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연구 선구자 정약전… 모더니티 추구한 종합과학자
정약용 정약전과 정약용
조선 후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정약용과 그 형제들의 삶은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에서 고뇌하고 새로운 방향을 치열하게 모색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사회사를 생생히 보여준다.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은 조선 후기 자연과학 분야의 걸작인 ‘자산어보’를 남겼다. 실학의 대가 정약용은 애민사상을 바탕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글을 쓰면서 어쩌다 가족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지난해 모 주간지에 지난 20세기 우리 역사에 대한 글을 연재할 때는 부모님 이야기를 잠시 꺼내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금 내 나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고, 오래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의 심사를 생각해보곤 한다.
넷째 형에 대한 기억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직하게 말하면, 20대 중반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가족의 의미를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재만이 존재를 증명한다고, 정작 가족과 떨어져 살아보니 그들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e메일이 없던 시절이라 직접 손으로 쓴 편지들을 주고받던 그 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애틋해진다.
1980년대 후반 어느 해 겨울이 막 오기 직전 어느 날, 넷째 형으로부터 정태춘 노래가 담긴 테이프와 함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정태춘이 처연히 부른 ‘서울의 달’을 들으면서 밤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보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 너 역시 저 달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린다는 내용이...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에서
가족주의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한걸음 물러서서 볼 때 가족주의는 긍정적인 기여보다 부정적인 폐해가 더 두드러진다. 유사가족주의인 학벌주의와 지역주의를 생각하면 한국식 가족주의는 극복의 대상이지 장려의 문화는 아니다. 내가 가족주의를 주목하는 것은 전통에서 모더니티로 가는 시간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내 마음을 더없이 처연하게 했던 한 지식인 가족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정약용과 그 형제들의 삶은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에서 고뇌하고 새로운 방향을 치열하게 모색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사회사를 생생히 보여준다. 결코 범상치 않은 이 가족의 복잡다단하고 파란만장한 삶에는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 우리 역사의 한 시대가 있는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정약용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이나 그 형제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은 이미 적잖이 나와 있다. 특히 이덕일 선생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2’는 이 가족이 겪어야 했던 더없이 무거운, 그러나 치열했던 역사를 소설 못지않게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비록 각주가 많이 달린 전문 연구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저자가 재구성한 정약용 일가의 삶은 여전히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재에도 작지 않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내가 정약용과 그의 가족을 알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부 시절이었다. 1980년대 초반 역사학을 공부하는 선배로부터 시간이 날 때 한번 읽어보라고 정약용의 책 두 권을 추천받았다. 송재소 교수가 펴낸 ‘다산 시선’과 박석무 선생이 펴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그것이다.
“쓸쓸한 석우촌 / 앞에는 세 갈랫길
두 말 서로 희롱하며 / 저 갈 곳 모르는 듯
한 말은 남으로 가고 / 또 한 말은 동으로 가야 하네
숙부님들 머리엔 백발이 성성하고 / 큰 형님 두 뺨엔 눈물이 줄을 잇네
젊은이는 다시 만날 기약이나 한다지만 / 노인들 앞일을 누가 알리요
조금만 조금만 하는 사이에 /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어졌네
앞만 보고 가야지 뒤돌아보지 말고 / 앞으로 다시 만날 기약이나 새기면서”
인용하기엔 다소 길지만 송재소 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정약용의 시 ‘석우촌의 이별’이다. ‘다산 시선’에 실린 원주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가경(嘉慶) 신유년 정월 28일, 나는 소내에 있다가 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서울에 들어가 명례방에 있었다. 2월8일에 조정에서 의논을 발하여 그 다음날 새벽종이 칠 때 투옥되었다가 27일 밤 이고(二鼓)에 은혜를 입고 출옥하여 장기에 유배되었다. 그 다음날 길을 떠남에 숙부님들과 형님들이 석우촌에 와서 서로 이별했다. 석우촌은 숭례문에서 남으로 3리에 있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1981년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 탓인지 이 시에 담긴 그 어떤 비장함, 안타까움, 서러움에 마음이 더없이 착잡하고 처연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어쩌다 숭례문이나 서울역 주변으로 갈 때 부지불식간에 이 시를 떠올리고, 비극적인 삶을 견뎌야 했던 정약용과 그의 가족을 떠올리곤 한다. 내친김에 하나 더 인용하자면, 같은 해에 씌어진 ‘아들에게’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두시(杜詩)가 내 마음 먼저 알아서 / 네 편지 받아 보니 너도 사람 되었구나
세상 밖 강산은 이리도 고요한데 / 어지러운 속에서도 모자간(母子間)은 친하구나
의심받고 놀란 몸 병을 어찌 면하겠나 / 살림살이 가난한 것 걱정치 말고
부지런히 힘써서 남새밭 가꾸어 / 맑고 밝은 세상에 일민(逸民)이나 되어라”
일민이란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사는 사람을 말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 더욱이 전통사회에서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최상의 가치였다. 그런데 정약용은 아들에게 정작 일민이나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서구 모더니티에 정통
이 시가 씌어진 1801년은 그의 기나긴 유배가 시작된 해다. 이런 내용의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정약용의 처지가 충분히 이해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으로 지식인을 내몰았던 당시 사회구조에 대해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은 막내였다. 큰형은 약현, 둘째 형은 약전, 셋째 형은 약종이었으며, 누나가 있었는데 남편이 이승훈이었다. 또 큰형의 처남은 이벽이었고, 그 사위는 황사영이었으며, 이승훈의 외삼촌은 이익의 종손이자 당시 기호 남인을 이끌었던 이가환이었다.
이들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우리 역사의 한가운데를 걸어갔던 지식인들이었다. 이기환과 정약용은 채제공의 뒤를 이어 기호 남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자 정조 개혁정치의 한 구심을 이뤘다. 이들의 비극은 1800년 정조의 돌연한 죽음 직후 시작됐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정약종, 이승훈, 이가환은 처형됐으며, 곧 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에서는 황사영이 처형됐다. 그리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기나긴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됐다.
이번 기획에서 다루고자 하는 두 명의 지식인은 바로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다.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구속을 고려할 때 이 두 사람은 이례적인 지식인이다. 그 이례성은 이들이 누구보다도 서학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이벽으로부터 서학과 천주교를 배웠으며, 천주교를 결국 떠났지만 당대 지식인으로서는 서구의 모더니티에 상당히 정통했다고 볼 수 있다.
귀양이라는 더없이 고단한 나날 속에 정약전과 정약용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지식인의 본분인 연구와 저술을 계속해나갔다. 특히 정약용은 위기로 나가는 조선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 담론을 치열하게 모색해나갔다. 정약용과 정약전이 유배 시기에 이룬 업적은 전통사회의 시대정신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청한 것이자 새로운 시대정신을 예감케 하는 것이었다.
수산학의 고전 ‘자산어보’
정약전(丁若銓)은 1758년(영조 34년)에 경기도 광주(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천전(天全)이며 호는 손암(巽庵)이다. 아버지는 재원이며 어머니는 윤씨 부인이다. 정약전은 어린 시절부터 기호 남인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이익의 학설을 익혔으며,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 문하에서 학문을 더욱 연마했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790년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전적·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정약전은 친척인 이벽, 이승훈 등과 긴밀히 교유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자연과학을 배우고 천주교 교리를 익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전은 전라남도 신지도에 유배됐으며, 곧 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연구를 계속해온 정약전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1816년(순조 16년) 흑산도에서 숨을 거뒀다.
정약전이 우리 지성사에 주목할 지식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 유배 시절에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는 데 있다(연구자들에 따라서 이 책은 ‘현산어보’라고도 불린다. ‘玆’을 ‘자’가 아니라 ‘현’으로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인데, 여기서는 자산어보라는 견해를 따른다). 정약전은 흑산도 근해의 생물을 조사하고 연구해 이를 책으로 기록했는데, 자산어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수산생물 155종에 대한 이름·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의 매우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채로운 자연과학 저작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저작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학과 윤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과학과 기술을 경시하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우리 전통사회에서 뛰어난 자연과학 저작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의 기본적 방법론은 관찰이다. 정약전은 세밀한 관찰을 통해 자산어보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수산생물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김려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와 함께 자산어보는 전통사회의 어류 연구에 더없이 소중한 자료다.
자산어보가 시선을 끈 이유는 네 가지다. 먼저 이 책은 정약전 특유의 분류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정약전은 당시 수산생물을 크게 인류(鱗類), 무린류(無鱗類), 개류(介類), 잡류(雜類)로 나누고 있다. 인류가 비늘이 있는 것이라면, 무린류는 비늘이 없는 것이다. 개류는 껍질이 단단한 것이며, 잡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들이다. 정약전은 다시 비늘이 있는 인류 아래 석수어, 숭어, 농어, 강항어 등 여러 종류를 구분하고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분류법이 낯설고 거칠다 하더라도 수산생물의 독특한 특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당시 수산생물의 방언과 특징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매우 소중한 자료다. 예를 들어 ‘짱둥어’의 경우 정약전은 ‘철목어(凸目魚)’라는 자신이 지은 이름 옆에 ‘장동어(長同魚)’라는 당시 방언을 함께 덧붙이고 있다. 또 청어와 고등어의 경우 그 회유 및 분포에 대한 정보를 적어놓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실태와 비교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셋째, 이 책에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반영돼 있다. 정약전은 개별 생물의 말미에 의약상의 기능을 기술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홍어는 배가 아플 때 효능이 있으며, 주기(酒氣)를 없애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적고 있다.
비극을 초극하려는 지식인의 의지
자산어보는 정문기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으며, 손택수 시인에 의해 주요 어류의 소개 및 해제를 담은 책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특히 손택수 시인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그림을 덧붙이고 현대 생물의 이름을 함께 소개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주목할 것은 자산어보에는 당시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물고기와 물새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어업에 종사한 민중에 대한 정약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손택수 시인이 지적하듯이 자산어보는 정약전 개인의 책인 동시에 장창대를 포함한 섬사람들이 공동의 저자로 참여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자산어보에는 유배라는 비극을 초극하려는 지식인 정약전의 의지가 담겨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정약전은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흑산도에서 이승을 떠났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것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서문의 첫 문장은 마음을 더없이 시리게 한다.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사람들의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이 자산이라 쓰고 있었다. 자(玆)는 흑(黑)자와 같다.”
동생 정약용은 흑산이란 말에 담긴 의미를 고려해 ‘흑’자 대신 ‘자’자를 썼다고 한다. ‘자’에도 검다는 뜻이 담겨 있으나 형님의 불우한 처지를 고려할 때 ‘흑산’보다는 ‘자산’이 섬세한 배려가 담긴 말일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흑산도를 가보지 못했다. 목포에서 100㎞ 정도 떨어져 있는 이 섬은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했다고 한다. 왜 ‘흑산어보’가 아니라 ‘자산어보’라 했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처연해지고, 개인적 비극에 의연히 맞서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정약전의 의지적 낙관에 새삼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유배지의 당대 최고 지식인
한 지식인의 위상을 다른 지식인과 비교하는 것은 학문 세계에서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지식인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연구영역이 있으며, 그 연구 성과를 다른 이들의 업적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잣대란 사실 부재한다. 이 점에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연구 업적을 수량화해 비교하는 풍토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오히려 상당한 숙고를 요구하는 창의적 연구를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이런 특성을 갖는 것임에도 우리 지성사에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뚝 솟은 거인들이 존재한다.
정약용은 바로 그런 거인의 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방대한 저작들도 저작이려니와 더없이 치열했던 그의 삶과 연구는 시대정신 탐구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더욱이 그 지적 고투(苦鬪)가 기나긴 유배생활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식인 정약용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지적 거인일 것이다.
박석무 선생의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를 보면, 긴 유배에서 돌아온 후 몇 년이 지난 1822년,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노론의 대가 김매순이 ‘매씨비평’을 읽어본 소감을 정약용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유림의 대업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아득하게 먼 천 년 뒤에 온갖 잡초가 우거진 동쪽 오랑캐 나라에서 이처럼 뛰어나고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으랴.”
정약용이 답신을 썼다. “박복한 목숨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날도 멀지 않은 때에 이러한 편지를 받고 보니 처음으로 더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정약용의 솔직한 심사가 잘 드러나 있는 편지다. 한편에서는 그래도 죽기 전에 이러한 평가를 받은 것이 정약용 자신에게는 다행이었고 보람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김매순이 정약용을 유배지로 내몬 사람은 아니었지만, 노론과 남인의 권력투쟁과 이로 인해 정약용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생각할 때 논리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영조 38년) 정약전의 둘째 아우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미용(美庸)이고,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菴)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그의 삶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득의의 시기다. 1783년 회시에 합격하고 1789년 문과에 급제한 다음 벼슬길로 나아갔다. 두 번째 시기는 유배의 시기다. 정조 사후 1801년 신유박해에서 그는 경상북도 장기를 거쳐 황서영 백서사건 이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1818년 귀양이 풀릴 때까지 실의를 딛고 고독 속에서 빛나는 연구를 진행했다. 세 번째는 마무리의 시기다. 18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신작, 김매순, 홍석주, 그리고 김정희 등과 교유하면서 자신의 저작들을 정리했다. 1836년(헌종 2년) 고향 광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치·행정 개혁론의 교과서
제한된 지면에서 정약용의 고단한 삶과 탁월한 업적을 간략히 정리하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흔히 정약용은 실학의 집대성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술은 500권이 넘는다. 오랫동안 정약용의 사상을 연구해온 금장태 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의 학문세계는 유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경학’과 국가경영을 위한 정치·경제·법률 분야의 경세학이 두 축을 이룬다. 그리고 여기에 문학,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풍속학, 의학 등이 덧붙여질 수 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아언각비’ ‘마과회통’ ‘아방강역고’ 등 그의 대표 저술들은 이 땅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에게는 익숙하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1표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로 알려진 경세학이다. 유학자답게 정약용은 경학에 심혈을 기울였고 앞서 김매순의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현재적 관점에서는 경학보다 아무래도 경세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경학이 실학파의 관점에서 본 유학의 재구성이라면, 경세학은 현실 개혁을 목표로 한 실학파의 본격적인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다. 실학파의 집대성이라는 평가가 오롯이 반영돼 있는 영역은 다름 아닌 경세학이기도 하다.
정약용이 1표2서를 저술한 것은 유배 말년과 해배 직후다. 1817년 경세유표를, 1818년 목민심서를 저술했고, 고향에 돌아온 직후인 1819년 흠흠신서를 완성했다. 1표2서에 담긴 정약용의 문제의식은 부국강병을 위한 포괄적인 사회개혁에 있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경세유표에는 ‘조선이라는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바꾸어버리자’는 문제의식이, 목민심서에는 ‘현재의 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 보자’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흠흠심서는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해 저술한 형법서다.
이 가운데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정약용의 대표작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성을 다스림은 학문의 반이라 하여, 이에 23사(史)와 우리나라 여러 역사 및 자집(子集) 등 여러 서적을 가져다가 옛날 사목이 목민한 유적을 골라, 세밀히 고찰하여 이를 분류한 다음, 차례로 편집하였다. 이곳 남쪽 지방은 전답의 조세가 나오는 곳이라, 간악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농단하여 그에 따른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내 처지가 비천하므로 들은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것 또한 그대로 분류하여 대강 기록하고 나의 천박한 소견을 붙였다.”
한마디로 목민심서는 지방 관리의 폐해를 해결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기 위한 정치·행정 개혁론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총 12편(부임, 율기, 봉공, 애민,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 진황, 해관)과 각 편을 6조로 나눈 총 72조로 구성돼 있다. 각 조는 다시 강목을 두었는데, 강에는 의견의 대강을 제시하고, 목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그 해법을 강구하고 있다.
유배 후반기에 경학에 대한 연구를 마친 이후 정약용은 국가의 제도 개혁론을 다루는 경세유표를 저술하다가 이를 중단하고 목심심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 더없이 곤궁했던 백성의 삶을 더 이상 이대로 놓아둘 수 없다는 그의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 책에는 당시 아전과 토호의 부정부패, 농민들의 처참한 실태가 있는 그대로 담겨 있다. 지방 행정은 국가 경영의 기초인바, 올바른 목민관이 되기 위한 지침을 다룬 목민심서는 정약용 사회개혁론의 출발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이 책을 여전히 중시하고 가장 많이 읽는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약용의 연구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30년대다. 1936년 그의 사후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적 헌금을 통해 그의 저술을 출간하는 사업이 추진됐다. 1935년부터 5년간 ‘여유당전서’ 76책이 신조선사에서 간행됐으며, 동시에 강연회를 포함해 그의 사상이 새롭게 재평가됐다. 이러한 재평가는 광복 이후 더욱 활성화됐는데 홍이섭 교수, 이을호 선생, 금장태 교수 등의 연구들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정약용은 실학파는 물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약용은 지난번 이 기획에서 다룬 박지원, 박제가와 동시대 지식인이다. 북학파 그룹의 연구와 정약용의 연구는 실학파로 통칭되고 있지만 일정한 차이가 존재한다. 첫째, 북학파의 주요 활동이 정조 연간에 이뤄진 반면, 정약용의 주요 연구는 순조 연간에 진행됐다. 북학파가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은 개혁정치 시대에 활동했다면, 정약용은 세도정치 시대의 고난 속에서 연구에 몰두한 셈이었다.
둘째, 북학파가 상공업의 발전을 강조했다면, 정약용은 이익의 문제의식을 계승해 전제(田制)를 포함한 농업의 개혁을 중시했다. 북학파가 중상학파로 불리고, 정약용이 중농학파로 불린 연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정약용의 관심은 인문학에서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종합과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모더니티에 대해 정약용이 가졌던 시대감각과 시대정신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정약용의 역량은 1789년 한강 배다리 준공과 1793년 수원성 설계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수원성 축성에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기중의 방법을 다룬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저술하고, 소규모 기중기를 만들어 공사 기간과 비용을 줄인 것은 뛰어난 자연과학적 업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홍역에 대한 치료를 다룬 ‘마과회통’을 저술하기도 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에 따르면 모더니티란 ‘기술의 모더니티’와 ‘해방의 모더니티’로 이뤄져 있다. 과학적 진보 및 혁신이라는 기술의 모더니티 관점에서 볼 때 정약용은 분명 모더니티의 선각자였다. 역사의 발전은 비약보다는 끝없는 누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며, 이 점에서 18세기 후반 정조 연간에 정약용 등에 의해 진행된 일련의 기술적 진보를 과소평가하기 어렵다. 기실 서구사회에서도 모더니티에 이르는 변화는 긴 시간에 걸쳐 진행돼왔음을 주목해야 한다.
해방의 모더니티 관점에서 볼 때 정약용의 사상은 문제적이다. 여기에는 서구와 동아시아의 차이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구의 경우 모더니티의 전개는 중세의 기독교적 질서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반면, 동아시아의 경우는 바로 이 서구 모더니티의 정신이 기독교 문화와 혼재돼 전래됐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평등주의가 모더니티의 핵심 가치라면, 동아시아에 전파된 천주교는 하나님이라는 유일사상과 함께 이러한 모더니티의 정신을 담고 있기도 했다.
동도서기(東道西器)와 서도서기(西道西器)
정약용은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가 보여주듯이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 그의 나이 60세 때 쓴 자찬묘지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진사로서 성균관에 들어간 후 이벽을 따라 놀며 서교에 대하여 듣고 서교의 책을 보았다. 정미년(1787) 이후로 4, 5년 동안은 매우 열심히 서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하지만 신해년(1791) 이후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함이 엄중했으므로 마침내 천주교에 대한 마음을 끊었다. 을묘년(1795) 여름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들어와 나라 안의 분위기가 흉흉하자 외직으로 나가 금정 찰방에 보임되어서는 왕명의 뜻을 받아서 천주교도들을 유인해 교화시키고 제거했다.”
천주교에서 떠났음을 이렇게 분명히 기록한 것은 천주교가 자신과 가족의 삶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종교로서의 천주교를 포기했다 하더라도 정신으로서의 서구를 과연 정약용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의 문제다. 유배 이후에 쓰인 저작들과 특히 편지들을 보면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전통인’으로서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경학에 대한 일련의 연구 성과는 그 직접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경세학에서 나타난 그의 애민사상이다. 백성에 대한, 다시 말해 민중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는 애민이 통치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앞선 유학자인 정도전과 이이의 사상에도 중심을 이뤘던 것이며, 정약용 역시 이익을 포함한 이러한 사상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애민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점에서 정약용의 애민사상과 토지개혁론에서 모더니티의 단서, ‘근대인’의 특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소망의 과잉’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위와 같은 판단이 서도서기(西道西器)적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발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데 있다. 모더니티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주의가 반드시 ‘서도’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다면, ‘소망의 과잉’이라는 평가 역시 서구적 시각의 판단일 수 있다. 동아시아의 모더니티에서 서도서기와 동도서기(東道西器) 중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는 결코 간단한 해답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며, 이는 우리 모더니티의 벽두에서부터 지식인들이 대면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모더니티를 과연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정약용 형제들은 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삶과 사상을 보여줬다. 정약전과 정약용이 동도서기적 사유의 한 출발을 보여준 반면, 정약종과 이승훈은 서도서기적 관점을 적극 수용했다. 동도서기와 서도서기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지는 여전히 우리 지식사회의 숙제이지만, 이 두 가지 선택 모두가 200년 전 한 가족의 삶과 사상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과 그 가족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성화돼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쪽 담을 비추는 달빛
지난 4월 중순 신록이 아름다운 어느 날, 정약용 생가와 묘소가 있는 능내리를 찾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마음이 쓸쓸할 때면 이곳을 더러 찾아갔다. 이번에는 글을 준비하는 와중에 들른 탓인지 마음이 더욱 각별했다. 생가, 여유당, 묘소, 기념관 등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정약용이 만들었던 거중기와 녹로 모형, 그가 저술했던 목민심서 등 여러 유품을 지켜보니 더없이 고단하고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에 자못 처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 생가 인근에 있는 한 카페에 들렀다. 서울에서 가까운 탓인지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외식을 하러 나온 가족도 있었고, 바람을 쐬러 온 부부도 있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관심도 없이 자기들끼리 이야기에 열중하는 연인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팔당호 위에는 덩그러니 달이 빛나고 있었다.
“병상에서 일어나자 봄바람도 가버리고 / 수심이 가득하니 여름밤이 길구나
잠깐 동안 대자리에 누워 있는 사이에도 / 문득 문득 고향집이 그리워지네
등잔불 그을음이 메케하길래 / 문을 여니 대[竹] 기운이 서늘하구나
저 멀리 소내에 떠 있는 달은 / 우리 집 서쪽 담을 비추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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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1960년 경기도 양주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 미국 UCLA 사회학과 방문학자 ●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Korea Democracy Project 공동편집인 ● 저서: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등 다수 |
1801년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쓴 시다. 낮이 빛이라면 밤은 어둠이다. 삶의 어둠을 비추는 달, 고향 하늘에 떠 있을 달과 가족을 떠올리는 정약용의 쓸쓸한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달은 정약용이 살았던 200년 전에도 저렇게 빛나고 있었을까. 두고 온 고향집 서쪽 담을 비추고 있었을까. 고향을 떠난 지 18년이 지난 다음에야 정약용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향이란, 가족이란 과연 무엇이고 또 어떤 존재일까.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넷째 형님 전화번호를 천천히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약전은 누구인가 1758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1816년 사망. 정약용의 둘째 형인 그는 흑산도 유배 기간 중에 ‘자산어보’ 등을 저술함. ‘자산어보’는 당시 수산생물을 연구한 독보적인 자연과학 저술로 평가되고 있음. 정약용은 누구인가 1762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1836년 사망. 성호 이익을 사숙한 그는 실학파를 집대성한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로 평가되고 있음. 주요 저서로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의 ‘1표2서’, 다수의 경학 저술과 기타 연구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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