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계와 전생의 비밀
지난해 11월. 나는 <영혼을 팔아먹는 남자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내, ‘영혼 세일즈맨’으로의 변신을 꾀한 적이 있었다. 영매로 알려진 내가 느닷없이 영혼을 팔아먹겠다고 나서는 통에 방송가에서도 꽤 흥미가 있었던지, 톡톡 튀는 DJ로 알려진 이숙영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청되어 뜻밖의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세간에 화제가 된 책을 여러 권 내기도 한 DJ 이숙영. 그녀가 내게 던진 첫 질문은 바로 “차길진 법사님, 영혼이 정말 있습니까?”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녀같이 ‘영혼의 존재에 의심을 품은 사람들’ 덕분에 지금까지 영혼을 팔아먹는 남자로 아이러니한 인생을 살아온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럼, 전생이란 게 정말 있습니까?”여기에 대한 대답은 물론 ‘예스’다. 하지만 방송이라 뭔가 묘한 말만 남기고 온 것 같아, 오늘 이 글을 통해 전생과 영혼의 세계에 대해 보다 깊이 얘기해볼까 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것을 빛이라고 얘기한다. 그럼 빛은 어디에서 태어난 것일까. 당연히 태양계의 중심, 태양이다. 하지만 태양으로부터 지구까지 그 빠르다는 빛이 도착하기까진 약 8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태양’은 이미 8분 전의 태양, 즉 ‘과거의 태양’이라는 얘기다.
이번엔 좀더 발을 넓혀 옆 동네로 가보자. 태양계에서 가장 가깝다는 우리의 이웃사촌인 안드로메다. 도대체 얼마나 가깝기에 이웃사촌이라는 것일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5만 광년이라는 엄청난 거리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천체망원경이나 컬러판 사진에서 등장하는 이웃사촌의 사진 역시 5만 광년 전의 모습이란 말밖에 더 되는가. 실로 엄청나게 한물 간 사진이란 말인데…….
안드로메다보다 더 먼 은하계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마도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심코 올려다본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 중에는 250만 광년 전의 별도 있을 테고 그보다 더 과거 속의 별, 어쩌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별도 있을 테니, 밤하늘 자체가 ‘우주역사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이렇게 밤하늘 자체가 우주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과 같이 현재의 여러분 자체도 여러분의 역사, 다시 말해 ‘전생’과 ‘미래’의 역사를 담고 있는 하나의 개체라면 믿으시겠는가. 물론 여러분에겐 현재의 모습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영능력자인 나에겐 여러분의 모습이 엄청난 역사를 담고 있는 하나의 개체로 보인다. 그 개체 속에는 100년 전 전생의 개체도 있고, 500년 전 전생의 개체도 담겨 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듯 그렇게 말이다.
“그럼, 제 전생은 뭐였나요? 전 전경부인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하며 나를 보는 이숙영 씨. 나는 그녀에게 “분명한 것은 이숙영 씨하고 내가 전생에 만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땐 인터뷰로 뵌 건 아니었겠죠?”하고는 시원하게 웃는 게 아닌가.
라디오 DJ와 ‘영혼을 팔아먹는 남자’와의 데이트. 비록 스튜디오 안에서 이뤄지긴 했어도 참으로 즐거웠기에 다음에는 사석에서 더욱 솔직한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라면 내가 그녀의 전생을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그녀가 아침 출근길에 상쾌한 청량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길 기대해 본다.
구명시식이라는 이름의 탄생
만물엔 이름이 있다. 그리고 이름엔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다. 즉, 모든 이름은 쉽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내가 하고 있는 ‘구명시식(救命施食)’도 그 특별한 이름만큼이나 특별한 역사를 갖고 있다. 까닭에 오늘은 그 특별한 이름, 구명시식(救命施食)에 얽힌 짤막한 에피소드를 공개할까 한다.
구명시식(救命施食)은 불교에서 올리는 구병시식(救病施食), 즉 병든 사람을 위해 떡 등 제례음식을 놓고 사찰에서 올리는 제례의식과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미 해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줄 안다.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한편의 장중한 드라마 같다는 점이 구병시식과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내가 올리는 구명시식(救命施食)은 이름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 의식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구명시식(救命施食)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이름 없는 의식’으로 시작했을 뿐. 그런데 그 이름 없던 의식에 ‘구명시식’이란 이름이 붙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분이 계시다. 바로 ‘하 대지해 보살’님이 그 분.
얘기는 내가 잠실 후암정사를 세우고 얼마 안됐을 무렵인 86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직 정돈조차 채 되지 않은 법당에 아버님의 영정부터 모셔놓고 법당으로써 갖춰야 할 것들을 꼼꼼히 살피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40대 중반의 여인이 법당 문을 빼꼼이 열고는 “여기가 후암정사인가요?”라고 물어왔다.
“네, 그런데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의 질문에 마침내 모습을 다 드러낸 여인. 그 여인은 한 마디로 병색이 완연한 ‘환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딱 보기에도 그녀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싶었다.
“여기에 앉으시지요.” 그녀에게 방석을 권하자, 그녀는 잔잔히 미소짓고 힘겹게 앉더니 “꿈에서 뵌 그대로시군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놀라 “저를 꿈에서 보셨다고요?”라고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마지막 소원을 꼭 좀 들어주세요.”라고 말하며 자기를 위해 불교에서 치러지는 ‘구병시식’같은 제를 한번만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저는 염불을 잘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염불은 제가 옆에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번만…….” 그녀는 이미 병원에서 만성신후염으로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 생을 포기했었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서 나를 만나면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나의 거처를 물어물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나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그로부터 얼마 뒤 그녀를 위한 의식을 집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의식을 올리던 중에 저승사자가 출현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 역시 저승사자가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는지, “저승사자가 절 데리러 왔군요. 저 3일밖에 못 살죠?”라고 묻는 게 아닌가.
순간, 생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며 목숨을 걸고 염불을 외던 그녀를 이렇게 보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안돼! 그녀를 죽게 해선 안돼!’ 그때부터는 오직 이 생각 뿐, 저승사자에게 강력한 염력으로 기원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죽게 해선 안된다고. 그렇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이런 의식을 올리지 않겠다고.
그때부터 그 의식의 이름은 ‘구명시식(救命施食)’이 되었다.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저승사자에게 올렸던 강력한 염력의 기도. 그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의식’인 ‘구명시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후 건강을 되찾아, 1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잠실 법당을 애용(?)하고 계시는 하 대지해 보살님. 구명시식(救命施食)의 이름을 탄생하게 해주신 분인 만큼, 오래오래 건강한 몸으로 자주 뵐 수 있길 기도 드린다.
모르는 게 약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있다. 살다 보면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더 좋을 때가 많지 않은가. 그럴 때 이 말은 참으로 명언이다 싶다. 물론 ‘아는 게 힘’이란 말도 있지만, 정신건강엔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왠지 더 좋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마도 ‘죽을 뻔 했던’ 그때 그 사고 때문인 듯 싶다.
몇 년 전 미국 뉴저지 후암정사에 있을 때 일이다. 워낙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인지라, 한번은 큰 맘 먹고 대규모 대륙횡단 계획을 세워 무조건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 대규모 대륙횡단 코스는 뉴저지를 출발해 LA를 거쳐 멕시코까지 가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나로서는 참으로 무리한 여행코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홀단신 여행을 떠나 LA까지 무사히 도착한 나는 자신감을 얻은 뒤 며칠 후 다시 멕시코 여행에 도전하기 위해 멕시코 행 비행기를 탔는데 설마 그 비행기 안에서 사고가 터질 줄이야.
영어라고는 아주 간단한 회화 정도인 내가 멕시코 행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에 자축하던 나는 기내를 살펴보곤 더욱 뿌듯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내에 동양인이라고는 조금 떨어진 옆좌석의 남자와 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몇 분 후 비행기가 멕시코를 향해 이륙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해 눈을 감으려던 찰나, 갑자기 비행기가 크게 몇 번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런 뒤 들려온 기내방송. 영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날씨가 나빠 기체가 조금 흔들렸습니다’ 정도의 멘트라 추측하고 알아들은 척 가만히 앉아 있는데, 기내방송이 끝나자마자 기내에선 “Oh! no!” “Oh! my god!” 하는 귀에 익숙한 영어가 들리더니 이내 아비규환 그 자체로 돌변하는 것이 아닌가. 소리를 지르며 의자 밑으로 들어가는 사람, 눈물을 흘리며 유서를 쓰는 사람, 아기를 꼭 안고 우는 엄마……. 나는 ‘이게 뭔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는데 근처에 앉아있던 동양인이 나를 보곤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보디랭귀지로 자기처럼 안전벨트를 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으라며 사인을 보내는 것이었다.
과연 기내방송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영어를 모르니 이 사태의 진상을 파악할 수 없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갑자기 비행기가 착륙하려는 듯 고도를 낮추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내는 통곡과 비명이 엉키기 시작했고 그 비명은 하강 속도가 빨라질수록 더욱 커지더니 몇 명은 기절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마침내 알 수 없는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 안에서 기장의 목소리가 흐르자 기내는 일시에 기쁨과 환희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도어가 열리자마자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따라 나갔는데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까닭인즉, 그 활주로에는 수십 대의 엠뷸런스와 경찰차, 방송 보도차량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
뜻밖의 사태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어째 한국어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SOS를 청하기 위해 미국 뉴저지 후암정사로 전화를 했더니, 그곳에 있던 제자가 급하게 전화를 받으며 다짜고짜 “법사님! 무사하셨군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어지는 제자의 목소리. “지금 TV에 법사님께서 타셨던 멕시코 행 비행기에 엔진 결함이 발생해 비상착륙 했다는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어요. 법사님,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영어를 몰라 죽을 뻔했던 고비도 행복하게 넘길 수 있었던 나. 만약 내가 그때 기내방송을 알아들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에 수명이 10년은 더 짧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분들도 괜히 쓸데없는 것을 알려고 노력하지 마시길. 그저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회춘’의 비결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영매와 형사의 차이점
아마 30대나 40대라면, 왕년에 인기 리에 방송되었던 <형사 콜롬보>시리즈를 기억하실 것이다. 형사 콜롬보를 모르는 세대라도, 콜롬보의 콧소리만큼은 다 아실 듯. 나 역시 형사 콜롬보의 열렬한 애청자였다. 그 당시 <형사 콜롬보>를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그 사람이 곤경에 빠질 대마다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멋진 추리로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들을 재치 있게 구해내는, 휴머니즘의 진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TV 시리즈 물. 이것을 현실로 착각하시고는 “형사 콜롬보 좀 불러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상당히 곤란한 일.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나를 형사 콜롬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요즘 꽤 많은 듯 싶다. 의문의 사건이 발생하거나, 이유없이 사람이 실종되는 등 묘한 형사사건이 발생할 대마다 나를 찾아와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하니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얼마 전의 일이다. 한 중년의 부인이 다급하게 나를 찾아와 다짜고짜, “우리 아들이 군대에서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도대체 우리 아들이 어떻게 죽은 것인지 사인을 좀 밝혀주세요. 네?”라고 다그쳐 묻더니, “구명시식을 하면 다 알 수 있다면서요? 제발, 사인을 좀 밝혀주세요.”사정하며 매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참 난처해졌다. 순간, ‘왜 내겐 영능력이 있는 것일까’하고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저 부인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들의 사인을 밝혀달라는 것 뿐.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그 이유에서 나를 찾아온 것이라면 엄연히 ‘번지수’가 틀렸다. 나는 영계를 통해 영혼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메신저이지 형사 콜롬보가 아닌 것을 …….
“저는 아드님의 사인을 밝혀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나의 말에 그녀는 뜻밖이라는 듯 강하게 항의하며 “영능력으로 뭐든 다 알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제 아들의 사인은 못 밝혀주신다는 거죠?”라기에 나는 “돌아가신 아드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신 후에 다시 찾아오십시오.”라고 말하곤 그녀를 돌려보냈다.
과연 영혼이 원하는 게 무엇이었을까. 만약 그 부인이 아들의 사인을 밝혀달라고 나를 찾아온 게 아니라, 고인이 된 아들의 영을 달래주기 위한 천도제를 올리고자 나를 찾아왔다면 나는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어찌 아들 먼저 떠나 보낸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까.
그러나 이미 그녀의 아들은 이승을 떠나 영계의 객이 되지 않았는가. 영계의 객이 된 영가의 사인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승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욕심일 뿐이다. 그 욕심으로 인해 영계에서 혼이 되어 떠도는 아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게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건지…….
이뿐만이 아니다. 나에게 국가의 기밀이나 개인의 사생활에 얽힌 비밀을 좀 가르쳐달라고 찾아오시는 분까지 계시다. 그런 분들을 보면,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영능력자를 비밀을 캐는 탐정으로 알고 오시는 분께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영계의 비밀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계의 비밀은 현세와는 달리 슬프고 아름다워 때론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런 비밀들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에 이용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렇게 해서 비밀을 알게 된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언젠가 그들도 비밀과 함께 사라져 영계로 돌아가게 될 터인데…….
만약 지금 여러분께서 반드시 알고픈 비밀이 있다면, 그저 비밀로만 남겨놓으시길 바란다. 비밀은 비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신비롭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형사 콜롬보 역시 미궁으로 남겨 놓아야 할 사건은 그렇게 남겨놓고 홀연히 떠나가곤 한다. ‘말없이 떠나는 것’ 그것이 비밀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만의 노하우인 것이다.
시신에도 표정이 있다.
얼마 전 일어난 주부 토막살인 사건. 그 시체가 예리한 칼로 잘려져 검은 비닐봉투에 담겨진 채 보라매공원 등지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었다. 그런데 이 살인 방법이 영화 <텔미썸씽>을 모방한 것으로 추측돼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기사를 접하다 보니 내가 염리사 시절 겪었던 또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
염리사 수업을 받은 지 1주일이 채 못 돼서의 일이다. 워낙에 빨리 배운 터라 현장 투입만 기대하고 있던 어느 날. 장의사 주인 어른이 침통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더니 “오늘 내 조카가 죽었네. 조카의 염습을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첫 염습을 나가게 된 것이다.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염습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있는데 주인양반이 내게 다가와선 “뭐든 처음이 중요하네. 첫 시신이니 만큼 부디 좋은 인연을 맺고 돌아오게.”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첫 손님의 집. 단단한 각오로 방으로 들어서자 보기에도 끔찍한 시신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30대로 추정되는 그는 대기업의 잘 나가는 사원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간경화로 죽기 바로 직전까지 심하게 피를 토하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시신과의 첫 대면. 그 순간, ‘첫 인연을 잘 맺어야지’하는 생각으로 준비해 온 향을 시신 앞에 피우며 정성껏 명복을 빌고 쑥을 끓인 물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토해낸 검은 피는 그리 쉽게 닦여지지 않았다.
그 피를 닦으며 왠지 시신에게 깊은 한이 느껴져 더욱 조심스럽게 닦아내는데, 그 순간이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제 몸을 정성껏 닦아주셔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허공을 바라 보니 또 하나의 시신이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앗!”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토했다. 하지만 더욱 놀란 것은 그것은 시신이 아닌 그 시신의 주인 영가였다는 사실. 한 마디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현장을 정면으로 목격한 것이었다. 물론 그 영가를 볼 수 있는 것은 영능력자인 나뿐이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와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아직 시신을 떠나지 못하셨군요. 깊은 한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러자 그는 “저한테는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요. 만약 아내가 재혼을 하고 나면 애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고 어떻게 떠납니까.”
곧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공간을 이동해 건넛방에서 울고 있는 자식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딸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게 아닌가. 이어 그의 아들까지도 몸을 부르르 떠는 현상이 내 눈에 생생하게 포착됐다. 즉, 영가가 사람들의 몸을 통과하면 순간, 심하게 몸을 떤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의 부성애(父性愛)에 감동되어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자식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 아버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같은 염리사를 만났으니 아무 걱정 마시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십시오.” 그러자 그 영가는 “죽어서 은인을 만나게 되는군요.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곤 빙그레 미소를 지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고통스러웠던 시신의 표정이 맑게 개이더니 지극히 편안한 표정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조문객들도 이상한 듯 “이것 봐. 시신의 표정이 달라졌어.”하면서 시신주위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저승의 수호령과 함께 떠난 영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몸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저승까지 가져가려 했던 돈
염리사 전력이 어언 6개월이 넘었을 때의 일이다. 유난히도 더운 어느 여름날 오후. 전화벨 소리에 놀라 받아 보니 다짜고짜 “거기, 싸게 염 해준다면서요?”하며 나를 찾는 것이었다. 물론 싸게 염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그런 전화를 받으니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형편이 오죽 어려웠으면 싼 염리사를 찾을까’라는 생각에 “어디십니까?”라고 물었고 그 길로 염습 도구를 챙겨, 단걸음에 그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이거, 싼 염리사를 찾을 집이 아닌데?”란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 집은 말 그대로 고래등같은 기와집이었던 것이다. 나는 전화에서 일러준 주소와 집 주소를 연신 번갈아 보며 주소까지 확인했지만 틀림없이 싼 염리사를 찾던 집이 분명했다. ‘틀려도 일단 들어가보자’라는 생각에 빼꼼이 문을 열어 보니, 초상난 집 마당에서 자식들로 보이는 이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관을 너무 비싼 걸로 했잖아요? 어차피 묻힐 거 이왕이면 싼 걸로 했어야죠.” 세상에, 아버지가 누울 관을 더 싼 걸로 해야 됐다면서 언성을 높이다니. 이 정도 구두쇠 집안이니 제일 싼 염리사인 나를 불렀던 것이다. 더욱 놀란 것은 시신이 있는 방문을 열고 난 뒤에 펼쳐진 장면이다.
“이건 또 뭐야.” 나는 그만 경악을 금치 못하고 말았다. 장면인즉, 험한 표정을 짓고 눈을 부릅뜬 70대 영감의 시신이 돈 뭉치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즉, 망자가 누워 있는 베개속에도 돈 뭉치, 이불 속에도 돈 뭉치, 하다 못해 깔고 누운 요속까지도 모두 돈 뭉치가 가득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에 할말을 잃은 나는 멀뚱히 돈 뭉치가 깔려 있는 시신만 바라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염리사 양반, 내 시신 가까이에 있는 돈에 손만 대면 알아서 하시오.”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시신의 주인공인 구두쇠 영감 영가였다.
“내가 마지막 유언으로 은행에 있는 내 돈을 모두 찾아 내 이불 속, 그리고 방바닥에 깔아놓으라고 했소. 내 돈을 두고는 이대로 떠날 수 없단 말이오. 그러니 내 돈 천원짜리 한 장도 건드려서는 안돼요.” 그러나 어찌 그런다고 저승까지 그 돈을 갖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황당하고 한심스러워 “저는 이 돈에 손도 대기 싫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염습을 해드리려면 자세를 잘 잡아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두 손에 돈 뭉치를 잡고 계시니 자세가 나와야지요.”하고 나름대로 불평을 토로했다.
사실, 그가 돈 뭉치를 잡고 놓지 않는 통에 시신의 손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뿐 아니었다. 그 구두쇠 영가가 “내 돈, 내 돈.”하면서 자기 시신 주위에 있는 돈들을 끌어안으려고 할 때마다 힘들여 잡아놓은 시신 자세마저도 따라서 흐트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욱 믿지 못할 장면은 저승사자와 구두쇠 영가간의 실랑이였다. 저승사자의 저승길 재촉에 “돈을 두고 못 갑니다. 바퀴벌레가 되어서라도 이 집에서 살랍니다.”하고 그는 우기기 시작했고, 이에 저승사자는 최후의 수단으로 매까지 들어 구두쇠 영감의 영가를 내치자 이내 구두쇠 영감의 시신에 멍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싫습니다. 저는 못 갑니다.” 맞으면서 끌려가는 노인 영가. 한때는 고물상 주인으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 하지만 자식들조차도 돈에 눈이 멀어 그를 싸구려 관에 넣으려고 입씨름하는 모습이 너무나 처연해 보였다.
연극 <오구>의 모티브가 되었던 구두쇠 영감. 가난했던 고물상 시절에 찍은 그의 가족 사진과 그날의 가족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탐착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한맺힌 인디언 영혼
미국 후암정사를 열기 전이었다. 친구, 신도들과 함께 미국 북동부의 명산 케스킬에 올랐다. 이 산은 인디언들이 기도처로 사용하던 성지(聖地)인데 곳곳에 작은 동굴들이 있다. 인디언들은 길흉화복을 기원으로 극복하고자 몇 시간이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추장이 주재하는 기도는 매우 엄숙히 거행됐다고 한다. 필자는 바로 그곳에서 모종의 강한 한(恨)을 느낄 수 있었다.
감응해본 결과, 크레스킬이라는 인디언 지도자의 영혼이었다.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억울함을 해소할 길이 없어 지금도 영혼으로 남아 자신들이 평화로운 삶을 누렸던 케스킬산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떠도는 그의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그처럼 맑던 하늘에 점차 구름이 덮이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온 산을 뒤덮듯 쏟아졌다. 마치 크레스킬이 떨구는 눈물방울 같았다.
거처로 돌아와 그날 처음 만난 인디언 지도자 크레스킬을 위해 정성스레 구명시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인디언 영혼들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광활한 대지, 풍부한 자원을 갖고도 아무런 욕심 없이 나름대로의 생활습관에 따라 행복하게 살아온 그들은 성품 또한 온순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백인들이 그들의 땅을 찾아왔다. 영국에서 종교의 박해를 피해온 청교도들이었다. 당시 인디언들이 악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아메리카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을 것이다. 100여 명에 불과한 그들이 도착한 순간, 모두 죽여 없앨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대했다. 오히려 평안히 살 수 있도록 편의도 봐주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는 말처럼 인구가 불어난 이주민들은 토박이 인디언들을 한구석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곳에 몰린 채 자유를 박탈당한 인디언들은 눈물을 흘리며 억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반항하는 인디언들은 살육당했고, 떠나지 않으려는 인디언들의 가옥은 잿더미가 됐다. 그 중 한 인디언이 바로 지도자 크레스킬이었다.
미국인들은 알아야 한다. 월스트리트는 인디언들과의 격전지였다. 그들의 희생을 딛고 그곳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됐다.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이라는 알량한 울타리 속에 감금하지 말고 그들에게 혜택을 줘야 한다. 이것 또한 세계 최대 문명국으로서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의 업보요, 과보인 것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법
우리는 홀로 있음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열어야 한다. 혼자 여는 가슴은 성스러운 한 편의 시와 같은 것이다. 혼자 있음은 성숙한 마음이고, 성숙한 마음은 혼자 설 수 있음이다. 혼자일 때 전체와 하나이고, 한 생각이 있으면 이미 혼자가 아니다.
땅 위를 걷는 사람이라면 단 하루라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자연의 손길이며, 고통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참된 즐거움도 알지 못한다.
스스로 굳게 서서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만이 운명과 겨룰 수 있기 때문이다. 구도를 향해 가는 길은 끝이 없으나 목적을 이룬 삶은 더 큰 목적을 추구하게 된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위해 말이다.
시대를 탓하지 마라. 부모를 탓하고, 직장을 탓하고, 시대를 탓하는 사람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부모를 부정하고,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 직장에 대해 불평하고, 상사에 대해서 불평을 하는 사람은 못살게 되어 있다. 어떤 직장이든 그 직장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상사를 욕하면 안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의 목적은 현재나 가까운 미래의 외적인 성공이 아니라 영혼의 성숙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덕이 남을 칭찬해 주거나 보상해 주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미덕은 우리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사는 이 자리이다. 부모, 직장, 시대를 부정하지 말고 현재의 자리를 부정하지 말라. 사람은 항상 극복하며 살아가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 자기 자신 속에서 삶을 꽃 피울 수 있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 시대를 열심히 사는 사람은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된다. 좌삼삼 우삼삼(결국 제자리라는 뜻)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땅에 넘어진 사람은 넘어진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즐겁게 사는 법
즐거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생각하는 사고의 즐거움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착각은 불경기가 없다고 내가 오래 산다는 착각, 내가 옳다는 착각, 남들이 모두 나를 좋아한다는 착각. 이런 착각 역시 생각하는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파도와 물을 구분하면 안 된다. ‘자등명 법등명’이 바로 불교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즉 인간은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생각은 고해의 바다이지만 인간의 가장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어떤 시비에도 빠지지 말고, 나는 죄인이라는 흑백논리에도 빠지지 말라. 망상이 있어야 깨달음도 있다. 부처는 중생을 바라보지 않지만 중생은 부처를 바라본다. 착각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두 번째로는 먹는 즐거움이 있다. 모 사찰에 비구니 스님 한 분이 계신데 그곳에서는 가장 큰 날이 대중에게 공양하는 날이다. 대중공양 때 인간들이 너무 많이 먹어 화장실 앞에 줄을 서면 스님은 아주 흡족해 한다.
인간에게 먹는 즐거움이 좋은 것이긴 하나,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낄 수 가 없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긍정하는 마음,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먹는 즐거움에는 반드시 건강이 수반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 바로 자연을 즐기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위한다는 이유로 자연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그린벨트가 풀어지면 물이 문제가 된다. 서해안의 개펄은 수억 년에 걸쳐 만들어진 자연 행태의 보고이며 정화조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생명체이듯, 흙 하나 돌 하나 역시 생명체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을 신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하듯 신만 위하다 보면 인간을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남의 집을 빼앗는 것과 같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아침 이슬 속에 피어나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고 활짝 피는 삶의 꽃. 사랑은 진정한 우아함을 주는 진리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사랑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자제하기 힘들다. 누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이미 착각이다. 사랑은 전생의 빚으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큰 사랑은 무자비한 사랑(하느님, 지장, 대자연 등) 뿐이다.
사랑이라는 것에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투철한 의식, 각성된 상태에서의 사랑, 사랑을 위하여 삶의 목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삶과 사랑은 같은 길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동정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사랑 속에는 동정이 있지만 동정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래서 결국에는 업(業)만 남게 된다.
사랑의 숙명은 사랑이 아니고 전생의 흔적이다. 사랑하는 부부가 50년을 함께 살다가 죽을 때 “정말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우주대자연, 빛과 같은 것이고 청하지 않은 불청객과 같다.
청하지 않은 손님을 불청객이라 하는데 이는 본래 불교용어다. 햇빛이나 흙과 같이 자연에서 얻은 사랑이 가장 큰사랑인데 그러한 큰사랑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우리에게 사랑을 준다.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지 시한적이거나,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올바른 자식교육
아기는 보통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아홉 달 반만에 나오는데 어머니 뱃속에서 태라는 것은 아기에게 생명줄과 같다. 아무리 생명줄이라 해도 일단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 그 태를 끊어주지 않으면 죽게 된다.
자식이 성장을 해서 속세의 나이 20세가 되면 또 하나의 태를 끊어야 하는데, 그 태는 바로 영혼의 태이다. 20세 성인이 되어도 엄마에게 찬 물, 더운 물 먹는 것을 물어보는 자식이 있는데 자식을 그렇게 키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느 부모에게 과외공부는 어떻게 시키느냐고 물었더니 과외는 돈 많이 들여서 시키는 것이 좋고, 그렇게 해야 좋은 학교를 간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사랑 많이 받은 자식일수록 나이 먹은 후에 불효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건 바로 고기를 잡아주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랑하되 마음속으로 해야한다.
반야심경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바로 이런 것을 가르쳐야 한다. 자식에게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생선은 3일 이내에 썩고 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에게 고기를 잡아주려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시간을 두고 끈기 있게 가르치되 자식에 가르칠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이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을 반조해서 생각해 보라. 전생에 내가 얼마나 빚을 지었는가. 자기 자신을 반조하면서 자식을 가르친다면, 자식을 학습지로 가르치는 것보다 수백, 수천 배 더 효과가 있고, 자식을 가르치는 것에도 후회가 없을 것이다.
자식을 가르칠 때는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서두르기 때문에 자식교육을 망치게 된다. 자갈밭을 걸어갈 때 리듬에 맞춰 발을 딛는 마음으로 가르치라는 얘기다.
자식을 키우는 것, 자식이 잘못되는 것, 이 모든 것은 부모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식의 모습이 바로 자기의 모습이고, 자식은 바로 자신의 그림자인 것이다.
효라는 것
효도하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되어 있다. 부모를 편히 모시려고만 하는 것보다 일하게 해드리는 것이 더욱 좋은 효도이다. 불은 너무 가까이하면 데이고 너무 멀리 있으면 춥기 마련이다. 택시를 타는 사람은 항상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는 사람은 항상 버스를 탄다.
옛날, 전북 전주지방에 진묵대사라는 아주 신통하고 법력이 크신 스님이 계셨는데 ‘곡차’라는 말을 만들어 낸 분이기도 하다. 그 분이 장년시절에 당신의 어머니를 지금은 아중리라고 하는 곳으로 모셔왔다.
당시 스님은 전주 일출암에 계셨는데 그 아중리는 완주군 용진면에 위치해 있었다. 스님이 계신 일출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진묵대사는 효성이 지극해 조석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뵈었는데 하루는 어머니 얼굴이 좋지 않아 어찌된 일인가 살펴 보니, 모기 때문에 고생을 해 그런 것이었다. 그 길로 대사는 산속으로 들어가 산신기도를 하면서 아중리에 모기가 없게 해달라고 했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모기가 없었다고 한다. 진묵대사의 지극한 효심에 관한 일화 중 하나인데 지금까지도 그 아중리에는 모기가 없다고 한다.
진묵대사의 어머니는 그 후 5년 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영전에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자식으로서의 애절하고 심각한 감정을 간결하게 잘 표현했다.
태중시월지은을 하이보야리요
(胎中十月之恩 何以報也)
슬하삼년지양을 미능망의로소이다
(膝下三年之養 未能忘矣)
만세상에 갱가만세라도 자지심은 유위혐언이온데
(萬歲上 更加萬歲 子之心 猶爲嫌焉)
백년내에 미만백년이오니 모지수가 하기단야오리까
(百年內 未滿百年 母之壽 何其短也)
단표로상에 행걸일승은 기운이의거니와
(單瓢路上 行乞一僧 旣云已矣)
횡채규중에 미혼소매가 령불애재오니까
(橫釵閨中 未婚小妹 寧不哀哉)
상단료 하단파하니 승심각방이옵고
(上壇了 下壇罷 僧尋各房)
전산 첩하고 후산 중한데 혼귀하처오니까 오호 애재로다
(前山 疊 後山 重 魂歸何處 嗚呼哀哉)
열 달 동안 태중에서 길러주신 은혜를 어찌 갚사오리까.
슬하에서 3년을 키워주신 은혜를 잊을 수가 없나이다.
만세를 사시고 다시 만세를 더 사신다해도 자식의 마음은 오히려 만족치 못 할 일이온데,
백년도 채우지 못하시니 어머니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시옵니까.
표주박 한 개로 노상에서 걸식으로 사는 이 중은 이미 그러하거니와,
귀머리도 풀지 못하고 규중에 있어 시집 못 간 어린 누이가 가엾지도 않습니까.
상단 공양도 마치고 하단제사도 마치고 중들은 제각기 방으로 돌아갔고,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도 겹겹이온데 어머니의 혼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진묵대사는 신통력도 대단했지만 유난히 효도하는 스님이었다. 또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無子孫 千年 香火之地)라 해서 어머니를 위해 자손이 없어도 천년 동안 제사를 받을 수 있는 땅에 어머니의 산소 자리를 썼는데 김제 만경에 있는 명당이 바로 그곳이다.
당시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면 그곳에 가서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면 병이 꼭 나을 수 있고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지금도 앞다투어 많은 사람들이 향이나 꽃을 올리며 이 묘를 보살핀다고 한다.
구명시식의 정체가 무엇인가? 부모에게 효도하면 복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그 본체이지 영혼을 보고자 하는 것인가? 부모에게 돌아가 자기 자신의 근본을 찾으라 하는 것 아닌가. 자기 부모를 모르고 자신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가?
내가 잘됐을 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건 바로 부모님이다. 형제간에도 질투가 있고 친구에게도 시기가 있지만 자식이 국회의원이 되면 국회의장이 된 것처럼 기뻐하고, 경찰이 되면 경찰서장이 된 것처럼 자랑하는 것이 바로 부모이다.
자식이 가슴 아파할 때 부모 마음에서는 피눈물이 흐른다. 그래서 효도는 백행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효도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복이 돌아온다. 잘 살려면 항상 웃고 남에게 편안하게 해주면 될 것이고, 더 잘 살려면 부모에게 효도하면 된다.
웃음과 분노의 미학
인간은 지루함을 알기 때문에 웃을 수 있다. 제일 웃음이 많은 민족이 유태인이고 전 세계에서 노벨상의 대부분을 수상한 것도 유태인이다. 이들은 많이 웃을수록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웃을 때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지, 좋은 일이 생겨야만 웃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심각할 때 웃어보라. 거기서부터 한 생각 여유가 생긴다. 몸이 아플 때, 아주 어려운 이야기지만 암이나 당뇨 같은 병에 걸렸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웃어 보라. 마음에 여유를 가져 보라. 자기를 관조하고 웃을 수 있을 때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요즘 같이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명상은 노력으로 하지 말 것이며 명상하는 자기를 발견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웃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기고, 좋은 일이 생기면 정말 웃게 된다. 웃지 않을 곳에서 웃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웃으면 안 될 때는 웃지 말자. 정말 많이 웃으면 배가 아프고 많이 울면 가슴이 아프다. 웃음은 건강에도 좋다.
웃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자조적인 웃음, 자기 해학적인 웃음, 우주를 보고 웃는 웃음, 이를 삼소걸이라고 하는데 허상을 보고 웃고, 실상을 보고 웃고, 허상과 실상을 보고 웃는 것을 말한다. 남이 넘어지는 것이나 잘못되는 것을 보고 웃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사람들이 나를 사업적으로, 가정적으로, 종교적으로, 아버지로서 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 성공했다고들 하는데 비결이 있다면 아마도 많이 웃어서 그럴 것이다. 웃음은 바로 에너지의 원천이다.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웃음을 배워가길 바란다. 웃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하는 사람들은 화내지 말라고 강요하지만 여러분들은 감정을 초탈하는 것을 배우지 말고 잘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화낸다는 것은 진실된 표현이고 가식된 웃음은 거짓된 표현이며 조화에 비유될 수 있다. 종교라는 것은 도덕강의를 배우는 게 아니다. 그러면 욕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사람은 분노 그 자체가 바로 진실된 모습이다. 꽃은 아무리 예쁜 꽃이라 해도 보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꽃은 그냥 꽃의 모습 그대로이면 되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화내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화를 내되 벼락처럼, 새가 창공을 나는 것처럼 흔적이 없으면 되는 것이지, 그 감정을 내세워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
일하는 부처님, 성내는 부처님, 사랑하는 부처님이 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현명한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다. 벼락이 쳐도 허공엔 흔적이 없고 새가 공중을 날아도 자국은 남지 않는다. 가식된 웃음이 성내는 순박함보다 나쁘다. 혹, 성을 낼 일이 생기더라도 성내는데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 감정 처리를 잘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지혜이다.
잘 산다는 것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은 상당히 중요한 말이다. 금강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여시아문인데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관찰한다’,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라는 뜻으로 쓰여진다.
여시아문을 잘 알고 이해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가슴으로 보게 되는 것이고, 또 잘 살게 되는 것이다.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바쁘고 힘들 때 한 생각 쉬어 가는 것도 중요하다. 무욕이 대욕이라.
인생살이에 있어서 말 한 마디 잘 하는 것이 복 짓고 잘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를 내게 묻는 사람이 있는데, 잘 사는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사람과 서로 대화할 때 상대방에게 덕담 한 마디 해주는 것이다.
말을 할 때 욕을 한 것이 상대에게 전해지면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화가 되어서 돌아온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말고 내가 남을 많이 알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잘 사는 방법이다.
차 한 잔을 마시러 찻집에 들어가 보면 ‘다선일여(茶禪一如)’라는 글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말은 옛날에 초의선사께서 ‘차와 선은 같다’는 뜻으로 쓰신 말이다. 마음을 활짝 열면 잘 살게 되어 있다
전생의 흔적
전생, 환생, 윤회라는 것이 있다. 어떤 어린애가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를 하고 이조 때 대궐을 짓던 도목수는 모두 젊은 사람으로 많은 경험이 없는데도 목재를 깎아 척척 조립을 했다. 이것은 생이지지, 즉 날 때부터 알고 있다는 뜻으로 전생에 이미 그 일을 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윤회의 법칙이기도 하다.
내게는 영혼을 불러오는 능력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순신의 영혼을 불러온다 하면 그것은 이순신이 살아있던 그때의 기록을 불러오는 것이고, 소크라테스의 영혼을 불러온다 하면 현재의 환생체를 부르지 않고 그 당시의 영체를 부르는 것이다. 환생 시에는 두 가지 영체가 같이 온다. 그래서 그 사람이 환생한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자폐증 어린이가 많다. 그 정신병 치료를 위해 구명시식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암에 걸린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몰핀을 주사하면 그 사람은 죽는 순간에 아편 중독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고통을 당했다면 죽을 때에도 고통 당하고 죽는다.
다시 태어날 때 아편 중독상태로 태어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자폐증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선천성 자폐증이고 오렌지 쥬스, 밀가루 음식 또는 인스턴트 식품 등 독성이 있는 음식으로 인해 뇌에 손상이 있는 경우에도 자폐증이 생기는데, 이런 경우가 후천성 자폐증이다.
과거에 아버지가 부역을 했다거나, 납북 또는 사상문제로 걸림돌이 있는 경우에 사관학교 입학이나 공무원이 될 수 없었고 해외여행도 할 수 없었는데 자식은 그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를 만난 것도 내 업이다. 불만스러운 남편을 만난 것도 자기 복, 자폐증에 걸린 어린애를 자식으로 둔 부모도 그건 자기 업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안 된다.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 남을 부리며 사는 사람, 종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 종을 부리며 사는 사람, 모두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사람은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종교단체를 위해 고생하는 사람들, 개미처럼 일해주고 근검절약해서 재산을 기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전생에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가 싶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은 전생을 알지 말아야 하기 때문인데, 삶의 이유야말로 인생의 숙제이며 전생은 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전생은 스스로 보아야 한다. 유체이탈을 하려면 어떠한 논리, 논조에 빠지지 말고 단순해지라. 노력과 명상을 통해 유체이탈을 하려는 것은 산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혜롭게 사는 법
우리는 교과서에서 뉴욕에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제일 높은 빌딩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 빌딩은 멀리서 보면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뉴욕에 가서 그 빌딩을 찾다가 결국엔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바로 옆에 두고 찾았음을 그때서야 알게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라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잘 못볼 때가 많다. 나라도 안에 있을 때는 잘 모르고, 공자님도 이웃에 살면 그저 이웃사촌 아저씨인 것이다.
12고해 중에 들어가더라도 천착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라.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도 꾹 참고 견디어 보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깨끗하지만 나오는 것은 더러운 이유에서다.
나에게 문제가 되는 사람이야말로 나의 스승이고 우물안 개구리도 한 생각 바꾸어 보면 태평양을 보게 된다. 대바닛타를 우리의 생각으로 헤아리면 나쁜 사람이지만 한 생각 바꾸어 보면 대바닛타야말로 큰 스승임을 알게 된다. 한 생각 바꾸어 봄으로 해서 인생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분들이다. ‘누구는 왜 나에게 이렇게 했을까’하는 식으로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우울증에 걸리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고해의 안경을 끼고 사는 사람과 같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명상이나 묵상도 하나의 종교적 형태이지만 침묵이라는 언어가 가장 좋은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침묵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한 것이고,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말이 필요한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면 변하는 것 또한 진리이다. 무조건 법대로 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똑똑해지는 것보다 현명해지는 것이 좋다. 낙타를 나누는 지혜가 바로 현명한 지혜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가 평온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 해결책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목표와 그 길이 바로 자신의 운명이다.
우리의 영롱한 영혼은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이다. 현실도피는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해도 우리의 삶 자체를 구할 수는 없다. 진정한 어려움은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진리는 진실한 영혼의 바탕이고 용기는 진리의 영혼인 것이다. 진리와 용기는 이 세상을 밝히는 영원한 불꽃이다. 한 번의 과감한 결심이 인생행로, 즉 운명을 바꿀 수 있다. 한 인간의 완성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진심으로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치 초가 타듯, 불꽃이 다른 촛불을 밝히듯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동양의 도둑은
첫째, 담장 안에 무엇이 있는가 잘 살핀다.
둘째, 담을 넘는 용기가 필요하다.
셋째, 잘 나누어 주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
서양의 도둑은
첫째, 밤 늦도록 일한다.
둘째, 하룻밤새 일을 끝내지 못하면 내일 또 다시 도전한다.
셋째, 동료의 모든 행동을 자기 자신처럼 느낀다.
넷째, 적은 소득에도 목숨을 건다.
다섯째, 값진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섯째, 시련과 위기를 견디어 낸다.
일곱째,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도둑의 신조를 얘기한 것은 도둑을 본받으라는 뜻이 아니다. 도둑에게도 신조가 있듯 우리 삶을 다시 한번 회광반조하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어렵긴 할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어머님의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다. 즉,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손가락을 빨고 성인이 된 후에 담배를 피우는 것은 어릴 때 어머니의 젖을 빨고 삼키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그리워하는 행위이다. 정말 술을 끊은 사람이라면 오늘 한 잔 마셔도 상관없다.
담배를 끊었을 때 껌을 씹는다던가, 말을 많이 한다던가, 기타 다른 행위를 하다가 새로운 습관이 생긴 사람은 끊지 않은 것과 같다. 술, 담배를 진정 끊었다는 것은 이따금 피우고 싶을 때 피우고 마시고 싶을 때 한 잔 마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라는 살생법문이 있다. 부처를 닮으려 하지 마라. 나는 나. 누구도 닮으려 하지 말라.
너무 똑똑하지 말라. 너무 똑똑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것이다.
너무 어리석지 말라. 너무 어리석으면 사람들이 속이려 할 것이다.
너무 나서지 말라. 너무 나서면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다.
너무 물러서지 말라. 너무 물러서면 사람들은 바보처럼 여길 것이다.
너무 거만하지 말라. 너무 거만하면 사람들이 까다로운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너무 겸손하지 말라. 너무 겸손하면 사람들이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너무 많이 말을 하면 말에 무게가 없을 것이다.
너무 침묵하지 말라. 너무 침묵하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너무 강하지 말라. 너무 강하면 부러질 것이요,
너무 약하지 말라. 너무 약하면 부서질 것이다.
마음이 삼계에 있으면서 현재에 머무르고, 무심하면서도 무관하지 말고, 범부이면서 범상하지 말라. 마음이 밖으로는 흩어지지 말고, 안으로는 정열에 들지 말고, 조용하게 열반에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참선이다.
속설에 관한 진실
‘너 양반되긴 틀렸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옛날에 상놈이 양반이 되고 싶어 양반을 따라 하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흉내만 낸다는 뜻이다. 그 중에 하나가 부모가 돌아가신 전날 밤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자정은 돌아가신 날의 첫 시각을 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가 돌아가시면서 3년 상을 지내는 이유를 물으니, 영혼이 3년 정도 머물다 떠나가기 때문이 아니냐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양반을 따라한다고 양반이 아니라,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행해야 양반인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태어나 형태를 갖추고 젖니를 가리는 능력을 가지는데 만 2년,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월, 부모님이 나를 키우시는 만 2년(햇수로 3년)동안 고생하신 것을 기리기 위해 3년 상을 치루는 것이다. 약식으로 백일 상을 치루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더라도 그 의미를 알고 해야 하는 것이다.
대추(조), 밤(율), 감(시)을 제사상에 반드시 놓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대추는 씨가 한 개 분으로 절손하지 않고 대를 잇게 해달라는 뜻이고, 밤은 한 송이에 씨(밤톨)가 세 개 있는데, 그것은 자손을 번성하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리고 밤나무 뿌리를 캐 보면 중심 뿌리, 즉 처음에 싹을 틔운 곳을 보면 그 밤톨 모양이 뿌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감은 씨를 심으면 고염나무가 나오는데,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접을 붙여야만 정상적인 감나무가 된다. 이것은 인간은 태어나서 올바른 이성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부모의 시신이 없을 때는 닭이 울기 전에 밤나무를 가져다 깎아서 모신다. 신주단지 역시 밤나무로 만든다. 어떠한 열매나 과일도 3일 이상 계속해서 먹으면 독이 되고, 과일은 간식은 되어도 주식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밤은 생으로 먹거나 쪄서 또는 굽거나 삶아서도 먹는다. 어떻게 해도 먹을 수가 있고 주식으로 해도 아무 탈이 없다.
제사지낼 대 여자가 절을 하는가? 하지 않는다. 왜일까? 죽을 때까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재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 이 집 저 집 귀신, 즉 그 집안의 뿌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인데 그것이 결코 차별의 뜻은 아니다. 여자는 잘 죽어서 자손에게 절을 받고, 살아서는 절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뜻을 알고 절을 하기 바란다.
옛날, 첫날밤에 신랑 발바닥을 때리는 이유는 뇌신경을 자극시켜, 첫날밤을 잘 지내라는 뜻과 함께 밖에 나가지 말라는 뜻도 있는데 조상님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풍습이나 관습에는 여러 가지 지혜로운 의미가 담겨 있다.
상념이란
상념에 대한 의식구조와 관련된 이야기다. 일본에 어떤 원숭이 관찰학자가 한 섬에서 흙 묻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원숭이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 섬의 모든 원숭이들이 따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발전해서 나중에는 바닷물에 고구마를 씻어 먹게 되었다.
이러한 습관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원숭이 전체에 번져 나가게 되었다. 이를 관찰하던 학자에게 문제가 생겼다. 어떻게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보지도 않았는데 고구마 씻어먹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박새는 우유통을 뚫고 우유를 먹는데 이 박새라는 것은 생활권 1.5킬로미터 밖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박새들이 우유통을 뚫고 우유를 먹는가. 이것이 바로 상념에 의한 전달이었던 것이다.
구명시식을 통해 13년간 천도를 해주는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한 맺힌 상념의 세계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는 발견하고 또 재발견하는 것이다.
한 생각 쉴 때, 수많은 고통을 지나 상념을 끊을 때, 새로운 세계에 접하게 된다. 상념을 끊어라. 끊지 못하고 허겁지겁 하지마라. 단식을 해본 사람은 분명히 단식이 모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백척간두진일보.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손에 나무를 쥐었을 그때 그 손에 쥔 나무를 놓아 보라는 것이다. 한 번쯤 상념의 단식을 해보기 바란다.
모든 것이 생각하는 데로 가는데 이것은 ‘일체유심조’와는 약간 다른 것이다. 자식 걱정, 특히 입학 걱정 같은 것을 간절히 원할 때는 잠시 쉬자.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하는데 생각에도 단식이 있다. 마음의 고통이 있을 때는 생각을 끊어버리면 된다.
사람들은 육신의 단식만 알지 생각의 단식은 모른다. 뉴우튼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는데 바로 한 생각 쉴 때 발견한 것이다. 부처님 역시 수많은 고행을 하셨지만 보리수 아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가?
영혼과 우주의 시스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이다. 질서는 단지 한 인간의 개체를 유지하는 기본이 될 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현존을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주의 질서, 인간 내부의 질서는 사회학적인 조화와 종의 영속성이란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천지(天地)간의 질서는 바로 우주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들로써 행성들, 해와 달, 지구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힘이 된다. 이러한 질서는 어떠한 한 인간에 의해, 그의 단순한 의지에 의해 좌우되거나 깨지지 않는다. 만약 천지간의 질서를 변화시키려거나 파괴시키려 하는 자가 있다면, 스스로 큰 질서의 틀에 끼어 파멸해버리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파괴할 수 있는 법칙은 유일하게 인간이 만든 법칙 뿐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법칙,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탄생해서 죽는 순간까지 천지간 대우주 법칙과 인간 개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소우주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또한 대우주 법칙과 소우주 법칙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 인간의 운명과 생로병사에 이르기까지 만사가 대우주 법칙과 소우주 법칙의 반응과 조화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연과 필연을 말할 때, 이 세상에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은 결국 우주 법칙들의 상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며, 다만 전체 우주 법칙의 외연(外緣)적 부분을 고찰하지 못했을 때 우연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우연히 일어난 일, 우연히 마주친 사람 등의 일반적 표현은 결국 인연에 따라, 우주의 법칙에 따라 나타나고 만나는 필연적인 사건들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만사의 배후에서 그 조화와 반응을 조정하고 있는 우주 법칙들은 최종적인 목표인 우주의 완성, 큰 깨달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가지 우주 법칙이라는 질서 속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고 있다. 인간이 이러한 우주의 커다란 법칙과 가치를 인식할 때,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질 수 있으며 보통 인간의 수준을 넘어 완성된 인간의 모습에까지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 이것이 천지간의 가장 큰 우주 법칙이다. 모든 창조물과 조물주의 존재, 완성의 경지,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오히려 하나의 개체는 의식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주의 창조, 생명의 창조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한 인간, 한 개인의 의식은 극히 작은 부분이지만, 그 작은 부분은 결국 커다란 세계 역사를 사유하고, 가치를 탐구하는 기본적인 요인이 되기에 가장 귀중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발달되기 시작한 인지과학(認知科學, cognitive science)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의식에 대해 궁극을 캐어 들어간 결과, ‘인간은 우주로 열린 작은 창’이라는 종교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국, 장차 계속될 학문인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본질과 의식의 가치를 어디까지 규정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발전과 발달을 거듭하고 있는 과학이 종교의 우상과 편견을 현재까지 수없이 파괴시키고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시간의 법칙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우주 공간 모두는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생각한 것은 인간이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 자유자재로 시간을 제어하거나 통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주 창조 당시, 조물주는 인간과 만물을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 가둬놨으며 그 한계는 결국 인간에게, 만물에게 벗어날 수 없는 법칙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법칙이 단지 직선적으로 과거부터 미래까지 연장되는 디지털 속성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두 가지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3단계로 나뉘어질 수 있도록 단순 구획된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연기론에 바탕을 둔 이야기지만, 현재는 과거의 인연에 다라 결정지어지는 기대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시간이 가진 직선적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먼 미래는 우리가 살아온 먼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우주의 시간은 시작과 끝이 없는 연결된 고리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밀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작용과 반작용을 주고 받는 하나의 몸체를 가진 실체이다.
둘째, 시간은 갈수록 압축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간단한 말로 과거의 천년이 근대의 백년이고 근대의 백년은 현대의 10년 꼴로 급변하게 발전해 나가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인간이 불을 쓰고, 도구를 만들게 되기까지는 수십만 년이라는 기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후 인간이 사회조직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경제제도를 만들게 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후 인간이 전기를 발견하고, 컴퓨터를 쓰고, 전화로 서로 대화하게 된 것은 단지 수십 년 만의 변화에 불과하다.
앞으로 물질문명의 속도가 가속화되어감에 따라, 인간이 인간의 문화나 물질 발전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 닥칠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체내의 엔트로피(entropy)가 높아져서 최종적으로는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조화가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가 불균형으로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시간도 물질의 압축과 팽창처럼 시간의 영속(永續)에 따라 압축되며, 결국 블랙홀의 최종 단계에 큰 폭발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인류 역사의 시간도 큰 폭발 속에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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