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산신이 있는 천태산 영국사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6) 충북 영동 천태산 영국사
내 것 조금 버리면 다 얻을 수 있음을 모르고 작은 것에 집착하는 이런 저런 사는 모습들이 곧 내 모습이려니 생각하니 씁쓸함을 떨굴 수 없다. 내 치부 가리기 위해 야합하는 떼거리들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니 여유 없는 마음 탓에 심사가 뒤틀린다.
인간의 몸뚱이는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함에도 그 몸뚱이를 치장하느라 가산탕진하고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니 우매함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며 한 평생 살면서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며 기고만장해 하는 것이 인간이다.
좋은 인연만 맺고, 좋은 말, 좋은 일 그리고 사랑만 하여도 모자랄 짧은 인생을 시기하고 음해 하느라 다 소비한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작은 진리를 실천치 못해 탐재로 망가지고 악연 맺기에 짧은 인생 다 탕진하니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사를 찾아가는 길마다 걸음마다 이런 생각을 떨구지 못한다. 이런 생각 또한 무상한 번뇌일진대 이 번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니 몸뚱이 있는 곳에 그림자 있듯 한 평생 함께 할 업보인가 보다.
▲ 영국사를 찾아가는 길옆 철조망엔 각처 등산객들이 남겨놓은 형형색색의 표식이 만국기처럼 빼곡하게 걸려 바람에 팔랑대고 있다. |
ⓒ 임윤수 |
구불구불한 지방도를 따라가며 눈으로 주워담는 늦가을 풍경은 그런 그림을 가슴속에 그리고 있다. 영국사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한적한 도로로 접어드니 얼마 가지 않아 널찍한 주차장이 나온다.
영국사는 노국 공주와 고려 공민왕의 애틋한 사랑과 구국기도의 지성이 전설로 서린 곳이기도 하지만 많은 보물과 천연기념물 233호로 지정된 수령 1300년 된 은행나무가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일제시대에 작성된 자료를 근거로 수령이 600년이니 700년이니 하지만 실제의 수령은 1300년은 되었을 거라는 게 나무 근처의 바위에 암각된 기록등을 근거로 마을 사람들의 주장이니 수령을 1300년으로 소개한다.
산사를 찾아가는 길이 다 나름대로 특색 있지만 찍어낸 듯 같게 하는 느낌의 공통점도 있다. 영국사를 찾아가는 길도 그랬다. 온통 기암인 주변산세에서 범상치 않은 느낌이 그랬고 휘휘 늘어진 고목의 가지에서 느끼는 눈 맛과 안정감이 그랬다.
▲ 천연기념물 233호로 지정된 수령 1300년 된 은행나무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 작성된 자료를 근거로 수령이 600년이니 700년이니 하지만 실제의 수령은 1300년은 되었을 거라는 게 마을 사람들 주장이다. |
ⓒ 임윤수 |
손때 묻은 맷돌만큼이나 깔끔한 바윗돌이 촘촘한 진입로를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산길 삼거리가 나온다. 그 삼거리에서 우측 길을 따라 조금만 더 들어가면 쌓은 이 알 수 없고 그 크기 알 수 없는 정성들이 만들어낸 돌탑들을 치장으로 두고 있는 삼신바위가 나온다. 쭈글쭈글한 바위가 영락없이 삼신할머니의 얼굴이다.
아들 하나 점지 해 달라 올린 누군가의 지성이 담겨 있고, 아직도 그 정성이 남아 있을지 모를 삼신바위를 지나니 삼단폭포가 나온다.
한여름 우기라도 만나면 쏟아지는 폭포가 장관일 듯 하나 가을 가뭄 탓에 겨우 폭포의 명맥만 유지하는 듯 하다. 한 때는 턱까지 차 오르던 소(沼)의 깊이도 겨우 무릎을 적실 정도다.
입구에서부터 이곳 폭포까지는 필자가 많은 추억을 담고있는 곳이다. 학창시절 큰돈들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기에 당일 MT로 친구들과 떼를 지어 찾아오곤 하였던 단골장소가 이곳이다. 지금이야 도로도 잘 포장되어 있고 입장료도 받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밥을 해 먹고 번개탄에 철망 놓고 삼겹살쯤 구워먹어도 뭐라 할 사람 없는 그런 곳이었다.
▲ 다산(多産)의 상징이며 맏며느리로 갖추어야 할 덕목중의 하나로 후덕함이 연상되는 그런 자태를 하고 있는 것이 영국사 은행나무다. 바닥에 수북한 은행잎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
ⓒ 임윤수 |
자연그대로의 계곡으로, 제한된 여건에서 젊음을 발산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놀며 쉴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일년에 몇 번씩은 찾아오던 곳이다. 미끄럼 타듯 내려오던 물줄기가 낭떠러지라도 만나면 하얀 물방울을 만들다. 그럴 때 재수 좋으면 부채 펴듯 만들어진 고운 무지개 다리도 볼 수 있던 그런 곳이다.
폭포를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폐침목을 몽탕 잘라 가지런히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길 위로 길이 만들어질 만큼 가파르고 구불구불하지만 오르막 길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거나 체중이 나가는 사람이면 이쯤에서 이마에 맺힌 땀을 한 번은 씻어야 할 듯 하다.
고갯길 올라서니 휴∼하는 안도의 숨과 함께 눈앞이 탁 트인다. 영국사는 분지형태의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을 오르면 논도 있고 밭도 있다. 길옆 철조망엔 영국사에도 분명 들렸을 각처 등산객들이 남겨놓은 형형색색의 표식이 만국기처럼 빼곡하게 걸려 바람에 팔랑대고있다.
▲ 땅에 내려앉은 가을 좀더 구경하라는 듯 경내 마당엔 떨어진 빨강단풍이 그대로 있다. |
ⓒ 임윤수 |
영국사는 신라 문무왕 8년(서기 668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가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 하였으며, 고려 고종 때는 금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대습을 피해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가피(加被)를 입게 되어 절 이름을 영국사(寧國寺)로 고쳤다 한다. 영국사엔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고 몇 분 거리 안에 계월암(桂月庵)이 있을 뿐이다.
올라선 언덕에서 마을 어귀 돌 듯 둥글게 굽어진 길을 따라 걷다보면 작은 도랑을 건너게 되고 커다란 은행나무 밑을 지나게 된다. 이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223호로 지정된 보호수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경기도에 있는 용문산 용문사에도 있고, 영국사에서 멀지 않은 금산 보석사에도 있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싱겁도록 삐죽 키만 자랐다면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볼륨감 있는 여인네 몸매를 닮은 잘생긴 나무다.
▲ 따뜻하게 느껴지는 노란색 요사채 벽과 가지 앙상한 나무가 깊은 가을을 느끼게 한다. |
ⓒ 임윤수 |
영국사 은행나무는 그 생김새만 눈길을 잡아두는 것이 아니라 아주 독특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서쪽으로 뻗은 가지 중 하나가 아래쪽으로 자라 땅에 뿌리를 내렸고 여기서 다시 새 나무가 솟아올라 어른 허벅지만큼의 굵기에 7m 이상의 높이로 자라고 있다.
본 나무와 가지가 뻗어 다시 솟은 은행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와 손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굵고 거칠지만 두툼해진 나뭇결에서 풍상의 세월을 살아온 할머니 텁텁한 피부가 느껴진다. 넘어질라 다칠세라 손자를 보듬고 있듯 그늘 드리워 비바람에 보호하고 있는 은행나무의 모양세가 영락없이 손자를 안고있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수북히 쌓여 뿌리로 돌아갔다 내년쯤 새 잎으로 다시 자라날 샛노란 은행잎이 윤회를 생각케 하고 솜이불처럼 푹신한 느낌과 따스함을 주니 각박한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1300여년 동안 한 자리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각양각색의 행태를 지켜보았을 나무 아래에 서니 왠지 자신이 작게만 느껴짐도 감출 수 없다.
누각아래 통과하니 천태산을 배경으로 대웅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땅에 내려앉은 가을을 좀더 구경하라는 듯 경내 마당엔 떨어진 빨강단풍이 그대로 있다.
▲ 영국사 맞은편에 있는 망탑봉엔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애틋한 사랑과 구국기도의 정성이 깃들어 있는 듯 하다. |
ⓒ 임윤수 |
고려시대, 홍건적의 침입으로 송도를 빼앗긴 공민왕은 왕비인 노국 공주와 조정의 육조 대신들과 함께 남으로 가던 피난길에 현재의 영국사가 있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을 지나게 되었다.
석양이 곱게 물들고 산새도 집을 찾아드는 해질녘, 인적 드문 계곡어디에선가 '데∼엥 뎅' '데∼엥 뎅'하고 장엄하며 아름다운 범종소리가 울려왔다. 불심 돈독한 공민은 행차를 멈추게 하고 말에서 내렸다.
피난길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 종소리가 처량하게 들렸고 가슴에 너울처럼 불심을 일궜다. 왕은 대신들에게 그 종소리가 어디서 울리는 소리인지 알아보도록 하였다.
분부를 받은 신하들은 그 종소리가 멀지 않은 국청사에서 울려오는 소리며, 국청사는 신라 진평왕 30년 원광법사가 창건한 절로 대각국사 의천 스님께서 천태교학을 강하고 교선일치를 설파한 절임을 아뢰었다.
부하들의 보고를 받던 공민왕은 대각국사가 주석했던 국청사로 가서 위기에 처한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을 서원하는 기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국청사로 가려고 한다.
▲ 천태산 75m 직상승 암릉에서 바라본 영국사 전경이다. 연노란색을 띤 은행나무의 풍만함이 보인다. |
ⓒ 임윤수 |
결국 신하들은 강의 양쪽에 누대(樓臺)를 짓고 밧줄로 임시 다리를 놓게된다. 주변에 흐드러진 굵은 칡넝쿨과 가죽을 섞어 튼튼한 밧줄을 꼬아 강 양쪽을 밧줄로 연결한다.
다리가 놓아지자 왕이 탄 가마를 밧줄에 매달고 가마를 끌어당겨 일행은 무사히 강 건너 국청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 누대를 높이 세우고 다리를 놓았으니 이 강 마을은 지금도 누교리라 부르며 육조대신이 쉬었다 하여 육조동이라고도 부른다.
국청사에 도착한 왕은 왕비인 노국 공주에게 옥새를 맡기며 절 건너편 망탑봉과 마주한 봉우리에 왕비를 기거케 했다. 그 봉우리는 오르는 길이 험해 누구든 쉽게 올라갈 수 없었다.
공민왕은 노국 공주를 하루도 보지 않고서는 지낼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보고싶음을 달래기 위해 평탄치 않은 봉우리를 매일 오르내리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왕은 소가죽을 이용하여 망탑봉과 왕비가 있는 봉우리를 왕래할 수 있도록 구름다리를 놓게 했다.
다리를 완성하고 왕은 육조 대신들과 함께 국태민안을 염원하는 백일기도에 들어갔고 왕비도 처소에서 나라의 안녕을 서원하며 부처님께 간곡히 기도하였다.
▲ 천태산의 살아 있는 산신령 배상우 어르신이 설치한 로프는 코스 안내의 보시며 구원의 실천이었다. 로프를 이용하여 몸이 불편한 어린이도 어른들 부축을 밭으며 산을 오르고 있다. | |
ⓒ 임윤수 |
왕과 왕비가 지극 정성으로 올리던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밤, 왕비는 꿈에 대각국사를 만나게 되고 '부처님께서 왕비의 극진한 기도에 감응하시어 오랑캐를 물리쳐 주실 것이니 왕과 왕비는 오랑캐가 쳐들어온 곳을 바라보면서 염주를 한 알씩 돌리라'는 환청같은 전언을 듣게 된다.
꿈속이지만 왕비는 북쪽을 바라보며 대각국사로부터 건네 받은 염주를 열심히 돌리니 염주 알을 돌리 때마다 홍건적이 한 놈 한 놈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멈추지 않고 북쪽을 바라보며 열심히 염주를 돌리니 어느덧 홍건적을 다 물리치게되었다. 감응의 기쁨을 감추지 못해 왕의 손목을 덥석 잡는 순간 왕비는 꿈에서 깨어났다.
기도를 끝내고 돌아 온 왕에게 왕비는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왕은 꿈이 예사롭지 않은 길몽이라고 기뻐하며 정세운을 총지휘관으로 명하며 홍건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개경을 포위하고있던 홍건적들은 한파와 폭설로 더 이상 쳐들어오지 않았고 진지에서 해이해져 방비가 허술함을 탐지한 정세운은 그날 새벽 사방에서 일제히 적을 공격하는 기습작전으로 홍건적을 물리쳤다.
▲ 천태산! 높지 않은 산이지만 결코 낮은 산도 아니다. 천태산이 낮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곳곳에 스며든 전설과 실천적 산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
ⓒ 임윤수 |
승전으로 태평성세를 맞은 공민왕은 부처님의 가피에 불심이 더욱 깊어진다. 노국공주와 함께 환궁을 서두르던 공민왕은 국청사 부처님의 큰 보살핌으로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나고 평국안민(平國安民)케 되었다 하여 절 이름을 국청사에서 '영국사(寧國寺)'로 바꾸게 하였다고 한다.
영국사 오른 쪽에 있는 옥새봉은 그 때 왕비가 거처하며 옥새를 무사히 보관한 곳이라 하여 옥새봉이라 불리게 되었고, 노국공주를 애틋하게 사랑하던 왕의 발길을 대신하여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영국사에는 보물 533호인 3층 석탑이 경내에 있고 망탑봉 삼층석탑(보물 제 535호)과 원각국사비(534호) 그리고 부도(532호)등 4점의 보물이 있다.
영국사를 외호하고 있는 천태산엔 살아있는 산신이 있다. 천태산에 살아있는 산신은 바로 양산면 가곡리에서 금호약방을 경영하고 있는 배상우씨로 나이가 70이 훨씬 넘은 어르신이다.
배상우씨는 18년 전부터 부지기수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천태산 곳곳을 구석구석 뒤져 등산코스를 개발하고 암릉 곳곳에 자비로 안전시설을 설치하고 안내도를 비치하였다. 천태산을 찾으면 75m 직상승 암벽을 타게되는 짜릿함도 맛보게 되는데 이 코스는 물론 다른 코스를 포함한 곳곳의 로프와 안내판엔 배상우씨의 산 사랑과 인간사랑이 진하게 배어있다.
18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천태산을 찾아 인간들의 교만함이 남긴 흔적 치워 산 달래고, 뭇 사람의 안전을 지켜내니 이이가 바로 천태산에 살아있는 산신령이 아닐런가. 배씨는 오늘도 낡은 로프를 교체하고 보수하기 위해 산엘 오르시니 커다란 보시를 베풀러 가시는 길이 틀림없다.
너럭바위에 가부좌 틀고 명상에 잠겨 본다. 바람소리, 가을냄새, 모아졌다 흩어지는 구름 속 인연들 이런저런 소리와 허상들이 귓가에 맴돌고 눈앞에 아롱댄다. 눈뜨고 다시 둘러보니 저 아래 영국사에서 국태민안을 염원하던 노국 공주와 공민왕의 불심이 전이되듯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7)-설령산 성륜사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연화대로 오르셨던 '청화 큰스님은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하는 부질없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곳에선 가셨지만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남을 알고 계실 테니 오는 듯이 가셨고 가신 듯이 다시 오시리라 생각하니 막연한 위안이 생긴다.
춘향골 남원과 곡성을 지나 27번 국도를 달리다 보니 저만치 전남과학대학이 보이고 옥과면을 외호하듯 둘러싼 설령산(雪靈山)이 보인다. 넓은 주변 탓인지 높게 보이지 않으나 범상치 않게 보인다.
성륜사 사무장의 전언에 의하면 나라 방방곡곡서 살생과 동족상잔이 벌어졌던 6·25때도 설령산에서 피난을 하였던 사람은 단 한 명도 다치거나 상하지 않았다고 하니 범상치 않은 산세에서 태평성세란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범종각과 승방을 지나게 되면 지장전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갈림길 나온다. 오른쪽으로 지장전이 보인다. |
ⓒ 임윤수 |
풍수지리에선 산을 용이라고 한다. 산을 용이라고 하는 까닭은 산의 흐림이 마치 꿈틀대는 생용(生龍)과 같기 때문이란다. 좌우로 굽이치고(左右屈曲) 위 아래로 꿈틀대며(上下起伏) 홀연히 굵어졌다 홀연히 가늘어지는(忽大忽小) 산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살아 꿈틀대는 용과 같다.
꿈틀대는 용이 뭔가를 휘감듯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그곳, 설령산 중턱 아늑한 곳에 성륜사가 있으니 경내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벽산당 금타화상 탑비와 부도탑 그리고 조선당(組禪堂)이 멀찌감치 가물가물 보인다.
시골의 작은 면소재지인 옥과면에서 지동천이라 하는 개울을 끼고 있는 도로로 접어드니 전형적인 시골 마을 가는 길이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난 시골 마을은 한적해 보인다. 사실 외형으로만 한적해 보이지 김장을 하고 월동 준비를 하느라 나름대로 분주할 것임을 알면서도 마음속엔 한가롭게 그려진다.
농로를 겨우 면한 정도의 포장길을 따라 차를 몰다 보면 야트막한 고개도 넘고 작은 다리도 건넌다. 보이지 않으나 촌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 농촌 마을로 들어서는 비포장 도로도 지나게 된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뜸해지던 집들이 작은 고개를 넘으니 보이질 않는다. 면소재지에서 10리쯤은 들어 온 모양으로 어느새 성륜사 일주문 앞에 서게 된다.
▲ 곱게 물든 단풍나무 사이로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의 문살이 아주 곱고 화사하다. |
ⓒ 임윤수 |
며칠 전, 청화 큰스님의 영결식이 있던 그 때 군중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설화처럼 이야기하던 큰스님의 청빈한 삶이 그려질 듯 그려질 듯 머릿속에 펼친 캔버스에 아롱대나 잘 그려지진 않는다.
온갖 잡다한 짓 다하고 돌아다니는 속물 중의 속물이 감히 선승 큰스님의 고고한 일상을 한순간에 그리려니 감조차 잡히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인파로 빼곡하였던 다비장과 주변이 휑하니 비었건만 비었다는 느낌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발길이 일주문을 들어서니 성륜사가 텅 빈 듯한 느낌이다. 청화 큰스님의 그늘이 성륜사를 꽉 채우더니 그 그늘이 사라진 탓인지 허전하단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성륜사는 20여 년 전 청화 큰스님이 원력을 세워 이곳,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설령산에 10여만 평의 터에 창건한 절로 특정 본사에 귀속된 말사가 아니고 대한불교 조계종 성륜불교문화재단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경내는 한적하기만 하다. 사진 중앙쯤의 건물 가운데 마당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
ⓒ 임윤수 |
청화 스님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24세(1947년)가 되던 해 송만암 스님의 상좌인 금타(金陀) 스님을 은사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출가하였다고 한다. 은사 스님인 금타 스님에게서 '청화(淸華)'라는 법명을 받게 되며, 불문에 들어 47년을 산중 선방에서 수행에만 전념하신 산승(山僧)이며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이라고들 한다.
큰스님은 전국 각지를 돌며 수행하다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고찰 태안사를 복원하고 서울의 광륜사와 이곳 성륜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청화 큰스님은 장좌불와(눕지 않는 생활)와 1종식(하루 한 끼만 먹는 생활)으로 평생을 수행하며 청빈한 구도자의 길을 솔선수범하신 분으로 입적하시기 전까지 성륜사에 주석해 계셨다고 한다.
멀리서 볼 때는 역동하듯 힘차게 흐르던 설령산 산세가 경내로 들어서니 아가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양팔처럼 부드럽게 성륜사를 안고 있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듯 하지만 그보다는 아가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양팔처럼 부드럽게 안으로 굽은 산세가 성륜사를 외호하고 있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장고한 역사가 없기에 역사성에서는 미천해 보이지만 당대를 대표할 최고의 선승이 창건하고 주석하였던 곳인만큼 성륜사는 선풍이 분명한 곳이다.
▲ 청화 큰스님의 사리 습과가 이루어지고 있던 조선당은 깔끔한 한옥으로 전망이 탁 트여 산하와 진입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 임윤수 |
일주문으로 들어서 금강문(천왕문)을 지나게 되면 좌측으로 종무소가 있다. 종무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며 보이는 건물들 대부분은 스님들이 공부하며 참선하는 승방이며 선방이다.
일반 절들에 비해 유달리 무단청의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그런 건물 대부분이 승방이나 선방이니 성륜사는 경내 자체가 선방이며 참선의 공간인 듯하다.
2층으로 된 범종각을 지나면 설법전이 나온다. 대중들이 생전 청화 큰스님의 설법을 들었을 공간이나 현재는 분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또한 이 설법전에는 스리랑카 정부에서 기탁 받아 봉안하고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에 평소에는 이를 친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단다.
좌우로 늘어선 승방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그곳에 지장전이 있고 지장전 위로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과 비슷한 높이지만 조금 떨어진 좌측에 커다란 건물이 있으니 바로 옥과미술관이다.
▲ 조선당 앞에는 군더더기 없이 단촐 한 바위와 절구가 놓여 있다. 큰스님의 청빈한 삶 또한 이처럼 깔끔했었을 듯하다. |
ⓒ 임윤수 |
전라남도 옥과미술관은 아산 조방원 화백(雅山 趙邦元 畵伯)이 평생 동안 수집한 간찰(簡札, 오늘날 편지)과 서화(書畵), 서첩류(書帖類), 성리대전 목판각(性理大全 木板刻)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백제·통일신라 시대 암·수막새와 고문서, 전남 중진작가들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대웅전에서 조금 더 가파른 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선방으로 가게 된다. 선방은 영결식 날 사람들이 말하던 청화 큰스님의 맑은 모습이 떠오를 만큼 깨끗한 한옥의 건물로, 탁 트인 전망이 막힌 마음도 뚫어줄 듯하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조선당(組禪堂)과 청화 큰스님의 은사 스님인 벽산당 금타 화상의 탑비와 부도탑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청화 큰스님은 은사 스님에 대한 공경과 예를 탑비와 부도탑으로 후세에 남겼으니 이 또한 실천적 설법이라 생각된다.
조선당은 성륜사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건물로 한마디로 마음조차 깨끗하게 해 줄 만큼 깔끔한 주변에 깔끔한 구조다. 동그랗게 둘러싼 산의 중앙에 자리잡아 포근하게 안겨 있고 산하를 굽어보듯 시야가 넓어지니 혼탁한 마음이 사라질 듯하다.
조선당의 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뭔가에 열중하던 스님이 흠칫 놀라며 손짓으로 나가라 하신다. 언뜻 보아도 청화 큰스님의 사리를 습과하는 과정인 듯하다.
▲ 성류사 제일 높은 위치에 청화 큰스님의 은사스님 되는 벽산당 금타화상의 탑비와 부도탑이 있다. 청화큰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공경과 예를 탑비와 부도탑으로 후세에 남겼으니 이 또한 실천적 설법이라 생각된다. |
ⓒ 임윤수 |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다시는 못 보게 될 저 광경, 큰스님의 사리를 습과하고 있는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꾸중 한 번 듣고 기회의 사진을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
선뜻 결정이 되지 않는다. 멈칫거리며 스님의 손짓에 따라 일단 문을 닫고 나니 '인연이 아닌 것은 따르지 말라'는 생각이 홀연히 찾아 든다. 큰스님은 입적하시기 전에 "올 때도 빈손으로 왔는데 굳이 마지막 가는 길 호화롭게 할 필요 있냐"며 "죽은 뒤 거적에 말아 일반 화장터에서 화장해 아낀 돈은 불우 이웃 돕기에 써달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한다.
이 말씀엔 '사리를 거두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유추된다. 자칫 선(禪)과 법력의 척도를 사리의 유무와 다소만으로 판가늠할 속인들의 우매한 입방아를 사전에 차단하며 또 다른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큰스님은 전신이 사리라 할 만큼 부지기수의 사리가 습과되고 있다고 한다.
▲ 경내 건너 쪽에 전라남도옥과미술관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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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8일 오후, 가슴을 뛰게 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다름 아닌 큰스님의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가 19일 오후 5시까지 주어진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수백 리 길 마다 않고 부랴부랴 찾아가니 계획이 변경되어 사리는 친견을 할 수 없단다.
18일 하루는 참배자들에게 친견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18일 저녁 문도회에서 큰스님의 유지에 대한 견해 차로 당장의 사리 친견은 취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추후에도 그 사리를 신도들에게 친견(공개)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아직 서지 않았다고 한다.
▲ 성륜사에 곳곳에는 승방과 선방이 있다. 무단청의 건물이 한층 깔끔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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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로든 연락을 받거나 소식을 듣고 큰스님의 사리를 친견하고 카메라에 담아 보겠다 불원천리 성륜사를 찾아 온 기자를 포함한 적지 않은 내방객들에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인연이 아닌 것을. 인연이 아니려니 하고 마음을 접어도 아쉬움은 감출 수가 없다. 한적한 성륜사 곳곳을 들려 참배하고 둘러보며 일주문을 뒤로하고 터벅터벅 걷다 보니 '청화 큰스님이 생존해 계시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반문이 생긴다.
사리 자체를 거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성급했던, 실수였던 일단 친견을 공개하였었다면 그것을 실천하였을 듯하다. 성급함이나 실수에 따른 과오는 당신이 평생 떨치고자 하였던 삼독(三毒)의 하나인 치(癡, 어리석음)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곤 그 어리석음에서 온 실수를 깨치기 위해 더더욱 수행에 정진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승가의 율을 알지 못하는 속인의 옹졸함일까?
▲ 설법전에는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기증 받아 봉안중인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고 평소에는 친견도 가능하다고 한다. 현재는 청화 큰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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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던 번복된 결정은 많은 사람들을 황당하게 하고 혼동시켰으며 입장을 곤란하게 한 것만은 사실이다. 차제에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고 가신 큰스님의 유지가 잘 지켜지고 전이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간절하다.
성륜사는 호남의 길지(吉地)에 아름답게 피어난 피안의 길목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당대 최고의 선승이 창건하고 그 선풍이 그늘처럼 곳곳에 드리웠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
창건주 선승 청화 큰스님의 고명에 걸맞는 명찰로 속인들에게 길이길이 속세의 번뇌를 끊고 피안의 언덕으로 들게 하는 커다란 법계의 일주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속살 들여다보듯 한 눈에 본 속리산 절경
절에 가서 절을 할 때는 최소 삼배는 한다. 그 삼배는 불가에서 말하는 삼보 즉, 불·법·승에 대한 각각의 예인 셈이다. 숫자가 나왔으니 말이지 절에 가면 유달리 108이란 숫자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입구에 들어서는 계단이 108계단인 경우가 많고 목에 걸거나 팔목에 감고 다니는 염주알도 108개다.
거듭해서 지성으로 절하고 있는 사람이 절하는 숫자를 세어보면 108배인 경우가 많고 108번뇌란 말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무슨 번뇌가 그렇게 많아 108가지나 된단 말인가? 백팔번뇌(百八煩惱)란 무엇일까? 108번뇌에 대해도 이런저런 여러 가지 설이 있을 수 있겠다.
▲ 상고암에서 바라본 경업대 쪽 계곡은 가을과 겨울이 환상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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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육감(六感)을 가지고 있다. 시각(눈)과 청각(귀), 후각(코)과 미각(혀) 그리고 촉각(몸)의 오감에 뜻(마음)을 합하여 육감이라고 한다. 인간들은 이 육감을 통하여 뭔가를 보고 들으며 냄새맡고 맛보아 느낌으로 희노애락을 접하게 된다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 대상을 만나게 되면, 저마다 좋다(好), 나쁘다(惡) 그리고 그저 그렇게(平等) 느낄 것이다. 육감이 각기 다른 세 가지로 느끼게 되니 18(6x3=18) 번뇌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육감이 각각 괴롭다(苦), 즐겁다(樂)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捨) 느낀다면 이 또한 18가지(6x3=18) 번뇌가 되어 이 둘을 합하면 36가지의 번뇌가 된다.
이 36가지의 번뇌가 인간이 살아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삼세(三世)에 끊이지 않고 반복되니(36x3 =108) 108번뇌가 된다 한다.
그러니 108배는 삼보(三寶)를 생각하며 하심(下心)으로 돌아가 이 108번뇌가 끊어지길 바라는 자기 수양이며 기도의 외적 표현쯤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절을 하려면 몸을 낮추어야 하니 그렇게 함으로 하심을 갖게되는 자기 실천의 한 가지가 108배 아닌가 생각한다.
▲ 예기치 않게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내린 서설이 산중 암자 상고암을 가일층 산뜻하게 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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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궁극적으로 108번뇌는 자신의 마음과 느낌에서 오는 것이니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아상(我想)일 게다. 올 초하루부터 단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108배를 하고 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경우든 하루에 108배는 꼭 하는데 아직도 왜 108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작정을 한 것이기에 꼬박꼬박 오체투지로 매일매일 108배를 하고 있다만 우둔하고 게을러 그런지 하심은커녕 점점 더 교만해 지고 집착에 빠져드는 감도 없지 않다. 시작하며 그런 마음을 가졌듯 12월 31일, 108배가 끝나기 전까지 내가 왜 108배를 하였는지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산사를 찾아 헉헉거리며 가파른 오르막을 오를 땐 육감이 다 힘들거나 괴로운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비탈길 올라 산사에 들려 흐르는 물 한 바가지 벌컥벌컥 마시다 보면 거기서 오는 청량감과 성취욕이 육감을 상쾌하도록 행복하게 하니 그 맛에 걸어가는 산사를 찾는다.
게다가 가끔 무지개나, 아닌 날씨에 눈이라도 내려 뜻밖의 장관을 보게 되면 그 기분은 횡재에 덤을 얻은 기분이다. 속리산 상고암을 찾았을 때 그런 횡재와 덤을 얻었던 적이 있다. 남아있는 가을과 찾아 온 겨울이 조화를 이룬, 황홀하도록 멋진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 높고 깊은 산중 암자 요사채에도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수북히 쌓인 눈길 헤치며 아침 도량석 펼칠 스님들 모습이 춥게 그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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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진산인 속리산(俗離山)은 최치원이 이 산에 들어와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려 하고, 산은 속세를 여의치 않는데 속세는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라고 읊은 데서 유래했다 하니, 속세를 떠나는 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개의 산들이 그 형상에 따라 이름이 정해졌다면 속리산은 최치원이 산에서 느낀 감의 표현에서 유래하니 별다른 의미가 있다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유래는, 법주사가 창건되고 233년이란 세월이 흐른 신라 선덕왕 5년(784)에 김제 금산사에 있던 진표율사가 속리산을 찾게되었다 한다. 그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율사를 맞아들이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소들의 기이한 행동을 본 농부들은 미물인 짐승들도 깨우치고 뉘우치는 모습에 크게 감명 받아 머리를 깎고 율사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입산 수도하였다 한다. 그러니 결국 속리산은 속세와 이별하여 떠나는 산으로, 속리산(俗離山)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사천왕은 추위, 눈에 아랑곳 않고 상고암을 찾는 불자들을 수호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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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불꼬불 하기로 유명한 말티재를 넘고, 흔치 않게 벼슬을 갖고 있는 정2품 송을 지나 들어가게 되는 속리산엔 법주사외에도 그 산세만큼이나 많은 산중 암자가 있다.
호젓한 진입로로 들어서 울창한 오리숲을 지나면 법주사와 문장대로 가게되는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앞이 법주사지만 이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면 문장대 쪽으로 가게 된다. 차가 다닐 만큼 널찍하고 잘 다져진 흙 길이다. 길이 넓다고 하니 썰렁한 모습을 머리에 그릴지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송과 잡목들이 울창한 숲 그늘을 만들고, 개울 또한 동무하듯 나란하니 썰렁하지도 심심하지도 않다. 마음만 조금 열어주면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나무들의 속삭임까지 주워 담을 게 가득한 그런 길이다.
▲ 상고암에서 바라본 천왕봉은 깊은 겨울 색이다. 눈발 날리며 쌩하고 불어올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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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길을 3Km쯤 걷다보면 사람을 갈등하는 마음조차 씻겨줄 듯 맑은 물이 있는 세심정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곧장 올라가면 문장대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천황봉 쪽으로 들어서게 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속리산 문장대를 다녀왔다는 사람의 70% 이상은 이 삼거리에서 곧장 올라갔을 거라 어림된다.
속리산 상층부엔 3개의 산중 암자가 있다. 문장대 직전의 중사자암, 경업대 아래쪽의 관음암 그리고 비로봉 아래쪽에 있는 상고암이 바로 그 세 암자다.
속리산을 위에서 보면 W자 형상이 된다. 왼쪽이 문장대고 오른쪽은 천황봉이다. 문장대와 천황봉 사이에 우측으로 치우진 볼록한 부분이 비로봉이다. 사람들은 제일 높은 천황봉이나 문장대에 올라서야 속리산을 다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다. 속리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비로봉 아래 있는 상고암이다.
상고암은 세심정 삼거리에서 천황봉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넉넉한 계곡 따라 산길을 걷다 천황봉으로 가는 입구를 지나면 별장처럼 만들어진, 있어서는 안될 듯한 곳에 비로산장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상고암 입구가 나온다.
▲ 멀리 문장대가 보이나 우뚝 솟은 철제 안테나가 눈에 거슬린다. 바위 뿐이라 그런지 흰눈이 많이 날릴 듯 얼마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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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올라가면 철 계단으로 팍팍하기 그지없는 경업대로 가는 산행길이 된다. 법주사에서 이쯤까지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평탄한 길이다. 마지막 갈림길이 되는 이곳에서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비탈이 조금 급해지지만 심한 편은 아니다.
깔린 듯 펼쳐진 산죽 사이로 차곡차곡 만들어진 산길을 30여 분 오르다 보면 언덕 같은 능선에 오르게 되며, 그 때는 눈앞에 상고암이 와 닿는다.
상고암(上庫庵)은 그 이름에서 위쪽 창고쯤으로 어림할 수 있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 여쭈니 '법주사를 창건하며 사용할 목재를 저장하고 가공하던 장소가 바로 상고암 자리가 아니었겠냐'는 설명을 보현스님이 준다.
휙 지나면 볼 수 없으나 아래쪽으로 '중고암과 하고암 터도 뚜렷하다' 하여 내려오며 확인하니 석축된 모양새가 틀림없는 절터가 확인된다. 그러니 상고암은 법주사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 흰눈으로 한껏 멋을 부린 경업대도 한눈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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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암 산신각 뒤로 올라가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면 문장대도 보이고 천황봉도 보인다. 그뿐 아니라 불끈 솟은 기암에 음부처럼 감추어진 계곡 구석구석이 고개만 조금 돌리면 눈길에 다 들어오니 속리산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곳 아닌가 생각한다.
문장대와 천황봉이 높기는 하지만 그 위치와 높이 때문에 생기는 그늘로 볼 수 없는 절경이 꽤나 많은데 상고암에서 보게되면 속리산 전체가 펼쳐진 파노라마 사진처럼 전개된다.
상고암엔 과거불인 아미타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탁 트인 전망에 지형에 따라 높고 낮게 배치된 전각들이 조화를 이루고 비로봉에 안긴 듯 아기자기하다. 상고암을 찾게되면 놓치지 말고 꼭 보고 맛 봐야 할 것이 있다.
극락전 오른쪽으로 가면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처럼 각인된 사천왕상이 있고 그 앞으로 사천왕상을 응시하는 거북형태 바위가 있다. 오래 전 정과 망치만으로 살처럼 깎아내듯 조심스럽게 각인했을 석공의 불심이 살아나는지 거북은 살아서 꿈틀대고 사천왕은 금새 호통이라도 칠 듯하다.
▲ 굴법당 약사여래부처님이 지성으로 서원하면 육신의 고통에서 오는 번뇌쯤은 덜어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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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 앞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굴법당에 모셔놓은 약사여래부처님을 참배할 수 있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넘겨야 할만큼 커다란 통 바위 아래 굴법당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만병을 치유케 해줄 약사여래불이 봉안되어 있으니 성심으로 기도하면 심신을 개운케 하여 108번뇌 중 육신의 고통에서 오는 번뇌쯤은 쉬 덜어 줄 듯하다.
상고암에서 꼭 맛봐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물이다. 속리산 꼭대기에서 발원한 물은 동, 남, 서쪽으로 흘러 각각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금강으로 맥을 잇고 있어 삼파수라고 한다. 속리산 최고봉 발원지에서 시작한 첫 수맥에서 솟구치듯 흘러나오는 물이 바로 상고암에서 맛볼 수 있는 물이니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는가.
상고암 약수의 효험과 우수성은 고금을 통하여 잘 알려졌다. 세조가 신병 치료차 피접을 나와 속리산에 머문 적이 있으니 그때 정2품 송도 벼슬을 얻게 된다. 그때 세조는 속리산 아래쪽에 있는 복천암에 머물며 식수는 물론 약을 다릴 때는 반드시 상고암 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 극락전 앞 노랑 그리고 빨간 장미가 갑작스런 눈에 반쯤은 얼어있다. 그러면서도 보는 이에겐 '행복하세요' 하고 속삭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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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전 전국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약수들을 모두 모아 품평을 하였는데 그 중 상고암 물이 으뜸으로 평가받았다 한다.
활 굽듯 안으로 휘고 불거지듯 우뚝 솟아, 속살 들여다보듯 한 눈에 속리산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는 상고암에서 물 중 으뜸인 약수로 갈증 덜고 허기 달래니 여여롭기 그지없다.
단풍 위로 하얗게 내려준 섣부른 서설이 횡재로 육감을 즐겁게 하니 기꺼이 맞고싶은 환희와 희열의 번뇌에 젖어본다.
산사에서 덤처럼 예기치 않게 얻은 행복감마저 108번뇌의 일부분이니 끊을 수 없는 게 108번뇌인가 보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9)-능가산 월명암
어느 곳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헬리콥터의 '타타타' 거리는 엔진 소리가 왠지 불안하게 들린다. 서해안고속도로 부안IC를 들어서니 전경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고 하늘에선 한 대의 헬기가 지나가고 있다.
아주 우연히 그 시간에 헬기가 날아갈 수도 있으련만 왠지 공중을 선회하는 듯한 착각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부안 땅엘 들어서니 뉴스에서 접하였던 시위와 진압에 따른 격렬한 모습이 연상된 탓에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몇 차례 부안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내소사와 개암사를 찾아 들렸던 적도 있고 채석강을 찾느라 들렸던 적도 있었다. 올 봄, 새만금사업과 관련된 성직자들의 삼보일배로 또 다른 시선 집중을 받고 있을 때도 들렸고 부안해변 마라톤대회에 참석하느라 들른 적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렇게 불안감이 들지 않았다.
불안한 이유를 알지 못하기에 더 불안하니 이것이야말로 불안 중의 불안이 아닌가 모르겠다. 월명암을 들렸다 돌아가는 길에 매표소를 지나니 외딴집처럼 뚝 떨어진 음식점 주차장에도 전경버스가 진을 치고 있다. 한적한 곳, 가끔 지나는 차들이 고작일 반도의 구석까지 전경들이 들어와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니 차들이 읍내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 내리막길로 들어서니 나뭇가지 사이로 월명암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이니 월명암이 보이나 봄부터 가을까지는 잎새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게 뻔하다. |
ⓒ 임윤수 |
작은 시골 읍내라 마땅히 대기할 장소가 없는 전경들은 구석진 외곽에 대기하다가 연락을 받으면 읍내로 출동을 하는 모양이다. 죄 없는 젊은이들이 다시금 상잔의 현장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 진다.
왜 그렇게 한적한 곳에조차 그들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에, 그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전이되어 그렇게 불안하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안 IC를 나와 읍내를 지나는 30번 국도를 따라 31Km, 40여 분 달리니 월명암으로 오르는 남여치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를 지나 얼마가지 않아 가파른 비탈길이 시작된다.
유료 입장을 하는 곳이기에 길은 잘 관리되고 있는 듯하나 정말 만만치 않은 길이다. 가파른 경사도 경사지만 바닥에 깔려 있는 파석들이 자칫 발을 미끄러지게 하기 십상이다.
▲ 마당 앞 우뚝한 감나무엔 빨간 홍시가 그대로 달려있다. 일손이 없어 아직 거둬들이지 못한 것인지 산짐승의 먹거리로 남겨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빨간 홍시가 수묵화에 찍힌 채색처럼 산뜻함을 준다. |
ⓒ 임윤수 |
서두를 것 없이 나무 아래 융단처럼 넓게 펼쳐진 산죽 사이로 또렷한 산길을 따라 한 발 한 발 걷는다. 그렇게 걷다 갈증이 생길 무렵엔 옹달샘이 보인다. 이제 나무들은 완전히 겨울 채비를 한 듯하다. 계절에 따라 나무 껍질은 색을 달리한다. 관심 없이 보면 그게 그것인 듯 하지만 가을색 다르고 겨울색 다르다.
잎새를 다 떨군 나무들과 사철 푸른 소나무가 구릉 따라 곡선을 만들고 완만한 음영을 그려내니 조화로운 산색이 만들어진다. 흐르는 땀도 닦을 겸 멈추어 서서 내려다 본 산 아래 골짜기들이 입체적인 그림을 만들고 있다. 알록달록 화려하지 않지만 수묵화처럼 깊은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겨울 산색이다.
그런 산길을 따르다 무심결에 도착한 옹달샘이 반갑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야 무심결이 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서두르면 나무가 보여주는 겨울색도 볼 수 없고 헉헉거리느라 산사 찾는 재미가 반감될게 뻔하다.
많은 사람들이 갈증을 덜었을 옹달샘은 정갈하다는 표현이 딱 좋을 만큼 깨끗하다. 덮여진 나무 뚜껑을 여니 한 말(20리터)쯤의 물이 들어갈 정도의 동그란 항아리가 묻혀 있다.
▲ 부설거사의 딸인 월명의 이름을 따 월명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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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은 돌로 채워진 항아리엔 정화수(井華水)처럼 맑은 물이 조금씩 넘쳐 흐르고 있다. 바로 이 물 맛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월명암을 오르는 길은 서두를 길이 아닌 듯싶다.
발걸음 재촉하다 보면 주변의 산세와 나무들이 들려 주고 보여 주는 많고 많은 법문과 감미로운 속삭임을 놓치기 쉽다. 뿐만 아니라 음미하듯 맛보아야 느낄 수 있고 영혼까지 맑게 해 줄 물맛은 조급함에서 오는 갈증을 덮어버릴지 모른다.
지그시 눈감고 가슴 가득 물맛 담으며 가던 길 조금만 더 걸으면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에 올라서면 갈림길을 만나게 되나 한 쪽에 출입금지표시가 되어 있어 길 헤맬 이유는 없다.
내리막길로 들어서니 나뭇가지 사이로 월명암이 한눈에 들어온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이니 월명암이 보이지 봄부터 가을까지는 잎새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게 뻔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월명암도 그저 그렇고 그런 산사 중의 하나에 불과한데 왜 "월명암, 월명암"하는지 알 수가 없다.
몇 걸음 더 걸어 월명암에 들어서게 되면 "와!"하는 감탄을 토하게 된다. 어디에 숨어 있다 어떻게 터진 것인지, 오밀조밀한 산길에 광명 쏟아지듯 갑작스레 전망이 탁 트인다. 멀리 보이는 산세가 몽실몽실하다.
▲ 흔치않게 재가불자 한가족 4명이 득도한 성지이기에 <사성선원>이라 한다. 이 사성선원은 득도한 일가족 4명의 불심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인간의 근본이라 할 애틋한 사랑이 녹아있는 선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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밋밋하게 몽실 몽실한 게 아니고 동글 동글한 형태의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바위가 동글동글한 게 아니고 산세가 동글동글하다. 변산반도의 군봉들이 한지에 그려진 산수화 같이 그렇게 월명암 앞에 몽실 몽실 솟아 있다.
마당 앞 우뚝한 감나무엔 빨간 홍시가 그대로 달려 있다. 일손이 없어 아직 거둬들이지 못한 것인지 산짐승의 먹거리로 남겨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빨간 홍시가 수묵화에 찍힌 채색처럼 산뜻함을 준다.
월명암 앞으로 나 있는 산길을 따라 계속 걷게되면 직소폭포를 지나 내소사에 들를 수 있다.
월명암은 대둔산의 태고사와 백암산의 운문암과 함께 호남의 3대 성지로 꼽히고 있다. 월명암은 여느 사찰들과는 달리 스님이 아닌 재가불자(在家佛子)인 부설거사에 의해 1300여 년 전인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월명암의 창건에 얽힌 설화를 보면 너무 인간적이며 가족적이다. 많은 명찰들이 고승들의 깊고 큰 원력이 창건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면 월명암은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가족간의 진하고 따뜻한 혈육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별다른 장비를 사용 할 수 없는 이곳에선 지게가 유일한 운반수단인 듯하다. 지게는 스님의 손때가 묻어 길이 잘 나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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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을 창건한 부설(浮雪) 거사는 신라 때 사람으로 서라벌 남쪽에서 태어나 불국사로 출가해 원정선사를 섬기다 도반(친구)인 영조, 영희와 더불어 '법(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게 된다.
법을 찾는 구도의 길에 오대산으로 가게 된 그들은 지금의 만경에 이르러 '구무원'이란 청신도의 집에 묵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묵었던 구무원의 집 앞에는 하얀 연꽃이 피는 백련지(白蓮池)가 있었다.
구무원에게는 묘화라고 하는 딸이 한 명 있었는데, 묘화는 자신의 집에 머물며 이야기하듯 들려 주는 부설 거사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애달프게 울더니 부설과 결혼하기를 갈망하게 된다. 어찌된 일인지 묘화 아가씨는 부설과 부부가 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막무가내로 부설에게 매달린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섰던 부설로서는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묘화의 간청이 너무도 진지하고 애절하여 쉽사리 떨칠 수도 없게 되었다. 부설 거사는 장고 끝에 도반인 영조와 영희를 먼저 떠나보내고 마음을 결정하기로 한다.
▲ 한 겨울 산사의 반찬이 될 무말랭이가 햇살에 말려지고 있다. 꾸둑꾸둑 마른 무말랭이가 별맛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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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무원의 집에 머물며 고심하던 부설 거사는 백련지에 만개한 연꽃들이 물위에 담담히 떠 있음에서 뭔가, 물에 잠겨 있으나 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을 보고 결혼을 하더라도 속세에 물들지 않으면 될 것이라는 점을 깨우치고 마침내 묘화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결정한다.
남녀가 결혼하니 자연스레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니 그들이 바로 아들 등운과 딸 월명(月明)이다. 가정을 꾸려 2명의 자식을 둔 뒤 부설 거사는 다시 수도에 전념하다 결국 일생을 마치게 된다.
평생을 구도의 길만 찾아다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탓에 부설 거사가 입적한 후 자식인 등운과 월명도 동시에 머리를 깎고 불자의 길을 따른다.
부설의 설법에 감동 받아 죽음조차 각오하며 결혼하기를 원했고, 결혼 후 남편이 다시 구도의 길을 가도록 기꺼이 마음을 열어 주었던 묘화 부인은 백십 세의 장수를 누렸다고 한다. 임종이 다가온 묘화 부인은 소유의 전재산을 내어 사원을 세우고 사원의 이름을 '부설원'이라 하니 월명암의 사기(史記)가 시작된다.
훗날 산문의 큰스님들이 암자를 짓고 여기에 부설 거사의 혈육인 두 자녀의 이름을 붙이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등운암과 월명암이다. 그러니 월명암은 일가족이 득도를 한 불교의 성지이자 징표인 셈이다.
▲ 마당 앞 커다란 나무에 엉클한 까치집이 서글퍼 보이지만 거기엔 까치들만의 사랑과 다정함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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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만선각, 월상원과 묘적암 등 많은 전각이 있지만 제일 위쪽엔 사성선원(四聖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사성선원은 득도한 일가족 4명의 불심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인간의 근본이라 할 애틋한 사랑이 녹아있는 선원으로 생각된다.
월명암의 원래 법당 위치는 현재 불사중인 대웅전 자리였다고 한다. 월명암도 다른 절처럼 전소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조선시대에 와서 진묵대사가 중창하고, 철종 때 다시 크게 중창한다. 계속하여 우리 나라를 침탈하려는 일본군과 맞서기 위해 의병이 봉기하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는 도중에 소실되고 복구되는 역사를 밟게 된다.
<月明庵>이란 편액이 달려있는 관음전 뒤쪽에 불사중인 대웅전은 4년 전부터 주지로 주석하고 있는 천곡 스님이 원력을 세워 원래의 월명암 터에 법당을 불사중이니 머지않아 월명암은 원래의 터에 다시 서게되는 것이다.
'월명암'하면 낙조를 꼽는다. 그런데 월명암 낙조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석양길이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를 전후한 여름에는 서해 바다로 일몰이 되어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지만 요즘 같은 겨울엔 석양길이 산중이니 마음에 그리던 낙조는 기대할 수 없다.
▲ 쌍선봉엔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신선처럼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새만금도 위도도 한눈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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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장관인 낙조를 볼 수 있는 낙조대가 월명암의 뒤쪽이라면 그 우측엔 쌍선봉(雙仙峰:498m)이 있다.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신선처럼 자리잡고 변산반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듯하다.
스님이 일러주는 대로 길을 찾아 쌍선봉에 오르니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다. 두 손을 뻗으면 하늘로 솟을 듯하고 두 발을 뻗으면 발 아래 군봉들이 예를 갖출 듯하다.
흐릿한 날씨 탓에 또렷하게는 볼 수 없으나 멀리 위도가 보인다. 시위에 참가한 부모와 진압에 투입된 자식이 상잔 아닌 상잔을 치르고 있는, 부안의 중심에 선 아픔의 섬 위도! 그 위도가 한 눈에 다가온다.
쌍선봉에서 바라본 위도와 새만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자연과 세월에 순응하며 있던 그 자리에 아주 평화로운 모습으로 있다. 위도의 작은 모래알보다 더 짧은 삶을 살아갈 간사한 인간들이 잔꾀로 서로를 속박시키고 공멸(公滅)의 구렁으로는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 흐린 날씨 탓에 또렷하게는 보이지 않으나 위도는 평화롭게, 그냥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 임윤수 |
쌍선봉을 내려오다 다시 옹달샘가에 앉았다. 물맛 속에 부설 거사와 묘화 부인의 애틋하고 순결한 사랑이 녹아난다. 그리고 등운과 월명과 함께 하던 한 가족의 혈육애가 가슴에 담아진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위도를 가운데 놓고 상잔(相殘) 아닌 상잔으로 많은 사람들의 살 맛을 강탈하고 국력 소모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이 한 번쯤 쌍선봉에 올라 위도를 바라보면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와 여유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냉수 먹고 정신차려"란 말이 있듯 월명암 오르는 산길에 있는 옹달샘 물은 시기심과 공명심에 들뜬 마음들을 씻어줄 듯하다. 산사 찾아가는 길에 자연이 들려주는 커다란 법문에 귀 한번 기울이면 화해와 화합의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월명암! 거기엔 부설 거사와 묘화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과 혈육의 끈끈함이 짙게 배어 있다. 변산반도가 한눈에 다 보이고, 모든 소리 다 들을 수 있다는 월명암의 관음보살님은 요즘의 부안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여쭈고 싶으나 여쭐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진실을 알고 계실 관음보살님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혜안이 없음을 한탄하며 능가산을 내려온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0)-월악산 덕주사
▲ 덕주골에서 800m정도 올라가면 덕주 산성이 나온다. 이 덕주루가 덕주사의 일주문을 대신하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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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月岳山)은 삼팔선 이남에서 두 번째 가라하면 서러울 정도로 험준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 한 번이라도 올라본 사람은 알겠지만 코스에 마련된 수많은 철제 계단들은 차라리 사다리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로 곧추세워져 있다.
일행이라도 있어 바짝 줄을 서서 오르게 되면 자칫 앞사람의 엉덩이에 머리나 코를 부딪히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을 만큼 가파른 경사가 몇 군데나 된다.
월악산의 월(月)자는 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음양(陰陽)으로 볼 때 음에 속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월악산은 음기가 강한 산이라고도 해도 될 듯 싶다. 뜬금 없이 음양을 이야기하니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한문 더덕더덕한 서책이 연상될지 모른다. 그리고 막연하게 고리타분한 이야길 하려나 보다하고 피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음양은 엄연히 존재한다. 남자와 태양 그리고 불과 낮이 양(陽)이라면 여자와 달 그리고 물과 밤은 음(陰)에 속한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이니 뭐니 하면 우선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곰팡이 핀 삿갓이나 곰방대쯤을 떠올리는 경우가 흔 할텐데 음양의 조화가 없이는 잉태도 있을 수 없고 존재와 현상(現象)이란 자체가 존재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덕주사 대웅전 앞쪽에 불끈 솟은 남근석 4기가 남아 있다. 그 형상이 원만하지 않고 많이 훼손되었지만 남근석임은 분명하다. 음양의 균형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지성을 올리던 대상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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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음양은 표현하는 방법과 용어만 다를 뿐 현대과학과 물리현상을 설명하는데도 빠트릴 수 없는 근거이며 해법이다. 먼저 음양오행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를 기본으로 하여 상극(相剋)과 상생(相生)의 관계에 있으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내포되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정치인들이 입발림처럼 기회 있을 때마다 써먹는 '상생의 정치'란 말도 결국은 오행의 상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듯하다.
목, 화, 토, 금, 수 5자로 삼라만상의 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하니 코방귀를 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억지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디지털이란 것도 알고 보면 0과 1의 반복 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5자를 반복 조합하여 삼라만상을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에 수긍하게 될 듯싶다.
▲ 불사되어 많은 세월은 흐르지 않은 듯 대웅보전의 단청이 산뜻하다. |
ⓒ 임윤수 |
월악산은 그 험준한 산세나 우뚝한 영봉의 형상으로 보아 양기의 산일 듯 한데 산명에 왜 음을 뜻하는 월(月)자를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면 월악산의 뒤가 되는 수산리 쪽에서 관망하여야 할듯하다.
산 내부에서는 울퉁불퉁한 남성의 근육질 같은 양기를 느끼게 되지만 수산리에서 바라보는 월악산은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형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거리를 걷다보면 돗자리를 펼쳐놓고 두툼한 안경을 쓴 할아버지들이 소위 관상(觀相)을 봐 준다거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봐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상이나 사주팔자는 모두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일이다.
관상은 말 그대로 그 사람의 드러난 외형을 근거로 운명을 이야기하며, 사주팔자는 외형과 상관없이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근거로 운명을 점치는 일이다.
▲ 산 그림자에 덮인 관음전이 한적해 보이고 마당의 감로수가 갈증을 달래 줄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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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을 점치는데 생김새와 상관없는 사주팔자와 생김새로 말하는 관상법이 있는 것처럼 산의 기를 구분하거나 명당자리를 찾을 때도 '형기론'과 '이기론'이란 방법이 있다.
풍수에서는 산을 음으로 보고 물을 양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산이 무조건 음이라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 따라 음인 산이 양도 될 수 있다. 그 예를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63층 빌딩의 중간쯤인 30층이 1층보다는 높지만 63층보다는 낮다는 이치를 생각하면 이해가 갈 듯도 싶다. 즉 30층이 63층에 비하면 음이 되지만 1층에 비하면 양이 되는 원리다.
형기론은 관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산세나 형태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며, 이기론이란 오행에 근거하여 산이 자리한 방향(坐向)과 시간 등을 세분하여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관상은 기가 막히게 좋으나 사주팔자는 영 엉망일 수 있듯, 외형으로 판단하는 산세가 좋다고 오행을 근거한 이기까지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으니 딱히 한 가지만을 가지고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양과 음을 주장 할 수는 없겠다.
▲ 자연 암벽사이에 조성된 산신각엔 조각된 산신상이 모셔져 있으며, 여느 절들의 산신각과는 다른 분위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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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높이가 1097m나 되는 영봉(靈峰)을 주봉으로 하고 있는 월악산은 산명(山名)에 음에 해당하는 월(月)자가 사용되고 있으니 그 연유를 알려면 백두대간의 전체적 흐름과 좌향을 좀더 자세히 보아야 좀더 구체적인 답과 설명이 나올 듯 하다.
일부에선 이와 상관없이 '달이 뜰 때면 장대처럼 우뚝 솟은 영봉에 그 달이 걸린다'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을 붙었다고도 한다.
월악산을 삼국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렀으며, 후백제 때 견훤(甄萱)이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되어 와락산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그런 월악산, 산세와 험준함이 근육 좋은 남성미를 연상케 하고, 떠오르는 달이 걸릴 듯 우뚝 솟은 월악산엔 신라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의 애환이 담긴 덕주사가 있다.
그 덕주사 대웅전 앞쪽엔 음양의 조화를 위한 것인지,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빌던 염원과 간절함이 담긴 대상물의 흔적인지 불분명 하지만 어느 절에서도 보기 힘든 4기의 남근석이 절 입구에 꼿꼿하게 서 있다.
▲ 고드름 주렁주렁 달린 바위 밑에 벌통이 보인다. 한여름 열심히 일해 꿀을 제공해 주던 벌들도 동안거에 들어간 듯하다. |
ⓒ 임윤수 |
덕주골에서 넉넉하게 포장된 진입로를 따라 800여m쯤 올라가면 산문을 대신 할 듯한 덕주루를 왼쪽으로 하여 개울 같은 계곡물을 건너게 된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좌측으로 덕주사 전각들이 나온다. 불사되어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듯 단청이 또렷하다. 왕년의 규모를 복원하려는 듯 여기 저기에 장기불사 계획을 가늠케 하는 안내표시가 보인다.
전각의 전체적 배치는 산길을 따라 길쭉한 一자 형태로 늘어져있다. 대웅보전을 기준으로 하여 영봉으로 가는 오른쪽으로 약사전과 관음전, 종무소, 요사채 등이 차례로 있으며 끝 쪽에 부도전이 있다.
대웅전 좌측으로는 대불정능엄신주비와 산신각이 있다. 약사전은 전방이 개방된 목조 전각에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으며 산신각은 자연암반 사이에 조성되어 있어 여느 산신각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마애불과 영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대웅전 앞쪽에서 계곡물을 건너는 산길을 따라야 한다.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서기586)에 창건되었으며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신라 경순왕이 천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내준 뒤 그 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 곳에 들어와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미륵불(보물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친 뒤부터 산 이름이 월악산이라 바뀌어 불리고, 절 이름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 한겨울 산사의 좋은 국거리가 될 시래기가 탁 트인 창고에서 말려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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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륵리 석불입상과 월악산 중턱에 있는 마애불엔 덕주공주가 오빠인 마의태자와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인 경덕왕을 그리워했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다.
아버지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된다.
일행은 그곳에서 야영을 하며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날 밤 마의태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왕자에게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西天)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며,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億兆蒼生)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현몽하였다 한다.
잠에서 깨어난 마의태자는 꿈이 너무 신기하여 누이동생인 덕주공주를 불러 간밤에 꾼 꿈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놀랍게도 같은 시각에 공주 역시 그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 덕주사에서 1.5km를 더 올라가게 되면 마애불이 있다.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오누이가 망국의 한을 달래며 조성하였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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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생각하고 두 남매는 계곡 물에 목욕재개 하고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배례 한 뒤 다음날 서쪽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된다. 일행이 서쪽으로 가며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일행은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며, 최고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아 석불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사다.
공주는 그대로의 삶, 불사에 전념하며 구도의 길을 걸음에 만족하였으나 왕권을 계승하지 못하여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동생인 덕주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금강산을 향해 떠난다.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져 혈혈단신이 된 공주는 출가하여 절에 몸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의 애틋한 부정을 그리워하고 오빠인 태자의 건승을 서원하며 일평생을 살았다 한다.
덕주사에서 다시 1.5Km쯤 더 걸어 올라가면 높이가 15m쯤 되는 커다란 바위에 암각 된 마애불이 있으니 이 마애불이 바로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오누이가 조성한 것으로 이곳을 상 덕주사라고도 한다.
▲ 월악산 영봉! 눈앞에 있는 듯 하지만 뒤로 돌아 사다리 같은 계단을 올라가려면 1시간 쯤은 더 올라야 한다. 하기야 신령을 만날 수 있는 영지에 오르는 것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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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에서 2시간쯤 걷다보면 오르게 되는 영봉(靈峰)은 말 그대로 신령스럽다. 정상인가 하고 올라서면 저만치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덩어리 산이 다시 보이니 그곳이 영봉이다.
능선에서 올려다 보이는 벼랑 위 영봉은 코앞인 듯 싶지만 영봉은 아직 멀었다. 신령스런 곳이니 만큼 마음을 더 청정할 기회라도 가지라는 듯 1시간쯤은 더 고행하는 산행을 감수해야 오를 수 있다.
최고봉을 영봉이라고 부르는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뿐이라고 한다. 산기와 천기가 만나고 사람과 신령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 듯한 그런 곳이기에 월악산 최고봉은 영봉이라 부르고 있는 듯 하다.
대웅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남근석은 월악산 기가 음기가 강한 탓에 양을 북돋아 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풍수상을 세운 것인지 아니면 남아선호사상이 짙었던 예전의 토속적 신앙에서 파생된 대상물이 남아 있는 것인지를 한 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절 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남근석을 보게되는 것은 산사를 찾는 또 하나의 별 다른 맛을 찾게 해준다.
▲ 영봉에서 굽어본 충주호와 산하는 아름답고 조용하기 그지없다. 비록 신령도 만나지 못하고 얻고자 하는 지혜의 단초도 얻지 못했지만 겨울산하를 한눈에 담았으니 자족하여야 할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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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의 기에도 음양의 균형을 맞추며 상생 위한 상생을 고민하였던 조상들의 지혜와 처세가 절실할 때가 요즘 아닌가 모르겠다. 수의 불균형에서 자칫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작금의 정치판이 음의 기가 강해서라면, 기의 균형을 위해 어떤 형상으로 양기를 북돋울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다보니 그 형상은 다름 아닌 검찰이라는 조직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민심인 듯 하다.
공멸로 가는 무조건적 상극보다는 공생으로 가는 절제된 상극, 공멸로 가는 무조건적 상생보다는 공생으로 가는 조화로운 상생의 지혜를 얻는 단초라도 얻고자 하나 오늘도 가슴엔 겨울 산사의 찬 공기만 가득 채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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