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이 바람처럼 춤추는 적멸의 땅
좋은 시(詩)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해시키려 들지도 않습니다. 읽는 이의 마음속으로 그냥 다가갈 뿐입니다. 누구나 가끔 ‘아, 참 좋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풍경을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풍경에 대한 감응방식은 좋은 시를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왕 시 얘기가 나왔으니 한 편 보고 가겠습니다.
까닭 없이 천기를 누설하면서
떨어지는 저 빗소리 다정하기도….
앉고 누워 무심히 듣는 소리가
귀를 써서 듣는 것과는 아예 다르네.
無端漏洩天機 滴滴聲聲可愛
坐臥聞似不聞 不與根塵作對
진각국사(眞覺國師·1178-1234)의 ‘밤비’라는 시를 이원섭 시인이 옮긴 것입니다. 어설프게 끼어들 여지가 없는 시입니다만, ‘앉고 누워 무심히 듣는 소리가 / 귀를 써서 듣는 것과는 아예 다르네’라는 대목에서는 한 마디 거들고픈 치기를 누르고 싶지 않습니다. 떠버리들이 흔히 말하기 좋아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니 우주와 합일이니 하는 경지를, 거창한 단어 하나 쓰지 않고도 우리 앞에 그대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봐라, 너희들도 순간순간 우주와 한 몸을 이루며 살고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도인과 범부의 차이는 이런 것이겠지요. 누구나 경험하는 ‘분별이 무너진 자리’를 무심히 지켜나가며 사는가, 끝없이 부딪치며 갈등하고 아등바등하는가, 바로 거기에 있겠지요.
통도사(通道寺) 가는 길은 무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도(道)로 통하는 길이니까요.
‘國之大刹(국지대찰)’, ‘佛之宗刹(불지종찰)’
통도사는 참 큰 절입니다. 십수 년 전 처음으로 통도사에 갔을 때의 첫 느낌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기에 더하여 참 ‘깊은’ 절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깊이는 영축산(1,081m)의 우람한 골기와 진입부의 춤추는 노송에서 비롯됩니다. 그 길을 걸어보지 않고는 통도사의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고집하면 그 길을 놓치기 쉽습니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나들목에서 양산시 하북면으로 접어들어 다닥다닥 붙은 건물 사이 복잡하고 좁은 도로를 벗어나면 곧바로 영축산문이 열립니다. 영축산이 저잣거리로 거의 다 내려온 형국입니다. 세속과 아주 ‘가깝게 먼’ 절이 통도사입니다.
흔히 절은 산과 짝하여 그 이름이 불려집니다. 영축산 통도사, 가야산 해인사, 태백산 부석사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산과 절이 일치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부석사 같은 경우는 봉황산 기슭에 있지만 그 일대를 대표하는 산인 태백산을 절이름 앞에 내 겁니다. 하지만 영축산은 먼 발치에서부터 혼연히 하나 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영축산문이라는 편액을 단 매표소 앞에서 고개를 들면 지붕선 위로 하늘을 받치고 선 듯한 영축산의 스카이라인이 적멸의 기운을 내뿜고 있습니다. 범부의 눈으로도 과연 부처의 진신이 깃들만한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합니다.
매표소를 지나서 무풍교를 건너는 찻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숲길로 들어서면 통도사는 맨가슴으로 객을 맞아줍니다. 아니, 이 길에서부터는 주객의 경계가 지워집니다. 1km 남짓한, 드물게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입니다. 이른바 통도팔경의 하나인 무풍한송(舞風寒松)이라는 시적인 이름에 값하는 노송들이 바람의 춤사위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꼿꼿이 우람한 나무, 용틀임하는 나무, 곧 땅으로 드러누울 듯 휜 소나무들이 천연스레 어우러져 있습니다. 바람의 무애무(無碍舞)입니다. 원효 스님이 서라벌 저잣거리를 누비며 추었다는 무애무도 이런 모습이었을 테지요. 그 모습을 보며 한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이 한 백 년을 살고 나면 어느 정도의 깊이를 보여 줄 수 있을까? ‘벽에 똥칠’만 안 해도…, 하는 결론에 닿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소나무 숲을 다 지나면 계곡 옆으로 활짝 시야가 열리면서 ‘靈鷲叢林(영축총림)’이라는 편액을 단 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른쪽 기슭으로는 역대 고승들의 부도가 또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잘 살다간 이들의 빛나는 뒷모습입니다. 절 입구의 부도전은 낯설지 않습니다. 내소사와 월정사, 선암사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 통도사는 압도적입니다. 이보다 더 간곡한 생사불이(生死不二)의 가르침은 없을 듯합니다.
드디어 일주문입니다. ‘靈鷲山通道寺(영축산통도사)’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기둥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國之大刹(국지대찰)’, ‘佛之宗刹(불지종찰)’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나라의 큰 절이자 한국 불교의 종가라는 의미이겠습니다.
도를 구하는 이, 도통한 이가 가야 할 길
통도사가 불지종찰(佛之宗刹)인 건 그곳이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도사는 불보(佛寶) 사찰로 불리고 법보(法寶) 사찰 해인사, 승보(僧寶) 사찰 송광사와 함께 삼보(三寶) 사찰로 일컬어집니다. 하지만 통도사가 정녕 한국 불교의 종가인 건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계단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통도사의 창건주이기도 한 신라의 대국통 자장율사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한 삼국유사의 기사를 보겠습니다.
“조정에서 의논했다. ‘불교가 동방에 들어와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그것을 지키고 받드는 규범이 없으니 통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이 의논을 위에 아뢰니 자장율사를 대국통으로 삼아 승니(僧尼)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관하게 했다…중략…자장율사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만나 불법을 널리 퍼트렸다…중략…이 때에 나라 안에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아홉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를 청하는 이가 해마다 달마다 불어났다. 이에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을 받아들였다.”(삼국유사 의해편 자장정율 조)
646년(선덕여왕 15)의 일입니다. 자장 스님에 의해 통도사가 세워짐으로써 신라 불교, 넓게는 오늘의 한국 불교가 체계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서, 또한 승려를 배출하는 사찰로서 현재까지도 창건 당시의 의미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절입니다.
지계(持戒), 즉 계를 받아 지닌다는 것은 부처님 곁으로 다가가 승가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결코 단순한 통과의례는 아닙니다. 비구는 250가지, 비구니는 348가지나 받아 지녀야 합니다.
자장 스님이 출가하여 고골관(枯骨觀:육신의 무상을 관찰하는 것. 송장의 살이 다 없어져 백골만 앙상한 모습을 관하는 수행법)을 닦고 있을 때 조정에서 재상의 자리에 오르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할 정도로 단호했습니다. 하지만 자장 스님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내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가 죽더라도, 백 년 동안을 계율을 어기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답이었습니다. 왕은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째, 승려가 되려면 누구든 이곳 금강계단을 통하여 계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법을 통달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통도사가 자리 잡은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사실 이 셋은 하나입니다. 도(道)를 구하는 이가, 도통한 이가 가야 할 길은 이 셋을 아우르기 때문입니다.
통도사는 분명 큰 절입니다. 전각이 68동이나 됩니다. 금강계단 중심의 공간이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규모를 더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겠지요. 하지만 통도사의 진정한 존재의미는 가람의 규모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귀중한 문화재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는 적멸의 땅, 지계의 정신이 소나무처럼 살아서 바람의 춤을 추는 곳, 통도사는 그런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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