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차길진_한문으로 푸는 세상

醉月 2011. 6. 16. 08:43

 

一不做 二不休

안 하면 안 하고, 하면 끝까지 간다

安史의 난

漢子(한자)는 뜻글자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게 매력인 동시에 난제다. 「사람 인(人)」자는 「사람과 사람」이 의지한 형상이라고들 한다.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영혼」이 서로 기대고 있는 꼴이라고 풀이해도 오답은 아닐 것이다.
「忽見祥暾映槿域 還邦馳逐群雄(홀현상돈영근역 환방치축군웅)」을 직역하면, 「무궁화가 핀 곳에 상서로운 기운이 홀연히 비쳤다. 나라로 돌아와 뭇영웅들과 달리다」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작자와 글의 주인공, 시대상황 등을 종합해야 비로소 무릎을 칠 수 있다. 빨치산 토벌대장 車一赫(차일혁) 총경의 생애 중 특정 시기를 읊은 漢詩(한시)라는 사실을 모르면 이해 난망일 수 밖에 없다.

「一不做 二不休(일부주 이불휴)」
「做(주)」는 「짓는다」는 뜻이다. 지을 「작(作)」과 같은 의미다. 「첫째, 하지 말라. 둘째, 했으면 멈추지 말라」는 얘기다. 「안 하면 안 하고, 한 번 하면 끝까지 한다」는 풀이다.
「一不做 二不休」는 여느 고사성어와 달리 익숙하지 않은 文句(문구)다.
이 고사의 배경은 「安史(안사)의 난」이다. 중국 唐나라 중기에 安祿山(안녹산)과 史思明(사사명) 등이 일으킨 반란 이후 널리 퍼진 말이다. 唐 왕조는 玄宗(현종) 때 국력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겨 보면 사정은 달랐다. 국가를 지탱해온 시스템인 「律令制(율령제)」는 변질됐고, 均田制(균전제)와 租庸調(조용조) 稅制(세제)는 느슨해졌다. 왕조의 기반인 자립 소농민층이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혼란의 와중에 국왕 못지않은 실력을 키운 자가 安祿山이다. 그는 유주, 평로, 하동 절도사를 겸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휘둘렀다. 왕 부럽지 않았다. 견제가 절실했다. 그래서 揚國忠(양국충)이 나섰다. 玄宗을 사로잡은 절세미녀 양귀비의 일가친척 출신 재상이다. 揚國忠은 「安祿山이 모반을 꾀하니 잡아들이라」고 玄宗을 부추겼다. 그러나 安祿山은 너무 커 있었다. 고분고분 꼬리를 내리긴커녕 범양에서 20만 대군을 거병했다. 명분은 「간신 揚國忠 토벌」이었다. 安祿山 군대의 파워는 대단했다. 破竹之勢(파죽지세)로 수도 長安(장안)까지 쳐들어왔다. 피란했던 玄宗은 아들 숙종에게 왕위를 넘겼고 揚國忠은 피살됐으며 양귀비는 목을 매 죽었다. 安祿山도 최후의 승자는 되지 못했다. 아들 경서가 아버지 安祿山을 암살한 것이다. 이후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사사명은 자기 아들 조의 손에 죽고 말았다. 사조의 또한 唐의 구조요청을 받은 위구르軍에 의해 목숨을 다 했다.

9년에 걸친 安史의 난에서 조연도 못되는 단역이 만들어낸 회한의 금언이 「一不做 二不休」다.
작자는 張光晟(장광성)으로. 唐 조정의 중앙관리였다. 시골로 좌천되자 딴생각을 품었다. 마침 安史의 난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위기는 곧 기회」라는 순간 포착으로 일신의 도약을 꿈꿨다. 개국공신 권좌를 그리며 반란군 참모를 자청했다. 처음엔 뜻대로 되는 듯 했다.
張光晟의 내밀한 고급정보 덕에 叛軍은 승승장구했다. 叛軍의 기세는 唐의 조직력에 의해 차츰 허물어져갔다. 張光晟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叛軍을 버리고 정부軍에 투항했다. 난이 평정되자 張光晟은 안도했다. 틀림 없는 정부군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끼 사냥시즌은 이미 끝난 뒤였다. 사냥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펄펄 끓는 솥뿐이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張光晟이 한탄했다. 『一不做 二不休』라고. 이어 해설도 덧붙였다. 『第一莫作 第二莫休(제일막작 제이막휴)』라고. 晩時之歎(만시지탄)이었다. 「疑人莫用 用人勿疑(의인막용 용인물의)」, 즉 「의심스러우면 쓰지 말고, 썼다면 의심하지 말라」는 人事, 채용의 진리와도 일맥상통하는 후회다. 「용서했으면 때리지 말라. 때렸으면 용서하지 말라」고도 할 수 있겠다.

 

「一不做 二不休」의 군상들

「一不做 二不休」해서 목적을 이룬 경우는 주변에 널려 있다.
당장 盧武鉉 대통령, 李海瓚 총리, 그리고 李相洙와 柳時敏 장관도 가까운 보기들이다. 金泳三 前 대통령도 우회로를 택했을지언정 一不做 二不休해 청와대를 차지했다. 金大中 前 대통령도 1970년대 이래 언제나 一不做 二不休였다. 가치 판단을 유보한 채 성패 여부만 보면 위화도 회군, 5.16 쿠데타, 12.12 쿠데타도 一不做 후 二不休 과정을 거쳐 목표를 달성했다. 연말 연초를 달군 是是非非(시시비비)와 논란에도 불구, 黃禹錫 박사는 여전히 一不做 二不休다. 그를 탓하는 의견이 「무작정 신뢰감」을 앞지르지 못하고 있다. 참 묘한 현상이다. 一不做 二不休의 위력이다.

거꾸로, 一不做 二不休하지 못해 날개를 꺾인 이들이 적잖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 지 몰라 두 다리를 걸쳐야 했던 재벌, 역시 같은 이유로 이리 저리  메뚜기처럼 소속을 옮기다 철새로 낙인 찍혀 재기 난망인 정치인도 한 둘이 아니다. 학식은 둘째 가라면 서럽고 친화력과 재력까지 탁월한 어느 인사는 주변에 「형」, 「동생」이 수만명이다. 그런데 이 형님과 아우들 대부분도 그 인사에게 一不做 二不休하지 않는다.

 

「一不做 二不休」권하는 사회

대개 양손에 하나씩 쌍알을 쥐고 해당 인사의 움직임을 살핀다. 리더도, 추종자 무리도 이 모양이니 산이 그에게 頂上을 허락할 리 만무하다. 뜻을 품고 말잔등이에 올랐다면 중도에 갈아타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은 一不做 二不休 마인드가 강하다. 一不做 二不休는 대한민국 특유의 「의리」와 자연스럽게도 접목된다. 「사나이다움」을 요구하는 견고한 사회적 가치체계가 「맨 콤플렉스」라는 강박관념을 불러오는 수가 많다. 一不做 二不休 쪽으로 기우는 남자는 대부분 30代 중반~40代 후반이다. 괜히 한국 40代 남자 사망률이 세계 1위인 게 아니다. 이들에게 一不做 二不休란 헤어나고픈 멍에에 다름 아니다. 「남자란 때가 되면 가정을 갖고 책임을 지고 그래야 어른」이라는 속박적 의미의 사회적 틀에 대해 과감히 다시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一不做 二不休는 오류일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一不做 二不休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친구와 형제, 고향, 인간적인 면, 무책임과 무질서, 의리와 우정, 公보다 私, 법보다 인연, 나보다 우리, 이성보다 감정 등이 우월한 토양이다.따라서 공정성이나 도덕심은 먹혀들 틈이 없다. 책임감과 질서 대신 무사안일을 선호하게 돼있다.

一不做 二不休는 신념이라야 한다. 가능성만 믿고 一不做 二不休하면 이는 신념이 아니라 철학일 뿐이다. 신념 없는 철학 만으로 성과를 얻을 수는 없다. 시험 삼아 一不做 二不休를 시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뼈아픈 경험으로 귀결될 개연성이 짙다. 一不做 하기 전에 꼼꼼히 따져야 한다. 의심 없는 一不做는 죽은 一不做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싶지도 않은 상태로 一不做한다면, 二不休는 있을 수 없다.

 

大名之下 難而久居

득세한 사람 밑에 오래 머물지 말라



大名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려운 까닭

大名之下 難而久居(대명지하 난이구거)는 큰 이름 아래 오랫동안 머물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시기와 모함이 집중되니 좋은 자리, 주목받는 직위에 큰 이름을 걸고 오래 있기는 어렵다. 任期(임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大名(대명)에게도, 그 大名밑에게도 적용 가능한 말이다.
大名은 大名 자체가, 大名 추종자는 大名의 變質(변질)이 부담스럽다. 權力(권력)이든 財力(재력)이든 득세한 파워 밑에서 너무 오래 지내서는 안 된다. 영원한 성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숨 가쁘고 어질어질한 情報化(정보화)세상이라 더욱 그렇다.
「秘密(비밀)」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大明天地(대명천지)다. 大名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벼락이 내리꽂히는 험한 날의 골프장에서 본능적으로 큰 나무 밑으로 몸을 피하는 골퍼들이 적지 않다.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과학상식을 순간적으로 잊는다. 벼락은 크고 높은 나무가 좋은 표적일 따름이다. 大木아래나, 大名 밑이나  難而久居는 매한가지다.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大名을 쟁취한 한동안은 날마다 잔치다. 大名을 얻을 수 있게끔 도운 측근들이 고맙기만 하다. 論功行賞(논공행상)이 잇따른다.
그러나 파티는 오래 가지 못한다. 大名이 더 멀리 보고, 더 많이 듣게 된 탓이다. 온갖 고급정보가 大名에게로 쏟아져 들어온다. 大名 앞에 무릎을 꿇겠다는 남녀가 줄을 선다. 싫어서 못 사귄 이들이 아니다. 몰라서 起用(기용)하지 못했을 뿐인 들이다.
익숙한 것은 소중하지 않다. 낯설기에 신선하고 참신한 느낌이다. 어느덧 大名의 功臣들은 舊派(구파)가 된다. 大名 마음을 사로잡은 新派(신파)의 시대가 열린다. 물론 新派도 언젠가는 舊派가 된다. 「橋脚(교각)의 역사」와 같다. 다리의 역사는 곧 崩壞(붕괴)의 역사다. 王朝의 역사, 企業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權不十年 花無十日紅(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다. 마냥 興史는 없다. 亡史없는 역사는 없다. 차면 기울고, 기울면 엎어진다.
大名에게는 세 가지 難題가 따른다.
우선, 大名 자체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 그 다음엔, 획득한 大名을 生前에 지키기란 아주 곤란하다. 이어 死後에 大名을 원상태로 두기도 몹시 어렵다. 남들이 자신들의 두 어깨로 떠받치고 다닐 때 까지만 그는 大名이다.
大名을 거머쥐지 못한 者일수록 大名에 집착한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大名까지는 못 갔지만, 大名의 진한 香氣(향기)를 가까이에서 잠깐이라도 맡아 봤다면 그에게 大名은 곧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名藥(명약)이다. 몇 번이고 엎어지고 깨지더라도 기를 쓰고 大名을 잡으려 아둥바둥하는 이유다.

進退가 분명해야

자신이 大名이든, 大名의 울타리 안에 寄居(기거)하는 인생이든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망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進退(진퇴)가 분명해야 한다. 박수를 받으며 떠날 수 있는 때, 날이 궂어지기 전에 下山할 때를 놓치면 城은 파도에 휩쓸리고 만다.
黃禹錫(황우석) 박사라는 大名이 흔들렸다. 동시에 연구와 기쁨을 함께 나눈 黃박사 주변의 모든 이들이 難而久居가 되고 말았다. 難而久居 정도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일 지경이다. 姓名學으로 짚은 黃박사의 이름은 「波瀾 後 成功格(파란 후 성공격)」이다.


그러나 한 번 금이 간 大名이 뿜을 수 있는 威力(위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을 다시 맡았더라도 4년 전의 大名을 이어 간다는 보장은 없다. 2002년 大名 「히딩크號」에서 難而久居했던 黃善洪(황선홍)과 洪明甫(홍명보)가 永生하고 있는 데는 隱退(은퇴)라는 세월의 藥이 일정부분 기여했다.


「참 大名」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사회는 「거짓 大名」에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다. 극심한 호칭 인플레이션이 이를 방증한다.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건만 아무에게나 「선생님」,「사모님」, 밑에서 일한 적 없어도 「사장님」하더니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회장님」을 남발한다. 비싼 술집의 20代 여종업원이 「이사」명함을 내미는 등 自家 大名 인플레이션 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大名은 獻呈(헌정)받는 것이다. 大名을 自作하는 것은 난센스다. 가수 羅勳兒(나훈아)의 노래처럼 스스로를 「잡초」라 格下한다고 얕잡아 보는 사람은 없다. 大名보다는 自己卑下(자기비하)를 통한 카타르시스가 더 맛있을 수 있다. 자신감이 있어야 스스로를 낮출 수도 있다.
法力과 道力이 탁월한 高僧의 1인칭 語法은 언제나 「小僧」이다. 「큰 대(大)」字는 현실에서 거꾸로 작용하는 수가 많다. 그레이트, 즉 大를 나라 이름 앞에 붙여 「大英帝國」을 선포한 이래 英國의 국운은 쇠퇴일로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당시 日本의 이름 앞에도 大가 있었다. 이후 「大日本帝國」에서 大를 빼면서 일본은 급속도로 강대국 반열에 올라서기에 이르렀다.


「官大有險 樹大招風(관대유험 수대초풍)」이다. 大名之下 難而久居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관리는 높아질수록 무서워지고, 나무는 커질수록 바람과 잘 지낸다」는 풀이다.
大名에 다가설수록 官吏는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간다. 아울러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채 국민들과 점점 멀어지고 만다. 그런데 나무는 크면 클수록 바람과 잘 共生(공생)한다. 공무원이 나무에서 배워야 하는 셈이다.
물론 관리에게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니다. 人間事(인간사)와 世上事(세상사)의 원리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에게는 시기와 의심이 끊이지 않는다. 남들을 잘 속인 덕에 얻은 大名이 수두룩한 탓이다. 양파 껍질이 하나둘씩 벗겨지면서 이러한 大名은 퇴색하게 마련이다.
大名에 오르는 것보다 大名을 지키는게 더욱 어려운 법이다. 정치와 연예계 大名 가운데는 대중의 망각을 비난이나 스캔들보다 더욱 무서워하는 경우가 적잖은 게 사실이다.


자신의 大名이 서서히 퇴색해 가는 것을 事前에 감지할 수 있는 정치인과 美人은 극히 드물다. 아름답든 추하든 宮中(궁중)여인은 시샘의 대상이다. 어질든 어질지 못하든 朝廷(조정)에 들어간 선비는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
판검사나 대학교수, 총장 등으로 우러름을 받다가 정치인 혹은 고위관료로 변신했다는 이유로 일종의 「惡性 댓글」에 시달리다 잊혀진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적시에 은퇴한 범려

중국 春秋시대 越(월)나라 왕 勾踐(구천)은 이웃나라 吳(오)와 숙적이었다.
구천은 한때 吳王 閤閭(합려)를 격퇴, 전사시키며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2년 뒤 합려의 아들 夫差(부차)에게 패해 會稽山(회계산)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야 했다. 그런데 吳를 선제공격한 쪽은 越이었다. 부차가 밤낮없이 병사를 훈련시키면서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구천의 先攻을 한사코 반대한 신하가 범려다.


『안 됩니다. 무기는 흉기라고 들었습니다.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옵고 무력쟁탈은 政事에서 下策(하책)인 줄 압니다. 싸움에서 모험은 하늘이 금지하는 일이니 이를 어기면 큰 害(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천은 『내가 이미 결정한 일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요지부동이었다. 구천은 무력을 발동해 吳로 進攻했다. 결과는 참패였고, 구천은 범려와 함께 3년간 吳의 인질이 돼야 했다.


이후 구천과 범려는 軍備(군비)를 증강하고 힘을 키우며 臥薪嘗膽(와신상담)했고 마침내 부차를 물리칠 수 있었다. 최후의 승자는 구천이었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쓸개를 먹고 섶 위에서 자면서 會稽之恥(회계지치), 切齒扼腕(절치액완)한 보상이다. 범려의 말을 들었더라면 하지 않아도 좋았을 고생이었다.


구천은 吳나라에 이어 長江(장강),淮河(회하) 유역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覇王(패왕)을 자처했다.
이 과정에서 큰 功을 세운 범려는 上將軍이 됐다. 바로 이때, 범려는 大名之下 難而久居를 실천했다. 괴로움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공유할 수 없는 大名이 구천이라고 판단, 손에 쥔 富貴榮華(부귀영화)를 버리고 齊나라로 가버린 것이다. 齊에서 農畜(농축)과 상업으로 富를 쌓았고 齊王에게 스카우트돼 相國(상국), 즉 宰相(재상)이 됐다.


하지만 범려는 이번에도 大名之下 難而久居했다. 그는 『집에 있을 때는 재산을 千金을 쌓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재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自手成家(자수성가)한 백성으로서 갈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본 것이다. 고귀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다』는 말을 남기고 大名 곁을 떠났다. 이렇듯 들고 나기를 확실히 한 범려는 아직도 明哲保身(명철보신)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功을 이루면 떠나야 한다

老子도 大名之下 難而久居를 지지한다.
「功遂身退 天之道(공수신퇴 천지도)」, 즉 功을 이루면 떠나야 한다. 그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가르쳤다. 「周易(주역)」또한 大名之下 難而久居를 은유하고 있다. 「亢龍有悔(항룡유회)」는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을 바라볼 뿐이니 위험하다는 경고다. 로켓처럼 하늘로 치솟았던 大名도 땅으로 떨어지면 나무토막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大名을 꿈꾼다면 추락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大名을 모실 수만 있다면  難而久居쯤은 얼마든지 감내하겠다는 각오라면, 大名 난파 직전의 下船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大名을 유지하려면 퍼주는 것은 공개적으로, 훔치는 것은 은밀하게 해야 한다. 大名을 지키는 것은 大名을 회복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大名에 현재는 없다. 人氣에 미래는 없다.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

「용서했으면 때리지 말고, 때렸으면 용서하지 말라」



헤픈 관용은 비극을 초래한다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용정불하수  하수불용정)」은 「용서했으면 때리지 말고, 때렸으면 용서하지 말라」는 충고의 말이다.
 
敵(적)을 몰아붙일 때는 안면을 바꿔야 한다. 밟으려면 확실하게 밟아야 싹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사람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예수다.
 
부처는 『善樂於愛欲 以杖加群生(선락어애욕 이장가군생) 於中自求安 後世不得樂(어중자구안 후세부득락)』이라 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즐거움을 좋아한다. 생명체를 때리거나 죽이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후세의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는 얘기다.
 
부처와 예수 모두 容情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下手에는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聖人(성인)이 아니라면 「최선의 복수는 용서」라는 달관의 경지를 외면하는 편이 낫다.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容情은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한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부를 수도 있듯, 개인의 부당한 容情이 쌓이면 역사의 愚(우)가 빚어질 수도 있다.
 
불필요한 용서는 아니 한 것만 못하다. 나는 줬는데 상대방이 빼앗겼다고 착각한다면, 참 억울하다. 以心傳心(이심전심)이 통하지 않는 자에게는 말(言)로 주입할 수밖에 없다. 「사람 마음이 다 똑같지」라는 착한 심성을 헤아려 주는 존재는 하늘뿐이다.
 
은인과 원수라는 천양지차를 혼돈하는 남녀노소는 뜻밖에도 수두룩하다.
 
『가수로, 영화배우로, 탤런트로 데뷔만 시켜 주면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다』며 무릎 꿇기도 불사하던 연예인 지망생이 스타가 된다. 동시에 무명 시절의 계약서는 불공정 계약의 표본처럼 돼버린다. 티격태격 소송이 잇따른다. 스타 연예인이나 그를 기획한 사람이나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자녀교육의 원칙도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에서 찾을 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가 전부다. 물론 容情과 下手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기분이 좋다고 마냥 용서하고, 기분이 나쁘다고 매를 들어서는 안 된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容情 혹은 下手가 설득력과 위력을 발휘한다.
 
용서하자니 괘씸하고, 내치자니 싹수가 아깝다. 이럴 때도 정답은 下手不容情이다. 靑出於藍(청출어람)할 역량이라면 처음부터 맞을 짓을 하지 않는 법이다. 당장의 불편함으로 容情하고 싶더라도 참아야 한다.
 
내 덕에 취직한 사람, 내 덕에 승진한 사람은 머지 않아 바닥을 드러낸다. 조직사회에서 미련과 惻隱之心(측은지심)은 절대부분 버려야 옳은 덕목일 수 있다. 어느 분야든 정상에 오른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컸다」는 것이다.
 
下手不容情이 꼭 단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화 한 통 걸지 않는 절교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하다. 두렵고 아쉬운 것은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방이다.
 
중국 春秋(춘추)시대의 越王(월왕) 句踐(구천)은 吳王(오왕) 夫差(부차)에게 패하자 목숨을 구걸해 살아남는다. 그 후 그는 쓸개를 핥으며 복수심을 불태운다. 越의 미녀 西施(서시)를 夫差에게 바친다. 夫差가 西施에게 빠져 있는 동안 句踐은 재기해 마침내 吳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夫差가 下手不容情하지 못한 代價(대가)는 亡國(망국)이었다. 夫差는 宰相(재상) 伍子胥(오자서)의 下手不容情 주장을 받아들여야 했다. 伍子胥는 『句踐을 용서하면 반드시 화근이 남을 것』이라며 제대로 내다봤었다.
 
容情은 용서할 사람과 용서받을 사람이 분명해야 한다. 용서받을 일도 분명해야 한다. 용서하는 이가 떳떳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할 이가 진실하고 겸허해야 한다. 숨기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일부러 잊게 만들어도 안 된다.
 

信賞必罰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는 「信賞必罰(신상필벌)」과도 相通(상통)하는 원리다. 상을 주고 벌을 주는 데 엄중하다는 것은 곧 용서할 것인가, 때릴 것인가의 선택이기도 하다.
 
泣斬馬謖(읍참마속)을 보자. 군율을 세우기 위해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버렸다. 중국 蜀(촉)나라의 諸葛亮(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면서 馬謖의 목을 베었다. 군령을 어긴 죄다. 大義滅親(대의멸친), 큰 도의를 위해 私的인 감정을 버린 것이다.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는 기업에도 적용된다.
 
三星그룹 창업주인 湖巖 李秉喆(호암 이병철) 회장은 「疑人勿用 用人勿疑(의인물용 용인물의: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쓰는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라는 用人원칙으로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를 실천했다.
 
湖巖은 흐르는 물이 괴기 시작하면 전체가 썩고 만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 「흙 한 줌도 버리지 않은 덕에 태산을 이룰 수 있었다」는 믿음으로 容情不下手하려 애쓰는 한편, 下手不容情이 필요할 때는 한없이 차가워졌다.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를 지탱하는 힘은, 개인적 이득이다. 중국의 法家(법가) 철학자 韓非子(한비자)가 일찌감치 간파한 진리다.
 
하인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충실해서가 아니라 보수를 받기 때문이다.
 
주인이 하인을 잘 대해 주는 것 또한 친절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부가 징그러운 뱀장어를 손으로 주무르고 여자들이 송충이 같은 누에를 손으로 만지는 것도 다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해관계만 맞으면 낯선 사이라도 화목하게 살고, 이해가 상충하면 아비와 자식 사이라도 충돌하게 마련이다. 이득만 생기면 사람은 누구나 최고의 용사가 된다.
 

 
容情에는 타이밍이 중요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하려면 정직해져야 한다.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다」는 修辭(수사)는 솔직하지 못하다.
 
「나는 용서할 수 없다」는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대범함을 가장해서도 안 된다. 모두 용서한다는 것은 곧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소리다.
 
下手는 거칠지만 正義일 수 있다. 下手를 復讐(복수)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개한테 물렸다고 「어찌 사람이 개를 물겠는가」라고 容情만 하면 리더가 될 수 없다. 가정에서는 下手, 사회와 조직에서는 容情하는 것은 위선이다.
 
容情을 버리고 下手 일변도로 나아가야 할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누군가가 나의 보스, 나의 배우자, 나의 이름을 더렵혔다면 下手不容情 외에는 대응책이 없다.
 
그래도 굳이 容情하고 싶다면,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큰 용서보다는 적절한 시기의 요긴한 용서가 더욱 효과적이다. 加虐的(가학적)이면서 동시에 被虐的(피학적)인 성품이라면 下手 없는 容情만 고수해도 좋다. 敵을 가장 괴롭히는 방법이 바로 용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刻薄成家 理無久享(각박성가 이무구향)

「남들의 원망 속에 이뤄진 일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신숙주와 한명회

피도 눈물도 없이, 人情事情(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됐다면 刻薄成家(각박성가)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가 중요하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刻薄成家의 끝은 理無久享(이무구향)이다. 남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면서 쌓은 富(부)를 오래 누릴 리 없다는 先覺(선각)이다.
 
 「成家」의 의미를 「재산」에 한정할 이유는 없다. 外延(외연)을 넓히면 人間事(인간사) 全般(전반)에 두루 적용 가능한 말이다.
 
 옛 中國 齊(제)나라 中大夫(중대부), 즉 고위관료 중에 「이사」라는 이가 있었다.
 
 방심했는지, 착각했는지, 피로가 쌓였는지 王이 베푼 잔치에 참석한 이사가 그만 漫醉(만취)해 버렸다. 비틀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와 정신을 차리려 했다. 이때 문지기가 다가왔다. 문지기는 다리가 잘리는 벌을 받아 몸이 불편해 보였다. 그는 『먹다 남은 술과 음식이 있으면 달라』고 했다.
 
 이사는 발끈했다.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것도 모자라 上典(상전)에게 술을 조르느냐』며 꾸짖었다. 문지기는 일단 물러섰다. 이사가 다시 잔치판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문지기는 이사가 잠시 서 있던 마루와 기둥에 물을 뿌렸다.
 
 다음날 王이 물에 젖은 기둥과 마루를 봤다. 영락없이 오줌에 젖은 꼴이었다. 문지기를 불러 누구의 所行(소행)인지 물었다. 문지기는 『소변을 보는 현장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젯밤 中大夫 이사가 그 자리에 서있었다』고 대답했다.
 
 王은 이사를 처형했다. 문지기를 향한 이사의 순간적 刻薄이 理無久享으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조선 전기의 文臣(문신) 申叔舟(신숙주)는 刻薄하지 않은 덕에 天壽(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世祖(세조)와의 술자리에서 만취해 世祖에게 팔씨름을 이긴 후 팔을 아프게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申叔舟는 무사했다. 동료 韓明澮(한명회) 덕이었다.
 
 韓明澮는 申叔舟의 집으로 청지기를 보내 집안의 촛대를 모두 치우도록 했다. 술이 깨면 책을 읽다 다시 자는 申叔舟의 습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世祖는 申叔舟가 진짜로 大醉(대취)했는지 申叔舟의 집으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살피게 했다. 한밤중에 깨어난 申叔舟가 책을 읽으려 했지만 초가 없었다. 申叔舟의 방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世祖에게 보고됐다. 그렇게 申叔舟는 起死回生(기사회생)했다.
 
 申叔舟도 韓明澮의 久享을 도왔다. 이미 申叔舟와 사돈지간이 된 韓明澮에게 權擥(권람)이 媒婆(매파)를 넣었다. 같은 癸酉靖難(계유정난) 功臣(공신)의 제의를 거절할 만한 사유가 韓明澮에게는 없었다.
 
 이때 申叔舟가 아이디어를 냈다. 『功臣 셋이 사돈관계로 얽히고설키면 王이 주목할 것이니 각별히 謹身(근신)할 필요가 있다고 둘러대라』고 귀띔했다.
 
 一理(일리) 있는 핑계 앞에 權擥도 결국 뜻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刻薄하면 기브 앤 테이크, 바터 시스템은 稼動不可(가동불가)다. 久享 또한 期待難忘(기대난망)이게 마련이다.
 
 
보복의 사슬을 끊는 자가 英雄
 
 刻薄成家와 理無久享은 대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 형태를 보인다.
 
 項羽(항우)와 劉邦(유방)의 군사가 秦(진)의 수도 咸陽(함양)으로 쳐들어 왔다. 그러자 趙高(조고)는 胡亥(호해)를 죽이고 扶蘇(부소)의 아들 子孀(자영)을 3세 황제로 삼으며 久享을 꾀했다. 그러다 자영에게 誅殺(주살)당하고 말았다. 自業自得(자업자득)이었다.
 
 보복의 사슬을 끊는 자는 英雄(영웅)이 된다.
 
 劉邦을 도와 漢(한)나라를 건설한 韓信(한신)은 어려서 고아가 됐다. 시장 바닥에서 시비를 걸어 온 건달과 맞싸우는 대신 그의 가랑이 아래를 기었다. 겁쟁이라는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훗날 漢의 장군으로 錦衣還鄕(금의환향)한 韓信 앞에 건달이 끌려왔다. 韓信은 『그때 너를 죽이고 살인자가 돼 도망 다니다 보면 꿈을 이룰 수 없을 듯해 참았다』며 건달을 용서했다.
 
 「털 끝 만큼도 손해 보지 않으련다」는 모진 마음의 끝에 刻薄成家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순서는 理無久享이다. 刻薄해지려는 본능을 참아 낸 報答(보답)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짧지만 긴 게 인생이다.
 
 「刻薄成家 理無久享」은 糟糠之妻(조강지처)와도 一脈相通(일맥상통)한다.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 가며 고생한 本妻(본처)가 糟糠之妻다.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빈천지교불가망 조강지처불하당)」, 가난할 때 친했던 친구를 잊어서는 안 되고, 糟糠之妻는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다는 後漢 시대의 이 말은 현 시점에도 유효하다.
 
 久享하려면 口業(구업)을 조심해야 한다. 입에서 비롯되는 모든 罪業(죄업)이다.
 
 
모든 罪業은 입에서 비롯
 
 젊은 과부 집에 자주 드나드는 성직자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惡소문을 퍼뜨리며 그를 비난했다. 와중에 과부가 숨졌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났다. 성직자는 癌(암)에 걸린 젊은 과부를 기도하며 돌봤던 것이다.
 
 성직자를 욕했던 주민들이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성직자는 그들에게 닭털을 한 봉지씩 나눠 주며 들판에 날려 버리라고 시켰다. 사람들은 성직자가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러자 성직자는 이번에는 그 닭털들을 주워 오라고 했다.
 
 束手無策(속수무책), 茫然自失(망연자실)한 사람들에게 성직자가 일렀다.
 
 『용서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담지 못한다』
 
 칼로 입은 상처는 치유될 수 있지만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토록 간다. 千手經(천수경)은 「淨口業眞言(정구업진언)」으로 시작한다. 口業을 깨끗이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다.
 
 刻薄成家하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怨恨(원한)의 씨는 삶과 죽음을 초월해 작용하기도 한다. 가해자의 久享을 끈질기게 방해한다.
 
 우리말로 「말명」, 한자로는 「萬明(만명)」이라 적는 「寃鬼(원귀)」가 대표적이다. 평생 行世(행세)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간 넋들이다. 죽어서도 刻薄成家의 久享을 理無로 유도하고 있다. 태어나지 못한 채 숨진 태아, 자살한 寃魂(원혼)들도 靈山(영산)으로 탈바꿈해 刻薄成家의 久享을 집요하게 막는다. 우리나라에는 6·25와 4·19 그리고 5·18 등이 낳은 靈山이 수두룩하다.
 
 음식점이나 술집·골프장 등에서 지배인·사장·주인을 불러 가며 종업원을 못살게 구는 刻薄을 떨면서 久享를 바라는 것은 난센스다. 상대적 弱者(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곧 자신의 인격이요, 능력이다.
 
 목에 걸린 가시를 빼 주면 호랑이도 보답한다. 까치·구렁이·생쥐·사슴 등 微物(미물)들도 은혜를 갚는다. 행여 돌팔매질당할세라 戰戰兢兢(전전긍긍)하지 않아도 좋은 개구리라면 나의 久享를 도울 수 있다. 하물며 사람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刻薄하지 않으면 久享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진정한 久享은 永生(영생)이다. 殺身成仁(살신성인)은 극소수만으로도 刻薄成家를 타이르는 세상의 빛이 되기에 충분하다.
 
 倫理(윤리)가 무너진 집은 곧바로 소멸하고 망한다. 동냥은 안 주더라도 쪽박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실패한 자, 실수한 자, 폭로로 물러난 자, 탄로로 궁지에 몰린자라고 죄다 영원한 실패자는 아니다. 七顚八起(칠전팔기), 당장의 敗者(패자)에게도 기회는 여럿 남아 있다. 현재의 勝者가 어느 날 갑자기 일곱 번씩이나 바닥을 보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因地而倒者 因地而起(인지이도자 인지이기)

땅에 넘어진 사람은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이다

「因地而倒者 因地而起(인지이도자 인지이기)」 땅에 넘어진 사람은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고려중기의 고승인 佛日普照(불일보조) 知訥(지눌)이 定慧結社文(정혜결사문)을 통해 설파한 진리다.
 
 지눌은 이에 덧붙여 「離地求起 無有是處也(이지구기 무유시처야)」라고 했다. 땅을 떠나서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땅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사람을 넘어뜨리지도, 일으키지도 않는다. 엎어지고 일어서는 것은 사람이다. 문제의 핵심이 「사람」인 것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남에게 기대면 된다. 무엇인가를 쥐거나 짚어도 좋다. 아예 일어서지 않거나, 매사 他人(타인)에게 의지하면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결국,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정상인이 아닌 셈이다. 넘어지지 않으면 잠든 사람이다. 깨어 있는 자는 넘어지게 마련이다.
 
 지눌은 「迷一心而起 無邊煩惱者 衆生也(미일심이기 무변번뇌자 중생야), 悟一心而起 無邊妙用者 諸佛也(오일심이기 무변묘용자 제불야)」라고도 했다. 마음이 미혹해 끝없이 번뇌하는 이는 「중생」, 마음을 깨달아 한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사람은 「부처」라는 설명이다. 심오하되 難解(난해)하다.
 
 因地而倒者 因地而起는 삶의 곳곳에 적용되고 있다. 고단한 현대인들에게 의욕과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鷺山 李殷相(노산 이은상)은 『高地(고지)가 바로 저긴데』라며 우리를 독려한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웅변한다.
 
 넘어진 순간, 그의 시선은 이미 「새는 날」을 향하고 있다.
 
 唐(당)의 詩人(시인) 杜牧(두목)은 「題烏江亭(제오강정)」에서 因地而倒者 因地而起를 捲土重來(권토중래)라고 강조한다. 땅을 휘말아 거듭 공격하라는 권유다. 패했으면 힘을 기르면 된다. 힘이 쌓이면 다시 도전해야 한다.
 
 
 東山再起
 
 杜牧은 자살한 項羽(항우)가 안타깝다. 그래서 이렇게 읊는다.
 
 〈勝敗兵家事不期(승패병가사불기)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江東子弟多才俊(강동자제다재준)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勝敗(승패)는 兵家(병가)도 기약하지 못한다. 부끄러움을 알고 참을 줄 아는 것이 사나이다. 江東(강동)의 子弟(자제) 가운데는 뛰어난 인물이 많은데 捲土重來했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애석함이다.
 
 因地而倒者 因地而起는 「塞翁之馬(새옹지마)」다.
 
 인생의 吉凶禍福(길흉화복)은 항상 바뀌는 법이다. 미리 헤아릴 수 없다. 달아난 말이 좋은 말 한 필과 함께 돌아온다. 한 마리가 두 마리로 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타던 아들이 낙마해 다리를 다친다. 덕분에 아들은 징병을 피해 목숨을 부지한다.
 
 得失(득실)과 禍福(화복)은 노력과 무관한 것일 수 있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斯界(사계)의 頂上(정상)을 경험한 이다. 막강한 힘은 하늘이 내린다는 점을 체험한 上手(상수)다.
 
 그렇다고 넘어진 땅에 널브러진 채 전전긍긍, 정확히는 遊手徒食(유수도식) 한다면 평생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을 똑바로 볼 필요가 있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미래를 염두에 둔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곧 닥치는 것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충실한 因地而倒者는 꼭 因地而起로 이어진다.
 
 因地而倒者 因地而起는 「東山再起(동산재기)」다. 동쪽 산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넘어졌다고 영원히 바닥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훌훌 털고 일어나 재차 주목받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東晉(동진)의 명문가 태생인 謝安(사안)은 젊어서부터 재능과 식견이 뛰어났다. 당연히 朝廷(조정)의 부름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러브콜을 한사코 거부한 채 草野(초야)에 숨어 살다시피 했다. 出仕(출사)에 적합지 않은 정치 상황을 看破(간파)한 덕이다.
 
 당시 국가 내부에서는 門閥(문벌) 간 싸움이 한창이었다. 북쪽에서는 前秦(전진)이 호시탐탐 東晉을 덮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謝安은 東山에 집을 지었다. 아름다운 山水(산수)에 묻혀 王羲之(왕희지), 支遁(지둔)과 어울리며 詩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세월을 낚았다. 물론 평생 風流(풍류)만 즐긴다면, 태어날 이유가 없을 터이다.
 
 마흔 살이 되자 謝安은 因地而起했다. 그는 門閥 세력을 제압한 征西大將軍(정서대장군) 桓溫(환온)의 휘하로 들어갔다. 吏部尙書(이부상서)라는 요직까지 승승장구했다.
 
 謝安은 자신의 깜냥을 알았다. 桓溫이 帝位(제위)를 넘보려 들자 즉각 낯빛을 바꿔 저지했다. 자칫 因地而倒者할 수 있는 위기를 넘긴 謝安은 공로를 인정받아 孝武帝(효무제) 즉위 후 宰相(재상)에 오를 수 있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알 정도라면 죽을 때까지 因地而倒者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因地而倒者가 되지 않고도 因地而起할 수있다면 그의 이름은 역사가 기억한다.
 
 
깨어 움직여야 한다
 
 因地而倒者가 轉禍(전화)라면, 因地而起는 爲福(위복)이다. 禍를 福으로 바꾸거나 그 거꾸로다. 韓(한)·魏(위)·趙(조)·燕(연)·齊(제)·楚(초) 나라 등 무려 6개국의 宰相을 겸한 蘇秦(소진)은 말한다.
 
 『옛날, 일을 잘 처리한 사람은 禍를 바꾸어 福이 되게 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功이 되게 했다(因敗爲功)』
 
 강한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깨어 움직여야 한다. 努力(노력)과 勞力(노력)이 두루 요구된다. 나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존재는 나 자신이다. 홀로 세운 훌륭한 계획을 남이 모른다면 因地而起는 遼遠(요원)할 뿐이다.
 
 因地而倒者라는 苦盡(고진)의 끝은 因地而起, 甘來(감래)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고생 끝에 樂(낙)이지만, 樂에 빠져 방심하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興盡悲來(흥진비래)다. 因地而倒者라도 生口不網(생구불망)이다. 산 사람의 입에 거미는 줄을 치지 않는다. 쥐구멍에도 언젠가는 볕이 든다. 「陰地轉陽地變(음지전양지변)」,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된다.
 
 因地而倒는 「兵家之常事(병가지상사)」요, 「政治之常事(정치지상사)」다. 선거라는 땅에서 넘어졌으면 선거의 땅에서 일어서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歷程(역정)이 좋은 보기다.
 
 貧益貧富益富(빈익빈부익부) 兩極化(양극화) 세상은 개천에서 나는 龍(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레 짐작일 따름이다. 조상과 부모만 탓하며 불만의 목소리만 높인다면 因地而倒者 단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牝鷄之晨 惟家之索(빈계지신 유가지삭)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동서양의 男尊女卑

婦言是用(부언시용)은 「여자의 말을 마냥 옳게 쓴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 줏대 없이 여자의 말을 잘 듣는 남자를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鷄之晨 惟家之索(빈계지신 유가지삭)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새벽을 알리는 울음은 수탉의 몫이다.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는 항변이 즉각 따르긴 하나, 경우가 다르다.
 
 殷(은)나라의 紂王(주왕)은 妖婦(요부) 「달기」에게 푹 빠져 지냈다. 달기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들어 줬다. 달기라는 色(색)에는 酒(주)가 따르게 마련이다. 허구한 날 酒色을 즐기느라 바쁘다 보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酒宴(주연)을 베풀면서 어진 신하들을 멀리하고 一族(일족)들마저 돌보지 않았다. 예정된 절차처럼 전국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이같은 혼란을 틈 탄 周(주)나라 武王(무왕)은 殷의 紂王을 쳤다. 병사 3000명을 이끌고 殷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외쳤다.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다』
 
 紂王을 치는 대의명분으로 鷄之晨 惟家之索을 거론한 것이다. 「암탉」이 곧 달기임은 不問可知(불문가지)다. 鷄는 無晨, 새벽에 울지 않아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鷄之晨을 경계하는 표현은 한둘이 아니다. 「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외언불입어곤 내언불출어곤)」은 같은 말이다. 바깥 얘기를 문지방 안으로 들이지 말아야 하고, 집안 얘기를 밖으로 흘려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암탉이 못 미덥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심지어 『여자는 友情의 敵이요, 피할 수 없는 형벌이며, 必要惡(필요악)』이라고 극언한 이는 어느 종교의 聖人(성인)이다.
 
 孔子(공자) 역시 암탉을 무시했다. 南尊女卑(남존여비),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는 뜻이다.
 
 孔子가 太山(태산)에서 노닐다 榮啓期(영계기)를 봤다.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물었다.
 
 『선생이 즐거워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榮啓期가 답했다.
 
 『나는 즐거움이 매우 많습니다. 하늘이 萬物(만물)을 만들 때 오로지 사람만 귀히 했는데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즐거움입니다. 또한 男尊女卑인데 나는 이미 남자의 몸을 얻었으니 그것이 두 번째 즐거움입니다…』
 
 孔子는 그를 『스스로 깨친 사람(自寬者)』이라고 추어올렸다. 纏足(전족)으로 여성을 愛玩(애완)한 대륙답다.
 
 암탉의 서러움은 속담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 하지 마라」, 「여자가 말이 많으면 과부가 된다」, 「여자가 너무 알면 팔자가 세다」, 「여자와 북어는 사흘 걸러 때려야 한다」 …
 
 암탉의 슬픔은 중국과 우리나라에 국한하지 않는다.
 
 일본의 아내들은 남편을 「主人(주인)」이라 불렀다. 西歐 신사도의 裏面(이면)에는 「물질적 존재」·「소유물」·「재산」으로서의 여성이 자리잡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재물이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의 산물이 바로 「젠틀멘 코드」일 수 있다.
 
역사 속의 「암탉」들  
 
 歷史(역사)는 영어로 히스토리(History)다. 「그의(His) 이야기(Story)」, 즉 남자들의 이야기가 히스토리의 語源(어원)이라는 說(설)이 그럴싸하게 퍼져 있을 정도로 東西古今 男尊女卑의 뿌리가 깊다.
 
 南師古(남사고: 조선 명종 때의 예언자. 호 格菴)의 「格菴遺錄(격암유록)」에들어 있다는 絶倫者怨無心(절륜자원무심), 「윤리를 끊는 사람은 죽는다」는 구절을 호주제 폐지와 연결해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찬다.
 
 우리나라 최초의 「암탉다운 암탉」은 7세기 신라의 善德女王(선덕여왕)이었다. 唐(당)나라의 2대 황제 太宗(태종)은 그때까지 중국에서도 등장하지 못한 女王의 출현을 조롱하며 「암탉」을 들먹였다.
 
 이후 舊韓末(구한말)에 이르러 일본公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高宗(고종) 앞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여기서 「암탉」은 물론 明成皇后(명성황후)다.
 
 중국 蔣介石(장개석)의 부인 宋美齡(송미령), 毛澤東(모택동)의 부인 江靑(강청)도 싫든 좋든 「암탉」 소리를 듣고 살았다. 周恩來(주은래)의 부인인 鄧穎超(등영초)는 새벽에 우는 암탉답지 않은 삶 덕에 생전은 물론 사후에 추앙받고 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부인 가운데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와 유사한 경우도 있고, 「암탉」과 무관한 인물도 있다.
 
易經이 내다본 여성상위 시대

 2006년 여름 시점에 鷄之晨 惟家之索을 强辯(강변)하면 시대착오적인 公共의 敵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鷄之晨을 탓하던 중국의 수탉들도 간 데 없다. 어느덧 암탉에게 뺨을 맞아도 그러려니, 익숙해졌다.
 
 또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무총리가 여성이다. 차기 대통령 후보 리스트의 최정상에도 여성이 올랐다. 걸핏하면 수탉들만의 대결장에 끼어들려 애쓰고 있는 골퍼 미셸 위도 암탉이다.
 
 작금의 암탉 上位時代(상위시대)는 「易經(역경)」이 일찌감치 내다봤다. 澤山咸(택산함) 卦(괘)는 여자가 위에 있고 남자가 아래에 있다는 의미다. 地天泰(지천태)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위에서 아래로 힘을 쓰고 남자가 아래서 위로 힘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周易(주역)」이 암탉더러 獨走(독주)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암탉과 수탉이 생물학적 性別(성별) 본분에 충실하게 화합해야 만사형통이라는 造化翁의 진리를 喚起(환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홀로 힘쓰는 암탉은 무의미하다. 지혜로운 수탉, 무모할 만큼 저돌적인 수탉, 계산에 밝은 수탉이 곁에 있으면 강한 암탉은 더 세질 수 있다. 암탉은 자신의 「스타일」을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벼슬(文), 발톱(武), 敵과 맞서는 용기(勇), 먹이가 있으면 「꼭꼭꼭」 대며 무리를 부르는 어진 성질(仁), 때를 맞춰 울음으로써 새벽을 알리는 충직(信) 등이 닭의 다섯 가지 德이다. 이 중 암탉의 몫은 仁 정도다. 수탉의 文武勇信보다 암탉의 仁을 중시하는 세상이다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

명예와 재물을 함께 좇으면 비극이 시작된다.


꽃과 과실은 동시에 얻지 못한다

東西古今(동서고금)을 통틀어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만큼 인간 심리의 단면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말도 드물다. 이 속담은 「太平御覽(태평어람)」이란 중국 宋(송)나라 古書(고서)에서 유래한다.
 
 齊(제)나라에 혼기가 찬 아리따운 처녀가 있었는데, 두 집에서 동시에 청혼을 했다. 동쪽 집 총각은 遺産(유산)이 많아 끼니마다 풍족했으나 외모는 볼품없었고, 서쪽 집 총각은 외모는 출중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하루 세 끼 끼니 걱정이 큰일인 시대였다. 선택이 어렵게 되자 처녀의 부모는 당사자의 결정에 맡기기로 하고 딸에게 물었다.
 
 『네 뜻은 어떠하냐? 말로 하기 힘들면 소매를 걷어 올리거라. 만일 동쪽 집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오른쪽 소매를 걷어 올리고, 서쪽 집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왼쪽 소매를 걷어 올리거라』
 
 그러자 처녀는 망설임 없이 두 소매를 모두 걷어 올렸다.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자고 싶어요』(欲東家食, 西家宿)
 
 동시에 두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의 속셈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여자의 얄팍한 속셈을 비꼬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여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우리 사회 지도층에서 자주 목격되어 씁쓸하기만 하다.
 
 각종 비리와 부도덕의 始原(시원)은 두 가지를 동시에 얻으려 하는 寡慾(과욕)이다. 권력자가 財産(재산)을 겸하려 하고, 재력가가 자리와 名譽(명예)를 사려 하고, 高官(고관)이 財物(재물)을 탐내기 시작하면서 悲劇(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꽃과 과실은 동시에 얻지 못한다. 꽃이 떨어져야 과실이 열린다. 세상은 물과 같다. 배를 띄우는 것도 물이지만 배를 뒤집는 것도 물이다.
 
 조선시대 「大東奇聞(대동기문)」이라는 서적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가 개국공신들을 모아 놓고 조선 개국을 축하하는 주연을 베풀고 있었다. 술잔이 오가자 취기가 돈 어떤 늙은 정승이 「雪中梅(설중매)」라는 기생에게 치근댔다.
 
 『너는 東家食西家宿하는 기생이니 오늘 밤 이 몸의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설중매가 『東家食西家宿하는 천한 기생이, 어제는 王씨를 모시다가 오늘은 李씨를 모시는 정승 어른을 모신다면 궁합이 잘 맞겠나이다』 라고 받아쳤다.

 中庸의 野合 경계
 
 현대판 「東家食西家宿」이 있다. 野合(야합)에 능한 爲政者(위정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역사의 前轍(전철)이다.
 
 요즘 정치판의 野合은 「中庸(중용)」이란 말로 새 단장한 듯하다. 「包容(포용)의 정치」, 「相生(상생)의 정치」, 「中庸의 정치」라 하여 어중간한 中立(중립)을 선언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러나 「짖지 않는 개」는 필요 없다.
 
 인간이 세상에 난 이유는 저마다의 용도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늦가을의 마지막 잎사귀가 장렬하게 떨어지지 않으면 나무가 겨울을 나지 못한다. 꽃이 피는 것도 때가 와서 피는 것이고, 꽃이 지는 것도 때가 돼서 지는 것이다.
 
 분명한 자기 목소리로 運命(운명)을 맞이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 어중간한 中庸의 野合은 현대판 「東家食西家宿」과 다름없다.

 

順風取下 用役不多 (순풍취하 용역부다)

순풍에 불을 붙이면 힘이 들지 않는다.


하늘의 運勢

「삼국지」의 클라이맥스는 赤壁大戰(적벽대전)이다.
 
 제갈공명의 離間計(이간계)와 黃蓋(황개)의 智略(지략)이 연합하여 강대한 曹操(조조)에게 대승한 전투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하늘의 運勢(운세)가 어떻게, 왜 기울어 가는지 상세히 담겨 있다.
 
 사람의 머리에서 짜낸 戰略(전략)보다 하늘의 때가 결정적이라는 이치를 음미할 수 있다.
 
 後漢(후한) 말, 袁紹(원소)를 무찌르고 華北(화북)을 평정한 조조는 여세를 몰아 18만 대군을 동원해 대륙 통일에 나선다. 우선 유비를 처단하기 위해 손권에게 회유의 서찰을 보냈다.
 
 「사냥하러 나오는 유비를 죽여 荊州(형주: 湖南省)를 귀국과 나누어 갖고, 향후 우리 두 나라가 영구히 和親(화친)합시다」
 
 손권은 조조가 미덥지 못해, 회신을 미루고 謀士(모사)들을 불러들여 어찌하면 좋을지 회의를 한다. 결론이 나지 않자 제갈공명을 초빙해 의견을 듣는다.
 
 공명은 「漢室復興(한실부흥)」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상대방의 체면을 세우고 이익을 얻고자 한다. 공명은 조조의 주력인 水軍(수군)이 숫자는 많지만, 투항한 지 얼마 안 되는 형주의 병사들이라 조조에게 충성심이 약하고, 水戰(수전)에 익숙지 않으며, 장거리 이동으로 질병이 만연하여 지금이 一戰(일전)의 適期(적기)임을 역설한다.
 
 조조軍의 허점을 들은 손권은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와 싸우기를 결심하지만, 참모들은 군사력의 優劣(우열)을 들어 결론을 내지 못한다. 최종적으로 손권의 오른팔인 주유의 의견을 듣기로 한다.
 
 공명은 주유의 감정을 자극해서 화가 난 주유가 조조와의 싸움을 결정하게 한다. 공명은 지략으로써 조조와 손권의 연합을 막고, 오히려 유비와 손권이 연합하여 開戰(개전)하는 데 성공한다. 협상하는 상대방과 차이가 나더라도 작은 부분은 놔두고 큰 것부터 합의해 간다는 「求大同存小異(구대동존소이)」 전술이다.
 
 중국인들이 거래할 때 반드시 세 군데 이상 가격을 비교해 결정하는데, 주유가 바로 전형적인 조조와 공명 사이에서 貨比三家(화비삼가)를 한 것이다.
 
 赤壁에 주둔한 조조가 水戰에 약한 북방의 병사들을 고려해 병사들이 배 위에서도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쇠사슬로 戰艦(전함)을 묶어 놓는다. 공명은 火攻(화공)으로 공격할 것을 주유에게 건의한다.
 
 주유의 부하 황개는 자신이 조조에게 거짓 투항하는 계략을 세워 火攻을 가까이에서 기습 전개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공명은 다시 한 번 지략보다 하늘의 기회를 강조한다.
 
 아무리 치밀한 지략이라도 하늘이 돕지 않아 逆風(역풍)이 분다면 허사라는 뜻이다. 『순풍에 불을 붙이면 힘이 들지 않는다(順風取下 用役不多: 순풍취하 용역부다)』고 설득한다.
 
 공명은 『동남풍이 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어느 날 밤, 동남풍이 불자 황개는 거짓 투항을 하는 척하고 10척의 전함을 끌고 접근한다.
 
 戰艦에는 기름을 잔뜩 먹인 마른 풀을 싣고 있었기에 금세 불길이 솟아올랐고, 때마침 불어온 동남풍에 쇠사슬로 묶어 놓은 조조의 戰艦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全燒(전소)되고, 강가의 軍營(군영)까지 불길이 타고 올랐다.
 
 조조는 대패하여 화북으로 후퇴하고, 결국 손권의 강남 지배가 확정되었으며 유비도 형주 서부에 세력을 얻어 중국 天下三分(천하삼분)의 형세가 확정되었다.
 
 후세의 智略家(지략가)들은 적벽대전을 지략의 결정판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지략으로만 치면 조조의 지략이나 황개의 지략이나 비등했다.
 
 
승리는 기다리는 자의 몫
 
 공명의 「知天命(지천명)」이 없었던들 대세를 장악한 조조의 굳히기가 유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운세를 읽은 공명의 지혜가 전장의 승패를 결정했다.
 
 「順風取下 用役不多」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기회를 보는 안목과 함께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당장 형세가 불리하다고 조급해하고, 유리하다고 輕擧妄動(경거망동)하면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승리는 기다리는 자의 몫이다. 세상을 도모하는 큰일일수록 인간의 지략보다는 하늘의 기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끈기만큼 드러나지 않은 큰 지혜는 없다.
 
 하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큰 그릇이 바로 큰 인물이다. 大選을 앞두고 정가가 어수선하다. 과연 누가 큰 그릇이 될 것인가

 

 

允執厥中 (윤집궐중)

「진실로 그 중심을 잡는다」


堯임금의 유훈
 
중국 堯(요)임금 때의 일이다. 堯임금이 微服(미복)을 하고 민정시찰에 나섰다. 아이들이 노래하기에 가만히 들어 보니 임금을 칭송하는 가사였다. 堯임금은 흡족해하며 다음 마을로 향했다. 이번엔 늙은 농부가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堯임금은 가만히 가사를 들어 보았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임금이 소용 없다니…」
 
 호위하던 신하는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堯임금은 달리 해석했다. 「백성이 임금의 존재를 알지 못할 정도로 태평성대이니 백성을 잘 다스린 결과」라고 흡족해했다. 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鼓腹擊壤(고복격양)」이다.
 
 堯임금은 9男2女의 자식들 대신, 어진 舜(순)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었다. 그때 그는 이런 글을 내렸다.
 
 <人心惟危(인심유위)하고
 道心惟微(도심유미)하니
 惟精惟一(유정유일)하여
 允執厥中(윤집궐중)하라>
 
 『인심은 위태롭고, 도덕은 미미하니, 오직 살피고 집중하여 그 가운데를 틀어 잡아야 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堯임금은 「允執厥中」 네 글자, 더 엄밀하게 「中」자 한 글자를 통치이념으로 남긴 것이다. 允執厥中을 풀이하자면 「진실로 그 중심을 잡는다」란 의미다.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말고 中庸(중용)의 입장에서 정책을 펴라」는 의미다.
 
 中道(중도)를 잃으면 偏見(편견)·偏食(편식)·偏愛(편애)하고 사람을 편 가르는 망발을 하게 된다. 中庸을 취해야 한다. 「中」은 부동의 절대원칙이나 이념이 아니다. 우물의 깊이가 다르면 중간이 달라진다. 이처럼 매사 시시각각 달라지는 양 극단의 중간을 틀어잡는 것이 「中」이다.
 
 어중간한 算術的(산술적) 「2분의 1」은 「물타기」에 불과하다. 필요에 따라 兩極(양극)의 의견을 적절히 끌어다 활용하는 것이 진정한 中庸이다.
 
 孟子(맹자)는 『孔子(공자)의 道는 주어진 시대적 상황에서 最適(최적)의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고 말했고, 그런 정신을 「時中(시중)」이라고 명명했다. 보통 孔子의 핵심 정신을 「一以貫之(일이관지: 하나로 꿰뚫고 있음)」나, 「忠恕(충서: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他人들에 대하여 자기를 미루어 생각함)」라고 한다. 하지만 맹자는 「中和」와 유사한 「時中」을 택한 데 주목해야 한다.
 
伯夷·叔齊보다 諸葛亮이 忠  
 
 「止於至善(지어지선)」은 大學(대학)의 실천 강령 중 하나다. 여기에서 「至善」은 「사리로 보아 지극히 당연함」이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至善은 「絶對善(절대선)」이 아니다 그때그때 상황을 전제로 하는 「相對善(상대선)」이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사나이의 포부를 포효하는 강령이 아니라 혼자서, 집에서, 사회에서, 국가에 몸담을 때마다 적절한 처신을 해야 한다는 「時中」의 의미다. 그래서 「至善」을 「中」과 동의어로 본다.
 
 魯(노)나라 임금 定公(정공)이 당시 大司寇(대사구: 지금의 법무부 장관) 벼슬을 하던 孔子에게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며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일을 어떻게 합니까』
 
 孔子가 명료하게 답했다.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禮로서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忠으로서 해야 합니다』
 
 「忠臣(충신)」이란 누구인가. 임금에게 듣기 좋은 말이나 苦言(고언)만 일삼는 신하 모두에게는 해당이 없다. 忠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忠」이란 가운데 中 밑에 마음 心변이 있는 형성자다. 가운데 있어 그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中(中庸)의 마음, 편중된 이념이나 정책을 당파로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에 맞게 적절한 정책을 간언하는 마음이다.
 
 그런 면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죽은 伯夷(백이)와 叔齊(숙제)의 忠節(충절)보다 諸葛亮(제갈량)의 변화무쌍한 지혜가 忠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人파出名, 猪파壯 (인파출명, 저파장)

돼지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목에 칼이 들어오고, 사람은 이름이 나면 구설수에 휘말린다


有名稅

장터에서 두 사람이 엿장수에게 엿을 샀다. 어진 사람은 「이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는 마을 노인들께 이 엿을 奉養(봉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 사람은 도둑이었다. 그는 「끈적끈적한 엿을 남의 집 문틈에다 밀어 넣으면 문 밖에서 문고리를 손쉽게 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엿이지만 사람이 쓰는 用度(용도)에 따라 相剋(상극)으로 갈린다.
 
 얼마 전 인터넷에 공개된 일화다. 한 사람이 권위 있는 잡지에 이렇게 寄稿(기고)했다.
 
 「변호사나 창녀나 똑같다」
 
 누가 감히 이런 말을 律師(율사)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한단 말인가. 당장 반박논리가 가마솥처럼 들끓고, 기고자는 명예훼손 被疑者(피의자)로 법정을 들락거리거나, 적어도 괘씸죄로 사회에서 매장당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응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오히려 박수까지 받았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원로 변호사였고, 기고된 잡지는 법률 전문지였다.
 
 유사한 일화가 있다. 어느 신축 건물 공사장에서 일꾼들이 간식시간에 같이 일하는 동료를 불렀다.
 
 『이 노가다 자식아, 한잔 처먹고 해』
 
 『그래 임마. 한잔 줘봐』
 
 상대방이 이렇게 싱글벙글 받아 넘겼다. 신축건물 주인이 이 광경을 보고, 일꾼들의 노고를 격려하기 위해 술값 하라며 수표 한 장을 건넸다. 친근감을 표시하려고 빈 술잔을 집어들고 술 한잔을 청했다.
 
 『나도 한잔 줘봐, 노가다들아』
 
 일꾼들은 노발대발하며 『우리가 거지냐』며 건물주인의 멱살을 잡았다. 좋은 의도와는 달리 낭패를 본 것이다. 두 경우 모두 是非(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適材適所(적재적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지위에는 代價가 따른다. 有名稅(유명세)가 그것이다. 유명세의 「세」자는 세력(勢)이 아니고 세금(稅)이란 의미다. 有名稅에 대한 一喝(일갈)이 「人出名, 猪壯(인파출명, 저파장)」이다. 뜻을 그대로 풀면 「사람은 이름 나는 걸 두려워하고, 돼지는 덩치 커지는 걸 두려워한다」이다.
 
 돼지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목에 칼이 들어오듯, 사람은 이름이 나면 구설수에 휘말리기 쉽다는 얘기다.
 
 아이들끼리 싸움을 해서 자기 자식이 맞고 들어오면 그 부모는 당장에 달려가 때린 부모에게 항의한다. 때린 아이 부모는 맞은 아이 부모에게 면전에서 싹싹 빌지언정, 뒤돌아 서서는 웃는다.
 
 반면 사과는 받아 냈지만 맞은 아이의 부모는 후련하지 않다. 근래 모 재벌 회장의 폭행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여러모로 사회정의의 문제라기보다 有名稅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사람이 자식들 싸움으로 치고 박고했더라면 언론이 실시간 「수사 속보」를 내보내면서까지 이렇게 요란스러웠을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엽다고 한다.
 
 어떤 부모라도 맞은 자식에 대해 분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야 인지상정이겠지만, 이분은 有名稅 때문에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좀더 신중히 대처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국시대 齊(제)나라 威王(위왕) 때의 일이다. 威王이 즉위한 지 9년이 되었지만 간신 周破湖(주파호)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를 보다 못한 후궁 虞姬(우희)가 威王에게 간곡히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北郭(북곽) 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옵소서』
 
 이 사실을 안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했다. 威王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다.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 내려고 했다. 威王은 아무래도 미심쩍어 우희를 불러 직접 신문했다.
 
 우희는 이렇게 말했다.

오이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아야  

『전하, 臣妾(신첩)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靑天白日(청천백일)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신첩이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제 不德(부덕)입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시오소서』
 
 威王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威王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은 「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세 가지 불행
宋(송)나라의 한 학자는 남자의 세 가지 不幸(불행)을 말했다. 첫째가 초년에 登科(등과)해 官職(관직)에 나아가 출세하는 것, 둘째가 부모의 後光(후광)으로 높은 벼슬을 하는 것, 셋째가 능력이 좋은데 문장까지 탁월하고 생김새가 美男(미남)인 경우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조건을 不幸이라고 한 이유는 「極上(극상)하면 自滅(자멸)」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위치에 오르면 그때부터 스스로 멸하는 법이다.
 
 어떤 재력가가 『어떻게 하면 우리 가문이 대대로 富(부)를 이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기에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제발 좀 국민에게 많이 로비하십시오. 그 정도의 재력을 가지셨다면, 代를 이어 재물을 물려가는 것도 좋지만, 국민에게 많이 돌려 주셔야 합니다』

 

喜怒哀樂 不形於色(희로애락 불형어색)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라


중국인의 商術

우리나라와 中國(중국)의 교역량이 미국보다 앞섰다. 양국은 이제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교역국이 됐다.
 
 우리가 중국에 수출하는 대표적인 품목의 하나가 「韓流(한류)」다. 우리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 주어 뿌듯하다. 그러나 희희낙락할 때가 아니다.
 
 중국 농산물이 우리 식탁을 점령한 지 오래다. 중국 상품은 低임금, 「짝퉁」으로 대변되는 싸구려 저질 이미지를 빠르게 脫皮(탈피)하고 있다.
 
 中低價(중저가), 高품질 제품이 속속 등장하면서 한국 상품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韓流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文化(문화)란, 優劣(우열)보다 개성으로 서로 교류하는 특성이 있다. 시간차를 두고 서로 주고 받게 마련이다.
 
 내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輸入(수입)하고 싶은 「中國流」가 있다. 바로 「喜怒哀樂 不形於色(희노애락 불형어색)」이다. 얼굴빛에 울고 웃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쳇말로 「포커 페이스」라고 한다.
 
 중국인들의 商術(상술)은 유명하다. 全세계에 華僑(화교)들이 진출해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가 없을 정도다. 그들의 사업 밑천이 바로 喜怒哀樂 不形於色다.
 
 중국인들은 사업 파트너의 인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우리 같으면 사업 파트너에 대해 품성이나 취향 등을 이리저리 재볼 테지만, 중국인들은 단지 금전적인 관계로 인간을 대한다. 성격이 맞건 안 맞건 철저하게 사업 목적을 위해 대한다.
 
 중국 商人들은 사업 파트너가 위급하게 되면 절대로 냉정하게 돌아서지 않는다. 자기에게 손해를 입혔더라도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건 상대방을 배려해서가 아니다. 상대방이 망하면 그때까지 투자한 자신의 본전에 손실을 입기 때문이다. 일단 살려 내서 나중에 받아 내자는 배짱이다.
 
 敵(적)을 쫓으면서 한편으로는 구조선을 보낸다는 「危中救急(위중구급)」은 그네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기만했어도 절대 화를 내 보복하거나 궤멸시키지 않는다. 철저하게 감정을 숨기고, 오히려 은혜를 베푼다. 이런 의미로 중국인들은 「敵에게 소금을 보낸다」는 말을 쓴다. 복수 대신 유용한 물건을 보내 적대감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감정을 얼굴에 잘 안 드러내는 중국인들의 민족성 때문인지, 중국은 얼굴에 쓰는 假面(가면)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영화 「패왕별희」에 잠시 등장했지만, 순식간에 가면이 탈바꿈되면서 10여 개의 얼굴 표정이 연출되는 장면은 영화 팬들의 腦裏(뇌리)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靜中動」  

중국인들의 포커페이스에는 유래가 있다.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에 離合集散(이합집산)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主君(주군)이 등장하는 와중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喜怒哀樂 不形於色은 「靜中動(정중동)」을 말한다. 돌부처처럼 무심한 것이 아니다. 속으로는 부단히 움직이면서 상대방에게 내 수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근 韓美FTA 협상과정을 보면서 喜怒哀樂 不形於色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기자들이 관찰해 보니, 협상장 밖을 빠져나가는 美國 대표들의 표정은 한결 같아서 도저히 진행 상황을 미뤄 짐작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 협상 대표들의 얼굴에는 만족과 실망의 감정 표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더라고 했다.
 
 공식 브리핑 결과와 맞춰 보니 한국 대표들의 표정 변화와 일치했다고 한다. 미국 협상단이 우리 협상팀의 얼굴을 읽었다면, 상대방의 패를 보고 게임을 한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된다.
 
 西歐(서구) 선진국의 대기업들이 사원들에게 가르치는 「바이어와의 협상 원칙」에는 포커 페이스가 明示(명시)돼 있다고 한다.
 
 「제시된 가격이 이상적이더라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추가적인 협상 여지를 남긴다」
 
 喜怒哀樂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마음이 순수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끼리 부대끼면서 살아갈 때는 喜怒哀樂 不形於色이 지혜다.
 
 우리나라 사람은 돈이 있으면 은근히 자랑을 하고 다닌다. 이를 알아챈 주위사람들은 『사장님』, 『회장님』 하며 아첨을 한다. 그런 부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아는 한 여성 사업가는 『큰 계약을 할 때 절대 남편에게도 자랑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감정이 드러나면 남에게 속마음을 도둑맞는다』고 했다.

 

兩虎相爭 必有一傷(양호상쟁 필유일상)

큰 세력이 서로 다투면 어느 쪽이든 큰 피해가 발생한다.


둘이 목숨 걸고 싸우면 兩敗俱傷

大權(대권) 경쟁이 漸入佳境(점입가경)이다. 유력한 大選 후보 예정자들이 잇달아 落馬(낙마)하고, 집권당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大選 예비 후보자 명단조차 윤곽을 잡지 못하고 있다. 막판 離合集散(이합집산)이 예고되는 이유다.
 
 野黨(야당)은 막강한 두 후보가 검증 논란으로 泥田鬪狗(이전투구)다.
 
 兩者(양자) 중 어느 의견이 더 옳은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두 거물급 大選주자들이 금도를 넘어설 경우 다른 변수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兩虎相爭 必有一傷(양호상쟁 필유일상).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 한 마리는 반드시 크게 다친다」는 뜻이다. 호랑이가 한번 싸우면 분명한 雌雄(자웅)을 겨룰 것이니 敗(패)한 쪽은 敗家亡身(패가망신)이 된다.
 
 勝者(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할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웠으니 勝者라 해도 상대방으로부터 입은 상처가 만만치 않다. 부상 입은 勝者도 체력을 탕진하여 기진맥진해 있을 것이다. 이때 다른 호랑이가 이 기회를 노리고 덤벼든다면 속수무책이다. 弱者(약자)라도 손쉽게 勝者가 될 수 있다.
 
 만약 사냥꾼이 지나가다 이 장면을 본다면 두 마리 호랑이를 손쉽게 포획하여 橫財(횡재)를 한 꼴이 된다. 목숨 걸고 싸운 두 호랑이의 입장에서는 양쪽이 다 패하고 상처를 입었으니 兩敗俱傷(양패구상)이 된다. 전후좌우 전체의 세력균형을 보지 못하고 힘만 믿고 덤벼들다간 兩敗俱傷이 되기 십상이다.
 
 정반대로 勢(세)가 약한 측에서는 자신은 힘을 축적하고 상대방이 기진맥진할 틈을 타서 漁父之利(어부지리)를 노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漁父之利는 權謀術數(권모술수)가 아니다.
 
 漁父之利의 계략으로 전쟁을 면한 춘추전국시대 燕(연)나라에 「蘇代(소대)」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세 치의 혀로 合縱策(합종책)을 펴 6國의 재상을 겸임했던 「蘇秦(소진)」의 동생이다.
 
 趙(조)나라 惠文王(혜문왕)은 이웃의 燕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燕나라는 齊(제)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하고 있었고, 그해 큰 기근까지 겹쳤다. 趙나라 惠文王은 이때를 놓칠세라 燕나라 침략을 서둘렀다. 燕나라 昭王(소왕)은 蘇代에게 趙나라 惠文王을 설득해 주도록 부탁했다. 蘇代는 惠文王을 만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부지리」의 계략  

『오늘 趙나라로 들어오는 易水(역수:燕·趙와 국경을 이루는 강)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보니, 까치가 날아와 강가에 있는 조개의 안쪽 살을 쪼려는 순간 조개가 입을 닫아 까치 부리를 물었습니다. 까치는 조개가 물이 말라 힘이 빠지면 말라 죽고 입을 벌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개는 까치가 입을 못 열어 굶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쌍방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지나가던 漁父가 이 둘을 망태 속에 집어넣어 잡아가 버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燕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燕나라가 「조개」라면 趙나라는 「까치」입니다. 燕·趙 두 나라가 공연히 싸운다면 백성들은 피폐할 것이고, 귀국과 접해 있는 저 강대한 秦(진)나라는 「漁父」가 되어 利得(이득)을 볼 것입니다』
 
 蘇代는 燕나라가 나름대로 趙나라의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강한 암시를 주면서 漁父之利를 말했던 것이다. 趙의 惠文王은 蘇代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옳다며 전쟁준비를 중단했다.
 
 과연 蘇代의 말이 진실인지 계략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漁父之利가 권모술수나 요행으로 해석되는 요즘 세태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漁父之利는 일종의 하늘이 준 기회다. 이 기회를 받아들이는 태도 여하에 따라 福(복)이 되기도하고 禍(화)가 되기도 한다. 현재 兩虎相爭의 당사자라면 目前(목전)의 敵(적)에게만 너무 憤氣撑天(분기탱천)하지 말고, 과연 잠재적인 敵들에게 오히려 이득이 되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야 한다.
 
 兩虎相爭의 제3자라면 漁父之利로 아무 노력 없이 수수방관하여 노력 없이 이득을 取(취)할 심사를 거둬야 한다. 두 마리의 싸움에서 드러날 장단점과 자신의 장단점을 점검하고 부족한 점을 만회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漁父之利를 흔히 쌍방을 이간질하여 힘 안 들이고 취하는 權謀術數로 해석하여 당장은 손쉽게 이득을 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쉽게 들어온 것은 쉽게 나간다. 하늘이 준 기회를 노력 없이 줍겠다는 心事(심사)는 自滅(자멸)을 초래한다. 漁父之利는 기회일 뿐 최종 成果(성과)가 아니다. 暴風前夜(폭풍전야)에는 하늘이 항상 각 당사자들에게 준비할 기회를 공평히 만들어 준다. 이 공백의 기회를 채갈 수 있는 者는 자기의 불리했던 점을 보강한 者다. 하늘의 뜻을 읽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天下(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은 하늘이 한다. 비록 하늘의 뜻을 읽었다 할지라도 변심하면 가차 없이 내치는 것이 준엄한 하늘의 理致(이치)다.

부족한 점 만회하는 기회로 삼아야

個人史(개인사)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자릿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승진 경쟁자는 늘 超過(초과)다. 요즘 세태는 「勝者(승자)가 결국 正義(정의)」라는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경쟁의 틈을 노려 손쉽게 漁父之利한 자가 제갈공명으로 偶像化(우상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의 긴 행로에서 최후의 승자는 난관을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고 善意(선의)의 競爭(경쟁)을 한 우직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兩虎相爭 必有一傷이 발생하는 원인은 간단하다. 서로 자신만이 궁극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넘치는 자신감, 더 소상히 말하면 자기 본인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大權은 하나이기 때문에 與野의 大選 후보들 중에는 현재에 이미 極上(극상)인 자도 있을 것이다. 頂上(정상)에 있으면서 한 발 더 오르려 하는 자가 있다. 한 발 더 내밀면 낭떠러지인데

 

三十六計 走爲上(36계 주위상)

이길 것 같지 않으면 도망가라.



패배의 수치 참는 것이 진짜 대장부

唐나라의 시인 杜牧(두목)이 烏江(오강)을 지나다가 「題烏江亭(제오강정)」이라는 詩(시)를 지었다. 1000년 전 烏江에서 자기 목을 찔러 자살한 項羽(항우)를 기린 내용이다.
 
 勝敗兵家不可期 (승패병가불가기)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전쟁에서의 勝敗는 알 수 없다. 패배의 수치를 참고 이기는 것이 진짜 대장부」라는 구절로 훗날을 기약하지 못한 項羽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 했다.
 
 어수룩한 劉邦(유방)이 天下(천하)의 項羽를 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劉邦의 군대는 천민·백정들로 구성된 下層民(하층민) 출신이 많았다. 劉邦 역시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식으로 무장한 학자나 꼿꼿한 관료를 좋아하지 않았다. 劉邦의 군대는 표면상으로 보기에는 규율이 잡혀 있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劉邦은 「馬上(마상)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馬上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태산이 높은 이유는 한 줌의 흙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고, 長江(장강)이 깊은 이유는 탁한 물도 포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훈시를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項羽는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項羽의 군대는 귀족자제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이 이끌었다. 규율이 엄하고 下向式(하향식) 명령계통이 분명했다.
 
 秦(진)나라 末期(말기)에 진승·오광이 亂(난)을 일으키자 沛公(패공)이라 칭한 劉邦은 秦나라 타도 기치를 내걸고 군사를 일으키지만 변변한 성과 없이 후퇴를 거듭한다.
 
 項羽는 많은 작은 전투에서 劉邦을 이겼지만 단 한 번의 패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승장구한 項羽는 垓下(해하)전투에서 애첩 우희를 잃고 四面楚歌(사면초가)에 몰려 처음으로 大敗(대패)하게 된다. 남은 20여 기마병을 이끌고 長江 기슭의 烏江에 도착한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亭長(정장)이 배 한 척을 내주고 훗날을 도모할 것을 간곡히 권한다. 하지만 패배의 굴욕감을 이기지 못한 項羽는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만다. 첫 大敗가 최후의 전투가 된 것이다.
 
 劉邦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敗戰을 거듭하며 36計 줄행랑을 놓던 수치 속에서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가장 힘든 처세술은 바보인 척 살기

「孫子兵法(손자병법)」에 적을 이기는 5가지 큰 計를 적시하고 있다. 아군의 형세가 유리할 때 勝戰計(승전계), 비등한 적의 허점을 노리는 攻戰計(공전계)·混戰計(혼전계), 내부의 적을 단속하는 倂戰計(병전계), 형세가 불리하여 역전하는 敗戰計(패전계)가 그것이다.
 
 열세에 놓여 역전이 역부족일 때, 敗戰計의 마지막 兵法(병법)으로 도망가는 走爲上이 떳떳하게 明示(명시)되어 있다.
 
 도망가는 것이 무슨 戰略(전략)이고 戰術(전술)이 되겠냐는 생각이 들지만, 전쟁에서 勝敗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패배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毛澤東은 中·日전쟁 중 장비·훈련·병력에서 앞도적인 일본군에게 후퇴에 후퇴를 계속하고, 나중에는 국민당 蔣介石(장개석) 군대에 온 대륙을 쫓겨 다녔다.
 
 그는 도망을 가면서 패배감에 사로잡혀 무모한 정면대결을 벌이지 않고, 게릴라전을 펴는 36計를 쓴 결과, 民心(민심)을 등에 업고 대륙을 통일하는 최후의 勝者(승자)가 됐다.
 
 일본 戰國時代(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휘한 兵法도 바로 마지막 36計다.
 
 천하의 覇者(패자)가 된 劉邦, 毛澤東, 도요토미의 공통점은 때에 따라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下心(하심)이었다.
 
 「손자병법」의 敗戰計가 가장 어려운 이유는 위기의 상황에서 스스로 자존심을 이기는 克己(극기)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지 말고 달아나서 승산 있는 형세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이다. 패배감에 사로잡힌 가미가제式 玉碎(옥쇄)와 走爲上은 정반대이다.
 
 孫子는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 중에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바보인 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도망갈 때 도망가는 것은 비겁한 게 아니다. 不利(불리)한 形局(형국)을 냉철하게 인정할 줄 알고, 자존심을 희생하고 모멸감을 참을 줄 아는 자만이 36計 走爲上을 펼 수 있다.

 

功遂身退 天之道(공수신퇴 천지도)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야 함이 하늘의 이치다.


상앙의 개혁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에는 『날카로우면 오래 보전할 수 없고, 在位(재위)가 높으면서 교만하면 災殃(재앙)을 자초하게 되며, 功(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야 함이 하늘의 道(도)』라 했다.
 
 옛사람들은 물러날 때를 아는 자가 하늘의 道를 아는 자라 했다. 욕심이 지나쳐 이런 이치를 간과했던 사례는 역사상 非一非再(비일비재)하다.
 
 戰國時代(전국시대) 秦(진)나라 때, 法家(법가)를 대표하는 상앙(상앙)이란 인물이 있었다. 秦의 왕이었던 孝公(효공)은 상앙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를 중용하여 강력한 法治主義(법치주의)를 통한 富國强兵(부국강병)을 표방한다.
 
 다섯 집이나 열 집마다 연대책임을 지는 「什伍連坐制(십오연좌제)」를 시행 했으며, 법을 범한 자를 고발하지 않거나 범인을 숨겨 준 사람은 적에게 항복한 자와 똑같은 형벌을 내리고, 범죄를 고발한 자에겐 적의 목을 벤 자와 똑같은 賞을 내린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戰功(전공)을 올린 자에게는 그 정도에 따라 작위를 부여하고, 개인적인 다툼에는 그 정도에 따라 刑(형)을 과하였다. 귀족과 같은 명문집안일지라도 戰功이 없는 자는 그 신분을 박탈하는 信賞必罰(신상필벌)제도였다 .
 
 그러나 法令(법령)을 즉시 公布(공포)하지 못했다. 너무 엄격하고 急進的(급진적)인 改革(개혁)이라 백성들이 과연 지킬지 의문이었고, 백성들은 지키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有名無實(유명무실)한 법이라며 半信半疑(반신반의)했기 때문이다. 상앙은 백성들이 不信(불신)하자 한 가지 꾀를 내서 榜(방)을 붙였다.
 
 「남문의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金(금) 10냥을 주겠노라」
 
 그런데 아무도 옮기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金 50냥을 주겠다고 써 붙였더니 한 사람이 『믿져야 본전』이라며 나무를 옮겼다. 상앙은 즉시 약속대로 金 50냥을 하사했다.
 
 일시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 소문이 퍼졌고 朝廷(조정)에서 公布(공포)한 법을 믿게 되었다.
 
 한번은 太子(태자)가 사형판결을 받은 귀족의 한 사람을 숨겨 주는 일이 발생했다. 「범인을 숨긴 자는 범인과 같은 죄」라는 법에 의해 태자가 死刑(사형)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상앙은 태자를 법에 따라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차마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죽일 수 없었다. 결국 상앙은 孝公과 상의하여 태자 대신 태자의 교육을 맡은 관리의 코를 자르고 태자의 스승을 형벌에 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성들은 감히 법에 어긋나는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상앙이 朝廷에 나선 지 5년 만에 나라 안에는 도둑이 사라졌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 가는 이가 없었으며, 길가의 과실나무에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도 감히 따 가는 사람이 없었다. 길가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지 않는다는 「道不拾遺(도불습유)」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秦나라는 질서가 잡히고 백성들 살림은 윤택해졌다.
 
물러날 때를 알아야

상앙

나라가 안정되자 상앙은 국력을 외부로 돌려 魏(위)나라를 征伐(정벌)하고자 한다. 이 정벌에서 큰 功을 세운 상앙은 높은 지위와 상금으로 15개 읍을 봉토로 받게 된다. 상앙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강도 높은 개혁을 강행했다. 그런데 왕인 孝公이 죽을병에 걸리게 되었다.
 
 孝公은 죽으면서 상앙을 불러 마지막 충고를 했다.
 
 『商君(상군)은 내 말을 잘 들으라. 그동안 엄격한 법 집행으로 富國强兵을 이룩했다. 그러나 감히 내색하지는 않고 있을 뿐이지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怨聲(원성)이 그대를 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라. 이제라도 官職(관직)에서 물러나서 조용히 後患(후환)을 피하라. 내가 없으면 누가 그대를 보호하겠는가』
 
 하지만 상앙은 『法治國家(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孝公의 충고를 묵살하고 자리를 지키며 엄격한 법령 改革을 계속해 나갔다.
 
 孝公이 병으로 세상을 뜨자 마침내 태자가 惠王(혜왕)으로 즉위했다. 惠王은 과거에 상앙으로부터 자기 대신에 스승이 코를 잘리는 刑罰을 지켜봐야 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惠王이 들어서자 그동안 법으로 피해를 보았으면서도 말을 못 했던 신료들은 일제히 상앙을 逆賊(역적)으로 모함했다.
 
 상앙은 낌새를 채고 재빨리 국외로 줄행랑을 쳤다. 千辛萬苦(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국경 근처의 한 여인숙에 피신해 들어갔다. 그러나 여인숙 주인은 숨어든 상앙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國法에 따라 증명서가 없는 사람을 재울 수 없소이다. 저까지 죄책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제야 상앙은 자신이 제정한 법률이 가혹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상앙은 군대에 잡혀 그가 정한 逆賊의 刑罰대로 거리에서 처참하게 사지를 찢기는 「車裂(거열)」이라는 극형을 당하고 九族(구족)이 滅(멸)하게 되었다.
 
 개혁의 反對給付(반대급부)로 그 피해자가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人情(인정)을 무시한 原理原則(원리원칙)의 주역들은 결국 개혁에 스스로 발목을 잡혀 조금 더 위세를 연장하려다 때를 놓쳐 상앙 같은 길을 걷고 만다.
 
 달은 차면 기울고 꽃은 피면 떨어진다. 「공을 세웠더라도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바로 하늘의 도다(功遂身退 天地道)」 물러남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도리를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알지 못할까. 인간이 자신의 絶頂(절정)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그릇 크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다. 결국 하늘의 道란 자신의 됨됨이를 아는 것이다

 

防蹈海 無露圭角(방도해 무노규각)

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언행에 모가 나지 말아야 한다.


杜衍의 무모한 충절

暴君(폭군)을 主君(주군)으로 모셔야 하는 臣下(신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반드시 暴君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뜻과 相衝(상충)되는 上司(상사)를 둔 사원도 동일한 경우다. 어떻게 해야 올바른 處身(처신)이 될 것인가.
 
 최근 某 대기업의 總帥(총수)가 가장 잘나가는 사업 분야의 사장들을 집합시켜 놓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호통을 친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떠날 때 떠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원들에게는 靑天霹靂(청천벽력)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청춘을 바쳐 회사를 위해 일하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근무했는데 떠날 때 떠나라니.
 
 하지만 그 속뜻을 잘 새겨야 한다. 「한 회사를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는 생각 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매너리즘이 배어 있지 않나 돌이켜 봐야 한다. 그 總帥는 간부들이 몇 년간 계속된 好況(호황)을 後光(후광) 삼아 자기 노력과 능력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警告(경고)를 한 것이다.
 
 나그네처럼 조금 유리한 연봉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끝까지 떠나지 않고 固守(고수)하겠다는 쪽도 지조와 절개, 충성으로 포장된 無事安逸(무사안일)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宋(송)나라 杜衍(두연)의 일화는 忠節(충절)이 무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던진다.
 
 宋나라 仁宗(인종)은 韓琦(한기), 范仲淹(범중엄), 歐陽修(구양수), 司馬光(사마광), 張載(장재), 程顥(정호) 등과 같은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여 國政(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유능한 신하들 간에 名論(명론)과 卓說(탁설)로 잦은 충돌을 일으켜 조정은 늘 시끄러웠다. 이들은 黨派(당파)를 이루어 兩黨(양당)이 서로 교대로 정권을 잡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20년 동안 내각이 17회나 갈렸으니,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慶曆(경력)의 黨議(당의)」라 했다.
 
 신하들 중에 杜衍이란 강직한 재상이 있었다. 性品(성품)이 절개가 곧고 강직하여 임금에게 直言(직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內降(내강)」이라는 임금의 관습이 있었다. 內降이란 「임금이 詔書(조서)를 내릴 때, 신하들과 상의하지 않고 임금 뜻대로 명을 내리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강직한 두연은 이 관습이 올바른 정치의 길을 막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임금의 詔書가 내려오면 수십 장이 쌓이도록 放置(방치)했다가, 말없이 되돌려 보냈다. 드디어 반대파의 신하들은 이를 보고 임금의 교지를 왜곡하는 행위라고 맹비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仁宗 또한 내심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杜衍의 사위인 소순흠이 관리자로서 공금을 유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國庫(국고)로 관청의 손님을 초대해 기녀를 불러 酒宴(주연)을 베푼 사건이었다. 杜衍의 반대파였던 왕공진이 소순흠을 취조하여 여러 명이 연루된 사실을 알아내 모두 하옥시켰다. 杜衍은 이 사건으로 재상에 오른 지 70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숙적을 일거에 제거한 왕공진은, 『나는 한 그물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잡았다』며 기뻐했다. 여기에서 「一網打盡(일망타진)」이란 말이 유래되었다.
 
 임금이 暴君이 아니었고 杜衍이 직접 연루되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평소에 모난 행동으로 말미암아 임금과 반대파에 미움을 산 결과였다. 충절이 평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다.
 
 반면 올바르게 忠言(충언)을 하면서 현명하게 처신하여 禍(화)를 면한 箕子(기자)라는 인물이 있다.
 
미친 척해서 목숨 건진 箕子  

 고대 중국 殷王朝의 마지막 군주인 紂王(주왕)은 원래 智勇(지용)을 겸비한 賢主(현주)였다. 그러나 그가 정복한 북방 오랑캐의 有蘇氏國(유소씨국)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라는 희대의 妖女毒婦(요녀독부)를 맞이하면서 역사의 暴君으로 치닫게 된다.
 
 신하들은 紂王의 暴虐(포학)을 諫(간)하고자 여러 방도로 의논을 했다. 그때 신하 중에 箕子라는 현명한 신하가 있었다.
 
 어느 날, 紂王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게 했다.
 
 箕子는 그것을 극구 말렸다.
 
 『임금님, 상아로 젓가락을 만드는 일을 그만두소서!』
 
 그러자 紂王은 성을 냈다.
 
 『그래, 임금이 이까짓 젓가락 하나를 못 만든단 말인가?』
 
 紂王이 듣지 않자 箕子는 紂王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신하들은 「그까짓 젓가락 하나 때문에 벼슬을 버리려 하느냐」며 수군댔다. 그러자 箕子는 이렇게 말했다.
 
 『그까짓 젓가락 하나가 아닙니다. 상아 젓가락이 생기면 거기에 맞도록 옥그릇으로 바꿀 것이며, 옥그릇에 밥을 먹으면 거기에 어울리도록 음식을 山海珍味(산해진미)로 바꿀 것입니다. 山海珍味를 먹으면 옷이 초라해 보여 비단옷으로 바꿀 것이고, 비단옷을 입으면 거기에 걸맞은 금은보화로 치장을 할 것입니다.
 
 음식과 옷을 바꾸면 궁전을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을 것이고, 궁전을 다시 지으면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금 한 사람의 사치는 마침내 온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 것입니다』
 
 과연 紂王은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國庫를 기울여 시설한 酒池肉林(주지육림) 속에서 晝夜長川(주야장천) 飮酒暴樂(음주폭락)으로 나날을 보냈다.
 
 충신들은 諫言(간언)을 했다. 그러나 처형당하거나 유폐되었다. 忠諫者(충간자)를 처형하고 요녀 달기가 웃는 모양을 보기 위해 극악한 ?烙之刑(포락지형)을 일삼았다.
 
 어느 날 紂王이 주색에 빠져 놀다가 신하들에게 「오늘 날짜가 며칠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紂王과 같이 유희에 빠졌던 신하들은 날짜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紂王이 箕子를 불러 날짜를 물었다.
 
 箕子는 당연히 날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천하의 주인이면서 날짜를 모르고 주위의 고위관직 신하들까지 모른다고 하는데 만약 내가 아는 척하면 그들의 시샘을 사서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충신들이 폭정에 굴하지 않고 간언을 하다가 紂王의 노여움을 사서 비참하게 죽거나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箕子는 아예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저잣거리로 돌아다녔다.
 
 怨聲(원성)이 하늘에 닿아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離叛(이반)당한 紂王은 결국 周나라의 武王(무왕)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모난 언행을 삼가야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가 난 언행을 삼가고, 언제든 떠날 각오로 일한다면 無事安逸(무사안일)이나 떠돌이 폐해를 모두 피할 수 있을 것이다.
 
 政治(정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 지금은 바야흐로 百姓(백성)의 시대다.
 
 백성이 임금을 택하는 시대다. 임금이 獨斷(독단)으로 신하를 호령하고 백성에 군림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현대는 오히려 君主가 백성의 눈치를 잘 살펴야 나라가 평안한 시대인 것이다. 백성의 처지와 마음을 잘 이해하는 모가 나지 않은 성품의 君主가 현대에는 더 적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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