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16)-지리산 실상사
농사꾼처럼 거무튀튀한 약사여래 부처님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실상사를 찾게 되면 지금껏 절에서 느끼던 정적인 느낌이 싹 달라진다.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던 대자보가 보이고 기아에 허덕이는 북녘 아이들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역동적 감흥이 시작된다.
내용이야 그때 그때 달라지겠지만 종단과 스님들 자신을 꾸짖는 내용의 글로부터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을 환기시키는 글들도 있다. 종단 내에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신랄하게 꾸짖는 준엄한 내용도 있다. 너무 직설적이며 솔직한 표현이 꾸짖음이기보다는 자아비판적 고행의 표현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동족이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북녘아이들의 피골상접한 사진은 맛 타령에 입맛 타령을 달고 다니던, 허구와 허영에 찬 세 치 혀의 간사스러움과 입으로만 나발거리며 보시를 게을리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인간들이 아무리 제 잘났다 날뛰어도 연기적 관계는 벗어나지 못함을 일깨워주는 큰 가르침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실상사에서는 생명체의 귀함을 일깨우는 이런저런 행사가 많이 열리는 듯하다.
실상사 천왕문으로 들어서는 분위기는 여느 사회단체의 역동적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천년 고찰이라고 하지만 대자보와 전시물에선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당찬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 '새만금 갯벌을 살리겠다'고, '일체중생의 평화'를 부르짖으며 부안 새만금 갯벌부터 800리 서울까지 아스팔트길에 골수 같은 땀 흩뿌리며 삼보일배를 하였던 수경스님이 이 실상사 스님이다.
많고 많은 다른 스님들에 앞서 수경스님이 삼보일배에 앞장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산선문의 맏형이라는 실상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선문이란 달마대사가 갈대 잎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온 이래 꽃피운 선법(禪法)을 신라의 젊은 스님들이 배워 와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선법이란 참신하고 개혁적인 신사조운동이었다. 인과율에 의한 기존의 교종불교는 사람의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적 인식이었다. 선종의 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의식을 제공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전제된다. 현실의 정치에서 기득권자들과 개혁세력들의 갈등쯤은 아무 것도 아닐 만큼 그 어려움은 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그 분야가 삶의 가치를 가늠하는 종교분야임에 더 했으리라 짐작된다.
▲ 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석등과 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 고색창연한 보광전이 보인다. |
ⓒ 임윤수 |
이 구산선문 중에서도 지리산 실상사가 최초로 문을 연 선문이다.
실상사는 창건 배경부터가 불의에 항거한 사회운동이며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참여정신에 있는 듯하다. 그런 역사가 인드라망을 강조하게 되고 수경스님이 삼보일배에 앞장서도록 한 배경이 된 듯하다.
지리산을 들어서는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마천 방면으로 가다보면 만수천(萬壽川)변을 따르게 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고개를 동쪽을 돌리면 손끝 대신 눈 끝에 천왕봉이 와 닿는다. 그 아래로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 보광전 우측 뚝 떨어진 곳에 약사전이 있다. |
ⓒ 임윤수 |
우리나라의 사찰 대부분은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천왕봉을 어머니의 가슴이라고 한다면 실상사가 있는 들판은 어머니가 두른 행주치마의 가운데쯤에 해당한다.
뭔가를 따뜻하게 보관하고자 할 때 어머니들은 행주치마 가운데 그것을 싸서 옮겼다. 행주치마의 가운데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며 사랑의 자리이다. 지리산의 기가 머금고 혈이 맺히는 그 자리에 실상사가 있다.
실상사는 서기 828년인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에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서 유학하며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을 배운 뒤 귀국하여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니다 현재의 터에 정착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 약사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거무튀튀한 색깔에 투박한 형상으로 농사꾼 부모님처럼 푸근한 느낌을 준다. 지리산의 기가 일본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땅바닥에 그냥 모셔진 부처님이란다. |
ⓒ 임윤수 |
실상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화재에 의한 전소와 중수 복원이 반복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6·25 때도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말못할 수난을 겪었지만 다행스럽게 사찰이 전화되는 등의 불상사는 없었다고 한다.
실상사의 호국정신은 선종의 출현이 그러하고 인드라망의 기본이 그러하듯 민족의 암울한 시기였던 일제침략시기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약사전을 지키고 있는 보살님의 안내에서 들을 수 있다.
약사전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령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 경내에 있는 소나무 사이로 보광전과 약사전 그리고 명부전이 보인다. |
ⓒ 임윤수 |
스님들과 일반인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가고 있다.
만수천 다리를 건너 논두렁 같은 진입로를 따라 걷다보면 일주문 없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정면에 석등과 양쪽에 선 석탑이 보이고 뒤로 고색창연한 본전이 보이는데 이 본전은 보광전이다.
보광전 우측 저만치에 또 하나의 전각이 있으니 이가 바로 약사전이다. 약사전과 보광전 중간쯤에 직각으로 배치된 전각은 명부전(지장전)이다.
▲ 맞배지붕 형태의 오래된 건물이 시선을 편안하게 해 준다. |
ⓒ 임윤수 |
실상사가 귀족과 왕실에 결탁하여 타락한 교종불교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선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친근한 모습의 불상이 제격에 어울릴 듯 하다. 대개의 불상들은 높은 좌대에 모셔진 것이 일반이지만 약사여래 불상은 그렇지 않다. 백두대간의 좋은 기가 일본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맨 바닥에 꾹 눌러앉아 계신 모습이다.
천왕문을 들어선 우측 바로 앞에는 범종각이 있으며 보광전 좌측엔 커다란 소나무가 있고 그 뒤쪽으로 칠성각도 있다.
경내 좌측으로 요사채가 있으며 요사채와 뒷간사이를 따라 올라가면 연꽃 가득한 방죽이 나온다. 그곳에서 몇 걸음 더 걷게되면 극락전으로 들어서게 되며 주변에는 이런저런 보물들이 즐비하다.
▲ 연지를 지나 찾게되는 극락전은 작고 아담하다. 극락전 주변은 온통 보고(寶庫)다. |
ⓒ 임윤수 |
요즘 실상사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은 '생명공동체' 아닌가 모르겠다. 생명공동체란 '일체중생의 평화'를 달리 표현한 것이며 실천이리라. 실상사에는 다른 곳에서 '해우소'로 표기한 화장실을 알리는 '뒷간'이란 푯말도 볼 수 있다.
뒷간은 단순히 생리적 배설만을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다. 뒷간이란 농약과 화학비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생명의 먹거리를 키워내는 소중한 거름이 만들어지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쌀을 비롯한 온갖 채소들은 똥과 오줌이 형태를 달리 한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냄새가 나지만 땅을 살리고 먹거리를 풍부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똥부터 대접하자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깨끗해 보이지만 하천과 강을 오염시키는 수세식 화장실을 거부하고 냄새 퀴퀴하지만 내면적 삶을 풍부하게 해줄 뒷간을 고집하는 그 정신이 바로 선문의 자존심이며 실천인 듯하다.
▲ 재래식 화장실인 실상사 뒷간의 모습으로, 실상사에서는 이곳에서 거름을 생산하여 논과 밭에 뿌려줌으로 먹거리로 돌려 받는다. |
ⓒ 임윤수 |
실상사 여기저기에 산재한 십수 점의 보물과 유형문화재들이 실상사의 오랜 역사를 고증하고 있는 듯하다.
아리랑고을 정선에 모셔진 부처님 진신사리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이며 감동의 노래다. 아리랑 속에는 충절의 혼이 숨어 있고 민족의 애환이 담겨있다. 아리랑엔 사랑이 배어있고 조혼한 여인네의 잠 못 이루는 뜨거운 갈망과 삶의 무상함이 있다. 그리고 이별의 서러움과 기다림의 애절함도 녹아있다.
이곳 저곳에서 불리는 지역별 몇몇 아리랑이 있지만 정선아이랑 만큼 민족의 가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서민의 혀끝에 똬리를 튼 아리랑도 흔치 않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인 조선초기부터 불리기 시작한 정선아리랑은 노랫말만도 15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로 넘기는 그 1500여 가지나 되는 노랫말 속에는 인간사 모든 것이 녹아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가냘픈 다리에 해진 모시적삼 위로 드러난 어깨에 산더미 같은 짐이 얹혀진 지게를 지고 휘청휘청 걷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아리랑고개마을 정선엘 가면 한국 5대 적멸보궁중의 하나인 정암사가 있다.
정선과 이웃한 태백은 탄광지역이다. 한 때는, 비록 막장에 목숨을 걸고 곡괭이 질에 손바닥에 두툼한 굳은살이 박히긴 하였지만 주막집 정도에선 흥청거릴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초 신군부의 출현과 함께 발생한 소위 '사북사태' 이후 태백의 경기는 줄곧 곤두박질이다.
▲ 좋은 산사엔 반드시 좋은 물이 있다. 적멸보궁과 진신사리가 봉안된 수마노탑을 가기 위해서는 이 계곡의 물을 건너야 한다. 속세의 근심걱정 다 씻겨줄 듯 맑은 물이 힘차게 흐른다. |
ⓒ 임윤수 |
그런 태백에서 하얗다 못해 새하얀 뭔가를 보았다. 그때 태백에서 보았던, 등교길 여고생의 교복에 달려있는 흰색 카라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사방천지 까만 바탕에 백색 점 하나 찍어놓은 듯 그렇게 선명한 흰색을 태백에서 보았었다.
그런 태백엘 25년만에 다시 찾았다. 산천이 두 번하고도 반쯤은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니 바뀐 것이 당연하겠지만 마음에 그리던 그런 모습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야트막한 지붕에 즐비했던 판자집들은 오간 데 없고 반듯반듯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에 밤이면 반짝거릴 간판들이 즐비하다.
이쯤에서 흉같은 고백을 해야 할 듯하다. 사람에 따라 목적지를 찾아가는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이를 두고 길눈이 밝다고 하거나 길눈이 어둡다고 한다. 그런데 아예 길맹이나 길치로 불리는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 필자가 여기에 속한다.
대전서 정암사를 가는 최적코스는 대전을 출발하여 충주와 제천 그리고 영월을 경유하여 찾아가는 방법으로 넉넉잡아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이번에 정암사를 찾아가며 필자는 대구 금호인터체인지를 거쳐 영주와 봉화 그리고 태백을 지나는 6시간의 헤매임 끝에 정암사엘 도착하였다.
▲ 수마노탑으로 가는 가파른 오름길은 갈지(之)자로 만들어 경사를 완만하게 하였고 바닦도 돌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
ⓒ 임윤수 |
사북쪽으로 향하는 도로 옆에는 한때 광부와 그 식솔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을 공동주택이 폐가상태로 을씨년스럽게 버티고 있다. 막장의 고단함과 가족들의 따스함이 함께 섞여 애환의 곡조 아리랑을 불렀을지도 모를 저 공간이 이젠 흉흉한 시대의 잔재로 남아있는 듯하다.
뻥 뚫린 터널을 빠져 나와 내리막길을 조금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그 삼거리에서 좌회전 해 철도 태백선과 나란한 414번 지방도로를 따라 오리쯤 들어서면 그곳에 정암사가 있다.
정암사는 경남 양산에 있는 영축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설악산에 있는 봉정암과 함께 자장율사께서 모셔온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5대 적멸보궁'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적멸(寂滅)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본래의 마음자리인 고요의 상태로 돌아감을 말한다고 한다. 법신인 부처의 세계에서 육신으로 인한 마지막 장애까지 훌훌 털어 버리고 영원한 진리 그 자체로 돌아가면 곧 적멸인 것이다. 적멸보궁이란 그 깨달음의 성인인 부처의 뼈에서 나온 사리를 모시는 보배로운 궁전이란 뜻이다.
▲ 칠보중의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은 탑으로 이 안에 부처님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칠보중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거만하지 않게 수수한 빛깔로 가슴에 와 닿는다. 바람이 불면 뗑그렁거릴 귀퉁이의 풍경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
ⓒ 임윤수 |
일주문을 들어서 좌측으로 한길이 훨씬 넘는 높이에 길다란 건물이 있고 정면 우측으로 범종각이 보인다. 범종각을 지나 극락교를 건너게 되면 정암사의 주전이라 할 수 있는 '적멸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건물을 끼고 좌측으로 돌게 되면 정면에 관음전이 있고 그 뒤쪽 언덕으로 휘굽어진 소나무와 함께 삼성각과 자장각이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정암사의 사리탑은 극락교 위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 비탈진 언덕길을 6∼7분쯤 올라야 한다. 부처님이 남기신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울창한 숲으로 시작되나 멀지 않게 시작되는 급경사의 오르막길은 지그재그 형태로 정돈되어 조금만 여유있는 마음으로 걷는다면 편안하게 오를 수 있게 되어있다. 오름길 내내 길을 만든 이의 정성이 눈에 띄도록 단정한 돌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져 고궁의 돌담길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그런 길이다.
▲ 이 주변 어딘가에 자장율사가 신통으로 감춰놓은 신물들이 있을 것이다. 불심을 깊게 하면 보일지도 모른다니 주변을 잘 둘러봐도 좋을듯하다. 아래쪽으로 진신사리를 모셔온 자장율사 영정이 모셔진 자장각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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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석이란 보석의 하나로 원석의 모양이 말의 뇌수를 닮았다 하여 '마노’라고 불리며 수정류와 같은 석영 광물로 전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은·유리·파리·산호·마노·진주'를 일곱 개의 보석 즉 칠보라고 하며 이 보석들은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칠보중의 하나를 몸에 지니면 재앙을 예방한다 하여 옛부터 장신구나 패물, 노리개로 세공되어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이런 칠보중의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아올린 정암사 수마노탑은 그 자체가 보물의 탑이며 정성의 결정체인 셈이다.
보석인 마노석으로 쌓아올린 탑에 '수(水)'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수마노탑은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하는데, 마노 앞의 수(水) 자는 자장의 불심에 감화된 서해 용왕이 마노석을 동해 울진포를 지나 이곳까지 무사히 실어다주었기에 ‘물길을 따라온 돌’이라 하여 덧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전란과 천재가 없는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불사리를 모시며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에 탑이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을 알려주는 설화가 있다.
▲ 극락교를 건너면 청색기와에 단아한 형태의 적멸보궁이 있다. |
ⓒ 임윤수 |
그런 연유로 정암사를 한때는 갈래사(葛來寺=칡넝쿨에서 온 절)라 하였다고도 한다. 지금도 고한에는 갈래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 하갈래라는 지명이 있어 모든 것이 허구만은 아님을 예상케 한다.
본래 자장율사께서는 당나라에서 귀국하며 석가세존의 사리, 치아, 염주, 불장주(佛掌珠), 패엽경(貝葉經)등 석가의 신물(信物)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 신물들은 ‘세 줄기의 칡이 서린 곳’에 나누어 각각 금탑과 은탑 그리고 수마노탑에 모셨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후세 중생들의 탐욕을 우려해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는 금탑과 은탑을 볼 수 없게 신통을 부려 현재 금탑과 은탑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 한다. 정암사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으니 그간의 어디에 금탑과 은탑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부처님을 닮아 가면 자장율사께서 신통으로 감추어 놓은 모든 신물들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 여느 법당들과는 달리 적멸궁 안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황금색 방석만 놓여있고 뒤쪽의 수마노탑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듯 하다. |
ⓒ 임윤수 |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 하여 정암사(淨岩寺)라는 이름이 붙였진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645년 선덕여왕 14년에 계곡 깊고 산이 높아 산세 웅장한 태백산 서쪽 기슭인 현재의 터에 창건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제4권 자장정율(慈藏定律)조에는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년(645), 이곳에 석남원을 세웠고, 그 석남원이 지금의 정암사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얽힌 설화가 실려있지만 언제 무었 때문에 정암사로 바뀌었는지 그 밖의 세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신라 28대 진덕여왕 때 대국통(大國統)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경주를 떠나 강릉에 수다사(水多寺:지금 평창에 빈터가 있음)를 세우고 살았다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내일 너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하였다.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니 문수보살이 다시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한다.
▲ 적멸보궁이 있는 극락교 안쪽에서 바라본 정암사 전경은 정갈한 느낌이다. 왼쪽의 건물이 종무소겸 공양간이며 정면에 보이는 전각이 관음전이다. 그리고 언덕위로 좌측에 삼성각이 우측에 자장각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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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 들고와 '자장을 보러 왔다'고 하였다. 스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귀에 거슬렸던 자장의 시중이 호통을 치니,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했다.
자장은 이 말을 전해 들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늙은이를 쫓아버리게 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아상(我相,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요' 하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곧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고 그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바로 그 늙은이가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그 뒤를 곧바로 쫓았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 가버린 뒤였다. 이후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달 뒤 다시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하고 당부하였다 한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라고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죽은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은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나의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정암사는 석가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기도 하지만 자장율사가 일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 극락교를 건너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목엔 자장율사가 사용하던 주장자를 꽂아놓았다는 주목이 한 그루 있다. 고목이 되어버린 외피의 주목은 천년쯤은 묵었을 자장율사의 손때처럼 고색이 완연하다. 그런 고목 속에 청년색 뚜렷히 자라는 신목의 가지들은 고목의 틈새를 헤집고 무성히 자라고 있지만 결코 고목의 세월무게를 감하려는 경솔함은 보이지 않는다. |
ⓒ 임윤수 |
고목이 되어버린 외피의 주목은 천년쯤은 묵었을 자장율사의 손때처럼 고색이 완연하다. 그런 고목 속에 청년색 뚜렷하며 그 굵기가 족히 서너 움큼이 될 신목이 자라고 있다. 신목의 가지들은 고목의 틈새를 헤집고 무성히 자라고 있지만 결코 고목의 세월무게를 감하려는 경솔함은 보이지 않는다.
나무의 꼭대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도사나 고승들이 짚고 다니던 전형적인 지팡이 끝 부분이다. 틀어지고 꼬였으며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그 주장자를 들고 금세 자장율사라도 출현할 듯하다.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590∼658)는 김씨의 성을 가졌으며 선종랑(善宗郞)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자장율사의 아버지 무림(茂林)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한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 초파일에 아들 자장을 낳았다고 하니 자장율사는 태생부터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듯하다.
한국불교의 도입과 융성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자장율사의 마지막 숨결은 바로 태백산 정암사에 그가 모셔온 진신사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다.
▲ 자장율사 주장자 주목 근처에 자라고 있는 어린 주목들이 가을을 알리려는 듯 빨간 열매를 맺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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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암사는 1717년 숙종 39년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다. 1770년과 1874년 그리고 지난 1972년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탑의 균열이 다시 발견되어 1995년 다시 보수공사를 시행한 바 있다.
정암사를 찾던 날도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종무소에서 주지스님을 찾으니 정광스님께선 추석 채비라도 하시는지 삼성각 주변에서 잡풀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하던 손길 기꺼이 멈추고 마당까지 내려오셨다. 그리곤 얼른 한 말씀하신다. 비가 오기 전에 얼른 사진이나 찍으라고. 그 말씀 한마디가 베풂이며 헤아림이었다.
등성을 올라 수마노탑을 참배하고 전각 이곳 저곳을 돌아 다시 주지스님을 찾으니 속가의 형님같은 미소를 건네주신다. 속인들에게 들려줄 말씀을 청하였으나 '나이도 어린데 무슨 할말이 있겠느냐' 하시면 그냥 웃고만 계신다.
스님께선 특별한 말씀을 해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속세의 예와 범절을 예우하시는 겸손함으로 묵언의 가르침을 주셨다. 빗길에 차 조심하라며 흔들어 주시던 스님의 손 인사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뚜벅뚜벅 그래 뚜벅뚜벅 걷지 않으면 봉정암엔 갈 수가 없다. 젊다고, 힘이 있다고 잰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거드름을 피우다가는 낭패하기 딱 좋은 그런 곳이 봉정암을 찾아가는 길이다.
봉정암을 찾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행이며 구도의 길인 듯하다. 평탄치 않은 산길을 걸머메고 둘러메고 꾸부렁꾸부렁 찾아가는 노보살님들의 행보에서 부처님을 찾는 불자들의 진지함이 뚝뚝 묻어난다.
봉정암은 지난 기사에 소개한 태백산 정암사와 함께 한국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로 국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보궁이며 지리산 법계사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세워진 사찰로 고도 1244m인 설악산 마등령에 위치해 있다.
어찌 보면 역사의 아픔이며 부끄러움이기도한, 전직 대통령이 유배 아닌 유배를 함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백담사에서 6∼8시간은 족히 올라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한 번쯤 백담계곡을 다녀 온 사람이라면 한국의 계곡을 말할 때 어김없이 아름다움과 깨끗함의 첫 번째로 주장할 만한 곳으로 생각된다. 백 개나 되는 소(웅덩이)가 있기에 백담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유래에서 알 수 있듯 백담계곡은 크고 작은 웅덩이의 연속이다.
▲ 봉황이 알을 풀은 형상의 산세에 봉정암이 있다. 사진의 출입문은 적멸보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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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계곡을 찾았던 사람 중에 그 맑은 물과 주변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자아내지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듯하다. 그만큼 백담계곡은 아름답고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온통 바위뿐인 계곡에 움푹 패인 웅덩이에 고이고 넘치며 흐르는 물은 맑다못해 서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하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있는 매표소로부터 그렇게 맑고 경이로운 계곡을 7km쯤은 들어가야 백담사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봉정암을 찾아가는 구도의 고행은 시작된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대략 6시간에서 8시간쯤 걸리는 산행길이다. 처음부터 가파르고 험한 길은 아니지만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길이며 지루하도록 인내심을 요구하는 그런 길이다.
백담사에서 시작되어 봉정암을 찾아가는 계곡 이곳 저곳은 이미 가을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디서 시작되었나 알 수 없지만 고이고 넘치는 흐름을 반복하며 형성되었을 물줄기들은 수십 길 낭떠러지를 만나도 자신을 낮추기 위한 추락의 위기에 촌음의 주저함이나 저항 없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속세의 오욕칠정은 이렇게 씻는 것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쪼개지고 부서진 물줄기는 작은 물방울 되어 백파(白波)로 비쳐진다. 백 개가 훨씬 넘을 크고 작은 폭포와 낙수에서 보여주는 백파의 소리 없는 부서짐과 발광(發光)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심오한 법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찾는 불자의 마음가짐을 채근해 주는 가르침으로 보인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리탑엘 가기 위해서는 이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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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외길은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생이 그러하듯 봉정암을 찾는 그 길은 철저하게 혼자 걸어야 할만큼 좁다. 성급한 마음에 서두르면 앞사람을 길옆으로 밀쳐야하며 자칫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설사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해도 봉정암을 오르는 길은 앞사람을 밀치고 질서를 어지럽힐 만큼 녹록한 그런 길은 아니다. 울퉁불퉁한 바윗길에 건너야 할 계곡이 몇몇인데 그런 당돌함이 언제고 용납되지는 않을 듯하다.
서두르는 발걸음엔 반드시 몰아쉬는 숨이 따르게 마련이고 몰아쉰 거친 숨은 결국 오름을 중단해야 하는 아픔으로 또 다른 형태의 가르침을 줄 듯하다. 가끔은 흩어지고 무형인 듯 하지만 봉정암엘 오르는 산길은 여느 곳보다 더더욱 철저한 질서를 요구하고 순리를 강조한다. 그리고 어떠한 경솔함은 허락하지 않을 듯하다.
부득불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면 앞사람에 마음 낮추어 양해를 구하거나 이따금 만나게 되는, 앞지르기가 가능한 공간까지 뒤따르는 것을 감수하여야 한다. 봉정암을 오르는 길에서 배울 수 있는 첫 번째는 바로 순리와 질서 그리고 자기 낮춤인 듯 하다.
▲ 사리탑에 오르는 길은 지금껏 험난했던 길과는 달리 잘 포장되어 있다. 이곳에서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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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댓 시간 여여한 마음으로 계곡 따라 산길을 오르다 보면 절벽처럼 앞을 막고서는 급경사의 오름길을 만나니 이를 사람들은 '깔딱고개'라 부른다.
'깔딱고개'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정말 숨 넘어 갈 듯 가파르고 힘들게 하는 오름길이다. 이쯤까지도 속세의 오만방자함을 간직한 사람이 있다면 모두 털고 무아의 마음으로 부처님진신사리에 참배하라는 마지막 관문인 듯 하다.
200여m 되는 깔딱고개를 올라서면 감추어진 듯 보이지 않던 봉정암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쯤에서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을 한 번쯤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 힘들다고 한다. 숨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하고 행복감이 넘쳐 흐른다.
그 기쁨과 행복감은 몇 몇 시간 동안 걸음에서 얻은 성취감이며 환희심이다. 걸음마다 쏟아 넣은 기도와 염원의 결정체가 얼굴에 맺힌 것이다.
▲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5층 석탑이다. 여느 절들의 탑처럼 기단석 위에 탑신이 있지 않고 설악산전체를 기단으로 하여 그 위에 우뚝 솟아있다. 바위에 탑이 솟아 둘로 나뉜 듯 하나 불심으로 바라보면 둘이 아닌 하나의 커다란 탑체이며 불신(佛身)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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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이름을 '봉정암'이라고 한 것은 신라 애장왕 때 조사 봉정이 이곳에서 수도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모실 곳을 찾던 중 꿈속에 나타난 봉황새를 쫓아 산 넘고 물 넘어 찾아든 이곳에서 봉황이 부처님처럼 생긴 바위 이마 부위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자장율사가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부처님 진신사리와 금란사를 가지고 고국인 신라로 돌아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을 것은 너무 당연하다.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진신사리를 모셔온 자장율사는 사리의 일부를 양산 통도사 보궁에 봉안하고 다른 길지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진신사리를 모실 적지를 찾아 이곳 저곳을 순례하며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던 어느날 스님의 꿈에 봉황이 나타났다고 한다. 범상치 않게 여긴 스님이 몇 날 며칠이고 봉황을 쫓았더니 드디어 어떤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님이 봉우리로 올라가자 봉황은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봉황이 자취를 감춘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니 바위는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현재 그 바위를 사람들은 '불두암'이라 부르고 있다.
스님을 이곳까지 인도한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고, 부처님처럼 생긴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지세를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온 산천을 다 헤매어도 더 이상의 승지는 없을 것 같기에 자장율사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할 곳임을 알고 봉황이 인도한 뜻을 따라 스님께서 부처님 형상을 한 그 바위에 불뇌사리를 봉안하며 5층 사리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으니 바로 현재의 봉정암으로 그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이다.
▲ 봉정암 적멸보궁 실내의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유리창으로 언덕 위에 있는 진신사리탑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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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에 가면 적멸보궁과 산신각 그리고 범종루 외에는 별다른 전각이 보이지 않는다. 큼지막한 건물들 대부분은 기도를 위해 봉정암을 찾는 불자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며 산행을 하다 묵어야 할 등산객에게 베풀어지는 쉼의 공간이며 자비의 안락처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성지 적멸보궁을 찾아 108배를 올리며 서원하며 기도를 올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지를 찾기 전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라 생각된다.
불한당이 아니라면 봉정암까지 오르다보면 누구든 성지에 참배할 마음의 저절로 준비될 것 같다. 아픈 다리 달래고 흐르는 땀 씻어내며 오르고 오르다 보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맞게 되는 환희심이 바로 마음의 준비이며 걸음걸음으로 엮어낸 도착이 예복이며 염불이다.
▲ 틀어 앉은 봉황 형상의 바위 아래에 산신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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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에 예 올리고 굽어보는 산하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어느 누구의 가슴이라 다 담을 수 있겠는가. 흐르는 듯 멈춘 듯, 솟은 듯 숨죽인 듯, 쉬는 듯 꿈틀대듯 맺고 이어진 주변산세가 마치 용의 모습이다. 용(龍)의 이빨(牙)처럼 생겼다해서 용아릉(龍牙稜)이라 불리는 능선의 바위를 기단으로 하여 5층 석탑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리탑이다.
대개의 탑들은 바탕이 되는 기단석이 있고 그 위에 탑이 있다. 그러나 봉정암의 사리탑은 설악산 전체를 기단으로 하여 그 위에 우뚝 솟아 있다. 바위에 탑이 솟아 둘로 나뉜 듯 하나 불심으로 바라보면 둘이 아닌 하나의 커다란 탑체이며 불신(佛身)으로 보인다.
사리탑과 산신각엘 들려 참배를 하고 종무소엘 들려 주지스님의 친견을 요청하니 쾌히 승낙해 주신다.
햇살 좋고 풍광 좋은 산사에서 스님께 한 말씀 청해 듣기로 작정을 하였다. 육신의 타는 갈증을 청량수로 달래듯 마음에서 일고있는 온갖 번뇌와 갈등을 해소 시켜줄 심수(心水)를 동냥 받고 싶었다.
▲ 적멸보궁 앞쪽으로 범종루가 있다. 산하에 울려 퍼질 범종소리가 마음을 가다듬게 할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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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히 인사드리고 어렵다는 경제, 매끄럽지 못한 정치, 결코 평온하지 않은 사회에 대하여 한 말씀 해주실 것을 청하니 '속세와 연을 끊고 사시기에 별 할말이 없다'하신다. 다시 한 번 말씀을 청하니 '위기이자 기회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어렵고 불안하다 하지만 어려움과 위기를 계기로 모두가 심기일전하면 보다 발전적이며 보다 행복하고 질 높은 사회구현을 위한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위기를 기회로 삼기 위한 전제로 몇 가지를 말씀해 주신다. 다름 아닌 '믿음과 사랑 그리고 자비의 마음이 필요하다'고 하신다.
'사랑이 전제된 믿음과 믿음이 바탕 되는 사랑을 나누게 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신다. '이해와 존중이 밑바탕 되는 사랑이 연기되면 서로를 믿게 되며 그 믿는 것만큼 큰 힘도 재기의 원동력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믿는 것만큼 큰 믿음도 없으며 그 믿음에서 자비가 나온다'고 하신다. '그런 사랑과 자비로 시작되는 인연이야말로 참 좋은 인연이며 상생의 관계로 서로에게 베품이 되고 얻고자 하는 구도의 길이 된다'고 하신다.
▲ 누구의 가슴에 이런 웅장함과 섬세함을 담을 수 있겠는가. 걷지 않으면 갈 수 없고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환희심이 봉정암엔 사방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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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렵고,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은 종교와 사회적 신분에 개의치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냥 봉정암을 찾아오기만 하라'고 하신다. '속세의 화려한 네온사인처럼 휘황찬란한 불빛도 없고 철렁대는 물침대는 없어도 마음 편히 자신을 돌아볼 휴식의 공간이 있고, 살며 짊어진 삿된 욕심의 짐을 덜어버릴 자아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봉정암에는 쉴 수 있는 공간도 있고 야박하게 돈을 내지 않아도 마실 수 있는 커피도 제공되고 있다'며 불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곳을 찾아 마음의 위안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넓은 말씀도 아끼지 않으셨다.
스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개운해 진다. 혼탁한 눈 가람이 말끔하게 벗어지고 희망의 서광이 보이는 듯 하다. 그래, 위기라고 하지만 기회일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 주지이신 정념스님께서는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이 전제되는 믿음과 믿음이 바탕되는 사랑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하신다. 마음이 불편하고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종교에 개의치 말고 봉정암에 들려 좋은 산하를 바라보며 평심을 찾아보라고 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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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으로 찾아가는 그 길은 속세의 모든 근심을 덜어줄 것이며 몸에 배인 자만과 오만 따위는 다 씻어 줄게 분명하다. 모든 것 하나하나 덜어내며 떨구며 뚜벅뚜벅 걸어 봉정암 사리탑을 친견하고 걸어 온 계곡을 뒤돌아보면 가슴에 밀려오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극기의 환희심이며 자신을 돌아본 반성의 환희심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가슴에 담아진 부처님의 자비에 대한 불심의 환희심과 얻어진 자비심이다.
올 가을, 정말 웅장한 대 자연의 풍경화를 보며 마음을 살찌우고 싶다면 몇 시간 발 품 파는 수고쯤은 아끼지 말고 봉정암엘 들리라고 권하고 싶다. 무의식중 내딛는 그 발걸음이 염불되고 108배 되어 성지 봉정암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덤으로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영혼까지도 달콤하게 해 주리라 확신한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19)-설악산 오세암
5세 동자의 순진무구함이 서린 암자
살며 살아가며 겪게되는 온갖 풍상은 심신을 피곤하게 하고 자연스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훌쩍 먹어버린 나이에 아랑곳없이 가끔은 동심의 아가가 되어 따뜻하게 기억되는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파에 지친 몸과 마음을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보듬어 줄 그런 휴식공간과 여유가 필요하다면 설악산 오세암(五歲菴)엘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모시적삼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 같은 백의의 관음보살이 있고 동색의 무구함으로 심신을 넉넉하게 해 줄 오세(五歲)동자가 그곳에 있다.
'어린이는 곧 어른의 스승'이며 '어머니의 사랑은 가이없다'란 말들을 한다.
과연 어린이의 무엇이 어른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며 풍부한 경험에서 터득한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무엇을 배우란 말인가. 출세욕과 명예욕 그리고 재물욕과 같이 잡다한 허욕에 사로잡혀 권모술수에 익숙한 어른들의 눈에는 아가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가장 큰 가르침이며 번뇌로부터 해탈케 할 구원의 손길임을 알리 없다.
▲ 멀리보이는 기암의 산하가 오세암을 향하여 다가서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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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들은 배고프면 밥 달라 보채고 더러운 것을 보면 거짓없이 더럽다 말한다. 예쁜 것을 보면 예쁘다 말하고 못생긴 것을 보면 못생겼다 말하지 상대방의 비위나 맞추려 거짓으로 예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이런 솔직함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 순수함은 어른들이 잃어버린 가장 큰 자산이며 꼭 되찾고 다시 배워야 할 덕목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러기에 어린이의 동심이야말로 부처님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많고 많은 사랑 중에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만큼 위대하며 무조건적 사랑은 없다. 그리고 남편을 향한 내조만큼 헌신적인 사랑도 없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한국 어머니의 사랑과 내조는 가이 없어 으뜸중의 으뜸이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과 아가의 무구함을 근간으로 백담계곡에 도량을 이루고 있는 암자가 바로 오세암(五歲庵)이다. 백담사를 지나 계곡으로 들어서면 세 개의 암자가 있다. 제일 먼저 만나는 암자가 영시암이며 이곳에서 봉정암과 오세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뉘어진다.
▲ 오세암이란 편액이 마음을 맑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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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봉정암이며 영시암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오세암으로 가는 길이 된다. 어찌 되었던 조금 더 발품을 팔면, 봉정암을 들렸다 오세암으로 오던, 오세암을 들려 봉정암으로 가던 한번의 산행으로 영험 가득한 심산유곡의 세 암자를 전부 참배할 수 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되며 산책로처럼 평탄한 산행 길이다. 영시암에서 곧장 봉정암으로 오르는 행로는 상당히 완만하며 순탄하다. 계곡과 함께 하는 그런 산책로 같은 길이 계속되다 봉정암에 거의 다가가서야 급경사가 시작되는 그런 코스다. 그러나 오세암을 들려 봉정암으로 가는 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산행길로 정말 만만치 않은 코스가 된다.
필자는 당일에 봉정암엘 먼저 들려 참배하고 하산길에 오세암엘 들리는 좀 팍팍한 일정으로 산행을 강행하였다.
봉정암 오층석탑(사리탑) 우측으로 조금 올라 우뚝 솟은 바위에 오르니 설악의 기암괴석들이 발아래 도열하니 '와!'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봉정암엘 들리는 사람들은 이곳엘 꼭 올라보라고 권하고 싶다. 힘에 겨워 몇 걸음 더 걷는 여유를 잃게 된다면 눈앞에 펼쳐질 장관도 함께 잃게되니 꼭 한번 서보라고 권하고싶다.
▲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한 오세암 전각들이 영험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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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속초와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기암의 설악 군봉들이 점점 가까워지며 한 폭의 웅장한 산수화로 감명의 울렁임을 만든다. 자연과 조물주의 걸작이라 할 설악의 유곡들이 발아래 즐비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성지에 오르니 주변의 풍광들에 질기도록 함께 하던 마음속 번뇌의 티끌들조차 절로 사그라지는 듯하다.
우뚝한 기암을 양옆으로 고행의 흔적처럼 생겨 난 하산로를 따르면 오세암엘 갈 수 있다. 말이 하산길이지 절벽과 다름없다. 두발 가진 인간이지만 이 절벽을 오를 땐 네발 가진 짐승이 되지 않으면 안될 듯 싶다. 앞발이 된 두 손으로 움켜쥔 코앞의 절벽은 겨우 한 두 뼘 정도로 눈에 바싹 와 닿는다.
이렇게 이어지는 만만치 않은 하산길은 내내 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완급이 반복되는 이런 하산길엔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몇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렇게 3시간쯤 내려오니 울창한 나무 사이로 청기와의 오세암이 보인다.
오세암엔 여느 절들과 달리 금빛 찬란한 불상이 보이지 않는다. <천진관음보전>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전각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백의(白衣)의 관음보살상이 있고 안쪽으로 아기동자상이 있다.
▲ 백의의 관음보살상에서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자애로움이 느껴진다. |
ⓒ 임윤수 |
보전에 들려 참배하고 종무소엘 들려 스님을 찾으니 영운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여염집 사랑방처럼 아담한 종무소에서 차 한잔을 건네시며 오세암의 창건사와 설화를 이야기하듯 들려 주신다.
오세암은 644년, 신라 선덕여왕 13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장 율사가 절을 창건하고 관음보살이 언제나 상주하는 도량임을 알리기 위해 절 이름을 관음암(觀音庵)이라 부르니 오늘날 오세암이 시작된 것이라 한다.
관음암이라 불리던 절 이름이 오세암으로 바뀐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스님이 중건한 다음부터라 한다. 절 이름이 관음암에서 오세암으로 바뀐 배경에는 정말 전설 같은, 5세 동자에 얽힌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있으며 중창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관음암에서 수행 중이던 설정스님은 형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아가 된 조카를 암자로 데려와 기르게 되었다. 아이의 나이가 5살 되던 해, 겨울이 막 시작되는 10월 하순 어느 날 스님은 산사의 월동준비로 양양의 물치 장터를 다녀오기 위하여 암자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 순진 무구함으로 성불한 5세동자상이 마음을 혼탁한 마음을 맑게 해 줄듯하다. |
ⓒ 임윤수 |
오세암에서 양양의 물치 장터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다녀와도 족히 이틀은 걸리는 장도였다. 그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다섯 살 짜리 조카를 위하여 스님은 그 기간 동안 아이가 먹을 만큼 밥을 짖고 반찬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스님은 아이를 불러 무릎에 앉히고 법당 안의 관음보살을 가리키며, "내가 다녀오는 동안 이 밥을 먹고 있으며 저분을 어머니처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 불러라 '그러면 저 분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라고 일렀다.
5살의 어린 조카에게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설정스님은 관음암을 내려와 물치 장에 들려 겨우살이를 포함하여 이 것 저 것을 구입한 후 신흥사에 들려 하루를 묵게 되었다.
스님은 다음날 조카가 기다리고 있을 관음암으로 돌아가려 일찍 일어났으나 밤샌 폭설로 엄청나게 쌓인 눈 때문에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스님은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머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스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야속한 눈은 그 뒤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 쌓여만 갔다.
▲ 여신도나 여자등산객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꽤나 넉넉해 보인다. |
ⓒ 임윤수 |
눈에 생기는 발자국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혼자 있는 조카에 대한 걱정으로 스님의 애간장은 점점 녹아 내릴 듯 간절하다 못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지만 워낙 많이 쌓인 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엄동설한 폭설에 혼자 남겨둔 조카가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만이 화두처럼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스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부처님께 조카의 무사를 서원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일 뿐이었다.
이렇게 고통스런 몇 며칠을 보내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관음암으로 돌아 가려하니 사중의 모든 스님들이 말렸다. '이러 폭설에 길을 나서면 죽을 게 뻔한데 왜 가려고 하느냐'며 적극 만류하여 결국 스님은 눈길이 트일 때까지 신흥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도 무정한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눈이 녹아 산길이 트이게 되었다.
서둘러 바랑을 챙긴 스님은 뜀박질을 하듯 달려 암자에 들어섰다. 암자에 들어서니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조카가 살아있다는 반가움에 스님은 어쩔 줄 몰라했으며 어찌된 것이냐고 물으니 조카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어머니가 언제나 찾아와서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라고 답을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환한 백의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창공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 갈증을 달래 줄 감로수가 넉넉하게 흐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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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 전에 큰절을 올리고 조카를 안아 보려 하자 품에 안기지도 않은 채 조카는 그대로 사그라져 승천을 하였다 한다. 나중에 살펴보니 법당 경상에 놓여 있던 책장이 스님이 집을 비운 딱 그만큼의 날짜만큼 찢겨져 나가있었다.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종이 한 장으로 그날 하루를 지내게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모든 것을 목격한 설정 스님은 다섯 살 어린 조카가 맑고 무구한 마음으로 삼촌인 스님이 시키는 대로 무념무상의 '관세음보살'을 계속하자 관음보살이 감응하고 그 가피로 영생불멸의 길로 접어든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5살 밖에 안된 동자였지만 그 순진 무구한 마음이 동자를 성불케 하였으며 이 도량에 관음보살의 영험이 있음을 길이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중건하고 절 이름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영운스님께서는 이런 설화를 들려주시면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오세암을 찾는다고 한다. 그 중에는 불자도 있으나 산행을 하다 잠시 들리거나 하루를 묵게되는 등산객의 경우도 많다고 한다.
산이 좋아 산을 찾으면서 자연의 현신인 산을 사랑할 줄 모르고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고 한다. 오세암이 불자에겐 기도처가 되고 산행에 지친 등산객에겐 구원의 공간이 되어 잠자리도 마련해 주고 먹거리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한다.
▲ 전각의 처마에 걸리듯 우뚝한 바위에서 설악의 기가 느껴진다. |
ⓒ 임윤수 |
상수원의 발원지라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에 오세암에선 비누와 샴푸 등의 화학세제를 쓰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스님들의 부탁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학제품을 펑펑 써가며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고 한다.
스님은 말씀하신다. 헝클어지고 겉으로 드러난 먼지나 땀 자국은 물로만 씻어도 충분하니 마음의 때나 열심히 씻으라고. 산세의 좋은 기와 명경수 같은 맑은 물에 세파에 찌들고 잡다한 욕심에 번득이던 마음이나 깨끗하게 씻으라 말씀하신다. 몰래 화학세제로 얼굴 닦고 머리감는 것은 마음에 또 하나의 업을 만들지만 조금 더러워 보여도 환경을 생각하며 화학세제를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닦는 선이라고 하신다.
도량에서 금하는 화학세제를 몰래몰래 사용하는 사람은 비록 얼굴이 깨끗해 보여도 영혼에서 악취가 나고 비록 얼굴이 거칠고 머리가 푸시시해도 화학세제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은 맑은 영혼에서 품어져 나오는 향기로운 사람 냄새가 날 것이라 하신다.
어렵고 힘이 들 때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크고 간절한 관음보살의 가피가 머물고 오세동자의 순진 무구함이 서린 오세암을 찾는 것도 좋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집에서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내력을 기르라고 하신다. 부처님께 지성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은 어머니의 내조력 같은 힘과 사랑이 되어 세파를 극복할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이라 하신다.
스님이 알려주시는 산 위에 우뚝한 불두암(佛頭岩)을 보니 다시금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이 만들어 낸 기암의 하나겠지만 뉘엿뉘엿 석양을 등지고 있는 바위는 영락없는 부처님 형상이기에 두 손을 합장케 한다.
▲ 오세암에서는 태양열집진기를 이용하여 최소한의 전기를 자급하고 있다. |
ⓒ 임윤수 |
스님으로부터 동화 같은 설화와 좋은 말씀을 듣다보니 산 그림자가 길어진다. 내려가겠노라 인사를 드리니 '어둔 밤길 조심하라' 하시며 사탕을 한 주먹 건네신다. 오세암엔 오세동자가 모셔진 탓에 불자들이 공양물로 사탕을 많이 올리기에 사탕은 항시 넉넉하다고 말씀하신다.
100리가 조금 못될 산길을 12시간에 걷다보니 여여한 마음으로 뚜벅뚜벅도 하였겠지만 그놈의 조급함을 버리지 못해 잰걸음을 놀리기도 한 듯하다.
마음이 혼잡해 지고 삶의 무게가 무겁다고 느껴지면 다시 찾으려한다. 그리고 오세동자의 맑은 눈으로 자아를 돌이켜 보고 싶다. 정말 방하착(放下着)하려 노력하느냐고.
금강산 일만 이천 봉 중 첫 번째 신선봉에 자리한 화암사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금강산이 정말로 일만 이천 봉이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나 가히 절경이라 할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시비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강산은 노래 가사에서나 불러보고 구전처럼 들려주는 옛 노인들의 산행기를 들으면서 그 빼어난 절경을 나름대로 상상해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 화암사로 들어서는 산문은 한적하다. |
ⓒ 임윤수 |
그러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면서 어느 노인의 독백처럼 '죽어서나 가볼 거'라고 생각하였던, 요원한 희망으로 남아있었던 그 금강산엘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금강산은 더 이상 꿈에만 그려야 하는 저쪽의 명산이 아니라 마음만 먹고 기회만 기다리면 갈 수 있는 국토 산하의 한 곳이 되었다.
금강산은 피붙이와 일가친척들이 이산가족이란 이름으로 헤어지고 그리워했던 세월의 무게만큼 진하게 배인 재회의 기쁨과 다시금 반복되는 생이별로 회한의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통한과 오열의 무대가 되고 있다. 타국으로, 제 3국으로 빙빙 돌거나 배를 타고 이국처럼 찾아가다 이젠 육로를 통하여 이웃집 찾아가듯 방문할 수 있는, 지척의 금강산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을 분단으로 잃어버린 국토의 상징이며 휴전선 북녘에 있는 절경의 무릉도원쯤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금강산은 이미 남쪽에도 있었고 남한에서 시작되었다.
▲ 왕관을 닮은 수바위엔 구멍이 있고 그 구멍에 대고 지팡이를 휘두르면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절 이름이 벼 화(禾)자에 바위 암(巖)자를 써 화암사(禾巖寺)가 되었다고 한다. |
ⓒ 임윤수 |
산 중의 산, 절경 중의 절경이며 일만이천 봉이 위용을 자랑한다는 금강산은 강원도 고성군에 발원한 신선봉에서 시작되니 이 신선봉이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첫 번째 봉우리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44번과 46번 국도를 따라가다 속초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시령을 넘어야 한다. 미시령을 넘다 보면 양측으로 장관처럼 펼쳐지는 산이 있으니 우측의 산이 설악산이며 좌측의 산들이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자락이다. 그러기에 금강산은 결코 휴전선 이북에만 있는 금기의 땅이었던 그 명산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보았고 디뎠던 그 산에서 시작된다.
미시령을 넘어 가는 길 좌측에 세로로 <金剛山禾巖寺>라 써진 커다란 바위의 이정표에서 화암사는 시작된다. 엄격하게 산명을 따르는 산사의 특성상 이곳부터가 분명 금강산임을 알 수 있다.
이정표를 따라 접어들면 한적한 산길로 들어선다. 차량을 이용하여 길을 따라 5분쯤 들어서다 보면 저만치 산 위에 우뚝한 바위가 보이니 그 바위가 화엄사라 불리던 절이름을 화암사로 바뀌게 한 전설을 가지고 있는 수암(秀岩)이다.
▲ 수바위에서 내려다본 화암사의 전경은 흐르는 물결처럼 자연스럽다. |
ⓒ 임윤수 |
화암사는 우리나라에 참회 불교를 정착시킨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에 의해 1천 2백여년 전인 769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하였던 진표율사는 남쪽에 위치한 화암사를 비롯하여 동쪽으로 발연사 그리고 서쪽에 장안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표율사가 수많은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하였기에 절 이름은 화엄사(華嚴寺)라 하였으며, 제자 1백명 중 31명이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얻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니 금강산이야말로 깨우침과 선의 길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12년,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이 종교와 신앙조차 권속화시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전국의 절들을 31 본산 체제로 억압하면서 화엄사(華嚴寺)와 화암사(禾巖寺)라 혼용되던 절 이름이 화암사(禾巖寺)로 공식화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건봉사의 말사가 되면서 창건 당시부터 이중으로 사용되어온 화엄사란 명칭은 사장되고 화암사란 명칭이 공식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 대웅전 뜨락에서 내려다본 화암사 입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
ⓒ 임윤수 |
절 이름이 화암사로 바뀌게 된 데는 진입로에서 바라보았던, 산 위에 우뚝한 큼지막한 수바위에 얽힌 전설로 설명된다. 화암사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우뚝 솟은 바위는 왕관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그 모양이 워낙 빼어나 빼어날 수(秀)자를 써서 수암(秀巖)이라 부른다 한다.
고찰 근처엔 참선하기에 딱 좋을 듯한 커다란 바위나 그런 장소가 있다. 주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거나 산의 정기가 맺힐 듯한 그런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있으면 그 자리는 영락없이 좌선자리다. 수바위엘 올라가 보면 진표율사를 비롯한 화암사의 역대 고승들이 이 수바위 위에서 좌선수도 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고 요즘도 스님들과 불자들이 한 번쯤 기도처로 찾을 법한 장소임을 느끼게 된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몇 분이면 민가에 도착할 수 있지만 발걸음으로 탁발을 하여야 하는 그 시대에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의 절이었다. 해 짧은 산에서 바랑을 둘러매고 마을까지 내려가 시주를 하는 것이 구도의 길일런지는 몰라도 몹시도 힘든 고행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 전통찻집 란야원이 수바위를 배경으로 다소곳하게 자리를 잡았다. |
ⓒ 임윤수 |
그러던 어느 날 화암사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 노인이 동시에 나타났다. 꿈에 나타난 백발의 노인은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알려주면서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세 번을 흔들라'고 일러주었다.
동시에 기이한 꿈을 꾸게된 두 스님은 수바위에 올라 꿈 속의 노인이 일러준 곳을 찾아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세 번을 흔드니 두 스님이 끼니를 해결할 만큼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두 스님은 꿈에 현몽한 노인이 식량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하라고 베풀어주신 부처님의 가피로 생각하고 더더욱 열심히 기도에 정진하였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바위 구멍에 대고 지팡이를 흔들면 쌀이 나온다는 소문은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화암사에 잠시 기거하게 된 한 객승도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원래 욕심이 많던 이 객승은 욕심을 내어 쌀이 나오는 바위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수없이 흔드니 어인 일인지 시뻘건 피가 솟구쳤고 그때부터 쌀은 나오지 않았다.
▲ 란야원 창틀엔 걸친 수바위가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잘 어울린다. 따끈한 찻잔을 들고 수바위를 바라보며 듣는 계곡의 물흐르는 소리는 행복의 소리이며 생동의 소리였다. |
ⓒ 임윤수 |
먹을 것을 구하느라 기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스님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쌀이 나오도록 가피를 주었으나 헛되이 욕심을 부리니 깨달음을 주고자 쌀보시를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절 이름 화암사(禾巖寺)가 벼 화(禾)자에 바위 암(巖)자를 쓰고 있음으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전설이 한낱 꾸밈말은 아닌 듯 하다.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희미해졌지만 옛날에 대를 이를 자손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형벌이며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 수바위는 손이 귀한 집안이 지성을 다하여 애절하게 기도하면 아들을 점지해 주는 신통력을 보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신혼부부나 득손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참배처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주문으로 들어서 한참을 안쪽으로 들어서야 수바위에 오를 수 있는 입구가 보인다. 고성군청에서 시공을 하였다는 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수바위 앞에 서게 된다. 이쯤에서 내려다보니 화암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곡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길게 자리한 가람 배치가 자연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비가 나리지 않는다면 멀리 속초와 동해가 한눈에 펼쳐질 듯하다.
▲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자신을 낮추기 위해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있다. |
ⓒ 임윤수 |
사람의 발을 배신하지 않아 우중에도 여간해서 미끄러지는 일은 없을 듯한 석질인 바위는 둥글둥글하고 유순한 형태이지만 역시 가파른 경사는 사람의 몸을 낮추게 한다.
먼저 바위엘 올랐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밧줄이 아무래도 위험해 보이고 위태롭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밧줄에 의지하여 바위엘 올랐는지 닳고닳아 가늘어진 밧줄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하다.
깊고 넓은 계곡을 건너면 화암사 경내로 들어서게 되며 대웅전에 들러 참배를 하기 위해서는 왼쪽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범종각이 ㄷ자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웅전 좌측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그곳에 삼성각이 있다.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솟구치는 게 마치 장마철 댐을 연상케 한다. 계곡은 깊고 맑은 물이 넘치고 넘친다.
▲ 새로 만들어진 교각을 대신 한 듯한 돌다리가 화암사의 옛 모습 일부를 보여주는 듯 하다. |
ⓒ 임윤수 |
전각에 들러 참배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면 계곡에 기둥을 딛고 서있는 고건축 양식의 건물이 있다. 이곳이 바로 화암사엘 들리면 다시 들리고 싶은 전통 찻집 '란야원'이다.
다다미(일본식 돗자리)가 깔린 안으로 들어서면 원목의 찻상이 마련되어 있고 창문 너머로 수바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화암사 경내 어느 곳 어떤 전각에서도 수바위와 눈을 맞출 수 있지만 이곳 란야원에서 창틀을 통해 바라보는 수바위가 제격인 듯 하다.
요즘 웬만한 절 근처엔 전통 찻집이 있다. 그러나 다른 전통 찻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송화밀차(송화 가루와 꿀로 만드는 차)와 호박 식혜는 이곳 란야원의 자랑이다. 가을비조차 내려 기온이 뚝 떨어진 요즘 화암사엘 들리게 되면 제법 쌀쌀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럴 때 란야원에 들러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통차 한잔을 마시면 몸도 마음도 훈훈해지고 행복감이 찾아들 듯하다.
비를 피해 찾아든 찻집에서 곱살한 아주머니가 내다 주시던 따끈한 찻잔에는 푸근함과 따뜻함이 듬뿍하다. 구도를 맞춘 듯 창틀에 적당한 크기로 들어선 수암과 계곡에서 올라오는 물소리가 삼차원 수채화로 눈길을 고정시킨다.
▲ 부도에서 화암사의 천년 역사와 고승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
ⓒ 임윤수 |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많은 것들 중 '덤'이 주는 기쁨을 빼놓을 수는 없다. 화엄사를 찾게된 것은 산행에서의 덤이며 기쁨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닿은 인연으로 생각한다.
산사를 찾다보면 가끔 인연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어떤 곳은 꼭 찾아가리라 작정을 하였다가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화암사는 덤처럼 우연이 아주 우연이, 백담계곡을 지키고 있는 한 분, 설악산 관리사무소 백담분소장 손관수님과의 우연한 인연으로 찾게 되었다.
봉정암엘 오르려 하니 기상 특보로 산행이 금지되어 일정이 막막해졌다. 막막함을 달래고자 관리사무소를 찾으니 화암사를 소개해 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좋은 산사가 있다'는 것. 고찰에 주변의 풍광도 좋지만 그 규모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려준 약도를 따라 찾아가니 그곳에 화암사가 있었다. 계획에도 없었고 알고 있지도 못하던 좋은 산사를 아주 우연이 들르게 되니 여기서 얻어지는 기쁨이 덤이며 인연에 얻어진 복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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