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고승철의 읽으며 생각하기

醉月 2011. 7. 8. 08:06

이웃의 눈으로 본 한중일 삼국사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1,2
유용태 박진우 박태균 지음, 창비, 414쪽(1권) 412쪽(2권), 각권 1만8000원

 

네덜란드의 소도시 마스트리히트. 인구 15만명의 이 도시는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3개국의 국경지역에 있다. 시민들은 맥주를 마시러 독일로 건너가기를 즐기며 저녁식사를 하러 벨기에 식당으로 가기도 한다.

1991년 12월9~10일 이틀 일정으로 유럽공동체(EC)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파리특파원으로 활동하던 필자는 이 회담을 취재하러 갔다. 유럽연합(EU)의 탄생을 매듭짓는 중요한 회의였다. 치열한 논의가 이어져 10일 자정이 되어서야 회담이 끝났다.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은 11일 오전 1시10분에야 시작됐다. 유럽을 통합한다는 내용을 담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그렇게 태어났다. 조약을 살펴보니 황당무계했다. 회원국들이 앞으로 단일통화를 사용한단다. 가능할까? 당시에 필자뿐 아니라 다른 언론인들도 미심쩍은 눈길로 봤다.

 

세월이 흘러 유로화(貨)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프랑(프랑스), 마르크(독일) 등은 사라졌다.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에서 혈전을 벌인 프랑스와 독일은 수백 년 구원(舊怨)을 풀고 유럽통합의 쌍두마차를 끌었다. 양국 전문가들은 중·고교에서 쓰는 유럽역사 교과서도 함께 만들었다. 오랫동안 적대국이었던 이들이 공통 역사서를 만들다니 대단한 성과 아닌가. EU 회원국들은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에 따라 대학생들을 활발하게 교류하게 하는 등 교감의 폭을 넓히고 있다.

 

눈을 동아시아 쪽으로 돌려보자. 한·중·일 3국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까. 흔히 ‘유교문화권’이니 ‘한자문화권’이니 하며 공감대가 넓은 것으로 묘사한다. 서양인 시각에는 그렇게 비칠지 모르지만 동양 3국 국민은 외모만으로도 서로의 국적을 분간할 만큼 이질적 요소를 금세 감지한다.

사관(史觀)도 크게 차이 나리라. 한국은 중국에 대해 오랫동안 조공을 바쳤지만 1990년대 중국의 개방 초기 때는 낙후된 중국을 보고 우월감을 가졌다. 한국은 35년간 일본 식민통치를 받았으나 고대, 중세까지만 해도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수했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중국은 오래된 역사, 세계 최대 인구, 높은 경제성장률 등을 바탕으로 세계 패권을 노리며 한국, 일본을 ‘작은 나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때 미국과 더불어 세계 2강 경제국이었다는 자긍심으로 여전히 중국, 한국에 영향력을 미치려 한다.

 

3국 사이에 영토 다툼이 일어날 소지도 크다. 한일 간에는 독도, 한중 간에는 백두산, 중일 간에는 센카쿠열도(중국 이름으로는 댜오위다오 열도)가 분쟁 예상 지역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한반도 역사를 왜곡했다. 일본은‘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일본이 오래전에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요즘 중국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역사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청(淸)나라의 역사를 복원하는 사업에 학자 1500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예산은 12억위안. 청 왕조 붕괴 100주년이 되는 2012년에 새로 쓴 ‘청사(淸史)’를 완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프로젝트의 정식 명칭은 ‘국가청사찬수공정(國家淸史纂修工程, 약칭 청사공정)’이다. 공정의 목적은 서양세력에 의해 몰락한 청 왕조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고 청이 이룬 사상 최대의 영토, 다민족 국가 건설 등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려는 것이다. 국가 통합문제를 해결할 교과서로 활용할 것으로 추정된다.

 

6년 각고 끝에 낸 역사서

통합유럽과 달리 한·중·일 3국에서는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이뤄지지 않은 편이다. 3국이 공동 역사 교과서를 마련할 가능성은? 요원하다 하겠다. 그렇더라도 그런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된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덩치가 큰 중국과 일본이 정면대결로 이견을 좁히지 못한다면 한국이 중재자로 나서도 좋을 듯하다.

 

역사학자 3인이 공동 집필한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매우 의미 있는 역저(力著)다. 중국사 전공자인 유용태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일본사 전문가인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한국 근현대사 분야의 권위자인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이 6년여 각고 끝에 펴낸 책이다. 이들은 매월 한 차례 집필회의를 열어 의견을 조율했다. 가장 유의한 점은 하나하나의 사건이 국가 간에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호작용했는지를 살피는 것이었다.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를 각각 병렬적으로 길게 설명한다 해서 해결되지 않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집필 취지를 서문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확인해보자.

 

 우리에게 익숙한 국사/세계사의 이분체제는 사실상 메이지유신 이래 제국일본에 의해 구축된 사관과 역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자국중심주의와 유럽중심주의가 그것이다.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면서 동아시아지역을 두 진영으로 갈라놓은 냉전시대가 끝나고 거대한 전환기에 들어선 이후, 바로 동아시아가 하나의 지역사로 파악될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 그런 만큼 제국의 유산으로 인해 그동안 우리 스스로 소외시킨 동아시아 이웃들의 역사적 경험을 지역사의 관점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절실해졌다.

서문에서 밝힌 대로 베트남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꽤 자세히 소개돼 눈길을 끈다. 베트남은 중국에 긴 세월 동안 조공을 바쳤고 자국 영토에서 외국 군대들이 몰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인 사실 등이 한국역사와 적잖은 공통점을 가졌다.

 

병자호란 이후 200년간 평화 유지

이 책의 장점은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400년 근현대사의 큰 흐름을 통합적 시각으로 조망했다는 데 있다. 먼저 중국의 명(明)이 바다 진출을 금지한 해금(海禁)정책 시기를 탐구했다. 이어 서양세력이 동아시아를 침탈한 제국주의 시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 시기, 1970년대 이후의 탈(脫)냉전 시기 등으로 시대를 크게 4개로 나누었다. 항목별 설명에서 여러 나라 역사를 골고루 다룬 점이 돋보인다. 저자들은 ‘연관과 비교’라는 서술 원칙을 지켰다고 한다.

 

15세기에 명은 해금정책을 펴고 쇠퇴기에 빠졌다. 이 책에 따르면 이 무렵에 벌어진 임진조일전쟁(壬辰朝日戰爭·임진왜란)과 그 여파로 일어난 병자조청전쟁(丙子朝淸戰爭·병자호란) 이후 약 200년간 동아시아에는 평화 체제가 유지됐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조선, 일본, 베트남을 ‘소중심’으로 하며 류큐(琉球·오키나와), 몽골, 티베트 등을 ‘주변’으로 하는 위계화된 형태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아편전쟁(1840~42)의 의미를 중시한다.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는 것이다. 영국의 무력 앞에 무릎은 꿇은 청 왕조는 1842년 난징조약을 맺고 영국에 숱한 이권을 넘겨준다. 난징조약은 국가 대 국가 사이에 맺은 근대적 국제조약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일본 지도층은 서양의 힘을 확인하고 서양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서양과 교역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서둘러 개항을 결정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유신(1868)에 대해 의미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한 반면 아편전쟁 정보에 관해서는 연행사절을 통해 제때 파악했다. 조선은 서양의 통상요구를 거절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면 천주교도와 민중이 손을 잡고 민란을 일으킬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직후에 일본은 타이완을 침공하고 류큐를 합병하는 등 바깥으로 몸집을 불렸다. 일본의 팽창에 맞서는 청, 러시아는 일본과의 한판 승부를 불사했다. 마침내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터졌다. 이들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한국의 땅과 바다는 남의 나라끼리 붙는 패권 경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양대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합병하는 등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 특수(特需)를 누리던 일본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일본에도 밀려오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테러와 쿠데타가 이어지자 일본 군부는 테러 진압을 명분으로 영향력을 더욱 키웠다. 일본 파시즘이 대두한 것이다. 일본은 동남아를 장악하기 위해 ‘대동아 공영권’이란 명분을 내세웠다.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손잡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전쟁 도중에 진행된 타이~미얀마 철도공사에서 연합군 포로 6만명과 민간인 노무자 20만명이 동원됐다. 이 가운데 7만4000명이 희생당했다. 일본의 이런 만행은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잘 묘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양대 강국 사이에는 냉전(冷戰)이라는 새로운 갈등이 전개됐다. 이 여파로 한국과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민족끼리 싸우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16억달러라는 엄청난 전쟁 특수를 누렸다. 미국이 전쟁 물자를 일본에 주문한 덕분이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부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벌어진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과 일본은 전쟁특수를 맛봤다. 이웃 나라의 참극을 틈타 떼돈을 번 셈이다.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좌우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냉전은 끝났다. 아시아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중국은 개방정책을 펼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미국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은 국경을 넘어 취업을 한다. 이주 노동자들의 불평등 문제는 새로운 사회적 이슈다. 노동자들의 이주는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 책은 2005년 한·중·일 3국의 학자 및 교사들이 함께 펴낸 ‘미래를 여는 역사’라는 역사서보다 몇 걸음 앞섰다. 진지한 성찰을 담았고 객관적 위치를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400년, 역사로 소통하다!’라는 부제가 책 내용과 딱 어울린다.

 

“20세기의 정암 조광조”… 이코노미스트 이계식의 삶과 글

정부개혁의 선구자 이계식
일주(一舟) 이계식 박사 추모집 편집위원회 지음, 청조사, 403쪽, 1만5000원

 

독서 선진국에서는 인물 평전(評傳), 자서전, 회고록, 전기 등이 널리 읽힌다. 서점에서도 이런 종류의 책들이 큼직한 서가를 차지한다. 한국에서는 인물 서적이 꾸준히 읽히긴 하지만 뚜렷한 장르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자화자찬 성공신화로 그득한 자서전이 범람해 독자는 이런 홍보성 책자에 진절머리가 났으리라. 특히 ‘정치의 계절’에는 활짝 웃는 얼굴사진이 실린 표지와 함께 낯 뜨거울 정도의 자랑이 담긴 정치인 자서전이 쏟아져 나오고 그 책을 알리느라 요란한 출판기념회가 열리지 않는가. 그런 자서전 대부분이 대필 작가가 한두 달 사이에 후닥닥 날림으로 쓴 책자임을 알 만한 사람은 안다. 명사의 회고록도 무용담 일색이어서 실책에 대한 반성을 통해 배울 게 보이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불멸의 고전 반열에 오른 것은 저자가 방탕한 청년시절의 행각을 낱낱이 밝히고 통렬히 뉘우쳤기 때문이리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음굴에 들락거렸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언젠가 서점에서 ‘판사 한기택’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얼른 사서 밤새 읽은 적이 있다. 일반인에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법조계에서는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유명했던 한기택 법관에 관한 추모집이었다. 그가 작고한 지 1년이 지나자 지인들이 고인에 대한 회고 글과 고인의 일기 등을 묶어낸 것이었다.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 치열한 삶을 살아간 고인의 고결한 인품이 책 곳곳에 배어 있었다. 현직 권력자가 아닌데다 이세상 사람이 아닌 인물에 대해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고인이 얼마나 존경받는지를 나타내지 않는가. 책 만들어 현실적으로 득(得) 볼 일도 없는데….

 

최근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서점 서가에서 ‘정부개혁의 선구자 이계식’이란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출판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책인데도 신간코너에 ‘눕혀져’ 전시되지 못하고 인물 코너 한구석에 ‘세워져’ 꽂혀 있었다. 일간지 서평 기사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숨은 진주’ 같은 귀중한 책을 찾아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은 서평자의 큰 보람 가운데 하나다. 이계식 박사는 2010년 2월 타계했고 그의 1주기를 맞아 이 책이 나왔다.

 

“그날은 오리라”… 정부개혁 이루는 날

이코노미스트 이계식(李啓植) 박사…. 일반인에게는 썩 익숙한 이름은 아니리라. 경제부처 장관을 지내지도 않았고 스타 학자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 관계에서 그는 유능하면서도 기개 높은 의인으로 정평 난 인물이었다. 아호는 일주(一舟).

이 박사의 약력을 살펴보자. 1948년 목포 출생. 목포 유달초등학교-목포중-경기고-서울대 경제학과-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등 화려한 학력을 가졌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 사무관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재정학을 전공하고 귀국 후에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위원으로 20년 가까이 활동했다. 그가 ‘정부개혁의 선구자’라는 별칭을 얻은 것은 1998년 3월부터 2000년 8월까지 2년 5개월간 정부개혁실 실장(1급)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이 추모 책자는 지인들끼리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추모집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준비됐다고 한다. 고인의 마지막 일터인 부산발전연구원에서 편집 실무를 맡았다. 편집위원회 대표(이종희, 좌승희)는 서문에서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수학을 잘했던 천재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꿈꾸며 경제학자의 길을 택했다. 우리나라가 일류 선진사회가 되길 갈망했다. 그렇기에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제도와 조직을 볼 때 안타까워하며 바꾸어 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산의 역사를 찾아 실사구시의 정신을 되새겼으며, 명치유신을 일으킨 인재들과 그때의 사회·경제시스템을 궁구하였다. 미국, 벨기에, 이스라엘, 뉴질랜드, 일본 등을 돌아보며 그 나라의 좋은 점을 우리 시스템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열정과 고뇌는 정부개혁과 지방의 발전을 넘어 남북교류 구상에까지 이르렀다.

 

오늘도 그가 그립기만 하다. 그는 천재와 개혁가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오만’과 ‘경박’ 그리고 ‘독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진심으로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다.

전두환 정부 시절에 경제수석을 지내다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김재익 박사 추모집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김 수석은 통찰력, 인품 등 여러 면에서 존경을 받았다. 수많은 인사가 그의 비보에 애통해했다. 추모 책자가 발간돼 유족들이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800여 명의 지인이 찾아왔다.

 

경제정책 수립자는 이해(利害) 관계에 얽힌 사안에 대해 용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아 손해 보는 쪽으로부터 비방받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이코노미스트 인물에 관한 추모집은 매우 드물다. 이계식 박사에 관한 책이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추모집은 ▲고인이 걸어온 길 ▲지인 45명의 추모 글 ▲고인의 글 ▲고인의 연구물 51편에 대한 해제(解題) 등 4개 부로 구성됐다.

 

초·중학교 시절에 그는 몸놀림이 빨라 ‘날쌘돌이’로 불리던 축구 달인이었다. 학업 성적도 두각을 나타냈다. 시골 중학교에서 당대 최고 명문인 경기고로 진학했으니…. 고교 시절에는 영시(英詩)를 줄줄 암송했다고 한다. 영어회화 클럽 ‘선(Sun)’을 조직해 회장을 맡았고 수학에 재능을 보여 이과반에서 공부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한 고교 동기생은 한덕수 전 국무총리 등이다. 대학생 때는 대학신문 기자로 필력을 떨치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받고 KDI에 들어가서는 주로 재정 분야 연구에서 성과를 냈다. 대학 스승인 조순 교수가 경제부총리로 입각하자 부총리 자문관으로 발탁된다. 정부가 금융실명제 추진, 토지공개념 확대 등 개혁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이 박사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출입기자들이 방문하면 언제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는 벨기에 루벵대학 객원교수와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한 다음 KDI로 돌아왔다. 그는 국제적 경륜을 바탕으로 한국경제를 살리는 데 일조하려 했다. ‘정부혁신: 선진국의 전략과 교훈’이라는 저서를 냈다.

그는 1998년 3월 대통령 직속기관인 기획예산위원회 정부개혁실장에 임용되면서 방만한 정부조직에 메스를 들이댔다. 30대 국책사업이 제대로 이뤄지는지도 따졌다. 그는 “향후 5년간은 (기득권 세력과) 싸움의 나날(daily battle)이 될 것”이라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개혁 작업에 나섰고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지독한 음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개혁 성공) 그날은 오리라/ 우리의 병이 우리 사회의 더러운 병이 깨끗이 사라지고/ 부끄러운 후진의 가죽을 바꾸어 자랑스런 선진의 면모를 갖출 그날이/ 우리 세대가 가기 전에 오리라 정녕 오리라’고 외쳤다.

 

그와 함께 정부개혁을 추진한 박개성 엘리오앤컴퍼니 대표는 “정부개혁실은 민영화, 인력감축, 운영시스템 혁신, 규제개혁, 전자정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면서 “그의 통찰력과 실험정신이 토양이 되었고 강직한 인품이 씨앗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20세기의 정암 조광조

이 박사는 공직을 떠난 후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에 와서 부산발전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산 발전계획을 세우느라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는 사이에 몸에 병이 깊어갔다. 이 박사의 지인들이 쓴 ‘일주(一舟)를 회상하며’라는 글에는 고인에 대한 애틋한 정이 듬뿍 배어 있다.

“이계식 원장님, 당신께서는 부산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부산을 사랑했고 더 깊이 이해했고, 부산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썼던 진정한 부산사람입니다.”(허남식 부산광역시장)

 

“당신은 바른 세상을 꿈꾸던 20세기의 정암 조광조이셨습니다. 영악한 자들은 당신의 우직한 올곧음을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당신의 이상과 열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황원규 강릉원주대 국제통상학부 교수)

 

“정부를 구조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더구나 연구에만 몰두해온 학자가 갑자기 정부에 들어가서 이해가 걸린 많은 조직이나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가? 그런데 그는 그 일을 뚝심을 가지고 이루어냈다. 그가 관직에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소신보다는 요령껏 처신해서 후일을 도모했으리라. 그는 그런 처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곽태원 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이 박사님은 내가 고3 때 과외 선생님이셨다. 친구 4명이 한 팀이 돼 과외를 받았는데 수학은 당시 서울대 2학년생인 이 박사님, 영어는 한덕수 현 주미대사였다. (세월이 흘러) 내가 행정개혁위원으로 임명받는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정부 산하 연구기관의 조직을 대수술하는 업무를 추진하시느라 사방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님이 그 일들을 잘 마무리시킨 것을 나는 기억한다.”(이계경 17대 국회의원)

 

“우리 둘은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종합기숙사인 정영사에서 한 방을 썼다. 그는 문학청년이었다. 소설이건 시건 수필이건 많이 읽고 공책에 빽빽이 기록해두었다가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예쁜 엽서에 시 한 수, 소설 또는 수필 한 두 구절을 꼭 적어 보내주었다. 이 박사를 알게 된 후 언젠가부터 그를 닮고 싶어했다. 그러나 반도 닮지 못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평생 쌓아올린 연구실적, 그리고 후학을 양성해온 그 열정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속병도 많았을 텐데 그때는 미처 그런 고뇌를 헤아리지도 못했습니다.”(송성현 수필가, 청조사 발행인)

 

조선의 한글 연애편지 스캔들

조선언문실록
정주리·시정곤 지음/ 고즈윈/ 240쪽, 1만1800원

 

“한글은 세계 여러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문자다.”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치적은? 훈민정음 창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다. 좀 삐딱한 학생은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점에 대해 “국수주의적인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었으리라. 어떤 학생은 한글이 위구르 문자를 베꼈다느니, 인도 어느 지방의 글자와 비슷하다느니 하는 주장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으리라.

 

세종(1397~1450) 당대에는 한글 창제가 백성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일은 아니었다. 먹고살기가 최대 과제인 때여서 세종의 중요 치적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란 농업기술 서적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란 의학 서적을 보급한 것이 꼽힌다. ‘농사직설’ 덕분에 농민은 농산물 생산량을 크게 늘려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늘리려면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워야 할 때였다. ‘향약집성방’은 중국에서 수입한 값비싼 약재 대신 조선 땅에서 나는 약초를 이용하는 방법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은 소아과와 부인과를 독립 항목으로 내세울 만큼 출산과 양육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향약 의술에서 해열제가 개발돼 소아병인 홍진, 두창 등으로 사망하는 아기가 줄어들면서 인구증가율이 높아졌다.

 

한글이 만들어진 지 600년이 돼간다. 창제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디지털 시대가 열렸다. 한글이 편의, 속도를 생명으로 하는 온라인 체제에 가장 적합한 문자임이 속속 입증된다. 과연 세종의 최대 치적이 한글 창제임을 실감한다. 한국인이 한글 없이 말글살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알파벳, 한자, 한글이 세계 3대 문자라는 주장을 펼쳐도 무리가 아닌 듯하다. 한글의 중요성을 한글날에만 외칠 게 아니라 평소에도 인식해야 하지 않나.

 

세자도 언문 배워 한문 읽어

한글 전문가가 집필한 ‘조선언문실록’은 한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추적한 책이다. 정주리 동서울대 교양학부 교수와 시정곤 카이스트(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의 공저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란을 보자. 정주리 교수에 대해서는 ‘국어학에 발을 내디딘 후 국어의 의미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국어 동사와 구문의 관계, 언어와 사회의 관계, 인간의 정신과 언어 코드의 비밀스러운 공모 관계를 밝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시정곤 교수에 대해서는 ‘말글 속에 숨어 있는 무한한 힘과 놀라운 질서의 세계에 매료돼 그 비밀을 찾는 언어 탐정으로서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대중과 호흡하는 말글살이 연구를 지향한다’고 씌어 있다. 저자들이 언어에 숨은 비밀을 찾는 전문가여서 내용이 흥미진진할 듯하다.

 

책 제목에 붙은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비롯됐다. 한글이 창제된 세종 25년(1443)부터 마지막 왕인 순종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관련 기록을 찾아 분석한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는 한글로 명명되기 이전, ‘언문’으로 불리던 우리 문자가 조선 백성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숨 쉬고 있었는지를 기록 영화 보이듯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저자 서문을 직접 옮겨보자.

 

어떤 때는 사랑하는 임에게 띄우는 편지에 쓰이고, 어떤 때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에 쓰이고, 또 어떤 때는 암호 문자처럼 쓰이고, 또 어떤 때는 누군가를 고발하는 투서에 쓰이면서 삶 속에 녹아들어 간 한글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는 사건, 스캔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한글 자체를 고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한글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보려 한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는 실록에 기록된 것이니만큼 당대에 이목을 끈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치적 사건에서부터 백성의 생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

중국을 사대(事大)하고 공식 문서는 한문으로 써야 했던 시대에 세종이 한글 창제에 나선 것은 엄청난 정치적 결단이었다. 최만리 등 관료권력이 훈민정음 창제가 옳지 못하다고 상소를 올리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세종은 1446년 9월 훈민정음을 세상에 공포하고 일반 백성뿐 아니라 지배 계층에서도 이 글자가 널리 쓰이기를 바랐다. 하급 관리인 서리를 뽑는 시험에 훈민정음을 포함시키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 책의 1장인 ‘언문을 사랑한 임금’에서 임진왜란 때 피란을 가던 선조가 백성들에게 언문 교서를 내리는 상황이 자세히 소개됐다.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치라는 내용인데 백성들에게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자 한문 교서를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1592년의 일이니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146년이 지난 때였다. 이미 언문은 백성들 사이에서는 유용한 소통 도구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세자가 학문을 두루 익혀야 했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공부에 시달렸다. 나이 어린 동궁이 옛 성현의 어록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숙종은 언문을 아는 보모를 왕세자에게 붙여주었다. 언문으로 가르치면 매우 효과적이라는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연애편지 스캔들로 궁녀 처형돼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에야 한자음을 제대로 적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같은 한자를 두고 읽는 발음이 달라 혼란이 심했다. 유생과 사대부도 왕실에서처럼 한문과 언해본을 대조해가며 공부했다.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언문의 유용성에 그들은 감탄했다. 관료들이 쓰는 공식 문서에도 언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숙종 때의 대학자 남구만은 “문과에 응시하는 유생 중에 어려서부터 언문으로 글을 익혀 읽기만 하다가 정작 과거에 오르게 되면 한문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개탄했다.

 

이 책의 2장인 ‘사대부, 언문 편지를 쓰다’에서는 사대부가 아내, 어머니, 시집간 딸, 첩 등 여성에게 편지를 쓸 때는 언문을 사용하는 여러 사례를 담았다. 연산군 때의 일이다. 연산군은 전국의 기녀를 궁궐로 불러 모으는 채홍사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한곤이라는 중급 관리는 자신의 첩이 채홍사에게 끌려갈까 걱정돼 “예쁘게 꾸미면 뽑혀 갈 것이니 꾸미지 말라”고 당부하는 언문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발각돼 한곤은 국왕을 능멸했다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암클’은 한글과 여성을 모두 비하하는 말이다. ‘암컷이 쓰는 글’이니 요즘 기준으로는 막된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이 언문을 즐겨 사용했다. 궁궐에서는 왕후나 공주, 궁녀들이 애용했다. 말하는 대로 쓰니 편했다. 특히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연애편지 쓰기에는 언문이 좋았다.

 

이 책의 3장 ‘여성의 삶과 언문’에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스캔들이 나온다. 세조 때 덕중이란 궁녀의 연애편지 사건을 보자. 덕중은 사모하는 귀성군 이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언문 편지를 써서 환관 최호, 김중호에게 주었다. 지체 높은 이준에게 덕중 자신이 접근하기는 어려웠으므로 환관에게 전달을 부탁한 것이다. 이준은 이 편지를 받고 아버지 임영대군에게 사실을 고한다. 임영대군은 아들 이준을 데리고 국왕 세조에게 가서 이를 아뢴다. 세조는 두 환관을 기강문란죄로 다스려 궁궐 밖으로 끌어내 때려죽이게 했다. 세조는 편지를 쓴 덕중은 살려두려 했다. 덕중은 세조가 수양대군인 시절에 정을 맺은 여인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후궁으로 삼아 아들을 낳게 했다. 그 아들이 곧 죽었고 덕중은 후궁에서 궁인으로 강등됐다. 국왕에게서 버림받은 덕중은 잇달아 스캔들을 일으켰고 마침내 편지 심부름을 한 환관 둘을 죽게 한 것이다. 신하들이 덕중도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세조도 어쩔 수 없었다. 덕중은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4장 ‘백성의 소통법’에는 백성들의 말글살이 실태가 실렸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은 1909년에 출간한 ‘전환기의 조선’이란 책에서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한 달 남짓 공부하면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서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천 명 가운데 한 명이 읽을 수 있는 데 비하여 조선에서의 읽기는 거의 보편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영국인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저서에서 ‘한강 유역의 하층민들이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당에서는 한문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한자의 음과 뜻을 언문으로 표기한 교재가 널리 사용됐다. ‘훈몽자회’가 그런 책이다. 학생들은 한문을 잘 익히려면 언문부터 배워야 했다. 5장 ‘언문, 국문이 되다’에서는 한글이 더욱 널리 쓰이는 상황을 알린다. 임진왜란 때 작전지시 등 비밀문서는 언문으로 작성됐다. 만약 왜군에게 넘어가더라도 그들이 언문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에 간 사신이 국내에 중국 사정을 알리는 문서를 작성할 때도 언문으로 썼다. 중국인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896년 4월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한글학자 주시경이 고안한 표기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신문 창간자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사가 된 최초의 한국인인데 영문처럼 한글도 띄어쓰기를 해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했다.

한글 사용 인구는 남북한 및 재외교민 등 모두 7500만명을 헤아린다. 소수 언어가 사라지는 추세인데 어떤 언어가 살아남으려면 사용인구가 1억명은 돼야 한단다. “한국어와 한글을 외국인에게까지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간다. 한국어 사용 인구 1억명 시대를 맞이하려면 종합 대책을 세워 꾸준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점을 요즘엔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실감한다.

 

한국에 싹튼 인문학의 뿌리는?

인문학의 싹
김기승 등 12명 지음, 인물과사상사, 419쪽, 1만6000원

 

디드로, 달랑베르….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들이 프랑스 백과전서파 인물임을 떠올리리라. 18세기에 그들은 당시의 다양한 지식을 집대성해 본문 19권, 도판 11권 규모의 대규모 백과사전을 만들었다. 시민을 계몽하기 위해 만든 이 백과사전은 프랑스혁명의 불씨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냥 지식만 모은 게 아니라 비판정신을 담았기에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몽매 상태에서 벗어났다. 집필자들은 토론, 강연 등의 치열한 과정을 거쳐 원고를 작성했다.

 

21세기 들어 프랑스에서는 옛 백과전서파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새 지식을 총망라해서 시민에게 전달하자는 뜻에서 대중을 위한 강연회가 열렸다. 2000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술학교의 메카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진행됐다. 그해는 2월이 29일까지 있었으니 1년이 366일이었다. 366개 강의가 묶여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한국에서도 번역돼 나왔다. 강연을 정리한 것이니만큼 생동감이 돋보인다.

 

선진국에서는 이처럼 강연 내용을 책으로 묶어내는 사례가 흔하다. 이런 책이 명저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적잖다. 역사학을 이해하는 데 손에 꼽히는 명저인 ‘역사란 무엇인가’도 저자 E. H. 카의 강연집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활동하며 서구중심주의를 맹렬히 비판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강연집 ‘저항의 인문학’은 ‘오리엔탈리즘’에 버금가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현대 미술이론을 정립하는 데 큼직한 기둥 하나를 세운 미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도상해석학 연구’라는 대표적 강연자료집을 남겼다.

 

강연을 정리한 책의 장점은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구어체로 기술되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질의응답을 덧붙이면 현장감은 더욱 두드러진다. 노련한 저자나 편집자는 현장 분위기를 잘 묘사해서 독자가 오디오뿐 아니라 비디오도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청중 가운데 가끔 ‘재야의 고수’가 앉아 있다. 그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발표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서울 종로구 계동에 ‘인문학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 보통명사 같지만 특정 박물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고즈넉한 북촌 한옥마을길로 10여 분 걸어가면 나타나는데 중앙고교 구내에 자리 잡고 있다. 우아한 석조 건물인 이곳에서는 근대화 자료를 전시하는 것말고도 인문학 교양강좌가 꾸준히 열린다. 강좌는 1회성이지만 이를 정리한 서적은 오랜 생명력을 가진다. 2010년 5월에는 ‘인문학 박물관에서’라는 책이 나왔다. 인문학자 12명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연 또는 대담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이 책에 이어 1년여 만에 나온 ‘인문학의 싹’도 이곳에서 열린 대중 강좌를 정리한 책이다.

 

책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문학이 어디에서 싹을 틔웠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지역은 한국. 시기는 근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싹을 품은 씨앗 12개를 골랐다. 이 책의 부제는 ‘오늘의 한국 인문학을 있게 한 인문고전 12선’이다.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처럼 널리 알려진 고전부터 북한의 대표적인 국어학자인 홍기문(1903~92)의 ‘조선신화연구’까지 다루어 다양성이 돋보인다. 인문학박물관 측은 남북한의 인문학을 통합해 ‘우리의 사상사’로 재탄생시켰다고 밝혔다.

 

먼저 ‘택리지’를 살펴보자. 1751년에 나온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다. 종전의 다른 지리서들은 행정구역별로 서술했는데 이 책은 생활권, 문화권의 관점에서 주제별로 나눠 설명했다. 마을의 입지를 결정하는 4대 조건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꼽았다. 여기서 ‘생리’는 물자의 생산 및 유통 환경을 말하는 것으로 경제가 중요하다고 언급한 점이 두드러진다. 살기 좋은 곳으로는 소백산 아래쪽 안동권과 상주권, 지리산 섬진강 유역, 충청도 공주 등이 꼽혔다. 이중환 자신이 가장 살고 싶어한 곳은 소백산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쪽에 있는 청화산이었다.

국학 연구자 안확(1886~1946)이 쓴 ‘조선문명사’는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의 정치사를 다루었다. 부제가 ‘조선정치사’다. 유럽의 선진 문명에서처럼 조선시대에 향회, 촌회 같은 자치제가 발달한 면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수준 높은 여러 저서를 낸 안확은 신채호, 최남선, 이광수 등에 비해 생소한 편인데 앞으로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겠다. 강의를 맡은 류시현 전남대 HK교수는 “안확은 해방 후 근대 학문적 아카데미즘에 속하지 못했기에 그의 조선문화 연구의 성과가 계승되지 못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혁명, 사랑, 아나키즘 추구한 박열

개화기에 의사, 교육자로 활동한 이만규(1889~1978)가 쓴 ‘조선교육사’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실증사학에 따라 교육사를 살핀 책이다. 화랑도 교육을 매우 높이 평가했고 교육 면에서 일제강점기를 민족교육파멸기라고 규정했다. 저자는 경성의학교를 나와 개성에서 개업의로 일했으나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배화여학교 등에서 25년간 교편을 잡았다. ‘조선교육사’에 대한 강의를 진행한 정미량 박사는 “출간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현재 남북한 대부분의 한국교육사 개설서는 이 책을 재인용하는 것만 봐도 고전의 위치에 오른 책”이라 평가했다.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박열(1902~74)은 애인이자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국왕을 테러로 제거하려다 붙잡혔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일본인 판사에게 반말을 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 국왕을 죽이려는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에 당황한 판사는 비공개 재판으로 얼른 바꾸었다. 박열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20여 년간 일본에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냈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8년에 출판한 ‘신조선혁명론’에서 우리 민족에 알맞은 민주주의와 좌우분열을 극복할 통일전선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한 논리였다. 오제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혁명, 사랑, 아나키즘 이 세 가지 단어가 박열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키워드”라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신남철(1907~58?)의 저서 ‘역사철학’은 같은 제목의 다른 책과는 달리 치열한 현실참여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았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미야케 교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광복 후 서울대 교수가 된 그는 1948년 1월에 이 ‘역사철학’을 펴낸다. 곧이어 5월에는 ‘전환기의 이론’이라는 책을 냈고 6월에는 월북한다. 6·25 때 그는 남한에 내려와 서울시 문화부장 자리에 앉는다. 신남철은 피란을 가지 못한 옛 동료 박종홍 서울대 교수와 조우했는데 북한 체제에 약간 실망한 듯한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기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김동석(1913~53?)이 지은 ‘뿌르조아의 인간상’은 1949년 2월에 나온 평론서다. 4월에 재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안회남, 김동리, 이광수, 김광균 등의 작품에 관한 평론을 수록했다. 이광수와 김동리 같은 우파 진영의 작가에 대해 혹평을 퍼부었다. 김동석은 인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뿌르조아의 인간상’을 낸 후 몇 달이 지나 월북한다. 전쟁 때는 인민군 통역장교로 남한에 왔는데 그 후로는 활동상이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전후에 국내 최고의 경제사학자로 인정받던 백남운(1894~?)은 1949년 2월22일부터 4월7일까지 소련을 방문했다. 북한의 내각교육상 자격으로 갔다. 소련 방문기를 정리한 책이 ‘쏘련인상’이다. 강의 진행자인 이상호 박사는 “이 책을 분석하면 당시 지식인의 최고봉인 백남운의 시각을 통해 북한의 대외인식, 특히 사회주의 대국 소련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인 배성룡(1896~1964)의 ‘농민독본’은 지식인 시각에서 농민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한 책이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는 “이 책은 농민을 각성시켜 스스로 권익을 쟁취하도록 도왔다는 점에서 ‘농민민주주의’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서구 미학사상을 국내에 제대로 소개한 선구자 김태오(1903~76)는 1950년에 ‘미학개론’ 초판을 펴냈다. 문필가, 심리학자, 철학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한 저자는 독일 학풍에 영향을 받아 심리학적 미학 분야에 천착했다. 강의 진행자였던 진중권 문화평론가는 “이 책을 읽는 동안 한편으로는 지루했지만 당시에 이런 고민을 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북한 학자 홍기문의 ‘조선신화연구’는 우리 고대사의 맨 앞을 차지하는 역사를 정확히 보자는 의도를 담은 책이다. 신화를 역사학적 입장에서 규명한 최초의 시도였기에 부제를 ‘조선사료고증’이라 붙인 듯하다. 홍기문은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의 장남이다.

대구에서 활동한 이종하(1913~2007)가 쓴 ‘우리 민중의 노동사’는 저자가 88세이던 때인 2001년에 출판됐다. 영남대 교수였던 저자는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노동자 단체들이 무상으로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도록 묵묵히 도와주었다. 이 책은 민중에 대한 저자의 사랑을 그득 담았다. 저자의 아들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

12강이 진행되는 동안 진지하게 참여한 청중 가운데 수십 년 전 저자들과 직접 만난 분들이 있었다. 이들 원로 청중은 강사도 파악하지 못한 저자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우리가 몰랐던 한국, 한국인

세계인과 함께 보는 한국 문화 교과서
최준식 지음, 소나무, 399쪽, 1만5000원

 

서울시민 가운데 남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서울타워에 올라가보지 않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 지방에서 서울로 여행 온 분들에겐 이곳이 필수 탐방코스다. 여의도에 있는 63빌딩도 그렇다. 관광객들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 꼭대기에서 서울시내 풍광을 조망하려고 기대감에 부풀어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서울사람들은 심드렁하다. 그렇다 보니 길 가는 서울시민 아무나 붙들고 “남산이나 63빌딩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은 어떤가요?”라고 물으면 당황하리라.

 

필자는 청년 시절 남산 기슭에 살면서 남산도서관, 식물원, 장충단공원, 국립극장, 벚꽃 산책로 등을 누비고 다녔다. 동네 약국의 젊은 여약사가 가수가 됐다고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 주현미 님이다.

 

세월이 흐른 요즘도 필자에겐 남산은 친숙한 곳이다. 어느 날 ‘신(新)서울기행’이라는 책을 보다가 낯이 뜨거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남산이 일본의 조선신궁(神宮)자리였고 또 여러 무속신앙의 기도 명당이었다는 설명을 읽고 이를 까맣게 몰랐던 점이 부끄러워서다. 그 책의 저자는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다. 한국학? 한국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인 줄은 알겠는데 이화여대에 정식으로 학과가 개설된 줄은 몰랐기에 다시 얼굴을 붉혔다.

 

서울시민은 역설적으로 서울에 대해 잘 모르고, 한국인은 한국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 그 속에 살기 때문에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몸으로 느껴서 그런 것일까. 한글에 대해 외국인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일반인은 판소리, 서낭당, 태극기, 사물놀이 등 한국 고유의 문화에 대해 어려움 없이 소개할 수 있을까. 익숙하긴 하지만 막상 설명하려면 말문이 콱 막히리라.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한국학 학술대회가 열릴 때 취재하러 간 적이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 학자들이 한국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광경을 보고 감격했다. 그들은 한국의 문학, 문화재에 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와당, 토용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나타냈다. 한국대표로 참석한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교수에게 던지는 그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한국학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한국학 전문가인 최준식 교수가 최근에 ‘세계인과 함께 보는 한국 문화 교과서’라는 단행본을 냈다. 한국인이면서 한국 문화에 대해 잘 모르기에 늘 죄책감을 가졌는데 이 책을 독파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겠다.

 

몬드리안과 흡사한 조각보 디자인

조형예술, 건축, 음악, 음식, 전통신앙, 기록, 우주관(觀) 등 7개 주제를 다룬 책이다. 주제마다 4~10개의 소(小)주제 글을 실었다. 역사적 사실을 간결한 문체로 설명하고 다양한 관련 사진을 실어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집필 의도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이번에 소개된 한국의 문화물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원고를 작성하면서 다시 한 번 한국은 빼도 박도 못하는 문화국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해 국수적인 태도를 멀리 하려고 노력했다. … 우리가 지금 이른바 글로벌 시대에 들어갔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문화를 외국인에게 ‘쿨’하게 소개하는 책은 많지 않다. 이 책이 그런 책 가운데 하나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형예술 분야에서 한국인은 파격미를 추구했다. 중국인, 일본인이 완벽미 또는 대칭미를 지향했다면 한국인은 고전미술의 질서를 깨는 실험정신이 강했다. 한국인의 성품이 자유분방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 책 맨 앞에 소개된 조형예술품은 조선 막사발.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든 것으로 16세기 이후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에서는 매우 진귀한 자기 대접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들은 일본에 끌려가 막사발을 만드는 일에 종사한다. 막사발 가운데 대표작은 일본 교토의 다이도쿠지(大德寺)라는 절에 소장돼 있다.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어느 일본 학자는 “이런 그릇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이 조선의 도공 손을 빌려 만든 것”이라 극찬했다고 한다.

자투리 천으로 만든 조각보는 기하학적 무늬와 화려한 색상으로 눈길을 끈다. 자투리 천을 여러 개 이어 붙여야 하므로 정교한 바느질 솜씨가 요구된다. 네모 천을 이어 만든 보자기는 20세기 최고의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작품과 디자인이 흡사하다. 조선의 여성들이 높은 예술 경지에서 노닐었음을 나타낸다.

 

신라금관을 보면 화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조형미와 세공 기술은 세계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하다. 이 금관이 지역적으로는 신라에만, 시기적으로는 5~7세기에만 있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7세기 이후에 중국 문물이 밀려온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신라 왕은 금관을 실제로 썼을까. 무덤 부장품으로 제작됐을 뿐이라는 학설이 있다. 특별한 의례 때 썼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아무나 못 들어간 창덕궁 후원

한국의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창덕궁이다. 동북아시아 궁궐 가운데 보기 드물게 친(親)자연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인 경복궁이 정도전을 위시한 신하들에 의해 설계됐다면 창덕궁은 태종의 의도에 따라 꾸며졌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창덕궁은 왕의 집무 공간인 외전을 왼쪽 밑으로 몰아놓고 휴식 공간인 정원을 넓게 만든 것이 특징. 자연 지형에 맞춰 짓다 보니 비대칭형이 됐다. 창덕궁의 트레이드마크는 후원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뜻에서 금원(禁苑) 또는 비원(秘苑)으로 불렸다. 후원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옥류천은 절경을 이룬다. 임금과 신하가 술잔을 띄우고 놀았다는 소요암과 정자를 바라보면 무릉도원이 연상된다.

 

불교 사찰은 울긋불긋한 단청 색상으로 눈을 어지럽게 한다. 승려들이 수행하는 곳인데 왜 그리 화려할까. 이 책의 저자는 “절은 극락과 같은 곳인데 사바세계와 본질적으로 달라야 하므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민 것”이라면서 서양의 교회나 이슬람 사원이 웅장한 것도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한국 사찰의 기본 구조는 입구에서부터 당간지주-일주문-천왕문-불이문(不二門)-대웅전 등의 건축물을 갖추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속세와 이별한다는 뜻이다. 천왕문에 선 험상궂은 장수 4명은 악귀를 쫓는 천왕이다. 얼굴은 중앙아시아인이고 옷은 원나라 장수의 갑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조선 검을 들어 퓨전 문화를 상징한다.

 

판소리는 세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1인 오페라’다. 가수 혼자서 온갖 인물 역할을 다 맡으니 독특하기 그지없다. 반주자도 고수 한 사람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판소리는 굿판에서 유래됐다. 악사들의 여흥 노래가 점차 발전해 17세기 후반에 판소리 형식이 태동했다.

 

밥 먹으려 반찬이 차려지는 한식

한식의 특징은 밥을 먹기 위해 반찬이 차려진다는 점이다. 한식의 차림은 ‘공간 전개형’이다. 한 상에 모두 차려진다는 뜻이다. 양식이나 중식은 시차를 두고 한 접시씩 음식이 나오는데 이런 ‘시간 전개형’과는 다르다. 한식은 입맛에 따라 그때그때 반찬을 골라 먹을 수 있어 좋다. 숟가락을 많이 쓰는 이유는 국물과 찌개를 즐기기 때문이다.

 

무당이 굿판에서 춤을 추다가 엑스터시에 도달하는 현상을 ‘신명 난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무당이 아니더라도 신명나게 일하기도, 놀기도, 공부하기도 한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한국팀은 신명 난 플레이를 벌인 끝에 4강까지 올랐다. 한국인의 내적 에너지가 폭발하면 놀라운 성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3세기에 중국의 진수는 저서 ‘삼국지’에서 “한국인들은 하늘을 숭배하는 축제를 할 때는 음주가무를 하면서 며칠 동안 논다”고 썼다. 이런 면모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온다.

 

세계의 문자 가운데 한글만이 창제자, 반포일, 창제 원리가 명확하다. 한글의 자음은 발성기관의 모양 등을 분석해 만들었다. 모음은 점(·) 하나에 ㅡ, ㅣ를 결합한다. 각각 하늘, 땅, 인간을 상징한다. 가장 간단한 모음체계로 가장 복잡한 외국어 발음까지 표기할 수 있다. 휴대전화 시대에 한글은 간편하게 작성할 수 있는 장점이 드러나면서 과학적 체계가 얼마나 튼튼한지를 세계 만방에 보여주었다.

 

세계 최대의 역사서는? ‘승정원일기’라고 한다. 승정원은 조선 국왕의 비서실 역할을 하던 기관이다. 이곳 사관들이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적었는데 승정원일기는 바로 이 기록물이다. 왕의 발언을 적은 것은 물론 당시에 동영상 촬영장치가 없었으므로 왕의 동작, 분위기 등을 묘사하기도 했다. 날씨를 분류하는 방법도 100여 가지였다. 별의 움직임도 자세히 기록했다. 사대부가 보내온 상소문은 전문을 수록했다. 승정원일기의 글자 수는 2억4000만자라고 하니 ‘조선왕조실록’의 4배나 되는 방대한 자료다. 왕조실록은 한글로 모두 번역돼 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승정원일기는 번역 중인데 다 마치려면 몇 십 년이 걸릴 전망이다.

 

한국인만큼 조상에게 정성스럽게, 부지런히 제사를 지내는 민족이 있을까. 설, 추석 차례는 물론이요, 기(忌)제사까지 꼬박꼬박 올리는 한국인에게 제사는 생략할 수 없는 풍습이다.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은 조선이 국왕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덕목을 강조하기 위해 권장한 의례가 제사다. 이 책 저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제사는 간접적인 영생법이라 정의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