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선운산 선운사

醉月 2011. 6. 11. 11:15

선운사에 가서 육자배기 가락에 젓노라니…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입니다. 아직 가을이 다 익지도 않았는데 무슨 동백꽃 타령이냐고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선운사는 단풍도 채 들지 않았습니다. 절정의 녹음이 가시긴 했지만 아직도 나뭇잎들은 푸르렀습니다. 그렇지만 맹렬히 햇빛을 탐하지도 않더군요. 그 모습, 보기에 좋았습니다.

공연한 가정이긴 합니다만, 만약 시인이 동백꽃이 한창일 때 선운사를 찾았더라면 어떤 시편을 남겼을까요. 아니, 물음을 바꾸겠습니다. 선운사 옆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이 동백꽃 핀 선운사를 한두 번 가본 게 아닐 텐데, 왜 그에 관한 시는 남기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시인은 온 산자락에 동백꽃 물이 들고 있을 때 선운사를 찾아놓고도, 차마 그곳으로 가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서 ‘살아간다는 일의 처연한 꽃다움’을 먼저 봤기 때문에. 아니면 피지 않은지 뻔히 알면서도 막걸리 생각에 꽃 핑계를 댄 것인지도 모르지요. 워낙 시인이라는 사람들은 ‘딴청 부리기’의 명수들이니까요. 어쨌든 시인은 동백꽃을 보지 못했고, 덕분에 우리는 명편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시인과 꽃의 엇갈림이 우리에게 안긴 시는 행운의 선물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독(毒)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백꽃이 선운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색안경이 돼 버렸으니까요. 거기에 가수 송창식씨의 노래까지 더해지면서 선운사는 가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동백꽃 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지로 선점돼 버린 사물일수록 실체에 다가서기가 힘든 법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禪師)는 온갖 이미지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늘의 우리를 위해 이런 말을 남겼나 봅니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야보 도천(冶父 道川, 중국 송, 1127~1130) 스님의 이 말은, 성철 스님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지요. 

또 어쩌면 서정주 시인은 문자의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으로 에둘러 동백을 노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동백꽃에 선점된 선운사의 이미지가 시인의 탓은 아닙니다. 그것을 덧씌워 보는 우리들의 타성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자명해집니다. 우리 각자가 나름의 목소리로 육자배기를 부르는 것입니다.

선운사를 품에 안은 선운산(도솔산이라고도 불리나, 전북 도립공원으로서 불리는 이름이 선운산이므로 널리 쓰이는 쪽을 따름)은 내장산 어름에서 부안의 곰소만쪽으로 뻗어나간 호남정맥의 가지줄기 끝에 맺힌 산입니다. 지도를 펴고 보면 파도 소리가 귀에 닿을 듯한 곳입니다. 그러나 막상 절로 들어가 보면 첩첩 산 가운데입니다. 정상의 해발고도가 336m에 불과하지만 평지가 거의 해수면에 가까우므로 수직적 상승감은 숫자가 주는 선입견을 보기 좋게 허물어 버립니다.

주의 산세와 담백담대한 전각들 잘 어울려

일주문에서부터 구릉 같은 산자락은 서서히 키를 높여 천마봉으로 오르고, 숲길은 아름드리 단풍나무와 느티나무로 깊어집니다. 길 옆으로 잔잔히 흐르는 계곡물 위로 또 하나의 숲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숲 그림자로 하여 계곡도 깊어집니다.

500m쯤 계류를 거슬러 오르면 다리 하나가 눈에 띄고 오른쪽으로 누각 형식의 문이 보입니다. 사천왕문입니다. 곧장 들면 긴 네모꼴의 무뚝뚝한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습니다. 기둥 사이 판문이 닫혀 있어 그 너머를 보여주는 데도 인색합니다. 만세루(萬歲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누(樓)라는 이름과 달리 단층 건물입니다.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돌아들면 천왕문에서부터 일직선 축으로 만세루와 이어지는 대웅보전(보물 제290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왜 누각도 아니면서 누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지 어렴풋이 의문이 풀립니다. 북쪽으로 산을 등에 두고 동서로 길게 배치된 사역은, 이 건물이 아니었다면 대웅보전을 정점으로 정리되지 않고 휑뎅그렁해 보일 정도였을 것입니다. 

 


현재 선운사의 가람배치는 간단합니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서쪽 옆으로 영산전, 영산전 뒤로는 팔상전과 산신각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영산전 옆 수직 방향으로는 명부전과 향운전(요사)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대웅보전 동쪽 옆으로는 관음전이 있고, 동쪽 끝에는 담장을 두른 별원 형식으로 최근에 신축한 유물전시관과 3동의 요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가람 배치는 1990년 이전 모습과 아주 다릅니다. 특히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에 수평축을 벗어나 약간 삐딱하게 서 있던 요사채가 사라지고, 대웅보전 서쪽에 관음전이 새로 들어서면서 밋밋하게 펼쳐진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김봉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선운사 마당은 동서로 길쭉하다. 자칫하면 휑하고 멍청한 마당이 되기 쉬웠으나, 약간 돌아앉은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의) 노전채가 긴 마당을 둘로 쪼개어 한 부분은 대웅전에, 다른 한 부분은 영산전에 속하도록 구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언젠가 노전채를 철거하고 말아 선운사 마당은 염려대로 비례가 맞지 않는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건축 전문가의 시각과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서 필요에 따른 가람 정비가 필요한 입장이 일치할 수만은 없겠지요. 그런데 건축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이것과는 다른 두 가지 사실이 더 크게 들어왔습니다.

첫째는 요사를 제외한 모든 전각이 맛배지붕이라는 점입니다. 두루뭉술한 주위의 산세와 전각들의 담백하고도 담대한 맛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만세루의 자연미입니다.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적지 않은 규모인데, 기둥들은 제각각이고 심지어 위아래가 현저히 다른 굵기의 나무를 잇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자연미는 우리나라 사찰 어디에서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를 자세히 보면 그 검박함과 대담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갈아 끼운 대들보 하나를 제외하고는 종보와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곧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 같이 땔감으로나 쓰면 좋을 법한 것들입니다. 특히 가운데 칸(어칸)의 대들보 위에 놓인 종보는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을 사용하고 그 끝에 용머리를 끼웠습니다. 당시 억불의 시대 상황과 목재 수급의 어려움에 따른 결과로만 해석하기에는, 그 익살과 해학의 품격이 구름을 올라탄 듯 자재롭습니다. 한없는 겸손이라고 표현해도,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이라고 표현해도 이 건물에 대해서는 결례가 될 것 같습니다.

영산전 뒤에서부터 산기슭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동백 숲(천연기념물 제184호)에 대해서는 어설픈 언급을 삼가겠습니다. 다만, 자연림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그 숲(5천여 평 3천여 그루)이 사실은 500여 년 전 가람을 중창하면서 인공으로 조성했고, 그 까닭도 산불에 대비한 것이었다는 것만 보탭니다. 사중에 전해오는 얘기라면서 문화재 해설사 강복남씨가 귀띔을 해 주었습니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보행자 탐방로도 우리의 산과 절이 우리에게 안겨 준 커다란 축복입니다. 도솔암 위 낙조대와 천마봉까지 욕심을 내도 4km 남짓으로 왕복 2시간 반이면 족합니다. 가는 길에 장사송(천년기념물 제354호)과 진흥굴도 둘러볼 수 있어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꽃 진 자리에서 돋아나기 시작하는 길가의 꽃무릇 새싹들도 정답게 길동무를 해 줍니다.

진흥굴은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수도하였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입니다. 선운사의 초창자가 진흥왕이라는 창건 설화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백제 땅에 신라왕이 출가했다는 건 믿기 어렵습니다. 현재 절에서 밝히는 바로는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 선사와 신라의 국사이자 진흥왕의 스승인 의운 국사가 힘을 모아 창건했다고 합니다.

천마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봅니다. 서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눈 아래로는 벼랑에 새긴 도솔암의 미륵부처님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엇갈리는 운명, 혹은 허방딛기가 잦아서 상처 많은 인생들에게는, 가을이야말로 잔인한 계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서 동백꽃을 본 미당처럼, 내가 사는 이곳을 미륵의 땅으로 여기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미당의 ‘무등(無等)을 보며’ 첫행)고 호기를 부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운사 주변 볼거리 먹을거리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선운사는 한층 가까워졌다. 최근에는 경상도쪽 여행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열차를 이용하려면 정읍역에서 하루 4번 있는 선운사행 직행버스를 타면 되고(50분 소요), 버스를 이용하려면 고창에서 선운사행 직행버스를 타면 된다(30분 소요).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서해안 고속도로는 선운사 나들목으로 나오면 되고, 호남고속도로는 정읍 나들목에서 22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선운사 가는 길을 만날 수 있다.

먹을거리

고창 사람들이 꼽는 선운사 3대 미각이 있다. 풍천장어, 복분자술, 녹차가 그것이다. 앞의 둘은 절집 앞에서 민망한 음식이긴 하지만 워낙 오래 전부터 유명하여 하나의 문화 상품이 된 느낌이다. 그나마 녹차가 있어 식탐의 흉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선운사 일대의 모든 식당에서는 풍천장어와 복분자를 판다. 딱히 특정 식당을 소개하는 것이 오히려 허물이 될 것 같다. 일주문 앞 집단시설지구의 식당에서는 산채정식이나 두부 요리 같은 다양한 음식을 메뉴에 올리고 있다.

집단시설지구 초입에 있는 농산물 판매센터에는 요긴한 우리 농산품들이 다양한 포장 단위로 갖춰져 있어 선물을 준비하기에도 좋다.

미당시문학관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 나들목에서 선운사 가는 길에서 조금 벗어나는 부안면 선운리에 있다. 친일 행적이나 말년에 정치권의 도움으로 문학지를 낸 흠결과는 별개로, 그의 시가 빛낸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폐교된 선운초교 부지에 폐교 당시의 학교 분위기를 최대한 살린 문학관 건물도 소박하면서도 예술적 품격을 지니고 있다. 문학관 옆 미당 상가 사이 민가에서 비닐하우스를 지어 운영하는 간이식당(질마재)에서는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순박한 아주머니가 파전과 막걸리를 판다.

고인돌 유적지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나들목 옆에 있다. 2000년에 강화도와 화순군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지로 고창읍 죽림리에 있다.

고창읍성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나들목에서 고창읍쪽으로 가면 된다. 조선 초기의 석축 읍성으로 사적 제145호다. 성벽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고, 보수 공사를 통해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다. 또 근처에 게르마늄 온천인 석정온천과 신재효 고택, 판소리 박물관이 있어 한번 걸음에 다양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