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임윤수_뚜벅뚜벅 산사기행_09

醉月 2011. 6. 1. 09:25

관음의 화신 덕숭낭자 버선꽃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1)-덕숭산 수덕사

 

'관성법칙'이란 게 있다. 중학교 물상 시간에 배운 것으로 뉴튼의 제1법칙이다. 선생님은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추거나 정지하면 앞뒤로 쏠림이 생겨 서있던 사람들이 넘어지려 하는 현상을 가지고 관성법칙을 설명했다.

▲ 일주문 좌측으로 고암 이응노 화백이 살았던 초가의 <수덕여관>이 있다. 여관 앞에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에서 화백은 구상을 잡고 캔버스를 펼쳐 그림을 그렸을 듯하다.
ⓒ 임윤수
중학교 때 관성법칙은 단지 문제를 풀기 위해 외워야 하는 많은 공식 중 하나며 기껏해야 물리 현상에나 적용되는 자연 법칙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살다 보니 관성법칙은 단순한 공식도, 자연계에만 작용되는 그런 법칙이 아니다.

살다보면 가끔 '머리 따로, 가슴 따로'를 경험하게 된다. 사랑하던 연인과의 헤어짐에서 그 현상은 뚜렷하다. 이성적 지배를 받는 머리로는 분명 정리되어 더 이상 만나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러나 감성의 바다인 가슴에선 연인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이 점점 더 큰 풍랑을 만들어 낸다. 이게 바로 감성의 관성 탓이다.

어디 그 뿐이야. 권력의 속성을 맛 본 사람은 권력의 관성에 지배받고 돈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은 돈의 관성을 극복하지 못해 파경의 길을 가게 된다. 이런 저런 관성의 풍랑이 결국 번민과 갈등이 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장애물도 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불혹'이라 일컫는 40의 나이는 '모든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음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고 유혹되지 않을 게 없음을 나타낸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굴렁쇠처럼 서서히 구르던 오욕칠정이 관성의 탄력을 받아 멈추기 힘든 고비의 절정기가 아닌가 모르겠다.

▲ 수덕사는 비구니절이 아니며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다섯 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 임윤수
유아기 때는 엄마의 젖무덤과 달콤한 사탕만이 유혹이었다. 사춘기 땐 이성의 도톰한 입술과 감미로운 목소리가 유혹으로 다가오더니 청장년이 되니 진로와 이성을 소유하고 싶은 뜨거움이 유혹으로 밀려왔다. 사회로 진출하며 출세욕과 명예욕이 본성을 드러낸다.

40대의 나이가 되니 이런저런 유혹들이 얼키설키 흔들림으로 다가온다. 불혹의 나이라는 40대는 미혹을 떨굴 만큼 성숙한 나이가 아니라 흔들림과 갈등의 나이다. 잠자는 아가의 작은 숨결에도 흔들릴 만큼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사춘기 때라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하찮은 설렘에도 열병을 앓는 그런 나이가 40대 아닌가 모르겠다. 그런 흔들림과 갈등을 잠재우고 달래기 위해 오늘도 관성적으로 산사를 찾는다.

오래 전 송춘희라는 가수가 불렀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인지 수덕사를 비구니(여승) 절로 생각하는 사람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러나 수덕사에는 국내 최초의 비구니 선방인 견성암과 환희대가 산내 암자로 있을 뿐 비구니(여승) 절은 아니다. 현재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계시는 법장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피선되기 전까지는 바로 수덕사의 주지 스님이셨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5대 총림(叢林) 중 한 곳이다. 총림이란 범어 'vindhyavana(빈타파나)'의 번역으로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은 3번째 고건축물인 대웅전은 건물 자체가 국보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 임윤수
현재 우리 나라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총림으로 지정된 곳은 수덕사의 덕숭총림, 해인사 가야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백양사 고불총림 5곳뿐이다.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과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 그리고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 및 염불 교육 기관인 염불원을 갖추어야 하며 총림의 어른이신 방장 스님이 계셔야 한다.

수덕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렇게 험한 산을 넘지도 않고 커다란 강을 건너지도 않는다.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과 덕산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가로지르는 지방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 곳에 덕숭산이 있고 덕숭산 품안에 수덕사가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행지 기분을 물씬 나게 하는 상가 골목을 지나 15분쯤 들어가면 일주문에 도달하게 된다. 일주문 옆에는 초가로 된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살았던 곳이다. 여관 앞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다. 화백은 이 바위에서 구상을 잡고 캔버스를 펼쳐 그림을 그렸을 듯 하다.

▲ 대웅전을 이루고 있는 기둥에선 세월이 깊이가 느껴진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기둥의 터진 자국에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 담겨져 있다.
ⓒ 임윤수
일주문을 들어서 이런 저런 문들과 전각을 지나게 되면 대웅전 마당에 서게 된다.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은 세번째 최고령 고건축물로 건물 자체가 국보 49호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세월이 느껴지는 기둥의 터진 자국에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 묻어나는 맞배지붕 주심포계 고건축물이다.

교구 본사의 커다란 사찰들 대부분이 그렇듯 수덕사도 몇몇의 산내 암자가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 바로 왼쪽으로 비구니승 도량인 환희대가 있고 원통보전이 있다. 경내를 지나 팻말을 따르면 견성암을 비롯한 암자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덕숭산 정상 쪽으로 산길을 오르면 정혜사가 있다. 정혜사는 평소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국내 몇몇 선원 중의 한 곳이다.

대개의 고찰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전설이나 설화 하나쯤 가지고 있듯 수덕사에도 가슴을 여리게 만드는 설화가 있다. 절뿐만 아니라 절이 들어선 덕숭산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애틋한 설화다. 설화의 귀착점이 되는 곳은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 있는 관음바위다.

옛날 이곳엔 수덕이라는 도령이 살고 있었으며 사냥을 즐겨했다고 한다. 비록 늙었지만 몰이를 잘하는 할아범과 몇몇 머슴들을 데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도령은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시중 들던 할아범이 노루를 발견하곤 도령에게 활시위를 당기라고 채근하니 귀를 쫑긋 세운 노루 한마리가 숲 저쪽에서 다가왔다. 도령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고 화살을 막 쏘려다 엷은 눈웃음을 흘리더니 말없이 활을 거두었다.

몰이를 하느라 진땀을 뺀 하인들은 활을 당기기만 하면 노루를 잡을 판이기에 못내 섭섭해 하기도 했지만 도련님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어찌된 일인지를 물었다.

▲ 대웅전 앞에는 마당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다. 위쪽 마당 가운데는 3층석탑이 있고 아래 마당 가운데는 코끼리 석등 있다. 코끼리 석등 동쪽에는 법고각, 서쪽에는 범종각이 있으며 마당 어디서고 탁 트인 전망이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다.
ⓒ 임윤수
그러자 도령이 노루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너희들 눈에는 노루만 보이느냐? 그 옆에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때서야 노루 옆에 서있는 처녀를 보게 된 하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루 옆에는 정말 아름다운 처자가 서있었다.

하인들 중 한명이 "도련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노루 대신 여인이라도… "하며 말끝을 흐렸다. 도령은 "에끼 이 녀석, 무슨 말버릇이 그리 방자하냐. 자 어서들 돌아가자"하고 야단을 치며 양반의 체통을 지키려 걸음을 재촉했지만 뛰는 가슴을 어쩔 수는 없었다.

노루 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여인! 어쩜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덕 도령의 가슴은 더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도령의 마음엔 온통 아가씨의 환상뿐이다.

눈길에서 멀어져 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 있는 수덕의 가슴은 진정되지 안았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뿐이었다. 여인 대한 그리움은 열병처럼 도령을 엄습해 버렸다. 그러기를 며칠, 하는 수 없이 수덕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했다.

▲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는 관음상이 모셔져 있고 관음상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다.
ⓒ 임윤수
할아범이 알아 온 바에 의하면 그녀는 바로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였다. 아름답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문장이 출중하여 마을 젊은이들이 줄지어 혼담을 건네고 있으나 어인 일인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덕의 가슴엔 불이 붙었다. 자연 글 읽기에 소홀하게 된 수덕은 훈장의 눈을 피해 매일 낭자의 집 주위를 서성댔다. 그러나 먼 빛으로 스치는 모습만을 바라볼 뿐 낭자를 만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열병 같은 짝사랑에 가슴을 태우던 수덕 도령은 용기를 내어 낭자의 집을 찾았다.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며 도령은 덕숭 낭자에게 진지하게 청혼을 했다. 만약 청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음으로라도 그 뜻을 풀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지만 낭자는 아직 혼인할 나이도 아닐 뿐더러 고아와 같은 미천한 처지라며 완강하게 청혼을 거절했다.

수덕 도령의 마음은 점점 더 낭자에게 빠져들었고 조급해졌다. 앉으나 서나 온통 낭자의 환상에 잡히게 되어 정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되어 몰골이 된 모습으로 다시 낭자를 찾아 혼인해 줄 것을 애절하게 간청했다.

▲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에 피어난 꽃이다. 이 꽃이 정확하게 버선꽃인지는 모르지만 순백의 꽃잎에서 낭자의 아리따움을 연상하게 된다(2003. 6. 12)
ⓒ 임윤수
수덕의 간청을 듣고 있던 낭자는 두 볼을 붉히며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낭자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면 청혼을 받아 주겠다는 말이었다. 낭자의 소망은 다름 아닌, 일찍이 비명에 돌아가신 어버이의 고혼(孤魂)을 위로하도록 집 근처에 큰 절을 하나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도령은 낭자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겠다 약속하고 곧바로 불사에 착수한다. 마음이 바쁜 수덕 도령은 부모님의 반대와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상관치 않고 오직 불사에만 전념했다. 터를 가다듬고 기둥을 세웠다. 서까래를 올리고 벽을 쌓으며 기와를 구웠다. 불철주야로 불사에 혼신을 다하니 이윽고 한달만에 절이 완성됐다.

불사를 끝낸 수덕 도령은 한걸음에 낭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들뜬 마음에 낭자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막 단청이 끝낸 절을 구경하러 가자고 하니 낭자는 구경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 한다. 한번도 절 짓는 곳을 다녀간 적이 없는 낭자가 불사된 절을 본 듯 말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할아범이 헐레벌떡 뛰어와 혼신을 다해 세운 절이 불길에 휩싸여 폭삭 주저앉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동안의 공덕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절망감과 하루라도 빨리 낭자를 품에 안고 싶은 열망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순간이기에 수덕 도령은 좌절하며 부처님을 원망했다.

▲ 덕숭산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소림초당'이란 편액이 붙어있는 초가가 나온다. 산길을 오르다 커다란 바위에 틀어 앉은 초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업이 한 꺼풀은 벗겨진다.
ⓒ 임윤수
그러자 옆에 있던 낭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부처님을 염하면서 절을 다시 지으면 된다"고 위로했다. 수덕 도령은 결심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면서 기도를 했으나 이따금씩 덕숭 낭자의 얼굴이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어 수행하듯 절을 완성할 무렵 또다시 불이 나고 말았다. 수덕 도령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낭자에 대한 도령의 사랑과 애틋함은 불사의 손길을 멈추지 않게 하였다.

또 다시 한달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신비롭기 그지없는 웅장한 대웅전이 완성되었다. 그 동안의 우여곡절이 주마등처럼 기억에 지나가니 도령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관세음보살"을 연송했다.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뛰다시피 덕숭 낭자를 찾아 절이 완공되었음을 알린다. 이번에도 낭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듯 도령을 반갑게 맞이하며, 소녀의 소원을 풀어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며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 약속을 했다.

며칠이 지나 마침내 신방이 꾸며졌다. 오직 하나, 덕숭 낭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주위의 비난과 조롱쯤 아랑곳하지 않고 오랫동안 일념의 시간을 보내 온 도령에게 있어 신방은 꿈이었으며 뜨거운 피를 식힐 수 있는 유일한 도원이었다.

▲ 소림초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만공탑이 나온다. 둥그런 지구의 형태인 탑에서 뭔가를 느껴질 듯하다.
ⓒ 임윤수
들뜸과 설렘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둘 만이 남게되었을 때 촛불 은은한 가운데 낭자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문을 열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만은 따로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말인가.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도령의 뜨거움을 식힐 수 있는 길인데 잠자리를 따로 하자니….

도령의 가슴은 너무도 뜨거웠고 그 뜨거움을 주체할 수 없었기에 낭자의 애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수덕은 낭자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런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풍이 일며 낭자의 모습은 섬광처럼 문밖으로 사라졌고 수덕 도령의 두 손엔 버선 한짝만이 남겨져 있었다.

은밀하게 차려졌던 신방도, 연지곤지를 찍고 아름답기만 했던 덕숭 낭자도 순식간에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정신을 차린 도령이 손에 든 버선을 들여다보는 순간 신방에 있던 큼직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에서 낭자가 신었던 버선과 흡사한 하얀 꽃이 피어 있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때서야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가 관음의 화신임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도령은 낭자와의 애틋한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수덕사'라 부르고 수덕사가 자리잡고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다고 한다.

자신은 비록 덕숭 낭자의 품에 안기지 못했으나 자신이 불심으로 일군 절이라도 덕숭 낭자의 품에 안기고 싶어 절을 품고 있을 산의 이름을 덕숭산이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정혜사 경내에 있는 석탑이다. 선원에서 갇힌 듯 수행 생활을 하는 많은 선승들에 깨우침을 향한 염원과 기도의 애환이 깃들여 있을 듯 하다.
ⓒ 임윤수
지금도 수덕사 인근 바위틈에서는 해마다 '버선꽃'이 피며 이 꽃은 관음의 버선이라 전해 오고 있다하니 기회 되면 관음이 화신한 덕숭 낭자를 닮았다는 버선꽃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흔들리는 마음과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절을 찾았건만 설화 속 덕숭 낭자와 수덕 도령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다시 마음을 흔들어 댄다. 역시 40대 나이는 어느 것에도 흔들리는, 미혹되지 않을 게 없는 부불혹(否不惑)의 나약하고 위험한 나이인가 보다. 이제야 알겠다. 세월의 관성만큼 분명한 관성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덧붙이는 글 | 수덕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천안 I.C → 21번 국도 → 예산 → 45번 국도 → 덕산면 → 622번 지방도 → 수덕사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2)-태화산 마곡사

 

해마다 거르지 않고 찾아오기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언제고 낯설고 내키지 않는 게 꽃샘추위다. 매년 봄의 문턱에서 깔딱 고개처럼 넘어야 할 한기의 마지막 까탈이려니 해도 올해는 좀 지나친 듯 싶다. 엄청난 폭설과 한파로 시샘의 단계를 넘어 많은 피해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 발빠르게 피어났던 목련이 꽃샘추위와 동반한 춘설이 녹으며 만들어진 얼음에 온전히 쌓였다.
ⓒ 임윤수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이 있듯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길고 가혹할 수록 찾아오는 봄은 그만큼 따뜻하리라 기대한다. 길었던 고통을 보상해 주고도 남을 만큼 화사하며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위안하면서도 당장에 피해가 고통스럽다.

꽃샘추위는 대개 2월 말∼ 3월 중순까지 나타나는데 갑작스런 시베리아 고기압의 확장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기상이변이라고 한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한겨울 혹한의 권세를 누리던 시베리아 고기압도 2월 하순이 되면 서서히 세력이 쇠하게 되어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쇠퇴해 가는 시베리아 고기압 자리엔 남서쪽의 따뜻한 고기압이 찾아든다.

절기가 바뀌어 햇살이 길어지고 봄비마저 촉촉이 내려 주니 이들을 원동력으로 여기저기서 개화가 시작되니 드디어 봄이다. 이럴 즈음 약화되었던 시베리아 기단이 다시 한번 세력을 회복해 권토중래하여 불현듯 찾아오면 이것이 꽃샘추위다.

인간들이야 넣었던 옷 다시 꺼내 입고, 몸 한번 더 웅크리면 되지만 눈치 없이 발 빠르게 피어났던 꽃들은 동사되기도 하니 꽃들에게 있어 꽃샘추위는 저승사자와 같은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꽃샘추위 뒤에는 자연의 심오한 생존 전략이 있다. 일상 꽃샘추위라 하면 움트던 새싹이나 웅크리게 하고, 피어나던 꽃망울이나 동사시키는 것으로만 생각되지만 그 뒤에는 자연에 순응하며 적응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자연의 감각이 활동으로 시작되는 기점이기도하다.

▲ 계곡을 걷고 다리를 건너면 해탈문이 나온다. 이 해탈문까지 들어가는 계곡에서 봄 맛을 챙겨야 한다.
ⓒ 임윤수

꽃망울 틔우고 새싹이 돋는 봄부터 시작된 수목들의 일년 나기는 한여름 녹음기를 거쳐 화려한 단풍과 탐스런 열매를 맺는 것으로 일년을 갈무리한다. 그렇게 자라고, 그렇게 무성하며, 그렇게 곱고 탐스런 잎새와 열매도 일말의 미련 없이 다 떨구고 겨울로 들어서는,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아는 지혜를 수목들은 가지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것 다 버리고 겨우내 죽은 듯 몸 낮추며 겨울 고비를 넘기며 봄을 맞이한 나무들은 일년을 시작하며 새싹과 꽃망울을 틔울 때도 아무 때나 틔우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기회 선택의 끈기와 본능적 혜안을 가지고있다.

수목들은 바로 꽃샘추위 때, 가장 열악한 조건일 때 새싹과 꽃망울을 제일 많이 틔운다고 한다. 틔웠던 싹도 거둬들이고 펼치던 꽃망울로 다시 접을 판에 새싹을 틔운다니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거기엔 자연이 존재하기 위한 처절한 자기 의지가 숨겨져 있다. 아무런 내력도 갖추지 않은 야들야들한 싹이나 몽우리가 따뜻한 때 세상 밖으로 틔우면 그것들은 말 그대로 연약한 새싹일 뿐이다. 혹한이나 여타의 열악한 조건에서 버틸 수 있는 생존력도 저항력도 갖추지 못한 채 밖으로 내던져지는 결과가 된다.

▲ 극락교 건너 아름드리 느티나무 사이로 대광보전과 대웅전이 보인다. 아직은 날씨가 차가운 탓에 누비옷을 입은 스님이 털 모자를 머리에 올려놓았다.
ⓒ 임윤수

아무런 대책 없이 따뜻한 봄날 싹을 틔웠다 예기치 않게 추위라도 다시 오거나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그 꽃 몽우리나 싹은 결국 죽어버린다. 그러나 가혹하도록 추운 꽃샘추위 때 새싹을 틔우게된다면 어떻게 될까? 새싹들이 그 추위를 이기고 살아나기만 하면 설사 다시 한 번 추위가 찾아오고 바람이 분다 해도 그 새싹은 꿋꿋하게 살아나 무성한 잎이 되고 아름다운 꽃이 되어 다시 열매를 맺게 된다.

봄날 자연이 만들어 내는 대자연의 도도한 상징인 새싹들이 험한 세상으로 나가면서 겪게 되는 최초의 시련이자 단련의 기회가 바로 꽃샘추위다. 이게 바로 자연이다. 순응하며 생존할 수 있는 내력이 준비된 것만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곳이 자연이고 그 출발의 시기를 선택하는 것이 자연의 본능적 지혜다.

새끼를 낳으면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려 살아남는 것만을 키우는 맹수들의 냉혹한 생존 경쟁력이 수목에도 엄연히 적용됨을 볼 수 있으니 여기에 자연의 가르침이 있다. 너나없이 넘치는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귀한 것이 자식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고 귀한 자식에 대한 인간들의 처세는 결국 새싹 하나를 틔워내는 나무 하나의 지혜와 의지를 넘어서지 못한 듯하다.

과잉 보호는 살아갈 수 있는 생활력을 준비할 기회를 박탈한다. 지나친 간섭은 화해할 수 있는 유연성을 경직되게 하고 절름발이 가치관을 형성시킨다. 자연에게 배울 일이다. 자식은 온실의 화분처럼 그렇게 키울 것이 아니라 혹한에 싹 틔우는 산야의 수목처럼 그렇게 키우는 것임을 말이다.

▲ 극락교 위쪽으로는 산 빛 가득 머금은 계곡이 깊숙하게 산 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 임윤수

그러니 꽃샘추위 때 자연계에 귀를 기울여볼 일이다. 여기저기서 새싹을 틔우고 꽃망울 움트는 소리가 아가의 옹알이처럼 들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적응해 가는 지혜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론 너무 일찍 싹을 틔워 꽃망울을 맺다 졸지에 동사하는 꽃들도 볼 수 있다. '모난 돌 정 맞듯' 튀지 말고 서두르지 말며 주변의 흐름에 속도를 맞추는 완급 조절도 필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보여준다.

대전에는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있다. 봄 풍경은 마곡사가 으뜸이며 가을 풍경은 갑사가 볼만하다는 말이다. 마곡사라고 해서 오는 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나는 건 아니지만 흐르는 계곡으로 아침 저녁 다르게 다가오는 신록이 빛깔은 실로 아름답다.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는 봄을 알리는 자연의 합창이다. 급한 물줄기는 급한 물줄기대로, 바위에 부딪혀 돌아가는 물줄기는 그 물줄기대로 독특한 톤으로 합창에 하모니를 이룬다. 거친 땅, 두툼한 껍질을 헤집고 고개를 내민 새싹들이 쏟아내는 상큼한 냄새는 봄을 느끼게 하는 자연의 향이며 독백처럼 들려주는 봄처녀의 속삭임이다.

계곡을 밑그림으로 하여 흐르는 물을 그려 넣고 조금씩 조금씩 푸름을 덧칠하며 한폭 그림을 완성해 가는 것이 봄날 자연이 그려내는 걸작 풍경화며 그 미미한 움직임이 판토마임이다. 그런 걸작의 풍경화에 자신을 등장시키고 판토마임의 주인공을 대신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마곡사 가는 계곡길이다.

▲ 극락교 아래로는 수많은 잉어들이 유유자적 유영한다.
ⓒ 임윤수

봄 경치가 이렇듯 수려한 마곡사는 공주에서 예산으로 가는 32번 국도를 타고 가다 사곡에서 지방도로로 이어진다. 사곡을 벗어나 구비 구비 산자락 따라 만들어진 길은 혼잡할 것 없어 절로 느긋해 지니 마음조차 넉넉해진다.

그렇게 이정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면서부터 봄 경치가 으뜸이라는 마곡사 계곡은 시작된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계곡을 따라 걸으면 계곡에 흐드러진 봄 속에 내가 들어간다.

마곡사(麻谷寺)라는 명칭은 본래 이 지역에 마(麻)가 많이 재배되던 골짜기(谷)라 하여 마곡(麻谷)이라 부르던 곳에 있는 절(寺)이란 뜻이라고도 하고,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스승인 마곡 보철화상을 기려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도 한다. 또한 보조국사가 고려 명종 2년(1172)에 이 절을 재건하고 법문을 할 때 설법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로 골짜기가 꽉 찬 모습이 마치 삼밭에 삼(麻)이 들어선 듯 빼곡하다하여 마곡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대부분의 산사가 계곡 하나씩은 끼고 있지만 이곳 마곡사는 산중 절이라기보다는 계곡 속에 자리한 절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릴 만큼 계곡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개의 절들은 산문이나 매표소를 지나면 계곡이나 개울을 건너고 앞쪽으로 이런저런 문들과 전각들이 있다.

▲ 보물 802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광보전은 그 규모도 놀랍지만 기둥을 이루고 있는 아름드리 싸리나무가 눈길을 끈다.
ⓒ 임윤수

그런데 마곡사는 다른 절과는 달리 매표소를 지나 한참을 걸어 들어가되 바로 오른쪽에 절을 두고도 줄곧 올라가야 한다. 펄쩍 건너뛰면 닿을 듯한 오른쪽 계곡 건너에 마곡사가 있으나 물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다시 한번 다리를 건너야만 해탈문과 천왕문에 닿게 된다.

길을 걷다 보면 아름드리 느티나무 사이로 알록달록 단청으로 치장된 전각들이 보이고 목탁 소리에 실린 염불 소리가 들릴 수도 있다. 흐르는 물은 말할 것 없고 커다란 바위에조차 봄빛이 흠뻑 배어 있다.

마곡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래서 좋다. 아무런 준비 없이 털썩 해탈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지나는 게 아니고 돌아가고 건너가는 계곡길이 미리 마음 열어주고 몸가짐을 챙겨 주니 그냥 찾으면 된다.

마곡사 계곡은 그냥 위에서 아래로 하염없이 물만 흐르기만 하는 그런 계곡이 아니다. 맑고 깨끗한 물엔 반질반질한 바위들이 도반처럼 발 담가 어깨동무한 채 물소리로 합창한다. 울퉁불퉁 못생겼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느티나무도 강강수월래를 하는 춤꾼들처럼 울타리를 만들어 한몫 하고 있다.

▲ 대광보전 뒤로, 멀리에서 보면 지붕 하나 불쑥 솟은 전각이 있으니 바로 보물 제80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이다.
ⓒ 임윤수

마곡사 계곡은 태극 모양으로 휘돌아 나가는 형상으로 물길 양쪽으로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계곡을 돌아 처음으로 맞게 되는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게 되면 극락교를 건네게 된다. 극락교를 건너기 전 좌측으로 이런저런 전각들이 있고 다리 건너 멀리 대웅전이 보인다. 해탈문 앞으로 작은 부도밭과 주변에 키 큰 나무들이 서 있을 뿐 그 어떤 꾸밈도 없다.

해탈문 왼쪽으로 소박해 보이는 흙담 안으로 몇몇 한옥 건물이 보이는데 영산전과 홍성루, 매회당, 수선사 등의 요사채다. 이곳으로부터 대웅전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다시 한번 계곡에 놓여진 다리 하나를 지나야 하니 그 다리가 극락교다.

주변의 형세가 이승과 극락을 절묘하게 갈라놓은 듯 하여 누구라도 쉽사리 그 다리의 이름이 극락교쯤 될 거라는 걸 짐작하게 되며 그 다리가 극락교임을 알게 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극락교 위쪽으로는 산 빛 가득 머금은 계곡 상류가 산 속으로 헤집어 들어가고 아래로는 수많은 잉어들이 유유자적 유영한다. 여느 절 고인 물에서 보아왔던 연못 속 잉어들과는 천양지차의 모습이다. 하기야 식수로 사용하여도 될 듯한 맑은 계곡 물에 살고 있으니 잉어에게는 이곳이 극락임이 틀림없다.

▲ 극락교를 건너 들어선 마당 좌측으론 흐른 듯 옆으로 넓게 퍼진 멋진 소나무를 제단처럼 갖고있는 응진전이 있다.
ⓒ 임윤수

극락교를 지나면 우측으로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범종루가 있고 정면에 5층 석탑과 대광보전이 보인다. 대광보전 뒤로 우뚝 솟은 또 하나의 전각이 보이니 그곳이 바로 대웅보전이다. 마당 왼쪽엔 흐른 듯 옆으로 넓게 퍼진 멋진 소나무를 제단처럼 갖고 있는 응진전이 있다.

보물 802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광보전은 그 규모도 놀랍지만 기둥을 이루고 있는 아름드리 싸리나무가 눈길을 끈다. 싸리나무 기둥에서 세월이 보인다. 반들반들한 법당 마루에서 마곡사를 다녀간 불자들의 흔적과 정성이 느껴진다. 대광보전에는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있다.

대광보전 뒤로, 멀리에서 보면 지붕 하나 불쑥 솟은 전각이 있으니 바로 보물 제80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이다. 대광보전 우측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건물규모에 비해 비좁은 뜰을 가진 2층 건물의 대웅보전이 있다.

▲ 선방으로 들어가는 골목과 담벼락에도 봄빛이 돌고 있다.
ⓒ 임윤수

이런 형태의 중층 건물은 화엄사 각황전이나 멀지 않은 부여의 무량사 극락전, 금산사 미륵전 등과 함께 우리 나라에 몇 안 되는 구조로 내부는 모두 통층으로 뚫려 있다.

대웅보전 안에도 손때 묻어 윤기가 자르르한 네 개의 싸리나무 기둥이 있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가면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많이 돌았을수록 극락길이 가깝고 아예 돌지 않았다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기둥을 붙들고 돌았기 때문에 생긴 사람들의 마음이 남긴 흔적이다.

대웅보전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러 전각들의 흙 기와에서도 봄기운이 올라온다. 화사한 산 벚꽃과 노란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필 날이 멀지 않았건만 아직은 날씨가 싸늘하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소리에 실려온 마음 속 봄은 이미 저 말치 흘러갔건만 육신엔 춘설 두터운 한겨울이다.

▲ 사물이 걸려 있는 범종루는 여느 사찰의 범종각과는 달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 임윤수

오는 봄의 화사함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처럼 얻고자 하는 지혜를 시샘하는 것은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아닌가 모르겠다. 오는 봄날 하루쯤은 주인공이든 소품이든 봄 풍경화에 자신을 등장시키기 위해 봄 맛이 제격인 마곡사 계곡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 마곡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천안 - 공주 - 예산으로 가는 32번 국도 - 사곡 - 이정표

 

자연은 민심을 거스르지 않는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3)-계룡산 동학사

 

'민심이 천심'이라 한다. 민심은 심해처럼 조용하고 태산과 같이 육중하여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처럼 거스름 없이 가야 할 곳을 향해 오로지 흐를 뿐이다. 그러기에 민심은 없는 듯하나 분명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다.

역사적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면 민란이 일어나곤 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894년(고종 31) 무지랭이 농사꾼인 줄로만 알았던 농민을 주축으로 지배층의 탐학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봉건, 반침략 운동인 동학혁명도 민란이다.

예나 지금이나 평민들은 봉기를 일으킬 만한 힘도 권력도 없고 조직도 정비되어 있지 않다. 민심은 자의적이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다. 부귀권세를 누리며 소소한 일에도 일희일비가 엇갈리는 관리들과는 달리 바위처럼 갈대처럼 제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던 백성들은 뜻과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면 그게 민심이다.

▲ 동학사가 자리 틀고 있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하여 계룡산(鷄龍山)이라 부른다고 한다.(2004. 3. 7)
ⓒ 임윤수

똑똑 떨어지는 처마 끝 낙숫물 모여 작은 도랑 만들고, 그 도랑들이 개울물 되고 강물 되어 누구도 거역치 못할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하듯 민심이 마치 이를 닮았다. 벙어리처럼 말하지 않고, 장님처럼 보지 못한 듯 이런 일 저런 일 묵묵히 담아 넘기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되면 자연발생적으로 뜻이 모여지고 힘이 합해져 범람하는 물줄기 같은 흐름의 여론을 형성하니 그게 바로 드러난 민심이다. 흉흉해진 민심은 원성이 되고 그 원성이 커지면 결국 민란이 되는 것이다.

110년 전 동학혁명 때 분노한 민심은 죽창과 연장을 손에 들었다. 부처님을 향해 빌고 빌던 그 손, 새싹을 키워 양식거리로 만들어가던 그 순박하고 투박한 손에 움켜쥔 죽창과 연장은 그들의 분노며 최소한의 방어였다. 애처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며 정의롭게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110년이란 장고의 시간이 흐른 오늘 분노한 민심은 죽창대신 촛불을 밝혀 들었다. 촛불의 흐름이 전국의 어둠을 밝히니 민심의 역동이 시작되었다. 끓는 분노를 토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네티즌들이 두들겨대는 자판 소리가 방방곡곡서 천둥소리처럼 메아리치니 시대에 걸맞게 형성된 민심의 물결이다.

필자가 태어난 1960년. 권력을 연장하려는 정치 모리배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3·15부정선거는 4·19를 야기시켰고 결국 그들은 민심에 굴복하였다. 동서고금에서 그 어떤 권력도 그 어떤 무기도 민심의 흐름을 거역해 승리한 역사가 없다.

▲ 선덕왕 23년(724)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지어 상원사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동학사는 명산 계룡산 동쪽에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 임윤수

사람들은 이번에도 아전인수격으로 '사필귀정'이란 사자성어를 인용했다. 사필귀정은 역사가 판단하고 민심이 판결하지 착각이나 입맛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다. 싸늘한 밤 공기를 데우고 어둠을 걷어내는 움켜쥔 촛불은 사필귀정으로 가기 위한 민심의 등불이며 당찬 몸부림이다. 누군가가 3·12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고는 누군가에게 '자업자득'이란 표현을 했다. 그래, 자업자득이 어떤 것인가를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민심을 요동시키는 엄청난 업보를 자행한 그들이 얻는 게 과연 무엇인지 지켜볼 일이다.

'동학'이라는 동음(同音)과 최초의 집회 장소인 공주라는 지역적 상관성 때문인지 동학사(東鶴寺)로 가는 내내 대표적 민란인 동학혁명이 떠오르고 4·19와 5·18 그리고 87년 6·10대회까지 번갈아 그려진다. 땅!땅!땅! 의사봉을 두들기던 3·12 대통령 탄핵 가결 장면을 밑그림으로 움켜쥔 촛불이 그려지는 것은 어인 일일까? 초라하다 못해 비굴하도록 떨리던 목소리의 하야 성명과 민심이 뭔지도 모른 채 만세를 부르던 3·12 주역들의 목소리가 공허한 되돌림 노래처럼 귓전을 맴돈다.

접근조차 거절할 듯 수북하게 쌓였던 눈들이 정말 '춘풍에 봄 눈 녹듯' 거반 녹아버렸다. 시간의 흐름은 자연의 민심인가보다. 겨울 위용을 유지하려는 엄청난 폭설도 도도히 흐르는 세월이란 민심엔 어쩔 수 없이 무너지고 양보되니 말이다.

자연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민심에 순응하며 양보도 알고 물러섬도 아니 걱정스러울 게 없다. 허나 탐욕에 눈먼 인간들의 흐려진 판단은 민심을 알지 못해 아등바등 저항하다 서로에게 아픔만 남기니 그게 문제다.

▲ 호랑이가 맺어준 두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게 되니 바로 "남매탑"이다. 앞에 보이는 7층 석탑이 오라비 탑이며 뒤로 보이는 5층 석탑이 오누이 탑이다.(2003. 10)
ⓒ 임윤수

선덕왕 23년(724)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지어 상원사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동학사는 명산 계룡산 동쪽에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절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어 절 이름을 동학사라 했다는 설과, 고려말 충신이자 동방 성리학의 원조인 정몽주를 제사 지내므로 동학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동학사가 있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 하여 계룡산(鷄龍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계룡산은 전국의 웬만한 도인들의 수도 경력엔 빠짐없이 등장하고 태조 이성계가 왕도의 진산으로 정했을 정도로 기혈 왕성한 명산이다.

계룡산은 논산과 공주의 영산(靈山)으로 한국의 오악 중 하나로 꼽힌다. 계룡산서 발기한 정기가 신도안으로 뻗었으니 신도안이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이성계가 왕도로 정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616년 전인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한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지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탐문한 끝에 지금의 신도안으로 천도를 결정한다.

고려 때부터 신도안이 도읍지로 더 없이 좋다는 이른바 '도참설'도 있었지만, 이성계 자신도 직접 둘러본 결과 적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도할 도읍지가 결정되자 대궐을 세우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 봄볕에 드러난 동학사 전경이 아늑해 보이기만 하다.
ⓒ 임윤수

천하제일의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만사를 호령하던 절대적 왕권이 있었기에 모든 일은 거칠 것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도읍을 천도하고 대궐을 짓는 일이란 게 원체 대사이기에 이성계는 계룡산 사연봉(四連峰)에 제단을 차려놓고 국운왕성과 무탈천도를 천신께 빌고 있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사가 진행되어 터가 다듬어지고 주춧돌이 놓여질 즈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고 있던 이성계에게 백발의 할머니 한분이 현몽하여 다짜고짜 "나는 계룡산 신령인데 여기는 정도령의 도읍지니 공사를 중지하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을 하였다.

계룡산 신령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언젠가 계룡산 정기를 타고 태어날 정도령이란 신인(神人)이 왕이 되어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8백년간 태평성세를 펼칠 그의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계는 갑작스레 나타난 백발 할머니상의 산신령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던 이성계였지만 할머니의 위풍당당함에 눌려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지금 주춧돌까지 놓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며 그냥 천도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 대웅전 앞에서면 계룡산 주봉인 삼불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고 빙 둘러선 산들이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다.
ⓒ 임윤수

그러나 할머니는 일언지하에 "만약 공사를 계속하면 앞으로 큰 화가 미쳐 국위의 존립 여부는 물론 생명까지 위태로울 것"이라 말하였다. 할머니의 태도가 워낙 냉랭하고 단호한지라 할 수 없이 이성계는 "이곳을 떠날 테니 어느 곳에 도읍을 정해야 할지 그 곳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할머니는 "여기서 5백리 북쪽으로 올라가 그곳에 가서 도읍을 정하라" 일러주니 그곳이 조선 5백년 도읍지인 현재의 서울, 한양이다.

기도 삼매에 빠졌던 이성계가 정신차려 주변을 살폈으나 계룡산 할머니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신도안으로 천도를 포기하며 "흙 한줌이라도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할머니의 뜻을 따라 수많은 일꾼들이 신에 묻었던 흙을 한곳에 털어 대니 그 흙이 모여 지금의 신털봉이 되었다 한다.

입으로 전해지는 한낱 설화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어쩌면 당시의 민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성계는 막강한 권력으로 추진하던 천도에 따른 민심 이반과 원성이 발생하자 산신령을 등장시켜 민심을 수습하는 기지를 발휘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이런 명산의 길지에 자리잡고 있는 동학사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일주문을 지나 동학사 직전, 계곡에 걸린 정자 앞에서 오른쪽 산길로 1시간쯤 오르면 만날 수 있는 남매탑부터 봐야 한다.

▲ 동학사엘 가면 대웅전 오른쪽에 세 개의 사당이 보인다. 사진의 왼쪽이 고려말 삼은을 모신 삼은각이며 오른쪽이 동계사다.
ⓒ 임윤수

남매탑(男妹塔)은 계룡산 동쪽에 있는 동학사와 서쪽에 있는 갑사의 중간 지점인 삼불봉 아래, 옛 청량사 터에 세워진 두개의 탑이다. 오누이 탑인 5층탑과 오라비 탑인 7층 석탑은 각각 보물 제 1284호와 1285호로 지정되었으며 청량사지쌍탑(淸凉寺地雙塔)이라고도 불린다.

남매탑에도 애틋한 전설이 유래한다. 통일신라시대 한 스님이 계룡산에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울부짖으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입을 크게 벌리는 일이 있었다. 갑작스런 맹수의 포효에 혼비백산했던 스님이 정신차려 호랑이 입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박혀있기에 이를 뽑아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호랑이는 아리따운 처녀 한명을 입에 물고 와 수도승 앞에 놓고 갔다. 목에 걸린 가시를 빼준 은혜를 보답하는 뜻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와 정신을 잃었던 처녀는 스님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다음날 정신을 차렸다. 처녀는 상주 사람으로 혼인을 치른 날, 초야의 신방도 차리기 전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눈도 너무 많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한 겨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둘은 토굴에서 겨울을 넘기게 되었다. 드디어 봄이 되어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낼 수도 없고 인연이 그러하니 부부의 예를 갖추어 둘이 함께 살아달라고 부탁하였다.

▲ 동학사에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다. 선방은 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 임윤수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불심 깊은 수도승은 남녀가 인연을 맺는 파계는 있을 수 없기에 고심 끝에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는다. 그렇게 맺어진 두 남매는 비구와 비구니로 불도에 힘쓰다 한날 한시에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두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게 되니 바로 '남매탑'이라 한다.

이 남매탑의 주인공은 동학사를 창건한 회의의 은사스님이 되는, 신라 성덕왕 15년(716)에 당나라에서 입국한 상원화상이라고도 하니 동학사의 뿌리는 이곳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하다.

32번 국도를 따르다 박정자삼거리에서 시작되는 넓은 진입로는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동학사 관문이다. 멀리 닭 벼슬을 닮은 계룡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속이 후련하도록 넓고 반듯하게 만들어진 길에는 속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훨씬 넘었을 노령의 벚나무들이 가로수로 온몸 벌려 길손을 맞아들인다.

마을이 나오고 삼거리가 나오니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고개를 넘으면 그곳이 이성계가 도읍지로 정하였던 신도안이며 육군본부가 들어선 계룡대가 있다. 벚나무 터널을 지나 주차를 하면 그곳부터 계곡에 늘어트린 산 그림자가 절 찾는 발길을 안내한다. 호객하는 상인들의 애교 섞인 부름이 속세의 끈끈한 연 만큼이나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매표소를 지나 오리쯤 걷게되는 진입로는 한마디로 혼자 걷기엔 너무 아까운 그럴싸한 데이트 코스다.

▲ 봄날을 맞은 비구니 학승들이 울력으로 경내를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봄빛에 드러난 빡빡 머리에 고깔모자라도 씌워주고 싶다.
ⓒ 임윤수

물길 따라 산 그림자 따라 뚜벅뚜벅 걷다보면 계곡에 걸린 육모정인 세진정을 지나게 된다. 세진이란 '마음속에 있는 번뇌의 티끌과 온갖 더러움을 맑은 계곡에 씻어 내듯 깨끗이 씻어내고 정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향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육모정에 올라 마음만 펼치면 일부러 염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속세의 온갖 번뇌와 오욕칠정이 씻길 듯하다.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은 혼탁한 마음을 씻어주고 졸졸거리는 청아한 물소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설법으로 목탁소리로 다가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을 따르면 남매탑으로 가게 된다.

세진정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절집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풍광이 일품이어서 언뜻 동학사가 아닌가 싶지만 그곳은 동학사 산내 암자인 관음암과 길상암이다. 두 암자를 오른쪽에 두고 계곡을 따라 몇 발자국 더 들어가야 비로소 동학사에 이르게 된다.

동학사가면 대웅전 오른쪽에 세 개의 사당이 보인다. 고려말 삼은을 모신 삼은각,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동계사, 단종과 사육신 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원통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키 위해 초혼제를 지내는 숙모전으로 이런 전각은 어느 절에서도 보기 힘든 전각들이다.

▲ 계룡산 동학사에 봄은 이렇게 오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단청을 배경으로 한 단색의 목련 몽우리가 잘 어울린다.
ⓒ 임윤수

고려말 학자인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음에도 동학사엔 그들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세워져있으니 바로 삼은각이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조선 500년 동안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배불의 근간이 되었다. 자신을 핍박하고 곤경에 일조한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세웠고 지금껏 제를 지내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와 보시를 실행으로 옮긴 실천불교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웅전에서는 계룡산의 삼불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고 빙 둘러선 산들이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다. 재잘대듯 흐르는 물소리는 무료함을 달래주고 간간이 스치듯 불어주는 바람은 흩어진 마음을 모아준다.

빡빡 깎은 비구니 학승 머리에 반사된 봄볕이 유난히 반짝인다. 문득 진한 눈썹에 맑고 커다란 눈동자에 담겨 있는 학승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필자가 생각하는 민심에 고개를 끄덕여 줄지 아니면 옆으로 흔들지가.

화병이라도 날 듯 뒤틀린 심사로 산사를 찾았건만 길 없는 곳서 길을 찾고 바위틈을 오르느라 심호흡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춘풍에 봄눈 녹듯' 민심을 뒤틀리게 하는 이런 저런 일들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4월 15일, 총선이 있는 바로 그날 '붓 뚜껑'에 담긴 민심의 물결에 말끔히 녹았으면 좋겠다.

▲ 봄은 물오른 나무에만 오는 게 아니고 양지쪽 빨랫줄에도 와 있었다. 봄볕에 드러낸 빨래들이 해바라기를 하고있다.
ⓒ 임윤수

민심은 산고와 껍질을 깨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희망이 보인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어느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촛불을 움켜쥔 손으로 환희와 축복의 박수를 칠 결과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우쑥 자란 주권과 누군가가 말한 '자업자득'의 결과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수백 년 된 호두나무는 광덕사 사천왕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4)-태화산 광덕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무리 여행을 좋아해도 배 쫄쫄 곯아가며 할 수는 없다. 여행의 한 재미가 특정지역에서만 생산되거나 만들어지는 독특하며 맛난 음식을 먹어보거나 기념품을 소장하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좀 아쉬운 얘기지만 오늘날 국내 여행지엔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독특한 특산물이나 기념품은 거의 없다. 설악산 기념품이나 서귀포 어느 곳에 있는 기념품이나 다 비슷비슷한 걸 취급하니 정말 유별나고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기념품이 별로 없다는 게 큰 아쉬움이며 관광산업을 위해 개선되어야 할 한 분야다.

▲ 한파를 이겨낸 산사주변 나무에는 파릇한 새싹이 돋고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산사 찾는 마음을 한결 밝게 해준다.
ⓒ 임윤수

기념품이라고 해야 대개 똑같은 형태에 관광지명만 달리한 것들이다. 거기다 웬만한 것들은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인쇄되어 있다. 6∙25땐 인민군이 인해전술로 밀려들더니 이젠 공산품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대개의 사람들이 '싼 게 비지떡'이라고 중국산이 질은 떨어지지만 값은 싸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요즘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원자재 파동의 한 가운데 있는 선철이란 것은 중국산이 질은 떨어지면서도 가격은 국산의 거반 두 배에 가깝게 거래되고 있다. 하여튼 중국산이 싼 것만은 아니니 명심할 일이다. 인해전술처럼 밀려드는 중국산에 대한 장기적 대비책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자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차 한 대쯤 소유한 자가용 시대지만 여행은 아무래도 기차여행이 제 맛이다. 안전하기도 하지만 도로의 막힘이 없고 이런저런 편리점이 많은 게 기차여행이다. 추억을 더듬고 낭만을 찾는 사치스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차에 연결된 식당도 있고 용무를 해결할 수 있는 화장실도 있으니 아무리 장거리를 가더라도 크게 불편할 게 없다.

▲ 천안호두과자란 명성에 어울리게 광덕사 주변은 온통 호두나무다. 호두과수도 있고 가로수도 호두나무다.
ⓒ 임윤수

차내를 반복해 오가며 군것질거리를 팔기도 하고 구역 별 별미를 팔기도 하니 여행지별 특산품이나 요리를 맛 볼 수도 있다. 거기다 재수 좋게 호감 가는 말벗 이성이나 입담 좋은 사람과 동석하게 되면 세상 돌아가고 사람 사는 얘기를 덤으로 들을 수 있으니 횡재하는 여행이 된다.

먹을 게 풍부해져 그런지 입맛이 달라져 그런지 지금은 그 맛도 많이 달라지고 의미도 퇴색됐지만 기차간이나 잠시 멈추는 역에서 먹었던 먹거리들은 맛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그 맛을 그립게 한다. 대전역은 가락국수로 많은 여행객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

단 몇 분 동안에 게눈 감추듯 먹어야 했던 가락국수가 그렇게 맛있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아니면 시간에 쫓겨 그랬는지 후루룩 마시듯 먹어대니 제대로 맛을 음미한다 할 수 없으니 정말 맛이 있어서 맛있다고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국물에 담긴 굵직한 국수에 몇 조각 함께 나오던 노란 단무지가 맛있다고들 한다.

기차여행뿐 아니라 천안을 말하면 먹거리 중엔 제일 먼저 호두과자가 연상된다. 사실 천안 호두과자는 천안에서 판매되는 이런저런 먹거리 중 꽤나 유명하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호두과자를 씹다보면 팥소와 함께 들어있던 고소한 호두가 아사삭 씹힌다. 호두과자란 상품에 '천안'이라는 이름이 붙으니 천안엔 호두나무가 많을 듯하다.

▲ 광덕사로 들어가는 입구엔 '태화산광덕사'란 편액을 달고 있는 일주문이 있다.
ⓒ 임윤수

그러나 천안을 둘러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시내 어느 곳을 보아도 호두나무는 쉽게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마치 붕어 없는 붕어빵을 보는 듯한 그런 기분일지 모른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안시내를 조금 벗어나 광덕산 쪽으로 가면 호두과자가 왜 '천안호두과자'인지 알게된다.

천안하면 언뜻 떠오르는 또 다른 것은 '천안삼거리'와 '흥타령'에 나오는 능수버들이다. 천안을 수시로 들락거려도 정작 천안삼거리를 모르거나 들르지 않은 사람들이 꽤나 많다. 천안삼거리에 들리지 않았으니 능수버들도 봤다 할 수 없다.

옛부터 삼남(三南:충청, 전라, 경상)의 요로였던 천안삼거리는 민요 '흥타령'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옛날처럼 번성된 모습을 요즘은 찾을 수 없지만 전라도 고부 고을 선비 박현수와 기생 능소와의 애틋한 사랑이 얽힌 전설은 천암삼거리의 지정학적 위치와 능수버들의 유래를 잘 말해준다. 요즘처럼 봄이 시작되면 어느 나무들 보다 먼저 녹색을 띠며 휘휘 타령춤이라도 추듯 가지를 늘이는 능수버들엔 능소와 관련 된 아픈 전설이 있다.

옛날 홀아비 한 명이 능소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다 변방의 군사로 뽑혀가게 되었다 한다. 그는 변방으로 가다 천안삼거리에 이르러 더 이상 어린 딸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주막에 딸을 맡겨 놓는다.

▲ 광덕사 보화루는 호두나무에 걸려있다. 이 호두나무가 국내 최고령호두나무다.
ⓒ 임윤수

홀아비는 딸 능소(綾紹)에게 '이 나무에 잎이 피어나면 다시 너와 내가 이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라며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은 뒤 홀로 떠났다. 어린 능소는 이곳에서 곱게 자라 기생이 되었는데 미모가 뛰어난데다 행실이 얌전해 그 이름이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이때 마침 과거를 보려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가 주막에 들렸다 능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박현수는 그후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를 제수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이곳에서 능소와 다시 상봉하자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 하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고 한다. 변방의 군사로 나갔던 능소 아버지도 별탈없이 돌아와 곱게 성장한 딸을 다시 만나게 되니 경사가 아닐 수 없어 잔치가 벌어지니 그곳에서 흥타령이 시작되었다 한다.

천안삼거리 공원엔 유달리 버드나무가 많다. 이렇게 버드나무가 많은 것은 능소와 헤어질 때 능소의 아비가 꽂았던 버드나무 지팡이가 자라서 퍼진 것이라 한다. 천안삼거리에 휘휘 가지를 느리고 있는 버드나무들은 이래서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흥타령'으로 유명한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이 휘휘 늘어진 천안삼거리를 지나 대전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남부순환도로가 나온다. 남부순환도로를 따라 아산방향으로 가다보면 광덕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를 따라 풍세를 지나 광덕엘 가보면 호두과자에 왜 '천안'이란 지명이 붙는지 이해가 간다.

▲ 여타 절들의 사천왕처럼, 신장처럼 광덕사 입구에서 그 오랜 동안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았을 호두나무야말로 성불한 불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임윤수

그곳에 있는 나무들은 온통 호두나무다. 호두나무가 과수로 밭을 이루고 있으며 가로수는 물론 개울둑에 심어진 나무들조차 크고 작은 호두나무다. 큼지막하고 오래 된 듯한 나무들은 대개가 호두나무다.

호두는 마치 복숭아(桃)처럼 생긴 것을 중국 호(胡)나라에서 가져온 데서 호두(胡桃)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호두의 원산지는 대개 중국으로 생각하나 이란이 원산지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호두는 고려 말 충렬왕 때 고향이 천안인 류청신(柳淸臣)이란 역관이 사신들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며 3그루의 묘목과 5개의 종자를 가져옴으로 국내에 유입되었다고 한다. 가져온 묘목과 종자를 고향인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 부근에 심고 파종하니 천안은 국내 최초의 호두 생산지가 주산지가 되었다.

봄기운 완연한 일요일, 천안 근교에 있는 광덕산을 찾는 길엔 사랑방 댓돌 위에 놓여진 신발들처럼 자동차들이 즐비하다. 시골집 사랑방 댓돌엔 신발이 떨어질 날이 없다. 동년배 지기들이 모여 뭐든지 나누던 곳이 바로 사랑방이다. 예고된 경사의 기쁨을 나누고 갑작스레 찾아온 환난이나 애사의 기쁨을 나누고 달래던 곳이 사랑방이다. 혼담이 오가고 소리 없는 풍문이 오가는 곳도 역시 사랑방이니 민심과 여론의 집합소며 생산지이기도 한곳이 사랑방이다.

▲ 맞배지붕 형태의 대웅전과 삼층석탑이 봄볕에 정갈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임윤수

천안사람들에게 있어 광덕산은 사랑방쯤 되는 모양이다. 늘어선 차 대부분이 충남 번호 판을 달고 있다. 동년배끼리, 가족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산을 오르고 계곡을 내려온다. 아직 가지뿐인 호두나무 사이로 원색의 등산복들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인다. 사랑방을 찾듯 광덕산을 찾아든 사람들이다.

주차공간이 없어 한참을 올라가 길모퉁이에 겨우 주차하고 밖으로 나오니 바로 도랑에 이어진 논두렁이다. 개울에 몸담고 있는 버들강아지는 이미 허연 수염처럼 활짝 피어있다. 버들강아지 사이를 나비가 나풀대고 벌들이 윙윙거린다.

올랐던 길 다시 내려와 주차장 앞에서 계곡 따라 만들어진 길을 걷는다. 성급한 사람들은 이미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은 물이 차가울 텐데 발을 담근 사람도 있다. 몇 걸음 들어가니 '태화산광덕사(泰華山廣德寺)'란 편액을 달고 있는 일주문을 지나게 된다.

공주에 있는 마곡사 말사인 광덕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흥덕왕 때(832년)에 진산화상이 중건했다는 고찰이다. 아산시와 천안시의 경계를 이루는 광덕산(699.3m) 동남쪽, 태화산(455.5m) 서남쪽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 삼층석탑 뒤로 지장보살과 열시왕을 봉안한 명부전이 보인다. 명부전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다.
ⓒ 임윤수

일주문을 지나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비구니암자인 '안양암'이 나온다. 안양암을 지나며 바로 극락교를 통해 계곡을 건너게 된다. 극락교 정면으로 2층 구조의 보화루가 보이고 보화루 앞에 고목인 듯한 커다란 한 그루 나무가 있으니 이 나무가 국내 호두나무의 최고령 목으로 알려진 광덕사 호두나무다.

극락교를 건너 보화루로 들어서는 계단 우측에 있는 호두나무는 땅에서 올라온 1m쯤서 V자 형태로 가지를 뻗었다. 밑동의 굵기는 어른 서너 아름은 족히 되며 벌어진 가지의 굵기도 한 아름으로 끌어안기는 어림도 없다. 4∼500년으로 추정하는 나무의 두꺼운 껍질이 마치 군살 박힌 시골노인의 손을 닮았다.

보화루를 나들며 합장하는 신도들에게 답례라도 하듯 가지 하나는 아예 허리를 굽힌 양 입구 쪽으로 가지를 뻗었다. 여타 절들의 사천왕처럼, 신장처럼 광덕사 입구에서 그 오랜 동안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았을 호두나무야말로 성불한 불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 백년 합장한 듯 허리를 굽힌 모양이 그렇고 수천, 수만 번은 들었을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촘촘한 나이테에 걸렸을 테니 이보다 더한 불성이 어디 있으랴.

▲ 산사의 전각들이 노란 산수유 꽃에 걸려있다.
ⓒ 임윤수

호두나무 밑을 지나 보화루로 들어서면 우측은 불교용품점이고 좌측엔 오가는 이 마음 쉬어가라고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휴게소로 들어서면 원목으로 만들어진 투박한 의자와 탁자가 있고 마실 수 있는 차가 준비되어 있다. 이곳이 광덕사의 해탈문 아닌가 모르겠다. 편액도 없고 세워진 기둥도 없지만 속세의 욕심을 차 한 잔으로 채워주는 다른 형태의 문이니 세속을 벗어나는 문인 듯하다. 게다가 산사에서 공짜 차를 마실 기회가 주어지니 별다른 기쁨이다.

보화루 밑을 통과하여 몇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앞 경내로 들어선다. 석탑을 우측으로 하고 석사자상이 양쪽에서 외호하는 돌계단을 다시 오르면 그곳이 대웅전이다. 대웅전 좌측으론 지장보살과 열시왕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이 있다. 마당 오른쪽엔 종무소와 공양간이 있는 한 채의 전각이 있는데 이 전각 좌측에도 호두나무의 원적지답게 또 하나의 커다란 호두나무가 기와지붕 처마와 툇마루 끝에 맞대어 있다.

보화루 우측으로 나란히 있는 범종각은 마곡사 범종각을 닮아있다. 본사와 말사지만 많이도 닮았다. 종각의 형태만 그런 게 아니라 산 이름도 똑같이 태화산이니 마곡사와 광덕사는 법계의 연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명부전과 종무소 전각 사이를 지나 산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산신각이 있고 부도밭이 있다. 그리고 5층 석탑도 있다. 이쯤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밭들이 온통 호두나무다. 광덕사 입구에서 보게되는 호두 밭과 호두나무 가로수들도 놀랍지만 천안호두과자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려면 역시 광덕사 호두나무를 봐야 한다. 호두의 원적지, 국내 호두 생산량의 60%를 차지한다는 양산 지에 걸맞게 절 주변도 온통 호두나무다.

▲ 경내에 있는 호두나무는 전각의 지붕과 툇마루에 이마를 맞대고 있어 '광덕사=호두'라는 등식을 성립시킬 듯 하다.
ⓒ 임윤수

초하루라 그런지 광덕사엔 신도들이 넘쳐난다. 대웅전 법당을 빼곡히 채우고도 밖에 펴진 자리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몇 분 스님이 함께 하는 염불소리가 참 듣기 좋다. 구성지기도 하고 애닳게도 들리는 천수경 염불에 마음이 끌린다. 입을 맞춘 듯 오르락내리락거리며 이어지는 염불소리가 조용한 산사를 더없이 숙연하게 만든다.

종무소엘 들리니 누구냐 묻지도 않고 대뜸 '점심공양이나 하라' 한다. 누구든 때에 오면 그렇게 챙겨주는 듯하다. 염치 불구하고 공양 간으로 들어가니 20년 동안 서울에서 광덕사에 다닌다는 나이 지긋한 보살님이 먹을 걸 챙겨준다. '절집음식 다 이렇다'면서 챙겨주는 밥과 국에는 챙겨주는 이의 보시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십 수년 전만 하여도 가을에 광덕사에 들리면 스님들이 추수한 호두를 한 봉지씩 얻어갈 수 있었는데 요즘 들어선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것도 여의치 않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깟 호두 몇 개를 얻진 못하지만 호두처럼 고소하고 아삭한 믿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얻어가니 지금도 서울 천안이 지척이란다.

보화루를 지나 다시금 호두나무 아래를 지나려니 호두나무가 한 마디하는 듯하다. '여보게 언제고 다시 오게. 맘 비우고 다시 오게. 그러면 가을에 아삭한 호두하나 줄께' 하고 말이다.

▲ 아직 갈색이지만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에도 봄기운은 완연했다.
ⓒ 임윤수

빙과류 대기업체에서 호두를 넣은 제품을 가지고 농간을 부린 모양이다.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 호두까지 농간의 대상으로 삼고있는 사람에게 광덕사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수백 년 광덕사 앞에서 합장하고 있는 그 호두나무로부터 세월에서 얻은 깨달음을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요일인 21일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호두가 건강에 좋다고 방송되었으니 한 동안 호두 열풍이 불 거라고 생각된다. 호두가 좋아 호두를 찾는 사람들도 한번쯤은 광덕사에 들려 보라고 말하고 싶다. 광덕사는 한 때 도올 김용옥이 머물며 삼매에 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우매한 관리를 깨닫게 하는 방귀 소리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5)-지리산 칠불사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지만 섬진강 주변 풍경은 도시락 싸들고 소풍을 오고싶다는 맘을 충동질하기에 충분하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은 잘 데워진 숭늉처럼 부드럽고 온화하다. 거칠고 삭막한 겨울 땅을 헤집고 올라온 연약한 새싹들은 얄밉도록 귀엽게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고개 든 새싹들이 옹기종기 무리 지어 한 뜸 한 뜸 채색을 시작하니 섬진강변은 연녹색 캔버스다.

▲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처럼 산비탈에 줄 맞춰 자라고 있는 섬진강변 야생녹차 밭에선 봄기운 가득한 녹차 향이 우러날 듯하다.
ⓒ 임윤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고 가로수로 심은 벚나무엔 통통한 꽃봉오리가 한다발씩 달려있다. 한 여름 밤 지리산 능선에서 보았던, 금방 쏟아지기라도 할 듯 하늘을 빼곡이 메웠던 은하수가 예서 올라간 꽃망울들은 아니었을까 의심될 만큼 다닥다닥 달려 있다.

붉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꽃망울이 어찌나 탱탱한지 바람이 짓궂게 장난이라도 하면 참던 웃음 툭 터트리고 하얀 속살을 드러낼 듯하다. 시집가던 날 누이가 발랐던 그 뽀얀 분을 훔쳐다 발랐는지 순백의 피부를 가진 목련은 이미 꽃잎을 떨구고 있다. 삐약거리던 노랑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개나리도 본색을 드러낸 지 오래다. 섬진강변을 따라 서서히 달리다 보니 달랑거리는 노란색 양은 도시락에 둘둘 말아 숭숭 썰어 넣은 김밥 채워 소풍을 가던 그 때가 생각나고, 다시금 그때로 돌아가 그런 소풍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칠불사를 찾아드는 계곡 이쪽 저쪽엔 만개한 봄꽃 사이로 고깔 쓴 벌통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부지런히 벌통을 드나들며 달콤한 꿀을 만들고 있을 벌들의 부지런함이 느껴진다.
ⓒ 임윤수


밤잠을 설치도록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이런저런 일들 중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초등학교 때 소풍이다. 계절적으로 좀 더 있어야 본격적인 봄 소풍이 시작되겠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알 수 없는 설렘의 미동이 다시금 시작된다.

소풍이라고 해야 형과 누나가 갔던 곳, 학교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 평소 한두 번쯤은 어른 몰래 다녀올 법한 그런 곳이다. 5, 6학년쯤이 되면 보물이 숨겨질 만한 곳도 전부 알 수 있을 만큼 매년 반복되는 그런 단골장소로 가는데도 소풍은 어린 마음을 잠 못 들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갔던 곳 또 가는데 왜 그렇게 기다려지고 가슴은 설렜는지? 평소엔 엄두도 못 내던 둘둘 만 김밥, 노랑물 진하게 배어 나오는 단무지와 파란 시금치 그리고 주홍빛 홍당무로 알록달록 구색을 맞춘 김밥이 눈길을 유혹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넉넉지 않은 재료와 농번기의 바쁜 손길을 빌려 썩둑썩둑 만들어진 김밥이지만 그때 김밥엔 추억에서나 맛 볼 수 있는 어머니의 손맛과 정성이 들어있었다.

요즘엔 밥을 밖으로 내어 마는 누드 김밥, 해물을 넣은 해물김밥까지 등장하니 김밥도 시대의 다양성에 따라 별의 별 종류가 다 생긴 모양이다. 사용되는 재료도 계란으로 만든 지단은 물론 햄과 맛살 등 눈맛과 입맛을 만족시킬 다양한 재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지금의 김밥과 예전의 김밥은 맛 차이가 날 법도 하다. 하지만 왠지 초등학교 시절 소풍날 먹었던 그 김밥이 제일 맛있는 김밥으로 기억된다.

▲ 칠불사는 가락국의 태조이자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 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 하여 칠불사가 되었다고 한다.
ⓒ 임윤수


둘러멘 가방엔 그렇게 만들어진 김밥과 삶은 계란 몇 개, 선생님께 드릴 것을 포함한 콜라나 사이다 한두 병 그리고 사탕과 과자 한두 봉이 들어 있다. 소풍지에서 아이스께끼(얼음과자)를 사먹고 장난감을 살 수 있는 얼마간의 용돈도 특별하게 지급 받던 날이 바로 소풍날이니 어찌 아니 기다릴 수 있었겠는가 싶다.

매일 아침 늦잠으로 야단을 맞던 게으름뱅이도 소풍날이나 운동회 날은 어른들보다 일찍 일어난다. 혹시 비가 오지 않나 날씨 걱정에 몇 번을 들락거리며 하늘을 바라보느라 단잠을 자지 못했어도 그날만큼은 부지런한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어 일찌감치 아침을 재촉했다.

물통을 어깨에 비껴 메고 줄 지어 가는 소풍 길 내내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댄다. 모처럼 챙겨 입은 새 옷이 피부를 사각사각 스쳐 조금씩 쓰라려도, 처음 신는 운동화에 발뒤꿈치는 물집이 생겨 통증이 무거워져도 마냥 즐겁기만 하던 그런 길이 소풍길이다.

지금 섬진강변은 그런 소풍 길을 생각나게 한다. 흐드러지게 핀 산수유 꽃에 산하가 온통 샛노란 산동 마을을 나와 칠불사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전북 이북에선 보기 힘든 보리와 토종 밀이 넓은 들판에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펼쳐진 보리밭은 벌렁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포근하고 아늑해 보인다.

▲ 칠불사에선 채마전을 삭발한 스님들 머리만큼이나 잘 정돈하는 것으로 봄맞이를 하는가 보다. 머지않아 씨 뿌리고 거둬들인 야채나 채소로 산사 음식이 마련될 듯하다.
ⓒ 임윤수


'보리밭이 과거엔 현대판 러브호텔로 한 몫 하였다'는 누군가의 이야길 떠올리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생기며 호기심이 생긴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온통 꽃밭이며 자연이 만들러낸 화원이다. 오빠랑 누이동생이 나란히 만든 꽃밭은 아니지만 그런 정성이 느껴지는 꽃밭이다. 샛노랗던 산수유 꽃은 예외로 한다 해도 주변은 온통 꽃들이다. 만개의 단계를 넘어선 목련이 있다.

일찍 개화하는 올 벚꽃은 이미 활짝 피어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도 활짝 피었다. 강 너머 언덕엔 만발한 매화꽃이 넘실대고,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처럼 산비탈에 줄 맞춰 만들어진 야생녹차 밭에선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녹차 향이 우러날 듯하다.

그 길이가 십리나 된다는 쌍계사 벚꽃 길을 지나 이십오 리는 더가야 한다는 칠불사를 찾아든다. 접어든 계곡 이쪽 저쪽엔 만개한 봄꽃 사이로 고깔 쓴 벌통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부지런히 벌통을 드나들며 달콤한 꿀을 만들고 있을 벌들의 부지런함이 느껴진다.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오르다보면 정말 다랑논 같은 다랑논들을 보게 된다. 겨우 어른 한길쯤 되는 논두렁 폭을 가진 논들이 계단처럼 층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 사람들은 그런 밭떼기조차 그냥 놀리지 않는 억척스러움과 땅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있나보다. 그런 길, 다랑 논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을 그렇게 헉헉거리며 올라가면 일주문으로 들어서게 되고 조금 더 들어가면 좌측으로 칠불사 전각이 보인다.

▲ 주차를 하고 촘촘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동국제일선원'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보설루를 지나게 된다.
ⓒ 임윤수


높은 고지 때문인지 칠불사는 아직 늦겨울과 이른봄 중간쯤이다. 부화뇌동하는 인간들이야 섬진강변 봄 풍경에 마비된 착각으로 칠불사에도 봄이 왔다 할지 모르나 기온의 절대적 바로미터인 주변의 초목들이 아직 겨울이라 말한다.

강변에선 이미 꽃잎지기 시작한 목련도 칠불사에선 아직 몽우리 채 뽀얀 솜털에 두툼한 껍질을 벗지 않았다. 실눈 뜬 듯 조금 벌어진 껍질 사이로 아래로부터 오는 봄을 지켜볼 뿐이다. 땅을 헤집고 올라오는 새싹들도 선뜻 몸체를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레 모양새만 햇살에 조금 내밀었을 뿐이다.

칠불사는 지리산 반야봉서 출발한 거대한 혈맥이 남쪽으로 40여리 뻗어 내린 해발 800여m,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야(伽倻), 일명 가락국(駕洛國)의 태조이자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곱 왕자가 이 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사가 되었다고 한다.

▲ 경내는 모든 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선방에서 수도승이 뀌는 방귀 소리조차 들릴 듯하다.
ⓒ 임윤수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생으로 인도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여 슬하에 10남 2녀의 자녀를 둔다. 큰아들 거등(巨登)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석(錫)과 삼남 명(明) 왕자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나머지 일곱 왕자가 출가하여 왕비의 친정 오빠인 보옥(寶玉) 선사를 따라 수도 정진하다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현재의 칠불사 자리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도하다 103년, 수로왕 62년 음력8월 15일 모두 생불이 되었으니 광불, 당불, 상불, 행불, 향불, 성불, 공불 등 일곱 부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칠불사의 창건설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곱(七) 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수로왕과 왕비는 기쁜 마음에 일곱 왕자를 만나려 지리산 운상원을 찾았다. 그러나 일곱 왕자의 스승이자 외삼촌인 보옥선사는 불법의 엄한 계율에 따라 그들을 대면시키지 않았다.

대신 '경내에 있는 연못을 지켜보라'고 일러주었다. 일곱 왕자를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왕과 왕비는 연못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연못을 지켜보니 얼마의 시간이 지나 연못에 성불한 일곱 왕자의 금빛 찬란한 모습이 비쳐졌다.

▲ 맞배지붕 형태의 정면 전각이 아자방이다. 아자방은 신라 때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 담공선사가 만든 온돌로 넓이가 8평방미터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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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왕자의 모습이 비쳤다는 연못은 영지로 칠불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기 전 오른쪽에 있는 원형연못으로 고지임에도 물이 가득 고여 있다. 일곱 왕자가 수도 정진하던 운상원이 지금의 칠불사며 당시 수로왕이 머물던 곳이 범왕사, 왕비 허황옥이 머물던 절이 대비사, 왕과 왕비를 따라 동행하였던 3정승이 기다리던 곳을 삼정이라 하였으니 지금은 모두 지명으로 굳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주차를 하고 촘촘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동국제일선원'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보설루를 지나게 된다. 보설루를 통과하여 몇 계단 올라서면 경내로 들어서게 되며 정면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우측으론 문수전이 있으면 경내 우측으론 설선당이 있고 그 뒤로 공양간과 신도들이 기도하며 머물 수 있는 처소가 있다. 보설루 우측엔 범종이 달려있는 원음각이 있으며 경내 좌측에 칠불사하면 떠올릴 수 있는 아자방(亞字房)이 있다.

세계건축대사전에 기록될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 아자방(亞字房)은 신라 때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 담공선사가 만든 온돌로 넓이가 8평방미터 정도라고 한다. 여느 방들처럼 방 전체를 평평하게 하지 않고 방안 네 귀퉁이를 70cm 높게 하여 아(亞)자 형태의 구조로 되었기에 '아자방'이란 이름이 붙었다. 방안 네 구석의 높은 곳은 좌선처이며 중앙의 십자형 낮은 곳은 행경처인데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 또는 겨울 내내 훈훈한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칠불사의 대표적 좌선처며 전각인 아자방에도 이런저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목마 탄 사미승'이야기가 그 대표적 전설로 조선 중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세계건축대사전에 기록될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 아자방은 처마 밑에 달린 편액조차 단정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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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하동으로 부임한 사또가 초도순시 차 쌍계사엘 들렸다 그 말사인 칠불암에 있는 아자방 선원을 보고 싶어했다. 안거 중이라 외인의 출입을 금했지만 군수는 권력을 빙자하여 억지로 선방문을 열도록 하였다. 익히 소문을 들어 아자방의 명성을 들었던 군수는 엄청난 계율을 상상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막상 아자방의 선풍을 보게 된 사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춘곤증 무거운 늦봄이라 그런지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들 중 일부는 천장을 쳐다보며, 일부는 고개를 떨구고, 일부는 좌우로 몸을 흔들며, 일부는 방귀를 뀌면서 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군수는 이들을 혼내 줄 심산으로 쌍계사에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한 바퀴 돌면 후한 상을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준다'고 기한을 정해 통문을 띄웠다.

통문을 받은 쌍계사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묘안이 있을 리 없었다. 그 때 한 사미승이 자신이 이 일을 맡겠다며 다른 스님들에게 목마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정해진 날자가 되어 스님들이 만들어 준 목마를 둘러메고 하동 관아로 들어간 사미승은 자신이 그것을 타고 동헌을 돌아보겠다고 사또에게 말했다.

사또는 사미승의 당당한 태도에 어이없어 하면서 "칠불암에 도인이 많다더니 내가 직접 보니 참선한다는 중들이 모두 졸기만 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미승은 "수도승이라고 해서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요"라며 담담하게 답을 하였다.

▲ 여느 방들처럼 방 전체를 평평하게 하지 않고 방안 네 귀퉁이를 70cm 높게 하여 아(亞)자 형태의 구조로 되었기에 '아자방'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네 구석의 높은 곳은 좌선처며 중앙의 십자형 낮은 곳은 행경처라고 한다. (사진은 아자방 입구에 붙여진 사진을 근접촬영한 것임)


그러자 사또는 그럼 도대체 "천장을 쳐다보며 졸고 있는 것이 무슨 공부란 말이냐?"하고 힐책하듯 질문을 던지자 사미승은 그런 행동은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 즉,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을 관찰하는 공부로 상통천문(上通天文) 하여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수행이라고 하였다.

사미승의 설명에 말문이 막힌 사또는 "그럼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졸고 있는 자들은 어떤 수행을 하는 것이냐"하고 재차 묻자, 그런 행동은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을 수행하는 것으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데 그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사미승이 답하였다.

계속하여 사또가 "그렇다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것은 무엇이며 방귀는 무엇이란 말이냐"고 다그치듯 묻자 사미승이 답하기를,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것은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라 하는 수행 법인데, 있음과 없음에 집착해도 안되며 전후좌우 어느 것에도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달관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귀를 뀌는 것은 '타파칠통관 (打破漆桶觀)이라고 하는 것으로 사또같이 우매한 관리들을 깨닫게 하는 공부라고 합니다"라 답한 사미승은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한바퀴 빙 돌더니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난이 대웅전 뒤에서 땅을 헤집고 올라왔다. 싹들은 선뜻 몸체를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레 모양새만 햇살에 조금 내밀었을 뿐이다.
ⓒ 임윤수


이 사미승은 다름 아닌 문수동자였다고 한다. 칠불사는 높은 위치에 있는 만큼 오는 봄도 늦은 듯하다. 잠시나마 호들갑스레 봄 소풍을 추억하던 봄날의 설렘도 칠불사에선 사치인가 보다.

사미승으로 나타난 문수보살이 다시금 현화하여 고하 할 것 없이 모든 관리들에게 타파칠통관을 깨우쳐 주었으면 좋겠다. 보설루를 지날 땐 뒤쪽 아자방에서 뿡∼하는 방귀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네 이놈 정신차려 하는 호령소릴 대신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