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김호기_시대정신과 지식인_05

醉月 2011. 4. 26. 08:49

[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⑤]

조선의 근대화 추구한 실학적 실용주의자 박지원…

중국어공용화론 제창한 급진 개혁주의자 박제가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이 기획을 시작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지식인을 꼽으라면 바로 초정 박제가다. 개인적 편견인지 몰라도 박제가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문제적 지식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적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른바 모더니티에 정공법으로 대결했던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서자 출신이라는 사회적 구속에도 그가 보였던 담대한 태도다.

 

박지원과 박제가

 

“너는 시집간 지 10년이 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니… 뒷날로 보면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구나!… 나는 가고 싶었지만, 직책상 함부로 도의 경계를 넘을 수 없어, 묘지명을 지어 광중에 넣는다. 후세사람들은 이를 보고 네가 정유 박제가의 딸임을 알 것이다. 명을 짓는다.”

 

박제가가 더없이 사랑하던 둘째딸 윤씨 부인이 죽었을 때 쓴 글이다. 이 비감한 글을 읽고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자식을 먼저 보내야만 하는 부모의 애끊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박제가의 한없이 드높은 자존심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시작되던, 새로운 사회변동의 기운이 꿈틀거리던 조선 후기의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걸어갔던 지식인,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천년 뒤에도 천만 명의 이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자기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냈던 지식인이 바로 박제가다. 박제가와 그의 스승 연암 박지원이 바로 이번 기획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이다.

 

18세기, 새로운 시대정신의 요구

우리 역사의 시대정신과 지식인을 다루는 이 기획에서 가장 고심한 부분 중 ...   

 

박지원의 대표작 ‘열하일기’.

 

이 학술회의를 주도한 송재소 교수는 실학 연구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이우성 교수를 따라 실학을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 실사구시(實事求是)학파의 세 흐름으로 나눴다. 경세치용학파가 주로 제도개혁과 농민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으로 대표된다면, 이용후생학파는 도시 상공업의 발전과 관련된 기술개혁을 주창한 담헌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으로 대표된다. 한편 실사구시학파는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학문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추사 김정희로 대표된다.

 

이 가운데 이용후생학파의 다른 이름이 북학파(北學派)다. 송재소 교수에 따르면 북학파란 이름의 기원은 그 의미가 북쪽에 있는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데서 비롯됐다. 당시 조선보다 문물이 발전한 청나라를 배움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것이 북학파의 핵심 아이디어이자 기획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북학파의 사상은 일종의 선구적인 근대화론이다. 근대화론의 기본 발상은 더 발전된 국가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이 논리가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당대적 관점에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있다. 주지하듯이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형식적으로는 청과 수직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청나라에 대한 적대심이 매우 컸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제안하고 효종이 절치부심으로 추진한 북벌론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당시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 가운데 하나였다.

 

청나라에 치욕을 당한 만큼 무력으로 청을 정벌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론은 그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 대내적 사회통합을 제고하기 위한 일종의 지배 헤게모니로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박지원과 그의 동료 및 제자들은 이러한 북벌론을 정공법으로 비판했다. 특히 박지원과 박제가는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법과 제도가 우수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북벌론에 맞서는 북학론을 제시했다. 기존 지배 이념과 정책에 대응해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게 시대정신 탐구의 본질을 이룬다면, 박지원과 박제가는 북학론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열하일기’에 대한 열광과 비판

박지원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가는 우리 역사의 길목에서 정약용과 함께 가장 주목할 만한 지식인으로 꼽혀왔다. 그는 북학론을 제시해 상공업의 장려를 촉구한 개혁적인 정치가이자, 문체를 혁신해 한국적 산문의 새로운 지평을 연 문필가였다. 홍대용, 형암 이덕무, 영재 유득공, 척재 이서구, 그리고 박제가가 동료이자 제자였으며, 개화파의 선구자 박규수는 그의 손자였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미(仲美)이고 호는 연암(燕巖)이다. 아버지는 반남 박씨 사유였으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 창원의 딸이었다. 1752년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으며, 보천의 아우 양천에게 ‘사기’ 등을 배웠다. 박지원에게는 처가가 중요했는데, 특히 처남 이재성과는 평생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박지원은 1765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768년 백탑 근처로 이사했으며, 친구인 홍대용, 이웃인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그리고 박제가 등과 교유했다. 이때는 영조 말년과 정조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였으며, 박지원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서양 문물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낙방한 이후 박지원은 오직 연구와 글쓰기에 주력하면서 새로운 학문과 정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박지원 삶의 전환은 정조의 등극과 함께 이뤄졌다. 정조 초기 정치적 이유로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 은거해 있었는데,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이 공식사절로 연경(북경)에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1780년 6월 말에 출발해 10월 말에 돌아온 박지원은 자신의 여행 체험담을 책으로 냈는데, ‘열하일기(熱河日記)’가 바로 그것이다. ‘열하일기’는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모았다. 젊은 세대는 열광한 반면 기성세대에게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박지원은 뒤늦게 관료사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1786년 선공감 감역에 제수된 이후 한성부판관, 안의현감, 양양부사 등을 지냈다. 여러 기록을 볼 때 박지원은 훌륭한 지방 행정관이었으며, 이 시기에 ‘과농소초’ 등을 포함한 저술을 남겼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등극해 개혁파의 입지가 좁아지던 1805년(순조 5년) 박지원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종채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과정록’을 썼으며, 종채의 아들인 박규수는 고종 때 개화파로 활약했다.

 

시대정신과 지식인을 다루는 이 기획에서 박지원과 박제가의 시대에 와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의 핵심은 다름 아닌 ‘모더니티(modernity)란 무엇인가’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세계사회는 여전히 모더니티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모더니티를 넘어서는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를 이야기하지만, 문화 현상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더라도 제도적 조건으로서 모더니티가 세계사회를 이끌고 있다.

 

조선 모더니티의 기점

모더니티란 대략 17세기부터 서유럽에서 시작돼 전세계적으로 확산돼온 제도와 의식, 다시 말해 경제적 자본주의, 정치적 국민국가, (근대적 의미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지칭한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제도적 측면에서 모더니티를 네 가지 제도와 그 관계성으로 개념화하기도 했는데, 자본주의, 산업주의, 감시체제, 군사적 힘이 그것이다. 또한 모더니티를 이루는 의식과 문화로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평등주의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모더니티의 역사적 과정인 근대화(modernization)가 단일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근대화가 서유럽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요란 투르비언(Goran Therborn)에 따르면 지구적 수준에서 근대화의 역사적 경로에는 혁명 혹은 개혁의 유럽 근대화, 아메리카 신세계의 근대화, 외부적으로 주어진 근대화, 식민지 근대화의 여러 하위 유형이 존재한다. 이런 경로들은 세계체제 내의 구조적 위치와 국내의 개인적 및 집합적 행위 간의 상호복합적인 관계에 의해 더욱 다층화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역사다. 과연 우리 역사는 이러한 근대화 기획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국 모더니티의 기원을 언제로 볼 것인지의 문제다. 여기에는 그동안 여러 담론이 경쟁해왔다. 어떤 이는 영·정조 시대까지 기원을 소급하는가 하면, 다른 이는 개항(1876) 또는 갑오개혁(1894)을 주목하고, 또 다른 이는 식민지 시대를 제시하기도 한다.

 

최근 역사학계에서 모더니티의 기점에 대한 유력한 견해로는 ‘1876년’과 ‘1894년’이 맞서고 있다. 전자가 외부 충격인 ‘개항’을 중시한다면, 후자는 내부의 대응인 ‘갑오개혁’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근대의 기점에 대한 논의는 결론을 서둘러 이끌어낼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적 연구가 축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혁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정조 시대는 여러 함의를 안겨주고 있다.

 

박지원이 남긴 대표적인 글로는 ‘열하일기’와 ‘연암집(燕巖集)’을 들 수 있다.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열하일기’는 문제적인 저작이다. 흔히 이 책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이 기행문학을 넘어서 일종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두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로는 선진 문물이라 할 수 있는 청나라의 경제·사회·문화·건축·토목·천문·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는 게 하나라면, 이들에 대한 이용후생을 적극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한마디로 박지원이 품었던 정치적 기획은 앞선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해 뒤떨어진 조선 사회를 개혁하자는 데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기획이 현재적 관점에서는 서구 기술과 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근대화론과 매우 유사하지만,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당대 주류 지식사회에서는 반청친명(反淸親明)의 경향, 다시 말해 청나라를 거부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제시한 북벌론은 이러한 논리를 대표하는 정치적 기획이었으며, ‘열하일기’는 이런 북벌론에 맞서서 새로운 북학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열하일기’의 10권 ‘옥갑야화’에 실린 소설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부국이민(富國利民)의 경제철학을 강조한다.

 

   

지배계층의 이중적 도덕성 질타

 

박제가는 그림에도 능해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정치, 다시 말해 국가경영의 일차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국민 다수의 물질적, 정신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박지원은 당시 지배계층의 ‘성리학적 원칙주의’에 맞서 ‘실학적 실용주의’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정책으로 구체화하고자 했다. 지배계층이 갖는 허위의식에 대한 박지원의 비판은 젊은 시절에 쓴 소설 ‘양반전’에도 이미 나타났지만, 열하일기 4권 ‘관내정사’에 나오는 ‘호질’에서도 잘 드러난다. 양반을 꾸짖는 호랑이를 통해 박지원은 지배계층의 이중적 도덕성을 풍자하고 질타한다.

 

박지원 사상의 핵심은 ‘이용이 있은 후에 후생이 되고, 후생이 된 후에 정덕(正德)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압축돼 있다. 다시 말해 정덕을 이룬 다음에 이용후생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용후생 이후 정덕을 이루자는 주장이 박지원이 품었던 실학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스콜라적인 주자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겨냥하는 이러한 발상에는 과학과 기술을 주목하고 특권화하려는 근대적 사유의 일단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연암의 사상은 조선 후기 우리 문학의 정점을 이룬 그의 일련의 작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아! 소위 법고(法古)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新)한다는 사람은 상도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즘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박제가의 ‘초정집’ 서문으로 박지원이 쓴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롭게 창조하자는 ‘법고창신’의 정신 아래 박지원은 우리 문학사에서 빛나는 작품을 다수 남겼다.

 

개인적인 일을 잠시 말하자면, 내가 시내라 할 수 있는 종로에 진출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1970년대 중반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 다니면서 종로와 그 인근 지역을 익히기 시작했다. 재수생 시절에는 아예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그때 무던히도 돌아다녔던 종로 구석구석에는 내 젊은 날의 기억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 가운데 한 곳이 탑골공원 주변이었다. 재수생 시절 학원을 마치면 종로 3가에 있는 다른 학원에 다니는 친구를 더러 찾아갔는데, 우리는 뜨거운 여름인데도 뜨거운 라면을 먹은 다음 가까운 탑골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가곤 했다. 탑골공원 안에는 그 이름이 이미 알려주고 있듯이 원각사 10층 석탑이 있다. 바로 이 탑을 조선시대에는 그 색깔이 흰색에 가까워 백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빙 둘러 있는 성 한가운데에 백탑이 있다… 여기가 바로 원각사의 옛터다. 지난 무자년(1768)과 기축년(1769)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여덟, 열아홉이었다.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으뜸이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백탑의 북쪽으로 가서 찾아뵈었다. 선생께서는 내가 왔단 말을 들으시더니 옷을 걸치며 나와 맞이하시는데, 마치 오랜 친구처럼 손을 잡아 주셨다. 마침내 당신이 지은 글을 모두 꺼내 와 읽게 하셨다. 몸소 쌀을 씻어 차솥에 안치시고, 흰 주발에 밥을 담아 옥소반에 받쳐 내오셔서는 잔을 나에게 축수해 주셨다. 나는 지나친 환대에 놀라고 기뻐하며 천고의 성대한 일로 여겨 글을 지어 화답하였다. 서로에게 경도되던 모습과 마음을 알아주던 느낌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인용이 다소 길었지만, 박제가가 쓴 ‘백탑청연집’ 서문이다. ‘백탑청연집’은 박지원 일파의 시문과 척독(편지)을 모은 책이다. 위의 인용은 박제가가 기억하는 박지원과의 첫 만남을 담고 있는데, 30대 초반의 박지원과 10대 후반의 박제가의 만남이 마치 드라마를 보듯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내친김에 앞의 글을 좀 더 인용해보자.

 

“당시 형암 이덕무의 집이 북쪽으로 마주 보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은 그 서편에 솟아 있었다. 수십 걸음 떨어진 곳은 서상수의 서루였고, 거기서 다시 꺾어져 북동쪽으로 가면 유금과 유득공이 사는 집이었다. 나는 한번 갔다 하면 돌아오는 것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연거푸 머물곤 했다. 시문이나 척독을 썼다 하면 권질을 이루었고, 술과 음식을 찾아다니며 밤으로 낮을 잇곤 했다.”

 

   

박지원과 박제가의 만남

 

당시 백탑 근처에 살던 이들은 우리 지성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커뮤니티였다. 박지원을 선생으로 하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이 함께 어울린 이 커뮤니티는 북학파를 태동시켰으며, 이 가운데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정조 시절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함께 임용되기도 했다. 당시 규장각은 창덕궁 안에 있었는데, 규장각이었던 주합루를 요즘도 어쩌다 찾아가게 되면 더없이 자유롭고 치열했던 백탑파 지식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박제가는 1750년(영조 2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박평의 서자인 그의 자는 재선(在先)이고, 호는 초정(楚亭)이다. 박제가는 소년 시절부터 문명을 떨쳤다. 10대 후반에 박지원을 만났으며,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교유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박제가의 성격은 호방하고 격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것으로 보아 감수성 또한 예민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1776년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건연집’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그 이름이 청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박제가는 서얼을 관직에 진출시키려는 정조의 정책에 따라 1779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임명됐다. 이후 그는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많은 책을 교정하고 간행했다. 그는 지방 행정을 맡기도 했는데 부여현감, 영평현감 등을 지냈다.

 

박제가의 삶에서 특히 중요했던 것은 네 차례에 걸친 연행길이었다. 그는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청나라로 갔으며, 1801년 사은사 윤행임을 따라 연경을 방문한 것에 이르기까지 네 번 연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에서 박제가는 이조원, 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했으며, 이런 교유의 전통은 그의 제자 김정희에게로 이어졌다. 네 번째 연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박제가는 흉서(凶書) 사건에 연루돼 종성에 유배됐다가 풀려났지만 1805년(순조 5년) 세상을 떠났다.

 

박제가의 글은 ‘정유각집(貞·#54406;閣集)’에 집약돼 있다. ‘북학의(北學議)’를 제외하고 박제가가 남긴 글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다양한 각도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이 책에 실린 글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글을 꼽으라면 묘향산 여행을 다룬 ‘묘향산소기’다.

 

정민 교수는 이 글을 우리 역사 기행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지목한다. 정 교수도 지적하고 있지만, 내가 이 작품을 주목한 이유는, 묘향산의 풍광에 대한 경탄할 수밖에 없는 더없이 유려한 묘사도 묘사지만, 서얼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슬픔이 짙게 깔려 있다는 데 있다. 조선 전기의 율곡 이이에 필적할 천재였건만, 적서 차별이라는 신분적 구속 아래 좌절을 겪어야만 했던 박제가의 비애와 그것을 초극하려는 의지가 곳곳에 담겨 있어 이따금 ‘정유각집’을 펼쳐 보면 마음 한구석이 시려오기도 한다.

 

진보적 세계화주의자

‘북학의’는 박제가의 대표 저술이다. 이 책은 박제가가 첫 번째 연행에서 돌아와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책으로 ‘열하일기’와 함께 북학파의 이론과 전략을 대변한다. 박제가는 섬세하면서도 호쾌한 자신의 성품에 걸맞게 청나라 문물을 치밀하게 소개하고 이를 과감하게 수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책은 ‘내편’과 ‘외편’으로 이뤄져 있다. 구체적인 항목을 보면 박제가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내편은 거(車)·선(船)·성(城)·벽(?)·와(瓦)·옹(甕)·단(簞)·궁실(宮室)·창호(窓戶)·계체(階?)·도로(道路)·교량(橋梁)·축목(畜牧)·우(牛)·마(馬)·여(驢)·안(鞍)·조(槽)·시정(市井)·상고(商賈)·은(銀)·전(錢)·철(鐵)·재목(材木)·여복(女服)·장희(場戱)·한어(漢語)·역(譯)·약(藥)·장(醬)·인(印)·전(氈)·당보(塘報)·지(紙)·궁(弓)·총시(銃矢)·척(尺)·문방지구(文房之具)·고동서화(古董書畵) 등의 30항목으로 돼 있다. 여기서 박제가는 실생활에 연관된 다양한 기구와 시설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개혁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외편은 전(田)·분(糞)·상과(桑菓)·농잠총론(農蠶總論)·과거론(科擧論)·북학변(北學辨)·관론(官論)·녹제(祿制)·재부론(財賦論)·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병론(兵論)·장론(葬論)·존주론(尊周論)·오행골진지의(五行汨陳之義)·번지허행(樊遲許行)·기천영명본어역농(祈天永命本於力農)·재부론(財賦論) 등의 17항목으로 돼 있다. 여기서 박제가는 상공업과 농업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상공업의 발전과 농업 기술의 개선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북학의’는 일종의 국부론이다. 부국의 방법으로 박제가는 청나라 문물의 즉각적이고도 대대적인 수입 및 응용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박제가의 제안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는 중국 문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어(漢語)를 써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킨 영어공용화론에 앞서 200년 전에 박제가는 중국어공용화론을 제안한 셈인데, 그 논란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이러한 견해는 급진적 개혁주의자 박제가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박제가는 뛰어난 시인이자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조선 후기 한문학 4대가로 꼽혔으며, 앞서 말했듯이 그의 시는 청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더불어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박제가의 국제 감각이다. 네 차례나 연행을 갔다 올 정도로 박제가는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또 나름대로 풍부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세계화주의자, 그것도 진보적 세계화주의자였다. 이런 박제가의 사상은 그의 제자 추사 김정희에게 이어졌다.

 

전통과 모더니티의 경계선에서

무릇 어떤 사상이라도 시대적 구속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 북학파의 사상이 지배적인 성리학적 질서를 비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범위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지원과 박제가로 대표되는 북학파 지식인들은 주자학에 대응해 고증학을 선호하고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것이지 포괄적 의미의 전통사상과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동시에, 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주의, 우주의 질서와 연관된 도덕과 윤리, 배움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는 엘리트 등을 강조하는 전통적 유교사상의 자장 안에 여전히 박지원과 박제가는 놓여 있었다. 그들이 남긴 여러 글을 보면 박지원과 박제가는 전통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에 경계가 존재한다면 박지원과 박제가는 그 경계에 서 있던 지식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주목하고 강조하려는 것은 모더니티를 이루는 양 축인 제도와 정신에서 박지원과 박제가가 보여준 선구적인 문제의식이다. 제도로서 모더니티가 자본주의, 산업주의, 감시체제, 군사적 힘으로 이뤄져 있다면, 박지원과 박제가는 비록 근대적 자본주의와 산업주의에 대한 이해가 심도 깊지 않았고 그 응용 모델이 청나라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두 사람은 분명 생산도구 개선과 유통구조 혁신 등 근대적 사회·경제 변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정신으로서 모더니티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박지원의 소설들이다. ‘양반전’ ‘호질’ ‘예덕선생전’ ‘열녀함양박씨전’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박지원은 봉건적인 신분제를 비판하고 평등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윤리를 모색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이성과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진 보편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에 담긴 모더니티를 생각할 때 문화사적 측면에서 박지원은 참으로 이채로운 지식인이었다.

 

문제는 모더니티를 향한 이러한 새로운 흐름의 운명이었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새로운 사상을 펼칠 수 있었던 조건 가운데 하나는 ‘계몽 군주’ 정조의 존재였다. 시대사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정조의 개혁 정치는 그러나 1800년 그의 죽음과 더불어 종결되고 이후에는 오히려 전통적 질서를 강화하려는 세도정치가 득세했다. 전진과 후퇴가 역사의 본질이기는 하지만, 당시 세계사적 변화를 지켜볼 때 조선사회의 대응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앞으로 이 기획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전통과 모더니티의 경계에 서 있던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계속 살펴보고자 한다.

 

지식인의 기품

두 해 전 나는 모 주간지 기획을 맡아 민통선과 비무장지대를 돌아본 적이 있다. 서쪽 강화군에서 동쪽 고성군까지 휴전선을 둘러보면서 분단시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이 기획에서 네 번째로 찾은 곳이 강원도 양구와 인제였는데, 휴전선에 붙어 있는 양구 펀치볼에서 인제 서화면으로 넘어와 원통으로 내려오던 길이 내게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설악산 서쪽 사면에 위치한 산은 높고 계곡도 깊은 인제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문득 떠올랐던 것이 박지원과 박제가가 남긴 글이었다. 두 사람이 교유하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백동수다.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다. 그는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지었으며, 북학파 지식인들과 매우 가깝게 교유했다. 자(字)가 영숙이었던 백동수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인제현 기린골로 들어가게 되자 박지원과 박제가는 이에 대해 글을 썼다.

 

개인적 소회를 말하면, ‘연암집’과 ‘정유각집’에 실려 있는 이 두 편의 글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남긴 글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품들이다. 먼저 박지원의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증정한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제 영숙이 기린협에 살겠다며 송아지를 등에 업고 들어가 그걸 키워 밭을 갈 작정이고 된장도 없어 아가위나 담가서 장을 만들어 먹겠다고 한다. 그 험색하고 궁벽함이 연암협에 비길 때 어찌 똑같이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 자신은 지금 갈림길에서 방황하면서 거취를 선뜻 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하물며 영숙의 떠남을 말릴 수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의 뜻을 장하게 여길망정 그의 궁함을 슬피 여기지 않는 바이다.”

한편 박제가는 ‘강원도 인제현 기린산골로 떠나는 백영숙을 보내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낮에 나가면 오직 손가락 끝이 무지러진 나무꾼과 쑥대머리를 한 숯쟁이들이 서로 더불어 화롯가에 빙 둘러앉아 있을 뿐이리라. 밤이면 솔바람 소리가 쏴아 하며 일어나 집 둘레를 흔들며 지나가고, 궁한 산새와 슬픈 짐승들은 울부짖으며 그 소리에 응답할 것이다.…영숙이여! 떠날지어다. 나는 지난날 곤궁 속에서 벗의 도리를 얻었소. 비록 그러나 영숙에게 있어 내가 어찌 다만 가난한 때의 사귐일 뿐이겠는가?”

 

우국충정을 품었으나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은둔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친구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박지원과 박제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연암집’과 ‘정유각집’에서 이 글들을 다시 찾아 읽으며, 새삼 지식인의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 글에서 말한 바 있지만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실참여와 현실비판이라는 지식인의 이중적 과제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

혹시 현재 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활동을 사회참여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여는 참여이고 비판은 비판인데도 그 비판의 엄정성이 참여의 현실논리로 인해 무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포함해 이 땅의 지식인들은 정치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 권력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초연할 수 있는지 인제현 기린협으로 떠나는 백영숙에게 주는 박지원과 박제가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식인에게 기품이란 무엇인가. 지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밝히는 이로서 지식인은 경우에 따라 시대와 불화할 수도 있고 권력에 맞설 수도 있어야 한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평등에 대한 소망은 지식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며, 이 덕목을 내면화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위엄이자 기품이다.

 

김호기
1960년 경기도 양주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미국 UCLA 사회학과 방문학자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Korea Democracy Project 공동편집인
저서: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등 다수

 

시내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 모처럼 인사동으로 나갔다. 저녁을 먹은 후 아는 이들과 헤어져 혼자 종로3가 쪽으로 걸었다. 가까이 백탑이 보였다.

 

부지불식간에 박지원과 박제가가 떠올랐다. 한 젊은이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드리니 다른 한 중년 사내가 서둘러 나와 반갑게 손을 잡아끌고 들어간다. 밤을 새워 끝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서울 하늘 아래 조용히 울려 퍼진다.

 

벌써 200년 전의 일이건만 그들의 첫 만남이 내 눈에 선하다.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저 뒤편 어디선가 두 사람 역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3호선을 타기 위해 종로3가 역으로 걸어가면서 이따금 나는 뒤돌아보곤 했다.

 

박지원은 누구인가
1737년 서울에서 출생. 1805년 사망. 실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 북학파로 알려진, 이용후생의 실학파를 이끌었던 그는 사회 개혁을 모색하고 문체 혁신을 주도했음. 주요 저작으로 ‘열하일기’ ‘연암집’ 등이 있음. .

박제가는 누구인가
1750년 서울에서 출생. 1805년 사망. 박지원과 더불어 북학파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던 그는 조선 후기 한문학 4대가 중 한 사람이며, 청나라 문물을 수용해 사회 개혁을 모색한 급진적인 사상가였음. 주요 저작으로 ‘북학의’ ‘정유각집’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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