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금전(金戰) 중-3
“그람 우린 어째야 쓰것소? 해결책도 있어야 할 거 아니오?”
“달러에 대항하려는 유로화나 엔화도 험난한 길을 걸을 게야. 결론은 이제는 태평양을 양어장으로 보자는 거야. 한반도의 대변화는 늘 대륙변화의 일부였어.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 고기가 많은 법이야. 위기가 기회야. 지구가 내일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했잖아. 큰 그림을 그려야지. 38선 통일은 너무 작은 그림이야.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세계지도를 그려야지.”
“일리 있는 말이지만, 실감이 안 납니다. 아직 남북통일도 요원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디….”
조기자는 쓴 입맛을 다셨다. 너무도 가늠할 수 없는 정보였고, 쭉 듣고 있자니 북한통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통일은 어떤 그림이 될 것 같소?”
“연방제나 연합을 생각해볼 수 있지.”
“연방제?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 말이요?”
“그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고. 더 큰 연방 말일세.”
“더 큰 연방?”
“연해주, 간도, 몽골, 일본, 러시아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 연방 말일세.”
조기자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멍했다.
“각기 독립된 자치구를 가지면서 경제, 군사적으로 긴밀하게 연동하는 일종의 한민족연방이지. EC처럼 화폐도 통일하고. 이제는 통일이란 말보다 ‘연합’이란 말이 좋을 것 같아. 통일은 꼭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느낌이거든. 천문학적인 통일비용 때문에라도 흡수통일은 불가능한 게 현실 아닌가, 조기자?”
“그런 통일, 아니 연합이 2012년 부터에 일어난다는 거이죠?”
“눈 깜짝할 사이지. 그런데 가만히 있는 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 대통령이 되려면 서둘러야지. 인심(人心)이 천심(天心)이라고 했어. 사람 하기에 따라 일자는 늘거나 줄 수 있네. 하지만 대세는 거스르지 못하지.”
“그런데 형님이 빼놓은 게 하나 있소. 8월의 경천동지라고 했는데, 그게 뭐요?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는 뜻이오?”
조기자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날을 세웠다.
“아, 그랬지라, 경천동지.”
차법사는 차를 마시며 뜸을 들였다. 조기자는 펜을 만지작거리며 차법사의 입만 바라보았다.
“남북한의 운은 상승기이고 일본은 하강기야. 하지만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있는 법이지. 이를 위해 올해와 내년에 두 가지 기도를 준비하고 있어."
“기도요? 두 가지?”
“지금 하고 있는 개국 열성조와 내년의 대한제국과 6·25기도.”
조기자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다. 개국 열성조, 대한제국, 6·25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조기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손수건을 꺼내 안경에 낀 부옇게 서린 김을 닦았다.
“한 가지 구체적으로 일러줌세.”
“뭡니까?”
“올 9월 4일부로 간도협약이 딱 100주년이 되네. 우리 땅을 되돌려 놓을 때가 되었지.”
간도협약이란 1909년 9월 이루어진 청나라와 일본간의 밀약이다. 일제는 1905년(광무 9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오다가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영토인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조기자는 생각했다. 차법사란 사람 참으로 엉뚱하다. 간도협약이라니. 이런 생각에 조기자의 머릿속이 다시 한 번 엉킨 실타래가 되었다.
“시방 간도를 되돌린다는 말씀이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것소, 형님.”
“허허 그런가. 자세히 설명해줌세. 100년 안에 국제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우리가 스스로 간도협약을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만약 훗날 되찾으려 해도 무관심했던 죄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걸세. 그래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후암미래연구소가 올 9월 안에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도협약 무효소송을 제기할 걸세. 때가 왔으니 우리도 열심히 쪼아야 하지 않는가.”
차법사는 윤봉길 의사 처형사진을 발굴하고 영친왕 유품을 일본으로부터 찾아와 모여대에 기증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있던 신윤복의 맹획의 고사도를 되찾아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신문기사를 조기자도 읽은 바 있었지만, 그런 문화재 반환과 간도협약 무효소송은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른 문제였다.
“그게 가능한 거요? 100년이 지나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중국 눈치 보느라고 국가도 나서지 못하는데 어떻게 일개 민간인이….”
“허허, 두고 보면 알겠지, 뭐.”
조기자의 곤란한 표정에 차법사가 짓궂게 물었다.
“8월에 간도협약 무효소송을 제기하고 경천동지할 일 터진다. 2012년 남북통일이 된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왜 잘못된 거라도 있나?”
“이것이 기사로 나갔는데 만약 실현되지 않는다면 법사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질 수 있소. 예언가로서 매장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오. 그런 위험을 감수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조기자의 표정 중에서 가장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영계로부터 메시지도 있고, 내가 관조해 봐도 그럴 것 같아 전하는 거야. 예언이 맞아도 내 운명이고, 틀려서 엉터리 법사라고 매장 당해도 내 운명 아니겠나. 맞으면 조기자 특종이고, 틀리면 내 위신만 땅에 떨어지니, 이거야말로 조기자가 손해 보지 않는 장사가 아닌가?”
조기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조기자 관심을 끌 만한 일이 하나 더 있지. 기자 복이 있는 사람은 달라. 이것도 특종이라면 특종일 게야.”
조기자는 표시나지 않게 마른 침을 삼키며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얼마 전 20년간 증산을 연구한 용화라는 분이 귀한 문서를 가져왔네. 천문(天文)이라고 하더구만.”
“천문이요? 천자문은 들어봤어도 천문을 처음 듣는디?”
“증산 선생의 현무경과 유서를 천문이라 하네. 그 천문이 도착했어, 얼마 전에.”
차법사는 용화가 가져온 제령봉 서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건 뭐요?”
조기자는 이리 저리 돌려보며 사진을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빛이 들어간 사진인가?”
차법사는 용화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 분 말인 즉, 천문 도수 안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설계되어 있고, 이를 이끌 미륵이 출세해 있다고 하네.”
조기자의 기자본색이 꿈틀거렸다. 조기자는 호기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무관심한 듯 응수했다.
“그라요? 그럼 일종의 증산 비결서네.”
“비결서? 그렇지. 천문을 전해 준 사람이 증산의 마지막 유언 ‘열 석자로 오리라’에 답이 있다는구먼.”
“열 석자 유언?”
“그 사람이 얼마 뒤에 다시 온다고 했으니, 같이 만나보는 건 어떻겠어? 아마도 천문을 직접 해설할 요량인 듯한데…….”
“물론이죠.”
조기자는 벌써부터 흥미진진했다.
몇일 뒤 조기사가 쓴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차법사, 2012년 한북통일 예언’이란 타이틀에 ‘8월 경천동지할 일 생긴다, 간도소송 제기하러 헤이그에 간다’란 작은 타이틀을 단 기사였다. 모 영자 신문 아시아판에서도 이 내용이 기사화 되었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라 겉으론 조용했지만 이 기사들은 많은 사람들이 눈여겨보고 있었다.
간도 출정식
8월 26일 저녁. 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100일 구명시식이 벌어지고 있는 극장에 용화도 동참하고 있었다. 용화는 열세분의 열성조 영정 옆에 붙어 있는 익숙한 그림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건네준 현무경과 증산 유서가 나란히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증산 화천 100년 만에 이렇게 100일기도에 등장한 광경을 보니 마치 증산이 살아온 듯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날 놀랄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1시간 넘는 예식이 끝나고 차법사가 무대로 올라갔다. 열성조 영정에 절을 올린 차법사는 아무 말 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이 접은 한지였다. 하늘이 내려주는 부적을 쓰는 검붉은 색 견명주사로 쓰인 4글자의 한자가 펼쳐졌다.
그때였다. 별안간 차법사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장내가 술렁였다. 붉은 선혈이 글씨 위로 빗물처럼 후루룩 떨어졌다. 차법사는 피 위에 인장 찍듯 엄지손가락을 꾹 눌렀다. 차법사는 피로 인장을 찍은 견명주사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펼쳐보였다.
爲法忘軀(위법망구)
“오늘은 출정식이 있는 날입니다. 무슨 출정식이냐 하면……. 간도협약 무효소송 출정식입니다. 도(道)가 석장이면 마(魔)는 열장이라고, 큰 뜻에는 마장이 끼기 때문에 귀신도 속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100일 구명시식 딱 절반이 되는 오늘에야 여러분들에게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좌중은 다시 한 번 술렁였다.
“여기 견명주사로 쓴 글자는 위법망구(爲法忘軀)입니다. 이 법을 위해서는 이 한 몸 바쳐도 좋다는 뜻입니다. 아난존자가 불법을 전하려 떠나려 하자 석가모니가 ‘돌에 맞아 죽을 텐데 괜찮겠는가?’라고 묻자 아난존자는 ‘죽는 줄 알면서도 간다’고 했습니다. 눈이 쌓이는 겨울날 혜가는 달마대사에게 팔을 잘라 바치며 ‘이 한 몸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위법망구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출정식을 올립니다.”
용화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늘 한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 일을 위해 꼭 필요한 분입니다. 박형기씨입니다. 나와서 인사드리세요.”
차법사는 전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간도협약 100년의 조망’ 학술대회에 다녀온 참이었다.
열흘 뒤 9월 4일이면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날이기에 관련 시민단체들은 들썩였다. 100년이 되기 전에 정부가 나서서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도협약 무효소송 서류를 접수하라는 시위였다. 관련 시민단체들은 전국 곳곳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이날의 학술대회 역시 현 정부의 행동을 촉구하는 일종의 시위성격이었다.
차법사가 학술대회에 간 이유는 한 가지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도협약 무효소송 서류를 접수에 같이 갈 동참자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대정부 성토가 이어진 회의는 시종일관 뜨거웠다. 그러나 이상했다. 차법사가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들은 성토만 할 뿐 헤이그에 간다고 나서는 행동가가 없었다. 실망한 차법사가 돌아서려는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박형기 민족운동가였다.
차법사의 갑작스런 거명에 당황한 박씨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띠리링- 띠리링-
별안간 요란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진지하던 분위기에 일순간 파문이 일었다. 기도 입장 전엔 진동, 묵음조차 금하고 전원을 끄도록 확인을 하고, 그래도 노파심에 식 시작 전 무대 위에서 사회자가 확인 안내방송을 하여 이중삼중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터였다.
누구 벨일까. 부주의를 책하듯, 150여명의 시선이 벨소리 쪽으로 일제히 모아졌다. 다름 아닌 박씨의 휴대전화였다.
박씨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입구에서 안내에 따라 분명히 전원을 끄고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파워 버튼을 눌렀으나 도무지 작동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눌러도 무심한 벨은 계속 울려댔다.
차법사는 그런 광경에 빙그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23년간의 구명시식 중에 종종 코드가 빠진 전화기 벨이 울린 적이 있었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사를 앞둔 지금, 예사롭지 않은 신호였다. 사람들은 무슨 징조일까 궁금해 했지만, 나중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박씨는 동행했던 총무에게 얼른 전화기를 넘겨주며 꺼지지 않는 휴대전화를 극장 밖으로 가져나가게 했다. 무대에 오른 박씨는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진땀을 닦으며 동참자들에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이상하네요. 분명히 들어오면서 껐거든요. 더 이상한 건 파워를 아무리 눌러도 전원이 안 꺼진다는 겁니다.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네요. 아무튼 초면에 거듭 사과드립니다.”
박씨는 간단하게 헤이그에 같이 가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차법사는 후암미래연구소 사무국장인 김국장도 나오게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민족회의라는 임시준비정부의 대표, 부대표로 저를 대신해서 같이 갈 겁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위법망구 넉자를 드릴 테니 가지고 가세요. 여기 모인 분들의 기도가 함께 가는 겁니다. 이준 열사와 같은 심정으로 우리의 뜻을 전해주세요.”
다시 한 번 박수가 터졌다.
용화는 식 내내 가슴이 벅찼다. 출정식도 출정식이지만 증산 이후 사라진 ‘납향제(臘享祭)’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납(臘)이란 ‘연종(年終)에 천지신명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뜻한다. 옛날 중국 하나라 때는 청사(淸祀), 은나라 때는 가평(嘉平), 주나라 때는 석사라 하였고, 한나라 때는 납(臘)이라 했다.
납향제(臘享祭)는 본래 나라 임금이 제주(祭主)가 되어, 나라의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는 행사이다. 국조 단군 이래 반만년 역사 동안 피고 진 나라가 많았는데, 각 건국조(建國祖)들에게 제사 지내는 국가적 중요행사였다. 예로부터 동지 후 제삼 술일(第三戌日)에 납향제를 지내던 것을, 조선국 이태조는 동지 후 제삼 말일(第三未日)로 고쳐서 지냈다.
증산도 납향제에 공을 들였다. 책에는 증산이 무신년(1908년) 동짓달에 무신납월(戊申臘月) 공사를 본 기록이 나온다. 이 납월공사는 천지(天地)를 바로잡는 대공사(大公事)라고 하였고, 이 식을 올리면서 글 쓴 종이가 무수히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부분의 제문과 부적은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어졌고, 현존하는 그림들은 그중의 일부가 현무경이라 불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면면이 이어오던 납향제의 명이 끊긴 때는 일제 강점기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겼으니 그렇다 치고, 해방 후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통령도 납향제를 지낸 기록이 없었다.
단군 이래 수천 년 동안 지내온 납향제가 우리 손에 절명된 것이다. 용화는 국가지도자들이 현충사에는 참배하면서 납향제를 외면하는 것에 늘 안타까움이 큰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 차법사가 국조 단군을 비롯하여 13명의 열성조님을 위한 구명시식을 올리는 장면을 눈으로 확인하니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한 건 당연했다.
특이한 점은 열성조 위패 옆에 일반인 조상의 위패도 빼곡히 붙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도 1천여 개가 넘었다. 이렇게 대대적인 제는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장장 100일간이나 제를 올린다니, 용화는 십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용화에게 약간 못마땅한 점이 있었다. 잠시 기다리는 시간 때문이 아니었다. 식이 끝난 후 차법사가 가는 사람들을 문까지 나와 일일이 손을 잡고 배웅을 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식을 집전하는 제사장이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지천태(地天泰)의 등장-1
식이 끝나고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선원 중앙에 10여 명은 앉을 수 있게 넓은 찻상과 방석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일종의 차 마시는 뒤풀이였다.
“오신 손님들 배웅하는 대로 법사님이 오실 겁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언제 나타났는지 예불스님이 방금 올라온 용화를 친절하게 자리로 안내했다. 용화는 큰 가방 꾸러미를 소중하게 옆에 놓고 도포자락을 정리하며 정갈하게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차법사가 들어왔다.
“아이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손님들 보내느라구요.”
차법사는 신도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용화가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 맞인사를 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차법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이어 용화 또래의 중년의 사내 두명이 따라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 차법사가 소개했다.
“이 분은 오랫동안 증산을 연구하신 용화 선인이십니다. 오늘 중요한 설명을 하기 위해 먼 길을 오셨습니다.”
지천태(地天泰)의 등장-2
용화는 일어서서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차법사가 다른 두 사람을 소개했다.
“조편집국장, 아니 편하게 조기자라고 하겠습니다. 조기자는 내가 미국에서 생활할 때 늘 같이 있었고, 지천태 도인도 미국에서 만났는데 심지가 깊은 분입니다.”
지천태(地天泰).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다. 지천태(地天泰)는 주역의 11번째 괘로 총 64괘중 가장 이상적인 괘에서 딴 일종의 호였다. 지천태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천지교태 소왕태래(天地交泰 小往泰來: 하늘과 땅이 합심하여 천지간에 있는 만물을 양육하니, 땅에는 백곡이 풍성하여 온 백성이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아간다)에서 나온 말이다.
“저와 지선생이 만났던 인연을 말씀해주세요. 그 땐 참 재미있었죠?”
차법사가 지천태를 바라보았다.
“아, 그때요.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차법사와 지천태는 그때를 생각하며 아이처럼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지천태와 차법사의 인연은 미국 서부의 세도나 가는 길을 안내하면서 비롯되었다. 90년대 초 지천태는 국내 재벌그룹에 근무하는 엘리트였다. 당시 서른 중반을 넘긴 그는 결혼도 마다하고 도를 닦는데 열중했다.
국내에서 유명한 기수련 과정을 모두 이수하여 세간에 ‘도인’ 호칭을 듣던 그가 결국 휴직계를 내고 미국에 온 이유도 세도나에서의 기수련 때문이었다.
세도나(Sedona)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기수련의 성지다. 미국 애리조나 주에 위치한 세도나는 과거에는 원주민인 나바호, 아파치, 야바파이 등 인디언 부족들의 성지이기도 했다. 세도나에는 반경 8Km안에 무려 5개의 거대 ‘볼텍스’가 몰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볼텍스란 바로 극을 말하는데, 묘하게도 세도나(Sedona)를 거꾸로 읽으면 전류가 흐르는 표면 양극(Anodes)을 뜻하는 영어단어가 된다. 북극과 남극 이외의 지구 곳곳에는 기를 분출하는 21개의 강한 ‘볼텍스’가 산재해 있는데, 그중 5개나 이곳 세도나에 몰려 있었다. 강력한 에너지 장 때문에 나침반을 놓으면 N극(북극), S극(남극)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전자 장비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근처 숙소의 모든 잠금장치는 구식열쇠가 대신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날 지천태는 우연히 뉴욕에서 만난 차법사 일행을 데리고 세도나 안내를 맡게 되었다. 차법사를 포함한 4명의 일행은 미니 밴을 몰고 애리조나 주의 세도나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미니 밴엔 차법사를 비롯해 3명이 타고 있었다. 운전석에 지천태, 조수석에 미스 김, 운전석 뒤에 미스 리와 차법사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뉴저지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근래 보기 힘든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콰르릉-콰쾅-
벼락과 천둥이 허공을 가르고, 화살처럼 내리 쏘는 폭우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세도나는 꿈도 꾸지 말라는 누군가의 경고같았다.
“자, 저만 믿고 갑니다.”
주저하는 일행을 향한 차법사의 이 한마디에 밴은 장장 2700마일로 예상되는 거리를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뉴저지를 떠나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미주리, 오클라호마, 텍사스 주를 지나 그야말로 끝없는 사막인 뉴멕시코 주의 40번 고속도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내달렸다. 세도나에 간다는 흥분감에 마치 축지법이라도 쓴 듯 달리고 또 달려 자지 않고 번갈아가며 운전한 결과, 이틀 만에 애리조나 주경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은 애리조나 주를 120마일쯤 남겨 놓은 지점에서 벌어졌다.
차법사는 불쑥 일행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딱 10분만 입정 상태에 들겠습니다. 죽은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브레이크를 잡지 말고 달리세요. 잊지 마세요. 그냥 달리기만 해요.”
다들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차법사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죽은 듯 수면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다들 피곤해서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분 뒤.
펑, 펑-
끼이익-
날카롭게 아스팔트를 긁는 굉음이 귀청을 찢었다. 앞에 달리고 있던 거대한 트레일러의 앞바퀴 2개가 커다란 굉음을 내며 연달아 터진 것이었다. 그 파편이 차 유리창 쪽으로 날아왔다.
!
세 명의 일행은 일제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앞 유리가 박살나며 쇠파편이 누군가의 얼굴에 밖힐 건 뻔 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다행히 파편은 유리창 바로 위쪽 천장을 스치며 튕겨나간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날아오는 파편에 놀라 지천태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기우뚱거리며 차선을 바꾸고 말았다. 돌발상황에 조금 전 차법사의 경고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끼이익-
급정거하려는 순간, 밴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뒤따르던 육중한 버스가 굉음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흰색 버스가 허연 악마처럼 밴을 덮치는 순간이었다. 지천태는 실내 뒷거울로 그 상황을 생생하게 바라보았다.
‘아, 늦었어. 내가 신이라도 저 차를 정지시키기엔 너무 늦었어.’
세 명은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차법사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죽은 듯 의자에 기대 있었다.
그때였다. 지천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얀 악마처럼 덮치는 그 버스가 눈에 들어왔는데, 차안엔 아무도 없었다. 앞좌석에 있어야 할 운전자도, 승객도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텅 빈 차였다.
그 순간, 밴에서 무언가 흰 그림자가 그 하얀 버스로 달려들었다. 하얀 버스는 사뿐히, 깃털이 바람을 타고 떠오르듯 밴과 트레일러 사이를 미끄럼 타듯 빠져나갔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한 일행들은 넋이 나간 듯 멍한 상태였다.
그때 또 한 번 차가 휘청했다. 앞서 펑크 난 트레일러가 휘청거리며 밴을 막아서는 순간 귀신처럼 앞으로 빠져나간 하얀 버스가 어느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연쇄충돌 순간이었다.
세 일행은 이제 악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얀 버스에 그대로 들이 받치는 순간, 일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충격도 없었다. 죽은 것일까. 세상이 너무나 고요했다.
지천태가 눈을 떠보니 밴이 차선을 바꾸어 트레일러를 지나쳐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얀 버스가 순간이동을 한 것일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몇 시간이 흘러간 듯 모든 것이 천천히 그리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일행은 아주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색이 된 채 그저 휑한 동공만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법사님!”
그제야 생각난 듯 미스 리가 차법사를 흔들어 깨웠다.
“법사님, 일어나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천태가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차법사 몸에 냉기가 돌았다. 언뜻 보기에 죽은 사람이었다.
“법사님! 법사님!”
놀란 미스 리가 다급하게 차법사를 흔들었다. 지천태가 뒤를 돌아 손가락을 차법사 코에 대보니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얼른 손목을 잡아보았다. 다행히 맥은 뛰고 있었다. 그때 차법사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차법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오랜만에 한 유체이탈이었네.”
차법사는 마치 막 낮잠을 깬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지천태는 등골이 오싹했다. 지천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심령과학이나 기의 세계를 다룬 책에서 유체이탈을 한 육신은 의식만 없을 뿐 숨을 쉬고 맥박은 그대로였는데 숨도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에서 빠져나가 하얀 버스를 밀어낸 게 차법사의 영혼이었단 말인가?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하얀 버스는 무엇이란 말인가?’
정차된 밴에서 멀리 고속도로를 바라보았다. 하얀 버스는 흔적도 없었다. 지천태는 혹시 백일몽을 꾼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미스 김과 미스 리도 하얀 버스 보셨죠?”
“물론이죠. 그 차하고 충돌하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미처 버스 안 까지 살피진 못한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차법사가 보는 사건의 전말은 일행과는 달랐다. 차법사는 애리조나 주에 들어서자 이미 유체이탈을 준비하고 있었다.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낯선 영가가 일행의 차안에 쑥 밀고 들어왔다. 생전에 엄청난 사고를 당해 최후를 맞이한 듯 눈알 하나는 없고 온 몸은 피투성인 히스패닉계 영가였다. 차법사가 염력으로 외쳤다.
지천태(地天泰)의 등장-3
‘썩 물러가라!’
‘키키키, 여긴 내 자리야. 니들 잡으러 온 저승사자지.’
말 그대로 그는 영계를 탈영한 저승사자였다. 원한이 서린 채 교통사고로 죽은 히스패닉계 영가는 지나가는 자동차에 올라타 교통사고를 일으켰던 것이고, 그 자리는 악명 높은 사고 다발지역이 된 것이다. 축축한 음기에 밖을 보니 그 자리에서 죽은 수백 명의 영가들이 좀비처럼 고속도로를 떠돌고 있었다.
차법사는 히스패닉 영가에게 강력한 염력를 보냈다. 히스패닉 영가는 움찔하며 어디론가 휙 사라졌다. 하지만 위기를 넘긴 것이 아니었다.
‘펑, 펑.’
순간 거대한 트레일러의 앞바퀴 2개가 커다란 굉음을 내며 연달아 터지고 그 파편이 차 유리창 쪽으로 날아왔다. 트레일러에는 수십 명의 영가가 들러붙어 있었다. 트레일러 운전자는 영문도 모른 채 정신이 혼미해져 영가들이 조종하는 데로 차법사 일행의 차로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체이탈한 차법사가 엄청난 염파를 발산하자 가까스로 파편이 앞 유리를 비켜갔다. 하지만 이번엔 버스였다. 펑크난 트레일러가 휘청거리며 밴을 막아서는 하얀색 버스가 어느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연쇄충돌 순간 차법사는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력한 염력으로 하얀색 버스를 밀어냈다.
사실 하얀 버스는 실체가 아니었다. 유령들이 만들어낸 유령버스였다. 그래서 승객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 운전자를 교란하여 금정거시켜 뒤이어오는 차들과 연쇄 추돌시키기 위한 일종의 눈속임이었다. 차법사의 염력에 유령버스는 수증기처럼 스스륵 사라졌다. 위기를 넘긴 차법사가 영가들을 꾸짖었다.
‘이승과 저승이 엄연히 구분되거늘 당신들은 왜 이승에서 떠도는가?’
‘나만 죽기는 억울해. 같이 죽어서 우리와 함께 있자고.’
영가들은 능글거리며 다음에 다가오는 자동차에 올라탈 준비를 했다. 차법사는 더욱 강력한 염력으로 영가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붙잡았다.
‘그대들은 고통 속에서 헤매지 않고 새 몸으로 태어나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가?’
‘그러고 싶지.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를 돌봐주지 않았어. 부서진 자동차와 너덜너덜해진 시신만 끌고 가고 우리 영혼들은 그대로 방치했어. 우린 영원히 이곳을 떠나지 못해. 우리의 존재를 알려야해. 그래서 사고를 내는 거라구. 제발 우리를 천도시켜 달라구.’
‘세상에 우연은 없소. 여러분들의 사고는 우연히 아니오. 전생을 거슬러 여러분이 분명히 가해자가 된 사건이 있었고, 이생에서 그런 과보를 받은 것이오. 상대방을 원망하지 말고 스스로 원망하는 마음을 거두시오.’
여러 차례 설득이 이어졌다. 영가들도 서서히 차법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하나 둘씩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종의 간단한 구명시식 천도 의식이 진행되었던 셈이다.
걱정하는 일행에게 차법사가 덤덤하게 말했다.
“지선생, 이제 세도나가 얼마 안 남았으니 달립시다. 세도나 수호신들의 시험도 무사히 통과했으니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요. 역시 공짜는 없군요. 다시 달립시다.”
지천태는 꿈을 꾼 것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단지 트레일러 파편이 운전석 위를 때려 긁힌 자국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고야 생시라는 확신이 들었다. 파편이 조금만 아래로 날아와 운전석을 때렸다면…….
‘휴-’
지천태는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세도나에서 차법사와 헤어진 이후 지천태는 줄곧 차법사를 생각했다. 그날 일도 그렇고, 특히 그곳 세도나에서 전하는 흥미로운 예언 탓이었다.
볼텍스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50년대 말 레스터 레븐슨이었다. 그는 뉴욕의 물리학자이자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말년에 시한부 선고를 받고 스스로 자신을 통찰하여 죽음을 초월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전파하였는데 <의식혁명>의 저자인 데이빗 호킨스 박사는 유명한 제자 중 하나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제임스 레드필드의 소설 《천상의 예언》은 경이로운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무대가 바로 세도나인 것이다. 1994년 레스터 레븐슨은 숨을 거두기 전 유언을 남긴 게 있었다.
‘동양에서 온 깨달은 정신지도자에 의해서 새로운 정신문명시대를 열어갈 중심 가치를 이곳(세도나)이 크고 귀하게 쓰일 것’이라는 유언이었다. 그가 말한 ‘동양의 지도자’란 과연 누구일까? 혹시 차법사는 아닐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서로는 소식이 멀어져갔다. 하지만 차법사가 남긴 마지막 말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선생, 언젠가 다시 만날 겁니다.”
이후 지천태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 티벳, 인도 등지를 순례하며 도인들을 찾아 유랑하였다. 그리고 주역을 비롯해 명리학, 심령학을 두루 섭렵하였다.
세월이 흘러 지천태는 다시 차법사를 찾았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깔깔대며 웃는 지천태의 모습은 여전했다. 차법사가 그의 근황을 묻자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차를 팔고 있어요.”
“네? 차요? 자동차 세일즈?”
“하하하, 자동차할 때 차가 아니라 우려먹는 차(茶)입니다.”
지천태는 전직을 하여 어느새 차 전문점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차를 달여 주위에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팽주(烹主)로 돌아온 것이다.
차법사는 지그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언론사 사장이었던 모 언론인이 작고하면서 유언으로 차법사에게 도선국사의 개태사 주장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물을 전했고, 일부 유품은 사례를 주고 인수했는데, 그 중에는 오래 된 ‘보이차’가 있었다. 때마침 차법사에게 보이차가 들어오던 바로 그날 지천태가 연락을 해온 터였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지천태는 네모난 붉은 벽돌 모양의 전차(煎茶) 포장을 뜯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오늘은 희귀 보이차를 음미하시겠습니다. 감정해보니 30년 이상 된 귀한 차입니다.”
그는 전차를 손가락 만하게 쪼개서 차호에 넣더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물을 붓고 진하게 올라오는 구수한 차향기를 음미했다. 붉은 빛이 도는 차호에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동지섣달 화로 곁에 둘러앉은 사랑방 같았다.
하지만 용화는 난처했다. 은밀하게 차법사에게만 천문을 전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불청객들이 함께 하면 천기누설이 되어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차법사가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오늘 서로 초면인 분들도 계시지만, 알고 보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다 같은 고향사람이니 친하게 지냅시다.”
“동향이라고요? 저와 형님만 같지 않은 게 아니오?”
조기자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허허허, 태어나기 전에 어디 있었겠어요.”
“…….”
“모두 저 세상에서 왔잖아요. 영혼이 어디서 왔겠어요.”
“…….”
“그러니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겁니다.”
하하하-
차법사의 넌센스 퀴즈에 모두 허탈해 했다. 그러나 차법사는 농담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 동석하게 된 인연이 있을 겝니다. 중요한 목격자들이 될 수 있으니까요.”
차법사의 말을 듣고 보니 용화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증산도 남녀평등시대가 도래하는 천지공사를 보면서 ‘지천태의 운수로 후천 세상을 열어간다’고 했다. 차법사와 지천태의 인연 이야기를 듣던 용화는 후천세계가 도래했다는 천문을 전하러 온 자리에 지천태가 동석한 인연 또한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북두칠성의 기운-1
지천태는 자사(紫紗)라는 붉은 색이 도는 돌가루를 갈아서 반죽하여 빚은 자사차호(紫砂茶壺)를 기울여 능숙하게 잔에 따랐다. 용화는 한입 머금고 혀를 한 바퀴 돌려 맛을 음미했다. 목구멍을 넘어가고 조금 지나자 단전에서 어떤 뜨거운 기운이 응어리지더니 이내 활화산처럼 용솟음쳤다. 용화도 다선일미(茶禪一味)라 하며 도담(道談)을 나눌 때 자주 마셔보았지만, 이처럼 기운을 돋우는 차는 처음이었다.
“허 참, 이 차는 기운이 참 특별납니다.”
용화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천태가 지그시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등짝이 뜨겁고 이마에서 약간 땀이 베어날 겁니다. 기 순환이 된다는 증거지요. 20년 이상 묵은 좋은 보이차 한 잔은 한약 수백 첩보다 낫고, 웬만한 단전호흡보다 효과가 월등합니다, 하하하.”
지천태는 말끝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천진한 웃음소리를 잊지 않았다.
북두칠성의 기운-2
보이차 때문이었을까. 용화의 기분은 약간 들떠 있었다.
“여러 모로 오늘은 뜻 깊은 날입니다. 오늘이 바로 음력 칠월칠석이지요. 북두칠성의 기운이 내려오는 날이지요. 이런 날 간도 출정식을 했으니 북두칠성의 가호 아래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신기한 건 제가 법사님 처음 뵌 날도 양력 7월 7일이라는 겁니다. 양력 칠월칠석에 천문을 처음 보여드렸고, 음력 칠월칠석에 천문을 해설하게 되었으니 이는 알게 모르게 천지도수에 이끌려 하는 일일 겁니다.”
차법사가 거들었다.
“북두칠성은 우리 백두민족과 인연이 깊죠. 특히 자미성은 북두칠성 동북쪽에 위치한 가장 강력한 기운의 별인데, 우리 백두민족이 자미성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어요. 중국에서는 자미성을 중국 천자의 별이라고 하지만, 실은 우리가 그 기운을 가장 많이 받고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북두칠성의 신령들을 모시는 칠성각이 있고, 심지어 사찰에도 토착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칠성각이 모셔져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외래종교와 문화가 융합되었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근본신앙입니다”
용화는 감격스러운 듯 오늘의 감회를 털어놓았다.
“천문을 붙여놓고 제를 올리는 구명시식을 보니 감개무량했습니다. 상제님 말씀인 ‘모사재천 성사재인(謀事在天 成事在人)’ 이라는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아무리 미미한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들어가면 일이 크게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법사님 말씀대로 간도와 연해주, 내몽골 지역이 우리나라 땅으로 되돌아온다면,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의 시에서 말한 것처럼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의 영광스런 시대가 재현될 것입니다. 아니 그 당시보다 더욱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여 세계 1등국의 천손민족 국가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길이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일부이기도 하구요. 참으로 법사님의 노고와 선견지명에 감탄과 경의를 표합니다.”
일러스트 : 나은진 |
훈훈한 덕담이 오갔다. 용화는 가방 꾸러미에서 비단으로 싼 뭉치를 소중하게 꺼냈다. 제단에 붙어 있었던 다섯 장의 천문(天文) 복사본이었다. 조기자와 지천태는 숨을 죽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기자가 먼저 감상을 말했다.
“혁필(革筆)이로군요?”
혁필이란 오색물감으로 한자에 사군자나 꽃, 곤충의 그림을 더한 그림이었다. 사군자에 비해 보다 서민적인 조선말기의 그림 기법이었다.
용화는 천문이 적힌 종이의 귀퉁이가 접히지 않게 소중하게 펼쳤다.
지천태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보통 혁필은 오색이지만 여긴 색이 없네요. 검은 먹만을 사용했군요. 그래서 검을 ‘현(玄)’자 현무경인가 보죠?”
용화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성물(聖物)을 대하듯 매우 경건한 자세였다.
“이것이 천문입니다. 그림 석 점은 현무경(玄武經)이라 합니다. 고구려 벽화에도 그려져 있는 동이족 고유의 우주관이 사신도(四神圖)인데, 현무란 좌청룡(靑龍), 우백호(白虎), 남주작(朱雀), 북현무(玄武)에서 북방의 ‘현무’를 이릅니다. 나침반을 볼 때 북방을 중심으로 하듯 천지공사의 중심 되는 경(經)이란 뜻이지요. 상제님이 남기신 현무경이 삼십여 점 있지만 이 석장과 두 장의 유훈이 가장 핵심 되는 장입니다. 과거, 현재 뿐 아니라 미래의 천지공사 도수가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일종의 핵심 요약본이란 거죠?”
조기자의 궁금증에 아랑곳 않고 용화는 설명을 이었다.
“지난번에 제가 법사님께 드린 큰 그림 3장은 원본은 아니지만, 상제께서 직접 그리신 것을 제가 천신만고 끝에 추적하여 복사한 자료입니다. 그림은 본래 이름이 없지만, 성장공사도, 예장공사도, 신장공사도라 붙였습니다. 천간지지(天干地支)의 도수가 성경신(誠敬信) 세 글자 그림에 들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혁필에는 경(敬)자는 안 보이는 것 같은데요?”
지천태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잘 보셨습니다. 경은 예(禮)와 같으므로 경 대신 예로 바꾸시어, 천지공사의 아주 중요한 도수를 음양도참법으로 그림에 설계하신 것입니다. 본래 다른 현무경과 같이 있어야 하지만, 그림 원도(原圖)가 커서 상제께서 현무경에는 ‘천지 성경신(天地 誠敬信)’이란 글씨만 쓰시고 그림은 부록으로 남기신 것입니다. 그림에는 천지공사의 아주 핵심적인 기밀이 들어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법사님과 아주 중요한 도담을 나누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반드시 오리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칠월칠석 오늘이 그 날이 아닌가 합니다.”
처음과 달리 분위기는 점점 진지하게 변하고 있었다.
“증산은 동학의 인물 중 한 분 아닙니까? 동학의 정수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설파하지 않았나요?”
조기자의 질문에 용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몇 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보통 증산 상제를 동학의 한 지류라고 아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정말 잘못 알고 계시는 거지요. 증산은 절대 하나님, 즉 상제님이십니다.”
세 사람은 말없이 눈만 끔뻑였다. 지천태가 차를 따르며 의심을 드러냈다.
“하느님이라고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도 하지만, 하느님이 사람으로 직접 왔다는 말씀인가요?”
용화는 단호했다.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것은 해와 달, 별과 같은 우주 천지의 운행질서를 개조하여 바꾼다는 뜻입니다. 몇 가지 예언이나 이적을 행한 인물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요.”
용화는 증산의 이적 몇 가지를 줄줄 늘어놓았다.
1908년 겨울 어느 날, 증산의 약방에 종도들이 모여 있을 때다. 증산은 이른 아침에 해가 앞산 봉우리에 반쯤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종도들에게 말했다.
“이제 계절이 바뀌는 난국이 도래하였다. 이를 제도하는데 해를 멈추는 권능을 갖지 못한다면 어찌 세태를 안정시킬 뜻을 품겠느냐. 내 이제 시험하여 보겠노라.”
증산은 긴 담뱃대를 물에 축여서 연달아 세 대를 피웠다.
“와-”
여기저기서 종도들이 탄성이 터졌다. 떠오르던 해가 산머리를 솟지 못하고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증산은 웃으며 담뱃대를 마당에 던졌다. 그제야 멈췄던 해가 움직이며 잃었던 시간까지 훌쩍 산머리를 넘어 달아났다.
한번은 증산이 청도원(淸道院)에서 동곡으로 돌아와 있을 때다. 종도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운·우·로·상·설·뇌·전(風雲雨露霜雪雷電)을 이루기는 쉬우나 오직 눈이 내린 뒤에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린 뒤에 서리를 오게 하기는 천지의 조화로써도 어려운 법이다.”
종도들은 눈을 끔뻑이며 증산을 바라보았다.
“돌아가거든 오늘 밤 문을 열고 잘들 살펴보도록 해라. 내가 오늘밤에 이와 같이 행할 것이다.”
그리고는 먹으로 글을 써서 불살랐다. 과연 그날 밤 눈이 내린 뒤에 번개가 치며 비가 오고, 비가 개이자 서리가 내리는 기이한 일기가 연속되었다.
한번은 증산이 종도인 김형렬의 집에 머물 때다.
“강감찬은 벼락 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증산이 좌우 손으로 좌우 무릎을 번갈아 쳤다. 갑자기 제비봉(帝妃峰)에서 번개가 일더니 수리개봉(水利開峰)에 떨어지고 또 수리개봉에서 번개가 일어나 제비봉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흥이 난 증산은 ‘좋다, 좋다’를 연발했다.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된 후, ‘그만하면 쓰겠다’ 하고 좌우 손을 멈추니 신기하게도 번개도 따라 그쳤다.
이튿날 종도들이 김형렬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고는 진짜인지 제령봉과 수리개봉에 올라가서 살펴보았다. 두 눈을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 있었다. 번개가 떨어진 곳곳에 초목들이 껍질이 벗겨진 채로 검게 그을려 타 재가 되어 있었다.
을유년(1945년) 해방공사-1
일행은 사랑방에서 듣는 옛날이야기처럼 용화의 실감나는 표정과 입담에 푹 빠져들었다.
“상제님께서 불치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린 사례들은 차라리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아마 다른 자리에서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저를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여기 계시는 차법사님도 비풍우를 부리고, 죽은 자의 명을 잇고, 불치병을 고치고, 앞날을 내다보고, 천리 밖의 일을 훤히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습니까. 법사님을 믿는다면 증산 상제님도 그러한 것이지요.”
조기자는 검은 안경테를 콧등으로 밀어 올렸다. 용화의 눈은 한층 빛나고 있었다.
“신장공사도를 보면 재미있는 도수가 나옵니다. 을유(乙酉)년 해방공사와 남북 분단공사가 달력처럼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여기 도수가 보이십니까?”
조기자와 지천태는 용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글쎄요. 새 두 마리가 입에 뭔가를 물고 날아가는 것밖에는…….”
“우측에 ‘청조전어 백안공서(靑鳥傳語 白雁貢書)’라 쓰여 있지요. 청조와 백안 새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 데 모두 쪽지를 물고 있고, 그 쪽지는 세상에 소식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소식이겠습니까?”
“…….”
“현무경의 모든 표식은 음양이 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큰 새 ‘청조(靑鳥)’는 양(陽)으로서 일십 천간(天干)을, 작은 새 ‘백안(白雁)’은 음(陰)으로서 십이 지지(地支)를 뜻합니다. 청조의 푸를 청(靑)은 천간에서 갑을(甲乙)로서 봄의 삼팔·목(三八·木)의 고유 색상입니다. 작은 새 ‘백안’은 흰 새 기러기입니다. 12지지의 사구·금(四九·金) 가을 유(酉)지요. 그래서 을유(乙酉)년이 나옵니다. 1945년은 바로 을유년이었습니다.”
하나씩 드러나는 구체적인 숫자가 마냥 신기했다. 용화의 손길에 눈길을 따라가다 보니 보이차가 식어가는 줄 몰랐다.
“앞서 말했듯 청조는 갑을(甲乙)로서 삼팔·목(三八·木)으로 양력 8월, 날개는 7개의 깃털, 꼬리는 8개 깃털, 합이 15입니다. 그래서 15일, 즉 을유년 8월 15일입니다.”
“백안은요?”
“백안은 가을 새로서 음력 7월을 뜻합니다. 꼬리에는 7개의 점이 찍혀 있지요. 음력 7일을 뜻합니다. 백안의 좌우 날개 깃털수를 세어볼까요. 18개에 18개, 더하면 모두 36개입니다. 일제 36년을 말하지요. 을유 1945년 음력7월 7일은 달력에서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양력 8월 14일입니다. 일본은 8월 15일 항복했지만 일본 항복문서 작성일은 하루 전인 14일입니다. 백안이 물고 있는 쪽지가 바로 일본 항복문서입니다. 일본 항복 문서의 글자 수가 815자인데 제가 보여드린 천문의 글자 수를 모두 합하면 815자입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음양 천간지지의 이치로 도수공사를 보신 겁니다.”
“허, 참!”
지천태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조기자는 달랐다. 도자기 감정하듯 용화의 한마디 한마디를 검증하려는 자세였다.
“정리하자면, 신장공사도는 을유년 7월 7석 날(양력 8월14일)에 일본이 815자의 항복문서를 작성하고, 15일에 항복선언을 하여 36년 만에 일제강점이 끝나고 조선은 광복을 맞는다는 소식을 도수로 표시한 겁니다.”
“…….”
“상제님께서는 일찍이 1,900년에 조일합방공사를 보셨지요.”
조기자의 질문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왜 하필 일제로부터 침탈당하는 천지공사를 했습니까? 인류를 구할 정도의 능력이었다면, 일제 침탈을 막아도 시원치 않을 텐데요?”
“다 이유가 있지요.”
“어떤 이윱니까?”
“눈앞의 것만 보는 우리 같은 범인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이지요.”
“뭡니까, 대체 그 이유란 게?”
조기자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가을의 실한 씨앗을 거두기 위해서지요.”
“가을, 씨앗?”
“흔한 말로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지요.”
조기자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 코를 찡그리며 안경테를 들썩거렸다.
“거 참… 더욱 모를 소린데…….”
“교과서에는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을 벌여 동양전체를 삼키려는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다가 패망해서 조선이 8·15광복을 맞이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만…….”
“그런데요?”
“내막은 따로 있지요.”
“내막이라…….”
“당시 제정 러시아는 동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도달했습니다. 태평양까지 진출할 수 있는 부동항(不凍港)을 갖게 되었지요. 이로써 러시아는 5대양에 모두 접하는 막강한 제국이 된 겁니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동양이 최강의 발틱 함대를 거느린 러시아의 식민지로 전락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이를 안 상제님께서 미국과 영국의 지원 하에 일본이 동양을 지키게 도수를 정하셨습니다.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면 조선족의 씨가 마를 것이고, 중국은 조선을 지킬 능력이 없기에 일본을 택한 겁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형식으로 지키게 한 것이죠.”
이번엔 지천태가 품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굳이 일본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조선이 직접 나서서 지키면 되죠.”
“당시 조선은 사대주의에 빠져 정쟁과 대립으로 주체적으로 개화하지 못했고,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굳이 일본을 불러들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광복이 돼서 일본은 빈 손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 이야긴 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객들이 장기를 두고 주인은 구경을 하지만 소가 나가면 판을 거두게 되고 장기가 끝나면 판은 그대로 주인 것이 된다는 이야기.”
“근본적으론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봐도 되지요.”
“결자해지?”
“우주의 일 년으로 치면 상극의 시대가 가고 가을이 해원의 시대가 시작되지요. 해원의 시작을 단주로부터 풀었습니다. 그것이 분열의 시대에서 화합의 세계로 가는 세계통일공사입니다.”
“…….”
조기자와 지천태는 용화의 설명을 못미더워하는 눈치였다. 반면 차법사는 온화한 표정으로 초지일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모두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조기자는 증거를 요구했다.
“말씀하신 건 지난 일이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일도 표시되어 있습니까? 물샐틈없는 도수라고 하셨으니 미래 일도 정확할 텐데요.”
“물론이지요. 사실 지난 일은 소용이 없지요. 제가 법사님을 찾은 이유도 미래 때문입니다. 몇 년 이내에 다가올 엄청난 후천개벽 때문이지요.”
조기자가 질색을 했다.
“후천개벽이요? 그건 허망한 종말론으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밀레니엄을 전후해서 지축이 바로 서고 대륙과 해양이 요동친다는 종말론 말입니다.”
“그건 이 현무경과 증산의 유훈을 완전하게 해석하지 못한 사람들의 과오였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편승한 것이지요. 여기 두 장의 유훈엔 연월일 이름의 도수가 정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현무경 3장에도 나누어서 숨겨져 있구요.”
“이름이라뇨?”
“후천개벽의 시작과 후천을 이끌 미륵의 출세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요? 그 미륵이 누구죠? 언제 후천개벽이 있답디까?”
“지금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보세요.”
용화는 보란 듯이 천문을 가리켰지만 좌중은 어리둥절했다. 한자로 빼곡한 글 어디에도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용화는 당연하다는 듯 여유 있게 미소까지 지었다.
“천문은 봐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천기누설 되도록 허술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니 천문이지요. 하늘의 평풍으로 가려져 있으니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알 길이 없지요. 후천이 언제고 누가 난세를 구할 미륵인지 매우 궁금하실 테지만, 제 입으로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아는 사람만이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일행은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조기자가 아니었다.
“이 5장은 최근 처음 발견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제가 한 자리에 모은 것입니다. 모두 모으니 비로소 온전한 뜻이 된 것이지요. 세상에 드러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 자리가 천문을 받는 자리이니, 시효가 지난 천지공사 도수는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륵탄생공사서부터 차례로 풀어보기로 하지요.”
미륵탄생공사서
용화는 현무경 한 장을 반듯하게 펴고 네 모서리를 책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기초동량(基礎棟梁)’으로 시작하는 이 유서는 일명 ‘감결문(甘結文)’ 또는 ‘미륵탄생 공사서’라고 합니다 ‘미륵탄생 공사서’는 ‘단주수명서(丹朱受命書)’와 같은 날 작성된 상제님 친필 유서입니다. 단주수명서 끝줄에 있는 갑진(1904)년 10월 8일에 증산 상제, 수제자 김형렬, 김형렬의 셋째 딸 말순 세 사람이 함께 수행하고 공증하는 형식의 공사였죠. 이 공사를 보았다는 것은 이미 여러 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단지 이 것이 두 장이었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뿐이지요. 말순의 14세 초경의 기운을 받아 천지공사의 음양조화를 맞추고 유불선이 하나 된 미륵을 포태 시켰고, 19개 중요한 글자에 혈을 찍어 감초처럼 중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미륵탄생 공사서를 일명 ’감결문(甘結文)‘이라 하는 겁니다.”
용화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서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파죽지세로 해설해나갔다.
『기초동량(基礎棟梁)
천지인신 유소문, 문리접속 혈맥관통(天地人神 有巢文. 文理接續 血脈貫通.)
치천하지대경 대법 개재차서 문이시이 치이도동(治天下之大經 大法 皆載此書. 文以時異 治以道同.)』
“하늘, 땅, 사람, 신이 세 둥지를 만드는 나뭇가지처럼 문장을 이루니, 그 문의 이치를 서로 접속하면 혈맥을 관통하여 흐른다.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전과 대법이 그 문에 실려 있으며, 문의 표현은 쓰는 때에 따라 다를지라도 천하를 다스리는 도법은 한결같다.”
“…….”
“여기 분명히 천문을 서로 접속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요. 천문 5장이 모두 합해야 온전한 뜻이 나옵니다. 상제님께서 때가 오기 전까지 천문을 숨기려고 퍼즐처럼 여러 장에 찢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전체로 통합해서 해석하지 못하고 낱장으로 부분적 해석하면 헛수고일 뿐입니다.”
『문즉천문 문유색 색유기 기유령 기령불매 이구중리 이응만사(文則天文. 文有色 色有氣 氣有靈 氣靈不昧. 以具衆理 以應萬事.)』
“문이란 천문을 말한다. 그 문에는 색이 들어 있고, 색에는 기운이 들어 있고, 기운에는 영이 들어 있어, 기와 영이 밝게 하며, 이들의 이치가 서로 모여 고루 갖추어져 세상만사에 서로 호응하고 있다.”
『사지당황 재어천지 불필재인 천지생인용인(事之當旺 在於天地. 不必在人 天地生人用人)』
“천지공사의 이루어짐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므로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함은 아니지만, 하늘과 땅은 사람을 만들었기에 사람을 써서 천지공사를 이룬다. 상제님 가피력이면 뭐든 할 수 있지만 굳이 인간을 내서 천지공사를 도모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사람은 바로 미륵입니다.”
『천지지용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天地之用. 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
원형이정 봉천지도술 경수인시(元亨利貞 奉天地道術 敬授人時.)』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법도는 영혼을 태에 깃들게 하여, 낳아 기르고, 씻기고 가르치며, 청년으로 기운을 왕성하게 하고, 늙어 병이 들고, 죽어 땅에 묻히는 것이다. 이를 인생 12지법이라고도 합니다. 우주 사계의 원리이자 도수인 원형이정의 천지도술을 받들라. 하늘이 그때를 알려주리니 인간들은 공경히 받으라. 여기에 천문을 세상에 공개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이미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때가 바로 오늘 칠월칠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불지형체 선지조화 유지범절 천문 음양 정사(佛之形體 仙之造化 儒之凡節. 天文 陰陽 政事.)』
“미륵은 불도의 형체를 하고, 선도의 조화를 부리고, 유도의 범절을 갖추었으니, 그 모든 음양정사가 천문에 들어 있다.”
『수천지허무 선지포태(受天地虛無 仙之胞胎.)
수천지적멸 불지양생(受天地寂滅 佛之養生)
수천지이조 유지욕대(受天地以詔 儒之浴帶)』
“천지로부터 허무의 기운을 받아 선도의 기운을 포태시키고, 천지로부터 적멸의 기운을 받아 불도의 기운을 성장시키고, 천지로부터 유도의 기운을 받아 목욕시켜 범절을 가르친다.”
『관왕(冠旺)
도술 허무 적멸 이조(兜率 虛無 寂滅 以詔)
감결(甘結)』
“가장 왕성한 관왕의 운세로 도솔 기운, 선도 허무 기운, 불도 적멸 기운, 유도 이조 기운을 하나로 모아 이 공사를 결재한다.”
조기자와 지천태의 눈과 귀는 용화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차법사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이방인처럼 혼자 차를 마시며 때론 눈을 지그시 감고 유유하게 앉아 있었다. 용화의 해설은 청산유수였다.
“다음은 단주수명서입니다.”
“단주가 무슨 뜻입니까? 단전(丹田)과 비슷한 건가요? 아참, 아까 사람이라고 했던가요?”
조기자가 아는 체했다.
“네, 단주는 사람 이름입니다. 단주(丹朱)는 인류 최초로 원한 맺혀 죽은 영혼이지요.”
“인류최고 원한 맺힌 영혼이요?”
“최초의 귀신이구만…….”
조기자의 말에 용화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증산 상제께서는 지상에 선경세계를 건설하시기 위하여 맨 먼저 하셨던 일이, 바로 인류 최초로 원한 맺혀 죽은 요임금의 아들 단주를 현세에 해원상생시켜 전생에서 못 다한 일을 성취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단주가 왜 원한이 맺혔는지 아시나요?”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천하의 패륜아라는 것 뿐이…….”
“그래서 원한이 사무쳐 있는 겁니다.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죠. 단주는 대동세계를 만들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간신배들의 모략으로 왕위를 농부인 순에게 빼앗기고는 천추의 한을 품고 죽은 역사상 실존인물입니다. 그 모함이 풀리지 않고 수천 년간 후세에 이어지자, 상제께서는 단주의 원한을 풀게 함으로써 이로부터 맺힌 원한의 마디를 풀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시고, 맨 먼저 단주를 비롯하여 수많은 신명들을 현세에 상생시켜 해원토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단주의 신명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우리나라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 때가 언제인가가 문제인가요?”
“맞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이 분을 가장 먼저 해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현세의 미륵으로 환생하게 했습니다.”
“그럼 현생의 미륵이 전생의 단주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단주가 미륵이지요. 앞으로 우리나라가 천하의 대중화국(大中華國)이 되므로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일을 성취하도록 거대한 해원공사를 보신 겁니다. 책에 보면 하루는 종도인 박공우가 도통(道通)을 간절히 원하자, 상제님께서 ‘때가 오면 내가 도통을 먼저 대두목(大頭目)에게 주어서 그 두목(頭目)이 천하의 도통군자를 거느리고 각기 닦은 덕목의 대소에 따라 모두 도통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대두목이 미륵입니다. 장차 그 분이 금산사 미륵불로 출세하여 한반도에 출현하게 될 대시국(大時國)의 초대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될 터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단주의 해원이 되는 것입니다.”
조기자는 수첩에 ‘단주’라고 적었다.
“결론을 너무 일찍 말했군요. 처음이라 믿기지 않으실 테니 차근하게 천문의 도수를 풀어보겠습니다.”
증산 선생 유서
용화의 해설은 거침이 없었다.
『증산 선생유서(甑山先生遺書)』
“단주수명서라고 불리는 이 유서는 상제님의 친필유언인데 본래 제목이 없었지요. 김형렬 선생이 주관했던 종교단체에서 이 유서를 베껴 쓰고 증산 선생 유서라고 쓴 것입니다.”
지천태가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쓴 것치곤 문장 길이에서 차이가 크네요?”
“해설을 모두 듣고 나면 알겠지만 문장 길이만 차이가 있지 핵심 내용은 같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상제님 이력이 앞에 더 붙고, 결정적으로 각각 천지도수(天地度數)가 다릅니다.”
“천지도수(天地度數)요?”
증산 선생 유서
용화의 해설은 거침이 없었다.
『증산 선생유서(甑山先生遺書)』
“단주수명서라고 불리는 이 유서는 상제님의 친필유언인데 본래 제목이 없었지요. 김형렬 선생이 주관했던 종교단체에서 이 유서를 베껴 쓰고 증산 선생 유서라고 쓴 것입니다.”
단주수명서(丹朱受命書) |
지천태가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쓴 것치곤 문장 길이에서 차이가 크네요?”
“해설을 모두 듣고 나면 알겠지만 문장 길이만 차이가 있지 핵심 내용은 같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상제님 이력이 앞에 더 붙고, 결정적으로 각각 천지도수(天地度數)가 다릅니다.”
“천지도수(天地度數)요?”
“보이지 않게 두 장에 나누어 천기를 숨긴 것이지요.”
“당시에는 증산을 상제님으로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했네요?”
“당시 종도들은 상제님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와 있는 수십 종의 증산 계열의 경들은 당시에 쓰인 게 아닙니까?”
“네. 화천하시고 수십 년 뒤에 종도들을 찾아 구술을 정리한 게 지금 시중의 경(經)들이지요.”
“음, 그것 참 모순이네요. 상제임을 알아보지 못한 종도들, 또 그 종도들의 구술을 채록하였다니. 그럼 정확성이 떨어지지 않나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마다 틀리거든요. 그래서 저마다 해석한 경이 수십 종이나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구술된 경이 아닌 상제님 친필과 유언을 직접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 천문도 각자 해석차가 생길 가능성이 있겠네요?”
조기자의 질문에 용화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제 스승이 30년, 제가 10년을 연구하였고, 5장의 천문 도수가 한 치의 어김도 없습니다.”
용화는 단호한 자세로 곧바로 유서 해석에 들어갔다.
“내가 서천 서역 대법국 천계탑에서 동양을 향하다가 금산사 미륵불에 깃들어 잇게 되었다. 호남 서신이 관장하는 사명기(생명을 좌우하는 권한 상징)의 지휘에 따라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태어났다. 경자년(1900)에 천문을 받들고 세상에 나왔으며, 신축년(1901) 북두칠성 기운이 내리는 7월 7일 모악산 대원사에서 인도통을 하였다. 임인년(1902)에 첫 제자인 김형렬을 만나, 세상에 덕을 베풀길 굳게 약속하였다. 세간에서 충효열윤리가 세상에 사라지고 있으므로, 사물약재로써 병을 고쳐야 한다. 구릿골에서 선화하면 금산사 불상의 형태가 될 것인데, 떠도는 혼은 전생이 펼쳐졌던 옛길에 다시 나타나리라.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면 화와 복을 내려주고, 비로소 그때야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열리게 되리라. 인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듣고 찾아와 모여, 그 뜻을 도와 세상을 밝히며 천지에 공덕을 닦는다. 단주의 명령은 신장공사도의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푸른 기러기이며, 장신궁(長信宮) 누각에 사람이 그 뜻을 받드는데, 그 형상이 대롱에 갇힌 큰 기러기이니라. 여기에서 보듯이 유서가 신장공사도에 미륵을 숨기고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지요.”
용화는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쏟아냈다. 지천태와 조기자는 그저 학생처럼 수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색을 함부로 쓰면 호해처럼 허망하게 죽으니, 무릇 정사라는 것은 창포와 갈대처럼 유연하게 나부껴야 하느니라. 저수지에서 물을 머금고 비행을 할 때, 하늘의 뜻을 받아 큰 기러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강남 갔던 제비가 옛 주인을 찾아오듯, 끝내는 새로운 성인의 덕을 닦는다. 설명하고 있는 마지막 문단이 특히 중요합니다. 신장공사도는 해방 전후의 천지공사 도수뿐 아니라 미륵 출세의 도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은 중요합니다. 신미년(1871년) 태어나 신축년(1901.7. 7) 대원사에서 도통을 하고 임술생 김형렬을 임인년(1902)에 만났다. 고대엔 4월 8일에 석가불이 탄생하고, 금세 4월 8일엔 미륵불이 탄생하느니라. 이 부분은 기유년(1909년) 6월 24일 24절기에 맞추어 돌아가시고, 금세 미륵불이 4월8일에 태어난 것은 8궤의 기운에 응해 맞춘 것이다. 그런고로 선천에 일어났던 일은 어김이 없었으니, 앞으로 후천에 일어날 일도 천시를 받들라. 시(때)란 하늘과 땅이 함께 작용해서 오느니라. 상제님께서 철저하게 천지도수에 맞추어 공사를 보신 것이지요.”
용화는 입이 말라 들어가자 차한잔을 마시고 지체없이 해설을 이었다.
“미륵은 불가의 형체를 하고, 선가의 조화, 유가의 범절을 받는다. 이것을 우두머리로 하여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여, 도를 미륵불에 옮기라. 불도는 인간의 일상사에서 이루어지느니라. 하늘은 사람을 통해 보이게 함으로써 사람은 하늘로부터 증험하며, 천도와 인도는 한 가지 이치로 통달하게 되어 있느니라.”
조기자와 지천태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이었다. 지천태는 어느새 메모지에 뭔가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용화는 간간히 차법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차법사는 화장실을 드나들고 휴대전화 통화를 위해 종종 자리를 뜨기까지 했다. 용화는 그런 차법사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현무경 풀이가 틀렸다는 뜻일까? 아니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침묵은 뭘 뜻할까?’
잠깐이지만 별별 생각이 다 스쳤다. 입이 마른 용화는 차 한 잔을 입안에 머금었다. 차법사의 눈동자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몸만 그 곳에 있지 눈동자의 초점은 멀리 어딘가에 맞춰져 있었다.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1인 시위-1
용화가 천문 해석에 기염을 토하는 시각,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공항. 8월 29일 차법사가 이준 열사의 심정으로 가라는 징표로 준 ‘위법망구’ 4글자를 품고 네덜란드행 비행기에서 내렸다.
하지만 박대표와 김국장은 공항 로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동참하기로 했던 민족회의 간부들, 간도 찾기에 뜻있는 분들과 제소장 초안을 작성한 미국동포를 비롯하여 많은 단체의 간부들이 어찌 된 연유에서인지 모두 불참하였고, 암스테르담 공항엔 달랑 두 명만 도착해 있었다. 목숨을 바칠 듯 입에 게거품을 물고 비장하게 간도 반환을 부르짖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출발부터 처음 예상과는 많이 빗나가 있었다.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는 이역만리 낯선 곳에 떨어진 두 사람은 막막했다. 통역 없이 헤이그 숙소를 찾아가는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은 이준 열사 또한 이러한 심정으로 헤이그로 달려갔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손짓발짓 영어로 1시간을 더듬더듬 수화한 끝에 헤이그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불가사의한 일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헤이그 시내 지리를 전혀 몰라 두리번거리던 일행은 번화가에서 한인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다행히 주인은 한인이었다. 식당 주인은 친절하게 이준 열사 박물관의 약도와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이준 열사 박물관부터 찾았다. 걸어서 1시간 거리 박물관은 이준 열사가 순국한 호텔을 개조한 오래된 건물이었다. 입구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관장 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은 이준 열사가 순국한 침대 앞에 섰다. 묵념을 올렸다. 일행은 헤이그에 온 목적을 설명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부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분의 뜻은 훌륭합니다만, 국제사법재판소에서는 민간인의 서류를 받지 않아요.”
우회적인 표현이었지만 부질없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 장벽에 굴복했더라면 헤이그까지 오지도 않았을 일행이었다.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1인 시위-2
“이준열사 역시 당시 국제법상으론 되지도 않는 특사로 여기에 오셨습니다. 결국 만국평화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죠. 그럼 그것이 실패를 한 겁니까? 하지 말았어야할 행동이었을까요?”
이준열사 박물관장 부부는 잠시 주춤거렸다. 김국장은 분노 섞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만약 이준열가께서 그런 의거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는 얼마나 초라했겠습니까? 실정법은 불법이고 실패했을지 몰라도 역사적으론 얼마나 큰 성공입니까? 접수가 목적이지만 되든 안 되는 도와주십시오. 100년이 되기전에 와서 분명히 반대했다는 기록을 남기게 도와주십시오.”
“여긴 법과 평화의 도시입니다. 의지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지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때였다. 박물관 전화기가 울렸다.
“이곳 동포인데 김국장님을 찾는 전화입니다.”
김국장은 어리둥절했다. 네덜란드에 전혀 연고가 없는데 현지인 전화라니.
알고 보니 작년에 차법사에게 구명시식을 올린 한 교민이었다. 차법사의 열렬한 팬이였던 그녀가 매일 인터넷으로 차법사의 근황을 주시하다가, 네덜란드에 온다는 신문을 읽고 긴급히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법사님이 오신 것으로 생각하고,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지리를 몰라 도보로 이동하던 차였는데, 현지인이 손수 운전까지 하며 기꺼이 발 노릇을 자청하다니. 더욱이 가장 아쉬웠던 통역을 해결할 수 있어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국제기구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 국제사법재판소 소송 문건을 세심하게 검토하여 규격에 맞게 수정까지 해 주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어쩌면 그렇게 콕 집어 적재적소에 도움을 주는 인물이 나타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난제는 제소장 접수였다.
“나라를 위해 좋은 일 하시는데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습니다만, 접수는 안 될 겁니다. 섭섭하시더라도 솔직히 말씀드려야죠. 아무리 뜻이 좋아도 민간단체는 접수자격이 없어요. UN에 가입한 국가여야만 하거든요.”
만나는 교민마다 격려를 해주었지만 하나같이 불가능하다는 걱정을 앞서 해주었다. 익히 알고 대책을 마련한 터였지만, 막상 굳게 잠긴 국제사법재판소 철문을 보니 두 일행은 더욱 암담하기만 했다.
두 사람은 다시 이준 열사를 생각했다. ‘위법망구’를 펼치고 결의를 다졌다. 매일 3일간 국제사법재판소 정문에서 성명서를 읽고 작은 현수막, 태극기를 펼치고 간도협약 무효와 간도 반환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했다.
국제법을 다루는 냉정한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는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결연한 각오는 그 어떤 것보다 강했다. 그것은 곳 하늘에 보내는 염원이었다.
하늘의 병풍-1
용화는 다 식은 차 한 잔을 마시고 ‘증산 선생유서’ 막바지 해석에 박차를 가했다.
“‘해와 달, 오성은 동서로 다니니, 동서는 해와 달이 다니는 길인 고로 동서는 두 개의 수도로 나뉜다. 남쪽은 불, 북쪽은 물인 고로 남방은 삼리 화다. 불은 발음상 같은 불인고로 남쪽은 오(午), 병(丙)은 남이니 병오 남에 불의 상이 나타나리라. 어둠을 밝히는 데는 불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불도가 가장 왕성할 때 서양의 금(金)세력이 가라앉느니라. 나무아미타불.’ 여기선 남북이 서울, 평양으로 두 개의 수도로 나누는 천지공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도란 지금의 불도가 아니라 미륵이 출세하여 만든 새로운 신불도를 말하는 겁니다. 유교 사서삼경의 도는 덕을 빛나게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지극한 선에 이르는데 있는데, 이를 있는 자(것)는 선이요, 이룩하여 완성하는 자(것)는 성이다.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하고 안과 밖이 서로 길러져야 하며, 그런 연후에야 가히 큰 도라 할 수 있느니라. 1년 360일 점차 수련을 하라. 1년을 1440으로 나누어, 그 일일은 집집마다 장1/4일(자,축,인,시)를 하루로 삼아라. 그리하면 집집마다 누구나 장수할 것이다. 천지에는 무궁한 복, 무궁한 재주가 있으니 하늘은 그 때를 놓치지 않으리. 그러므로 친절한 신명(미륵)은 절기를 분명히 알아보는 이가 주인이 되게 하였느니라.’ 여기엔 평시에 꾸준히 도를 닦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책에 보면 예전엔 도인은 산에 났으나 천지도수가 바뀌면서 민중들 속에 도를 닦는 시대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친히 백성들 속에서 천지공사를 보신 것입니다.”
『갑진년 10월 8일 3일 공사 3인(甲辰年 十月 八日 三日公事 三人)
소만부(小滿符)
천병(天屛)
사(巳)
정해 4월 8일 병오(丁亥 四月 八日 丙午)』
“갑진년(1904년) 수제자 김형렬의 딸 김말순의 만 14세가 되는 해 10월 8일에 세 사람이 함께 공사를 보다. 하늘의 병풍을 쳐서 미륵출세를 가린다. 여기에 도수가 숨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던 지천태의 눈이 반짝였다.
“출세한 미륵이 정해년 4월 8일 생이란 뜻입니까?”
조기자와 지천태의 눈이 일제히 용화 쪽으로 향했다. 왠지 심드렁하던 차법사도 고개를 돌렸다.
“소만부는 소만절 탄생일인데…… 제가 더 이상은 밝힐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도수 대목에서 또 못하겠다니 좌중은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여기에 미륵에 대한 모든 도수가 요약되어 있지요. 하지만 천기누설입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사람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늘의 병풍을 친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천태는 쓴 입맛을 다셨다.
“연속극 잘 보고 있다가 마지막 회 못 보는 거와 다를 게 없네요.”
조기자는 아예 시비조였다.
“괜스레 변죽만 올리시깁니까?”
“신장공사도에 더 구체적인 미륵 도수가 나와 있지요. 출세할 미륵의 생년월일과 성씨까지 명시해두셨으니까요.”
“그래요? 그럼 이미 미륵이 출세해 있다는 뜻입니까?”
용화는 아무 말 없이 눈을 지그시 감았지만 긍정의 표시였다.
“모든 천지도수는 결국 미륵의 출세를 위한 것이지요. ‘미륵탄생공사서’에 분명 ‘사람을 써서 천지공사를 이룬다’고 되어 있었지요. 유서에는 단주의 명령을 전하는 기러기의 뜻을 받드는 인물이 성장공사도의 장신궁(長信宮)에 있다고 했구요. 그러면 장신궁의 비밀을 잠시 풀어볼까요.”
용화는 이번에는 신장공사도를 펼쳤다. 점점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신장공사도 우측 서문에는 청조전어 백안공서(靑鳥傳語 白雁貢書)라고 쓰여 있습니다. 청조와 백안이 전하는 소식이란 뜻입니다. 이에 대해선 이미 서두에 을유년 해방공사에서 해설드렸고……. 이제 백안의 미륵탄생공사 차례군요.”
조기자가 조바심을 드러냈다.
“설마 여기서도 천기누설이라면서 스톱하기 없깁니다.”
용화는 빙긋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신장공사도에는 오로봉(五老峰) 안에 장신궁(長信宮)이란 글씨가 쓰여 있고 그 안에 불상이 서 있으며, 그 몸체에 21수리(數理)로 추정되는 21개의 점이 찍혀져 있습니다. 장신궁(長信宮)의 글씨는 33획수, 즉 33수리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것은 33천(天) 도솔천을 의미합니다. 장신궁 안에 서 있는 사람형태의 불상은 도솔천의 주인인 곧 미륵불임을 추정할 수 있지요. 좌우 도합 12개의 갈대가 펼쳐진 이곳은 금산의 금곡 저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상이 서 있는 구조물은 여러 가지 수리(數理)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4그루의 소나무와 9개의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21로 설계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천주 주문 21자와도 일치합니다.”
“미륵이 거처한다는 장신궁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합니까?”
하늘의 병풍-2
“생전 상제께서 동곡약방 주인 김형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나보다 나은 사람일세. 자네를 먼저 찾아야 나를 알게 될 것이니 말일세’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상제께서 큰 뜻을 일부러 이 집 깊숙이 감추시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지천태는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물었다.
“동곡약방에 숨겨 놓았다는 겁니까?”
“그 때문인지 동곡약방은 1909년도에 상제 어천 후 차경석과 고부인이 찾아와서 약방의 벽지에 붙은 상제 시와 약장과 방바닥의 먼지까지 쓸어간 일이 있었죠. 이것은 동곡약방의 기운을 싹쓸이하여 대흥리로 옮겨가는 의미가 되지요. 그 기운으로 인하여 고부인은 대흥리에 초창기 종교단체를 만들었고, 훗날 차경석은 보천교를 만들었지요. 그러나 장신궁은 동곡약방이 아니라 출세한 미륵이 거처하며 천지공사를 보는 곳이라고 생각 됩니다. 결국 누가 미륵이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주인 없는 동곡약방은 헛껍데기일 뿐이지요. 지금도 서로 동곡약방을 차지하려고 애쓰고들 있지만 주인의 도수는 성장공사도(誠章公事圖)에 이미 정해놓으셨습니다.”
“출세한 미륵의 이름이라도 나와 있다는 겁니까?”
넘겨짚는 조기자의 예측에 용화가 흠칫했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해설을 이었다.
“생년월일이 나와 있지요. 성장공사도 우측 서문에 수양매월 만고유풍(首陽梅月 萬古遺風)이라 쓰여 있습니다. 수양(首陽)년 매화 월 생(生)에게 만고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도맥(道脈)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이 8개의 글자에도 역시 도수가 설계되어 있지요. 글씨 전체의 획수는 79획이고, 앞의 4자는 36획이 나오는데 신장도 그림 백안(白雁)의 양 날개에 찍힌 36개의 점(點)과 일치하지요.”
“이 획수를 일일이 세어보셨다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상제님 한 획 한 획에 따라 천지도수가 좌우되니 한 점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나요.”
“그 말씀은 만약 해석에서 한 획이라도 틀린다면 천문 해석이 틀린다는 뜻도 되겠네요?”
“물론이지요. 한 획도 어긋나지 않게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 천문입니다. 여기 연도와 월일이 나와 있습니다. 한번 찾아들 보시겠습니까?”
지천태가 몇 번을 훑어보았지만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숫자는 안 보이는데요?”
“눈앞에서 보아도 보이지 않게 하늘의 병풍을 쳐놓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때가 되어야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기자는 안경을 벗더니 손수건으로 슥슥 닦았다. 용화는 의기양양해하게 해설을 늘어놓았다.
“수양(首陽)은 양(陽)기운, 즉 천간의 머리라는 뜻으로 왼쪽과 오른쪽 그림의 요철 돌출부분에 7개와 9개가 나오므로 천간지지로 계산하면 곧 경신년(庚申年) 도수가 산출됩니다. 즉 미륵불은 경신년 생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수양에 핀 매화와 반달은 월과 일입니다.”
“몇 월 며칠인가요.”
“매화는 4월이고 반달은 7.5일 즉 8일이 됩니다. 경신년 4월 8일 생이지요.”
“그래요? 혹시 증산 선생 유서 말미에 등장하는 4월 8일 그 일자와 같은 건가요?”
“미륵탄생공사서에 뭐라 되어 있었습니까? ‘천지인신 유소문, 문리접속 혈맥관통’이라. 그 문의 이치를 서로 접속하면 혈맥이 관통하여 흐른다. 모든 천문이 한 장이나 다름없다는 걸 사람들이 그동안 몰랐던 게지요.”
조기자와는 달리 지천태는 붙임성 있게 질문을 이어갔다.
“성장공사도 안에 비석과 글자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 비석에는 천지사풍이제원(天地使風夷齊院)이라 쓰여 있지요. ”
“이제원이 뭡니까?”
“그건 일종의 암호문자입니다.”
“그래요?”
이번엔 용화가 천기누설 운운하며 빼지 않고 선선히 풀이를 했다.
“이제원(夷齊院)의 이제(夷齊)는 ‘사람의 목을 베어 끊고, 멸하여 없애는 집’으로 귀신을 제도하는 곳으로서 멸살 당함을 건지는 집이기도 합니다. 해원공사, 적멸공사를 보시는 곳이지요. 상제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시며 인류 선악을 심판하는 집이기도 했고, 장차 미륵불이 출세하여 억조창생들의 생사를 점고하는 옥황후비님의 거소라는 뜻이 됩니다.”
“땅위의 집은 아닌 갑네.”
조기자가 퉁명스럽게 추임새를 넣었다.
“천지사풍이제원(天地使風夷齊院)에도 도수가 설계되어 있습니다. 일곱 글자로 된 절문(節文)의 수리를 분석하여 종합하면 天(10數), 地(12數), 使(18數), 風(16數), 夷(14數), 齊(19數),院(17數) 모두 106수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6도수도 의미가 있나요?”
“7개의 암호 문자에는 미륵이 천명(天命)을 받는 시기가 들어 있습니다. 천명을 받는 연도, 날짜, 시간 등이 설계되어 있지요. 그러나… 아직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으므로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지요.”
“결국 본인이 풀어보라는 말씀이군요.”
용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장신궁과 이제원은 같은 장소를 말합니까?”
“맞습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夷齊)’의 절문 수리의 합은 33이 되는데, 신장도의 장신궁(長信宮) 절문 33수리(數理)와 서로 일치하고 있지요. 말하자면 장신궁과 이제원은 같은 장소가 되는 것이지요. 현재 이곳에는 많은 의통, 인패가 보관되어 있는데, 장차 병겁이 올 때 사용하려고 하늘에서 준비해 두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궁금하시겠지만, 그 장소 또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무슨 천기누설이 이다지 많은 겁니까?”
조기자가 참다참다 마침내 불만을 터뜨렸다. 지천태는 좀 더 끈기가 있었다. 조기자는 심드렁해 하는 반면 지천태는 흠뻑 빠져 있었다.
“예장공사도는 무엇이지요?”
“천지 성경신(誠敬信) 가운데 경(敬)에 해당하는 규범인데, 경은 예(禮)와 같아 예자가 되었지요. 우측에는 ‘낙출신귀 천지절문(洛出神龜 天地?文)’이라 되어 있습니다. 천간지지 24절기의 역리법칙이 들어 있지요. 예장공사도는 일명 귀마일도(龜馬一圖)라 합니다. 그림 안에는 북현무를 상징하는 신귀(神龜)와 용마를 하나의 역상(易象)으로 만드는 법도가 계시되어 있지요. 그런데 귀마일도의 거북 등에 그려진 낙서도(洛書圖)와 그 아래 하도(河圖)는 기존의 것과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요. 낙서의 동방 3.8목이 3.6으로, 하도의의 3.8목이 4.8로 변경되어 있지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러한 문을 천지절문(天地節文)이라고도 하는데 역리의 이치를 그린 것입니다. 역리가 변경되었다는 것이지요. 상제님께서 새로운 천지공사를 보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천지공사가 바로 그것인데, 귀마일도는 천문을 요약한 총론쯤 된다고 할 수 있지요.”
“왜 변경했을까요?” “우주의 가을로 들어서는 후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지요. 후천 우주운행 도수가 선천과 같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절후를 바꾼 것이지요.”
“우리 같은 범부들은 아예 접근도 못하게 꽉꽉 잠가놓았군.”
“그러니 천문이지요. 인간이 하늘의 말을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나요.”
세계 통일국가-1
용화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천문해설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법사님 100일 구명시식을 보면서 경탄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만, 가장 크게 놀랬던 건 13이란 숫자입니다. 13분의 열성조를 칠월 칠석에 제를 시작한 사실입니다.”
지천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놀랄 일입니까?”
“도수 13은 인간의 수가 아닙니다. 하늘의 완성 수입니다. 서양에서는 13일의 금요일이라고 해서 13을 악마의 수로 치부하지만, 예수님이 만약 13제자를 거느렸다면 인류역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하나가 모자란 12제자뿐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함으로 마저 뜻을 못 이룬 겁니다.”
“…….”
“13열성조의 13수는 천문을 의미합니다. 오늘 천문을 받는 것도 예정되어 있었던 거지요. 2012년 통일은 병겁의 시작년도이구요.”
“통일과도 연결되나요?”
“법사님의 책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상제님이 말씀하신 후천세계와 일치하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차법사님께선 당신의 저서 《영혼의 목소리》(225쪽)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습니다.
‘새로운 종교의 태동이 목전에 다다랐다. 기존종교의 틀로는 엄청난 변화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 주장만 하는 종교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밝아오는 21세기에는 스케일이 큰 다른 종교가 있어야 한다. 기존종교의 귀향운동이 전개되는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려야 한다. 그 진원지는 우리 동이족의 고향이어야 한다.’
선천은 여름의 기운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여름의 나뭇가지처럼 분화하지만, 후천엔 혹독한 겨울을 날 준비에 들어가는 거지요. 종교는 머지않아 통일될 겁니다. 그동안의 종교는 유럽, 이슬람, 동양으로 나뉘는 지역적인 종교였습니다. 이제 범지구적인 종교로 통합될 때가 도래한 것이지요.”
오랜만에 조기자가 입을 띠었다.
“그럼 불교, 기독교, 이슬람도 아닌 종교가 뭡니까?”
“천문에 ‘미륵은 불가의 형체를 하고, 선가의 도통줄 조화, 유가의 범절을 받는다’고 했지요. 외형은 불가겠지만 내용은 더욱 포괄된 신불교가 아닐까 합니다. 책에 보면 상제님께서 백양사에 가서 불상(佛像)들의 머리를 담뱃대로 톡톡 치시면서 ‘속세에 나가서 장가들어 자식 낳아 즐겁게 살라’고 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불교는 모든 승려들은 후천이 되면 결혼하게 될 정도로 파격적인 공사를 보아 두셨지요. 상제님도 결혼하였고 미륵불도 결혼할 것이니 모든 승려들도 결혼하여 자식 낳고 살게 될 것입니다. 신앙형태도 기존과는 다른 생활종교가 될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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