 정부와 IMF 간 협상이 시작될 즈음 재경원 제2차관보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재경원 제2차관보는 국제금융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나는 정부와 IMF 간 자금지원 협상을 맡게 됐다.
 
  IMF는 한국 정부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조건들을 제시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후진국형 경제체질을 선진국형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당장은 입에 쓰지만 장기적으로는 몸에 좋은 보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IMF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체질개선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요구대로 우리 금융시장의 빗장을 일거에 풀어 버리면 국내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은 막대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재경원 협상팀은 한국의 경제상황을 최대한 반영한 협상조건을 IMF에 내밀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시스템이 붕괴된 것을 눈으로 확인한 IMF 협상팀은 한국 정부가 제시하는 자료조차 믿으려 하지 않았다.
 
  IMF는 기본적으로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고 있다. 그 나라가 IMF의 조건들을 수용하게 되면 그 나라의 경제시스템 또한 자연스럽게 아메리칸 스탠더드에 맞춰지게 된다. 거칠게 말하면 IMF의 조건을 수용한다는 의미는 곧 미국 경제의 우산 아래로 편입되는 것을 뜻한다. 재경원 실무팀은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미국의 이 같은 속셈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재경원은 협상팀을 구성한 뒤 곧바로 협상전략을 세웠다.
 
  IMF와의 협상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될 분야는 금융부문 구조조정이라 예상했다. 그중에서도 금융기관 통폐합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IMF는 부실 금융기관을 정리하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재경원은 영업폐지보다는 합병과 영업양수도(어떤 회사의 영업사업 부문을 다른 회사에 매각하는 것) 등을 통해 부실 금융기관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눈물의 합의서 초안
 
  11월 28일 금요일은 IMF와 협상을 벌이던 재경원 직원들에게 몹시 바쁜 하루였다. 이날은 한국 정부와 IMF 간의 협상에서 분수령이 된 날이었다. 임창렬 부총리는 이날 일본으로 건너가 미쓰즈카 대장상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쓰즈카는 “한국이 무너지면 일본도 흔들린다”며 IMF와 별도로 한국에 달러를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는 “IMF 지원을 받는 게 옳다”며 거절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까지 나섰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일본이 등을 돌리자 IMF와 협상을 벌이고 있던 재경원은 상심했다. IMF가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한국 정부로서는 수용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코너’에 몰린 것이다.
 
  이날 오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 클린턴은 김 대통령에게 “한국의 외환위기는 심각하다. 서둘러 IMF와 협상을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은 심각한 국면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점잖은 조언이었지만 속뜻은 경고에 가까웠다.
 
  클린턴 대통령의 전화 한 통은 위력이 컸다. 김영삼 대통령은 곧 바로 강만수(姜萬洙)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IMF와의 협상을 서둘러 12월 초까지 끝내라고 지시했다.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협상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재경원은 일단 협상에 꼭 필요한 소수 정예로 별도의 협상팀을 구성해 힐튼호텔에 투입하기로 했다. 내가 IMF 협상의 전면에 나선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강만수 차관이 힐튼호텔에 파견된 한국 협상단의 수석단장이었고, 나는 교체 수석대표였다.
 
  힐튼호텔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11월 28일 늦은 오후였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한국 협상단의 의지는 결연했다. 11월 28일 힐튼호텔에서의 첫날밤, 한국 협상단은 한데 모여 IMF의 요구사항이 무엇일지 점검하고 그에 대한 대응논리를 찾느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한국 협상단이 밤샘 논의를 끝내고 잠깐 쉬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 29일 새벽 6시30분쯤 IMF 실무협상단이 자금지원 조건을 제시해 왔다. ‘대기성 차관의 정책이행 조건’이란 명칭의 문건, 이른바 합의서 초안이었다.
 
  ‘한국 정부는 앞으로 3년간 IMF와 합의한 대기성차관협정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IMF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
 
  합의서 초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어 한국 정부와 IMF가 합의해야 할 3년간의 경제조정 프로그램 내용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이 초안에 임창렬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서명해서 IMF 이사회에 제출하면 협상은 끝나는 것이었다.
 
  협상조건을 꼼꼼히 읽어 보던 한국 협상단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IMF가 제시한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한국 경제와 국민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3당 후보의 각서까지 제출
 
임창렬 부총리(가운데)와 이경식 한국은행총재(오른쪽)가 1997년 12월 3일 정부제1종합청사에서 IMF 구제금융신청 의향서에 서명하는 모습을 미셸 캉드쉬 IMF 총재(왼쪽)가 바라보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다.

  합의서 초안이 제시된 이후 12월 3일까지 약 5일 동안 한국과 IMF의 실무협상단은 열 차례 이상 합의서 초안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협상이 그만큼 치열했다.
 
  IMF와 가장 첨예하게 맞붙었던 쟁점은 부실 종금사 가운데 몇 개를 폐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IMF에서는 합의서가 IMF 이사회에 올라가기 전에, 즉 캉드쉬 총재와 임창렬 부총리가 합의서에 공식 사인하기 전에 12개 부실 종금사를 퇴출시키라고 요구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재경원은 청솔, 경남, 경일, 고려, 삼삼, 신세계, 쌍용, 한솔, 항도 등 9개 종금사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여기서 한 가지 해 두고 싶은 말은 “종금사를 먼저 정리해야 달러가 들어온다”는 IMF의 주장에 밀려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 종금사를 무더기로 영업정지시켰지만, 당시 일부에서 문제 삼았던 것처럼 정부가 부실은행을 살리기 위해 종금사를 희생시켰다거나, 영업정지 대상 종금사를 선정하는 과정에 어떤 의도가 개입된 사실은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12월 3일 아침 7시35분. 그동안 나이스 단장을 원격조종하며 한국을 애먹이던 캉드쉬 총재가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다. 임창렬 부총리와 김영삼 대통령 등을 만나 한국 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임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는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한국 협상단에서는 내가, IMF 실무협상단에서는 나이스 국장이 배석했다.
 
  네 사람이 협상에 대해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중 캉드쉬 총재가 갑자기 임 부총리와 할 얘기가 있다며 나와 나이스 단장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방에서 나오면서 순간 새롭고 까다로운 조건이 추가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아니나 다를까, 20~30분이 지나서 임창렬 부총리가 나를 방으로 부르더니 한국말로 “저 친구가 꽤 까다롭게 나오는구먼, 3당 대통령 후보의 각서를 받아 오래. 일단 청와대에 보고를 해야겠지”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자금지원 합의서까지 작성해 놓고 서명식만 남겨 놓은 상황에서 새삼 밀고 당기기를 할 처지도 아니었다.
 
  청와대에 캉드쉬 총재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청와대 경제수석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그쪽이라고 별다른 묘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캉드쉬 총재가 요구하는 대로 해야지,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아니냐”는 김영삼 대통령의 의중을 전해 들은 게 오전 10시30분쯤이었다. 오전 중 하기로 했던 서명식은 오후로 미루고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3당 후보들로부터 각서를 받아 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3당 후보의 각서를 받는 임무는 내게 떨어졌다. 일단 총지휘는 내가 맡고, 재경원 고위 간부들이 직접 3당 후보를 찾아가서 서명을 받아 오기로 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에게는 강만수 차관이, 국민신당 이인제(李仁濟) 후보에게는 안병우(安炳禹) 차관보가 가기로 했다. 문제는 당시 제1야당이었던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후보였다. 여당과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나라 경제가 나락에 떨어진 만큼 그 책임은 여당과 정부가 져야 한다는 것이 국민회의와 김대중 후보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쉽게 각서에 서명하지 않을 게 뻔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끝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김원길(金元吉) 정책위의장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김원길 의장은 오랫동안 재경위에서 활동했던 국민회의 내 경제통이어서 재경원의 딱한 처지를 이해해 줄 것으로 믿었다. 우여곡절 끝에 3당 후보의 각서를 모두 받았다.
 
 
  3당 후보 성격 드러낸 각서
 
  각서에는 현 정부와 IMF 간에 체결된 협약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3당 후보들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 각서에 서명을 하는 데도 3당 후보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회창 후보는 재경원에서 만든 원안에 직접 서명했고, 이인제 후보는 재경원의 원안에 자신의 인장으로 박범진 사무총장이 대신 날인하게 했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는 재경원 원안을 일일이 살펴본 뒤 일부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수정했다. 김대중 후보는 각서를 받으러 온 김원길 의장에게 IMF 사태를 촉발한 책임은 현 정부(김영삼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못 박고, 그렇지만 앞으로 IMF와의 약속은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내용을 첨부하라고 지시했다. 김원길 의장은 재경원 원안 대신 별도의 각서를 따로 작성해 김대중 후보에게 서명을 받았다.
 
  이틀 뒤인 12월 5일 미국 워싱턴 소재 IMF 본부에서는 IMF 이사회가 열려 약 6시간에 걸친 격론 끝에 한국에 대한 자금지원 승인이 떨어졌다. 서명식이 끝난 뒤 임창렬 부총리는 침통하고 회한에 찬 어조로 대국민 담화문을 낭독했다. 이어 캉드쉬 총재가 나와 이번 협상을 계기로 한국 경제가 거듭날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는 가끔 서명식 당시 사진을 꺼내 보곤 하는데 사진에 잡힌 내 표정은 너무나 침통하다. 아마 내가 갖고 있는 사진 가운데 가장 침통한 표정이리라. 임창렬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가 앉아서 합의서에 서명하는 바로 뒤에 내가 서 있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그 사진을 보면 지금도 당시의 참담했던 심경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정말이지 치욕적인 역사의 한 장면에 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후 재경부 차관이나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내면서 힘들 때면 당시의 사진을 꺼내 보곤 했다. 내가 이 사진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그 사진 속에 있는 내가 그 어느 때보다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진을 보면서 당시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되새겨 스스로를 낮추게 되고, 그런 마음으로 일상에 임하면 틀림없이 실수가 적어진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우리 삶에 더 큰 교훈을 준다는 것을 나는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IMF 자금지원 그 후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총재가 1998년 1월 1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고 있다. 왼쪽부터 휴버트 나이스 IMF 아·태국장, 캉드쉬 총재, 김대중 당선자, 박태준 자민련총재.

  한국 정부가 IMF에 구조를 요청한 이후 우리는 1997년 12월 3일 IMF 스탠바이 협정자금을 비롯해, IMF 긴급 고리자금인 SRF 자금, IBRD와 ADB 등 개발금융기관 지원자금, G7 등 선진국들의 후원자금 등을 포함해 총 575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공급 계획을 확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자금공급 계획은 구제금융 지급조건이 현실에 맞지 않는 등 불합리한 점이 많았고, 지급 스케줄 또한 지나치게 먼 미래에 배분되었기 때문에 발표 직후부터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그 결과 유동성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
 
  특히 초기 대응과정에서 IMF와 미 재무부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늑장 대응한 데다, 한국 정부도 처음에는 대통령 선거 바람에 휩쓸려 어정쩡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외화유동성 위기가 금융위기, 경제위기로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외화유동성 위기의 불길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잡히기 시작했다. 소방수인 IMF가 갖고 온 물은 거센 불길을 잡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IMF가 초기 진화에 실패한 가운데 외환위기의 불은 때마침 불어 온 대통령 선거란 세찬 북서풍을 타고 더욱 확산됐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불길은 조금씩 약해졌고, IMF와 한국 정부 사이에 존재하던 불신과 불확실성이 정리되면서 급격히 누그러졌다.
 
  한국 정부는 1997년 12월 21일부터 12월 24일까지 IMF와 세칭 ‘IMF 플러스’라고 불리는 수정협상을 벌여 200억 달러에 달하는 IMF 자금을 조기에 제공받기로 합의했다. 큰 불길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형 화재로 이어질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내 금융기관들의 단기외채였다. 1997년 12월, IMF와 G7을 중심으로 한 채권국들은 상호 합의하에 자국 채권은행들에 대한 행정지도에 나서 채권회수를 막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고 유동적이었다.
 
  한국 정부는 1998년 1월 18일 뉴욕에서 채권은행단과 외채 만기연장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218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의 만기를 1년, 2년, 3년으로 연장하고, 기간마다 각기 다른 금리를 적용하는 것이 협상의 골자였다.
 
1998년 1월 3일 서울역앞 대우센터 로비에서 열린 '나라경제 살리기 위한 금모으기운동'에 반지와 목걸이 장신구 등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뉴욕외채협상이 진행되던 1998년 1월 26일 인도네시아가 지불유예 선언을 해 상황이 악화되기도 했으나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새 정부 정책에 신뢰를 보내며 협상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마침내 1998년 1월 29일 외채 만기연장 협상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외화유동성 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김대중 정부는 위기의 단초가 된 한국 경제와 사회의 구조적 문제, 즉 비시장적 요소들을 시장형으로 전환하는 대대적인 구조개혁에 착수한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부문, 기업부문, 노동부문, 정부 등 공공부문의 4대 부문에 대한 개혁을 표방하며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그 결과 금융과 기업부문의 개혁은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노동부문과 공공부문에 대한 개혁은 강한 정치적 저항에 부딪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특히 2000년 4월의 개혁은 더 이상 내실 있게 추진되지 못했다. 결국 4대 부문 개혁은 막대한 재정적자만을 초래한 채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대우그룹의 도산은 겨우 위기진정 국면으로 접어들던 한국 경제를 다시금 뒤흔들어 놓았다. 막대한 규모의 추가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그 여파를 극복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아울러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출된 노동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한국 경제는 총량 면에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자칫 악순환의 궤도에 빠져버릴 수도 있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최우선 과제는 경제를 선순환 궤도로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수출을 정상화해 무역수지를 흑자로 돌려놓아야 하고 생산과 출하, 제조업 가동률 등을 증가시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률을 감소시켜야 했다.
 
  아울러 적절한 유동성관리를 통해 성장에 필요한 통화를 공급하고 과잉유동성에 의한 물가상승과 실물자산 투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다.
 
 
  세계를 보는 국민의 시각 변화
 
1997년 12월 2일 금융노련의 IMF 구조조정안 반대집회에 참가한 한 조합원이 ‘IMF=나의 실직?’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정부는 지나치게 총량지표의 호전에만 관심을 보였고, 이러한 확장적 재정금융정책으로 도처에 버블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2000년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정치의 계절이 시작됐다. 노동부문에 대한 개혁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채 도처에서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으나 총선을 의식한 정부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공기업 민영화 등 공공부문에 대한 개혁 역시 강한 반발에 부딪혀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조기 극복을 정치적 성과로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당시 한국 경제는 세 번째 터널 속에 갇혀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실업을 해소하는 데 정권의 생사를 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기존의 취로사업형 일자리 창출은 실업문제를 해결할 근본대책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는 IT산업을 중심으로 한 벤처기업 육성에도 적극 나섰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너무 강한 지원책이 동원됨으로써 IT부문에 버블이 생기고 금융·재정지원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면서 연쇄도산과 각종 비리사건에 빠져들고 말았다.
 
  내수부문의 진작을 통해 경제성장 기조를 선순환 기조로 돌려놓으려는 정부의 정책은 신용카드의 남발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급격한 가계부채 증가와 신용불량자 양산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저금리 정책의 결과 확대된 과잉유동성이 신용카드 버블과 만나 화폐의 유통속도를 가속화시키고 부동산 등 실물투기를 부추겨 결국 경제의 안정성마저 해치게 됐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은 과거 30년간 유지해 온 박정희식 개발모형(양적 성장 정책)의 한계를 인식하고 경제발전 전략을 전면 수정하기에 이른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 체제로 이행됐다. 하지만 경제발전 전략은 특별히 변한 게 없었다. 관치금융과 정경유착 관행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었고 정치권과 관료, 그리고 재벌로 이어지는 3각 지배구조는 그대로 존속해 있었다.
 
  외환위기는 이런 구조를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개방화와 세계화를 통해 우리 경제구조는 시장형으로 넘어갔고, 양적 성장 위주의 전략도 경쟁력 제고를 통한 생존에 무게중심을 두는 쪽으로 변했다.
 
  1998년 IMF의 캉드쉬 총재는 한국의 외환위기가 전화위복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국제금융계의 시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에 수반되는 고통이 크고 부수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라고만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위기를 통해 한국 국민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새롭게 정립한 경제관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점에서 위기가 웨이크업콜(wake up call)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李秉喆과 삼성

“똑똑한 사람 데려다 바보를 만들면 기업가가 아니다” (사장들에게 수시로 당부하며)

글 : 李弼坤 전 삼성물산 부회장
정리 : 鄭蕙然 月刊朝鮮 기자

⊙ 산업화의 일등공신이 박정희라면, 그 뒤엔 이병철이 있었다
⊙ 사업보국의 신념으로 부강한 경제국가 꿈꿔
⊙ 기력 쇠해 커피잔 못 들어올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업 챙겨

李弼坤
⊙ 1940년생. 서울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삼성물산 입사. 제일제당 상무,
    삼성물산 부회장, 중앙일보 회장, 삼성21세기 기획단 회장, 삼성자동차 회장,
    삼성전자 중국본사 회장 역임, 서울시 행정1부 부시장 역임. 금탑산업훈장, 석탑산업훈장 수훈.
⊙ 現 알티전자 회장.
기흥 반도체공장을 돌아보고 있는 이병철 회장.
  고(故) 이병철(李秉喆) 회장을 떠올리면 흰색 와이셔츠에 노타이, 깔끔하게 다려진 재킷과 가지런히 빗어넘긴 머리가 떠오른다. 이 회장이 작고한 지 어느덧 23년이 흘렀지만, 이 모습은 쉽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회장을 처음 뵌 것은 1964년 겨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삼성그룹에 입사 지원을 했고,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중역들과 함께 앉아 있는 이 회장을 봤다. 단정한 매무새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는 이 회장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무서웠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어 보이는 완벽한 인상이랄까. 삼성에 입사해서 이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그가 남을 배려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적어도 그날의 첫인상은 그랬다.
 
  “우리나라 농촌 경제에 대해 우째 생각하노?”
 
  이 회장이 내게 던진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경상도 억양이 강한 이 회장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힘줘 말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면접을 치른 나는 이듬해에 삼성물산에 입사해 ‘삼성인’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날이 내가 30년 넘게 삼성그룹에 몸담게 된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 회장을 가까이서 모신 것은 1973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부강한 경제 국가 육성에 대한 들끓는 갈망 속에서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삼성그룹은 조선업에 진출할 요량으로 그룹 비서실 내에 조선팀을 만들었다. 당시 김동철씨가 팀장, 내가 관리부 부장이 됐다.
 
  회사의 관리담당은 최고 경영자에게 보고를 자주 하는 자리다. 삼성그룹은 조선업의 입지 선정, 대규모 자금 투입 등 굵직한 결정을 자주 내려야 했다. 대부분의 중요 결정을 최고 의사 결정자가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수시로 이 회장을 만났다. 가까이서 뵌 이 회장은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반듯한 분이었다. 하루 일과가 일정했고, 조선소 입지 선정을 할 때에는 일일이 찾아가 자리를 확인했다.
 
  삼성의 조선사업은 이듬해인 1974년 1차 오일쇼크가 오면서 좌초에 부딪쳤고, 나는 제일제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나는 삼성의 중역으로서 이병철 회장을 만나게 됐고, 이 회장이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매일 불려다니다시피 했다. 체신부 장관을 지낸 고 배상욱(裵相稶)씨가 1984년에 삼성물산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외부 출신이다 보니 이 회장은 나를 자주 찾았다. 사실 이때부터는 이 회장께 매일 ‘꾸중’을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전경련 초대 회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에 아이디어 제공
 
5·16 직후 군사정부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기업을 통한 경제성장을 제안했다.

  1970~80년대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 이병철 회장은 큰 비전을 갖고 있었다. 국가 경제는 엉망이었다. 오일쇼크가 왔고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고, 이는 군사 쿠데타로 이어졌다.
 
  나는 국가의 리더였던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부강한 국가를 이룩하는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이병철 회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키워드는 ‘외자도입’, ‘기업육성을 통한 경제성장과 개발’ 등이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를 통해서 나왔다. 전경련은 동시대를 살았던 경제인들이 모여서 발족했는데, 초대 회장이 이병철 회장이었다. 전경련을 통해 이런 아이디어가 박 대통령에게 전달되는데 이 회장의 공이 꽤 컸을 것이라고 본다. 산업화의 일등공신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그 뒤에는 이병철 회장이 있었던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끊임없는 열정으로 새 사업에 진출했다. 사업의 진출과정을 잘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물자 부족을 해결하고자 갈망했던 1950년대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세웠다. 1950년대 후반 들어서는 보험회사를 만들었다. 국가의 성장 드라이브를 강력하게 추진해야 했던 1960년대에 전자회사, 1970년대 중반에는 중공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또 한 번의 경제 도약을 꿈꿨던 1980년대에는 IT, 통신업에 진출했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삼성의 사업 진척은 거의 맞아떨어진다.
 
 
  사업보국(事業報國)
 
  이는 이 회장의 평소 신념인 ‘사업보국’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회장은 신규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어떤 사업을 해야 국가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관심이 컸다.
 
  이 회장은 사장들을 앉혀놓고 “사업은 시류(時流)에 맞아야 하는 기라”, “자기 수준을 잘 알아야 한데이. 너무 욕심을 내도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시류라는 것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업이다.
 
  이병철 회장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말을 좋아했다. 젊은 시절부터 만주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해서인지 통이 컸다. 특히 ‘일본 종합상사’를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여러 중역에게 일본 종합상사를 유심히 보라고 했다.
 
  왜 하필 일본 종합상사였을까. 이 역시 ‘사업보국’이라는 이 회장의 신념과 맞아떨어진다. 경제 원조 수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우리와 달리 일본은 경제 대국이었다. 이 회장은 일본을 벤치마킹하면서도, 언젠가 일본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이 회장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만 계속 할 생각을 버려라. 일본의 종합상사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다. 일본을 배워서 국가와 삼성의 발전을 위해 모두의 역량을 다해라. 해외 시장을 개척해 수출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1970년대 말에 글로벌 기업 꿈꿔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 건물. 대구시 인교동에 있었다.

  이병철 회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꿈과 함께, 한국을 세계 경제를 이끄는 한 축으로 키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사업을 하는 내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병철 회장은 1970년대 말부터 중역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는 글로벌 시대가 온다. 우리는 수입구조가 취약한데 일본은 기반이 굳건하다. 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전(全) 세계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이에 대한 기반을 닦은 사람은 이병철 회장이다. 이병철 회장이 이 시기에 세계화에 대한 혜안(慧眼)을 갖고 있었고, 이를 직원들에게 지시해 삼성물산이 해외 시장 개척에 앞장섰다. 회사는 기술력은 물론 이와 결부된 마케팅, 판매처가 중요하다. 오늘날 삼성전자의 해외 판매처 개척에 대한 초석을 놓은 곳이 삼성물산이다.
 
  1980년대 초까지 그룹 내에서 삼성물산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인문계의 99%가 물산 입사를 지원했다. 20~30대(代)의 피끓는 젊은이들이 007가방 하나 달랑 들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것에 심취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007작전’이라고 불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전자제품의 수출 판로를 뚫었는데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아 해외 소비자들이 클레임을 걸고, 외교 경쟁 때문에 북한 요원에게 우리 주재원이 붙잡힌 적도 있다. 콜롬비아에서 미팅을 할 때 현지의 마약 게릴라들이 그 건물 아래층에 폭탄을 설치해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이런 우여곡절 중의 일부는 이병철 회장에게 보고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통이 큰 사람이었다. 사업상 일어날 수 있는 실수들에 대해서는 일절 타박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무랐지만,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크게 야단을 치지 않았던 것 같다.
 
  C사장은 이 회장이 많이 아꼈던 사람이었는데, 과음이 잦은 편이었다. 하루는 이 회장이 그를 불렀다.
 
  “니 술 끊을래, 회사 그만둘래?”
 
  직설적인 이 회장의 어투에 C사장이 많이 놀랐다. 물론 C사장은 이후에도 술을 끊지 않았지만, 이를 빌미로 이 회장의 눈 밖에 나지는 않았다. 믿는 직원들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이병철 회장이었다.
 
 
  정치는 不可近不可遠
 
  내가 아는 한 이병철 회장은 정치에 대해서는 거리를 뒀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정치에 대한 그의 신조였다. 이 회장이 한창 사업을 벌이던 시기가 격동기이다 보니, 처음부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정치와는 거리를 좀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개발연대의 거인(巨人)’ 중 한 명인 이병철 회장의 가장 큰 업적으로 인재 양성과 반도체 진출을 꼽고 싶다.
 
  이병철 회장의 ‘인재 육성’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다. 삼성의 채용제도, 교육제도, 사회에서의 역량 강화가 그의 주요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1964년에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처음 회장을 뵀던 나는 나중에 임원이 되어 회장을 모시고 면접을 들어갔다.
 
  이 회장은 “삼성 들어와서 뭐할래? 뭐까지 해볼래?”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가정교육이 한 사람의 인품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서 가족 사항에 대해서도 꼼꼼히 살폈다.
 
  이 회장은 살아생전에 종종 “회사를 경영하는 데 80% 이상을 인재를 키우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에 할애했다”고 말했다.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이들을 잘 키우고, 이들의 일을 공정하게 평가해 그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면접관들에게 이 회장이 이런 얘기를 했다.
 
  “내 보기에 인사라는 것이 참 어렵데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70%가 잘됐다고 하면 성공한 거지. 그러니까 다들 단디해라.”
 
  이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회사의 역량은 사장의 역량과 같다”
 
  이병철 회장은 임원인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관여했다. 나중에 삼성그룹이 커져서 한 해 임원 인사가 300~400명이 됐지만, 주력 계열사는 거의 챙겼다.
 
  이 회장에게는 ‘경영자 그릇론’이 있었다. 부장으로 끝날 사람, 사장이 될 사람이라는 식(式)으로 직원들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했다. 다양한 특성의 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인사의 ‘핵’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늘 “똑똑한 사람을 데려다 바보를 만들면 기업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똑똑한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을 교육을 통해 인재로 길러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삼성의 모든 CEO가 갖고 있는 정신이다.
 
  삼성은 평가의 공정성을 엄청나게 따진다. 회사 내에서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어떠한 프리미엄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삼성의 전통은 이병철 회장이 만든 것이다. 이 회장이 인사에 대해 공정하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서는 ‘나는 이병철 회장의 친인척이 아니지만 열심히 하면 사장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예전에 거래처에 나가 보면 “삼성 사람들은 회사 일이 아니라 자기 사업하는 사람들 같네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삼성을 일궈내는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의 신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신입사원에서 임원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이병철 회장은 특히 ‘사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 회장은 회의시간에 “회사의 역량은 사장의 역량과 같다”고 자주 언급했다. 실적이 좋지 않은 회사 사장에 대해서는 인사 이동이 잦았다.
 
  이병철 회장은 사장이라는 직함을 ‘중책(重責)’으로 보고 중용을 잘했다. 사장의 연공서열이 파괴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입사가 늦은 사람이 먼저 사장자리에 올라서 선배들을 거느리는 일이 잦았다. 이 회장은 애사심이 많은 사람, 회사를 위해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5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
 
1979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둘러보고 있는 이병철 회장(가운데).

  나는 이병철 회장의 또 다른 큰 업적은 반도체 사업 진출이라고 꼽는다. 처음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건의했을 때 이병철 회장은 시기상조라고 망설이기도 하였으나, 이건희 회장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계기로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경제가 이 수준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 반도체다.
 
  하지만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는 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망할 것이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을 할 즈음에 외국 업체들은 벌써 2세대를 앞선 상황이었다. 우리가 16K 개발에 박차를 가할 때 그들은 256K를 하고 있었다. 외국 업체가 몇 세대를 앞서가는 상황에서 이를 따라잡고, 또 넘어서야 했다.
 
  초기 투자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연구소를 만들고, 사장보다 월급을 많이 주면서 외국에서 인재를 스카우트해야 했다.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한 번 정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그는 한 번 결정한 사항이 틀렸다고 판단되기 전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없었다. 물론 탄탄한 정보와 지식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진출을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라도 하면 성공 확률이 있지만, 이거 안 하면 반드시 회사 망한데이.”
 
  이 한마디가 끝이었다. 늦었지만 그나마 지금이라도 사업에 진출을 하면 성공할 수도 있지만, 두려운 나머지 시작조차 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회사가 망한다는 소리였다. 몇 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분명하다.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신 뒤 10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 경제에는 ‘반도체 착시현상’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반도체 하나만으로 수출 실적이 늘어난 해도 있었다.
 
  공군참모총장 출신으로 국무총리를 지낸 고 김정렬(金貞烈)씨가 1970년대에 삼성물산에 몸담았던 적이 있다. 그는 이 회장에 대해 ‘5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철저하게 준비한 뒤 신규 사업 추진
 
해외사업추진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병철 회장.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밀어붙일 때 외부에서는 우려의 빛이 역력했지만, 내부에서 반대를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단순히 회장의 카리스마에 눌려서가 아니다. 그만큼 사장단의 회장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관련 지식으로 무장을 한 다음에야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정보나 판단 근거는 주로 일본 도쿄에서 얻었다. 일본의 전경련인 게이단련 회장과 친분이 두텁고 많은 지인을 가졌던 이 회장은 수시로 일본을 다녔다. 특히 연초에는 도쿄에 머물면서 ‘동경구상’을 했다. 일본에서 들은 내용을 차곡차곡 메모해 뒀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관련자들을 만나서 확인하고, 다시 정리하고 감수를 한 다음에야 사업을 추진했다. 회장의 지식이 확고한데 그 앞에서 뭐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이 회장에게 수시로 불려가는 사장들은 야단을 맞기 일쑤였다.
 
  이 회장을 모시고 하는 회의는 통상 점심시간을 많이 활용했는데 주제에 적합한 계열사 사장들이 주로 불려갔다. 그룹 비서실에서 그날의 주제를 미리 귀띔해 주는 덕분에 준비를 한다고 하지만, 이 회장은 간혹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해서, 또는 이 회장의 작은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 동문서답을 했다가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 이병철 회장의 앞에서는 변명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회장에게 ‘호출’받지 않는 사장단의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좌불안석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회장은 공개적으로 “내는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부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꾸중을 듣더라도 자주 불려다니는 임원은 여전히 이 회장의 신임을 받는다는 증거였다.
 
 
  완벽주의자
 
  이병철 회장은 완벽주의자였고, 일등주의자였다. 계열사 사장들이라면 누구나 ‘일등주의’라는 단어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 것이다. 이 회장은 1등을 하지 못하면 성이 안 차는 분이었다.
 
  조미료 시장에서 삼성이 고전하던 때가 있었다. 대상의 ‘미원’ 브랜드가 워낙 강해서 어떤 제품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이 회장은 우리가 미원을 못 따라가는 이유에 대해 잘 납득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좋다면서 왜 결과는 그 모양이냐고 못마땅해 했던 기억이 난다. 이 회장에게 ‘일등’이라는 것은 운이 좋아 나온 결과가 아니었다.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고, 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화법은 직설적이었다. 직설적으로 주문했고 일하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열심히 노력하는데 잘되지 않는 일은 이해했고, 게으른 것은 용서를 하지 못한 편이었다.
 
 
  산림활용의 시범단지, 자연농원 사업
 
  이병철 회장이 했던 사업이 당대에 사회적으로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간혹 이 회장의 의중이 오해받은 적이 있었다. 자연농원(오늘날의 에버랜드) 사업이 대표적인 경우다.
 
  자연농원 사업에는 이 회장의 큰 뜻이 담겨 있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의 70%가 산림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산림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국토 활용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식목일이 되면 유실수를 심고, 돌산에 불모지였던 450만 평의 자연농원 땅을 가꿨다. 주요 목적은 우리나라 산림 활용의 시범단지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1970년대 중반에 제조업을 등한시하고, 서비스업, 향락업을 한다며 비판했다. 이 회장의 순수한 의도를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이 크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내가 알기에 한비(현 삼성정밀화학)는 이 회장이 돈을 벌 목적으로 만든 회사가 아니었다. 농민이 전체 국민의 60%를 차지했던 시절에는 농민의 발전, 소득보호가 필수였다. 한비는 결과적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회사가 국가에 귀속됐지만, 이병철 회장의 본래 의도와 상관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병철 회장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하지 않았을까 싶다. 삼성그룹은 1970년대 후반부터 폴크스바겐과 만났고, 1980년대 초에는 크라이슬러와 접촉하면서 자동차 사업 진출을 꿈꿨다. 당시까지만 해도 삼성의 차기 사업은 자동차였다. 하지만 법에 저촉됐고 결국 이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삼성에서 시작한 사업 중에는 최초인 것이 제법 많다. 이병철 회장의 평소 소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회장은 남들보다 먼저 시작하고, 제대로 일등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업이 존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등전략과 첨단 관리기법, 사업의 다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회사의 생존 전략 그 자체였다.
 
  이 회장은 평소에 “기술력이 없는 사업에 진출하지 말아라. 괜히 잘못해서 나라 돈만 축내는 것은 국가 자원 낭비다”고 말했다. 사업과 국가를 끊임없이 걱정하던 사람이 이병철 회장이었다.
 
 
  열정
 
  “남 얘기 잘 듣거레이.”
 
  이병철 회장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내가 삼성에 몸담으면서, 이 회장에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바로 이 얘기다.
 
  이 회장은 중역들을 불러놓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성은 고문 제도를 열심히 활용하는 편이다. 과거에 일본에서 기술을 잘 주지 않을 때에는 정년퇴직한 일본인을 고문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계열사 사장이 혼자 생각으로 일이라도 추진할 요량이면, 이병철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 얘기만이 아니다. 남 얘기는 늘 잘 듣거레이.”
 
  나에게 이병철 회장은 무서우면서도 온화한 분으로 기억된다. 나는 말이 빠른 편이다. 하루는 이 회장이 나를 불렀다.
 
  “이 군, 내 두 번째 경고다. 사람이 말을 빨리하면 경박해 보인데이. 말 천천히 해라. 몇 번 더 경고하고 안 들으면 내 니 안 본다.”
 
  이 회장은 믿는 직원들의 개개인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타고난 것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이 회장 앞에만 서면 긴장이 돼서 말이 더 빨라지는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업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병이 있다는 것을 안 이 회장은 연초만 되면 “나 이제 쉴란다”고 했다. 중역들이 이건희 회장과 함께 그룹을 잘 꾸려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런 얘기 역시 당시뿐이었다. 쉬시겠다는 분이 또 회사에 나오고, 또다시 업무 보고를 받는 일이 계속됐다. 커피잔을 한 손으로 잘 들어올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회사에 대한 열정을 내려놓지는 못했다.
 
  이병철 회장은 왜 사업가가 됐을까.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중에 선진문물을 접하고, 드넓은 만주 땅을 오가면서 느낀 점이 많아서가 아닐까 싶다. 사업으로 성공하는 것이 본인은 물론이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껴서일 것이다.⊙

 

[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鄭周永과 현대

사람 잘 뽑아서 잘 부려먹은 계산 철저한 사업가

글 : 權奇泰 전 현대건설 부사장
정리 : 李根美 자유기고가

토목 전공자보다 실력이 더 뛰어났던 정주영 회장. 전문가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방법으로 토목기술을 축적해 불같은 추진력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불가능은 없다는 모험정신으로 국내외에서 기록을 갈아 치우며 수많은 공사를 수행해 현대건설과 국가발전을 동시에 이룩했다.

[권기태가 꼽은 정주영의 다섯 가지 성공법칙]
1. 긴장으로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용했다
2.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이 있었다
3. 전문가를 능가하는 지식이 있었다
4. 치밀한 현장 확인을 했다
5. 원가의식이 철저했다

權奇泰
⊙1932년생. 서울대 토목학과 졸업.
⊙1959년 현대건설 입사. 현대건설 부사장, 두산건설 부사장, (주)한양 사장, 한라건설 회장,
    현대건설 고문 역임.
⊙수상 : 1983년 과학기술상 수상. 2006년 서울대·한국공학한림원 선정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
⊙저서 : <건설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토목시공연습>외 다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공사 현장을 돌아보는 정주영 회장(오른쪽).
  나는 제대한 지 한 달 만인 1959년 3월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대졸(大卒) 엔지니어 30명이 응시하여 10명이 합격했다. 입사하자마자 오산비행장 내 포장공사 현장에 배치되어 미국인 감독의 지시 아래 일했다. 4개월간 포장공사를 마치고 8월에 본사(本社)로 복귀하니 9명은 퇴사(退社)하고 나 혼자만 남았다.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들이 일하기 힘들 정도로 당시 건설현장의 근무환경이 좋지 않았다.
 
  1938년에 경일상회를 설립하면서 사업에 뛰어든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은 6·25 전쟁이 터지기 다섯 달 전인 1950년 1월 10일이다. 전쟁 중에도 공사를 계속했던 현대건설은 1962년에 국내 1위 업체로 떠올랐다. 그때까지 어느 회사가 1위인지 몰랐으나 제3공화국이 국토개발을 위해서 건실한 건설업체를 육성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도급한도액 제도를 실시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정주영 회장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젊고 너무 말라서 놀랐다. 그 시절에는 영양실조로 다들 말랐기 때문에 사장이라고 하면 으레 배가 나오고 살집이 있는 사람을 연상했었다.
 
  정 회장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1959년 8월,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장에 투입되면서부터였다.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200만 달러 공사를 현대건설이 단독으로 수주했다. 경험이 부족하지만 미국인 고문 두 명을 고용하는 조건으로 계약이 이뤄졌다. 6·25 때 폭격을 맞은 도크를 보수하는 공사였는데 현장에서 측량을 해서 도면을 그린 뒤 그것을 어떻게 복구하겠다는 설계도면(shop drawing)을 또 그려야 했다. 내가 도면을 그리는 담당자였는데 도면이 늦어지면 공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면을 작성하면 미국인 고문인 글로브가 승인을 했다. 이때 열심히 하는 나를 정 회장이 기억하고 후일 빠르게 진급시켰다.
 
 
  예리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
 
1964년 단양 시멘트공장 준공 당시 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맞은 정주영 사장 부부.

  인천 도크공사는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로 정 회장은 현장 숙소에 새벽 5시면 나타났다. 출근시간이 6시였는데 그때부터 직원들을 깨웠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시절, 그 시각에 서울에서 왔으니 새벽 3시 전에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정 회장은 예리한 판단력으로 현장에서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11t짜리 갑문(閘門)이 앞뒤로 두 개 있었다. 이 문을 들어올려서 보수를 하기 위해서는 미 해군이 소유한 60t짜리 해상 크레인을 빌려야 했다. 진해 해군기지에서 해상크레인이 출발할 때부터 공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경비를 다 지불해야 하니 임대료가 엄청나게 비쌌다.
 
  정 회장이 그 돈을 아까워해 이리저리 궁리를 할 때 내가 “부체(浮體)를 중립 상태로 놓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자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부력(浮力)을 이용하여 문을 띄워서 공사를 해 보자고 했다. 좁고 긴 수문(水門)에서 시행하기 힘든 공사였으나 정 회장은 모험심을 발휘해 일을 성사시켰다.
 
  공사를 마쳤을 때 환율이 인상되면서 인천 도크공사에서 큰 이익이 났고, 그 이익금으로 서울 무교동 사옥을 건축했다.
 
  정 회장은 운용능력이 비상한 데다 추진력이 있었다. 누가 아이디어를 내면 그 자리에서 어디에 적용할지 찾아내서 바로 실행에 옮겼다. 소양강댐을 사력(砂礫)댐으로 바꾼 것도 정 회장이 즉석에서 생각해낸 일이다. 현대건설이 태국의 파솜댐 공사 입찰 초청을 받았을 때 일이다. 100m 높이의 댐인데 발주는 태국 정부에서 하고 설계는 미국이 하게 되었다. 입찰 설명을 듣던 정 회장이 “우리나라 소양강 댐도 사력댐으로 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소양강댐은 높이 123m의 중력식 콘크리트댐으로 지을 예정이었다. 건설부로부터 수탁받은 수자원공사가 발주자이고 일본공영이 설계를 했다. 시멘트는 일본에서 수입하기로 했고 콘크리트 생산에 필요한 부수적인 것도 관급(官給)이었다. 시공사는 모든 기계와 자재를 보관하고 가공과 설치를 하면서도 노임과 운영비밖에 받을 게 없었다. 그걸로는 적자(赤字)를 면키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태국 파솜댐이 사력댐이라는 말에 정 회장은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소양강에 퇴적된 막대한 사력을 건설재로 사용하면 되니 콘크리트도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시공자가 임의로 변경을 요청하자 건설부와 수자원공사, 일본공영이 반대했다. 하지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력댐이 콘크리트댐보다 낫다고 판단해 허락을 했고, 오늘날 소양강댐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공과대학 출신이 아닌 정 회장은 당연히 토목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어떤 사안이든 금방 이해를 했다. 토목을 전공한 사람이 들으면 “이상한 것도 다 묻는다”고 생각할 만큼 계속 질문을 던져 답변을 듣다가 그 사안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해를 한 다음에는 토목 전공자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방식을 생각해냈다. 그렇게 해서 바로 현장에서 실행한 일이 셀 수 없이 많다.
 
  정 회장은 “나도 갑종(甲種)면허를 갖고 있는 건설기술자”라고 말할 정도로 건설 지식이 해박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비상한 기억력 덕분이다. 한 번 들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지식으로 축적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초창기 건설업은 한마디로 모험정신의 실험장이었다. 그런 만큼 누가 얼마나 더 대범하게 사업을 결정하고 열심히 뛰느냐에 사업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 모험심과 추진력·판단력은 정주영 회장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오늘날의 현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동맥이 되어 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경부고속도로는 현대건설이 아니었다면 훨씬 나중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현대건설은 비행장 활주로 공사를 하면서 도로에 대한 기술을 축적했다. 초창기 대부분의 건설기술은 곁눈질이나 담 넘어가서 배운 것들이다.
 
  1961년에 4월에 착공한 군산비행장 활주로 포장공사에서 콘크리트 제조설비인 배치 플랜트가 꼭 필요했다. 정 회장은 나에게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배치 플랜트 설계를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사방에 수소문을 해 보았다. 미국 회사가 지금의 미국대사관 건물을 건축 중이었고, 그 안에 배치 플랜트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높은 담장을 기어 올라가 배치 플랜트를 확인한 후 정문 경비원을 회유해서 경내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국산 제1호 배치 플랜트를 만들었다.
 
  이후 수원 광주 대구 활주로 포장공사를 미국업체와 같이 수행했다. 다 합쳐서 10km에 불과했다. 정 회장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다. IBRD 차관공사인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공구 수주 경쟁에서 현대건설은 최저가인 520만 달러를 제시했다. 2위는 580만 달러로 60만 달러나 차이가 나자 도로국에서 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정 회장은 이때 포기하면 현대건설은 해외공사를 영원히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인식하여 계약을 결심했다.
 
  1965년 5월부터 방콕에 터를 잡은 현대 기술진은 인근 독일, 이탈리아, 일본 회사의 현장을 견학하면서 어떤 장비를 사용하는지 살펴보았다. 국내업체 가운데 최초로 해외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운 파타니-나라티왓 구간은 1968년 5월에 준공했고, 10년이 지나도 파손된 곳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에 서독을 방문하여 아우토반을 질주해 본 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총 건설비 700억 원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 고심하던 차였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의 태국 고속도로 건설 소식을 접한 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을 연구해 보라고 했다. 정 회장의 지시로 다양한 조사를 한 끝에 330억원이면 건설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길로 청와대에 가서 내가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설명했다.
 
  1968년 2월 현대건설이 서울-수원 구간을 시범건설하게 되었다. 젊은 공병(工兵)장교들이 이 구간에서 연수를 받아 다음해부터 전 공구(工區)에서 감독을 했다. 2년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420km의 4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한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정주영 사전에 난공사란 없다
 
1981년 사내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사장.

  정주영 회장 사전(辭典)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난(難)공사여서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1972년 파푸아뉴기니 라무 지하수력발전소 공사는 하상(河床) 및 지하 200m에 지하동굴을 만들고 발전기를 설치, 낙차(落差)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일종의 유역변경형 수력발전소이다. 정인영(鄭仁永) 사장은 난공사라며 입찰에 응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난공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승산이 있다”며 적극 참가하라고 나에게 강하게 명령했다. 정 회장은 “선진국 회사와 같은 기술과 경험이 없으니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이런 난공사만이 우리를 크게 부각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정 회장의 적극적인 의지로 입찰에 응했고 결국 성사가 되었다. 대신 공사경험이 없는 우리가 다른 업체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식대로 방법을 찾아 공사를 착착 진행하자 착공 4개월 후부터 다른 업체가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다. 1100만 달러의 라무 지하수력발전소 공사에서 현대건설은 이익을 남기고 공기도 6개월 단축하여 준공했다.
 
  중동(中東)지역 진출 역시 정주영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 6월 이란 반다르 압바스 동원훈련조선소를 시작으로 중동시대를 열게 되었다. 계약금액이 800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공사였지만 최초로 턴키 베이스로 설계·시공한 해외 공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당시 정 회장은 조선소 건설관계로 울산에 내려가 있을 때가 많았으나 수시로 본사에 전화를 걸어 당시 부사장이었던 나에게 어서 중동에 나가라고 독촉했다. 내가 중동에 가려고 하자 정인영 사장은 중동진출에 대해 신중론을 펴면서 나가지 말라고 호통쳤다. 정주영 회장과 정인영 사장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울산에서 올라온 정 회장이 왜 빨리 중동에 나가지 않는 거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당장 이란의 테헤란으로 날아갔다. 공사현장은 테헤란으로부터 1000km 이상 떨어진 인가가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현지 사정을 알아보러 갔다가 2~3일 전에 내린 비로 지프차가 진창에 빠져 고생을 많이 했다. 공사가 시작된 뒤에는 공사장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야 했다. 찌는 듯한 더위를 참아 가며 모두들 악전고투했다. 자재 조달은 물론 먹고 입는 것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공사를 수행했다.
 
  같은 해 10월에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를 착공하고 12월에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착공하면서 중동공사는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즈음 정인영 사장이 현대양행으로 가면서 중동공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정인영 사장이 현대건설을 그만둘 때 이명박(李明博) 부사장이 사장에 선임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권기태씨를 비롯한 선배들이 있다는 걸 정주영 회장에게 말하자 ‘그 사람들은 엔지니어여서 관리를 못한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화는 없다>에 MB가 현대건설에 입사할 때 내가 면접관이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면접 당시 일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태국 도로공사할 때 MB가 현장 경리를 맡은 것은 기억난다. 나는 당시 주재이사였다. 나도 진급이 빨랐지만 MB의 진급은 그야말로 초고속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자신이 실력을 인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힘을 실어 주는 스타일이었다.
 
 
  “해 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하느냐”
 
유조선으로 가로막아 유속을 느리게 한 후 마무리한 서산항 간척지 공사.

  정 회장은 ‘안되는 것은 되게 하라’는 불도저식 사고를 갖고 있는 만큼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다. 정 회장의 뜻에 맞춰 열심히 달렸던 나는 1975년 12월 착공한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 때 공사 방식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가 그 공사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정 회장이 말한 준설문제와 말뚝박기 방식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하자 “해 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하느냐.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며 나를 제외시켜 버렸다. 정 회장은 그때쯤 나를 대신할 후배들이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1976년 6월 최대 규모였던 주베일 산업항(港) 계약 당시 계약보증서가 빨리 발급되지 않아 계약이 1개월 연기된 일이 있었다. 중간에 여러 과정이 있었으나 내가 다 잘못한 것처럼 보고되어 그 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울산조선 건설사무소로 가서 7개월간 도크 건설 일을 맡았다.
 
  울산에서 콘크리트 블록을 만들어 중동의 공사장에 공급했는데 여기서도 정 회장의 뚝심이 발휘되었다. 일반해운사를 이용하여 콘크리트 블록을 운송하려면 t당 150달러를 내야 했다. 정 회장은 5000t에서 2만 t 되는 바지선을 제작하여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고 직접 해상운반을 결정하는 대담성을 보여주었다. 직접 운반을 하니 t당 30달러밖에 들지 않았다. 수십만t을 운반했으니 차액만 해도 상상을 초월했다.
 
  1978년에 이란에서 1년간 수주활동이 금지되면서 이라크를 대체시장으로 주목했다. 7개월의 울산생활을 마치고 본사로 복귀했다가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가게 되었다. 1978년 4월에 바스라 하수처리장 공사에 최저입찰자가 되었다. 이 공사는 굴착 깊이 9m, 총연장 20km나 되는 하수관로와 펌프장, 처리장을 건설하는 공사였다. 낙찰되지 않도록 하려고 했으나 2위 8000만 달러의 거의 반밖에 되지 않는 4500만 달러로 낙찰이 되었다. 그 일로 생전 처음 시말서를 썼다. 하지만 이 공사가 기초가 되어 이라크에서 수십억 달러의 크고 작은 공사를 수행했다. 나는 1979년에 이라크에서 돌아와 국내공사를 담당했다.
 
  내가 현대건설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공사는 서산간척공사였다. 해외공사가 퇴조하던 1970년대 말 해외에서 일하던 근로자와 중장비를 활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 이 장비를 국내에서 활용할 명분을 찾고 있던 정 회장은 부족한 토지와 전력을 생각하여 간척사업과 수력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1979년 8월 현대건설은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서산간척사업 면허를 취득했다. 1982년 4월에 B지구를 착수하고 1983년 7월에 A지구를 착공했다. 간척사업의 성패는 최종 물막이의 성공여부에 달려있다. 최고유속(流速) 4~5m면 어렵지 않지만 서산 B지구는 최대유속이 6.5m, A지구는 8m나 되었다. 내가 네덜란드에서 철판으로 물막이한 예를 얘기하자 정 회장이 즉석에서 유조선으로 물막이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유조선으로 가로막아 A지구의 유속을 느리게 한 뒤 1984년 3월 10일 물막이 공사를 완료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훌륭하게 물막이를 해낸 ‘정주영 공법’은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정주영의 성공법칙
 
  25년 동안 정주영 회장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다섯 가지 성공법칙을 발견했다. 내가 본 정 회장은 조직운영의 귀재(鬼才)였다. ‘조직의 효율은 긴장에서 온다’는 것이 정 회장의 첫 번째 성공법칙이다. 건설현장에서 정 회장은 호랑이같이 무서운 존재였다. 입사 후 3일 만에 배치된 오산비행장에서 구내 포장공사를 하던 어느 날 정 회장이 현장을 방문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정 회장을 보자 아버지라도 만난 듯 반가워 달려갔는데 선배 사원들은 딴 길로 도망가고 없었다.
 
  정 회장은 ‘조직의 긴장은 곧 능률이고 정신통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언제나 무리 중 한 사람은 희생양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조직 전체가 늘 긴장 속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은 현장뿐 아니라 본사 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정 회장은 언제나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고, 그 정보가 틀린 적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철저히 대비해도 당할 수가 없었다.
 
  정 회장의 두 번째 성공법칙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에 있다. 건설현장의 일은 동일한 사안도 때에 따라 기후조건, 사회환경에 따라 달라지므로 반복이 없다. 날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돌발적으로 생기는 곳이 현장이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위에서 해결방법을 찾아 신속하게 아래에 전해 다 같이 그 일을 헤쳐 나가야 돌파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 회장은 훌륭한 사령관이었다. 정 회장은 매일 새벽 전국 현장과 전화를 하여 정보를 수집한 후 적당한 해법을 하달했다.
 
  현대건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정 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능력 있는 믿음직한 리더가 있었기에 부하직원들이 마음 놓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은 언제나 현장의 사기와 능률을 향상시키는 지표가 되었다.
 
  셋째, 정주영 회장은 전문가를 넘어서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토목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현장의 그 누구보다도 해박했다. 이는 정 회장이 토목건설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사를 입찰할 때나 시공계획을 확정할 때 반드시 사전에 결재를 받아야 한다.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심문하는 과정이었다. 질문에 충분한 설명을 못하는 자는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걸로 간주하고 재검토 후에 결재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은 뛰어난 기억력으로 전문기술을 완전히 습득해 다음 공사에 활용했다. 기술을 사실지식과 과정지식으로 분류한다면 정 회장은 풍부한 과정지식의 소유자였다. 부족한 사실지식을 결재과정에서 습득하여 최상의 의사결정을 내려 사업에 성공한 것이다.
 
  넷째, 치밀한 현장확인이 정 회장의 성공요인이다. 정 회장은 지나칠 정도로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앉아서 보고받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과 달랐다. 정 회장은 부지런히 현장을 달렸다. 정 회장은 어떤 공정을 언제까지 완료하라고 명령한 뒤 매일 전화로 확인했다. 회장이 언제 현장에 출동해 점검과 질문을 할지 모르니 모두들 긴장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전화로 질문을 받을 때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예를 들어 “토사운반 덤프트럭을 몇 대 가동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15t 덤프트럭 10대”라고 보고하면 “무슨 트럭이냐”고 또 묻는다. “현대차 5대, 대우차 5대”라고 대답하면 “적재함 뒤 문짝이 없는 차는 몇 대냐”는 질문이 날아온다. 아무리 철저한 확인을 해도 차 뒤쪽 문짝까지 확인하기는 힘들다. 그때 대답을 못하면 가차 없이 꾸중이 날아온다. 정 회장이 현장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뒷문짝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굴착, 상차, 운반에 다 비용이 드는데 뒷문짝이 없으면 흙을 흘리게 되고, 그러면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정 회장의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하기 위해 현장에서는 철저한 준비를 했고 그런 것이 바탕이 되어 현대건설이 발전했다.
 
  다섯째, 정 회장은 원가(原價)의식에 철저했다. 근검절약은 곧 원가의식이다. 정 회장의 근검절약 사상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 회장은 원가에 대한 암산능력이 탁월하다. 나는 호주머니에 슬라이드 룰러(slide ruler)를 갖고 다니며 정 회장의 암산을 확인하곤 했는데 틀린 적이 없었다.
 
  중고(中古)차량을 구입하여 태국 고속도로에 투입하고 울산조선소 광장을 5cm 두께로 포장한 것도 다 정 회장의 원가계산에서 나온 결정이다. 해외에 출장가면 국내보다 몇 배의 높은 경비를 지출해야 한다. 따라서 현대건설은 해외에 나가면 국내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각오로 일했다.
 
 
  서산간척지 완공 후 현대건설을 그만두다
 
정주영 회장의 사진 앞에 선 권기태 전 현대건설 부사장.

  나는 1984년 서산간척지 사업이 완공된 후 현대건설을 그만두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이후 틈을 내서 모교인 서울대 토목과에서 강의도 하고 토목 관련 책을 내면서 열심히 일하던 때였다. 1983년에는 과학의 날 ‘과학기술대상’도 받았다. 간척지 사업을 마치고 얼마 안 되어 정주영 회장이 당시 사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저 사람 학문 좋아하니 울산공과대에 가서 교수하라고 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지만 석사학위도 없는 나한테 대학으로 가라는 건 사표를 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25년간 목숨 걸고 뛰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섭섭했다. 정 회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만나 주지 않았다. 사표 낼 때 잠시 들어가서 “바라는 사람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정 회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사사로운 정(情)에 이끌리는 성격이 아니다. 공사 현장에서 결정을 과감하게 하듯 사람을 내보낼 때도 냉정하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물러나왔다.
 
  정 회장이 돌아가신 뒤 산소에 갈 때 MB와 버스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때 “당시 사장이었으니까 내가 왜 쫓겨났는지 알 거 아니오. 정 회장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얘기해 달라”고 하자 MB가 웃으면서 “서산간척지를 TV에서 문제로 삼은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서산간척지가 완공된 후 TV에서 ‘재벌에 매립허가를 줘서 개인이 3000만 평이 넘는 땅을 소유하게 된 건 잘못’이라는 내용의 고발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그 일로 정 회장이 화가 많이 났다고 한다. TV에서 그런 비판 프로그램을 만드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지라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
 
  현대건설을 그만두고 허탈감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내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두산건설과 한양건설을 거쳐 1991년 한라건설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정인영 회장이 중앙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 정주영 회장도 참석했다. 정주영 회장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정인영 회장에게 “당신 권기태 잘 데리고 갔다”고 말했다.
 
  1999년 6월, 15년 만에 정주영 회장의 부름을 받고 다시 현대로 돌아왔다. 복귀했을 때 예전에 왜 나를 내보냈는지에 대해 아무 언질이 없었다. 다시 불려 왔으니 그것으로 오해가 풀어졌다고 생각했다.
 
 
  황해도 앞바다 메워 신도시 건설 구상
 
  내 직책은 고문이었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말동무하면서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정 회장이 2001년 3월 21일에 별세하셨으니 그때 이미 건강이 많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여전히 구상이 많았다. 당시 김대중(金大中) 정권에서 북한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중동 특수(特需)보다 더 큰 시장이 열렸다”는 말을 했다. 그랬으니 정 회장이 사업가로서 큰일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고향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업을 위해 북한에 여러 가지를 베풀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쩌면 나를 부른 것은 말동무나 하고 소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전 한창 때처럼 같이 일해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정 회장은 황해도 앞바다를 메워 신도시를 만들 구상을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그런 구상에 대해 별 반응이 없었다. 소규모 개성공단보다 훨씬 더 좋은 사업이지만 폐쇄된 국가인 데다 우리와 생각이 전혀 다르니 그 속을 알 길이 없었다.
 
  매일 아침 7시에 정 회장이 사무실에서 아들 몽구·몽헌과 함께 커피를 마실 때 나도 참석하여 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정 회장은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한창 때 못지않게 투지에 불탔다. 나한테 이런 저런 제안을 했지만 그런 구상이 구체화되지 않도록 막아 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정 회장은 아들들에게 북한 프로젝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나한테 금강산댐에 대해 묻기도 했다. 정 회장의 마지막 꿈은 북한에 가서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어 한참을 못 뵈었는데 2001년 3월 21일 비서실에서 곧 임종하실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돌아가셔서 분장을 시키는 중이었다. 나의 청춘을 바친 거인(巨人)이 가시는 길에 만감이 교차했다.
 
 
  사람을 잘 뽑아서 잘 부려먹었다
 
  정주영 회장과 25년을 함께 일한 나에게 인터뷰 요청이 종종 온다. 빠지지 않는 질문은 ‘정주영 회장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정주영 회장은 철저한 사업가였다. 이해관계가 분명한 분이었다. 타산적(打算的)이어서 잘하면 함께 가고, 그렇지 아니면 미련 없이 버렸다. 어떤 사업이든 이익이 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했다. 계산이 분명했기 때문에 사업을 크게 일으킨 것이다.
 
  ‘정 회장이 애국심에서 국가적인 공사를 했는가’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나중에 현대그룹이 엄청난 규모로 발전했을 때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현대건설 초창기에는 공사를 하여 이윤을 남기는 데 주력했다.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사업체인 현대건설을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달렸지만 사업이 점점 커지면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정 회장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잘 뽑아서 잘 부려먹을 줄 알았다.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은 정 회장의 직감이 정확했기 때문이고 잘 부려먹은 건 충성하도록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를 확실히 주고, 획기적인 인사를 했다.
 
  현대건설에서 밀려난 일로 섭섭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다. 거인과 함께 일하면서 마음껏 일할 무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2006년 서울대학교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되었다.
 
  1980년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건설기술이 일반화되었지만 그 이전의 건설공법은 모두 현대건설이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현장감각과 실력이 뛰어난 정주영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의 건설이 발전한 것이다. 또다시 그런 큰 인재가 등장해서 우리나라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키길 기대해 본다.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너무 놀랐고 믿어지지 않았다.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회장이 시아버지 정주영 회장 이상으로 현대건설을 발전시키길 기대한다.⊙

 

[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具仁會와 LG

“아따 마, 나는 사람 죽이는 물건 안 만들란다. 장사 안 한다” (무기업 진출을 검토했던 금성사 중역회의에서)

글 : 鄭蕙然 月刊朝鮮 기자

⊙ 경제개발계획 이전에 사업의 기틀 마련… 이후 전선·정유사업 추가
⊙ 철저한 유교 가풍으로 ‘인화 LG’의 토대 만들어
⊙ ‘잘 생기면 잘생긴 대로,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받아들여라’는 인재관

李憲祖
⊙1932년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57년 락희화학공업사 입사. 한국콘티넨탈카본 이사,
    국제증권 사장, 금성반도체 사장, 럭키금성상사 사장, 금성사 회장(현 LG전자), LG인화원 회장 역임.
    동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 수훈.
⊙ 저서 : <일과 말들의 화석> <붉은 신호면 선다> 등.
국내 최초 국산화한 전화기로 시험통화하는 구인회 창업회장(가운데).
  “한국의 ‘선비 경영자’였지요.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결단력 있고 꼿꼿한 그런 분이었죠.”
 
  이헌조(李憲祖) 전(前) LG전자 회장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얘기했다. 그가 떠올리는 고(故) 구인회(具仁會) LG그룹 창업 회장은 이런 사람이었다. ‘선비 경영자’라는 표현 속에 여러 의미가 함축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인회 LG그룹 창업 회장은 삼성의 이병철(李秉喆), 현대의 정주영(鄭周永) 회장과 함께 폐허가 된 우리나라의 경제를 일으켜 세운 1세대 경영인이다. 하지만 이병철, 정주영 회장보다 일찍 타계(1969년)한 탓인지, 그와 관련된 스토리는 많이 전해지지 않았다. 구인회 회장에 관한 얘기를 듣기 위해 지난 12월 2일, 이헌조 전 회장의 자택을 찾았다.
 
  구 회장의 사돈인 허씨 가문의 고 허정구(許鼎九)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이 이 전 회장의 외삼촌이다. 그는 6ㆍ25 때 부산으로 피란 가서, 또 락희화학(LG화학의 전신)에 입사하기 전부터 종종 구인회 회장을 뵀다고 했다.
 
  이 전 회장은 “구인회 창업 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기업인”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구 회장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나오기 이전에 대다수의 사업에 진출한 상태였다. 럭키(Luckyㆍ행운)에서 이름을 따온 락희(樂喜)화학은 1947년에 설립돼 치약ㆍ크림을 판매하고 있었고, 1958년에 설립된 금성사(LG전자의 전신)는 라디오ㆍ선풍기ㆍ전화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LG그룹은 이후에 전선사업 등을 추가하며 한국의 대표 기업이 됐다. 1960년대에 이미 오늘날 LG그룹의 면모를 갖춘 셈이다.
 
 
  조선시대 높은 관직 지낸 할아버지가 사업 반대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에 따르면, 구인회 창업 회장은 철저한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구 회장은 집에서 한학을 익히다 지수보통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일본강점기에 서울로 올라와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귀향(歸鄕)했다. 이후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면서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마을에 상술에 능한 일본인이 잡화를 팔고 있어서, 이에 대응해 주민들을 모아 소비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결국 구인회 회장은 지수협동조합 이사장이 됐고, 1931년에 진주에 ‘구인회 상점’이라는 포목상을 열었다. 사업가로서의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워낙 유교 가풍이 철저했던 구씨 집안에서는 이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원칙에 따르자면 ‘장사’는 가장 하위의 일이었던 것이다.
 
  구 회장의 할아버지는 ‘교리’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었다. ‘교리’는 조선시대에 집현전·홍문관·승문원·교서관 등에 둔 정5품 관직이다. 구 회장의 할아버지는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서 칩거를 하던 중이었는데, 뼈대 있는 유교 집안의 장손이 장사를 하는 것이 예뻐 보였을 리 없다.
 
  나중에야 구 회장의 할아버지가 “네가 굳이 하고 싶으면 해봐라”고 허락해서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구 회장은 광복 직전에 화물차 30대로 운송사업을 했고, 광복 직후에는 군정청 승인 제1호 무역업체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사농공상 중 ‘상’을 생업(生業)으로 정했지만, 구인회 회장은 늘 유교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경영을 해왔다.
 
 
  LG에서 하지 말아야 할 사업
 
호남정유 여수공장 준공식에서 기념사하는 구인회 창업회장.

  이헌조 전 회장은 구 회장이 ‘해야 할 사업’과 ‘하지 말아야 할 사업’ 간의 경계를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1960년대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정부는 국가가 운영해 온 방위 산업의 일부를 민영화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었다. 이 중 일부를 금성사에 맡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오갔다. ‘금성사가 회사 운영을 잘하고 있으니 병기창 사업을 맡기자’는 제안이었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다.
 
  “금성사 중역들이 모두 반겼습니다. 정부와 하는 사업은 안정적이니까요. 어떻게 병기창 사업을 할 것이냐에 대해 의견을 활발히 교환하고 있었습니다. 구 회장이 가만히 앉아서 이 사람, 저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었지요. 잠자코 듣던 구 회장이 ‘됐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아따 마, 내는 사람 죽이는 물건 안 만들란다. 장사 안 한다’고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중역들이 입도 뻥끗 못하도록 강하게 말씀했지요. 아무리 돈이 된다 해도 사람에게 해(害)를 입히는 물건은 만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습니다. 유교에 나오는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고나 할까요. 해야 할 사업, 하지 말아야 할 사업의 기준을 만든 겁니다. 사업을 하면서 이윤만을 따지지 않는 분이었죠.”
 
  LG그룹은 나중에 유도체를 만드는 고도의 전자 장비 회사인 ‘금성정밀’을 세운다.
 
  이 전 회장은 “유도체가 탄두와 같은 직접 살상 무기가 아니어서 그나마 사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나마 구 회장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회사가 세워졌다”고 했다.
 
 
  철저하게 믿고 맡기는 타입
 
  구인회 창업 회장은 회사의 일에 대해 일일이 기획하고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직원들에게 업무를 철저하게 분담시키고 간섭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구 회장의 라디오사업 진출은 락희화학 윤욱현(尹煜鉉) 기획부장의 아이디어를 채택하여 시작됐다. 구 회장은 중역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큰 틀에서 결정하는 역할만을 했다고 한다.
 
  LG가 1962년에 경기도 안양에서 한국케이블 공사를 할 때의 일이다.
 
  이 전 회장은 당시에 건설본부장으로서 오전에는 건설 현장에, 오후에는 경리 업무를 맡았다. 하루는 안양 공장에 근무하던 현장 사람들이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그를 찾아왔다.
 
  사연은 이랬다. 구 회장이 불시에 공장을 방문했다가 배관 공사 하나에 대해 변경을 지시한 것이다. 배관을 필요 없이 크게 설계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장 뜯어고치고 설계 변경하라’는 구 회장의 지시에 현장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달려온 것이다.
 
  이 전 회장은 구 회장을 찾았다. 왜 배관을 평소보다 조금 크게 설계했는지에 대해 한참 설명을 하는 동안 구 회장이 잠자코 듣고 있더란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이랬다.
 
  “그래?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한참을 설명하고 있던 이 전 회장이 오히려 머쓱해질 정도로 명쾌한 답이었다.
 
  실제로 구 회장은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을 키우는 것이 곧 기업을 키우는 일이다”는 말을 자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 회장의 사람에 대한 ‘신의(信義)’는 후대 경영자인 구자경(具滋暻) LG그룹 명예회장, 구본무(具本茂) LG그룹 회장에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호남 출신 등용
 
  이헌조 전 회장은 구 회장의 이 같은 일화가 모두 그의 휴머니즘에서 비롯됐다고 전했다. 이 전 회장이 구 회장 살아생전에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사람 함부로 다루는 거 아니다’는 것이었단다.
 
  이 전 회장의 얘기다.
 
  “구 회장은 사람을 많이 아꼈습니다. 회사에 이윤을 많이 가져오고, 일을 잘하는 사람만 총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 생기면 잘 생긴 대로,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간혹 실적이 부진한 사람에 대해서도 ‘두고 보레이. 언젠가 하지’라고 했습니다. 구 회장 시절에는 사람을 내보내는 일이 극히 적었습니다. 나중에 LG가 국제화 시대를 맞으면서 구조조정 등으로 성과주의 바람이 불기는 했습니다만. 구 회장은 사람 자체를,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를 그냥 존중하고 아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LG의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의 기초가 됐다고 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구 회장은 사람들이 서로를 차별하고, 배격하는 일에 대해서도 몹시 나무랐다고 한다. 경남 진주 출신이면서, 오히려 ‘호남 출신’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다.
 
  이 전 회장이 1958년 즈음으로 기억하고 있는 일이 있다.
 
  하루는 구 회장이 “이 사람아, 자네 호남 사람으로 유능한 사람 있으면 추천해 봐. 우리 회사도 이제 호남 사람 뽑아야지”라고 하더란다. 이후부터 LG는 호남 출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배려했다고 한다. 전적으로 구인회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이 전 회장의 얘기다.
 
  “사람은 전부 같은 사람이지,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구 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구 회장은 사람에 대한 차별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중역들이 그런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금물이었죠.”
 
 
  1960년대에 정부 보증 없이 차관 도입해 화제
 
  박정희 정부가 기업들에 대해 ‘부정축재 환수’를 명했을 때, LG그룹은 전선 공장을 할당받았다. 하지만 다른 그룹에 비해 정부의 눈치는 비교적 덜 봤다는 것이 이헌조 전 회장의 증언이다. LG는 1960년대에 화학·전자와 같은 사업도식을 마친 상태이고, 정부의 계획에 따라 개발됐던 조선ㆍ자동차ㆍ건설업 등과 LG의 사업군(群)이 딱히 겹치지 않아서다.
 
  구인회 회장은 국민 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제품을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해, 1950년대 초에 플라스틱 가공제품과 치약 등 생필품 생산을 하고 있었다. 금성사를 설립한 것이 1958년이었다. 라디오, 선풍기, 자동전화 등을 생산했고, 1960년대 들어서 TV, 에어컨, 세탁기로 품목을 다양화했다. 이후 석유화학산업에까지 진출하며 우리나라 근대 공업화의 기업군을 만들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정부의 지급 보증 없이 독일에서 차관을 들여와 업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해외에서 차관을 빌려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구인회 회장과 거래를 해왔던 독일의 한 회사가 500만 마르크를 선뜻 빌려준 것이다. 그것도 정부와 은행의 지급 보증을 요청하지도 않고서 말이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다.
 
  “나중에는 정부에서 독일에 광부, 간호사를 보내면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애쓰기도 했습니다만, 우리가 거래를 해온 독일의 ‘후에라이스터사’라는 회사에서 LG에 500만 마르크를 빌려줬습니다. 대한민국의 LG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요. 그쪽 회사 대표가 구인회 회장을 참 좋아하고 깊이 신뢰했습니다. 정부의 지급 보증을 요청하지도 않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에게 그 큰돈을 빌려줘서 한동안 화제가 됐습니다.”
 
 
  “저그 할아버지들끼리 돈 때문에 싸웠다 하면 우리를 우째 생각하겠노”
 
구인회 회장이 외부 파트너들과 회의를 하는 모습.

  구인회 회장은 ‘통이 큰 경영인’이었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다.
 
  “5ㆍ16혁명이 끝나고 1964년에 민간 라디오 방송, 민간 TV 방송이 생겼습니다. 허가 신청을 하라고 해서 사돈지간인 이병철씨와 구인회 회장이 신청을 했습니다.(이병철 삼성 회장의 둘째 딸 숙희씨가 구인회씨의 셋째 며느리다-편집자 주). 그냥 사돈끼리 5대 5로 합작해서 방송을 하자고 합의를 하고 똑같이 투자를 했습니다. 그때 삼성은 라디오 서울을 맡고, LG는 민간TV를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길어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라디오는 투자 비용이 적게 들고 라디오 기기 보급률이 높아서 청취자의 반응이 빨랐습니다. 반면 TV는 시설비가 엄청나고, 수상기가 잘 보급되지 않아 수익이 잘 생기지 않았습니다. 합작회사이다 보니 이사회에서 자꾸 TV 쪽을 공격하게 된 겁니다. ‘TV는 왜 이익을 못 내고 자꾸 투자만 하라고 하느냐. 돈 내라는 것도 지겹다’면서요. 결국 LG가 삼성의 지분을 돈을 주고 인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합의를 하고 약속된 날에 우리 측 김주홍 전무가 찾아갔는데, 삼성에서 돈을 받지 않은 겁니다. 차일피일 미뤘는데 가만히 보니 우리의 생각과 좀 달랐습니다. 삼성에서 TV를 경영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내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요.
 
  “삼성이 우리가 그 대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고 무시한 것이 아니냐, 락희가 해보자, 돈이 얼마 들어가더라도 TV만큼은 우리가 하자고 난리가 난 겁니다. 다른 회사 임원들까지 각오가 대단했지요. 다른 곳에서 돈을 벌어서 얼마를 쏟아붓더라도 우리가 해야겠다고 한 겁니다.”
 
  이 전 회장의 얘기에 따르면, 사돈 그룹인 삼성과 LG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교양 TV에서 상무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던 구인회 회장의 자택으로 가서 매일 보고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구인회 회장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아이고 헌조야. 안 되겄다. 티비 삼성에 넘기자’ 이러는 겁니다. 제가 놀라서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습니다. 중역들도 각오가 대단한데 대체 왜 이러시느냐고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구 회장이 꼼짝도 않는 겁니다. 제 얘기를 한참 들으시더니 이러시데요.
 
  ‘아무리 그래도 안 되겄다. 내한테는 친손주, 이 회장한테는 외손주 아이고. 내 죽고 나서 저그 할아버지들끼리 돈 때문에 싸웠다 하면 우리를 우째 생각하겠노. 손주들 때문에라도 내가 물러날란다’고 했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손주들의 평가까지 생각을 한 겁니다. 유교적 사고방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나서는 동생 말려
 
  LG의 구씨 가문에는 직접 정치에 나선 사람이 있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구태회(具泰會) LS전선 명예회장이다. 구인회 회장의 동생인 구태회씨는 공화당 6ㆍ7ㆍ8대, 유정회 9대, 공화당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헌조 전 회장은 “구인회 회장이 동생의 국회 진출을 말렸다”고 했다.
 
  “구인회 회장은 정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동생이 정치에 나섰을 때 하지 말라고 말렸지요. 사실 구태회씨가 정치에 나선 것은 당시 공화당에서 요청해서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결국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구 회장은 기업인이 정치와 가까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 회장은 정치에 대해서는 데면데면한 태도였지만, 우리나라 국민과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전쟁이 소용돌이치던 1950년대 초반에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었던 것은 국민들을 생각해서였다고 한다.
 
  구 회장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기업이 생활용품을 제대로 만드는 것도 애국(愛國)하는 길이고, 전쟁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1954년에 국내 최초로 치약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 회장은 “버터 먹는 미국 사람 치약하고 김치 먹는 한국 사람 치약은 달라야 한다. 우리에게 맞는 물건을 만들자”며 중역들을 독려했단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
 
  LG그룹이 추구하는 가치 중 하나는 인화(人和)다. 이헌조 전 회장은 “그룹을 이끌고 있는 기본 가치를 세운 것은 구인회 창업 회장”이라고 했다.
 
  그의 얘기다.
 
  “사람들이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창업 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창업 당시에는 회사가 작아서 주로 가까운 사람들이 회사 운영을 하다 보니, 서로 신뢰하면서 맡은 책임을 다하자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구 회장이 강조하는 인화는 어정쩡한 가족주의나 온정주의가 아닙니다. 사전에 충분히 합의를 하고,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책임의식을 말하죠. 서로 합심(合心)해서 최상의 결과를 내자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를 듣다 보니, 구인회 창업 회장은 사업보다는 ‘사농공상’ 중 ‘사’에 해당하는 학자의 길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학자적인 재질보다 경영자적 재질이 강했다”고 잘라 말했다.
 
  “구 회장은 현실 감각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직원들을 믿고 맡겼다는 것이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경영을 맡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력이 강하다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게다가 창업 회장은 10대(代) 때부터 유달리 모험심이 강했다고 해요. 학교를 다니다 귀향해서 ‘조합체’를 만들어서 일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죠. 남이 안 하는 것을 해보겠다는 도전 의욕도 유난히 강했고요.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고집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아마 구인회 회장 시절에 LG가 실패를 모르고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가족 간에 이해관계 따지는 것 배격
 
구인회 창업회장.

  구씨 가문은 대가족이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에 따르면, 이들 가족에게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고 한다. 세뱃돈을 주는 경우도 그랬다. 가령 진학 전 아이는 얼마, 초등학생은 얼마, 중학생은 얼마라는 식(式)이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정해둬야 모든 가족의 불만이 없고 협조가 잘된다는 것이 창업 회장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구인회 회장은 자식들에게 ‘돈’에 대해 깐깐하게 가르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물건을 사면 사용기간을 정해 그때까지 아껴쓰도록 했고, 한푼의 돈도 헤프게 쓰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단다.
 
  LG가의 이런 가풍은 ‘장자우선주의’를 만들었다.
 
  이헌조 전 회장은 “구 회장이 작고한 다음에 동생들이 조카인 구자경 명예회장을 회장에 추대했다”며 “가족끼리 재산싸움이나 경영권을 둔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구인회 회장 시절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구인회 회장은 집안 내부에서 서로 이윤을 더 챙기고자 싸우는 것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유교적인 사고에서 볼 때, 가까운 사람끼리 이해관계를 가지고 다투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다.
 
  이 전 회장은 “구인회 회장이 돌아가실 때 가까운 친척만 100명 정도였다. 단 한 번도 트러블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철저하게 유교적인 베이스가 있어서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사돈기업으로서 회사를 함께 경영해 온 LG의 구씨 가문과 GS 허씨 가문이 그룹의 경영을 분리할 때에도 밖으로 잡음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대중교통 이용해 모임 참석
 
  구인회 회장 스스로도 자신에게 굉장히 엄격했다고 한다.
 
  본사가 있는 부산에 주로 거주했던 구 회장은 종종 서울의 반도호텔에 위치한 서울사무소에 오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하면 늘 혼자였다. 다른 그룹은 회장들을 위해 몇몇 대형차가 준비됐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다.
 
  “구 회장은 서울에 오실 때 직원들이 차편을 물으면 ‘너그들은 나오지 마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마이크로패스라고 여러 사람이 같이 타는 택시가 있었어요. 큰 버스보다는 작고 택시보다는 큰 봉고 같은 거였죠. 그 차편을 이용해서 모임 장소까지 가곤 했습니다. 그때 금성사가 워낙 잘나갔고, 다른 회장들과 재력은 비슷했거든요. 누가 봤으면 회장이라는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소탈했습니다.”
 
  구 회장이 가장 즐겨 먹었던 음식 중 하나는 보신탕이었다.
 
  이헌조 전 회장은 과장 시절 을지로 3가 판매사무소에서 박승찬 당시 상무와 함께 라디오 판매 일을 했다. 구인회 회장은 서울에 오면 이곳을 곧장 찾곤 했다. 구 회장은 으레 박승찬 사장, 이 전 회장과 함께 청계천가에 있는 보신탕 집에서 한 끼를 해결했단다.
 
  이렇게 소탈한 모습 때문인지, 구 회장이 회사 업무에 한창이던 때에는 그 앞에서 토론이 벌어지기가 일쑤였단다. 구 회장이 직원들에게 권위적이지 않아서, 중역들은 회사의 중대 사항을 구 회장 앞에서 목소리 높여서 설명하고 간혹 다투기도 했다.
 
  이헌조 전 회장은 “구인회 회장은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다. 중역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도 무언가 결정할 일이 생길 때 우유부단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연암 구인회. 그는 사농공상적 직업관이 투철한 시대에 어려운 공상의 길로 투신할 만큼 도전정신이 강한, 그래서 대한민국의 효시가 되는 사업을 개척한 대한민국 경제의 거목이었다.⊙

 

[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崔鍾賢과 SK

“당장 급하다고 아무 기술이나 살 수는 없다”

글 : 洪思重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정리 : 崔善姬 자유기고가

⊙ 안감공장에서 원사공장 설립, 유공 인수, 이동통신 인수 거치면서 회사 키워
⊙ “장사꾼과 기업가는 다르다”, 올곧은 성품으로 정부에 쓴소리
⊙ 한국고등교육재단 설립, 국가 발전에 기여할 인재 양성

洪思重
⊙ 1931년생.
⊙ 美시카고대 대학원 사회사상학과, 위스콘신대 대학원 서양학과 졸업.
⊙ 서울대·한양대·경희대 교수,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논설위원·논설고문 역임.
⊙ 저서 : <근대 시민사회사상사> <한국인의 미의식> <한국인에게 미래가 있는가> 등.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정부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1995년 11월 3일 열린 긴급 제계중진회의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 회장.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SK그룹은 최종현(崔鍾賢) 회장의 형님인 최종건씨가 수원에서 시작한 작은 안감 직물공장이 모태다. 형님이 급작스런 병환으로 세상을 뜨면서 회사경영은 당시 부사장이던 그의 몫이 되어 최 회장은 1970년 선경직물 사장으로 취임했다.
 
  SK는 최 회장 생전에 3번 큰 도약을 했다. 그 첫 번째가 1968년의 원사(原絲)공장 설립이었다. 당시에 국내에는 직물공장이 800여 개나 있었지만 대부분 자본금 5000만원 정도의 중소기업들이었다. 선경직물도 그 수준이었다. 공장이 난립하면서 과잉생산이 됐고 시장은 혼란스러워졌다. 언제 불경기가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감 생산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최 회장은 원사공장 설립을 계획했다.
 
  늘 불안정한 원사 공급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더없이 좋은 일이었지만 당시 직물업자가 원사 생산에까지 손을 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데다 선진 외국으로부터의 기술·기계 설비 도입을 위한 외자(外資) 동원 능력도 필요했다. 게다가 그가 기술 이전을 원한 일본의 원사업체 ‘데이진’은 세계적인 기업이었다. 이제 겨우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선경직물이 데이진과 손을 잡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상대로 데이진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였으니 작은 중소업체인 선경직물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였다.
 
  그는 생각 끝에 아세테이트 원사로 눈을 돌렸다. 일종의 우회작전이었다. 아세테이트는 사양(斜陽)산업이라 경합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국내 수요량이 많아 시장을 독점(獨占)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결국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아세테이트 공장 건설을 위한 지불 보증 승인을 받았고, 1967년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이윤보다 자체 기술개발이 중요”
 
최종현 회장이 직물공장을 돌아보고 있다. 최종현 회장은 안감공장에서 시작한 SK를 석유화학과 이동통신을 망라한 대기업으로 일구었다.

  그 사이 폴리에스테르 생산업체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지금까지 데이진의 독점물이던 것을 일본의 다른 업체들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6년 말 어느 날, 평소 그에게 각별히 호의를 가지고 있던 일본 거래처 이토추의 부사장이 데이진이 아닌 도요보의 기술을 살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말해 왔다. 최 회장은 다음과 같이 거절했다.
 
  “나는 도요보의 기술로 폴리에스테르 사업을 시작할 생각은 없다. 도요보 기술로는 앞으로 일류 폴리에스테르 메이커로 발전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당장 급하다고 해서 아무 기술이나 살 수는 없다. 기업의 생명은 오늘보다도 내일의 전망에 달려 있는 것 아니냐.”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데이진의 오오야 사장은 그의 기업 정신에 반했다. 그러고는 그때까지 거래가 있던 다른 한국 기업들을 제치고 우선적으로 선경을 돌봐주기로 했다. 지금의 선경인더스트리의 전신이자 국내 최초의 폴리에스테르 원사 메이커인 선경합섬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그가 폴리에스테르 생산 기술을 얻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도쿄(東京)를 왕래하고 있을 때 우연히 그를 도쿄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날 저녁 호텔 방에서 그는 ‘남에게 고개를 수그리는 것처럼 아니꼬운 것은 없다’며 교섭이 순탄치 않은 데 대한 울분을 터뜨렸다. 그가 어떻게 해서든 독자적인 기술개발을 서둘러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나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에 성공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산비를 줄이려면 기술 개발보다 로열티를 주고 외국으로부터 사오는 편이 안전하고 유리하다. 그러나 이윤을 많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체적인 기술 개발이다. 부존(賦存)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기술 개발을 통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기고 계속 수출을 확대시켜야 발전할 수 있으며 이것이 한국 기업가의 사명이다.”
 
  선경화학의 기술진이 1980년 말, 미국의 3M, 독일의 BASP, 일본의 소니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비디오 테이프 개발을 할 수 있었던 뒤에는 그의 이런 철학이 있었다. 최 회장이 평소 은근히 자랑하고 있던 몇 가지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폴리에스테르 생산과 비디오 테이프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인데, 이것은 모두 국내 최초의 성과였다.
 
 
  유공·이동통신 인수로 새로운 도약
 
  두 번째 도약은 1975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신년 하례식에서 최 회장은 ‘우리의 목표는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른 산업의 완전 계열화(系列化)를 확립시키는 것’이라며 제2창업 선언을 했다.
 
  사실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말은 이보다 2년 전인 1973년의 선경창립 30주년 기념식 때 처음 했다. 이해에 SK는 일본 이토추, 데이진 등과 합작하여 일산(日産)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온산 지역에 100만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하는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공급 약속을 받아내고 정부로부터 정유공장 건설 내인가까지 받아놓은 바 있었다. 그러나 제4차 중동(中東)전쟁으로 야기된 석유파동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최 회장에게 포기가 아니라 일시적인 유보였다.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은 1980년 11월. 정부는 대한석유공사(유공)의 민영화 계획에 따라 그 인수기업을 SK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SK가 여러 해에 걸쳐 정유공장 건설을 계획해 왔다는 사실과 그동안 다져 온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의 친분을 인정받아 얻은 성과(상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2010년 3월호 참조)였다. 마침내 그해 12월 24일에 최 회장은 유공 사장에 취임했다.
 
  그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20세기형 첨단산업으로 선경을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폴리에스테르 생산에 성공한 이후부터였다. 폴리에스테르가 원유 가공품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그로서는 당연한 발상이었다. 그런 집념이 유공 인수로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21세기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는 1985년 뉴욕에 따로 회장실을 차리고 이곳을 거점으로 은밀히 정보통신 분야 개발 계획을 짜 나갔다. 전년도 선경의 총매출은 15조원이었는데 그중에서 직물 부문은 2500억원에 불과했다. 수원의 한 작은 안감공장에서 시작된 선경이 새로운 사업들로 인해 21세기를 향해 새롭게 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보통신사업에 뛰어들다
 
SK그룹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최종현(오른쪽에서 두 번째) 회장이 1969년 2월 준공된 수원 선경합섬(현 SK케미칼)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정보통신사업이었다. 1992년 신년사에서 “선경그룹이 대통령 사돈이기에 특혜를 받을 것이라는 세간의 눈초리가 두려워서 이동통신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특혜를 받지 않고 공정한 게임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92년 초에 정부가 제2이동통신을 민간에 넘긴다고 발표했을 때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이었다.
 
  정부의 심사에서는 선경이 1등으로 선정되었지만 언론은 대통령과 사돈이라는 점을 들어 ‘선경의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불리한 여론 속에서 계속 사업을 추진해 나간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물론 두고두고 특혜시비에 시달릴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선정결과를 백지화(白紙化)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동의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로서는 여간 괴로운 결단이 아니었다.
 
  그는 제2이동통신사업에 대한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정부 소유의 기존 이동통신 주식을 당시 예상 가격을 훨씬 웃도는 비싼 값으로 샀다. 아마 그 곱절이나 돈이 더 들었다 해도 그는 사려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정보통신사업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경과야 어떻든 뜻한 대로 후에 이동통신 사업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대로 정보통신사업은 SK그룹의 도약에 새로운 날개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는 장남 태원이 대통령의 딸(당시에는 노태우 장관)과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내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노태우 장관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과 사돈이 된다면 기업을 이끌어 가는 데 상당한 불이익이 올 것이 틀림없었다. 또 최 회장의 성격으로 봐서는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위치를 기업에 이용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때 나는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를 물었다. “시카고대학원에서 유학 중 만나 테니스를 치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는 말에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만났으니 정략(政略)결혼이라는 얘기도 나오지 않을 거고 중요한 것은 본인들의 의사 아니겠어?”라고 조언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사돈인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자 그는 회사 임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일렀다. “이제부터 우리 SK는 눈을 밖으로 돌리고 해외에서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해야 한다. 앞으로 6~7년 간은 국내에서는 조금도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경영전략을 새로 짜야 한다.”
 
 
  미국 유학 중 형 돕기 위해 귀국
 
최종현 회장이 1970년대 충주 조림지 산비탈에 나무를 심고 있다.

  최 회장과 나는 시카고대학 유학 시절 처음 만났다. 같은 대학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그는 경제학과요, 나는 사회사상연구소라서 처음 두어 달 동안은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근 반세기에 걸친 우리의 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학 중의 최 회장은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당시 시카고대학 유학생 중에서 비록 털털이 시보레 차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남의 뒷바라지를 잘해 주는 성품이라 유학생들이 이사를 한다거나 다운타운에 나갈 때는 으레 그의 신세를 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일들을 그는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도 나를 대학 기숙사까지 안내해 주기 위해 비행장까지 마중 나온 내 친구를 그가 태워 준 덕분이었다.
 
  그의 비교적 여유 있는 유학생활 뒤에는 형이 있었다. 그는 부친에게 부탁해 유산(遺産)으로 받을 논마지기를 미리 조금 떼어 형님에게 투자하는 셈치고 맡겼고, 형님한테서 이자 조로 송금(送金)을 받고 있었다.
 
  형으로부터의 송금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다음해부터 제때 송금이 안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러던 중 아버지로부터 “빨리 돌아와서 네 형을 좀 도와줘라”는 애절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그전에도 형님이 “그만하면 미국에서 배울 만큼 배웠으니 이제는 돌아와서 나와 함께 일하자”는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그는 일시 귀국이라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짐을 미국에 남겨둔 채 1962년 11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의도 공항에서 회사가 보내준 지프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오는 도중에 최 회장은 운전기사를 통해 어려운 회사 형편을 알게 되었다.
 
  선경직물은 처음 몇 해 동안은 호황(好況)의 연속이었다. 품질이 좋았고, 전쟁의 상처로부터 회복하기 시작한 탓으로 수요도 많았다. 워낙 통이 큰 형은 이런 경기가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계속 생산시설을 늘려 나갔다. 다른 생산업자들도 경쟁적으로 시설을 확장해 나가 과잉공급 현상이 빚어지면서 선경직물은 5000만원이 넘는 부채(負債)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밤잠을 설쳐 가면서 고심하고 있던 형을 내버려둔 채 미국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최 회장은 형님을 돕기로 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부터 회사에 나갔다.
 
  최 회장은 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외국으로의 수출 길을 열어 놓고 정부의 수출장려 정책을 이용하여 단시일 내에 악성(惡性)부채를 모두 갚아 나간 것이다. 형을 설득해 원사공장까지 만들었다.
 
 
  “기업가와 장사꾼은 다르다”
 
최종현 회장은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관리했다.

  이처럼 늘 믿음직스러운 동생이었지만 형이 가진 한 가지 불만은 거래선 사람은 물론이요 정부 관리들을 만날 때에도 조금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잘 “당신 동생은 너무 거만스럽다”는 불평을 들었다. 최 회장은 남들이 아첨하고 아양 떨고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자기도 남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는 ‘장사란 서로 수지가 맞으면 성립이 된다. 아양을 떤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부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떳떳한 일을 정정당당하게 하는데 왜 허리를 굽히고 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평소 그가 자주 했던 말 중의 하나가 “장사꾼과 기업가는 다르다”는 것이다. 1987년 유공이 해외 유전(油田) 개발에 성공했을 때의 일이다.
 
  “노다지를 찾았으니 이제부터는 돈이 쏟아져 들어오겠구나”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장사꾼이고 돈만을 벌겠다면 그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돈 이외의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진짜 기업가다. 나는 돈만을 탐내는 장사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장사꾼과 기업가의 차이는 돈을 어떻게 모으느냐는 데도 있지만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개인적인 이해보다 국가 경제에 대한 공헌을 우선시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기업가 정신이라 할 것이다.”
 
  기업을 하며 인재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꼈다는 최 회장은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시카고대학과 교수와 학생들을 교환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대학이었다. 그 준비의 하나로 세운 것이 바로 한국고등교육재단(1974년 설립)이었다.
 
  그가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교수진이었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학자들부터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꼭 학자가 되지 않는다 해도 세계적인 두뇌라야 새로운 시대의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적어도 장학재단의 장학생 중에서 박사가 100명은 넘어야 한다. 그러면 대학도 살고 아까운 인재를 활용하는 길도 된다.’
 
  이것이 그가 재단을 설립한 이유였다.
 
  그는 재단 기금으로 자신이 당시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 절반을 출연(出捐)했다. 고등교육재단 장학제도의 특징은 장학 유학생들에게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아무 조건 없이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지급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혜택을 받아서 박사가 된 다음에 그가 꼭 어느 기업, 어느 분야를 택해야 한다는 조건도 없다. 단 한 가지 최 회장이 붙인 조건은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우고 최고의 이론을 몸에 익힌 다음에 한국에 돌아와서 사회에 기여하라”는 것이었다. 여기 한 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면 “단순히 최고의 이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의 현실에 맞는 이론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혜택을 받은 장학생 출신은 고려대 최장집(崔章集·정치학) 교수를 비롯하여 서울대 정진성(鄭鎭星·사회학), 동국대 양영진(梁永鎭·사회학), 고려대 임혁백(任爀伯·정치학), 고려대 한성일, 일리노이대 조인구, 서강대 하영원(河英源·경영학), 고려대 염재호(廉載鎬·행정학) 교수 등 현재 100명이 넘는다. 박사학위 취득자들도 어느새 200명 가까이 되었다.
 
최종현 회장의 장학생들. 왼쪽부터 최장집 고려대 교수, 정진성 서울대 교수, 양영진 동국대 교수, 임혁백 고려대 교수, 하영원 서강대 교수, 염재호 고려대 교수.

 
  “기업은 사람이다”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를 묻는다면서 끝내 물어보지 못하고 만 것이지만 SK에는 경영의 3대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인간 위주의 경영이다. 그 안에는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인 만큼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는 1980년 7월에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사람이 업(業)을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는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유포되고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한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기업경영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이것은 조금도 빈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유공을 인수할 때 여실히 나타났다. 2000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고 그대로 인수했다. 한국이동통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93년 제21대 전경련 회장을 맡았다. 소신 있는 기업가였던 그는 전경련 회장직을 그저 명예직으로만 여겨 오던 그때까지의 회장들과는 달랐다. 한국경제를 대표하고 한국경제 전체를 걱정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그를 한시도 가만있게 하지 않았다.
 
  “설사 어떤 불이익이 있다 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나는 나 혼자 호강하기 위해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많이 남겨 주기 위해서 사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 사업에 타격을 입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내가 맡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졸장부로 끝난다. 남들이 나중에라도 나를 손가락질할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나에게 들려준 얘기였다.
 
  그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거침없이 정부 정책을 비판해 나갔다. 당시의 기업계 전체가 품고 있었지만 정부가 무서워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한 것들을 거침없이 지적했다. 그러니 그가 정부 측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것들이 화근이 되어 한동안 세무조사,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 등에 시달렸다.
 
 
  “어찌 사람의 기가 땅의 기운에 눌릴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도 그의 건강이 나빠진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믿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의대교수들의 세미나 자리에 초청 연사로 참석했다가 우연히 식사 자리에서 옆에 앉은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요즘 코피가 자주 난다”며 지나가듯 한마디를 했다. “내일 꼭 병원에 들르시라”는 의사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진찰을 받았고, 이내 폐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까지 건너갔지만 이미 너무 많이 번진 상태라 손을 쓸 수 없었다. 이후 1년3개월간 이어진 투병(鬪病) 기간을 그는 평소 성품대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버텼다.
 
  최 회장이 암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1997년 11월의 어느 날 풍수지리학자인 서울대 최창조 교수는 최 회장이 살고 있는 워커힐의 집이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고 최 회장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광나루 쪽을 찌를 듯 달려드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곳은 일시 머물며 완상(玩賞)하고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당하지만 장기간 머물며 살기에는 매우 문제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자 최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집이란 일시 머물다 떠나는 곳. 이 세상 모든 것 중에서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인데 어찌 사람의 기(氣)가 땅의 기운에 눌릴 수 있겠는가. 나는 이곳이 좋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집을 옮길 수는 없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문득 일찍 돌아가신 그의 형님을 떠올렸다. 형님이 삼청동에 새 집을 마련했을 때도 풍수를 잘 아는 지인(知人)이 “지형이 사나워서 좋지 않다”고 조언했다. 그때 형님은 자기가 기가 센 만큼 충분히 누를 수 있다면서 예정대로 이사했다. 그러나 줄줄이 나쁜 일이 겹쳐 일어나더니 드디어는 형님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최 회장도 형님의 일을 떠올렸지만 그러면서도 최 교수의 권고를 물리치고 이사하지 않았다. 자기가 형님처럼 기가 세다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산 지도 1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그만큼 행복하게 잘살았으면 됐지 뭐 더 이상을 바라겠느냐”며, 그는 껄껄 웃었다.
 
  이제 그가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지금도 워커힐호텔에 운동을 하러 갈 때면 그가 살던 집 쪽을 한 번 돌아보곤 한다. 항상 10여 년 씩 앞을 내다보며 인생이며 사업을 설계해 왔고, 70세가 되면 은퇴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던 최 회장. 은퇴 후의 여생을 즐길 새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가 그립다. 그 역시 자신이 탄탄하게 기반을 닦은 덕분에 지금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SK의 모습을 하늘에서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朴泰俊과 포스코

짧은 人生을 영원 祖國에, 그리고 제철 報國에

글 : 李大公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정리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 제철보국, 우향우 정신, 열연 비상… 朴泰俊의 신념은 곧 포항제철과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다
⊙ 박태준의 실패는 포항제철의 실패, 포항제철의 실패는 곧 대한민국의 실패
⊙ 80%까지 진척된 공사현장에 부실 드러나자 다음 날 다이너마이트로 현장 폭파
⊙ 25년 대역사 준공 후 朴正熙 묘 앞에 서서 “각하, 임무 완수했습니다”

李大公
⊙ 1941년생.
⊙ 경기고ㆍ서울대 법대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 1969년 포항종합제철 입사 후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부사장,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등 역임.
⊙ 現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착공식에 참석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
  “자네, 한 달만 여기에 올 수 있겠나.”
 
  2006년 여름, 미국 플로리다 주(州)에 머물던 박태준(朴泰俊) 명예회장이 포항에 있던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그날로 이구택(李龜澤) 당시 포스코 회장에게 보고하고 바로 짐을 쌌다. 평생 모신 분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는 1973년부터 그를 직접 모셨다. 덕분에 누구보다 그의 철학과 생각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한 달을 보냈다. 차도 그가 뒷자리에, 내가 조수석에 앉으니 마치 20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는 변한 게 없었다.
 
  “여기 소나무가 많네. 미국에 웬 소나무가 이렇게 많을까.”
 
  “저 건물은 15층인데 위쪽 색깔이 다르네. 증축을 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저렇게 설계를 했을까.”
 
  “이 동네엔 도요타 차가 왜 이리 많을까.”
 
  질문은 끝이 없었다. 사소한 것도 그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나는 멍청히 지켜볼 뿐이다. 내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의 눈엔 너무나 크게 보였다. 40년 전 포항의 건설현장에서도 그는 그랬다. 아무도 몰랐던 부실현장을 발견해 수차례 바로잡았다. 그 눈이 없었다면 포항제철이 제대로 건설되기나 했을까.
 
 
  ‘교육王 박태준’
 
  ‘철강왕(王) 박태준’이란 말 이전에 ‘교육왕 박태준’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포항과 광양에 15개 초·중ㆍ고등학교, 유치원, 그리고 포항공대(포스텍)를 세웠다. 지역 기업이 성공하려면 인재 유치가 핵심인데, 이들이 오기 위해선 우수한 교육 수준이 보장돼야 한다. 그는 교육 수준을 양적으로만 넓힌 것이 아니라, 수월성 교육을 통해 교육의 질까지 끌어올렸다. 그 결과가 현재의 포스텍과 포스코교육재단이다. 1989년 노벨상 수상자 10명 초청, 제철장학회 71명 해외유학생 선발 지원, ‘베서머(Bessemer)금메달 수상 기념 장학회’의 16명 해외 장학생 선발 지원, 청암재단의 기초과학 분야 매년 30명 선발 지원, 한국 최초 체조 및 축구 전용 경기장 건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 지원이 이뤄졌다. 복지교육의 모델인 핀란드와 최근 수월성 교육의 성공사례로 급부상한 상하이(上海)의 성공사례를 그는 이미 40년 전에 내다봤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주택단지 조성과 학교 설립은 직원의 충성도와 업무 효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박태준 사장의 합리적인 리더십은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줬다. 그의 확고한 제철보국(製鐵報國) 신념은 포항제철 임직원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다.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21세기엔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다. 이 말은 20세기에도 통한다. 박태준 한 명이 적어도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다. 당시 산업의 파급 효과를 뜻하는 전후방 연관 효과는 석유산업이 가장 높았고, 그다음이 제철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제철이 가장 높았다. 자동차, 조선(造船), 가전, 건설… 철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었다. 박태준의 실패는 포항제철의 실패였고, 포항제철의 실패는 곧 대한민국의 실패였다.
 
  ‘박태준의 신화’는 ‘우향우의 기적’으로 불린다.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으로 지어진 포항제철은 ‘선조의 피의 대가’였다. 그는 이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 제철보국!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철학이 돼야 합니다.”
 
1968년 11월 불시에 포항 현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롬멜하우스 2층에서 박태준 사장의 보고를 받고 있다. 창 밖을 보던 박 대통령은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며 혼자 말했다.

 
  ‘우향우 정신’은 구호가 아니라 진실
 
  만약 포항제철이 실패했다면 그는 정말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그는 항상 말이 앞서지 않았다. 실패했다고 사표 내고 끝낼 상황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사업을 이끌었다.
 
  일본의 군신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ㆍ1849~1912) 대장은 뤼순(旅順) 고지 전투에서 부하 13만명 중 6만명이 전사하는 고전 끝에 승리했다. 그의 아들 2명도 전사자 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황군 6만명을 잃은 죄’를 씻기 위해 메이지(明治)왕에게 할복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다. 7년 동안 조용히 지냈던 그는 메이지 왕이 죽자 그날 바로 할복했다. 국경을 초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러일전쟁의 또 하나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ㆍ1848∼1934) 제독은 러시아 발트함대와 싸우기 전날 밤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영국의 넬슨보다 이순신이 낫다”고 한 그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정신을 배웠다.
 
  6ㆍ25전쟁 당시 나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아들은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그 조건은 “만에 하나 포로로 붙잡히면 자결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는 평생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싸워야 했다. 6ㆍ25전쟁 당시 육군대위였던 그는 포항 형산강 전투에 참전해 이후 함경도 청진까지 북진(北進)했다. 청진에서 흥남으로 내려올 땐 추위를 이기기 위해 드럼통에 고무호스를 꽂고 녹물이 섞인 ‘카바이드 소주(화학주)’를 빨아 마셨다. 흥남에선 맹장염에 걸려 응급수술 후 해병대 상륙함(LST)에 실려 후송됐다. 그는 일생이 전쟁이었고, 매일이 전투였다. 그의 우향우 정신은 생사를 건 그의 인생철학에서 나온 산물이다. 말뿐인 구호가 아니라, 그를 설명하는 사실이요, 진실이다.
 
  ‘롬멜하우스’란 곳이 있다. 현재 ‘포스코 회사 자산 1호’로 기록된 건물이다. 1968년 영일만 현장에 지어진 초라한 슬레이트 지붕의 목조 건물로, 건설 초기의 애환과 사연이 담긴 곳이다. 직원들은 이 건설사령탑을 사막의 영웅 롬멜(Rommel) 장군의 야전군 지휘소라 하며 ‘롬멜하우스’란 이름을 붙였다.
 
 
  준공 직후 朴正熙 묘에서 “각하, 임무 완수했습니다”
 
25년 제철소 건설의 대역사를 마무리한 박태준 회장은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각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라고 마지막 보고를 했다.

  1968년 11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건설 현장을 불시 방문했다. 당시 현장은 황량한 모래벌판이었고, 건물은 롬멜하우스 하나였다. 박태준 사장은 박 대통령을 롬멜하우스 2층으로 모셨다.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초가집들을 헐어낸 폐허 그 자체였다. 박 대통령의 표정이 어두웠다. 자신 있게 시작했고 “하면 된다”고 했지만, 막상 현장에 와보니 걱정이 됐나 보다.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박태준 사장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배짱 좋다던 분이 이날 위경련까지 일으켰다고 한다. 겉으론 강한 분이었지만 속은 항상 그렇게 타들어갔다. 그만큼 민족적 사명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총 13차례 포항 현지를 방문했다. 직접 눈으로 현장을 보고, 직원들을 격려했다. 그의 의지가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면, 포항제철 역사는 오랜 기간 연기됐을 것이다.
 
  1970년 2월 공사가 한창이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서명이 적힌 메모지를 주며 박태준 사장에게 설비구매에 대한 전권을 일임했다. 일명 ‘종이마패’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 종이 한 장은 큰 힘이 있었다. 하지만 박태준 사장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다가 박 대통령 서거 후 공개했다.
 
  포스코에 단 6개월 관여한 사람들도 “내가 포항제철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25년 4반세기 대역사 종합준공을 끝낸 그는 국립묘지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박태준의 리더십
 
1971년, 계획보다 3개월 지연된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하루 700㎥ 콘크리트 타설’이란 특명, ‘열연비상’이 내려졌다.

  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등 세계적 기관에서 포항제철의 성공사례를 연구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 박성빈(朴成彬)씨는 미국 스탠퍼드대 유학 당시 건축품질관리 사례로 아버지의 부실공사 현장 폭파 이야기가 나오는 수업을 들었다. 영국 학교의 교과서에도 포스코 사례가 실렸다고 한다. 이들이 꼽은 첫째 성공 요인은 모두 같다. 바로 박태준 회장의 리더십이다.
 
  ‘평상시’ 회사엔 다른 어느 곳보다 용역이 많았다. 그만큼 그는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분위기가 바뀐다.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전환돼 업무 추진의 속도가 빨라졌다.
 
  자기희생적 솔선수범을 통해 조직문화를 정립했고, 부하직원을 철저하게 훈련해 내부 승진의 전통을 절대 고수했다. 이는 구성원의 조직 충성도를 더 높였다. 전투를 지휘하며 몸에 밴 리더십은 ‘동시다발’ ‘전천후’ ‘전방위’ 업무로 전환됐다. “지휘자의 최고 책임은 부하 육성 교육”이라며 상세한 설명을 통해 교육했다. 소통 경영을 위해 임원회의록을 전 임직원에게 공개 배포한 것도 획기적인 전통으로 남았다.
 
  그의 리더십은 여러 방향으로 확대됐다. 저가(低價) 설비 구매, 공기 단축을 통한 건설원가 절감, 원료 염가 확보, 주택단지, 직원 자녀 교육을 비롯한 폭넓은 복지정책 등이 오늘날 포스코를 만들어낸 핵심요소들이다.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박태준은 확고한 비전을 품었다. 눈으로는 황량한 모래벌판을 보면서 머릿속엔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소를 이미 그리고 있었다.
 
  1978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이 일본 기미쓰(君津) 제철소를 방문했다. 그는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했는데, 이나야마의 답변은 간단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소?”
 
  1969년 당시 IBRD 실무자였던 자페(Jaffe)는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18년 후인 1988년 방한(訪韓)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포철에 대한 당시 나의 보고는 정확했다고 아직 확신한다. 다만 박태준 같은 리더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빅토르 사도브니치 모스크바 대학 총장은 광양제철소 방문 당시 “마르크스와 레닌이 꿈꾸던 노동자의 천국을 광양에서 봤다”고 했다. 신화가 된 그의 역사는 철강인 최고의 명예인 ‘베서머(Bessemer)’ 금메달과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 등 수상으로 증명됐다.
 
 
  ‘담배꽁초 강철파일’
 
  “왜 나한테만 보이나. 너희 눈엔 안 보이나.”
 
  1971년 봄, 제강공장 건설 현장을 둘러보던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의 눈에 강철 파일(pileㆍ땅속에 박아넣는 말뚝) 몇 개가 들어왔다. 마침 레미콘 이 콘크리트를 쏟아부었는데, 파일이 옆으로 슬쩍 기울었다. 이를 눈여겨본 사람은 없었다. 공사 책임자, 건설회사 책임자, 현장간부들 모두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박태준 사장은 공사를 중단시키고 불도저를 불렀다.
 
  “밀어 봐.”
 
  불도저가 파일을 밀었다. 모래 위에 박힌 담배꽁초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엄청난 부실공사 현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용광로에 쇳물을 정제하는 제강공장은 아무 땅에나 짓지 않는다. 땅속 깊은 암반에 강철 파일을 박고, 콘크리트를 친 후, 그 위에 다시 앵커볼트(기초볼트)를 연결한다. 그리고 그 위에 제강공장을 ‘얹는다.’ 한마디로 지구 암반에 고정시켜 짓는 셈이다.
 
  포항의 평균 지반 깊이는 38m다. 38m 정도 길이의 파일을 박아야 제대로 고정이 된다. 지반 높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파일을 박아넣으면 남는 부분이 생긴다. 당시 일부 현장에선 2~3m 길이의 남은 토막 파일들을 대충 모아 꽂아놨다. 대형 부실공사였다. 박태준 사장은 건설회사 소장과 일본 설비회사 현장감독을 불러 크게 호통을 쳤다. 일본인 현장감독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 현장은 곧바로 전면 재시공에 들어갔다.
 
  그날 ‘담배꽁초 파일’이 박태준 사장의 눈에 안 들어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100년을 가야 할 공장이 10년도 안돼 무너졌을 것이다. 그게 무너졌다면 포항제철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다. 2006년 여름, 명예회장과 함께한 한 달 동안의 미국 합숙 기간에 그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오직 아이젠하워의 눈에만 보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오직 맥아더의 눈에만 보였다. ‘영일만 상륙작전’은 오직 박태준의 눈에만 보였다. 모두가 실패할 거라 했지만, 이들은 확고한 신념과 계획을 갖고 있었고, 죽음을 각오했다.
 
 
  볼트 24만 개 재조사, 부실현장은 폭파
 
박태준에게 부실공사는 곧 이적행위였다. 1977년 발전 송풍설비 공사현장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그는 80% 진척된 공사현장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그에게 부실공사는 곧 이적행위였다. 그는 끊임없이 현장을 찾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제강공장을 시찰하던 중 철골구조물 연결 볼트가 허술하게 조여진 것을 발견했다. 모든 간부를 집합시켜 즉시 모든 볼트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대형볼트 24만 개를 일일이 조사한 결과 400여 개가 잘못 조여진 것으로 밝혀졌다.
 
  1977년 발전 송풍설비 공사현장, 그의 눈에 부실 현장이 들어왔다. 80% 정도 진척된 공사현장을 다음 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당시 포항제철의 관련 임직원, 건설 책임자, 외국인 기술 감독자 등이 한자리에 모여 이 광경을 지켜봤다. 따로 설명하거나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완벽주의에 대한 확실한 인상을 직원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1978년 6월, 아침 8시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건설현장을 찾았다. 현장소장은 없었고, 반장이 대략적인 인원을 보고했다. 조말수(趙末守) 당시 비서과장(후에 포항제철 사장)이 동행해 보고사항을 기록했다.
 
  8시 회의, 현장소장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전날 늦게까지 과음하고 곧바로 회의에 나온 것이다. 그는 박태준 사장이 아침 일찍 현장에 다녀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박 사장의 질문이 시작됐다.
 
  “오늘 현장 인원이 몇 명인가?”
 
  “875명입니다.”
 
  “다 나왔나?”
 
  “다 나왔습니다.”
 
  박태준 사장은 “현장에 직접 가봤느냐”, “보고 내용에 책임질 수 있느냐”며 물었고, 현장소장은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했고, 책임질 수 있다”고 답했다. 박 사장은 조말수 비서과장을 불렀다.
 
  “조 과장, 아까 내가 가서 본 숫자와 비교해서 발표해 봐.”
 
  현장소장의 얼굴이 순간 하얘졌다. 거짓말이 들통났고, 그날 이후 모든 건설현장의 인원을 5일 동안 전면 재조사했다. 그런데 조사 결과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았다. 사람 수가 계속 틀렸다. 직원들은 이상하다 생각했고, 박태준 사장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전체 공장을 포위한 후 한 명도 빼놓지 말고 사람 수를 조사하라고 했다.
 
  그러자 정확한 결과가 나왔다. 이쪽에서 조사를 하면 다른 현장에 있던 인부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서로 돌려가면서 ‘인원 메우기’를 했다. 하지만 결국 박태준 사장의 ‘군사작전’에 모두 들통났다. 박 사장은 그들을 ‘유령’이라 불렀고, 시공회사 책임자로부터 20%의 작업인원 조작이 있었다는 실토를 받아냈다. 자재와 인력이 충분했음에도 예정 공기(工期)를 따라가지 못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는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이런 부분은 정주영(鄭周永), 이병철(李秉喆) 회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답답한 사람 눈에는 모두 보인다. 회사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은 CEO고, 나라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은 대통령이다. 본인은 몰라도, 부모 눈에는 자식의 얼굴 상처가 보인다. 이런 눈을 가진 리더만이 조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
 
 
  첫 쇳물이 나오던 날
 
1973년 첫 쇳물이 나오던 순간 포항제철 모든 임직원이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박태준 사장은 이 순간에도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열연비상’은 그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1971년 8월, 그는 계획보다 3개월이나 지연된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보고서 위에 ‘9월-700입방미터’라고 썼다. “9월 중엔 무조건 하루 700m³의 콘크리트 타설을 실시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이것이 포항제철의 제1호 건설비상, ‘열연비상’이다. 당시 하루 300m³ 정도 타설했던 건설현장은 24시간 비상체제에 들어섰다. 최대 장비와 인원이 동원돼 밤낮없이 일했다. 결국 두 달 만에 5개월 분량의 타설을 완료했고, 10월 31일, 박태준 사장은 ‘열연비상’을 풀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첫 아들이 나왔다. 오랜 산고 끝에 첫 쇳물이 터져 나왔다. 한국 최초의 대형 고로인 영일만 제1 고로의 첫 출선(出銑)을 바라보던 포철 임직원들은 모두 머리 위로 두 팔을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 언론의 모든 카메라는 일제히 쇳물을 향했다. 포철의 사진기사가 방향을 돌려 마지막 만세를 외치는 임직원들을 찍었다. 공보과 이재영 기사가 유일하게 포착한 이 사진이 지금까지 수많은 지면에 등장한 출선 사진이다. 1초만 늦게 몸을 돌렸다면 영원히 놓칠 뻔한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 모든 사람이 크게 웃으며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단 한 명만이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가장 큰 주인공인 박태준 사장은 그날 크게 웃지 않았다. 사진 속 그의 시선은 평소와 똑같았다. 한곳을 응시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모두가 감격할 때도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조국근대화를 위한 종합제철소 건설은 애초 ‘불가능한’ 민족적 과제였다. 박태준 명예회장과 모든 임직원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차례 제철소 건설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5개국 8개 회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은 와해됐고, IBRD도 포항제철 사업의 타당성을 부인했다.
 
  첫 단추부터 풀기 어려웠던 자금조달 문제를 박태준 당시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계획’이란 ‘하와이 구상’을 통해 성사시켰다. 그는 하와이에서 바로 귀국하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 제철의 나가노 사장 등 철강선진국인 일본 철강산업의 대표들을 직접 만나 기술협조 약속을 얻어냈다.
 
  KISA의 조강 연산 50만t 계획은 하와이 구상 후 1단계 조강 연산 103만t 규모로 확대됐다.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사용 잔액을 제철소 건설에 투입했는데, 만약 건설에 실패했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포항제철은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중 7370만 달러와 일본수출입은행 상업차관 등 총 1억2370만 달러로 지어졌다. 그리고 2000년 10월 초 민영화되면서 배당금과 주식매각 및 양도 등으로 모두 3조6155억원을 정부에 갚았다.
 
 
  한 달 독서량 30권
 
박태준의 집념은 공기 단축을 통한 건설원가 절감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1978년 포항 3고로 본체 공사 장면.

  박태준 명예회장은 한 달에 책 30권을 읽는 ‘독서광’이다. 그가 사장이던 시절 비서실과 도쿄(東京)사무소 직원들은 읽을 책을 찾아서 그에게 보내는 것이 큰 업무 중 하나였다. 관심을 가지고 읽는 책은 속독(速讀)했고, 아주 중요한 책일 경우엔 천천히 정독(精讀)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땐 책에 친필로 메모해서 보내줬다.
 
  1992년, 그는 “앞으로 중국이 원료의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원료 조기 확보를 강조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의 분쟁 가운데 발생한 희토류 수출 통제 일화를 보면서, 18년 전 이를 정확히 예고한 그의 독서력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됐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외강내유(外剛內柔)의 리더십이다. 제철소 건설을 성공적으로 끝낸 날, 지난 시절 밤낮없이 돌관(突貫) 공사를 하던 중 처벌된 모든 임직원을 징계해제 조치했다. 지금 말로 표현하면 일반사면을 단행한 셈이다.
 
  그는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를 철저하게 지키는 신사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항상 부인인 장옥자(張玉子) 여사가 먼저 타게 한다. 딸들은 부모를 ‘닭살 부부’라 할 정도였다. 학교에 방문할 때, 여교사가 아무리 젊어도 말을 놓는 법이 없다.
 
  그는 평생 세 번 눈물을 흘렸다고 알려졌다. 1973년 6월 9일 첫 출선에 성공했을 때 첫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눈물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포항에 보낸 장녀 진아씨가 결혼할 때가 돼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읽었을 때 나왔다. 세 번째 눈물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태준 명예회장의 관계는 유성룡과 이순신처럼 특별한 관계였다. 1969년 3선개헌 당시 예비역 장성 500명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박태준 당시 사장은 “정치엔 끼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 친구 원래 그런 사람이야. 제철소 일이나 열심히 하게 건드리지 마.”
 
  5ㆍ16군사혁명 당시에도 박정희 소장은 박태준 대령을 배려해 혁명에 직접 가담시키지 않았다. 다만 혁명이 실패할 경우 그의 가족을 책임져 달라는 부탁을 했고, 박태준 대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므리바’
 
1999년 1월, 포항중앙교회를 찾은 박태준 회장이 세례를 받기 위해 꿇어앉은 모습.

  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낸 몇 안되는 애국자다. 수많은 이가 번지르르한 말을 하며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만, 그는 초연하게 일했고, 그 결과가 현재의 포스코다. 그의 업적은 포항제철소, 광양제철소, 포항공대를 보면 된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이 글은 사족(蛇足)에 불과하다. 다만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감히 주제넘게 글을 썼다.
 
  보잘것없는 내 이야기를 정리하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나는 ‘므리바’ 이야기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구약성경 <민수기>에 나오는 물가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쳐 백성이 필요한 물을 솟아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행동했다가 결국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오늘날 포스코의 영광은 박태준과 박정희,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종교는 기독교다. 2006년 포항 지역 목사님들의 요청에 의해 박태준 명예회장이 어떻게 기독교인이 됐는지 간증한 적이 있다. 그날 제목은 ‘포스코의 기적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미국에 거하던 시절 교회에 처음 출석했고, 1999년 1월 포항중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날 ‘천하의 박태준’이 꿇어앉은 모습을 보며 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이 한민족을 살리기 위해 박태준을 보내신 거라고.⊙

 

 

 

[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趙重勳과 한진

하늘길과 바닷길을 개척해 輸出立國의 기틀을 다지다

글 : 黃昌學 전 (주)한진 부회장
정리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같은 값이면 우리나라 비행기로 수출해 달라는 부탁에 선선히 응해 주는 일부 (생산)업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조중훈 회장)

黃昌學
⊙ 1932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대한항공 상무·전무·부사장, 한국항공 사장, 한진 사장, 한진·대한종합운수 부회장,
    한국공항 부회장등 역임.
만일 조중훈 회장이 1970년대 초 한진해운을 설립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수출입국의 꿈은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화물선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중훈 회장.
  필자는 1959년에 한진상사에 입사했다. 그 후 한진그룹 창업주인 조중훈(趙重勳) 회장이 20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이상을 지근거리에 있었다. 어쩌면 40여 년간 ‘그분을 모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한진그룹에서 일하며 필자는 단 한 번의 지방근무도, 해외 파견 근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젊은 시절 조중훈 회장이 오직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일념으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불철주야 노력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새벽 4시면 일어나 시작하는 방대한 독서량으로 직원들을 쩔쩔매게 했던 그분은 “기업은 곧 인간의 집합체이므로 인화가 중요하다”고 말씀하곤 했다.
 
  그분은 “기업은 종합예술이다”라는 말도 자주 했다.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기업도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해·공(陸海空) 종합 수송망 구축에 한평생을 바치면서 그분이 자랑과 보람으로 여겼던 것은 그 모든 것을 국내 자본이 아닌 외화벌이를 통해 이룩했다는 점이었다.
 
  그분은 달러가 귀했던 시절, 전쟁터의 한가운데서 달러를 벌어들였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는 대한민국 수출입국의 초석이 된 해상운송 체계와 항공운송 체계를 구축하는 데 쓰였다.
 
  오늘 나는 수송보국의 마음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디딤돌을 놓은 그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짧은 지면에 그분이 수십 년간 쌓은 업적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면이 허락하는 데까지 말하려고 한다.
 
 
  베트남 진출
 
미 국방성 수송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으로, 월남에서 한진이 물자 수송 중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대항하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광복 이후 한국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전환점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베트남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중동 붐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두 차례의 기회를 정확히 포착해 한진그룹을 세계적인 글로벌 물류 전문그룹으로 키워내는 한편 경제 개발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당시 한진그룹이 벌어들인 엄청난 외화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수송보국의 일념으로 일궈낸 전(全) 세계 육·해·공 루트는 우리나라가 수출을 통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혈관이 됐다.
 
  베트남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던 1965년 12월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던 조 회장은 정부에서 구성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동남아 방문길에 올랐다. 마지막 방문지는 베트남 퀴논이었다.
 
  조 회장은 기내(機內)에서 곧 퀴논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창문 덮개를 올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퀴논항 외항에 정박하고 있는, 군수품을 가득 실은 30여 척의 화물선이었다. 하역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소형 어선들이 주로 접안했던 퀴논항의 하역시설이 대형 수송선을 처리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했던 것이다. 조 회장은 이런 장면을 보면서 한진상사가 국내에서 군수품 수송으로 쌓은 경험과 노하우라면 퀴논항의 적체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요동쳤다고 한다. 경제시찰단으로 함께 간 기업인들도 있었지만 군수품 수송 경험이 있는 조 회장의 눈에만 그런 장면이 사업과 연결돼 보였던 것이다.
 
  조 회장은 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한진상사는 당시 수송에는 상당한 경험을 쌓았지만 하역은 다소 생소한 분야였다. 조 회장은 인천과 부산의 하역장에서 화물의 처리과정을 파악하고,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하역작업의 기준이 되는 하역표를 구했다. 또 미국 브루클린을 비롯한 주요 국제항구의 하역비에 대한 자료도 수집했다.
 
  퀴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예상했던 대로 군수품 하역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협상은 쉽지 않았다. 조 회장은 수의계약을 원했지만 미군은 공개입찰의 원칙을 내세웠다.
 
  조 회장은 미군 측에 “한진에 수의계약으로 하역작업을 맡겨주면 100일 이내에 작업을 시작해 3일에 한 척씩 처리할 수 있다”며, “기간 내에 작업을 시작하지 못하면 하루에 1만 달러의 벌금을 내겠다”고 제안했다. 대신 하역비로 국제 기준 가격의 3배를 요구했다. 미군 측은 터무니없어 했으나 조 회장은 전쟁 중이고 철야와 폭풍우의 악조건에서 작업하는 데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치공장 설립
 
  힘겨운 협상 끝에 1966년 3월 10일 한진그룹은 주월미군사령부 측과 하역작업 계약을 맺었다. 미군들도 베트남 현지인에게 하역작업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달리 방도가 없는 상태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계약금이 790만 달러였다. 한진그룹이 그 10년 전 한국에서 미군과 맺은 첫 번째 계약금의 100배가 넘는 규모였다.
 
  계약을 맺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1960년대 베트남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일간지 기자는 한진 직원들의 작업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미군 군수물자를 부두의 크레인에서 트럭으로 옮기는 기술자들의 동작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기민하고 정력적이었고, 도로를 포효하듯 질주하는 트럭의 행렬은 인디언의 기습에 쫓기는 포장마차의 서부 영화를 연상시켰다… 월맹군의 기습을 의식한 공포감, 보급물자를 약속시간 내에 운반해야 한다는 강박감, 달러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는 개인들의 욕망이 어우러진 숨막히는 드라마였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미군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일은 매 순간이 바로 사선(死線)이었다. 수송 작업이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퀴논항에서 하역을 마치고 목적지로 이동하던 중 베트콩 부대의 기습 공격이 발생했다. 인근 군부대에서 지원병이 급파됐지만 수송단 중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현장 인부들은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몸을 사렸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조 회장은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작업복을 입고 현장감독으로 나섰다. 겁먹은 직원들을 독려하며 맨 앞 트럭에 선탑해 총탄을 뚫고 수송단을 진두지휘했다.
 
  조 회장이 직접 죽을 각오로 몸을 던지고 나오자 겁에 질려 있던 직원들이 하나 둘 그 뒤를 따라나섰다. 당시 한진 수송단의 활약상은 수송 도중 베트공의 기습을 받자 대항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미 국방성 군사박물관에 남아 있다. 베트콩의 공격이 줄어들자 일부에서는 우리 한진이 베트콩에 뇌물을 준 게 아니냐, 하는 우스갯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베트콩의 공격이 줄어든 것은 조 회장을 중심으로 우리 수송단들이 죽을 각오로 그들의 공격에 맞선 결과였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생사가 엇갈리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수송작전이었지만 조 회장은 직원들에게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한번은 베트남으로 가는 배편에 북어를 가득 실으라고 했는데 이는 인부들이 아침에 잠을 깨면 입이 칼칼해서 북엇국 생각이 간절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또 ‘오대호’라는 선박을 구입해서 우리 쌀을 직접 수송해 공급하기도 했다.
 
  베트남 현지에 한진 직원들을 위한 김치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조 회장은 “한국 사람이 김치를 못 먹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다”면서 베트남 고산지대에서 배추를 특별 수송해 김치를 담가 직원들에게 제공했다.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을 때는 김치공장 직원만도 70~80명에 달할 정도였다. 김치공장은 한진 직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웃해 있는 맹호부대 장병들도 김치 생각이 나면 한번에 70~100명씩 찾아와 식사를 하고 가곤 했다. 물론 무료였다.
 
 
  외환관리법으로 해외 진출
 
1969년 3월 월남의 퀴논항을 신상철(申尙澈) 당시 주월대사와 시찰하고 있는 조중훈 회장.

  조 회장은 또 베트남 현지인들에게도 각별하게 인정을 베풀었다. 미군 용역사업을 하러 베트남에 와 있긴 했지만 현지인들의 인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분의 판단이었다. 우선, 안전 및 교통사고 처리를 위해 언어가 통하는 베트남 현지인을 고용했고 김치공장에도 베트남 여성들을 취업시켰다. 1968년 당시 한진 베트남지사 직원수는 4000여 명에 달했는데, 4분의 1에 해당하는 1000명이 베트남 현지인이었다.
 
  위와 같은 불굴의 사업의지와 현지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널리 알려져 정부 또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진이 베트남에 진출하던 1966년 5월 당시, 한국 기업 중에는 경제협력 차원에서 해외에 진출해 본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관련 법규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한진이 베트남에 지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시작하려면 ‘해외투자법’이라는 법안 자체를 새로 제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다행히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외국환 관리법 시행령을 찾아냈다. 급한 김에 가장 비슷한 법령으로 해외지사 설립허가를 내준 것이다.
 
  조 회장의 리더십과 적극적인 현지인 유화정책,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한진 베트남지사 직원들의 밤낮없는 노력으로 1967년 5월 한진이 미군과 맺은 2차 계약 규모는 1차 계약의 5배에 달하는 3400만 달러로 늘어났다. 한진이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동안, 미군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5000만 달러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화 60달러 안팎이었으니,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부는 외화획득 우수업체로 한진을 선정, 매년 수출의 날마다 대통령표창, 금탑산업훈장, 은탑산업훈장, 대통령우승기 등을 포상했고 한진은 당시 기업체 중에서 최고상 최다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부실 공기업 대한항공을 떠안다
 
  월남전 미군 용역사업을 통해 중견기업에서 자본금 1000억원대의 대기업으로 발돋움한 한진은 1967년 7월에 ‘대진해운’을 세웠다. 조 회장의 다음 계획은 해운사업 분야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조 회장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늦춰져야 했다. 정부에서 부실덩어리인 국영 대한항공공사의 인수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전 중역이 거세게 반대했다.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어떻게 부실덩어리인 대한항공공사 인수에 퍼부어야 하느냐는 반발이었다.
 
  조 회장은 고심했다. 그분이 선택한 것은 보국(報國)이었다. 그분은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결심했다. 조 회장이 어려운 결단을 내린 또 다른 이유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거듭된 부탁 때문이었다. 조 회장은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게 아니겠소.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서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오”라는 박 대통령의 강권에 가까운 권유의 말씀을 듣고 결국 인수를 결정했다.
 
  1969년 2월 28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은 대한항공공사 사장에 선임됐고, 3월 6일에는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을 열었다. 이것이 오늘날 항공기 보유대수 132대, 국제화물수송 부문 세계 1위, 국제항공여객수송 부문 세계 13위 항공사로 우뚝 선 ‘대한항공’의 첫출발이었다.
 
  인수 초기 조 회장은 회사를 정상화시킬 걱정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허다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일하는 직원에 비해 자리만 꿰차고 앉은 임원이나 간부급이 너무 많은 역(逆)피라미드식 조직이었다. 심지어 이름만 걸어놓고 출근부 도장만 찍는 유령 직원까지 있었다. 요즘의 기준이라면 과감하게 정리해고를 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그러나 인화를 중시했던 조 회장은 ‘못 쓸 사람은 못 쓰는 대로 쓸만한 사람은 쓸만한 대로 쓰겠다’며 단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1969년 2월 사장 취임 일성으로 주주총회에서 “앞으로 기종의 증가는 프로펠러기가 아니라 성능 좋은 4발 제트기로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과감한 투자를 시작했다.
 
  세계의 선진 항공사들이 대형 제트기로 치열한 ‘하늘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무리가 따르더라도 대한항공이 살아남을 길은 짧은 시일에 최대의 수송 능력을 갖추는 것뿐이란 판단에서였다.
 
 
  미국의 하늘길을 열다
 
초기 대한항공 비행기.

  국제선 항로 확보 작업에도 착수했다. 외화를 벌어들여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외국 항공사들이 선점하고 있는 국제선 노선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항로는 비행기와 수요만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나라의 하늘길이라 해도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 빼앗기거나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 문제 때문에 막히는 일이 허다했다. 보통 나라와 나라 간 항공 협정은 공무원들의 외교적인 노력보다는 민간외교가 큰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 플러스알파로 그 나라가 갖고 있는 국력이 작용하는 것이다. 당시 보이지 않는 하늘길을 놓고 세계열강이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국력이 약했던 우리나라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민간외교였다. 조 회장은 하늘길을 열기 위해 민간외교로 동분서주했다.
 
  1969년 2월, 조 회장은 일단 서울~사이공 노선에 B720 여객기를 취항시켰다. 항공 협정을 맺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우선 ‘착륙 허가’만 받아 운항을 시작했다. 다행히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병력과 근로자 수송을 위해 취항이 필요하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대한항공의 운항을 제지하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을 연결하는 동남아 최장노선을 개설했다.
 
  조금씩 취항지를 늘려가면서 대한항공은 서서히 국적 항공사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주(美洲)노선이 문제였다. 미주노선에 취항하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한미 항공협정부터 개정해야 했지만 미국 측은 아예 협상 테이블에조차 나오려 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미국 정부와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동시에 1970년 11월 로스앤젤레스 지점을 설치하고 이어 뉴욕, 시카고, 휴스턴에 영업소를 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미국 정부를 집요하게 설득, 1971년 1월 결국 미주노선 취항을 허락받았다.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를 잇는 노선으로 대한항공 출범 2년 만에 마침내 태평양 상공의 하늘길이 뚫린 것이다. 조 회장은 첫 미주노선에 화물기 취항을 결정했다.
 
  당시는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활발히 진행되던 중이었고, 특히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을 최대의 당면 과제로 여기고 있던 시기였다. 조 회장이 미주노선에 여객기보다 화물기를 먼저 띄운 것은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한 수출길을 열겠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화물운송 세계 1위
 
  우선 전담조직을 구성하려고 보니 항공화물 운송에 종사해 본 전문가가 없었다. 또 무역규모가 크지 않은 시절이어서 실어나를 화물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역들 사이에서 취항을 연기하자는 얘기까지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걸음부터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미주노선 개설은 피 말리는 협상 끝에 따낸 대한항공의 숙원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가발이었다. 조 회장은 직원들에게 가발업체를 찾아가 물량을 확보해 보라고 지시했다. 느닷없이 가발 비상이 걸린 실무자들은 외국인 바이어들이 주로 머물던 조선호텔로 찾아가 숙박부를 뒤져가며 접촉을 시도했다. 또 일부는 생산업체를 찾아나섰다. 가발업체는 대부분 중소규모로 도처에 산재해 있어 소재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수출조합에서 주소록을 확보해 복덕방에 위치를 물어가는 방식으로 가발업체를 하나씩 찾아나갔다. 조 회장은 당시의 절박했던 심정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오직 사명감 하나로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지만 수출업체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우리 항공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주들과 힘겨운 설득전까지 치러야 했다. 같은 값이면 우리나라 비행기로 수출해 달라는 부탁에 선선히 응해 주는 일부 업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이처럼 어렵게 확보한 화물을 싣고 대한항공 화물기는 1971년 4월 26일 마침내 태평양 상공을 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대한항공의 화물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가발로 시작된 화물은 오늘날 반도체와 휴대전화로 바뀌었고, 국제선 화물운송 부문에서 세계 유수의 거대항공사를 물리치고 6년 연속 세계 1위의 자리를 굳건히 고수하고 있다.
 
  여객 부문에 있어서 대한항공 중흥의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중동 붐이었다. 석유파동과 중동전으로 대한항공에 모진 시련을 안겼던 중동지역이 전쟁 종결 후 새로운 기회로 다가섰다. 한국 기술자의 중동 진출은 1974년 400명에 불과했으나 1975년에는 7000명으로 늘어났고, 건설 수주가 본격화된 1976년에는 2만명을 넘어섰다.
 
  대한항공은 1975년 말부터 바레인에 부정기 전세기를 운항한 데 이어 1976년 5월 최초의 정기여객 노선을 정식으로 개설했다. 1만km가 넘는 거리였고, 왕복 27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운항이었다. 2개월 뒤에는 이 노선을 스위스 취리히까지 연장했다. 서울∼바레인 정기 노선의 첫해 수송인원은 1만3500명에 달했다.
 
  대한항공은 여세를 몰아 1977년 4월에는 중동 최대의 산유국이던 사우디아라비아에 노선을 개설했고, 이듬해 7월에는 쿠웨이트에도 취항했다. 바야흐로 중동 붐이 절정에 달했고, 중동으로 향하는 기술자들이 몰려들자 사우디 대사관은 대한항공 항공권이 없으면 비자를 내주지 않을 정도였다. ‘중동특수’는 19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됐다.
 
  발 빠른 대한항공의 중동노선 개척으로 인해 외국 항공사로 빠져나갈 막대한 외화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음을 물론 국내 건설사들의 플랜트 수출에 결정적 도움이 됐음은 말할 나위 없다.
 
 
  수출 고속도로 바닷길 개척
 
1970년 제4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군납최고 표창을 받고 있는 조중훈 회장.

  1966년 6월. 미군 군수품 수송을 지휘하기 위해 베트남에 머물러 있던 조 회장은 퀴논항 부두에서 미국 ‘시랜드’ 소속 화물선의 하역 작업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2시간 넘게 100여 개의 컨테이너가 다 내려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갠트리 크레인’이라는 특수장비로 화물선에서 집채만 한 크기의 컨테이너들을 하나씩 부두 위에 내려놓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컨테이너 한 개의 무게는 30~40t. 이를 배에서 부두로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분에 불과했다. 당시 12명의 노무자가 한 시간 동안 작업해야 겨우 옮길 수 있는 화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컨테이너 속에 든 군수품은 따로 부리는 과정 없이 통째로 트럭에 실려 미군부대로 향했다.
 
  그것은 해상운송의 ‘혁명’이었고, 조 회장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현재도 세계 최대의 해운선사 중 하나로 꼽히는 시랜드는 이미 1957년 10월 컨테이너 시대를 열고, 대형화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컨테이너의 출현은 증기선에 맞먹는 기술혁신으로 평가된다. 선박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가 인부들에 의해 옮겨지던 화물은 컨테이너를 통해 단위화·규격화됨으로써 자동화기계에 의해 옮겨지기 시작했다. 또한 배에서 곧바로 철도로 연결, ‘해륙일관(海陸一貫)’ 수송 시스템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세계 최초로 컨테이너 시스템을 갖춘 시랜드는 하역비를 기존의 20분의 1로 줄이고, 항구에서의 정박기간도 7일에서 15시간으로 단축시켰다.
 
  컨테이너를 통해 해상수송의 미래를 내다본 조 회장은 베트남에서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해운사 설립에 착수했다. 조 회장은 젊은 시절 화물선 기관사로 동남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해운왕’의 꿈을 키웠고, “한진상사를 설립하면서 인천을 사업 근거지로 삼은 것도 또한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항구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1967년 대진해운을 설립한 조 회장은 당장 컨테이너 수송 시스템을 도입하고 싶었지만 한국의 해상운송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필요했다. 그해 12월 ㈜한진을 통해 정부에서 추진 중이던 ‘인천항 민자부두’ 사업에 참여키로 결심한다. 컨테이너 시스템이야말로 수송산업을 현대화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당장의 손익 계산을 떠나 장래를 내다보고 민자부두 건설에 참여키로 결정한 것이었다.
 
  부두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 회장은 노르웨이로부터 1만2000t급 화물선을 도입했다. 이름을 ‘오대호’로 붙였고, 한·미·일 정기 항로에 투입했다. 그리고 일본 조선소에 컨테이너선 2척을 주문했고, 1972년 한 척을 인도받아 부산∼고베(神戶) 항로에 투입했다. 이것이 국내 해운 사상 최초의 컨테이너 운항선인 ‘인왕호’이다.
 
 
  수출입국 토대 구축을 위한 선견지명
 
  한진은 이미 1970년 1월 시랜드와 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했고, 3월 2일에는 시랜드의 피츠버그호가 부산항에 입항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컨테이너를 통한 하역 작업이 이뤄졌다. 조 회장은 시랜드의 경영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한진의 시랜드 대리점 관련 부서에 우수한 직원을 집중 배치했고, 해운영업과 마케팅, 컨테이너 운영 업무를 숙달하도록 독려했다.
 
  1974년 당시 대진해운은 ‘일본우선(日本郵船·NYK)’의 대리점 업무를 맡고 있었고, 한진은 시랜드의 총대리점이었는데 시랜드사에서 두 회사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해 왔다. 조 회장은 시랜드를 선택했다. 당장은 일본우선의 화물이 필요했지만 세계 해운업계의 흐름을 전망해 볼 때 당시 세계 최대의 해운사였던 시랜드와 협력관계를 더욱 다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시랜드 대리점 사업을 통해 해운사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축적한 데 이어 1974년 5월 10일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준공됐다. 컨테이너 운송에 필요한 인적자원과 제반시설, 필요한 장비가 확보된 셈이다.
 
  마침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조 회장은 컨테이너 전용 선사 설립에 착수한다. 그러나 컨테이너선을 운항하려면 막대한 시설·장비·영업망이 필요했다. 조 회장은 신규 투자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랜드가 갖고 있던 세계 주요 항구의 시설과 장비를 이용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한진을 중심으로 해운사 설립을 준비하던 조 회장은 1977년 초 우연한 기회에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대한항공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나라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항공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이제는 육상운송과 항공사업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우리나라 해운업의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격려까지 받게 되자 조 회장은 1978년으로 예정했던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 설립을 그해 5월로 앞당겼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톱10 해운사로 우뚝 선 ‘한진해운’의 시작이었다.
 
  만일 한진그룹이 70년대 초 한진해운을 설립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수출입국 꿈은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우리의 제품들이 이 컨테이너를 통해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지금의 선진국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물류는 한 국가의 경제를 살리는 혈관이라 할 수 있으며 조중훈 회장의 선견지명이 경제 개발의 디딤돌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민간 외교관
 
  조 회장은 글로벌 물류 사업을 통해 전 세계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졌다. 이와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민간 외교관으로서 전후 50년 동안 국가 브랜드 향상 및 국가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함으로써 재계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 곳곳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일례로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포스코(옛 포항제철) 건설에도 조 회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초반 포항제철 건립을 위해 일본 정부와 차관 교섭을 벌이던 당시 조 회장은 일본 정·관계의 두터운 인맥을 활용해 민간 차원에서 아낌없는 막후 지원활동을 펼쳤다.
 
  또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인 1964년, 일본에서 들여온 2000만 달러의 긴급차관 역시 조 회장의 작품이다. 당시 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1961년 말 2억 달러에서 1963년 말 1억3000만 달러로 곤두박질쳐 있었고 한국 경제는 심각한 외환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일본과의 차관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장기영 부총리는 조 회장에게 긴급 요청을 했고 조 회장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와 담판을 시도했다.
 
  조 회장은 밤샘 궁리 끝에 “짧은 시간에 단 몇 마디의 말로 일을 성사시키려면 대화의 기선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혼네(속마음)’를 숨긴 채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다나카에게 “이왕에 제공할 거라면 서두르자”고 제안했고 화통한 응답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해 7월 21일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2000만 달러 규모의 1차 경제협력차관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한편으로 조 회장은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10여 년 이상 맡으면서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 증진에도 크게 기여했다.
 
  주어진 지면 때문에 여기서 글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게 개인적으로 너무 안타깝다. 그만큼 할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뛸 때도 생각하면서 뛰어라”고 현장에서 다그치던 그분의 목소리가 다시 그리워진다. 조 회장은 생각이 많아 아이디어가 많았고 아이디어를 실천으로 옮겨 오늘날 우리 경제 발전의 밑거름을 만든, 우리 재계에서 몇 안되는 분이었다.⊙

 

[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金宇中과 대우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도전·기업가 정신 때문”

정리 :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나보다 우리를, 개인보다 국가를, 소아(小我)보다 대아(大我)를,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 지금의 우리가 희생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세대다”

⊙ 대우의 ‘세계경영’은 국내 기업의 세계화 방향을 제시한 최초 경영전략
⊙ 1998년말, 589개 해외 支社·支店에 15만여 명 근무… 연간 176억 달러 수출

[도움말]
李景勳 대우인회 회장
崔桂龍 전 쌍용자동차 사장
王英男 전 대우자동차 사장
張炳珠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
1998년 5월 1일 폴란드 루블린에서 열린 대우자동차 LD-100공장 기공식에 참석해 초석을 놓고 있는 김우중 회장.
  “대우주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육대주 오대양은 우리들의 일터다. 우리는 대우가족 한집안 식구, 온 누리 내 집 삼아 세계로 뻗자.”
 
  대우그룹 사가(社歌)의 일부분이다. 가사(歌詞)에 나와 있는 것처럼 ‘대우(大宇)’의 일터는 오대양 육대주였다.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았던 것이다.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재무구조 개선작업)되기 직전인 1998년 연간 수출액은 176억4000만 달러였다. 대한민국 총 수출액의 13.3%에 해당하는 수치다. 대우는 IMF 외환위기의 조기극복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수출전문기업 대우는 1967년 ‘대우실업’으로 출발했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 국내기업 중 수출 1위를 기록했고, 1998년까지 32년 동안 누적 수출액은 1119억 달러였다. 수출을 통해 한국경제의 근대화와 성장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대우는 내수시장보다 해외시장에서 국부(國富) 창출에 주력했다.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대우의 수출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대우의 수출 실적 가운데 50% 이상은 계열사 제품이 아닌 타사(他社) 제품의 수출을 통해 이뤄졌다. 이는 대우가 갖고 있던 광대한 해외 네트워크가 우리나라의 대외(對外)수출역량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경영의 의미
 
  아쉽게도 대우그룹은 1999년 8월 워크아웃 체제로 들어가면서 해체의 길을 밟았다. 무리한 해외투자가 재무구조 악화를 가져와 기업 전체가 망했다는 세간의 지적이 있다. 이는 ‘세계경영’이라는 대우의 경영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주장이라는 게 김우중 회장 측근들의 말이다.
 
  돌이켜 보면 세계경영은 한국 기업의 방향을 뚜렷이 제시한 경영전략이었다. 신흥시장에서 단기간 내에 시장에 진입하고 선점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모델이었다. 세계경영은 2단계로 추진됐다. 1단계는 시장진입을 위한 전략이고, 2단계는 시장 내(內) 성숙단계를 위한 전략이다.
 
  세계경영은 창업 초창기부터 시작됐다. 1980년대 말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될 때는 한층 강화됐다. 그러나 ‘세계경영’은 성숙단계로 접어드는 1999년 ‘대우사태’로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대우는 무역과 중화학공업을 중시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철강·화학·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 등 6개 전략산업을 집중 육성했다. 국내 부실기업을 인수해 이를 정상화하면서 국내 산업기반을 유지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당시 인수한 기업들은 한국기계공업(대우중공업),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대우해양조선),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통신공업(대우통신), 국방부 조병창(대우정밀공업), 대한전선 가전부문(대우전자), 동양증권·삼보증권(대우증권), 경남기업 등이었다. 대우는 이들 기업을 건실한 회사로 만들었다.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직전까지 대우의 계열사는 총 41개였는데 산업 연관 효과가 큰 자동차, 조선, 기계, 전자 등이 주력 분야였다.
 
  김우중(金宇中) 전 대우그룹 회장은 창업 초창기부터 해외시장 확대에 노력해 왔다. 해외에서 기업성장의 동력을 확보한다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1993년부터는 단순가공 수출전략을 뛰어넘어 생산·연구·마케팅·인력·자본 등 경영의 제반 요소들을 해외에 ‘현지화’했다. 우리 기업의 세계화를 선도한 것이다.
 
 
  현장 중시해 4530일간 해외 출장
 
1979년 대우조선 창립 1주년에 참석, 근로자들과 악수하고 있는 김우중 회장.

  김우중 회장은 해외사업을 진두지휘(陣頭指揮)했다. 창업 때부터 1998년말까지 4530일간 해외출장을 다녔다. 세계경영이 본궤도에 오른 1996년에는 257일, 1997년에는 237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김 회장은 ‘촌음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으로 토요일에 출국해 월요일에 현지에 입국, 곧바로 업무를 보곤 했다. 그는 서류보다 현장을 중시했다.
 
  김우중 회장이 추진한 ‘세계경영’의 밑바탕은 창조·도전이었다. ‘대우정신’으로 통하는 이 단어는 ‘김우중’과 ‘대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도전’은 미개척 해외시장을 뚫어내는 원동력이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 상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중심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업은 내수시장에서 수익을 내는 데 몰두했다. 내수영업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우는 달랐다. 김우중 회장은 사업 초창기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수출증대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모든 것을 던지겠다고 결심했다. 김우중 회장을 중심으로 대우 사람들은 열심히 뛰었다. 물건 하나를 팔기 위해 홍콩에서 일본-서울-부산-서울-홍콩으로 ‘날아’다녔다. 그 결과 자체공장도 없이 자본금 300만원으로 시작했던 섬유수출업체 ‘대우실업’은 창업 5년 만에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며 섬유수출업계의 1인자가 됐다.
 
  해외시장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건설회사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시장이 아니면 다른 시장은 없다고 생각할 때, 대우는 수교도 되지 않은 리비아 건설시장에 뛰어들었다.
 
  리비아 진출 초창기 때의 일이다. 대우가 학교 건물을 짓기로 돼 있었는데 그 옆 공사장에 이탈리아 건설업체가 미리 진출해 학교 건물을 거의 다 지은 상황이었다. 이탈리아 업체는 건물 내 전기·기계설비 공사를 남겨두고 있었다. 대우는 그때부터 땅을 파기 시작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이탈리아 업체보다 빨리 건물을 짓기보다는 리비아 측과 약속한 공기(工期)를 맞추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공사가 끝날 무렵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공사를 이탈리아 업체보다 빨리 끝낸 것이다. 그때부터 리비아 정부는 대우를 달리 봤다.
 
  대우는 리비아에서 10년간 100억 달러 규모의 공사를 수주했다. 공개입찰보다는 수의계약이 많았다. 리비아 정부가 대우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리비아 사람들에게 한국인의 성실성을 각인시킨 대우는 국내 다른 기업이 리비아에 진출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
 
  대우는 리비아로부터 공사대금으로 원유(原油)를 받기도 했다. 이 원유를 대우 소유의 벨기에 정유공장으로 가져가 정제(精製)한 후 현금화했다. 부가가치를 높인 것이다. 대우는 나중에 정유공장을 높은 가격에 되팔아 많은 수익을 남겼다.
 
1998년 7월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누아세르 외국기업전용공단에서 모하메드 모로코 황태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자동차-전자복합공장 기공식을 갖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세대”
 
1980년 수단 ITMD준공식에 참석해 감사메달을 받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 회장은 평소 직원들에게 “나보다 우리를, 개인보다 국가를, 소아(小我)보다 대아(大我)를,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 지금의 우리가 희생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세대”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한때 대우의 ‘새벽회의’는 국내 업계에서 유명했다. 대우 사람들은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했다. 대우인(人)은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실천했다. 대우가 1992년 초 인도 onGC 해양 플랜트 공사에서 보여준 ‘공사기간 단축’은 자기희생과 시간의 소중함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공기를 맞추기 위해 현지 근로자들은 설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차례를 지낸 뒤 공사장으로 향하기도 했다.
 
  대우그룹은 사라졌지만 ‘대우’와 ‘김우중’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기업가 정신’ 때문이다. 1970년대 당시 대우인들은 아프리카 오지(奧地)를 다니면서 “사우스 코리아가 어디에 있느냐. 그것도 나라냐”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러나 목표로 삼은 시장은 반드시 뚫었다. 기업가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외시장 개척에 있어서 대우는 큰 원칙을 갖고 있었다. 한국업체가 진출하지 않은 나라를 전제로 땅이 넓은 나라(수단), 인구가 많은 나라(나이지리아), 자원이 풍부한 나라(리비아 등 중동)에 우선적으로 진출했다.
 
  이런 원칙하에 김우중 회장은 임원들과 함께 세계지도를 펴 놓고 사업을 구상했다. 해외진출 초기 공략 대상국으로 아프리카 국가 수단이 결정됐다. 대우의 아프리카 진출은 이렇게 시작됐다. 수단에는 이미 북한과 중국이 들어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김우중 회장은 수단 대통령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비동맹 50국 회의를 위한 숙박시설, 대통령 궁전 등을 따냈다. 대우는 공사를 멋지게 완수해 수단 지도부에게 감동을 줬다. 이후 수단 대통령은 김우중 회장에게 “타이어공장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수단은 도로 포장이 잘 안돼 있어 타이어의 수요가 많았다. 대우는 면화 생산량이 많았던 수단에 섬유공장을 지어 줘 수출증대에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김우중 회장은 단순 교역을 넘어 세계경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미(未) 수교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에도 노력했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국가 간 수교가 필요했다. 우리 정부가 수단, 나이지리아, 리비아, 알제리 등과 수교를 맺은 데는 대우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대우와 아프리카·중동 국가와의 우호적 ‘관계’는 한국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치열한 로비전이 펼쳐질 때, 김우중 회장은 평소 친분이 있는 아프리카·중동 국가의 IOC 위원들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IOC 위원들은 자국(自國)에서 사업을 크게 하고 있는 김우중 회장의 요청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1981년 당시 세계를 무대로 비즈니스를 한 국내 기업은 대우밖에 없었다.
 
 
  “헝가리와 체코로 쳐들어가자”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시내를 누비는 대우자동차들.

  대우의 세계경영은 1980년대 후반 동구권 사회국가와 소련이 해체되면서 적극 추진됐다. 그 무렵 김우중 회장은 “헝가리와 체코로 쳐들어가자”고 했다. 두 나라는 서방 쪽에 덜 개방돼 있으면서도 공산화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대우는 제조업 진출에 앞서 대우증권을 통해 합작은행을 만들었다. 금융시스템 구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수익을 많이 낸 대우증권은 IMF 이후 산업은행으로 넘어갔고 산업은행은 대우증권 현지법인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김우중 회장은 그로츠 당시 헝가리 서기장의 도움을 얻어 소련으로 진출했다. 김 회장과 개인적 인연이 깊었던 그로츠 서기장은 한국이 구(舊) 소련과 수교하는 데도 도움을 줬다.
 
  대우는 동서유럽을 연결하는 상업 거점지역인 체코에 (주)대우 프라하지사(支社)를 시작으로 1993년 대우전자 판매법인을 세웠다. 1995년에는 체코의 상용자동차 생산업체인 아비아사(社)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외국기업이 체코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첫 번째 사례였다. 김우중 회장은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 진출을 위해서는 자동차부문 진출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한 개의 자동차 모델을 50만대 이상 생산·판매하면 가격을 절반 가량 낮출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대우는 판매부진과 만성 적자상태였던 아비아사의 체질을 개선해 1년 반 만에 2200대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향후 생산능력 5만 대까지 확충하고 자체 연구개발 능력도 강화했다. 대우의 체코 진출은 상업적 이익을 겨냥한 사업이라기보다는 현지인과 번영을 함께하는 동반자의 이미지로 체코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우크라이나에는 자동차·부품·면방·금융·이동통신 등 패키지형(型)으로 진출했다. 인근 구 소비에트 연방국가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이후 대우는 동구권 자동차 시장에서 점유율 30%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해외시장 개척 사례 중에서 우즈베키스탄을 빼놓을 수 없다. 우즈베크 현지에는 지금도 대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길거리에는 대우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국민 대다수가 대우가 개설한 통신 교환기를 사용하고 있고, 대우가 세운 면직공장에서 옷이 생산되고 있다. 또 대우가 투자한 전자회사에서 TV 등 가전제품이 만들어진다.
 
  대우가 우즈베크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92년 11월이었다. 국내 종합상사 가운데 처음으로 지사를 설치했다. 이후 외국기업으로서는 중앙아시아 최초로 자동차 공장을 설립했다. 대우와 우즈베크 정부가 각각 50% 지분을 투자해 설립한 ‘우즈-대우자동차’가 그것이다. 당시 카리모프 대통령이 한국의 창원 공장을 방문해 “우즈베크에도 똑같은 공장을 지어 달라”고 김우중 회장에게 부탁해 공장이 만들어졌다. 우즈-대우는 경차(輕車) 다마스와 티코, 라보 등을 생산했다.
 
  대우의 우즈베크 진출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중앙아시아를 국내 기업이 처음으로 개척했고, 10여 개 자동차 부품업체의 현지진출을 주선해 중소기업과의 상생(相生)을 꾀했으며, 우즈베크의 경제발전에 기여해 양국의 우호관계를 증진시켰다는 점 등이다.
 
 
  세계화의 선구자
 
김우중 회장은 ‘세계경영’을 평가받아 1992년 <포천>지 표지인물로 선정됐다.

  최근 G2로 부상한 중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국내 기업 중 최초로 진출한 기업이 대우였다. 김우중 회장은 국교 수립 전인 1980년대 초부터 중국시장 진출을 모색해 왔다. 그런 노력의 첫 결실이 1988년 6월 중국 푸젠성(福建省)의 ‘복주 냉장고 공장’이었다. 한중(韓中) 양국이 수교를 맺기 4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비롯 진출 1년 만에 톈안먼 사태로 경영상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중국 내 다른 지역에 진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후 대우는 톈진(天津) 카오디오 공장, 위하이(威海)·바오안(寶安) 대우전자, 산둥(山東) 대우전기, 옌타이(蓮台) 대우전자부품공사 등을 세웠다. 산둥성에 세운 시멘트공장은 중국내 단일 공장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대우중공업이 옌타이에 설립한 ‘대우중공업 연대유한공사’는 지금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꾸긴 했지만, 중국내 굴삭기 시장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대우는 옌타이시(市)에 대우의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 놓았다. 회사 유니폼이 없었던 중국에서 대우 근로자는 청색 작업복을 입어 이른바 ‘푸른색 붐’을 일으켰다. 당시 옌타이에서는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 대우 직원이 ‘따위(大宇)’라고 한마디만 하면 택시기사나 경찰의 친절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대우는 1998년 말 396개의 해외법인을 비롯해, 지사·연구소·건설현장 등 총 589개의 해외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충실한 해외기반을 확보했던 것이다. 대우는 한국이 중국, 베트남, 헝가리, 리비아 등의 제3세계 국가와 수교하기 전부터 현지에 진출해 시장을 뚫었다. 유엔개발기구가 발표한 1998년도 세계투자보고서에 따르면, (주)대우의 해외 보유자산은 149억 달러로, 개도국 기업 가운데 해외 자산이 가장 많았다. 현지 사업장에 근무하는 종업원 숫자도 15만여 명에 달했다. 해외 인력이 국내 인력(10만여 명)보다 5만여 명 더 많았다.
 
  최근 3~4년 전부터 ‘세계화’가 재계(財界) 화두(話頭)로 부상했다. 대우는 짧게는 15년 전부터 길게는 창업 초창기부터 세계화를 주창(主唱)했다. 김우중 회장이 갖고 있던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경영철학이 지금 와서야 빛을 발하는 것이다.
 
  김우중 회장은 열심히 일하는 기업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했다. 휴일과 명절에도 업무를 계속했다. 아침 7시부터 밤 늦은 시각까지 생활 전체를 경영활동에 전념해 왔다. 그는 골프는 물론, 술도 평소 가까이하지 않았다. 한국경제 발전과 기업의 세계화에만 몰두했다는 것이 그를 지켜본 이들의 주장이다.
 
  김우중 회장은 1980년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을 목적으로 250억원을 출연해 공익법인 ‘대우재단’을 설립했다. 대우재단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들, 그늘진 곳에 있어야 하는 것들, 조금만 도와주면 일어설 수 있는 것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대우학술총서와 의료지원 등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
 
 
  기업인의 노벨상 受賞
 
  김우중 회장은 오너이기보다는 ‘전문경영인’으로서 인정받기를 희망했다. 그는 평소 “2세 경영상속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해 왔다. 실제로 2세의 경영참여 사례는 전혀 없었다. 그는 외국정부가 수여하는 각종 훈장을 받아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일조했다. ‘기업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국제상공회의소 국제기업인상’을 받았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로부터 ‘듀스트리크 훈장’,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도뇌르 훈장’, 독일 정부로부터 ‘십자공로 훈장’, 벨기에 국왕으로부터 ‘대왕관 훈장’ 등을 받았다.
 
  김우중 회장은 1999년 7월 IMF 여파로 대우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상태로 몰리자 자신이 보유한 대우중공업·쌍용자동차·대우개발·대우증권·교보생명 주식 5142만 주(株)를 내놓았다. 당시 이들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2553억원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개인이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총 452억원 상당)도 경영정상화를 위해 모두 내놓았다. 회사 경영자로서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2011년은 대우가 해체된 지 12년이 되는 해이다. 대우그룹은 없어졌지만 대우는 여전히 살아있다. 국내 대형 건설사의 주요 CEO 70~80%가 대우 출신이다. 증권계도 대우증권 출신이 많다. 내비게이션 업체 사장은 80~90%가 대우통신 출신이다. 대우는 인재(人材)를 중요시했다. 대우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지금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우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갖고 있다.

 

[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崔元碩과 동아

한국인의 突貫정신이 리비아 大水路 공사 성공시켜

글 : 崔元碩 전 동아그룹 회장
정리 :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 대수로 공사, 100억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
⊙ 대천 방조제 공사에 어선 11척 동원해 물막이 공사 완공
⊙ 국토개발의 核心인 동진강 간척공사·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

崔元碩
⊙ 1943년 대전 출생
⊙ 이화여대사대부고 미국 조지타운大ㆍ한양大 졸업
⊙ 동아건설ㆍ대한통운 사장, 대전MBC 대표이사 회장, 동아생명 회장, 공영토건 관리인,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장, 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 대한건설협회장,
    동아그룹 회장 역임. 현 동아방송예술대학 이사장.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 대형 트럭이 송수관을 매립지 현장으로 옮기고 있다.
  동아그룹은 1970년대 ‘중동 붐’을 이끌었고, 1980년대 리비아 대수로(大水路) 공사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대한민국 건설사(史)에 큰 획을 그은 ‘대작(大作)’이었다. 그룹 모체였던 동아건설은 공사 비용(1·2단계) 100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를 성공리에 완성했다.
 
  대수로 공사의 본질은 콘크리트 관(管)을 만들고 이를 운반해 매설하는 작업이었다. 동아그룹은 대수로 공사의 3대 요소인 관생산(동아콘크리트), 관운송(대한통운), 관매설(동아건설)을 담당했던 3개 회사를 갖고 있었다.
 
 
  “동아그룹은 대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업”
 
동아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1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전화통신공사를 수주했다. 1977년 사우디를 방문해 당시 칼리드 국왕과 악수하고 있는 34세의 최원석 회장.

  1982년 5월, 리비아 대수로청(GMRA) 부위원장 누리 시누시(Nuri Senussi)를 포함한 4명의 대표단은 한국을 방문해 동아건설, 동아콘크리트 및 대한통운을 면밀히 시찰한 후 이렇게 말했다.
 
  “옷감부터 단추까지 다 있고 재단까지 하는 양복점에 온 것 같다. 동아그룹은 대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업 같다.”
 
  1983년 11월 6일, 나는 트리폴리의 알 카빌호텔에서 리비아 대수로청 망구시(Mangoush) 장관과 정식계약을 체결했다. 이날 계약식에는 김성배 건설부장관이 참석했다. 단일 토목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를 동아건설이 수주할 당시의 환호와 충격은 지금도 내 가슴속 깊숙이 남아 있다. 대수로 공사는 그해 세계 10대 뉴스로 뽑혔다. 이로 인해 ‘동아건설’은 전 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총 5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공사 목적은 리비아 동남부와 서남부 내륙 지하에 매장돼 있는 35조t의 풍부한 수자원(나일강의 200년 유수량)을 취수(取水)한 후, 대형 송수관을 통해 리비아 북부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물이 부족한 지역에 농업용수, 생활용수, 공업용수를 공급함으로써 한반도 면적의 약 6배에 달하는 122만㎢의 사막을 옥토로 바꾸겠다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나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건설한국(建設韓國)의 명예가 걸려 있는 국가적인 공사’로 생각하고 공사에 임했다. 대수로 1단계 공사는 총연장 1874㎞의 송수관을 통해 하루 200만t의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 공사는 1983년 11월 착공해 7년7개월 만인 1991년 8월에 끝났다.
 
  1단계 공사를 성공리에 마친 동아그룹은 2단계 공사도 수주했다. 2단계 공사는 1990년 6월 착공돼 74개월 만인 1996년 8월에 완공됐다. 리비아 서남부 자발하수나 취수장에서 지중해연안 트리폴리를 잇는 길이 1670㎞의 대역사였다.
 
  통수식(通水式)은 1996년 9월 1일에 열렸다. 세계 30여 개국의 국가원수급 지도자들과 한국의 추경석 건교부장관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통수식에서 리비아의 카다피 지도자는 “이 공사의 성공적인 마무리로 사막을 옥토로 바꾸려는 리비아의 오랜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며 “동아그룹은 리비아의 녹색혁명을 앞당겨준 기업이며 ‘체어맨 초이(최원석)’는 리비아 역사의 일원이다”고 했다.
 
 
  동아가 세운 각종 기록들
 
  대수로 1·2단계 공사 대금은 총 98억9000만 달러였다. 공사 규모만큼 소요 비용도 당시로서는 최대였다. 브리태니커(Britannica) 사전은 대수로 공사를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the greatest civil engineering project in the world)’라고 소개했다.
 
  동아그룹이 대수로 1·2단계 공사를 하면서 세운 기록 또한 경이적이었다. 1995년 당시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사리르 공장 3000여 명, 브레가 공장 3000여 명, 관로 현장 5000여 명, 기타 현장 2000여 명 등 총 1만3000여 명이었다. 1996년 8월까지 한국인 연인원 1254만명과 외국인 근로자 연인원 1346만명이 동원됐고 140여 종의 주요 건설장비 1150만 대가 투입됐다.
 
  이때까지 투입된 콘크리트는 2340만t으로 분당 신도시 2개를 건설할 수 있는 양이었다. 사용된 흙은 3억7000만㎥로 여의도 전체를 높이 125m로 덮을 수 있다. 또 경부고속도로의 8배가 넘는 총 연장 3544㎞ 길이의 대형관을 만드는 데 들어간 강선(P/S wire)의 길이는 543만㎞로, 지구를 135바퀴 도는 것과 같았다. 관을 운반하기 위해 동아건설이 별도로 건설한 관운송 도로(haul road)의 길이는 3500㎞로, 당시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총 연장보다 길었다. 관을 운송한 거리는 1단계 공사가 1억1000만km였고, 2단계 공사가 4억2000만㎞로 1·2단계 관 운송거리를 합하면 지구에서 달까지 700번이나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다.
 
  동아건설이 현장에 보유하고 있는 각종 차량은 약 6000대였는데 트레일러, 포크리프트, 트랙터, 크레인, 크러셔, 불도저 같은 중량차량이었다. 공사차량을 정비하는 아즈다비아(Ajdavia)공장은 13만㎡의 부지에 35만 종(種)의 부품을 가진 초대형 정비공장이었다.
 
  관 하나의 무게는 75t이었고, 직경은 4m, 길이는 7.5m였다. 이를 실어 나르는 27.5m 길이의 트레일러는 독일회사에 특별히 주문·제작했다. 동아건설은 925대의 트레일러를 갖고 있었다. 1개 수송단(輸送團)은 60대의 트레일러로 구성됐는데 수송단이 움직일 때 뒤따르는 모래바람은 10여㎞에 달했다. 그 모습은 마치 대형 함대가 이동하는 것과 같았다.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최대 장관 중의 하나였다.
 
 
  UN 제재 조치에도 神話 창조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함께한 최 회장(왼쪽).

  공사 과정에서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1992년 4월 발효된 유엔(UN)의 대(對)리비아 제재조치로 인력과 공사 자재 및 장비를 수송하는 데 힘들었다. 리비아로 들어가는 항공기의 이·착륙과 선박의 입·출항이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력과 기자재 공급은 인접국 튀니지(Tunisia)나 이집트(Egypt)를 거처 육로(陸路)로 리비아에 들어가야 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2단계 공사 당시 리비아 정부는 당초 완공 예정보다 2년을 앞당겨 줄 것을 요구했다. 리비아의 카다피(Qadafi) 국가지도자는 1995년 8월 나에게 “내년(1996년) 9월 1일 혁명기념일(革命紀念日)까지 사하라사막의 지하수가 트리폴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대수로 2단계 공사 현장은 섭씨 50도가 넘는 곳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직경 4m, 길이 7.5m, 무게 75t에 이르는 거대한 송수관을 매설한다는 일은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동아인(東亞人)의 잠재력은 ‘기한 내에는 해내고야 마는’ 한국인의 돌관(突貫) 정신이었다. 리비아 내(內) 항만과 공항이 봉쇄된 최악조건에서 공기단축의 성공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아건설은 리비아 대수로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뤄 가며 세계 건설시장에서 우리의 토목기술을 한 단계 높였고, PCCP 파이프 설계에 관한 국제특허(國際特許)도 획득했다.
 
  1996년 9월 대수로 2단계의 트리폴리 통수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면서 약 100억 달러 상당의 대수로 3·4단계 공사도 동아가 맡기로 합의했다.
 
  나는 1968년 동아건설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해외 건설시장에 대한 진출의지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은 1971년 중반이었다. 동아건설은 1972년 해외건설 진출의 첫 번째 시장인 괌(Guam)에 동아아메리카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미군 해군기지 내 해군장교 숙소와 통신시설을 만들었다. 1973년에는 말레이시아 데밍고댐 공사에 응찰했지만 일본 미쓰비시그룹의 자금력에 아쉽게 고배(苦杯)를 마셨다. 당시 우리가 우수한 경험과 기술력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제적 지위와 경제적 신뢰도가 낮아 수주에 실패한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수주에는 실패했으나 이 지역에서의 수주활동 경험이 중동 건설시장 진출에 큰 도움이 됐다.
 
  동아건설은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외곽도로 공사를 수주해 중동진출의 길을 열었다. 이듬해 수주한 주베일항만 공사(9160만 달러)는 해외건설의 도약대였다. 연이어 수준한 콰디마항만 공사(1만7902만 달러)와 사우디아라비아 TEP통신공사(12억7249만 달러)에서는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TEP공사가 진행되던 1978년에는 9000명의 국내인력을 사우디에 송출했고, 1980년까지 3만여 명을 송출했다. 사우디 TEP공사에 동원된 연인원은 650만명이었다. 동아건설이 개통한 전화회선은 117만6000회선이었다.
 
  동아건설은 1975년 우리나라 건설업체로는 처음으로 아랍에미리트(UAE)에 진출해 아부다비 교량공사를 따냈다. 1977년에는 아부다비 방파제축조 공사와 마프락 하수처리 공사를 수주, 중동 건설시장의 영역을 확대해 갔다.
 
  동아건설은 1945년 8월 충남 대전에서 ‘충남토건’이라는 간판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선친(先親) 최준문(崔竣文·1920∼1985) 회장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선친은 충남 부여의 임천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수리간척사업 현장에 다니면서 토목공사의 기본을 익혔다. 그 후 평안북도 신의주 철도공사 현장에서 막일과 밑바닥 일을 두루 체험한 후 논산으로 다시 내려와 본격적인 토목인(土木人)의 길을 걸었다.
 
 
  25세의 최준문 회장, 농업토목공사로 기반
 
동아그룹 창업주 고(故) 최준문 명예회장.

  선친은 8·15 해방과 함께 대전으로 터전을 옮겨 동아그룹의 근간이었던 충남토건(1949년 동아건설로 개명)을 설립했다. 6·25 전쟁이 터질 때까지 대전, 논산, 부여 등 충남 일대에서 교량, 도로 및 재해복구 공사 등 주로 농업토목 공사를 했다.
 
  동아건설을 전국 규모의 대 건설업체로 떠오르게 한 공사는 대천수리조합이 6·25전쟁 중에 발주한 대천방조제 간척공사(1952∼1958)였다. 대천 간척공사는 해방 전에 일본인 건설업체가 시공을 하다가 시작단계에서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중단한 공사였다.
 
  대천 간척공사는 충남 보령시 대천읍 앞의 해수면을 막아 방조제를 쌓고 그 안의 갯벌을 농토(1100ha)로 바꾸는 공사였다. 남북으로 연결된 방조제(3383m) 축조에는 만 4년이 소요됐고, 배수갑문을 설치하는 데는 2년이 소요됐다.
 
  방조제공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최종 물막이 공사였다. 공사가 진행될수록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 쇠말뚝을 박고 그 위에 공사용 다리를 설치했으나 만조(滿潮) 때면 쇠말뚝이 뿌리째 뽑혀 나가곤 했다. 채석장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축대를 쌓듯 차곡차곡 쌓아 나갔으나 최종 구간에서 물살이 심해 번번이 실패했다.
 
  고심 끝에 나의 아버지 최준문 회장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어선을 물막이 공사에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부친은 인근 어촌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어선 11척을 구입한 후 어선에 돌을 가득 실어 미리 표시해 둔 지점에 좌초시켰다. 빠른 물살을 막기 위함이었다. 어선투입 작전은 적중했다. 8개월이라는 긴 사투 끝에 최종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대천방조제 축조공사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다. 대천 방조제의 건설사적 의미는 기계장비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거대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배를 동원한 방조제 공사는 현대건설의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1984년 서산간척지 방조제 물막이 공사에 폐(廢)유조선을 동원한 것보다 28년 앞섰다. 대한토목학회(大韓土木學會)가 1993년 12월 토목회관 준공식 때 동아그룹 창시자 최준문 회장의 동상(銅像)을 건립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며 대토목인(大土木人)으로 인정한 데는 대천방조제 최종 물막이의 성공신화가 한몫했다.
 
 
  동진강 간척공사와 경부고속도로 공사
 
동진강 간척공사 당시 축조한 방조제.

  동아건설은 1957년 본사를 대전에서 서울 중구 서소문동으로 이전했다. 동아건설은 1960년대 들어 동진강 간척공사, 왕십리발전소 공사,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여러 공사 중에서 동진강 간척공사는 동아건설이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동진강 간척공사는 1960년대 초 제1차 경제개발계획상(上) 동양 최대의 국토개발사업이자 다목적 토목사업이었다. 호남평야에 인접한 전북 부안군 부안면 서쪽의 동진강 하구의 바다를 총연장 12.8km의 방조제로 막아 그 내부의 개펄(3925ha·1180만평)을 농지로 만드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당시 정치권과 언론은 간척공사의 기술적인 문제를 이유로 공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강한 의지와 추진력으로 방조제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됐다.
 
  동진강 간척공사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른 국토개발사업의 상징적인 공사였다. 착공 이후 하루 동원인력은 평균 2000명이었다. 그때까지 국내의 어떤 건설현장에서도 볼 수 없던 대규모 인력 투입이었다. 6년간의 대역사 끝에 1968년 10월 방조제가 완성됐다.
 
  동아건설은 1967년 우리나라 국토개발의 획을 그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에 참여함으로써 장비·기술·경영의 현대화를 기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했다.
 
  1968년 7월, 정부는 당시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통운을 민영화하면서 동아건설에 경영권을 맡겼다. 대한통운의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은 부친 최준문 회장은 만성 적자와 경영부실의 늪에 빠져 있던 대한통운을 살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마침내 민영화된 지 3년반이 지나면서 대한통운은 완전히 정상화됐다. 대한통운은 우리 경제의 고속성장 기반을 확충했고, 수송체계를 선도적으로 이끄는 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대한통운의 경영정상화는 아버지의 건강악화를 가져왔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몸을 돌보지 못한 선친께서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아버지는 서울 서소문의 한일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병실에 직통전화를 열어 놓고 업무를 봤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 기력을 다소 회복했지만 병고(病苦)가 지병이 돼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동아그룹, 권력에 의해 해체당해
 
  대한민국 건설업계의 중심역할을 했던 동아그룹은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출범하면서 비운(悲運)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정부는 IMF 극복이라는 이름하에 ‘입맛에 맞지 않는 기업가’를 권력으로 처리한 것이다.
 
  1997년 12월 당시 동아그룹은 동아건설·대한통운·동아생명·동아증권·동아엔지니어링·공영토건 등 22개 계열사를 둔 재계서열 10위의 대기업이었다. IMF사태로 자금 유동성에 다소 위기가 있었지만, 해외 공사대금이 들어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리비아 대수로 2단계 공사가 끝날 무렵 동아건설은 리비아로부터 매년 공사대금 10억 달러를 차질 없이 받고 있었다. 1996년 9월 대수로 2단계 공사 트리폴리 통수식에서 리비아 대수로청(GMRA) 자달라 장관은 한국기자들에게 “대수로 3·4단계 공사도 동아그룹과 협력관계를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두 달 후 리비아 정부는 51억 달러(4조 3000억원) 규모의 대수로 3단계 공사에 관한 낙찰의향서(Letter of Intent)를 동아건설에 발급했다.
 
  그로부터 1년반 후 동아그룹이 ‘재벌해체’의 표적이 되어 공중분해당하는 운명을 맞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김대중 정권에 의해 1998년 5월 15일 동아그룹 회장직에서 쫓겨났다. 6·25 전란(戰亂)을 딛고 성장해 온 동아그룹은 이때부터 순식간에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동아그룹의 첫 번째 매각 대상은 동아증권이었다. 내가 물러난 지 두 달 만에 동아증권은 ‘세종기술투자’라는 듣지도 못한 조그만 회사에 단돈 ‘21억원’에 넘어갔다. 동아건설이 1300억원을 투입해 건설한 서원레저골프장은 1998년 11월 현찰 20억원에 팔렸다. 말도 안되는 헐값 처분이었다.
 
  동아그룹이 해체될 무렵 리비아 정부는 한국 정부에 동아그룹이 대수로 공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허사(虛事)였다. 대수로 공사를 통해 거액(巨額)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는 다른 나라 경쟁업체에 돌아갔다.⊙

 

[한국경제, 미래를 향한 도전] 그린수송 시스템

高연비·친환경차 개발로 ‘그린카 빅4’ 국가로 성장

글 :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중국은 친환경차 ‘올인’ 10년간 17조 쏟아붓는데…
한국은 ‘현재의 성공’ 취해 내연기관車에만 매달려


⊙ 中, 한국보다 4년 먼저 전기車 시판… 친환경차 관련 日특허 한국 30배
⊙ 일본, 세계 최초로 전기차 ‘아이미브’ 판매
⊙ 현대차, 2013년까지 4조1000억 투자… 2018년 친환경차 50만대 양산
2010년 11월 9일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퍼스트레이디들을 태울 전기차가 창덕궁 연경당에 도열해 있다.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개막일인 2010년 11월 11일, 서울시의 최첨단 친환경 그린카가 서울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에 총출동했다. 시민들은 시(市)가 G20 성공을 기원하며 행사용으로 지원한 전기차와 수소차를 보고 마냥 신기해했다.
 
  서울시는 현대자동차·GM대우·한국화이바 등과 협력, 2010년 개발한 전기차 38대와 수소연료 전지차 15대를 행사장과 주변시설을 연계해 주는 셔틀버스와 내외신기자 취재차량, 행사참가자 이동차량 등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전기차는 현대차의 ‘블루온’ 10대와 전기버스 ‘일렉시티’ 4대, GM대우의 ‘라세티프리미어’ 10대, 한국화이바와 현대중공업이 개발한 상용 전기버스 ‘이프리머스’ 10대, 브이이엔에스사의 ‘브이그린’ 4대다. 수소연료 전지차는 현대·기아차의 수소버스 2대와 ‘모하비’ 13대였다.
 
  특히 승용 전기차 ‘블루온’과 ‘라세티 프리미어 전기차’ 등은 취재진과 행사 참가자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내외신기자 취재용으로 지원된 수소연료 전지차 ‘모하비’는 한 번 충전으로 650km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권혁소(權赫昭) 서울시 맑은환경본부장은 “친환경 그린카가 국제회의 행사차량으로 나오기는 처음”이라며 “세계 전기차 시장 선점(先占)을 두고 경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국내 그린카가 세계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이벤트였다”고 했다.
 
 
  왕촨푸 중국 BYD 회장, 전기버스 1000대 납품계약 밝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2010년 11월 1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만찬에 앞서 도요타의 1인용 전기차‘아이리얼’(i-REAL)을 시승하고 있다.

  2010년 9월 24일,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국제자동차모터쇼 행사장. ‘그린 과학(綠色科學)’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 모터쇼에 비야디(BYD·Buid Your Dreams)와 체리자동차, 상하이차 등 중국 ‘토종’ 자동차 업체들이 GM·도요타·폴크스바겐·혼다 등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에 도전장을 내밀며 신차 10여 종을 내놓았다.
 
  상하이차가 주력으로 내놓은 것은 준중형 세단인 ‘로위 550’ 플러그인 하이브리드(하이브리드카에 충전기능을 넣어 단거리는 전기의 힘만으로 달리는 차·전기차의 일종)였다. BYD도 2011년부터 중국 시장에 판매할 순수 전기차인 ‘E6’를 전시했다. 이 모터쇼에서 중국 자동차업체들이 선보인 하이브리드카와 전기차는 모두 6가지 모델이었다. 중국 자동차업체들은 차세대 ‘친환경차’ 개발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일주일 뒤인 9월 30일,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의 BYD 생산공장. BYD는 자체 기술로 개발한 전기버스 ‘K9’ 출시 행사를 가졌다. 왕촨푸(王傳福) BYD 회장은 단상에 올라 “오늘 창사시 정부와 전기버스 1000대 납품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중국에서 전기차 시장은 ‘미래의 시장’이 아니라 ‘현재의 시장’이다. 중국은 현재 1000개가 넘는 회사가 전기차를 제작하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베이징·상하이 같은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에서도 전기버스가 연간 1000~2000대씩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BYD가 만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승용차인 ‘F3DM’는 2009년부터 판매되기 시작했다. 2011년부터는 순수 전기 승용차도 시장에 나온다고 한다. 중국 업체들이 2012년까지 출시하겠다고 밝힌 친환경차는 모두 25가지 차종이다. 순수 전기차가 13종이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가 2종, 하이브리드차가 10종이다.
 
  한국 자동차업체가 2012년까지 출시하겠다고 발표한 전기차는 2종뿐이다. 하지만 이 2종류도 모두 관공서에 납품하는 2000여 대가 전부다. 일반 소비자에게는 2013년에야 판매한다는 것이다. 차세대 자동차시장에서 중국은 이미 한국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중국은 내연기관 자동차(휘발유·경유 등을 연료로 삼는 엔진 자동차)로는 현재의 자동차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일본·한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보고, 아예 전기차로 판을 바꿔 자동차산업의 미래 패권(覇權)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이런 시도는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 2009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으로 성장한 엄청난 내수(內需)시장이 있고, 전기차 등 친환경차에 집중적인 지원을 퍼붓는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2010년 8월 ‘16개 국유기업을 연합해 차세대 전기차 개발에 나서고, 2020년까지 1000억 위안(약 17조원)을 투자한다’는 친환경차 발전계획을 발표했다. 2020년이 되면 한 해에 친환경차를 500만 대 정도 보급하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친환경차를 구입하는 소비자에게 최대 6만 위안(약 1000만원)을 지원해 준다. 매년 10개 도시를 선정해 각 도시에 연간 1000대씩 전기버스를 공급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특히 내연기관 자동차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기차 관련 기술 확보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다.
 
  친환경차 발전계획에 따르면, 외국계 기업이 중국 내에서 전기차나 전기차 부품을 생산하려면 반드시 중국 토종업체와 합작기업을 세워야 하며, 중국쪽이 51% 지배지분을 갖도록 했다. 이럴 경우 관련 기술은 중국업체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횡포’에 가까운 원칙이지만,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야 한다.
 
 
  일본, 세계 최초로 전기차 ‘아이미브’ 판매
 
현대차가 생산한 전기버스 일렉시티.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자동차시장의 강자(强者) 일본은 미래 자동차시장에서도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1997년 세계 최초로 도요타가 하이브리드카인 ‘프리우스’를 내놓았고, 미쓰비시 역시 올해 세계 최초로 전기차 ‘아이미브’를 판매했다. 닛산은 2015년까지 50만대 규모의 전기차 생산능력을 갖추겠다고 선언했다.
 
  차세대 친환경차 개발·시판에서 선두로 나선 일본은 미리 확보한 ‘특허’와 ‘표준’을 무기로 후발국들의 진입을 견제할 가능성이 높다. 친환경차 특허에서 일본은 한국에 압도적이다. 1995~2006년 일본의 도요타·혼다·닛산·히타치·도시바 등 5개 업체가 한·중·일 3국에 출원한 친환경차 관련 특허는 8500여개, 현대자동차(292개)의 30배에 달한다.
 
  한국은 내연기관 자동차시대의 ‘모범생’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자동차산업을 시작한 후발 개발도상국 가운데 유일하게 독자기술로 자체 승용차 모델 개발에 성공했고, 2005년 이후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가로 올라섰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약진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성공이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 자동차업체들은 전기차 등 차세대 친환경차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이른 시일 내에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고, 아직도 내연기관 자동차에 매달리고 있다.
 
  전기차 모델을 두고 전세계 각국의 자동차 강자들은 시장 선점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2010년 9월 30일, 프랑스 파리모터쇼 전시장. 르노 카를로스 곤 회장은 3종의 전기차 모델을 공개하며 “내년부터 각각 2만대 규모로 시판에 들어가겠다”고 발표했다. 파리모터쇼에 출시된 자동차를 본 마이클 로비넷 CSM월드와이드 글로벌 자동차 예측 담당 부사장은 “전기차 시대가 전문가나 일반 소비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0년 9월 20일, GM은 2010 중국 상하이 세계박람회(엑스포)를 방문한 전 세계 언론을 대상으로 상하이 인근 저장성(浙江省)에 위치한 ‘나인드래곤 리조트’에서 친환경 자동차 시승 및 설명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GM은 2010년 말 미국 시장 출시를 앞둔 세계 최초의 양산형 전기자동차 시보레 볼트(Volt)와 수소연료 전지차 시보레 에퀴녹스(Equinox), EN-V(Electric Network-Vehicle) 등 3종류의 차세대 친환경차를 선보였다. 당연히 GM이 개발한 전기자동차, 수소연료 전지차 등 차세대 친환경 자동차에 전 세계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됐음은 물론이다.
 
  시보레 볼트는 전기충전 구동방식의 자동차로, 일반 가정에서 전원을 연결하면 충전이 가능하며, 리튬 이온 배터리와 전기구동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동력 시스템을 탑재해 최대 80km까지 전기로만 주행한다. 그 이상의 거리를 주행할 경우, 차량 내 장착된 1.4L 가솔린 엔진 발전기가 배터리를 충전, 전기 운행 장치를 가동하면 추가로 500km까지 주행이 가능하다. 이는 전기 충전만이 유일한 동력원인 다른 전기차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2010년 11월 미국 내 6개 주에서 출시한 전기차 볼트는 최대출력 150마력으로 최고 시속 161km를 낼 수 있으며, 시속 97km까지 9초 만에 도달한다. 완전 충전까지는 240V 사용시 4∼5시간, 120V 사용시 10∼12시간이 소요된다.
 
  시보레 에퀴녹스는 휘발유를 사용하지 않고 수소연료로만 주행해 공해 물질 없이 수증기만을 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수소연료 1회 충전으로 최대 320km까지 연속 주행이 가능하고 최고 속도는 시속 160km를 내는 한편, 시속 100km까지 가속시간이 12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지구상 가장 풍부한 수소로 동력을 얻기 때문에 인류의 화석 연료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자 궁극적인 친환경차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EN-V 콘셉트카는 전기 모터로 구동되는 두 바퀴 굴림 차량이다. GM이 2009년 4월 선보인 P.U.M.A(Personal Urban Mobility and Accessibility) 콘셉트카에서 한 단계 발전한 모델이다. 리튬 이온 배터리로 전기를 공급받아 구동되는 전기모터가 차량의 운행을 담당하며 자세제어 기능이 결합돼 차량 회전반경을 크게 줄였다. 차량운행에 배기가스는 전혀 발생하지 않으며, 가정용 전기콘센트를 이용한 1회 충전으로 하루 최대 40km까지 주행할 수 있다.
 
  GPS와 차량 간 교신, 거리측정 센서 등으로 실시간 교통정보를 받아 목적지까지 최단거리를 선택해 주행한다. 차량 간 무선통신을 이용해 이동 중에도 네트워크에 접속, 개인 및 회사 업무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반적인 자동차에 비해 무게와 크기가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국내 전기차, 1992년 김철수·홍존희 연구팀이 개발 시작
 
2010년 미국 뉴욕모터쇼에 참가한 현대차.

  국내 전기차 생산업체 가운데 선두주자인 현대차그룹은 2010년 연구개발(R&D) 투자규모를 2009년보다 53% 정도 늘리면서 친환경 차량과 고연비 중·소형차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이브리드 차종 확대, 전기차 양산, 연료전지차 상용화 등 ‘2012년 친환경차 대량생산체제’ 구축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의 한 관계자는 “2018년에는 친환경차 50만대 양산체제를 갖춰 3만7000명의 고용증대 효과와 7조원의 생산유발 효과를 내겠다는 청사진을 세워 놓고 있다”고 했다.
 
  현대차는 우선 2010년 말부터 ‘쏘나타 하이브리드카’를 미국에서 판매한다. 2011년에는 디젤 하이브리드카도 출시할 예정이다. 전기차는 2010년 8월부터 생산에 들어가 9월 시범운행에 들어간 현대차 ‘블루온’에 이어, 2011년 말부터는 기아차 브랜드로 소형 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CUV) 전기차를 양산하는 등 2012년 말까지 2500대의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이다.
 
  2012년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하고 있는 수소연료 전지차는 국내외에서 시범 운행을 통해 상품성을 향상시키고, 배터리와 모터 등 핵심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를 늘릴 계획이다. 이를 통해 현대차그룹은 2012년 친환경차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중장기적으로 2018년에 친환경차를 50만대까지 양산할 계획이다.
 
현대기아 수소연료전지차 투싼이 미 대륙 완주에 성공했다.

  2010년말 미국을 시작으로 한국 등에 선보이게 될 쏘나타 하이브리드는 현대차 하이브리드 기술의 수준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공인연비는 L(리터)당 17km 수준이며, 저속에서는 엔진의 도움 없이 모터만으로 주행할 수 있는 ‘풀하이브리드 방식’을 채택한 본격 하이브리드카다.
 
  기아차는 2010년 11월 17일 ‘2010 LA 국제오토쇼’에서 K5 하이브리드(수출명 옵티마 하이브리드)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성능이나 연비는 쏘나타 하이브리드와 거의 같다. 최고출력은 168마력이며, 하이브리드 전용 2.4L 엔진과 30kW급 모터를 탑재했다. 미국기준 공인연비는 고속도로 주행 시 L당 17km, 시내 주행 시 L당 15.3km인데, 내년 상반기 북미시장부터 출시된다.
 
  수소연료전지차도 2012년 조기 상용화를 서두르고 있다. 2012년 1000대, 2018년 3만대를 생산할 계획이다. 현대·기아차는 2004년 9월 미국 에너지부(DOE)가 주관하는 수소연료전지차 시범사업자로 선정돼 미국 전역에서 수소연료전지차 32대를 시범 운행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하이브리드 기술을 바탕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차량 개발에도 나서 2013년 이후 상용화한다는 방침이다.
 
  순수 전기차는 1992년 김철수(金哲琇)·홍존희(洪尊熙) 박사팀이 처음으로 연구개발을 시작했으나, 배터리의 주행거리가 짧아 경제성이 떨어진 데다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수면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2005년 무렵, 유류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국제사회가 이산화탄소 규제를 강화하면서 전기차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배터리 성능까지 획기적으로 개선되면서 국내 전기차 연구에 날개를 달게 됐다고 한다. 수소연료차는 홍성안(洪性安) 한국과학기술원 수소·연료전지사업단장, 임태원(林泰源) 현대자동차 이사의 주도로 처음으로 연구개발을 시작, 오늘날 상당수준의 기술축적을 달성했다.
 
 
  선우명호 교수, “전문인력 공급없이 미래자동차 없다”
 
현대차의 전기차 블루온.

  2015년까지 글로벌 전기자동차 시장 점유율을 10%까지 올려 전기차 4대 강국이 되겠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목표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에 못 미친다. 매킨지는 “한국이 배터리 분야에서 선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정부 정책이나 완성차 업체의 준비 상황은 미국·일본·유럽뿐 아니라 중국에도 밀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양대 미래자동차학과 선우명호(鮮于明鎬) 교수는 “전기차의 4대 핵심 기술 중 배터리는 한국 기업이 앞서 있고, 모터와 전자시스템, 배터리 제어장치 등은 외국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터 및 전자제어장치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파워반도체 분야는 국내 생산도 안 되는 실정이다. 전기차 개발을 위한 자동차·반도체 업체 간 유기적인 기술 협력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자동차를 기계공학의 관점에서 보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며 “2015년까지 한국이 그린카 4대 강국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국내외 자동차 산업계에 전문 인력을 공급해야 한다”고 했다.
 
기아 벤가 전기차.

  전기차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과 정부의 지원도 부족하다. 정부는 공공기관에 대해서만 전기차와 일반차량 가격 차이의 50%를 보조해 줄 방침이다. 미국, 일본, 중국 등이 일반 판매분에 대해서도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과 차이가 있다. 자동차 업계에선 “정부가 먼저 시장을 열어 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국내 전기차가 없는 상태에서 보조금만 준다고 무슨 효과가 있느냐”고 말하고 있다. 서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며 책임을 떠넘기는 분위기다.
 
  전기차 충전 시설이 없는 것도 문제다. 2010년 10월 초 제주에 전기차 충전소가 시범적으로 문을 연 것이 유일하다. 한국전력 주도로 각 가정과 직장에 전기차 충전시설을 설치하는 ‘스마트 그리드’ 프로젝트는 이제 구상단계다.
 
  전기차 표준 전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은 2010년 3월 정부와 158개 민간기업이 전기차 충전방식 표준화를 위한 협의회를 공식 발족시켰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의 이경호 연구원은 “미국과 유럽, 중국이 글로벌 표준화를 서두르고 있다”며 “표준 획득 여부가 향후 전기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선우명호 교수는 “우리 자동차산업이 세계시장에서 선전하는 이유는 우수한 기술인력, 부품회사의 기술경쟁력 등 한국 자동차산업이 무한한 잠재 경쟁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자동차 산업은 경제 전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산업인 만큼, IT와 전자산업을 연계하는 큰 틀을 갖고 전략적으로 환경차를 개발해 나간다면 또 한번 도약의 시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경제, 미래를 향한 도전] IT융·복합 기기를 위해 뛰는 사람들

스마트폰, 태블릿PC, 클라우딩서비스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다

글 : 鄭蕙然 月刊朝鮮 기자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이 2010년 9월 2일 유럽가전박람회에서 ‘갤럭시 탭’을 선보였다.
  IT기기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단어는 일상이 됐다. 미국의 애플사(社)가 스마트폰을 내놓은 지 불과 2년 반 만이다. 애플은 지난 2007년 6월 29일, ‘아이폰’을 첫 판매하며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
 
  무선 전화기가 카메라 기능을 겸한 카메라폰으로, 인터넷이 가능한 스마트폰으로, 전화와 컴퓨터의 기능을 합친 태블릿PC로 변신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 IT산업의 융·복합은 변신 속도가 빠르다.
 
  IT 융·복합기기가 차세대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삼성의 ‘갤럭시S’ 6개월 만에 800만대 팔려
 
  융·복합기기에 반드시 필요한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오는 2020년 총 41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IT 융·복합 기기의 필수 제품인 4세대 통신칩, 고성능 모바일 CPU(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보안플랫폼 등이다.
 
  스마트폰 시장은 오는 2013년에 총 3억9300만대 규모로 성장, 전체 휴대폰 시장의 25%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스마트폰이 일부 ‘얼리어답터’들이 사용하는 제품이 아니게 될 것이란 얘기다. IT 융·복합기기 시장은 명실공히 차세대 먹을거리 사업이다.
 
  삼성전자는 이 부분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인 ‘갤럭시S’는 지난 2010년 6월에 국내에 첫 출시된 이래 미국, 일본, 유럽에까지 진출했다. 출시한 지 6개월 만에 800만대가 팔렸다. 하루에 4만대, 2초에 한 대씩 팔린 셈이다. 역대 삼성의 스마트폰 중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의 대중화 시대를 본격적으로 선도한다는 입장이다. 총책임은 신종균(申宗均)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이 맡고 있다. 이돈주(李敦柱) 전략마케팅 부사장, 홍원표(洪元杓) 삼성전자 총괄 부사장이 상품 전략을 담당하고 있다.
 
  신종균 사장은 “소비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스마트폰을 통해 할 수 있는 스마트 라이프(smart life)를 제공하는 제품을 만들 것”이라며 “삼성전자의 22년 동안의 역량을 총집결한 상품”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이 제품의 글로벌 히트 비결로 최고의 화질을 구현할 수 있는 ‘수퍼아몰레드’ 디스플레이 탑재, 4인치 대화면, 1GHz CPU의 빠른 데이터 처리속도, 터치 사용성 등을 꼽고 있다.
 
  삼성은 가장 큰 시장인 미국 스마트폰 시장 공략을 위해서 ‘화질’, ‘속도’, ‘콘텐츠’를 3대 키워드로 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삼성은 태플릿PC인 ‘갤럭시탭’을 내놨다. 갤럭시S는 출시한 지 두 달 만에 전 세계에서 총 300만대 이상이 팔렸다.
 
  삼성의 ‘갤럭시탭’은 7인치의 고해상 대화면을 지원해 신문, 책 등을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사진·동영상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두께가 11.98mm, 무게는 380g에 불과하다. 양복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갤럭시탭’은 컴퓨터와 무선전화 중간 사이즈의 기계 하나로 전화, 인터넷, 카메라, 게임 등 모든 콘텐츠를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수퍼 미디어 장치”라며 “사람을 위한 지속적인 기술혁명으로 탄생된 이 시대의 새로운 문화코드”라고 설명했다.
 
 
  조직 재편하고 경쟁에 나선 LG전자
 
  LG전자는 최근에 조직을 재정비하고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후발주자로서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2011년부터는 본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선다는 것이 LG전자의 전략이다.
 
  이를 위해 LG전자는 지난 2010년 11월에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스마트폰사업부 및 피처폰 사업부를 폐지하고 MC(Mobile Communications) 연구소 안에 제품개발담당을 신설했다. 또 해외R&D 담당을 신설하며 해외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LG전자 관계자는 “본부장 중심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실행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직을 재정비했다”며 “연구소를 중심으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 해외시장 공략에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소장 출신인 박종석(朴鍾碩) 부사장이 총책임을 맡았고, 연구소장에는 정옥현(鄭玉鉉) 전무, 글로벌상품 전략담당에 배원복(裵元福) 부사장을 내세웠다.
 
  LG전자의 스마트폰인 ‘옵티머스 원’은 지난 2010년 10월부터 90여 개국, 120개 비즈니스 파트너를 통해 판매되고 있다.
 
  LG는 앞으로 스마트폰 시장은 ‘속도’의 경쟁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인터넷, 게임 등을 빠른 속도로 즐길 수 있도록 중앙처리장치(CPU) 부문을 강화했다.
 
  이와 함께 LG전자는 성능, 크기, 운영체제 면에서 기존의 태블릿PC와 차별화된 제품을 준비하고 있다.
 
 
  달랑 240달러 내고 뉴욕타임스 130년치 신문을 가상공간에 저장
 
  국내 IT업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클라우딩 컴퓨팅’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 기술을 활용해 가상화된 IT 자원 서비스를 하는 컴퓨팅이다. 인터넷상에 서버를 두고 데이터를 저장하고 네트워크, 콘텐츠를 사용하는 IT와 관련된 모든 서비스를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컴퓨팅 환경이다.
 
  업계 관계자로부터 좀 더 쉽게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컴퓨터에서 작업한 데이터들은 PC 안에 저장이 됩니다. 또 은행에서 갖고 있는 수많은 입출금 내역 등의 데이터는 대용량의 서버에 저장되죠. 서버를 구축하고 관리하기 위한 비용이 많이 듭니다. 우리나라 기업체들은 통상 서버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용량이 큰 서버를 사용하는데, 이 비용은 엄밀히 말해 불필요한 비용입니다. 또 자료를 PC에 보관할 경우 하드디스크 장애 등으로 자료가 손실되기도 합니다. 인터넷 기술을 이용해서 인터넷상에 가상의 공간에 서버를 만들어 놓으면 비용 절감과 시간, 인력을 줄일 수 있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빌려서 사용하고, 사용한 만큼만 비용을 지불하면 됩니다. 게다가 에너지 절감 효과까지 있습니다.”
 
  IT업계에서 이를 ‘클라우딩’이라고 부는 이유는 간단하다.
 
  ‘구름(cloud)’과 같이 무형의 형태로 존재하는 공간에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등의 컴퓨팅 서비스 자원을 이용하는 서비스를 설계해서다.
 
  IT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해외 시장은 성숙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밝혀진다.
 
  뉴욕타임스는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해 1851~1980년까지 1100만 장의 신문기사 지면을 스캔 이미지로 온라인 스토리지에 저장한 다음에 약 100개의 가상 서버에 저장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의 자체 서버를 활용하면 약 14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일이었다. 이 작업을 하는 데 24시간이 걸렸고, 아마존에 서버 사용료로 지불한 금액은 240달러였다.
 
  아마존은 온라인 유통 사업자로서 IT기술을 가지고, 이 영역에 이미 진출했다. 2009년 3월까지 49만명의 고객을 확보하는 등 매년 사업이 30% 이상 성장하고 있다.
 
  구글은 클라우스 서비스뿐만 아니라, 기존의 검색과 광고 사업을 연계해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 중이다.
 
 
  KT, ‘아마존’보다 30% 싸게 전세계 시장에 서비스 제공
 
서정식 KT 클라우드 추진본부장.

  우리나라에서는 KT가 이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KT는 지난 2010년 4월 클라우드추진본부를 신설하고 11월에 충남 목천에 위치한 위성센터를 리모델링해서 국내 최초로 클라우드데이터센터를 오픈했다.
 
  KT는 본부를 발족시키자마자, 개인의 PC를 대신할 수 있는 ‘유클라우드홈’과 중소기업의 서버를 대신할 수 있는 ‘유클라우드 프로’ 등을 내놨다. ‘유클라우드 프로’는 출시된 지 석 달 만에 760여 개의 기업이 가입했다.
 
  이석채(李錫采) KT 회장은 “2015년까지 클라우딩컴퓨팅 분야에서만 연 7000억원의 매출을 창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클라우딩 컴퓨팅을 위해 KT의 여러 사람이 뛰고 있다. 총책임은 서정식(徐禎植) 본부장이 맡았다. 기획담당은 허철회 상무, 사업담당은 김충겸 부장, 인프라 구축은 윤동식 상무가 맡고 있다.
 
  총책임자인 서정식 본부장과의 일문일답니다.
 
  ―클라우딩 사업이 왜 차세대 먹을거리 사업입니까.
 
  “최근 스마트폰의 확산, 콘텐츠의 대용량화 등으로 콘텐츠 이용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데이터의 전송, 저장, 관리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기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소프트웨어의 종류가 늘어나고 서버량이 늘었죠. 이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보다 임대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향후 소비자가 계속 늘어날 예정이니 차세대 사업이라고 봐도 되죠”
 
  ―KT가 이 사업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전국적으로 유선망, 초고속인터넷망, 와이파이를 보유하고 있어서 클라우드컴퓨팅 사업을 하는 데 용이합니다.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740만명, 이동전화 가입자 1600만명을 확보하고 있는 점도 강점입니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관련된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저렴하게 내놓는 방안을 계속 모색 중입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기업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장점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일반 웹을 저장하는 데 90만원 정도를 내야 하는데 클라우딩은 10분의 1 수준의 비용을 내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가령 회사에서 사용하는 ‘유클라우드프로’는 접속 아이디 2개와 20기가바이트를 사용하는데 월 1만8000원을 내면 됩니다. 중급 서버 한 대를 월 30만원 정도에 사용했던 기업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12만원만 내면 됩니다.”
 
  ―자료 보안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외부 해킹 위험에 대비해서 사전예방 및 감지시스템을 철저히 완비했습니다. 기존의 KT 데이터센터 운영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에 금융권 수준의 보안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해외 수출이 가능합니까.
 
  “구글이나 아마존이 전 세계 거점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세계 곳곳에 이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추세입니다. 클라우딩서비스는 인터넷 기반 서비스이기 때문에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제공할 수 있는 대규모의 IT자원만 있다면 국경에 상관없이 모든 회사에 납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존보다 30% 낮은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해외업체보다 다소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이 서비스를 설계할 때부터 단가를 낮추면서 높은 성능을 낼 수 있는 데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해외 진출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한국경제, 미래를 향한 도전] 에너지 효율 종합기술

‘그린 빌딩’, ‘그린 빌리지’ 기술 개발로 세계시장 주도 기대

글 : 權世珍 月刊朝鮮 기자

삼성물산이 개발한 친환경 주거 모델인‘그린투모로우’의 모습. 폐기물 재활용 기술 등을 적용해 기존 건축물에 비해 최대 40% 정도 에너지 소비를 줄였다. 지붕의 파란 부분은 태양열을 모으는 집광판이다.
  한 건물이나 어느 마을이 그 안에서 필요한 에너지(전력 등)를 태양광과 지열(地熱) 등 신재생에너지로 스스로 생산하고 그 범위 안에서 소비하며 심지어 남는 에너지를 외부로 판매ㆍ수출까지 할 수 있다면? 이런 꿈같은 일이 멀지 않았다. 한국형 마이크로 에너지 그리드, 즉 K-MEG(Korea Micro Energy Grid) 사업이 2011년 5월부터 시작되면 2020년에는 이 같은 ‘제로 에너지(에너지 생산량과 소비량이 같은) 빌딩 또는 마을’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조현춘 박사, “K-MEG는 한국형 에너지 기술개발 위한 것”
 
  K-MEG는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단장 황창규)이 2010년 10월 말 발표한 ‘5대 미래선도산업기술’ 중 하나로, R&D전략기획단은 기존의 스마트그리드와 마이크로그리드, BEMS(빌딩에너지관리시스템), 에너지사용기술, 분산전원 등의 기술을 통합해 이 같은 미래기술을 만들어냈다.
 
  K-MEG를 선보인 R&D전략기획단 박상덕 에너지담당투자담당자(前 한전 전력연구원장)는 “세계가 녹색시장 선점을 위해 신재생에너지 투자와 에너지소비효율화 등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K-MEG는 우리나라가 전 세계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K-MEG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스마트그리드’와 ‘마이크로그리드’, ‘BEMS(Building Energy Management System)’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스마트그리드는 전력제공자가 소비자에게 전력을 판매하는 기존의 일방적인 전력망에 정보기술을 접목해 제공자와 소비자가 양방향으로 실시간 정보를 교환,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는 ‘지능형 전력망’을 의미한다. 마이크로그리드는 하나의 기관(우리나라의 한국전력 등)이 일률적으로 전국에 전력을 공급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다수의 공급 겸 소비자가 전력을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다. 빌딩에너지관리시스템을 의미하는 BEMS에는 빌딩제어시스템, 센서 네트워크, 빌딩정보 모델링 소프트웨어, 마이크로그리드 등 다양한 분야가 포함돼 있다.
 
  K-MEG는 이 개념들을 통틀어 빌딩 내에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공급함으로써 ‘자급자족형’ 제로에너지 빌딩(또는 마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R&D전략기획단 조현춘 박사는 “스마트그리드는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지만 이를 단독으로 상용화ㆍ제품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세계 최고 수준인 국내 IT환경을 바탕으로 한국형 에너지 기술을 개발, 사업성을 강화해 세계시장을 선도하자는 의도에서 K-MEG가 탄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합 소프트웨어 개발
 
  K-MEG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마이크로그리드 EMS(에너지관리시스템)와 BEMS를 통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합 운영하고 제어하는 소프트웨어 기술을 개발하고, 기존 BEMS 시스템을 개선하는 기술과 자연에너지를 적극 활용해 운영을 최적화하는 등 다양한 에너지 절약기술을 선보인다는 것. 둘째는 에너지 저장장치와 전기자동차 충전기 등 기기를 이용하기 위한 전기교류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셋째로 전력수요 절감을 위해 양방향 전력거래 시스템을 마련하고, 실시간 처리시스템도 만든다. 넷째로 열성능진단시스템과 지능형제어시스템을 적용하는 것이다. K-MEG에는 통합 소프트웨어 구축은 물론, 센서와 전력저손실장치, 고효율히트펌프(냉난방장치) 등 하드웨어 생산까지 포함된다.
 
 
  에너지 자급자족이 목표
 
2009년 12월 서울 길음뉴타운에 태양광 발전설비를 갖춘 아파트가 등장했다.

  즉 K-MEG는 IT기술을 접목한 스마트그리드 기술과 신재생 에너지 기술, 최종사용 에너지 기술 등이 총망라된 차세대 에너지 기술이다. 이를 이용하면 에너지 생산과 사용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제로 에너지 빌딩’과 ‘에너지 자급자족 도시’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빌딩이나 마을이 어떻게 에너지를 자급자족할 수 있을까? 조 박사의 설명이다.
 
  “예를 들면 빌딩 옥상과 창 등 외벽에 태양광에너지 장치를 구축해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죠. 지열 에너지를 이용할 수도 있고요. 마을의 경우 태양광과 지열 외에도 풍력, 폐기물에너지도 생산가능합니다. 이 같은 신재생 에너지로 생산량을 충당하고, 기존의 에너지 소비량을 절반 이하로 줄이는 겁니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IT기술이 동원되죠. 센서를 부착해 사람이 장시간 자리를 비울 때는 난방이나 전력을 제한하고, 외부 온도나 조도에 따라 난방과 조명을 조절하는 식입니다. 에너지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시에 개개인의 절약이 이뤄지면 에너지 소비는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형 건물에서 사용할 에너지 전부를 태양열로 얻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계속되는 조 박사의 설명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태양광으로 충분한 에너지를 얻기에 좋은 환경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내 신재생 에너지 관련 연구개발 관계자들은 같은 일사량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과 하드웨어를 지속적으로 개발 중입니다. 이에 따라 에너지 양은 더 많아지고, 전력 공급시스템을 교류에서 직류로 바꾸는 등 송전상의 에너지 낭비를 줄이는 한편 개개인은 에너지 소비를 효율적으로 줄임으로써 ‘에너지 제로(생산=소비)’에 근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산화탄소 저감이 목표
 
  K-MEG가 우리나라의 미래선도기술이 될 수 있는 것은 전 세계 기후변화협약에 따라 화석연료 감축과 이산화탄소 감축이 의무화되고, 이에 따라 그린에너지 시장이 무한대로 팽창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2012년부터 탄소감축 의무국이 될 예정인데, 에너지효율 분야에서 OECD국가 중 하위권이기 때문에 개선효과가 막대하고, 이에 따라 국내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박상덕 에너지담당투자담당자의 설명이다. “저탄소경제구조로 전환하기 위해 각 국가는 에너지이용 효율 향상을 위한 산업구조로 변화할 것이고, 따라서 국내 시장도 성장하겠지만 해외 시장의 성장가능성은 상상외로 큽니다. 선진국은 대부분 의무적으로 탄소감축을 실시해야 하는 국가들이죠. 이에 전 세계의 많은 국가가 그린빌딩을 의무화하고 그린시티를 앞다퉈 건설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수년 내에 관련 시장도 급성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에너지 저소비ㆍ저탄소 경제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혁신적이고 융합적인 획기적 기술이 필요하다”며 “청정에너지 기술과 에너지-IT 융합기술, 에너지의 저가격 고효율화를 위한 혁신기술 등 다양한 기술을 융합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하나로 통합해 낸 것이 K-MEG”라고 말했다.
 
 
  생산보다 현명한 소비가 먼저
 
  K-MEG의 특징은 신재생 에너지 생산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현명한 소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이산화탄소 감축과 녹색성장을 위해서는 신재생 에너지 등 에너지 ‘생산’보다 효율화된 ‘소비’가 먼저라고 입을 모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대표 발간물인 <에너지기술전망>(ETP, Energy Technology Perspectives) 2010년호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산화탄소 감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전체를 100으로 볼 때 소비연료와 전기 효율적 사용이 38%로 가장 수치가 높았고, 탄소 포집 및 저장(19%), 재생가능 에너지 사용(17%), 최종소비연료전환(15%), 원자력에너지 사용(6%) 등이 뒤를 이었다.
 
  박상덕 박사는 “최근 국내의 저탄소녹색성장 이슈는 대부분 신재생 에너지 연구 등 에너지 ‘생산’ 부문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데, 실제로 생산보다 중요한 것은 소비”라며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데 연구개발 능력을 집중해야 하고, 이와 더불어 에너지절약 캠페인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1년 5월부터 본격적인 개발 착수
 
  현재 R&D전략기획단이 추진 중인 K-MEG 사업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곳은 5개 컨소시엄이다. 5개 컨소시엄은 각각 삼성물산ㆍGS건설ㆍ포스코건설 등 국내 대형 건설업체가 주도하고 있으며 에너지 관련기업ㆍ부품업체ㆍ대학ㆍ연구소 등 각각 20~30여 개의 업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있다. 2011년 5월 최종 사업자가 지정되면 선정된 컨소시엄은 3년간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린빌딩과 그린빌리지를 구축하게 된다.
 
 
  지역별 수출전략
 
  정부는 K-MEG가 상용화될 경우 이를 해외 각국으로 수출할 계획이다. 선진국에는 노후건물 리노베이션과 관련한 그린빌딩 건축기술을, 개발도상국에는 산업단지 에너지 공급 프로젝트를, 후진국에는 낙후지역 신규전기 공급과 관련한 마이크로그리드 기술 수출을 기대할 수 있다.
 
  조현춘 박사의 설명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후진국 등 다양한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각각 다른 전략을 구사할 예정입니다. 선진국의 경우 에너지 소비의 40%가 빌딩에서 발생합니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노후건물 비중이 매우 높아 이를 이산화탄소 절감형으로 리모델링 또는 재건축해야 하는데, 이 시장이 엄청나게 큽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노후빌딩이 많은 국가들은 이미 이 시장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죠. 개발도상국은 신규 산업단지 내에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한 기술을 수출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제철소에서 엄청난 열에너지가 발생하는데, 이를 적절히 활용한다면 단지 내에서 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후진국은 낙후지역이나 고립마을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어려운 경우 이 기술을 활용할 수 있고요. 또 후진국은 아니지만 그리스가 이 기술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지중해 연안의 섬들에 일일이 전력을 공급하기 힘들기 때문에 섬에서 전력이 자급자족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실제로 미 일리노이주 시카고시(市)는 노후건물 리모델링에 대해 우리 정부(지식경제부)와 MOU를 맺고 국내에 기술시찰을 다녀가기도 했다.
 
  조 박사는 “수출 대상국의 기후ㆍ지리ㆍ경제적 여건을 고려해 다양한 패키지를 개발할 예정”이라며 “하드웨어 제조원가를 낮추고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등 경쟁국과 기술ㆍ기능ㆍ가격을 차별화해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고 스마트그리드 기술 활용
 
제주시 구좌읍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의 한 가정 지붕에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돼 있다.

  세계 시장을 선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신재생 에너지나 빌딩에너지 관리 등 분야의 기술은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내 그린에너지 기술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50~85% 수준에 불과하다. 빌딩에너지 관리의 경우 빌딩제어시스템, 센서, 빌딩정보모델링 등 각 분야 모두 하니웰과 지멘스, 벤틀리, 오토데스크 등 외국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스마트그리드의 경우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앞서나가는 IT환경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의 선두에 서 있기 때문에 K-MEG의 상용화와 세계시장 선도가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판단이다.
 
  현재 제주에 설치된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는 77개 기업이 참여, 기업과 정부가 1015억원을 투자한 상태다. 2010년 11월 초 지식경제부 주최로 제주에서 열린 ‘스마트그리드위크’에는 12개국 50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였으며, 참석자들은 “한국이 전력망과 정보통신기술 인프라, 기술개발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만큼 스마트그리드 시장에서도 한국의 미래가 밝다”고 평했다.
 
 
  매출 26조원 시장…2015년부터 본격화
 
  K-MEG는 10년 뒤 19조원의 경제효과가 예상되며, 부대효과도 7조원에 달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의 <건설경제저널>(The Construction Business Journal)에 따르면 전 세계 그린빌딩 시장은 2006년 2350억 달러 규모였으나 2015년에는 6240억 달러, 2020년에는 742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 이후 5년마다 20%씩 성장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세계 그린빌딩 시장점유율은 0.21%에 불과하고, 국내 그린빌딩 시장도 하니웰과 존슨컨트롤스 등 외국기업이 7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K-MEG가 상용화되면 이 같은 상황이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R&D전략기획단은 2020년에는 우리나라의 그린빌딩 기술이 세계시장 점유율 2%, 국내시장 점유율 75%로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상덕 박사는 “K-MEG는 세계 최초의 에너지효율 종합기술 상용화 프로젝트”라며 “K-MEG가 이 자리를 잡고 해외시장에 진출하게 되면 우리나라는 에너지의 97%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에너지수입국에서 에너지기술 수출국으로 변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 미래를 향한 도전] 신재생에너지산업의 핵심, 태양전지

고효율 대면적 박막태양전지, 우리 기술로 세계시장 선도

글 : 權世珍 月刊朝鮮 기자

태양전지업체 직원이 태양전지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박막(薄膜) 태양전지산업은 우리나라에 제2의 반도체산업이 될 것입니다.”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 홍순형 부품·소재담당 MD(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교수)의 이야기다. 박막태양전지는 신재생에너지의 핵심인 태양광에너지를 실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도구다.
 
  전 세계의 화두인 저탄소녹색성장. 이를 이루기 위해 주목받는 것이 석탄 등 탄소연료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는 에너지, 즉 신재생에너지다. 그중 가장 비중이 크고 성장가능성이 큰 에너지는 무엇일까? 우리 정부는 저탄소녹색성장을 이루기 위한 신재생에너지로 11가지를 선정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태양광에너지다. 11개 에너지 중 가장 비중이 크다. 타 에너지에 비해 에너지원의 양이 많고 전기에너지로 전환되기도 쉽기 때문이다. 성장잠재력도 가장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 태양광을 전력으로 전환하는 장치가 바로 태양전지(solar cell). 따라서 태양전지 산업은 세계 각국의 신재생에너지 개발 관련산업 중에서도 특히 많은 주목을 받는 산업이다.
 
  그러나 기존의 실리콘형 태양전지는 생산단가가 높은 데다 벌크(bulk·덩어리)형 실리콘을 사용하기 때문에 두꺼워 창문이나 LCD 등에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태양광을 직접 흡수하는 건물 외벽 창문에 장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리콘형 태양전지의 한계를 드러냈다.
 
 
  태양전지 2세대, 박막태양전지
 
  이 점에 착안해 박막태양전지(Thin film solar cell)가 개발됐다. 기존의 결정형(실리콘) 태양전지를 ‘1세대’로 볼 때 박막태양전지는 ‘2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박막태양전지는 실리콘 대신 유리나 특수 플라스틱 등 값싼 판을 소재로 활용한 것으로, 기존 태양전지에 비해 두께가 100분의 1에 불과할 만큼 얇으며 공정이 간단한 만큼 제조 단가가 훨씬 낮아졌다. 또 두껍고 곧은 형태의 실리콘 태양전지는 둥근 면이나 얇은 창문 등에 적용할 수 없었지만, 박막태양전지는 가능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세계 태양전지 시장이 이미 2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기존 결정형 태양전지에서 차세대 박막태양전지로 중심이 옮아가고 있다는 것. 결정형 태양전지 세계시장은 2009년 전년대비 45% 증가한 반면 박막태양전지 중 하나인 CIGS(구리·인듐·갈륨·셀레늄 화합물반도체) 시장은 전년대비 290% 성장했다. 박막태양전지는 CIGS·비정질실리콘·염료감응·CdTe(카드뮴과 텔루라이트 화합물을 사용한 것) 등이 있다. 이 중 CdTe와 CIGS 박막태양전지는 세계 다수 기업이 이미 연구개발에 돌입했고 생산량도 적지 않은 상태다.
 
  물론 박막태양전지는 기존의 태양전지에 비해 에너지효율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연구개발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효율성이 실리콘형 태양전지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얇게 만든 만큼 전력이 고르게 퍼지지 않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또 크게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건물 외벽 등에 적용해야 하는 만큼 대형화가 필수인데, 아직 대형화 기술이 완성되지 않았다. 넓게 이어 붙이는 것이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 것. 이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인 셈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은 최근 향후 세계시장을 선도할 우리 기술 5대 분야 중 하나로 이 박막태양전지 기술을 선정했다.
 
 
  태양전지로 만든 블라인드·커튼 멀지 않아
 
태양전지는 신재생에너지산업의 핵심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 한 공장에서 직원이 태양광 모듈(반제품 형태의 부품)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1979년 한국 최초로 실리콘 태양전지를 만들었으며, 현재 박막태양전지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불리는 안병태 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태양전지는 중간 매체를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서 바로 전기에너지를 생산해 내는 장치이므로 높은 에너지 효율을 기대할 수 있고 공해를 생산하지 않아 우리가 반드시 실용화해야 할 미래지향적인 장치”라고 설명했다.
 
  “우리 주위, 주택의 지붕이나 발전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실리콘 태양전지인데, 이는 제조가격이 높아 가격 부담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래서 국내외 연구진은 유리·금속·플라스틱 기판을 사용해 태양전지를 만드는 연구를 계속해 왔습니다. 저가형 박막태양전지는 에너지효율성이 낮지만 색깔이 균일하고 우아한 색상을 내기 때문에 공공건물 벽이나 아파트 벽에 부착할 수 있습니다. 또 일부 박막태양전지는 빛의 일부를 투과시켜 반대 방향의 물건을 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다양한 색깔을 만들어 예쁜 모양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활용도가 훨씬 높아지는 것이죠. 태양전지가 유리창을 대체하면서 전기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안 교수는 “수년 안에 태양전지가 지붕이 아닌 벽에 부착된 건물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며 “앞으로 태양전지가 블라인드나 커튼을 대체하며 우리 생활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이미 CIGS 박막태양전지의 효율성을 상당히 높이는 표준공정을 개발했지만, 생산용 연구장비의 부족으로 아직 상용화되지 않고 있다. 안 교수는 “기술개발은 시간싸움인데 우리는 아직 시장에 내놓을 만한 기술이 부족한 만큼 좀 더 적극적인 투자와 연구개발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슬림화, 대형화는 우리 기술이 세계 최고
 
태양전지 제품을 살펴보고 있는 태양전지업체 직원.

  아직 박막태양전지는 세계 태양전지 시장에서 그 비중이 20%에 불과하다. 태양전지 매출 세계 1~10위 업체 중 박막태양전지를 주력으로 하는 곳은 1곳뿐이다. 10위 안에 국내 업체는 한 곳도 없다.
 
  R&D전략기획단 부품소재산업분야 이형규 팀장은 “기존 태양전지 기술에서는 우리가 앞서나가지 못했지만, 박막태양전지 기술은 우리가 세계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유리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반도체·LCD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슬림화·대형화 부문 기술 역시 최고이기 때문이다. R&D전략기획단 이형규 팀장의 설명이다. “박막태양전지 제조기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얼마나 더 얇게 만드느냐입니다. 얇게 만드는 과정의 핵심은 반도체죠. 아시다시피 우리 업체들의 반도체 기술이 얼마나 뛰어납니까. 우리 기업들의 디스플레이 슬림화 기술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데, 이 기술은 박막태양전지의 슬림화 기술과 매우 유사합니다. 둘째, 얼마나 더 크게 만드느냐입니다. 현재 양산되는 박막태양전지는 기존 태양전지에 비해 크기가 훨씬 작아서 대형건물에 적용하려면 구매와 설치 등 비용이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대형화하면 사업성이 대폭 개선되는 것이죠. 이 분야도 국내 업체들의 전문분야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LCD TV는 소형밖에 만들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현재 대형 LCD·LED TV가 양산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이 같은 고효율 대면적화 기반기술 및 인프라를 사용해 우리 업체들이 세계시장에서 기술을 선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술장벽이 높아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이 팀장은 덧붙였다.
 
  “박막태양전지는 어차피 기존 태양전지에 비해 에너지생산 효율성은 떨어지지 않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 팀장은 “물론 효율성 강화도 연구개발 중이며 계속 개선될 것”이라며 “그뿐만 아니라 경제성·편리성 등을 모두 고려해서 가장 미래지향적이고 실용적인 태양전지를 개발, 우리 업체가 세계시장을 선도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 ‘아시아 솔라 밸리’ 추진
 
  박막태양전지 분야에서 앞서나가는 국내 대기업으로 현대중공업이 있다. 현대중공업은 현재 태양전지 셀과 모듈(핵심부품)을 자체생산 중이며, 지난 12월 2일 프랑스 생고방사(社)와 최대 8억 달러 규모의 차세대 박막태양전지 합작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양사는 2억 달러를 투자, 2012년까지 충북 오창 외국인투자지역에 100MW 규모의 CIGS 박막태양전지 제조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또 추가로 6억 달러를 투자해 2015년까지 생산능력을 400MW로 확대, 이 분야 세계 5대 메이커로 올라선다는 구상이다.
 
  현대중공업 솔라에너지부 기술기획담장 이창용 부장(공학박사)은 “CIGS는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결정형 태양전지에 비해 가격은 절반 수준이면서 실험실 최대 효율은 19.9%로 25%인 실리콘결정형과 큰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CIGS 태양전지는 네 가지 화합물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양산기술을 확보한 업체가 국내는 없으며 세계적으로도 서너 개 업체에 불과하다”며 “이번 협약과 투자를 통해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향후 충북 내에 가칭 ‘아시아 솔라밸리’를 만드는 등 태양광 산업을 적극 육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창용 부장의 설명. “올들어 태양전지 가격이 전년대비 20% 전후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에 원가를 절감시키는 것이 업계의 과제”라며 “가격은 낮추면서 효율은 높이는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그 부분에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부장은 “우리 업체의 경우 태양전지 산업을 각 업체에서 단일화하면 중국 등 다른 국가의 대형업체와 경쟁할 때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중소-대기업 협력과 상생 또는 대기업의 계열사 연계 등으로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녹색성장의 핵심산업
 
광주 북구 첨단산업단지 LED밸리에 지난해 들어선 SDN(주)의 태양광에너지 설비.

  박막태양전지 산업은 저탄소 녹색성장 산업의 핵심으로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 배출을 저감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특히 국내시장은 물론 해외시장으로의 수출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적으로 신재생에너지 개발이 붐을 이루고 있고, 유럽과 미국 업체들이 앞서가고 있지만 시장 규모나 기술 모두 초기단계이기 때문.
 
  이형규 팀장의 설명. “우리나라 태양광 에너지원의 질과 양은 세계 시장에서 중간정도라고 봅니다. 따라서 박막태양전지 관련기술을 개발하면 물론 국내에서도 활용하지만 세계 시장으로의 수출에 집중하게 될 전망입니다.
 
  지금은 세계 10위권 안에 우리 업체가 하나도 없지만 세계 태양전지 시장이 실리콘 태양전지에서 박막태양전지로 이동하는 추세입니다. 세계 1위 업체(미국 퍼스트솔라)도 박막태양전지를 주력으로 하고 있고요. 따라서 박막태양전지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우리 업체들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또 현재 신재생에너지 관련기업들의 기술이나 매출이 아직 초기단계여서 R&D 투자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우리 업체들이 선두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고 덧붙였다.
 
 
  2020년 11조원 시장
 
  고효율 대면적 박막태양전지가 예정대로 개발된다면 2020년 우리 업체들은 11조원의 매출이 예상된다. 정부는 이 산업이 제2의 반도체 산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은 2011년 5월 선정되는 업체(컨소시엄)에 향후 3년간 연구개발비로 700억원을 지원하고, 해당 업체가 700억원을 투자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또 소재·부품·장비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셀과 모듈(태양광을 에너지화하는 데 핵심이 되는 소재)은 대·중소기업 공동R&D를 추진하고, 공동R&D를 활성화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협력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전략이다.
 
  이형규 팀장은 “R&D 성과의 조기사업화를 위해 타 경쟁국에 비해 선제적으로 양산하는 데 투자를 집중하고, 전방사업과 연계를 강화하며 권역별 맞춤형 시장을 연구하는 등 해외로 진출하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R&D전략기획단의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2015년 국내 박막태양전지 생산능력이 2GW(기가와트)를 달성할 것으로 전망되며, 세계 시장 점유율도 20%(매출 2조원)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5000여 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가져오고 연간 이산화탄소를 130만t 감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20년에는 세계 시장(27조원)의 약 40%(11조원)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R&D전략기획단 홍순형 MD는 “향후 집중투자로 전세계 박막태양전지 시장에서 우리 업체들이 탄탄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박막태양전지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이은 부품소재 분야 미래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육성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 미래를 향한 도전] 천연물 新藥 분야

동의보감 등 전통 資産 많아 세계 제약시장 장악 가능성 커

글 :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 동아제약, 쑥으로 만든 스티렌정 개발해 연매출 1000억원 대박
⊙ 정부, 연매출 1조원 규모의 매머드급 신약 개발에 적극 지원
천연물 신약에 쓸 약초를 점검하고 있는 서울대약초원 연구원들. 최근 토종 식물이 미래 신약의 원천으로 주목받고 있다.
  인구 고령화(高齡化) 현상으로 예방의학이 중요해지는 가운데 천연물 신약(新藥)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식경제부 산하 지식경제 연구개발(R&D) 전략기획단은 전통 의학을 활용한 천연신약 개발을 위해 향후 3년간 최대 10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김선영(金善榮·서울대 교수) R&D 전략기획단 융합 신(新)산업 총괄매니저는 “현재 제약 선진국들의 천연물 신약기술 수준이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며 “정부는 신산업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최고의 천연물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제약 선진국도 개발 초기단계
 
  천연물 신약이란 식물에서 천연물을 추출·정제·합성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약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신약은 화학 합성신약, 바이오 신약, 천연물 신약으로 나뉜다. 현재 화학 합성신약과 바이오 신약은 화이자 등 다국적 제약회사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에 반해 천연물 신약은 제약(製藥) 선진국이나 다국적 제약회사도 개발 초기단계에 있다. 그만큼 후발주자인 한국으로서는 성공의 여지가 많은 셈이다.
 
  김선영 R&D 전략기획단 총괄매니저의 말이다.
 
  “화학 합성신약은 개발 리스크가 높고 투자 비용이 많이 듭니다. 우리나라 여건상 다국적 제약기업과 경쟁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죠. 바이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천물질을 개발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다행히 천연물 신약과 관련해 우리나라에는 수백 년간 전해온 데이터베이스가 많습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이 대표적인 경우죠. 쑥이 위장에 좋고, 헛개나무가 간에 좋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새로운 약을 만든다면 세계 제약 시장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어요.”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은 천연 한약재를 치료용으로 이용해 왔다. 그러나 이를 일반 제약 형식으로 개발한 경우는 많지 않다. 다행히 세 나라 중에서 한국이 천연물 신약에 대한 관심이 높고 기술도 가장 앞서 있다. 특히 세계 3대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옆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 김선영 총괄매니저는 “중국은 천연물 신약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고 규제도 까다롭지 않다”며 “중국은 2020년 세계 최대 제약시장으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국내 제약회사는 지난 20연간 총 14 종류의 신약(화학합성·바이오·천연물 신약 포함)을 개발했다. 이 중에서 천연물 신약은 두 종류다. 동아제약의 ‘스티렌정’과 SK케미칼의 ‘조인스정’이 그것이다. 스티렌정은 2009년도 매출액이 850억원에 달했다. 국내 제약업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조인스정 또한 2009년도 매출액이 250억원에 이르렀다. 이들 두 제품은 국내 제약시장에서 ‘블록버스터’로 평가받고 있다.
 
 
  천연물 신약은 난치성 만성질환에 효과 커
 
한국의 천연물 신약 경쟁력은 다른 신약 개발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국내 최초 천연물 신약인 스티렌정은 쑥에 들어있는 ‘유파틸린’을 주성분으로 하는 위염 치료제다. 헬리코박터균(菌)으로 인한 위염을 차단하고 위점막 재생작용을 촉진해 위염 재발률을 현저히 낮춘 약이다. 안병옥 동아제약연구소 연구위원의 말이다.
 
  “쑥이 한방에서 많이 사용된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특히 복통과 부인과(婦人科)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지요. 서해안 지방에서 자라는 쑥을 건조해 유효 성분을 검출하는 과정에서 위염 치료에 탁월한 성분을 발견했어요. 연구에서 개발, 제품화 단계까지 8년이 걸렸습니다. 천연물 신약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제품이라 할 수 있지요.”
 
  2003년부터 시판되고 있는 스티렌정은 2010년도 매출액이 1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제약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스티렌정은 박카스로 유명한 동아제약이 국내 최대 제약회사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스티렌정은 현재 동남아 국가에 수출되고 있다.
 
  동아제약은 덩굴성 여러해살이풀의 일종인 ‘마’를 이용해 진통제도 개발하고 있다. 생약인 ‘견우자’로는 소화불량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SK케미칼이 개발한 조인스정은 퇴행성 관절질환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한약재인 괄루근·하고초 등에서 주요 성분을 추출해 만들었다. 조인스정은 관절염이 있는 부위에 강력한 소염, 진통효과를 나타낸다. 장기간 복용해도 부작용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약은 연골파괴를 차단해 관절염 진행을 막아 주는 핵심 치료제로 알려져 있다. 조인스정은 호주와 뉴질랜드에 수출된다.
 
  SK케미칼은 조인스정을 비롯해 발기부전치료 ‘엠빅스’도 개발했다. 이 회사는 치매 치료제, 당뇨병 치료제 등 천연물 신약과 바이오 신약에 대한 연구개발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천연물 신약 개발은 1940년대부터 시작됐다. 화학 합성신약 기술이 저조했던 당시로서는 식물에서 제약 원료를 추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스피린도 처음에는 버드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들었다. 이후 합성신약 기술이 개발되면서 현재 아스피린은 화학 성분으로 대량 제조되고 있다.
 
  현재 전통기법에 의존한 토종 천연물 건강식품은 국내 시장에 상당수 존재한다. 이들 건강제품이 천연물 신약으로 개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임상시험을 통한 과학적 입증이 쉽지 않다. 비용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김선영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 융합신산업 총괄매니저.

  김선영 R&D 전략기획단 총괄매니저는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천연물 신약은 화학 합성신약과 바이오 신약이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대부분의 합성신약과 바이오 신약은 생체 내(內) 치료 타깃이 하나입니다. 여러 인자가 작용하는 당뇨·비만·치매와 같은 다병인(多病因) 난치성 만성질환을 치료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반면 천연물 신약은 복합적 생리활성을 하기 때문에 높은 치료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존의 알레르기 치료제는 증세를 완화하는 데 머물러 있지만 천연물 신약은 증상 자체를 없앨 수 있어요. 또 기존 항암 치료제의 경우 부작용이 상당한데 천연물 신약은 부작용이 없는 치료제가 될 수 있습니다.”
 
 
  과학화·표준화·규격화가 관건
 
  천연물 신약이 획기적인 대안(代案)이 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안병옥 동아제약연구소 연구위원의 말이다.
 
  “식물이라는 게 지역이나 환경, 기후, 수확 시기, 농약 사용 여부 등에 따라 성분이 아주 달라요. 채취 단계에서부터 과학적인 품질관리가 어렵지요. 또 제품화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원료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야 합니다. 과학화, 표준화, 규격화 등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쪽이 세계 시장을 장악할 겁니다.”
 
  최근 정부가 천연물 신약 개발에 예산을 쏟아붓는 것도 이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함이다. 정부는 이를 통해 연매출 1조원 규모의 매머드급 신약 개발을 유도할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2013년까지 유럽·미국에서 임상 1·2단계에 진입하는 제품 6건, 중국에는 시장 진입단계에 있는 제품 2건 이상을 개발할 예정이다. 만성·복합성 질환 치료제, 항암 치료제 개발이 주요 지원 대상이다.
 
  지난 2000년 ‘천연물 신약개발촉진법’이 제정된 후 국내 제약업계는 천연물 신약을 위한 임상시험 건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천연물신약 개발과 관련해 제약회사들의 상담 건수도 2004년 26건에서 2009년 134건으로 늘어났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임상시험 분야는 골관절염, 치매, 암, 천식, 아토피, 당뇨, 간질환 등이다.
 
  김선영 R&D 전략기획단 총괄매니저는 “현재 독일이 천연물 신약 시장의 25%를 차지하고 있지만 시장 자체가 초기 단계에 있어 큰 의미가 없다”며 “국내 제약 연구기관에서 20여 건의 천연물 신약을 연구하고 있는데 정부는 개발 의지를 높이기 위해 지원금을 대폭 늘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소수의 솔선수범과 자기 희생 없이 그 분야가 꽃피운 사례는 없다. 희생과 기업가 정신은 발전의 디딤돌인 동시에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격이다.”⊙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만화가  (0) 2011.01.31
안병권의 고향보따리_03  (0) 2011.01.29
안병권의 고향보따리_02  (0) 2011.01.22
안병권의 고향보따리_01  (0) 2011.01.18
새 인맥지도가 세상을 나눈다  (0) 2010.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