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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태양의 기운을 이 말만큼 온전히 담아내는 말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빛! 이 말 또한 태양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볕이 담고 있는 온기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빛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이 사물을 비추어 보이기만 할 뿐입니다. 하여 나는, 빛이 태양의 이성이라면 볕은 태양의 감성이라 부르겠습니다.
볕 좋은 계절입니다. 함빡 붉은 고추, 천하태평으로 누런 들판의 벼, 색색으로 물들어가는 풀과 나무…. 이맘 때 하늘이 높아가는 건, 자신이 빚어 놓고도 믿기지 않은 듯,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살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계절에는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내면으로 침잠할 경우 자기연민이라는 치명적 함정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볕의 감성으로 신들메를 조이고 산수간을 거닐어야 합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인 자연의 품에서는 인간사에서 작동하던 두뇌 기능이 정지돼 버립니다.
사실 산수간을 거닌다고 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인간에게 자연은 대상화된 존재이니까요. 그나마 따뜻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 있다면 절집일 겁니다. 특히 수타사처럼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은 쭈뼛거림 없이 자연에 동화되게 합니다. 절집도 사람을 압도하지 않고 주변의 산세도 편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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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규모에서 나오는 심원함과 날렵한 공간감
공작산 기슭, 흔히 수타사계곡으로 불리는 덕지천 상류에 이르자 화강암으로 만든 다리가 일주문인양 절의 입구를 알립니다. 그때까지도 절은 지붕만 살짝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살짝 정체를 드러내는 고수의 거동과 같은 것입니다.
절의 정문 격인 봉황문 앞에 서자 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봉황문 사이로 흥회루, 흥회루의 기둥 사이로 대적광전이 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공간의 깊이는 혼을 쏙 빼 놓을 만큼 흡인력이 강합니다. 봉황문의 판벽이 만들어내는 폐쇄감이 통로의 개방성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지세의 흐름에 따라 상승하는 흥회루와 대적광전을 한 축에 배치하여 단 한번의 시선으로도 곧장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절대 미감을 보여주는 프레임 구실을 하는 절집의 문루는 많습니다만, 이렇게 작은 규모의 절에서 심원하면서도 날렵한 공간감을 보여 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봉황문을 지날 때, 한 순간 빛이 차단됩니다. 이어서 환히 열리는 공간은, 흥회루 너머가 그야말로 대적광(大寂光), 즉 빛의 부처인 비로자나의 세계임을 몸으로 느끼게 합니다.
흥회루는 이름 그대로 누각이 아니라 단층으로 된 맛배집입니다. 문루가 아니면서 루(樓)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상징적 의미와 기능적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상징적 의미를 보자면, 고창 선운사의 만세루처럼 누각은 아니지만 사실상 누각이 있어야 할 곳에 서서 다음에 전개될 공간이 불계(佛界)임을 알리는 문루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2층으로 짓지 않았냐 하면, 산지 가람이지만 기울기가 가파르지 않아서 다른 전각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절집에서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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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봉황문(사천왕문)에서 흥회루를 바라본 모습. 흥회루의 문으로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이 보인다. 2중의 프레임으로 하여 비로자나불이 극적으로 부각된다. 보물 제745호인 <월인석보>는 봉황문의 사천왕상을 수리할 때 복장 속에서 발견됐다. / 2 심우산방 앞에서의 한담. 문전이 한가로우면 마음도 한가로운 법. / 3 수타사 초입의 부도밭. 세계의 무상을 일러주는 설법전이다. / 4 대적광전 기단석의 담쟁이. 돌의 핏줄인양 하다. / 5 원통보전 내부. 중생의 원을 다 들어 주려는 불보살의 원력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