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쓸 데 없는’ 떠돌기. 본시 여행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떠돌이의 삶을 타고난 집시나 유목민도 쓸 데 없이 떠돌지는 않습니다. 떠돎은 그들의 생존방식입니다.
떠도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한 여행은 분명 근대의 산물입니다. 순수한 여행은 수확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무목적이 합목적입니다. 물론 명확한 목표를 겨냥한 여행이 없는 건 아닙니다. 취재 여행이나 답사 여행, 혹은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 여행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여행에는 ‘순수한 바람기’가 없습니다. 여행의 진정한 매력은 그냥 바람처럼 떠도는 데 있습니다.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학창시절 수학여행에서 과연 ‘수학(修學)’에 얼마만큼의 관심이 있었는지를.
여름의 정점입니다. 유희본능에 충실한, 괜히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공중제비를 돌고는 대양에 종주먹질을 해대는 돌고래처럼, 산과 들 그리고 바다로 휘젓고 다니기 좋은 계절입니다. 이런 여행지로 서해 변산 만한 곳도 드물 것 같습니다. 이른바 산해절승(山海絶勝), 산과 바다가 두루 빼어난 곳이니까요.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이 아무리 좋기로 곧장 그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판소리 사설처럼 펼쳐지는 풍광들이 들려주는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건, 가마 타고 조는 한심한 양반놀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천년 파도가 깎아 만든 해식단애와 갯벌, 그리고 구름을 휘감은 첩첩 산봉우리가 연이어 펼쳐지는데 어찌 앞만 보고 달릴 것입니까. 만약 요즘 같은 장마철에 변산으로 가다가 바닷가 바위벼랑 어디선가 한 소나기를 만난다면, 그것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 신화의 한 장면을 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소사 가는 길은 게으를수록 좋습니다.
마치 아프리카 지도를 가로로 뉘어놓은 듯한 변산반도는 크게 내변산과 외변산으로 나뉩니다. 채석강과 격포 해수욕장, 적벽강, 고사포 해수욕장, 변산 해수욕장 같은 북서쪽 바닷가쪽이 외변산입니다. 그리고 옥녀봉에서 신선봉, 관음봉, 의상봉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내변산입니다. 따라서 변산이라는 이름은 반도 전체를 일컫기도 하고, 호남정맥의 가지줄기인 변산의 산군 전체를 이르기도 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변산반도는 딱히 어느 한 산을 지목하여 ‘변산(邊山)’이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꼬집어 변산을 지칭하자면 예로부터 최고봉인 내변산 북쪽의 의상봉(508m)보다는 내소사 뒷봉우리인 관음봉(425.5m)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흔히 내소사는 ‘능가산 내소사’로 불리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변산을 일러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고 한 기록을 그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변산에 관한 옛 기록은 여럿입니다만 이중환이 택리지에 쓴 내용만을 옮겨 보겠습니다.
“노령에서 (산줄기) 한 가지가 북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가운데로 쑥 들어갔다. 서쪽·남쪽·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구렁이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나서 해를 가렸다. … 주민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기와 소금 굽는 것을 업으로 하여,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쳐 사지 않아도 풍족하다.”
이제 내소사로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내소사는 633년(백제 무왕 34년)에 혜구 두타 스님이 소래사(蘇來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래사(蘇來寺)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조선 중기 이후에 개명이 됐다는 얘기인데, 당나라의 소정방이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칠 때 이 절에 시주를 하여 내소사로 개명됐다고 전하는 얘기는 거의 믿을 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더욱이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그 같은 전설이 전한다는 것은 괴이쩍기조차 합니다.
소래사에서 내소사로 바뀐 내력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단순히 글자 순서를 바꾼 것 이상의 심오함이 내포돼 있습니다. 절이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한번 헤아려 보겠습니다.
개명에 관해서는 대웅보전 중건과 관련된 전설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호랑이가 화현한 대호선사가 중건했다고 하고, 파랑새로 화현한 관세음보살이 단청을 했다고 합니다.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간단히 줄여보면 이렇습니다.
대웅전을 짓기로 한 목수는 3년을 하루같이 집을 짓지는 않고 법당을 장엄할 나무토막만 다듬었습니다. 이를 한심하게 여긴 동자승 하나, 심술스런 호기심으로 슬쩍 한 토막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드디어 그 일을 마친 목수가 나무토막을 헤아려 본즉 하나가 비었습니다. 목수는 장탄식을 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한심스러웠던 목수는 일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이를 보고 동자승이 감추었던 토막을 내놓았지만, 끝내 목수는 그것을 부정한 것이라 하여 쓰지 않고 집을 지었습니다.
건물이 완공된 후 단청을 할 때였습니다. 화공은 백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자승의 인내심은 99일이 한계였습니다. 몰래 창구멍을 뚫고 본즉, 파랑새가 붓을 들고 단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파랑새는 마지막 붓질을 멈추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소사 대웅보전 내부공포 한 칸은 비어있고, 단청 한 군데는 바탕색만 칠해져 있습니다. 인공의 한계에 대한 섬세한 고백, 혹은 자연에 다가서는 고수의 태도를 알게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아주 매력적인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산문시인데, 조금 길긴 하지만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천연스런 우리말의 최고 경지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소사 대웅보전 단청은 사람의 힘으로도 새의 힘으로도 호랑이의 힘으로도 칠하다가 칠하다가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 다 못하고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어놓고 마지막으로 단청사를 찾고 있을 때, 어떤 해어스럼제 성명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서(西)로부터 와서 이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었다.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마라.”
그런데 일에 폐는 속(俗)에서나 절간에서나 언제나 방정맞은 사람이 끼치는 것이라,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어느 때 슬그머니 다가가서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그네는 안 보이고 이쁜 새 한 마리가 천정(天井)을 파닥거리고 날아다니며 부리에 문 붓으로 제 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곱게 단청해 나가고 있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 기척에“아앙!”소리치며 떨어져 내려 마루바닥에 납작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커어다란 한 마리 불호랑이였다.
“대호(大虎) 스님! 대호 스님! 어서 일어나시겨라우!”
중들은 이곳 사투리로 그 호랑이를 동문(同門) 대우를 해서 불러댔지만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내생(來生)에나 소생(蘇生)하라고 이 절 이름을 내소사(來蘇寺)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단청하다가 미처 다 못한 그 빈 공백을 향해 벌써 여러 백년의 아침과 저녁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내려오고만 있는 것이다.
―내소사 대웅전 단청(전문)
그렇습니다. ‘와서(來)’, 나를 ‘다시 하는(蘇)’ 절이 바로 내소사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오늘이고 미래는 다가올 오늘입니다. 나날이 나를 새롭게 하는 것이 영원을 사는 길임을 일깨우는 절이 바로 내소사입니다.
사실 내소사에 대해서는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서 앵무새 같은 설명 따위는 괜한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유명한 전나무 숲길이나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고려동종(보물 제277호)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관음봉과 세봉 사이의 산 중턱에 자리한 청련암으로 걸어오를 것을 권합니다.
간간이 오솔길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류가 피워 올리는 물안개를 벗 삼아 느긋이 올라도 30분이면 족합니다. 그곳에서 서해로 몸을 돌려 세우고, 곰소만의 그림 같은 풍광에 잠겨 보십시오. 필시 마음 속 한 귀퉁이에서 ‘물처럼 바람처럼 살고프다’며 꼬드기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못 이긴 척 속아 넘어갈 일입니다. 그것이 내소사에서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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