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11)-계룡산
신원사
계룡산 주변엔 명산으로 알려진 이름에 걸맞게 많은 절들이 있다. 신(神)들의 꽃밭 혹은 종교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신흥종파의 집결지이며 부지기수의 굿당이 있다. 그리고 사방으로 절이 있다. 동쪽의 동학사와 서쪽의 갑사 그리고 북쪽에 구룡사가 있었으며 남쪽에는 바로 신원사가 있다.
계룡산 천황봉 남쪽에 자리한 신원사에는 보물 제 1293호로 지정된 중악단이란 산신각이 있다. 다름 아닌 계룡산신을 모셔 놓은 곳이다.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왕조 때 세운 묘향산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 그리고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을 삼악이라 하였는데 유일하게 계룡산에 있는 중악단만 현존하고 있다. 중악단은 휴전선 이남에 현존하는 산신각 중 최대의 규모이며 역사성과 구조적 측면에서 아주 귀한 유물이다.
만사가 눅눅한 장마철.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 틈새로 햇살이 쏟아진다. 그 햇살을 피하여 계곡을 찾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펴고 있다. 신원사로 들어가려면 계곡을 건너야 한다. 장마중이라 계곡에 넉넉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한시도 없어서는 안 될 몇몇 중의 하나가 바로 물이며 물은 바로 이렇게 산에서 시작되는가 보다.
신원사의 전체적 좌향은 정남향으로 터를 잡고 있어 산사의 전형적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앞뜰 중앙에 있는 진신사리탑을 중심으로 북편 한가운데에 대웅전이 서 있고 오른쪽으로 영원전과 벽수선원(계룡선원)이 있다. 왼쪽으로 종무소와 독성각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으로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다. 영원전과 선원 사이의 등나무 터널을 지나 동편 천황봉 쪽으로 50여m를 가면 그곳엔 고가옥 형태의 중악단이 있다.
계룡산은 명산이다. 계룡산은 닭이 홰치는 형국이며 용이 꿈틀대듯 생동하며 이 강산을 수호하는 지신들의 거처라고 한다. 좀 우스운 얘기로 많은 무당과 점술가 그리고 철학인(?)들이 자신의 도력을 말하며 계룡산에서 몇 년간 도를 닦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소설이나 비서 등에 계룡산이 명산임을 지칭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부분이다.
대개의 절에는 어느 한 곳에 작은 규모로 산신각이 있다. 대웅전이나 다른 전각들에 비하여 그 규모도 매우 작고 얼른 눈에 띄지 않을만큼 한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 속에 있는 절엔 예외 없이 산신각이 있다고 생각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듯하다.
절은 부처님을 모셔놓은 곳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심신을 수양하는 도량으로 생각해도 엉뚱하다고는 하지 않을 듯하다. 절은 곧 불교의 전당이다. 불교의 전당인 절에 자리하고 있는 산신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엄격히 말해 산신을 모시는 곳이 불교의 교리를 따르거나 불교의 전당 범주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산신각은 말 그대로 산신을 모셔놓은 곳이다. 산신은 인격신이 아닌 국가의 정신적 지주를 뜻하는데 토속신과의 혼용, 융합과정 등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 미신의 산물인 것처럼 퇴색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의 문화와 가치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교지만 불교도 엄연히 우리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도입된 종교며 문화임을 거부할 수 없다.
결국 불교는 도입되면서 토속신앙을 포용하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서 절 안에 부처님을 모신 전각과 함께 산신각이나 칠성각 등이 공존하는 구조를 갖게 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갈등의 요인이 될 수도 있고 자칫 상호비방에 봉착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토속신앙을 포용한 것은 불교의 세련된 포교 방법이며 수단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타 신앙에 대하여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하였으며 공존하는 그 너그러움이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절 안의 산신각이다.
분명한 교리도 그럴싸한 경전도 없지만 산신신앙은 말 그대로 토속적으로 사람들의 가슴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대상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며 절 안에 불교와 접목되어 극락의 사상으로 발전하여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인지 대개의 절에 있는 산신각은 그 규모가 매우 적다. 그런데 계룡산신을 모시고 있는 신원사 중악단은 결코 그렇지 않다. 대웅전보다 더 크거나 비슷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국모였던 민비도 중악단에서 친히 기도를 올렸다 한다. 이러한 역사성으로 보아 과히 규모와 당시의 민심에 어떻게 역할을 하였는지 그 정도를 가늠케 한다. 중악단에 얽힌 이러한 배경을 두고 명성황후를 마치 무속 마니아로 격하시키려 함은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가치관을 간과한 사람들의 딴지걸기로 생각하고 싶다. 계룡산신을 모시고 있는 신원사 중악단은 이 나라 왕비의 애절한 염원이 스며 있는 애환의 산물이기도 하다.
여느 산신각들이 부속건물 없이 작은 전각에 산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 전부라면 중악단은 궁궐을 연상케 한다. 소슬 삼문(三門) 좌우로 외여닫이문이 달린 출입문이 있으며 이 출입문을 들어서 중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계룡산은 풍수적으로 수도가 자리잡을 수 있는 땅이라고 한다. 정감록(鄭鑑錄)에 <송도 5백년에 이씨(李氏)가 나라를 빼앗아 한양에 천도하고, 한양은 4백년에 정씨(鄭氏)가 국권을 찬탈하여 계룡산에 도읍한다. 신도(新都)는 산천이 풍부하고 조야(朝野)가 넓고 백성을 다스림에 모두 순하여 8백년 도읍의 땅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비록 수도는 아니지만 오늘날 국력의 막강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육군·해군·공군본부가 자리잡은 계룡대가 있는 곳이 바로 신도안이다.
중악단을 둘러보고 대웅전 앞으로 오니 선원에 계시던 재민스님이 나오신다. 스님을 따라 들어간 스님의 방은 2평이 안 될 작은 규모였지만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앉은뱅이 책상에 빼곡한 책들에서 스님의 일상이 엿보인다. 차와 함께 내놓은 산도가 유달리 단맛을 느끼게 한다. 산도와 차는 허기를 덜어주고 스님의 좋은 말씀은 공허한 마음을 채워 주었다.
요즘 같은 난세에 명성황후가 다시 중악단에서 기도를 올리게 된다면 무엇을 서원할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형이하학적 측면에선 아둔한 듯 하지만 현대인보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기에 더 지혜로울지도 모를 선인들의 명견을 듣고 싶다.
명산 계룡주봉의 기를 흠뻑 받고 있을 중악단을 참배하고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에 두 발을 담그니 이런저런 잡념 다 사라지고 시원함과 평온해진 마음만 남는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벼 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사연 그리 많아….”로 시작하는 대중가요로 잘 알려진 <칠갑산>이 그 노래다. 일찍 청상이 되어 어렵게 남매를 키워온 어머니의 일생이며 이야기가 곧 노랫말이니 눈물을 펑펑 흘릴 법도 하다.
그 노래의 배경이 되는 칠갑산 깊숙한 곳에 장곡사란 절이 있다. 충남 청양군에 있는 칠갑산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해발 561m밖에 안 되는 유순한 형태의 산세를 가지고 있는 차령산맥의 한 자락이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칠갑산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청아한 산색과 맑은 물 그리고 신선한 공기로 다른 어떤 명산에 비해 모자람 없이 좋은 산으로 기억할 듯 하다.
장곡사(長谷寺)는 이름이 말해주듯 긴 계곡(사람들은 흔히 '아흔 아홉 계곡'이라 부른다)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며, 공주에 있는 마곡사와 예산의 안곡사 그리고 청양의 운곡사와 함께 '사곡사(四谷寺)'의 하나라고도 한다.
절에 있는 전각들은 모시고 있는 부처님에 따라 그 명칭이 정해진다. 대웅전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셔놓은 전각을 일컫는 명칭이었지만 요즘은 그 절의 주불을 모셔놓은 전각에 보편적으로 대웅전이란 편액을 붙여 놓으니 딱히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만을 대웅전이라고 고집하기에는 옹색함이 없지 않다.
그러기에 모셔진 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이 아니더라도 절의 주불을 모신 전각이라면 대웅전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셔놓은 주불이야 어떻든 한 절에 대웅전 하나는 공식이며 통률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장곡사는 아주 특이하게 하나의 절에 두 개의 대웅전이 있다.
전해지는 설화 중 하나는 칠갑산 남동쪽 자락에 있던 도림사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남아 있던 대웅전을 장곡사로 옮겼으리라는 추측이다. 장곡사는 약사여래도량이다. 약사여래도량이란 병든 사람에게 희망과 꿈을 줄 수 있는 도량을 말한다. 한마디로 장곡사는 기도 발이 잘 받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명성을 쫓아 찾아 드는 사람들이 무지기수로 늘어남에 따라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공간이 더 필요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하나의 대웅전을 증축하게 되어 두 개의 대웅전이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한다. 상대웅전에서는 주로 스님들이, 하대웅전에서는 일반 신도들과 신병기도를 위해 장곡사를 찾은 스님들이 기도를 올리던 곳이 아닌가 추측하는 설화다.
36번 국도를 따라 대치터널을 지나 칠갑산을 동서로 가르고 나와서 다시 남쪽 골짜기로 난 도로를 따라 장곡사를 찾아 들어간다. 칠갑산을 넘으며 주변을 둘레둘레 살폈다. 혹시 콩밭을 메고 있는 아낙이라도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말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콩밭을 매는 아낙은 보이지 않고 띄엄띄엄 등산객 무리만 보일 뿐이다.
한편 금강 상류인 지천을 굽어보는 일곱 장수가 나올 갑(甲)자형의 일곱자리 명당이 있어 칠갑산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칠갑산은 신라 유리왕 때 만들어진 도솔가에 '칠악'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백제 사비성(지금의 부여)의 정북방 진산으로 오래 전부터 신성하게 여겨오던 산이라고 한다.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칠갑산의 오묘한 명성을 오늘날에는 장곡사가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하다. 칠갑산 산세가 그렇듯 장곡사 역시 그리 큰 사찰은 아니다.
국도 36번 도로에서 시작되는 645번 지방도로를 따라 장곡사 쪽으로 가는 길 양쪽에 나란한 벚꽃 나무가 봄의 화려함을 연상케 한다. 벗 나무 가로수 사이로 이십 리쯤 달리면 길옆 장승과 함께 <新羅古刹 長谷寺>라 쓰여진 돌 이정표가 나온다.
괴목 아래를 지나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좌측으로 장승공원이 있다. 이런저런 표정으로 해학적 웃음을 띄게 하는 장승들이 넓은 마당에 줄지어 서 있다. 장승공원을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장곡사 경내로 들어섬을 알리는, <七甲山長谷寺>란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가면 넓은 주차장과 높은 차이를 두고 우뚝한 범종각과 운학루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치우쳐 만들어진 비탈길을 조금 오르면 네 갈래 갈림길이 나온다.
이미 이쯤이면 고색창연한 장곡사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왼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오랜 세월이 묻어 있음직한 설선당이 정면으로 보인다. 뭐라고 할까?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깔끔하게 손질된 삼베옷을 입고 계신 그런 모습이라고 할까? 하여튼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는 그런 분위기다.
장곡사에 있는 대다수의 전각들은 맞배지붕 형식으로 건축되어 있다. 다른 절들은 대개 맞배지붕과 팔작지붕 형태로 전각들이 축수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장곡사는 불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금당을 뺀 나머지 전각은 모두 맞배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하대웅전 우측에 있는 지장전과 편액이 걸려 있지 않은 전각 그리고 운학루와 설선당은 전체적으로 口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하대웅전 좌측으로 있는 70여 돌계단을 오르면 좌우로 전각이 나온다. 좌측은 스님이 참선을 하고 계실 듯한 점화실이며 우측의 전각이 상대웅전이다.
하대웅전이 서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음에 비하여 상대웅전은 동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상대웅전은 보물 1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로자나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그리고 협시불로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화엄사 각황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등과 같이 장곡사 상대웅전의 바닥에도 나무가 아닌 벽돌이 깔려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경우에는 아미타여래가 사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유리바닥 대신 돌을 깔았다고 하는데, 장곡사의 경우는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상대웅전 바로 옆에 약수터가 있어서 수맥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라 한다.
상대웅전 앞에는 수령이 850년쯤 되었다는 오래 된 느티나무가 있어 고찰의 분위기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상대웅전 앞에서 내려다보는 장곡사의 전각들이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는 촌락을 연상케 하여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오밀조밀 하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회색의 기와지붕이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여유를 만들어 준다.
응진전 우측으로 난 비탈길을 내려와 다시 산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산신, 독성, 칠성을 모셔놓은 삼성각이 있다. 오르던 길 다시 내려오면 좌측으로 금당이 자리하고 있다. 오래되지 않았고 단청이 되지 않아 드러난 나무 결과 색이 깔끔하다는 느낌을 준다. 장곡사에서 숙박을 하며 기도를 하게되면 바로 이 금당에서 기거하게 된다고 한다.
돌로 포장된 비탈길을 내려오면 장곡사로 들어서며 맞게 되었던 작은 네 갈래 길에 다시 서게된다. 네 갈래 길 좌측엔 약수가 흐르고 있다. 넓지 않은 장곡사지만 이 전각 저 전각에 참배하고 이곳엘 도착할 즈음엔 갈증을 느낄 만도 하다. 흐르는 물 한 바가지 떠 벌컥 벌컥 마시면 그 물이 곧 감로수며 청량수다.
다른 절들도 부엌에 모시고 있는지 모르지만 장곡사 설선당에 있는 부엌엔 조왕신이 모셔져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더불어 살며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지켜주는 지킴이들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지킴이들을 예우하고있다. 많은 지킴이 중에 부엌 아궁이의 불을 지켜주는 지킴이가 바로 조왕신으로 부뚜막에 물 한 대접을 떠서 바치는 것으로 그 모심을 대신하였다.
이 외에도 장곡사에는 국보 300호로 지정된 미륵괘불탱화도 있지만 야단법석에서나 볼 수 있기에 보지 못한 아쉬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장곡사의 현재 규모는 우리나라 대다수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비해 턱없이 작다. 단지 한때 스님들이 밥통으로 사용했다는, 운학루 뒤편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구유'만이 장곡사의 옛 규모를 짐작케 할 따름이다.
장곡사엔 어찌 두 개의 대웅전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 흔한 탑 하나 없는지 궁금할 뿐이다.
코끝이 싸하도록 맛이 깊게 든 솔차 한잔을 달게 비우고 그 빈 잔에 산사 장곡사의 고요함과 깊은 불심을 가득 담아 걸망에 담았다. 노래 속의 그 아낙, 흐르는 땀에 벼 적삼 흠뻑 적시고 수많은 사연에 포기마다 눈물지으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그 아낙이 김 매고 거둔 콩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 된장이 들어 있는 포장된 작은 항아리 하나 사들고 뚜벅뚜벅 발길을 옮긴다.
동양최대의 지장보살 품안에 마련된 납골공원
죽음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것이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문답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겠지만 아직 분명한 답을 낼 수 없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형태로 골똘히 생각하고 탐구하였겠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답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다.
어떻게 살았던 일생을 마치고 죽게되면 장례란 것을 치르게 된다. 장례의 주가 되는 주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은 나라와 민족에 따라 다르고 풍속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 우리처럼 매장을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수장이나 풍장을 하기도하며 화장이 주를 이루는 곳도 있다.
대대손손의 부귀영화와 발복을 예언하는 명당을 쫓아 산 넘고 물 넘어 있는 산소들은 접근하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가끔은 벌 등에 의한 예기치 않은 사고를 야기시키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장묘문화인 매장에 따른 국토잠식, 접근의 불편 등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납골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고 있는 절이 있다.
뭔가 빠진 듯한 그림에 점 하나가 찍힘으로 명화가 되듯 미타사가 있는 가섭산이야 말로 그냥 평범한 산에 지장보살이 건립되어 주변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어 내용이 꽉 찬 걸작 명화 속 풍경이 되었다.
혼과 성을 다한 장인이 부처님을 다 만들어 놓고도 점안을 하지 않으면 완전한 부처님이 되지 아니하듯 이 산은 바로 규모에 걸맞는 지장보살이 건립되므로 가섭산이란 이름에 완벽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선다원이 있고 오른쪽으로 명당자리에 혈을 맺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한다는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앞쪽 저 만치에 지장보살상이 있고 그 지장보살상까지의 공간에는 납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장보살이란 중생을 다 제도하지 않고서는 성불하지 않겠다며 불철주야 지옥문전에서 눈물을 흘리며 중생을 제도하는 분이라고 한다.
미타사에 있는 지장보살은 규모적으로 동양최대라고 한다. 모든 중생이 108참회를 하면 다생겁래의 업장이 소멸되고 모두 성불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높이를 108척인 33m로 하였다.
풍수지리가들이 '백룡이 여우주를 안은 백룡희주형(白龍 珠形)'으로 설명하고 있는 미타사 납골공원은 뒤쪽에 있는 가섭산이 오색비단의 장막을 이루고 있다. 자식을 안은 어머니의 팔처럼 부드럽게 뻗은 산세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뚜렷하다. 현세에는 부귀다자(富貴多子)하고 죽은 후에는 지장보살의 품에서 고혼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그런 곳이라고 한다.
일년에 한 두 번씩 찾게 되는 조상들의 산소는 자칫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기 쉽다. 현실적 여건상 잘 돌보지 못해 엉클해진 조상의 묘를 대하면 송구한 마음을 넘어 죄책감마저 들게 한다. 그럴 때마다 자주 찾아 뵙고 잘 돌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먼 거리 교통난에 허덕이며 허겁지겁 다녀오면 마음뿐 아니라 몸조차 상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미타사 납골공원은 그 이름 <자연가정납골공원>처럼 공원 같은 분위기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언제고 편안하게 다녀갈 수 있을 듯 하다. 뭐라고 할까? 뽀얀 납골탑을 보면 나이 드신 부모님께 명절 때 고운 빔을 한번 해드린 그런 기분으로 다녀갈 수 있다고 할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이 마애불은 신라 말 불상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여래입상으로 자비스런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다. 이 마애불의 미소가 곳 미타사의 미소라 한다. S자로 깊게 굽어진 길을 조금 더 오르면 그곳에 미타사 본전이 있다.
미타사에서 대웅전이란 편액은 볼 수 없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진신사리탑이 있는 마당 안쪽으로 극락전(極樂殿)이란 커다란 편액이 걸린 전각이 있을 뿐이다. 이미 다른 산사의 기행에서 이야기하였듯 전각은 모셔놓은 주불에 따라 그 명칭이 정해진다. 극락전은 무량수전이라고도 하며 과거불인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모셔놓은 전각을 일컫는다.
진신사리탑을 중심으로 口자 형태로 배치된 전각들 안쪽에 있는 극락전 좌측에는 삼성각이 있다. 탑 좌측엔 종무소와 스님들이 기거하시는 요사채가 있다. 탑의 우측으로도 한옥형태의 요사채가 있는데 그곳은 기도를 위하여 미타사를 방문하는 신도들이 기거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탑의 전면은 담장인 듯 하지만 아래쪽으로 식당이 있고 그 앞에 미타선원이 있다. 탑을 중심으로 배치 된 전각들이 막힘 없이 후련한 듯 하면서도 아늑한 공간을 이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절밥이 맛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절밥을 먹을 기회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다. 공양(식사) 시간에 미타사엘 찾아가면 언제든 절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미타사 진신사리탑 앞쪽에 있는 공양간(식당)에는 식사시간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의 절밥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이승에서의 행적에 따라 판결을 받는다 한다. 조선시대의 고승(高僧)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은 불교포교 가사(歌辭) 중 하나인 <회심곡> 중에 죽은 남자를 심판하며 이승의 행적을 묻는 대목이 있다.
임금님께 극간하여 나라에 충성하며 부모님께 효도하여 가범을 세웠으며 배고픈 이 밥을 주어 아사구제 하였는가?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란공덕 하였는가? 좋은 곳에 집을 지어 행인 공덕 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 하였는가?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공덕 하였는가?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 하였는가? 높은 산에 불당 지어 중생공덕 하였는가? 좋은 밭에 원두 심어 행인해갈 하였는가?
'여자죄인 잡아들여 엄형국문 하는 말이, 너에 죄목 들어봐라. 시부모와 친부모께 지성효도 하였느냐? 동생항열 우애하며 친척화목 하였느냐? 괴악하고 간특한 년, 부모말씀 거역하고, 동생간에 이간하고, 형제불목 하게 하며 세상 간악 다 부리며 열두시로 마음변화 못 듣는데 욕을 하고 마주앉아 웃음낙담 군말하고 성내는 년 남의 말을 일삼는 년 시기하기 좋아한 년 풍도 옥에 가두리라 죄목을 물은 후에 온갖 형벌 하는구나'
죽어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떤 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떳떳한 답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납골공원을 지나니 다원이 보인다. <미타사선다원>이란 간판이 걸린 건물로 들어서니 차를 마시고 싶다는 분위기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마음을 정리하기엔 충분하다. 깔끔하게 내놓는 차 한잔을 마시니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했던 마음이 평상을 찾는다.
속세를 외면치 않고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속가 사람들이 해결해 야 할 문제중의 하나인 장묘문화를 앞서 해결하려는 미타사가 왠지 선각자라는 생각이 든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⑭-희양산 봉암사
산사 속의 산사,일년에 딱 하루만 산문을 여는 곳
20여년동안 일년에 딱 하루만 산문을 열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는 절이 있다. 1982년 6월 3일 대한불교 조계종단에서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제정, 공고하며 봉암사는 물론 희양산 일대는 일반인들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일년에 딱 하루, 부처님 오신날인 4월 초파일 하루동안만 산문을 개방할 뿐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고 하면 올 봄 전 종정 서암스님의 다비식과 같은 행사가 있을 경우에 있는 산문 개방이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곳이 절이라고, 대개의 절들은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한 포교의 일환으로 점점 개방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찌 보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보다 충실한 역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를 널리 알리고 뭇 중생들을 구제하는 구도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암사는 그렇지 않다. 가는 사람이야 어찌하는지 몰라도 오는 사람은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러기에 봉암사에서는 일반인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렇다고 경내를 휘적휘적 걷고 있는 스님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숨죽인 듯한 조용함과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그런 기가 느껴질 뿐이다.
봉암사는 백두대간의 단전자리에 해당하는 희양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백두대간이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기점으로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 내려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일컫는다.
국토의 척추와도 같은 대간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산과 강줄기들은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고, 삼국의 국경과 조선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다. 백두대간은 국토의 자연적 상징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라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동양의학에서 흔히 말하는 단전은 배꼽으로부터 9cm쯤의 아래 부위를 말한다. 선경(仙經)에서는 인체의 중요부분을 상단전(上丹田)과 중단전(中丹田) 그리고 하단전(下丹田)으로 나뉘고 있다. 상단전은 뇌에 해당하며 중단전은 심장에 해당하고 하단전이 바로 배꼽 아랫부분으로 정(精)을 간직하고 비축하는 곳이라 한다. 요즘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는 기수련이나 단전호흡 등을 통하여 정기(精氣)를 모으려 하는 곳이 단전이다.
바로 백두대간의 이런 단전자리가 희양산이며 그곳에 산사 속의 산사라고도 하고 한국불교정신의 최후 보루라고도 하는 봉암사가 있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당시 심층거사란 불자가 지증도헌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할 테니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한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였었다.
그러다 희양산 일대를 불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싸여있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한다.
봉암사를 찾아가는 길은 산세가 만만치 않다. 쌍곡계곡을 지나 15분쯤 더 가면 되지만 꼬불꼬불한 포장도로가 산세를 실감케 해준다. 절세가인의 선녀가 목욕을 할 것 같은, 옥빛 폭포수 가득한 하트모양의 용추폭포가 있는 대야산을 우측으로 하여 몇 분 정도 더 가면 봉암사로 들어가는 가은초등학교 희양분교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서 좌회전하면 저 만치 떨어진 곳에 와∼하는 감탄사가 나오게 하는, 웅장한 규모의 흰색 바위산이 보인다. 와∼하고 감탄을 낳게 하는 그 산이 바로 희양산이다. 포장된 길을 따라 3Km쯤 더 달리는 포장도로 좌, 우측엔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있고 그 아래 당집이 있다.
너럭바위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발견하고 몇 가구되지 않는 동네로 들어서 포장이 끝날 때쯤 출입을 제한하는 안내판과 길을 가로막고 있는 쇠사슬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 경비초소가 있다.
초소를 지난 진입로는 흙 길이다. 구불구불 멋대로 자란 소나무 빼곡한 흙 길을 걷는 기분이 새삼스럽다. 한참을 걸어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이쯤에 들어오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다른 또 하나의 흰색 바위산이 안쪽으로 보인다. 봉암사는 밖에서 보았던 바위산이 뒤를 감싸고 멀리보이는 또 다른 바위산이 좌측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장 올라가면 일주문을 지나게 된다. 갈림길부터 일주문으로 가는 길 우측으론 맑은 물이 넉넉히 흐르는 계곡이 나란히 흐른다. 일주물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침류교(枕流橋)를 건너 전각들이 있는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서 침류교를 건너지 않고 계곡과 나란한 소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 가게된다.
오른쪽으로 침류교를 지나 남훈루(南薰樓) 아래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한 단 높게 자리잡은 대웅보전이 보인다. 넓은 마당을 가운데로 하여 좌측에 성적당(惺寂堂)이 있고 우측에 보림당이 있다. 대웅보전 우측엔 극락전이 있고 그 옆으로 점화실이 있다. 극락전과 점화실 뒤편에 작은 규모의 산신각도 있다. 마당을 벗어난 성적당 뒤쪽에 3층석탑과 금색전이 있다. 그리고 금색전 뒤쪽에는 조사전이 있다.
3층석탑과 비로자나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진 금색전 그리고 희양산 정상은 일직선을 이르고 있다. 현재의 대웅보전이 불사되기 전까지는 금색전이 봉암사의 대웅전이었다고 한다. 그런 역사성 때문인지 금색전 뒤쪽엔 <대웅전>이란 편액이 그대로 걸려있다.
3층탑 좌측에 있는 범종각에서 좌측으로 가려하면 다시금 일반인 출입금지 푯말이 보인다. 이 곳이야 말로 일반의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되는 구역이다. 봉암사와 연이 닿는 신도라면 사전에 허락을 받아 이곳 경내까지 출입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곳, 스님들이 수도정진을 하고 있는 선방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출입이 제한되는 봉암사에서도 더더욱 출입이 통제되는 이곳이 바로 <曦陽山門太古禪院(희양산문태고선원)>이란 편액을 달고 있고, 스님들이 수도정진하고 계신 선원이다.
분위기가 그렇고 국내최고의 선방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발걸음도 조심스럽고 숨이라도 몰아쉴까 호흡을 가다듬게 된다.
참배를 마치고 경내를 두루 돌아보고 남훈루를 나와 다시 침류교를 건너 오솔길 같은 소로를 따라 걷는다. 말 그대로 오솔길이다. 사람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한 사람은 길을 벗어나 피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인적이 없는 곳이기에 그런 일은 없을 듯 하다. 오솔길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면 다시금 경탄을 토하게 된다.
심산유곡 깊은 골짜기에 가슴이 후련하도록 넓은 바위에 물이 흐른다. 흐르는 물이 너무 맑아 감히 손을 대기가 어렵다. 속세에 찌든 업보가 한 방울 떨군 먹물이 퍼지듯 그렇게 표시 날까 주춤거리게 한다. 움푹 패인 석지(石池)에 잠시 머물던 물은 다시 흐른다.
그런 마당바위 위로 큼직큼직한 바위가 군데군데 조화롭게 놓여있다. 자칫 바위뿐인 단조로움을 달래려는 듯 주변과 잘 어울리는 노송들이 가지를 드리워 청색을 더하고 있다. 그런 한쪽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불은 희양산 정상에 시선을 맞춘 듯하다.
너럭바위 군데군데 차곡차곡 올려 쌓은 돌탑들이 간직했을 정성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선원에서 화두를 놓지 않고 있던 스님들이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다녀간 흔적인지 아니면 훌쩍 다녀간 누군가의 흔적인지 모르지만 높지 않은 돌탑들이 꽤나 여러 개 있다.
들리는 소리는 물소리와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뿐이다. 속세에선 소음으로 들리던 매미소리도 이곳에선 마음을 일깨워 머릿속을 비워주는 자연의 가르침으로 들린다.
속세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조용한 산사에서조차 허둥대느라 송골송골 맺었던 땀방울이 사라지고 서늘함마저 느껴질 즈음 계곡과 나란히 어깨동무 하고있는 오솔길을 따라 오르던 길 다시 내려온다.
침류교가 있는 곳, 일주문서 올라와 마애불로 가는 길과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이곳은 아주 작지만 사거리가 되는가 보다. 대웅전에서 바라 본 앞산 바위를 향하여 발길을 옮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산길로 접어든다. 가파른 비탈을 한동안 오르니 바위에 서게 되고 봉암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거대한 하나의 암석덩어리로 꽃술 모은 연꽃형상을 하고 있는 희양산의 산세가 오묘하다. 어루만져 만든 듯 곡선을 그리며 뾰족이 솟은, 풀 하나 없는 듯한 희양산 꼭대기 바위는 하늘을 찌를듯하나 다시금 살펴보니 하늘의 정기를 받고 산의 지기를 모아 봉암사에 맺게 하는 듯하다.
담장에 둘러싸인 선원이지만 공간을 헤치고 들어가는 눈길은 어쩌지 못해 출입을 허락하는 모양이다. 바위에서 내려다 본 선원은 다소곳한 구도에 정갈함을 느끼게 한다. 분명 정진중인 스님들이 다수 계실텐데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곳이 절이라고는 하지만 대개의 절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 바람 속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하고자 함도 있겠지만 절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다른 의미도 있을지 모른다.
오는 사람을 막고있는 봉암사는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할까? 봉암사는 특별수도원이다. 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깨우침을 얻고자 수도하고 계신 도량이다. 물론 다른 절들도 스님들이 정진하고 계신 수도도량이지만 대중을 상대로 포교와 가르침 그리고 구도가 병행되는 곳이다.
주변환경이 그렇다 보니 하나의 화두에 몰두하기엔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 속인들과의 반복된 만남은 출가할 때의 마음을 흩어 놓아 부처님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깨달음을 위한 고행을 게을리 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승보의 길로 가기 위한 각오를 다지게 하는 곳이 바로 봉암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한국불교의 교리와 정신 그리고 스님들이 따르고 지켜야할 모든 것을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된다.
등산과 산사출입을 통제 받는 일반인들의 푸념 섞인 불만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속세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 보존되며 한국불교의 진면목을 고이고이 전수하는 그런 곳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자연은 왠지 구불구불하고 제 멋 대로인 무질서를 연상하게 하고 개발은 반듯반듯하고 차곡차곡 한 질서를 상징한다. 봉암사는 구불구불하고 제멋대로 인지 모른다. 그 구불구불함과 제멋대로가 자연이라면 봉암사는 먼 후일까지 산사 속의 산사로 보존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질서와 무질서를 가름하는 그 자체가 인간들의 착각이며 아집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경내 이곳저곳에서 셔터를 눌러대는 기자의 울긋불긋한 복장에 주지스님이 불편한 심기를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인 듯 완곡히 표현하신다. 봉암사에서 소임을 맡고 계신 모든 분들이 사문으로부터 말을 듣고 있다고.
이루고 싶은 소망하나쯤 항상 간직하고 있는 삶이 아름답듯 가보고 싶은 곳 하나쯤 간직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봉암사를 가보고 싶은 그런 곳으로 간직해도 좋을듯하다. 찾지는 말고 그냥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만 간직하길 바란다. 그러다 꼭 가고싶으면 몇 달쯤 마음을 다져 큰맘먹고 산문을 개방하는 사월 초파일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지키고자 하는 분들에 대한 도리라 생각된다.
금정산에는 하늘 나라의 고기라는 범어(梵魚)사가 있다.
맺힌 이슬 퐁당하고 떨어지듯 맑은 목소리를 가진 스님이 염불이라도 할 때면 묘한 기분마저 든다. 가슴이 찡해지면서 편안함을 느끼는가 하면 어떤 때는 이유 없는 서러움 같은 것이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이른 시간 잠을 떨구고 찾아가기가 힘들어 그렇지 손해볼 것 없이 좋은 곳이 아침 산사다.
절에서는 신도의 성별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 하고 남자 신도를 '처사' 또는 '거사'라고 한다. 그리고 법명(法名)이라는 것도 있다. 기독교에서 신도들에게 주는 세례명과 같이 절에서도 본명 이외에 또 다른 명칭이 개인에게 부여된다.
산사의 아침 예불은 보통 새벽 3시 30분 경부터 시작한다. 예불 전에 도량석을 하여야 하는 스님들이야 훨씬 이른 시간에 기상을 할 게 분명하다. 산사의 아침 예불은 이처럼 이른 시간에 시작되기에 스님들뿐인 경우가 많다.
불자들을 성별로 정확하게 구분하여 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좀더 적극적으로 절을 찾는 사람들은 여성이며 그 중에서도 나이 지긋한 장·노년층이 많다. 아무래도 이 분들에게는 이른 시간 산 속에 있는 절을 찾을 만한 적당한 교통편이 없기 때문에 새벽에는 스님들 뿐 일 경우가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목견한 산사의 아침예불은 특정 기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거나 행사가 아닌 경우에는 그랬다. 넓은 경내에 염불하는 스님과 저벅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기자가 전부인 경우가 허다하였다.
감각적으로 불나방처럼 불빛을 좇아가면 아침 예불이 시작된 대웅전이나 전각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곳엔 아침 예불을 주관하고 계시는 스님도 계신다. 범어사에서도 그랬다. 불빛 따라 더듬더듬 다가가니 높게 자리한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 좌우에 있는 지장전과 관음전에서도 열린 문으로 불빛이 뭉턱뭉턱 쏟아진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보제루를 돌아 앞마당과 계단을 지나 대웅전에 다가가니 이제껏 보았던, 스님뿐이었던 산사의 아침 예불과는 달리 법당에 사람들이 빼곡하다.
통 넓고 활동하기 편하게 생긴, 펑퍼짐한 회색 바지(일명 몸빼), 법복을 입은 보살 신도들이 스님 주변으로 빼곡하다. 순간적으로 '무슨 행사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얼른 눈길을 돌려 좌우에 있는 지장전과 관음전을 보니 그곳에도 신발들이 꽤나 많다. 절을 한번 할 때마다 염주 알을 넘기는 것으로 짐작컨데 108배라도 드리는 모양이다.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니 보는 것도 많지만 듣는 것도 적지 않다. 전라도에 있는 산사에 가던 충청도에 있는 산사에 가던 성지순례차 신도들을 태운 차에는 경상도 번호판이 제일 많거나 자주 보였던 듯 싶다.
정량적인 통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상도 보살님들이 가장 적극적이며 활동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신도 숫자야 인구밀도가 다르니 서울 등과 어떨지 모르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불심이기에 그 깊이를 잴 수는 없지만 하여튼 경상도 보살님들이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물론 경상도 특유의 억양 때문에 두드러진 점도 없지 않겠지만 말이다.
경상도는 삼국시대 때 신라의 영토였다. 복잡하게 역사적으로 어떠니 저떠니하지 않더라도 신라시대에 불교는 번창하고 융성하였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경상도에는 불교 관련 문화재나 볼 것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 볼 것과 관습은 문화가 되고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경상도는 불교와 좀더 익숙한 문화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지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다보니 아무래도 불교에 익숙한 가치관을 갖게 되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범어사는 그렇게 이름 붙여진 금정산 동쪽에 있다. 범어(梵魚)는 '하늘 나라의 고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결국 범어사는 마르지 않는 금정에 살고 있는 하늘나라의 고기와 같은 절인 셈이다.
범어사는 서기 678년 신라 문무왕 18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경남의 3대 사찰로 꼽힌다고 한다. 원효대사도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활동하였던 의병의 본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단다.
한국의 고찰들이 대개 그러하듯 범어사도 창건 이후 소실과 중건 또 다른 소실과 개수 및 중수 등이 거듭되었다. 그러다 근세의 고승인 경허 스님이 1900년에 범어사에 선원을 개설하였다고 한다.
민가와 동떨어지지 않은 때문인지 아침 운동을 하는 몇몇 사람들도 보인다. 가까운 곳에 커다란 절이 있으면 반드시 예불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아침 운동 겸 명상의 장소로 절을 찾는 것도 좋을 듯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산사의 아침을 어지럽히거나 훼방놓는 무례한 행동이나 함성을 질러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불빛을 좇아 들어간 곳이 일주문이 아니었나 보다. 입구에서 다시 들어가며 보니 정면에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경계 중 첫 번째 문으로 산문이라고도 한다. 속가의 중생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로 성역(聖域)의 문지방에 해당된다.
일주문들은 보통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한 개의 출입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범어사의 일주문은 네 개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3개의 출입구를 가지고 있다. 이런 형태를 일주삼간(一柱三間)이라고 한다.
절이나 고건축의 규모를 나타낼 때 간(間)이라는 단위를 쓴다. 간(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한다. 기둥사이가 좀더 넓고 좁은 것은 따지지 않고 그냥 기둥과 기둥사이를 한 간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똑 같은 세 간 규모라 하여도 좀더 클 수 있고 작을 수도 있다.
범어사 일주문의 또 다른 특징은 여느 일주문들이 나무기둥만으로 된 것과는 달리 돌기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지반으로부터 1.5미터 정도의 높이까지는 배흘림 돌기둥으로 되어있고 그 위로 목조 두리기둥을 세워 만들었다.
오른쪽 문에 있는 '禪刹大本山' 편액은 범어사가 선종의 으뜸 사찰임을 말하며 왼쪽 문에는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진 '金井山梵魚寺'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현재의 일주문은 1781년에 세워진 원형그대로라고 한다
일주문을 들어서 사천왕문과 불이문을 지나면 보제루 옆을 돌게된다.
보제루 오른쪽으로 돌다보면 벽면에 전원의 목가적 풍경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목우도(牧牛圖)라고 하는데, 송나라 보명(普明)이라는 사람이 창안한 선화(禪畵)로 소를 길들이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소는 '무릇 생명체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의 상징이라고 한다. 그림은 검은 소에서 흰 소로 변하고 더 나아가 마지막 열 번째는 비어있는 원으로 묘사되어 있다.
보제루 앞마당 안쪽으로 훌쩍 높게 자리한 곳에 목탁소리와 함께 많은 보살님들이 아침 예불로 지성을 보여주던 대웅전과 지장전 그리고 관음전이 있었다.
전각에 묻어 있는 세월이 걷힌 어둠위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들였을 지성과 기도가 느껴지는 듯 하다. 기둥의 나무 결이 그렇고 바랜 문살이 그랬다.
대웅전 왼쪽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 옆으로 길다란 전각이 있다. 한 지붕 길다란 전각에 팔상전과 독성각 그리고 나한전이 나란히 있다. 위쪽이 둥근 형태를 하고 있는 독성각 출입문이 시선을 끈다.
경내의 울창한 소나무 숲도 좋고 한쪽을 차지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도 좋다. 그리고 이른 시간에 지성을 드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더없이 따뜻한 느낌이 든다.
시내서 멀지 않은 곳에 호젓이 사색할 수 있는 명찰이 있다는 게 부산사람들에겐 또 다른 하나의 행복이라고 생각된다. 배타적 종교관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언제고 찾아 심신을 쉬게 할 수 있는 축복 받는 공간으로 영원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한번쯤 떠올리는 계기의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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