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임윤수_뚜벅뚜벅 산사기행_08

醉月 2011. 5. 18. 08:32

연못에서 깨달음을 얻은 절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6)-보개산 각연사

 

▲ 잘 정리된 겨울 밭에서 어릴 때 보았던, 방치되듯 눈 덮인 밭은 그저 기억일 뿐이었다. 같은 밭고랑에서도 양달과 응달이 확연히 구분된다. ⓒ 임윤수

 

어릴 적 산골짜기 고향마을에 밤새 눈이라도 내려 수북이 쌓인 하얀 아침이면 덜 깬 잠에서도 어린 마음은 들뜨고 손길이 분주해졌다. 솔직히 지금도 그 짓을 재미로 했는지 아니면 정말 먹을 것을 구하느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겨울이 다가오면 쪽 곧은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꽤나 많이 마련한다. 이렇게 준비된 나무들과 짚 그리고 촘촘하게 꼬아진 새끼와 노끈을 이용해 덮치기와 새 차꼬(족쇄)를 만들었다.

새 차꼬는 나무를 활처럼 휘어 탄성이 생기게 해 A자 형태로 만들어진 받침대에 활을 고정시킨다. 가름 막대와 당겨진 활줄 틈새에 먹이를 달아 참새나 멥새가 먹이를 먹으려 머리를 넣었으면 고였던 바늘이 빠지면서 활줄이 퉁겨 새의 목이 걸리게 만든 것으로 아주 간단한 형태로 되어있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는 논둑을 삼태기 크기만큼 깨끗하게 쓸고 주변에 왕겨를 뿌려 놓으면 덮인 눈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 벌판을 헤매던 새들은 금세 눈이 없는 곳으로 모여든다.

처음엔 조금 경계하는 듯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새 차꼬에 먹이로 달린 수수를 먹으려고 활줄 사이로 머리를 넣다가 목이 걸려 잡힌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한꺼번에 두 마리가 동시에 잡히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

▲ 그래 바로 이 모습이다. 소먹이로 쓰일 볏단이 그대로 남아있는 논에서 옛날 모습을 볼 수 있다.
ⓒ 임윤수
팅∼하고 활줄 퉁기는 소리가 나면 거의 새 한 마리씩은 잡히니, 그 팅∼하는 소리에 놀라서 후루룩 날아가는 새들을 보고 잡힌 것을 알 수 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쏜살같이 달려가 활줄을 잡아당겨 잡힌 새를 꺼내고 다시 줄을 고여놓을 때쯤이면 또래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어린 마음에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잡힌 새를 한껏 크다고 자랑하며 있지도 않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그럴싸하게 떠벌려 대곤 했었다.

새 차꼬는 조금 간단한 반면 덮치기는 꽤나 복잡하고 덩치도 크다. 우선 영을 엮듯 볏짚을 이용하여 바닥을 만들고 굵직한 나무를 이용하여 커다란 활을 만든다. 활줄을 꼬아 탄성이 생기면 미리 만들어 놓은, 부채형태의 테두리에 거미줄처럼 엮어 만든 덫을 끼운다.

새 차꼬는 논둑의 눈을 쓸고 비스듬하게 꽂아야 했지만 덮치기는 눈 위에 그냥 놓기만 하면 된다. 가능하면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에 자리를 잡는데 이왕이면 춥지 않은 곳에서 지켜볼 수 있는 집 앞 텃밭이 좋았다.

덮치기 역시 배고픈 새들이 먹이를 구하려고 볏짚으로 된 바닥에 앉았다 덫 안으로 들어가 먹이를 주둥이로 쪼는 순간 살만 남은 부채 같은 덫이 덮쳐짐으로 새를 잡는 그런 도구다. 새 차꼬에서 잡히는 새는 목이 졸리기 때문에 죽기 십상이지만 덮치기에 잡히는 새는 산채로 잡히는 경우가 많았다.

▲ 새를 잡을 때 사용하던 덮치기다. 사진 속의 덮치기는 송판으로 되어있으나 짚으로 영을 엮듯 만들어 바닥을 만들었었다.
ⓒ 임윤수
경험이 없거나 손이 너무 얼었을 때는 덫을 열고 새를 꺼내는 순간 '포르르' 하고 새가 날아가 버리는 황당한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품안의 새도 놓쳐버리는 일'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하면 그것도 밀렵도구가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아주 당연한, 한겨울 산골 꼬마들이 겨울을 나기 위한 필수도구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내 것엔 왜 새가 잡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손끝이 꽤나 야무지다는 소릴 들었기 때문에 엉터리로 만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며칠 동안 죽어라 정성을 다해 열심히 만들어 친구랑 나란하게 놓으면 새들은 친구의 것에만 몰려들뿐 내것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에 친구에게 사정사정하여 자리를 바꾸어 놓으면 이놈의 새들이 조금 전까진 얼씬도 하지 않던 바로 그 자리, 내 것이 있던 그 자리에 놓여진 친구 것으로 다시 모여드니 정말 속이 상했다.

잘 잡는 친구는 하루에 10여 마리를 잡기도 했으니 먹을 것이 변변치 않던 시골 살림엔 아주 특별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지만 먹거리로 사냥을 하였다기보다는 조금 특이한 놀이로 기억하고 싶다.

▲ 달그락거리며 추를 넘기면 거적(꺼치)이 만들어 졌다. 이렇게 겨우내 만들어진 거적은 농사에 긴요하게 쓰였다.
ⓒ 임윤수
기억에 또렷한 어릴 적 겨울나기를 생각하며 산골길을 따르다 보니 길옆으로 반듯하게 정리된 밭고랑이 다시금 옛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눈 덮인 들판은 평온 그 자체다.

시설농업이란 게 없었던 그때의 산골 겨울은 한가로울 수밖에 없다. 땅이 꽁꽁 얼었으니 언 땅이 녹을 때만을 기다리는 게 시골농부들의 겨울나기일지도 모른다. 낮에는 땔감을 마련하느라 낫을 갈아 지게에 꽂고 뒷산을 오르는 날도 있지만 매일은 아니다. 동네 사랑방에 모여 멍석을 만들고 거적이나 가마니를 치기도 했지만 가끔은 먹거리를 내기로 화투를 치는 것도 보았다.

요즘은 카지노니 뭐니 하는 휘황찬란한 도박장을 드나드는 사람들, 혹은 점 1000이니 뭐니 하며 고스톱을 치는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지만 담배 가치(개피)내기로 '육백'이나 '뽕'이라고 하는 화투를 쳤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동네 어느 집에서든 밤참을 마련해 준다. 숭숭 썰린 신김치를 넣어 끓인 칼국수일 때도 있고 가을에 주어다 놓은 도토리로 만든 묵일 때도 있었다. 하여튼 산골의 겨울은 눈과 함께 조용하게 깊어가고 소리 없이 봄을 맞는 듯하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은 봄까지 그냥 눈만 쌓인 허허 벌판일 뿐이었다.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을 만큼 꽁꽁 얼어버리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시설농업이 아니더라도 트랙터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겨울 밭갈이는 해 놓는 모양이다.

▲ 설날 각연사는 조용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사진 속 보리수나무를 윙윙거리게 만들고 몸을 웅크리게 만들었지만 비로자나불의 서광이 느껴졌다.
ⓒ 임윤수
태성마을을 지나 계곡을 따라 10리쯤 들어가는 길은 눈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콤바인 궤도바퀴를 이용해 눈을 치울 수 있어 눈이 오면 10리 길눈을 말끔하게 치울 수 있다고 한다.

차 한 대 들어갈 넓이에 포장까지 되어 있지만 산 따라 물 따라 만들어진 각연사 가는 길은 천수답 논두렁만큼이나 구불구불하다. 하늘만 뻐끔할 뿐 사방이 온통 산이다. 봉우리에 그늘진 곳엔 허연 눈들이 음영을 또렷하게 강조하고 있다.

일주문이니 사천왕문이다 해서 거쳐야할 문 하나 없이 곧장 경내까지 들어가니 양지바른 곳에 요사채가 있다. 요사채와 작은 둔덕을 이룬 높이에 대웅전과 비로전이 있고 대웅전 뒤로 삼성각이 있다. 요사채와 대웅전 가장자리엔 범종과 법고 그리고 운판(雲版)과 목어(木魚) 등 사물이 걸려있는 전각이 있다.

삼면이 산이다 보니 어느 전각하나 배경으로 멋진 겨울 산 하나 두르지 않은 게 없다. 이리 봐도 산자락 저리 봐도 산자락이다.

▲ 대웅전이 한껏 햇살을 받으며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대웅전 좌측으로 보이는 전각은 삼성각이다.
ⓒ 임윤수
설날인데도 첩첩산골 각연사에선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고 법당 댓돌 위엔 대여섯 켤레의 신발들이 나란히 놓여져 있다. 차례를 지내고 정월 초하루를 넘기지 않고 절을 찾은 불자들의 지극함이 느껴진다.

햇볕이 잘 드는 양달쪽은 눈이 녹았으나 그렇지 않은 응달엔 눈이 그대로 있다. 간간이 불어오는 골짜기 바람이 윙윙거리며 비로전 앞 커다란 보리수 나무 가지를 흔들고 몸을 웅크리게 한다.

각연사는 괴산팔경의 하나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어 10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찰이다.

충북 북부지역인 괴산군 칠성면 소재 보개산과 칠보산 그리고 덕가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각연사는 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어 국사책에도 나오던 명찰이다.

법흥왕이 호국불교를 강조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신라시대에 유일대사라는 분이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려고 현재 각연사 산너머인 쌍곡리 사동에 터를 잡고 목수들을 모아 불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 산짐승(개 발자국인지도 모르지만)들도 새벽 도량석을 돌았는지 절 뒤 채마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겨 놓았다.
ⓒ 임윤수
목수들은 부처님을 모시고자 하는 대사의 불심에 감화되어 정성껏 아름드리 재목을 다듬으며 절을 세우기 위한 불사에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날이면 수북하게 쌓였던, 재목을 다듬느라 생긴 톱밥과 대팻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자 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대사는 밤새 톱밥과 대팻밥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연유를 알아보기 위해 며칠을 새벽 일찍 일어나 작업장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디에선가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아와 톱밥과 대팻밥을 입에 물고 사라지는 것을 대사가 보게 되었다.

허겁지겁 까마귀의 뒤를 쫓던 대사는 산 깊은 곳에 이르러 그만 까마귀 떼를 놓치고 말았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리. 다음을 기약하며 대사는 더 이상 쫓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다 까마귀가 물고 가다 떨어뜨린 톱밥을 발아래서 우연이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발길을 돌려 차분한 마음으로 그 흔적을 따라가니 물안개가 몽실몽실 피어나는 잔잔한 연못에선 그 동안 없어졌던 톱밥과 대팻밥이 연꽃처럼 하얗게 떠 있었다.

▲ 연못에서 건져낸, 보물 433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진 비로전이다. 이른 시간 새벽공기를 가르며 도량석을 돌았을 스님들의 행적이 눈 위에 발자국으로 남아있다.
ⓒ 임윤수
대사가 연못 근처로 다가가자 톱밥이 떠있는 연못에선 한 줄기 서광이 비추기 시작하였다. 연못에서 서광이 비추는 것을 신비롭게 생각한 대사가 조심스레 연못 속을 살피니 연못 안에는 진좌한 석불이 미소를 띠고 있는 게 아닌가?

합장 삼배 후 정신을 가다듬은 대사는, 이곳에 절터를 잡으라는 부처님의 계시라고 생각하고 사동에 짓던 불사를 중단하고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연못 속에 진좌하고 있던 비로자나불을 조심스럽게 건져내고 연못을 메워 창건한 절이 지금의 각연사라고 한다.

그리고 '연못에서 깨달음을 얻은 절'이라는 뜻의 각연사(覺淵寺)를 절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비로전 터가 메워진 연못으로, 절을 짓느라 메웠기에 볼 수는 없으나 커다란 연못이 있었음을 반증이라도 하듯 각연사에는 사시사철 물이 아주 풍부하다고 한다.

▲ 지권인을 하고 있는 석조 비로자나불이 보인다. 비로전 내에 걸려있는 연등은 요즘 보기 드문 한지로 만들어져 있어 마음을 정갈하게 해 주었다.
ⓒ 임윤수
보물 433호로 지정된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은 각연사를 찾는 이에게 자비로운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을 의미하는 지권인, 양손을 가슴 앞에 올려 집게손가락만 똑바로 세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오른손 엄지가 왼손 집게손가락 끝에 맞닿도록 한 모양으로,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임을 의미한다는 수인(手印)으로 찾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묵언의 설법을 하고 있다.

설날 각연사를 참배하고 계곡을 내려오다 보니 다시금 옛 생각이 떠오른다. 해가 바뀌었으니 작년이 된 2003년 '법연'이란 법명과 함께 수계를 받았다. 불자로 입문하니 최소한 5가지를 지키겠다는 오계 서약식을 하는데, 그 첫 번째가 '생명을 존중하고 억압하거나 손상하지 않으며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는 아낌없이 베풀며 결코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지 말라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결코 사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며, 다섯 번째는 술에 취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 아침저녁으로 골짜기를 벗어나 법계(法界) 중생을 위해 울려 퍼질 범종과 법고 그리고 운판과 목어 등 사물이 보인다.
ⓒ 임윤수
솔직히 이 다섯 가지를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지킬 자신은 없다. 그러나 가끔 되뇌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덜 사악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듯하니 수계를 받은 게 헛된 일만은 아닌 듯하다.

비록 그것이 시대의 배경이었든, 기억에 희미한 지나간 추억이든 배고픔을 달래고자, 어떻게든 엄동설한 추위에서 살아나고자 먹이를 찾는 새들의 산목숨을 앗으려고 안달이었던 꼬마시절이 발아래 아삭이는 눈처럼 마음에 밟힌다.

덧붙이는 글 | 각연사 찾아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증평 나들목 - 증평IC - 36번 국도 - 도안 삼거리에서 우회전 - 34번 국도 -괴산 - 쌍곡 계곡 입구에서 직진 - 태성마을 삼거리 - 우회전 - 농로 4.7km -각연사

 

삿된 마음을 용납하지 않는 도량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7)-호거산 사리암

 

 

▲ 휘어지고 굽어진 소나무 숲엔 솔 향이 넘쳐 흘렀다. ⓒ 임윤수

 


동지(冬至)가 지나면 사나흘에 낮의 길이가 한 뼘씩 길어진다더니 정말 하루 해가 눈에 띄게 길어졌다. 겨울임을 느끼게 해 주는 듯 매서운 추위가 며칠간 살갗을 콕콕 찌르더니 어느새 오후엔 노곤함이 밀려오는 그런 날씨다.

입춘 추위가 밀려오고 있지만 차가운 공기 속엔 미약한 입김 같은 봄기운이 느껴진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으나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어날 봄은 분명 다가오고 있다. 황토빛 산 뿌리를 훤히 드러낸 산에도, 앙상한 가지로 월동하고 있는 나무들도 새 생명과 새싹을 틔우기 위해 지표 속으로, 껍질 속으로 이미 물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틈만 나면 산사를 찾으니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산사를 찾느냐" 묻곤 한다. 별다른 대꾸 없이 피식 하고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나는 산사 찾는 길에서 줍기도 하고 흘리기도 하는 사색이 즐겁다. 깊은 산중의 상큼한 기와 깔끔한 정(精)은 불혹의 나이를 살아오면서 옷가지 껴입듯 덕지덕지 껴입고 넋까지 비집어 넣은 속세의 풍진을 닦아주고 털어 내어 말끔하게 씻어 준다.

의식할 것 없으니 흐느적거리듯 걷거나 쫓기듯 종종걸음을 치거나 하며 혼자 걸으면서 산세를 둘러본다. 그곳에서 읽을 수 없는 글들을 듣고,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읽는다. 수목과 잡초, 산짐승과 미물조차 삼매의 경지에 든 듯 조용한 산사.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그 산사 찾는 길에는 주워 올 것이 꽤나 많다. 그 길에서 망각으로 잊혀진 추억을 줍고 잃어버린 나를 줍는다. 여유를 줍고 넉넉함을 챙길 수 있다. 하여튼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 산사를 찾는다고 말한다면 너무 아리송한 대답일 것같아 그냥 피식하고 웃을 뿐이다.

▲ 삿된 마음을 놓고 가라는 표식인 듯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임윤수

여여하게 다녀 온 산사의 뒷맛은 뭐라고 할까? 한여름 오랜 갈증 끝에 만난 옹달샘의 청량감? 한겨울 꽁꽁 언 손 녹여 주던 모닥불의 따뜻함? 그런 뭔가 있기에 훌쩍 다녀오곤 한다.

산사를 찾을 때마다 느끼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지만 자연은 참 순리적이다. 싹 틀 때 싹 돋고, 녹음질 때 그 잎새가 무성해진다. 가을이면 영락없이 결실을 맺거나 몸뚱이를 감싸던 잎새를 떨군다. 제 아무리 고운 색으로 단풍이 들었더라도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뿌리로 돌아갈 낙엽이 된다.

좀 더 오래 두고 구경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때가 되면 그 때에 맞게 자신을 낮추거나 포기하는 게 자연이다. 넘치도록 화려한 아름다움도 미련 없이 버리고, 과하게 밀려오는 인간들의 칭송 따위도 매정하도록 냉정하게 떨구는 게 자연인 것이다.

인간들의 그런 칭송과 눈길은 그냥 아양일 뿐이란 걸 자연은 너무 잘 알고 있다. 문득 '사람은 땅을 본받아야 하고, 땅은 하늘을 본받아야 하며, 하늘은 도를 본받아야 하고, 도는 자연을 본받아야 한다'는 노자의 말씀이 머리에 맴돌다 수박 씨처럼 입술에 툭 걸린다.

▲ 험한 벼랑길이지만 동글동글하게 만들어져 있어 오르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 임윤수

자연은 언제나 그렇게 있을 뿐이다. 자연은 하는 것 없으면서, 또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자연은 욕심도 없고 거짓도 없다. 억지도 부리지 않으며 오직 순리만 따를 뿐이다. 선악(善惡)도 없고 미추(美醜)도 없다. 진위(眞僞)도 없으며 고락(苦樂)과 영욕(榮辱)도 없다. 자연은 우리를 일깨워 줄 스승 중의 으뜸 스승이기에 자연에서 배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절한 다툼과 질식하도록 철저한 질서, 도태와 생존의 대립이 숨어 있는 걸 알게 된다. 인간들의 알량한 정이란 것은 애당초 없으나 분명한 생성의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다. 그러기에 약자는 죽고 강자만 살아 남는 정글 법칙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그게 자연이며 순리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떤가? 낮은 물에서 높은 물로 자리바꿈하려 부단하게 아등바등 몸부림을 친다. 몸부림이 모자라면 술수를 쓰고 술수가 모자라면 거짓이나 협잡사기를 친다.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에 순응하며 조화롭게 살고, 생존 질서를 담보하기 위한 최소 척도로 법을 만들었다. '법(法)'이란 글자를 가만히 보면 물 수(水)에 갈 거(去)로 이루어져 있는데 물 흐르듯 그렇게 조정하고 판결한다는 뜻이리라.

▲ 겨울 산중 미물들을 위한 보시물이 바위 곳곳에 놓여있다.
ⓒ 임윤수

그러기에 헌법 조항을 들지 않더라도 누구나 법은 따라야 하고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들이 형성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최소의 도리이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방귀 뀐 놈이 큰소리 친다"더니 버젓이 범법 행위를 해 놓고는 "편파 수사니, 형평이 맞지 않느니"하면서 패악질을 해대고 있다. 그것도 떼거리로 말이다.

세상 물정을 몰라서 떼 쓰는 아이들이라면 어르고 달래보고 그러다 영 안되면 엉덩이라도 두드려 일깨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악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소위 사회 지도층이란 인간들이 떼거리로 그러니 참말 한심스럽다.

공권력 중의 공권력, 아니 공권력이라는 수준을 넘어 국기의 근간이 되어 물 흐르듯 사회 질서를 순조롭게 하는 사법부의 구속영장 집행조차 무력화시키는 그들의 패거리 작태. 그 작태에서 순리에 역행하는 파멸이 예감되어 암울한 슬픔이 밀려온다.

한 때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신조어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더니 이젠 "유권무속(有權無束) 무권유속(無權有束)"이란 말이 생길 법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소싸움으로 잘 알려진 청도에 있는 호거산 사리암을 찾았다.

▲ 계곡에 두툼하게 얼어붙은 얼음이 겨울 산중을 느끼게 한다.
ⓒ 임윤수

호거산(虎踞山)! '호랑이가 걸터 앉아 있는 산'이란 뜻인가? 어릴 때 지지리도 말을 안 들으면 "요즘 호랑인 뭘 잡아 먹어. 저놈이나 잡아가지"하며 신세 타령하듯 야단을 치시던 어른들의 푸념이 생각난다. 진짜 요즘 호랑이 뭐하나 모르겠다. 국민들 혈세나 축내고 살맛이나 떨어뜨리는 그런 인간들 안 잡아가고…. 산 속의 호랑이가 보이지 않으니 이젠 국민들이 호랑이 행세를 하여야 할 것이다. 호랑이가 되어 저런 인간들 덥석 물어가야 할 것이다.

사리암을 찾기 위해서는 운문사 숲길을 지나야 한다. 운문사 진입로에 있는 솔밭 길은 어느 산사의 진입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울창하고 아름답다. 매표소를 지나면 걷게 되는 숲길엔 솔향이 물씬한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짧게는 100년 안팎부터 길게는 수령 200~300년은 됨직한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다.

천년 세월을 버텨온 이런 숲길에선 무거웠던 발길도, 혼잡한 머리도 가벼워진다. 왜곡되고 점철된 역사만큼이나 기둥은 물론 솔가지 하나 반듯하게 펴진 게 없다. 이리 휘고 저리 굽어진 소나무들이 고단한 듯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 벼랑에 세워진 절이기에 축 벽을 높이 쌓았고 그 위에 전각들을 세웠다.
ⓒ 임윤수

솔숲을 자세히 보니 수백 년 노송의 밑동에 하나 같이 생채기가 또렷이 남아 있다. 일제 치하 전쟁 물자로 쓰던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칼집을 냈던 상흔으로 보인다. 아직 아물지 않은 역사의 아픔은 진행형인 듯하다. 어쨌든 험난한 세월을 버텨낸 한 그루 한 그루의 소나무가 대견하고 고맙다.

햇살이 중천에 드리우는 시간인데도 소나무 숲길은 산 그림자에 파묻힐 정도로 깊고 울창하다. 무색의 길이기에 마음대로 덧칠을 할 수 있는 사색의 길이다. 숲길을 따라 천천히 들어 가보니 어느덧 사리암 주차장이 나온다.

사리암은 운문사 산내 암자로 간사할 사(邪)와 떠날 리(離)가 합쳐져 '삿(邪淫)된 것을 여의는 암자'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30~40분 정도 벼랑길을 걸어야 하지만 가로등까지 촘촘하게 서있는 것으로 보아 불자들의 발길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 모양이다. 두 사람쯤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벼랑길 양쪽엔 돌담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가파른 경사에 울퉁불퉁한 길로 순탄하진 않지만 길들이 예쁘게 정돈되어 있다. 소꿉놀이하듯 아기자기한 그런 눈맛이 느껴지는 돌길이다. 한 겨울 배고픈 산중 짐승에게 베푼 보시물인 쌀과 조, 그리고 씨앗들이 군데군데 바위 위에 깔끔하게 공양되어 있다.

▲ 좁은 공간에 터를 잡다보니 지붕을 평평하게 하여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 임윤수

계곡은 말라 있고 알몸을 드러낸 겨울 산, 등걸처럼 몸뚱이뿐인 나무를 보고 삭막하다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세와 수목의 진면모를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겨울이다. 그늘에 감춰지고 나뭇잎에 숨어있던 산의 깜찍한 매력과 흉허물도 여지 없이 드러내는 게 겨울 산이다.

사리암으로 오르는 길도 그랬다. 계곡은 말라 있고 나무들은 벌거벗어 음한 곳, 귀한 곳 다 드러냈다. 의외로 정갈한 느낌을 준다. 삿된 마음 모두 털고 올라가라는 듯 감춤 없이 보여 준다.

나반존자(那畔尊者) 기도도량으로 유명한 운문사 사리암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을리에 소재해 있다. 사리암(邪離庵)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 국사가 937년(고려 태조 20년)에 창건하였다.

그후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산중 암자로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무정한 세월이 1천여 년 흐른 1845년(조선 헌종 11) 효원대사가 중건하고 신파 스님이 천태각(天台覺)을 건립하며 세상에 알려지자 불자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 나반존자님을 모셔 놓은 천태각이 마치 제비집처럼 바위에 매달려 있다. 줄을 서 순서를 기다려야만 참배를 할 수 있다.
ⓒ 임윤수

1851년(철종 2) 현재의 나반존자상을 봉안한 후 영험한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알려지며 불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수행처이자 기도 공간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사리암에 전해내려 오는 설화가 경내 안내판에 잘 기록되어 있다. 옛날 사리암 바위굴에는 수행하는 사람이 한 명이면 한 사람 분의 쌀이, 두 사람이 공부하면 두 사람 분의 쌀이, 열 사람이 기도를 하면 열 사람 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이 생긴 대중 한 명이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하려고 막대기로 들쑤셨다. 그런데 웬걸 콸콸 쏟아지길 기대했던 쌀은 나오지 않고 물만 솔솔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로는 쌀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삿된 마음이 상존할 수 없음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다.

이곳에는 천태각과 관음전이 있고 산신각도 있다. 전각 전체가 벼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천태각과 산신각은 마치 제비집처럼 벼랑에 매달려 있다. 천태각은 참배할 수 있는 공간이 워낙 협소하다 보니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참배를 해야 한다. 워낙 급경사라 축 벽을 쌓아 불사한 전각들은 지붕을 평탄하게 했고 그 지붕을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올라 온 길이 아스라이 드러난다. 다시 저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 임윤수

올랐던 길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다시금 발길을 돌린다. 문득 오를 때 가로등을 수리하던 전기공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낮이면 햇살 받아 생체 활동을 하고 밤엔 어둠을 덮고 쉬어야 할 나무들이 밤에 찾아오는 불자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밝혀 놓는 가로등에 속앓이를 할 것을 생각하니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한 생각 고쳐 먹으면 백팔 번뇌가 백팔 은덕으로 바뀐다고 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혜로움을 백팔 개만 찾아낸다면 예토(穢土)가 정토(淨土)로 변한다고 했다. 그러면 인생 고해(苦海)가 인생 낙해(樂海)로 될 것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가로등 주변 나무들이 자연의 순리대로 밤에는 어둠을 덮을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미물의 축에도 끼지 못할 나무들이지만 심산유곡에서조차 인공 불빛에 순리를 유린당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해진다.

전각의 기왓장 하나까지도 스님들 얼굴이라고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기왓장에 마음 쓰는 것보다 가로등에 시달림 받을지도 모를 나무들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더 고매한 얼굴이자 마음일 것이다.

▲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자칫 삿된 마음에 헛발이라도 놓게 되면 수십 길 낭떠러지로 던져질 듯하다.
ⓒ 임윤수

피로가 온몸을 엄습해 온다. 껍질뿐인 몸뚱이가 삿된 마음으로 나를 유혹한다. 어찌 보면 지금껏 껍데기를 시봉(侍奉)한 게 삶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껍데기가 없으면 내가 존재할 형체가 없기에 모든 것을 껍데기에 바쳤다고 변명하며 이제부터라도 참 나의 모습을 찾고 싶다. 껍데기의 꼬임을 뿌리치고 여생을 뚜벅뚜벅 걷고 싶은데 그럴 자신이 없다.

덧붙이는 글 | 사리암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경산IC - 동곡 - 운문사 - 사리암(도보로 30-40분)

 

8명의 성스런 스님들이 머물던 절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8)-팔공산 팔성사

 

 

▲ 험상궂은 표정의 금강장사가 마음을 지켜보는 듯하다. ⓒ 임윤수

 

중학교를 다닐 때 일이다. 2학년 재학 중 전학하여 처음으로 새 학교에 등교했는데 누군가 '윤수야!'하고 부른다. 알만한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옆에 있던 또래가 '왜'하고 대답을 한다.

그때서야 이 세상엔 나 외에 다른 '윤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네 전부가 일가친척인 집성촌인 탓에 큰집과 작은집, 당숙과 재당숙, 외가와 사돈 등으로 얼키설키 연을 달고 있는 시골마을에서 자란 우물안 개구리인 나에게서 윤수는 이 세상에 하나 뿐인 독보적 이름인줄 알았다.

국어 책에 바둑이 친구 영희가 나오고 담임선생님 이름이 영희였지만 그것은 그냥 책에나 나오는 것이지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만나고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망상이 한 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그 후에 전화번호 책을 뒤져보고 윤수란 이름이 정말 흔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준 그 친구는 중학교 2년 동안을 한 반에서 함께 생활하며 많은 우여곡절을 함께 경험해야 했다. 동명(同名)은 가끔 사람을 헛갈리고 당혹스럽게 한다.

▲ 눈밭의 뽀얀 부도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 임윤수

절 이름도 같은 게 부지기수로 많다. 어떤 이름은 전국적으로 수십 군데나 된다. 그러니 자칫 어떤 절을 말하면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전혀 엉뚱한 절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큰 규모에 속하는 '쌍계사'란 절만 하더라도 그렇다. 지리산 자락인 하동에 쌍계사 있는가 하면 전남 진도와 충남 논산 등에도 쌍계사가 있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기사의 제목에 나오는 '팔공산'을 보고 십중팔구는 대구에 있는 팔공산(八公山 : 1192.9m) 일 거라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팔공산은 경북 대구에도 있지만 전북 장수에도 팔공산(1151.0m)이 있다.

전북 장수엔 왜장을 끌어안고 물에 뛰어 든 주논개의 사당과 생가가 있다. 꽃다운 스무 살 나이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논개가 태어난 곳이 바로 장수다.

양성평등이 주창되면서 많은 여성들이 정·재계를 포함한 사회적 지도층에 두드러지게 진출하고 있다. 지도층에 입문하려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본받으려 해 봄직한 인물이 논개 아닌가 모르겠다. 논개는 고관대작의 사대부 집 딸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을 출생지로 두고 있는 아녀자임에도 기꺼이 제 몸 불살라 의를 행했다.

▲ 대웅전과 극락전 그리고 삼성각이 보인다.
ⓒ 임윤수

그러기에 만해 한용운은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廟)에'란 글로 그를 예찬했으며 논개의 순절을 기리는 마음은 결국 대중가요까지 등장하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 그런 말을 하였다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이지만 어릴 때 여자들이 해야 할 일, 부엌일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등 사내녀석이 해서는 안될 일(?)을 하면 할머니들의 호통 담긴 조롱이 뒤따랐다. 다름 아닌 '계집이 하는 일을 남자가 하면 불알 떨어진다'는 말씀이었다.

대범하지 못하고 씩씩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계집만도 못한 녀석이라 호통하며 불알을 떼어버리라'고도 했다. 불알은 남성의 생식기적 표현이지만 남자로서 지켜야 할 의(義)와 도(道)그리곤 체면(體面) 등이 농축된 상징이었음이 분명하다.

행동을 어떻게 하든 생식기인 불알이 떨어질리 없지만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또 다른 표현이자 격려였으리라. 남자답게? 글쎄 남자답다는 게 무언지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선비정신, 꼿꼿한 지조 그리고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의로움도 포함된 뭔가를 말한 게 아닌가 모르겠다.

▲ 대웅전 양옆에는 옴마니반메홈이 양각된 순동제 회전체가 있었다.
ⓒ 임윤수

그 할머니들이 생존해 작금의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분명 그 소릴 또 할 듯하다. '저 계집만도 못한 놈들' 하고 혀를 끌끌 찰 게 분명하다. 아무리 어제의 동지가 오늘날 원수 되고 동지가 원수 되는 게 정치 판이라고 하지만 이합집산에 패륜적 배신을 밥먹듯 하니 말이다.

남성으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가끔은 남자임을 부끄럽게 하는 여성이 꽤나 많다. 그런 여성엔 이미 운명을 달리해 역사적 인물이 된 사람도 있지만 한 시대를 동시에 살아가는 여성 중에도 분명 있다.

그런 여성중의 한 명, 논개가 태어난 장수는 무주, 진안과 인접해 있다. 이 세 고장을 통틀어 '무진장'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꺼먹돼지와 사과 그리고 흑두부가 유명한 장수엔 팔공산이 있고 팔공산에는 팔성사(八聖寺)라는 절이 있다.

장수IC를 나와 장수읍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재를 넘어야 하는 고갯길을 따라야 한다. 재에 올라서면 장수 읍내가 한 눈에 보인다. 산자락을 행주치마처럼 두른 작은 읍 소재지로 옴폭 패인 분지형 지형이다. 불어오던 바람도 멈추고 흘러가던 구름도 쉬어갈 듯한 그런 산세가 읍내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 산신과 칠성 그리고 독성님을 모셨을 삼성각이 절의 규모에 비해 큰 편이다.
ⓒ 임윤수

장수읍내를 벗어나 주논개 생가입구를 지나 남원 쪽으로 한참을 가다 팔공산을 바라보면 저만치 산 중턱에 산사가 보인다. 이정표를 보고 포장된 농로와 산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주차장이 나온다. 산사 가는 길이 대개 그러하듯 들어가는 길은 한적하다. 그냥 길 따라 들어가면 된다.

팔공산 기슭에 자리잡은, 한때 운점사(雲岾寺)라고도 불렸던 팔성사(八聖寺)는 백제 무왕 때(603) 해공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행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버글거릴 때를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 표현하는데 이 야단법석이란 표현이 당시의 신조어로 등장한 배경엔 원효대사의 설법 풍경에서 시작되었다.

원효대사가 양산에 있는 내원사에 머물 때 천여 명의 중국 스님들이 찾아와 설법을 청하였다고 한다. 암자의 터가 비좁아 어쩔 수 없이 대사는 뒷산의 넓은 벌판에 야외불단(野外佛壇)을 세우고 법좌석(法座席)을 마련하여 화엄경을 설했다.

▲ 대웅전 앞 회전체의 글씨와 극락전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 임윤수

그렇게 되니 이때부터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때의 풍경, 야외에 불단을 차려놓고 법좌석을 마련하여 화엄경을 설법하던 야단법석(野壇法席)과 같다하여 '야단법석'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

내원사에서 야단법석이 있은 후 대부분의 스님들은 중국으로 돌아갔으나, 8명의 스님은 원효대사를 따라 계속하여 수도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여 팔공산으로 들어와 함께 거주하게 된다. 이때부터 8명의 귀한 손님들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하여 그 산은 '팔공산'이라 불렀다.

남아있는 8명의 스님 모두가 성스러운 스님들이니 그들이 머물던 절 이름은 팔성사(八聖寺)라고 하였으니 그 절이 현재의 팔성사다. 또한 팔공산은 성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라 하여 성적산(聖積山)이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 흰눈 속 산사는 정막감이 들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 임윤수

비탈진 산길을 오르느라 자동차가 굉음을 낸다. 동절기 휴식삼매에 들어있을 나무와 산짐승을 희롱하는 듯해 미안함이 앞선다. 유달리 눈이 많기로 알려진 곳이라 응달진 곳을 지날 땐 빙판이 걱정된다. 눈 녹은 물조차 멈출 새 없이 흘릴 만큼 급경사인 탓에 결빙된 곳은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제일 먼저 잘 정돈된 주변의 소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붉은 껍질에 구불구불 멋대로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손질을 하였는지 거슬리는 가지 하나 없이 잘 다듬어진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나무사이 저 만큼에 원색의 단청이 보인다. 눈이 내린지 며칠이 지났건만 응달진 곳은 수북한 눈밭이다.

사악한 생각이라도 하면 와락 덮칠 것 같이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는 금강장사가 양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비탈지고 휘어진 길을 조금 오르니 왼쪽으로 뽀얀 부도가 눈밭에 보인다. 부도의 깨끗함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이 짐작된다.

부도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 좌측이 되는 산 쪽으로 사람 한 길 높은 위치에 대웅전이 있고 그 우측에 삼성각이 있다.

▲ 스님들이 공부를 하는 선방은 응달진 곳이었고 주변의 눈이 그대로 있었다.
ⓒ 임윤수

대웅전 전면 양쪽에는 드럼통 형태의 순동제 회전체가 놓여져 있다. 아주 작은 힘으로 돌려도 부드럽게 돌아가는 그 회전체에는 '옴마니반메홈'이라는 진언이 범어(산스크리트)로 양각되어 있다.

'옴마니반메홈'이란 "당신의 거룩한 꽃 속에 나 온전히 안기나이다"란 뜻이라고 하니 속세의 모든 악연을 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다는 뜻인 듯하다. 진실한 마음으로 진언이 양각된 이 회전체를 돌리며 한가지를 소원하면 반드시 이루게 된다고 한다.

구리판을 둥그렇게 감고 글씨를 양각하여 만든 이 회전체를 돌린다고 요술방망이에서 '뚝딱' 하고 소원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리는 없을 것. 그러나 그렇게 소원하며 진실한 마음을 가지다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보면 뭔가를 깨닫거나 지혜를 얻게되니 그것이 곧 소원을 이루는 수단이자 방법의 길이 아닌가 모르겠다.

대웅전 우측엔 여느 절들과 마찬가지로 삼성각이 있고, 그 옆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산상의 별장처럼 작은 선방이 있다. 한 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막힘이 없으니 그 곳에 앉으면, 꽃 피고 눈 나리는 가운데 자아를 놓게 될 듯하다.

▲ 원두막형태의 초가가 한여름의 더위를 떠올리게 한다. 옆으론 바위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별도의 선방이 필요 없을 듯 하다. 이곳이 곳 선녀 골이며 무릉도원일 듯하다.
ⓒ 임윤수

대웅전 정면, 사람 한 길만큼 낮은 곳 왼쪽으론 극락전이 있고 한 단계 더 낮은 곳엔 공양간과 기도하며 기거할 수 있는 숙소가 있다. 공양간 앞쪽으론 고사된 듯 거무튀튀한 아름드리 호두나무가 유구한 세월을 느끼게 해준다.

대웅전 좌측에는 원두막 형태의 초가가 있고 그 옆 바위로 물줄기가 골을 이루고 있다. 한 여름, 등줄기 땀이 줄줄 흐르는 삼복 더위 속 여름, 초가의 그늘에 앉아 흐르는 물 바라보며 경이라도 한 줄 읽답보면 예가 곧 선녀골이며 무릉도원일 듯하다.

별도의 선방이 필요 없을 듯하다.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물에서 하심(下心)을 보게되고 불어오는 바람에서 덧없음을 알게되니 무엇을 더 깨우치랴. 물에 덤벙 적신 옷가지는 바윗돌이 금방 말려줄 게 틀림없다. 산나물이라도 뜯어 펼치면 건조대가 되고 등대고 누우면 침상이 될 듯하다.

기둥만 남아있는 소나무 사이로 잘 정돈된 들녘이 보인다. 경내에서 먹고 마신 것이라곤 흐르는 물 조금뿐인데 배가 고프지 않다. 가슴에선 맑은 공기가 아삭아삭 씹히고 답답한 머릿속엔 퐁당하고 퍼지는 물결처럼 후련한 뭔가가 너울을 만든다.

▲ 깡동하게 기둥만 남아있는 소나무사이로 잘 정돈된 들녘이 시원하게 보인다.
ⓒ 임윤수

비탈길 내려와 금강장사 옆을 지날 땐 무심코 주머니 속 두 손이 꼼지락거린다. 그리곤 할머니들이 말씀하시던 사내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되뇌게 된다. 그것만 달렸다고 사내라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곤 혀 끌끌 차며 불알 떼어내란 소릴 하지 않을지 내심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팔성사 찾아가는 길
대전-진주간고속도로 - 장수IC- 장수읍내 - 19번국도 남원방향 - 이정표

 

불국토의 최전방, 두타산 호국충용사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9)-두타산 호국충용사

 

남자 서넛만 모이면 영락없이 군대 이야길 한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이들도 그렇지만 나이 지긋하게 먹은 어른들도 거나하게 한 잔 마시면 거르는 법 없이 소싯적 군대 이야길 한다. 가끔은 믿기 어렵게 과장된 무용담도 있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동질적 이야기들도 많다.

현실 사회에선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노년과 중년의 삶을 살아가지만 군대 이야기가 시작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역전의 용사가 되고 가장 어려운 시대에 나라를 지킨 호국 충정의 늠름한 군인이 된다.

▲ 왠지 군대 구호가 언뜻 연상되는 <護國忠勇寺>란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이 보인다.
ⓒ 임윤수
사람들은 자신은 칼날 같은 군기 속에서 빳빳한 졸병 세월을 보냈는데 자신의 졸병들은 하나 빠짐없이 고무줄 군기에 헐렁한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다"란 말로 결론을 맺는다.

하루라도 못 보면 금방 끝장이라도 날 듯 뜨거웠던 연인, 군 생활이 길어지며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첫사랑에 대한 배신감과 연민은 예나 지금이나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에겐 홍역처럼 거르지 않는 아픔이자 함께 나누는 동병상련의 이야기거리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들었던 이야기 또 들어야 하니 여자들에게 있어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라 해도 할말이 없을 듯하다. 하여튼 군대 이야긴 남자들에겐 공통분모 같은 이야기거리며 평생 동안 우려내도 모자람 없는 젊은 날의 위풍당당한 추억거리다.

하기야 가장 뜨거웠을 젊은 청춘을 달궈진 냄비 속에서 생활하듯 보냈던 곳이니 오랫동안 기억되고 우려낼 것이 많은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니 어찌 보면 군 생활은 그 자체가 삶의 질곡이며 수행이었다.

▲ 여느 절들과 비슷한 법당이지만 호국충용사는 군 영외 법당이다.
ⓒ 임윤수

남자들이 기억하는 군대 추억 중 또 하나가 있다면 훈련소에서 일요일 경험하던 종교 활동이 아니었나 모르겠다. 일요일이면 갖게 되는 종교 활동은 군대 생활이 막 시작되는 훈련병에겐 좋은 휴식 시간이며 피안의 공간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훈련소 생활이란 게 완전히 틀에 박힌 일과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는 에누리 없이 짜여진 시간표대로 훈련을 받는다. 제식 훈련을 받고 총검술을 익힌다. 소위 피가 나고, 알이 배며, 이가 갈린다는 PRI가 있은 다음에야 사격을 한다. 지나고 보니 어린애들 전쟁놀이와 다름없는 각개전투와 목봉 체조도 빠지지 않는다.

학교를 다닐 때 이와 비슷한 제식훈련이나 총검술을 배우던 교련 시간엔 가끔 결석도 하고 지각도 할 수 있었지만 훈련소 생활에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것들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다 일요일이 되면 개인 시간과 함께 나름대로 휴식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런데 말이 휴식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리둥절한 훈련병 시절엔 손에 쥐어준 휴식 시간도 어리둥절하게 놓치기 일쑤다. 모든 것에 익숙하지 못하니 마음에 여유가 없는 탓에 쉴 수 있는 시간은 물론 공간도 여의치 않다. 공연히 내무반서 얼쩡거리다 조교나 기간병들 눈에 잘못 띄면 자칫 빨래나 대청소 또는 취사장 사역에라도 차출되어 휴식은커녕 팔자에 없는 일을 하거나 심부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엉뚱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 법당 기둥엔 한글로 된 주련이 걸려있다.
ⓒ 임윤수
멀지 않은 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광주 사태의 실체도 알지 못하고, 어디서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유비통신(流蜚通信)시대였던 25년 전 1980년의 논산훈련소 이야길 하고 있으니 현재의 훈련소 생활과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역에 동원되는 그런 위험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가 종교 활동이다. 훈련소에서도 종교 활동은 보장되어 있었다. 훈련소에도 군법당이 있고 교회와 성당도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신자이거나 신자인 척만 하면 어느 종교 시설에든 주어진 시간만큼은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다.

교회를 다니는 동기생을 따라 사이비 기독교인이 되어 일요일엔 교회를 다녔다. 졸거나 등을 기대려고 엉덩이를 빼면 앞으로 미끄러지는 불편한 의자였지만 마음 편하게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자 해방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그저 옆 사람 따라 적당히 분위기만 맞추면 된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평소엔 교회를 다니지 않던 아이들이 한 알의 달콤한 사탕을 얻기 위해 교회엘 나가는 것처럼 훈련소에선 사역을 피하고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교회에 나갔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중부고속도로 증평 I.C.를 나와 34번 국도를 따라 충주 쪽으로 6km쯤 가다보면 왼쪽으로 왠지 군대 구호가 언뜻 연상되는 ‘護國忠勇寺’란 편액이 일주문에 걸려있는 절이 있다. 지금은 일주문이라도 세워져 덜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부대 입구처럼 양쪽 기둥을 바탕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철제 구조물에 '호국충용사'사란 글씨가 걸려있어 영락없는 군부대 출입문을 연상시켰던 절이다.

▲ 대웅전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좌협시불로는 지장보살, 우협시불로는 관세음보살을 모셔 놓았다.
ⓒ 임윤수

절은 두타산에서 뻗어 내린 야트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탁 트인 증평 들녘을 전망으로 하고 있다. 새로 뚫린 대로(大路) 바로 옆에 있는 호국충용사는 그 이름에서 연상되듯 군 법당이다. 군 법당이라고 하니 군부대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할 듯하나 그렇지는 않다.

대로를 벗어나 시멘트로 야무지게 포장된 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일주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나오고 마당 중간쯤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의 규모나 형식은 여느 사찰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기둥에 쓰여 있는 주련(柱聯)들이 눈길을 끈다.

여느 절들의 주련들은 난해하기 그지없다. 한문 세대가 아닌 청장년들에게 법당 기둥에 달려 있는 주련들은 그냥 볼거리에 불과하다. 한문이라는 자체가 그렇지만 휘갈겨 쓰듯 멋을 낸 한자를 읽는다는 것은 좀체 쉬운 일이 아니다. 더더구나 그 문구가 담고 있는 뜻을 헤아린다는 것은 스님들이나 알 수 있는, 염원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기에 가끔은 눈을 뜨고 있으나 눈을 감은 듯한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 군승인 법사스님과 군종 사병들이 생활하고 있는 요사채에는 <염화미소>란 편액이 걸려있었다.
ⓒ 임윤수
그런데 충용사 대웅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들은 한글로 되어 있었다. 정면 6개의 기둥엔 각각 "비록 사람이 일백년을 살지라도, 게으르고 약해 정진하지 않으면, 하루를 살아도 용맹하고 굳세어, 꾸준히 노력함만 같지 못하니, 생각이 온전하면 지혜가 생기고, 생각이 흩어지면 지혜를 잃는다"란 글이 적혀 있다.

계속된 내용의 주련은 대웅전 정면뿐 아니라 사방 기둥에 하나도 빠짐없이 달려있으니 그냥 대웅전을 돌라보며 기둥의 주련만을 읽는 것으로도 하나의 가르침을 얻을 게 분명하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그리고 좌협시불로는 지장보살님이 우협시불로는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 요사채 거실에는 보기에 오래된 듯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80평 정도 되는 법당은 정갈하기만 하다. 하기야 군 법당이니 군인의 생활 기본인 정리 정돈에 부처님을 모시는 불심까지 더했을 테니 그 정갈함이 어디와 비교한들 빠질 수 있겠는가. 훈련을 마치면 총기를 닦고 기름 치듯 시시때때로 법당을 닦고 정돈하였을 군종 사병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제대할 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군법당이 이런 모습이었구나. 훈련병이란 제한된 영내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을 감수하여야 하는 청춘 시기에 법당과 같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작은 행복이다.

질풍노도와 같은 번뇌와 끊임없는 갈등으로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할 시기에 몸과 마음을 차분히 보듬어 줄 심신의 휴식처로 법당과 같은 신앙 공간이 있다는 게 참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주문과 대웅전 좌측 사이엔 500관(1875Kg)이나 되는 육중한 범종이 달려있는 범종각이 있다. 부대의 기상 나팔과 취침 나팔이 하루 일과를 알리는 시작과 마감의 타율적 소리였다면 범종에서 울려 퍼지는 깊은 울림 소리는 심금을 파고드는 자정(自靜)의 소리일 듯하다.

대웅전 우측엔 석조미륵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그 앞쪽엔 요사채라고 할 수 있는 건물 한 채가 있다. 건물 정면엔 '염화미소'란 편액이 걸려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 정면엔 동제로 보이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어디서 어떻게 모셔왔는지 알 수 없지만 보살상에선 유구한 세월이 느껴진다.

 



▲ 대웅전 우측과 요사채 중간지점에 석조미륵보살상이 조성되어 있었다.
ⓒ 임윤수
염화미소실은 군승(軍僧)인 법사 스님과 군종 병사들이 숙식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반 절들이 스님과 신도인 보살이나 처사들에 의하여 살림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군법당인 충용사는 현역 군인인 군승과 군종 병사들에 의해 살림이 이루어지고 있다.

법복을 대신해 군복을 입은 군종들이지만 스님들처럼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드리고 법회가 있을 때면 사시마지도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범종을 타종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라고 한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절을 찾아오는 장병이나 군 가족에겐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마음의 휴식이 필요한 사람에겐 또래의 말벗으로 마음을 보듬어 주어야 할 친구가 되어야 한다.

교육중인 훈련병은 규정상 영외 출입이 허락되지 않기에 종교 활동 또한 영내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부대에서 훈련병을 상대로 한 법회가 있을 때면 충용사 스님이 영내로 들어가 의식도 갖고 마음의 양식이 될 법문도 들려준다고 한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 언덕 위에 500관의 육중한 범종이 보인다.
ⓒ 임윤수
군법당이라고 하지만 훈련병은 그 특성상 영외 종교 활동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충용사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신도는 현역 기간병과 장교 그리고 군인 가족이지만 일반 민간인들도 있다고 한다.

호국 충용사가 심산유곡에 있거나 찾아가기 불편한 곳에 위치한 것은 아니지만 군법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언제고 조용할 듯하다. 커다란 절, 이름 난 큰스님만을 찾아다니며 짝사랑하듯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음에 속앓이를 하는 것보다는 이렇듯 조용한 곳을 찾아 참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들 같고 손자 같은 젊은 병사들이 나라를 지키는 애틋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이런 절을 찾아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편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엔 평화의 너울이 만들어질 게 틀림없다.

▲ 군 법당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군종 사병은 가슴이 이런 표식을 달고 있었다.
ⓒ 임윤수
많은 우여곡절 끝에 이라크 파병안이 국회 비준을 통과했다. 본인이 원했고 부모들 동의 하에 십수 대 일의 경쟁에서 발탁되어 이라크로 파견을 나가지만 그들에게도 심신을 쉬게 할 휴식처는 필요하다.

떨어진 체력과 상처 난 육신이야 약 바르고 쉬면 회복되고 쾌유된다. 그러나 마음에 드리워진 이런저런 갈등과 아픔은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손으로 어루만지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물질만 넉넉히 준다고 모든 게 족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큰 착각이다. 혈기 왕성한 청년 시기에 충분한 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마음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최신 장비에 넉넉한 보수만으로 사기가 충만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착각이다. 진정한 용기와 사기는 마음에서 우러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결코 물질적 풍요로움에서 솟아나지는 않는다. 그런 마음,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진실한 마음은 가슴에 저며 놓은 본심에서 우러난다.

▲ 탁 트인 전망, 들녘 건너 쪽으로 평온해 보이는 증평읍이 보인다.
ⓒ 임윤수

훈련과 경계근무에 지친 병사들을 어머니 마음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또 다른 대상물은 혼자만의 생각을 놓을 수 있는 법당의 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있지 않으면 파병이 이루어진다. 수억만리 이국에서 타국민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해 활동할 우리 젊은이들에게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충용사 같은 종교적 지원도 따랐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호국충용사 찾아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 중평IC - 좌회전 34번국도 6Km - 사거리 직진 - 좌측에 일주문 보임

 

토끼가 달 보듯 국태민안 염원하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0) 도봉산 망월사

 

84세가 되는 어머니에게 있어 조금씩 길어지는 요즘 하루는 뉘엿뉘엿한 저녁시간에 하늘을 곱게 물들이는 노을 빛 여정과 같이 삶의 아쉬움이 서린 그런 시간일 듯하다. 살아온 날 보다는 살아갈 날이 훨씬 적음을 알기에 앞일을 설계하기보다는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고 각색해 보는데도 모자랄 듯하니 어머니가 느끼는 시간의 깊이를 짐작할 수는 없다.

▲ 돌산답게 주변이 온통 돌로 되어있다. 돌로 만들어진 가지런한 계단이 깔끔해 보인다.
ⓒ 임윤수

초침이 시계 한 바퀴를 도는 똑같은 시간에서 느끼는 세월의 무게가 천양지차니 계절이 바뀔 때 느끼는 삶의 체감속도야 감히 비유조차 어려울 게 뻔하다. 살아온 만큼 사물에서 느끼는 심오함도 다를 거며 오고있는 봄에 대한 느낌도, 살아 갈 내일에 대한 각오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애절한 기다림보다는 그렇게 기다렸던 지난날이 더 그리워지는 그런 여생의 시간을 살고 계실지도 모를 어머니 마음에도 하나의 망불상(望佛象)이 간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시집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고 한다. 60여 년이 넘게 절에 다녔음에도 그 흔한 법명(法名) 하나 없다. 어느 절이고 의식 때마다 빠트림 없이 누구나 독경하는 '반야심경'조차 온전하게 외우지 못할지도 모르는 불자가 어머니다.

▲ 망월사 큰법당인 낙가보전이 도봉산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 임윤수

많이 배워 선지식인이란 이름으로 강동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친일에 앞장서던 그런 여성들과는 달리 가난한 시골의 볼품없는 계집애로 자랐을 어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자식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기껏 어깨너머 눈썰미로 익힌 실력이기에 정자로 또박또박 쓰여진 한글을 더듬더듬 읽을 정도니 문맹에 가깝다.

그들이 책을 펼치고 학교 책상에 앉아있을 때 어머니는 보릿고개를 맞아 허기를 면키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외할머니를 도와 산과 들로 초근목피(草根木被)를 얻기 위해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어머니기에 태반이 한문으로 되어있던 경전을 읽을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총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요즘처럼 듣고 외울 수 있는 오디오시스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늙어가며 총기마저 어둑해지니 어머니에게 있어 염불은 부처님을 모시는 스님들이나 독경하는 심오한 천상의 말씀 정도로 생각하셨다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더더구나 고향에 있는 절에선 법문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고향에 있는 절은 법주사 말사로 할머니 동년배쯤 되었다는 두 할머니 스님이 탁발로 일구어 놓은 아주 작은 암자다. 어렸을 때 보았던 두 할머니, 태조와 팔영이라 부르던 두 스님은 빡빡 깎은 머리에 덕지덕지 기운 옷을 입고 매일 같이 바랑을 둘러메고 탁발을 하러 다니는 모습이셨다.

그렇게 탁발해 온 쌀이나 동전을 모아 초가 같던 지붕에 기와를 올리고 텃밭을 마련하며 수십 년을 조금씩 불사한 절이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다. 뚜렷한 창건사도 없고 그럴싸한 전설이나 설화도 없지만 부처님에 대한 두 할머니스님들의 땀이 일구어 낸 불심의 결정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어머니의 정성과 기도가 구석구석 물씬하도록 배인 곳임에도 분명하다.

▲ 전각조차 마음을 비운 듯 허허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 임윤수

어머니가 60여년째 다니고 있는 고향 절은 석가모니불을 모셔놓은 아주 작은 규모의 대웅전과 한 평 정도의 크기가 전부인 산신각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겨우 밥이나 끓여 먹고 몸 하나 의지할 수 있는 사랑채 같은 요사채가 절의 전부다.

길다란 염불도 줄줄이 외지 못하고 경전도 유창하게 읽지 못했지만 절에 갈 때는 며칠 전부터 매사를 조심했다. 혹시라도 부정이 탈까 그랬는지 며칠씩 근신하듯 말조차 삼가며 생활했지만 진작 절에 가는 날엔 마지(부처님께 올리는 밥) 올리고 연거푸 절을 하는 것으로 기도를 끝낸 듯하다.

절에 다니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기라도 하면 제일 먼저 부처님께 올릴 공양미를 따로 떠놓는다. 이어 제사지낼 쌀을 떠놓고 나서야 나머지 쌀들을 쌀통에 채운다.

▲ 바람에 날리는 눈발 때문에 주변이 온통 뿌연 하다.
ⓒ 임윤수

어머니에게 있어 부처님은 그저 믿음의 대상이지 교리를 따지고 가르침을 논할 그런 대상이 아니다. 구성진 목청에 적당한 리듬을 실어 천수경과 금강경을 막힘 없이 독경하고, 조리 있게 교리를 설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저 절이나 열심히 하는 어머니는 초라하고 무지한 한 불자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쌈짓돈이나 작은 공양물을 부처님께 올리니 뭉칫돈을 부담 없이 덥석 내놓는 화주들에게 있어 어머니는 도리어 보시의 대상이며 느릿한 동작으로 눈살의 대상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도 그들 못지 않은 불자라 생각한다. 비록 그들이 말하는 산스크리트(梵語)를 모르고 한문을 읽지 못해 경전을 읽지 못하지만 그들보다 불심이 얕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들이 알고있음으로 조금은 비유하고 의심하는 것만큼을 상쇄해 주고도 남을 의심 없는 믿음이란 게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의 빳빳한 새 돈에는 없을, 꼬깃꼬깃한 헌 돈을 인두로 다리는 정성이 담긴 돈을 어머니는 시주금으로 놓는다. 그들이 내놓는 커다란 공양물의 화려함 대신 어머니가 가져다 놓는 공양물엔 고르고 가다듬은 어머니의 부처님에 대한 경배심이 담겨있다.

▲ 아침저녁으로 망월사 계곡에 구제의 종소리로 울려 퍼질 범종이 있다.
ⓒ 임윤수

어머니의 믿음은 그런 조건 없는 믿음이다. 소원하던 좋은 일이 이루어지면 '다 부처님 덕'이라 생각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당신의 정성이 모자란 탓'이라 생각한다. 북방불교가 어떻고 남방불교가 어떠니 하는 논리적 접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지만 신앙의 제일 조건이며 으뜸이라 할 믿음엔 손색없다고 믿어진다.

어머니가 부처님을 찾아다니며 애원하듯 기도하는 소망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자식들 건강하고 우애 있게 잘 살아달라는 정도다. 결혼을 앞둔 자식이 있으면 잔치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고 먼길 떠날 때는 탈없이 잘 다녀오라는 바람의 기도다. 그러다 차를 몰고 다니 게 되니 사고 없이 운전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덧붙여질 정도다.

이런 것은 비록 필자의 어머니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무지렁이 할머니로 취급받거나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많은 어머니들의 어머니들 신앙이란 게 대부분 그랬을 거다. 그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은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결국 그 많은 한을 보듬는 한 방편이 간절한 기도와 믿음이 되었을지 모른다.

▲ 흰눈과 전각 그리고 바위와 청솔이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산수화를 만들고 있다.
ⓒ 임윤수

배운 것을 바탕으로 간교한 삶을 살 순 없기에 우직하리만큼 묵직한 믿음이 삶의 방식이며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들의 그런 믿음과 기도는 뭔가를 기다리던 한이 되고 슬픈 전설이 된 것을 많이 보게되니 망부석이 그렇고 망탑이 그렇다.

그런 바람, 뭔가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간절함과 애틋함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은 국가적 염원이 송두리째 담겨진 절이 있으니 바로 도봉산 망월사(望月寺)다.

이런 봄날 망월사를 찾으려면 승용차보다는 기차를 이용하는 게 좋을 듯하다. 기차를 타고 기차에 얽힌 추억들을 더듬다 보면 산사 찾는 맛에 기차 타는 맛이 덤으로 주어질 게 분명하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기차는 아주 특별한 교통수단이다. 웬만하면 자가용 한 대쯤은 소유하고 있는 요즘엔 좀 어색한 이야기지만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여행과 기차는 바늘과 실같은 그런 관계였다.

▲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모셔진 문수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문을 지나야 한다.
ⓒ 임윤수

얼마 있지 않아 통일호가 없어진다는 소식을 들으니 지금은 볼 수 없는 비둘기호가 생각난다. 시속 300km를 상회하는 고속전철이 등장하는 시대에 좀 동떨어진 이야긴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지금처럼 통일호니 새마을호니 하기보다는 완행열차나 급행열차로 불렸다.

비둘기호는 대표적인 완행열차다. 가끔 뿌∼뿌∼거리며 기적소리를 내고 선로를 덜커덩거리며 달릴 땐 기관차도 숨을 고르는지 칙칙폭폭 거리며 연기를 뿜어내곤 했다. 아주 작은 역, 타고 내리는 사람이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간이역조차 거르는 법 없이 빠짐없이 멈췄다 가는 그런 기차였다.

지금도 가끔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비둘기호는 의자조차 오늘날 기차들과는 다르다. 지금처럼 두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도록 가지런하게 된 게 아니고 객차의 유리창을 따라 길다란 벤치처럼 놓여져 있다. 가운데는 동네 골목만큼이나 넓은 통로가 있고 그 통로엔 예외 없이 손잡이를 잡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비둘기호가 사라지고 조금 더 고급스러워진 통일호가 그 역할의 일부를 대신하더니 이젠 통근용으로만 활용된다고 하니 통일호마저 사라지는 것과 진배없다.

▲ 출입문을 지나 가파르고 어두컴컴한 토굴길을 지나면 문수전으로 들어서게 된다.
ⓒ 임윤수

서울역에서 의정부로 가는 국철을 타면 망월사역을 지나게 된다. 망월사역은 도봉산을 오르는 많은 등산로 중 하나다. 망월사역에서 40∼50분 산길을 오르면 그곳에 망월사가 있다.

먼발치에서라도 바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도봉산은 암산(巖山)이다. 기암들이 승무를 추듯 너울너울 하늘로 솟았고 갖가지 나무들이 계절 따라 시간 따라 채색을 연출한다. 골짜기마다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계곡들은 하심과 자연의 이치를 보여주고 알려주는 또 다른 자연의 서당이자 도장이다.

망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 말사다. 절 이름이 망월사로 된 것은 풍수적 유래와 창건 동기와 관련된 유래가 있다. 망월사 대웅전인 낙가보전 동쪽에는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으로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다. 그러니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의 형세이기에 망월사라 이름지었다는 유래다.

망월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8년(639년)에 해호스님이 여왕의 명을 받아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하였다. 창건을 하면서 당시 서라벌 월성(月城)을 향해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절이라는 뜻에서 망월사라 이름하였다는 유래도 있다.

▲ 문수전은 벼랑 위에 이렇게 서 있었다.
ⓒ 임윤수

창건 이후 망월사는 중창되고 전란에 의한 황폐화된다. 그러다 다시 중건되고 신축과 중수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월사엘 가면 웬만한 절에선 다 볼 수 있던 대웅전이란 편액을 단 전각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2층 구조로 된 전각에 <洛迦寶殿(낙가보전)>이라 쓰여진 편액이 붙어있다. 낙가보전이 망월사의 큰법당이니 대웅전인 셈이다. 낙가보전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보살(bodhisattva)은 세간과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성자(聖者)이므로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곳에서고 위험에 처하거나 어려울 때,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힘들고 슬플 때 '관세음보살'을 반복해 부르면 언제고 구제의 손길을 내려준다는 경배의 대상이다. 어릴 때 어머니와 같은 그런 존재로 구원의 손길과 보살핌의 눈길을 멈추지 않는, 중생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을 베풀고, 크게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이익 되게 하는 보살을 모셔놓은 것이다.

▲ 멀리 의정부시내 일원이 한눈에 보인다.
ⓒ 임윤수

이 외에도 망월사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모셔놓은 문수전이 있고 영산전과 칠성각, 선원,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도지정문화인 망월사혜거국사부도, 천봉 태흘의 부도, 망월사천봉선사탑비가 있다.

망월사를 찾았을 때는 온통 흰 눈 뿐이더니 어느새 찬바람 속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진다. 어머니가 그러하듯 언제고 비워진 마음에 믿음만을 가득 채워 산사 찾는 맛을 담을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망월사 찾아가는 길
서울역 - 의정부행 국철 - 망월사역 하차 - 산행보도
전화 031-873-7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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