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1)-치악산 구룡사
역사와 사진 속의 유물이 된 대웅전과 불상을 다시 보며
조선 후기인 1807년에 건축된 팔작지붕에 다포형태를 하고 있는 단아한 목조의 대웅전만이 아니라 그 안에 모셔놓았던 3분의 불상도 완전 전소했다. 그 외에도 탱화와 소종 그리고 법상과 법고 등은 물론 다수의 불기와 시설들이 타버렸다.
정확하게 25개월 전인 2001년 7월 8일 구룡사에 들렸을 때 카메라에 담아 놓은 그 대웅전과 불상들을 이젠 사진에서야 보아야 한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가끔 현존하지 않는 유물을 사진으로만 보며 많은 아쉬움을 가졌던 일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니 믿어지지 않는다.
많고 많은 산중에 그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는, 10개가 넘지 않는 몇몇 산 중 하나가 치악산이다. 바위가 많고 험하기에 이름에 '악'이 들어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종가(宗家)나 종손처럼 산중에서 제일 어른의 산(즉, 큰 산)인 산종(山宗)에 '악'자가 사용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사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보광루 아래로 들어서 까치발 돋듯 돌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대웅전이 있었다. 그러나 사진에 있고 기억이 생생한 대웅전은 간데 없고 그을음에 거무티티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휑한 공간에 흰색 현수막만이 나풀거린다. |
ⓒ 임윤수 |
웬만한 절 치고 진입로 좋지 않은 곳이 있겠냐마는 구룡사 진입로는 산 이름에서 예견되는 험하고 급한 경사와는 영 딴판이다. 시골 마을끼리 이어주는 산모퉁이 농로처럼 완만한 경사에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산줄기와 계곡을 따른 구불구불함이 있다. 게다가 수백년은 되었을 울창한 노송이 만들어 주는 그늘은 한낮에도 태양 빛 한 점 볼 수 없고 코끝엔 솔향이 뭉턱뭉턱 묻어나는 그런 길이다.
궁색한 기억 속에 있는 대웅전이 자꾸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참 불사중인 일주문과 부도전을 지나 사천왕문 앞 공터에 다다랐으나 호들갑스럽게 상상하였던 그런 모습, 그을리고 어수선한 그런 모습은 아니다.
▲ 이제는 사진과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웅전의 모습이다. 2년여 전 구룡사를 찾았을 때 구룡사 대웅전은 이렇게 단아한 형태로 건재하였다. |
ⓒ 임윤수 |
사천왕문을 들어서 숨가쁘게 올라서야 하는 대웅전 경내 마당과 높낮이 차에 조화를 이루기 위해 높게 건축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천왕문이 있는 바닥과 대웅전이 있는 경내 마당은 꽤나 높이 차이가 난다.
급경사의 오름길에 단층으로 야트막하게 사천왕문이 들어섰다면 왠지 어색하고 왜소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을 듯하다. 규모와 형태에서 주변과 조화를 이룬 선인들의 지혜와 예술성이 느껴진다.
사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보광루 아래로 들어서 까치발 돋듯 돌계단을 오르니 눈앞이 허전하다. 사진에 있고 기억이 생생한 대웅전은 간데 없고 그을음에 거무티티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휑한 공간에 흰색 현수막만이 나풀거린다.
뉴스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궁색하게 그려보았던 화재 현장이 실물로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비록 정돈되어 아수라장이 되었을 화재 당시의 어수선함은 보이지 않지만 있어야 할 대웅전이 빠져버린 공간은 허전하다.
▲ 사진에 있고 기억이 생생한 대웅전은 간데 없고 그을음에 거무티티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휑한 공간에 흰색 현수막만이 나풀거린다. |
ⓒ 임윤수 |
저절로 두 손을 모으고 몸을 낮추게 하였던 불상도 온데간데없고 타다 남은 목탄 조각만 보일 뿐이다. 부서지고 깨어져 흩어진 기와조각과 숯검정으로 변해버린 목조들이 화재 당시 우왕좌왕했을 스님들과 사람들의 하염없는 당혹감을 떠올리게 한다.
아침저녁으로, 불공이 있을 때면 법당에서 영락없이 사용되었을 동제(銅製) 소종이 열기를 이기지 못해 반쯤은 녹은 상태에서 흘러내린 흔적이 당시의 뜨거움을 짐작케 한다.
정돈된 화재 현장과 새로 불사되어 전에는 보지 못했던 전각들을 둘러보고 대웅전이 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을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꼬리를 문다. 한참 그곳에 서있다 종무실을 찾았다.
종무실을 찾으니 때가 때인지라 주지인 자광스님(李遠行)은 정신없이 바쁘시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전화를 받고, 이미 와 있던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한참을 기다리다 스님께 인사 드리고 몇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 저절로 두 손을 모으게 하였던 목불(木佛)도 이젠 사진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
ⓒ 임윤수 |
어떠한 경우도 화재 전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지만 혼신을 다하여 원상에 가깝도록 복원을 하여 놓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기도하며 전문가와 관계기관에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고 하였다.
화재가 있고 며칠 간은 스님께서도 어찌할 줄 몰라 마음을 놓고 있는데 85세 된 할머니가 노구를 이끌고 스님을 찾아왔었다고 한다. 한 여름 고추를 따서 벌어들인 돈이라고 하면서 몸빼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내 놓으시며 '원력을 세워 하루라도 빨리 복원을 해 달라'고 애원하듯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천재라 할 태풍매미에 상처입고 쇠락해가는 경제에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의지처이며 희망의 공간이었던 대웅전과 부처님을 하루라도 빨리 복원해야 한다'고 채근하듯 말씀하시며 신신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 수천 수만 불자들의 경배대상이었던 불상도 불에 타니 한 조각 목탄조각일 뿐이다. |
ⓒ 임윤수 |
문화재였던 구룡사 대웅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현존물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문화재를 창조한다는 그런 각오로 복원불사에 임하겠다고 하신다. 오는 24일 기공식에 이어 2004년 3월에 봉불식을 갖고 4월 5일 준공을 예정으로 복원 불사가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아주 얄미운 소리 중 하나가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말을 쓸 수밖에 없다. 구룡사는 불행 중 다행으로 대웅전을 포함한 모든 전각에 대해 실측한 상태라고 한다.
2000년 12월 구룡사 주지로 부임한 자광스님은 유물의 보존과 보수 등에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모든 전각에 대한 실측도를 구축하여 놓아 복원에 절대적인 자료가 확보된 셈이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 화재현장을 제일 가까이 지켜보았을 언덕에서 바라본 구룡사는 왠지 허전하다. 대웅전이 복원되면 그 허전함을 덜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
ⓒ 임윤수 |
현재 구룡사는 한문으로 龜龍寺로 쓰고 있는데 예전에는 구룡사(九龍寺)로 썼다. 아홉 구(九)자에서 거북 구(龜)자로 바뀐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한 스님이 명산인 치악산에 큰 절을 세우고자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 주변을 살펴본 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에 연못이 있었다.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 했는데 연못 속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의 용들로서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못을 메우겠다는 스님과 메울 수 없다는 용이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용들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 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고 한다.
용들이 먹구름을 불러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 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져 삽시간에 스님이 서 계신 곳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배를 준비하였던 스님은 태연히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 구룡사의 유구한 역사를 한 눈에 읽게 해주는 부도전도 오늘은 왠지 허전해 보인다. |
ⓒ 임윤수 |
내기에서 이긴 스님은 예정대로 그 연못을 메우고 대웅전을 지어 오늘의 구룡사가 들어앉게 되었다 한다. 이 절터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구룡사(九龍寺)'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은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한다.
역할에 따른 권리가 주어지니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룡사 주지는 뇌물을 받는 등 타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구룡사는 물질적으로는 풍성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 주지인 자광스님은 '석고대죄'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문화재를 창조한다는 각오로 복원불사에 전념하겠다 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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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어 버리니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급기야 절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된 어느 날 또 다른 도승 한 분이 찾아와서는 '이 절은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몰락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이를 흘리지 아니하고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하고 재차 물으니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 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 동강으로 내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한다.
이에 주지스님이 그 처방을 물으니 도승이 답하기를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로 쓰면 될 것'이라 일러주기에 그 다음부터 절의 이름은 거북구(龜)자가 들어가는 구룡사(龜龍寺)로 쓰게 되었다 한다.
▲ 솔향 그윽한 숲길을 걸으면서도 화재 현장이 왠지 자꾸 눈에 거슬린다. 목조건물인 산사의 대부분이 어찌 보면 화재에 무방비상태임을 알기에 검게 그을린 그 목탄들이 자꾸 떠오르는지도 모른다. |
ⓒ 임윤수 |
전설 속에 승천하지 못한 한 마리의 용이 천 년 넘게 모아진 불자들의 불심으로 승천하는 과정에 발생한 성스런 화염이 우리 눈에 비추어진 화재였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억측이며 말장난일까?
구룡사의 화재 현장이 왠지 자꾸 눈에 거슬린다. 목조건물인 산사의 대부분이 어찌 보면 화재에 무방비상태임을 알기에 검게 그을린 그 목탄들이 자꾸 떠오르는지도 모른다.
불교계는 물론 문화재관리국에서도 차제에 최선이 어렵다면 차선책으로라도 이런 불행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했으면 좋겠다.
하기 쉬운 말과 쓰기 쉬운 펜으로만 하는 유야무야한 대책이 아니고 실전에 대응할 수 있는 실천적 대책 말이다.
먼 후일 구룡사의 사적기에 이번의 화재와 복원이 어떻게 기록될지 사뭇 궁금하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2)-치악산 상원사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것이 정치'라 하더니 요즘 정치 판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딱 그 판이다. 어제의 동지였던 사람들이 목에 핏대 세워가며 입장을 달리한 상대의 가슴에 상처가 될 말들을 칼날 들이대듯 마구 퍼붓는 모습에서 비감을 느낀다. 일관 없고 논리 없는 주장으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그들의 모습이 초라하다 못해 측은해 보인다.
건국이래 되돌림 노래처럼 반복되던 정치권의 악습과 불신풍조를 일소해 보겠다는 일념쯤으로 생각하고 싶은 최고권력자의 순수성은 관습의 프리즘을 통해 정치꾼의 더러운 권모술수쯤으로 변색되는 느낌이다.
▲ 입지적 조건 때문인지 오솔길보다 조금 넓은 소롯길에 오똑하니 서 있는 일주문. 웅장함은 없으나 다정함이 있다. |
ⓒ 임윤수 |
도박으로 치자면 천지개벽 이후 세상에서 가장 큰 도박일 대통령 자리를 걸고 풍토처럼 굳어버린 정치판의 구악과 구습을 일신할 토대를 만들겠다는 데 무슨 사족들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이해득실 따지지 않으면 간단할 문제에 수구와 이해가 개입되니 난맥을 이루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남들은 정치, 경제, 사회문제로 골머릴 앓을 때 한량처럼 심산유곡 산사나 찾아다니며 이러쿵저러쿵 하는 자신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그려진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부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 것이며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그 해법을 제시 할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발로 걷는 수고쯤은 곁들여야 글을 쓰기에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에도 걷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치악산 꼭대기에 있는 상원사를 다녀왔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옷을 입거나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짐승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는 많고 많은 근거 중 하나는 윤리를 알고 보은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 절 앞 산죽 나무숲에서 솟는 쌍용수란 약수샘으로 맑은 물줄기는 산아래 성남마을까지 이어지며 상원계곡을 이루고 있다. |
ⓒ 임윤수 |
배신을 밥먹듯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례가 심심하지 않게 발생하는 요즘, 정말 인간이라면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전설을 가진 산이 있고 그 전설의 산 중심에 자리한 산사가 있다.
한문으로 쓰는 치악산(雉岳山)에 쓰여진 '치'자는 꿩 치(雉)자다. 산 이름을 보면 그 이름엔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우여곡절이 있다. 산형에 따라 이름이 부여되는가 하면 전설이나 유래에 의하여 또는 기념할 만한 특정 사건이 계기가 되어 산 이름으로 고착되는 경우도 있다.
꿩 '치'자로 시작하는 치악산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한번쯤 자신의 도리를 곰곰이 되돌아보게 하는 전설이 있다.
물 맑고 산세 좋은 강원도 원주의 이름 모를 산에 입산하여 수도하던 어느 선비는 산길을 걷다 새끼가 태어날 알을 품고 있는 꿩을 잡아먹으려는 구렁이를 화살로 쏘아 죽임으로 꿩의 생명을 살려 주게된다.
▲ 가을색 배경에 그려진 듯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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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을 구해준 선비는 날이 저물어 잠자리를 구해 민가를 찾게되었다. 나그네가 찾아든 오두막집은 공교롭게도 여자 혼자 살고 있었지만 외딴집이었기에 할 수없이 그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오두막집의 여자는 낮에 선비에게 죽은 숫구렁이의 아내 되는 암구렁이로 복수를 하기 위해 여자로 둔갑을 하여 남자를 유인한 것이었다. 장도의 산행에 피곤한 선비가 깊이 잠들자 암구렁이는 길다란 몸뚱이로 선비의 몸을 칭칭 감고 목을 옥죄며 혀를 날름거리며 잡아먹으려 했다.
잠결에 공격을 당해 목숨이 위태롭게 된 선비는 어쩔 수 없이 간절하게 살려 달라 애원했다. 그러자 선비의 목을 옥죄고 있던 암구렁이는 자신의 업보를 풀기 위해 '첫닭이 울기 전에 종이 3번 울리면 살려 주겠다' 한다. 오두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상원사라는 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 절은 빈 절이었으니 종을 칠 사람이 아무도 없음이 너무 뻔하니 터무니없는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목숨을 포기한 선비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뎅~ 뎅~ 뎅~'하고 상원사에서 종이 3번 울렸다. 비록 미물이나 구렁이는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기지 않고 자신의 남편을 죽인 선비를 놓아줌으로써 선비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 꿩이 죽어가며 울렸을 그 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저녁으로 치악산 상원계곡에 울려퍼질 종소리를 내는 것임은 분명하다. |
ⓒ 임윤수 |
분명 아무도 없던 절에서 종소리가 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선비는 단숨에 상원사로 달려갔다. 상원사 앞마당에 있던 종 주위를 살피니 종 앞에는 선비가 낯에 구해준 그 꿩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것이었다.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선비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꿩은 자신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종에 부딪혀 소리를 나게 해 선비의 목숨을 살려낸 것이었다.
꿩의 살신 보은으로 목숨을 건진 선비는 그 후 은혜 갚은 꿩을 기리기 위해 산 이름에 꿩 '치'자를 넣어 치악산이라 명명하니 오늘의 치악산이란 이름을 갖게되었다.
절 앞 산죽 나무숲에 있는 쌍용수란 약수샘에서 시작되는 맑은 물줄기는 산아래 성남마을까지 이어지며 상원계곡을 이루고 있다. 성남마을에서 3시간쯤 올라가면 그곳에 상원사가 있다.
성남 매표소에서 계곡을 따라 상원사로 오르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지만 험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 졸졸거리는 물소리 정겹고 덤벙 발 담그고 싶은 작은 소(물이 고인 곳)가 끊이지 않고 나온다.
▲ 용마바위 위에 '보은의종유래비'가 있고 뒤쪽으로 계수나무가 보인다. |
ⓒ 임윤수 |
산을 오르다 잠시 신발 끈 풀어놓고 흐르는 물에 발 담그는 재미가 그만이다. 투박한 등산화에 갇혀 갑갑하게 꼼지락거리기만 하던 발가락을 흐르는 계곡물이 간지럽히니 그 애무감이 입가에 미소를 절로 만든다. 까탈스럽지 않은 성격이라면 오므린 손으로 물을 떠먹는 것에서도 또 다른 시원함을 맛 볼 수 있다. 가방에 비스켓이나 쵸코파이라도 있어 함께 곁들인다면 그 맛이 꿀맛이다.
힘이 들어서라기보다 여유를 만들고 싶어 한 두번쯤 숨 고르며 오르다 보면 상원사 일주문이 나온다. 상원사 일주문은 입지적 조건 때문인지 오솔길보다 조금 넓은 소롯길에 오똑하니 서 있어 그 규모에서 웅장함은 없으나 다정함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마른 목 축여 줄 거북바위 감로수가 있으니 여기서 시작한 물이 상원계곡을 형성한 것이다. 높은 산에 있는 산사에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산꼭대기서 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신비로움을 감출 수 없다.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대웅전 앞 좌우 두 기의 삼층석탑(三層石塔)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는 2.9m쯤 된다. 오랜 세월 스치는 비바람에 마모된 석탑의 상륜부에서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
ⓒ 임윤수 |
지표의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일상이지만 지하의 물 흐름은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은 가보다. 쪽바가지 가득한 물을 한숨에 마시니 뱃속까지 시원하다. 산을 오른다는 핑계로 흐트러진 옷매 가다듬고 마음 낮추니 다른 절의 사천왕문이나 불이문을 대신할 듯한 석등 사이를 지나게 된다. 석등을 지나 몇 걸음 더 내디디니 툭 터진 마당으로 올라선다.
올라선 정면에 세 개의 비 중 가운데 있는 '보은의 종 유래비'가 눈길을 끈다. 선비의 목숨을 살린 꿩의 보은을 기리고자 건립된 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당에 오르면 좌측이 되는 산 정상 쪽에 대웅전이 있고 우측인 계곡 쪽, 대웅전 앞쪽에 범종각이 있다.
전설이 전설이니 만큼 종에 자꾸 눈길이 간다. 지금도 아침저녁이면 뎅뎅하고 울려 퍼져 법계중생을 일깨울 종소리를 생각하니 피 흘리며 죽어갔을 꿩의 처참한 모습이 위대하고 크게 다가온다.
대웅전 전면 좌측 커다란 바위에는 세 개의 비가 있고 '보은의 종 유래비' 뒤에 상부가 부러지거나 잘려진 듯 뭉툭하게 고목된 침엽수의 나무가 있으니 이 나무가 계수나무라 한다.
▲ 상원사에선 산신각이 있는 곳 가을색이 제일 진하였다. |
ⓒ 임윤수 |
어릴 때 부르던 동요 '반달'에 나오던 그 계수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콧노래로 흥얼거리게 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 삿대도 아니 달고 돛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남쪽 나라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다 보니 치악산에 있는 상원사는 물론 주변의 모든 것이 묵언으로 가르침을 주는 법문으로 생각된다. 죽으면서도 은혜를 갚은 꿩의 보은정신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이 밥먹듯 자행하는 배은망덕을 꾸짖는 호령으로 충분하다.
종이 울리면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어기지 않은 암구렁이는 비록 미물이지만 신의를 하찮게 여기는 인간들에게 인간다운 신뢰를 구축하라고 가르칠 듯하다.
용마바위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 뒤쪽에 있는 계수나무는 40m나 되는 벼랑에 서 있다. 꿩의 보은을 지켜보고 숫한 인간들의 옳고 그른 행위들을 지켜보았을 계수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음이 틀림없다.
▲ 독성각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선 치악산의 '악'자가 연상되었다. |
ⓒ 임윤수 |
대웅전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자리하고 있는 독성각과 산신각은 가을이 그려가고 있는 단풍 수채화에 한 채의 전각으로 자리잡고 있다.
치악산 상원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무착조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운 절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창건이래 도선국사, 나옹선사, 월봉, 위학, 정암, 해봉, 삼공선사 등의 고승들이 수도를 하였다는 역사 깊은 도량이다.
상원사에서 수도한 고승들도 경전의 문구 하나보다는 꿩의 보은에서 더 많은 깨우침을 얻었고 그 깨우침을 후손에게 깨우침으로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30여년 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대웅전 앞 좌우 두 기의 삼층석탑(三層石塔)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는 2.9m쯤 된다. 오랜 세월 스치는 비바람에 마모된 석탑의 상륜부에서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 치악산 가을은 이렇게 내려오고 있었다. 점점 진하게 점점 알록달록. |
ⓒ 임윤수 |
머리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면 꿩은 종을 칠 수 없었을 것이며 보은 또한 할 수 없었을 거다. 머리가 깨어지지 않으면 보은을 할 수 없었듯 껍질도 깨어지지 않으면 새로움은 탄생되지 않는다. 그 껍질이 구악과 구습이라면 껍질은 반드시 깨져야 한다. 오래된 시간만큼 두껍고 단단한 껍질일수록 깨트리는데 힘도 많이 들고 소리도 많이 날 테지만 껍질은 반드시 깨져야 한다.
알 수 없는 아릿하고 괴로운 인연이 모두에게 내리고 있다. 한 줄기 소나기처럼…. 한 줄기 소나기처럼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올바른 가치관과 신의가 구축되면 좀더 떳떳한 마음으로 상원사에 깃들어 있을 꿩의 보은정신에 좀더 반듯하게 대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런 날 다시 찾으리라.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3)-지리산 법계사
돈과 권력을 움켜잡아 한바탕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권모술수와 사기 그리고 계략과 정략적 이합집산이 판치는 우리들의 삶이 펼치는 마당, 숨쉬기조차 곤란하도록 비좁고 야박한 세상이 바로 속계가 아닌가 모르겠다.
잠들고 병든 날, 걱정, 근심에 속고 속이려 발버둥치며 보내는 시간 다 빼고 나면 채 40년도 안 되는 짧은 삶을 살아가는 속계의 우리들이 별별 수단 다 동원하고, 있는 지혜 없는 지혜 다 짜내며 야단법석을 떨지만 법계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하찮은 어린아이 투정이나 미물들의 꿈틀거림쯤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법계란 질곡의 곡해를 넘고, 깨달음으로 광명의 빛이 비추며 생로병사의 고뇌도 사라지고 시기와 질투가 존재하지 않는 크고 넓은 마음이 상생하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천년이 될지 만년이 될지 모르는 무한의 깊이를 가진 곳이라고 한다.
▲ 법계사로 오르는 길은 참 예쁘다. 동글동글한 바위가 가지런히 깔리고 초록의 산죽잎들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머리 위로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치장되어 있으니 법계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즐거울 뿐이다. |
ⓒ 임윤수 |
어릴 때 사물의 크고 작음과 많고 적음을 나타낼 때 '눈꼽만큼, 손톱만큼 그리고 하늘땡땡만큼'이란 표현을 쓴 기억이 있고 지금도 가끔 아이들에겐 그런 표현을 쓴다.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하는 소꿉놀이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귀엽다는 생각과 함께 그들이 하는 행동이 참 어리숙하고 현명치 못하다는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비단 보고 있는 아이들의 소꿉놀이뿐 아니라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자신의 모습에 그런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사춘기 때 죽고 싶도록 힘들고 괴로웠던 진학 문제나 이성 문제도 지나고 보니 별 것 아닌 어리석음과 집착 때문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보는 눈이 높아지고 넓어졌기 때문에 작은 어리석음을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당장 번민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도 좀 더 높고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분명한 해답이 있고 그 번민 자체가 가소로운 것임을 알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바로 인간의 한계인가 보다.
그래도 가끔 위안이 되는 것은 소위 내로라 하는 정치꾼들의 어리석음도 범인(凡人)의 어리석음 못지않다는 것이다. 작금의 SK 비자금 문제가 정치꾼들과 그 집단의 어리석음을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 속계와 법계의 경계를 알리는 일주문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법계와 속계의 경계는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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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음을 너무 버젓이 자행하고 있는 그들의 뻔뻔스러움이 실소를 금하지 못하게 한다. 금세 들어날, '단 1원도 받은 적이 없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너무도 당당하게 하던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는 연민이 생긴다.
단 며칠도 버티지 못한 거짓이 자백으로 깨져야 했을 때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외면하고 짓밟고 감추려 해도 진실은 생물처럼 꿈틀대며 언젠가는 그 모습이 드러난다는 작은 교훈이라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몰염치하다 못해 파렴치하게 생각되는 정치꾼들의 어리석은 정치 놀음이 살아오면서 복습하듯 저질렀던 필자의 어리석음을 자위하게 해 준다. 패거리로 우르르 몰려가 탄압이니 뭐니 하더니 지금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함구하고 있는 꼬락서니에서 비겁과 아부의 미련함이 보인다. 하늘땡땡만큼 큰 금액을 눈꼽 취급하듯 시치미를 뚝 떼었던 그 사람들 양식엔 무엇이 들었을까? 그 사람들은 하늘땡땡만큼 큰 법계의 진리와 눈꼽만큼 한 속계의 작은 양심을 알기나 할까?
뒤숭숭한 이런저런 생각을 차곡차곡 접으며 한 발 두발 걷다보니 우리나라 하늘 아래 첫 산사인 법계사로 들어서게 된다.
▲ 연기(緣起) 조사가 전국을 두루 다녀본 후 천하의 승지(勝地)라 하여 터를 잡은 이곳은 용이 사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산세로 좌우로 급박하게 짜여져서 오직 동남쪽으로만 트여있으니 동틈과 함께 지기와 천기가 조화를 이루며 화합하는 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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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915m나 되는 지리산엔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색깔이 고도에 따라 줄을 맞춘 듯 분명하다. 설악산이 좀 더 기상적이며 강한 인상을 준다면 지리산에선 웅장하지만 유순하며 완만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받게 된다.
지리산 천왕봉 동쪽 해발 1450m 지점엔 우리 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법계사가 있다. 그러니 법계사는 하늘 아래 첫 산사인 셈이다.
법계사를 가는 길은 사람들이 말하는, 지리산 오르는 코스 중 중산리 코스를 따르면 된다. 중산간 마을쯤으로 생각해도 좋을 만큼 높은 고도에 자리한 중산리 매표소에서 법계사까지는 총총걸음으로 2∼3시간은 걸어야 한다.
지리산 자연 학습원에서 법계사로 오르는 길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동글동글한 돌들이 가지런하게 깔려 있고 푸른 산죽들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설렘에 울렁거리는 마음처럼 흔들리는 쇠줄다리 아래로 단풍잎이 곱께 깔려 있다.
흙 한줌 밟지 않고도 법계사엘 갈 수 있을 만큼 오르는 길은 내내 바위에 돌덩어리다. 아직은 울퉁불퉁하고 앙칼진 면이 남아있는 돌들도 있지만 대개는 둥글둥글하고 반질거리기조차 한다. 그렇다고 법계사에 오르는 길이 만만한 길은 아니다. 끊이지 않는 경사와 울퉁불퉁한 바위길이니 항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 억새를 지붕으로 이은 일자 형태의 초가는 오는 겨울의 삭풍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문에는 투명하지만 두툼한 비닐이 덧대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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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들어 하늘과 산 위로 내려오는 겨울색에 인사하며 눈길을 옆으로 주니 파란 산죽을 깔고 잎새 떨군 나무들이 '나 추워, 나 추워' 하는 듯 바람에 흔들린다. 가을 곡식 잘 영글라고 참아준 하늘 때문인지 계곡은 목말라 있다.
두런두런 주변 살피며 휘적휘적 걷다보니 로터리 산장이 나온다. 산장앞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니 이곳이 해발 1450m라고 되어 있다. 법계사는 이정표에서 어림잡아 고도 20m쯤은 더 올라가야 있으니 1470m쯤에 자리한다고 하면 정확할 듯하다.
법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연기(緣起) 조사가 전국을 두루 다녀 본 후 천하의 승지(勝地)가 이곳이라 하여 천왕봉에서 약 4㎞ 떨어진 현재의 터에 법계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용이 사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산세는 좌우로 급박하게 짜여져서 오직 동남쪽으로만 트여있으니 동틈과 함께 지기와 천기가 조화를 이루며 화합하는 곳이다 .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이성계에 패배한 왜군에 의해 소실된 법계사는 조선 시대 태종 즉위 5년인 1405년에 정심(正心) 선사가 중창했으나,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다시 소실되어 방치되다 1981년 겨우 절다운 형태를 갖추었다고 한다.
▲ 커다란 자연 암석을 기단 삼아 물끄러미 속계를 바라보고 있는 삼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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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사에는 보물 473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부처님 진신 사리가 봉안된 탑으로 이 탑과 적멸보궁 앞쪽에 있는 산의 커다란 바위는 일본의 후지산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다고 한다. 이러한 지정학적 배치를 고증이라도 하듯 일본과의 미묘한 관계가 구전되고 있다.
예로부터 '법계사가 일어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일어나면 법계사가 망한다'고 하여 여러 차례 왜적이 법계사를 침범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 왜적 아지발도(阿只拔屠)가 이 절에 불을 지르고 운봉 전쟁에서 이성계의 활에 맞아 죽은 일화는 바로 구전이 허위만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다.
법계의 영역임을 알리는 "智異山法界寺"란 글씨가 붙어 있는 철제 기둥의 일주문이 조금은 궁상맞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바람에 쓰러진 나무로라도 장승을 세우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3년 전부터 법계사에 주석하며 불사월력을 세워 많은 전각을 중건하신 주진 진욱(眞旭) 스님께서도 일주문에 대해서 많이 안타까워 하셨다. 원래 법계사에는 별도의 일주문이 없었다고 한다. 야간 등산이 허용되던 때 일부 등산객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법계사로 들어와 고성방가를 일삼는 것은 물론 훼불(毁佛)의 위험성이 있어 부득불 만들 수밖에 없었던 시설이라고 하신다. 여력이 되고 기회가 되면 산세를 해치지 않고 세웠지만 세워지지 않은 듯 환경에 거슬리지 않는 소담한 일주문을 세우고 싶다고 하신다.
▲ 여느 적멸보궁과 같이 이곳에도 불상은 모셔져 있지 않다. 창문을 통하여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삼층석탑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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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들어서 굽어진 계단길을 들어서니 종무소와 공양간을 겸한 한옥이 나온다. 이 건물 왼쪽 커다란 암반을 돌아가면 그곳에 적멸보궁이 있다. 여느 적멸보궁처럼 전각은 있으되 모셔진 불상이 없는 이곳에선 부처님 진신 사리가 봉안된 뒤쪽 삼층 석탑을 향하여 예를 올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적멸보궁을 나와 계단을 따라 산쪽으로 오르니 한껏 햇살 좋을 듯한 곳에 태양 에너지를 유용한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집광판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선 이 집광판에서 얻는 에너지를 전기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햇살이 좋아야 얻어지는 전기가 많기 때문에 구름이라도 끼는 날에는 최소한의 조명만을 남기는 절전이 생활의 일부분이라 하신다.
몇 걸음 더 올라서니 억새를 지붕으로 이은 일자 형태의 초가가 한 채 있다. 오는 겨울의 삭풍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문에는 투명하지만 두툼한 비닐이 덧대어 있다. 한 겨울 아랫목 뜨끈한 이곳에서 수북하게 쌓인 설경을 보게 된다면 가히 장관일 듯싶다. 초가를 보니 화로가 생각나고 군고구마와 토닥거려주던 할머니의 손길이 생각난다.
초가에서 쉬고 싶다는 미련 거두고 다시 몇 걸음 옮기니 좌측으로 지반 전체를 이루고 있는 너럭바위 암반 위에 둥글고 커다란 바위가 두 개 있고 그중 한 개의 암반 위에 삼층 석탑이 서 있다.
▲ 법계사 산신각에는 산신 할아버지뿐 아니라 산신 할머니도 함께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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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자연 암석을 기단 삼아 물끄러미 속계를 바라보고 있는 삼층 석탑, 가공되고 다듬어진 여느 석탑처럼 화려한 꾸밈도 오밀조밀한 미감도 갖추고 있지 않지만 파란 하늘을 가까이 둘렀으니 그동안 느끼지 못하던 또 다른 눈맛을 준다. 군더더기 없이 오로지 법계를 지향하듯 솟아 오른 그 상승감 속에 수많은 스님들과 불자 그리고 석공이 느꼈을 환희심이 가슴으로 전이되는 듯하다.
야트막한 돌담을 들어선 우측의 바위에 석탑이 있고 좌측의 바위엔 사적비가 암각되어 있다. 삼층 석탑 우측에 또 하나의 전각이 있으니 이곳이 과거불인 아미타 부처님을 모셔 놓은 극락전이다.
기와를 포개 쌓은 담장이 참 가지런하다는 느낌을 준다. 포개진 기왓장에서 아기자기하며 고물고물한 정겨움이 느껴진다. 전각과 마당 그리고 둘레의 담장까지 모든 것이 깔끔하게 단정되어 있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한다. 바람에 딸랑이는 풍경 소리 들으며 극락전을 나와 다시 앞쪽의 전각으로 오르니 그곳은 "山神閣"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절의 규모에 비하여 조금 크다고 생각되는 산신각으로 들어서니 지금껏 어느 절에서도 보지 못했던 할머니 산신이 모셔져 있다. 물론 할아버지 산신도 모셔져 있고 용왕님도 모셔져 있지만 할머니 산신을 모셔놓은 것이 아주 특이하다.
▲ 너럭바위처럼 거대한 암반위에 둥근 형태의 바위가 두 개 있고 좌측의 바위를 기단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삼층석탑이 있다. 바위사이로 보이는 전각이 극락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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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그 규모만 웅장한 것이 아니라 민족적 애환이 서려 있고 많은 사람들의 치성이 깃들어 있는 명산이다. 방방곡곡이 산인 우리네 일생은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살다 산으로 돌아간다 해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런 산에는 산을 지키며 인간들을 돌보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
산신을 이야기하면 미신이니 어쩌니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산은 평지보다 많은 위험이 있는 곳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위험한 곳에 생존 기반을 둔 사람들이 마음 의지할 뭔가를 찾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 의지처와 대상이 산신이라면 이는 너무 다행한 일이며 당연한 일이다.
법계사 채마전에는 무와 배추가 잘 자라고 있었다. 스님들과 법계사를 찾는 많은 불자들에게 월동 반찬이 될 것이 분명하다. 높은 산중에서 씨 뿌리고 김 매주며 배추를 키웠을 스님들의 일상을 생각하니 그 자체가 선(禪)일 듯하다.
속계와 법계는 과연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리 찾아봐도 속계와 법계를 구분 짓는 표식은 보이지 않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속계인 일주문 밖과 법계인 법계사는 언제고 건널 수 있고 뚜렷한 경계도 없어 마음속에만 그 경계가 그려진 듯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고 하였으니 속계와 법계의 경계는 바로 마음속에 있음이 분명하다. 어리석음과 놓지 못하는 집착이 철옹성 같은 경계를 만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 온통 바위뿐인 법계사 경내에 자투리처럼 얻어진 채마전에선 올 겨울 월동 양식이 될 배추와 무가 자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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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들을 수 있던 반야심경 끝 부분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를 반복하며 아래로아래로 발길을 옮긴다. 찾아가는 그곳이 과연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일지는 모르지만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어서 가자'라는 의미를 가진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을 되뇌며 다시금 속계로 찾아든다.
알면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심신이 답답할 때엔 법계사를 찾아 법계의 기준으로 자아를 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거기에 분명 답이 있을 것이다. 보다 높고, 보다 넓은 그리고 보다 깊은 자아성찰이 있으면 속계에선 얻지 못할 후련한 해답이 분명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佛)과 가르침(法) 그리고 승(僧)을 가장 귀히 여기며 이를 삼보(三寶)라 한다. 경남 양산에 있는 통도사가 불보(佛寶) 사찰이고 합천의 해인사가 법보(法寶) 사찰이며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가 승보(僧寶) 사찰이다.
불보(佛寶) 사찰인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 계곡은 절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절들이 있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 사찰을 삼보 사찰로 꼽고 있으니 그 첫째가 불보 사찰인 통도사다. 통도사에는 부처님 진신 사리와 가사(부처님이 입으셨던 옷)가 봉안되어 있기에 '불보 사찰'이라 한다.
불교 용어에서 '법(法)'이란 글자는 법문, 법어 등에서 알 수 있듯 '가르침'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를 그러기에 '법보 사찰'이라 하며 국사(國師)로 지정될 만큼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었기에 송광사를 '승보 사찰'이라 한다.
통토사가 있는 영취산(靈鷲山)은 그 산세가 마치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과 흡사하기에 '영축산'이라고도 부른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영축산에는 신선과 독수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하는데 한국의 영축산은 그 산세가 날개 펼친 독수리형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산 이름인 영취산의 '취'자는 바로 독수리 취(鷲)자다. 어릴 때 읽었던 '큰바위 얼굴'처럼 마음에 그리고, 많은 불자들이 닮고 싶어하다 보니 그 뜻과 정성이 지형조차 움직여 양산 영취산을 인도의 영축산을 닮게하고 불교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오르는 길도 그렇지만 내려오는 길도 방심을 하지 말라 당부하고, 그렇게 하였다간 정말 야단이라도 칠 듯 그런 기세만큼 백운암을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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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로 들어서는 산문을 지나게 되면 휘휘 가지 늘이고 있는 아름드리 노송에서 고찰 냄새가 물씬 난다. 절의 규모와 엄청난 방문객을 수용하느라 꽤나 넓은 길이 잘 포장되어 있지만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영취산엔 통도사로 시작되어 계곡따라 20여 개의 산내 암자들이 즐비해 있다. 산길 오르며 염불과 목탁 소리가 끊일 만하면 다른 암자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염불과 목탁 소리가 다시 이어지니 계곡 전체가 법당이다.
절골(고을)이란 표현이 딱 좋게, 산문부터 영취산 정상까지 끊이지 않는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가 몸도 마음도 불가의 세계로 들어서게 해 주니 어찌 마음이 평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골 영취산 골짜기에 즐비한 20여 개 많은 암자 중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가 백운암이다.
색감 좋은 산 정상부를 휘감고 있는 흰 색 구름처럼 영취산 8부 능선에 휘감듯, 숨 고르듯 백운암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영취산을 올라 보면 높지 않은 산이 꽤나 험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봉우리로 이어지는 능선이 온통 바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급한 경사와 깔려있는 돌들이 그 험함을 더해 준다.
▲ 별도의 일주문도, 표식도 없이 영취산을 오르는 길, 조금 평탄함을 보이는 장소에 백운암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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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풍수지리에서는 용(龍)이라고 표현한다. 좌우로 굽이치고 홀연히 솟았다 가라앉듯 내려앉고 갑자기 굵어졌다 끊일 듯 가늘어지는 산세의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살아 꿈틀대는 용처럼 보이는 형상이니 산을 용이라 표현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풍수지리와 산을 이야기하면 기(氣) 흐름이 자연스레 동반한다. 기(氣)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대상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는 대상이다. 전기(電氣) 자체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엄연히 존재함을 인정하듯 지맥을 타고 흐르는 기도 눈으로 확연히 규명하지 못하지만 엄연히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란 말이 있듯 기 또한 예외는 아닌 듯 하다. 영축산의 넘치고 솟구치는 기가 거침없이 아래까지 전이되면 그 넘치는 기가 화로 나타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영축산의 거침없는 기 흐름을 숨 고르듯 잠시 멈추거나 흐름을 더디게 하며 완급의 조화를 이루는 곳이 있으니 그 자리가 바로 백운암이 들어선 자리다.
영축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산세가 뚝 떨어지듯 거침없이 내려 뻗었다. 물이라도 한 방울 떨어트리면 그냥 아래까지 쏟아질 듯하다. 그런 급경사의 가파름에 매듭처럼 평지를 이루고 흐름의 완급을 조화롭게 하는 작은 공간이 바로 백운암이 들어선 자리다.
백운암은 영취산 산문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 다리를 건너는 왼쪽으로 접어든다. 이곳에서 곧장 들어가게 되면 통도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포장된 계곡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야트막한 고개도 넘고 다리도 건너며 많은 암자들을 지나치게 된다.
▲ 백운암에서는 중건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불기 2547년 9월 24일 상량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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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0분가량 발길 재촉하며 걷다보면 극락암까지 쉽게 도착할 수 있다. 극락암을 지나면 비포장 도로를 걷게 된다. 산문부터 시작된 노송 숲이 끊이지 않으니 산사 찾는 길에서 누릴 수 있는 독특한 향과 안락함을 즐길 수 있다.
비포장 길을 걸어 비로암을 지나며 조금 더 오르다 보면 오름길이 점점 가팔라짐을 느끼게 된다. 오름만 가팔라지는 게 아니고 바닥도 점점 험상궂어 진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살을 꿰뚫고 들어올 듯 뾰족뾰족한 돌들이 땅에 박히고 뒹굴며 발걸음 조심하라 눈 부릅뜨고 바라본다.
오르는 길도 그렇지만 내려오는 길에 방심을 하지 말라 당부하고, 그렇게 하였다간 정말 야단이라도 칠 듯 그런 기세만큼 백운암을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다. 비포장이지만 차 한 대 갈 수 있을 만큼 넓었던 길이 끝나고 외줄처럼 이어지는 산길로 들어서 30∼40분쯤 걷게 되면 백운암에 도착하게 된다.
질긴 생명력을 일깨우듯 바위 틈새로 모질게 뻗어 나온 활엽수들이 고운 단풍을 입고 있다. 빤히 보이는 산 정상부에서 산 허리까지 내려온 단풍이 주변의 바위들과 조화를 이루니 가히 장관이다.
해발 800m쯤에 자리하고 있는 백운암(白雲庵)은 652년(신라 진덕여왕 6) 조일(早日)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시대가 되어 순조 10년인 1810년 침허(枕虛)가 중창하고, 1970년대에 경봉(鏡峰)이 후원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하나 백운암에는 법당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만 있을 뿐이다.
▲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불사되고 있는 법당은 금년내에 완공될 예정이라 한다. 법당이 완공되면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심신과 환희심을 줄 공간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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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암은 의식이 중요시되는 일반 절들과는 달리 스님들이 더 큰 깨우침을 얻기 위한 보림의 장소였을 거라고 주지 만초(萬草) 스님이 설명하신다. 근대 불교계의 큰스님으로 꼽히는 경허, 만공, 경봉 스님 등의 수도처이기도 하지만, 특히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이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초견성 장소이기도 하단다.
백운암에서는 중건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임법당(臨法堂)인 백운암은 법당과 요사채 그리고 공양간이 건물 한 채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래된 건물에 그때 그때 땜질식 보수가 반복되다 보니 안전까지 염려되어 2년여 전부터 백운암 주지로 주석하게 된 만초 스님이 불사원력을 세워 법당을 새로 짓고있는 중이다.
팔작 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를 갖는 이 법당은 금년 내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뜯어낸 건축물은 법당 옆 작은 공간에 그대로 복원하여 백운암의 고색창연함을 기억할 사람들에게 기억이 어색하지 않은 전통 맛을 그대로 전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주지 스님이 임시 사용하고 있는 2평 남짓한 조립식 건물의 요사채를 찾으니 차 한잔에 잘 익은 홍시를 내 주신다. 맑고 발갛게 익은 홍시를 한입 물으니 단맛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차가움이 있다.
백운암에 얽힌 설화나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부탁하니 통도사 산신각에서 20m 남쪽 응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있는 호혈석(虎血石)에 얽힌 전설을 들려 주신다.
▲ 공양간과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겸하고 있는 고 건축은 산을 오르던 사람들에겐 잠시 다리 걸치고 쉴 수 있는 쉼터로 제공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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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분명치 않지만 백운암에는 젊고 잘생긴 홍안의 젊은 스님이 홀로 기거하며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훌륭한 강백이 되기를 희망하던 이 스님은 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물론 아침, 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성심껏 기원하고 있었다.
산기슭 군데 군데에 잔설이 남아 있지만 봄나물 파릇파릇 솟아오던 어느 봄날에도 스님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경을 읽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인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그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금은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문을 연 스님은 이번엔 귀가 아니라 눈을 의심했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봄나물 가득한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나물을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은 처녀가 이리저리 헤매면서 길을 찾다 백운암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막막하던 차 불빛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온 처녀는, 어렵더라도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방이 하나뿐인 곳에서 수행중인 젊은 스님으로서는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그러나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던 스님은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주고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 새로 짓는 법당지붕에 영취산 가을은 이렇게 걸려 있었다. |
ⓒ 임윤수 |
스님의 경 읽는 음성은 매우 낭랑했다. 고요한 산중에 울려퍼지는 경 읽는 소리는 산울림처럼, 속삭임처럼 처녀를 사로잡았다. 처녀는 그날부터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었다. 처녀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다.
스님을 흠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가 마침내 처녀는 상사병을 얻게 되었다. 마을 권세 가문의 무남독녀인 처녀는 좋다는 약을 다 썼으나 백약이 무효이니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좋은 혼처가 나와도 고개를 흔드는 딸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처녀의 어머니는 안타깝기만 했다.
병석의 딸을 어르고 달래어 어렵게 지난날 백운암에서 만났던 젊은 스님의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듣게 되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딸의 사연을 알게된 처녀의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그 스님을 찾아갔다.
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 살림 차려 줄 것을 약속하며 혼인을 애걸하여도 젊은 스님은 결심을 흩뜨리지 않고 경전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죽음에 임박한 처녀가 마지막으로 스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하였으나 스님은 그마저 거절하고 말았다. 처녀의 애틋한 마음을 여러 차례 전해들어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지만 강백이 되고자 하는 뜻에 어긋날까 고민 끝에 냉정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 법당 옆 작은 공간에는 뜯어낸 법당자재를 이용하여 요사채로 쓰여질 건물이 시공되고 있었다. 이 건물은 백운암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
ⓒ 임윤수 |
얼마 후 처녀는 사모하는 한을 가슴에 안은 채 목숨을 거두고 영축산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시간이 많이 지나고, 그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한 결과로 드디어 서원하던 강백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많은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어느 날 강원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호랑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큰 호랑이가 지붕을 넘나들며 포효하고 문을 할퀴며 점점 사나와지기 시작하였다.
호랑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대중 속에 누군가와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는 데 중지를 모으고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지는 것으로 그 연이 누구와 이어졌나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 밥상에 오른 싱싱한 쌈배추가 입맛을 자극한다. 쿡 찍은 된장과 아삭아삭한 맛이 별미다. 사진의 오른쪽이 주지인 만초스님으로 염불소리가 너무 맑고 매끈하였다. |
ⓒ 임윤수 |
저고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으나 호랑이는 하나씩 받아 그냥 옆으로 던지더니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마구 갈기갈기 찢으며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자 강백 스님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속세의 인연인가 보다 하고 앞으로 나서며 합장 예경하고 호랑이가 포효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 스님을 입으로 덥석 물고 어둠 속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 산중의 모든 사람들은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깊은 골짜기마다 다 뒤졌으나 보이지 않던 스님은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등성이에 상처 하나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강백 스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심볼'은 보이지 않았다.
미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호랑이로 태어난 처녀는 살아생전 흠모하던 스님과 그렇게라도 연을 맺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 통도사에서는 호랑이의 혈(血)을 눌러야겠다 하여 큼직한 반석 2개를 도량 안에 놓게 되었으니 이를 '호혈석(虎血石)' 또는 '호석(虎石)'이라 부르며 산신각에서 20m 남쪽 응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 있다.
구전되는 전설과 통도 팔경 중 하나로 꼽히던 저녁 무렵의 아름다운 경치와 백운명고 소리를 설명해 주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금수(金水)와 은수(銀水)를 옛날이야기 하듯 들려주신다.
▲ 해지고 주변이 어둑해져 속세에 전등이 밝혀지니 산아래 마을이 더 한층 또렷이 보인다. 예전에 울렸던 명고를 다시 울릴 수 있다면 어스름 풍경과 어우러져 환상을 이룰 듯 하다. |
ⓒ 임윤수 |
사시법회(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에 올리는 불공)가 시작되고, 카세트를 틀어 놓은 듯 너무 맑고 매끄러운 염불 소리가 들려오니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매끄러울 뿐 아니라 호소하듯 애원하듯 애절하게 넘고 넘기는 염불 소리가 사람을 홀릴 듯 하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떨구지 못해 법당으로 들어가니 만초 스님이 초하루 법회를 집전하며 염불을 하고 계셨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귀동냥하듯 많은 스님들의 염불 소리를 들어봤지만 이처럼 맑고 매끈한 염불 소리는 처음인 듯 하다. 스님이 들려주던 전설 속의 그 젊은 스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 스님의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법회 끝나고 푸성귀 가득한 점심 공양까지 맛나게 먹게 되니 산사 찾은 작은 발품이 커다란 복으로 내려진 듯 하다. 관광 삼아 지나치듯 통도사를 들려보는 것도 좋지만 통도사를 외호하고 있는 영축산 8부 능선에 자리한 백운암엘 들리는 발품쯤 기꺼이 팔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맑은 주지 스님의 염불 소리가 영혼을 맑게 해 주고, 운 좋게 공양이라도 하게 되면 덤처럼 얻어진 맛남이 삶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 기대한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5)-금정산 원효암
솔직히 "그 유명한 <오마이뉴스>를 모른단 말이야?"하는 반감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알고 있는 사람에겐 유력한 인터넷 종합 일간지지만 모르는 사람에겐 생소한 것이 당연하다.
오늘날의 <오마이뉴스>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어찌 보면 시대적 흐름을 잘 타 봇물 터지듯 그렇게 유력 언론 매체로 부상된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더더구나 인터넷이라고 하는 온라인에서 운영되니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 어색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싶다.
산사를 찾아 사진을 찍으려면 스님들의 허락을 얻어내는 게 제일 첫 번째 관문이다. 국보급 보물과 역사적 유물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많은 절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다.
▲ 금정산정 돌벽과 나란한 억새가 가을 길을 걸어보라고 유혹하는 듯 하다. |
ⓒ 임윤수 |
절을 찾게되면 제일 먼저 법당에 들러 참배하고 종무소엘 들러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린다. 어떤 때는 일반인인 사무장을 통하여 용건을 말하기도 하지만 스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스님께 합장으로 인사드리고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리려면 땀부터 난다. '이 스님은 <오마이뉴스>를 알고 계실까?' '모르고 계시면 어떻게 설명을 하지?' 등 이런저런 궁상이 그렇게 만든다.
다행히 스님께서 <오마이뉴스>를 알고 계시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사진 촬영을 허락받고 좋은 말씀도 들을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나름대로 모범 답안이라 생각되는 설명으로 <오마이뉴스>를 소개하고 왜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이해를 구해야 한다.
좀 뭐한 얘기로 절이 많이 알려지길 원하는 스님들은 내심 반기는 면도 없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스님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절간처럼 조용한 수행 생활과 선에 비중을 두시는 스님을 만나게 되면 영 이야기가 어려워진다.
▲ 머릿속으로 그리던 산사 찾아가는 길은 원효암 가는 길에 있었다. |
ⓒ 임윤수 |
찾아다니는 산사에서 만나 뵈었던 많은 스님들은 <오마이뉴스>를 모르고 계셨다. 스님들이 무관심하거나 외면해서 <오마이뉴스>를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니라 환경이 모를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더 이상 당황스럽지는 않다.
자가 발전으로 겨우 전기를 해결하고 있는 심산유곡 산사에 인터넷망이 연결되어 있을 리 없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에서만 운영되고 있는 이런저런 사이트 중 하나인 <오마이뉴스>를 모르고 계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나이 드신 스님들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컴퓨터 숲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에 살면서도 50대 중반을 넘긴 많은 사람들은 아직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거나 생소해 하고 거리감 있어 하는 게 현실이다.
일상이 온라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터넷과 밀접한 생활권에 살면서도 나이 드신 어른들에겐 어색한 것이 컴퓨터며 인터넷인데, 접속은 물론 구경조차 여의치 않은 산사에서 생활하시는 나이 지긋한 스님들이 인터넷을 이해 못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그런 스님들께 허락을 받아내야 하니 송구스럽게도 답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름대로 유력 언론 매체라고 자부하는 <오마이뉴스>를 시큰둥하게 받아들일 때는 약이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사진이 필요하고 설명이 필요한 것을.
▲ 산등성이엘 올라서니 원효암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
ⓒ 임윤수 |
절에서 사진 촬영을 금하는 데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관습적으로 사진 촬영을 금하는 곳도 없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젊은 스님이 사진 찍는 것을 제재하는가 하면 노스님이 쾌히 승낙해 주실 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큰 규모의 절에 법력 높은 큰스님이 기거하고 계실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개 큰스님들은 암자 규모의 풍광 좋은 절에 기거하고 계시는 경우가 많으니 암자를 찾다 보면 뜻밖에 고명한 스님들이 계신 곳을 찾아 좋은 말씀을 듣는 기쁨을 얻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찾은 부산 금정산 원효암이 그런 곳 중의 한 곳인 듯하다.
원효암(元曉庵)은 범어사에서 30분 정도 올라가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범어사 산내 암자 중 제일 꼭대기에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미륵과 함께 세운 것으로 알려진 원효암을 찾아가는 길은, '아! 이 길이 바로 산사 찾아가는 길이구나'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 울창한 나무사이로 비추는 햇살에 부도가 따사롭게 가슴에 와 닿는다. |
ⓒ 임윤수 |
구도(求道)의 길에서 만난 선후배이자 친구 사이였던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불교계에 독특한 철학을 구축한 지도자이자 국가와 민중의 등대였다. 구도의 동반자였던 두 스님의 관계는 '의상이 있는 곳에 원효가 있고, 원효가 있는 곳에 의상이 있다'는 말로 모든 것이 함축된다.
이 두 분 스님이 부산의 명산인 금정산에도 함께 하신 흔적을 남겨 놓았으니 범어사와 원효암 그리고 스님들의 좌선 장소였던 의상대와 그 위쪽 200m 지점에 있는 원효석대가 그것이다.
범어사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 금정산을 오르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원효암엘 갈 수 있다. 예전에야 어쨌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잘 살피지 않으면 입구를 그냥 지나칠 만큼 특별한 표식조차 없이 조용한 수행처로 있길 원하는 곳이다.
웬만한 암자 같으면 눈에 띄는 안내 표지 하나쯤은 있으련만 원효암엔 그것조차 없었다. 범어사엘 들러 산내 제일 꼭대기에 있는 암자를 찾으니 원효암을 소개해 준다. 등산로를 따라 30분쯤 올라가면 된다고 쉽게 설명해 준다.
어린 아이 엉덩이처럼 동글동글한 바윗길인 금정산 오르는 길은 모진 마음조차 부드럽게 해 줄 듯하다. 따뜻한 곳이라곤 하지만 가는 세월 어쩔 수 없는지 금정산도 울긋불긋 단풍에 젖어있다.
▲ 휙 굽어진 길을 올라 원효암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이 문을 들어서게 된다. |
ⓒ 임윤수 |
이미 잎새 떨군 수종이 있는가 하면 아직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한 수종도 있다. 30분은 족히 걸었으련만 아직 어떤 표식도 보이질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오르다 보니 눈앞에 성곽이 나타나니 원효암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쳐 금정산성 북문에 도착한 것이다.
복잡한 도심지에서만 길을 헤매는 게 아니고 한적한 산에서도 알려 준 길조차 못 찾는 길맹인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그런 단점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원효암 가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꼭대기까지 올랐으니 덕분에 금정산성엘 들리게 되었고 구구절절한 전설이 흐르는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에도 오르게 되었다.
금빛 물고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논다는 금샘(金井)이 있는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에는 평생을 불심으로 살다 죽어간 한 화주 보살에 얽힌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는 빈번하게 화재로 전소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으니 그 첫 번째가 임진왜란 당시 모든 건축물들이 잿더미로 변한 일이라 한다.
동래성을 함락한 왜놈들은 울산 지방에 상륙한 왜군들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며 주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범어사를 알게 된다. 침략군 왜군들이 화엄 10대 사찰로 불교계의 명맥을 계승하는 범어사의 웅장한 기운을 그대로 둘 리 만무했다.
▲ 원효암은 마치 한옥의 여염집 같다. |
ⓒ 임윤수 |
더구나 범어사는 지정학적으로 대마도를 향해 자리하고 있으며 왜군들의 침략을 기선 제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고 하였으니 왜군들의 작심한 방화로 완전 전소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 때 밀양에 살던 화주 보살은 범어사가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에 달려와 절을 잃고 망연자실한 스님들을 위로하고 중건을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바랑 하나 걸머메고 천리길 마다 않고 탁발로 시주를 받은 할머니는 스님들이 연명할 끼니를 만들고 주변을 정리하며 불가에 심신을 맡기게 되었다.
죽기 전에 예전의 범어사 모습을 되찾는 것이 할머니의 유일한 서원이자 기도였다. 할머니는 범어사 중건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마다 않고 하였으며 능력 모든 것을 기꺼이 헌신하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탁발로 시주를 해 오며 절 살림도 도맡아 꾸려 가던 할머니는 당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고 어느날 주지 스님께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봉우리 아래에 고모선신(姑母善神)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제(姑母祭)를 지내 주면 넋이라도 금정산의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 재건에 헌신하겠습니다"하고 조용한 유언을 남긴다.
▲ 색 바랜 고색의 단청에서 원효암의 유구함이 느껴진다. 전각 가운데 '원효암'이란 편액이 붙어있고 우측에 추사 김정희선생님의 친필인 '無量壽閣' 편액이 붙어 있다. 언뜻 '天量壽閣'이라 읽을 수 있겠다. |
ⓒ 임윤수 |
살아생전 전소된 범어사 중건을 위해 미력을 다하던 할머니는 사후에라도 금정산에 머물며 범어사 재건을 소원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할머니의 고귀한 뜻을 살려 그의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사당을 짓고 1년에 두 번씩 (음력 1월 15일, 5월 5일) 고당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의 유언처럼 범어사는 다시 중건하게 되었고 화엄의 대표적 사찰로 자리잡게된다. 이 때부터 별다른 이름이 없었던 금정산 제일봉은 할머니의 깊은 불심을 기리기 위해 할미 고(姑)에 집 당(堂) 자를 써 고당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예기치 않게 금정산 제일봉인 고당봉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산장에서 다시 길을 물어 원효암을 찾았다. 반들반들 길이 난 하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철조망이 굽어지는 지점에서 커다란 흔적 없이 샛길처럼 생겨난 오른쪽 길로 접어드니 철조망을 따라 걷게 된다.
혼잡할 만큼 많은 등산객들 무리에서 뚝 떨어지게 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발걸음조차 한결 가벼워진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철조망이 조금 열려 있고 '원효암'이란 글씨가 새겨진 손바닥 크기의 안내판 조각이 보인다. 철조망 안으로 들어서 산길을 따르니 지금껏 마음속으로 그리던 산사 찾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 원효암에서 화려한 장엄물은 보이지 않는다. 무량수각이란 쓰여진 편액 아래쪽에 놓여진 소종이 보일 뿐이다. |
ⓒ 임윤수 |
생소하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런 친근감 있는 길이 정말 고즈넉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길이라곤 하지만 여느 길처럼 반듯하지도 매끄럽지 않았지만 눈길 주고 발길 줌에 너무 편안한 그런 길이다.
휘어지고 굽어지는 길을 따라 등성일 넘으니 저만치 산 아래로 동네가 보이고 길 옆으로 절에서 가꿈직한 채마전이 보인다. 채마전 오른쪽 울창한 나무숲에 3기의 부도가 보이니 원효암이 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부도전에서 조금 더 들어가니 휙 굽은 길 안쪽에 오래된 느낌 물씬한 출입문이 보인다. 총총걸음으로 원효암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출입문의 보이지 않는 문턱을 넘으니 한가롭기만 한 원효암이 거기에 있다.
오랜 세월에 산뜻함을 잃은 색 바랜 단청이 남아 있는 야트막한 기와집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절집에서 보아 왔던 화려함은 없고 수수한 여염집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정면에 보이는, '元曉庵'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전각으로 들어가 참배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던 처사(남자 신도)에게 용건을 이야기하니 스님을 불러 주신다. 젊은 스님은 큰스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며 큰스님이 계신 곳을 다녀와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셨다.
그때서야 원효암에 범어사 조실 지유(知有) 스님이 주석하여 계심을 알았다. 조실 스님이란 부처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좌표이자 스승의 상징이 되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범어사와 여기에 소속된 크고 작은 수많은 말사의 많은 스님들에게 스승이며 정신적 지주가 되는 가장 큰스님이 원효암에 주석해 계신 것이다.
▲ 솟을대문처럼 생긴 이 문을 나서게 되면 원효암을 다시 나서게 된다. |
ⓒ 임윤수 |
절이라고 해야 별다른 장엄물이 없다. 그냥 산속에 있는 조용한 기도처 같은 분위기다. 굳이 장엄물을 들라고 하면 마루에 올려진 소종이 있을 뿐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전각 오른쪽에 큼지막하게 '天量壽閣'라 써진 편액이 눈길을 끈다. '천량수각'이란 말이 생소하고, 한문을 잘 모르기에 스님께 여쭈니 '천량수각'이 아니고 '無量壽閣'이라 써진 것이며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친필이라고 알려주신다.
과거불인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극락전이나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하니 이곳 원효암에선 아미타 부처님을 모셔 놓고 '무량수각'이라 표현을 하였나 보다 하였더니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은 관세음보살님이라 한다.
글씨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추사 선생님의 친필을 조용한 산사에서 대하니 또 다른 감흥이 인다. 원효암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선방은 아니었지만 선방에 버금가는 수행 공간인 듯하다.
스님은 원효암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을 반가와 하지 않는 듯하였다. 불자들이야 언제고 찾아와 기도하고 불공을 드려도 좋지만 자칫 등산객들이 들렸다 지나가는 유희의 장소로 알려질까 염려하시는 듯하다.
조용한 산사! 마음으로 그리던 수수한 절집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원효암은 정말 절집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들만 찾았으면 좋겠다. 아주 겸손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산사 찾는 길을 걷고 싶고 그런 경험을 꿈꾸는 사람들이 찾는 금정산의 산사로 남아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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