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문명의 교차로에서]
김기영│서울대 강사·문학박사 kimky@snu.ac.kr
연재를 시작하면서… |
서구 열강이 ‘문명(civilization)’의 전파라는 명분을 내세워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했을 때 ‘문명’이라는 단어가 ‘야만’의 미성년을 벗어난 성년기 인류의 교화된 상태를 의미했다면, 식민 지배를 강요받은 이들에게 ‘문명’은 무엇보다도 총과 대포로 대표되는 무력과 그 가공할 만한 폭력을 생산해낸 과학기술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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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교류하고 충돌하는 극적인 양상은 전쟁이다. 전쟁은 세계관의 차이, 정치와 경제의 문제, 종교와 관습의 대립, 과학과 기술의 성과 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무대인 것이다. 집단이나 종족, 민족이나 국가는 자기(自己)의 서사로 전쟁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타자(他者)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정체성과 대비되는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확립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전쟁은 여러 도시국가 사이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반적인 사건이었다. 작은 도시국가들 모두 저마다 독립을 열망하고 각자 우월성을 확보하고자 마치 운동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처럼 서로 경쟁하고 투쟁했다. 전쟁은 또한 서양문학을 탄생시킨 요람이었다. 서양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다. 이 작품은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지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다루면서 두 문명의 충돌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페르시아 전쟁
역사시대에서 동서양 문명이 첫 충돌한 사건이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79년)이다. 페르시아 전쟁을 경험한 그리스인들도 자기 관점에서 그 전쟁을 바라봤으며, 페르시아인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정체성과 대비되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과 역사가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4년)의 ‘역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페르시아 전쟁은 유럽 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처럼 작은 도시국가 시민이 거대 제국의 백성을 물리쳐 승리한 예상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진영이 패했더라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유국가로 남지 못했을 것이고, 아테네에서 자라기 시작한 민주주의 싹도 개화하지 못하고 고전기 문명도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페르시아 제국이 성취한 업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초의 거대 제국으로 여러 민족을 분할해 통치하는 정책을 구현하며 평화와 질서를 보장함으로써 다인종·다문화·세계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가 페르시아 전쟁을 기술하면서 그리스인 처지에서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서문은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의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을 보존하고 전쟁이 발발한 원인을 탐구하는 게 저술 목적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리스인이 아닌 이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고, 비교적 객관적 시각과 합리적 서사로 전쟁을 기록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아쉽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페르시아 쪽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기록물로는 관료가 새겨놓은 석판과 왕궁 벽에 조각된 왕의 포고령이 있을 뿐이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작품이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이다. 이 비극은 페르시아 전쟁 전반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페르시아 전쟁의 경험을 헤로도투스보다 더 멋지게 비극의 형식으로 전유한다. 대체로 그리스 비극은 전통신화를 소재로 극화하지만,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민주주의 개혁을 목격했다. 기원전 510년 참주 힙피아스가 축출되자, 508~507년에 클레이스테네스가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치권력을 가진다’는 이소노미아(isonomia) 정신으로 행정구역 개편을 골자로 하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또 아이스킬로스는 직접 마라톤 평원과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그는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는데, 그의 형이 마라톤에서 적군의 도끼에 손목이 잘려 전사했다. 기원전 525년 혹은 524년에 태어난 이 위대한 비극 시인은 기원전 456년 혹은 455년에 사망했는데, 묘비명에는 놀랍게도 그가 마라톤 전쟁에 참전한 용사라는 사실만이 적혀 있다.
전해오는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472년에 대(大)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1등상을 거머쥐었다. 이 작품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훗날 저 유명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였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고 8년이 지난 어느 봄날, ‘페르시아인들’이 대 디오니소스 제전의 무대에 올랐다. 아크로폴리스의 남동쪽에 위치한 디오니소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이 작품을 감상하고, 페르시아 전쟁 중에 불탄 아크로폴리스의 신전(神殿)을 바라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전쟁에서 패한 적국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전쟁의 과정을 바라보는 놀라운 콘셉트를 보여준다. 비극의 주인공을 페르시아 왕으로 삼은 점은 실로 획기적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사(Susa)를 무대로 펼쳐지는 ‘페르시아인들’의 극은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1)페르시아의 장로들은 크세르크세스 왕이 원정을 떠난 경위를 설명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전쟁 결과를 기다린다. 태후 아톳사가 등장해 불길한 꿈과 전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의 마음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2)사자가 등장해 페르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일격에 무너졌다고 보고한다. 전사한 장군들의 이름을 열거하지만 다행히도 왕은 생존했다고 한다. 불길한 꿈과 전조가 패전을 암시했던 것이다.
(3)아톳사는 다리우스 왕의 무덤에 제주를 바쳐 남편의 혼령을 불러낸다. 젊은 크세르크세스가 정신의 질병에 걸려 불경한 교만함으로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다가 신들의 벌을 받아서 전쟁에서 패한 것이라고 혼령은 분석한다. 아울러 페르시아 군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도 패배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4)크세르크세스 왕이 등장해 옷을 찢고 울부짖으며 통곡한다. 잔인한 악령이 페르시아 종족을 파괴한 것이다. 코러스는 왕과 함께 통곡하고 제국의 운명을 한탄한다.
적국의 왕과 백성들이 패전으로 겪는 고통과 슬픔을 비극이란 형식으로 재현해 보여준 아이스킬로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페르시아인들’에서는, 오만방자한 말과 행동을 뜻하는 휘브리스(hybris)를 범한 인간이 신에게 벌을 받는다는, 그리스 비극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티프를 기본 틀로 삼으면서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상고 시대 현자들이 개진한 인간 멸망의 패턴을 ‘페르시아인들’에 반영하고 있다. 그 인간 멸망의 패턴이란 엄청난 부와 명성으로 번영을 누리는 인간은 휘브리스를 범하고 아테(ate) 상태에 빠져 파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테’란 신의 개입으로 정신이 홀려 헤매다가 판단력을 잃고 정해진 한계를 망각해 파멸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멸망의 그리스적 사유 틀
페르시아 제국에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아톳사는 다리우스의 혼령을 불러낸다. 그 혼령이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책을 도출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다리우스를 이러한 캐릭터로 형상화하는 것은 분명한 역사 왜곡에 해당한다. 1세는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후 복수심에 가득 차서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겠다는 야욕에 불탄 존재였다. 복수의 한을 품은 채 죽은 자가 다리우스가 아닌가.
그런데 아이스킬로스는 극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해 다리우스의 혼령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다리우스에게 실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부여하는 한편, 페르시아 제국의 패전에 그리스적 사유의 인간 멸망 패턴을 적용한다.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자기의 전통적 사유 틀로써 타자인 페르시아인들의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해석해 그것을 정당화한 것이다.
인간 멸망의 첫 번째 단계가 엄청난 부와 번영이다. 페르시아는 황금으로 넘쳐나는 막대한 부를 가진 나라로 번영을 구가하는 제국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부와 번영은 휘브리스를 낳는 조건이 된다.
이 작품에 나타난 휘브리스의 구체적 양상은 세 가지다. 첫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보여준 불경한 오만함이다. 그는 인간인 주제에 오만방자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리스 본토의 신상(神像)들을 약탈하고 신전들에 불을 질러 제단들을 사라지게 하고 신상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등 불경죄를 자행한다.
두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자연과 세계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다리우스의 혼령이 보고하듯 크세르크세스는 배들을 이어붙여 헬레스폰토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에 부교(浮橋)를 놓았다. 이렇게 해협의 물길을 억지로 바꾸고 인간인 주제에 포세이돈 신마저 지배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세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제 영토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의 자유 시민을 정복해 노예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러한 휘브리스는, 패전의 소식이 도착하기 전에 서사된 아톳사의 꿈에서 암시된다. 그 꿈에 따르면 아시아 여인과 그리스 여인이 서로 다투게 되자 크세르크세스는 그들을 제지하고 자신의 전차 앞에 그들을 매고 목에 멍에를 얹었다. 아시아 여인은 복종하지만, 그리스 여인은 발버둥치며 두 손으로 마구를 찢어버리고 고삐도 없이 전차를 끌다가 멍에를 두 동강 낸다. 그러자 크세르크세스는 전차에서 추락하고 아버지 다리우스를 보자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이제 휘브리스는 ‘아테’ 단계로 넘어간다. 이러한 과정을 다리우스의 혼령은 시적으로 표현한다.
일단 교만(휘브리스)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아테)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그런데 이 단계로 넘어가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신/악령이다. 신/악령은 인간을 기만하고, 이로써 아테의 덫에 걸려든 인간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크세르크세스도 지혜를 잃고 말았다. 아울러 신/악령은 전쟁에도 참여해 페르시아 제국을 파괴하는 힘으로 현현(顯現)한다. 페르시아 군대를 망가뜨리고 페르시아 종족을 짓밟으며 페르시아 남자들을 잘라버린다. 전쟁에 패해 왕궁에 도착한 크세르크세스는 아직도 악령이 자신에게 덤벼들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패전을 도덕적 · 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아테네는 페르시아 제국의 재앙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페르시아의 선왕인 다리우스의 혼령은 그리스 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테네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페르시아를 통해 그리스를 보다
‘페르시아인들’에서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가 전쟁 상대국이었지만 페르시아인들을 비웃거나 비하하지 않고 동등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아톳사의 꿈에서 묘사한 그리스 여인과 페르시아 여인의 두 자매처럼 말이다. 하지만 비극 시인은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그리스의 자기 정체성을 부각한다. 작품 속에서 페르시아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페르시아 제국은 왕이 통치하는 전제정치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에 기초한다. 태후 아톳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장로들로 구성된 코러스가 태후에게 말한다.
저기 신들의 눈과 같은 광명이,
왕의 모후이신 태후 마마께서 납시오.
나는 부복할 것이오.
우리 모두 태후 마마께 마땅히
말로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또 장로들은 태후를 여주인이라고 부르면서 “힘이 미칠 수 있는 한 말이든 행동이든 두 번씩 하명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의 제기란 불가능하고 단지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 사자(使者)가 살라미스 해전에 대해 보고하는 연설에서 크세르크세스 왕이 제독들에게 명령하는 장면을 보면 전제군주의 전형적인 잔인성을 엿볼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그리스인들이 배를 타고 도주하면 제독들의 목을 모두 베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아테네 시민 관객은 자유 시민들의 평등에 기초한 자신들의 행동방식과는 다른 페르시아인들의 행동방식에 주목했을 것이다. 아톳사와 코러스가 나누는 대화는 전쟁 상대국인 아테네가 민주정치로 통치하는 나라임을 강조한다. 아톳사가 “누가 그들의 목자로서 군대를 지휘하지요?”라고 묻자, “그들은 누구의 노예라고도, 누구의 신하라고도 불리지 않사옵니다”라고 코러스가 대답한다.
둘째, 페르시아 제국은 과도한 부와 사치가 넘쳐나는 왕국으로 묘사된다. 페르시아 궁전은 황금으로 장식되고 군대도 황금으로 번쩍인다. 페르시아의 중심 도시인 사르데이스와 바빌론도 황금으로 넘쳐난다. 신과 같은 인간 크세르크세스도 황금의 종족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부유함을 바탕으로 페르시아 문화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세련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갑옷이 찢긴 크세르크세스 왕이 왕궁에 도착해서 코러스에게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통곡하시오”라고 명령할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유약하고 여성적인 것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인들의 물질적 풍요와 세련되고 우아한 생활방식은 절제와 검약을 중시하는 그리스인들의 생활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셋째, 페르시아인들은 감정을 과도하게 표현하면서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기 훈육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높은 언덕에 놓인 옥좌에 앉아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를 지켜보며 통탄하고, 옷을 찢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보병부대에 명령을 내리고 급하게 도주했다고 사자가 보고한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무대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다. 왕은 가슴을 치고 수염을 뽑으라고 코러스에게 명령한다. 이윽고 코러스는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하고 자신도 “아아”로 화답한다. 이처럼 ‘페르시아인들’의 마지막 장면은 왕은 물론 모든 백성이 패전을 슬퍼하고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통곡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행동방식은 당시 관점에서 보면 여성적 특성이기에 크세르크세스가 비극의 영웅이 되기엔 부족한 인물을 암시한다. 다른 그리스 비극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웅 가운데 오이디푸스나 헤라클레스는 좌절과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한다. 따라서 크세르크세스 왕에겐 자기 통제라는 그리스인의 미덕이 결여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페르시아인은 전쟁에서 무질서하게 행동하고 비겁했다. 사자의 보고에 따르면 살라미스에서 해전을 앞둔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의 함성에 벌써 크게 실망해 겁을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결전을 앞두고 지휘관의 통솔하에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또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하자 페르시아인들은 무질서하게 허둥대며 도망친다. 전투방식마저 페르시아인들의 비겁함과 그리스인들의 용감함을 대비시킨다. 페르시아인들은 비겁하게도 멀리 떨어져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는 것이 장기지만, 그리스인들은 용감하게도 창과 방패로 무장해 적과 맞서 싸운다.
페르시아인들은 전제정치의 위계질서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 풍부한 물질로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는 것, 과도하게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 전쟁에서 무질서하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과 같은 악덕을 보여준다. 페르시아인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하면서 그리스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민주정치로 자유 시민들이 평등한 권력을 가지는 것, 절제와 검약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 감정을 잘 절제하고 통제하는 것, 전쟁에서 질서 있고 용맹하게 적과 맞서는 것과 같은 미덕을 부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페르시아인들’에서는 그리스인이 비록 소수지만 모두 하나가 되어, 모래알처럼 흩어진 다수의 페르시아인과 맞서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자가 살라미스 해전을 보고하는 대목에서 아이스킬로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인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물론 다른 장수들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임진왜란의 명량대첩을 서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반면 페르시아 장군의 이름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용맹과 무용을 강조한다. 아미스트레스, 아르타프레네스, 메가바테스, 아스타스페스, 아르템바레스 등 낯선 이방인의 장군 이름들이 허황되게 관객의 귓전을 때렸을 것이다. 그리스 군사들이 살라미스 해전에 임하면서 외치는 함성만이 관객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리라.
오오, 헬라스인들의 아들들이여, 진격하라!
우리의 조국을 해방하라!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들과,
조국의 신들의 처소들과, 조상들의 무덤을 해방하라!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이렇듯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공동체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 작품의 영웅은 평등한 자유 시민들이 일체가 되어 단결하는 도시국가 공동체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의 강건함이 페르시아인들의 무기력을 물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전쟁은 문명의 교류와 충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건이다. 기원전 472년에 공연된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극화한 것으로 그리스인들이 타자 페르시아 제국과 교류하고 충돌하면서 무엇을 성찰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비극 작품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를 비극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현하는 색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쟁에 패배한 페르시아인들의 운명을 동정하면서도 그 패전의 원인을 분석해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인들은 자기의 사유 틀로 타자의 비극을 정당화한다. 상고 시대 현자와 시인들이 개진한 인간 멸망의 패턴으로 페르시아인들의 재앙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타자 페르시아인들의 정체성을 규정함으로써 자기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부각한다. 페르시아의 전제정치와 위계질서, 엄청난 부와 사치, 감정표현의 과도함, 무질서, 비겁함에 대해서 그리스의 민주정치와 평등주의, 검약과 절제, 자기훈육과 질서, 용감함을 맞세운 것이다.
요컨대 동서양 문명의 충돌인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인에게 자기(그리스) 안에서 타자(페르시아)를, 타자(페르시아) 안에서 자기(그리스)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비극 ‘페르시아인들’의 분석과 해석을 계승한 헤로도투스는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 전제정치와 민주정치의 이분법을 더욱 발전시킨다. 이렇게 하여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사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참고도서
● 김기영, 「아이스퀼로스 비극에 나타난 전쟁관」:『페르시아인들』,『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장수들』,『아가멤논』을 중심으로,
『서양고전학 연구』, 37(2009).
● 천병희 옮김,『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고양: 숲, 2008.
● 천병희 옮김, 헤로도투스 『역사』, 고양: 숲, 2009. 홀랜드, 톰, 『페르시아 전쟁-최초의 동서양 문명 충돌, 지금의 세계를 만들다』
● 이승호 옮김, 서울: 책과 함께, 2006. Hall, Edith, Inventing Barbarian. Greek Self-Definition through Tragedy, Oxford1989.
오리엔트를 통일한 巨大 제국, 그리스에 무릎 꿇다
처음에 이오니아인들은 승전을 거듭했고, 마침내 페르시아 왕권의 중심인 사르데이스를 접수했다. 사르데이스는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했다. 이윽고 소아시아의 거의 모든 종족이 봉기에 가담해, 페르시아 제국에 저항하는 불길이 최고조로 타올랐다. 하지만 봉기의 기세도 이오니아인들이 498년 에페소스 전투에서 패하자 시들기 시작했다. 494년부터 페르시아는 봉기에 가담한 도시들을 차례로 진압해 이오니아를 평정했다.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인들의 봉기를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복수하고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려는 대규모 원정을 계획했다.
제1차 원정은 기원전 492년 시작됐지만, 페르시아 함대가 폭풍을 만나 난파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자연의 힘이 그리스인을 도운 셈이다.
491년 다리우스 왕은 그리스 전역에 사자를 보내 물과 흙을 복종의 상징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많은 도시국가가 이러한 요구를 수락했지만 스파르타와 그 동맹군들, 그리고 아테네는 거절했다. 490년에 시작한 제2차 원정은 함대 600척, 지상군 20만명, 기병 1만명 규모로 이뤄졌다. 이오니아 봉기를 도운 에레트리아를 잿더미로 만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의 북동쪽에 위치한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그때 종교행사를 치르던 스파르타는 군대를 파병하지 못했다. 어쨌든 아테네의 1만 중갑병은 1000명의 연합군과 함께 마라톤 평원에서 보병 10만과 기병 1만의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마침내 두 진영이 격돌한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좌우익에서 우세를 보이고 무너진 중앙을 상쇄하며 페르시아군을 해안으로 밀어냈다. 한 전령이 오늘날의 마라톤 풀코스 거리를 달려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전의 소식을 전하고 죽었다.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지 수년 후 복수를 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친 뒤 기원전 480년 시작한 제3차 원정은 크세르크세스 왕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지상군 260만명과 1207척의 3단 노선 등으로 무장한 대규모 원정군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스파르타를 맹주로 삼아 테르모퓔라이에 1차 저지선을 설정했다. ‘뜨거운 문’이라는 뜻인 테르모퓔라이는 중앙 그리스로 진입하는 협로로 전략상 중요한 거점이다. 여기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결사대가 연합군과 함께 사흘간 결사 항전해 페르시아군의 사기를 꺾고 수많은 적을 도륙했다. 결국 협공을 당해 스파르타인 모두가 몰살되고 말았지만 도덕적으로는 승리한 전투였다. 테르모퓔라이 협로가 열리자, 그리스 연합군은 이스트모스를 2차 저지선으로 결정했고, 아테네 시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아크로폴리스마저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스 연합군은 코린토스 지협을 수비하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함대는 살라미스 섬 주변에 포진했다. 거짓 정보에 속은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해협 안으로 진입시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함대가 해협 안에 갇혀 포위되자 사방에서 그리스 함선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페르시아의 배들이 서로 부딪쳐 침몰하고 그리스 중장보병들이 배 위에 올라타 페르시아인들을 죽였다. 페르시아군 시체와 난파선 파편이 해협을 뒤덮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지상군을 남기고 귀환했다. 479년 페르시아 군대는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지만 패전하고 만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을 소아시아 연안까지 추격했다. 결국 그리스 본토를 정복해 복수하려던 크세르크세스 왕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동·서양 문명의 첫 충돌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만남,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조우한 예수와 공자,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주여성의 문화충격까지 문명의 교차로에서 벌어진 에피소드 열네 꼭지를 독자께 차려 올린다.
그 두 번째 이야기로 유럽의 기원 격인 켈트족 이야기를 준비했다.
문명의 교차로를 뚜벅뚜벅 걸어가보자.
1992년 2월7일, 유럽 12개국이 마침내 마스트리히트조약을 정식으로 비준했다. 이로써 일부 유럽은 하나의 정치·경제적 통합체로 거듭났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체를 결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1992년 무렵만 하더라도 유럽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지 채 반세기가 경과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따라서 유럽 각지에서 마스트리히트조약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럽 통합을 정당화하고자 여러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켈트족이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유럽 중부와 서부에 살았던 켈트족이 선사시대에 이미 유럽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면서 통일된 문화적 전통을 이룩했던 집단으로 새롭게 조명받았다. 즉 우리가 흔히 단군과 고조선으로부터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듯이, 당시 유럽 통합을 주도하던 정치 세력들은 켈트족에게서 오늘날 모든 유럽인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1992년 베니스에서는 ‘켈트족, 유럽의 기원(The Celts, the Origins of Europe)’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렇듯 켈트족은 찬란한 선사 문화를 이룩한 주체이자 범유럽적인 정체성의 담지자로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람들 대부분이 가진 켈트족에 관한 이미지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켈트족이라고 하면 대개 로마를 약탈한 미개 집단, 벌거벗은 채 파란색 물감을 뒤집어쓰고 전쟁을 하던 야만인, 혹은 만화 ‘아스테릭스’에 나오는 술 잘 마시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전사 등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켈트족은 그리스·로마의 문명 세계와 적대 관계를 맺었던 야만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켈트족에 관한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이해에서 비롯한 왜곡된 시각일 뿐이다. 켈트족은 그리스와 로마의 집단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문명 세계의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집단들도 켈트족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으며, 특히 켈트족이라는 비(非)문명화된 타자(他者)를 통해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되돌아보았다. 즉 켈트족과 문명 세계는 단순히 충돌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했던 것이다.
벌거벗은 야만人
우리가 이른바 켈트족이라고 하는 집단은 유럽에서 철기 시대가 시작될 무렵인 기원전 800년경에 중부·서부유럽을 중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켈트족은 외부에서 이주해 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발전하면서 형성된 집단이었다. 따라서 켈트족에 관한 이야기는 철기 시대 이전, 즉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중부와 서부유럽에서 일어났던 정치·경제·사회적 변화를 살펴보면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과 접촉하면서 야기됐다.
기원전 1900년경, 지중해 동단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이 발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 본토의 남쪽지역에서 미케네 문명이 나타났다. 미노아·미케네 문명이 성장하면서 그리스 지역은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 중심지로 거듭났다. 크노소스 궁전이나 미케네 성채 등에서 나온 풍부한 양의 유물이 이를 입증해준다. 그리스인은 지중해 지역의 자원을 거침없이 소비했고, 지중해 지역 내에서 충당할 수 없는 물자는 원거리 교역을 통해 멀리 떨어진 이방 세계로부터 들여왔다.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초기 단계에는 주로 동쪽, 즉 레반트 지역과 인더스 문명권과의 교역을 통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 멸망하고 그리스 지역 내 소비가 증가하자 그리스인은 새로운 교역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지역 서쪽으로, 즉 중·서부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지역의 풍부한 청동 원료 때문이었다. 미노아·미케네 사회에서 청동기는 개인의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사용되었다. 즉 청동으로 된 무기류나 장신구를 통해 엘리트는 자신의 신분을 공고히 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청동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원료인 구리와 주석은 지중해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청동 원료가 풍부한 중·서부 유럽 지역과 교역하기 시작했다.
청동을 매개로 그리스 문명권과 접촉한 중·서부 유럽 집단들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수요로 인해 그리스 지역과 인접한 발칸 반도에서 많은 양의 청동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광산에서 구리를 캐는 작업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노동이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노동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의 구리 광석을 채굴하던 예전과 달리, 노예 노동력에 의존해 구리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리스 문명권과의 접촉으로 중부 유럽 지역의 청동 생산 시스템의 규모는 확대되었으나, 이러한 경제적 발전의 이면엔 구리 채광을 전담하는 노예 계층 형성이라는 어두운 현실이 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노예 계층의 형성은 위계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스 문명권과의 접촉은 중·서부 유럽 교역망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또한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중·서부 유럽에는 벌써부터 광범위한 교역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 교역망을 통해 중부와 남동부 지역의 청동기가 대서양 연안, 북부 스칸디나비아 지방, 발트해 지역 등으로 전해졌고, 그 대가로 지급된 호박석이나 모피가 다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교역망의 각 지점에는 외국산 제품과 현지 물품 교역을 관장하는 집단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 특권을 기반으로 엘리트 계층을 형성했다. 게다가 이러한 기존 교역망에 그리스의 원거리 교역이 가세하면서 교역 물량이 늘어났고, 그 결과 교역을 조직하던 집단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었다. 또한 교역을 관장하던 엘리트는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선진 문물을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자신들과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을 더욱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스칸디나비아의 엘리트 무덤에서 발견된 미케네 문명의 접이식 의자가 그러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리스 문명권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그 교역망에 관여하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차별화가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戰士 문화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던 그리스 지역과의 교역은 중부와 서부 유럽 사회의 계층적 분화를 자극했다. 이로써 확고한 귀족층이 존재하는 켈트족 사회가 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마련된 것이다. 이후 기원전 1000~800년경에는 철기 생산 기술이 그리스 지역을 통해 중·서부 유럽으로 전파됐는데, 이것은 유럽의 철기 시대 사회, 즉 켈트족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근간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철로 만든 제품은 청동기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다. 철제 도구나 무기는 청동으로 만든 제품보다 더 단단하며 날도 더욱 뾰족하다. 그런데 철의 또 다른 특징은 원료인 철광석이 청동의 원료인 구리와 주석보다 더욱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며 그 매장량도 훨씬 더 풍부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청동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범유럽적인 교역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철은 그 지역에서 나오는 원료를 이용해 생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의 집단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역 정치체(polity)들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은 이와 같은 지역 정치체들이 존재하는 사회를 흔히 ‘족장 사회’ 혹은 ‘군장 사회’라고 부르는데, 켈트족 사회도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철기의 사용은 중요한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켈트족 사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앞서 언급했듯 철이라는 소재는 청동에 비해 확보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중부와 서부 유럽의 철기 시대 집단들, 즉 켈트족은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 농기구도 만들어 사용했다. 땅을 더 깊게 갈 수 있는 쇠로 만든 보습이나 수확을 더 용이하게 하는 철제 낫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청동기 시대보다 크게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성장은 켈트족 사회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주었다.
한편 농업 생산성 향상은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인구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는 다시 농경지의 과도한 경작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나타난 기후 변동으로 환경 조건마저 악화하면서 중·서부 유럽에서 자원에 대한 과도한 경쟁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철기 시대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군사적 갈등 증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군사적 갈등이 자주 발생하는 상황에선 전장에서의 용맹을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전사의 삶을 추앙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켈트족 남성에게 전사로서의 사회적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이데올로기 조건이 갖춰지면서 켈트족 사회를 이루는 독특한 요소가 자리 잡았다. 먼저 눈여겨볼 만한 것이 그들의 ‘전사 문화’다. 켈트족에 관한 로마 기록들을 보면 지역 간 편차는 있겠지만, 상당수 켈트족 남성이 전사 집단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전사로서 사회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장검이나 창, 그리고 방패를 들고 다녔다. 또한 켈트족 전사들의 무덤 발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전사의 모습을 갖춘 채 저승으로 갔다.
노예를 팔고, 술을 사다
켈트족 전사들은 줄곧 전투에 가담했다. 그런데 당시 전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전투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즉 켈트족의 전투는 상대방을 완전히 복속하고 전멸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실제 전투라기보다는, 전사 집단의 전사적 정체성을 표출·재생산하고, 또한 전사 집단 간 힘과 우월함을 견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인 경우가 많았다. 로마 기록에 이러한 켈트족 전투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전투에 가담하는 양측에서는 각각 한 명의 전사가 대표로 나와 싸움을 펼쳤고, 그러는 동안 나머지 전사들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까지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기편의 승리를 응원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다양한 물질문화와 퍼포먼스를 통해 과시하고 확인하는 것이 켈트족 전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켈트족 전사 문화의 이 같은 측면이 구현되는 또 다른 장은 만찬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켈트족 전사들은 위계를 매우 중요시했다. 따라서 만찬 때 싸움 잘하는 순서로 자리에 앉았고, 고기를 먹을 때도 서열대로 먹었다.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옛 전투의 용맹스러운 기억을 회고했으며, 이웃 집단들과의 오래된 갈등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복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즉흥적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만찬이 실제로 약탈로 이어지는 예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러한 왁자지껄한 만찬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다. 켈트족이 일상적으로 마신 술은 벌꿀을 발효한 미드(mead)와 맥주로, 둘 다 알코올 도수가 낮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선호한 술은 와인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접할 수 있었던 가장 독한 술이자 보관하기 쉬운 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옛 켈트족 땅에서 와인을 생산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켈트족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와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지중해 세계에서였다.
켈트족에게 와인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들은 그리스인들이다. 그리스 지역에서는 앞서 언급한 미노아·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다음, 잠시 동안의 암흑기를 거쳐 아테네, 스파르타 등과 같은 도시국가가 등장했다. 그런데 기원전 8세기경,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도시국가들은 식민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식민지를 세웠고, 그곳에서 유럽 내륙의 켈트족 집단들과 교역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대표적 그리스 식민지가 오늘날의 마르세유인 마살리아(Massilia)다. 이 같은 식민지를 기점으로 그리스인들은 중·서부 유럽으로 와인을 공급했고 그 대신 모피, 햄, 주석, 노예 등을 가져갔다.
그리스인들에 이어 로마인들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켈트족 집단들에게 와인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켈트족이 얼마나 와인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와인을 얻고자 얼마나 쉽게 노예를 팔았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내에서는 노예 한 명당 대형 항아리 5~6개 분량의 와인을 받을 수 있었으나, 켈트족과의 교역에서는 노예와 와인 항아리를 일대일로 교환했다. 켈트족 집단들이 와인을 마시려면 노예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웃 집단을 약탈하고 그 주민을 노예로 삼았던 켈트족 전사의 행위는 자신들의 전사적 정체성을 과시하는 수단이면서 생활필수품 격인 와인을 확보하는 방편이었다.
켈트족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귀족 문화다. 켈트족 엘리트는 위세품 확보와 과시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고 재생산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귀족 문화에서 지중해 지역의 선진 문물은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우선 켈트족 엘리트는 귀한 와인뿐만 아니라 그러한 와인을 우아하게 마시는 문화까지 지중해 지역으로부터 수입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라인강 상류의 빌징엔(Vilsingen) 유적과 카펠(Kappel) 유적 등에서 발견한 로도스 섬 양식의 주전자(Rhodian flagon)들이다. 주전자의 형태를 가진 이 청동제 술병들은 공중토론이 이뤄지던 와인 파티인 그리스의 심포지엄(symposium)에서 사용된 물품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한 용도의 용기가 켈트족 영역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켈트족 엘리트가 그리스의 세련된 와인 음주 문화를 모방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 지역의 우아한 와인 음주 문화를 수용하고자 했던 켈트족 엘리트의 의지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비(Vix) 유적에서 발굴한 대형의 청동제 술 단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크레이터(crater)라는 전문 용어로 불리는 이 용기는 만찬 석상에서 와인과 물을 섞을 때 사용했다. 켈트족 사람들이 와인을 물에 섞지 않고 그냥 마시는 바람에 쉽게 취하고 난동을 부린다는 그리스 저술가들의 기록을 떠올리면 이러한 크레이터의 존재는 더욱 흥미롭다. 높이 164㎝, 무게 208㎏인 이 술단지는 아마도 스파르타나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주문 제작했고, 그리스인들이 직접 운송해 와서 현장에서 조립했을 것으로 보인다.
켈트족 엘리트는 지중해 집단을 통해 더욱 멀리 떨어진 세계의 물품을 소개받기도 했다. 예컨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호크도르프(Hochdorf) 무덤의 주인인 켈트족 족장은 중국산 비단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옷을 입은 채 매장됐다. 또한 독일 내 다뉴브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호미헬레(Hohmichele) 유적의 제6번 무덤에 묻혔던 여성은 중국산 비단 띠로 장식한 매우 고급스러운 모직 원피스를 입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참고로 이 무덤은 기원전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곳에서 발견한 비단은 현재 유럽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비단이기도 하다.
켈트족 엘리트는 그리스 지역의 건축 양식도 받아들였다. 요새를 축조할 때 그리스 양식을 활용했다 .다뉴브 강이 내려다보이는 독일 호이네부르크(Heuneburg) 요새는 기원전 600~530년경에 아마도 그리스인 건축가 감독하에서 그리스 건축 양식에 따라 리모델링된 것으로 보인다. 요새의 성벽은 규격화한 크기와 모양의 진흙 벽돌로 축조됐다. 또한 성벽 북면에는 장방형의 보루가 추가됐는데, 이것은 실제로 방어적 기능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요새 전체에 웅장한 느낌을 주고자 설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뤄볼 때, 켈트족 엘리트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고자 지중해 세계의 물질문화는 물론 그 표현 방식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점령한 켈트족
위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던 켈트족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들의 본토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저술가들은 이러한 켈트족의 이주가 인구 증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으며, 고고학자들도 이러한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즉 본토 내에서 켈트족의 인구압이 높아지자 엘리트 전사들이 주민 일부를 이끌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주를 시작한 켈트족 무리는 이탈리아 반도가 있는 남동쪽을 향해 내려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저술가들은 그들이 이탈리아 지역으로 오게 된 것이 그곳의 우수한 자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예를 들어, 플리니우스는 그의 저서인 ‘박물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알프스 산맥으로 인해 갇혀 있던 갈리아인(켈트족)들이 (중략) 처음으로 이탈리아 내로 넘어오게 된 것은 헬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갈리아 출신의 시민 때문이었다. 수공업 장인이었던 그는 로마에서 살다가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갈 때 말린 무화과와 포도, 그리고 몇몇 종류의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가져갔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이러한 물품들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플리니우스의 기록은 지중해 세계의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켈트족 무리가 왜 이탈리아로 이주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기원전 5세기 후반경에는 북부 이탈리아의 포 강 주변에까지 정착했다. 그들 중 세노네스(Senones) 부족은 이후 남쪽으로 더 내려가 이탈리아의 토착 집단 중 하나인 에트루리아인들의 영역을 침범했다. 그런데 이 무렵 로마 공화국은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하나씩 복속하며 북쪽으로 영역을 넓히던 중이었다. 따라서 두 집단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세노네스 부족이 원한 것은 정착할 땅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외교적으로 논의하고자 로마 공화국 대표를 기원전 391년 클루시움(Clusium)이라는 도시에서 만났다. 하지만 협상이 결렬되자 몸싸움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로마 측 대표 한 명이 켈트족 전사를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켈트족은 결국 무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기원전 390년 7월18일 알리아 강변에서 로마 군대를 쉽게 물리친 다음, 해질 무렵에 로마에 도착했다. 이들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로마 시민 대부분은 피난길에 올랐고, 몇몇 군인과 그 가족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 있는 성채로 피신했다. 바로 이곳에서 그들은 켈트족이 자행한 살인과 방화, 도둑질과 약탈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학자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눈과 귀는 물론 생각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적군의 고함소리, 여성과 소년들의 비명소리, 화염의 포효, 집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트족은 무려 7개월 동안 로마를 점령했으며 결국 황금 1000파운드(약 450㎏)를 받고 떠났다고 한다. 켈트족의 약탈은 로마 시민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남겼으며,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수백 년 후에도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한편 본토를 떠나 동쪽으로 향한 켈트족 무리도 있었다. 이들은 다뉴브 강을 따라 오늘날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 걸쳐 있는 카르파티아 분지에 도착했고, 기원전 4세기경에는 발칸 반도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무렵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켈트족 세계와 지중해 세계는 또다시 충돌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335년 알렉산더 대왕은 세 명의 켈트족 대표를 마케도니아에 있는 그의 궁전으로 불러 ‘우정과 환대의 협정’을 맺었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한 토막 있다. 알렉산더가 켈트족 대표들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오만하게도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자신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대답을 예상했던 알렉산더는 “잘난 척하는 놈들”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알렉산더 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켈트족 집단과 평화가 유지됐다. 그러나 알렉산더 사후에 일어난 정치적 분란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세력이 약해지자 켈트족 집단은 다시금 마케도니아 영토를 호시탐탐 노렸다. 결국 기원전 280년 마케도니아로 침입한 켈트족 군대가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치고 왕을 살해한 다음 그의 머리를 창에 꽂아 전시했다고 한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누리던 부에 이끌려 남하한 켈트족 집단도 있었다. 기원전 279년에는 켈트족 한 무리가 마케도니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그리스 군대를 물리친 다음 델피까지 내려갔다. 이들은 델피의 아폴론 신전을 성공적으로 약탈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아폴론이 천둥과 번개, 지진을 일으켜 이들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약탈 사건은 로마의 약탈과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다. 또한 이는 문자로 기록돼 후대에까지 전해졌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야만적’인 켈트족에 관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했다.
마지막으로, 소아시아로 이주해서 켈트족 왕국을 세운 무리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비티니아(Bithynia)의 왕 니코메데스는 세 집단의 켈트족 부족을 초대해 이웃 왕국과의 분쟁 지역에 이들을 정착시켰다. 이후 이 켈트족 집단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앙부에 있는 고원 지대로 옮겨가 갈라티아(Galatia)라는 왕국을 세웠다. 갈라티아를 거점으로 이들은 주변 왕국을 약탈하며 안락한 삶을 유지했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경,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가 지역에 있는 왕국들에 대한 켈트족의 약탈이 너무 심해지자, 그 왕국들의 맹주인 페르가몬(Pergamon)이 기원전 233년 켈트족을 소탕했다.
도둑질과 살육, 강간
지중해 세계 주민에게 켈트족과의 충돌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켈트족과의 만남을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우선 켈트족 전사들은 지중해 지역 전역에 걸쳐 용병으로 고용됐다. 예컨대 기원전 369~368년에는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우스 1세가 켈트족 용병 2000명을 고용해 동맹국인 스파르타를 지원했다. 이것은 아마도 켈트족 용병이 고용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마케도니아 계통의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도 기원전 277~276년에 4000명의 켈트족 용병을 고용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그들의 계획이 탄로 나자, 용병들은 나일 강 한가운데에 있는 무인도에 갇혀 굶어 죽거나 서로를 잡아먹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갈라티아 켈트족에게 약탈당한 소아시아의 왕국들도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을 보면 문명화한 지중해 세계와 켈트족 세계와의 충돌이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폴리비우스, 파우사니아스, 리비우스와 같은 저술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인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는 로마공화국이 전성기를 맞아 켈트족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나가던 시기다. 따라서 이들은 켈트족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화한 시스템이 어떻게 외부 집단을 물리쳐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즉 국가의 통제가 존재하는 지중해 세계의 이성적이고 문명화한 질서를 원시적인 켈트족의 야만과 혼란, 야생 등과 대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저술가들은 켈트족을 묘사할 때 특히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정반대되는 측면들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명 세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자 했으므로 켈트족은 존경할 만한 적수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때는 미개한 고귀함(savage nobility)을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켈트족을 다룬 당시의 미술 작품에도 반영돼 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갈리아인(The Dying Gaul)’은 켈트족 전사의 모습을 나타낸 매우 유명한 작품이다. 이 조각은 원래 위에서 언급한 갈라티아에 대한 페르가몬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 건축물을 장식했다고 한다(참고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이 작품을 베낀 로마인들의 모사품이다). 이렇듯 켈트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고자 만든 작품인 만큼, 죽어가는 켈트족 전사의 모습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존경할 만한 적수의 면모다.
기원전 2세기 이후 켈트족의 위협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지중해 세계에서는 그들에 관한 또 다른 이미지가 형성됐다. 알프스 산맥 서쪽 지역에 대한 로마의 정복이 완성될 무렵 그리스 저술가 포세이도니오스는 ‘역사’에서 이 지역의 켈트족에 대한 민족지적 정보를 전했다. 여기에서 그는 켈트족 사람들의 용감함과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친절 등을 특별히 높게 평가했다. 심지어 전쟁을 좋아하는 그들의 급한 성질을 치기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명사회가 아닌 이 미개한 켈트족 집단들이야말로 지혜로운 자들이 사회를 지배하는 ‘황금의 시대’에 근접했다고 보았다.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 켈트족이 더 이상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자, 그들은 로마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존재로도 인식됐다. 예를 들어, 네로 황제의 통치하에서 활동하던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학자인 타키투스는 로마 지배층의 무능력함과 로마 사회 전반에 스며든 향락과 정신적 해이, 그리고 개인 자유의 소멸 등을 켈트족을 통해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다. 그는 ‘아그리콜라’에서 로마 군대에 맞섰던 영국의 켈트족 수장 칼가쿠스의 입을 빌려 로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세상의 약탈자들, 그들은 무차별적인 강탈로 땅을 고갈시켰으며 (중략) 도둑질과 살육, 강간에 ‘정부 통치’라는 거짓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들은 황폐함을 가져와 그것을 평화라고 한다.”
충돌의 時代
언론 매체와 관련 전문가에 따르면 우리는 오늘날 두 개의 거대한 세계가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한쪽에는 알카에다, 탈레반 등으로 대변되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국이 이끄는 서방 세계가 있으며,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돌이켜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은 약 2000년 전에도 있었다. 즉 켈트족이 지중해 세계를 공격하자 이 충돌의 사건들은 자극적 이야깃거리가 되어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에 의해 기록됐고,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켈트족과 지중해 세계 사이에는 매우 오래된 교류의 역사가 있었고, 보다 중요하게는 상생의 관계가 있었다. 다만 이와 같은 사실은 ‘충돌’이라는 강력한 이미지에 의해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역사는 결국 자극적인 충돌의 사건들로 인해 자칫 간과하기 쉬운 공존과 협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이른바 ‘충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교차로에 서서 예수를 ‘모든 것 위에 있는’ 진리의 이름으로 알렸다.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한국이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것,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 이민족이 아닌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을 튀케(운명의 여신)에게 감사했다”고 전해온다. 그런가 하면 2세기경 한 유대교 랍비는 사람들은 매일 다음 세 가지를 찬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를 여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나를 무지한 자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나를 비유대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그리스인들이 ‘바르바로이’라고 부른 이민족과의 대립을 통해 탁월하고 자유로운 그리스인이라는 자의식을 만들어갔다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과 세상 민족들, 즉 이방인(Gojim)과의 날카로운 구별을 통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타자였다. 이방인을 부정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정결하고 가치 있는 유대민족이라는 표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통념을 깨뜨리는 소리 이방인의 사도
이와 같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자명하고 마땅한 세계에 사뭇 도전적인 출사표를 던진 인물이 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예수 추종자들을 핍박하다가 갑자기 그 운동에 투신한, 바로 사도 바울이다. 이방인의 사도! 극적인 회심 이후 스스로 사도가 된 이 예외적인 인물은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며 등장했다. ‘이방인의 사도’라는 바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천명은 이미 자기-타자, 중심-주변이라는 고대 세계의 정체성의 문법을 깨뜨리는 파격이었다.
그는 또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노예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누구나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확언했다. 어느 모로 보나 낯선 선언이었다. 그것이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집단을 특정한 땅과 그 땅의 신, 그 신을 예배하는 종교와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정체성에 대한 당대의 어법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의 통념으로 보면 쓸모없는 존재였던 이방인들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유대인의 고유한 유산을 그들과 공유하고, 이방인과 유대인 위에 새로운 공동체 원리를 세우고자 했다.
아주 익숙해서 견고한 정체성의 문법을 깨뜨린 바울의 이러한 급진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목소리(비전)의 힘이라고 흔히 말한다. 틀리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적 비전을 활성화한 개방성과 탄력성은 그가 속했던 헬레니즘 세계의 정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은 유대 땅을 떠난 유대인이며, 헬레니즘 문화가 공기처럼 꽉 차 있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그리스어로 말하고 상당히 능숙한 수사학을 구사하며, 동시에 히브리인들의 성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할 줄 알았다. 편지 글에서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하면 약하고 말주변이 변변치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바울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삐걱거리며 공존하던 자기 세계와 닮았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그 세계와 제대로 싸울 줄 알았다.
바울의 다문화적 배경과 새로운 공동체 실험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세계가 우리 시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이래 우리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가 근대 국가들과 여러 지역을 잠식해가는 강압적이고 도도한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편승하려는 욕망과 지역의 저항적인 문화 전략들이 충돌하고 공모하는 가운데 다양한 이민 공동체, 이주 노동자, 정치 망명객, 난민 등 각양각색의 이방인들이 공존하는 다문화, 다민족 사회가 늘어가지만 폭력과 차별, 편견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연대를 확립해 더욱 정의롭고 더욱 나은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우리 시대가 아직도 씨름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다. 바울의 행보는 유사한 상황들과 그 해법에 대한 고대 말기 버전처럼 보인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때론 깊은 울림을 준다. 바울과 그의 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기독교를 넘어 바울 보기
신약성서와 기독교 외경들에서 바울은 예수의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베드로와 맞먹거나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럴 법도 한 것이 4세기 무렵 확정된 기독교 정경(신약성서)의 거의 절반을 바울의 편지들이 차지했다. 기독교 운동을 ‘예수는 부활하셨다’라는 하나의 선언으로 집중시킨 바울의 신학이 복수의 기독교 운동 가운데 확고하게 주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수가 새로운 집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면, 바울은 그 집의 주춧돌을 놓고 골격을 세웠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대에 바울은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예수처럼 바울도 온존하는 세상과 불화했다. 사람들을 선동해 새로운 대열로 이끌었으며, 오래된 관습에 저항하고 위선과 단호히 맞섰기 때문이다. 으레 그렇듯이 거센 반발, 물리적 공격, 집요한 의심이 그를 괴롭혔다.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 기독교 내부의 만만찮은 적수들도 자주 걸림돌이 됐다. 역사적으로도 바울은 누구에게나 복음의 사도, 즉 ‘좋은 소식의 전달자’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예수의 소박하고 순수한 복음을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 체제에 순치시키고 나약한 죄의식으로 타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바울이라는 식의 비판이 이어졌다. 이러한 혐의는 바울이야말로 “나쁜 소식의 전달자(the Dysangelist)”라는 니체의 전복적 표현에서 절정에 이르기도 했다.
가부장적 도덕과 여성에 대한 편견, 노예제도에 대한 보수적 태도, 반유대주의 등 기독교 역사의 권위적이고 부정적 측면들을 모두 바울 탓으로 돌리는 상투적인 담론은 여전히 통용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바울에게 투사하고, 예수를 순수한 원형으로 복원하려는 하나의 신화적 작업이다. 한편 최근의 연구들은 부정적 바울의 근거가 되는 부분들이 바울이 직접 쓴 편지보다는 후대 교회 상황에 맞게 각색한 바울 전승에 있다고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직접 쓴 편지의 모순적이고 애매한 태도까지 다 문제 삼을 까닭은 없다. 기독교 역사와 거의 등치된 바울이나 완전무결한 바울이나 모두 구체적 시공간을 살았던 인간 바울을 보기 어렵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바울은 기독교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우며, 기독교 역사의 무게를 덜고 그 자신의 시대로 되돌려놓을 때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대략 기원후 50년 전후에 쓰여진 것으로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은 막 태동하던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과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자, 그 시대와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다. 학계에서 대체로 합의하는 바울의 친서들(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은 자기 시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바울로 안내하는 길잡이다(전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야기의 대부분은 바울 사후에 기록된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이름을 빌린 편지들보다는 주로 바울의 친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바울은 그가 살았던 헬레니즘 세계의 다문화적 지평에 뿌리박고 있다.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새로운 정신사적 흐름, 유대인들의 오랜 디아스포라적 삶과 종교가 바울이라는 한 인간 안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바울이 헬레니즘 세계의 전형적 인물로서 어떻게 자기 시대의 언어로 문화의 창조자가 됐는지 보자.
헬레니즘 세계와 디아스포라 유대인
헬레니즘 시대는 정치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기원전 334년 혹은 323년 알렉산드로스의 사후)에서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문화사적으로 헬레니즘 세계는 다문화 상황이 지속되고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의 헤게모니가 유지된 로마제정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복을 통해 갑자기 출현한 이 ‘하나의 세계’는 당시 지중해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체감한 세계의 크기와 그들이 경험한 세계의 이미지를 바꾸어놓았다. 세계는 더 이상 예측가능하고 질서정연하며 동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서로 다른 도시(국가)에서 각자의 언어와 관습, 저마다의 법에 따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도 바뀌어갔다.
헬레니즘 세계의 도시들은 모델이 된 그리스 도시들과 겉보기에는 비슷했지만, 자세한 경관은 훨씬 복잡하고 더 개방적이었다. 그 속에는 강제이주를 당한 피정복민, 기회를 찾아 식민도시에 정착한 이민자, 정복전쟁에 고용되어 떠도는 용병, 부역에 동원된 노동자, 유랑하는 배우, 정치 망명객, 멀리서 끌려온 노예들, 도망친 노예, 떠돌이 예언자, 철학교사 등 다양한 배경과 사정, 이질적 욕망을 가진 뿌리 뽑힌 존재들이 뒤엉켜 있었다. 특히 제국주의 전쟁이나 정복에 의해 고향땅과 가족 형제, 신전과 종교로부터 유리된 사람들에게는 폭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불안한 세계였다. 각 도시의 신과 도시의 질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옛 관념들은 더 이상 그 질서가 유지되지 못하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확대된 세계 속에서 엄습하는 불안과 절망에 빠지거나, 더 확장된 새로운 삶의 지도와 틀을 갈구했다. 마치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난 사람들과 같았다. 이제 돌아갈 고향땅이 아니라 새로운 목적지, 새로운 고향땅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그 세계는 고대의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다원적이었으며, 이따금 절호의 기회도 되었다. 예수와 바울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느님 나라와 예수를 통한 만인의 구원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세계 속에서였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그러한 헬레니즘 문화 중심지의 하나였던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현재 터키 소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히타이트 시대에 창건된 타르수스는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제국에 귀속되었다가 기원전 66년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동서 문화의 교차지요, 많은 철학자와 시인을 낳은 유서 깊은 도시였다. 타르수스는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키드누스 강을 따라 지중해 교역과 연결됐으며 로마의 주요 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이 지역 특산품으로 킬리키움(cilicium)이라고 불리는 양탄자가 유명한데, 바울도 양가죽이나 천으로 천막을 만들어 팔던 가업을 물려받았다. 바울은 선교활동 중에도 공동체에 신세지지 않으려고 계속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땅에 터를 둔 농부가 아니라, 기술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일하고 살 수 있는 도시의 수공업자였기에 가능했다.
바울이 염두에 둔 세계 자체가 도시들이 그물처럼 연결된 헬레니즘 세계였으며 주요 청중도 도시민이었다.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했던 곳은 대부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키아, 아카이아의 코린토스, 소아시아의 에페수스, 갈라티아의 안키라와 같은 로마 속주의 수도들이었다. 이러한 대도시들은 문화적 인종적 계급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했다. 바울이 성장과정과 생활환경에서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집단, 여러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끊임없이 그들과 교유했다는 의미다.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 밖에 살았지만 율법을 엄수하던 바리사이파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서 8일째에 할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천막기술뿐 아니라 토라도 배웠다. 율법을 지키는 데 흠이 없는 바리사이파요, 혈통적으로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다고 자부했다. 헬레니즘 도시 문화 못지않게 유대인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도 바울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탈중심적 행로와 경계 넘기
이처럼 바울은 두 세계,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았던, 그야말로 경계인이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민족의 세계가 교차하는 도시환경은 많은 것을 자기화하고 적응, 동화시킬 수 있는 바울의 탄력적인 정신의 요람이었다. 그는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었고 기독교 운동에 투신하고도 대부분의 삶을 여러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 위에서 보냈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잡겠다면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진리와 소명에 눈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 뒤의 바울은 어떤가? 갈라디아서의 자전적 기술에 따르면 회심 직후 그는 기독교 운동의 중심이던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 운동의 권위자인 예수의 사도들, 생전에 예수를 알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자기 경험을 누구와 의논하거나 공식적인 중심에 의뢰해 인준받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바울은 바로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왔고, 3년 만에야 예루살렘을 찾았다. 보름간 베드로와 함께 지내며, 야고보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던 조용한 방문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지척에 두고도 머뭇거리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끊임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바울의 행로는 중심을 확대하기보다는 외부를 무한히 넓혀서 급기야 외부와 내부,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탈중심적 방식이었다.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였다. 그 사이 바울은 킬리키아, 시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 로마제국의 동쪽 도시 곳곳에서 계속 여러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여행자였다. 로마제국의 훌륭한 도로와 토목기술 덕에 여행이 일상화했더라도, 길 위의 갖가지 위험, 추위와 굶주림을 감수해야 했다. 바닷길에 배가 난파해 여러 날 망망대해에 떠 있던 적도 있었다. 도시에서는 이방 사람과 동족들 모두에게 여러 번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그렇게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고난과 수고의 결실을 가지고서야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회합의 쟁점은 이방인 기독교 신자의 할례 문제였다. 비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들이 성장하자,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바울은 일부러 할례를 받지 않은 티투스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 바울의 의견은 단호했다. 이방인 신자의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 기독교인이 누리는 자유를 다시 빼앗는 것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팽팽한 설전 끝에 이방인 신자는 할례가 필요 없지만, 음식 금기를 비롯한 몇몇 율법조항은 지켜야 한다는 타협적인 중재안이 나왔다. 예루살렘 회합은 갈등의 불씨를 남긴 채 일단락됐다.
그 뒤 수 년 동안 바울은 동쪽 도시들의 선교를 마무리하고 로마를 거쳐 당시 서쪽 끝이던 에스파냐로 갈 염원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전에 가난한 예루살렘 교우들을 돕고자 그리스 교회들에서 모은 구제금을 들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됐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환대와 안전한 귀환을 염원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에 모금을 전달하는 것도 순조롭지 않았고(유대인은 비 유대인에게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급기야 바울은 에페수스 사람과 함께 있다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죄목은 폭동선동과 성전모독이었다. 유대법상 유대인이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 안뜰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금지됐고, 위반하면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바울이 그 금기를 어겼는지, 모함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성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로마 당국에 넘겨졌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주장했으며 결국 로마로 이송돼 로마식 재판을 받았으며 거기서 얼마간 활동하다가 64~65년경 네로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의 최후 몇 년은 매우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유대인들과의 관계 악화,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석연찮은 관계 정도만 짐작될 뿐이다.
유대인들과의 충돌 배경에는 할례와 율법 문제 외에 좀 더 미묘한 사정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낯선 도시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에 들르곤 했다.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했던 것과 상충되지만, 당시 유대교 회당의 정황은 그 의문을 해소해준다. 크로산의 주장처럼 바울은 이방인에게 선교할 때, 완전한 유대인이나 순수한 이교도가 아니라 ‘하느님 경외자’ 또는 ‘하느님 공경자’로 알려진 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던 것 같다. 그들은 유대교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는 이방인들로서, 유대인 회당 구성원의 일부였다. 오랜 디아스포라적 삶 속에서 형성된 히브리인들의 보편적 유일신 신앙과 윤리적 생활은 헬레니즘 시대 새로운 정신적 출구를 찾는 이들에게 일정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헬레니즘 문화에 젖은 유대인들이 있었듯이, 이런 저런 이유로 유대인에게 공감하는 이방인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며 경제적으로 후원하거나, 회당 건축 기금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율법 준수와 할례의 의무는 없지만 유대교 회당의 일원이었던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피상적인 인식과 달리 헬레니즘 시기 유대교는 민족적 편협성을 넘어 일종의 자기 발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에게 말을 거는 것도 오직 바울의 창안은 아니었다.
바울은 도시의 회당에 먼저 들러 유일신 신앙과 히브리 성서에 익숙해진 이방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은 유대인 공동체에 상당한 타격을 줬을 것이다. 유대인 처지에서 보면 바울의 선교는 유대인의 유산을 가로채고,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대인을 보호해주던 완충지대마저 잠식하는 것이었다. 서로 가까웠던 만큼 갈등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중간지대를 먼저 겨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바울은 제3의 중간지대를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경계를 넘는 지렛대로 삼은 셈인데, 이들이 기독교 확산 과정에서 점차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끊임없는 탈중심적 여정과 이방인과 유대인의 중간지대를 포섭하는 현실적이고 기민한 선교전략은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성공비결이 됐다.
새로운 식탁의 이상
바울의 시대에 그리스인과 유대인, 나아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문제는 구체적인 사회생활의 문제이기도 했다. 누구와 어떻게 빵을 나눌 것인가? 사람들이 자기편을 확인하는 가장 소박한 방식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신에게 바친 제물을 함께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례적 절차였다. 집단적 정체성은 단순하게 말하면, 함께 빵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빵을 나눌 없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일 수 있다. 디오도로스(Dio-doros)의 기록에 의하면 셀레우코스 왕조 시기 유대인들은 “어떤 종족과도 빵을 나누어 먹거나 선의를 보이지 않기 위한 이질적인 율법을 도입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다신교 사회의 다른 신들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른 신의 제단에 오른 음식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정결법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음식과 접촉을 엄격히 금한다. 이교신의 제단에 올린 음식을 먹는 것은 당연히 금지됐다. 음식과 식사법에 대한 금기는 단지 오염의 논리만이 아니라, 공동식사가 함의하는 강력한 사회적 연대와도 관련된 것이다. 겸상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녔다.
예수는 일찍이 유대법이 접촉을 금한 사마리아 여인이나 세리, 창녀들과도 자유로이 먹고 마심으로써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들의 공분을 샀다. 나아가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며 정결법의 논리를 뒤집어버렸다. 예수의 격의 없는 식사는 기독교 운동 안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새로운 공동체의 본보기가 된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가 보여준 보편주의적 이상을 관철하고자 했다. 안티오키아 일화는 이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일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예루살렘 회합 후 얼마 안 되어 베드로가 바울이 있던 안티오키아를 방문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베드로, 바울, 바르바나가 만나 여러 비유대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바울이 얼굴을 붉히는 일이 일어났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며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의 제자들이 들어오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갑자기 자리를 피했고, 베드로가 자리를 뜨자 바르바나를 비롯한 다른 유대인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던 것이다. 바울은 격분해서 베드로 면전에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위선자라고 크게 나무랐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식탁이 훼손된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관련한 껄끄러운 이야기를 공적인 편지에 굳이 기록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기독교의 일원이라면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음식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공동체의 원칙과도 관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권위 있는 사도였기 때문에 더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빵을 나눌 수 있는 동질적인 집단이라 해도 내부적으로 다시 빵을 분배하는 방식은 세밀하게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헬레니즘 세계의 연회나 공동식사 자리는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식사의 장소, 좌석의 배치, 음식의 종류와 고기의 부위, 포도주의 등급 등은 엄격한 위계에 따라 정해지고 배치됐다. 그것은 하위 계층에게는 공공연한 모욕과 굴욕의 의식이었다. 후견인과 수혜자들이 피라미드식으로 연결된 후견인 제도가 발달했던 로마제국 안에서 많은 수혜자를 거느린 명망 있는 후견인의 식사는 철저히 서열에 따라 구조화돼 있었다. 그것이 당시의 정상적인 공동식사의 양상이었다.
초기 기독교에도 공동체 식사가 있었다. 예수의 최후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식은 세례와 함께 초기 교회에서 널리 행해지던 중요한 종교 의식이었다. 성찬식은 보통 모든 공동체의 성원이 함께 모여 배불리 먹는 식사 뒤에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례로 마무리되곤 했다. 바울은 이러한 성만찬을 예수의 본보기를 따르는 평등한 사랑의 잔치로 규정했다. 그것은 주류문화의 공동식사와 같으면서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차이가 공공연히 확인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차이가 작동하지 않는 자리로서, 일종의 저항문화였다. 주류 세계의 연회와 구별되는 이러한 성찬식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 계기는 역설적으로 코린토스 교회의 성찬식이 차별적인 바깥 사회의 축소판과 같이 전락했을 때였다.
고린도전서의 증언에 따르면 성찬식 모임 날 코린토스 교회의 부유한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일찌감치 와서 자기들끼리 흥청망청 먹고 취하도록 마셨다. 남루한 옷을 입고 노동에 지쳐 뒤에 온 하층민 신자들은 먹다 남은 빈 식탁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남의 잔치에 온 것처럼 소외감을 느끼고 상처를 입었다. 바울 공동체는 대부분 그랬지만, 특히 코린토스 교회는 비천한 노예나 하층민, 수공업자나 상인들, 사도들과 여러 교회를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집단이었다. 코린토스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그들 사이의 반목과 파벌, 분쟁에 대해 반어적 어법으로 경고하곤 한다. 특히 성만찬 상황을 전해 들은 바울은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라며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현실을 세심하게 직시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릴 것, 미리 식사가 필요한 사람은 집에서 하고 올 것이 방안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성만찬이 가난하건 부유하건, 주인이건 노예건 모두 똑같이 형제의 친교를 나누는 평등하고 열린 식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식탁의 이상은 온전히 구현되지 않았지만, 바울은 끈기 있게 공동체 안에 그 원칙이 살아 있게 하고자 노력했다. ‘환난을 다 겪어도 곤경에 빠지지 않고 가망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 투지를 가지고, 바울은 여러 공동체를 가르치고 격려하며 때로 단호하게 질책하는 수고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민족, 인종, 계급, 성별을 넘어 보편적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현실과의 끊임없는 불일치 속에서 확인하고 조율해나간 바울 공동체의 지속적 과정이야말로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힘이 됐다.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기”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하며 시작한 바울의 새로운 여정은 갓 기지개를 켠 기독교의 향방을 확고하게 탈민족적이고 탈중심적인 형태로 결정지어 놓았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경계를 가로질러 그것들을 상대화하고 모두에게 차별 없이 말 건넬 수 있는 보편적 종교의 실험이었다. 그 안에서 예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진리의 이름이 되었다. 바울은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생각했고, 정결법과 관습에 근거한 금기와 계율에 저항했다. 관습이나 도덕, 법을 완전히 초월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엄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동족에 대한 친애의 마음조차 훌쩍 넘어섰다는 뜻도 아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 돼서도 자신의 동족인 유대민족에게 더 애틋했다. 동족이 기독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를 바랐고,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저주도 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바울은 유대인에게 유대인이 되고,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세계시민이었다.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진리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려 했다. 이처럼 언뜻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이 바울 안에 공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바울 식의 보편성은 특수성과 차이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특수성과 우연적 차이들을 무심히 가로지르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지적처럼 바울의 보편주의 실험은 철학의 개념적 보편성과도 다르고, 모든 게 헛되다는 허무적 보편주의와도 달랐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은총(신의 무조건적 사랑)의 사건과 기독교적 주체의 내적 확신에 정초한 보편주의였다. 바울에게 그것은 그리스인이든 유대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모든 경계를 가로질러 모두에게 말을 건네는 사랑이었다.
이러한 기독교적 이상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두 문화 사이의 경계인으로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살며 길러진 바울의 탄력성과 개방성을 통해서 더 널리 전파되고 좀 더 실천적 모습으로 구현됐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들, 경계인들, 뿌리 뽑힌 자들에게 바울의 기독교는 새로운 푯대요 희망이 될 만했다. 그 푯대는 특정한 지역과 민족, 계급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모두를 포괄하고 모두를 각성시킬 수 있었다. 바울에게 기독교라는 새로운 울타리는 구원에 대한 내적 확신과 믿음 외에 어떤 영토도 경계선도 없는 울타리였기 때문이다. 바울 당대에 기독교인의 숫자는 지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넘어 이방인에 대해 자신을 개방했던 바울의 새로운 보편적 공동체 실험은 헬레니즘 세계의 다문화, 다민족 풍토에서 점점 더 적합성을 얻게 될 터였다. 자기 땅을 벗어난 디아스포라적 존재들이 새로운 문화의 창조적 주체가 된 이 과거의 사례는 과연 우리도 그들처럼 온전히 시대와 대면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씨름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한다.
참고문헌
●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
● 요아힘 그닐까, ‘바울로’,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8.
● 알랭 바디우, ‘사도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현성환 역, 새물결, 2008.
● F. W. 월뱅크, ‘헬레니즘 세계’, 김경현 옮김, 아카넷, 2002.
● 존 도미니크 크로산,‘하나님과 제국’, 이종욱 옮김, 2007.
● 게리 윌스,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김창락 옮김, 2006.
● 마틴 헹엘, ‘신구약중간사’, 임진수 역, 살림, 2004.
기독교 광신주의와 고대문명의 종말
송유레 서울대 HK교수·서양고대철학 esong@snu.ac.kr
배후로 지목된 이는 총대주교 키릴로스, 그는 교회를 세속 권력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간 교회에는 수많은 키릴로스가 있었다.
‘히파티아 살인사건’이 오늘의 한국에 뜻하는 바는…
415년 3월 어느 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거리에서 한 여성이 습격당했다. 기독교 광신도들이 근처 교회까지 그녀를 질질 끌고 간 후 그곳에서 옷을 벗기고 조개껍데기로 난도질했다. 그리고 토막 난 시체를 광장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이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철학자 히파티아, 고대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철학과 더불어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친 최초의 여자 교수였다.
여교수 살인 사건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테온은 오늘날의 대학과 견줄 수 있는 무세이온에서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쳤다. 히파티아는 일찍이 아버지를 통해 수학에 입문했다. 그녀는 원추형에 대한 논문을 썼고 고대 수학자들의 저서를 편집하고 주석을 달았으며, 천문관측의와 물비중계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고도의 추상적 사고뿐 아니라 실험과 관찰을 중시한 알렉산드리아의 학풍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히파티아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이끈 철학자였다. 그녀는 철학자의 망토를 두르고 도심을 누비고 다녔으며, 원하는 사람이면-종교와 종파를 불문하고-누구에게나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의 책을 해석해주었다.
히파티아 살해의 배후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가 지목받았다. 동시대 교회사가 소크라테스는 키릴로스가 살인 사건에 직접 연루됐다는 말은 피했지만, 히파티아가 ‘정치적 시기심’ 탓에 희생됐으며, 히파티아 사건이 키릴로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적지 않은 불명예를 안겨줬다고 보고한다(‘교회사’). 6세기 철학자 다마스키오스는, ‘반대파’의 키릴로스가 도시 전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히파티아에 대한 시기와 증오에 휩싸여 살해를 직접 모의했다고 주장한다(‘철학사’). 한편 7세기 니키우의 주교 요한은 히파티아의 살인을 ‘마녀’의 제거 또는 살아 있는 우상의 파괴로 정당화하며 키릴로스를 영웅으로 치켜세운다(‘연대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라파엘로는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테네 학당’의 철학자들 사이에 히파티아를 되살려놓았다. 이후 히파티아는 종교개혁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게 주목받았다. 예를 들어, 18세기 개신교 신학자 존 톨란드는 ‘히파티아 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결하고 가장 학식이 높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성, 그러나 통상적으로 하지만 부당하게도 성인이라고 불리는 대주교 성 키릴로스의 자만심과 경쟁심, 잔인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조각조각 찢겨진 여성의 역사’(1720)라는 긴 제목의 역사 수필을 썼고,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볼링브로그 경의 중요한 조사 또는 광신주의의 무덤’(1736)에서 히파티아의 살해를 종교적 광신주의가 천재를 박해한 사건으로 규정한 뒤 “키릴로스의 삭발한 개들이 저지른 야수적 살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르콩트 드 리즐은 히파티아를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죽음과 함께 그녀가 대표하는 고대문명의 상실을 안타까워했다. 히파티아를 주인공으로 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최신 팩션 영화 ‘아고라’(2009)는 다시금 기독교 교회의 불편한 기억을 되살렸다. 사실, 히파티아의 삶은 영화보다 훨씬 덜 낭만적이고 그녀의 죽음은 훨씬 더 잔혹했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새로운’ 기독교 문명의 눈부신 도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한다. ‘불안의 시대’로 불리는 고대 후기, 신구(新舊)-문명의 대결이 다른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히파티아의 암살극은 고대문명의 최후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히파티아가 살았던 바로 그 시대에 오랫동안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의 ‘등대’ 역할을 해온 알렉산드리아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전투적 지도자들이 이끈 ‘새로운’ 종교는 이교신전 사라페이온을 파괴했고, 도시가 생긴 이래 700년간 존속한 유대인 공동체를 파멸시켰다. 히파티아의 암살 이후 오래지 않아 도시의 통치권은 교회의 수중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이 글에서 우리는 히파티아의 극적인 삶과 죽음을 신구 문명의 교차지 알렉산드리아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알렉산드리아가 잃어버린 옛 문명은 어떤 모습이었나? 그리고 새로운 문명은 어떤 얼굴로 나타났는가? 어떻게 옛 문명은 새로운 문명에서 기억됐는가? 문명의 대전환을 몸소 겪었던 히파티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잃어버린 고대문명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건립됐고, 대왕의 사후 이집트에 수립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되었으며, 기원후 641년 아랍군에 의해 함락되기까지 천년의 고도(古都)로서 위엄을 자랑했다. 건립된 지 오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의 도시는 고대문명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성장했다. 그런데 이 신흥 도시가 품어 안은 문명의 이상은 더 이상 협소한 도시국가(polis)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된 고전기 그리스 문명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인종적, 민족적, 지역적 경계를 넘어 하나의 세계 문명을 지향하는 ‘헬레니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치사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에 나선 기원전 334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기원전 30년까지의 약 300년간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동정(東征)으로 출현한 헬레니즘 문명은 고전 그리스문명과 고대 동방문명이 융합돼 창출된 것으로, 문명사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결혼’으로 일컬어진다. 헬레니즘은 에게 해 중심의 그리스 세계를 ‘서(西)’로 하고, 이집트를 포함한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동(東)’으로 하는 동서 문명 통합의 산물이었다. 헬레니즘은 철학에서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로, 종교에서는 제설통합주의(syncretism)로 대변된다. 실제로 헬레니즘 시기 이름난 철학자의 대다수는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시리아, 이집트 및 아랍 출신이었으며, 신들의 이름이 상호 교환되기도 했고, 이집트-그리스 신(神) 사라피스와 같이 하이브리드 신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중해의 진주’로 불린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최대 무역항이었다. 지중해 연안 도처로부터 배가 들어왔다. 어떤 배들은 몬순 바람을 이용해 인도의 서해안에서 홍해를 거쳐 비단과 향료를 들여오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기록에 따르면, 배 한 척이 한 번에 향료 60상자, 코끼리 상아 100t, 흑단 135t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인도와 중국을 ‘동’으로 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서’로 하는 확장된 의미의 ‘동서무역’은 고대인들의 세계 지평을 현저히 확대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인이 이집트에 세운 ‘그리스’ 도시였지만, 그리스인 외에도 이집트인, 페니키아인, 아랍인, 누비아인 등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어깨를 비비고 사는 곳이었다. 이처럼 ‘고대의 뉴욕’이라 할 만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사에서 최대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초엽,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리스말을 사용하는 유대인을 위해 학자 70여 명에게 히브리어 구약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기도록 요청했으며, 그 결과 유명한 ‘70인역 성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패전과 자살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의 유산을 바탕으로 고대 후기 문명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이 도시는 한때 로마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다. 기원후 1세기 중엽에는 인구가 100만명에 달했다. 이 시기에 성(聖) 마르코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 교회를 세운다. 이로써 기독교가 이교(異敎)와 유대교와 함께 치열한 문명의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찬란한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단연 등대와 도서관을 꼽을 수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파로스(Pharos) 등대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40층짜리 고층 빌딩이었다. 이 고대판 마천루는 기원전 283년에 세워져 기원후 1300년대 중반 지진에 의해 쓰러질 때까지 약 1600년간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했다. 우뚝 선 파로스의 맞은편 항구 주변에 왕궁이 있었고, 바로 근처에 무세이온(뮤즈의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안에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놓여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번영을 구가했고, 알렉산드리아를 문화적 황무지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바꾸어놓았다. 더불어 알렉산드리아는 나일강 일대에 자생하는 파피루스를 가공하는 종이산업의 본고장이자 지중해 지역 서적 무역의 중심지로 도약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존재한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책을 사들였다. 특히 호메로스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돼 다양한 종류의 필사본이 수집됐다. 기원전 3세기 초에 활약한 칼리마코스는 도서관 장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정리한 ‘목록’(원제는 ‘전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과 그들의 작품을 기록한 목록’이다)을 편찬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사라페이온’에 두 개의 소형 도서관이 건축됐다. 무세이온의 주도서관에는 50만~70만권의 두루마리 책이, 사라페이온의 부도서관들엔 5만권의 책이 소장돼 있었다고 전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왕립 대학 무세이온 (‘museum’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의 산하기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로열 아카데미’는 고대의 학문을 집대성하겠다는 문화적 야심의 산물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창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뮤즈의 신전’을 짓고, 세계의 유수한 작가·시인·과학자·철학자를 불러 모아 높은 봉급과 함께 숙식을 제공하면서 연구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기하학자 유클리드와 지구의 원주를 근소한 오차로 계산해낸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 그리고 해부학의 창시자 헬로필로스가 초빙됐다. 무세이온은 특히 수학과 의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무세이온의 회원으로 알려진 최후의 인물이 바로 테온, 그러니까 히파티아의 아버지다.
고대문명의 보고(寶庫)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소문만큼 이론(異論)도 많다. 7세기 아랍의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됐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슬람을 중상하기 위해 꾸며낸 허구일 소지가 크다.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전술상의 이유로 알렉산드리아 항에 정박 중이던 자신의 함대에 불을 질렀을 때 불길이 번져 위대한 도서관을 태웠다고도 하지만, 도서관 전체가 아니라 일부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도 도서관은 수차 화마를 겪은 것으로 전해지며, 270년경, 팔미라 왕국의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왕궁과 함께 주도서관이 파괴된 것으로 간주된다. 늦어도 391년 사라페이온이 완전히 파괴됐을 때 부도서관들도 (그때까지 건재했다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히파티아가 죽기 25년 전의 일이다. 영화 ‘아고라’에서는 도서관이 이교도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라페이온의 파괴
391년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이교의 제사의식을 금지하고 사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옛 종교는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영구히 추방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한 지 80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교 사원 철폐령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로스는 기독교인들을 이끌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호신 사라피스의 신전으로 가서 헬레니즘의 거대한 ‘우상’을 파괴했다.
그가 젊어서 모시던 성 아타나시우스의 오랜 염원이 드디어 이뤄진 순간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를 역임한 아타나시우스(293~373)는 교회 내 이단논쟁에서 성자의 신성(神性)을 부정한 아리우스파를 몰아내고 성부와 성자가 본질상 동일하다는 내용의 ‘정통교리’를 확립한 주인공이다. 교회의 일대 ‘내전’을 종식시킨 아타나시우스는 말년에 눈길을 교회 밖으로 돌렸으며, 특히 이교의 상징인 사라페이온을 부수길 희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교’(異敎)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제외한 ‘다른’ 전통 종교를 가리킨다. 다분히 기독교와 유대교를 기준으로 하는 편향된 말이다. 하지만 ‘이교’로 번역되는 원어 ‘paganism’은 이보다 더 심한 말이다. 이 말이 유래한 라틴어 ‘paganus’는 원래 ‘시골뜨기’ 내지 ‘무식한’을 뜻하며, 미신에 빠진 사람이나 범죄자 또는 환자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후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됐다. 정작 ‘이교도’로 불린 사람들은 기독교의 압제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하나의 집단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정치적 권한이 확대되면서, ‘교회의 파라오’라 불리던 테오필로스 총대주교의 세력도 강화됐다. 흥미롭게도 테오필로스 시대에 성 안토니우스(250~350)가 시작한 이집트 수도원 운동이 절정에 달한다. 히파티아를 흠모한 시인 팔라디스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2000여 명의 수도승이 알렉산드리아 주변에 살았고, 은수자 5000명가량이 니트리아 사막에 은거했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총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한꺼번에 엄청난 수의 수도승이 알렉산드리아로 달려왔다는 사실이다. 테오필로스는 수도승들을 자신의 ‘사병(私兵)’으로 활용한 것이다. 수도승들은 사라페이온의 파괴에도 한몫을 했다. 세상의 유혹을 끊고 오직 신을 찬미하기 위해 불모의 사막으로 떠났던 성 안토니우스의 후예들이 주교의 군대가 되어 도시로 되돌아온 것이다. 검은 망토를 두른 수도승들은 테오필로스의 사촌이자 그를 이어 총대주교의 자리에 오른 성 키릴로스에게도 충성을 바쳤다. 이들이 바로 흰 망토를 두른 철학자 히파티아의 살해 용의자다.
키릴로스의 야심
교회사가 소크라테스는 히파티아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기록하며,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개인적 감정에 기인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정치적 암살’임을 암시한다.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키릴로스(376~444)는 현재 기독교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교회 박사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412년 키릴로스는 폭도들을 동원해 교회 내부의 반발 세력을 제압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선출됐다. 교회 조직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지 못한 신임 총대주교는 과도한 ‘행동주의’로 자신의 불안감을 상쇄하려 했다. 교회 안으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금욕주의를 표방한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축출됐다. 교회 밖으로는 자신의 권한을 세속 정치의 영역에까지 확대하려고 했다. 이러한 ‘월권’으로 인해 키릴로스는 이집트의 총독 오레스테스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이 갈등은 유대인 문제를 계기로 폭발한다.
이단 축출 이후 키릴로스는 교회의 내부 세력을 규합하고자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시나고게의 타락에 대하여’를 집필해 반(反)유대인 정서를 조장했다. 마침내 415년 어느 날 오레스테스 총독이 자리한 극장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은 결국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의 파멸로 귀결됐다.
소크라테스는 이 엄청난 사건이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유대인들의 ‘극장 열풍’이 그 사소한 화근이었다. 그가 전하는 사건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종종 율법을 듣는 대신 극장에 갔다. 특히 무용수들이 관중을 끌어 모았다고 한다. 춤 공연에 열광한 유대인들이 장외 질서까지 문란하게 하자, 기독교인들의 항의가 잇달았고, 관(官)에서도 제재 조치에 나섰다. 오레스테스 총독이 규제령을 공포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극장에 소집했을 때, 기독교인들도 들으러 갔다. 그런데 키릴로스의 열렬 추종자 한 사람이 규제령에 환호의 박수를 보내자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를 선동가로 몰아세웠다. 그러자 총독은 ‘선동가’를 체포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고문에 처했다. 이것은 관권을 침해하는 총대주교에 대한 경고장이기도 했다.
증오에 휩싸인 유대인들은 어느 날 밤중에 교회에 불이 났다는 거짓말로 기독교인들을 집 밖으로 유인해낸 다음 무차별로 공격해서 죽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손가락에 나무 반지를 꼈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기독교인들의 복수전이 시작됐고, 키릴로스가 몸소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7세기 이집트 니키우의 주교 요한은 승자의 입장에서 전쟁의 경과를 기술한다. “기독교인들은 분노에 차서 시나고게로 향했고, 그것을 차지했고, 교회로 만들기 위해 정화했다.”(‘연대기’).
이 사건은 유대인 공동체의 파멸로 끝나지 않았다. 니트리아 사막으로부터 약 500명의 수도승이 도시로 몰려와서 총독을 ‘이교도 우상숭배자’라고 모욕하며 난동을 피웠다. 총독은 자신이 세례를 받은 기독교이라고 항변했지만, 한 수도승이 그를 돌로 쳤다. 이를 본 시민들이 달려와서 그의 목숨을 구했고, 그를 친 수도승을 잡았다. 총독은 수도승을 공개적으로 고문했는데, 고문이 극심해서 수도승이 죽고 말았다. 키릴로스는 수도승의 시체를 어느 한 교회에 안치하고, 거기에서 그를 순교자로 추대하는 성대한 미사를 거행했다.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들은 -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 키릴로스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키릴로스는 교회를 세속 권력의 중심으로, 자신을 도시의 통치자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그의 시대에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의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되었고, 박해받는 자가 아니라 박해자가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대박해가 있은 지 약 10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총독과 총대주교 사이의 권력 다툼은 또 다른 사건에 의해 새로이 불붙는다. 총독과 친분관계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최고의 유명인사, 즉 히파티아가 살해당한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육신
철학자 히파티아는 신플라톤주의 학파의 수장(首長)이었다.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서 짐꾼으로 생계를 잇던 암모니오스 사카스(‘짐꾼’)에서 시작해 로마로 간 그의 제자 플로티누스(205~270)를 통해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지배적 철학사조로 발전한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특히 우주의 원리를 논하는 형이상학적 사변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들의 형이상학적 원리론은 기독교 신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플라톤의 정신에 충실하게 수학 교육을 중시했고, 그들의 형이상학은 피타고라스주의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히파티아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히파티아의 사상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그녀가 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플로티누스처럼 종교적 제의를 멀리하고 철학이야말로 신을 모시는 진정한 길이라 여겼을까? 아니면 이얌블리코스와 같은 후대의 신플라톤주의자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종래의 제의를 포용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처럼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이교의 전통을 쇄신하려 했을까? 분명한 것은 히파티아가 기독교인을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듣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철학을 가르쳤다. 그녀의 문하에는 이교도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도 있었다. 사실상 그녀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기독교인으로 주교좌에 오른 키레네의 시네시우스다.
390년대 알렉산드리아로 유학 가서 히파티아를 사사한 시네시우스는 스승을 몹시 존경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편지 가운데 히파티아에게 보낸 편지가 7통 전한다. 한 편지에서 그는 히파티아에게 “하데스에서는 망자들에 대한 망각이 있다지만, 거기에서도 나는 당신을 기억할 것이오.”(‘편지’)라고 썼고, 그가 병상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는 그녀를 “어머니, 누이, 선생님, 게다가 은인”(‘편지’)이라고 부른다. 그는 스승에게 자신의 저서를 함께 보내면서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그를 비방하는 검은 망토를 입은 자들과 흰 망토를 입은 자들 양쪽에 대항해 자신의 철학을 옹호하기도 하며, 물비중계를 보내달라는 부탁도 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히파티아가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도 한다. 시네시우스가 히파티아의 죽음을 언급하는 편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먼저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시네시우스와 히파티아의 사제 관계가 예시하는 것처럼, 고대에는 한 철학 학파에 입문하는 것이 ‘평생 친구들’의 서클에 가입하는 것과 같아서, 철학자 친구들은 죽을 때까지 서로 간에 친밀한 유대를 유지했다.
시네시우스 주교는 참다운 철학의 길을 모색하며 교회의 ‘정통 교리’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육체의 부활, 세상의 종말, 영혼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교리에 반대했으며, 교회 내에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히파티아가 길러낸 철학자 주교가 걸은 길이다. 이 길은 ‘다른’ 생각을 용납지 않은 키릴로스가 걸은 길과는 다르다. 키릴로스는 수많은 이단 논쟁에서 승리했고, 수많은 이를 파문했다. 그리고 교회에는 수많은 키릴로스가 있었다. 이처럼 숱한 파문의 역사를 통해 확립된 것이 소위 ‘정통’이다.
다시 히파티아로 돌아가자. 히파티아는 높은 학식과 함께 미모로 유명하다. 한 일화에 따르면, 한 학생이 너무나 아름다운 처녀 교수를 사랑하게 됐다. 그것을 알게 된 선생은 제자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충격요법을 썼다. 그녀는 자신의 피 묻은 생리대를 가져와 보이며 “청년, 이것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라고 말해서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한다(‘철학사’). 그녀의 아름다움이 총대주교의 여성혐오증을 야기했거나 부채질했다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415년 살해 당시, 그녀는 적어도 40대 중반, 많게는 60대 중반이었으므로, ‘아프로디테의 육신’과는 거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소크라테스는 히파티아를 차분하지만 자유로운 성품의 소유자로 묘사한다. 그녀는 관료들이 자리한 공식석상에 자주 나타났고, 남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들도 범상한 위엄과 덕을 지닌 그녀를 존경했다고 덧붙인다. 다마스키오스 역시 그녀의 덕을 칭송한다. 특히 그녀를 절제와 정의의 귀감으로 기린다. 이밖에 그녀의 명료하고도 능숙한 언변과 정치적 감각도 언급한다. 이러한 자질들로 인해, 히파티아가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됐던 것 같다. 새로 부임한 총독 오레스테스에게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를 대표하는 시민이었다. 총독은 이 여성 철학자를 정치적 조언자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마녀사냥
히파티아가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보고에 따르면 히파티아가 오레스테스와 자주 회동을 갖자, 기독교도들 사이에 총독과 총대주교의 화해를 가로막는 것이 그녀라는 악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마침내 성서 낭독자로 일하던 베드로라는 자가 광분해 폭도들을 이끌고 가서 히파티아를 공격했다고 한다.
7세기 니키우의 주교 요한도 그러한 소문을 믿었고, 오레스테스의 반항을 그녀 탓으로 돌렸다. 이 맥락에서 그는 놀랍게도 히파티아를 ‘마녀’로 묘사한다. 그에 따르면 히파티아는 마법에 종사했고 많은 이를 악마의 술책으로 홀렸으며, 도시의 통치자 즉 오레스테스 또한 마법으로 현혹해서 총독과 불목하게 하고 교회에 냉담하게 만들었다. 그의 묘사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천문관측의와 악기들이 마법과 한통속으로 다뤄진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천문학이나 화성학과 같은 수학적 학문들을 마법이라고 스스로 오해했거나 또는 남들을 오도하려고 한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학문을 죄악시하는 종교의 광신적 전통과 맞물려 있다(‘연대기’).
요한은 키릴로스가 히파티아 살해에 직접 연루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살해 장면을 묘사한 후 다음과 같이 쓴다. “그리고 모든 이가 총대주교를 둘러싸고 그를 ‘새로운 테오필로스’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도시에 남아 있는 우상의 마지막 잔재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연대기’). 여기에서 키릴로스의 히파티아 제거는 테오필로스의 사라페이온 파괴에 비교된다. 요컨대, 히파티아의 살해는 우상파괴 내지 ‘마녀사냥’이다.
6세기 신플라톤주의자 다마스키오스는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해석한다. 그는 히파티아의 살해를 너무나 단순하게도 인간심리를 통해 설명한다. 그가 본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키릴로스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많은 사람이 그 집으로 나고 드는 광경을 보게 됐다. 그가 수행원에게 무슨 군중에, 웬 소동인지를 묻자, 수행원은 철학자 히파티아가 지금 문안 인사를 받고 있는 중이고, 그 집이 그녀의 집이라고 대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영혼이 미움에 휩싸였다. 그러자 곧 그는 그녀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철학사’). 다마스키오스의 진단에 따르면 키릴로스는 미움 내지 시기 질투라는 마음의 병에 제압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히파티아의 죽음에 걸려 있는 수많은 디테일을 생략한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미움이 히파티아 사건의 핵심인 것은 사실이다. 종교가 다르거나, 종파가 다르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사라페이온도, 유대인 공동체도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철학자도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시에 바쳐진 뇌물 덕에, 히파티아 사건의 원인과 주모자에 대한 관(官)의 조사는 없었다. 키릴로스의 교회는 황실까지 매수했다. 오레스테스 총독은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됐다. 418년, 마침내 도시의 행정권이 총대주교의 손으로 공식적으로 넘어가게 된다.
등대여, 다시 빛나라!
사라페이온의 파괴와 히파티아의 암살이 곧바로 고대문명의 종말을 가져오진 않았다. 440년대 키릴로스가, 죽은 지 80년도 넘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를 논박하는 ‘율리아누스에 반대하여’를 집필할 필요를 느낀 것을 보면 그렇다. 히파티아가 죽은 후에도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학파는 100년 넘게 지탱했다. 5세기 중반 히에로클레스가 아테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비록 오래지 않아 고향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이교도 철학교수인 올림피오도로스(475~570)는 이교도 철학자로서 기독교 도시에 산다는 것이 야수들에 둘러싸여 그들을 쓰다듬으려고 하는 미치광이 짓과 같다고 썼다(‘고르기아스 주석’). 다마스키오스(460~540)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우고 가르치다가 아테네로 건너가서 아카데미의 학장이 된다.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카데미를 철폐하자 아카데미의 마지막 학장은 동료들과 함께 페르시아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이 공식적으로 최후를 맞는다.
훗날 기독교 교회는 히파티아를 마녀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8세기 무렵 생성된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의 전설에 히파티아의 아름다움과 처녀성, 그리고 철학·수학·천문학 분야의 학식이 투영된다. 사실, 전설의 성녀 카타리나와 역사적 히파티아의 연결고리를 시사하는 유적이 있다. 아직도 소아시아의 한 고대도시에는 ‘성 히파티아 카타리나’에게 바쳐진 교회의 폐허가 존재한다. 왜 기독교 교회는 히파티아를 마녀에서 성녀로 만들었을까?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가 ‘배운 여자’를 포용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14세기에는 ‘히파티아’가 여성 학자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기에 이른다.
2011년 이집트는 현대사를 다시 쓰고 있다. 민주화운동으로 ‘현대의 파라오’라 불리던 무바라크가 30년의 독재 끝에 하야했다. 하지만 1월1일 알렉산드리아 콥트 교회에서 일어난 차량폭탄 테러 사태를 생각하면 이집트가 갈 길은 아직 멀다. 역사는 돌고 돌아 성 마르코의 교회가 무슬림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약자 신세가 됐다. 이렇듯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일 수 있음을 역사는 가르친다. 강자든 약자든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느 종교를 가지고 어떤 종파에 속하든지 남과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독단과 독선을 버리고 대화의 장, 아고라로 나와야 한다. 대화하는 정신, 이것이 히파티아를 인도한 고대문명의 등대였다. 등대여, 다시 빛나라.
참고문헌
● Maria Dzielska, Hypatia of Alexandria,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 Manfred Clauss, Alexandria. Eine antike Weltstadt, Stuttgart: Klett-Cotta (2003)
도대체 십자군이 뭐기에 이슬람-기독교 세계에서 지금껏 회자되는 것일까.
11세기 말부터 200년간 문명의 교차로에서 지속된 십자군이 인류에게 남긴 것.
최근 친구와 말다툼을 하거나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는가? 살다보면 타인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로 인한 갈등도 피할 수 없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린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멈추었던 적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도 지구상 어느 곳에선가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언뜻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인 것처럼 보인다. 개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는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슬람권의 오사마 빈 라덴도 이 낱말을 입에 올렸다. 요즈음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카다피가 서방 세계의 간섭을 십자군에 비유하며 이슬람 정서를 자극했다.
기독교 세계의 팽창
이러한 예에서 보듯 십자군이란 말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십자군의 원인
사실 이러한 요청은 이례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로마 교황과 비잔티움 황제가 소원했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의 황제는 제사장이기도 했으므로 황제는 행정조직의 우두머리임과 동시에 종교조직의 우두머리였다. 종교조직만을 놓고 본다면 황제 바로 아래 5명의 총대주교(總大主敎·Patriarch)가 있었으며, 후일 교황이라고 불리는 로마 총대주교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한동안 지속됐는데, 로마 총대주교는 다른 총대주교들과 마찬가지로 비잔티움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 따라서 서로마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교회(비잔티움 교회)는 원래 단일한 교회 조직에 속했으며, 모두 비잔티움 황제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런데 726년 성상(聖像)파괴령을 기점으로 두 교회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비잔티움 황제 레온 3세(Leon III)는 모든 성상을 우상(偶像)으로 간주해 금지했으나, 게르만족에게 지속적으로 포교해야 하는 로마 교황은 성상 유지를 주장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고, 1054년 로마 교황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문함으로써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했다. 오늘날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동유럽의 정교회는 이때부터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별개의 조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분열돼 있었으나 로마 교황도 비잔티움 황제도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화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가운데 비잔티움 황제가 원조를 요청한 것인데, 황제가 예상했던 원조는 대규모 십자군 파병이 아니라 제국 군대를 보조할 소규모의 용병 기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생각은 달랐다.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원조보다는 성지 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성지 순례는 참회의 수단이었다. 중세에는 예전에 성인들이 머문 곳을 방문하면 그 영향력의 일부가 순례자의 것이 된다거나, 성유골(聖遺骨)을 찾아가면 질병 치유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중죄를 저지른 자에게 교회가 순례를 명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순례가 널리 퍼져 있던 중세 시대의 3대 순례지는 에스파냐 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로마 그리고 예루살렘이었다. 순례지 중 하나인 예루살렘의 회복이야말로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의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교황이 원한다고 해서 기사들이 순순히 십자군에 나설 리는 만무하다. 기사들은 기사들 나름대로 참전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은 게르만족의 침입, 서로마 제국의 멸망, 그리고 바이킹의 침입 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가 10세기경부터 안정되기 시작했다. 봉건제가 성립돼 기사들 사이에서는 위계질서가 생겼으나 이들의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회로서는 이들이 호전성을 분출할 출구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슬람을 정복함으로써 자신들의 토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 기사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성지 회복과 성지 순례라는 명분까지 더해졌으므로 십자군이야말로 기사들에게 매력적인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앞서 언급했듯 십자군은 서유럽 사회의 팽창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이 안정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새로운 토지 개간이 이뤄졌지만, 토지는 여전히 부족했고, 장자상속제가 시행돼 둘째 아들부터는 영지를 상속받을 기회가 없었다. 즉 인구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서유럽 밖으로의 인구 배출을 유도했다. 따라서 십자군의 발생 원인을 성지 탈환이나 호전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럽의 팽창이라는 시각으로 십자군을 들여다봐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군의 경과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됐는데, 대규모 군사원정이 여덟 차례 시도됐고 소규모 원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14세기에도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망은 이어졌다. 제1차 십자군은 1096년 시작됐는데,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4개의 십자군 영지(領地)를 건설했다. 기사들은 성당기사단, 병원기사단 같은 조직을 구축해 예루살렘을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했다. 이들 기사단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함락된 뒤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들이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고 하는 성배를 가져왔다거나, 예수의 장례를 지낼 때 몸을 감쌌다고 전해지는 성의(聖衣)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유럽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후 4개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이던 에데사 백작령이 이슬람 수중에 들어가자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됐다. 그리고 1187년 이슬람의 지배자 살라딘(Saladin)이 하틴(Hattin)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과 그 일대를 정복하자 제3차 십자군이 구축됐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성지 회복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제3차 십자군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가 힘을 모았으나, 두 군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항구도시 아크레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이즈음 십자군은 점차 변질돼가고 있었다.
제4차 십자군은 가장 추악한 십자군으로 기록돼 있다. 일찍이 베네치아 상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무역과 관련해 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권을 경쟁 도시인 제노아와 피사에도 부여하자 베네치아 상인들은 십자군에게 성지로 가는 선박을 제공해줄 테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달라고 요구했다. 1204년 십자군은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약탈한 뒤, 그 일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다. 성지에는 가지도 않았으며 이슬람과의 전투도 물론 없었다. 이후에도 네 차례 더 십자군이 결성됐으나 모두 실패했다.
십자군의 결과
십자군은 원래 목표한 바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 애초 교황은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서유럽을 단일한 기독교 세계로 만들고자 십자군을 제창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한 반면, 국왕들의 권위는 신장됐다. 국왕들은 십자군에 참가해서 전사한 봉건귀족의 영지를 몰수했고, 자신이 직접 참가한 십자군의 기사 군대를 지휘했다. 물론 십자군이 왕권 강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군이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권력관계의 변화는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대립에서 교회권력이 점차 쇠퇴하고, 단일한 기독교 세계라는 개념이 퇴조하는 대신 근대국가가 등장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국왕이 권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민족적 적대감이 격화되기도 했다. 제2차 십자군 때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증오감이 커졌으며, 제3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결국 단일한 기독교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바람은 분열된 민족국가의 길로 들어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렇듯 겉으로 드러난 직접적 결과만이 십자군이 남긴 영향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도에게 십자군은 승리의 표시로 인식됐다. 돌이켜보면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됐을 때부터 십자가 표시는 승리의 상징이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의 패권을 놓고 다퉜는데, 하늘의 계시를 받아 방패에 기독교의 십자가 표시를 하고 전투에 임해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이듬해 기독교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십자군은 콘스탄티누스의 방패에 새겨진 승리의 표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했던 셈이다. 오늘날 권력가들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걸핏하면 십자군 운운하지 않는가.
주목해야 할 점은 십자군이 기독교인에게 승리의 표시로 기억되는 만큼이나, 이슬람 지역에서 십자군은 신성모독이나 유럽인 침략행위의 표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침략을 단호하게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십자군에게까지 관용을 베푼 살라딘을 이슬람 세계가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인해 이집트가 영국, 프랑스와 벌인 전쟁은 1191년 영국 국왕과 프랑스 국왕이 모두 참여한 제3차 십자군에 비유됐고,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에 비유됐다. 그리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역시 서방 세계에 대항해 싸우는 자신을 살라딘에 빗댔다.
지중해 세계의 부활
십자군은 일견 충돌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충돌이란 교류의 한 측면이다. 충돌과 교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십자군은 원래 목표에는 없던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고, 그 열매들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중해 세계는 십자군을 거치면서 문명 교류의 장으로 부활했다.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할 때, 모든 교류는 지중해를 통해 이뤄졌다. 물자와 인력, 그리고 문화가 지중해를 통해 로마로 흘러들어왔고, 로마에서 혼합됐으며, 로마로부터 흘러나갔다.
사실 지중해 세계는 로마 제국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기원전 1000년경 페니키아인이 지중해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후 그리스인이 지중해에 진출해 여러 식민도시를 세웠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리, 마르세유 등이 바로 그리스인이 세운 식민도시다. 그리스인의 뒤를 이어 로마가 지중해를 내해(內海, mare internum)로 만들었다.
로마 중심의 지중해 세계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쇠퇴했다. 4세기부터 서로마가 있던 지역으로 이주한 게르만족은 혼란을 야기했고, 7세기부터 북아프리카에는 이슬람 세력이 등장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축소되기는 했으나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이윽고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에 오른 800년에는 명백히 지중해는 세 문명으로 분열돼 있었다.
과거 서로마 제국에 속하던 영토에는 게르만족이 이주해 살기 시작했고, 이들 중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8세기 말 게르만족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던 샤를마뉴는 게르만족의 왕국들을 대부분 정복했고, 로마 총대주교이던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로써 오늘날 서유럽 지역에는 ‘게르만족-로마 가톨릭’ 문명이 형성됐고, 이 문명에서는 종교 지도자인 교황이 정치 지도자인 황제보다 우위에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축소된 채 유지되고 있었으나, 7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의 치세를 분기점으로 옛 로마 제국의 성격을 점차 잃고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으로 거듭났다. 이 제국을 수도의 이름 비잔티온을 따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거 로마의 황제가 제사장이기도 했으므로 비잔티움 황제 역시 정치 지도자이면서 종교 지도자였다.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총대주교가 황제 아래에 있었다.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 문화-정교회(Orthod-oxy)’를 특징으로 하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북부 아프리카와 오리엔트 지역 역시 과거에는 로마 제국에 속했으나, 이슬람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이슬람 세력은 8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 지중해 남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이슬람 문명’으로 뒤덮었다.
이로써 지중해 문명은 오늘날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샤를마뉴 제국,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문명으로 분열했다.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지중해를 서유럽, 동유럽, 이슬람이 나누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늦춰 잡아도 800년부터 십자군이 발생한 시기까지 지중해는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 셈이었다. 제1차, 제2차 십자군은 육지로 이동했는데, 이 같은 사실은 해로가 봉쇄돼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십자군은 서유럽에서 출발해 동유럽을 지나 그리스를 통과해 터키에 이르렀다. 터키에서부터는 육지와 해로를 모두 이용했다. 제3차 십자군에 이르러서는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의 십자군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독일을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십자군만이 육지로 이동했다. 악명 높은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제공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중해를 통한 해상운송이 회복된 것이다.
해상운송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든 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생긴 기독교 영지들도 한몫을 했다. 앞서 서술했듯 제1차 십자군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4개의 영지가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데사 백작령이 이슬람 수중으로 넘어갔고, 뒤이은 십자군에서도 이 백작령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선 당연히 여러 가지 물건이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고자 유럽으로부터 물자가 수송됐다. 물자 유통은 기독교도의 영지들이 이슬람 수중에 넘어간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이 같은 유통의 중심 역할을 떠맡았다. 이탈리아를 출발한 선박은 그리스를 거쳐 소아시아 반도와 키프러스 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각지로 물건이 실려나갔다.
그러나 유럽에서 전해지는 물건보다 유럽으로 보내는 물건이 값어치가 더 나갔다. 유럽은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와 면직물, 귀금속을 수입했다. 중동에서 출발한 배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도착했고, 일부 선박은 남부 프랑스와 스페인 동부로 항해했다. 중동의 산물은 강을 타고 서유럽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상업의 온기가 유럽의 말초신경까지 전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로마 제국 몰락 이후 단절됐다고 할 만큼 쇠퇴했던 지중해 무역은 십자군을 통해서 부활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업의 부활은 거의 농업만으로 자급자족하던 유럽의 여러 마을에 외부의 산물을 가져다주었고, 도시가 발달하는 디딤돌로 작용했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은 서유럽이 중국-인도-중동-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세계 경제에 연결됐음을 의미한다.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한 물건이 유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 인도의 문화도 들어왔다. 예컨대 11세기 말 중국에서 사용하던 나침반이 12세기에는 유럽으로 유입됐다. 오늘날 베네치아에서 볼 수 있는 유리공예는 시리아에서 전래된 것이며, 사탕수수나 비단 같은 새로운 물품도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치품이 유럽으로 운송됐다. 유럽은 귀금속, 목재, 모피 등을 제외하면 반대급부로 제공할 것이 없었다. 동방으로 수출할 물품이 필요했던 유럽은 모직물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도시다. 이들은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에 물자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과도 물자를 거래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종교가 아니라 이탈리아와 중동 사이에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베네치아 같은 도시에서 중동에 이르는 바닷길은 비잔티움 제국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통행허가를 받고, 관세를 납부해야 했다. 이러한 비잔티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베네치아는 십자군을 사주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도록 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에게는 종교보다 상업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후 지중해 상업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의 패권 장악은 십자군의 변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이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발생한 ‘교류’라면,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럽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 교류도 있었다. 그것은 이슬람 학문의 수입이었다. 물론 십자군 이전부터 이슬람의 학문은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 칼리프국(Caliphate of Cordoba)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아랍어로 번역됐고, 신플라톤학파의 저술 역시 비슷한 시기에 번역됐다. 그리고 12세기까지 이슬람의 여러 학자가 이 저작들을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이슬람의 학문적 업적이 십자군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건너갔다. 학문적 교류는 대부분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이웃해 함께 살던 지역에서 이뤄졌다.
12세기에는 에스파냐의 톨레도를 중심지로 삼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거의 모두 라틴어로 번역됐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거의 모든 지식 분야에서 학문적 진전이 이뤄졌다. 특히 아베로에스(Averroes)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랍어 주석이 라틴어로 번역돼 중세 스콜라 철학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철학뿐 아니라 수학 분야에서도 기독교 세계로 학문이 전파됐다. 인도에서 유래한 아라비아 숫자와 영(零)이 유럽에 도입됐고, 오늘날 컴퓨터 용어로 자주 사용되는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수학자 알콰리즈미(al-Khwarizmi)의 대수학도 기독교 세계로 수입됐다. 과학 분야의 학문 수입도 적지 않았는데 연금술, 점성술이 대표적이다. 연금술이나 점성술은 그 자체로서는 일종의 거짓 과학이지만, 연금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화학 기구가 발전했으며, 점성술 역시 천문 관측기구의 제작과 천문도 작성의 디딤돌 구실을 했다.
요컨대 유럽인은 십자군을 통해서 이슬람의 학문세계를 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온전히 되살릴 수 있었으며,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천문학 등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십자군이 당초 의도한 목적을 이뤘다고는 할 수 없다. 성지 회복이라는 순수한 종교적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십자군이라고 하더라도 종종 광신이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변질되곤 했다. 애초에 십자군을 제창했던 교황은 단일한 기독교 세계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제4차 십자군이 보여주듯이 십자군에 참여한 기사들은 토지와 재물에 관심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종종 벌어졌던 광신에 가까운 행동은 내부 결속을 다지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가령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나서 벌인 살육은 너무나도 심각해 솔로몬 신전 옆에 피의 도랑이 생겨 발목까지 잠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화는 이슬람이 단결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반대로 하틴(Hattin)의 전투에서 살라딘이 성당기사단을 학살한 사건은 십자군 쪽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증오심은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날에도 십자군이라는 단어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이용되곤 한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십자군의 중대한 결과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류일 것이다. 물론 두 문명의 교류가 십자군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교류는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군을 통해 문명의 교류가 대규모로 이뤄지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해 르네상스 시대까지 영광을 누렸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도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십자군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한 ‘충돌’ 속에서도 의도하지 않은 ‘교류’가 발생하고, 이것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유럽이 이슬람 학문을 수입한 것 역시 충돌의 과정에서 이뤄진 교류의 결과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이 눈앞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학문의 수입은 유럽이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그 장점을 취해 자신들의 장기적 발전을 도모하도록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모두가 종교와 전쟁에 매몰돼 있을 때도 학문의 교류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들이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충돌이 발생하고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평화롭게 교류하고 있으며, 심지어 충돌이 벌어지는 곳에서조차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십자군에서 보았듯이, 교류와 충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며, 교류와 충돌 모두 적개심을 품게 할 수도, 이해를 증진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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