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6)-함월산 골굴사염불과 목탁 그리고 무술로 수행하는 한국판 소림사
그 후 삼보일배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곳저곳에서 이런저런 명분으로 여러 차례 있었다. 한 표가 새로운 총선을 코앞에 둔 요즘, 한때 호남의 맹주로 군림하던 어느 야당 선거책임자가 80년 민주의 광장이었던 광주에서 또 다른 형태의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갯지렁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작년의 삼보일배나 총선을 앞둔 지금 광주에서 있었던 삼보일배나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는 똑같은 형태의 삼보일배지만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색깔이 다를 듯하다.
보여지는 모양새가 다르고 등장하는 구호가 다를 거다. 모여든 사람들 성향이 다르고 이루고자 하는 염원이 다를 것이다. 거룩하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때의 삼보일배와 달리 금남로에서 벌어지는 삼보일배는 왠지 표를 달라는 구걸의 몸짓으로 신성해야 할 큰절의 의미까지 정치판에 이용되는 듯한 안타까움이 먼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필자만의 편견이거나 착각이길 바란다.
이젠 심심하지 않게 거리에 등장하는 삼보일배, 세 걸음 걷고 한 번 하는 큰절 속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이마와 양 팔꿈치 그리고 양 무릎 등 신체의 다섯 군데가 땅에 닿을 정도로 온몸을 낮추어 하는 큰절이기에 큰절을 '오체투지'라고도 한다.
불가에서 올리는 큰절은 삼보(부처님, 가르침, 스님)에 대한 예경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또한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수행 방법으로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시하는 예법이다.
몸을 낮추어 납작 엎드리면 세상의 모든 것들 아래 내가 있다. 미물로 여기던 갯벌의 갯지렁이도 내가 받들어야 할 공경의 대상이며 존중해줘야 할 생명의 존중체이다. 의미를 알고 하는 삼보일배의 큰절이라면 모든 유권자와 국민 아래로 자신을 낮추어 공경하고 존중한다는 뜻일텐데 과연 그것이 그들의 평상심 인지엔 의구심이 생긴다. 그들이 여태껏 해왔던 정치적 행보가 선뜻 그들의 순수성을 믿을 수 없게 한다.
두 눈 말똥거리고 사지 펄럭이며 살 맛 나는 중·노년의 삶을 살아가야 할 망월동 영령들을 싸늘한 주검으로 만들어 놓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80년 민주학살의 주역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정치권에 뿌리를 둔 또 다른 야당과 공조로 이뤄낸 그들의 영광스런(?) 정치적 산물인 탄핵정국을 금남로에 머리 숙인 그이는 망월동 영령들께 어떻게 설명하고 변명할까 몹시도 궁금해진다.
큰절엔 하심과 같은 의미가 담겨진 만큼 절을 할 때도 나름대로 순서와 방법이 있으며 참회나 기도로 하는 큰절은 일반적으로 108배, 1080배, 3000배 등을 한다. 절을 할 대상, 대개의 경우는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이 되겠지만, 앞에 서면 먼저 합장한 자세로 합장절을 한 다음 큰절을 한다.
합장이란 반듯하게 몸을 세우고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인 듯한 자세에서 두 손을 가슴높이 정도에서 모으는 것을 말한다. 합장절이 끝나면 합장한 자세에서 두 무릎을 굽히면서 오른손과 왼손 순서로 바닥을 짚는다. 이때 손은 머리가 닿을 정도 위치에 나란히 놓되 너무 넓거나 좁아서는 안되니 어깨넓이만큼 벌려서 짚는다.
무릎을 꿇고 앉을 때는 왼발이 오른발 위에 오게 포개며, 엉덩이가 두 발의 뒤꿈치에 닿게 앉는다. 그리고 양 팔꿈치와 이마가 바닥에 닿은 상태에서 양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귀에 닿을 정도로 받쳐 올린다. 일어날 때에는 올렸던 손을 바로 하면서 머리를 들어 허리를 펴고 손은 왼손 오른손 순서로 가슴으로 가져와서 합장의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발을 세워 무릎을 일으키면서 일어선다. 이렇게 하므로 한 번의 큰절이 끝나게 된다. 글로 설명을 하니 매우 복잡한 듯하지만 실제 해보면 일상의 동작과 다를 게 없다.
큰절도 수행법의 하나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이란 말을 들으면 조용한 분위기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명상에 잠기는 참선을 생각할 것 같다. 스님들이 하는 수행이라고 하면 어렵다고 생각되는 법경(부처님 가르침이 담긴 책)을 밤낮으로 읽고 염불을 외거나 읊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수행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본적 공부야 당연하지만 어느 정도의 단계에 들어가면 각양각색의 수행법이 있다. 공부를 많이 하여 법문에 능통한 것도 한 수행법이지만 불가에서 요구되는 남다른 예능적 기능이나 능력을 보유하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것도 한 수행법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스님들이 얻는 깨우침의 절정인 득도도 여러 가지 행태서 얻어지는 듯하다.
깊은 고민에 빠진 듯 화두 삼매에 빠져 골몰하던 중 섬광석화처럼 순간적 깨우침으로 득도하였다는 스님도 있고 평생을 막노동처럼 일하다 어느 순간에 뭔가를 깨달음으로 득도를 하셨다는 스님도 계신다. 그러니 각자의 수행법에 따라 득도하는 순간도 방법도 달라질 뿐이다. 어찌 보면 속세의 이런저런 유혹과 인연을 끊는다는 그 자체가 수행의 길로 접어든 구도의 실현이며 수행의 연속이다.
스님들 중에선 설거지를 하다 득도를 하셨다는 분도 계실 수 있고 목공처럼 절을 짓거나 가수처럼 찬불가를 부르다 순간적으로 뭔가를 깨우쳐 득도하시는 분도 계실 듯하다. 종을 치다 득도를 하셨다는 분도 있고 돌다리를 건너다 불현듯 화두로 잡았던 것에 대한 답을 구함으로 깨우침을 얻었다는 분도 계셨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절에서의 수행하면 조용한 산사에서 좌선을 한 스님들 모습을 연상할 듯하다.
그러나 그런 선입견을 깡그리 부수는 한국판 소림사가 경주근처에 있다. 권법이 등장하고 화려한 동작과 함께 하는 심오한 무술이 계승되고 발전되는 소림사는 중국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국내에도 영화 속 소림사처럼 고도의 무술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하고 있는, 한국판 소림사라 할 수 있는 '골굴사'라는 절이 있다.
신라 천년의 고도, 불교문화의 성지답게 경주엔 절도 많고 불교유적도 무지기수로 많다. 경주에선 눈 돌리고 발길 돌리는 곳마다 불교와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 토함산이 그렇고 남산이 그렇다. 불국사가 그렇고 분황사나 주변의 왕릉들도 다 불교와 관련이 있다. 한국불교의 최대 번성기자 중흥기의 도읍지다운 문화적 유산이 전해지는 곳이 경주다.
그런 경주는 요즘 꽃대궐에 떡과 술이 흥건히 넘쳐나는 잔치판이다. 사방은 온통 벚꽃화관을 두르고 있다. 길거리는 길거리대로 화관을 두르고 있고 호수는 호수대로, 공원은 공원대로 꽃 치장을 하고 있다. 벌어진 잔치 판이니 들어서기만 하면 객이 되어 거하게 차려진 잔치 상을 한 상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대궐을 노니는 세자나 공주도 될 수 있고 한가롭게 봄날을 즐기는 대궐 속 왕과 왕비로 자신의 신분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소품과 무대가 마련된 곳이 요즘 경주다.
그런 경주를 지나 4번 국도를 따라 동해안 감포 쪽으로 약26km쯤 달리다 보면 기림사와 골굴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달린 안동3거리를 지나게 된다. 이 삼거리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여 500m 정도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하나의 일주문이 저만치 보이니 이곳이 바로 선무도라고 하는 무술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하고 있는 골굴사다.
골굴사는 1500년 전 천축국(인도)에서 건너온 광유(光有)스님 일행이 함월산 지역에 정착하면서 기림사와 함께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창건당시 인도의 사원 양식을 본 따서 지은 전형적 석굴사원으로 석회암 지층으로 형성된 산 정상에 마애불을 각인하고 12개의 석굴을 파 법당으로 조성한 한국 최초의 석굴 불교성지다.
넓은 진입로를 들어서 일주문을 지나게 되면 두 갈래 길로 갈라진다. 여기서 골굴사는 곧장 들어가게 되며 오른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신축된 건물을 지나 선무도장의 본산인 선무대학으로 들어 가게 된다. 오른쪽에 보이던 현대식 건물은 선무대학에 입교하여 선무도를 수행하게 되는 수행자들이 머물 수 있는 생활관이며 그 안쪽으로 완공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선무대학 본관이 있다.
수행자들이 선무도의 기본동작을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공간이며 수행의 도장이기도 한 선무대학은 적당한 크기의 운동장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대학건물을 중심으로 빙 둘러진 산들이 영화에서 보았던 심산유곡의 소림 도장을 연상하게 한다. 금강장사가 외호하고 있는 건물로 들어서니 공중을 휙휙 나는 무공들 모습이 그려지는 넓은 수도장이 있다.
반질반질한 나무바닥엔 수행자들이 흘린 수도의 땀방울과 기합소리가 두터운 층을 이뤄 인고의 각질처럼 반짝이고 있다. 넓은 도장은 숨죽인 듯 고요했으나 요동치듯 출현하는 기가 쏟아질 듯 응결된 듯하다.
갈림길에서 곧장 들어서면 다시 한번 야트막한 고개를 넘게 된다. 이 고개를 넘어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주차할 공간이 나오고 다시 경사 길을 오르면 골굴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활짝 핀 목련꽃 사이로 전각의 일부가 보인다.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몇몇 전각과 요사채를 지나게 된다. 앞쪽에 있는 가파른 바위산꼭대기에 아크릴 보호막이 보이고 조금 아래쪽 왼편에 단청된 작은 전각과 단청이 되지 않아 목질감이 물씬한 또 다른 전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좀더 안쪽으로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멀리서 보았던 바위들이 좀더 뚜렷하게 보인다. 바위는 깎아세운 듯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제일 꼭대기, 아크릴 보호막 아래엔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산더미 같이 커다란 바위는 곳곳이 움푹 파인 동굴형태로 되어 있다. 굴과 굴 사이는 철 파이프로 보호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굴 하나 하나가 법당이며 기도처다.
올라가는 입구에 '노약자는 이곳에서 참배하시오'란 푯말이 붙어 있을 정도로 바위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다. 계속하여 돌계단을 오르면 대표적 굴법당인 관음전에도 들릴 수 있고 남근석과 마주 보고 있는 음궁에 차려진 산신각 그리고 다른 굴에 마련된 나한전 등도 참배할 수 있다.
12개나 되는 석굴 중에서 가장 넓은 관음전은 동굴입구에 기와 얹은 건물을 덧대어 관음전을 만들어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셨다. 돌계단을 올라 처음으로 맞게되는 관음전엔 정면에 모신 관세음보살뿐만 아니라 동굴의 벽면에 청동 108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듯 가파른 바위굴에 마련된 이런저런 굴 법당을 찾아다니는 길은 만만치 않다. 암벽을 타듯 줄을 잡고 오르기도 해야하고 바위틈을 지나 아찔한 행보도 하여야 한다. 그러나 태산같은 바위에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철제 보호대를 쫓아다니면 웬만한 굴법당은 다 참배할 수 있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보호시설이 있기에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다.
옛부터 굴법당인 관음전에서 잠을 자고 나면 병들고 허약한 이가 생기를 되찾았다 하는데 결코 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함월산 지역은 석회암 지층으로서 제올라이트 등 광산대가 형성되어 있어 암반 성분이 맥반석처럼 인체에 유효한 원적외선을 발산한다 할 수 있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1500여 년의 신비가 담긴 골굴사 관음굴은 세세생생 많은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 가피를 전하는 감로정이 될 것이다
골굴사에도 우리의 토속신앙이 녹아있는 전설을 담고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산신당이 있는 여궁과 그 앞에 있는 남근석이다. 불교가 도입되기 전에도 분명 우리 조상들이 의지하던 신앙의 대상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속신앙이며 자연신앙이다. 전해지는 민족 고유의 민속 신앙 중 하나가 남근과 여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적 자연신앙이다.
자손의 번성과 수명장원을 기원하였으며 특히 득남기도의 중심이 되었던 여궁 터에 산신당이 마련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아들을 얻지 못한 부인들이 여근(산신당)바닥에 자연적으로 패인 여궁에 앉아 밤샘 기도를 하면 다음날 새벽 여궁에 물이 고임으로 기도의 성취를 확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인들은 이를 음양의 조화로 생긴 정수라 생각하였고 득남의 증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자손을 이은 사람들이 대대로 골굴사의 신도가 되어 전체 신도의 3분의1이나 된다하니 여궁의 효험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단언하기 곤란하다.
골굴사가 여느 절들과 특이한 점은 아무래도 '선무도(禪武道)'라는 무술을 수행법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무도란 흔히 '위빠사나'라고도 불리는 수행법으로 불교의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에 전하는 전통수행법이라고 한다. 선무도, 무술이라고 하니 일방적으로 격렬한 격투기나 화려한 몸 동작이 수반되는, 영화에서 보았던 싸우는 무술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듯하다. 위빠사나 혹은 요가처럼 인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수행법의 하나인 선무도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적 방편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워 익힐 수 있는 수련법이라고 한다.
선무도를 수행하는데도 단계별 과정이 있다고 한다. 본 수련에 들어가기 전 신체의 각 부위를 부드럽게 하여 줌으로 심신을 이완시키고, 골관절을 교정하여 근육의 탄력을 키워주는 오체유법(五體柔法)이라고 하는 요가 수준의 선요가가 그 첫 단계라고 한다.
선요가를 익히면 합장의 변화와 호흡의 조화를 통해 법륜을 발현하고 정(精), 기(氣), 신(神)의 조화를 통해 심신의 통일적 삼매(三昧)를 구하는 좌관법을 수행하게 된다. 이 단계를 넘으면 손발의 부드럽고 느린 동작을 마음으로 관(觀)함과 동시에 의념과 함께 흘러가는 기를 조화시켜 우주의 신비와 선정(禪定)의 법열(法悅)을 느낄 수 있다는 입관법을 수행하게 되니 이쯤이 되면 머릿속으로 상상하였던 소림권법이나 소림사 무술동작이 등장할 만하다.
선무도의 최고 경지는 입관법에서 터득하게 되는 화려한 동작이나 파괴적인 힘이 아니다.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적 원소와 정신적 차원을 조화시켜 심신의 안정과 건강을 구하고 해탈에 나아가는 경지, 선기공 체조인 행관법 경지를 넘나드는 구도의 길만이 선무도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선무도는 단순한 무술의 차원을 넘어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수행의 한 방편이다. 궁극적으로 선무도를 통해 누구나 몸과 마음이 활짝 열린 대자유인을 염원하며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세계로 나아가고자 함을 구현하고자 하는 부처님 가르침을 또 다른 형태의 수행법으로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곳이 골굴사다. 귀를 째는 듯한 '얍!'하는 기합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지만 골굴사에선 무공의 함성과 수행의 정적이 가슴에 다가왔다.
정치인들의 정치적 신념과 성직자들의 신심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천양지차인 모양이다. 성직자들은 2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750리 아스파트길에 삼보일배를 하면서도 신체적 한계를 극복했는데 정치지도자는 기껏 3일만에 휠체어에 기댄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개인의 신체적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역시 종교적 신심은 정치적 신념보다 위대하단 생각이다.
절대적(absolute) 오계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을 지키려 노력하다 보면 많이 절제되고 정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니 그 자체가 수행이며 신앙생활이라고 생각된다.
절에서 금해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계율로 정하고 있는 기본적인 것들 외에도 부지기수로 많다. 하다못해 스님들은 먹을 것조차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금하고 있다. 살생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는 육류는 물론 속세의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강해질 수 있을까' 하며 갈구하는 파, 마늘, 달래, 부추, 무릇 등 오신채도 금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대부분의 절에서는 법당 내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다. 법당은 물론 경내 건물조차 촬영을 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이처럼 사진촬영을 금하는 것은 문화재 보호와 수행이나 기도에 방해가 되는 여타의 행동을 모두 차단하겠다는 조처로 생각된다.
우리 나라의 절은 단순한 종교나 신앙적 공간을 넘어 역사와 유물이 다량으로 남아있는 보물의 보고다. 그러니 절에는 문화재 도굴꾼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많은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이런 유물들이 사진으로 찍혀 그것이 도굴꾼들에게 노출됨으로써 도난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고 실제적으로 그런 이유로 도난을 당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많은 절을 다니며 사진을 찍느냐, 못 찍느냐를 가지고 꾸중도 듣고 설전 아닌 설전도 있었지만, 왜 사진을 찍으면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금강산에 있는 '건봉사'에서 '진신 치아사리를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했을 때였다. 그곳 스님으로부터 사진을 못 찍게 하는 이유를 충분히 수긍할 만큼 설명 들었던 게 유일했다.
그 외의 절에서는 그런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불손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무조건 '사진은 찍으면 안 된다'라고만 하신다. '왜 사진을 찍으면 안 되느냐'는 갑작스런 질문에 불쾌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웠을 마음도 이해하지만 조리있게 설명해 주신 분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사진을 찍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승낙해 주는 스님들도 있다. 속세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연세 높은 스님이라고 사진 찍는 것을 무턱대고 금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젊은 스님일수록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또 좀 더 개방적일 거라고 생각한 외국인 스님 역시 서툰 말로 '사진 찍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사진촬영 금지가 절의 문화이며 전통이라고 하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막연한 관습에 의한 것이라면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공개된 물건, 공개된 장소에서는 여간해서 도난이나 절도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사람이 존재할 수 있듯 다른 절이면서 이름은 같은 절들도 꽤 많다. 그 대표적 동명이사(同名異寺)의 경우가 '송광사' 아닌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은 송광사하면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로 유명한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송광사'는 전북 전주에 근접한 완주에도 있다.
벚꽃 철을 만나 길옆 좌우에 차려진 좌판에서는 별의별 것들이 다 팔리고 있다. 절을 찾아가는 꽃터널에서 어색하지 않게 장사하는 길거리 풍경에서 사람 사는 모습이 솔솔 피어난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룬 이들의 삶에 묘한 애착이 느껴질 때쯤 어느새 송광사 일주문에 도착한다.
송광사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여느 산사들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힘겹게 오르지 않아도 부처님께 다가갈 수 있는 평지가람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는 송광사는 금산사 말사로 신라 경문왕 7년 (867년)에 창건된 절로 원래는 현재의 일주문으로부터 3km 떨어진 곳인 '나들'이라는 곳에 있었고, '백련사'로 불리던 대찰에서 창건사가 시작되었다 한다.
양 옆으로 돌담을 달고 있는 일주문에 들어서면 금강문이 나온다. 금강문을 지나면 사바 세계의 악귀를 내쫓는다는 사천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사천왕문으로 들어서게 되나, 현재 송광사 사천왕문은 보수 중으로 연말이 돼서야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12개의 기둥으로 지은 아(亞)자형의 2층 누각에 범종각이 보인다. 십자각이라고도 불리는 이 범종각은 1716년에 불사되고 1796년에 보수됐으며, 지방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동종과 법고 등 불구 4물이 걸려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들어선 마당 정면으론 5층 석탑과 대웅전이 있다. 넉넉한 공간에 시원한 여유를 갖고 있는 전각들은 시선에 걸림이 없다. 마당 우측으로 지장전이 있고 좌측은 관음전이다. 나한전과 삼성각 그리고 미륵불이 있는 대웅전 뒤쪽에는 종남산 자락이 완만하게 드리워 있다.
대웅전 소조삼존불은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을 부처님 가피로 극복하려는 염원을 담아 대대적으로 중창한 인조대왕 호국원찰이다. 즉, 아비의 애틋한 잔정과 호국위민을 기원하는 국왕의 거룩함이 깃들어 있는 불상인 셈이다.
대웅전 삼존불은 그 규모의 웅장함뿐만 아니라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며칠 동안 땀을 흘려 뭇 사람들에게 환난을 예고해 준다는 영험한 부처님으로도 유명하다.
이 부처님은 12·12사건, KAL기 폭파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사건, 강릉 잠수함 출몰 시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IMF 한파가 시작되기 직전인 97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도 법당이 흥건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려 하나의 국치로 불렸던 당시의 상황을 예견했다고.
그것이 정말 땀인지 아니면 적당한 습도와 기온 차에 의한 결로에 의해 생겨난 수분이었는지 과학적으로 확인해 보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무심코 넘어가기에는 실로 불가사의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부처님 앞쪽 비스듬한 천장 벽면에 그려진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라는 11폭 그림도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림에 몰두해 감상삼매에 빠질 때면 어디선가 듣고 보았던 연주대의 북과 장고 그리고 날라리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춤추는 무희들의 요염한 몸 동작에 펄럭이는 옷자락이 바람이라도 일으키는지 대웅전 촛불도 함께 흔들리는 듯하다.
송광사는 고창 선운사의 도솔암, 강원도 철원에 있는 심원사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개심사와 더불어 전국 4대 지장기도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절의 규모에 비해 큰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그 조형미로도 유명하다.
대웅전 후면 우측에 있는 나한전의 석가여래와 500 나한상도 답답한 마음을 한 보따리 풀어놓으면 기꺼이 들어줄 것만 같은 모습들이다. 좌측에 있는 삼성각과 미륵불도 봄빛에 만개한 벚꽃만큼이나 마음을 환하게 해준다.
만개한 벚꽃처럼 많은 사람들 얼굴에 활짝 핀 웃음을 띄울 수 있게 해 주시길 소원하며 두 손을 모은 채 다시금 송광사 벚꽃 터널을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8)-만수산 무량사
가을 산하의 아름다움이 농염한 오색 비단을 두른 대감 댁 마님의 풍요로움과 넉넉함이라면, 봄 산하의 아름다움은 다홍치마에 연둣빛 저고리를 입은 새댁의 청순함과 같다.
눈길만 흘겨도 우수수 떨어질 듯 살랑거리는 오색의 낙엽들이 족두리에 찰랑거리는 칠보의 장식물을 닮았다면, 피어나는 봄날 새싹들은 새댁이 두른 행주치마에 놓여진 수의 소박함과 가지런함을 닮았다.
청순한 빛깔의 엷은 연둣빛 옷감에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산 벚꽃이 수놓은 듯 펼쳐진 봄날의 산하. 새댁의 수줍음처럼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피어나는 게 봄날 산사에서 맞는 봄의 아름다움이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에서 흘린 피처럼 또렷이 빨간 선홍색 꽃들이 연둣빛 산하를 한결 곱고도 청순하게 장식한다.
충남 부여에서 40번 국도를 따라 대천(보령)을 얼마 남기지 않은 외산면 만수산엔 '무량사'란 절이 있다. '만수산'이란 산 이름이 혀끝에 툭 걸리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느낌이다. 기억을 더듬으니 '하여가'라는 시조가 생각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로 이어지는 바로 그 '하여가'에 '만수산'이 등장했다.
만수산에 자리하고 있는 '무량사'는 대천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진 보령군의 접경지, 행정구역상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에 소속된 말사로 신라 말, 범일(梵日) 스님이 창건하고 여느 고찰들처럼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으며 재건되고 보수됐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개울을 따라 만들어진 진입로를 조금 걸어 들어가면 '萬壽山 無量寺(만수산 무량사)'란 편액을 달고 있는 일주문을 지나게 된다. 심한 봄 가뭄에도 돌 틈으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귀와 마음에 낀 세속의 먼지를 말끔히 씻어주며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목탁소리처럼 들린다. 왼쪽으로 접어드는 다리를 건너 계곡경사면을 오르면 천왕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석등과 오층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 극락전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극락전 거대한 건물을 오랫동안 지탱하였을 법한 늙은 기둥은 등이라도 굽었을 듯하나, 꼿꼿한 자태를 흩뜨리지 않았다. 빛 바랜 단청과 기와에선 웬지 어머니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지은 지 얼마 안 되거나 칠이 새로 된 산뜻한 단청에선 새색시 같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투박한 모양새에 거칠고 갈라져 노인의 피부처럼 오래된 세월이 느껴지는, 손때 묻어 반들반들 해진 기둥이나 기와에서는 산뜻함보다는 은은한 아름다움과 푸근함을 동시에 느낀다. 무량사 극락전 기둥과 전각들이 그렇다. 마음을 걸쳐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무량사는 숨가쁘게 산을 올라야 할 첩첩산중에 있지도 않고 이름난 여느 대찰처럼 화려하거나 거대한 사찰도 아니다. 표주박이 동동 떠있는 옹달샘처럼 심신이 갈증을 느낄 때, 들른 김에 걸터앉아 잠시 마음을 놓았다가 '툭' 털고 일어나기 딱 좋은 그런 크기다.
사랑의 크기도 재거나 셀 수 없으며 정이나 미움, 지혜의 크기도 재거나 셀 수 없다. 이에 반해 사람의 목숨은 손가락 몇 번 돌려가며 접었다 폈다 하면 셀 수 있을 만큼 유한하다. 이 유한한 목숨을 셀 수 없고, 잴 수 없을 만큼 지혜가 가득한 무량의 세계 극락정토로 지향케 하는 곳이 바로 '무량사'가 갖는 의미가 아닌지 모르겠다.
무량사의 대웅전 격인 극락전은 보물 제3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법당 안에는 완주 송광사 좌불 규모에 버금가는 아미타여래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굳이 그 규모를 말하라면 국내에서 2번째 크기의 실내 좌불이 아닌가 모르겠다.
극락전은 무량사의 대표적 법당으로 겉으로 보기엔 2층 구조의 목조건축물이지만 내부는 위아래 탁 트인 통층으로 돼 있다. 이러한 통층의 극락전 내에 주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불로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무량사 석등은 연꽃 받침에 원형도 사각도 아닌 8각 기둥으로 되어있다. 원형이나 사각보다 가공하기 어려운 8각을 그 단단한 돌에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8각은 원에 도달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며, 단계이다. 시작과 끝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동그란 원이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8각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단계인 것.
절의 건축물이나 막새와 같은 부속물에는 8각, 8엽 등 8이란 숫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불교 기초 교리인 팔정도에 기인한다. 팔정도(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는 수행자가 지켜야할 여덟 가지 바른 길 즉 실천 덕목인데 깨달음의 진리에 이르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등(燈)은 곧 불이고, 불은 불교에서 깨달음의 진리를 의미한다. 어둠으로 상징되는 어리석음을 쫓아내고 밝음, 즉 팔정도를 이뤄' 깨달음의 불, 진리의 불'을 밝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8각 기둥을 하고 있는 석등의 심오한 불교적 의미이다.
극락전 서측에는 우화궁이 있고, 그 뒤쪽으로 영산전과 천불전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모셔 놓은 또 하나의 전각이 있다. '김시습이 생활했다'는 산신각은 극락전 뒤편 계곡 건너에 숨어있듯 자리하고 있다.
오층석탑 우측으론 범종각과 명부전이 있고 좌측으론 요사채가 있다.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명부전 뒤쪽 산에서 아침해가 솟아오른다. 색감조차 희미하던 사방천지가 환희의 빛깔로 가득하다. 이런 기분에 아침 산사를 찾는다. 답답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어둠에서 광명의 빛을 받아 산뜻하게 맺혀지는 망막 속 아침풍경과 고요함이 가슴 싸 하도록 큰 기쁨을 준다.
'한 번 배우면 곧 익힌다' 하여 이름도 시습(時習)으로 지어졌다는 매월당 김시습.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세상에 자자하여 세종대왕으로부터 '자라면 크게 쓰겠다'는 약조까지 받았다는 김시습.
그런 김시습이 스물 한 살 되던 해,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쿠데타가 벌어지자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머리 깎은 후 방랑 길에 들어섰다. 유랑생활을 하다 '험하고 외진 곳, 백년이 지나도 귀찮게 할 관리 없으리'라고 말하며 숨어들어 설잠스님으로 생활하다, 그의 나이 59세인 1493년에 이승을 뒤로 하고 사바의 세계로 입적했다는 곳이 바로 무량사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김시습의 영정을 보고 있노라니 일화가 떠오른다. 10년이 넘는 오랜 유랑 중 잠시 한양에 머물 던 김시습이 서강(西江)을 지나다 시대를 농락하던 한명회가 '靑春扶社稷(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라 쓴 시를 보고 망설임 없이 '부'(扶) 자를 '망'(亡)자로, '와'(臥) 자를 '오'(汚) 자로 고쳐버렸다. 그러니 한명회의 글이 '靑春亡社稷(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白首汚江湖(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라는 뜻이 돼 위정자들을 희롱했다는 유명한 일화다.
절 집 마당, 봄 햇살 속 산하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요사채를 바라보며 범종각에 기대니, 이런저런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불현듯 왜 절이 좋은 지에 대한 한 가지 답이 잡힐 듯하다. 눈앞에 펼쳐지는 봄 산하의 조화처럼 그 포용성 때문에 좋아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에선 이단(異端)이란 말로 뭔가를 배척했단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터라, 사후세계에 정말 극락세계가 있다면 살아생전 늘 착하게만 산 사람을 신앙이 달랐다 해서 괄시하거나 지옥으로 쫓아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된다.
신앙이 다르다고 배척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속세의 인간들이 성이나 피부 색깔로 사람을 차별하는 불평등과 별반 다를 게 없을 테니 말이다. 만사를 포용할 극락세계로 가는 길은 결국 어느 종교를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만큼 선행하며 살았는가가 더 중요할 거란 생각이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9) 선운산 도솔암
어찌 보면 그렇게 하는 게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 시대적 감각이며 능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한눈에 모든 걸 담아 표현할 사진을 찍어 올 능력도 없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과 미안한 마음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단 한 명이라도 좀더 구체적인 정보를 얻으려 또박또박 끝까지 읽을지도 모른다는 착각과 기대감으로 이어지는 혼자만의 글쓰기 짝사랑에 조금씩 조금씩 사족을 늘리다 보면 A4용지로 서너 페이지가 훌쩍 넘는다.
'구름에 달 가듯' 사진만 후루룩 훑어볼 사람과 읽어줄 사람 모두의 입맛에 맞춘다는 알량한 심산에 최대한으로 사진도 넣고 나름대로 콜콜한 이야기들을 자판 토닥거리며 써 내린다.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만큼 딱 떨어지는 적절한 표현도 없는 듯 하다. 준비 없이 여행을 하다보면 꼭 봐야 할 여행지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겉돌다 오는 경우가 촘촘히 발생하니 말이다. 결국 많은 걸 보기 위해서는 많은 걸 알아야 한다는 강한 반증이기도 하다.
두 눈 지긋이 감고 갸우뚱한 고개에 꺾어진 날개처럼 손목 떨군 한쪽 팔을 어깨 높이로 들어올린 모습이 연상되는, 중년이 훨씬 넘은 송창식이란 가수가 자꾸 "선운사엘 가신 적이 있나요"하고 묻더니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라며 이어 묻는 노래가 있다.
그의 노랫말을 들으면 '바람불어 설운 날 그곳 선운사엘 가면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선운사 동백꽃이 얼마나 좋기에 매년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선운사엘 가 봤느냐?' 노랫말로라도 묻는지 궁금해진다.
미당 서정주도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고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 선운산에 있는 선운사 동백꽃과 주변의 분위기 일말을 묘사했다.
이쯤만 알고 선운사를 찾게 되면 선운사를 다 알지 못하는 만큼 보지 못한 게 있을 법하다. 선운산엘 가면 꼭 봐야 할 것이 따로 있는데 알지 못하기에 그것을 빼먹고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생긴다.
이미 널리 알려진 동백꽃과 풍천 장어 그리고 복분자 술로 유명한 전북 고창 선운산엔 선운사 말고도 또 다른 진면목이 감춰진 산사가 있다. 선운산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도솔암이 선운산의 드러나지 않은 진면목이며 8, 9월에 동백꽃보다 더 붉게 흐드러지게 피는 상사화가 또 하나의 진면목이다.
빠듯한 일정 탓도 있겠지만 선운산에 들르는 많은 사람들 중엔 입구에 있는 선운사에 들러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과 가람의 겉모양만 보고 좋은 곳을 구경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게다가 풍천장어를 안주로 복분자 술이라도 한 잔 마시게 되면 넘치는 여력(?)을 어찌할까 고민하는 그런 행복한 여행길이 된다.
하기야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사람 사는데 먹는 재미 빼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도 싶다. 아무리 풍치가 좋아도 허기진 눈으론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여행이니 여행지에서 좋은 먹거리는 요건 중의 하나다. 호강하러 나선 건 아니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먹을 것 맛나고 건강에 좋은 먹거리가 있는 곳으로 구경을 가는 거야말로 여행의 금상첨화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곱씹어야 음식의 제 맛을 알고 양분을 충분히 흡수하듯 선운산은 다리 품을 팔고 없는 시간을 쪼개더라도 10여리 안쪽으로 들어가는 도솔암을 꼭 봐야 볼 것 제대로 보고 투자한 여행경비의 본전을 찾는 셈이라 말하고 싶다.
석가탄신일이 얼마 남지 않아 그런지 산사 찾아가는 길 여기 저기엔 꽃 연등이 걸려있다. 연녹색 수풀을 배경으로 부는 바람에 끄덕끄덕 흔들리고 있는 원색의 연등이 곱기도 하다. 자칫 단색의 연녹색 수풀에 길손이 무료할까 그랬나 단맛이 우러날 듯 눈깔사탕을 닮은 고운 빛깔의 연등이 길목을 주렁주렁 치장하고 있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으로 들어가는 10여 리 진입로는 차를 이용해 갈 수도 있지만 걸어 들어가야 제격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으며 두발로 딛게되는 황톳길이 도솔암을 찾아가는 길손의 오감에 산사 찾는 감칠맛을 더해 준다.
경사진 듯 평탄한 듯, 쪽 곧은 듯 구부러진 듯 완만한 진입로는 촉감 좋게 다져진 흙 길이다. 무수히 오간 사람들이 흘리고 간 땀과 발자국, 아름다운 추억과 간절한 기도가 배어들고 빚어낸 불심의 비단길이다. 양옆으로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들이 빛 한줄기 숨어들지 못하게 빼곡한 숲 그늘을 만들고 있다.
산들바람에 여린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물소린 듯 목탁소린 듯 가물가물한 이런저런 소리들이 기분 좋게 귓전에 머물다 간다. 이런 길 걸으며 마음 열리지 않을 이 한 명도 없겠다. 이런 길 걸으며 행복을 느끼지 못할 이 하나도 없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흙 길을 30분쯤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늘씬하게 뻗은, 천연기념물 354호로 지정되고 수령이 600년이나 된다는 '장사송'이라 부르는 소나무를 보게 된다. 그 소나무 우측으로 몇 걸음 옮기면 참선하기 딱 좋을 만한 크기의 자연동굴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오랫동안 밝힌 촛불 그을음에 내벽이 거무튀튀하게 변색되어 있지만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정면으로 다가서는 불상과 촛불의 심오함에 끌려 두 손을 가슴에 얹게 된다. '불심 깊은 진흥왕이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와 기도를 하였다'는 전설이 담겨진 진흥굴이 바로 이 굴이다.
이쯤이면 이미 선운산 폐허 깊이 만큼이나 들어온 셈이다. 진흥굴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니 그곳이 도솔천 내원궁으로 들어가는 목전이라 할 수 있다.
지명이나 산 이름에 유래가 있고 전설이 있듯 선운산 또한 그 이름에서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운산'을 '도솔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선운(禪雲)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을 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부처님이 있다는 '도솔천궁'의 뜻이다. 그러니 선운산이라 부르던 도솔산이라 부르던 선운산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며 내세(來世)의 불국정토를 위해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뜻이 된다.
선운사 사적기에 도솔암과 선운사는 함께 창건된 것으로 되어 있으니 도솔암의 역사나 창건연대는 선운사와 같다고 생각하면 될 듯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늘나라엔 '도솔천'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곳에는 내원궁(內院宮)과 외원궁 두 궁전이 있다고 한다.
외원궁은 하늘나라 일반 중생이 살고 있는 곳이며, 내원궁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라 한다. 그런 도솔천 내원궁이 선운산 깊숙한 도솔암에 있으니 이곳이 곧 미륵보살의 정토란 뜻인가 보다.
도솔암으로 오르는 비탈진 진입로에서 좌측으로 시작되는 샛길이 있으니 이 길을 따르면 용문굴도 갈 수 있고 천마봉에도 오를 수 있다. 하늘을 난다는 의미를 가졌을 천마(天馬)를 타야만 미륵정토 도솔천 내원궁을 한눈에 볼 듯싶으니 기꺼이 올라보는 게 좋겠다.
천마봉으로 오르는 길은 무척이나 가파르지만 잘 정돈되어 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복장에 관계없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천마를 타고 있는 천상의 마주가 되어 있다.
굽어보는 도솔산이 아름답다. 한 눈에 들어오는 도솔산과 도솔암의 조화가 경이롭다. 깎아지른 듯, 오밀조밀 쌓아 올린 듯 오묘하게 어우러진 기암의 바위와 나뭇잎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낸 도솔천 내원궁이 참 아름답다. 내원궁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바위엔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원래 도솔암엔 위, 아래 그리고 동, 서, 남, 북으로 여섯 도솔이 있었으며 현재의 도솔천 내원궁이 상 도솔, 마애불상이 있는 곳이 하 도솔 그리고 현재의 대웅전 터에 북 도솔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는 그 흔적을 확인하기 곤란하고, 지금은 이 모두를 합쳐 그냥 도솔암이라 부르고 있는 모양이다.
비탈진 오르막길을 올라 평지로 올라서면 종무소와 신도들이 기도하며 기거할 수 있는 숙소가 오른쪽으로 있다. 도솔암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로 깔끔한 기와지붕의 한옥이다.
대웅전은 오르막길 정면 산 쪽에 있다.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다시 한번 휘어지고 굽어지는 산길을 조금 오르면 또 다른 평지가 나온다. 그 그곳엔 공양간이 있고 나한전이 있으며 올라선 오른쪽으로 '도솔천내원궁'이란 글씨가 써진 작은 대문처럼 보이는 출입문이 보인다.
나한전 앞을 지나 몇 걸음 안쪽으로 들어가면 천상의 세계 내원궁을 버팀목처럼 받치고 있는 커다란 바위에 각인 된 마애불상을 참배하게 된다. 아래로 다가서니 하늘에 닿을 듯 커다란 바위다. 수직의 태산 같은 바위에 동양최대의 마애불을 어떻게 조각하였을까 경이롭기만 하다. 이 높은 바위 위로 내원궁이 있다는 걸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도솔천내원궁'이라 쓰여진 작은 문을 들어서면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마주가 되어 천마봉에서 바라보았던 내원궁으로 들어선다.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팔작지붕의 작은 전각이다. 흙 한줌 없는 바위 꼭대기서 우산처럼 펼쳐진 소나무가 만들어 내는 그늘에 기대니 그 생명력이 경이로울 뿐이다.
이곳 도솔암은 한국 3대 지장기도도량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내원궁 좌측을 돌아 뒤로 가면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산신령을 모셔놓은 산신각이 있다.
일반인들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내원궁 오른쪽 바위에 오르니 너럭바위다. 천상의 소리가 들리고 속세의 하릴없는 온갖 다툼이 보일 듯하다.
한라산 최고봉에도 올라보았고 지리산 천황봉, 월악산 영봉에도 올라 아래로 펼쳐지는 이런저런 모습들을 봤지만 그 어떤 장관과 경이로움에 뒤지지 않는 후련함과 야릇한 느낌이 전해지는 곳이다. 불현듯 좌선에 들고싶은 욕구가 생긴다.
교리를 모르고 법문을 몰라 내로라 하는 스님들처럼 설법을 할 수 없고 염불은 하지 못하나 혼자의 마음을 다스리며 참 나를 돌이켜 보는 참선의 삼매엔 누구든 들 수 있게 할 그런 자리가 될 듯하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 들려오는 모든 것, 오감에 와 닿는 모든 것이 자아를 들여다보게 하는 가르침이며 눈 틔움이다. 휘적휘적 걸어 들던 진입로가 한 눈에 들어오고 코끝에 와 닿는 공기의 맛과 상큼함이 지금까지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지금껏 숨쉼이 코와 기관지 그리고 핏줄을 통해 걸러지고 정화되며 머리와 가슴에 생명을 연명키 위한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면 너럭바위에서 숨쉼은 천상의 느낌과 천하의 느낌이 거리낌없이 조화하며 온몸을 휘감는 무아의 호흡이다.
위험이 있을 수 있기에 누구든 오를 수 없게 철망이 쳐진 곳이란 아쉬움에 선뜻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리.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아닌걸. 커다란 걸음으로 펄쩍 뛰면 건너편 천마봉에 오를 듯 하다.
도솔천 내원궁은 결코 닿지 못한 염불 속 세상만은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천상천하 어느 곳에도 존재할 천마를 부릴 수 있는 마주가 될 수만 있다면 도솔산 천마봉에서 바라보았던 그와 같은 내원궁을 찾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갈구하는 내원궁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산하는 황톳길이 비단결처럼 발길에 다가온다
천마를 부릴 마주가 되는 길은 마음 닦고 이를 실천하려는 혹독하고 부단한 자아성찰에 있다는 생각이다.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도 좋고 풍천장어와 복분자 술도 좋겠지만 천마봉에 올라 조심스레 들여다본 내원궁이 보여주는 조화의 신비로움과 어우러짐의 아름다움이 선운산의 감칠맛이 분명하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50) 서귀포 약천사
남자들이 평생동안 얘깃거리로 우려먹을 만큼 젊은 청춘을 속앓이하듯 보내야 하는 군 생활 30개월을 고스란히 보냈던 곳이니 특별하다는 말이다. 남들은 전방에서 철책근무를 설 때 필자는 철조망조차 없는 제주의 푸른 해변을 지키는 전경으로 복무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하면 나름대로 떠올리는 것들이 다양할 거다. 이국적인 가로수를 떠올리는 사람, 깨끗한 해안도로를 떠올리는 사람, 이런저런 관광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제주도 특유의 방언을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미 24년 전 일이다. 논산훈련소서 기본교육을 마친 필자는 한마디로 군기 빳빳한 일당백의 전형적 졸병군인이었다. 옷깃을 스치는 것은 물론 눈빛만 마주쳐도 꼿꼿한 자세로 목청껏 관등성명이 자동으로 나왔으니 군 생활 중 가장 칼칼한 군기를 보였던 때인 듯하다.
제주도 근무를 명령받아 동료들과 밤 기차를 타고 새벽녘에야 목포엘 도착했다. 그때 탔던 기차가 노래에 나오는 '대전 발 0시 50분' 기차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연무대에서 늦은 밤 기차를 탔던 건 분명하다.
아무리 병역의무를 다하기 위해 떠나는 길이지만 생면부지의 섬 지방을 향해 가는 마음은 배급품으로 가득 채워진 국방색 자루가방 만큼이나 무겁고 착잡하다. 심지어 덜컹 겁조차 난다. 몇 시간 동안 철커덕거리는 기차에서 마음졸이며 앉아있다 보니 어느새 목포다. 낯설고 물선 섬 지방으로 군 생활하러 가는 졸병들의 스산한 마음을 아는지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제주도에 도착하자 부두에서부터 한 차례 얼차려 신고가 벌어진다. 빳빳한 군기지만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하였다는 안도감과 생소한 분위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느닷없이 떨어진 얼 차려 명령이다. 앉은 자세서 쪼그려 뛰기를 시키고 묵직한 '따불백'을 머리에 올리고 오리걸음을 시킨다. 제주도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쯤이야 이미 각오한 사실이니 겁날 것도 힘들 것도 없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졸병들은 침상 끝에 차려 자세로 앉아 뭔가를 기다려야만 했다. 뭐를 기다려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저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기다려야 했다. 꿀꺽거리며 목젖을 흔드는 옆 사람 침 넘기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긴장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이 확 열리며 고참 한 명이 들어온다.
통로를 중심으로 양옆 침상 끝에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양손을 무릎에 얹은 상태로 앉아있는 졸병들을 차례로 훑어보더니 느닷없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이 필자를 향한다.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자세를 더 한번 곧추세워 허리를 꼿꼿이 펴고 관등성명을 대니 대뜸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훈련소에서 그랬듯 목청껏 '충청돕니다'라고 대답을 하니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며 부처님과는 불알친구쯤'으로 교육받고 생각되던 고참의 부름이 떨어지니 떨리고 무섭기만 하다. 그런 고참 앞에 서니 느닷없이 주머니에서 50원짜리 동전을 꺼내주며 "부대 뒤쪽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보댕이'를 사와라" 한다. 친절하게 정문으로 나가지 말고 뒷담이 높지 않으니 넘어가면 된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고참이 사오라고 한 '보댕이'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물건이다. 아마 '제주도에서만 파는 값싼 뭔가가 있는가 보다'라는 정도의 생각이 들뿐이다. 졸병 주제에 다시 물었다간 군기 빠졌다고 흠씬 기압받기 일쑤니 그냥 몸으로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정문도 아닌 부대 뒤쪽이란다. 그것도 담을 넘어서 쏜살같이 다녀오란다. 고참이 시키는 대로 뒷담을 넘어 가게로 들어서니 중년이 훨씬 넘은 듯한 아주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계신다.
고참이 시켰던 대로 50원짜리 동전을 건네며 '보댕이 하나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아주머니가 '뭐요'하고 묻기에 다시 한 번 '보댕이요'라고 또렷하게 답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오뎅(어묵)'을 하나 꺼내 비닐봉지에 담아주셨다.
순간 제주도에서는 '오뎅'을 '보댕이'라고 하는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담을 넘어 의기양양하게 어묵을 손에 들고 내무반으로 들어서니 심부름을 갈 때보다 훨씬 많은 고참들이 식사를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와 있다.
심부름을 시켰던 고참에게 사온 '어묵'을 내 놓으니, 고참이 어묵을 손에 들고, "애가 50원 주고 부대 뒤 구멍가게서 사온 '보댕이'"라고 소개하자 순간 내무반이 웃음바다가 된다.
정말이지 그들이 왜 그렇게 웃는지 도대체 짐작도 할 수 없고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니 오금이 저려온다. 그렇게 한바탕 웃음거리가 된 다음 며칠이 지난 나중에야 '보댕이'란 말이 제주도 방언으로 여자의 성기를 일컫는 말이란 걸 알았다.
군인들의 짓궂은 장난에 익숙해진 가게 집 아주머니가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곤란해 집어 준 어묵이 한바탕 웃음에 톡톡히 일조를 한 셈이다.
누군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하는 사람도 답답하지만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환장할 노릇이다. 알아듣는 척은 하였으나 실제적으론 무슨 뜻인지 몰랐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경우를 포함해서 말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그 사람이 나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어떤 뜻이었구나 하는 것이라도 깨달으면 그나마 다행이나 대개의 경우는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원인에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 난해한 표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신과 이해를 달리하는 내용일 때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가 더 많았던 듯싶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이미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데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복잡하고 귀찮게 생각해 스스로의 귀를 막아버리니 잘 들리지 않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무려 8만 4천이나 되는 가르침을 남겨놓으셨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밀교'와 '현교'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밀교란 한마디로 은밀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드러내지 않고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으로 가르치며 깨우침을 주셨을 테니 들어도 듣지 못하고 일러줘도 알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겠다.
여행사를 통해 제주도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들릴 법한 곳이 신서귀포와 중문관광단지 중간쯤에 있는 '약천사' 아닌가 모르겠다. '동양 최대의 대웅전'이라는 유명세도 있지만 그만한 볼거리에 입장료조차 받지 않으니 여행사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라도 들릴 법한 곳이니 말이다.
서귀포(西歸浦)는 한국 최남단에 있는 도시, 아름다운 천혜의 해안관광지로 유명하지만 그 지명은 해석에 따라 불교와 아주 밀접하다. 아미타부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는 극락세계를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한다. 서귀(西歸)란 바로 그 서방정토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돌아가는 곳('西方淨土 阿彌陀佛께 歸依한다')이다. 서방정토로 가는 반야(지혜)의 용선(배)이 출발하는 포구로도 해석되니 불자들의 염원이 담겨진 지명이라 해도 될 듯싶다.
제주도 남쪽 해안에 모슬포 산방굴사를 시작으로 성산 일출봉 입구의 동명사까지 많은 절들이 들어선 것은 바로 서귀(西歸)의 염원이 담긴 까닭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문관광단지를 벗어나 서귀포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바닷가로 난 조그만 길 입구에 '약천사'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골목으로 들어서 제주도 특유의 돌담길을 따라 500m쯤 내려가면 약천사의 웅장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 일반건물 10층 정도의 높이인 30m쯤 되는 약천사(藥天寺)는 그 규모가 단일 전각으로는 동양 최대라고 한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걷고 계곡을 건너 들어서게 되는 심산유곡의 산사에서 나름대로 절 찾아가는 맛을 느낀다면 탁 트인 바다를 전망으로 하고 있는 바닷가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남다른 기쁨과 신심도 있다.
어찌 보면 획일적인 듯 그렇고 그런 절들에 비하면 약천사에선 조금 파격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우선 그 규모가 파격적이고, 주변의 이국적 수목들과 어우러진 가람의 조화가 파격적이다. 어떤 이들은 조선초기의 건축방식이라고 하지만 층층이 올라간 대규모임에도 날렵한 곡선미와 균형감에서 분명 지금껏 보았던 여느 절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대웅전 격인 대적광전 내부에는 높이가 5m나 된다는 비로자나불이 높이 4m의 좌대에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복도 형태로 이루어진 층별 양쪽 벽에는 금불과 옥불 등 1만8천 소불이 모셔져 부처님 터널을 이루고 있다.
법당 앞마당 양옆에 솟아있는 2층의 누각엔 각각 범종과 법고가 걸려 있다. 망망대해 남쪽바다와 배산으로 두고 있는 한라산을 향해 울려 퍼질 범종과 법고의 깊고도 울림 있는 여음을 한 몸에 느끼고 싶다.
법당 뒤로 돌아가면 굴법당이 있고 오른쪽 언덕엔 석탑이 있다. 노란 밀감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경내 마당을 한 계단 내려오면 커다란 잎새의 종려나무들이 이국적 풍경을 연출한다. 눈길 끝에 바다가 걸린다. 소리라도 크게 지르면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던 해녀가 답을 할만도 하다.
약천사를 일부에서는 '약수가 흐르는 절'이라는 의미를 가진 약천사(藥泉寺)로 부르기도 한단다. 약천사에는 오래 전부터 '돽새미'라 불리는 수질이 좋은 약수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듯하다.
이른 시간, 많은 사람들이 아직은 잠들어 있을 시간의 약천사는 정말 조용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바다를 전망으로 이국적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동양최대의 단일 가람은 서귀로 드는 일주문이며 관문인 듯하다. 아미타부처님이 관장하는 서방정토로 드는 길목이라 해도 될 서귀포에 자리한 약천사는 극락으로 가는 반야(지혜)의 용선이 정착한 속세의 또 다른 극락인 듯하다.
많은 절을 찾아다니는 동안 자연을 통해, 스님의 말씀을 통해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하는 뭔가를 통해 부처님께서는 남다른 가르침이나 깨우침을 주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속세의 말귀조차 다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무지함에 배운 것도 없고 깨우친 게 하나도 없는 듯하다.
속세의 업을 쌓느라 알고도 모르는 양 시치미 뚝 떼고 가르침도 깨우침도 거스르며 일상의 일탈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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