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공작산 수타사

醉月 2011. 4. 22. 08:49

공작산 수타사

하늘과 땅이 함께 부르는 가을노래를 듣다

볕!태양의 기운을 이 말만큼 온전히 담아내는 말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빛! 이 말 또한 태양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볕이 담고 있는 온기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빛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이 사물을 비추어 보이기만 할 뿐입니다. 하여 나는, 빛이 태양의 이성이라면 볕은 태양의 감성이라 부르겠습니다.


볕 좋은 계절입니다. 함빡 붉은 고추, 천하태평으로 누런 들판의 벼, 색색으로 물들어가는 풀과 나무…. 이맘 때 하늘이 높아가는 건, 자신이 빚어 놓고도 믿기지 않은 듯,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살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계절에는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내면으로 침잠할 경우 자기연민이라는 치명적 함정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볕의 감성으로 신들메를 조이고 산수간을 거닐어야 합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인 자연의 품에서는 인간사에서 작동하던 두뇌 기능이 정지돼 버립니다.


사실 산수간을 거닌다고 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인간에게 자연은 대상화된 존재이니까요. 그나마 따뜻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 있다면 절집일 겁니다. 특히 수타사처럼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은 쭈뼛거림 없이 자연에 동화되게 합니다. 절집도 사람을 압도하지 않고 주변의 산세도 편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대적광전 뒤에서 가을볕을 즐기는 석불. 과장된 육계에 비해 표정은 인간적이다.

작은 규모에서 나오는 심원함과 날렵한 공간감


공작산 기슭, 흔히 수타사계곡으로 불리는 덕지천 상류에 이르자 화강암으로 만든 다리가 일주문인양 절의 입구를 알립니다. 그때까지도 절은 지붕만 살짝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살짝 정체를 드러내는 고수의 거동과 같은 것입니다.


절의 정문 격인 봉황문 앞에 서자 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봉황문 사이로 흥회루, 흥회루의 기둥 사이로 대적광전이 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공간의 깊이는 혼을 쏙 빼 놓을 만큼 흡인력이 강합니다. 봉황문의 판벽이 만들어내는 폐쇄감이 통로의 개방성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지세의 흐름에 따라 상승하는 흥회루와 대적광전을 한 축에 배치하여 단 한번의 시선으로도 곧장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절대 미감을 보여주는 프레임 구실을 하는 절집의 문루는 많습니다만, 이렇게 작은 규모의 절에서 심원하면서도 날렵한 공간감을 보여 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봉황문을 지날 때, 한 순간 빛이 차단됩니다. 이어서 환히 열리는 공간은, 흥회루 너머가 그야말로 대적광(大寂光), 즉 빛의 부처인 비로자나의 세계임을 몸으로 느끼게 합니다.


흥회루는 이름 그대로 누각이 아니라 단층으로 된 맛배집입니다. 문루가 아니면서 루(樓)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상징적 의미와 기능적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상징적 의미를 보자면, 고창 선운사의 만세루처럼 누각은 아니지만 사실상 누각이 있어야 할 곳에 서서 다음에 전개될 공간이 불계(佛界)임을 알리는 문루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2층으로 짓지 않았냐 하면, 산지 가람이지만 기울기가 가파르지 않아서 다른 전각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절집에서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 1 봉황문(사천왕문)에서 흥회루를 바라본 모습. 흥회루의 문으로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이 보인다. 2중의 프레임으로 하여 비로자나불이 극적으로 부각된다. 보물 제745호인 <월인석보>는 봉황문의 사천왕상을 수리할 때 복장 속에서 발견됐다. / 2 심우산방 앞에서의 한담. 문전이 한가로우면 마음도 한가로운 법. / 3 수타사 초입의 부도밭. 세계의 무상을 일러주는 설법전이다. / 4 대적광전 기단석의 담쟁이. 돌의 핏줄인양 하다. / 5 원통보전 내부. 중생의 원을 다 들어 주려는 불보살의 원력을 본다.
▲ 가을 하늘을 더 밀어올리는 대적광전 추녀. 보수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빛바랜 단청이 더 고풍스러워 보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 같다. / 수타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 비로자나불을 모신 집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다음 1632년(조선 인조 10)에 다시 세워진 건물이다.

다음으로 기능적 의미는 가운뎃마당을 구획하고,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주불전으로 나아갈 때 전개되는 공간에 입체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식의 진입 방법을 모퉁이 진입, 즉 우각(隅角) 진입이라고 합니다. 이에 더하여 실용적인 기능은 마당의 연장으로서 대규모의 법회가 있을 때 사람들을 수용하는 역할을 합니다.


흥회루를 지나면 가운뎃마당입니다. 전면으로 대적광전과 원통보전, 왼쪽으로 백연당, 오른쪽으로 심우산방이 긴네모꼴 마당을 형성합니다. 본디는 주불전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바른네모꼴이었으나 1992년에 원통보전을 새로 지으면서 모양이 바뀌었습니다. 대적광전보다 원통보전이 상대적으로 너무 커서 기형적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대적광전이 좁기 때문에 예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입니다. 전통문화 공간으로서의 미학적 고려보다는 예배공간으로서 신앙적 필요가 더 컸기 때문이겠지요.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조금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조화 때문에 대적광전(도유형문화재 제17호)의 단아함이 더욱 돋보입니다. 조선시대 양식으로 추정되는 다포집이지만 공포가 간결하고 소박하여 더 정감이 갑니다. 기단석은 다듬은 돌이지만 기둥 아래의 주초는 막돌입니다. 창건 이후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진 역사의 흔적입니다.

수타사는 본디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일월사란 이름으로 우적산에 창건된 절입니다. 이후 조선 선조 2년(1569)에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라는 현 위치로 옮기고 수타사(水墮寺)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잿더미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수타사가 오늘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진 것은 1632년(인조 10)에 공잠(工岑) 스님이 대적광전을 중수하면서부터입니다. 이어서 1644년에 학준 스님이 선당, 1647년(인조 25)에 계철과 학준 스님이 승당, 1658년(효종 9)에 승해 스님 등이 흥회루, 1674년(현종 15)에 법륜 스님이 봉황문을 세웠습니다.


1881년(순조 11)에는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하는 현재의 이름인 수타사(壽陀寺)로 바뀌었습니다. 일월사를 현 위치로 옮기고부터 절 옆 계곡의 소에 해마다 스님이 한 명씩 빠져 죽는 변이 생겼는데, 도참(圖讖)에 밝은 한 스님이 절 이름자가 ‘물 수(水)에 떨어질 타(墮)’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전합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1976년에 심우산방을 중수하고, 1977년에 삼성각을 세웠으며, 1992년에 원통보전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 1 대적광전과 마주한 흥회루. 당호에 ‘루(樓)’를 달고 있지만 1층 건물이다. 1658년(효종 9)에 세워졌다. / 2 대적광전 안의 닫집. 비천상과 연꽃 조각이 소박하면서도 역동적이다. / 3 가을나들이 길에 수타사를 찾은 인근 부대의 군인들. 모범적인 군생활을 한 병사들을 격려하는 길이라 한다. 평화를 위해서 무력을 키워야 하는 세간사의 모순을 보는 듯도 하다.

보기 좋은 계곡이라기보다 느끼기 좋은 곳


수타사를 둘러싼 자연 경관도 수타사처럼 단아하면서도 흡인력이 강합니다. 수타사계곡은 여름철에 물놀이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지만 계곡을 따라 흐르는 오솔길이 더 운치가 있습니다. 수타교를 건너기 전 왼쪽으로 계곡을 따라 흐르는 길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충직한 호위병처럼 숲으로 드는 길을 알려 줍니다. 계곡으로 내려서기도 하고 기슭이 야박한 곳에서는 산을 허물지 않고 철제 다리를 놓아 계곡을 따라 오릅니다. 마음 내키면 곧장 계곡으로 내려가 반석 위에 앉아 탁족(濯足)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수타사계곡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기암괴석이 즐비한 그런 계곡이 아닙니다. 산세에 비해서 상당히 넓고 반석으로 흐르는 물이 편안합니다. 군데군데 물살이 바위를 가르고 소를 만들어 놓은 곳이 많아서 편안히 쉬기 좋은 그런 계곡입니다. 보기에 좋은 계곡이라기보다는 몸으로 느끼기 좋은 곳이라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수타사계곡을 따라 걷노라니, 산수간을 노닌다는 말이 딱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눈 아래로는 편안한 계류, 눈을 들면 기분 좋게 솟구치는 산. 마침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나무들은 물이 줄어서 바닥을 드러낸 계곡을 배경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뽐냅니다.


다시 절로 돌아오니 봉황문의 추녀에 가을볕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추녀 끝의 연화문이 막 피어난 듯 화사합니다. 하늘과 땅이 함께 부르는 가을노래입니다.


수타사 계곡 오솔길 걷기

계곡을 즐기면서 삼림욕 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다. 오감으로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수타사로 드는 다리를 건너기 전 왼쪽으로 팻말이 붙어 있다. 적당한 거리는 ?소까지 1,7Km. 군데군데 계곡으로 내려서기 좋은 샛길이 나온다. 물을 건너야 할 곳이 아니면 계속 계곡으로 걸을 수도 있다. 상류로 오를수록 조금씩 계곡이 좁아지지만 반석이 많아서 위험하지는 않다.  귀ㅇ소는 계류가 바위를 가른 다음 세찬 기세로 흘러내리며 소를 이룬 곳이다. 반석에 누워 물소리를 들으며 양명한 가을볕을 쬐면 한겨울도 거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