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금강산 초입의 큰 사찰
불혹의 나이가 넘도록 살아 왔으면서 아직도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듯한데 마음에 여유가 없는 탓인지 선뜻 7번 국도를 따라가는 동해안 일주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기암절벽에 곡예를 하듯 매달리고 구부러진 도로를 따라 철썩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맛이 그만일 듯싶다. 몇몇 개의 해수욕장이 있을 것이며 파도를 피해 바닷가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어촌의 정겨움은 어떨 것인가? 어릴 적 고향 개울가에서 만들어 떠내려보낸 종이배처럼 작게 보일 만큼 멀리 떠 있는 고기잡이배도 보고싶고 끼룩거리며 날고 있을 갈매기도 보고싶다.
맛이란 게 뭔가? 맛이란 음식에만 있는 것은 아닐 거다. 맛이란 것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무엇'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음식이 마냥 달기만 하고 보기에 화려할 뿐인 것을 맛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달콤 새콤 매콤 쌉싸롬 짭짜롬' 뭐 이렇게 복잡 미묘한 것이 잘 조화를 이룰 때 맛이 있다고 느낄 것이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런 뭔가가 녹아 있는 음식이 정말 맛있는 음식일 게다. 눈 맛으로 말하자면 화려하지는 않으나 보면 볼수록 마음에 기쁨을 주며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뭔가가 있는 것이 눈 맛다운 눈 맛이 아닌가 모르겠다.
이런 저런 모든 것에 나름대로 묘미가 있을 테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도 살맛이란 게 있을 거다. 여러 가지 맛과 자극이 복잡 미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 '맛나다'는 느낌을 주듯 살맛 또한 그럴 것이다. 행복과 불행,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기쁨과 슬픔과 안락과 고통 게다가 갈등과 걱정이 적당히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어 기복을 가져다줄 때 살맛을 느끼리라 생각된다.
조금만 여유 있는 마음으로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여행을 하면 그런 눈 맛과 살맛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강릉과 속초를 지나 7번 국도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가다 보면 건봉사를 찾아갈 수 있다.
건봉사는 민간인출입통제선 북쪽에 위치하여 6.25 전쟁 이후부터 출입이 제한되다 1989년 1월 20일부터 자유 출입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무려 35년간이나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라고 한다.
1989년 1월 20일 이전에도 사월 초파일에만 민간인에게 개방되고 다른 때는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던 곳이었지만 현재는 지역주민들은 물론 전국의 여행객과 불자들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가끔 큰스님들이 입적하시면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사리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는다. 사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다. 옥구슬처럼 영롱한 빛에 동글동글한 모습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다.
건봉사에서 친견할 수 있는 사리는 2547년 전에 입멸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라고 한다. 2547년의 장고한 세월도 세월이지만 부처님의 진신에서 얻어진 사리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다.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 있으며 서기 520년인 신라 법흥왕 7년에 하도화상이 원각사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그후 1358년(고려 공민왕 7년)에 나옹화상이 중수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세종대왕이 원당으로 정하고 어실각(御室閣)을 건립하기도 하였단다. 규모나 역사성에서 한국불교의 대성지로 현재의 신흥사와 낙산사, 그리고 백담사를 말사로 두기도 하였었지만 지금은 건봉사가 신흥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다리를 한번 더 건너 교동천 제방도로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홍예교를 건너 고갯길을 넘는다. 그러면 거기에 건봉사가 있다. 건봉사 입구엔 구국과 중생구제를 염원하시던 대덕고승들의 영혼이 봉안되어 있는 부도가 수십 개 군집한 부도 밭이 있다. 이곳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불이문에 도착하게 된다.
안내표지판에 분명 <금강산 건봉사>라고 되어 있다. 금강산은 이북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바로 이곳부터 금강산은 시작된다고 한다. 건봉사는 금강산자락 초입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한에 있는 수많은 절 중 최북단에 위치한 절인 듯하다.
불이문에서 조금 걸어 개울 같은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정면으로 적멸보궁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으며 그 다리 안쪽에 대웅전이 보인다. 계곡건너 대웅전을 가기 위해서는 계곡 위에 놓여진 능파교를 건너야 한다.
능파교는 피안교라고도 한단다.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하는 고해의 이쪽 언덕 건너편에 있는 저 언덕,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보살의 세계를 피안이라 하는데 바로 그 세계로 들어가는 다리란 뜻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능파교란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금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보살님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능파교를 건너게 되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에 염불원이 있다. 바로 이 염불원에 부처님 진신치아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친견할 수 있는 광영이 주어진다.
인공 장기가 등장하고 나노(nano) 스케일의 재료가 실생활에 활용되고 있는 현재까지도 사리를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분석하고 증명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한 때 몇몇 사람들이 사리를 논리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아주 높은 온도로 가열하고 해머로 두들겨 보았지만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사리를 불가사의한 구슬 또는 영골(靈骨)이라 하기도 한단다.
사리는 끝없이 육바라밀(六波羅蜜=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을 실천하고 덕을 쌓음으로 생기며,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닦아 생기는 것으로써 매우 얻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고승에게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리는 바로 그대로 간직해야 할 영물이지 과학이나 논리를 빌어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우매함을 넘어 형이상학적 신비함에 속하는 사리는 오로지 엄숙한 마음으로 받들어야 경배의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건봉사 염불원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어 다비를 마치고 나온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염불원에서 진신치아사리 친견과 대웅전 참배를 마치고 다시 능파교를 건너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적멸보궁과 명부전(지장전)이 나온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이다. 적멸이란 열반(涅槃)의 다른 말로 미혹의 세계를 영원히 벗어나 무한한 안락의 경지에 도달한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송광사를 삼보사찰이라고 하는데 그 중 통도사는 불보사찰이라고 한다. 바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 놓았기에 통도사를 불보사찰이라고 하며 적멸보궁 안(뒤)쪽에 있는 부도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건봉사 적멸보궁에서도 불상은 찾아볼 수 없다. 뒤쪽에 지신사리가 봉안된 부도가 있을 뿐이다.
건봉사도 6. 25때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당시 경내에 주둔했던 아군 11사단 13연대의 실화에 의해 766칸의 웅대한 건물과 사찰, 국보급 보물들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과 당사자의 입장이 아닌 상태에서 결과만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자칫 오판의 우를 범할 수 있다고 하여도 아군의 실화에 의하여 고이 간직되고 기려야 할 대 사찰이 소실되었다는 것은 불교사뿐만 아니라 역사에 옹이로 남을 만큼 서글픈 사실이다.
7번 국도를 따라 건봉사엘 가다보면 부지기수의 해수욕장과 울창한 송림을 지나가게 된다. 탁 트인 바다에서 여유를 얻고 울창한 산림에서 오밀조밀한 눈 맛을 느끼게 된다.
남북 문제는 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동족간의 피가 전제되었음에 좀더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며 금강산 자락 초입에 자리한 건봉사를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
걸망에담아온 산사이야기(7)-두륜산대흥사
승병 서산대사의 구국혼과 초의선사 다도가 머무는 곳
낮 시간이 긴 한여름이지만 새벽 3시를 갓 넘긴 산사 주변은 온통 깜깜하기만 하다. 아스팔트 포장이 끝나고 발길에 툭툭 차이는 돌을 더듬으며 찾아가는 산사 쪽에선 이미 따그락 따그락 목탁 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새벽 산사에서 기원하는 목탁소리는 생각보다 멀리까지 들린다.
초입 매표소를 지나 30여 분은 올라온 듯 하다. 이른 시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울창한 숲 속은 마치 터널처럼 앞쪽으로만 눈길이 트일 뿐 위와 옆은 어둡기만 하다. 그런 녹음의 숲 터널을 걸어온 것이다. 장마철이라 넉넉히 흐르는 계곡의 물줄기 소리가 마음을 추스르게 한다. 피안교를 건너 두 번째 일주문을 지나니 가로등 불빛에 부도군이 보인다.
수십 기의 부도가 운집해 작은 부도 마을을 이루었다. 이 부도군 속에는 승병 서산대사의 고혼이 잠들어 있을 부도도 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 진다. 이쯤에서 잠시 발걸음 멈추고 부도군을 향하여 합장삼배하였다.
컴컴한 저편에 경내를 돌아보고 있는 스님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 도량석을 하고 계신 모양이다. 목탁소리를 따라 금당천을 건너고 침계루를 지나니 대웅전 앞마당이다. 주변을 둘러보나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법당에서 예불을 올리고 있는 스님들만 계신 듯 하다.
고요함 속의 또 다른 고요함에 빠져든 기분이다. 넓은 공간이 텅 빈 듯 하더니 마음속에 뭔가가 차 오르는 기분이다. 뭐라고 할까? 오열 같기도 하고 서러움 같기도 하고 희열 같기도 한 그런 뭔가가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아! 새벽산사여….
5시 50분이 지나니 대중들에게 아침공양을 알리는 타종이 시작된다. 뎅 뎅∼ 목탁소리가 맑고 경쾌한 음파로 귓전을 울리며 머리로 다가왔다면 종소리는 은은함과 푸근함으로 가슴에 다가온다.
주변은 이미 훤해지고…, 아직도 사람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산사를 뒤로하며 아래로 아래로 발길을 옮긴다.
대흥사는 주변의 풍광과 산세도 좋지만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켰던 서산대사와 다도문화를 부흥시켜 차 문화의 성인이라 일컫는 다성 초의선사 자취가 어린 곳으로 유명하다.
대흥사에 있는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1669년에 건립한 사당이라고 한다. 이조 22대, 집권 12년에 정조왕이 표충사라 사액 하였으며,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관급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1기는 <표충사건사적비>고 다른 1기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로 두기 모두 높이가 3m가 넘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 서산대사는 청허대사라고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청허는 서산대사의 호이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80노구를 이끌고 구국운동의 선봉에 나서 활약한 승병대장으로 선조가 <국일대선사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란 긴 호를 내렸다고도 한다.
서산대사는 '낮이 되면 차 한 잔, 밥이 오면 한바탕 잠자네. 푸른 산과 흰 구름, 더불어 만사에 생멸(生滅)이 없음을 말하네' '승려의 일생하는 일은 차 달여 조주(趙州)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시로 선과 차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한다.
표충사로 들어가기 직전 오른쪽엔 여여한 표정에 단지를 들고 있는 노구의 동상이 하나 있으니 이이가 바로 초의선사다.
다도(茶道)란 무엇인가? 가끔 잡지나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접하게 되는 다도란 것은 까다롭기도 하고 엄청난 정성과 조심스런 몸 동작을 요구한다.
다성이라 일컫는 초의선사가 말씀하신 다도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그 잘 끓인 물과 좋은 차를 적절히 조합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지 결코 유별나거나 남다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1786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5세 때 강변에서 놀다 탁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에 있던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지식을 얻고 선을 행하다 대흥사 동쪽 계곡에 일지암을 짓고 40여년 동안 홀로 생활하면서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곤 하였다 한다.
초의선사 사상은 선사상(禪思想)과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집약된다고 한다. 다선일미사상은 차와 선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라는 제법불이(諸法不二)로 이러한 사상이 바로 초의선사가 강조한 다도의 근본일 듯하다.
▲ 서산대사의 구국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으로 표충사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있다.
1866년 세수 80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셨으며 대흥사에서 배출된 걸출한 13대종사 중 13번째 대종사이기도 한 분이 바로 초의선사라고 한다.
초의선사에 다도가 계승되고 있을 대흥사 동다실에서 차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굳게 닫힌 문이 열리지 않는다. 마음으로나마 두륜산 줄기를 흘러온 정수로 찻물을 끓이고 좋은 차를 넣어서 한 잔 마시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찻물은 없었으나 혀끝엔 차 맛이 맺히고 코끝엔 차 향이 맴도는 듯 하다.
대흥사에는 이 외에도 많은 전각과 유물들이 있다. 가허루를 지나 들어가게 되는 천불전도 있고 대웅전 옆으로 명부전과 응진당 그리고 삼층석탑도 있다. 표충사를 들어가는 길목의 오른쪽에 있는 성보박물관엔 대흥사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고 대종사님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많은 성보들이 있다.
숲 터널이라고 하는 곳은 꽤 여러 곳이 있다. 그러나 이곳, 대흥사 입구를 걸어보지 않고서 숲 터널을 이야기하는 것은 숲의 진모를 보지 못한 허풍이거나 과장일 듯 싶다.
고등학교 때 <솔바람 물결소리>란 책제목을 보고 이런저런 모습을 상상해 본적이 있다. 그런데 바로 대흥사 입구의 분위기가 바로 <솔바람 물결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땅 끝 해남에 자리하고 있는 대흥사는 역시 멀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숲길다운 숲길, 숲 터널다운 숲 터널에서 <솔바람 물결소리>같은 분위기의 명상 시간을 갖고 싶다면 찾아가는 수고쯤 기꺼이 감수하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휴전선 이남에 있는 무지기 수의 산중 언뜻 기억나는 산 이름을 대라고 하면 어떤 산 이름들을 말할까? 한라산, 치악산, 설악산, 소백산, 태백산, 대둔산, 덕유산, 계룡산, 지리산 그리고 고향에 있는 앞산이나 뒷산쯤을 말할 듯 하다.
궁금증이 생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지리산을 말할 것인가가. 교과서에 나와서가 아니라 지리산을 모르는 성인은 없을 듯하다. 전남·북과 경남 삼도를 걸치고 있는 규모도 규모지만 아직 상처의 딱지처럼 지리산에 묻어있는 6.25의 상흔 때문일지도 모른다.
2년 전 지리산을 1박 2일로 종주 한 적이 있다. 2박 3일 정도면 좋을 듯한데 다른 목적이 있어 최소한의 시간을 잡았지만, 가던 길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반야봉도 빠트리지 않고 들렀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일정 부분이나 많이 알려진 계곡을 한번쯤은 관광 삼아 다녀왔겠지만 정작 지리산을 종주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듯 하다.
화엄사부터 노고단 하단 평지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고작 서너 시간이 되지만 계속된 오르막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하지만 지리산 종주 전 코스 중에서 이곳만큼 아름답고 기억에 남을 만한 곳도 드물 듯 하다. 원래 힘든 과정이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지만 오르막 내내 시원한 계곡이 길동무처럼 함께 한다.
자동차로 노고단 하단인 성삼재까지 가고 그곳부터 종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꽤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화엄사부터 노고단까지를 걷지 않고서 지리산 종주를 이야기하는 것은 뭔가를 빠트린 미완성의 종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554년 신라 진흥왕 5년에 인도 승려 연기에 의해서 창건되고, 642년 선덕여왕 11년 자장이 중창하였으며 의상대사가 장륙전(현재의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만들었다는 창건설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찰들의 대부분이 이런저런 재란에 황폐화되고 소실되었듯 화엄사도 정유재란 때 현재의 각황전인 장륙전과 화엄경이 파괴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그 후 1630년 인조 8년에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년)에 의해 중수되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받았고, 1702년 숙종 28년에 장륙전이 중건되어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까지 얻었다고 한다.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고이며 신라사찰 가운데 지리산 입산 1호의 천년 거찰이다.
▲ 이른 시간 종각에 걸려있는 달빛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매번 절을 찾으며 느끼는 소감이지만 절은 곧 우리 나라 대다수 보물과 유물의 보고라는 생각이다. 화엄사의 넓은 경내 대부분 전각과 탑이 국보이자 보물 그리고 유물임을 알게되면 이 곳이 찬란한 불교 문화의 보고임에 벅찬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규모에 걸맞게 큼지막하게 <지리산대화엄사(智異山大華嚴寺)>라 쓰여진 편액을 달고 있는 산문을 들어서면 산사냄새 물씬한 숲길로 들어선다. 서둘지 않는 넉넉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양반 집 대문 같은 불이문에 다다르게 된다.
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에 이르게 된다. 대개 다른 절에 있는 보제루는 그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에 이르게 되어있는데 화엄사의 보제루는 루의 옆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보제루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계단처럼 층진 넓은 공간이 나온다. 아래층 마당 형태의 공간에 동서 두 개의 탑이 사선방향으로 보인다.
동쪽 탑 위 부분 보다 한단 높은 위 터에 대웅전이 있고, 서쪽 탑의 위 부분, 대웅전과 평탄한 역 기역자 형태의 위치에 각황전이 있다.
목탁소리에 장엄이란 표현이 왠지 어색해 보일 듯 하다. 그러나 화엄사의 목탁소리는 다른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각황전과 대웅전 그리고 명부전과 나한전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는 주변의 산 벽까지 갔다 다시 돌아오며 회오리바람처럼 울림을 만들어 낸다. 자연이 연출하는 입체음향 효과를 덤으로 실은 목탁소리가 청각의 단계를 넘어 가슴 저 아래까지 숨어든다.
전각에서 흘러나오는 조그만 불빛이 탁한 머릿속을 밝게 해 준다. 적막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조용한 새벽 산사에서 목탁소리와 조화를 이루는 스님들의 독경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에 퐁당하고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맴 돌이 여운을 만든다.
보름 달빛이 남아있는 이른 새벽에 맞이한 화엄사의 아침예불 목탁소리와 독경소리는 귓전을 윙윙 울리며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으로 모으게 한다.
각황전 북쪽 측면에는 자그마한 나한전이 각황전과 같은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대웅전 서 쪽 측면에는 원통전등 작은 전각이 대웅전과 같은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전각의 배치는 대웅전과 보제루를 잇는 축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각황전의 중심과 앞에선 석등을 잇는 축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과 금강문 그리고 천왕문들이 모두 이 중심축 선상에서 조금씩 빗겨 태극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08계단을 올라 효대에 오르면 국보 제35호인 4사자석탑이 있다. 4사자석탑은 중간층 받침돌 모퉁이에 하나씩 있는 4개의 연꽃자리 위에 4마리 사자가 앉아 위층 탑 돌을 받치고 있다. 모퉁이에 있는 4마리의 사자들 중앙에는 스님 한 분이 위엄한 모습으로 사자들과 같이 위층 탑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탑의 기초 위로 3층의 탑 몸체(塔身部)가 있고 그 위에 커다란 꾸밈없이 담백하게 처리된 탑 꼭지부(上輪部)가 있다.
석탑 속의 스님은 이 절을 창건하신 연기조사의 어머님이고 공양석등에 계신 스님은 연기조사라고 한다. 4사자석탑과 공양석등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자식이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모습으로, 연기조사가 그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모양을 형상화하였다 한다. 어머니와 자식의 애틋한 사랑과 효가 형성화 된 석탑과 석등이 있는 이 터를 효대(孝臺)라 부른다.
도선국사 의천이 효대에서 읊은 시
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峰上絶纖埃
彷徨盡日思前事
薄暮悲風起孝臺
적멸당 앞에는 훌륭한 경치도 많고
길상봉 위에는 가는 티끌조차 끊겼네
하루 종일 거닐면서 과거사를 생각하니
날 저문 효대에 슬픈 바람 이는구나.
화엄사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많은 전각과 탑 그리고 비석 등이 있다. 그 많은 전각 중에 규모나 역사성에서 당연 시선을 고정시키는 곳은 역시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각황전이다.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숙종 25년에 시작하여 28년에 완성된 2층 팔각지붕의 전각으로 건립배경과 <각황전>이라 부르게 된 설화가 있어, 최정희님의 한국불교 전설 99에 있는 <공주의 울음과 불사>를 빌어 소개한다.
역시 새벽산사는 일상에 지치고 피곤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준다.
아침예불로 시작되는 산사의 맑은 목탁소리를 들으며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지리산 종주의 첫걸음을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주지와 대중은 들으라.』
『예.』
『내일 아침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을 화주승으로 삼아라.』
때는 조선 숙종조. 임란 때 소실된 장륙전 중창 원력을 세운 대중들이 백일기도를 마치기 전날 밤!
대중은 일제히 백발의 노인으로부터 이 같은 부촉을 받았다.
회향일인 이튿날 아침 큰방에 모인 대중은 긴장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려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었으나 한결같이 흰 손이 되곤 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주지 계파 스님뿐.
스님은 스스로 공양주 소임을 맡아 백일간 부엌일에만 충실했기에 아예 항아리에 손을 넣지 않았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마지막으로 항아리에 손을 넣게되었다.
이게 웬일인가?
계파 스님의 손에는 밀가루 한 점 묻지 않았다.
스님은 걱정이 태산 같아 밤새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너무 걱정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
간밤 꿈에 만났던 그 백발의 노승이 다시 나타나 일깨워 주는 게 아닌가?
『나무 관세음보살.』
새벽 예불 종소리가 끝나자 주지 스님은 가사장삼을 챙겨서 산기슭 아랫마을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도록 아무도 만나지 못한 계파 스님은 초조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아! 내가 한낱 꿈속의 일을 가지고….』
씁쓰레 웃으며 마지막 마을 모퉁이를 돌아설 때! 드디어 눈앞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기쁨에 넘친 스님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스님은 남루한 거지 노파의 모습에 이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발노승의 말을 믿기로 한 스님은 노파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눈이 휘둥그래진 거지 노파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아니 스님, 쇤네는….』
그러나 스님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소승의 소망은 불타 없어진 절을 다시 복구하는 일이옵니다. 하오니 절을 지어 주시옵소서.』
『아이구, 나같이 천한 계집이 스님에게 절을 받다니 말이나 되나 안되지 안돼....』
총총히 사라지는 주지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노파는 결심했다.
『다 늙은 것이 주지 스님께 욕을 뵈인 셈이니 이젠 죽는 수밖에 없지. 난 죽어야 해. 아무데도 쓸데없는 이 하찮은 몸, 죽어 다음에 태어나 큰 불사를 이루도록 부디 문수 대성은 가피를 내리소서........』
할멈은 그 길로 강가로 갔다. 그리곤 짚신을 바위 위에 가지런히 벗어 놓고는 강물에 투신자살을 하였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자 스님은 살인범 누명을 쓰게 되었다.
『아, 내가 허무맹랑한 꿈을 믿다니.』
스님은 바랑을 짊어진 채 피신 길에 올라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6년 후.
창경궁 안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울음을 그치지 않는 공주를 큰길에 다락을 지어 가두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폐하! 노여움을 푸시고 명을 거두어 주옵소서.』
『듣기 싫소! 어서 공주를 다락에 가두고 명의를 불러 울음병을 고치도록 하라.』
이 소문을 전해들은 계파 스님은 호기심에 대궐 앞 공주가 울고 있는 다락 아래로 가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울기만 하던 공주가 울음을 뚝 그쳤던 것이다.
『공주!』
황후는 방실방실 웃어대는 공주를 번쩍 안으며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아니, 공주가 손가락으로 누구를 가리키며 웃사옵니다. 폐하!』
『허허! 정말 그렇구나.』
황제와 황후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폐하! 저기 저 스님을 가리키고 있사옵니다.』
『응, 스님을?』
모든 사람의 시선이 계파 스님에게 쏠렸다.
주위를 의식한 스님이 그만 자리를 떠나려 하자 공주는 또 울기 시작했다.
『여봐라, 저 스님을 모시도록 하라.』
황제 앞에 부복한 스님은 얼떨떨했을 게다.
『폐하, 죽어야 할 몸이오니 응분의 벌을 주시옵소서.』
스님은 지난날의 일을 낱낱이 고하며 눈물을 흘렸다.
울음을 멈춘 공주는 빠르르 달려와 스님에게 매달렸다.
그리고는 태어날 때부터 펴지 않던 한 손을 스님이 만지니 스스로 펴는 것이 아닌가?
이!∼ 그 손바닥엔 「장륙전」이란 석 자가 씌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 일찍이 부처님의 영험을 알지 못하고 크고 작은 죄를 범하였으니, 스님 과히 허물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승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공주가 스님을 알아보고 울지 않는 것은 필시 스님과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음을 뜻함이오. 짐은 이제야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스님을 도와 절을 복구할 터인즉 어서 불사 준비를 서두르시오.』
숙종대왕은 장륙전 건립의 대원을 발하고 전각이 완성되자 「각황전」이라 명명하였다. 왕이 깨달아 건립했다는 뜻이라 한다. / 최정희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9)-마이산 탑사
기도와 정성의 결정체 돌탑이 숲을 이룬 곳
탑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돌 하나 하나에는 그 돌을 얹어놓은 사람의 기도와 정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영락없을 듯하다. 돌탑은 그냥 돌이 쌓여진 것이 아니라 기도와 염원이 탑을 이룬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거다.
여행을 하다 아니면 어딘가를 가다 돌탑 무더기를 만나게 되면 주변서 돌 하나 주워 탑 꼭대기에 얹어놓는다.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꼭대기에 돌 하나 얹어 놓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대개의 사람들이 돌을 얹으며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얹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를 생각하고 염원하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얹어진 하나 하나의 돌이 돌탑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돌탑은 기도와 기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쌓여진 정성의 결정체인 신념의 탑이다. 기도에는 별 별 기도가 다 있었을 거다. 아들을 점지해 달라는 득손의 기도, 병을 빨리 낳게 해 달라는 간병의 기도, 어느 시험에 척 붙게 해 달라는 성취의 기도, 요즘은 1등으로 로또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는 기도도 있을지 모른다.
장난이 심하고 심술궂은 사람도 여간해서 일부러 돌탑을 무너트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착한 심성을 가졌다는 반증이며 그 돌탑에 담겨 있는 정성과 기도에 알게 모르게 동감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된다.
묻고 물어 가다 보니 멀찌감치 두 귀 세운 말인 듯 그 형상이 또렷한 마이산이 나타난다. 이런 형상 저런 형상 많이 보아왔지만 저것은 분명 살아 있는 말의 두 귀임에 틀림이 없다. 금방 나풀거리며 주변에서 윙윙거리고 있을 쇠파리라도 쫓을 듯하다.
마이산을 찾아가는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마이산의 남쪽으로 갈 수도 있고 북쪽으로도 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기자는 북부 주차장에서 마이산을 오르게 되었다.
북부주차장에 차를 놓고 마이산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마이산을 오르는 길은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다. 길 옆에 드리운 울창한 숲길도 숲길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목재로 정비된 계단형태의 길은 도란도란 이야길 주고받으며 걷기에 딱 좋을 듯하다.
산책하듯 그렇게 오르다 보면 어느새 고갯마루에 오르게 되니 이 부분이 말의 두 귀 중앙에 해당하는 정수리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계단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 헐떡이며 좌우를 살피다 보면 양쪽으로 절벽처럼 떡 버티고 있는 두 개의 산이 있다. 바로 이 두 개의 산이 숫마이산과 암마이산이다. 북부 주차장에서 올라와 말머리 정수리 부분에 서게되었을 때 좌측이 숫마이산이며 오른쪽이 암마이산이 되는 것이다.
암마이산은 계속해서 오를 수 있는 산행코스가 있지만 숫마이산은 더 이상 오르기가 곤란한 상태로 가파르다.
석간수로 갈증을 달래고 아래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은수사가 있고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그곳에 탑사가 있다.
탑사! 말 그대로 탑으로 이루어진 절이다. 여느 절들의 탑에 다듬고 쪼아낸 석공의 땀과 정성이 담겨 있다면 이곳의 돌탑에선 다른 정성과 다른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여느 절들의 탑들이 커다란 뭉치로 큼직큼직 그 높이를 더해 갔다면 탑사의 돌탑들은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그 높이를 더하느라 더 많은 땀과 정성을 들였음이 느껴진다.
성인 머리 크기의 돌덩이에서부터 밤톨만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 얹어 쌓은 80여 개의 크고 작은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 마이산 탑사(馬耳山塔寺).
탑들은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효령대군 16대 손으로 태어난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에 의하여 축조되었다고 한다. 수행을 위해 25세 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하던 중 이갑용 처사는.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게 된다고 한다.
탑을 쌓기 위해 30여 년 동안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탑의 기초 부를 쌓았고, 각처 명산에서 축지법을 이용하여 날라 온 돌들로 탑 상부를 쌓았다고 한다. 돌들은 팔진도법과 음양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 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 한다.
탑사 경내에 즐비한 많은 탑들이 제멋대로 인 듯하지만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고 한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함을 연출하기도 한단다.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 쌍의 탑이다.
탑사의 탑을 쌓는 데는 2가지 방식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피라밋 방식과 일자형 탑 쌓기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며 그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는다고 한다.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릴 때는 100일간 정성의 기도를 올리고 피라밋 상단 부분에 잔돌로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우물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음양돌을 올렸다 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이 기이함을 어찌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백여 년이 넘는 장고한 시간의 풍상 속에 태풍과 회오리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성능 좋다는 접착제를 사용하고 견고하다는 시멘트를 사용하였어도 세월 가고 거센 바람 불면 무너지고 부서지는 것이 통상인데 보이지 않게 조화이룬 돌들의 음양이 끄덕 없이 풍상의 세월을 이겨내고 있음에 기이함마저 든다.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 속에는 이갑용 처사가 쓴 신서가 새겨진다고 한다. 이 신서는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이갑용 처사가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으로 전해 내려온다 한다.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없다고 한다.
요즘 굿모닝시티에 관한 이런 저런 기사들이 매일 아침을 굿모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뒤숭숭하다. 정치판이 어지럽고 경제가 어렵다고들 아우성이다. 게다가 사회가 질서와 인심조차 혼미한 듯하다. 이럴 때 내가 아닌 남을 위하여 돌탑에 돌 하나 얹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준다면 좀더 넉넉한 현실이 될 듯싶다. 바람에 구름 가듯 그렇게 다녀가는 마이산 탑사지만 오래오래 가슴에 남을 듯하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 (10) - 왕가봉 여래사
고정관념 속의 '절 모양'을 깡그리 부수고
고건축 양식의 건물에 화려하기조차 한 단청 그리고 바람에 딸랑거리며 매달려 있을 풍경까지 꼭 같을 듯하다. 오래 된 소나무나 활엽수들이 숲 그늘을 만들어주는 좁다란 길을 따라 들어가게 되는 그런 분위기를 연상 할 듯하다. 졸졸졸 흐를 물소리를 만들어내는 계곡도 함께 하는 그런 주변의 전경도 그릴지 모르겠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며 수행하고 계시는 스님들의 모습과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편안함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그려낼 듯하다.
호남고속도로 유성IC를 빠져 나와 공주 방향으로 1.5Km쯤을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버섯모양에 탑 하나 삐쭉 올라간 황토색 건물이 보인다. 여느 산사들처럼 동네와 뚝 떨어져 있거나 산 속에 호젓이 절만 있는 게 아니고 대로 옆 주변의 주택들과 나란히 있기에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산사를 찾으며 맞게 되는 자연의 그런 모습이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라면 여래사로 들어서는 짧은 진입로에 펼쳐지는 모습은 막힘 없는 공간에 전시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같은 그런 분위기의 모습이다.
자연이 자연으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자연이 절제되지 않은 자유와 무형유형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작품엔 작가의 혼과 정성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작가의 혼과 정성이 스며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가공물이지 작품이라 할 수 없을 거다.
여래사는 입구의 담벼락이 작품이며 전각이 작품이다. 이곳 저곳에 자리하고 있는 장승과 장엄물들이 작품임은 물론 그 배치와 구도 자체가 작품이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해 전국 명지를 돌아다니다 계룡산을 찾아가는 길에 가마가 쉬었던 곳이라 하여 왕가봉이라 이름 붙여진, 계룡산 자락의 야트막해 보이는 왕가봉 남쪽에 여래사가 있다.
여래(如來)란 범어 다타아가타(tath gata)의 번역으로, 진리에 의하여 왔고, 항상 진리에 의하여 사시는 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 구속과 결박을 해탈하는 이, 위없이 가장 높은 이라고 하니 곧 부처님을 일컫는 말인 듯하다. 여래사는 곧 부처님을 모신 곳이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여래사로 들어서는 진입로 양쪽엔 황토색의 야트막한 담장이 나란하다. 꼭대기에 기와를 이고 있는 담장은 마치 갤러리의 전시 벽 같은 분위기다. 깔끔한 느낌을 주는 황토벽 군데군데엔 작품 같은 문양이 액자처럼 조형되어 있다.
언뜻 보게 되면 흡사 카페나 음식점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우뚝 솟은 탑이 있기에 일반 음식점으로 생각하기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그런 구도를 하고 있다. 게다가 입구부터 계속되어 마당까지 도열하고 있는 장승과 석불에서 절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절에 가면 당연히 대웅전이 있게 마련인데 이곳엔 대웅전 대신 황토색 건물에 <무설전>이란 편액이 걸려있을 뿐이다.
무설전이 무슨 뜻이냐고 주지 각림(覺林)스님께 여쭈니 "法法無法法 說說無說說 聞聞無聞聞 傳傳無傳傳 (법이라는 참된 법은 법 없는 법이요. 설법이라는 참된 설법은 설법할 것 없는 설법이니, 듣는다고 하는 참된 들음은 들을 것 없는 들음이요, 전한다고 하는 참된 전함은 전할 것 없는 전함이어라)"라고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을 해주셨지만 뭔가가 느껴지는 내용임엔 틀림없다.
여래사를 창건한 주지스님의 속가 부친께선 스님의 출가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화를 가슴에 안고 돌아가셨다 한다. 부친의 그런 원혼을 달래며 부처님의 말씀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불자의 근본에 충실하고 속죄하는 마음을 대신하고자 하신 듯하다.
속세와 모든 연을 끊고 생활하는 것이 출가자의 일반적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속가와의 인연을 외면치 않는 스님의 마음 씀이 성직자로의 고뇌와 인간으로의 갈등을 느껴지게 한다.
이왕 지을 것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런 형태의 고건축에 알록달록 단청된 절을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경제성을 고려하여 이런 형태의 절을 지었다고 한다. 사실 고건축 양식으로 절을 짓게 되면 그 건축비가 만만치 않단다.
이에 반해 여래사와 같은 방식의 건축은 아주 경제적이라고 한다. 불자로서 지켜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주는 것과 받는 것 그리고 받은 것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청아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이 청아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대로 받을 수도 쓸 수도 없기에 경제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단다.
요즘 황토집이 좋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쉽게 황토집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관리와 보수 유지에 필요한 능력과 노동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 한다. 시멘트 집이야 한 번 지으면 보수 유지가 거의 필요치 않지만 황토집은 반복해 바르고 덧발라주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여건이 그렇지 못하고 노동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여래사 주지인 각림스님은 모든 것을 손수 하며 그것이 가능하기에 이런 형태의 황토집을 지을 수 있었고 요즘도 보수하고 황토를 덧발라 주는 것이 일상중의 하나라고 한다.
여래사를 들어서는 입구엔 헌 기와와 건축자재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여래사의 모든 건물 지붕에 얹어진 기와와 많은 목조들은 주변의 대형 사찰이나 고찰들이 개·보수하면서 발생한 것들을 얻어다 재활용 한 것이라 한다.
절의 외양은 파격적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배우고 실천하는 데는 더없이 철저하다고 한다. 새벽 30시 30분에 올리는 아침예불로 하루를 시작한단다. 매일매일 고정관념 탈피를 위한 작업과 작품제작은 고행하듯, 참선하듯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신도들을 대상으로 불교 기초교리는 물론 다도와 도예 그리고 불화를 교육함으로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다.
이판(理判) : 불교에서, 속세를 떠나 도를 닦는 데만 마음을 기울이는 스님.
사판(事判) : 절의 재산을 관리하고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스님.
/ 민중국어사전
그 말을 듣고 나니 "딱 이구나"하는 동감이다. 차 한잔 마시며 둘러 본 방에서 바로 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았다. 빼곡한 경전은 말할 것도 없고 갤러리에 전시된 것들인 양 다양한 작품들이 그렇다.
그래도 궁금하여 다시 한번 여쭈었다. 절의 외양이 이러함에서 오는 어떤 어려움이나 오해 같은 것은 없는지가 궁금하였던 것이다. 창조란 자칫 고정관념의 타킷이 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고정관념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어야만 한민족이라고 고집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듯 부처님을 모시는데 절의 외양만을 가지고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신다.
법당에만 머무는 자비를 좀더 널리 알리고자 고정관념을 깨고 파격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자리한 여래사는 바로 창조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설법인 듯하다.
여래사는 창조가 강조되고 창조가 곧 경쟁력인 작금의 시대에 창조가 뭔가를 느낄 수 있고 화두로 삼게 하는 그런 곳이다.
여래사는 분명 깊은 산 속에 있는 산사는 아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고 이런 저런 이야길 듣다보니 산사에서 얻고자 하는 본연의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온갖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묶인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하늘을 지나는 가벼운 바람 같은 마음으로 한 번 다녀온다면 맑고 향기로운 절로 기억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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