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차길진_구명시식 실화 소설 [天文]_01

醉月 2011. 5. 2. 10:35

김영수 장편소설

 

1장. 예언자

불타는 숭례문


2008년 설 연휴 마지막 날. 국보 1호 숭례문 지붕 위로 하얀 연기가 봉화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대문 4거리에 붉은 색 소방차들이 구겨진 성냥갑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다.

서울의 밤하늘을 찢는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마치 앙칼진 암고양이 같다. 휘휘 돌아가며 플래시를 터뜨리는 전광등은 흡사 고양이 눈처럼 번뜩였다.
소방차가 뿌린 물로 흥건한 푸른 잔디 광장은 자동차바퀴와 신발자국이 짓이겨져 곤죽이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소방차들은 갈 곳을 몰라 아우성이었다.
뿌연 연기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1층 누각 위에서는 검은 방독 마스크를 쓴 세 명의 소방대원들이 짙은 연기를 헤치고 있다. 흰색 포말이 흘러 나무바닥은 시궁창처럼 질퍽거렸다.

메케한 불냄새, 밤하늘에 너울대는 하얀 그을음이 원귀처럼 떠돌았다.
“계단이 어디 있는 거야?”

숭례문의 내부 구조를 모르는 소방대원은 급한 마음에 입이 더욱 타들어갔다. 현대식 건물이라면 복도나 비상계단쯤은 눈 감고도 찾았을 테지만 600년 전에 지어진 목조건물은 고대 피라미드의 미로처럼 낯설기만 했다.

“2층 누각에 도착했다, 이상! 불꽃이 보이지 않는다. 화재진압은 거의 완료됐고 잔불처리만 하면 될 것 같다. 이상!”
“수고했다. 이상!”

지휘차 근처에 있던 소방대원들은 모자를 벗으며 팔소매로 이마의 땀을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숭례문 주변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지붕 위로 시뻘건 불꽃이 치솟은 것이다.

“앗! 저게 뭐야?”

잔불정리 준비를 하던 소방대원들은 일순간 멍하니 숭례문의 지붕만 응시했다. 마치 누군가 풀무질하듯 지붕 틈새 곳곳에서 용접 같은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불이 진압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다시 소방호수의 물이 분수처럼 숭례문 지붕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기와지붕은 든든하게 방수처리가 되어 기와 속으로는 물 한 방울도 미치지 못했다.
방수 지붕 아래서 불씨를 충분히 달군 화마(火魔)는 거세게 풀무질하며 보란 듯 맹렬하게 타올랐다. 순식간에 2층 누각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각의 전 대원은 속히 철수하라. 이상! 빨리 나와라! 무너지고 있다. 빨리!”

무전기의 칙칙거리는 잡음마저 화마의 배경 효과음으로 동조해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이제 연기마저 벌겋게 달구어져 치솟았다. 한 소방대원이 황급히 숭례문 현판을 갈고리로 끌어내렸다. 2층 누각은 고사하고 현판이라도 구하자는 판단이었다. 현판은 투신하듯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조각났다.
소방호수의 집중 포화에도 불구하고 혹시 휘발유를 퍼붓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불길은 더욱 위세 좋게 무자년 정월 밤하늘에 봉화(烽火)를 올렸다.
“콰르르릉.”
지붕은 검은 연기를 토하며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달나라를 오가는 시대에 불타는 국보 1호 앞에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불구경뿐이라니! 지켜보던 시민들과 소방대원들은 무기력감과 자괴감에 고개를 숙였다.
다음날 아침 여명(黎明)에 드러난 남대문 사거리는 처참했다. 밤새 포화를 맞은 전장처럼 잔불 연기가 여기저기 솟아오르고 있었다. 비릿한 불냄새가 매슥거렸다. 한 건장한 사내가 그 앞에서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예(禮)를 숭상한다(崇)'는 의미의 ‘숭례문(崇禮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풍수지리상 한양 남쪽 관악산의 드센 화기를 막기 위해 세웠고 명칭부터 관악산의 화기를 고려했다.
그 어떤 전쟁에서도 불사조처럼 꿋꿋하게 600년간 서울을 지킨 숭례문은 대한민국의 상징이며 서울의 수호신 아닌가. 그런 숭례문이 무자년 정초부터 전소됐다는 사실은 더욱 불길하게 느껴졌다.
기도를 마친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서울의 운이 다했단 말인가….”


예언자를 찾아라

2008년 7월 11일 새벽 5시 10분 북한군 초소가 멀리 보이는 금강산 해변 모래사장. 동 트기 직전 어스름한 모래사장엔 한줄기 을씨년스런 바람이 스쳤다.
남측의 한 여성 관광객이 운동복 차림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여자는 엉성한 남북 철조망을 넘어 해안 북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장진항이 바라다 보이는 호텔에 묵은 남측 관광객들은 일출을 보기 위해 삼삼오오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탕, 탕-’

날카로운 두 발의 총성이 고요한 새벽을 찢었다. 관광객들은 일제히 총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날 총성이 남북한 극렬한 대립을 알리는 신호탄이란 징조로 받아들이는 자는 없었다.
광화문에 위치한 주한 미국대사관. 대사관 북쪽으로 신록 푸르른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청와대 파란 기와지붕이 한눈에 보인다. 최초의 여성 주한 미국대사인 신임 캐슬린 스티븐스는 첫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였다.
남자비서는 최근 남북관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금강산 피격사건 직후 남북 분위기는 냉랭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에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대북 포용적인 내용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던 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10년간의 햇볕정책이 저물 것을 우려하여 발 빠르게 화해 분위기를 연장시키려 했다. 플루토늄 생산량 등을 적시한 핵 신고서를 제출하고 2008년 6월 27일에는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장면을 전 세계에 송출했다. 미국은 대북 테러 지원국 지정 해제절차에 착수하면서 이에 화답했다.
대북 강경기조를 선언하려던 이명박 정권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화해 무드에 발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멈췄던 대북 식량지원을 재개하고 남북 정상회담도 은밀히 타진을 하면서 정식적인 대북 외교방향을 천명하려는 직전이었던 터에 금강산에서 돌발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그럼 긴장국면을 조장하기 위한 북측의 고의적인 사건인가요?”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우발적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고의적인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대통령을 지지했던 수구언론들은 해빙 무드의 연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물을 만난 고기처럼 금강산 피격사건을 ‘정면도전’이라고 몰아붙였다.
남북 언론들은 서로를 겨냥해 입에 가시 돋친 논조를 쏟아냈다. 남한의 극우 반북세력들은 김정일 정권타도 궐기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왔다. 10년간 해빙 무드였던 한반도는 다시 급랭했다. 대북 강경론자들의 득세에 남북한은 물론이고 공들였던 미국과 동북아 외교 라인은 망연자실했다.
금강산 관광은 즉시 중단되었다. 이어 북 외무성 대변인은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중’이라는 강경 성명을 냈다. 연이어 장거리 로켓을 동해안에 발사한 북한은 기어코 6자회담 불참을 선언하고 말았다. 핵시설 원상복구 방침을 천명하고 핵실험을 강행했다. 한반도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우발 쪽으로 예측한다구요?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죽은 사건인데 예측이라뇨? 예스입니까, 노입니까?”
“그게…. 북한이 워낙 폐쇄적인 집단이라 진상규명이 쉽지 않습니다.”
북한은 남한 관광객이 군사 경계지역을 침범하였다고 주장했고, 남한은 북한이 발표한 시간과 사거리에 이의를 제기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남북공동 조사단을 꾸리자고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부함에 따라 사건의 실체는 미궁에 빠진 상태였다.

“최고의 정보력을 가진 미국이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죄송합니다. 하늘에서 첩보인공위성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지만 피격 동기까지는….”
“음… 기계의 한계군요. 그럼 우발이란 근거는 뭡니까?”
“북한 김정일은 새로이 선출된 이명박 정권과 해빙 무드를 연장하기 위해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는 조치를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대통령이 대북 긴장완화 방안을 발표하는 날 마침 금강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서로 모순됩니다.”
“동기가 없다….”

 

예언자를 찾아라-2
“물론 화해무드를 반대하는 북한의 일부 강경파들의 공작의 가능성도 검토했습니다만 한국의 믿을 만한 정보통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믿을 만한 정보통이라면?”
“오전 브리핑에서 한국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정·재계 VIP들을 소개한 바 있었는데 그때 빠진 인물이 있습니다.”

비서가 리모컨을 누르자 한 사나이의 사진이 대형 스크린에 올라왔다.

“이 자는 유명한 예언가입니다.”
“예언가? 예언가라고 했나요?”
“예스 맴.”

미국도 미소냉전 때부터 종종 초능력자들의 힘을 빌려 정보를 얻곤 하였다. 비서는 두터운 파일을 대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건 열흘 뒤 그자가 쓴 금강산 피격 관련 칼럼입니다. 작성은 게재시보다 이전이었을 겁니다.”

대사는 찬찬히 칼럼을 읽어 내려갔다.

『…평소에도 금강산 해변에는 엉성하게 군사경계선을 그어서 이를 넘어온 남한 관광객들에게 북한 군인들이 금품을 요구하고 풀어주는 일이 상시로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그날 새벽 여자 관광객은 조깅을 하다가 모래사장에 설치된 허술한 경계선을 넘고 말았다. 다가온 북한군은 다짜고짜 없던 일로 할 테니 달러를 달라고 요구했다. 관광객은 뒷골목 불량배처럼 돈을 요구하는 북한군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이에 격분한 북한군이 우발적으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북한군은 정상적인 보급이 끊긴 지 오래 되었다….』

“금강산 사건이 예언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이번 사건은 훨씬 지난 일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딱히 그자를 부를 말이 없어 예언가라고 하는 겁니다. 영능력자라는 말이 더 적확할 겁니다.”
“영능력자요?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CIA파일에 의하면 그는 1991년 1월 17일 걸프전 개시 일을 정확히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이 신문에 소개되고 나서 펜타곤(미국 국방성)은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왜지요?”
“1급 비밀이 외부로 누설됐으니까요. NSA(미국 국가안보국)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요?”
“정보원에 의한 누설이 아니라고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면…….”
“영능력입니다.”
“영능력이요?”
“예언능력이라고 할까요. 그는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26 사건도 정확히 예측했고, 1992년 LA폭동, 동해안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 서해교전, 한국의 IMF도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최근엔….”
“최근에는요….”

스티븐스 대사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깊은 관심을 표했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도 맞추었습니다. 지난 7월 금강산 사건의 발발을 암시하는 예언도 언론기록에 있습니다.”
“음…….”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도 방한하여 그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가장 요주의 인물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극비 정보를 마음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인가요?”
“네, 그렇게 가정하고 있습니다. 이전 대사님은 그와 종종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래요?”
“예. 중요한 정책 결정에 자문을 구했다고나 할까요.”
“그와 연락이 되나요?”
“물론입니다. 그와 핫라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티븐스 대사의 표정은 진지했다.

평양 주석궁 국가안전보위부. 지하 벙커에 위치한 작전기획실은 원폭에도 견딜 만한 두께로 설계된 군사시설이었다. 해가 지는지 뜨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밀폐된 벽면의 수십 개 화면엔 남한의 연합뉴스, 미국의 CNN, 중동의 알자지라 등 전 세계 유수한 뉴스 채널이 24시간 모니터 되고 있다. 관제탑 같은 2층 보위부장 사무실이 방탄유리 너머로 이 광경을 빠짐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회전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던 깡마른 체격의 보위부장이 책상에서 쿠바산 시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책상위에는 300페이지가 넘는 노란 서류철이 펼쳐져 있었다. 노란색은 요주인물의 신상정보가 담긴 기밀서류란 뜻이었다. 서류철이 상당히 두껍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인물이거나 오랫동안 감시해온 인물이란 증거였다. 보위부장은 주머니에서 미제 터보라이터를 꺼냈다.

‘딸각-’

날카로운 푸른 불꽃이 시거를 붉게 달궜다.
보위부장 앞에 정복 차림의 건장한 소좌는 얼어붙은 듯 차렷 자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보위부장은 코로 연기를 내뿜으며 다그쳤다.

“38호실 쥐새끼 찾았소, 동무?”

국가안전보위부에서 38호실은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 산하기관으로 외화벌이가 주 임무였다. 면세점과 외국인 전용 호텔을 운영하며 전국에 분소를 두어 송이, 꿀, 성게 알 등 북한산 토산물을 해외로 수출하여 외화를 벌었다. 가장 인기 있는 부서이지만 근래 들어 더욱 그랬다. 남한과 거래하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공급되는 남한의 고급물자들이 북한에 유통되었다. 암거래 시장이 형성될 정도로 38호실은 고급간부에서 말단까지 벌이가 짭짤했다. 하지만 금강산 38호실 분소는 단순 외화벌이만 하지 않았다. 대남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가 추가되는 특별 관리대상이었다.

“부장동무, 아직 못 찾았습네다. 철저히 조사하고 있디만 내통자는 아직….”
“무시기? 지금 나랑 놀자는 기야. 그럼 어떻게 그자가 금강산 사건의 자초지종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게야.”
“그, 그거이….”

금강산 사건 직후 정보를 담당하는 안전보위부는 발칵 뒤집혔다. 고위정보 취급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샌 것이다. 남한의 국민들은 그의 금강산 칼럼 내용에 반신반의했지만, 내막을 알고 있던 북한은 사정이 달랐다. 특급 보안기밀이 누설된 책임소재가 밝혀져야 했다.
보위부 소좌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자는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그자는 주석동지 서거, 서해교전, 동해안 잠수함작전, 2002 월드컵 4강, 노무현, 이명박 당선….”
“또, 또 그 소리. ‘예언자다. 천리안을 가진 예언자.’ 그걸 어케 국방위원장에게 보고하란 말이야, 동무! 우린 위대한 주체사상의 영도를 받는 영광스런 북조선 인민이야. 유물 변증법적으로 해석해보라우.”
“…….”

보위부장은 입안에 머금은 담배연기를 소좌의 얼굴에 뱉으며 그 주위를 몇 바퀴 빙빙 돌았다.

“곧 중국의 후진타오도 오고 미국 특사도 만나야 하는데, 이렇게 정보가 줄줄 새면 어떻게 대남공작을 하갔서. 당장 쥐새끼 하나 만들어 내라우!”

안전보위부가 정보누설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희생자가 필요했다.

“옛, 알갔습네다!”
“그리고 말야…. 그 칼럼 쓴 자의 언행은 잘 탐지하고 있겠지비?”
“물론입네다. 벌써 사람을 보내 매일 보고 받고 있습네다.”

보위부장은 노란 서류철에서 남한의 금강산 칼럼니스트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서울의 하나교 총재실. 노환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윤총재에게 근래 전세계 동향을 보고하고 있는 유실장. 윤총재는 전 세계 200개의 지부와 500만 신도를 거느린 하나교의 교주였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어 그린랜드와 남극에 빙상이 녹아내려 초원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올해만 해도 미국 동부, 사모아섬,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대만, 중국 베이징에서 강진이 발생하고 필리핀도 최악의 태풍과 홍수로 수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2012년 지구 종말론이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마야인들의 예언록에 지구의 종말이 2012년에 그친 것을 근거로 지구의 대변동이 있을 거란 내용입니다. 지구 종말을 그린 ‘2012년’이란 영화가 흥행 1위를 기록할 정도입니다. 지난 1999년 밀레니엄 종말론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우리 지부에도 2012년이 천지개벽이 시작되는 날이 아니냐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2012년… 지축의 변동론이 다시 고개를 드는군…. 유실장, 그거 말고.”
“네?”
“개벽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니야. 쿨럭.”
흥분을 하자 윤총재는 잔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아, 예!”
유실장이 아래에 있던 다른 파일을 주섬주섬 펼쳐 읽었다.

 

예언자를 찾아라-3

“신종 플루 소식입니다. 전염속도가 엄청납니다. 벌써 미 대륙에서만 1000명이 넘게 사망했습니다. 이번 신종 플루는 조류독감이나 사스와 달리 그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부장들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올 겨울에 전 세계를 강타한다고 합니다.”

“인류의 대재앙인 병겁(病劫)이 시작된 게야. 할 일은 많은데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니. 총재자리를 물려주겠다는데도 아들놈은 나타나지도 않고….”

윤총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세계 최대의 조직망을 자랑하는 종교 교단이었지만, 후계자 문제에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윤총재가 세상을 뜨면 그 주변의 즐비한 유수한 석학들을 통제할 만한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후계자가 없었다.
결국 아들을 옹립했으나, 부자세습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저 윤총재의 눈치를 보며 면종복배하고 있을 뿐 사오분열이 불 보듯 뻔했다.

“아드님은 오늘 외부인사와 만찬이 있어 행사준비중이라고 합니다.”
“미덥지 못해… 유실장, 솔직히 말해보자구. 내가 없어도 신도들이 그 놈을 따르겠나? 당신도 내 아들을 나만큼 믿겠냔 말이야, 유실장?”
“에, 뭐 잘 하시겠죠.”
“여우같은 늙은이들이 득실득실한데, 새파란 놈이 어떻게 견디어내겠어, 쿨럭. 적어도 천지 도수(度數)를 넘나들고 설계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해, 쿨럭.”

윤총재는 기침을 진정하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실장, 그가 필요해. 그에겐 연락이 없는가? 쿨럭.”
“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어허, 숭례문 예언 몰라?”
“네? 숭례문이요…….”
“숭례문 화재 때 그 사람 칼럼 스크랩하라고 했잖아. 뭐가 쭉정이고 알맹이인지 구별도 못하나!”
“아!”

윤총재는 주섬주섬 노트북을 뒤지는 유실장을 못마땅한 듯 노기 띤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기 줄쳐 놓은 거 읽어봐.”
“무자년이 시작하는 설날연휴 마지막 날 600년간 서울의 화기를 막아오던 숭례문이 연소된 사실은 불길하다. 서울의 화기(火氣)를 막을 수 없다. 화기라 함은 작게는 화재요, 크게는 전쟁이다. 나는 숭례문 앞에서 불길한 예감이 맞지 않기만을 영계에 기도했다.”
“그리고는 바로 광우병 광화문 촛불 시위가 있었지.”
“네, 그렇습니다.”
“이제 화기는 하나 남았어.”
“…….”
“전쟁!”
“네?”
“촛불 화재는 지나갔으니 전화(戰火)뿐이 더 남았겠어.”
“…….”
“검증하는 것도 좋지만, 늦으면 안 돼. 반드시 우리 사람 만들어. 이게 내 마지막 유언이야, 쿨럭 쿨럭.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쿨럭.”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나? 요즘 뭐해? 예전에 검증해본다고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나. 쿨럭.”
“예, 사람을 하나 보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유실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마친 유실장이 즉시 보고했다.

“총재님, 그는 이탈리아에 있답니다.”
“이탈리아? 왜?”

이탈리아의 북동부 ‘피에베 디 솔리고’시. 베니스에서 1시간 떨어진 평온한 도시다. 하지만 심심한 전원도시가 아니었다. 베니스가 상업의 도시라면 피에베 디 솔리고는 예술의 도시였다.
십자군 전쟁의 길목이었던 이 시의 베니스 상인들과 피렌체 수공업자들은 엄청난 유럽의 부를 축적했고, 이 자본은 르네상스를 촉발시켰다. 예술가들은 풍광 좋은 ‘피에베 디 솔리고’에 거주하면서 베니스로 공연을 떠났다.
그래서일까.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에즈라 파운드, 루이지 노노를 비롯해 유명한 음악가들의 마지막 귀향지도 이곳이었다.
젊은 예술가들은 그들이 묻힌 묘지에 추모의 시들지 않는 꽃을 바치며 예술혼을 기렸고, 이곳은 슬금슬금 예술가들의 성지가 되어 갔다. 국립음악대학교가 유서 깊은 이 고장에 위치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차법사는 그런 피에베 디 솔리고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이 도시를 찾은 이유는 표면상으론 창작 오페라 ‘카르마’의 갈라 콘서트 공연계획 때문이었다.
차법사가 작시한 아리아 몇 곡이 우연히 이곳 국립음악대 교수에게 알려졌다. 그들은 동양의 해탈적 사랑과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인 정(情), 한(恨)에 매료되어 자발적으로 작시의 해설서를 만들고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갈라 콘서트 형식의 음악회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페라의 종주국에서 콧대 높은 이탈리아 성악가들이 한국어로 노래 부르는 일은 처음이었다.
하늘은 지중해처럼 푸르고 날씨는 화창했다. 차법사가 먼저 향한 곳은 행사가 열리는 시립극장이 아니었다. 시의 참전묘지였다. 차법사 자신도 왜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는지 궁금했다.
이 고장은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1, 2차 대전 중에 가장 참혹했던 격전지 중의 하나였다. 시의 중심가를 흐르는 강 전체가 붉은 피로 물들어 ‘피의 강’이었다. 헤밍웨이가 참전하여 작품 ‘무기여 잘 있거라’의 무대이기도 했다.
미국 9·11 위령제, 북해도의 일제 강제징용 한인희생자 위령제, 백두산 대동위령제를 지낸 적이 있던 차법사였지만 음악회로 피에베 디 솔리고에 온 것 자체가 의외였다. 그러나 묘한 인연의 고리가 드러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용한 묘지에 들어선 차법사는 번개를 맞은 듯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둥근 원통으로 조성된 하나의 석상 묘지 위에 나부끼는 깃발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헝가리, 독일, 체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벨기에 등 전쟁 당시 적국이 포함된 10여개의 깃발이 나란히 나부끼고 있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참전자 모두를 함께 묻어 추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차법사 묘지 입구에 서 있는 낯익은 인물의 등장에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는 다름 아닌 차법사의 선친인 故 차혁일 총경이었다. 말끔한 군복에 비스듬하게 철모를 쓴 차총경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차법사는 깜짝 놀랐다. 영가로서 종종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이처럼 이탈리아에서 만날 줄이야. 그는 다른 일행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차법사의 눈에만 보이는 장면이었다.
차총경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며 6·25의 긴긴 전쟁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창경원에 이현상의 시신을 행인들에게 전시하였다. 유가족조차 빨치산의 시신을 거두길 꺼린 적장의 시신을 차총경은 거의 탈취에 가깝게 운구하여 섬진강가에서 정중히 화장시켜주었다.
관계자가 이 사실을 문제 삼자 차총경은 ‘당신은 죽어서도 좌익이고 우익을 하면서 총질을 할 참인가!’라며 호통을 쳤다.
물론 이 사건으로 차총경은 상부에서 전공(戰功)을 깎이는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사건건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서 죽어서는 아군과 적군이 없다는 피에베 디 솔리고의 참전묘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위대한 예술은 가슴 아픈 시간과 현장의 뒤안길에서 탄생한다.’
허공에서 차총경의 음성이 들렸다. 물론 차법사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영가는 그 말만 남기고 희미하게 사라졌다.
차법사는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탈리아의 피에베 디 솔리고가 왜 예술의 도시가 되었는지, 왜 이곳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에서도 가극을 공연하고 영화를 만들고 고찰을 수호했던 문화경찰인 선친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가이드가 되어 이탈리아 곳곳에 차법사 일행을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2장. 천지 도수(天地 度數)

석종(石鐘)으로 떨어진 용-1

짙은 초록으로 무성한 모악산 금산사. 석양에 쫓긴 산 그림자가 스멀스멀 금산사 앞마당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푸른 산과 붉은 석양, 검은 그림자가 경합하는 금산사 허공은 보랏빛 안개로 팽팽했다.
황금빛 석양으로 번뜩이는 웅장한 3층 미륵전은 삼매에 빠진 듯 고요했다. 미륵전 북쪽에 높게 위치한 평평한 방등계단(方等戒檀)도 말이 없었다.
몇 시간째 방등계단 주위를 탑돌이하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개량한복 차림을 한 사내는 한눈에 봐도 선골(仙骨)의 기풍이 휘날렸다. 사내는 혼자 중얼거렸다.

“때가 되었나이까?”

평소 같으면 당연히 미륵전의 삼존불부터 친견했을 테지만, 오늘은 미륵불은 외면한 채, 단숨에 방등계단부터 찾은 사내였다. 간밤의 꿈 탓이었다.
푸른색의 용 한 마리가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지더니 방등계단 중앙의 석종(石鐘)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돌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산을 뒤흔드는 호랑이의 포효 같았다.
이상했다. 금산사의 백미는 미륵삼존불이 모셔진 미륵전 아닌가. 많은 예언가들이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선경세계를 이끌 인물을 예언하며 가리킨 곳도 바로 미륵불이었다. 그런데 용이 떨어진 곳은 미륵전이 아니었다.

‘기이하다. 왜 하필 방등계단일까? 왜 미륵전을 비껴갔을까? 길몽인가, 흉몽인가?’

 

석종(石鐘)으로 떨어진 용-2

정방형의 방등계단을 수백 번 탑돌이를 했어도 방등계단엔 이따금 바람만 일뿐 아무것도 없이 휑하기만 했다.


‘혹시 때가 무르익지 않은 것인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휴우-”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내는 지친 듯 계단 기단 벽을 기댔다. 방등계단을 돌고 있는 사내는 용화(龍華) 선인(仙人)으로 불리고 있었다. 용화란 미륵이 강림하는 용화세계를 구현하라는 뜻으로 스승이 손수 지어준 이름이었다.
현생한 미륵을 맞이하기 위해 지난 10년을 하루같이 정진해왔던 그였다. 세상에 드러낼 시기를 절치부심하던 중, 드디어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나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천지공사(天地公事)를 감지할 능력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구나.’

계시를 알기 전에는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하지만 허기에 지친 육신은 슬며시 타협의 손을 내밀고 있었다.
방등계단을 기댄 용화의 손가락에 굴곡이 느껴졌다. 기단에 새겨진 음양의 요철 때문이었다. 그가 더듬은 것은 기단에 새겨진 매월당의 한시였다. 절로 한탄이 나왔다.

“옛날엔 걸출한 선인들이 많았건만….”

홀연히 선선한 한 줄기 바람이 불더니 사내를 휘돌아 감았다.

때는 1461년 세조 7년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3층 높이의 장중한 미륵삼존불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륵불에 경배의 절을 올리기는커녕 눈을 부릅뜬 채 한판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매월당의 차림은 괴이했다. 양반 복장은 유(儒)요, 의복의 색은 먹장삼의 불(佛)이요, 머리에 평평한 천장의 삿갓은 선(仙)을 상징하는 유불선이 어우러진 야복(野服) 차림이다.
세상은 더없이 흉흉했다. 수양대군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참살하고, 복위운동이 두려워 어린 조카인 단종마저 강원도 산골에서 무참히 살해한 뒤에도, 단종 친위세력들을 우물 속에 생매장하는 등 피의 향연을 멈추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의 도리를 배운 유생이라면 세조의 만행을 규탄하며 한양을 향해 머리를 풀고 곡을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천벌이었을까. 세조가 왕위 찬탈한 직후부터 몇 년간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지속되어 민심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매월당도 세조의 행위에 분노해 모든 경서(經書)를 찢어 불태우고 정처 없이 팔도를 떠도는 유랑객이 되었다. 벌써 여섯 해를 넘게 구름처럼 흘러 다니다 보니 더 이상 분노도, 좌절도 닳은 짚신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인걸들은 피를 뿌리며 꽃처럼 허무하게 떨어졌건만 산천은 의연하게 사계절을 돌리고 있었다.
매월당은 유심(有心)한 인도(人道)와 무심(無心)한 천도(天道)가 서로 다름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현생은 과거의 업보일 뿐이었다. 미래가 중요했다. 민초들의 삶을 보장할 새로운 사회변혁 사상이 절실했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단종의 제를 올리고, 지체 없이 미륵신앙의 원천지인 모악산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엔 없어…. 미륵전에는 미륵이 없어.”

매월당은 끝내 배례를 올리지 않고 삼존불을 뒤로 하고 미륵전을 나왔다.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매월당은 뒤를 돌아 미륵전을 올려다보았다. 미륵전 뒤로 모악산 정상인 국사봉이 눈에 들어왔다. 우뚝 솟은 국사봉 주위에 석양에 반사된 햇무리가 서기처럼 테를 두르고 있었다.
‘어미산’이라고도 불리는 모악산(母岳山)은 전형적인 ‘평지 돌출산’이다. 예로부터 사방이 탁 트인 평지 돌출산은 선각자들의 태반이었다.
서해 지평선을 연장한 호남평야를 마음껏 질주하다 보면 별안간 가파른 산맥이 가로 막아서는데, 사방 백리가 넘는 평지를 급하게 치솟은 모악산이다.
모악산은 정상에서부터 산이 겹치면서 아래로 구불구불 급하게 뻗친 모양이 마치 지네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려오면서 머리를 쳐든 형상과 같다하여 오공비천혈(蜈蚣飛天穴)이라 부른다.
그 오공비천혈에는 다섯 개의 혈이 있는데, 최고 혈자리에 자리 잡은 터가 다름 아닌 금산사(金山寺)다.
매월당은 가파른 북쪽 계단으로 향했다. 가쁜 숨을 들고 내쉬며 올라서니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널찍한 화강석으로 만든 평상만이 펼쳐 있었다. 방등계단(方等戒檀)이다. 방등계단은 사각형의 평탄한 돌을 놓아 매우 넓은 2층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첫인상은 하도 휑하여, 건물이 불타고 돌 기단 터만 남은 폐허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만약 중앙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종 모양의 화강석 종탑마저 없었다면 그런 추측은 당당했을지 모른다.
매월당은 벼락 맞은 나무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바람도 머물지 못하고 스쳐가야 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평평한 방등계단. 돌로 만든 종만이 침묵을 울리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해가 떨어진 자리에 저녁별이 총총했다. 매월당은 한탄처럼 시 한 수를 읊었다.

매월당은 다시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국사봉과 미륵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렸다.

“미륵전은 3층이 아니야. 저 국사봉이야말로 미륵전의 가장 마지막 지붕이지. 그래, 미륵이 바로 여기 계셨구먼.”

매월당은 엉뚱하게 방등계단에 절을 했다.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미륵전은 금산사의 정수리였다. 3층 누각 안에 모셔진 웅장한 삼존불에 압도되지 않는 이가 없다. 하지만 매월당이 보기엔 미륵전에는 미륵이 없었다. 미륵불의 형상만 있을 따름일 뿐이었다. 형상 없는 미륵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방등계단에 있었다.
미륵전은 미륵이 지상으로 내려온 형상이요, 방등계단은 미륵이 만들려는 이상향인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미륵전이 유(有)의 세계라면, 방등계단은 무(無)의 세계였다. 형상 없는 무도(無道)를 설명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 유형의 불상(佛像)이요, 유형은 무형의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였다.
지상세계 미륵전의 외형은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 공간적으로 상·중·하 3단계 차별을 상징하는 3층 모양이다. 반면 방등계단은 사방팔방이 차이 없이 모두 평등한 미륵의 도솔천을 완성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방등계단과 미륵전은 긴밀하게 한 몸이다. 미륵전은 겉에 보이는 3층이 전부가 아니다. 미륵전 안으로 들어서면 내부는 층이 없다. 한통으로 통해 있다. 외형이 육신이라면 내부는 마음이다. 차별이 있는 육신 내면의 마음속에는 차별 없는 미륵의 씨앗을 이미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미륵전이 차별 속의 평등이라면, 방등계단 2층 기단은 평등 속의 차별이다. 미륵불의 외형을 보려거든 미륵전을 찾아야 하지만, 미륵을 직접 친견하려거든 미륵의 마음을 형상화한 방등계단을 찾아야 했다. 미륵은 애초부터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 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보던 매월당은 객사로 돌아와 검은 먹으로 일필휘지 써내려갔다.

무릇 사람의 호흡은 천지의 호흡이로다.

동지 이후부터는 날숨[호]이요
하지 이후부터는 들숨[흡]이니
이것이 일 년의 호흡이로다.

자시 이후부터는 날숨이요
오시 이후부터는 들숨이니
이것이 하루의 호흡이로다.

하늘의 일 년과 하루는 곧 사람의 한번 호흡이니
이로써 일원(一元)의 도수는 129,600년이요
우주의 큰 변화는 1년이 되노라.

청주에서 매월당을 만나러 모악산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벗 조진사는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이보게 동곡(매월당의 다른 호), 무슨 뜻인가? 일 년이 129,60 0년이라니? 360일 아닌가?”
“조선의 사계절만 사계절이 아니지. 우주에는 더 큰 사계절이 있어. 작은 한 해가 360일이고, 우주의 큰 한 해는 129,600년이야.”
“우주에도 춘하추동이 있다는 겐가?”
“물론이지. 북두 우주의 대원(大圓)을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다시 땅이 돌고, 달이 돌고 있어.”
“음, 어렵군.”
“어렵긴. 대원과 소원(小圓)을 곱하면 되지.”
“내가 셈에 약해서…….”

조진사는 겸연쩍은 듯 마른 침을 넘겼다. 매월당은 허공을 노려보듯 실눈을 뜨고 염불처럼 중얼거렸다.

 

석종(石鐘)으로 떨어진 용-3

“천지 도수의 시작을 명나라로 축을 두고 있는데 이건 명백한 잘못이지. 조선이나 명나라의 사계절이 아니라 북두 은하의 사계절부터 시작해야 하니, 조선 팔도가 아무리 봄이라 해도 우주의 겨울엔 꽃이 필 순 없지. 음양오행의 도수는 작게는 인간의 들숨과 날숨에서 시작하여 크게는 우주의 호흡과 짝을 이루어야 해.”


조진사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바짝 당겨 물었다.

“그럼 우주의 계절로 보면 지금은 어느 계절인가?”
“봄과 여름의 선천(先天), 가을, 겨울의 후천(後天)이라 하지. 지금은 화기운의 극상인 선천의 말미야. 여름의 막바지야. 아니 초가을에 더 가깝지. 무질서의 극상. 나뭇가지는 만방으로 뻗고, 잎사귀는 푸르다 못해 분에 넘게 검고, 씨방에선 덜 익은 열매들이 치고 올라와 꽃잎을 시들게 하고…. 후천이 지나야 비로소 가타부타 쭉정이가 가려지겠지.”
“우주의 가을엔 세상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가?”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지.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대변혁기엔 모든 것이 변하네. 통합의 기운이 왕성해져서, 무성한 나뭇잎이 추풍낙엽에 우수수 떨어지며 단단한 열매가 맺지. 분화 번성하던 시절은 가고 열매 하나로 통합하는 우주의 가을이 도래하겠지.”
“우주의 가을, 통합의 기운….”
“가을엔 영글기 위해 다툼이 많을 게야. 옥석이 가려지며 가혹한 겨울을 견딜 놈들만 살아남아야 하니까.”
“실감이 안 나는구먼.”
“동방(東方)인 목방(木方) 간(艮) 조선 팔도엔 내홍과 전화(戰火)가 극성이겠지.”

‘둥- 둥- 둥-’

별안간 괴이한 소리에 움찔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북소리 같지만 가죽 북이 울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맑은 쇠종소리도 아닌 땅을 뒤흔드는 둔탁한 소리였다.
다음날 금산사 승려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이 방등계단에 모여 웅성거렸다. 다름 아닌 지난 밤 처음 듣는 소리는 방등계단 중앙의 돌종에서 울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댔지만, 그 종소리가 조선 팔도를 불태울 왜구와 오랑캐가 들이닥칠 징조임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방등계단을 돌고 있는 용화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저녁별이 하나 둘 반짝거렸다.
‘출생할 미륵 또한 저렇게 세상에 빛나면 얼마나 좋으련만….’

10년 전 용화 선인에게 스승인 동곡(銅谷)선생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미륵의 현신으로 믿고 있던 스승은 20년간이나 증산의 흔적을 연구한 천문(天文)의 대가였다.
그 동안은 증산이 남긴 현무경(玄武經)을 감히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동곡이 처음으로 현무경에 도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동곡은 현무경이야말로 증산이 후세를 위해 남긴 천문이라고 굳게 믿고 해석에 뛰어들었다.
놀랍게도 천문에는 해방 전후까지 국운이 천지공사 도수로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동곡이 이를 알아낸 것이다.
어느 날 동곡은 따르던 도학들에게 중대한 사실을 실토했다.

“후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엄청난 변란이 다가옵니다. 지구 전체가 요동치는 변란이에요. 천문 도수에는 이미 미륵이 출세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도탄에서 구할 미륵이 출세했다니. 도학들이 출세한 미륵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몸이 달았음을 물론이다. 동곡은 천기누설이라며 더 이상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데 동곡도 천문을 완전히 해석하지는 못하였다.

“지난 과거사의 도수는 모두 찾았으나 미래 도수는 아직 불완전해.”

동곡은 그렇게 실토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그가 돌연 이승을 떠나고 만 것이다. 따르던 도학들은 천기누설의 과보를 받은 것 아니냐며 돌아서 뒤숭숭해 했다. 스승의 허무한 죽음으로 천문은 완전히 해독되지 못한 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영원히 묻힐 찰나였다.
그러나 완전히 베일에 싸인 건 아니었다. 실마리는 남아 있었다. 임종 직전 동곡은 도학들 중에 가장 총명한 용화를 불렀던 것이다. 용화만 남기고 주위를 물리치고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귓속말로 비결을 전했다.

“그 책의 13쪽에 도수를 적어 놓았네. 그런데 내가 풀지 못한 게 하나 있어. 세상을 구할 미륵의 도수지. 생년월일이 몇 군데 나오는 데, 어떤 것인지 모르겠어. 증산 상제님께서는 분명히 구체적으로 명시해놓으셨을 텐데….”

동곡은 그 말만 남기고 그렇게 홀연히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동곡 스승을 미륵의 현신으로 믿고 따르던 도학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동안 혼돈 속을 헤매던 용화는 마침내 스승의 유지를 받들기로 결심했다. 용화는 스승이 남겨 놓은 비결 연구서 풀이를 꼼꼼히 챙겼다. 증산계통의 종교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떠돌던 현무경 24장을 모두 구해 자료를 보충하며 스승의 연구를 보다 체계화시키기 시작했다.

방등계단 한시를 더듬던 용화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돌벽을 짚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썩은 고목처럼 고꾸라졌을 것이다.
사실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천기(天氣)수련을 통해 10리를 5분 안에 주파하는 축지 걸음을 자랑했던 철각(鐵脚)이었다. 하지만 올 초부터 현기증으로 몇 번이나 혼절하고 말았다.
양방의원에서는 심한 당뇨라고 했고, 한의사는 기가 너무 머리로 상승한 상기병(上氣病)이라는 진맥결과를 내놓았다. 현무경 연구에 너무 골몰한 탓이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너무 쇠약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증산의 유언을 전할 자를 더욱 더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루빨리 큰 짐을 덜고 싶어서였다.
용화는 밤새도록 방등계단을 수십 번 돌며 모종의 계시를 기다렸지만 돌종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

‘천문을 실행에 옮길 시기가 되었다는 계시가 아닐까?’

사실 용화가 오랫동안 주시해온 인물이 한명 있었다. 세간에 ‘차법사’라 불리는 사내였다. 과연 그 인물이 자신이 점찍은 그 인물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차법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용화는 그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증산이 남긴 유서-1

서울 동쪽 송파에 자리 잡은 상가 2층의 조그만 선원. 그 옛날 한강을 정비하기 전 송파는 갈대가 숲으로 둘러싸이고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였다.
그날은 차법사가 일반인들에게 인생 상담을 해주는 날이었다. 법당의 법단 중앙에 비로자나 불상이, 옆에는 지장보살 석상이 모셔져 있고 천장에는 짙은 연분홍색 연등이 산딸기처럼 매달려 있었다.
60여명이나 되는 면담 신청자들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삶의 고뇌에 찌든 처절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걸고 차법사를 찾은 사람들이었다.
예불 스님이 나오더니 공손하게 양해를 구했다.

“법사님께서 오늘따라 조금 늦으십니다.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곧 도착한다는 전갈이 왔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용화도 그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용화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오만상을 찌푸린 인생 낙오자 같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실망이었다. 차법사와 만나기 위해 면담을 신청한 지 몇 주가 지나서야 기별을 받았고, 오는 내내 매캐한 자동차 매연으로 목이 칼칼했다. 게다가 이 사람 저 사람 어깨에 부딪히며 길을 헤쳐 도착한 선원을 보자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즈넉한 암자는 아니더라도 소나무가 청청한 넓은 마당쯤은 기대했는데, 빌라가 밀집한 답답한 건물상가라니.
도대체 이런 갑갑한 도심 한복판에서 차법사란 자는 무얼 하겠다는 말인가. 과연 천문을 받을 만한 인물인가. 마음이 어지러웠다. 용화는 물끄러미 불상을 바라보았다.

용화가 차법사를 점찍은 건 2004년 봄 정읍의 ‘제령봉(帝令峰) 서기(瑞氣)’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용화는 동곡 스승이 남겨준 현무경의 도수풀이가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 현생에 출세한 미륵의 도수가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헛디디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증산의 친필 유훈과 진본 현무경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현무경(玄武經)은 증산이 천지공사를 보면서 직접 그렸다고 알려진 시화(詩畵)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숨은 비밀을 풀기 위해 공부했다. 동곡 스승처럼 평생을 바쳐 현무경 사본을 연구한 이도 있었다.

 

증산이 남긴 유서-2

용화는 진본 성장공사도(誠章公事圖), 신장공사도(信章公事圖), 예장공사도(禮章公事圖)가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장공사도(禮章公事圖): 귀마일도(龜馬一圖)


30여 점만이 전하는 현무경 중에 특히 그 석 점만은 다른 현무경과 달랐다. 납작한 가죽으로 만든 붓으로 여러 빛깔의 글씨와 그림을 겹쳐서 그리는 혁필화(革筆畵)였는데, 증산은 특이하게도 색을 넣지 않고 검은 먹만으로 그렸다. 글과 그림이 다른 현무경에 비해 대형일 뿐 아니라 매우 치밀하게 그려져 있다.
용화도 떠돌던 축소 복사판만 접했을 뿐 말로만 들어오던 진본 현무경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친필 유서와 함께 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용화는 번개를 맞은 듯 눈이 번쩍 뜨이고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렸다. 용화는 즉시 골방을 박차고 나왔다.

봄이 왔다고 하지만 바람은 아직도 쌀쌀한 겨울인 3월초였다. 용화는 한 인물을 만나기 위해 금산사에서 원평읍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어 내려갔다. 푸른 물이 넘실대는 호수가 보였다. 모악산의 물을 가둔 농업용 원평 저수지가 내륙의 바다 같았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넘실대는 물결이 가슴을 탁 트이게 했고, 멀리 호수 가운데는 물오리 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호수는 동곡마을로 통하는 입구였다. 근처에 동곡약방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증산이 천지공사를 보았다고 책에 나오는 약방이 아직도 실존하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스승의 이름 ‘동곡’도 여기서 딴 이름이었다.
용화는 약방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마을 맨 위쪽에 있는 집을 찾아 올라갔다. 모악산 깊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도랑을 끼고 한참 올라가니 허름한 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마을과 그리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마치 깊은 산속에 둥지를 튼 암자 느낌이었다.

“계십니까?”

반응이 없자 마당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문홍 선생님!”
두 번째로 소리에 방문이 열리더니 키가 크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노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노인의 눈매가 평범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문홍 선생님이 맞으신지요?”
“그렇소만, 어디서 오셨는지요?”
용화는 자초지종을 말하고 노인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방안에는 책장이 두어 개 있고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개중에는 용화의 눈에 익은 몇 권 눈에 들어왔지만, 처음 보는 책들이 더 많았다. 아마 증산관련 도서나 경전들은 모두 완비되어 있는 듯했다.
용화의 눈은 현무경과 유훈을 찾고 있었다. 깊숙이 숨겨져 있는 듯 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늑한 방안은 온화한 기운이 뭉쳐 있어 새둥지처럼 안락했다.

“그래 미륵 공부를 하려고 왔나요?”

문홍은 용화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 형식적인 말을 피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용화는 가지고 온 책들을 꺼내 놓았다.

“이 책들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요….”
“그래요? 허허….”

우물쭈물하는 용화를 보는 문홍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용화는 현무경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문홍 선생이 그런 성스러운 물건을 호락호락 내놓을 성싶지 않았다.
사실 문홍은 용화의 방문 목적을 첫눈에 알아챘다. 이런 산골에 자신을 물어물어 찾는 이들은 백이면 백 현무경 때문이었다. 말은 친절했지만 문홍은 용화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심지를 재보고 있었다.

“이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인연이라면?”
“상제님과 인연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문홍은 잘라 말했다.

“상제님이라뇨?”

용화는 엉겁결에 말을 되받았다.
“증산 상제님 말이에요.”
“….”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나요?”
“그게 아니고….”

용화는 얼버무렸다. 그가 그동안 공부한 바로는 증산 선생은 금산사 미륵불이었다. 동곡 스승 또한 이를 전제로 현무경을 풀이했었다. 증산의 언행을 다룬 많은 경전에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 금산사 미륵불은 손에 여의주를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같이 증산이 금산사 미륵불임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혹시, 증산께서 금산사 미륵불이 아닌가요?”

용화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흐음….”

문홍은 깊은 신음을 토한 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찬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마당을 쓸었고, 창호지 문이 바르르 떨렸다. 문홍은 거두절미하고 대못부터 박았다.

“결론만 말하지요. 증산 어른은 미륵불이 아니고 옥황상제님입니다. 절대자 하느님.”

용화는 토끼같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책에는 미륵불로 되어 있던 것 같은데….”
“책을 얼마나 보셨수?”

책이라면 볼 만큼 보았고, 스승인 동곡의 비기까지 전수 받은 용화였기에 속으로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문홍은 빤히 용화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강렬했다.

“무슨 증거로 그렇게 단정 짓습니까?”

이번에는 용화가 강하게 밀고 나갔다.

“허허허. 금산사 미륵불을 찾으라 했지, 증산 어른이 미륵불이란 말은 없을 텐데요, 허허허.”

문홍은 기가 막힌 듯이 웃기만 했다.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구릿골의 한겨울 분위기는 적막했다. 어디선가 기러기 떼가 끼룩거리며 북쪽 하늘로 열을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한바탕 설전을 벌인 용화가 마당에 나와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상념에 잠겨 있으려니 문홍이 다가왔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돌아가도록 해요.”
“….”

뭔가 정보를 주겠다는 허락의 신호였다. 문홍이 손가락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산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저 산을 보시오. 오로봉(五老峰)이라고 하지요.”
“오로봉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선생님?”

용화는 이미 호칭을 선생님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었다.

“다섯 개의 권위 있는 산이라는 뜻이지요. 구릿골을 중심으로 5개의 산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쌓고 있는데, 이 마을에서 상제께서 천지공사를 보신 것입니다. 즉 이곳이 천지공사(天地公事)의 기지가 되는 셈이지요. 그나저나 천지공사가 무슨 뜻인 줄 아시나요?”
“미래를 설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천지공사란 하늘과 땅의 운행질서를 개조하여 바꾼다는 뜻이지요. 천체가 운행하는 질서, 즉 해와 달과 별, 그리고 28숙이 기존의 운행하는 법도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길(路)로 변경시켜 운행시킨다는 의미로, 지구상에 다가올 미래 역사의 프로그램도 다시 설계하여 그 도수(度數)대로 역사가 진행되도록 공사한 것을 말합니다. 이적(異蹟) 중의 이적이 천지공사지요.”

천지공사가 무엇인지쯤은 용화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다만 다가올 후천에 펼쳐지는 그 천지공사의 도수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게 관심사였다. 문홍이 소장한 천문을 친견하고 싶어 조바심이 일었다. 그런 용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홍은 구릿골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있었다.

 

증산이 남긴 유서-3

“상제께서 남긴 말씀 중에 세계유의차산출(世界有意此山出)이라는 글이 있는데, 세계가 뜻이 있어 만든 산이라는 의미이지요. 여기에서 이 산은 곧 모악산을 비롯한 오로봉을 의미한 것입니다.”
“권위 있는 산이라뇨?”
“다섯 봉오리의 산신(山神)들은 곧 신선(神仙)들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천지공사의 핵심기지이기 때문이지요.”

일러스트: 나은진


책으로만 보다가 직접 현장에서 확인을 하니 그동안의 공부가 옹색함이 그지 없었구나 하는 한숨이 나왔다. 용화는 문홍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귀를 기울였다. 이 노인은 증산에 대해서 무언가 깊은 비밀을 아는 것 같았다. 선생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상제께서 남기신 시문(詩文) 중에는 이런 글도 있지요. ‘삼인동행칠십리(三人同行七十里) (3인이 동행하여 70리를 가고), 오로봉전이십일(五老峰前二十一) (오로봉 앞에서 21자가 내려온다). 여기에서 오로봉이 나오는데, 구릿골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5개의 산들을 뜻하는 것이지요.”
“3인이 동행하여 70리를 간다는 뜻은 무업니까?”

용화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이실직고 하는 문홍 선생의 진솔한 성품에 용화는 더욱 믿음이 갔다.

“이 시문은 상제께서 남기신 현무경 중의 신장공사도(信章公事圖)라는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겠지요. 21수리도 아직 수수께끼지요.”

그의 입에서 현무경(玄武經)이란 말이 처음 나왔다.
문홍의 설명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도대체 이 노인이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는지 용화는 놀랍기만 했다.
간소하게 내온 저녁을 물리자, 문홍이 어디선가 야생 열매주를 내왔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밑도 끝도 없는 도담(道談)을 나누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 가는데 두 사람의 술잔은 주거니 받거니 끊이질 않았다. 술이 들어가자 조심스런 마음도 없어지고 취기가 돌아 호기로운 마음이 생겼다. 용화가 불그스레한 얼굴로 당당하게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증산께서 옥황상제님이란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정말로 증산께서 하느님이란 말입니까?”

문홍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내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문서를 하나 보여주지요. 아마 당신이 인연인 것 같소.”

문홍이 열쇠를 채운 다락방 벽장문으로 다가갔다. 귀중품을 보관하는 두터운 철제 금고가 보였다. 철걱 소리를 내며 열쇠가 입을 벌렸다. 차곡차곡 쌓인 오래된 문서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문홍이 두개의 두루마리 족자를 꺼냈다.
문홍이 조심스럽게 작은 족자를 벽면에 걸어 펼쳤다. 노란색의 한지에 쓴 가지런한 한문 족자는 ‘기초동량(基礎棟梁)’이란 글로 시작하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소?”

용화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자라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문홍이 이번에는 큰 족자를 걸었다. 족자는 과감하게 아래로 떨어져 펼쳐졌다.

“앗!”

용화는 순간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다시 한 번 자기 눈을 의심했다.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었다.

“증·산·선·생·유서(甑山先生遺書)!”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문홍 선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두 눈으로 보다시피 천문(天文)이지요. 상제님의 유서란 말입니다.”
“이런 게 어떻게….”


인류 최초로 원한 맺혀 죽은 영혼, 단주(丹朱)-1

생전에 증산은 부적이나 현무경을 그려서 천지공사를 보았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공사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모두 불태워 없애게 했다. 알려지기로는 제자인 차경석에게 남겨진 현무경 묶음은 한권뿐이고, 이마저도 멸실되고 흩어져 세간에 돌아다니는 30여장의 현무경은 늘 진위논란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친필 유서가 남아 있었다니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만약 이것이 진본이라면 현무경을 둘러싼 분분한 해석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 증산의 본뜻이 드디어 온 천하에 온전하게 세상에 드러나는 역사적인 순간이 아닌가. 용화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작은 족자는 상제님께서 친히 쓰신 유서인데 ‘감결문(甘結文)’ 또는 ‘미륵탄생공사서’라고 하지요. 감결문에는 상제님께서 직접 손가락으로 19군데 혈을 찍으셨지요. 큰 족자는 단주수명서(丹朱受命書)라고 합니다. 상제님이 아니라 수제자인 김형렬이 쓴 것으로 추측해요. 여기 김형렬의 도장인 12지신 인장이 뚜렷이 찍혀 있지요. 경전을 공부했다니 이런 공사를 했다는 구절은 읽어 보았을 겁니다.”

사실이었다. 책에는 갑진년(1904년) 음 10월 8일 증산이 수제자 김형렬의 딸과 혼인한 날 천지공사로써 인연을 맺게 하여 수부공사(首婦公事)에 참여토록 한다고 되어 있었다.

“바로 그날 상제님과 김형렬이 한 자리에서 각각 작성한 천문이지요.”

용화는 홍두깨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믿기지 않는 자신의 의심을 털기 위해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질문공세를 벌였다.

“그런데 왜 유서가 두 개입니까? 문장의 길이에서 차이가 있는데요?”
“이 두 장의 유서는 한 날, 한 시, 한 자리에서 쓰인 것이지요. 진위를 세상에 공증하기 위해서지요.”
“공증이요?”
“일종의 증인 진술서지요. 상제님은 요점만 쓰고, 김형렬은 구구절절 다 받아쓰고. 하지만 해석은 일맥상통해요. 그러나 도수는 달라요. 상제님께서 각각마다 달리하는 도수를 숨겨 놓았으니까요. 한문 해석은 쉬워요. 문제는 숨겨진 도수지요. 그걸 풀어야지요.”

용화는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공연히 술잔을 받아 정신이 혼미하게 된 것을 자책했다. 아니 어쩌면 문홍이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더욱 악물었다.

“자, 여길 봐요. 단주수명서에는 상제님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온 사유가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어요. 즉, 현대문명은 물질과 사리에만 정통하여 인류의 교만과 잔폭을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써 모든 죄악을 거리낌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사계(四界)가 혼란하여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도수를 어기었다는 내용이 있지요?”

문홍은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단주수명서를 설명했다.

“그러자 서양사람 마테오릿치 신부가 지상에 있는 모든 신인(神人), 성인(聖人), 불타(佛陀)와 보살들을 데리고 구천(九天)에 올라와서 옥경에 계신 하느님께 고하기를,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을 치료할 일이 시급함을 하소연하므로 상제께서 인간세상에 내려오셨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러자 상제께서 <서천서역 대법국 천계탑>을 통하여 지상에 내려와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에 임하여 신미년에 인간의 몸으로 현신하여 오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왜 단주수명서라고 합니까?”
“단주(丹朱)는 인류 최초로 원한 맺혀 죽은 영혼이지요. 단주는 당시에 천하를 대동세계(大同世界)로 만들려는 원대한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모함으로 죽었어요. 그 모함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단주 알기를 권력에 눈이 어두워 골육상쟁을 저지른 패륜아로 생각하고 있어요. 상제님께서는 이분을 가장 먼저 해원하셨습니다.”

 

인류 최초로 원한 맺혀 죽은 영혼, 단주(丹朱)-2

“그럼 미륵탄생공사서는….”


문홍은 용화의 말을 가로막았다.

“네, 바로 단주가 미륵이지요.”

점입가경이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상제님께선 미륵으로 현생케 하여 단주의 원한을 푸는 공사를 하신 겁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천하의 대중화국(大中華國)이 되므로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일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문홍은 그렇게 일사천리로 두 장의 유서를 해석해 내려갔다.
이미 술병은 바닥이 드러난 상태였다. 얼큰한 취기도 모두 가신 상태였다. 용화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문에도 있지만 미륵은 특정 종교를 말하지 않고 있어요. 유불선을 고루 섭렵하는 중용의 자세지요. 미륵이란 말 자체가 모든 것을 융합한다는 뜻이지요. 상제님을 특정 종교로 가두는 건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요. 처음부터 종교의 눈으로 본다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거지요.”
“…….”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천손민족(天孫民族)으로 알려져 왔어요. 말하자면 하느님의 직계자손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상제님도 우리 민족의 신분으로 우리나라 땅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살펴보면 환인(桓因), 환웅(桓雄)을 거쳐 단군(檀君)으로 이어진 역사상 계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요? 여기에서 말한 환인은 곧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이겠어요?”
“…….”
“상제님이 미륵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렇게 해서 증명이 끝났지요?”

문홍은 환인, 하느님, 증산을 같은 인물로 단정하고 있었다. 유불선을 넘어 단군까지 명쾌하게 일맥으로 관통한 문홍은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용화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천지공사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주어도 믿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지요.”
“…….”
“증산상제께서 9년여 동안 천지공사를 보신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 겁니다. 그 중의 일부가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혜성이 지구충돌을 하게 된 것을 미연에 방지하여 지구가 파괴되어 인류가 절멸하게 될 운수를 사전에 막는 공사가 있지요?”
“정말 그런 공사가 있었나요?”
“그럼요. 인류 파멸을 막는 공사이지요.”

용화의 두 눈이 놀라서 왕방울만 해졌다. 용화는 익히 증산의 천지공사를 책에서 익혔다. 하지만 문홍이 언급한 내용은 처음이었다. 용화는 공부를 모자라게 한 자신을 자책했다.
문홍은 이번엔 다른 책을 펼치더니 어느 부분을 용화에게 보여 주었다. 용화는 책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술신년(戊申: 1908년) 5월 하지(夏至)날 구릿골(銅谷)에서 수제자인 형렬에게 명하여 태인공사를 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문홍은 용화가 다 잃기도 전에 이야기를 해석을 놓았다.

“그날이 바로 1908년(戊申年) 하지날인데 양력으로는 6월 22일이고, 음력으로는 5월 24일이지요. 그로부터 7일 후에 지구와 혜성이 충돌하여 지구가 파괴되는 것을 막았지요. 1908년 6월 30일 새벽에 시베리아 퉁구스 지방에 큰 불덩이가 충돌했는데, 지구는 박살나지 않고 직경 몇 천 킬로에 달하는 지역에 화재가 일어나서 지상에 있는 모든 수목이 불에 탔다고 하지요. 그러나 인명피해는 안 나도록 그 불덩이가 인적이 드문 시베리아 지역에 충돌하도록 조치하신 것이지요. 만약 대도시 지역에 혜성이 떨어졌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겠지요.”
시베리아 폭발은 실제사건이었다. 놀라운 사실에 용화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놀랄 필요 없어요. 알고 보면 모두 상제님께서 이미 하신 일이니까요. 문제는 미래지요.”

용화는 다시 한 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랬다. 모두 지나간 과거사일 뿐, 그야말로 다가올 앞날이 진짜 문제가 아닌가.

“천문에 앞으로 벌어질 일이 기록되어 있나요?”

용화의 채근에 문홍은 지금까지 분위기와 달리 입을 굳게 닫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매우 중대한 사안임이 틀림없었다. 문홍의 표정이 하도 근엄하여 용화는 감히 더 이상 재촉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작심한 듯 문홍이 입을 열었다.

“이 두 장의 천문에는 앞으로 탄생할 미륵을 명시하고 있어요. 상제께서 미륵탄생공사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륵탄생공사라뇨?”

용화가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았다.

“상제께서는 장차 우리나라에 미륵을 파견하여 지상선경세계를 건설하도록 공사를 보신 기록이 있습니다. 장차 오실 미륵의 생년월일도 상제님께서 친히 기록하셨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

용화는 놀라워 입을 다물지 못했다. 궁금증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엔 용화가 문홍의 기분도 아랑곳 않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언제 탄생하시나요?”
“…….”
“혹시 이미 현생에 계시나요?”

한참을 뜸들이던 문홍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문에는 태어난 일시까지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요.”
“언제입니까?”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공부를 깊이 하여야만 되요. 어설프게 공부해서는 믿기지도 않고 확신도 안 들지요.”
문홍은 상체를 곧게 펴며 자리를 정리했다.

“자, 이제 그만합시다. 더 이상은 천기누설입니다.”

문홍은 처음 만났던 단호한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용화는 뒷간 갔다가 처리 못하고 나온 사람처럼 아쉬움으로 안절부절 이었다.

“혼자 공부해서 터득해야 해요. 스스로 알아내야 합니다.”

용화는 문홍의 냉엄한 어조에 아무리 졸라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구릿골 동녘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하얀 서설(瑞雪)이 내려 있었다. 눈꽃으로 수놓은 온 산천은 마치 설국에 온 기분이었다. 기분이 상쾌하고 공기도 청량하였다.
삼신산과 구성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은 아직 얼어붙지 않고 졸졸졸 노래했다. 그 맑기가 수정처럼 투명하여 언제든 지나가는 나그네의 목을 축일 수 있게 했다.
용화는 걸으면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안간힘을 썼다. 너무도 어마어마한 일들을 하룻밤 새 경험한 까닭이었다. 간밤의 일이 꿈결같이 아득하기만 했다. 혹시 꿈을 꾼 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손에 들려 있는 묵직한 서류봉투를 열어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봉투 안에는 문홍 선생이 건네준 천문 두 장의 복사본이 가지런히 접혀 들어 있었다. 용화는 천문을 가슴에 꼭 품고는 정읍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제령봉(帝令峰)에 서기(瑞氣)가 내리고-1
용화는 대흥리 제령봉 앞에 서 있었다. 고도는 높지 않지만 주변 산을 지휘하듯 이끌고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하얀 서설까지 머리에 이고 있는 제령봉은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용화가 이곳에 온 것은 문홍의 언질 때문이었다.

‘다가올 후천 선경세계의 수도는 대흥리에 있지요. 대흥리의 제령봉. 상제님께서 명령을 내린다 해서 제령(帝令)이 되었지요. 상제님께서 대흥리에 사는 제자 차경석의 집에서 천지공사를 본 기록이 책에 있어요. <제령봉의 흙을 13척 깎아내려 그곳에 장차 천하의 교당을 세울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지요. 그곳에 미륵국가인 ‘대시국(大時國)’이 세워지고 3천 개의 국가로 나눠진 천하의 3천 명의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 지구촌의 일을 보는 세계의 수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제령봉(帝令峰)에 서기(瑞氣)가 내리고-2

경건한 마음으로 제령봉을 우러러보던 용화는 가방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증산의 행적지 방문 때마다 찍어두는 사진이었다. 충전한 지 오래된 배터리가 경고등을 깜빡거렸다. 찍히든 말든 제령봉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다시 한 번 눌렀지만 이번엔 카메라 전원이 들어오질 않았다.
그렇게 제령봉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온 용화는 수집했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지?”

찍어온 사진을 점검하던 용화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며 갸우뚱했다. 마지막 사진인 제령봉 장면에 전혀 생각지 못한 풍경 때문이었다.
제령봉 정상에서부터 번개처럼 흰 빛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리 뻗어 있었다. 서설이 내린 제령봉에 서기가 내린 장면이 틀림없었다.

“정말 기이하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상서로운 징조였다. 문홍 선생에게 증산의 유서를 받아온 날 이런 서기가 내렸으니 말이다. 마지막 미륵 도수를 풀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도 용화는 혹시나 하고 사진 파일을 사진관에 들고 가서 감정을 요청했다. 요모조모 살펴보던 사진사는 먼저 용화부터 훑어보았다. 점잖은 사람이 거짓말을 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음… 카메라 메모리 고장이라면 저장된 사진 전체가 못쓰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디지털 카메라가 중간에 빛이 들어갈 리가 없고요… 필름 카메라라 할지라도 사진 중간에 이렇게 교묘하게 노출될 수는 없는데….”

사진사는 다시 한 번 용화를 위아래도 쳐다보면서 신중하게 감정을 마쳤다.

“혹시 뽀샵을 했을 수 있지만… 직접 메모리칩을 가져 오셨으니…. 제 생각엔 분명 사진에 찍힌 빛줄기네요.”

기이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용화는 인터넷 검색어에 ‘제령봉’을 쳤다. 최신 칼럼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제령봉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된 칼럼이었다. 키보드 방향키를 내리며 칼럼을 읽던 용화는 화들짝 놀랐다. 모니터 앞으로 눈을 바짝 갖다 댔다.
“이럴 수가!”

그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글의 칼럼니스트가 제령봉을 다녀갔다고 했는데, 바로 그 날짜가 자신이 방문한 날짜와 일치하는 게 아닌가. 간발의 차이도 서로 엇갈렸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한날 제령봉의 서기가 두 사람에게 내렸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용화는 칼럼의 작자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차진길’.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다. 용화는 진작부터 특출한 예언가로서 익히 차진길 법사의 명성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 뒤에 붙은 ‘법사’란 호칭에서 증산과는 먼 불교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문홍으로부터 입수한 증산의 유훈에 쓰여 있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턱 걸렸다.

佛之形體 仙之造化 儒之凡節. 天文 陰陽 政事 (불지형체 선지조화 유지범절 천문 음양 정사)

즉, 미륵은 불도의 형체를 하고, 선도의 조화를 부리고, 유도의 범절을 갖추었으니, 그 모든 음양정사가 천문에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증산의 친필 ‘미륵탄생공사서’에는 향후 미륵이 어떤 형태로 강림할 것인지 명시하고 있는 대목이었다.

“불도의 형체라….”

용화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무슨 계시일까? 차경석이 살던 마을에 나타난 차진길이라….’

용화는 증산 유훈 해석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한편 차진길의 행적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용화는 문홍 선생이 건네준 천문(天文)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마침내 스승도 풀지 못했던 미륵의 정체가 출생년도는 물론 성씨까지 용화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증산이 설계한 천지공사 도수를 모두 풀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가올 미래를 훤히 내다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러나 곧이어 거대한 허탈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앞일을 미리 안다고 생각하니 세상 살 맛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점점 깊은 허무의 늪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아무리 천기누설이지만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늘에서 내게 이 천문 해석을 내린 이유가 있을 텐데….’

그는 천문해석까지 인연이 된 것은 증산의 천지공사를 완성케 하는데 자신을 일꾼으로 쓰려는 징조라고 생각하자 막중한 사명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금산사 방등계단에 청룡이 내려오는 꿈을 꾼 것이다.

“아, 도수가 다 찼구나. 상제님의 열 석자가 시작된 게야. 때가 다 되었어. 그들을 찾아야 해.”

용화가 지난 기억에 잠겨 있던 그 시간, 차진길 법사는 시간에 쫓기며 선원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 바삐 오르고 있는 차법사 눈에 작달막한 키의 50대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런 핸드백을 끼고 두리번거리고 있던 아주머니는 차법사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아저씨, 여기가 법당 맞소?”

아주머니는 차법사를 몰라보고 있었다.

“네, 여기가 법당입니다.”

아주머니는 상대방이 더 말을 건넬 틈도 주지 않고 기관총 쏘듯 불평불만을 갈겨댔다.

“아니, 무슨 법당이 간판도 제대로 안 걸고 장사를 하고 그려. 그래도 절이라면 기와집을 짓던가, 아니면 새 빌딩을 하나 지어서 손님을 끌어야지. 목탁도 두들기고 새끼 중들도 서빙해서 손님을 안내해야 할 거 아냐. 백화점도 안 가보나.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이게 뭐야.”

아주머니는 미안스런 표정으로 눈만 끔뻑이는 차법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떠벌렸다.

“아예 주차장도 없어. 차법사인가 뭔가, 하도 신통하다길래 몇 달을 기다려 찾아왔더니 이 모양이네그려. 손님은 왕인데 이렇게 엉망으로 장사를 해도 되는 거야. 어떻게 할라고 그래. 그런데도 사람들이 줄서는 거 보면 참 신통하긴 하나보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씬 여기 뭣 땜에 왔수? 마누라가 바람이라도 났수? 보아하니 신수가 훤하고 빙글빙글 웃는 걸 보니 작은 마누라라도 생겼나?”

아주머니는 차법사 관상까지 읊어댔다.
차법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 실수하는 일에는 익숙해 있다. 앞날을 귀신처럼 알아맞히고 영혼과 소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허연 수염 쓰다듬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나이 지긋한 노도사가 근엄하게 앉아 있을 거라고들 생각했다.
한번은 장안동에 살 때, 지방에서 올라왔다며 한 노인이 찾아왔다가 떠꺼머리총각 차법사를 보고는 ‘아버님 어디 가셨냐?’ 하고 물어서 ‘출타했다’고 하니, 한참을 기다리다 되돌아간 적도 있었다.
차법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차진길.’

아주머니는 명함을 앞뒤로 돌려보더니 또 입방아를 찧었다.

“차진길? 이 절의 주지스님 차씨하고 성씨가 같네. 그런데 어떻게 회사이름도 없고 전화번호도 없이 달랑 이름 석자뿐이유? 무슨 사업을 하슈?”
“그냥 이것저것…….”
“아, 사채업하슈? 손도 솥뚜껑 만해 가지고……. 내가 아는 깍두기 아저씨들도 명함이 이렇더만.”

아주머니는 핸드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차법사에게 건넸다.

‘애영실업 대표 최옥자’

“내가 각종 옷감을 남대문시장에 대는 일 하고 있고, 빌딩도 몇 개 있수. 옷감 싸게 맞추려면 나한테 연락하쇼.”
차법사는 그러마 하고 아주머니를 앞세우고 선원문을 열었다. 기다리던 선원식구들이 차법사를 알아보고 공손히 합장을 했다.
아주머니는 웬일인가 싶어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엉거주춤하게 차법사를 바라봤다.

“혹시, …에구머니나!”

 

제령봉(帝令峰)에 서기(瑞氣)가 내리고-3

“아까 명함 드렸는데….”
“그람 처음부터 ‘여기 주지입니다’ 하고 묵직하게 무게를 잡고 목소릴 깔아야지, 그리 히죽히죽 웃어 싸면 어찌 안다요. 그나저나 이걸, 이걸 어째쓰까, 잉.”
“제가 여러 가지 일을 하긴 하는데 사채업은 안합니다, 최여사님.”


차법사는 안절부절못하는 아주머니를 진정시키고 모인 사람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자리가 협소해서 죄송합니다. 보통의 법당이나 선원은 신도들에게 개방 되어 있지만 이곳은 저의 수행도량이기 때문에 크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만의 도심 속의 암자입니다. 오늘은 단지 면담신청자들을 위해 한 달에 몇 번만 날을 잡아 개방한 날입니다. 저는 신도들이 모이는 걸 꺼려하는 병이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그는 윗 양복을 벗고 병풍 뒤로 자리를 잡았다.
뒤쪽에서 용화가 유심히 차법사의 면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6척이 넘은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두툼한 손이 천상 무골(武骨)이었다. 약하게 쌍꺼풀진 부드러운 눈매에 주먹코가 우뚝하고 입술은 두툼했다. 선이 굵고 모나지 않는 관상이었기에 언뜻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쌀집 아저씨 같았다. 단지 목소리가 큰 강물 흐르듯 웅장한 울림이 있고 청명한 쇳소리가 묻어나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용화의 예상은 또 한 번 무참히 빗나간 것이다. 비바람을 부르고 귀신을 부린다는 차법사 명성이라면 초탈한 눈빛으로 긴 수염에 나이 지긋하며 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기풍은 갖추어야 하지만 근엄한 허연 수염의 도인은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용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에게 대체 무엇이 신통해서 차법사, 차법사 하는 것일까? 차법사에 대한 언론기사들과 평판은 모두 사실일까?’


중생 면담-1

20평짜리 선원은 속속 도착한 사람들로 얼추 100명쯤 북적거렸다. 넓게 쓰기 위해 벽 없이 탁 트인 원룸이었지만 1백 명이 뿜어내는 탁한 공기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병풍 뒤의 차법사는 한 중년 가장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있었다.

“법사님 집 좀 팔게 해주세요.”

그는 무리한 주식투자로 은행 빚을 지게 되어서 물려받은 마지막 재산인 집을 팔아 부채를 갚으려 했지만, 집이 통 팔리지 않아 은행이자와 원금 독촉에 차압통지서를 받은 상태였다. 경매로 집이 팔린다 해도 은행 빚을 모두 갚을 수 없는 처지였다.
차법사는 혀를 끌끌 찼다.

“어쩌다 그랬어요. 어린 자식이랑 모두 거리에 나앉아야 하잖아요.”

가장은 아이처럼 뚝뚝 눈물을 떨어뜨렸다.

“제 몸 하나 옥살이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허나 처와 어린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 할 제 빚인데요.”
“내가 한 2억 빌려줄테니, 급한 빚 갚고 작은 월세라도 얻어 새로 시작하세요.”

2억이란 말에 가장은 눈이 동그래졌다.

“고맙습니다, 법사님. 꼭 갚겠습니다.”
“대신 현금으로 주는 건 아닙니다. 영계(靈界)에서 주는 보이지 않는 돈이에요. 집 팔리고 돈이 들어올 겁니다.”

반신반의했지만 돈이 생긴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잊지 말세요. 이 돈은 은행돈보다 무서운 돈이에요. 당신 복(福)이 아니라 빌려온 운(運)이니까 돈 생기면 나중에 꼭 불사하세요.”

현금이나 채권이 오간 건 없었다. 그저 차법사의 구두 약속뿐이었다. 그렇지만 중년의 가장은 그 말을 굳게 믿었다. 보이지 않는 돈을 빌린 그는 큰 절을 하고 물러갔다.
30대 초반의 회사원이 차법사 앞에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다른 사람처럼 조급하거나 울상으로 사정하지 않았다. 회사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법사의 눈이 매처럼 번뜩였다.
회사원 뒤에 누군가 따라 들어와 있었다. 웬 할머니 영가였다. 할머니는 애가 타서 차법사에게 사정했다.

‘법사님, 제 손자놈 좀 살려주세요.’

돌아가신 회사원의 할머니였다. 청년은 눈만 끔뻑일 뿐 영가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차법사의 영안(靈眼)에만 보이는 영가였다. 차법사는 염력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할머니 손자세요?’
‘네. 제 하나밖에 없는 손자놈이에요.’
‘그런데 어쩐 일로 이렇게 손자를 데리고 오셨어요?’
‘이 녀석이 글쎄, 빚 때문에 애인도 잃고, 죽을 마음을 먹고 있어요. 약까지 먹으려고 작정을 했어요. 제발 하나밖에 없는 손자 살려주십시오.’

할머니 영가는 넙죽 무릎을 꿇고 눈물로 하소연했다. 청년을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건 할머니 영가였다. 죽어서도 애지중지 손자의 뒤를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처사님, 이제 안주머니에 있는 약봉지 꺼내시지요.”
차법사의 말에 청년은 흠칫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그는 주섬주섬 수면제 수백 알이 포장된 비닐 주머니를 꺼냈다. 이 약국 저 약국 기웃거리며 며칠간 사 모은 약이었다. 오늘 밤 소주와 함께 들이킬 생각이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법사님, 제 월급은 이백만원인데, 빚은 산더미 같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습니다. 제가 이제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누구나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패하게끔 되어 있다구요?”
“그럼요. 아무리 성공한 사업가라도 결국 죽지 않습니까.”

청년은 곱게 자라면서 성공의 야망을 키워왔다. 좋은 학벌에 승승장구했지만 한 번의 실패에 그만 좌절하고 만 것이다. 성공의 환상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보세요. 결국엔 뼈만 남은 거대한 물고기를 낚아 올리잖아요. 실패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의 컨셉이죠. 왜 성공하려고 하는지 생각해보셨어요?”
“떵떵거리고 살려 그러는 거지요.”
“성공이란 자기가 잘 살려고 성공하려는 것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나 자신을 위해서 사세요. 성공해도 내 삶이고 실패해도 내 삶이지요. 세상을 살아지지 말고, 살아가세요. 영혼이 있다는 것은 믿으시죠?”
“그럼요. 법사님 책을 보면 육신에 영혼이 들어 있다고 하셨잖아요. 죽어도 끝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다시 태어날 때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달라는 겁니다.”

딱한 양반이었다.

“다음 생에 다시 잘 태어난다고 하셨지만, 삶을 포기한 지금의 과보 때문에 다음 생에는 지금보다 몇 십 배는 더 큰 고통일 텐데요.”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쉬었다.

“조금만 더 견디어보세요.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좋은 비방을 하나 가르쳐드릴게요.”

그는 비방이란 말에 금세 환한 표정이 되었다.

“저도 실패를 많이 하는데 그때마다 저도 그렇게 합니다.”
“법사님도 실패하는 게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젊은 시절 꿈인 경찰도 못 되었고, 공무원도 퇴사해야 했고… 제가 이루려는 모든 것은 전부 실패했어요. 오죽했으면 전국을 헤매며 만행(萬行)을 다녔겠어요.”
“법사님, 그게 뭡니까? 그 비방이요?”

차법사는 잠시 간격을 두었다. 그리곤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웃으세요.”

회사원은 다소 실망한 듯 차법사를 바라봤다.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인생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괴로워할 때, 그런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번 웃어 보세요. ‘이것이 인생이야.’ 하고 크게 외치시구요.”
“웃을 일이 있어야 웃죠.”
“인생 살면서 웃을 일이 얼마나 되겠어요.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웃을 일이 생기는 겁니다. 내 세상이지 어디 남의 세상입니까?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긴 하죠.”
“자기가 먼저 웃어야 세상이 밝아지는 겁니다. 억지로라도 웃으세요.”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조금만 참으면 곧 일이 풀릴 겁니다.”

차법사는 사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차법사는 사과를 꾹꾹 눌러 기를 넣어 잘라서 청년에게 전해주며 할머니 영가를 바라보았다.

 

중생 면담-2

“그리고 어렵다고 할머니 제사 건너뛰지 마세요. 손자가 이런 걸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저를 참 많이 귀여워하셨는데….”

일러스트: 나은진

할머니 영가의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몇 번이고 차법사를 향해 허리를 굽혀 감사의 표시를 했다.
다음에 들어온 면담자는 기품 있는 여교수였다. 차법사는 그녀를 보자마자 가슴이 턱 막혔다. 역시나 단아한 몸가짐과는 달리 그녀는 청문회에 온 듯 질문을 연발했다.

“법사님, 저는 저명한 고승들 아래서 법문을 듣고 전 세계 종교경전도 연구했어요. 과연 저의 연구가 제대로 된 것인지 점검하러 왔습니다. 법사님께서는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또한 도란 무엇인가요?”
“교수님께서 지금 물으신 것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다 나올 텐데요. 이곳은 버리는 자리지 채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네요.”
“왜요? 인터넷은 얕은 지식에 불과해요. 법사님께선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수십 년간 구명시식을 하셨잖아요.”

인터넷보다 생생한 고급정보를 알고 싶다는 뜻이었다. 차법사는 여교수에게 물었다.

“미국사람이 한국의 ‘묵은지’ 맛을 알까요?”
“물론 모르겠지요.”
“삭힌 홍어 맛을 알까요?”
“저도 아직 그 맛도 모르는데요. 호호.”
“묵은 지를 책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비디오로 찍어서 보여준다고 그 맛을 알까요?”
“모르죠.”
“맞아요. 그런다고 맛을 알 리 없겠죠. 만약 책 설명에 ‘오렌지만큼 시다’고 해설해 놓으면 묵은 지를 먹어보지 않은 미국인은 ‘오렌지 맛이 난다’ 하고 평생을 기억할 것이고 남에게도 그렇게 전하겠지요. 그것이 전해지고 전해져서 ‘묵은 지는 오렌지같이 시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요.”
“그게 지식입니다. 교수님께서 직접 맛보세요. 진리, 도, 인생, 영혼을 남에게 전해 들어서 어떻게 아시겠어요.”
“어떻게 모든 것을 경험합니까? 지식으로 확장하는 것이지요. 그런 방식으론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잖아요.”
“교수님,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면서 어떻게 남에게 묻습니까?”
“…….”

차법사는 어리둥절해하는 여교수에게 친절하게 해설했다.

“지금 묻고 있는 죽음, 도를 모르는데 제가 해설한들 어떻게 알겠어요. 묵은 지 설명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되어봐야 그 사람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죽는 사람 심정을 산 사람이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겪어도 힘든데 저한테 물어서 어떻게 알겠어요. 직접 맛보고 들어와 보시면 될 텐데.”
“법사님 말인 즉, 배워서 알 수 있는 건 없다는 결론이네요.”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자가 가장 많이 아는 자가 아닐까요?”
“…….”
“허허허, 아는 자는 알기에 말이 없고, 모르는 자는 몰라서 말이 없는 겁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교수는 다시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그래도 저보다 많이 아실 것 아닙니까? 어떻게 맛을 보는지 방법을 알려주셔야지요.”
“왜 에베레스트 산을 고생고생하며 올라가겠어요. 헬기로 휙 갔다 오면 되는데. 자기 발로 자기 인생을 살아야 자기 인생이지요. 사금을 캘 때 수많은 물과 흙을 버리잖아요. 버리는 건 지식이고 남는 건 지혜입니다.”
“하지만 스님들도 ‘이 뭐꼬?’ 하며 공안 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허허허.”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머릿속 논리로 파고드는 여교수의 습성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한 가지만 알려드릴 게요. 아니 힌트라고 해두죠. ‘이 뭐꼬?’란 남에게 묻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겁니다.”
“그런가요?”
“교수님께 딱 맞는 ‘이 뭐꼬?’ 수행법이 있긴 있습니다만….”
“그게 뭐지요?”

여교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무언가 하나 건져가겠구나 잔뜩 기대가 부풀었다.

“묵언수행입니다.”
“네에?”
“남에게 묻는 습관을 버리고 자신에게 물으세요.”
“잘 알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또 잃으신 겁니다.”
“네? 알았다고 한 것뿐이었는데요?”
“스스로 물어서 답을 얻은 게 아니라 제 말을 들어서 아셨잖아요.”
“아, 그러네요. 아차차 또… 호호호.”
“달이 어떻게 생겼는지 앞사람에게 묻지 말고 직접 머리를 들어 밤하늘을 보세요.”
“잘 알았습니다. 아니, 이것도 들어서 알았으니 내가 안 것은 아니겠네요.”
“도란 것은 언어가 끊어진 곳, 즉 언어도단의 입정처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도를 소리 내어 묻는 자는 이미 ‘도’를 알 수가 없지요. 도란 글자가 ‘도’가 아니란 걸 알면 이미 ‘도’를 아는 것이기에 물을 리가 없겠지요. ‘도’를 모르기 때문에 도를 묻는 겁니다. 그런데 도를 모르는 자에게 도를 설명한들 어찌 알겠습니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 모두 헛소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깨달은 자의 헛소리는 아무리 험한 욕일지라도 진리가 되지만, 깨닫지 못한 자가 아무리 거룩한 법문을 해도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
“동서남북은 자기 서 있는 방향에서 결정됩니다. 정답이란 것은 없지요.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고사성어 아실 겁니다.”
“네, 물론이지요. 움직이는 배에서 칼을 떨어뜨리자 그 자리를 배에 표시해서 찾는다는 뜻이죠.”
“네,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 보지 말고 자기 자리에서 보세요.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기가 선 자리를 알아야겠지요.”
“…….”

여교수는 그 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만약 제가 ‘도는 무엇이다’라고 한 마디 던지면 교수님께선 그게 도라고 생각하실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침묵하거나 모른다고 쌀쌀맞게 거절한다면 분명 교수님께선 교수님 시각으로 ‘차법사란 사람, 아는 게 없더라’ 이렇게 생각하실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말을 해도, 말을 안 해도 이미 도와는 십만 팔천 리 멀어지게 되어 있으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겠어요. 애초에 그런 질문이 없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을 텐데요. ‘왜요?’ 이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업을 지은 것이겠어요.”
“…….”
“그래서 부처님은 돌아가실 적에 ‘49년 동안 설한 바가 없었다’고 하며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스스로 불을 밝혀 찾아가라’고 하셨잖아요. 자신에게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겁니다.”
“…….”
“교수님께서는 제가 구명시식을 통해 이승과 저승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으셨겠지만, 생(生)을 모르는 자가 어찌 사(死)를 알겠어요. 생사를 맛보지 않은 사람에게 ‘생사일여(生死一如)’란 지식이 얼마나 독이 되겠어요.”
“…….”
“제가 시 한 수 적어드릴 테니, 선지식(禪知識)으로 삼으세요.”

차법사는 종이에 글을 적었다.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 단소를 손에 쥐고 오는 이가 있다면 / 굳이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이른 새벽에 홀로 앉아 향을 사르고 / 산창에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 굳이 불경을 아니 외워도 좋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한 물로 화분에 물을 적시며 / 난초 잎을 손질할 줄 아는 이라면 / 굳이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저문 봄날 지는 꽃잎을 보고 / 귀촉도 울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라면 / 굳이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 바랑을 매게 하고 /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 굳이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해 저문 산야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물을 것도 없이 / 굳이 오가는 세상사를 들추지 않아도 좋다.

물끄러미 읽어보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생 면담-3

“그런데 법사님, 이 선시의 숨은 뜻이 있나요?”

습관적으로 또 질문을 하고 만 여교수에게 차법사는 기가 막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교수는 화들짝 그런 자신에 놀라며 고개를 젓는다.

일러스트 : 나은진


“아이고, 죄송합니다. 또 개 버릇 남 주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껄껄 웃었다. 여교수는 ‘왜요?’병에 걸린 자신을 보고, 차법사는 그런 장면 속의 두 사람을 보고 그렇게 웃고 말았다. 그 순간이야말로 서로 말없이 마음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이번엔 머리가 희끗한 반백의 차분한 몸가짐의 아주머니였다.

“법사님, 저희 남편이 연구원 정년퇴직을 했는데….”
하지만 차법사는 귀에 아주머니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주머니 어깨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총소리와 화약 냄새, 그리고 아우성치는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남편께서 몸이 아프시죠?”
“어머? 어떻게 그걸….”
“복부쪽이요. 병원에 가도 잘 낫지 않고.”
“어머, 맞아요!”
“구명시식을 하셔야겠네요.”
“정말이요?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구명시식인데… 고맙습니다!”

아주머니는 이렇게 쉽게 구명시식을 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처럼 쉽사리 구명시식을 올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구명시식 신청합니다.”

현직 공무원이라고 밝힌 사내는 들어서자마자 대뜸 구명시식을 요청했다. 차법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안 된다는 겁니까?”

공무원은 조목조목 따질 기세였다.

“병원에 가면 약만 받아오는 환자가 있고, 응급실에 들어가는 환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약만 먹어도 되는 환자에게 응급실 입원시켜 수술을 하면 되겠습니까. 구명시식은 영혼의 응급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약만 드셔도 될 정도인데요.”
“그런가요? 그래도 법사님이 하시는 구명시식에 참가하고 싶은데요.”
“의사가 수술실 구경시키는 것 봤나요. 제가 기를 넣은 사과를 하나 드릴 테니 좋은 일 생길 겁니다.”

공무원은 차법사의 기가 들어간 사과를 받고 자리를 나왔다.


당신이 차천자(車天子)요-1

용화는 차법사의 면담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켜볼수록 신기한 점이 있었다. 차법사가 앉아 있는 병풍 뒤로 들어간 면담자들은 기껏 3분, 길게는 10분 만에 일을 보고 나왔을 뿐인데 면담자들이 병풍 뒤에 다녀오면 표정이 180도 바뀌었다. 서럽게 흐느끼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해맑게 웃으면서 나오는 자도 있었다. 대체 병풍 뒤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용화선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용화님. 들어오세요.”

드디어 그의 차례였다. 용화는 조심스레 책 보퉁이와 족자를 가슴에 안고 병풍 뒤로 걸어 들어갔다. 차법사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선풍의 기운이 강렬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주저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전생에 증산 공부를 하셨군요?”

차법사의 첫마디에 용화는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용화는 정신을 가다듬고 가져온 천문(天文)을 내밀었다.

“법사님, 이것 받으십시오.”

용화는 차법사 앞에 다짜고짜 책 보퉁이와 족자를 내놓았다.
“이게 뭡니까?”
“상제님의 천문을 받으시겠습니까?”
“상제님은 뭐고 천문은 뭐지요?”
“저는 모악산 구릿골에서 온 용화라는 사람입니다. 증산 상제님의 뜻을 받들어 미륵불을 호위할 도통군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책과 두루마리에는 현무경 석 점과 상제님의 유언 두 점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천지공사의 도수가 다 들어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올 터이니 부디 성심껏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면담자리에는 참으로 별의별 인간군상이 나타나긴 하지만 이렇게 차법사에게 다짜고짜 숙제를 안겨주는 이는 처음이었다.

“저도 증산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만, 왜 이렇게 귀한 걸 제게….”

용화는 가방에서 16절지 크기의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손상되지 않게 단단하게 코팅이 되어 있었다.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던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제령봉 서기가 찍힌 사진이었다.
용화는 차법사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이 사연을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법사님이 정읍 제령봉을 다녀간 날 저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서기가 내린 장관이 찍혔습니다. 제령봉은 증산의 제자 월곡이 살던 대흥리에 있지요. 보통일은 아닙니다. 법사님도 법사님의 전생쯤은 훤히 관(觀)하고 계실 테지요. 법사님께서 전생에 차천자(車天子)였기 때문입니다.”
“…….”
차천자의 호는 월곡(月谷)이요, 이름은 경석(京石)이다. 차천자는 증산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증산이 화천(化天)한 뒤, 29년간 일제강점기 600만 교도를 이끌던 보천교의 교주였다.
“월곡이 전생에 상제님을 보위했듯이 현생에서도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일꾼으로 나서야 합니다. 천지개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와서 천문에 대한 도담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엔 열석자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용화의 말투는 마치 문홍 선생처럼 변해있었다. 마치 용화가 문홍을 만나 가르침을 내리듯 그런 말투였다. 말없이 듣기만 하던 차법사가 입을 띠었다.
“열석자의 비밀이요?”

용화선인은 대꾸 없이 일어서 나가려 했다. 차법사는 용화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아이 머리통만한 사과를 하나 가져오게 했다. 차법사는 두툼한 손으로 사과를 가로로 쥐었다.

‘쩍-’

그 큰 사과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씨방을 가로질러 두 토막이 났다.

‘저 큰 사과를! 그것도 가로로… 대단한 손힘이군!’

차법사가 손가락 지문을 찍었다는 조약돌 프린팅 사진을 보긴 했지만 직접 눈앞에서 시범을 보니 더욱 실감이 났다.

“제 기를 넣은 겁니다. 몸부터 추스르셔야겠습니다.”

용화는 흠칫 놀랐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이 사내가 어떻게 자신의 지병을 훤히 알고 있다는 말인가. 차법사는 천진하게 말했다.

“참 희한한 일입니다. 월곡의 자료가 돌아온 날 하필 증산 선생의 천문을 받다니요.”
“월곡의 자료요?”

그랬다. 이날 오전에 차법사에게 소포가 하나 도착했는데 월곡에 관한 자료였다. 10년도 전에 절친한 교수 한분이 월곡 차경석에 대한 평전을 쓴다며 차법사에게 많은 자료를 구해간 일이 있었데, 그 교수는 책을 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해 동안 자료를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에야 반납한 것이었다.
차법사가 한 쪽에서 두툼한 책 보퉁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위에 빼곡히 메모된 글자와 밑줄 친 원고들이었다. 차법사는 용화에게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그 교수가 지은 책입니다.”

《차천자의 꿈. (부제: 시국(時國)의 한)》

표지를 본 용화는 번개에 맞은 듯 숨이 멈췄다. 등골에 전율이 흘렀다.

‘시국……제령봉 서기…….’

책을 받아든 용화는 전기에 감전된 듯 얼어붙었다. 자신이 어떻게 선원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3장. 경천동지(驚天動地)

국혼(國魂)을 불어넣을 때-1

2009년 7월 7일,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자리 잡은 지하 2층의 소극장. 간밤에 천둥번개가 콩 볶듯 하더니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차법사가 큰일을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곤 했다. 이번에도 차법사는 조용히 모종의 거사를 도모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차법사는 소극장에 제단을 마련하고 나라를 연 13분의 개국(開國) 열성조(列聖朝)영정을 정성스레 점검하고 있었다. 고조선 단군, 고구려 고주몽, 백제 온조, 신라 박혁거세, 가야 김수로, 고려 태조 왕건, 후고구려 궁예, 후백제 견훤, 발해 대조영, 조선 태조 이성계, 청의 누르하치, 대한제국 고종, 대한민국 이승만. 무대 좌우측에는 옥으로 조각한 단군 좌상 두 개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었다.
150여석의 자리를 가득 메운 동참자들은 대부분 선원 회원들이었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구명시식은 보통 밀폐된 공간에서 초대된 가족들만 동참해 올려지는데, 이렇게 공개된 무대 위에서 하는 구명시식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100일간이나 지속한다니 그 영문을 아는 이는 없었다.

일러스트 : 나은진

 

말쑥한 두루마기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차법사가 150여 명의 동참자들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대 위의 구명시식은 뭐고, 또 장장 100일간이나 한다니 그 이유가 궁금들 하실 겁니다. 하지만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이왕 여기서 저와 동참하신다면 알아서 믿지 말고, 믿어서 알아가세요.”

차법사의 일은 늘 퍼즐 같다. 처음엔 불쑥 던져진 한 조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로 긴밀하게 연관을 지으며 모양이 드러나는 퍼즐. 그건 고도로 머릿속에 계산되었다기보다 장애물을 만나도 끊임없이 그리고 유연하게 흘러 결국 물길을 만들어 찾아가는 흐르는 물과 같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

“그래도 힌트는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족 중심의 조상 구명시식이었습니다. 가령, 나의 아버지를 비롯해 동참자들의 돌아가신 가족 조상영가와 사건으로 인연 있는 주위 영가들. 그런데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전교 1등을 해도 아버지가 사업이 망하면 식솔들은 그 운명을 따라갈 수밖에 없잖습니까. 만약 국가의 운명이 달린 일이 발생하면 개인의 운은 거기 휩쓸려 갈 수밖에 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비장하기까지 했다. 단상이 있었다면 아마 주먹으로 내려칠 기세였다.

“그러나 이번 100일 구명시식은 다릅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구명시식이 아닙니다. 국혼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국혼이 사라지면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동참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법사 뒤를 이어 식을 진행하는 예불 스님이 무대 위에 올라왔다. 장정 두 아름이나 되는 큰 징을 들어올렸다.

‘부왕, 부왕, 부왕!’

극장을 붕괴시킬 듯 세 번의 천둥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가무단의 살풀이와 요령이 이어졌다. <선구자> 노래를 배경으로 대형 스크린에는 그간의 차법사와 회원들이 올린 미국 9·11테러 위령제, 일본 북해도 한인 강제 징용자 위령제, 백두산 일송정 위령제 등 크고 작은 위령제 장면이 주마등처럼 비춰졌다.
그때였다.

‘쿠르릉-’

갑자기 무대 쪽에서 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뭉게뭉게 흰 구름이 몰려왔다. 무대는 없어지고 순식간에 광활한 산맥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영안(靈眼)을 가진 차법사의 눈에만 펼쳐지는 광경이었다. 차법사는 긴장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차분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흰 구름이 걷히더니 흰 도복을 입은 6척 거구 사내가 나타났다. 살집이 있고 얼굴이 붉고 눈이 작은 젊은 사내였다.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태양을 쳐다보았을 때 눈부심처럼 차법사도 정면으로 눈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염력을 통한 대화가 오갔다.

‘어서오십시오.’

차법사가 공손히 예를 취했다. 사내는 차법사를 알아보고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중저음으로 예를 받았다.

차법사와 단군왕검은 초면이 아니었다. 이미 수십 년 전 구명시식 자리에 초혼된 바 있었다. 당시 나타난 단군의 영혼은 차법사에게 다짜고짜 ‘무릎을 꿇으라’고 호령했다. 차법사가 당황하자 ‘이런 일하는 것으로 말하면 내가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란 영혼을 부리는 일을 말한다.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로서 상상을 초월한 영능력였다.
단군이란 말도 몽골에서 왔다. 몽고어의 탱그리(천신)가 어원이다. ‘단군’은 영혼을 다스리는 샤먼(무당)을, ‘왕검’은 육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뜻한다. 즉 단군왕검은 ‘샤먼과 임금’이란 뜻이다. 지금이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있지만 고대만 해도 정치적 국왕과 종교적 제사장이 한 인물이었던 제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이다.
단군이란 말은 단골(당골)에서 왔다. 최남선 선생은 단골이 단굴과 혼동에서 오는 와음이라고 전제하고 ‘단굴’을 한자로 표기하면 ‘단군(檀君)’이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 단군은 우리가 쓰는 단골이란 말의 한자 표기다.
자주 가는 가게를 말할 때 ‘단골 가게’의 그 단골이다. 이 단골은 원래 마을의 무속 신앙을 주관하던 세습 무당을 일컫는다. 종교와 의술이 없던 그 예날 사람들은 무당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해 하루가 멀다 하고 단골집(무당의 집)을 찾았고, 지금의 단골이란 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실제로 전남의 진도에서는 세습무당을 단골 혹은 당골로 부르고 있다.
차법사도 구명시식을 행할 때마다, 이른바 설치고 힘이 세고 심술 사나운 영가를 만날 때, 그들이 덤비면 영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곤 했는데 단군은 어린 시절 아버지 차일혁 총경의 죽음 이후 차법사가 가졌던 영능력을 능가하는 힘이었다. 차법사는 얼떨결에 단군 영가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을 정도였다.
차법사는 구명시식에 나타난 단군과 대화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 상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환웅과 웅녀의 아들이 아니라, 중국 북부 만주 지방에서 먼저 청동기 문명을 발달시킨 부족의 한 명이었다. 특히 고아시아족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를 침략하는 데 앞장 선 전투부대 대장이었다.
단군 자신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서 환웅이 곰과 만나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이다’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한반도 북부를 평정한 단군의 아버지, 곧 환웅의 전투부대가 토착부족, 특히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부족들 중에 곰 부족의 한 귀족 딸을 부인으로 맞아 낳은 아들이 바로 단군 자신이라는 것.
단군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쑥과 마늘을 가지고 동굴에서 견디라’는 이야기는, 그 당시 단군의 어머니와 같은 지배자의 부인들은 다른 여자들과 같이 밖에 나가서 잡혼을 하지 않고 한 집에 머무르면서 지배자만을 섬기게 되어 있었던 것을 뜻한다고 했다.
고대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도읍지에 대해서도 설이 많은데, 단군 영혼은 도읍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종합해 유추해보니 지금의 내몽골 지역이었다.
단군의 존재는 배달민족에게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를 근거로 하는 배달민족의 정신적 원형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적, 인종학적 출발의 모습이다. 과거 칭기즈칸도 샤먼을 등에 업고 전 세계를 통일하려했다. 샤먼은 러시아, 몽고, 중국 동부,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의 ‘마쯔리’라는 거대한 제천의식에도 보듯이 현재 동아시아의 정신과 문화에 뿌리 깊게 살아있다.
단군은 동아시아인들의 종교와 정신과 문화의 원형이다. 개인으로 치자면 내 아버지가 누구인가와 같은 의문의 종착역이다. 단군왕검은 작은 단군들에게 샤먼 중의 샤먼, 즉 그레이트 샤먼인 셈이었다. 단군왕검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은 배달민족 이해의 출발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관련된 종교, 학술, 예술, 생활, 문화 등 거의 전 분야의 틀을 잡는 것과 동일한 말이 된다. 단군을 모신 100일 구명시식은 여느 형식적인 제천제가 아니라 상식적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천지공사였던 것이다.

예를 마친 차법사에게 단군이 물었다.

‘어찌 다시 불렀는가?’
‘작금에 이르러 당신의 자손들이 더불어 잘 사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잃고 약육강식의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단군의 출현이나 둘 사이의 대화를 알아챈 동참자는 없었다. 오직 차법사의 영안에만 보이는 광경이었다. 단지 엄청난 염력이 오간 흔적은 남았다.

‘쿵!’

갑자기 제상에 차려둔 과일들이 굴러 떨어졌다.

“어머나, 놀래라!”

팽팽한 긴장감 속에 조용히 기도를 올리면 동참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혹시나 무대가 무너진 것은 아닌지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국혼(國魂)을 불어넣을 때-2

염불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무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개국 열성조답게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큰 말에 수백의 군사를 끌고 나타나는 제왕에서부터 고급차량에 경호원들과 함께 나타난 대통령 영가까지 극장은 그야말로 시장터 같았다.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좌석 배정이었다.
생전에 제왕이었던 습성들 때문에 자신이 가장 중요한 좌석에 앉아야 한다며 치열한 자리다툼까지 벌이는 게 아닌가. 차법사는 진땀을 흘리며 겨우 연대순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가무단의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차법사는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외국 국빈이 와도 나라가 들썩이는데 하물며 기라성 같은 13분의 왕조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했으니 여간 어려운 자리가 아니었다.

일러스트 : 나은진

 

그래도 왠지 모르게 국조들의 심기가 편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의전에 소홀한 것은 없나 차법사는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그런데, 아뿔사! 차법사는 무릎을 쳤다. 그분들은 서로 상극중의 상극관계였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국조들 간의 관계가 좋을 리 없다. 고구려, 백제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고, 신라는 고려에, 고려는 조선에 의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 세운 나라를 패망시킨 장본인들이 대면하고 있으니 마음이 선선할 리 없었다. 천하의 원수들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형국이었다.

‘그렇게 까지 모질게 귀국을 막을 필요가 있었소?’

박정희 영가에게 이렇게 따진 건 이승만 대통령 영가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사임하여 하와이에 망명한 이승만 대통령은 병환이 깊어지자 조국의 하늘 아래서 숨을 거두길 강력하게 희망했었다. 하지만 그 간곡한 청은 외면당하였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임종 후에야 입국할 수 있었는데, 지금 이를 탓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이승만)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소!’

이번엔 고종황제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호통을 쳤다. 자신의 아들인 영친왕을 그렇게 불행하게 만든 이승만 대통령에게 쌓인 감정을 터뜨린 것이다. 차법사는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재빨리 세 분의 중재에 나섰다.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인과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국혼을 살리고 국운의 상승을 위해서 올리는 구명시식인데, 해묵은 앙금 때문에 자칫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위기였다. 차법사는 영가들에게 정중히 과거를 회상시켰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체류하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려 하였지만, 국내 정치 실세들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 시절 강력하게 환국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고, 국적을 잃은 채 일본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임시정부 헌법에는 분명 조선왕조를 우대한다고 되어있으나, 이승만은 이 약속을 어기고 조선황실을 배척했던 것이다.
영친왕은 1963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였고 56년 만에 가까스로 그리운 고국으로 환국을 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한 많은 임종 후 환국은 영친왕에 대한 과보를 고스란히 되받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종 황제도 일방적인 피해자는 아니었다. 아들 영친왕의 그런 고행을 하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인과(因果)가 있었다.
1898년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 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그때 실권자가 고종황제였다. 이승만은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극적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승만 복역수 앞으로 3번이나 가마니가 준비되었다고 한다. 감옥으로 들어가는 가마니는 시신을 덮기 위한 입관대용이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3번이나 죽었다고 할 정도로 감옥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고종과 조선황실에 대해 이때 생긴 마음의 앙금을 거두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선대에 제왕들이었지만 여느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인과의 굴레에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반목이 이어지고 있으니 국가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던 것이다.
차법사는 거의 울다시피 부탁했다.

‘그렇게 당신들이 아끼는 후손들의 나라를 위해 화해하시고, 후손들의 앞날을 밝혀주십시오.’

서로의 인과를 확인하고 나서야 영단은 조용해졌다. 근대 통치자들은 일단 봉합이 되었지만, 고대 선왕들의 인과는 더욱 복잡하기에 산 너머 산이 아닐 수 없었다.
무대 좌측에 대형 스크린이 올라갔다. 동참자들의 빛바랜 조상의 사진이 스크린에 한 장씩 올라왔다. 13열성 개국조들과 개인 조상의 제를 동시에 올리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무용, 음악, 영상, 소리, 예불, 조상의 영가가 함께 하는 새로운 시도의 구명시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차법사는 무엇에 끌린 듯 영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다 돌아가신 이름 없는 영가 신위’

누군가 붙여 놓은 영가의 위패에서 눈이 멈추었다. 순간 위패에서 하얀 그림자가 스스륵 걸어 나왔다. 이번엔 흰 소복을 입은 여인 영가였다.
그녀 주위에는 올망졸망한 아이 세 명이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었다. 염력을 통한 영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법사님, 이렇게 저희를 위해 기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찌 무주고혼을 떠돌게 되었습니까?’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 곳을 응시했다. 차법사는 그녀의 투명한 눈물이 고인 눈망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만주의 누런 흙먼지는 대낮의 태양마저 희뿌옇게 흐렸다. 여인은 젖먹이를 들쳐 업고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뒤에는 4살, 6살 남매가 뒤따르고 있었다. 끼니를 거른 지 오래 된 듯 수척하고 옷은 남루했다. 계집애는 언니랍시고 동생 손을 꼭 잡고 돌보며 이끌었다.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털썩 주저앉았다. 귀 뒤에는 검은 피딱지가 말라붙어 있었지만 어깨에선 움직일 때마다 검붉은 선열이 베어났다. 갑자기 통증이 밀려왔다. 여인은 생각난 듯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젖먹이는 마른 젖꼭지를 힘없이 물었지만 굶주린 어머니가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입 속에 황토 흙바람만 들어가 으직거릴 뿐이었다.
부러운 듯 젖먹이를 바라보는 남매의 퀭한 눈을 본 여인은 포대기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근방을 둘러보다가 찔레꽃 쪽으로 갔다. 찔레의 여린 순을 꺾어 껍질을 벗겼다. 한 움큼 모은 찔레 순을 남매에게 내밀었다.

“요 산만 넘어가면 아버지가 계시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라.”
남편은 항일무장 독립군이었다. 한 달 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에게 대승을 거둔 남편소식을 들었다. 며칠 거리에 있는 남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곧 만주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용정에 이주를 할 수 있으리란 내용이었다. 남편은 막내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떠났었다.
초승달이 뜨던 어느 날 말굽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돌아왔을까.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과 총소리가 들렸다. 일본군들이었다. 말을 탄 일본군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나오는 사람들에게 총질을 해댔다. 독립군들의 뒤를 봐주었다며 보복을 개시한 것이었다.
온 마을은 화염에 휩싸였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소름끼쳤다.
여인은 얼른 젖먹이를 들쳐 업고 남매를 깨웠다. 뒷방의 낮은 창문을 빠져나온 여인과 아이들은 무조건 달렸다. 따끔하더니 귓전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여인은 아이를 양 손에 이끌고 정신없이 어디론가 달렸다. 독립군이 있다는 일송정을 향해 일주일을 그렇게 북으로 북으로 걸었다.
여인은 물에 적신 옷고름을 젖먹이의 마른 입술에 갖다 댔다. 젖먹이는 희미하게 기척을 했다. 다시 아이를 들쳐 업었다. 현기증이 밀려왔다. 순간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작열하는 황토색 태양이 머리를 짓눌렀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일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인은 스스륵 의식을 잃어갔다. 젖먹이를 꼭 끌어안은 채.
얼마나 흘렀을까. 여인이 눈을 떴다. 저녁놀이 어스름했다. 사방을 둘러보던 여인이 소리 쳤다.

“영희야, 정수야!”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걸까.

“엄마 여기 있다! 어디 있는 거니!”

아이를 업은 여인은 미친 듯 아이들을 부르며 들판을 헤맸다.

“엄마.”

큰아이의 목소리였다. 여인은 달려오는 두 아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국혼(國魂)을 불어넣을 때-3

“어디 갔었니. 얼마나 찾았는데.”
“배가 고파서 찔레꽃 따먹었어.”
“빨리 가자,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일러스트 : 나은진

 


멀리 용주사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쩐 일인지 어깨의 통증도 말끔하게 가셨다.

“종소리 들리지? 얼마 안 남았단다.”

네 가족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정겹게 손을 잡고 나아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틀 뒤, 100여명의 독립군들이 비암산을 지나 압록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맞은 편에서 말을 탄 척후병이 달려왔다.

“대장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시신?”
“민간인입니다. 여인이 젖먹이를 업은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피난민이군.”

독립군들은 모자(母子)의 시신을 정중하게 땅에 묻고 묵념을 올렸다. 출발하려는 찰나 다시 척후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신이 더 있습니다. 아이 두 명입니다.”

남매가 손을 꼭 잡고 누나의 손에는 찔레꽃이 쥐여 있었다.

“서로가 길을 잃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신은 부패한 냄새가 고약했지만 손에 들린 찔레꽃은 전혀 시들지 않았다.
네 개의 소복한 돌무덤이 나란히 쌓였다. 독립군들은 압록강을 향해 다시 말을 달렸다.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일송정 소나무에 네 명의 식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엄마 내가 불러볼게.”

손에 찔레꽃을 든 여자아이가 고개를 어르며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흐뭇한 눈으로 두 남매를 바라보며 같이 노래를 불렀다.

불과 수초가 흘렀지만 먼 곳을 다녀온 차법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극장안의 그 누구도 차법사의 시간여행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영가시여, 일본은 패망하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로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아직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간도지역을 찾지 못해 완전한 광복은 아니지만요.’
‘일본이 망했군요. 우리는 해방을 했군요. 아, 정말 바라고 바라던 바입니다.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어요.’
‘네, 영가님들과 같은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의 염원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편히 쉬시고 새 몸을 받으십시오.’
‘고맙습니다. 간도를 찾는데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저희 독립군 영가들도 도울 테니까요.’

영가는 세 아이를 데리고 위패 속으로 스스륵 사라졌다.
차법사는 가무단에게 아리랑을 신청했다. 일송정 가족영가와 이름 없이 스러져간 많은 만주 독립군 영가들을 위무하는 노래였다. 동참자들은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왠지 모를 서글픔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객석 뒤쪽에서 차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꼼꼼하게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간간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기도 했다. 그는 차법사가 특별히 초청한 조준동 기자였다.


할렘 마피아와의 대결-1

차법사가 일일이 동참자들의 손을 잡고 배웅하는 동안 조준동 기자는 7층에 위치한 차법사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각종 상패와 감사패를 확인했다. 사무실 벽에는 30여점의 사진 액자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화엄사 차혁일 총경비 제막식, 버뮤다 삼각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일본 하사히야마 음악제 공동 주최, 이탈리아 피에베 디 솔리고 오페라 공연….
조기자는 검은 테의 안경을 벗어 수건으로 닦으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이 양반이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했구먼. 안 보는 사이 거목이 되었어.”

조기자가 차법사를 처음 만난 건 21년 전인 1991년 여름이었다. 군부정권이 막을 내리고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되던 시절이었다.
신문사의 뉴욕 특파원이었던 조기자는 신참인 관계로 선배들에 밀려 백악관은 출입하지 못하고 한인 동포사회의 한인들과 인맥을 쌓고 있었다. 뉴저지에 선원을 세우고 영혼과 이야기한다는 차법사 소식도 간간이 듣고 있었다. 몇 번 동포들의 경조사 자리에서 스쳤던 차법사가 조기자의 뇌리에 박힌 건 온몸으로 공포를 체험했던 마피아 사건 때문이었다.
할렘에서 생선가게를 하고 있는 교포 김씨가 찾아와서 차법사에게 애걸복걸했다.

“법사님, 꼭 말콤을 만나주세요, 제발이요! 안 그러면 가게 문 닫고 저희 가족들은 거리에 나앉게 됩니다. 부탁드려요, 법사님!”

김씨는 미국에서 차법사에게 구명시식을 올리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할렘의 마피아들 때문에 가게 문을 닫게 생기자 맨발로 달려왔던 것이다.
할렘은 맨해턴 스트릿 220여개 중 북쪽 40블록의 흑인 밀집 거주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흑인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범죄가 많은 빈민가의 대표적인 이름이다.
억척스런 우리 동포들이 이곳에서 장사를 많이 하고 있었다. 주로 청과상, 의류, 잡화, 가발 그리고 생선가게들 이었다. 그곳의 토박이 흑인 주민들은 워낙 우악스럽고 청결과는 거리가 멀지만 순진한 편이다. 그들은 버는 대로 정확히 말하면 들어오는 대로 쓰는 소비행태를 지니고 있었기에 한인들에게 장사는 잘되는 편이다. 하지만 뒷골목 상권은 마피아들이 좌우하고 있었다.
어느 날 차법사의 명성을 들은 할렘 뒷골목의 보스 말콤은 김씨를 협박했다.

“미스터 차를 내 앞에 불러와라. 안 그러면 장사할 생각 말라.”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차법사는 김씨의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우락부락한 흑인 덩치들과 함께 무시무시한 할렘으로 향했다. 통역을 위해 조기자가 같이 동행했다. 영문도 모른 채 달려왔던 조기자는 얼떨결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보스 말콤은 할렘 지역 뒷골목의 황제였다. 유명한 민권운동가 말콤의 이름을 따왔지만 하는 짓은 전혀 딴판인 건달이었다.
한 블록쯤 떨어진 허드슨 강이 보이는 어느 낡은 건물의 3층에 도착했다.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기분 나빴지만 소파도 있었고 책상도 있는 사무실의 형태는 갖추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거구의 사내가 차법사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한마디 던졌다.

못해도 150킬로그램은 되어 보이는 거구였다. 그래도 예의는 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자동차 타이어만 했다. 손힘이라면 차법사도 져본 일이 없었다.
손을 잡는 순간 말콤은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었다. 차법사는 태연하게 힘의 균형을 맞추고 악수를 끝냈다. 거만하던 말콤의 표정이 움찔했다. 차법사의 손힘이 자신보다 윗길이면 윗길이었지 아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콤은 성능 좋은 소음 권총으로 무장한 부하들이 곁에 있었다.
말콤은 뚜벅뚜벅 걸어가 책상 옆의 사람 키보다 큰 그림 액자곁으로 가더니 액자를 슬며시 옆으로 밀었다. 액자가 구르듯 스스륵 밀렸다. 시커먼 구멍이 떡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네모난 모양이었다. 검은 구멍은 깊은 우물같이 밑바닥을 알 수 없었다. 서늘한 기운과 함께 비명소리 같은 아득한 동굴 울림이 들렸다. 어찌 들으면 고양이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우리는 이걸 블랙홀이라고 부르지. 허드슨 강에 연결되어 있어.”

말콤은 묵직한 크리스털 재떨이를 그 구멍으로 획 집어 던졌다. 재떨이는 깊은 우물 속에 떨어지는 돌처럼 몇 번 벽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더니 아득히 멀어져갔다. 말콤은 사람을 돌에 묶어 던지면 이렇게 된다는 시범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말콤의 목소리는 한층 더 유들유들해져 있었다.

 

국혼(國魂)을 불어넣을 때-4

“마스터 차, 당신이 그렇게 신통하다며? 그럼 염력으로 나를 한번 들어 올려보시지.”

순간 차법사는 오늘 일이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기가 흐르는 분위기가 그랬다. 말콤은 아무 말 하지 않는 차법사를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일러스트 : 나은진

 


“그 정도도 못하면서 마스터라고 할 수 있어? 당신 사기꾼 아니야? 선량한 사람들 현혹시키는….”

차법사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공중부양을 말하는 모양인데, 공중부양은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만 할 수 있다. 당신처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부양이 되지 않는 법이야.”

공포스러운 힘에 눌려 이미 입술이 퍼렇게 질려 있던 조기자는 더듬더듬 차법사의 말을 통역했다. 말콤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부하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무언가 전환점이 필요했다. 차법사의 눈에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아날로그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말콤, 대신 내가 다른 것을 보여주지, 저 벽시계를 보라구.”

차법사는 잠시 마음을 고르고 벽시계를 응시했다. 어디 선가 툭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시계가 거짓말처럼 멈춰서는 게 아닌가.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목격자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말콤도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시 법사가 기를 모았다. 이번엔 시계의 초침이 힘들게 위아래로 부르르 떨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초침이 뒤로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더니 아예 멈춰 섰다. 이번엔 차법사가 말콤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시계가 아니라 당신 심장을 멈추게 하겠다!”

손가락으로 말콤의 심장을 가리키자 말콤은 통역을 하지 않았는데도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저어 흔들었다.

“오, 노! 오, 노!”

놀란 말콤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흔들며 사색이 되어 주춤주춤 물러섰다.
두 사람은 그렇게 무사히 말콤의 소굴을 빠져나왔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시내 중심에 이르자 구토가 몰려와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토악질을 했다. 차법사는 허리춤이 덜렁거려서 보니 허리 벨트가 끊어져 있었다. 시계가 멈춰 설 때 툭 하고 났던 소리는 벨트가 끊어지는 소리였던 것이다.
차법사의 이날 일은 헛되지 않았다. 며칠 뒤 말콤에게 정중한 초대장이 왔다. 그 자리에서 차법사는 말콤에게 한인들을 괴롭히지 않고 각별하게 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에도 차법사가 이탈리아 갱단 두목을 제압하여 교포들의 카지노 도박을 막고, LA 흑인 폭동 때 앞장서서 한인의 가게를 지킨 현장에 늘 조기자가 함께 있었다. 미국에서 차법사의 행적은 조기자의 정보망 안에 있었다.


변화의 도수(度數) 100-1

“조기자,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차법사는 오랜 친구를 반기듯 특유의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며 조기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형님! 이게 몇 년 만이요!”
“글쎄 20년이 다 되어가나? 벌써 그렇게 됐네.”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땅이 넓은 것 같소.”
“왜?”
“미국에 계실 때는 늘 제 레이더 망 안에 계셨는디, 한국에 같이 있으면서 강산이 한 번 변할 때까지 눈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으니 말이오. 일부러 서로 피하려고 해도 그러기 힘들지라.”

조기자의 남도 사투리가 군데군데 묻어났다.

“허허허, 듣고 보니 그러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동안 조기자가 뭔가 열중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조기자는 뜨끔했다. 역시 차법사다웠다. 사실 조기자는 그동안 정치판을 기웃거리다가 보기 좋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던 터였다. 조기자 입가에 쓴웃음이 살짝 스쳤다. 조기자도 질 수 없다는 듯 날이 선 질문을 던졌다.

“사진을 보니 그동안 엄청난 일들을 하셨는데, 어찌 사업규모는 별로 늘질 않으셨소?”

그는 선원의 크기와 신도의 수를 말하고 있었다.

“나야 늘 구멍가게지, 뭐. 부증불감(不增不減). 매일 구조조정해.”
“구조조정이요?”
“하하하. 그렇네. 나를 믿는 자는 남고, 내 말만 믿는 자는 떠나는 거지. 그렇게 해서 쉴 새 없이 구조조정해왔어. 그래서 나를 구조조정의 명수라고들 하더구먼.”
“나를 믿는 거와 내 말을 믿는 거와 뭐가 다르요? 그게 그거이 같은디.”
“천지차이지. 자기 마음을 믿느냐, 외부의 지식과 논리를 믿느냐 하는 차이.”
“말은 다 알아들었는데 도통 이해가 가질 않소.”
“머리가 이해한다 해도 마음이 편치 못하고 찜찜하면 헛거야.”
“그래도 신도 느는 맛이 있어야 신이 나지 않것소?”
“하긴 잠실 송파에서 대학로에 이사 와서 연극 극장 세 개나 붙였으니 가게가 늘긴 는 셈이지.”
“그래도 겨우 연극 극단 사장 명함 하나 더 넣은 거잖소. 법사님 같은 그릇은 적어도 50층 빌딩 하나쯤은 교단으로 가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종교도 사업인데 교세를 늘이셔야지요?”
“허허허. 교주는 근엄해야지 않은가. 나는 웃음이 많아서 안 돼. 조기자도 잘 알잖아. 같이 장난 치고 웃길 좋아하는데 어떻게 교주가 될 수 있겠어.”
“그건 사업하기 나름이죠. 정 나서시기가 꺼려지시면 얼굴 마담을 내세우고 뒤에서 섭정을 해도 되구요. 스타 뒤에는 스타를 조종하는 숨은 브레인이 늘 있는 겁니다. 그라믄 형님, 얼굴 마담으로 저는 어떻습니까?”


 

변화의 도수(度數) 100-2

“하하하. 조기자, 미국의 한인 방송국 생각나는가?”
“물론이죠. 아무리 흰 머리카락이 늘었어도, 교민방송국을 잊을 리가 있나요. 그때가 참 좋았소.”
“그때도 내가 조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지. 당시 10만 불로 큰 집을 지을 거라 하니까 조기자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는가?”

 

“글씨요, 기억이 가물가물…….”
“큰 절을 지을 거냐고 묻더구만. 그래서 나는 그런다고 했어. 그리고 그 돈을 방송국에 줘버렸어. 방송국이야말로 교민들에게 가장 큰 집 아닌가.”
“아, 맞소. 생각나네. 그때 그랬죠.”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보이지 않는 집을 짓고 있네.”
“허허허, 이거 또 형님께 한방 먹었소.”

조기자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오늘의 본론에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조기자가 나와 인연은 인연인가 보네. 여러 신문사 기자들을 초청했는데, 달려온 건 조기자뿐일세. 100일 구명시식은 참 중요한 건데….”

100은 변화의 도수(度數)였다. 단군의 탄생도 100일 기도 덕분이었다. 잡혼이 성행하던 시대 웅녀는 쑥과 마늘로 버티며 토굴에서 100일을 기도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단군으로 시작되는 문명국 고조선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근대 의학에서도 뇌의 변화는 100일 동안 반복해야 비로소 뇌의 일부로 습관이 된다고 인정했다. 100일은 새로운 판을 짜는 중요한 변화 도수였다.

“연락 받고 참 의외라고 생각했소, 형님.”
“왜?”
“불교 구병시식(救病施食)은 병에서 구하는 것이지만, 법사님 구명시식(救命施食)은 그야말로 생명을 구하는 의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미 수백, 수천 년 전에 돌아가신 개국 열성조를 위한 100일 기도를 하신다고 해서요. 혹시 구명시식에서 대중 부흥회로 사업 변경을 한 겝니까?”

그는 기자답게 넘겨짚고 있었다.

“허허허.”

차법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파도나 바다나.”
“예? 내가 머리가 나쁜께, 알아듣게 좀 말하소.”
“예전에 동해바다에 갔는데 관광차에서 내린 아주머니들이 버스 기사에게 항의를 하더라구. 기사가 여기가 바다라고 하자 파도가 없는 바다가 어디 있냐고 항의하는 게야. 그날따라 바람이 없어 파도가 잔잔했던 것인데. 아주머니는 파도가 있어야 바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바다가 파도이고 파도가 바다 아니겠나.”
“허, 재미있기는 한데, 딱 머리로 이해가 안 되네.”
“미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가본 적 있지?”
“물론이죠. 뉴욕 살면서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다시피 했잖소.”
“그 건물 아래 가면 외국 관광객들이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더라구.”
“뭐라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어디 있냐는 거야. 허허허.”
“맞아요. 저도 경험했죠. 코앞에 두고 못 찾더라구.”
“멀리서 보면 보이던 게, 가까이서 보면 전체가 사라져 안 보이는 법이지.”
“가만, 법사님 말씀인즉 100일 기도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라는 거요?”
“그런 셈이지.”
“개인 구명시식이나 개국 열성조 구명시식도 바다와 파도와 같은 관계라는 말이시….”
“역시 센스가 빨라. 국가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 우리 민족은 세 집만 다리 놓으면 모두 친인척 관계야. 자기 조상은 섬기면서 국가의 공통조상은 이상한 눈초리로 보더라고. 바다가 파도이고, 파도가 바다 아닌가.”

조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기자, 명함 보니 이제 편집국장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편집국장이 직접 와도 되시나? 취재기자를 보내지 그랬어?”
“형님 일인데 제가 직접 달려와야 지라. 그냥 말콤 시절 맹키로 조기자라고 부르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은 그렇게 부르소.”
“군인이 군복 입을 때 가장 아름답지. 역시 조기자는 기자일 때가 제일 빛나.”
“여기 오는 건 어렵지 않은데, 사실 기사로 다루기에 애로사항이 큽니다.”
“그래?”
“구명시식 때문이오. 구명시식을 한마디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것소?”
“말 그대로 생명을 구하는 식이라고 대충 하면 되지 뭐.”
“간단치가 않아요. 다른 종교나 학자들이 항의합니다.”
“그래? 무슨 이유로?”
“한마디로 이단이라는 거지라. 구명시식이 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형님 경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존의 율법에 맞춘 것도 아니고…….”
“그건 간단한 문제인데.”
“간단하다고라?”
“문 안으로 들어오면 돼.”
“…….”
“문 밖에 서서 방 안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지만 말고, 자기가 직접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오면 간단한데…. 영혼에 무슨 종교가 있누. 그저 겪어보지도 않은 지식으로 시비선악(是非善惡)을 가르고 승부를 보려니 그렇지.”

간단한 차가 나왔다.
“형님, 아까 전에 무대 위에서 가족 중심의 구명시식에서 국혼을 불어넣는 구명시식이라고 하셨는디, 혹시 앞으로 나라에 큰일이라도 생기요?”

허허실실하면서도 눈치가 빠른 조기자의 근성에 할 말이 없었다.

“…….”
“형님은 남들 모르게 귀신처럼 일을 하시잖소. 그런데 이렇게 기자까지 부른 걸 보면 뭔가 대중적으로 경고할 일이 있으신 것 아니요?”
“귀신은 속여도 조기자는 못 속이겠구먼.”


 

변화의 도수(度數) 100-3

“새 정권 시작하고 숭례문 화재 있을 때 서울에 전화(戰火)가 있을 거라 했고, 보도에 보니까 연초에 큰 별이 두 개 떨어진다고 예언하셨습디다. 예언대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이 떠났는데, 또 다른 별이 떨어집니까?”
“…….”
“혹시 북쪽에서?”

 

“너무 앞서가지는 말게. 나도 단군을 비롯해 13분의 개국 열성조를 모시기로 결정한 것은 불과 3일전이네.”
“3일이요? 오랫동안 기획하신 게 아니고라?”
“내가 작년에 잠실 선원을 떠나면서 구명시식이 힘들어졌어. 구명시식에 나타난 영가들이 ‘차법사, 나라가 흔들리는데 이게 무슨 소용이요.’ 아 이렇게 꾸짖는 게야. 나라에 큰 격변이 생길 텐데, 여전히 자녀를 대학에 붙게 해 달라, 집을 팔게 해 달라, 병을 낫게 해달라고 소원 들어주는 데 매달리고 있냐는 게지. 얼마 전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모처에서 기도를 마치고 오는데 마른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면서 ‘13분의 창업주를 모시라’는 음성이 내 귀에 또렷이 들리더라고.”

조기자는 메모하던 펜을 멈추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 이야기는 기사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창업주라고 해서, 대기업 창업총수를 말하는가 하고 어리둥절했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라를 세운 창업주들이더라고.”
“어쨌거나 누르하치를 우리 국조로 넣은 것은 정말 탁월한 혜안이요. 제가 요즘 누르하치 책을 출간하려고 공부하고 있거든요. 그 분도 분명 우리 민족이고 조상입니다.”
“잘 아는군. 그 분 성이 본래 경주 김씨거든. 백두산에서 대동제를 지낼 때 천지에 나타난 누르하치가 분명히 그랬어. 후금을 세우고 나서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애신각라(愛新覺羅)란 성씨를 붙였지. 분명 문헌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
“그런데 왜 이승만을 넣었소?”
“논란이 많다는 건 나도 잘 알지. 하지만 아버지가 맘에 안 든다고 아버지를 바꿀 수가 있는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보네.”
“100일 구명시식의 목적이 뭡니까?”
“목적이라…. ‘추탁동시(?琢同時)’라고 혹시 들어봤나?”

차법사는 수수께끼 내듯 천진하게 조기자를 쳐다보았다.

“추탁동시요? 글씨? 한자가 어떻게 되요?”
“병아리가 21일째 부화가 되기 위해선 알 속의 병아리와 알 밖의 어미가 서로 신호를 보내 동시에 쪼아야 비로소 생명이 탄생한다는 말일세. 하늘의 때만 기다리지 말고 인간도 그에 부응해서 원을 세워야 비로소 새로운 역사가 탄생한다는 뜻이지.”
“아, 이제야 감이 잡히네. 무언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장장 100일간의 구명시식이다. 그런데 그렇게 쪼고 계시는 게 대체 뭡니까?”
“무엇을 쪼느냐 하면….”

차법사가 잠시 뜸을 들이는 동안 조기자는 펜으로 수첩을 톡톡 치면서 조바심을 드러냈다.

“내가 조기자에게 특종을 줌세.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유일하게 달려온 기자인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특종이란 말에 조기자의 눈빛이 매처럼 번뜩였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1

“8월 중순경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터질 걸세.”
“경천동지라 하면….”
“하늘이 울리고 땅이 울린다는 뜻이지.”
“하늘이 울리고 땅이 울릴 만한 사건이라…. 자세히 좀 설명해주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기자였지만 이번만은 조기자도 조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차법사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2012년이 되면 남북통일이 시작될 거야.”

조기자는 수첩에 ‘2012년’이라고 적고는 몇 번이나 밑줄을 쳤다.

“통일의 계기가 8월 중순에 발생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큰 지진 전에 잔 지진이 길을 닦는 것처럼 앞으로 계속 요동칠 테지만.”
“시방 계속이라고 혔소?”
“영계에서는 이미 통일이 되었지만, 현상계의 통일은 시간과 계기가 필요하지. 분단 반세기는 짧은 기간이 아닐세. 부모자식도 서로 못 보면 서먹한데, 하물며 남북이 으르렁대다가 하루아침에 어깨동무할 수는 없지.”
“어떤 사건이다요?”
“그것보다는 어떤 통일이냐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조기자는 슬그머니 피해가려는 차법사의 말 길목을 가로 막았다.
“혹시 전쟁이라도 터집니까? 핵미사일이 발사된다거나 하는….”
“나뭇잎 한 잎이 눈앞을 가려서 태산을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이야. 통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베를린 장벽 붕괴처럼 38선 철책 붕괴 통일만을 통일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건 아니지. 내가 왜 고조선, 고구려, 거기다 청나라 국조까지 모시겠나?”

조기자는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이럴 때 기자는 가장 난감하다. 답답한 조기자의 심정을 꿰뚫은 듯 차법사가 조근 조근 설명을 붙였다.

“굳이 영능력이 아니더라도 자세히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수 있지. 도(道)가 무어라고 생각하나, 조기자는?”
“도요? 글씨요, 길거리 가다가 ‘도를 아시나요’라고 접근하는 사람은 몇 번 만나보았습니다만….”
조기자는 종교철학을 전공한 기자였다. 수많은 종교를 비교연구하고, 한때는 기자생활을 접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강단에 섰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더욱 냉철했다.
그에게 종교나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매우 인간적인 그리고 사회 집단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신과 종교는 객관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신학도에서 보이는 것만 믿는 기자로 다시 되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불가사의한 세계는 존재하지만 현실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것이며, 인간 상상력이 만들어낸 미신에 불과하다는 가치관으로 무장한 그에게 차법사는 까다로운 취재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차법사의 예언에 솔깃해 달려온 자신의 심사를 스스로 어찌 해명할 수 없었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찾자면 차법사 예언의 적중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차법사는 기(氣)에 대해 설명했다. 차법사가 이렇게 이론적으로 자세한 설명은 늘어놓은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다분히 조기자의 성향을 고려한 배려였다.

“기는 1초에도 수천, 수만 번 변하네. 기를 간단하게 우주에 가득 찬 에너지 파장이라고 생각해도 되네. 수많은 변화는 흐름을 낳지. 그 기의 흐르는 길이 바로 도일세. 다시 말해 우주가 음(陰)과 양(陽)으로 운동하는 길을 도라 할 수 있지.”

조기자는 여전히 펜을 멈추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2

“예언이란 신비한 눈이 아니라 천하대세를 읽은 도라고 해두자고. 도의 입장에서는 예언이라기보다 조짐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게야. 참, 우리말에 철부지란 말이 있지. 철모르는 사람 할 때 ‘철’이 무언지 아는가?”
“사시 사철할 때 계절이란 뜻 아닙니까?”
“맞아. 계절이란 뜻이야. 춘하추동. 우리나라는 사철이 뚜렷한데 일본이나 남북극, 열대지방 사람들은 철이 뚜렷하지 않거든. 그래서 자연의 음양오행을 설명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철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던 데서 유래했네. 철을 모르면 눈이 와도 맨발로 뛰쳐나가는 꼴이지.”
“…….”
“철이란 작게는 4계절이지만 크게는 우주의 철을 말하네. 결국 철을 모른다는 말은 우주의 이치도 모른다는 게지. 지구에 계절이 있는 것처럼 크게는 우주에도 철이 있고 작게는 한 사람에게도 철이 있지. 철의 변화를 ‘운(運)’이라고 하고.”
“지금 우리나라의 철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지. 이제 좀 감을 잡는군. 그 때가 도래하고 있네.”
“때라…….”
“헌데 조심할 게 있지. 독불장군은 없네. 특히 우리는 중국과 일본과 혈연적 인연으로 엉켜 있네. 우리나라의 국운은 동아시아 전체의 국운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지.”
“혈연적 인연?”
“지금은 한·중·일·몽고·러시아로 나뉘어져 있지. 그 옛날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왜, 당 등으로 국명을 달리 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한 핏줄의 형제였네. 단군의 자손들이지. 그러니 서로 아옹다옹 싸우지.”
“웬수가 아니라 형제였다고라?”
“싸움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게야. 사람도 그렇지만 국가도 인연이 없으면 어떻게 서로 얼굴을 마주대고 밀고 당기고 그러겠나. 주고받는 과보가 얽혀서 그런 게야.”
“…….”
“본래 대륙의 주인은 우리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었지. 단군의 후예. 100일 구명시식은 국조 단군왕검을 비롯하여 나라를 세운 분들을 기리며 새롭게 열리는 시대에 국운을 받기 위한 국혼 불어넣기라고 할 수 있네.”
“국운이라고 하셨는데, 동아시아에 큰 변화가 예견됩니까?”  “지금 대륙은 중국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 중국의 국운이 얼마나 갈 것 같은가?”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떠오르는 슈퍼 파워 아닙니까?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이라고나 할까요.”
“내가 보기에 떠오르는 해가 아니라 지는 해 같은데.”
“예에? 지는 해라고라?”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중국이 아시아의 맹주가 될 것이며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지 않던가.

“조기자가 청나라를 연구한다니 나보다 중국의 역사를 더 잘 알거야. 중국은 대륙에서 통일된 나라의 평균 지속기간이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글씨요? 한 100년?”
조기자는 자신 없다는 표정이었다.

“진시황도 20년을 못 넘겼어. 춘추전국시대, 수나라, 당나라 등 수많은 제국이 꽃처럼 피고 졌네. 그런데 그 평균 유지 기간이 60년도 못 넘겼네.”
“생각보다 짧구만이라.”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난다는 요즘 아닌가. 중화인민공화국은 올해로 60년 되었지. 꽤 장수한 셈이야. 모였으니 이제 흩어지는 게 자연의 이치, 즉 도리가 아닐까. 이제 중국은 옛 소련처럼 통일에서 분열의 길로 들어선 거야.”
“60년이란 건 평균치 통계수치일 뿐이고, 그렇다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그처럼 된다는 보장은 없죠.”
“구체적인 증거라……한번 보자구. 예전에 법륜공(法輪功) 수련자가 중국 공안으로부터 대대적
인 탄압을 당한 거 기억하지?”

법륜공은 1992년 중국 리훙즈가 창시한 기(氣) 수련법 또는 수련단체인데 법륜공 수련자 수가 공산당원의 수보다 많은 1억 명이 넘어가자 외신은 중국정부가 법륜공 수련자 수십만 명을 36개 이상의 노동수용소에 보냈고, 고문으로 3000명 이상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2000년부터 2005년까지 4만여 건에 달하는 장기를 법륜공 수련자로부터 적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해서 티벳트 사태, 최근의 위구르 사태가 발생하여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 수천여명 이상이 암암리에 목숨을 잃었네. 이제 독립이란 말만 나와도 중국군대와 공안이 출동하네. 이렇게 첩첩이 원한이 쌓이면 별 수 없지 않겠나.”
“중국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 있긴 하죠. 주변국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을 동원해 역사왜곡을 해가며 동북공정을 강행하고, 백두산에서 조선족을 쫓아내고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으니까요.”
“백두산을 건드리는 것 패착 중에도 큰 패착이지. 배달민족의 영산을 건드렸으니 큰 대가를 치를 거야. 중국 공산당은 이제 토사구팽(兎死狗烹)이야. 굶주린 대륙을 중국 공산당이 해결한 건 사실이지만, 사냥철이 지났는데 어쩌겠나. 사냥개는 잡아먹어야지. 13억 인구를 하나의 이념으로 언제까지 묶어 둘 수 있다고 보는가. 인터넷, 휴대전화로 정보가 마음대로 날아다니는데 어떻게 일당독재로 인간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겠어. 손으로 공기를 잡겠다고 공기가 잡히겠나.  앞으로 중국이 살려면 옛소련처럼 분열이 불가피해질 거야.”
“그러면 남북통일은 바로 중국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뜻입니까?”
“중국의 야심은 상상을 초월하지. 그들은 세상을 중화(中華)로 만들겠다는 거야. 여기에 외적 변수를 넣으면 그림이 더욱 확실해지지.”
“외적 변수요?”
“응, 외적 변수.”

잠깐의 침묵이었지만 조기자는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했다.

 

세계는 금전(金戰) 중-1

“외적 변수라면…….”
“미국이야.”
“미국?”
“버젓이 미국과 유럽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중국을 가만 놔두겠어. 아편전쟁, 청일전쟁 같은 대외전쟁에 중국은 이겨 본 적이 없어.”
“…….”
“예전엔 냉전(冷戰)이었다면, 지금 세계는 ‘금전(金戰)’중이야.”
“금전은 뭡니까?” “돈의 전쟁이란 뜻이지.”
“돈 전쟁?”
“미국이 슈퍼파워인 이유가 뭐겠나?”
“군사력 아니것소. 엄청난 핵무기와 첨단무기들.”
“무엇보다 ‘달러’가 아닐까?”
“아, 달러!”
“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하면서 달러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지.”
“군사력보다 달러가 더 막강한 무기이긴 하죠. 전문가들도 미국의 핫머니가 세계를 움직인다고 했거든요.”
“역시 기자라서 이해가 빠르구먼.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중국은 고심했지. 어떻게 하면 미국을 꺾고 슈퍼 파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선택한 게……뭐라 생각하나 조기자는?”
“에이 참 형님도. 결정적일 때 꼭 그러시네. 기자가 그걸 알면 취재하겠소. 이거 감질나게 너무 가지고 노는 거 아니요?”
“허허허. 내가 그랬나. 그래도 고급정보인데 좀 생색을 내고 싶은데.”
“이럴 땐 형님은 꼭 장난꾸러기 같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중국이 택한 건 달러에 대적할 통화를 만드는 거였어. 지구의 20%를 차지하는 15억 인구가 못할 건 없다고 본거지. 아시아를 위안화로 지배하는 거였어.”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었다.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미국보다도 더 지독한 자본 중심주의를 계획하고 있다는 게 조기자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미 미국을 견제하는 여러 조치를 했어. 처음엔 달러를 교란시키기 위해 달러 위조지폐를 찍었지.”
“예? 그런 뉴스는 금시초문인데?”
“진실과 현실은 다르지. 용천사건이 이와 관련 있어.”

이른바 ‘용천 폭발사고’는 2004년 4월 중국에 인접한 용천에서 강력한 열차 폭발로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사건 직후 북한은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여 전 세계 이목을 주목 시켰다. 신속하게 남한을 비롯해 공개적으로 전 세계에 구호의 손길을 요구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고 직후 당시 북한에서 2인자 장성택이 즉시 구금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고, 한동안 김정일의 행방도 묘연했다.
반 김정일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린 전형적인 사건이기에 철저한 외부차단이 예상되었지만, 용천사건에 대해서만은 이상하리만치 개방적으로 구호와 취재활동을 허용했었다.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청했던 것이다.


세계는 금전(金戰) 중-2

“중국이 관련되어 있는 뜻이요?”

조기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눈빛이 펄펄 살아있었다.

“중국이 슈퍼노트(Supernote)를 북한에다가 하청을 주었어.”
“네? 슈퍼노트?”

슈퍼노트란 진짜 화폐와 다름없을 정도로 극히 정밀하게 만들어진 미화(美貨) 100달러권의 위조지폐를 말하는 것이다.
화들짝 놀라는 조기자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차법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슈퍼노트를 만들어 공장은 북한에 지은 거지. 만약 발각될 때를 대비해 발뺌을 하려는 중국의 음흉한 속셈이었지. 그런데 북한에서 호락호락하지 않고 배달사고를 일으켜 중국과 갈등이 생긴 거야.”
“배달사고는 또 뭐유?”

조기자는 메모하던 펜을 멈추고 차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외화가 모자란 북한이 위조 달러를 빼돌린 거지. 분노한 중국 지도부가 북을 응징하고 북 지도부를 물갈이하려했는데, 미국이 알아채고 용천 정보를 미리 주는 바람에 실패한 게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조기자는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만큼 북한은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거야. 3대 가는 부자가 없다고, 이제 북한은 위기 중의 위기지. 김정일은 김일성처럼 주석이 아니고 국방위원장이지 않은가. 이미 친중 집단체제로 넘어간 지 오래야. 단지 중국은 미국 때문에 노골적으로 국경선을 변경할 수가 없을 뿐이지.”
“증거가 있나요? 용천 사건의 증거.”
“글쎄……. 그렇게 말하면 나야 할 말 없지 뭐. 내가 안테나가 좀 별난 것 이외에는.”
“형님을 못 믿는 다기 보다는 너무 경악할 일이라서 그라지라.”
“그런 생각도 무리는 아니야. 그런데 그건 놀랄 일도 아닐세. 중국은 미국을 돈으로 사려고 하니까.”
“네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요?”
“미국 국채의 30%이상 사들인 게 중국이야. 만약 일거에 미 국채를 팔면 어찌 되겠는가.”

   
 
너무나 뻔 한 일이었다.
“미국 정부가 파산하겠죠.”
“맞아. 최근 미국이 금융공황상태로 빠진 이유 중에 하나도 중국 때문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아.”
“중국이 미 국채를 팔았나요?”
“히든카드를 초장부터 빼들 순 없지. 환율을 이용했어.”
“환율? 달러 환율 이런 거 말이죠?”
“중국 정부의 고정환율제 때문에 환율전쟁에서 중국이 미국에 판정승했지.”
“환율전쟁?”
“미국의 핫머니는 거의 투기 자금인데, 미국의 무리한 파생상품이 핫머니와 연결되어 있어. 핫머니가 담합하면 우리나라 97년도 IMF같이 국가 하나를 지불 불능상태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지. 해당국가의 신용도가 땅에 떨어질 때 달러 가치는 치솟고 그 이익은 핫머니의 먹이가 되는 거지. 이미 남미도 그렇게 쑥대밭이 되었었네. 미국 핫머니도 중국에서 그러할 심산이었는데 중국에선 그런 일을 미리 막았어. 미국이 아무리 고정 환율을 자율 환율로 바꾸라고 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게 중국이야.”
“음, 놀랄 노자네. 형님이 이렇게 세계경제와 국제정세에 해박할 줄은 몰랐소.”
“칭찬으로 듣겠네. 어쨌든 중국은 압력을 가하는 미국에게 되레 카운터펀치를 날렸지.”
“흥미진진하네요. 뭐요, 그 카운터펀치가?”
“중국이 고정 환율을 유지하고 국내 활동하는 외국 핫머니를 대대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한 거야. 핫머니가 묶이자 미국 본토의 자금경색이 심해졌지. 그게 파생상품의 연쇄 붕괴를 일으켰고, 미국 본토의 개인 신용 붕괴까지 이어진 거라고 보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 미·중 정상회담 때 미국 관리가 중국에 고정환율제를 풀라고 한 외신을 본 적이 있소. 형님 말 듣고 보니 정말 ‘금전시대’가 실감나오. 아시아 통화에, 위조지폐에, 미 국채에…중국은 미국의 눈엣 가시것소.”
“여기에 하나 더 얹어야지.”
“또 무엇을?”
“중국은 달러 도전뿐 아니라 벌써 군사적 주도권에도 발 벗고 나섰다고.”
“아따, 군비 경쟁이라믄 미국은 이골이 났지라. 구소련을 KO시키고, 지금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수천 개가 대기하고 있는데.”
“그럴까?”
“그럴까라뇨?”
“톤당 수천 불 하던 몰리브덴 값이 몇 년 사이에 8만 불 가까이 치솟았어.”
“갑자기 몰리, 그 몰리 뭐라 혔소? 알아듣지도 못하것네.”
“군사무기 만드는 몰리브덴. 텅스텐과 함께 대표적인 전략 광물이지. 희토류라고도 하지.”
“그런 게 있었나. 암튼, 그란디요?”
“중국의 몰리브덴 매장은 세계 최고수준이야. 그런데도 전 세계 몰리브덴 광산을 싹쓸이했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독점하려고 그런단 말이시.”
“뿐만 아니라 자국 몰리브덴은 갑자기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지. 그 의도가 뭐겠나?”
“못된 심보구마. 상대방은 발을 묶고 자긴 뛰겠다는 거잖소.”
“그렇지. 그런데 하필 거기에 북한이 관련되었어.”
“북한? 와요?”
“북한 몰리브덴 매장량이 상당하거든. 핵발전의 원료인 우라늄 매장량도 세계 최고지. 북한의 지하자원 매장량이 7천조 원에 이른다더구먼.”
“아하, 그놈들을 중국에 팔았구나!”
“그래. 미국은 몰리브덴이 부족한 반면 북한은 전략 광물을 중국에 판 거야. 왜 중국이 북한의 뒤를 봐주겠나? 이념의 동질성? 천만에. 먹을 게 있다는 거지. 싸우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심기가 편할 리 없지.”
“미국에겐 중국과 북한이 정말 웬수겠고마.”
“잘 알다시피 미국에게 전쟁은 비즈니스의 일부야.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걸프전이 필요했잖아. 미국은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그리고 희귀전략광물 확보 때문에라도 한반도를 소홀히 할 수가 없어.”
“한반도가 국제분쟁이 일어날 정도로 자원의 보고인 줄 꿈에도 몰랐소, 형님.”
“옛날 같으면 무연탄, 석회석, 철광석이 주요광물이었지만, 시대가 바뀌었지. 이제 희토류가 총애를 받는 때가 된 거지.”
“아따, 그야말로 <아바타>가 따로 없구만.”
“갑자기 무슨 <아바타>?”
“아따 형님도. 영화 <아바타>도 모르요? <아바타>에서도 희귀 광물을 차지하려는 못된 지구인과 토착민들이 서로 전쟁하는 줄거리 아니오.”
“허허허, 그런가.”
“그래서 미국이 취한 조치가 뭐요?”
“아, 그 얘기하다 딴 길로 샜지. 조기자는 중국의 아킬레스건이 무언지 아는가?”
“글쎄요. 아킬레스건이라…….”
“대만이야.”
“대만이요? 이것도 금시초문인디.”
“그래? 중국도 알고 보면 분단국가야. 나중에 한번 공부해보게. 중국과 대만의 관계. 대만이 얼마나 대륙을 견제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최근 미국이 대만에 최신무기를 팔았구나.”
“미국은 중국의 분열을 원하고 있어.
“미국이 달라이 라마를 초청한 것도 중국의 독립분열을 가속시키기 위해서죠.”
“그렇지. 이제야 감을 잡는군. 가장 고비가 내년이야. 6·25동란 60주년이 되는 경인년.”
“경인년이요?”
“백호 경인년은 왕좌를 겨루는 해지. 미국의 엄포에도 중국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결국 어떻게 되겠나?”
“혹시, 전쟁?”
“미국은 10년에 한번 전쟁을 해서 전쟁무기 재고를 털어야 하는 국가인데, 그동안 너무 쉬었어. 무기가 너무 녹슬었어. 이란이나 아프카니스탄이 화약고라고 하지만 동북아도 그에 못지않지.”
“에이, 그래도 어떻게 명분도 없이 중국을 칩니까?”
“스위치 하나면 되지.”
“스위치?”
“잘 알다시피 남북 휴전선은 언제 건 한방에 터질 수 있게 되어 있어. 만약 남북이 한판 붙으면 어찌 되겠어?”
“…….”
“북한에 전쟁이 나면 중국이 자동 개입한다는 북한과 중국의 조중조약을 맺어있고, 정전 당사자중에 하나도 중국이야. 남한의 전시작전권은 미국에게 있지. 언제든 한 방이면 한반도는 전쟁이 가능한 시스템이네. 시작은 한반도겠지만, 결국 남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지. 국제정세라는 게 60년전 미·소 대리전인 6·25때와 다를 게 없어.”
“설마…….”
“과연 설마인지 미국이 개입했던 베트남전, 6·25전쟁의 발발 직전 사건들을 한번 공부해 보라고. 어떻게 전쟁이 시작되었는지. 그래서 경인년 남북 경계선이 위태위태해.”

조기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기삿거리로는 애매한데…….”
“왜?”
“증거가 있는 게 아니라 법사님 예측일 뿐이잖소.”
“하긴 그래. 믿거나 말거나지, 뭐.”

사실 차법사가 종종 천기누설에 가까운 미래예언을 턱턱 했지만 대중들에겐 너무 황당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결과로 나타나기 일쑤였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윤수_뚜벅뚜벅 산사기행_05  (0) 2011.05.04
윤제학_능가산 내소사  (0) 2011.05.02
임윤수_뚜벅뚜벅 산사기행_04  (0) 2011.04.30
윤제학_마니산 정수사   (0) 2011.04.28
문명의 교차로에서  (0) 2011.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