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영화 연재를 시작합니다.
윤용규 감독 1949년작 |
내가 처음 접했던 영화는 1977년도 이원세 감독의 “엄마 없는 하늘아래” 였다. 지금에 와서, 당시 故 박정희 전대통령이 이 영화에 감명받아 전국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단체관람 시켰다던 말을 들었다. 당시 1학년이었던 나는 집 안에 일이 있어 등 떠밀려 내쫓기다시피 보았던 영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슬펐던 영화였지만 들키기 싫어서 집에 돌아와 남몰래 슬피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故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영화를 몇 번씩 보게 되어서 더 가슴에 남아있나 보다.
지금도 항상 영화를 볼 때면 생전 처음 접했던 스크린의 웅장함과 설레임, 흥분, 그리고 가슴 에이는 슬픈 감정들을 지금도 떨쳐 버릴 수 없다. 이렇듯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보았던 감정과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최근 쏟아지듯 나오는 영화의 홍수 속에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내 자신에게 묻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들어보곤 하지만 천차만별의 말들이 내 귓속을 맴돌 뿐이다. 그래서 더욱더 뭔지 모를 매력이 있는가 보다. 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영화를 나는 사랑한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많은 흥미위주의 영화 속에서 불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 등의 다양한 종교 영화가 세상에 태어나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에 친숙한 불교 영화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장르 가운데 하나이다.
양적, 질적 측면에서도 우수한 작품이 적지 않고 현재에도 꾸준히 제작되고 사랑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로카르노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배용균 감독), "유리"(칸느 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양윤호 감독), "아제 아제 바라아제"(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 임권택 감독) 등 많은 작품의 수상과 더불어 찬사가 쏟아졌고 대중적 불교 영화로서 관객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좀 넓은 의미의 불교영화는 약40여 편이 넘는 듯 하다. 그 중에서 연도별 불교영화를 대략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 꿈(신상옥, 1955), 원효대사(장일호, 1962), 성불사(윤봉춘, 1950), 이차돈(김승옥, 1962), 사명당(안현철, 1963), 석가모니(장일호, 1964), 꿈(신상옥, 1967 리메이크), 세종대왕(이규웅, 1970), 서산대사(전조명, 1972), 파계(김기영, 1974), 관세음보살(최인현, 1978), 호국 팔만대장경(장일호, 1978), 만다라(임권택, 1981),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1989), 우담바라(김양득, 1989), 아제 아제 바라아제(임권택, 1989), 오세암(박철수, 1990), 꿈(배창호, 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정지영, 1991),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김혁, 1992), 화엄경(장선우, 1993), 카루나(이일목, 1996), 유리(양윤호, 1996), 달마야 놀자(박철관, 2001), 동승(주경중, 2003), 보리울의 여름(이민용, 2003), 오세암(애니, 성백엽, 2003),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김기덕, 2003)…….
수행과 깨달음, 불교 설화, 무협영화의 배경, 불교 인물, 역사관련 등 그 유형도 다양하다.
불교영화는 대중 속에 숨 쉬고 있는 한국의 이미지를 영화로써 세계에 소개시켜 왔으며 그 역할을 충분히 해왔다. 그러하기에 앞으로 좀 더 발전 되어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으며, 신비주의적 접근도 좋지만 좀 더 대중 속에서 숨쉬고 공감하는 영화로 거듭 태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종교영화 뿐만 아니라도 탈한국, 세계 속의 한국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모습을 벗어 던질 때 진정으로 우리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영화, 감동적이고 우리 영혼 속에 살아 숨쉬는 탈한국 영화가 되리라 믿는다.
본시 불교에 관한 영화만을 소개하고자 하였으나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불교영화는 그 수가 적고 또 너무 딱딱한 글이 될까 우려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들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2001)
노스님이 나무 바닥에 반야심경을 쓴다. 남자는 아내를 죽인 칼로 이를 새긴다. 마음을 다스리려 하지만... |
이 영화의 수상경력은 화려하다. 한국에서 청룡영화상(2003)과 대종영화상(2004) 수상을 시작으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10개의 수상메달과 7개 부문의 후보작으로 노미네이트된바있다. 최근 영화중에 가장 세계적인 한국의 불교영화란 의미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란 제목에서 암시하듯, 주제는 인과응보, 윤회다. 경상북도 청송의 주산지의 기막힌 영상을 배경으로 인생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자연의 사계절과 조응하며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기만 해도 눈이 호사를 누리는 영상미와 처절한 인간의 번뇌가 대비되면서 인생의 봄, 자연의 봄이 시작된다.
봄은 인간의 업(業)이다. 동자승이 물가에서 개구리를 잡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다가 살생의 업을 진다. 노스님이 야단을 치지만 천진한 동자승은 아랑곳없다.
여름은 욕망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산사에 17세 동갑내기 소녀가 몸이 약해 요양하러 머문다. 청년과 소녀는 자연 속에서 순수한 사랑을 나눈다. 신기하게 소녀는 병이 완치된다. 소녀가 떠나자 청년은 잊지 못하고 집착은 날로 심해진다. 결국 그녀를 찾아 산사를 도망친다. 산사엔 노스님만 홀로 남는다.
가을은 고통의 계절이다. 10년이 지난 뒤 더벅머리로 장년이 되어 다시 산사로 도피해 돌아온다. 배신한 아내를 죽이고 도피해온 것이다. 푸르던 나뭇잎이 처절하게 말라 비틀어져 낙엽이 되듯 그는 고통과 분노로 타들어간다. 불상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려하자 노스님은 그를 심하게 매질한다. 남자는 노스님이 나무 바닥에 써준 반야심경을 아내를 죽인 칼로 조각하며 마음을 다스리려 한다. 그러나 형사들이 찾아와 연행해간다.
겨울은 허무와 구도(求道)다. 형을 마치고 어느덧 중년이 된 남자는 다시 산사로 돌아온다. 노승의 사리를 수습해 얼음 불상을 깎고 돌부처를 허리에 줄로 매서 산꼭대기로 오르는 고행을 자처한다. 이제 남자가 나이가 들어서 선(善)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을 무렵, 한 여인이 아이를 남겨둔 채 도망친다. 남자는 노승이 되었고 그 아이는 동자승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봄. 머리 깎고 승복 입은 동자승이 물고기에 돌을 매서 살생의 업을 짓는다.
영화 속의 숨은 상징 코드를 알면 한결 흥미롭다.
문을 통과하는 행위는 규율을 상징한다. 물 위에 떠 있는 대문과 법당 내부에 서 있는 두 개의 문 3개의 상징적 문이 있다. 벽 없이 덩그러니 서있는 문들은 ‘이미지의 문’이다. 청년은 여자와 성관계를 가질 때 평소 드나들던 문을 통과하지 않고 여자에게 접근한다. 반면 여자는 문을 경유해 남자와 만나는 동선(動線)을 보인다. 김감독은 이 설정에 대해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
“문을 벗어나는 행위가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도덕적 삶만이 인간적인 건 아니다”
고양이는 욕망이다. 노승은 고양이 꼬리에 먹물을 묻혀 나무 바닥에 반야심경을 쓴다. 욕망의 정화다.
김기덕 감독은 미국의 선댄스 영화제에서 영화를 만든 의도를 이렇게 피력했다.
“사계절에 비유되는 우리의 삶을, 깊은 산속 연못 위에 단아하게 떠 있는 사찰에 살고 있는 스님과 그 주변의 자연을 통해 그려본다. 동자승이 소년이 되고 청년,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는 한 인물의 다섯 단락 이야기를, 각 계절의 시작과 끝의 이미지를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내재하고 변해가는 속성과 숙성의 의미를, 그렇게 순환되고 생성하는 우리의 삶을.......순수 속의 잔인함, 욕망속의 집착, 살의 속의 고통, 번뇌 속의 해탈을.....
기(氣)가 육체를 만들고 육체가 단풍처럼 변하고 썩어 이슬로 땅에 스며드는 사람이, 사계절의 반복과 무엇이 다른가?”
세계 최대의 인터넷 영화 사이트에서 이 영화에 대해 전 세계 7622명이 만족도 투표를 참여했는데 10점 만점에 8점이란 고득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대부분 찬사를 보내지만 비판 내용도 있다. 하워드(캐나다)가 올린 글을 인용하면 이렇다.
“영적인 영감을 주는 영화들은 종종 인간정신의 우월성을 재현함에 있어서 신비롭고 억제된 느낌을 준다. 다른 관점에서 관객에게 자신들의 영화가 얼마나 영적인가를 보이고 감동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영화들은 가끔 그들의 시도에서 실패하게 되는데, 어색한 지나친 자기중심적인 모습 그 이상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깊고 힘든 과정에 대한 상투어를 반복하고 있다. 윤회란 이름으로.”
이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반복’의 의미에 대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깨달음이란 과보나 윤회를 끊는 것인데 단지 자신의 인과응보 해석에 그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과보를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엔 인과응보에 대한 해석만 있다. 과거 지향적 해석이고 현재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단지 과거 인과의 결과만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의 결과라는 측면이 간과되어있다. 인과응보이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과보가 생길 수 있다는 메시지가 현실적이지 않는가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이 과연 선택적인가. 생노병사가 선택적인가. 인연이 마주쳤을 때 처신해야하는 인간의 선택이 결여되어있다. 이것이 현재다. 과거로부터 온 인과의 연장선이지만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현재의 선택은 없고 결과만 있는 과거 해석. 인과응보는 없다고 주장하며 무작정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유효할지 모르나 이영화의 관점은 자칫 운명론이나 맹목적 신념의 위험이 도사린다. 이러한 이유는 윤회의 주체인 영혼이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영화는 물질(육신)의 순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건의 윤회, 정신의 윤회도 환생이란 이름으로 육신 순환의 일부처럼 묘사되어있다. 물리학의 에너지 보전 법칙처럼 과보를 인수분해 하여 총합과 비교하여 해를 구하는 이른바 기계적 합리성. 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영혼의 성숙이다. 영혼의 성숙은 윤회의 일탈을 의미한다. 해탈이란 과거의 회상을 통해 과보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김기덕 감독은 노년기 산사에서 선을 통해 과보를 회상하며 기거함을 해탈로 그리고 있으나, 홀로 고독하여 사건도 없으니 그것으로 인과도 잔잔해진 것이지 진정한 해탈은 아닐 것이다. 일종의 도피인 것이다. 도피가 해탈이라면 골방 속에 갇힌 고립이 해탈로 미화될 수 있다. 현재와 현실의 선택과 개척이 결핍되어있다. 그래서 윤회가 기계적 인과응보의 반복으로 고착된 느낌을 준다. 영화는 과거의 깨달음만 있고 현재의 개선이 없기에 다시 과거와 같은 봄이 시작되고 있다. 단순한 기계론적 윤회 반복. 과연 영혼에 계절과 장소가 존재하며 계절과 같이 기계적 순환을 하는가. 자연을 인간 인식의 틀 안에서만 유지하려는 유물적 고찰만 있고 피안너머 영혼의 고찰은 상실되어있다. 공간적 격리를 통한 해탈의 한계. 그래서 이 영화가 사회와 동떨어져 자기 고립적이어서 대승적 해탈에 한계를 드러낸다는 지적을 당하기 일쑤다.
몇 가지 꼬투리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영화의 우수성을 손상시키지는 못한다. 윤회란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관객 스스로 윤회가 무엇인지, 윤회의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하게 하는 동기부여와 윤회를 벗어나려는 영혼의 의지가 더 중요하니까.
[ 오세암 ] 성인 동화의 주역들
**영화제목: 오세암(장편 애니메이션) **감독: 성백엽 **원작: 정채봉 |
정채봉 선생의 동명 단편동화가 원작인 <오세암>은 <하얀 마음 백구>의 제작진이 다시 모여 다섯 살 동자의 동심과 자연과의 교감을 그린 작품이며, 단순한 생존 이상을 찾는 애니메이션이다. 제작비의 공백을 메운 정성이나 감독의 딸아이를 모델 삼은 정서적 친밀감은 기술적인 완성도를 떠나 호감을 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진돗개라기보다 사람의 얼굴에 가까워 보이는 백구를 내세웠는데도 성공을 거둔 <하얀 마음 백구>가 말해주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은 굳이 영화와 가깝게 만들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오세암>은 아이들이 세상을 느끼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방식을 기억하고 있고, 그 때문에 추억도 눈물도 웃음도 낯간지럽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
성백엽은 고등학교 졸업 후, 외국 애니메이션 하청업을 하는 업체에서 일하며 애니메이션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원화감독으로 일하며 <달마시안>, <스파이더 맨> 등 미국과 일본의 많은 작품들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는 외국 애니메이션의 하청 일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구상, 기획하였고, ‘마고21’의 이정호 대표를 만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첫 기획작 <하얀 마음 백구>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2001년 우수 콘텐츠 사전제작지원과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되었으나 제작 중 제작비 문제로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 작품으로 SICAF 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게 된 성백엽 감독은 2003년 <오세암>을 연출,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 세계무대에서도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시인이자 아동문학의 대가, 한국 동화작가로는 최초로 독일(물에서 나온새), 프랑스(오세암)에서 작품을 번역 출간한 문호이자 '성인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하며 현대 문학
사의 거목이 된 시인, 故정채봉. 그는 평생 소년의 감성으로 엮어진 시적 언어로 작고 소박하지만 위대한 가치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왔다. 그리고 이제 2003년 4월, 그의 대표작 <오세암>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거장들에 의해 가장 한국적인 빛깔의 애니메이션으로 되살아난다.
슬로우 영화
영원한 소년작가 故정채봉 시인은 화려하고 빠른 것만이 최고의 가치라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행복은 가장 가까이, 가장 소박한 것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왔다. 해맑게 웃는 갓난 아이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로움, 다섯 살 바기 꼬마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 속에 묻어나는 동심, 온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사는 소박한 행복...그가 이야기하는 감성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이면서도 어른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주었던 것은 잊고 있었던 동심 한 자락, 무심했던 작고 소박한 것의 가치를 일깨워주며 따뜻한 눈물 한 방울 흘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악산 골짜기 작은 암자에 전해 내려오던 부처가 된 다섯 살 꼬마의 설화, <오세암>. 파랑새가 된 절집 꼬마, 길손이가 엄마를 만나는 슬픈 기적에 관한 이야기.1983년 초판된 이래 20년 넘게 재발행을 거치며 10만부 이상 읽혀진 스테디셀러이자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된 명작 동화이다.
"누나,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하늘처럼 생긴 물인데, 꼭 보리밭같이 움직여"
눈을 감은 아이, 감이에게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 불어오는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 하나하나를 이야기해주는 길손이. 다섯 살 길손이는 연못 같은 아이다. 구름을 비추면 구름을 담고 하늘을 비추면 하늘을 담는 작은 연못처럼 맑고 투명하고 귀엽다. "새들아 집에 가니?" "구름아 답답했지?" 구름, 새들에게 말을 거는 길손이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친구다. 겨우내 묵게된 절집, 법당 안을 뛰어다니며 스스럼없이 부처님에게 말을 걸고 손에 꽃을 올려놓는 아이. 호리병 속에 구름친구를 담아 가는 아이. 추운 겨울, 산에 사는 사슴과 산새들을 위해 밤새 부엌에 군불을 떼고 곡식 자루를 열어놓는 아이. 어두운 그늘없이 길손이는 그저 맑고 착하고 발랄하기만 하다.
"나쁜 애들도 다 엄마가 있는데...엄마는 맨날 누나 꿈에만 나타나고 내 꿈에는 한번도 안 와" 감이 누나와 길손이를 거지라고 놀리는 나쁜 애들도 다 엄마가 있는데, 길손이는 엄마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누나 눈사람, 스님 아저씨 눈사람, 바람이 눈사람도 다 만들었는데 엄마 눈사람은 얼굴이 기억 안나 만들다 말았다. 한번이라도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평생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텐데... 한번이라도 따뜻한 엄마 품에 안겨보면 참 좋을텐데...
세상의 전부인 엄마의 부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린 나이 다섯 살. 그래서 언제나 엄마의 자리가 텅 빈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누나가 들려주는 흐릿한 엄마의 기억은 더욱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파고들 뿐이다.
그래서 이제 겨우 다섯 살인 길손이는 직접 엄마를 찾아 나선다. 엄마가 하늘에 있다면 하늘로, 바다에 있다면 바다로...그렇게 물어 물어 엄마를 찾겠다고 길을 떠난다. 슬픈 기적이 이루어지는 곳, 두 꼬마의 오세암으로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다섯 살의 여행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지나 마등령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작은 암자 하나. 그 흔한 금부처님 하나 없이 벽에 그려진 관음보살님이 전부인, 작다못해 너무 소박한 고요한 연못 같은 암자. 관음 보살님이 머문 곳이라 하여 관음암이라 불리던 곳. 이 소박한 작은 암자에서 시작된 슬픈 기적이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맑고 따뜻한 눈물을 흘리게 한다.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 다섯 살 꼬마 길손이. 길손이의 소원은 단 하나다. 하루라도, 반나절이라도, 아니 한번이라도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마음을 다해 간절히 원하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란 설정 스님의 말을 듣고 길손이는 정말 간절히 기도한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하지도 덜하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마침내 길손이의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 오세암 작은 암자엔 슬픈 기적의 꽃비가 내렸다. 솜다리, 금낭화, 금강초롱 꽃비가 온 산하를 덮었다. 다람쥐, 토끼, 사슴들이 꽃구름이 솟아오른 작은 암자로 달려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을 다섯 살 부처가 탄생한 곳, 오세암이라 불렀다. 이것이 파랑새가 되어 날아간 다섯 살, 절집 꼬마의 슬픈 이야기.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길손이의 소원이 이루어진 기적의 공간 오세암. 정채봉 시인의 손끝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 오세암은 우리에게 길손이처럼 간절히 원하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지 물어본다. 마음을 다해 부르면 이루
어질 거란 희망을 믿을 용기가 있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 오세암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 필요한 것은 티끌하나 더하지도 덜하지 않은 다섯 살 부처같은 순수한 마음 하나.
척박하고 메마른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애니메이션 <오세암>은 가슴을 촉촉히 적셔줄 기적의 선물이 될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Why Has Bodhi-Dharma Left For The East?, 1989)
감독: 배용균, 수상: 제42회(1989)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
-배용균 감독
1989년 5월 제42회 깐느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부문 및 황금카메라 상 후보작으로 선정될 때까지만 해도 이영화의 제작은 알려지지 않았다. 개봉도 되기 전에 제작과정이 홍보되는 흥행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은 작품이었다. 같은 해 8월에 열린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하면서 우리 영화계에 놀라움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배용균이라는 감독이 이제까지 영화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라는 점도 그러하였거니와 그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점, 그리고 영화의 제작 방식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영화 제작의 특성인 집단 작업을 철저히 배격하고 연출, 촬영, 편집, 각본, 미술 등 모든 분야를 자신이 개인 작업으로 직접 이루어내었다는 점에서 충격 그 자체였다.
장난기 어린 돌팔매질로 나는 새를 다치게 한 동자승 해진은 끝내 죽어버린 새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음을 졸인다. 기봉은 동상을 입은 스님을 돌본다. |
사바세계에서 왔지
빛과 그림자의 멋진 대비와 아름다운 색채로 조화된 유려한 영상과 최소한의 대사로 농축된 이 작품은 끝없는 고행과 수행으로 속세와 동떨어진 낡은 절간에서 오로지 득도의 길을 추구하는 노승 혜곡 스님과 혜곡 스님이 주워다 기른 동자승 해진이 함께 기거하는 낡은 절에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자유로운 영혼에로의 진리를 갈망하는 기봉 스님이 찾아옴으로써 시작된다. 불문에 귀의하여 득도의 길로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속세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눈 먼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겨둔 기봉 스님으로서는 인륜과 혈육의 정으로 얽혀진 속세와의 인연을 단호하게 끊어버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해진(동자승): 산을 내려가면 큰 절이 있잖아요? 큰절 아래로 내려가면 또 뭐가 있죠?
기봉(행자승): 사바세계.
해진: 사바세계? 스님은 사바세계에서 왔어요?
기봉: 그럼, 해진이도 거기서 왔지.
해진: 큰 스님(혜곡)도?
기봉: 응
해진: 왜 모두가 사바세계에서 왔죠?
기봉: 그곳에선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롭지가 못했어.
해진: 왜요?
혜곡(노스님):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로 담을 커다란 마음 그릇이 없는 탓이다. 실은, 그릇은 있으되 아상이 그릇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세상과의 인연이 이미 다한 노승 혜곡 스님은 스스로의 운명을 의식하고, 기봉 스님은 끊지 못한 사바세계와의 끈질긴 인연으로 고뇌한다.
기봉: 스님은 왜 산에 계십니까?
혜곡: 강남에서 온 제비야 고향길은 어디로 나있던가? 네가 물어가는 볍씨 한 알에 황금빛 수선화는 입을 열더냐? 별은 먼 곳에서 하늘의 균형을 잡는다. 이놈아, 너 같은 멍충이가 나를 찾아 산을 오느니 내가 산에 있어야지. 불속에 들어간대도 꽉 깨물은 화두를 뱉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 출세간의 장부가 한번결심을 세웠으면 끝을 보아야지.
기봉: .........
혜곡: 화두를 깨트려 견성을 이룬다면 천왕산 꼭대기에 부는 천풍과도 같은 자유와 풍운속에서도 요지부동인 큰 바위돌 같은 평정을 얻게 되어 네가 오늘 섰던 생사의 그 자리가 바로 극락정토이다. 자, 어찌하겠느냐? 경계에 흔들리고 풍진에 핏발이나 서는 뒤숭숭한 눈으로는 지옥과 극락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지. 말해라, 말해! 마음달이 물밑에서 차오를 때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느냐?
기봉: 동상이 덧난 자리는 어떻습니까? 저의 경솔한 짓이 스님을 이지경으로 만들다니.
혜곡: 조용히 좀 하거라. 네탓이 아니라 이 육신이 세상과 맺은 인연이 다해가기 때문이다. 이 허망한 몸뚱아리는 갈 때가 되면 스스로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그래, 네 화두는 바닥이 보이더냐?
기봉: 스님이 가시기엔 아직 이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 공부는 앞이 캄캄하기만 한데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시고 그냥 가시렵니까? 앞이 가로막힐 땐 제가 어디다 여쭙겠습니까?
혜곡: 산천초목, 삼라만상, 여기와 거기가 한울타리 속인데 가는 것이 오는 것이고 오는 것이 가는 것이라. 바람은 걸림없이 동서남북으로 불지 않느냐? 육신이 흩어져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니 짓물러진 상처의 피고름은 밤하늘에 이슬이 되어 내리리라. 천지간에 나는 끝내 없고, 천지가 내 아님이 또한 없구나.
기봉 수좌 잘 듣거라. 이 기회에 말할 것이 있는데 명심하여 어김없도록 하여라.
내가 언젠가 멸하게 되면 나의 잔재를 너에게 맡길 터이다.
기봉: 스님....
혜곡: 끝까지 듣거라. 큰절에 알려서 폐를 끼치지 말고 바로 너의 두 손으로 할일이야. 모든 의식은 일절 생략하고 내 입은 옷 그대로, 뒤 안에 있는 반닫이 생각나지? 그걸 관으로 사용하면 안성맞춤일 게다. 산불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기봉아, 모든 일은 하루 반 안에 끝내도록 하여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점은 꼭 지킬 일이야. 이 일은 내가 너에게 주는 활부요, 이것이야말로 실참시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가 입적하면 지체하지 말고 서둘 것이다.
사대삭신 육천마디의 인연줄이 뿔뿔히 풀어헤쳐져
이몸은 흙과 물과 바람으로 허공 중에 흩어지는데
나의 주인공은 끝내 어디를 가는고?
결국 노승 혜곡 스님은 열반하고, 기봉 스님은 혜곡 스님의 다비장을 혼자 치른다. |
기봉: 스님은 가시고 저는 남았습니다. 무상한 푸른 숲속으로 겨울이 자라고 있고 앙상히 벗은 가지 끝으로 여름은 가까워옵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량겁의 순환 속에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라 하지만 목숨은 아직 남은 자의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영원한 흐름 속에 태어남도 사멸함도 없다지만 죽음은 남은 자에게 풀지 못한 과제입니다.
기봉은 동자승 해진에게 암자를 맡긴 후 다시 먼 구도의 길을 떠난다.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
이 영화의 특징은 대사의 최소화다. 친절한 설명이 주류인 영화와 확연히 차이진다. 이야기 전개보다 출중한 영상미 속에 녹아 있는 장면 장면마다의 일화를 중요시했다. 공간과 시간을 정교하게 짜나간 조형미가 화면에서 화면으로 유려하게 흘러간다. 무엇보다 자연의 빛을 이용한 아름다운 회화적 구성과 한국 영화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촬영의 탁월한 효과를 낳게 한다. 무엇을 느낄지, 화면 어디를 봐야할 지는 자기 몫이다. 수려한 화면에 빠질만하면 골치 아픈 화두를 던진다. 잠깐씩의 대사는 의사 전달이나 극의 전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객에게 의문(선문답)을 위해 던져진다. 화면 안팎의 인간이 모두 번뇌에 빠지도록. 시종 어두운 자연광의 화면은 인간의 끊임없는 번뇌를 깔고 있다. 감독 나름대로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을 영화언어로 구현하려 애쓰고 있다.
생과 사, 선과 악, 행과 고라는 우리 존재의 체험이 주어지고 생은 태어나는 것도 사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설법이 주어진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계속 화두로 남는다. 계속 질문하고, 의심하고, 대답하고, 번민하고, 그리고 다시 질문하는 독백과 방백의 화법이 이어지면서 영화 전체는 선문답의 삼천대천세계로 펼쳐지고 있다.
나는 이 고뇌가 감독 자신의 현학적인 학자의 면모를 그대롤 반영하고 있지 않은지 의문해 본다. 생사마저 불이(不二)라고 하면서 사바세계와 구도세계를 애초부터 구별하는 것. 생활 속의 불이가 아니라 지식속의 불이는 아닐까. 분별심(分別心)!! 거기서 오는 번뇌 그 이상은 아니란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탁월한 형식미는 박수 받을 만하지만 불필요한 긴장과 번뇌는 너무 자해적이고 현학적 자아도취는 아닐까?
아제아제바라아제(1989)
감독: 임권택 (주연: 강수연, 유인촌, 한지일) |
석가탄신일이 되면 빠지지 않고 방영되는 영화가 바로 「아제아제바라아제」다. 1989년 제27회 대종상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강수연은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1990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베트남전쟁의 상처로 승려가 되어 떠나버린 아버지와 육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고리대금업자 어머니, 자신을 겁탈한 어머니의 애인, 존경하던 선생에 대한 사랑의 상처 등의 업보를 안고 순녀는 입산하여 절에 머문다. 그러나 자살하려던 남자를 구출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파계하고 속세에 돌아오지만 그 남자는 죽고, 순녀는 또다시 방황을 계속한다. 그후 간호사 생활을 시작하나 거기에서도 몸바쳐 구하려던 남자가 죽자 자신의 업보의 끈질김을 깨닫고 다시 산사로 돌아온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축은 불교의 종교적 환경을 바탕으로 서로 상반된 길을 걷는 두 여주인공을 내세워 고된 여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제아제바라아제」라는 뜻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말미에 있는 경문의 일부로써 <가자! 가자! 더 높이 가자!>라는 뜻이다. 불교의 득도, 해탈이 최고의 이상인 걸 감안할 때 “더 높이 가자!”라는 이 말은 참으로 최고의 이상을 향한 진언이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 두 여인이 겪는 수도의 방편은 참으로 고된 것이었다. ‘왜 저리도 고통받아야 하나?’ 할 만큼 두 여인은 혹독한 삶을 체험한다. 특히 여자이기에 가능한 “순결의식” 마저도 더 나은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강간 비슷한 방법으로 희생당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주인공 여성 둘은 그런 억압적 금기들을 겪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지나갈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본능적 욕망의 고통마저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지나쳐 갔다. 이처럼 이 영화는 고통의 늪을 건너고 있는 두 여인의 외면적 행적과 내면적 요동 등을 잘 표현 해 내주고 있었다.
여기서 두 여인은 강수남이라는 속명을 가진 비구니 진성과 청화 스님이라 불리며 불가에 입문했으나 파계하고 세상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던 여인 이순녀, 바로 그들인데 이들이 가진 공통점과 상이점은 부처에 대한 생각, 또는 고통이 다가올 때 그 고통을 대응하는 방법, 근원적 질문의 해답을 찾는 모든 면에서 치밀하게 대립 항을 이루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두 여인은 하나의 합일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불교의, 특히 동양의 특징적 논리가 부각되는 것 같았다. 은선 스님이 말하시길 “나가서 깨달아야 할 것과 절 내에서 깨우쳐야 할 문제가 따로 있는 게야~”라며 두 연인을 각각 세상 속으로 내보내게 되는데 특히 이순녀는 진성 과는 차원적으로 다른 속세를 맛본다. 심지어 깨우침을 찾아가기보단 쫓겨나는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다시는 불가에 귀의하지 못할 것만 같이 느껴지던 두 여인의 구도가 <개유불성>이라는 용어 내에서 무리 없이 소화되고 있었다. “모든 사물에 부처의 품성이 있으며 이를 깨우치는데 동원되는 행위들이 마음의 중심을 흩뜨리지 않으면 그 나름의 역할을 인정받게 된다”는 이 말을 통해 진성의 닭을 훔치는 행위나 이순녀가 세상의 유혹을 영접하는 일 등이 구도의 본질과 영원히 결별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보편적 논리가 서양종교로 대표되는 기독교 사상에서는 어떻게 받아질 수 있을까? 절대 적인 규범과 대비되는 불교의 보편적 규범에 입각했기에 마침내 그들은 대립항을 극복하고 하나의 합일점에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순녀의 화두는 불가를 떠나야 해결 할 수 있는 화두였던 것 같다. ‘산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너의 혼령인지? 마을을 떠도는 등신이 네 진짜인지? 어느 것도 원래의 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은선 스님의 아이러니칼한 화두는 마치 장자의 나비 꿈처럼 신비롭기만 했다. 이처럼 이순녀의 화두는 산문과 속세의 양면을 모두 알아야 만이 답을 내릴 수 있었기에 이순녀의 세속적 고통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처럼 생각되었다. 이 화두에 대해 이순녀는 진성과 달리 분명한 자기의견을 제시하는데 대답한다.
「산중의 혼령도 저의 진짜가 아닙니다. 마을을 떠도는 등신도 제 진짜는 아닙니다. 언젠가 제 혼령과 등신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호산 명덕 학운 안으로 산중의 혼령을 가져올 겁니다. 마을을 떠도는 등신도 그리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둘을 합쳐놓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 진짜입니다.」
박현우라는 사람을 구출한 일로 파계 아닌 파계를 하여 끝없는 시련을 맞았던 그녀는 남해안에서 구도의 길을 찾아 만행중인 진성 을 만나 비금도 병원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는 다른 인간의 아픔을 체득하는 기간이었다. 송 기사를 건지려던 그녀는 송 기사의 죽음으로 덕암사를 다시 찾아 진리, 자유, 구원 그 어떠한 지고지순의 가치도 사람이 아플 때 뿌리내리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을 스승인 은선 스님으로부터 배운다.
임권택감독은 구도를 향해 나아가는 두 종교적 인물의 고행을 현실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얘기함으로써 우리가 일상적으로 근접하기 어려운 종교의 세계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일상생활 한 복판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 노력했다.
이 영화에 대해 의문이 든다. 윤회를 알지 못하는 ‘고행’은 새디즘 아닌가. 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 종교이지 맹목적으로 감내하는 것이 종교이고 수행이란 말인가. 근엄하고 자비로운 부처님만 부처님이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부처님, 화내는 부처님, 돈 버는 부처님이 필요한 시대다. 돈, 사랑, 명예, 화를 피할 수 없다. 마음을 없애는 게 아니라 마음을 잘 쓰는 게 수행은 아닐까.
환생
<요미가에리>(환생)은 2003년 일본에서 40만부 이상 판매된 최고의 흥행작을 영화화 한 것이다. 개봉 후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한 작품 "환생"은 소재에서 뿐 만아니라 작품전반에서 인연의 소중함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불교적인 색채가 묻어 나오는 작품이다. 이를 통해 일본인의 삶 깊숙히 차지하고 있는 영적 사고도 엿볼수 있으며,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인 환타지가 아닌 죽은 사람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기적을 부른다는 드라마틱을 더한다. 감성멜로 "환생"이 전하는 가슴찡한 여운과 훈훈한 감동이 국내 관객들의 가슴을 잡은 영화다.
원작 소설은 "요미가에리"란 제목으로 환생한다는 기발한 발상에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담아낸 카지오 신지의 소설로 그당시 사회전반에 색다른 해석으로 붐을 일으키는 등 큰 화재를 모으기도 했으며, 주인공은 일본 최고 그룹 SMAP의 멤버 쿠사나기 츠요시가 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아 제작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가수활동은 물론 브라운관과 스크린, CF계를 넘나드는 일본 국민적 스타그룹으로 추앙받는 그룹. 그 중 쿠사나기 츠요시는 멤버 중 가장 한국에 친근한 이미지로 국내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초난강"이란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친한파"로도 유명하며, 국내에서의 가수활동 당시, 원색적인 의상과 독특한 메이크업 등으로 일본에서와 달리 코믹한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환생>을 통해 죽은 친구의 약혼자이자, 자신 또한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여자주인공에 대한감정으로 갈등하는 주인공으로 진한 감성연기를 선보이며 이미지 쇄신 했다.
감독은 시오타 아키히코. 디지털영화와 단편영화로 해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는 감독으로 뽑힌다.
릿쿄대학 재학 때부터 독립영화를제작. 83년 <파라라>가 "피아필름 페스티벌"에 입선되어 주목을 받았다. 96년에는 비디오 <노출왕인 여왕>을 감독하였고, 극영화 데뷔작 <월광의 속삭임>으로 98년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수상하고 99년 일본 국내 영화제에서 신인왕을 휩쓸었고, 디지털 비디오 작품 <깁스>, <해충>으로 제5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현재의 영화’ 부분에 출품, 낭트 3대륙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시놉시스
큐슈의 아소지방.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는 믿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계속 그리워해 준 사람 앞에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 연인, 형제들의 ‘환생’에 기뻐하는 사람들. 그리고 혼란에 빠진 행정당국. "환생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어떤 것이었을까? "
후생성에 근무하는 ‘헤이타’는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이 기이한‘환생’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다. 익숙한 고향의 향기에 취해 잠시 추억에 잠기는 헤이타. 소꿉친구로 학창시절부터 줄곧 마음에 담아두었던 ‘아오이’를 떠 올린다. 한발 앞서 그녀에게 고백해버린 친구 ‘슈스케’의 사랑을 ‘아오이’에게 전해들은 ‘헤이타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깊숙이 감춰버렸다. 하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슈스케’가 바다에서 갑작스런 사고로 죽어버리고, 그 날 이후 ‘아오이’는 ‘슈스케’만을 그리며 지낸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고 ‘아오이’의 아파트로 찾아가 반갑게 재회하는 두 사람. ‘헤이타’를 도와 ‘환생’현상을 함께 조사하던 ‘아오이’는 ‘헤이타’로 부터 ‘죽은 사람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환생’ 현상과 어렴풋이 관계 되어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슈스케’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환생’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조사를 진행시키던 ‘헤이타’는 결국,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어떤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환생한 사람들은 3주밖에 이 세상에 머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헤이타’는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아오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 때문에 ‘슈스케’를 살려내는 일에 갈등하게 된다.
죽음의 강을 건넜던 이들이 다시 돌아갈 그날은 인기여성 가수 RUI의 콘서트날에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 속에 슈스케를 살려낼 방법을 찾아낸 ‘헤이타’는 ‘아오이’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오며 ‘달의 물방울’이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시바사키코우(RUI) – 달의 물방울(츠키노 시즈쿠)
말은 달의 물방울의 연애편지
슬픔은 물거품 같이 덧없는 환영…
아름다움과 요염함은 사랑을 속삭이는 한숨
싸움과 재앙을 한탄하는 목소리는매미가 우는 때 부는 바람과 닮았어요…
시간의 저 끝에서 식어가는 사랑의 온도가
지나가버린 덧없는 추억을 비추어 가요…
"만나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살며시 지금 소원이 되요
슬픔을 달의 물방을이 오늘도 다시 적셔 가요…
하현달이 떠올라요
거울과 같은 수면…
세상에 활짝 피어있던 만엽의 꽃은(시간의 흐름에)저물어가요
슬픔으로 사람의 마음을 물들여 가요…
"그리워요…"라고 노래하는 말은 살며시 지금 하늘의 저편으로…
슬픔을 달의 물방울이 오늘도 다시 적셔 가요…
"만나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살며시 지금 소원이 되요
슬픔을 달의 물방울이 오늘도 다시 적셔 가요…
하현의 달이 노래해요. 영원히 이어지는 사랑을…
노래의 가사처럼 헤어짐을 암시하며 두 사람은 만난다. 그러나 만남도 잠시.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고 손을 잡는 순가 먼지처럼 아오이는 산화해 간다
리틀붓다
"내 아들이 부탄으로 가야 한다구요?"
노브는 환생을 확인하기 위해 제시를 부탄에 데리고 가 대종사님과 모든 스님들의 자문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딘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
【줄거리】
리틀붓다는 도제라마 선생의 환생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액자식 구성을 취하며 싯다르타의 삶과 깨달음도 함께 보여준다.
미국 시애틀에는 건축가 아버지 딘과 수학선생님 어머니 리자를 부모로 둔 제시라는 남자 어린이가 살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부탄에서 승려들이 찾아온다. 그 중 한 명이 노브이다.
사실 노브는 제시네 집에 방문하기 전부터 그들의 존재를 꿈을 통해 만났다. 환생한 도제라마 선생이 산을 향해 손을 흔들자 그 곳에 집이 생겼는데 그 집이 바로 제시가 살고 있는 집이라는 것이다.
노브는 부탄의 승려의 방문에 조금은 의아해 하는 딘과 리자에게, 도제라마는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였고 돌아갈 무렵 서방에도 부처의 가르침이 필요함을 느끼고 시애틀로 환생을 통해서 오셨다며 도제라마 선생에 관해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 환생에 대상이 바로 그들의 아들 제시라고 말한다.
딘은 노브와 승려들의 말에 호감을 표하지만 환생이라는 것이 낯설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그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에 껄끄러운 생각까지 갖게 된다. 부인 리자는 딘보다는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생’이라는 것에 한한 것이지 제시와 관련된 환생에 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다.
제시는 승려들을 통해서 싯다르타에 관한 (전기)책을 선물받게 된다. 그리고 제시는 그 책에 대단한 흥미를 가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책 속의 이야기와 현실의 이야기라는 두 가지 양태의 이야기 구조를 취한다.
-싯다르타 일대기(생략)
-딘의 이야기:
환생을 믿지 않는 딘에게 노브는 제시가 특별한 교육을 받기 위해 부탄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고 말한다. 노브는 도제라마 선생의 환생이 확인되면 아이는 특수한 가르침을 받게 되고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영적지도자로 성장한다고 말한다. 딘은 미국인인 자신과 아들 제시가 이러한 환생의 대상에 관련된다는 것이 그저 의아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는 제시가 꼭 지금 부탄으로 가야하는지 묻는다. 딘은 제시를 좀 더 나중에 보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노브는 환생을 확인하기 위해 제시를 부탄에 데리고 가 대종사님과 모든 스님들의 자문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딘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부탄으로 간 제시는 이곳 저곳을 구경하던 중에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한 남자 어린이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남자아이의 이름은 ‘라주’이다. 라주는 도제라마 선생의 환생 대상에 또다른 후보였다. 둘은 제시가 갖고 있던 게임기를 통해서 친해진다. 그 광경을 지켜 본 노브와 승려들은 제시와 라주가 서로를 알아보고 친해짐에 매우 놀라워한다. 제시와 라주를 포함한 노브 일행이 다음으로 이동한 것은 바로 소녀 지타의 집이다.
노브 일행은 지타의 집에서 기이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은 도제라마 선생이 열반을 하기 전에 지타의 집에 방문했는데 그 때 지타 어머니의 배에 손을 얹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지타이다. 지타는 라주와 제시는 가짜라고 하며 자기가 진짜 도제라마라고 말한다. 그런 지타에게 질세라 라주는 도제라마 선생은 여자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지타는 제시와 라주를 자신만의 정원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한 나무를 소개한다. 그 나무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을 하던 나무와 매우 흡사한 나무였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또 다시 싯다르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노브는 도제라마 선생의 환생으로 추정되는 세 어린이가 모두 비슷해서 누가 도제라마 선생의 환생인지 시험을 해보려 한다. 그것은 바로 도제라마 선생의 모자를 같은 모양의 것과 섞어 놓고 누가 도제라마 선생의 모자를 가려내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 어린이 모두는 도제라마 선생의 모자를 골라 낸다.
결국 세 어린이 모두가 도제라마 선생의 환생임을 알게 된 노브는 세 어린이 모두에게 경배의 절을 올린다. 세 어린이는 자신들이 어떻게 모두가 도제라마 선생의 환생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 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노브는 이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그것은 도제라마 선생의 말씀과 몸과 정신이 세명의 어린이에게 각각 나뉘어져 환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분신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와 같이 연민과 자비로 베풀고 가르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렇게 세 명의 어린이들이 각각 불(佛), 법(法), 승(僧)으로 환생한 도제라마 선생의 분신임을 알게 된 노브는 마침내 열반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의 몸은 한 줌 재로 남는다.
그리고 그 재는 제시, 라주, 지타에게 각각 나뉘어서 배달된다.
제시는 아버지 딘과 리자와 함께 그 재를 바다에 뿌린다. 그리고 라주는 그것을 하늘로 올려보내며 지타는 땅에다가 그것을 묻는다.
【가르침】
이 영화에서는 두 가지의 가르침이 있었다.
첫째로, 영화 중반에 노부 라마의 대사 중 육신과 영혼을 그릇과 내용물에 비유하여 말한 부분이 있다. '홍차가 들어 있는 잔이 깨어지면 잔은 잔이 아니지만 홍차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잠시 옮겨진 것 뿐 홍차는 홍차이다.' 이것은 죽은 뒤 육신은 비록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그대로의 영혼인 것이라는 것으로 윤회사상을 의미한다.
둘째로,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가르침인 중용이다. 부다가 지나가는 악사의 말(`줄을 너무 세게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늦추면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을 듣고 깨달은 중용이다. 중용,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하지만 욕심의 끝은 과연 무엇일까?
결국은 물질적 풍요 뒤에 정신적 빈곤일 것이다. 부자로서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당사자에게는 꼭 그런 것만이 아니다. 아니면 끝인 가난한 사람은 그의 삶에 만족할까? 그 것도 아닌 중간에 살면 어떠할까? 우선은 가난으로 인한 불편함에서 벗어남에 만족감 그리고 부자임으로 고통 받을지 모르는 정신적 빈곤을 모두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적당한 삶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지는 미지수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나치지도 덜하지도 않게, 중용의 도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경지에 이르기보다는, 적어도 지나친 집착과 극단적인 행동을 지양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중용이란 말을 가슴 속에 담고 그러한 삶을 살도록 아니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다
“죽음에 못잖은 힘이 삶에도 있습니다”
열성 나치당원인 하인리히 하러. 그에게 히말리야는 더 이상 꿈을 실현하는 장소가 아닌 기필코 나치깃발을 정상에 찍어야만 하는 정복의 대상이 된다.
□ 줄거리
다섯살이 된 텐진. 그는 14대 달라이라마로 티벳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된다. '달라이라마'는 몽골어로 '지혜의 큰 바다'라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추앙받는 존재. 달라이라마는 티벳어로는 '쿤둔'이라 불리는데 이는 '살아있는 부처', '고귀한 존재'란 의미이다. 달라이라마의 사진은 티벳인들의 부적이며 그들은 달라이라마가 자신들을 절.대.적으로 보호해줄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
이렇듯 장엄한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우리의 달라이라마지만, 그저 공양으로 받은 '음악상자'에 히죽거리며 즐거워하는 호기심많은 어린 꼬마일 뿐.
열성 나치당원인 오스트리아의 산악가 하인리히 하러. 그는 장차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히말리야원정을 위해 기차에 몸을 싣는다. 11명이나 되는 대원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히말리야의 최고봉 낭가파르밧트. 재차 등정실패로 자존심이 구겨진 하러. 그에게 히말리야는 더이상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장소가 아닌 기필코 나치깃발을 정상에 찍어놓고 내려와야만 하는 정복의 대상이 된다.
정복욕에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산악인들에게는 서로의 몸을 이어주는 로프는 더이상 자신과 자신의 동료를 지키기 위한 '생명줄'이 아니라 동료의 실책에 두려워하는 '고통의 줄'이 되어버린다.
원정대장 패트, "다친거 왜 얘기 안했어?"
이기주의자 하러, "내가 알아서 해, 상관마."
패트, "내 목숨이 달린 문제야. 네 실수가 내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었어."
패트는 하러의 깊게 패인 상처에는 무관심하다. 하러 또한 패트의 아슬아슬했던 추락사고가 짜증날 뿐이다.
2차세계대전. 전쟁의 불똥은 산넘고 물건너 히말리야 원정대에게까지 튀었다. 영국령인 네팔에서 산을 기어오르던 그들은 산악인이 아닌, 나치당원이란 이유로 체포되고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히말리야에 대한 정복욕으로 이글거리던 독수리 하러는 이젠 수용소를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생명의 길로서 히말리야를 택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 히말리야는 늘 그대로 존재했지만 히말리야를 바라보는 하러의 시각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앙숙인 하러와 패트는 티격거리면서도 함께 티벳으로 가는 여정의 길을 걸어간다.
외국인을 터부시하는 티벳인들의 적나라한 야유를 물리치며 달라이라마가 있는 성도 라자까지 입성한 하러와 패트. 하러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정화를 목적으로 힘들게 성도로 오는 행렬을 바라보며 '나도 정화될 수 있을까'하는 작은 생각의 씨를 품는다.
이 존재의 씨앗은 하러의 핏발선 욕망이 가라앉으면서 더욱 생생한 생각의 씨를 퍼뜨린다.
영화의 재밋거리로 미녀 티벳 재봉사가 등장한다. 당연히 뒤따르는 수컷들의 암투. 그녀는 잘난척하는 하러대신 항상 겸손한척하는 패트의 손을 들어주고. 하러는 달라이라마의 뜻밖의 부름을 받고 궁으로 향한다.
호기심에 초롱초롱 빛나는 달라이라마의 두 눈을 바라보며 하러는 고향에 두고 온 아들을
연상하며 그의 호기심에 온 마음을 모아 진심으로 답변해준다.
"산을 타는게 뭐가 그리 좋아요?"
"절대적 순수. 혼란스런 생각이 없어지고 절대적인 순수의 상태가 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당신 앞에 있을 때도 똑같이 느끼게 되요."
하러의 마음에 생겨났던 작은 생각의 씨는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을 통해 이제 가슴 안의 정화의 촛불이 되어 그를 고요한 평화의 상태로 인도했던 것. 그가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어느날 문득 그렇게 씨앗은 '순수의 꽃'을 피워냈다.
악몽에 새벽눈을 뜬 달라이라마. 고향 암도가 중국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피흘리는 예시몽이었다. 13대 달라이라마의 '언젠가 외국인들의 침략으로 달라이라마까지 외국으로 유랑생활을 한다'는 예언의 전주곡이었던 셈.
티벳을 합병한다는 중국의 깜짝발표. 이를 고지하기위해 온 중국 장성들은 티벳인들의 염원을 모아 만든 평화의 만다라를 군화발로 뭉개버린다. 거만한 중국 장성들의 위협아래에서 어린 달라이라마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알린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행복과 번영을, 경전과 부처님 말씀에 죽음에 못지 않은 힘이 삶에도 있다 하였습니다. 이를 안다면 누구든 살생을 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저희는 천성이 착한 국민들입니다. 그렇다고 나약한 국민이란 뜻은 아닙니다."
□ 생각
'죽음에 못지않은 힘이 삶에도 있습니다.' 달라이라마의 이 한마디. 삶과 죽음이 똑같은 이치라는 뜻일까.
혹자는 냉정하게 말한다. 神政(신정)국가의 몰락. 전 근대성의 당연한 결과라고. 불교 외적인 해석인지 모른다. 하지만 불교적인 해석은 더 파격적일 수 있다. 티베트의 과보는 어디서 왔는가?
거대한 조각 상만 우상이 아니고 신정일치의 한 통치자를 받드는 것도 우상 숭배일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법을 세우라고 하지 않았다. 최후의 법은 스스로 혼자서 가라(자등명 법등명)이었다. 영혼은 평등하다. 하나하나의 번뇌마저도 불성인 것이다.
한사람의 생불(生佛)을 추앙하기 위하여 나머지 영혼들은 모두 종으로 전락해야만 하는 신정일치 국가. 그 종말은 아닐까. 이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불국정토의 막연한 이상을 각성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산들은 높은 산에 머리를 수그리고 있지 않다. 저마다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쿤둔
줄거리
(감독: 마틴 스콜세지 / 주연: 텐진 듀톱 차롱, 규메 테통) |
1933년 13대 달라이 라마가 서거한 뒤, 레팅 린포체('린포체'는 영적 스승을 의미하는 칭호임)는 고인이 된 라마와 역대 모든 달라이 라마의 대를 이어 관세음보살의 현신이 될 14대 달라이 라마를 찾을 때까지 섭정직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레팅은 환영을 보고 그 환영의 배경이 된 국경의 변방지대에 소년을 찾으러 승려들을 보냈다. 오랜 탐색 끝에 후보자로 여겨지는 2살의 라모 된둡이 발견된다. 태어날 때 불교의 성조(聖鳥)인 까마귀가 소년을 지켰으며 또한 티벳의 수도이자, 달라이 라마의 사원이 있는 라사에 가려고 한다는 소년.
승려들은 소년의 집으로 가서 똑같이 생긴 여러 개의 물건을 보여주면서 마지막 테스트를 했다. 각각의 물건에는 13대 달라이 라마가 사용하던 것이 들어 있으며 소년은 그의 물건을 집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 아기가 13대 달라이 라마의 염주를 잡고 소리친다. "이거 내꺼야!"
레팅은 아기에게 고개를 숙인다. 바로 그가 14대 달라이 라마 '쿤둔'(The Presence, 고귀한 존재)이었다. 불과 5세에 세상을 구원하는 쿤둔의 자리에 즉위한 이 소년은 그러나 가장 치열한 역사의 격동에 놓여진다. 2차 대전 후, 중국이 일본에서 벗어나 혼돈을 겪고 있을 때 소년은 불과 열 두 살이었다. 공산화된 중국이 1957년 마침내 침공해오고 자신의 동포가 아무런 무기 없이 그들 앞에 무자비하게 죽어갈 때도 소년은 사춘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1959년 18세의 나이에 소년은 중국의 암살위협을 피해 긴 망명길을 떠난다.
1959년 독립시위에 대한 잔혹한 진압으로 티벳 전체인구의 20%인 120만 명이 학살되었다. 문화 대혁명 기간동안 홍위병들에 의해 4500여 개 사원이 폐쇄됐으며 수많은 티벳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행방불명됐다. 최근 티벳에서 망명, 다람살라에 머물고 있는 텀딩이라는 사람은 "60년 이후로도 약 20만 명이 더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UN을 비롯 세계 열강들은 티벳을 외면했고 쿤둔은 홀로 외롭고도 기이한 저항을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의 저항이었다. 일체의 폭력도 개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세계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1989년 노벨상 위원회는 평화상을 그에게 수여한다.
▶ 해설
이 영화는 <티벳에서의 7년>이 달라이 라마의 삶을 일부 다룬 영화라면 <쿤둔>은 전부를 다룬 전기 작품이다. 소재가 달라이 라마라고 해서 이영화가 과연 불교영화인지 한번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외국 감독 스콜세지가 바라본 오리엔탈리즘은 아닌지.
영화에는 불교의 핵심 교리라 할 수 있는 환생, 용서, 평화, 수행이 모두 직접적으로 표현되어있다. 감독은 달라이 라마의 언행을 최고선으로 하여 티벳침략자들을 배경으로 돋보이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화엄의 세계에서 선악과 악이 존재하던가. 선악 이등분이야 말로 전통적인 서양 종교의 전형이다. 결국 예수님 대신에 부처님을 대체한 성인(聖人) 영웅는 아닐까. 다시 말해 감독은 선악을 뛰어넘는 성인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의 정치 지도자를 그리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비저항의 간디 같은. 영화 전반에 깔린 ‘경외감’은 동양의 신비에 대한 그리고 불교의 신비에 대한 감독 자기 방식의 해석에서 나온 정서일 것이다.
내 관점에서 진정 불교적 시각이라면 응당 인과응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 티벳의 운명이 그리 되었는가. 과연 성인의 지위를 왕위처럼 승계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세상은 과연 한사람의 성인을 모시기 위하여 존재하는가. 여기에서 환생으로 반복되는 업보는 불교 종국의 목표인 해탈과 어떤 조화를 꾀할 것인가. 태벳에서 달라이 라마 이전의 지도자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결정적으로 석가모니는 그러한 화려한 왕위를 버리고 보리수 아래 앉았다는 것이다. 한 왕국을 다스리기보다 고독한 자가 되어 전 인류를 대상으로 했다는 데서 서로 상충된다.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과연 부처님이 신정일치와 같은 종교정치조직을 필요로 했을까
컵 vs 소림축구
이번에는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하기로 한다. 모두 축구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수행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컵>은 사찰 안의 이야기요, <소림축구>는 사찰 밖의 이야기다.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오히려 영화 제작 뒤편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1. 줄거리
▶ 컵 (Phorpa / The Cup, 2000) 부탄, 오스트레일리아
감독 :키엔츠 노부
티벳을 탈출한 니마와 팔덴 두 소년은 히말라야의 한 사원에 도착한다. 승려가 되고 싶은 두 소년이지만 벽에는 온통 축구 슬로건이 걸려 있고, 입으로는 불경을 읽으면서 눈은 스포츠잡지의 화보를 쫓고 있다. 각국을 응원하는 낙서가 가득하다. 수계식을 받은 팔덴과 니마는 공부에 전념하려 하지만 롬메이트는 그를 가만 두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마을의 가게에서 월드컵 준결승전을 보는 모험을 강행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 스님 게코에게 걸리고 만다. 큰스님, 아보트도 공 전쟁을 벌인다는 문제의 월드컵 때문에 동자스님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이 걱정된다. 이 어린 소년들이 사원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이고 만다.
프랑스와 브라질의 결승전. 사원 안에서 경기를 보게 해 달라고 케코에게 부탁한다. 물론 가망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러나 놀랍게도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의기투합하여 TV를 사기위해 돈을 벌기 시작하는데.
▶ 소림축구 (少林足球: Shaolin Soccer, 2001) 홍콩 코미디/액션
감독 :주성치
출연 :주성치, 조미, 오맹달, 황일비, 막미림
왕년의 스타 플레이어 명봉(오맹달 분)은 축구 코치가 되고 싶어도 어느 구단에서조차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절룩거리는 다리 때문에 퇴물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한때 소림사에서 무공을 익혔던 씽씽(주성치 분)은 사부가 죽자 가난한 백수로 빈둥거린다. 그의 낙은 만두가게 처녀 아매(조미 분)를 흠모하며 멀리서 침을 흘리는 것. 명봉은 거리에서 우연히 씽씽의 요상한 다리 힘을 발견하고는 축구단을 결성하자고 제안한다.
씽씽은 소림사에서 함께 무예를 다졌던 동료들을 차례차례 찾아간다. 그러나 그 날래던 무사들은 오간데 없고, 외모비관론자, 뚱땡이, 박봉의 청소부, 방콕론자, 돈벌레 등으로 모두 변해 있었다. 이들은 씽씽의 제안을 처음엔 거절했었지만 나중엔 차례차례 씽씽을 다시 찾아오게 된다. 잃어버린 꿈을 찾으러.
결성된 축구단은 이름하여 '소림축구단'. 이들은 길거리 축구에서부터 시작해서 연습을 쌓더니 결구 프로들과 겨룰 수 있을 만큼 급성장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 명봉과 왕년의 라이벌 관계였던 강웅이 축구협회 위원장었다.
소림 축구단은 마치 옛날 만화인 ‘외인구단’에서처럼 한 사람씩 자기 고정관념을 깨쳐나가면서 한 팀씩 겨루며 1승씩 쌓아간다.
2. 영화 그리고 제작 이야기
<컵>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부탄 영화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히말라야 사원까지 불어 닥친 월드컵 열병에 관한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종교와 월드컵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를 유쾌하게 다룸으로써 종교에 대해 다시 차원의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실제 수도원에서 두달 동안이나 촬영되었으며 감독과 주요 배우들 또한 실제 그곳의 승려들이다. 감독 키엔츠 노부는 법명인 키엔츠 린포치로 더 유명한 실제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리틀 부다>의 작업에 참여하여 영화의 실무를 익힌 그의 첫 작품이다.
<소림축구>에서 골키퍼 '사사형' 역을 맡았던 진국곤은 원래 이 영화에서 잠깐 나오는 배우들의 춤 씬을 위해 고용되었던 안무가인데, 이미지와 골격이 전설의 스타 이소룡과 너무 흡사하여 주성치가 즉석에서 '사사형' 역을 맡겼다고 전해진다. 악마팀에서 가장 활약이 돋보이던 주전선수 석자운은 진짜 소림 스님이었으며 전국 자유격투기 경기 우승자 출신이고 현직은 무장경찰 교관이라고 한다.
주성치 특유의 요절복통 정통 코미디는 과장된 연기와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하지만 유치하다기 보다 장엄하기까지 하다. 시시껄렁한 3류 코미디 영과 같지만 거기에 들어간 비용이나 노력을 알고 나면 몇 초의 웃음과 볼거리가 얼마나 비싼 웃음이고 눈요기인지 놀랄 만 한다.
보도에 의하면, 특수효과 장면 600개, 필름 사용량 30만 자(홍콩상영에서는 9천자 편집본, 국내엔 인터내셔널 87분 버전), 최다 엑스트라 동원수 5000명, 최다 NG 40 테이크, 작품 전체의 20분을 차지하는 결승전 장면은 28일간 촬영, 평균 1일 3000여 명, 최대 5000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 홍콩에 두 대 밖에 없으며 3백만불을 호가한다고 하는 컴퓨터 제어 'motion control 카메라'로 축구장 객석을 촬영할 때, 특수효과로 합성하면 5천 여명의 엑스트라 수를 4만 여명으로 늘여놓았다고 한다.
<소림축구>의 과장된 코미디와 특수효과 때문에 <컵>과는 완전히 다른 주제가 될 것 같지만, 정서로 보면 그리고 수행의 차원에서 보면 매 한가지로 요약된다. 인간의 순수, 순수한 욕망. 천진한 동심(童心)은 종교적 규율 혹은 사회적 열등감을 초월한다는 것. 수행자의 궁극적 목표가 그것이 아니던가.
매트릭스
"내가 과연 존재하는가"
□줄거리
서기 2199년 한 무리의 인간들이 '시온'이라는 세상을 건설하고 인류를 구원할 영웅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각성한 반란자들이다.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인공 자궁 안에 갇혀 기계들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되고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 당해 평생 기계에 의해 설정된 가상현실을 살아가야하는 끔직한 세상이다.
기계가 만든 가상현실의 꿈에서 깨어난 인간들은 마침내 그들의 구세주를 발견하는데 그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 토마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이다. 하지만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해킹을 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이중생활을 한다.
어느 날 네오는 앤더슨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라는 여인에게 이끌려 시온을 열망하는 무리들과 만난다. 그곳에서 매트릭스 밖의 우주를 이해하게 되면서 현실이 가상인지 진실인지 혼란에 빠지게 되지만, 앤더슨은 이제 '네오'라는 이름으로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센티넬이라는 기계군단이 '시온'을 장악할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네오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트리니티, 모피어스(로렌스 피쉬번)와 함께 매트릭스 시스템에 맞서게 된다. '매트릭스'의 내부 구조로 깊이 들어갈수록,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자신의 역할에 눈 떠가던 네오는 '설계자'를 만나 자신의 존재가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진 통제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직면한다.
네오는 '사랑‘과 ’인류의 구원‘중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끊임없는 갈등의 여정속에서 네오는 방황하며 매트릭스와 현실세계의 중간계를 떠돌게 된다.
인류 최후의 보루 '시온'으로 기계들이 최후의 침공을 해오자 인간들은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인간 형체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에이전트 스미스(휴고 위빙)에의 공격에 의해 위기를 맞는다.
세력이 커져가면서 기계들의 통제권까지 벗어난 스미스는 현실 세계와 매트릭스는 물론 기계도시까지 말살할 야욕을 불태운다. 네오는 현자인 오라클(매리 앨리스)을 만나 조언을 구한다. 하지만 오라클 역시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 종교적 혹은 철학적 고찰
매트릭스(matrix)는 자궁을 뜻하는 용어로, 영화 속의 배경이 되는 가상공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비유적으로 인간의 지능이 만든 모태 매트릭스를 뜻한다. 두뇌 속의 기억을 조작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디지털 시스템과 이에 대항하는 아날로그 인간들 사이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1. 존재에 대한 물음
아마도 모든 철학과 종교의 물음은 결국 ‘존재하는가’로 귀결되지 않을까?
사실 그동안 우리가 의문을 가져온 ‘존재’는 자아였다. 내가 과연 존재 하는가?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누구나 한번씩 ‘현실과 가상세계 가운데 어느 것이 과연 진짜인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세계, 현실이 꿈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되는 세계,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허구이자 환상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세계는 과연 영화적 상상력에 의한 산물일 뿐일까?
물론 유물론자들은 명쾌하게 육체적 물질의 존재는 인식이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느냐’ 하는 물음 자체를 주관적인 것으로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유물론의 위기는 그렇게 신봉하던 객관적 과학으로부터 그 존립의 근거를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 양자역학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의 기준이라고 여기던 물질 즉 보이고, 만져지고, 질량을 가지는 소립자들이 사실은 비물질의 산물이라는 이론이 가장 첨단의 과학이론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지금 보이는 세계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과학이 발달하자 종교적인 접근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기준으로 하는 존재는 이미 구식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 매트릭스는 진보적 의미와 동시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매트릭스의 의의는 존재에 대한 물음의 확장이다. 기존에는 ‘나’의 존재에 국한했었다. 그러나 매트릭스에서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자체의 존재에 의문을 던진다.
네오를 비롯한 저항군들이 매트릭스를 벗어난 ‘현실’ 속에 존재하면서 그 현실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현실’ 또한 가상이 된다고 암시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는 현실 또한 실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으며 결국 인간의 의식이 작용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만든 매트릭스 안에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간혹 ‘나’와 ‘세계’가 충돌을 일으켜 세계를 인식하는 ‘나’에 무게가 실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이 결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섣불리 결론내리지 않고(혹은 감독 취향의 결론) 관객의 몫으로 남김으로써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가상과 현실은 어떤 차이인가”
존재의 물질론적 접근
이 영화를 받아들일 때, 인간의 인식마저 물질화 되어가는 데 대한 경고 정도로 해석하면 간단하고 나름대로 의미도 크다. 하지만 보다 인식론적 존재를 탐구하려는 입장으로 접근하면 하나의 훌륭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서구 존재론의 총체적인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가 제기하는 인간의식의 딜레마는 인식자체가 허위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진위를 인식을 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존재’ 자체를 찾거나 탐구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육체가 아니라 의식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기계 지배자들은 보이지 않는 의식을 결국은 ‘정보의 축적’이라는 물질로 환원하고 있다. 인간의 기억으로 남은 추억이 정보이고 이것만 주입하면 인식이 된다는 것이다. 매트릭스에서는 이렇게 0,1로 나열된 디지털 정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깊은 회의를 품고 있다. 이 정보의 틀 자체를 넘는 것이 진정한 인간 혹은 신(神)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기계문명과 정면충돌하고 있다.
즉 저항 자체가 창조적인 본래의 인간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위기 속에서 남녀의 사랑 또한 인간으로서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도 창조적 행위라는 것. 인간의 육체는 과학의 발달로 비록 고도로 발달된 컴퓨터 기계에 의해 복제 생산될 지라도 창조적인 인식을 갖는다면 진정한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추출해 낼 수 있다.
인간 인식이 가상일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는 과연 세계가 가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판단이 불가능해진다. 디지털 조합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식은 가치가 없으니까 허구이고 아날로그적으로 창조된 저항군의 인식은 가치가 있으니까 진실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또한 객관성에 오류가 생긴다. 만약 세계가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인식되든 말든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객관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신비감이 벗겨진 존재에 대한 ‘허무’를 존재의 기준으로 슬쩍 바꾸는, 즉 인간에게 인식된 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는 것은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매트릭스의 한계는 존재를 여전히 물질에 대한 편견이다. 인간 ‘인식’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디지털 기호의 조합이므로 재연가능하기 때문에 허구라는 논리를 깔고 있다.
나는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물음보다 그 것이 의미있는 가치를 지니느냐 아니냐로 환원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가령, 영화는 은막에 비춰진 일종의 빛의 환상이다. 허구이기 때문에 과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연극, 소설, 뉴스, 다큐멘터리가 일종의 허구인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의미가 없다고 과연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존재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인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방법은 매우 매력적이다.
사이퍼가 스테이크 요리를 먹는 장면에서 매트릭스 안에서의 경험과 바깥에서의 그것은 감각을 통한 인식의 측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는 매트릭스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고 있다. 무엇을 통해 매트릭스와 그 바깥 세계 즉 가상과 현실을 규정하고 있는가. 저항군의 정신적 리더 모피어스는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분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고 제시하고 있다. 모피어스가 네오를 훈련시킬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하자 주변이 달라지고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게 된다. 급기야 현장 전투에서 총알을 피할 만큼 시간이 달리 흘러가게 된다. 각성이 바로 기준이 된다. 가상과 허구에 대한 각성. 어쩌면 모두가 허구라는 각성.
단계적 각성
영화 매트릭스의 장점은 지속적인 의식의 고양이다. 다시 말해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어떤 목적을 이루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음 단계로 이행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네오는 매트릭스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잘 안았지만 트리니티의 키스를 통해서 허구와 현실을 각성하여 매트릭스 속에서는 영웅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파괴하려는 적을 이길 수 없다. 보다 높은 각성이 트리니티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드디어 타인의 생명까지 살릴 수 있는 신의 경지에 이른다. 죽음이 하나의 탈피과정이 되고 있다.
모피어스는 이미 한차례 각성을 한 상태에서 네오를 찾아낸다. 모피어스의 각성은 육체적 고통이다. 생포되어 고문 속에서도 자기 의지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다시 높은 차원으로 각성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각성 단계가 높아짐에 따라 매트릭스의 의미도 변하게 된다. 진실 같았던 시온 조차도 또 다른 매트릭스일 수 있다는 것으로 의미가 이전된다. 보다 높은 경지의 입장에서 낮은 단계의 세계는 단지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세주의 등장
저항군들은 애타게 구세주를 찾는다. 흡사 기독교의 교리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를 종교적 안경으로 본다면 매우 임의적인 해석으로 변질된다.
이 영화에서는 ‘종교’를 인정한다. 아날로그 인간의 한 특성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이 말하는 종교는 현실 넘어 이상세계나 하늘나라, 내세를 의미하지 않는다. 구원은 현실적 전투에서 승리다. 각성을 덜한 자를 높은 각성자가 이끈다는 신념, 믿음이 진정한 종교라고 유도하고 있다. 어찌 보면 평범한 네오가 구세주가 된 것도 동료들의과 매트릭스 주민들의 믿음이다.
구세주를 단지 한 종교의 신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각성자로 해석한다면 현존하는 종교의 모든 성인을 대입할 수 있게 된다.
예 언
네오 일행은 예언자를 찾아간다. 앞날이 정해져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앞날은 분명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 ‘매트릭스’의 메시지다. 존재하기에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흥행과 비평에 동시에 성공을 거두며 2, 3편이 제작된다. 놀라운 사실은 감독인 두 워쇼스키 형제가 1편 제작 시 이미 2,3편의 시나리오도 완성했다는 것이다. 한편의 훌륭한 영화가 웬만한 종교의 경전을 능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鮮京)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성지 아닌 영혼”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발리안이 적장 살라딘에게 묻는다. 성지란 무슨 의미인가. 살라딘이 대답한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또한 전부다.
줄거리
7세기 중동지역을 장악한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미명 하에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전쟁의 폭풍 속으로 돌입했다. 서민들부터 영주들에 이르는 수 만 명의 기독교도들이 이 전쟁에 참여 하였고, 십자군 원정대의 기나긴 행렬이 2세기에 걸쳐 낯선 동방으로 향했다. 이들은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며 왕국을 건설했다. 향후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은 고통의 종교분쟁에 휩싸이게 된다. 십자군 제1차 원정에서 기독교도들이 탈환된 예루살렘은 반세기 넘게 기독교 세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인 1184년에 이르러 예루살렘 왕국은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살라딘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으로 이슬람 세력이 급팽창함에 따라 차츰 왕국은 존폐위기에 몰리게 된다. 십자군 기사들은 난국을 타개하고자, 성지 수호를 위한 새 전사들을 모으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온다. 십자군 원정에서 부상을 입고 고향 프랑스로 돌아온 기사 고프리는 아들 발리안을 찾아가 자신이 친아버지임을 밝히고, 그에게 기사도 정신을 불어넣는다. 한낱 대장장이였던 발리안은 아버지의 숭고한 이상에 고무돼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러나, 고프리는 매복 기습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고프리는 아들 발리안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예루살렘의 평화를 수호할 임무와 영주로서의 기사 작위를 물려준다. 아버지의 검을 넘겨받은 발리안은 이제, 약자를 보호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신성한 기사도 서약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 한 발을 내딛는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도인 지혜로운 통치자 볼드윈 4세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일시적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볼드윈의 치세가 수명을 다해가면서 십자군 내부에서는 권력암투, 탐욕, 반목과 질시의 징후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불안정한 휴전도 서서히 위협을 받았다. 볼드윈을 축출하고 새로이 권력을 장악한 왕에 의해 휴전은 깨어지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지만, 탐욕으로 얻은 권력의 오만으로 십자군은 전멸 당하고 만다. 기사 발리안은 백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며 외친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손에 달렸다. 십자군이 이 성을 빼앗을 당시는 지금 밀려오는 적군도, 우리도 모두 태어나기 이전이었다. 저들과 우리는 앞 세대가 저지른 일로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엔 로마가 무너뜨린 유대사원이 있었고 이슬람 사원이 그 위에 세워졌다. 무엇이 더 신성한가? 통곡의 벽? 이슬람 사원? 예수의 무덤? 무엇이 더 소중한가? 우열은 없다. 모두가 소중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이 돌벽이 아니고 이 안에 사는 백성이다.” 발리안은 아버지의 유언을 되새기면서 목숨을 건 일전(一戰)에 임했다. “적을 절대 두려워 말라. 용기 있게 맞서라. 약자를 보호 하고 의를 행하라.”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발리안이 적장 살라딘에게 묻는다. “예루살렘은 무슨 의미인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보며)“Nothing(아무것도 아니다)......Everything(또한 전부다),,,,,,” 성전과 성지와 종교 ‘반지의 제왕’의 요정 전사 역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올랜도 블룸이라는 배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2005년 5월 개봉됐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양분되었지만 완성도 높은 스펙터클과 감동은 뒤로 하고서라도 이 영화는 종교의 참된 의미를 생각케 하는 서사액션 대작이다. 이 영화는 많은 아랍인들에게도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예루살렘은 지구촌에서 가장 치열한 그리고 가장 오래된 화약고다. 예루살렘엔 뭐가 있을까? 말라가는 우물 몇 개와 황토 먼지뿐이다. 석유가 나거나 금광이 발견된 곳도 아닌 일종의 사막의 오아시스 정도인 곳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곳을 차지하려고 그 아까운 피를 뿌렸을까? 단 하나 성지(聖地)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막강한 두 종교의 성지가 중첩된 곳이기 때문에 서로 탈환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예루살렘을 위한 죽음은 모두 순교로 치장되었고, 최고의 영광으로 봉인되었다. 남미의 마야 문명에서는 신에게 바칠 제물로 가장 꽃다운 처녀나 순수한 어린아이까지 서슴지 않았다. 제물들에게 가장 신성한 죽음이며 영광이라고 받들었다. 현대인들은 이런 행위를 미개한 종족들의 전형으로 치부한다. 그러면 성지를 두고 성전을 벌이는 인간들은 어떠한가. 종교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목숨을 버린다는 차원에서는 별반 다른 게 없다. 성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육신마저도 한 시절 입고 버리는 가죽옷으로 치부하는 선각자들의 눈에는 땅에 표시를 해 성지로 삼고 여기다가 목숨까지 바치는 이들이 어떻게 비칠까.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종교 건축물을 지어 성지를 만들어 가면서 순교를 강요하고 있지 않는 돌이켜보게 한다. 종교의 목적은 자신의 영혼일 것이다. 그러나 물신이 지배하는 세태는 영혼을 일순간 감싸는 치장물을 숭배하여 오히려 영혼을 병들게 하지는 않는지. 이것이 종교의 속성 아닐까. 죽도록 사랑하지만 결국 환상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 |
디 워(D-War, 2007)
“비쥬얼 OK, 낯선 윤회 스토리 “글쎄”
줄거리
참혹한 참사가 벌어지는 LA. 단서는 단 하나, 현장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비늘뿐. 사건을 취재하던 방송기자 이든(제이슨 베어)은 어린 시절 잭(로버트 포스터)에게 들었던 숨겨진 동양의 전설을 떠올린다. 여의주를 지닌 신비의 여인 세라(아만다 브록스)와의 만남으로 인해 이무기의 전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전설의 재현을 꿈꾸는 악한 이무기 ‘부라퀴’ 무리들이 서서히 어둠으로 LA를 뒤덮는 가운데, 이들과 맞설 준비를 하는 이든과 세라. 악의 이무기와 선의 이무기의 팽팽한 결전과 이카루스 군단과 의 혈투를 벌인다. 결국 선한 이무기가 최후에 용이 되어 브라퀴를 물리치고 하늘로 승천한다. 조선시대 배경등 한국 이미지와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리랑의 선율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가주의 감독
한국에서만 800여만 명이 관람했고, 미국에서도 한국역사상 최대 스크린 수 2000개를 넘겨 개봉했다. 개봉 전부터 그리고 개봉 후에도 여전히 네티즌 사이에서는 뜨거운 감자다. 예술성이냐 흥행성이냐를 따지기에 앞서 우선 코미디언 심형래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영화감독에서부터 접근해본다.
과거 한때 우리는 개그맨 심형래의 천부적인 연기력에 원없이 웃었다. <영구와 공룡쮸쮸>(1993년)에서는 “현대에 되살아난 어린공룡 쮸쮸가 영구와 함께 돌담길을,,,”, <타라오의 발톱>(1994)에서는 “기원전5만년전 공룡 시대의 원시인 심형래를,,,,”, <영구와 우주괴물 불괴리>(1994년)에서는 “영구가 초록별 지구를 점령하기위해 파견된 불괴리와 싸움을”, <드래곤 투카>(1996년)에서는 “영구가 젊은 여자를 제물로 삼는 거대한 에일리언과 싸웠고<용가리>(1999년)에서는 ”100% 컴퓨터그래픽(CG)로 완성된 용가리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장르를 발굴 발전 시켰고 또 다른 영역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어린 시절 꿈과 모험심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그가 한국영화 사상 유래 없는 자금이 동원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과 그 비판의 저울의 잣대 오른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심형래’라는 웃음을 선사해주는 한명의 감독,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만든 영화 “디워”는 <티라노의 발톱>,<용가리>와 함께 그의 인생에 있어서 계속되는 하나의 일직선상의 흐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일순간 돈과 명예 애국심 운운하는 쇼맨쉽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그의 엔터테인먼트 인생을 뒤돌아 볼 때 의문이 들게 한다. 또 다른 차원의 상상력을 스크린 속에서의 세계를 연출하고, 한국의 이조시대를 배경으로 윤회사상을 고집했다는 부분에서는 적어도 영화의 한 감독으로서는 일관된 영화 철학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심형래 감독은 작가주의의 대열에 충분히 자격이 있다.
빈약한 스토리 그리고 윤회에 대한 가벼움
한국이나 미국이나 영화 비평가들은 더할 수 없는 혹평을 했다. 스토리가 너무 빈약해서 한마디로 유치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마케팅에서는 흥행성에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비쥬얼 영상이 놀랍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눈으로 보는 것이기에 음향만 뒷받침 된다면 충분히 흥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 <킹콩>의 줄거리도 빈약하긴 마찬가지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의 흥행성적을 보면 스토리 전개의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한국에서는 그런대로 대박이었지만 미국에서는 그냥 그러한 실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투 장면에서 실감이 나고 긴박감이 넘치지만 정작 줄거리에서는 스토리가 묻어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줄거리 부분과 그래픽 전투장면 괴리되어 줄거리 전개부분에서는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 하듯 지루하게 해설을 해버린다. 스토리가 영상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게 만들고 있다. 왜 전투를 하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전투장면이 화려하고 실전같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스토리는 사실 간단치가 않다. 과거의 과보를 현세에서도 과연 반복하는 가하는 스토리는 한국(과거)에서 미국(현재)으로 장소를 이동하므로 써 한층 더 복잡하다. 그래서 ‘스토리가 희박하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표현이다. 각색이 빈약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각색을 심형래 감독이 아니라 ‘너는 내 운명’같은 영화의 각색 전문가가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윤회에 관한 부분은 미국인들에게 생소한 부분이다. 기독교 가치관이 대부분인 사람들에게 이것을 이해시키는 일은 종교적 포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눈에는 확실히 이단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네티즌들과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고 논란이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 종교적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영화의 완성도를 시비거리로 올렸지만, 영화 전반의 스토리흐름인 불교적인 윤회가 영 거슬렸다는 것이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윤회가 상식이 되어있다시피 하니 그럭저럭 스토리가 연결이 되었는데, 미국에서는 아무리 비쥬얼의 비중이 높더라도 낯선 윤회 스토리, 낯선 이국의 조선시대가 영 부담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애초부터 심각한 종교영화를 표방했다면 몰라도, 비쥬얼을 주무기로 한 영화에서 윤회라는 얼개는 치명적이었다고 보인다.
전투장면은 SF적 요소지만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인물 갈등과 대화는 사실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내용을 뜯어보면 시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윤회 자체가 SF의 요소이다. 이런 불균형이 영화 전반을 너무 가볍게 만든 것이라고 보인다.
영화를 마케팅함에 있어 한국에서 애국주의는 통했지만 서구의 문화 정서를 간파하는 마케팅은 여전히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영화 ‘괴물’이나 ‘올드보이’가 비평가의 눈을 사로잡은 이유는 영화 속에 국적이나 종교적 이질감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인간 본연의 심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교에서 자주 다루는 윤회, 과보, 무심 등을 우리는 인간 본연의 휴머니즘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단지 도식화된 매뉴얼로서 다루고 있지 않나 심각하게 반추해야할 부분이다.
문화가 다른 미국인들이 묻는다. 과거 한국(조선시대)일을 현재(미국)에서 연장시키는 윤회가 무슨 의미인가? 영화를 벗어나면 지금 우리 생활과 윤회가 무슨 관계인가? 세계적인 불교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이 문화 정서의 장벽을 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를 잘 안다는 우리조차도 인간의 깊은 이해 없이 맹목적으로 불교 개념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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