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상왕산 개심사

醉月 2011. 5. 5. 11:45

충남 보령 상왕산 개심사

마음 씻는 골짜기, 마음 여는 절

 

절로 오르는 숲길만으로도 마음을 활짝 열게 하는 절, 개심사-. 자연이 내어준 길을 따라 휘돌아 흐르면,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크고 화려한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 개심사처럼 검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절이 아직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산문(山門)! 산의 어귀를 이르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절의 입구를 일컫기도 합니다. 산으로 드는 일을 입산(入山)이라고 하고, 출가하여 수도승이 되는 일 또한 입산이라 합니다. 이리하여 산과 절은 안심(安心)의 공간이 됩니다. 어떤 근심을 들고 와도 오는 발길 막지 않습니다. 와서 모든 걱정 다 내려놓고 가라 합니다.

상왕산(象王山) 개심사(開心寺)-. 백두대간속리산에서 솔가한 한남금북정맥은 안성의 칠현산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한남정맥금북정맥이 바로 그것인데, 금북정맥이 서해바다에 몸을 부리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는 상왕산(307m) 남쪽 기슭에 안긴 절이 개심사입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정표 중에 갈래머리 땋은 예쁜 소녀를 연상시키는 해미(海美)라는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고속도로를 버리고 해미읍에서 당진쪽으로 5km쯤 달리다 신창리에서 우회전해 5리쯤 더 가면, 홀연히 길은 사라지고 산문이 열립니다.

험한 산 소나무 골짜기
다 쓰러져 가는 암자 하나
산허리에 걸린 길은 실낱 같은데
안개비 속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석지현 엮음, 선시감상사전 375쪽, 민족사)

중국 원나라 때의 선사인 중묵 스님이 지은 ‘옛 절(古寺)’이라는 시의 풍정을 떠올리게 할 만큼 호젓한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 유명 사찰 아랫마을은 어디고 유원지 냄새가 물씬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습니다. 열병처럼 지나간 답사 열기 때문에 개심사도 이제는 널리 알려진 절이 되었지만 아직 번잡의 때는 묻지 않았습니다.

 

산문에는 그 흔한 일주문도 없습니다. 다듬지 않은 자그마한 표석이 그것을 대신합니다. 왼쪽에는 세심동(洗心洞), 오른쪽에는 개심사 입구(開心寺 入口)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 씻는 골짜기’의 ‘마음 여는 절’로 드는 문이라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애써 마음을 씻고 열고 할 것이 없습니다. 길 따라 몸을 맡기면 절로 그리 됩니다.

절로 드는 길은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솔숲 사이로 난 돌계단 길이고, 하나는 찻길입니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도 몸이 돌계단 숲길로 발을 옮겨 놓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힘입니다. 아무리 문명에 길들여진 몸이라 할지라도, 자연 앞에서는 원시성을 회복합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부처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아는 일이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결코 두꺼운 경전이 필요치 않습니다. 자연의 생명력에 공명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듣는 일이자 산천초목이 다 부처임을 아는 길입니다.

스님들 안행(雁行) 하듯 걸어드는 길

 

800m 남짓한 개심사의 솔숲 돌계단 길은 몇 백 리 다리품에는 과분한 즐거움을 안겨 줍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을 일입니다. 뒤돌아보면 발자국마다에 녹음이 고여 있는 듯하고, 올려다보면 솔잎에 걸린 구름이 꽃인 양 합니다. 

가람은 가로로 길쭉한 연못으로 시작됩니다. 상왕산의 형세가 코끼리 같은데 그 코끼리가 마실 물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못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경지(鏡池)라 합니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뜻이겠지요. 이미 세심동(洗心洞)을 거치며 마음을 씻은 터이므로 거리낌 없이 비춰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봄이면 떨어진 벚꽃 잎이 한 번 더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배롱나무 꽃 그림자가 수련과 조화를 이루는 연못입니다. 연못 가운데에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최근에 부러질 위험이 있어 치웠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무리지어 움직일 때도 외줄로 걷습니다. 그것을 안행(雁行)이라 합니다. 기러기가 정연하게 한 줄을 이루어 하늘을 나는 모습에 빗댄 것입니다.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함께 가더라도 결국은 혼자입니다. 죽음만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연못을 지나면 1300년 고격을 고이 간직한 전각들이 펼쳐집니다. 서해쪽으로 열린 공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범종각을 지나 안양루를 비껴 오르면 심검당과 무량수각이 대웅보전을 떠받치는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고, 가운데에는 5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무량수각 오른쪽으로는 요사와 명부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개심사 금당인 대웅보전은 보물 제143호로, 다포계와 주심포계 양식을 함께 갖춘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심검당의 휘어든 기둥이 말해주는 것

전각들 중에서는 휘어진 기둥을 그대로 살려 쓴 심검당이 단연 돋보입니다. 우리나라 사찰 곳곳에 이런 기둥은 흔합니다. 그런데 유독 개심사의 심검당에 더 눈길이 가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아마도 처마를 맞댈 듯 가까이에 있는 대웅전과 달리 단청도 하지 않은 검박함이 대범과 비범으로 느껴지는 탓일 겁니다. 크고 잘난 것만 추구하는 세태에 초연한 그 모습만으로도 미덥고 고맙습니다.

 


심검당의 휘어진 기둥이 진정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인간이 어떻게 자연에 다가가야 하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흔히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말하지만, 저절로 된 것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과의 조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좋은 것도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소곳이 기대는 것일 겁니다. 개심사 심검당의 휘어진 기둥에서, 참으로 곱게 자연에 기댄, 겸손의 몸짓으로 자연에 스며든 인간의 성정을 봅니다. 목재의 귀함과 같은 기능적인 이유나, 운치를 곁들이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렇게 메마른 시각으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얘기가 샛길로 빠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애써 구운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내자 말자 마치 조물주인 양 살펴보고는 깨 버리는 것을 볼 때마다 오만이나 위선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문외한으로서 욕먹을 얘기가 되겠지만,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나름의 구실이 있을 텐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개심사의 창건은 654년(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 국사가 개원사(開元寺)라는 이름으로 산문을 열면서부터입니다. 이후 14세기 초반에 쇠락했다가 1350년(충정왕 2년)에 처능(處能) 스님이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또한 고려 후기의 진정(眞靜)이 지은 《호산록(湖山錄)》에는 ‘폐사가 되어 수풀이 무성하나 절 뒤편에 새로 지은 세 칸짜리 부도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475년(성종 6년) 충청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하다가 산불을 내서 절이 탔으나, 이 해에 다시 중창했다고 합니다. 그 뒤 1740년(영조 16년)에 중수하였고, 1955년 전면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릅니다.

개심사의 명부전은 절 규모에 비해 유난히 큽니다. 마음 씻는 골짜기에 자리한 절인 만큼, 염라대왕 앞에서 달아볼 죄의 무게를 미리 일러 주어 조금이라도 덜어내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을 해 봅니다. 명부전에는 죄의 유무를 가리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지옥을 다스리는 열 명의 왕이 모셔져 있고, 사이사이에 동자상이 있습니다. 아이들처럼 무구한 마음으로 살면 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부전에서 조금 더 발길을 옮기면 산신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멀리 서해로 강물처럼 흐르는 산줄기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산에서 산바라기를 하는 느낌이 각별합니다. 마음 살피는 일도 이와 같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