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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정서에 가장 밀착된 풍광은 썰물의 개펄 위에 턱 괴고 앉은 작은 고깃배들이 오도카니 먼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습니다. 하여 나는, 개펄에 새겨진 떠나간 바다의 발자국 위로 떨어지는 저녁 햇살을, 다시 올 님을 기다리는 등불로 걸어둔 서해를 찾았습니다. 고백하건대, 정수사는 핑계였습니다. 또 한 해가 저무는 이 때, 엄살스런 회한보다는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갯가에서 바다를 보고 싶었습니다.
- 마니산 기슭 함허동천으로 가는 길 옆으로 개펄이 누워 있었습니다. 고깃배는 한 척도 없었지만, 부드럽게 깊은 갯고랑은 누천년의 그리움을 지문처럼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달그림자인지도 모릅니다.
새삼스러운 얘기가 되겠지만, 밀물과 썰물은 달이 바다에 띄우는 연서(戀書)입니다. 그 편지를 받은 바다는 부풀대로 부푼 그리움으로 달을 향해 나아갔다가는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속마음도 털어 놓지 못하고 돌아섭니다 (밀물이 달의 인력작용에 의한 팽창 때문에 일어난다는 과학 교과서의 설명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메마른 수작입니다).
함허동천을 지나 정수사로 오릅니다. 마니산 참성단으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름이면 동굴 속 같은 녹음을 드리우는 숲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을바람만 빈 가지에 허허롭습니다.
보는 이의 마음 자락을 먼 바다까지 넓혀주네
-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신라 선덕왕 8년(639), 낙가산에 머물던 회정 선사가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한 뒤, 동쪽 기슭의 훤히 밝은 땅을 보고는 가히 선정삼매(禪定三昧)를 바르게 닦을[精修] 곳이라 하면서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정수사(精修寺)라 했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전하여 오는 이야기이고, 1903년에 엮은 정수사산령각중건기(淨水寺山靈閣重建記)와 강도지(江都誌)에는,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합니다.
현재의 절 이름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 기화(涵虛 己和) 스님이 중창할 때 법당 서쪽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는 정수(精修)라는 이름을 정수(淨水)로 고쳤다 합니다.
10여 년 전부터 네다섯 번 계절을 달리하여 정수사를 찾곤 했습니다. 봄이면 절로 오르는 108계단 옆으로, 봄보다 먼저 봄 마중을 나서는 매화의 운치가 그윽합니다. 늦여름, 절 마당 앞 산자락에 펼쳐지는 노랑 상사화 군락은 어디에서도 만나기 힘든 꽃마당을 이룬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꽃마당을 보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일주일 정도만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가을 단풍의 은근함도 보기 좋습니다. 내장산이나 설악산 단풍 같지야 않지만, 크고 작은 활엽수가 성글게 어우러진 모습은 비범을 속으로 감춘 고승의 풍모를 느끼게 합니다. 겨울 설경이야 어디인들 좋지 않겠습니까만, 산토끼가 마실을 다니는 평화로운 분위기는 한겨울에도 온기를 나눌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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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설전 뒤에서 바라본 모습. 산이 허락해 준 만큼만 터를 얻은 모습이 단아하다.
- 정수사는 작은 절입니다. 암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산이 허락해 준만큼 터를 얻고 대웅보전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를 세워 놨습니다. 최근에 절 마당 귀퉁이에 ‘바람이 그곳을 스칠 때’라는 이름을 단 찻집이 도량을 약간 좁아보이게 하지만, 돈을 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차를 나누어 주는 찻집 안에서 바라보는 절 앞 산자락과 살짝 모습을 보이는 서해는 보는 이의 마음자락을 먼 바다까지 넓혀 줍니다. 사물을 관조(觀照)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트는 것만이 명상이 아니라, 때로는 풍광 속으로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자연스런 알몸의 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수사 대웅보전(보물 제161호) 꽃문살의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이 첫손을 꼽을 정도로 빼어납니다. 가운데 칸 네 짝 꽃문살은 여느 꽃문살과 달리 화병의 꽃을 옮겨 놓은 듯한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손과 마음이 순일하게 하나를 이루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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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이 그곳을 스칠 때’라는 이름의 찻집 안. 창밖으로 빈 가지에 허허로운 바람이 걸려 있다. / 무설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툇마루와 꽃문살이 순일한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 주는 집이다. 최근 보수 공사를 마치고 새로 단청을 해서 고풍을 느끼기 힘들지만, 과거보다 단청 색깔은 더 단순하고 간결해졌다.
틈나는 대로 산수간에 몸을 두어야 할 이유
대웅보전이 처음 세워진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57년 보수공사 때 조선 초기인 1423년에 고쳤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집은 앞면의 툇마루가 특이합니다. 건물의 양식으로 미루어 볼 때 후대에 고쳐 지을 때 덧달아 낸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우리네 옛 시골집을 떠올리게 하는 툇마루는 부처의 세계와 바라보는 이의 거리를 지워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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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최근에 조성한 무설전 안. 오백라한이 모셔져 있다. / 2. 대웅보전(보물 제161호) 안. / 3,4. 대웅보전 공포 장식. 해학적인 용머리가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짓는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장대석과 주초석도 우리네 전통 미감을 곱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듬은 장대석은 중후함과 함께 처음으로 지어진 때가 조선 이전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사찰 건축에서 기단에 다듬은 돌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기둥을 받치고 선 돌은 모두 다듬지 않은 돌인데, (앞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 귀퉁이의 바위는 자연에 깃들어 사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상하게 보여 줍니다.
대웅보전 뒤 삼성각은 정갈한 돌계단을 마련하여 다가서는 이의 걸음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대웅보전과 같은 방향이 아니라 살짝 오른쪽으로 튼 모습도 다소곳합니다. 주불전에 대한 경의의 뜻인지, 터의 모양에 순응한 것인지, 최초에 지은 사람의 의도는 알길 없으나, 자연과 하나 되기를 꿈꾸었던 우리네 선인들의 마음결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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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르는 계단길이 다가서는 이의 걸음을 정갈하게 하는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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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오른쪽에서 산기슭으로 몇 계단 오르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벼랑 위에 삼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근래에 조성한 불사리탑인데, 대웅전 앞에 세웠다가 다시 이쪽으로 옮겼습니다. 강화도라는 땅이 ‘바다 위에 뜬 연꽃’ 같은 곳이어서 절 마당 가운데를 피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과거에 염전이던 곳이 지금은 논으로 바뀐 모습과,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영종대교가 손끝에 걸릴 듯합니다. 약간의 거리만 두어도 문명의 첨단이 소꿉놀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입산수도는 할 수 없어도 틈나는 대로 산수간에 몸을 두어야 할 이유를 다시금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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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설전 지붕 너머로 보이는 서해. 영종대교가 눈 아래에 걸린다. 물러 나 보면, 첨단의 문명도 아이들 소꿉장난 같다. / 도량 옆 벼랑 바위 위에 세워진 불사리탑. 생애 최후의 순간을 빛으로 수놓는 단풍과 어우러진 모습은 ‘흐름’으로 영원한 자연의 본래면목을 보여 주는 듯하다.
- 초겨울 산사에는 일찍 밤이 찾아듭니다. 자동차의 불을 밝히고 강화읍을 향하며 정수사 대웅보전 꽃문살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꽃봉오리가 그렇듯이 그 문은 닫혀 있는 때에도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네 마음의 문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은, 닫혀 있든 열려 있든, 소통의 숨구멍이어야 합니다.
문 닫아 거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문만 활짝 열어 둔다면, 열고 닫는 일에 자재로울 수 있겠지요. 긴 겨울, 내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연재 끝>
독자들께 드리는 편지
- ▲ 절로 오르는 108계단. 앞장 선 개가 따라오는 이가 잘 오고 있는지 고개를 돌린다. 기다려 준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배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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