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임윤수_뚜벅뚜벅 산사기행_11

醉月 2011. 6. 14. 10:43

하늘빛 바다와 관음의 자비가 어우러진 도량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51)-금오산 향일암

 

▲ 일출은 어둠을 걷어내고 희망을 가져다준다. 언제고 해를 바라보고 있을 향일암서 맞이하는 일출은 또 다른 기쁨을 준다. 향일암서 해를 맞으니 자신이 향일암인 듯 하다. ⓒ 임윤수

 

<오마이뉴스>에 '산사기행'을 연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어느 절이 가장 좋으냐'고 질문을 한다.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개인별 취향에 따라 좋아할 절도 다를테니 선뜻 특정한 절을 소개해 주기 곤란해 얼버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긴 이래서 좋고 저긴 저래서 좋고, 좋은 것만을 골라 말하면 다 좋은 곳이 되고 좀 모자란 것만을 골라 말하면 다 모자란 곳이 되니 부득불 답을 해야 된다면 '이 때쯤은 여기가 좋다'라는 전제를 달고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곳을 알려준다.

▲ 가파른 계단길에 <金鰲山向日庵>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일주문이 보인다.
ⓒ 임윤수
요즘 그런 질문 '어디가 좋으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여수 금오산 향일암을 가보라고 말한다. 농익은 봄날 조용한 절 집에서 맞게 되는 아침 그 자체도 좋지만 풋풋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떠오르는 아침해를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며 축복이다. 그런 행운과 축복을 받길 바라며 향일암을 소개한다.

향일암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있는 임해가람이다. 17번 국도를 따라 20년 전 준공된 돌산대교를 건너면 우리 나라 섬 중 7째로 큰 돌산섬에 도착한다. 돌산섬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끝까지 달려가면 향일암이 있는 임포마을에 이른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향일암 일주문에 이르게 된다.

▲ 일출 전 이른 시간에도 대웅전엔 기도 올리는 불자들로 가득하다. 불자들 가슴엔 이미 일출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 임윤수
향일암이 있는 기암괴석의 산은 거북형상을 하고 있는 '금오산'이다. 산세가 다도해의 망망대해를 향한 거북의 형상을 닮았기에 쇠금(金)자, 큰바다거북 오(鰲)자를 쓰는 금오산(金鰲山)이란 산명을 가졌으며 그 거북의 몸체쯤에 향일암이 자리잡고 있다.

원효대사가 659년에 원통암(圓通庵)이란 절로 창건하였고 그 후 1715년 인묵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며 '해를 바라본다'는 뜻의 '향일암(向日庵)이라고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거북들이 난간에 나란하다. 금오산 돌들은 거북등무늬처럼 각지고 줄이 나있다.
ⓒ 임윤수
향일암으로 들어가는 길은 일주문을 통하지 않고 조금 질러가는 계단길도 있지만 이왕 절을 찾을 거면 조금 돌더라도 일주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굳이 계단으로 오르고 싶은 사람은 한번 계단의 숫자를 세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계단은 291개로 이루어져 있다. 한숨에 내딛기엔 벅찬 오르막이니 오르는 중간에 한두 번 뒤돌아보며 발아래 펼쳐지는 시원한 바다를 한눈에 넣어 보는 것이 좋다.

어느 길로 오르든 살짝 어깨를 틀어야 지날 수 있을 틈만 남겨두고 기대어 서있는 두 개의 바위가 만들고 있는 독특한 길목을 지나야 한다. 여기서 몇 걸음 더 들어가면 다시 바위틈 사이로 계단이 나온다. 이 급경사의 계단을 올라서면 창건 이후 불철주야 해를 맞이하고 있는 향일암에 들어서게 된다.

▲ 향일암의 또 다른 이름인 <靈龜庵>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전각이 대웅전 오른쪽에 있다. 관세음보살을 태운 신령스런 거북이 안좌하고 있다는 뜻인가 보다.
ⓒ 임윤수
해를 맞기 위해 들어선 절이니 만큼 그동안 찬란한 일출도 수없이 보았겠지만 날씨 탓에 구름 탓에 밤새 염원하던 햇살을 보지 못한 날도 부지기수였으리라. 그러나 항심으로 일출을 기다려줬고 앞으로도 기다려줄 일편단심의 승속이다.

향일암은 동해 낙산사의 홍련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 그리고 서해 강화도 보문암과 함께 우리 나라 4대 관음기도 도량 중 한 곳이다. 천상천하 어느 곳 누구라도 어려움에 처해 찾게되면 언제라도 보살핌을 준다는 부처님이 관세음보살이다. 풍랑 많고 위험 많은 바닷가 절이다보니 어민들이 마음 의지하고 매달릴 수 있는 구원의 대상으로 관음보살을 많이 찾아 관음도량이 된 게 아닌지 모르겠다.

▲ 대웅전을 끼고 뒤로 돌아가면 대낮에도 전등을 밝혀야 하는 바위굴이 나온다. 이 굴을 지나야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과 관세음보살상을 참배할 수 있다.
ⓒ 임윤수
기암의 벼랑에 둥지처럼 들어선 절이다보니 마당은 넓지 않지만 일출을 보려는 관광객들과 새벽기도를 올리려는 불자들로 어느 대찰 못지 않게 북적대는 아침을 맞는 곳이 향일암이다. 대웅전 앞마당은 물론 경내 곳곳 발붙일 수 있는 곳이면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 깎아지른 벼랑에 관음전이 있다. 뒤에 보이는 바위 뒤가 금오산 정상이다.
ⓒ 임윤수

향일암을 한때는 '영구암(靈龜庵)'이라고도 하였다는데 그 흔적을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전각에 걸려있는 편액에서 볼 수 있다. 대웅전 앞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는 마치 거북이가 물이라도 먹으려는 듯 주둥이를 바다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목줄과 구갑(龜甲)처럼 둥그스레한 곡선을 따르다 보면 향일암이 선 곳이 거북의 몸체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금오산 모든 바위는 표면이 마치 거북이 등처럼 각이 지고 줄이 새겨져 있어 어떤 형태로든 거북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이란 십장생 중 하나며 전설이나 설화에 등장하는 영험한 동물이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향일암 마당엔 일년 내내 일출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대감과 불심을 가다듬고 서원하는 불자들의 간절한 마음이 풍랑처럼 넘실대고 있다. 일출 시간이 되니 돌난간에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 머리가 바다를 배경으로 하나 하나의 불두를 이루니 또 다른 볼거리다. 뒤쪽 난간에는 조그마한 자연석 거북상이 해를 향해 일렬로 늘어서 있다. 거북 등에는 어느 새 누군가가 염원하며 올렸을 동전이 탑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을 끼고 뒤로 돌아가면 대낮에도 전등을 밝혀두어야 하는 어두운 바위굴이 나온다. 이 굴을 지나야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과 관음보살상에 갈 수 있다. 이곳에서 보는 바다 풍경은 평온하고 아름다워 한 폭의 풍경화 같다.

 

 

 

 

 

 



 

▲ 망망대해 남해를 자애한 눈빛으로 바라보고계신 관세음보살부처님이다. 예전에는 뱃사람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바닷가 관세음보살부처님이었겠지만 지금은 전국 방방곡곡 불자들이 찾는 전국적 관세음보살부처님이다.
ⓒ 임윤수
멀리 대·소 횡간도가 놓여 있고 세존도와 이름을 다 알지 못하는 다도해의 많은 섬들도 남해가 펼친 하늘빛 캔버스에 멋지게 펼쳐져 있다. 띄엄띄엄 불 밝힌 고깃배들, 서있는 것은 서 있는 대로, 흰색 꼬리를 달고 달리는 배들은 그들 나름대로 생동감 있는 풍경화를 연출한다. 어디 그뿐이랴 딛고선 돌산섬의 연녹색 나무와 해안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환상의 앙상블을 이룬다.

▲ 금오산 한 끝은 마치 거북이가 물이라도 먹기 위해 머리를 바다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다.
ⓒ 임윤수
향일암을 품고 있는 금오산 정상은 향일암 경내에서 20분도 안 걸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향일암을 다녀온 사람들 중 정상에 오른 사람은 드물다. 향일암 일대의 절경을 제대로 즐기려면 다른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한번 올라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주문을 향해 내려가는 길, 콘크리트 포장도로 중간, 화장실이 선 곳 맞은편 축대 옆으로 '등산로'라 쓰인 팻말이 붙어 있는 곳이 정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 길로 접어들어 코에 닿을 듯한 급비탈길을 5분쯤 오르면 곧 시야가 툭 트이는 바위 위에 서게 된다.

향일암에서 미처 보지 못한 남해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곳에서 충분히 다 볼 수 있다. 향일암에서 미쳐 떨구지 못한 속세의 미련이 있고 채우지 못한 바람이 있다면 이곳에서 충분히 떨어뜨릴 수도 채울 수도 있다.

▲ 빠트리지 말고 금오산 정상엘 올라보라고 권하고 싶다. 남해의 진면목을 한 눈에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좋은 곳이다.
ⓒ 임윤수
요즘 같은 때, 농익은 봄날 아침을 맞기에 딱 좋은 곳으로 돌산섬 향일암을 기꺼이 소개하고 싶다. 일출쯤 못 보면 어떠랴. 마음놓고 마음 담아 올 하늘빛 바다와 관음의 도량이 거기에 있는 것을.

 

쌍홍문 들어서니 거기가 깨우침의 도량

걸망에 담아온 산사 이야기 (52) 금산 보리암

 

우리 나라 많은 산들은 풍수지리의 형기론이나 전설을 그 이름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대 임금이 산에 이름을 하사한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남해 일출의 대명사며 '깨달음을 얻어 도에 이르는 곳'이란 뜻의 '보리암'이 있는 '금산'은 그 산명을 태조 이성계로부터 하사 받았다.

▲ 쌍홍문에서 내려다보는 산하가 아름답다. 보는 이에 따라 여인의 눈웃음처럼 유혹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보이기도 하고 해골에 뻥 뚫린 공허한 구멍으로 보일 수도 있는 한 쌍의 굴은 높이가 7~8m쯤 된다.
ⓒ 임윤수
금산(錦山)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으로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이 산에 '보광사'라는 절을 창건하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 후 이성계가 이 산에서 1백일간 기도를 올리며 조선의 개국을 기원하게 되고, 태조의 뜻대로 조선이 개국되자 그 보답으로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한 데서 '금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마친 후 자신의 기도를 받아준 영험한 산에도 하사품으로 비단을 내릴 것이니 온 산을 비단으로 덮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 때 신하 중 한 사람이 이성계에게 이르기를 비단이란 것이 처음 두를 때는 아름답고 보기 좋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빛은 퇴색하고 나중에는 보기 흉한 꼴이 되기 쉬우니 세세손손 비단을 두른 듯 산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붙여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신하의 설명을 들은 이성계가 그 뜻을 받아들여 금산이란 산명을 하사하니 그 때부터 이 산을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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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굴 중 또 하나의 석문. 금산의 명치를 드나드는 관문이며 자연이 만들어 낸 보리암 일주문이 쌍홍문이다.
ⓒ 임윤수
이렇듯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가 그 이름을 하사할 정도로 기도발이 잘 선다는 유명한 산, 산과 바다 그리고 기암의 어우러짐이 얼마나 절묘한지를 보여주는 한려수도 남해의 금산 좋은 곳에도 어김없이 절이 있다.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영험과 자비로운 해수관음보살의 포근한 미소 도량으로 소문난 보리암이 바로 금산의 정맥자리에 들어선 절이다.

기본적으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종교가 불교지만 나약한 인간들이 어디 깨달음만 추구하랴. 그러기에 불교는 원을 구하고자 하는 구원의 종교라 해도 크게 반박할 여지는 없을 듯하다.

많은 불자들이 '성불'이라 일컫는 단계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려운 수행에 힘쓰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이루고자 하는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부처님이나 보살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 쏟아질 듯한 기암의 틈새에 보리암은 자리를 잡았다. 이 바위들은 보리암의 신장이며 금산의 혈맥이다.
ⓒ 임윤수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구원을 들어주는 부처님 가운데 가장 널리 그리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의지했던 부처님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으로 어려움에 처한 중생이 언제 어디서나 구원을 요청하면 어떠한 도움인들 다 들어준다고 한다.

그러기에 불자들은 평소는 물론 어려움에 처할 땐 소리를 내어 '관세음보살'을 연호하며 구원을 요청한다. 아기들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소리내어 찾듯 그냥 '관세음보살'하고 불러주기만 해도 구원의 손길을 내 준다는 부처님이 관세음보살이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도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음신앙이 형성, 퍼져 나가기 시작해 6세기말에는 신라, 백제 등 삼국 모두에 뿌리 깊은 신앙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관세음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삼국유사' 등에도 관음신앙에 대한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 깎아지를 듯한 절벽에 층층이 쌓아올린 극락전이 경이로우면서도 이질감을 준다. 급 비탈에 건물이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느라 그 층수가 높아진 듯 하다.
ⓒ 임윤수
우리 나라 관음신앙의 3대 성지, 즉 3대 기도도량은 남해 보리암,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강화도 보문사다.이들 3대 관음도량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모두 신비한 창건 설화와 많은 영험담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기에 요즘도 뭔가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자 진지한 마음으로 매달리듯 찾아가는 귀의처 같은 기도도량이다

보리암에 가는 길은 남해 상주면 상주해수욕장에서 올라가는 길과 앵강고개를 넘어 이동면 복곡저수지를 지나가는 길 두 군데다. 쉽게 가려면 복곡저수지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가면 아무래도 절 찾아가는 맛이 덜할 수밖에 없다.

▲ 상주 해수욕장과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수욕장이 마치 복주머니 형의 반구를 이루고 있다. 기와지붕의 가지런함이 마음조차 가지런하게 해준다.
ⓒ 임윤수
좀 힘이 들더라도 금산의 진미를 눈과 가슴에 담으려면 상주해수욕장 가는 길에 있는 매표소를 통해 올라가는 게 좋다. 매표소에서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잘 다듬어져 있지만 가파른 편이며 1시간 30분 가까이 올라야 한다.

오르는 길 중간중간 간지럼을 태우듯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며 내려다보는 남해바다 풍경은 일품이다. 쭉 뻗으면 닿을 듯한 남해의 청옥색 바다에서 하얀 파도가 연거푸 눈꺼풀을 끔벅대듯 바닷가로 밀려왔다 사라진다. 옥색 비단에 장식처럼 박힌 작은 섬들과 그 사이를 유영하는 고기배들이 자연 속에 꾸리는 삶의 한 장면을 매끈하게 그려낸다.

기암괴석의 산자락은 청보리 빛 해안에 그 끝을 담그고 있다. 펄렁이는 앞치마를 두른 듯 흔들리는 산하의 수목이 만들어 내는 짧은 떨림과 잎새의 물결들이 아름다운 율동을 만들고 있다. 이렇듯 기암절벽과 해안의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름답기로 유명한 금산은 바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명산 중 명산이다.

▲ 벼랑 끝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삼층석탑. 지금껏 보았던 어느 석탑보다 마음과 눈길이 끌린다.
ⓒ 임윤수
가파른 오르막길이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비단길을 걷는 촉감을 느낄 만큼 주변의 풍광이 좋은 곳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그렇게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보리암 직전에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을 통과하게 된다.

금산의 명치끝을 드나드는 관문이며 자연이 만들고 있는 보리암 일주문이다. 옛날엔 천양문이라 불렀으나 신라 초기 원효대사가 '두 굴이 쌍무지개 같다' 하여 쌍홍문(雙虹門)이라 부른데서 지금껏 그렇게 부른다 한다.

▲ 제 어느 곳에서고 '어머니'하고 외치면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기꺼이 내주던 어머니처럼 구원의 손길을 뻗쳐줄 자비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이다.
ⓒ 임윤수
보는 이에 따라 여인의 눈웃음처럼 유혹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보이기도 하고 해골에 뻥 뚫린 공허한 눈구멍으로 보일 수도 있는 한 쌍의 굴은 높이가 7~8m쯤 된다. 올라온 길도 더듬어 볼겸 걸음을 멈추고 굴속에서 뒤돌아보는 산하의 풍경이 아름답다.

멀리 상주해수욕장이 안고 있는 바닷물에선 쪽빛인 듯 청보리 빛인 듯 푸르스름한 방광이 일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있는 다도해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석가 세존이 금산에서 깨우침을 얻은 후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인도로 가기 위해 무념무상으로 하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하산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세존이 가까이 가자 갑자기 그 커다란 바위에 무지개 같은 구멍이 생기며 가는 길을 열어 주어 이 길을 통해 석가세존이 인도로 갔다는 전설이 간직된 석문이 바로 이 쌍홍문이다.

쌍홍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의 장군암과 사명대사의 행방을 알기 위해 보연, 보배, 보원 세 비구니 스님이 기도한 끝에 경남 거제 앞 바다 연화도에서 사명대사를 친견했다는 전설이 담겨있는 '음성굴'을 지나 몇 걸음 더 올라가면 보리암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사실 보리암에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경내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리고 기암과 수목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불상이며 법전이니 그냥 눈길 닿는 곳 모두 경내라 하고 싶지만 부득불 삼층석탑과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는 곳부터 자투리 평지가 조금씩 있으니 이곳부터를 경내라고 표현한다.

벼랑 끝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삼층석탑, 지금껏 보았던 어느 석탑보다 마음과 눈길이 끌린다. 이 탑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삼국시대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태비가 월지국에서 우리 나라로 돌아올 때 타고 오던 배의 밑바닥에 깔았던 돌로 신라 초에 탑을 세웠기에 신라삼층석탑이라고 한단다.

▲ 바스락거리는 이 산죽길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였다는 기도 터가 나온다.
ⓒ 임윤수
이 돌은 바다를 건너오며 모진 풍랑에 방향을 잃었는지, 아니면 자연의 흐름조차도 무시할 만큼 커다란 도력을 가졌는지 신기하게도 이 탑 앞에서는 나침반이 제구실을 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이 탑의 밑변 돌 위에서는 나침반 바늘이 정상으로 움직이지만 윗변 돌 위에서는 나침반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 기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확인을 해 보진 못했으나 탑석의 일부가 자철광처럼 자성(磁性)을 띤 광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삼층석탑 바로 앞에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금산의 온갖 형상의 기암과 파스텔 산색을 배경으로 서있는 보살상의 미소에는 어머니의 무한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곡선의 몸매에선 여인의 아름다움보다는 어머니의 강하고도 따사로운 모습이 느껴진다. 언제라도 '어머니!'하고 부르면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내주던 어머니처럼 구원의 손길을 뻗쳐줄 자비로운 모습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등 이런저런 전각들이 나온다. 종무소 앞에서 아래쪽으로 나 있는 대나무 사이의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 보라. 바스락거리는 산죽을 스치며 내려가다 보면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였던 장소에 그의 후손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볼 수 있다.

▲ 이성계가 기도를 하였던 자리에 후손인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이 보인다.
ⓒ 임윤수
보리암에는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한다. 하나는 의상대사와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원효대사가 방방곡곡 금수강산을 흐르듯 돌아다니다 온 산이 마치 방광(防光)하듯 빛나는 금산의 승경에 이끌려 입산하여 초가집을 짓고 수행을 한 보광사에서 창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인 허황옥 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장유선사가 세웠다고 하는 설화다. 장유선사는 허황옥 공주의 삼촌으로 지리산 칠불사에서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을 성불케 한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한 장유선사가 금산의 천태만상 변화에 매혹되어 금산에 터를 잡아 인도 아유타국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지금 보리암의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때의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이다.

▲ 산의 기암과 푸른 산 빛 그리고 웅크리듯 들어선 전각들이 한 폭의 풍경화다.
ⓒ 임윤수
금산 어느 곳에서 둘러봐도 망막에 맺히는 산하는 명화며 절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리암에서 구원도 얻고 어떠한 깨우침도 얻었으리라. 우둔한 필자조차도 금산 보리암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란 것을 알게되니 이 또한 세속의 삶에 아름다움을 느낀 작은 깨우침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쫓기듯 허겁지겁 오르느라 미처 눈길조차 마주하지 못했던 돌과 수목들이 한마디 하는 듯하다. '여보게 뭘 그리 서두르나. 어차피 인생은 뚜벅뚜벅 걷고있는 걸. 앞서려 서두르지 않으면 인생이 여여(如如)롭네'하고 말이다.

 

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5대 법당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53)-5대 적멸보궁

 

뭔가에 우선 순위를 매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순위 안에 들게 되면 가일층 관심을 받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기업의 규모를 5대니 10대로 구분하고 연말이면 10대나 20대로 그 뉴스의 사회적 비중과 관심을 판가름한다.

▲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을 받들어 기도하고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계단 앞쪽에 세워진 고색 창연한 전각의 전면에는 '金剛戒壇'이란 편액이 달려있고 동쪽 측면에 '大雄殿', 서쪽 측면에는 '寂滅寶宮'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다.
ⓒ 임윤수
국내에 있는 절들 숫자도 어림잡아 수만개는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불교종단협회에 등록된 25개 종단에는 많은 숫자의 교구본사와 또 교구본사에 소속된 적지 않은 수의 말사(末寺)가 있다. 게다가 종단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종단이나 개별적으로 불상을 모신 절들의 숫자를 포함해 그 수를 어림하면 그 정도는 될 거라 생각된다.

기업의 규모나 뉴스의 비중을 몇 대로 구분하듯 수많은 절 중에도 통상적으로 삼보사찰, 4대 관음도량, 5대 적멸보궁 등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산사를 찾아 혼탁한 심신에 자정의 기회를 갖는 것도 좋지만 비중 있게 분류되는 성지를 한번에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 동안 어느 매체에서 삼보사찰이나 4대 관음도량, 5대 적멸보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였던 적이 있었나 확인을 하진 못했지만 일년 가까이 산사를 소개해 온 입장에서 끝마무리로 이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 삼면에 각각의 편액을 달고 있는 전각 뒤쪽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통도사 금강계단이 있다.
ⓒ 임윤수
우선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 중인도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하였던 적멸도량을 의미하는 전각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은 불가에 있어 성지 중의 성지다. 부처님 생전에는 별도의 법당도 경전도 필요 없었을 거다. 부처님이 머물고 설법을 하면 그곳이 곳 법당이고 경전일 테니 말이다. 불교는 '스스로 깨우침'을 지향하는 종교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다 보니 심신과 눈을 통해 깨우침을 주고 심신의 의지처를 찾게되니 이런저런 형태의 불상과 불구가 등장하여 안내자며 수호자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야말로 최고의 신앙대상일 수밖에 없다.

▲ 적멸보궁에는 별도의 불상을 모시지 않고 방석만 준비되어 있다. 뒤쪽 어딘가에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정암사 적멸보궁 내부의 모습이다.
ⓒ 임윤수
한국에 사리신앙을 전파한 이는 자장율사다. 중국에 유학한 자장율사는 종남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세존의 의발(衣鉢)과 진신사리 100과를 얻어 귀국해 모셔 온 진신사리를 여러 곳에 나누어 봉안했다고 전하니 그곳이 바로 '5대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몸체에서 나온 불사리를 모신 곳이니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해 계신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 진신을 모신 것을 상징하는 곳이니 법당에는 별도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게 적멸보궁의 외형적 특징이다.

적멸보궁엔 불상이 별도로 모시지 않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적멸보궁을 들렸다 방석만 덩그러니 놓여진 걸 보고 조금 황당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적멸보궁 바깥쪽 어딘가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어 봉안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방석이 놓여진 뒤쪽에 창이 나 있는 경우 그 창을 통하여 사리탑이나 계단을 볼 수 있을 수도 있다.

▲ 정암사엔 칠보 중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은 수마노탑이 있고 이곳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 임윤수
우리 나라 많은 절들 중 적지 않은 곳에 적멸보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대 적멸보궁을 구분하여 말한다. 적멸보궁의 대표적 5대는 경남 양산에 있는 영취산 통도사, 강원도 평창에 있는 오대산 상원사의 중대 그리고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봉정암, 강원도 영월에 있는 사자산 법흥사, 강원도 정선에 있는 태백산 정암사를 말한다.

통도사는 일주문을 지나 안쪽 깊숙한 곳에 대형 금강계단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해 삼보사찰 중 불보종찰이 됐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을 받들어 기도하고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계단 앞쪽에 세워진 고색 창연한 전각의 전면에는 '金剛戒壇'이란 편액이 달려있고 동쪽 측면에 '大雄殿', 서쪽 측면에는 '寂滅寶宮'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다.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 말사인 상원사 중대의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의 주처'라는 생각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성지다. 이곳 적멸보궁의 불사리는 어디에 봉안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다만 보궁 뒤에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 해발 1224m지점에 있는 봉정암의 야경이다. 대 여섯 시간동안 어렵게 올라온 성지니 만큼 철야기도를 하느라 경내의 불이 밤새 꺼지지 않는다.
ⓒ 임윤수
설악산 해발 1224m의 고지대에 있는 봉정암 적멸보궁 역시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5층 석탑에 불사리를 안치했다. 여느 탑들처럼 별도의 기단석 없이 설악산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거암에 탑을 조성하고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라 한다.

영월에 있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은 대웅전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다. 보궁 뒤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다는 보탑이 서 있고, 그 옆에 자장율사가 도를 닦았다는 토굴도 있다.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에도 5대 적멸보궁 중 한 보궁이 있다. 자장율사가 현몽한 문수보살의 지혜를 받아 태백산맥 자락에 정암사를 창건하여 보궁과 함께 칠보 중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은 '수마노탑'이 천의봉 중턱에 있다.

▲ 별도의 기단석 없이 암반에 바로 세워진 특이한 형태의 5층 석탑에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 임윤수
봉정암과 정암사는 이미 소개한 적이 있으며 통도사는 삼보사찰에서 소개할 예정이기에 이번에는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와 오대산 상원사만을 소개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4교구본사 월정사 말사인 상원사(上院寺)는 한 때 진여원(眞如院)으로도 불렀다 한다. 쭉 곧은 전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월정사와 상원사 진입로는 많은 사람들이 산사 초입의 진미로 예찬한 바 있다.

한마디로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주변의 풍경을 묘사한 글을 읽으며 사진을 본다 해도 스치는 바람의 상큼함과 숲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진솔한 향긋함은 느낄 수 없다. 상원사 진입로에서 느끼게 되는 오묘한 행복감은 연출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자연만의 전유물이며 위대함이다. 오감에 감성을 더한 육감의 만족감과 행복감은 찾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땀과 발품의 보상이 분명한 곳이다.

▲ 전나무 숲을 지나 들어간 상원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면 그곳에도 적멸보궁있다.
ⓒ 임윤수
전나무 잎새를 헤집고 들어온 햇살들이 시선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그런 진입로를 걸어 들어가면 세조와 문수동자에 얽힌 설화로 유명한 상원사에 도착하게 된다. 상원사엘 가면 동종과 문수전 앞 고양이 석상을 꼭 봐야 한다. 그리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 총부리 앞에서도 의연하게 대항하던 스님들의 깊은 불심도 새겨볼 일이다.

창건사와 얽힌 설화는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6·25전쟁 중 전소의 위기에서 절을 지켜낸 스님들의 불심과 어느 장교의 슬기로운 처세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국군이 북으로 진격하며 절이 공비의 소굴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소각하려 했었다고 한다. 군인들이 절을 불에 불을 붙이려하자 한암 중원이란 스님은 법당에서 염불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리 전시지만 사람이 들어있는 곳에 그냥 불을 지를 수는 없어 스님을 밖으로 나오라고 말하니 스님께선 "그냥 불을 질러라. 당신들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 절을 지키는 것은 승려의 본분이다. 마지막까지 승려의 본분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하곤 염불을 계속했다고 한다.

▲ 불사리가 어디에 봉안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상원사 적멸보궁 뒤에는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다. 불탑 앞에 나란한 물병들은 신도들이 기도를 하는 동안 올려놓았다 하산할 때 가져갈 물들로 불심이 가득 녹아든 만큼 부처님의 커다란 가피가 기대 된다.
ⓒ 임윤수
스님의 말씀을 들은 장교는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한 후 법당 문짝만 떼어 소각한 뒤 돌아갔다고 한다. 상관 명령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며 스님의 불심을 지켜준 장교의 슬기로운 대처가 근대 상원사를 수호한 신장인 셈이니 지혜의 현신인 문수보살의 근대적 출현인 듯 싶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을 참배하기 위해서는 꽤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한다. 한두번 쉴 거라는 마음으로 가면 힘들 것도 없는 곳이다.

월정사는 5대 적멸보궁 중 상원사와 정암사 외에도 한곳의 적멸보궁이 있어 5대 적멸보궁의 절반 이상을 말사로 두고 있는데 그 중 한곳이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이기도 한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에 있는 사자산 법흥사다.

▲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을 찾은 신도들이 법당은 물론 앞마당까지 빼곡하게 메웠다. 험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으며 뛰어난 절경의 사자산은 산 자체가 법당이며 자연이 들려주는 이런 저런 소리가 온갖 법문이다.
ⓒ 임윤수
자장율사께서 마지막으로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당시에는 흥녕사라고 불렀었다 한다. 선문구산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 도량이었던 이곳은 소각과 중건을 반복하다 1902년 비구니 대원각 스님이 중건하며 절 이름도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절들은 좋은 산들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법흥사 역시 풍치 좋은 사자산에 자리를 잡았다. 절을 찾아 경전에 나오는 좋은 말들을 되뇌며 심신을 어르고 순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그냥 목적 없이 찾아도 좋은 곳이 좋은 산에 있는 좋은 산사니 그런 곳 중 한 곳이 바로 사자산 법흥사다.

▲ 적멸보궁 뒤쪽에는 사리탑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자장율사가 기도를 하였다는 토굴이 있다.
ⓒ 임윤수
고단한 삶을 영위하느라 뻘처럼 끈적거리며 늘어붙은 속세의 이런저런 혼잡함을 맑은 물에 헹구는 마음으로 법흥사를 찾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사계절 구분 없이 자아내는 주변의 아름다움과 불신의 가피가 인생의 맛을 맛깔스레 해 줄거라 확신한다.

 

어머니 품처럼 평안 주는 관세음보살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54) 한국 4대 관음기도도량

 

사람들은 깜짝 놀라거나 황당한 일을 당하면 엉겁결에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처럼 '엄마'나 '아버지'를 외친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있어 부모란 존재는 영원한 보호자며 안식처다.

▲ 인자한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해수관음보살상은 4대관음기도도량이 아니라도 많은 절에서 볼 수 있다.(사진은 남해 보리암 해수관음보살상)
ⓒ 임윤수
제대로 말을 배우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위험에 직면하거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할 때면 사람들은 어머니나 아버지를 찾으며 임종 직전에도 어머니나 아버지를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록 연로해져 물질적 보호자 역할은 다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신적 측면에서 부모는 영원한 보호자임에 분명하다.

한평생 살면서 도움을 받거나 보호를 받을 곳은 무지기수로 많다. 그것은 사회적 제도일 수도 있고 물리적 보호구나 시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평생동안 마음 편히 기댈 수 있고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대상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뭔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부를 수 있고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건 큰 힘이 되고 커다란 행운이다. 형을 둔 꼬마들은 거들어줄 형이 없는 아이들보다 알게 모르게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다. 든든한 배경의 부모나 친척이 있는 어른들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하면 똑같이 겪게 되는 황급함일지라도 보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걸 보게 된다.

비록 그때그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진 않을지라도 자신을 보호해주고 구원해 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은 당당한 행동으로, 의연한 대처로 자신감을 준다. 그러한 자신감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도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다.

불교 신자들 중 나이 지긋한 많은 분들은 뭔가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답답한 일이 생기면 입버릇처럼 '나무관세음보살'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걸 본 적이 있을 듯하다. 순간적인 어려움에 닥칠지라도 아이 때 '엄마!'를 외치듯 무의식 중 '관세음보살'을 찾는걸 보게된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엄마'를 외치듯 그렇게 외치는 '관세음보살'이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은 불교에 등장하는 많은 보살 중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이되면서 범어(梵語)의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vara)가 광세음(光世音), 관세음(觀世音), 관자재(觀自在),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그 의미가 번역되었다. 이것이 한국으로 도입되며 일찌감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 믿고 우러르는 대상이 되었으며 약칭하여 '관음보살'이라 부르게 되었다.

▲ 여수 돌산에 있는 향일암도 한국 4대 관음기도도량이며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향일암 종각-
ⓒ 임윤수
'천상천하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소리를 들으며 속세의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성자(聖者)'란 뜻이니 결국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그런 보살임을 알기에 위험에 처하거나 놀란 불자가 자신을 구원해줄 어머니처럼 관세음보살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절에 모셔진 여타의 불상 중 푸근하고 후덕한 모습으로 본래 중생이 구비하고 있는 불성을 의미하는 연꽃을 왼손에 들고 있는 불상을 보았다면 그 불상이 관세음보살상이다. 불상의 푸근함과 후덕함은 어머니의 인자하시고 자비로움을 닮았다.

또한 여럿의 머리나 여럿의 손을 가지고 있는 불상을 본적이 있다면 그 불상도 관세음보살을 형상화 한 불상으로 생각하면 될 듯싶다. 이러한 불상 중에는 머리가 11개 또는 33개나 달린 것도 있고 손 또한 그러하니 이러한 불상을 11면 관음보살상 또는 33면 관음보살상이라 부른다. 이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머리와 손을 가지고 있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상도 있다.

하기야 속세의 구석구석에서 찾고 부르는 소리에 감응을 주려면 어찌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귀로 다 감당하랴마는 그 의미를 강조한 것쯤으로 생각하면 될 듯싶다.

▲ 낙가산 큰법당인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고 관세음보살님도 모셔져있다.-보문사-
ⓒ 임윤수

관음신앙이 오래된 만큼 우리나라 많은 절에는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 있거나 최소한 협시불로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 수만의 절 중 4대 관음기도도량은 강원도 낙산사의 홍렴암과 강화도 보문사 그리고 이미 소개한바 있는 남해 보리암과 여수 향일암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4대 관음기도도량 모두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이런 점은 비록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인도나 중국도 마찬가지로, 바닷가에 주요 관음도량이 있다.

서해안 강화도 서쪽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를 찾아가는 길은 여느 사찰을 찾는 길과는 다르다. 우선 바다를 건너야하니 배를 타야하니 다르다. 게다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차를 가지고 들어가야 하니 차에 앉아 배를 타게되는 걸 경험하게 된다.

연륙교로 이어졌으나 강화도는 분명 섬이다. 그런 섬마을 강화도에 딸린 석모도(席毛島)를 가기 위해서는 두 곳의 선착장을 이용할 수 있다. 배를 이용해 10여분이면 닿을 수 있는 서해안 섬이기에 배를 넘나드는 파도나 새파란 바닷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신 손이라도 휘저으면 한 마리 걸릴 만큼 많은 갈매기 떼가 바다와 공중에서 입체적 마중과 배웅을 해준다.

▲ 사진 중 제일 앞쪽에 보이는 불상이 관세음보살이다. 뒤로 주불로 모시고 있는 아미타부처님과 협시불이 보인다.
ⓒ 임윤수
일렁이는 바닷물에 꽃잎처럼 떠 있는 갈매기들이 한가로워 보인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만큼 시간에 쫓기는 사람 중 짬을 내어 한적한 길을 드라이브 해 보고 싶다면 석모도를 귀띔해주고 싶다.

해안을 따라 빙 둘러 만들어진 도로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기껏 배를 통해 드나드는 몇몇 대의 차가 전부니 재촉하는 차도 없고 가던 길 멈추게 하는 신호등도 없으니 담아갈 마음만 있다면 한가로움은 얼마든지 있는 곳이다.

선착장에서 15분 정도를 가면 보문사에 도착한다.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회정대사가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석모도로 들어와 산세가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인도의 낙가산과 흡사함에 산 이름조차 '낙가산'이라 부르며 절을 창건하게 되니 그 절이 보문사다.

일주문을 들어서며 걷게되는 비탈진 진입로는 울창한 숲길이다. 숨 한 번 몰아 쉴 즈음이면 수령 4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 밑에 있는 감로수로 목을 축이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 가다듬은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몇 걸음 옮기다보면 범종이 달려있는 법음루와 윤장대를 지나 극락보전엘 들려 아미타부처님을 참배 할 수 있다.

▲ 보문사 석실 나한전엔 천 수 백년 전 어부가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는 23분의 나한님이 모셔져 있다.
ⓒ 임윤수
보문사도 여느 절들처럼 주법당인 극락보전이 있고 삼성각이 있으며 이런저런 전각들이 있다. 그럼에도 보문사엘 가면 석실로 되어있는 나한전과 다시 한 번 다리 품을 팔아야 하는 눈썹바위 아래 계신 마애관음좌상은 꼭 참배할 일이다.

대웅전 좌측, 장고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하소연하는 우여곡절의 푸념과 애절함을 담아 그런지 휘어지고 뒤틀리며 모질게 자라 600년의 세월이 뚝뚝 묻어나는 오래된 향나무에 반쯤은 가려진 석실법당이 있으니 이곳이 나한전이다.

2∼30평의 넓이가 되는 석실법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22 석조나한상이 모셔져 있는데 모셔진 나한상에 얽힌 설화가 있다. 보문사가 창건되던 635년 주변의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사람 모양의 돌덩이 22개가 한꺼번에 그물에 걸렸다고 한다. 돈벌이가 되는 고기가 아니고 엉뚱한 게 걸렸음에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를 바다에 버린다.

▲ 보문사 극락보전 우측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마애관음좌상이 있다. 모자챙인 듯 눈썹인 듯 햇빛과 비를 가려줄 천혜적 암반아래 미소진 눈처럼 둥글게 휘어진 바위에 좌상의 관음보살이 양각되어 있다.
ⓒ 임윤수
어부가 다시 그물을 쳤는데 또 다시 바로 그 돌덩이들이 걸리게 되니 어부는 또 다시 그 돌덩이를 바다에 버리고 연거푸 그물에 돌만 걸리자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낮에 그물에 걸렸던 돌들은 천축국에서 보내온 귀중한 불상인데 어찌하여 이를 모두 버렸느냐'질책하며 '날이 밝으면 다시 그곳에 가 불상을 건져 명산에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다음 날 불상을 건져 올린 어부는 꿈속에서 노승이 당부한 대로 낙가산으로 불상을 옮기던 중 현재의 보문사 석굴 앞에 이르니 갑자기 불상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옮길 수 없었다고 한다. 어부가 주변을 살펴보니 불상을 모시기에 안성맞춤인 석굴이 있어 이 석굴이야말로 불상을 안치할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해 굴 안에 단을 만들어 바다에서 건져낸 불상을 모시니 석실법당 나한전과 나한 불상들이다.

▲ 보문사 관음보살님이 언제고 눈길을 떼지 않고 있을 작은 섬들과 바다가 내려다 보듯 보인다.
ⓒ 임윤수
석실에 모셔진 나한석상은 섬세하지 않아 투박한 할아버지의 까끌까끌한 손맛을 느끼게 한다. 섬기며 볼수록 불심을 깊게 해줄 그런 묵직함이 있다. 현실도피의 얄팍한 기도가 아니라면 믿음을 두텁게 쌓아 마음을 평온하게 해줄 그런 뭔가가 느껴진다.

나한전을 나와 극락보전 오른쪽으로 나있는 가지런한 대리석 계단을 오르면 그 꼭대기에 마애관음좌상이 있다. 많은 불자들의 정성과 불심이 보시금 되고 기도가 되어 하나 하나의 초석이 되고 디딤돌이 되어 완성된 계단이련만 육신의 무게를 지고 올라야 하는 300여 계단은 만만치 않다.

하나, 둘, 셋… 계단 숫자를 세며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보니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얽혔던 잡념들이 사라진다. 모자챙이라 할까 눈썹이라 할까? 세워진 반달처럼 안쪽으로 약간 굽어진 암벽에 앉아 계신 관음보살님이 각인되어 있다. 마애불을 볼 때마다 느끼는 석공의 불심 같은 것이지만 보문사 마애불은 지금껏 느꼈던 불심과는 또 다른, 그런 정성과 기도하는 마음의 불심이 느껴진다.

▲ 동해 일출 명소 중 한곳인 이곳 의상대에서 좌측을 보면 해안가 벼랑에 들어선 홍련암이 보인다.
ⓒ 임윤수
관음보살님을 참배하고 몸을 돌리니 눈앞이 바다다. 띄엄띄엄 섬들이 보이고 고깃배들이 보인다. 들녘과 바다 그 어느 곳에서라도 '관세음보살' 하고 외치면 다 들리고 구원의 손길을 내 줄 수 있는 장소인 듯싶다.

마애관음좌상이라도 된 듯 펼쳐진 바다와 산하를 보고 있노라니 '아~ 이래서 이곳이 한국의 4대 관음기도도량 중 한 곳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인다. 강화로 나오는 배에서 석모도를 바라보니 문득 석모도(席毛島)는 석가모니 모태의 섬을 의미하는 석모도(釋母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해를 관자재하고 계신 관음보살님이 보리암과 향일암에 계시고, 서해를 관자재하고 계신 보살님이 석모도 보문사에 계신다면 동해를 관자재하고 계신 관음보살님은 낙산사 산내암자인 홍련암에 계신다.

▲ 바람이라도 불어 파도가 거세지면 어찌될까 걱정될 만큼 바닷가에 자리를 잡았다. 법당 밑이 바다이기에 홍련암은 바다에 떠 있는 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 임윤수
홍련암(紅蓮庵)은 동해의 해돋이 명소로 잘 알려진 의상대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홍련암은 해안 절경에 얄밉도록 조화롭게 피어난 홍련빛 가람이다. 바람 불어 파도라도 높게 일면 어찌어찌 잠기지 않을까 걱정되고 쪽배처럼 두둥실 떠가지 않을까 염려되는 그런 형태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하기 전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던 석굴 바로 그 장소로 낙산사의 근간이 되는 성지다. 경주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의상대사는 기도에 정진하던 어느 날 푸른 새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흔치 않은 새를 보게 된 대사는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감을 범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하여 굴 앞에서 7일 동안 철야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7일간의 기도가 끝나던 날 바다 위에 붉은 연꽃이 떠오르고 그 위에 관음보살이 출현하니 드디어 의상대사는 관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사는 그 자리에 암자를 세워 '홍련암'이라 이름 짓고, 푸른 새가 들어갔던 굴을 '관음굴' 이라고 부르니 그 이름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 홍련암 법당에 뚫린 구멍으로 들여다 본 바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라 바다가 들려주는 전설과 법문도 들릴 듯 하다. 부서지는 파도에 마음 실어 바다로 띄우고 싶다.
ⓒ 임윤수
해안의 절경과 어우러지는 홍련암과 낙산사 주변도 일품이지만 홍련암엘 가면 법당마루바닥을 잘 살펴볼 일이다. 마루바닥에는 길이 8cm 정도의 정사각형 형태의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을 통하여 내려다보면 절벽과 파도가 만들어내는 흰색 포말의 경이로움을 볼 수 있다. 장난기 섞인 마음에 낚시라도 드리우면 마음 가득 바다 속 인어에게 연민의 마음도 전할 수 있을 듯하다.

의상대사가 이 절을 창건한 이래 수많은 보수공사가 있었음에도 이 구멍만은 일관되게 유지되어 언제고 존재하는 홍련암의 상징적 징표지만 구멍의 존재를 알지 못해 보지 못한다면 분명 보았으나 보지 못한 홍련암일 뿐이다.

소금을 담고 있는 해풍이 목조건물에 해롭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옛 선조들이 가람의 훼손을 감수하며 법당 마루에 구멍을 뚫은 건 구멍 밑 동굴에 상주한다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라는 게 일반적 주장이다.

또한 의상 대사에게 여의주를 바쳤다는 동해에 살고 있는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다는 설도 있다. 그럼에도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해조음(파도소리)를 관(觀)함으로 깨달음을 얻는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을 위한 장치라고 밝힌, 원광대 동양종교학과 조용헌 교수가 제기한 '수행을 돕기 위한 장치'라는 설명이다.

자칫 흥밋거리로 생각 할 수 있는 법당의 작은 구멍 하나조차도 염불삼매에 들기 위한 도구며 환경인 셈이다.

살며 살아가며 심신을 놓고 싶을 정도로 힘들거나 쉬고 싶을 때는 어머니를 부르듯 관세음보살을 불러 보라. 입을 통해 쏟아지는 한낱 울림의 관세음보살이 아니고 간절한 마음이 담기고 믿음에서 우러나는 '관세음보살'이라면 분명 어떤 형태로든 구원을 주리라 믿는다. 설사 그 구원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평안이며 행복감일지라도 말이다.

 

또 하나의 보물은 바로 '님'이십니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 55, 마지막회

 

한국불교 3보사찰 예전처럼 흔하진 않지만 아직도 요즘처럼 무더위가 시작될 때 한적한 시골에 가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따각거리며 장기 두는 걸 구경할 수 있다. 평소 할아버지의 근엄함은 어디로 갔는지 할아버지들끼리 물려달라 안 된다며 티격태격 말싸움이라도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절에서 보게되는 세 개의 문양이나 조형물들은 부처님과 가르침 그리고 스님을 삼보로 의미한 것이다.
ⓒ 임윤수
그런 장기판은 5일 장터 한갓진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장기 두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승패의 당사자가 아닌 훈수꾼일 때는 야바위꾼의 꼼수조차 척척 읽어 내던 사람이 막상 자신이 장기를 두게 되면 훤히 보일만한 수도 보지 못해 낭패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분명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서는 자리에 따라 장기실력이 천차만별이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땐 누구나 시야가 넓어지고 판단력도 명료해진다. 그러나 자신이 이해에 얽매이게 되면 판단력도 불분명해질 뿐 아니라 소소한 것에 얽매여 진작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상은 비단 장기판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친구나 가깝게 지내던 이웃이 어떤 고민거리를 상담해 오면 아주 이성적인 지혜의 결단에 넉넉하다고 해야할 여유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막상 본인이 그런 고민의 주인공이 되면 인사불성이 되어 이해는커녕 스스로를 옭아매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 영축총림 통도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며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곳이니 답답한 속세를 벗어날 도통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 임윤수

이런 현상은 까탈처럼 따라붙는 작은 이기를 버리지 못해 번번이 빠져드는 어리석음의 늪 때문이지만 누구도 쉽게 그 늪에 다시는 빠지지 않을 거란 호언을 하진 못할 듯하다. 언제나 정말 뚜벅뚜벅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산사를 다녀오리라 다짐하며 집을 나서지만 몸뚱이만 뚜벅뚜벅 게으름을 피울 뿐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종종걸음으로 조급증은 버릴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산사에 들러 단청문양을 보면 어렵지 않게 세 개의 점이 그려졌거나 조각된 것을 보게 된다. 절에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뜻이 있다. 그러니 그 점의 숫자인 3에도 무슨 뜻이 있을 듯하다.

몸을 낮추어 하게되는 절도 때와 장소에 그 수가 달라진다. 생존해 계신 부모님이나 어른들께 절을 올릴 때는 한 번 절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제사를 지낼 때나 상가에서처럼 돌아가신 분들께 절을 올릴 때는 두 번을 절하게 된다. 그런데 절에 가서 절을 하게되면 최소한 세 번은 해야 한다.

▲ 수십인지 수백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부도가 군을 이루고 있다. 검버섯 핀 할아버지 피부처럼 이끼를 안고 있는 부도도 보이지만 아직 그 숨결이 들릴 만큼 젊은이 피부처럼 뽀얗고 광택 나는 새 부도나 비석도 보인다.
ⓒ 임윤수

한 번쯤 '절에선 왜 절을 세 번이나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사람도 적지 않을 듯하다. 절에서 하는 세 번의 절 중 한번은 부처님(佛)께 올리는 절이며 또 한 번은 부처님의 커다란 가르침(法)에 대한 절이고 나머지 한 번은 스님(僧)께 드리는 절이다.

불교와 인연이 있던 없던 '삼보사찰'이란 말을 한번쯤은 들어봤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삼보란 불교에서 보배롭게 여긴다는 세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세 번의 절에서 알 수 있듯 부처님과 가르침 그리고 스님이 삼보로 꼽히는 불교의 세 가지 보물이다. 그러기에 절에 있는 건축물이나 문양에서 삼보를 의미하는 세 개의 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되는 것이다.

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야단법석에 빠트리지 않고 등장하는 의식 중 하나가 '삼귀의례'다. 삼귀의란 부처님과 가르침 그리고 스님께 내 모든 것을 다해 따르며 귀의하겠다는 예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3이란 숫자도 삼보를 의미한다.

통도사는 한국 불교 세 보물 중 으뜸

▲ 돌담길을 걷듯 그렇게 걸어도 좋고 숲길을 산책하듯 그렇게 걸어도 좋을 그런 곳이다. 원체 유명한 곳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왕래를 하지만 어느 곳이고 들여다보면 마음 한 자락 걸치고 쉴만한 안락함이 있는 곳이다.
ⓒ 임윤수

반복되는 얘기지만 한국에는 수만 개의 절이 있다. 그 수만 개의 절 중 한국불교의 세 보물이라 할 삼보사찰로 명명된 절이 있다. 경남 양산에 있는 영축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이며 합천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팔만대장경이 있는 법보사찰이다. 그리고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는 수많은 국사(國師)와 대덕고승을 배출한 승보사찰이니 이 세 사찰을 일컬어 삼보사찰이라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출가자들이 수행하는 공간인 사찰 어느 곳이 귀하지 않고 청정도량이 아닌 곳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한국불교의 세 보물로 불리는 곳이 이곳들이니 한국불교의 세 보물 중 그 첫 번째가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사찰 통도사다.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불교에서 통도사가 차지하는 중요성이나 역사성에 앞서 우선 그 규모에 놀란다. 매표소부터 시작되는 아름드리 소나무 그늘과 길옆 바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빛 바랜 역사책 한 페이지를 보는 듯하다.

▲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있는 팔만대장경이 있기에 해인사는 법보사찰이다. 일주문을 지나 곧장 몇몇 문을 더 지나야 주법당인 대광보전 앞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 임윤수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한 곳으로 유명한 인도의 영축산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산이기도 하지만 산세 또한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 해서 통도사라는 절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니 부처님을 모신 성지로 손색이 없는 모양이다.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 계곡은 절 골이다. 입구부터 시작된 산 내 암자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다. 비록 속가의 촌락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지는 않지만 부처님을 뵙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닫을 수 있을 만큼 거리에 20여 암자들이 수행공간으로 기도처로 들어서 있다. 통도사를 목적으로 하던 영축산을 둘러보겠다는 마음으로 가던 산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맞게되는 곳이 통도사다.

일주문을 지나며 오른쪽으로 맞게되는 부도군이 통도사의 역사와 무게를 말해 준다. 수십인지 수백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부도가 군을 이루고 있다. 크기와 형태도 여러 가지지만 부도에서 흘러온 세월을 느끼게 된다.

처음엔 또렷하였을 조각이 불분명할 만큼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을 부도가 있다. 검버섯 핀 할아버지 피부처럼 이끼를 안고 있는 부도도 보이지만 아직 그 숨결이 들릴 만큼 젊은이 피부처럼 뽀얗고 광택 나는 새 부도나 비석도 보인다.

▲ 대광보전 뒤쪽에 있는 장경각에 들어서 뒤돌아 본 광경이다. 사진으로 보이는 좌·우측 나무창살 안쪽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언뜻 그냥 건물인 듯 하지만 목판이 상하지 않게 숯과 소금을 이용해 현대 과학을 능가하는 고승들의 지혜가 담겨진 산물이다.
ⓒ 임윤수

그런 부도군과 불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사방에 둘러선 전각에서 전설이 쏟아지고 백발수염 성성한 도인들의 좌담소리가 들릴 듯 하다. 전각들마다 묵직한 뭔가가 있다. 여느 절들 특정 전각에서 느끼던 그런 고색이 통도사엔 만연해 있다. 어떤 석수장이도 어떤 목수도 흉내내지 못할, 오로지 세월만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오묘함과 편안함을 펼쳐내는 곳이 통도사다.

여느 산사처럼 이 전각 저 전각 다 들려 참배라도 하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려야 할 듯하다. 그렇게 웅장함에도 가지런함이 있다. 돌담길을 걷듯 그렇게 걸어도 좋고 숲길을 산책하듯 그렇게 걸어도 좋을 그런 곳이다. 원체 유명한 곳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왕래를 하지만 어느 곳이고 들여다보면 마음 한 자락 걸치고 쉴만한 안락함이 있는 곳이다.

통도사는 그 자체 가람의 크기와 전각의 수, 수많은 탑과 비석, 산 내에 20여개의 암자를 거느렸다는 규모도 규모지만 이런저런 상징성 또한 가히 한국 불교 으뜸이다. 우선 삼보사찰 중 제일이라 할 불보사찰이며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5대 총림(叢林) 중 하나며 제 15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 일희일비하는 인간들에게 뭔가를 깨우쳐 주고 108번뇌를 벗어난 듯 조금도 변함없이 유구한 세월동안 부처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목판 대장경이 마치 서고에 진열된 장서처럼 보인다. 하나 하나에 지혜와 커다란 가르침이 담겼으련만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니 답답할 분이다. 어찌 보면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것을 담을 마음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 임윤수

불보사찰이란 이미 언급했듯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였기에 일컫는 말이며 총림(叢林)이란 나무가 우거진 수풀에 비유할 만큼 승려와 속인들이 모여드는 도량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승려들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그리고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총림이라고 하며 삼보사찰과 백양사와 수덕사가 한국 5대 총림이다.

부처님 정각의 세계, 해인사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한 법보사찰 해인사는 경남 합천에 있는 가야산 줄기에 있다. 다른 절들도 그 이름에 고매한 뜻이 있고 인연이 담겨져 있지만 특히 해인사는 그 이름 '해인'이라는 낱말에 창건의 참뜻이 농축되어 있다고 한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해인사를 찾는다는 건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방문하게 된다는 것이니 열려진 법당이며 깨달음의 도량에 심신을 들여놓게 되는 거다. 부처님을 모셔놓은 전각을 법당(法堂)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법당은 곧 '가르침을 받아 깨우침을 얻는 집'이란 뜻이니 어리석음의 늪에 빠지지 않거나 빠져 나올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곳이다.

▲ '승보종찰조계산송광사'가 암각 된 입석을 지나 송광사로 들어간다. 송광이란 절 이름이 부처님가르침을 널리 펼칠 18분의 큰스님을 의미하던, 솔개의 사투리인 '솔갱이'에서 유래되었던 당대는 물론 후세 대대로 추앙되는 큰스님을 유달리 많이 배출한 송광사야말로 법당중 법당인 듯하다.
ⓒ 임윤수
가르침을 말하는 '법(法)'이란 배운다는 의미인 학(學)과도 상관관계에 있을 테니 법당이나 학당이나 배워 깨우치는 전당인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가야산 줄기를 따라 해인사로 들어가다 보면 길다란 계곡과 함께 한다. 오래된 절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의 분위기에서 모자랄 게 하나도 없는 게 해인사 진입로다.

주차장에 차를 놓고 한참을 올라가면 영지를 우측으로 끼고 일주문을 들어서 너댓 문을 지나야 주법당인 대광보전 앞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이 법당 뒤로 돌아가면 아주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야 하는데 이 계단을 올라서면 그곳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이다. 빙 둘러 장방형 미음(ㅁ) 자 구조를 하고 있는 장경각 안에는 유구한 세월동안 부처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목판의 팔만대장경이 가지런하게 보관되어 있다.

통풍을 위해 만들어 졌을 나무 창살 사이로 꽂혀있는 대장경이 보인다. 그 오랫동안 목판이 별다른 자연적 손상 없이 대장경을 보관할 수 있었던 건 현대의 기술과 과학성을 능가하는 선조들의 놀랄만한 지혜의 산물임에 분명하다.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니 그 뜻을 알지 못해 깨우침을 얻을 리 없건만 나무창살 사이로 보이는 대장경에서 분명 뭔가를 얻게 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가슴에 와 닿는 무언가는 삭막한 세대를 사느라 각박해진 마음에 온기를 주고 잠시 잃어버렸던, 동심에서 느끼던 그런 삼매에 들게 하니 이 또한 해인삼매의 또 다른 삼매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많은 큰스님 배출한 송광사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승보사찰 송광사엘 가면 항상 가슴이 두근거린다. '송(松)'이 곧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한다고 하나 지금껏 16분의 큰스님만 일컬어지고 있으니 후세에 18에 포함된 큰스님을 뵙게 될지도 모른다는 몽상가 같은 기대감 때문이다.

▲ 한때 구도의 길을 걷기 위해 찾아든 수행자들의 수를 어림할 수 있는 구유가 보인다.
ⓒ 임윤수

송광이란 절 이름이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펼칠 18분의 큰스님을 의미하던, 솔개의 사투리인 '솔갱이'에서 유래되었던 당대는 물론 후세 대대로 추앙되는 큰스님을 유달리 많이 배출한 송광사야말로 법당 중의 법당인 듯하다.

집안에 가풍이 있고 학교에 가풍이 있듯 절 또한 나름대로 어떠한 풍이 있을 테니 송광사의 그 풍이야말로 법을 빌어 깨우침의 반야에 들게 하는 승가의 진풍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역대 수많은 고승들이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모여든 몇몇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송광사니 고승들의 큰 뜻과 흔적이 담겨진 곳이기도 하다.

한 때 밥통으로 사용되었다는 엄청난 크기의 구유에서 송광사서 구도의 길을 찾겠다 모여들었던 스님들의 숫자와 규모를 어림할 수 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송광사 또한 삼보에 걸맞는 뭔가가 있다.

▲ '승보전' 여느 절에서 보지 못했던 전각이다. 송광사가 승보사찰임을 알게 하는 상징적 전각인 듯 하다.
ⓒ 임윤수

지금껏 둘러 본 600여 곳의 절 중에서 삼보사찰은 불교만의 세 보물이 아니라 한국의 보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한국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보물은 역시 처사니 보살로 불리는 불자며 국민이다. 지금껏 이 글을 읽어 주신 님께서도 불가의 보물이며 한국의 보물이라 생각된다.

<뚜벅뚜벅 산사기행>을 마치며

작년 6월 5일 '일년쯤'이란 기간을 약속하고 '추억 담아올 걸망 하나 만들다'로 시작한 <뚜벅뚜벅 산사기행이 어느 덧 그 일년이 되었습니다. 연재를 신청하며 약속해야 했던 '주 1회 이상 새 기사가 업데이트 돼야 합니다'라는 사항도 지키려 나름대로 안간힘을 썼지만 하루 이틀쯤 늦게 요일을 변경해 연재를 하였던 적도 있습니다.

좋은 산 좋은 곳이면 어김없이 있는 산사이기에 마음 편히 다가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는데 몸만 뚜벅거렸지 마음은 역시 종종걸음을 친 듯합니다. 땀 뻘뻘 흘리며 찾아간 절에서 벌컥벌컥 마시던 약수의 달콤함이 마음을 맑게 해 주었습니다. 바람결에 뎅그렁거리던 처마 끝 풍경소리가 붕붕거리던 마음을 차분하게 앉혀 주었습니다.

제가 일년 동안 산사에서 느꼈던 마음의 평온함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도 그렇지만 주체하기 어렵게 기쁠 때도 산사를 찾아 보십시오. 가장 듣고 싶은 위로의 말과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산사 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가 그 위로와 칭찬을 받아들일 만큼 아주 적게라도 마음만 열어준다면 말입니다.

제게 꼭 보여주고 싶은 산사가 있으면 소개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제 마음에 있는 또 하나의 보물은 제 연재를 읽어 주신 바로 님이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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