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집처럼 절벽에 매달린 절
황금욕조에 순금 세숫대야, 철렁이는 물침대니 뭐니 하면서 잔뜩 궁금증만 부풀려 놓더니 막상 공개되니 그런 이야긴 쏙 들어간 것으로 봐서 그냥 사람 사는데 사람 쓰는 물건 정도가 있는 모양이다.
탈로 많고 말도 많던 청남대는 대전과 청주를 경계로 자리하고 있는 대청댐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일국의 나라님인 대통령 별장이 들어설 정도라면 그 풍광이나 산세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키는 어렵지 않겠다.
▲ 팔각정에서 주차를 하고 조금 내려오면 가파른 철제 계단으로 현암사를 오르는 길은 시작된다. |
ⓒ 임윤수 |
현암사는 대청댐 잔디광장 맞은 편인 북쪽의 구룡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 전지왕 3년(406년) 달솔해충(達率解忠)의 발원으로 고구려 승려 청원선경(淸遠仙境)대사가 개산(開山)하여 창건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원효대사 등의 중창이 있었다고 한다.
▲ 계단을 올라 얼마쯤 오르다 보면 가쁜 숨 고르고 짊어진 업 놓고 가라는 듯 항상 비어있는 빈자리가 있어 찾는 길이 가벼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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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바지가랑이 둥둥 걷고 난간에라도 걸터앉으면 시원한 강바람에 시간가는 줄 모를 듯하다. 매달린 듯하고 떨어질 듯한 긴장감이 가끔은 가슴을 후련하게 해 준다. 비록 몸을 던지지는 못하지만 겹겹이 짊어진 이런 저런 업과 집착을 떨쳐버리기엔 딱 좋은 자리다.
팔각정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흐르는 물길 따르듯 조금 아래쪽으로 걷다보면 우측으로 철제 계단이 나타난다.
▲ 이것도 문명의 혜택이라고 해야하나 모르겠다. 지게질조차 쉽지 않을 만큼 가파른 현암사에서 유일하게 물건을 오르내릴 수 있는 도르래 삼태기가 눈길을 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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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줄기들이 향한 곳의 정점, 아홉 줄기의 물이 모여들기에 원효대사께서 구룡산이라 하였다는 그 곳에 현암사가 있다.
현암사란 절 이름은 이곳에 들러 수도를 하시던 원효대사가 지은 것으로, 절이 위치한 산을 중심으로 아홉 줄기의 강물이 뻗어다 하여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고 절이 벼랑에 매달린 듯하다 하여 현암사((懸巖寺)라 하였다고 한다.
▲ 가파른 비탈에 겨우 틀어 앉듯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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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청댐이 들어섬으로 구룡산 앞에는 세 개의 연못이 형성되었으며 국왕인 대통령이 기거하는 청남대가 들어서지 않았는가.
현암사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흥미 있는 전설도 갖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접근이 만만치 않은 옛날, 현암사는 무척 가난하여 스님들이 들어와도 먹고 살 방법이 없어 자주 떠나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젊고 착하며 불심이 강한 스님이 현암사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 젊은 스님은 열심히 기도하며 절대로 이 절을 떠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다.
▲ 삼성각 앞은 비쭉한 산죽들이 아늑할 만큼 눈가림을 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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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인 듯 너무 생생한 꿈에 놀라 잠에서 깬 스님이 꿈속의 노승이 일러준 대로 아궁이를 보니, 한 명이 한끼정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쌀이 있었다 한다. 젊은 스님은 꿈속에 노승이 사라진 쪽을 향하여 합장 삼배하고 그 쌀로 밥을 지어 부처님께 마지를 올린 후 자신도 공양을 하여 기운을 차렸다.
▲ 한 발을 내딛으면 대청댐에 닿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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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현암사에 오는 스님들은 아궁이에서 나오는 쌀로 끼니를 해결하며 수도에 정진할 며 불심을 지켜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 많은 스님이 절 살림을 맡아 살게 되었고 그 욕심 많은 스님은 매 끼마다 꼭 한 사람 분량의 쌀만 나오는 것에 불만을 갖게되었다. 한꺼번에 많은 쌀이 나오면 절도 좀더 크게 짓고 그러면 자신의 위세도 조금 더 커질 것이라는 집착을 갖게 되었다.
▲ 크고 작은 산봉우리에 몸 감추듯 숨어 흐르던 물줄기들이 구비 구비 따라서듯 한 곳을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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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부터 주지로 주석중인 주지 도공(道空)스님은 20여 년 불사원력을 놓지 않아 현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용화전, 산신각, 요사채 등을 건립하였으며 대웅전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5층 석탑도 조성하여 놓았다.
▲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5층탑이 청남대를 향하여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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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줄기의 물이 모인 구룡산과 용이라고도 표현하는 임금님(대통령)이 기거하는 처소였던 청남대 그리고 주지스님의 띠인 용이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한겨울 산사를 따뜻하게 해 중 장작이 스님들의 머리카락만큼 가지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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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2)-대둔산 태고사
다른 계절에도 신중해야하지만 음기가 강한 겨울엔 행동도 음적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낙상(落傷)을 당해 성치 않은 몸으로 산사를 찾게 되니 정말 조심해야 한다.
언제 내린 눈인지 응달엔 허연 눈들이 그대로 있다. 그냥 감상만 하는 풍경이라면 갈색 낙엽만 수북하게 있는 것보다 덜 단조롭고 색채의 대비가 뚜렷해 '보기 좋다' 할 수 있으나 걸어서 지나야 할 때는 그렇지 않다.
가파른 비탈길에 차곡차곡 다져진 눈길은 평지의 얼음길 못지않게 미끄럽다. 게으름을 피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소유의 자동차가 4륜 구동인 것을 과신하고 싶었는지 맨질맨질한 산길을 윙윙거리며 올라온 차들이 내려갈 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끙끙거린다.
▲ 일주문을 대신 할 듯 한 석문을 지나야만 태고사엘 갈수 있다. 바위에 써진 <石門>이란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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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미끄러지기라도 시작하면 까마득한 저 아래서 처참한 꼬락서니로 발견될 테니 그 끔찍함을 연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순간 교만함과 게으름을 책망하며 다음부터는 걷는 수고쯤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탈 게으름과 과신하지 않겠다는 겸손함을 깨우침으로 얻었다.
태고사를 찾아가는 길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나 절에서 200m여 정도 아래까지는 차 한 대쯤 다닐 넓이에 시멘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으니 꽤나 좋은 편이다. 그러나 겨울엔 포장도 소용없고 넓이도 필요 없다. 그냥 반들반들한 빙판이 전부기 때문이다.
다져진 눈들이 꽁꽁 얼어붙은, 얼었다 녹다를 반복하며 두툼한 얼음이 되어버린 산비탈 겨울 길을 걷거나 운전해 본 사람은 그 아슬아슬함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향이 틀어지고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몸도 차도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멈추어야 하는데 대책 없이 그냥 "어~ 어~" 하다 쿵하고 넘어지거나 나뒹구는 게 보통이다. 하물며 차를 운전하다 내리막길에서 그런 미끄럼을 타게되면 온몸이 젖도록 땀이 나는 것은 물론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냥 관세음보살을 찾거나 운 좋게 커다란 피해 없이 멈추어 서기만을 바랄 뿐이다.
▲ 석문을 들어서면 그때서야 태고사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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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를 찾아가는 길이 그랬다. 가파른 비탈길에 쌓인 눈이 다져지고, 얼었다 녹다를 반복하여 빙판을 이루어 조금이라도 방심하였다가는 나뒹굴기 십상인 그런 길, 4륜구동형 지프차라 해도 미끄럼을 타면 속수무책인 그런 길이였다.
'큰 두메의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대둔산은 전북과 충남 두 도에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두 도에서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절경의 산이다. 맥을 따진다면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이 호남의 만경평야에 이르기 직전에 불끈 솟은 암산(巖山)이다.
대둔산 낙조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태고사는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전국을 순례하며 불교를 전파하고 고행의 구도를 하던 원효대사는 이곳 태고사 절터를 발견하고는 너무도 기뻐 3일 밤낮에 걸쳐 춤을 추었다는 설화가 있을 만큼 절경이다.
"첩첩 쌓인 푸른 산은 부처님의 도량이며 맑은 하늘 흰 구름은 부처님의 발자취고 대자연의 고요함은 부처님의 마음"이라 하더니 태고사 자리가 딱 그렇다. 주변의 기암과 산세가 도량의 신장들처럼 우뚝하고 발아래 펼쳐지는 구릉들이 사시사철 흰 구름을 대신한 부처님 흔적 같다. 적막하리 만큼 고요한 주변은 마음에 일고 있던 모든 번뇌를 잠재울듯하다.
▲ 석문을 지났어도 침목 계단을 올라야 경내로 들어설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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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이 "태고사를 보지 않고는 천하의 명승지를 말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니 한국 12승지의 하나이며 호남 제1의 성지란 말이 조금도 손색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고사를 찾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나야 하는 석문(石門)이 있다. 대개의 절들이 갖추고 있는 일주문과 사천왕문 그리고 불이문의 역할을 한꺼번에 다 할 듯 웅장한 바위틈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이 문은 한 사람이 드나들기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며 시작되는 진입로는 50cm 정도로 길이를 맞춘 폐침목을 가지런하게 엮어놓아 깔끔한 계단으로 되어있다.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침목(枕木) 계단을 오르다 보면 절벽처럼 코앞을 가로막는 암벽을 만나게 된다. 그 암벽 사이로 문처럼 생긴 틈이 있으니 그게 바로 석문이다. 암벽에는 음각(陰刻)되어 붉은 색이 칠해진 '石門'이란 글씨가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그때서야 태고사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태고사를 정점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진 산세와 기암들은 태고사를 외호하기 위해 도열한 신장인 듯하다. 이쯤 되면 산세의 기이함과 오묘함에 불자가 아니더라도 저절로 두 손 모아 합장을 하게 된다.
▲ 기암들이 대웅전을 외호하듯 산을 두르고 있다. 이 자리쯤에서 원효대사가 춤을 추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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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경사지라 협소하기만 한 경내를 넓히느라 높게 쌓은 대리석 축대는 단순한 축대가 아니라 기도하며 수행할 수 있는 생활 공간이다. 축대 곳곳에 문이 달려있고 그 문으로 출입하는 스님들이 있는 것으로 봐 그곳은 방으로, 자투리 공간조차도 수행공간으로 활용한 알뜰함이 엿보인다.
계단을 올라서면 법당의 정갈함에 감탄이 절로 난다. <太古寺>란 편액을 달고 있는 대웅전 우측엔 극락전과 관음전이 있다. 좌측으론 지장전과 산신각이 있지만 산신각은 공양간 내부에 있는 작은 문을 들어서야 볼 수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관음전 우측, 암릉에는 범종각이 불사중이다. 암릉을 기반으로 웅장하게 들어서고 있는 범종각이 완공되면 울려 퍼질 종소리가 대둔산의 또 다른 명물이 될게 분명하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낙조대에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듣게되는 범종소리는 귓전에 머물지 않고 가슴부터 영혼까지 울려댈 게 틀림없으니 그 황홀감을 빨리 맛보고 싶었다.
▲ 굽어보는 산하가 평온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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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에 들려 참배하고 경내 전각을 둘러보다 보면 올라왔던 쪽으로 눈길이 간다. 대개의 산들이 그렇지만 태고사에서 바라보는 산하는 유달리 깨끗하고 아름답다. 탁 트인 전망이 가슴을 후련하게 하고 고물고물 한 산세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눈길을 조금씩 당기다 보면 다시금 눈길이 멈추는 곳이 있으니 바로 촛대바위다.
석문 위쪽으로 우뚝 솟은 바위가 있으니 바로 그 바위가 촛대바위다. 법당자리가 부처님 모셔진 단상이라면 이 바위는 분명 그 앞에 밝혀진 촛대형상이다. 하늘대는 촛불처럼 바위 꼭대기엔 세월의 풍상을 느끼게 하는 발가벗은 고목이 하나 있다.
산세의 기이함과 오묘함에 취해 두 눈 지그시 감으니 태고사에 전해지고 있는 원효대사의 기행적 전설이 현몽처럼 떠오른다. 태고사에서 수행했던 원효대사는 불심도 깊고 교리도 밝았지만 역술 또한 조예가 깊었다.
▲ 석문 위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엔 풍상의 세월을 느끼게 하는 발가벗은 고목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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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원효대사가 어느 날 밤 별자리를 보니 중국의 한 절에 불상사가 날 것이라는 괘가 나왔다. 무엇보다도 중생구제를 제일로 생각하던 대사는 깊은 생각 끝에 불상사에 대한 방술(防術)로 널판지에 '척판구중(擲板救衆)' 즉, '널판을 던져 사람들을 구한다'고 적어 중국 쪽으로 날렸다고 한다.
이때 중국에 있는 한 절에서는 나이 어린 동승이 해우소에 앉아 변을 보며 우연히 하늘을 보다 커다란 황금덩어리가 절 쪽을 향해서 날아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갑작스런 동승의 괴성에 놀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모두 밖으로 뛰어나오니 그 순간에 절 뒤에 있는 산이 무너지며 절을 덮쳐버렸다.
결국 동승의 괴성이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다. 때아닌 날벼락에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안정을 찾고 그 동승에게 괴성을 지른 연유를 묻자 날아온 황금덩어리 이야기를 하였다.
사람들이 동승이 말하는 대로 황금이 떨어진 곳으로 가보니 황금은 없고 널빤지에 '동방의 원효가 널을 던져서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다.
▲ 왠지 따스함이 녹아있을 것 같은 공간이다. 숙박을 하며 기도를 하면 이곳에서 머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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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를 찾으면 절경의 산세와 기암 그리고 절의 단아함에 감탄하게 되지만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고승 도천스님이 주석 해 있다는 사실이다. 세수 백수를 바라보는 도천스님은 삶 자체가 설법이며 또 설법 자체가 실천이다.
귓전을 맴돌다 허허하게 사라지는 백 마디 법문보다 더 가슴에 남는 그런 법문을 몸으로 실천하며 수십 년 동안 구도의 길을 걷고 계시는 큰스님이다. '한 번 보는 것이 백 번 듣는 것보다 낫고 한번 실천하는 것이 백 번 보는 것 보다 낫다(百聞不如一見 百見不如一行)'는 진리를 실천으로 법문 하듯 보여주고 있다.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도천 스님은 당신 스스로가 "나는 도인이 아니라 머슴이요"라고 말할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고 실천으로 법문을 대신하신 분이다.
도천스님은 1962년부터 6·25때 불에 타 폐허가 된 태고사 터에 움막을 짓고 나물죽을 끓여먹으며 40여 년 간 머슴처럼 일하여 오늘의 태고사를 손수 일궈낸 장본인이다. 그러니 태고사 석축에 들어간 돌 하나 기와 한 장이 스님의 땀이며 법문이다.
▲ 전각들이 정갈하다. 처마의 고드름과 연기 솟는 굴뚝에서 산사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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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성성한 삶은 할아버지 은사인 수월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어 도천스님이 그 맥을 계승, 실천하면서 수도의 한 방법으로 굳건히 자리잡은 듯 싶다.
도인이지만 머슴처럼 일하며 살아온 스님에게 있어 나이란 숫자에 불과할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인격 최고의 결정체인 정신이 몸뚱이의 노예가 돼 온갖 헛된 짓 다하다 패가망신하는 반면 도천스님은 법력을 높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몸뚱이의 주인답게 잘 부린 듯하다.
범인(凡人)들처럼 몸뚱이에 얽매이지 않고, 그 몸뚱이를 법력을 높이고 수행하는 데 백분 활용하였으니, 도천 스님의 법력이 높아지고 도인의 경지에 이른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당연한 일이리라.
쉬운 듯 하지만 쉽지 않은 것, 고귀한 정신이 몸뚱이의 노예가 되지 않는 그런 삶을 수십 년 동안 실천하고 보여주셨으니 그 자체가 도인의 삶이며 실천적 법문이다. 원효대사가 그 터를 발견하고 3일 밤낮을 춤출 정도로 뛰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머슴인 듯 하지만 여느 스님보다 큰스님인 도천 스님이 계시기에 태고사는 꼭 한 번 찾아 볼 호남 제1의 성지다.
▲ 올 봄 봉암사에서 있었던 서암스님의 영결식에 참석한 도천 큰스님이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계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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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 진묵대사가 태고사를 보고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하여 산을 베개삼고 누어 있으니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강물은 술동이로다"라고 했다는 말이 실감나도록, 이 곳의 절경은 더 없이 아름답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원효대사의 덩실춤이 보이는 듯 하니 환희심이 절로난다. 한기에 웅크린 내 어깨조차 절로 들썩거리니 산사 찾은 기쁨이 온몸을 감고 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추위에 덜덜거리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승속의 냉정함으로 일갈하던 묘법스님이 점심공양도 챙겨주고 목장갑도 한 켤레 건네주신다. 물 닿으면 물에 젖고 바람도 술술 들어올 장갑이지만 심장을 감싸주듯 따뜻하기만 하다. 많은 신도들의 보시물로 허한 속 채워 속 든든하니 하산길이 여여하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3)-팔공산 중암암
산사를 찾다 보면 정말 기상천외한 곳에 자리한 산사에 입이 벌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에 있는, 일명 돌구멍 절로 알려진 중암암(中巖庵)이 그런 산사 중의 하나다.
돌구멍을 통하여 절을 드나들게 되어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와 보일러실도 돌구멍 속에 있다. 뿐만 아니라 돌구멍 구멍들이 이런 저런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니 제격에 딱 어울리는 절 이름이다. 이런 절, 보는 것만으로도 입을 벌리게 하는 절들은 그 규모가 어찌 되었건 찾아가 보는 것만으로도 산사 찾는 맛을 더해 준다.
중암암은 은해사 산내 말사다. 은해사 일주문을 통하여 4Km쯤 들어가야 갈 수 있는 중암암은 신라 흥덕왕 때 심지왕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중암암'이라는 이름보다는 한문을 풀어 말하는, 일명 돌구멍절로 더 알려진 조그만 암자다.
▲ 돌구멍절에서 제일 큰 구멍인 이 구멍을 지나야 법당엘 갈 수 있다. 곳곳에 있는 돌구멍엔 보일러실도 있고 해우소도 있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창고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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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은 그 전체가 '불국토(佛國土)'라 할 만큼 많은 절들이 들어서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하나의 산에 두 개의 대찰(본사)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팔공산과 그 주변은 온통 불색(佛色)이다. 대구 쪽으로 동화사와 파계사가 있고 은해사가 영천에 있다. 동화사와 은해사는 힘들지 않게 하루에 산행을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교구본사인 대찰이다.
그리고 대구 하면 언뜻 떠오르는 갓바위도 팔공산에 있으니 팔공산을 불국토라 해도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닐 듯하다. 하기야 대구 사람들의 불심을 알면 당연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듯싶다.
팔공산은 영천, 신령, 하양, 인동, 칠곡 등의 여덟 고을에 걸친 공공의 산이라는 뜻으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과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의 공산 싸움에서 고려 장수 신승검, 김락, 전이갑, 전의갑 등 여덟 장군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순절한 것을 기리기 위해 팔공산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동화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심지대사가 영심으로부터 전수하여 봉안하여 왔던 8간자를 고려 예종이 궁중에서 친견하실 때 서기가 뿜어 나와 팔간자의 팔자를 공산 위에 씌워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는 물론 현재에도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 돌구멍을 들어서면 숨어있다 나타난 듯 법당이 보인다. 허리높이의 담 너머는 아찔한 낭떠러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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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하고 휘휘 휘어진 가지가 한껏 운치를 자아내는 멋진 소나무로 유명한 은해사 진입로를 지나 중암암으로 오르는 길은 한적하다. 개울을 따라 걷다보면 저수지가 나오고 그 저수지를 지나게 되면 암자를 안내하는 팻말이 있다. 은해사는 8개의 산내 암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중 백흥암 같은 경우는 비구니스님들이 수도 정진하는 선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일반의 절들과는 달리 경내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곳이다.
갈림길의 유혹을 떨구고 곧장 산을 향해 걷다보면 높이가 20m쯤은 되어 보이는 폭포가 나온다. 한여름엔 시원한 물줄기로 산사 찾는 이의 더위와 갈증을 달래 주었을 듯싶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한 듯 폭포는 하얀 얼음과 울퉁불퉁한 고드름으로 볼륨감 있는 순백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폭포를 지나 한 두 번쯤 급하게 휘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돌계단이 보인다. 일정한 크기로 놓여진 돌계단을 오르다 고개를 들면 하늘에 걸친 흰 구름처럼 산 중턱에 걸친 소운당(小雲堂)이 보인다.
소운당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바위 길을 따르다 보면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돌구멍이 보인다. 어둡고 캄캄한 석굴이 아니고 맑은 햇살이 들어오는, 대문 같은 돌구멍이다.
▲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전각도 까치집처럼 벼랑에 매달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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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멍으로 들어서면 감추었다 내놓은 듯 작은 암자가 벼랑에 서 있다. 이 법당엔 돌구멍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돌구멍 절이란 이름에 걸맞게 암자의 규모도 앙증맞도록 작다. 둥글둥글해 순해 보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절벽 위에 겨우 자리를 틀었다고 해야 맞을 정도로 여유 공간이라곤 하나도 없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한 넓이로 법당 앞에 길이 있고 길에는 허리 높이로 담이 쌓여 있다. 장난이라도 만에 하나 담 너머로 몸이 밀리게 되면 그땐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 듯하다. 그렇게 가파르고 높은 벼랑 위에 대웅전이 들어선 것이다.
대웅전 전방 우측에 있는 사무실을 겸한 작은 건물 또한 아슬아슬하게 벼랑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중암암은 법당만 돌구멍을 통해 들어가는 게 아니다. 국내에서 가장 깊다는 해우소(화장실)도 돌구멍 속에 있다. 얼마나 깊기에 국내에서 제일 깊다는 말을 쓰는지 궁금했지만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었다.
중암암 해우소의 깊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에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멍 절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 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통도사에 계시는 스님이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1말 3되나 떨어진다"고 하며 은근히 절의 규모를 법당 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셨다.
▲ 절 위쪽으로 올라가면 3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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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 때는 배를 띄어야만 저을 수 있다"고 하며 절의 규모와 큰 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돌구멍절 스님은 절의 규모 등으로 자랑 할 게 없자,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중암암 스님이 제일 큰 허풍으로 도반 스님들의 절 자랑을 제압했다고 볼 수 있지만 벼랑 위 바위 속에 만들어진 중암암 해우소가 얼마나 깊은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설화다.
중암암의 또 다른 특색은 여느 절들과는 달리 영가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웬만한 절에서는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나 49재 등을 지낸다. 그런데 중암암에서는 영가(죽은이)를 위한 재는 일체 없다고 하니 별다른 뭔가가 있는 듯하다.
▲ 이 틈새로 들어서면 극락굴로 들어서게 된다. 들어가 꺾어지고 두 번을 더 꺾으면 이 빛을 다시 보게 된다. 이 빛은 환희의 빛이며 극락의 빛이었다. |
ⓒ 임윤수 |
중암암은 그 들어서는 입구가 돌구멍이라서 돌구멍절이라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곳곳이 돌구멍이다. 그리고 그 돌구멍으로 들어서면 알 듯 모를 듯한 환희와 성취감이 솟는다.
소운당을 지나 법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면 중암암 부근엔 건들바위와 만년송, 그리고 장군수가 있다고 되어 있다. 안내판이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계단을 딛고 올라 산 쪽으로 올라서면 안내판에 있는 건들바위와 만년송 그리고 장군수를 볼 수 있다.
중암암은 두 번째 찾아가는 길이다. 2년여 전쯤 한여름에 그곳을 찾았던 적이 있다. 땀 뻘뻘 흘리며 찾아가니 때가 아닌데도 밥상을 차려준다. 칠십은 훨씬 넘은 듯한 노보살님께서 "이 꼭대기까지 오르느라 얼마나 시장했느냐"며 장국에 산나물 무침으로 때아닌 밥상을 차려주어 정말 맛나게 먹은 적이 있었다.
그 할머니가 계시면 그때 못 드린 감사의 표현으로 큰절이라도 드린다는 생각으로 찾았건만 그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중암암 경내를 둘러보고 안내 표지판에 있는 장군수와 건들바위 그리고 만년송을 찾으려니 영 찾을 수가 없다.
▲ 작은 힘에도 흔들리는 건들바위. 이 바위 옆 돌구멍을 지나면 만년송을 볼 수 있다. |
ⓒ 임윤수 |
할 수 없이 요사채가 있는 곳으로 가 스님에게 여쭈니,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아 스님께서도 아직 모르고 계신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 계신 신도들께 여쭈니 한 보살님이 모든 곳을 잘 알고 계신다고 한다.
의성에서 오셨다는 그 보살님, 3남매 모두를 출가시키고 고향인 의성으로 가셔서 노후를 대비하고 계신 듯한 그 보살님의 안내로 3층 석탑은 물론 세 곳 모두를 보게 되고 카메라에 담게 되었다. 그 보살님은 안내 표지판에 소개되지 않은 아주 특별한 곳을 선물하듯 안내 해 주셨다.
다름 아닌 돌구멍절에서는 꼭 봐야 할 곳이라며 극락굴을 안내해 주신 것이다. 법당 위쪽에 있는 3층 석탑 옆으로 들어서는 극락굴은 누군가의 안내가 없으면 찾기도 힘들고, 설사 찾는다 하여도 선뜻 들어서기가 힘든 곳일 듯하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입구로 들어가 2∼3m쯤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굴이라기보다는 틈새라고 해야 할 작은 공간이 나온다. 이 틈새로 들어서 몇 걸음 가다보면 좌측으로 꺾어지는 틈새가 나오고 그 틈새를 따라 다시 꺾어지면 처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
□자 형태의 굴(틈새)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목에 건 휴대폰이 걸려 그 휴대폰을 빼야 할 정도로 틈새에는 에누리가 없다. 등과 뱃가죽이 붙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몸을 축소시켜야 하고 중간쯤에는 몸을 낮추어야 빠져 나갈 수 있는 공간이다.
▲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에서 생명의 모짐을 볼 수 있다. 이 소나무가 만년송이다. 동글동글한 바위의 곡선에서 아름다운 여체의 미가 보인다. |
ⓒ 임윤수 |
욕심으로 채웠건 허영심으로 채웠건 몸집이 부풀려진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그 굴을 빠져 나오며 느끼는 쾌감은, 말 그대로 극락을 다녀온 기분이다. 비좁은 공간에서의 해방감, 어둠에서 찾게 되는 광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극락굴을 한 번 지나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굴을 안내해 주시던 보살께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앉는 컴컴한 굴 전체를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모양이다. 입구로 들어서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연송 하더니 어디쯤에선 몸을 낮추라고 알려주신다.
중암암을 가면 이 극락굴을 꼭 지나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굴을 안내 해준 보살님의 말에 따르면, 조강지처가 아닌 소위 세컨드는 이 극락굴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극락굴을 나와 조금 더 올라 능선의 정상에 있는 건들바위는 둥그런 사발을 엎어 높은 듯한 형상이다. 어느날 밤 바위에서 우뢰 소리가 나 주지 스님이 놀라서 달려 가보니 바위가 암자를 덮칠 듯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 스님이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하니 바위는 움직임을 멈추고 원래의 위치보다 북쪽으로 옮겨 현재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바위다.
이 건들바위 옆에도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구멍이 있으니 이 구멍을 지나게 되면 만년송을 만나게 된다.
▲ 김유신장군이 수련을 하며 마셨다는 장군수는 암벽사이에서 흘러 고이는 석간수였다. |
ⓒ 임윤수 |
아름답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바위들. 잘록한 몸매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인네 몸처럼 둥글둥글하고 완만한 곡선을 가지고 있는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뻗으며 자란 소나무가 있으니 이 소나무가 만년송이다.
흙 한줌 없는 바위틈에서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모진 생명력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모짐을 헤치며 생존하였기에 더없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다. 만년송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만 옮기면 산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된다.
"야호∼!"하고 함성 한번 지르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경내라는 생각과 혹시 잠들어 있을 산짐승이 놀랄까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능선을 넘어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장군수를 찾을 수 있다. 깎아 세운 듯한, 높이가 두 길이 넘는 암벽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이는 석간수가 장군수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17세 화랑이었던 시절 이곳에서 수련하며 마셨다는 전설이 있는 약수이다.
중암암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중암암 뒤쪽, 만년송 조금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련을 하며 기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10평 남짓한 공간이 있다.
▲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돌구멍절 해우소다.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에야 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 깊이가 깊다고 한다. |
ⓒ 임윤수 |
기에 대하여 문외한이지만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마음을 모으게 되며 저절로 산기도 천기도 내려질 듯한 공간이다. 둥그런 배열로 늘어선 길쭉한 형태의 입석들은 마치 장군을 외호하는 호위병 같다. 툭 터진 전망은 호연지기를 키우고, 일상에서 생기는 답답함을 툭 털기에 딱 좋을 듯하다.
돌구멍 절!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는 구멍 구멍에선 옹달샘처럼 불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돌구멍 절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영천IC - 영천시내 - 28번 국도 - 909번 지방도 - 은해사 - 일주문 통과 4Km
극락굴을 안내해 준, 의성에 사신다는 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
몇 년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사를 찾다보니 친구들이 "언제쯤 머리 깎고 산속으로 들어갈 거냐" 묻는다. 처음엔 "좋은 산 풍치 좋은 곳엔 영락 없이 절이 있고, 좋은 곳을 찾다보니 절을 가게되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신경 써가며 변명인지 설명인지를 했지만 이젠 그 정도 비아냥쯤은 무시할 여유가 생겼다.
요즘도 간혹 그런 빈정거림을 받게되면 그냥 담담하게 "때가 되면"이라고 답해 버린다. 솔직히 말해 그럴 주변머리도 없지만 산속으로 들어 갈 능력도, 자신도 없다. 이따금 정말 산속으로 들어가 속세를 등지고 수행 생활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얽히고 설킨 인연과 하찮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집착,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비겁함 때문이겠지만 제일 자신 없게 만드는 것은 역시 아는 게 없다는 것이다. 산사를 찾아다니며 가끔씩 뵙는 스님들은 정말 해박해 보인다. 정치나 경제 또는 물리나 수학 같은 측면에서 해박하다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응어리진 뭔가를 풀어주는 데는 도사인 듯 해박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 40여 년간 석천암에 주석해 계시다 3년여 전에 입적하셨다는 혜정 스님을 모신 부도탑이 깔끔한 모습으로 오가는 이를 맞이하고 있다. |
ⓒ 임윤수 |
신앙이란 게 원래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측면이 강한 것이라 그런지 우문(愚問)에 대한 스님들의 현답(賢答)은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해 주기도 하고, 캄캄하도록 이해되지 않던 뭔가에 쏟아지는 햇살처럼 번뜩이는 답이 있을 때가 있다.
눈에 보이고 계산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를 많이 알며 조리있게 설명하는 것을 해박하다고 한다면 그건 무조건 외우고 반복하다 보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형체도, 존재도 그리기 힘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루만져 준다는 것은 단순한 암기와 반복에 의해서는 얻어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인고의 수행과 그 수행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얻어지는 게 스님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해박(該博)함이 아닌가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인식시켜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삶의 활력소로, 생의 의미로, 살아갈 희망이자 마음의 의지처로 되게 하려면 그만큼 넓고 깊은 공부를 하여야 할 텐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자신이 없다.
두 번째로 자신 없게 하는 건, 속가에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단하고 팍팍한 스님들의 일상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스님들의 일상은 여유 그 자체다. 신선처럼 호젓한 곳에서 차나 마시고 염불이나 외며 느긋하게 생활하는 그 모습, 그렇게 등장하는 스크린 속 스님들의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 부도탑을 지나면 여염집처럼 포근함이 느껴지는 요사채와 출입문이 보인다. |
ⓒ 임윤수 |
허나 스님들의 일상을 알고 보면 기가 막히게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다. 보통 절의 하루 일과는 새벽 3시에 시작된다. 새벽 3시가 어떤 시간인가? 한밤중의 한밤중이다. 아무리 일찍 출근하는 사람이라도 잠자리에서 곤하게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간에 스님들의 일과는 시작된다.
요즘 같은 한겨울 새벽 3시는 사방이 어둠이며 뼈 속까지 파고드는 삭풍이 일고 있을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 산사를 돌며 도량석으로 시작하는 스님들의 일상을 속인의 눈높이로 볼 때 그 자체가 고통이며 막노동이다.
그 다음 이른 5시쯤 아침 예불을 마친 스님들은 자유로운가? 일찍 일어나느라 못 잔 잠을 보충하느라 눕기라도 한다면 그래도 좋으련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때부터 나름대로 해야 할 일들이 태산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참아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생활 자체가 수행이다 보니 일반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금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사람이 살면서 갖게 되는 많은 재미에는 먹는 재미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런데 스님의 생활이란 그 먹는 재미조차 거의 포기해야 한다.
▲ 커다란 바위 아래 들어선 대웅전이 인상적이다. 규모가 가장 작기도 하지만 대웅전이 바위를 고깔처럼 쓰고 있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웅전 규모는 3.5평 정도 면적에 키가 닿을 만큼 야트막한 지붕으로 되어 있다. |
ⓒ 임윤수 |
이것은 이래서 먹으면 안되고 저것은 저래서 먹으면 안되고, 그러다 보니 산나물과 야채 종류만 풍성해 보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처럼 절밥을 먹게 되면 이구동성으로 맛있다고들 한다. 어찌 보면 속인들에게 절밥이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상 기름진 것을 먹다 칼칼하도록 담백한 절밥을 먹게 되니 맛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공짜로 얻어 먹는다는 공짜 맛이 더해지니 스스럼없이 맛나다고들 할 일이다.
그러나 속인들에게 매일 스님들처럼 산나물에 야채만 먹으라고 하면 그때도 맛있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육식에서 얻게 되는, 먹는 재미를 상실하게 되니 절밥은 더 이상 맛있는 음식이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먹는, 어쩔 수 없는 생리적 욕구의 충족일 뿐이다.
어찌 금하는 것이 육식뿐이랴. 금연에 금주 등 기호품으로 불리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하니 먹는 재미는 깡그리 잃게 된다고 봐야 좋을 듯하다. 그러니 먹기 좋아하고 게으름 피우며 순간 순간의 안락함을 좋아하는 데 익숙해진 입장에선 수행 생활에 자신 없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 꼬마 대웅전이란 표현이 어울릴 전각엔 분명 <大雄殿>이란 표식이 붙어 있었다. 법당엔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
ⓒ 임윤수 |
16년째 금연을 하고 있고 2년째 금주를 하고 있지만 막상 수행자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정말 살맛이 없을 듯하여 자신이 없다. 지금이야 의지력으로 참고 있느니 뭐니 하면서 가끔 무용담 비슷하게 자랑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입장이 된다는 것은 같은 금연 같은 금주라고 해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를 듯하다. 하여튼 능력도 안 되지만 자신도 없고 포기해야 할 게 너무 많아 그냥 구경꾼으로만 남아 있기로 작정한 지 오래 되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지 오래지만 친구들에게 가끔 '기회가 되면 머물고 싶은 절이 있다'고 소개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대야산 석천암이다.
2년 전 처음으로 석천암을 찾아갈 때는 초가을이었다. 한낮엔 아직 무더움이 남아있고 주변이 곱게 단풍 드는 그런 시기였다. 백두대간으로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대야산에 자리잡고 있는 석천암 주변의 가을 풍광은 일품이다.
가을 풍경을 제대로 연출하기 위해 구색을 맞춘 듯 둥글지만 불끈 솟아오른 바위에 흩뿌려진 단풍이 어루러진 전망은 울긋불긋한 산수화가 분명했다. 요즘 같은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석천암을 정점으로 한 주변은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할 듯하다.
백색의 캔버스에 기암과 어우러진 청솔, 겨울 냄새 물씬한 발가숭이나무들이 바람과 합창으로 들려주는 겨울 연가가 입체적 산수화를 구성할 게 틀림없다.
▲ 대웅전 규모에 걸맞게 아주 작은 산신각이 대웅전 앞쪽 바위에 있다. 산신각의 크기는 1평 정도였다. |
ⓒ 임윤수 |
전형적인 시골 마을, 겨울이면 한낮에도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인적이 뜸한 삼송 마을을 지나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자동차로는 더 이상 들어가기 힘든 종점에 도착하게 된다.
석천암은 차에서 내려 15분 정도만 걸어 들어가면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 돌도 흙도 아닌, 돌인 듯하나 밟거나 비비면 부스러지는 그런 지반에 꽤나 가파른 오르막길엔 떨어진 솔잎이 차분하게 깔려있다. 뽀얀 바닥에 진한 갈색 솔잎이 널린 비탈길을 10여 분쯤 그렇게 오르면 오른쪽에 혜정탑(慧正塔)이란 글씨가 암각된 부도탑이 보인다.
40여 년간 석천암에서 수행 생활을 하다 3년여 전 입적하신 혜정 스님을 모신 부도라고 한다. 대개의 스님들 일생이 그러하지만, 민가에서 십 리가 넘게 뚝 떨어진 곳에서 40여 년을 수행하다 피안의 세계로 가셨을 스님의 일상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이곳에서 위를 바라보면 커다란 느티나무 사이로 가정집처럼 무채색의 기와집이 보인다.
급경사를 완만하게 하느라 구부려 만들어진 길을 다시 한번 꺾어들면 여염집 대문과 흡사한 출입문이 보인다. 여기까지에서 석척암은 막 지나 온 부도탑을 빼면 여염집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냥 산 속에 뚝 떨어진 외딴집일 뿐이다.
▲ 산사 음식을 마련하는 데 이용될 맷돌이 장독대 앞에 보인다. 석간수로 물 맞추고 맑은 공기에서 익었을 장들이 맛날 듯하다. |
ⓒ 임윤수 |
양쪽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지나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높이가 2m쯤 되는 바위가 있고 그 바위 뒤로 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라고 해서 그냥 땅에 박혀있는 그런 바위가 아니다. 그 크기도 만만치 않지만 포근해 보이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어머니 품처럼 안기고 싶은 그런 구조다. 컴컴함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동굴이 아니다. 햇살을 한껏 받을 수 있는가 하면 시원한 그늘이 절로 만들어지는 그런 공간이다.
그런 공간, 커다란 바위가 어머니 품을 만들고 있는 그 공간에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의 규모는 꼬마 대웅전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작다. 대웅전의 처마 높이가 170cm쯤 될 테니 키가 큰 사람들은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야트막한 건물이다.
석굴암을 비롯하여 굴법당에 부처님을 모신 곳은 꽤나 많다. 제주도 약천사에도 굴법당이 있고 지리산 서암정사는 극락전 전체가 굴법당이다. 그러나 전각인 대웅전 건물이 바위 아래 들어선 곳은 석천암에서 처음 보았다. 바위 아래 건물이 들어서다 보니 아무래도 그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렇게 작은 소규모의 대웅전은 처음 본다. 바위를 고깔 모자처럼 쓰고 있는 꼬마 대웅전이란 표현이 딱 어울릴 듯하다.
▲ 뽀얗게 닦여진 흰색 고무신이 한겨울 산사 생활의 일면을 느끼게 한다. |
ⓒ 임윤수 |
3평이 조금 넘을 것 같은 법당엔 10명만 들어가도 꽉 채워질 듯하다. 그 규모 때문인지 대웅전에 모셔진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은 눈 높이로 모셔져 있어 장엄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대불들과는 달리 한결 편안함이 느껴진다.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지만 숨결조차 닿을 정도로 가깝게 절을 올리니 서원하는 속마음까지 다 들어줄 그런 친근감이 느껴진다.
바위가 만들고 있는 그늘은 대웅전 옆으로도 꽤나 넓은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2년 전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았을 땐 굴에서 시원한 바람이 내려와 땀을 식혀 주었고, 석천암(石泉庵)이란 이름에 걸맞게 바위아래 고인 석간수가 갈증을 달래 주더니 한 겨울에 다시 찾으니 바위가 만든 공간은 온화한 품이 되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꾸미고 치장하기 좋아하는 스님들이 계셨다면 바위와 공간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장엄물을 만들어 놓았을 법도 한데 바위와 굴은 원형 그대로 있다. 햇볕 드나들고 바람 쉬었다 가게 훼손이나 가공 없이 고스란히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보는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기껏해야 조금씩 흐르는 석간수가 고일 수 있도록 손등 깊이 만큼 바닥을 헤쳐 고랑을 만들었을 뿐이다.
원래 석천암은 마을에서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현재의 터에 있던 보덕암이 1985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신축하면서 석천암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석천암은 나옹선사의 보림터로 1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 여느 절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기록은 찾기 힘든 듯하다.
▲ 기도를 하러 오는 신도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은 대웅전에 비하여 꽤나 커 보였지만 다른 절들에 비하면 역시 작을 뿐이다. |
ⓒ 임윤수 |
석천암에선 참선을 위해 별도의 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바위아래 넓은 공간은 그 자체가 법당이며 참선 터다. 바위 아래 그냥 자리잡고 경전을 펼쳐들거나 스님으로부터 우문현답을 듣다보면 거기가 바로 선방이 될 게 분명하다.
바위 아래 또는 산 중 어느 곳이라도 자리 잡아 앉으면 좌선(坐禪)이고, 서 있으면 입선(立禪, 누우면 와선(臥禪)이 될 듯하다. 비바람 막아주고 강한 햇살 가려줄 큰 바위, 대웅전을 외호하며 신장같은 바위가 온몸을 감싸주니 마음 또한 차분해 질 듯하다.
대웅전 앞 바위에 세워진 산신각도 대웅전 규모에 비례한 듯 작기만 하다. 바위에 자연스럽게 기반을 둔 산신각은 그 면적이 1평 정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다. 대웅전 규모에 비해 꽤나 큼직하게 보이는 요사채 1동, 그래 봐야 다른 절들의 요사채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기도를 하러 온 신도들이 묵을 수 있는 또 다른 한 채의 건물이 있을 뿐이다.
요사채에는 '전각 증축 불사'를 안내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나라의 지원으로 증축된다고 한다. 나라의 지원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지극한 마음과 작은 정성이 보태지면 대대손손 물려줄 또 하나의 걸출한 유산이 대야산에 남겨 지리라 기대된다.
▲ 석천암에서 바라본 가을 풍치. 계절마다 나름대로 특색 있고 수행하기 좋은 곳이지만 가을에 바라본 전경도 일품이다. 저녁이면 앞산으로 떨어질 낙조가 장관일 듯하다. |
ⓒ 임윤수 |
좌향(坐向)이 서향(西向)인 요사채나 숙소에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먼 산으로 떨어지는 낙조는 절로 감탄을 나게 할 듯하다. 다시 한 번 더 찾아야 낙조를 보여주려는 듯 흐린 날씨로 기대하던 일몰의 장관은 볼 수 없었다. 깔아 놓은 듯 고르게 뿌려진 솔잎을 밟으며 내려오는 석천암 길은 여여(如如)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석천암 찾아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 증평 IC - 592번 지방도로 - 청천면 소재지 - 32번 국도(문경, 화양계곡 방향) - 송면삼거리 - 상주방향 - 송면중학교 - 입간판
청주 - 25번 국도 - 가덕면 - 32번 국도 - 청천면 소재지 - 32번 국도(문경, 화양계곡 방향) - 송면삼거리 - 상주방향 - 송면중학교 - 입간판
전 화 : 043-833-8275
대수롭지 않고 별 것 아닌 듯싶다. 그러나 어찌 보면 가장 힘들지만 실천 가능하고 아름다운 목표가 아닌가 모르겠다. 산은 산다워야 하고 강은 강다워야 한다. 계절 또한 그러하니 겨울은 아무래도 조금은 쌀쌀하고 적당히 눈이 내려주어야 겨울답다. 사실 그 동안 이상난동(異常暖冬)이 염려될 정도로 날씨가 푸근하였다.
색 바랜 동심으로 학수고대하던 눈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포근한 그런 겨울은 역시 겨울답지 않았다. 설을 앞두고 이제서야 겨울다운 날씨가 시작된 듯하니 갑신년 새해에는, 대통령부터 저 아래 꼬맹이까지 모두 '답다'란 수식어에 당당한 그런 1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 산길을 따르다 보면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
ⓒ 임윤수 |
예나 지금이나 '겨울'하면 역시 눈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천하를 온통 하얗게 덮어버린 눈은 동심조차 들뜨게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의 시골 겨울은 무료하리만큼 단조롭고 지루했다. 더더구나 먹거리도 놀거리도 제대로 없던 때였으니 그 무료함은 더 했을 거다.
눈이 펑펑 나리면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한다. 크고 작은 덩어리를 하나씩 만들어 커다란 덩어리 위에 작은 덩어리를 올려놓으면 몸이 되고 머리가 되니 어렵지 않게 눈사람이 만들어진다. 몸이 다 만들어지면 집 근처 어디에서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솔가지와 숯검정으로 눈썹을 붙이고 수염도 만들어 준다.
그러다 더 많은 눈이 오면 눈을 쓸어 마당 한 구석에 미끄럼틀을 만든다. 쌓인 눈을 경사지게 다지고 가끔 물을 끼얹으며 만들어진 눈 미끄럼틀은 눈오는 날 마당에 만들어지는 멋진 놀이기구가 된다. 몸이 유연한 아이들이야 넘어져도 상관없지만 가끔 어른들이 대책 없이 넘어져 낙상(落傷)을 당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기는 하지만 꽤나 인기가 있는 겨울 놀이인 것은 틀림없었다.
▲ 일주문 안쪽 눈밭엔 부도가 나란하다. |
ⓒ 임윤수 |
동네 앞 완만한 경사를 가진 언덕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네사람들이 즐기는 미끄럼틀이 된다. 비닐로 된 비료포대에 지푸라기를 넣어 두툼하게 하여 엉덩이에 깔고 앉으면 정말 스릴 있는 미끄럼 타기가 된다. 울퉁불퉁 할 수밖에 없는 언덕의 질감이 그대로 엉덩이에 전이된다.
겨울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바로 눈꽃(雪花)이 그 대상이다. 가끔은 나뭇가지들을 부러뜨리기도 하지만 휘휘 늘어진 가지에 몽실몽실 얹혀있는 눈덩이들은 순백의 꽃송이가 틀림없다. 사람들은 그런 눈꽃을 보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탄하기도 한다.
그런 눈꽃보다 더 아름답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겨울의 꽃이 있으니 바로 상고대가 아닌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눈꽃은 눈이 와야만 피어나기에 눈이 와야만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러나 상고대는 그렇지 않다. 눈이 오지 않아도, 햇볕이 쨍한 날씨에도 정말 아름다운 눈꽃으로 환생하는 것이 상고대다.
▲ 대웅전 앞마당에서 내려다 본 우화루와 그 전망이 아름답다. |
ⓒ 임윤수 |
뭐라고 할까? 눈이 오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추운 겨울날 유리창이나 벽에 피어난 성에와 같다고 할까? 그 생김새가 차갑도록 예리하고 깨끗하지만 그 순결함은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 성에가 나무에 피어나 자란 게 상고대다.
그러니 눈이 오지 않아도 상고대는 피어난다. 적당한 습도와 온도가 조화를 이루고 바람까지 곁들여 준다면 피어나듯 자라나듯 그렇게 성장하여 가슴조차 저리게 하는 아름다운 눈꽃(상고대)이 된다.
밤새 씨를 맺고 바람 따라 자라난 상고대가 아침햇살을 머금게 되면 거기서 쏟아지는 반짝임은 정말 환상적이다. 바람이라도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어 상고대와 햇살이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정말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해 낸다. 80년대 초 한라산 성판악에서 보았던,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바람에 살랑이던 그 상고대를 생각하면 지금도 필자는 가슴이 울렁거린다.
상고대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백학의 군무(群舞)같은 그런 상고대는 아무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없다. 그런 상고대, 백학의 군무같이 슬프도록 순결하고 깔끔한 그런 상고대를 가끔 아주 운 좋게 볼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덕유산이다.
▲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대웅전 그 뒤로 덕유산 향적봉이 있다. |
ⓒ 임윤수 |
덕유산(德裕山)은 그 이름에서 예감 할 수 있듯 넉넉함과 느긋함이 있는 산이다. 모나지 않은 산세지만 결코 경망해 보이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권력자의 위엄 같은 게 느껴지는 그런 산이다.
그런 덕유산에 엄마의 젖줄처럼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무주 구천동이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관문이었다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면서 구천동(九千洞) 물줄기를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엔 기암과 어우러져 맑은 물이 흐르고있는 계곡이 꽤나 많다. 흐르는 물이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고 움푹한 웅덩이나 바윗돌을 만나게 되면 담(潭)을 만든다. 봄이 오면 모든 것에 앞서 얼음 속으로 경쾌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보여 주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려줌으로 오고있는 봄을 알려주는 계절의 전령이 된다.
여름엔 시원한 땀 식혀주는 바람의 근원지가 되고 가을엔 예쁜 단풍 가득 담는 그릇이 된다. 그러다 겨울엔 주렁주렁 고드름을 달거나 얼음판을 만들어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 불공을 드리는 신자들이 기거할 공간이지만 평소엔 등산객들이 도시락을 펼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
ⓒ 임윤수 |
구천동은 첩첩 산골 덕유산 골짜기에 9천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살고 있어, 구천인의 둔지(屯地 = 진치고 있는 땅)라는 뜻에서 '구천둔'이라 불렸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천동이란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 길이가 90리나 된다는 구천동엔 백련사를 포함하여 33의 절경이 있다고 하니 돌고 도는 구비구비가 징검다리 절경이다.
구천동이라 불리는 유래에서 알 수 있듯 덕유산도 불교가 성행하였던 곳이니 꽤나 오래된 절이 있으니 곧 백련사다. 백련사는 덕유산 자락인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946-1번지로 무주구천동 계곡의 거의 시작 부분에 위치해 있어 고지(高地)에 있는 산사 중의 하나다.
백련사를 찾는 길은 삼공리 매표소를 지나 십오 리 길의 완만한 진입로를 걷게 된다. 차 한 대쯤 다닐 수 있는 넓이로 되어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겨울엔 특별한 경우라 해도 걸을 수밖에 없다.
▲ 등산객들이 대웅전 옆 석간수로 갈증을 달래고 있다. |
ⓒ 임윤수 |
구천동 계곡 안쪽으론 겨울이 시작되어 눈이 한 번 나리면 봄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겨울 내내 그늘에 빙판을 만들고 있으니 걸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길이다. 걷는 이가 크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1시간 반쯤 따라가다 보면 백련사 일주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우측으로 눈밭 속에 부도군이 있다. 부도군을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니 백련사 전각들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 사천왕문과 우화루를 통과해 경내로 들어 갈 수도 있고 사천왕문을 지나지 않고 우화루 앞으로 연결되는 경사 길을 따라 경내로 들어갈 수도 있다.
백련사는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살았던 곳에 백련(白蓮)이 솟아 나와 그 자리에 절을 짓고 백련암이라 하였다고 하는 설과, 830년 무염국사가 창건하였다고는 설도 있지만 역사적 기록을 찾기 어려우니 어느 것을 정설이라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 경내에서 바라본 향적봉 쪽 하늘이 파랗기만 하다. 운이 좋으면 나뭇가지에 피어난 상고대를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
ⓒ 임윤수 |
천왕문을 지나며 통과해야 하는 우화루 우측엔 범종각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계단을 모르면 정면으로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으로 명부전(지장전)이 있다. 심산유곡 구천동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백련사는 워낙 외떨어져 한적할 듯하나 끊이지 않는 등산객들로 항시 움직임이 있는 산사다.
아무리 좋은 산길도 1시간 30분쯤을 걷다보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데 바로 그 자리에 백련사가 있으니 백련사는 덕유산을 오르는 이들이 몸도 마음도 쉬어 가는 쉼터가 된다.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끈 조인 등산화를 벗어 법당에 들려 참배한 후 대웅전 좌측에 솟고있는 석간수 한 바가지 마시니 그 맛이 꿀맛이다.
대웅전 오른쪽, 작은 계곡 건너 쪽엔 꽤나 큼직한 기와지붕 한옥이 있다. 불공을 드리러 오는 신도들이 기거하는 공간이겠지만 평소엔 등산객들이 도시락을 꺼내 놓고 먹을 수 있는 대청마루 같은 행운의 공간이 되기도 하는 듯하다.
▲ 일주문 오른쪽엔 특이한 형태의 벌집이 달려 있었다. |
ⓒ 임윤수 |
백련사를 지나며 덕유산을 오르는 길은 조금 급해지는 경사길이 된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게 두 시간쯤 산길을 따르다 보면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에 도착하게 된다.
소백산맥에서 남쪽으로 뻗은 국립공원 덕유산은 그 높이가 1614m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2개도 4개 군에 걸쳐 있으며, 1975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발 1330m 이상의 봉우리가 5개나 되며 8개의 큰 계곡을 거느리고 있지만 결코 거만하지 않고 유순한 그런 형태의 산이다.
땀 뻘뻘 흘리지 않고 쉽게 향적봉에 오르는 방법도 있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이용하면 15분쯤을 걸어 힘들지 않게 향적봉엘 오를 수 있다. 어찌 되었건, 향적봉의 상고대, 눈이 오지 않아도 피어나는 설화중의 설화는 항시 기대해도 좋을 그런 환상이다.
한 겨울 금강의 원류천인 구천동 계곡엔 백설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백련이 있으니 바로 백련사가 그 백련(白蓮)이다.
▲ 오색딱따구리가 먹이를 찾기 위해 나뭇가지를 열심히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염불하는 목탁소리로 들린다. |
ⓒ 임윤수 |
백련사를 들려 내려오는 길에 때아닌 빠른 템포의 목탁소리가 들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를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야 나무를 열심히 쪼고 있는 오색딱따구리를 발견하였다.
딱따구리야 먹이를 찾느라 나무를 쪼고 있었겠지만 그 다다닥거리는 부리소리가 염불하는 목탁소리로 들린 것은 어인 까닭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백련사 찾아가는 길
경부(중부)고속도로 - 대전↔진주고속도로 - 무주IC -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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