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열강 거부한 민족주의적 개혁론자 이건창, 서구적 개혁 추구한 근대인의 초상 서재필
이건창과 서재필
어느새 이 기획도 절반이 지났다. 원효와 최치원으로 시작한 우리 지식인들의 시대정신 모험은 이제 조선사회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영·정조 시대부터 우리 지식인들의 최대 화두는 근대화였을 것이다. 근대화는 다름 아닌 근대성, 다시 말해 모더니티를 이루는 것이다.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자본주의, 그리고 문화적 현대주의(모더니즘)를 가리킨다(여기서 말하는 모더니즘이란 예술사조로서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포괄하는 가치 및 정신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뜻한다).
모더니티로 가는 길에서 1876년 개항은 중대한 분수령을 이룬다. 그것은 나라의 문호를 열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낯선 존재였던 서양인과 서양 문물을 문을 열어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방향의 발전을 모색하겠다는 것에 개항의 의미가 담겨 있다. 물론 우리에게 개항은 자발적인 게 아니라 타율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결국 이러한 타율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식민화...
한말 3대 문장가
이건창은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과 더불어 한말 3대 문장가로 꼽혔던 그는 이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의 절친한 벗인 김택영은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 아홉 명을 선정한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에서 이건창을 그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다. 김부식에서 이건창에 이르는 구대가의 선정에 이견이 없지는 않지만, 조선 말기 이건창의 문장이 독보적이었음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는 듯하다. 그러기에 그는 ‘조선의 마지막 문장’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이건창의 유적지를 여러 번 가보았다. 강화도 초지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선두포구를 지나, 쪽실수로에서 동막해수욕장 쪽으로 조금 더 가면 화도면 사기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에 이건창이 태어난 생가가 있다. 소박한 초가집이지만, 집 앞에는 서해 바다가 펼쳐 있고 뒤편에는 마니산 줄기가 이어져 있다. 그리고 양도면 건평리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그의 묘지가 쓸쓸히 놓여 있다.
개인적으로 이건창을 알게 된 것은 민영규 교수의 ‘강화학(江華學) 최후의 광경’을 통해서였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의 강화학자들, 다시 말해 양명학자들을 다루는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안겨줬다. 하곡 정제두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의 양명학은 이른바 ‘이단의 사상’이었다. 주자학만을 철저히 숭상한 조선 사회에서 지행합일을 강조한 양명학은‘변방의 사상’이었다. 가학으로 양명학을 배운 이건창은 바로 이 점에서 ‘비주류의 사상가’라고 하겠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내 연구실이 있는 건물의 이름이 위당관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연희전문에서 가르치신 정인보 선생은 강화학파의 양명학을 계승하신 분이기도 하다. 건물 앞 한구석에는 선생의 흉상이 있고, 거기에는 제자 민영규 교수가 쓴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산이 그렇고, 성호가 그렇고, 그리고 하곡·원교·초원·담헌·석천 등이 역시 모두 그러해서, 수삼세기 동안 지하를 복류해야만 했던 선학들의 슬픈 사연을 몸으로 감당하시고 지표로 광복하신 이가 바로 선생 당신이시다.”
선학들의 슬픈 사연이란 다름 아닌 주자학의 나라에서 양명학을 연구해온 이들의 서글프지만 의연했던 삶을 뜻한다. 연구실을 오가면서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밀린 원고 때문에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머무는 날이면 흉상 앞 본관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더러 휴식을 취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 말의 의미를 음미해보곤 한다.
진리란 무엇이며, 지식인은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당시 강화학자들이 소론계 양명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이 현재적 관점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진리 탐구의 학문적 관점에서 당파라는 분류는 기실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 갖는 어느 한 측면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속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자신의 시대와 당당히 맞서서 진리 탐구에 고투(苦鬪)한 강화학자들의 용기다.
민족주의의 선구적 노선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개항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세 가지 흐름이 존재했다. 서구의 물결이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데 전통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풍전등화의 현실 속에서 위정척사를 주도한 정통주자학의 길, 갑신정변을 주도한 문명개화의 길, 그리고 그 둘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론이 경합했다.
이건창이 선택한 길은 이러한 노선들과는 사뭇 달랐다. 사상가라기보다 문장가였던 그가 선택한 길은 강화학, 즉 양명학에 기반을 둔 일종의 개혁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전통을 쇄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전통의 개혁노선이자, 서구 열강 세력을 거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선구적 노선이기도 했다. 이건창과 양명학자들이 이러한 노선을 선택한 이유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
민영규 교수도 주목한 이건창의 시 ‘농삿집의 추석(田家秋夕)’은 그의 현실인식을 엿보게 한다.
“남쪽 마을에선 소주를 거르고 / 북쪽 마을에선 송아지 잡네 / 오직 서쪽 이웃집에서만은 / 밤새껏 통곡치네 / 묻노니 그 통곡하는 사람 누구뇨 / 유복자 안은 과부라네 (…)
겨울 나기도 부족하여 / 봄이면 부자집에 가 빌어 / 몇 줌 낟알 얻어온 것 / 한 알도 아껴 먹지 않고 / 종자곡식으로 삼았다오 (…)
매양 굶다보니 / 그녀가 어찌 나무같이 완강하랴 / 남편이 세상 뜨니 / 앞산 기슭에 묻었다오”
당대 농민들의 삶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서너 번의 암행어사와 유배 경험은 이건창으로 하여금 농민들의 구체적인 삶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정약용이 오랜 유배생활에서 당대 현실을 새롭게 발견했듯이 이건창도 몰락해가는 조선사회의 민생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목도하고 또 비판했다.
이건창이 남긴 저작으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과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손꼽힌다. ‘명미당집’이 그가 남긴 작품들을 모은 시문집이라면, ‘당의통략’은 조선시대 당쟁에 대한 연구서다. ‘당의통략’은 조부 이시원이 지은 ‘국조문헌’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국조문헌’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자신이 소론계 양명학자였음에도 이건창은 가능한 객관적 시각에서 선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 당쟁을 검토한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책의 마지막 ‘원론’에서 당쟁의 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쟁의 원인으로 이건창은 다음의 여덟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는 도학이 지나치게 중한 것이고, 둘째는 명분과 의리가 지나치게 엄한 것이며, 셋째는 문사(文詞)가 지나치게 번잡한 까닭이고, 넷째는 옥사와 형벌이 지나친 것이며, 다섯째는 대각(臺閣)이 너무 높은 것이고, 여섯째는 관직이 너무 맑은 것이며, 일곱째는 문벌이 너무 성대한 것이고, 여덟째는 나라가 태평한 것이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비의 부국강병
‘당의통략’이 갖는 함의는 당쟁에 대한 이러한 분석에서 조선시대 정치에 대한 이건창의 평가와 비판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정치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도 강조하듯이 ‘적과 동지의 이분법’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적대가 사회적 통합과 함께할 때 의미를 갖는 것이지, 적대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될 때 그것은 ‘사회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정치’, 곧 소모적 정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당의통략’을 통해 이건창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도 백성을 위한, 사회를 위한 정치의 구현이었다.
이건창과 강화학자들의 삶은 비록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전통과 모더니티의 경계에서 지식인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전통에서 모더니티로의 전환이라는 역사변동 속에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전통의 쇄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모색하려는 강화학자들의 정치적 기획은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물줄기는 이미 모더니티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 과거는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는 것, 연속보다는 단절이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을 포함해 역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 선 강화학자들은 서구화라는 근대화의 물결에 합류하기를 주체적으로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학을 이끌던 이건창이 세상을 떠난 후 동료와 후학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땅에서, 어떤 이들은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비로서 기품 있는 고투를 이어갔다.
민영규 교수에 따르면,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게 양명학의 가르침이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것이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의 갈 길이라는 것이다. 이건창은 양명학의 이러한 가르침을 할아버지 이시원에게서 어릴 때부터 아침저녁으로 들었다고 한다.
정치사회학적으로 동기의 순수성과 질의 참됨이라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지식인이 가져야 할 ‘신념윤리’를 지칭한다. 학문과 정치를 오가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양명학의 주장은 결과를 중시해야 할 ‘책임윤리’를 과소평가한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 비판을 소홀히 한 당시 지식사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양명학의 가르침은 치열한 진리에 대한 열망으로 볼 수도 있다.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빛이며, 그것은 지식인에게 존재의 마지막 거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화학자들의 용기는 이건창과 평생 교유한 황현에게서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이건창이 세상을 떠난 후 황현은 고향에 은거해 저술에 몰두했다. 널리 알려진 그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말 그대로 ‘들에서 쓴 기록’이다. 들에서 썼다는 이 표현이야말로 역사의 한가운데서 역사에 맞서온 황현의 삶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1910년 나라가 결국 일제에 패망하자 황현은 “나는 죽을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순국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절명시 네 편을 남긴 채 자결을 감행했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을 돌이켜보니 / 문자 안다는 사람 인간되기 어렵구나”
절명시 가운데 한 부분이다. 나는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더 비장한 시를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했다. 어떤 이는 황현 역시 봉건시대 지식인의 한계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 역시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역사를 모두 현재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대 속에서 황현이 선택한 길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최선의 길, 다름 아닌 진리에의 길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목숨
문자를 안다는 사람, 다시 말해 지식인의 본분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라의 패망에 죽음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동기의 순수성과 질의 참됨, 바로 그것이었다. 지식인은 과연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이는 국면사적 역사나 구조사적 역사를 넘어선 초시간적 역사 속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황현은 지식인이라는 존재의 위엄을 입증했다. 황현마저 세상을 떠난 후 일제 식민통치는 더욱 강화됐고, 36년이 지난 다음에야 무궁화의 나라는 해방을 이뤘다.
이건창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명미당시문집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한 바 있다. 마치 행장과도 같은 이 글은 이건창의 일생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이 글을 보면 당대에 같이 활동했던 개화파와 동도서기파에 대한 이건창의 직·간접적인 평가가 나온다. 주목할 것은 이건창이 개항 이후 ‘조선책략(朝鮮策略)’을 포함해 대외 정세를 상당히 숙지하고 있었음에도 개화파 및 동도서기파와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개항 이전과 개항 이후의 두드러진 차이 가운데 하나는 대외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조선이 놓인 지정학적 특징을 다룬 대표적인 책이 주일 청나라 공사였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이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가져온 이 책에서 황준헌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전략을 다루고 있다. 그 외교 전략으로 그는 조선이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에 기초해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이 책자는 당시 조선을 뒤흔들어놓았다. 한편에서 유림의 척사 상소가 이어졌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개화파와 동도서기파의 외교 전략 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주목할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에 대해 어떤 외교 전략을 구사할 것인지는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볼 때 우리 사회의 지정학이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구조화되어온 셈이다.
이 나라들 가운데 특히 주목할 국가는 미국이다.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래 미국은 지난 100여 년을 통틀어 볼 때 한국 사회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쳐온 나라다. 미국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이건창의 뒤를 이어 이 기획에서 다루고자 하는 지식인은 한국인이면서도 미국인이었던, 독립협회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서재필이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
먼저 그의 말년부터 이야기해보자. 광복 이후 미 군정청의 요청으로 서재필은 1947년 7월 49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갑신정변 당시 미주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반생을 보내고 백발로 돌아온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김규식, 김성수, 여운형, 조병옥 경무부장 등 각계 대표와 관계 요인들과 친척, 국내외 신문기자단 등 환영군중에 싸여 인천 부두에 상륙하자 수만 군중의 박수와 만세소리는 해륙을 흔들었다. 그는 귀국의 제일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귀국은 실로 49년 만의 일이다. 이번 오게 된 것은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왔으나 개인으로서 의정을 돕기 위하여 오게 된 것이다. …짧은 시일이나마 젊은이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돌려서 지도에 노력하겠다.”
해방공간에서 서재필이 귀국해 머문 시간은 1년2개월이다. 그는 미군정 최고의정관이 되어 김규식 등과 함께 나름대로 정치적 활동을 벌였지만, 이미 연로하고 이승만 세력이 견제하면서 그 영향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의 삶과 사상에 대한 책을 출간한 이정식 교수는 1948년 9월 서재필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을 사실상 세 번째 망명이라고 쓰고 있다. 한국인이면서도 미국인이었던,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세 번째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서재필의 삶과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서재필은 1864년(고종 1년) 전라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광언이고, 어머니는 이기대의 따님이었다. 호는 송재(松齋)이며, 영어 이름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7세에 서울로 올라와 외삼촌인 김성근에게서 한학을 배우고(서재필은 어린 시절 친척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갔다), 1882년 1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그는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교유하면서 개화사상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1883년에 김옥균의 권고로 일본 도야마육군소년학교에 입학해 현대식 군대교육을 받았다.
1884년에 귀국한 서재필은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그는 병조참판에 임명됐지만, 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4개월 뒤에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그의 첫 번째 미국 망명이었다. 서재필은 1889년 콜럼비안대학(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했고, 1890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893년에는 대학을 졸업, 의사면허를 획득했으며, 1894년에는 미국 철도우편사업자의 딸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했다.
언로를 개척하다
서재필이 미국에 머물렀을 때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이 일어났고, 갑신정변 세력이 복권되자 1895년 그는 귀국했다. 곧 그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으며, 1896년에는 정부예산의 도움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서재필의 독립운동이 빛을 발하던 시기는 바로 이때였다. 독립신문에 이어 그는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출범시켰으며, 독립문을 건립하고 토론회를 개최하며 정치개혁 운동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은 보수세력의 견제를 받게 됐는데, 결국 1898년 두 번째 미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미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의학을 포함한 생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3·1운동을 전해 듣고 언론을 통해 한국 문제를 세계에 알렸으며,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외교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이 이뤄지고 미군정이 실시되자 앞서 말했듯이 그는 미군정청의 초청으로 한국에 돌아왔지만, 1948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고, 1951년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여든여섯의 기나긴 삶을 마감했다. 1994년에는 그의 유해가 봉환되어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서재필은 정치운동가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는 1999년 서재필이 영어로 집필한 자료를 정리해 ‘My Days in Korea and Other Essays’를 출간했으며, 2009년에는 최기영 교수가 편집한 국문자료집 ‘서재필이 꿈꾼 나라’를 간행했다. ‘서재필이 꿈꾼 나라’는 한말,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눠 서재필이 집필한 논설, 연설, 서간 등을 담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서재필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결성일 것이다.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 서재필이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립신문에 대해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근대 시민사회의 한 구성 요소로서의 공론장(public sphere)에 관한 것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공론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언로(言路)라는 게 그것이다. 사대부들은 언로를 통해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했는데, 여기에는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라는 제도적 장치와 상소라는 비제도적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전국에 산재한 서원과 연계된 상소는 전통사회 공론장에서 이채로우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제도였다.
하지만 개항 이후 빠르게 진행되는 사회변동 속에서 국가와 사회를 이을 수 있는 새로운 공론장에 대한 요구가 커져왔다. 독립신문은 바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근대적 공론장의 효시다. 정진석 교수는 독립신문이 갖는 언론사적 의의를 정부와 백성의 가교, 권력과 외세에 대한 비판, 신문을 통한 여론 형성, 한글 전용과 영문판(The Independent) 발행 등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독립신문 발간은 바로 우리 근대사에서 시민사회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서재필을 둘러싼 ‘문화충돌’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늘 처음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권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올바른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이 있을 터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터이옴.”
1896년 4월7일 독립신문 창간호에 서재필이 쓴 논설이다. 이미 당시 관보인 ‘한성순보’가 있었지만, ‘독립신문’이야말로 정부와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공론장이었다. 독립신문과 함께 독립협회 결성 또한 서재필의 주요한 기여다. 서재필을 포함한 범(汎)개화세력은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창립해 조선사회의 정치·시민사회 개혁을 모색했다.
독립협회에 대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발표한 신용하 교수는 독립협회가 전개한 민족운동을 독립문 건립운동기(1896년 7월~1897년 8월), 토론회 계몽운동기(1897년 8월~1898년 2월), 정치개혁 운동기(1898년 2월~1898년 12월)의 세 단계로 구분한 바 있다. 여기서 마지막 정치개혁 운동기에 독립협회는 조선의 자주독립 공고화와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현을 위한 자주·민권·자강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당시 서재필의 사상은 자주독립과 자주국권, 민주주의,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자주근대화 그리고 과학적 위생론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1896년 조선에 다시 돌아온 서재필은 선배 세대인 김옥균, 박영효와는 다른, 오늘날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 서구적 ‘근대인’이었다. 망명 시절에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교육을 받은 서재필은 서양, 서구화, 무엇보다 모더니티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서재필의 태도에 대한 전통적 지식사회의 반응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그(서재필)가 갑오년에 환국했을 적에 왕을 알현하면서 외신(外臣)이라고 칭했고, 안경을 쓰고 담배나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니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 일이 이쯤 되면 사람으로서 어찌 천도를 안다 할 수 있으랴”는 기록을 남겼다. 서재필의 태도에 대한 다소 과도한 비판이기는 하지만, 당시 서재필의 태도를 둘러싼 논란에는 일종의 ‘문화 충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사회학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태도 그 자체 못지않게 세계관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시험을 보고 갑신정변에 참여했지만 서재필은 한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예민했을 20대에 미국식 근대 교육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개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주의를 자연스레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조선사회에 일차적으로 요구된 것은 근대적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독립국가의 건설과 근대적 개인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확립이었을 것이다.
신용하 교수도 강조하듯이,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이 강조한 사상 가운데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준 것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관리는 국민의 종복에 불과하다는 국민주권 사상이었다. 전통사회와 모더니티를 나누는 기준인 ‘왕이냐 국민이냐(King or People)’에서 그는 국민의 우선성을 열렬히 옹호했고, 나아가 기존의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러한 서재필의 사상에서 조선 사회는 적어도 이념의 영역에서는 서구의 모더니티에 가까이 다가갔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이 정부의 주인”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서재필이 추구한 근대화는 서구화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는 철저한 서도서기(西道西器)의 관점에서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추구했다. 당시는 물론 최근까지 이러한 서도서기의 전략이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을 이뤄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서재필의 태도는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친미파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비서구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서도서기가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서구적 물질문명의 수용이 불가피하더라도 그 정신적 가치를 어디까지, 그리고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문제는 서구 중심적 세계관이 한계에 도달한 현재, 문명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포괄적이면서 심층적인 토론을 요청하고 있다.
서재필의 일생에서 다시 해방공간으로 돌아오면, 그가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우리 국민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마라. 정부에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라는 것이요,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소원이다.”
모더니티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를, 문화적 현대주의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수용해야 하며,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 태평양을 오가면서 서재필은 과연 무엇을 꿈꿨고 또 무엇을 고뇌했는가. 비록 그가 한국인으로서 살아온 시간이 미국인으로서 살아온 시간보다 한참 짧았다 하더라도 뒤늦게나마 서재필의 유해가 독립을 그토록 갈망했던 나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서울 출신이 아니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열한 살 때까지 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내가 초·중·고교와 대학교를 다닐 때 서울의 중심은 종로였다. 종로2가 사거리에서 안국동 로터리까지의 우정국로에 가면 조계사 옆에 우정총국 건물(현 체신기념관)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이곳을 처음 찾아와 본 이래 무던히도 이 주변 길을 돌아다녔다. 원고를 마무리하기 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체신기념관을 찾았다. 바로 여기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에 대해 이건창과 서재필은 각각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라 선 지 오백 년 / 선비를 기르고 양반을 중히 여겨 / … / 고관과 두터운 녹 받는 이들은 / 부귀영화로 편안히 지냈는데 / 외적에 붙기를 기꺼이 여겨 / 매국을 별로 어려워 않았네.” 1886년 이건창이 쓴 시 ‘한구편’(韓狗篇)의 한 구절이다. 이건창이 보기에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개화파는 외세를 끌어들여 정권을 장악하려고 한 비주체적 정치세력일 따름이다.
갑신정변의 한계 인정
“갑신년 조선의 개혁운동자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이상 두 전례(영국의 마그나 카르타 서명,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조선 귀족 실패의 근본적 원인은 둘이니 하나는 일반 민중의 성원이 박약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너무도 남에게 의뢰하려 했던 것이다.” 1935년 동아일보에 실린 서재필의 글 ‘회고 갑신정변’의 한 구절이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갑신정변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자주 토론돼왔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갔던 두 지식인의 서로 다른 태도다. 조선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이건창의 길과 서재필의 길은 달랐다. 이건창은 서양을 거부하는 주체적인 개혁을 꿈꿨고, 서재필은 서양을 수용하는 서구적인 개혁을 모색했다. 두 지식인이 선택했던 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았는지를 판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역사에서 결과의 책임윤리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지식인에게는 그 동기의 신념윤리 또한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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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일 것이다. 1870년대의 개항과 1960년대의 산업화에 이어 최근 우리 사회는 세계화라는 제3의 개방의 문턱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세계화가 불가피하다면 우리 사회는 그것을 주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경쟁력 강화와 불평등 감소, 사회적 다원성과 국민적 합의, 평화 공존과 국가 이익 등 세계화가 강제하는 상호모순적인 과제를 어떻게 생산적으로 결합해야 할 것인지의 중차대한 과제를 지금 우리 사회는 안고 있다.
체신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길가에 서 있는 빨간 우체통이 내 눈을 끌었다. 이건창의 길과 서재필의 길.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두 사람이 선택했던 서로 다른 길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반추했다. 초여름 늦은 어둠이 서서히 내리는 종로의 한 구석,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안국역 쪽으로 가야 하는데 정작 그 반대편인 보신각 쪽으로 나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건창은 누구인가 1852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고 강화에서 성장함. 1898년 사망. 강화학이라 불리는 양명학을 가학으로 전수받은 그는 조선 말기를 장식한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되고 있음. 주요 저서로는 ‘명미당문집’ ‘당의통략’ 등이 있음. 서재필은 누구인가 1864년 전라도 보성에서 출생. 1951년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사망.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출범시킨 그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평가되고 있음. 주요 저서로는 ‘서재필이 꿈꾼 나라’(최기영 엮음), ‘My Days in Korea and Other Essays’(홍선표 엮음) 등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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