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 김남수를 알고 싶다
하늘이 내려준 신의(神醫), 이 시대의 화타(華陀).
의료인에게 이보다 더한 찬사는 없을 것이다. 대중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 바로 구당 김남수(95) 옹에 대한 이야기다.
1984년 재야에서 침뜸 봉사활동을 해오던 구당은 2008년 KBS 추석특집 프로그램 ‘구당 김남수 선생의 침뜸 이야기’에 출연하면서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2회에 걸친 방송은 종합 시청률 20%를 기록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이후 민간에서는 자가(自家) 뜸 치료 열풍이 불었고, 특히 위암에 걸린 영화배우 장진영 씨를 치료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치인, 종교인, 기업인들이 앞다퉈 구당을 찾았고, 구당의 존재는 대체의학 및 민중의학의 선봉자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러나 구당이 유명해질수록 침과 뜸을 자신들의 업무 영역이라고 여기는 한의사들(대한한의사협회)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헌법재판소는 7월 29일 부산지법이 구당의 침뜸 연구단체인 ‘뜸사랑’ 회원들이 낸 신청을 받아들여 재청한 의료법 제27조항의 위헌법률심판 사건에 대해, 재판관 4(합헌)대 5(위헌)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의료법 제27조는 ‘의료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의사면허 없이 침이나 뜸 시술, 자기요법(磁氣療法) 등 이른바 대체의학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 소송의 한가운데에 구당이 있었다.
‘주간동아’는 그동안 일단의 한의사와 뜸사랑 전직 회원들로부터 구당과 뜸사랑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제보를 받았다. 제보 내용은 △ 구당의 침사자격증과 의술 경력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고 △ 그가 치료를 했다는 유명인사들이 실제로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거나 일부 치료를 받은 적은 있어도 구당의 주장대로 완치되지 않았으며 △ 침뜸이 암, 에이즈, 사스 등 불치병을 치료했다는 과학적 인증이나 임상시험 결과가 없음에도 이를 과대포장해 주장하며 △ 구당의 의술활동을 뒷받침하는 조직인 뜸사랑이 돈 문제에서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구당을 둘러싼 현재까지의 논란은 침사자격증만 있고 구사자격증이 없는 그가 무면허 뜸 진료 행위를 한다는 점에 국한돼 있었다. 침과 뜸의 의료행위가 한의사의 고유 영역인지, 일반인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지의 논란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러므로 이 기사에서 이 문제는 다루지 않기로 했다. 대신 구당의 의술과 도덕성에 대해 일단의 한의사와 뜸사랑 전직 회원들이 제기한 의혹을 하나씩 확인해보았다.
국민의 알 권리와 건강권
8월 25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자리한 남수침술원을 찾아 그동안 주간동아의 취재 결과를 설명하고 직접 구당의 해명을 들으려 했으나, 그는 과거 경력과 관련해 제기된 의혹에 대해 일절 답변을 거부했다. 대신 나머지 부분은 서면 인터뷰로 응했다. 구당과 뜸사랑 측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구당과 뜸사랑을 두고 제기되는 의혹들은 한의사협회와 뜸사랑에 불만이 있는 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구당 선생과 뜸사랑의 운영, 예산, 관리 등에 대해 확인·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알리는 것이 과연 국민의 알 권리에 해당하는지 (의문)”라며 “뜸사랑에서는 이러한 사항을 알릴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간동아는 국민의 알 권리와 건강권 보호 차원에서 의혹들을 검증할 필요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구당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행위를 하고 있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공인일 뿐 아니라 어떤 한의사나 의사보다 유명하고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구당과 뜸사랑 측은 “연간 1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침뜸 봉사를 한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구당과 그의 의술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구당과 뜸사랑의 주장대로 “치료를 잘한다”고 해서 그의 미심쩍은 경력과 과대포장된 치료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2005년 논문 조작건으로 대한민국을 흔들어놓았던 황우석 파동을 두고 황우석 박사를 옹호하는 일각에선 “난치 희귀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논문 조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황우석 박사의 전체 연구를 폄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논문 조작’이라는 분명한 잘못이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목적이 옳다 해도 과정의 잘못까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연예인들의 학력 위조가 사회적으로 문제 됐을 때 “연기를 잘하니까 학력 위조는 용서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과거 경력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 명성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다면 경력의 진위를 밝히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구당과 뜸사랑 측은 “뜸사랑의 운영, 예산, 관리에 대한 부분은 내부 문제일 뿐 국민의 알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당과 뜸사랑이 제공하는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을 포함해 그들로부터 침뜸을 맞은 이들은 외국인이 아닌 우리 국민이다.
구당과 뜸사랑 측은 ‘배워서 남 주자’며 침뜸 놓는 행위를 ‘무료 봉사활동’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실제 배우는 과정은 절대 ‘공짜’가 아니다. 기본과정(3개월/55만 원), 본과정(3개월/65만 원), 전문과정(6개월/120만 원)을 포함한 뜸사랑의 1년 교육비는 240만 원에 달하며, 지금까지 침뜸 교육을 받은 이가 4000여 명이다. 구당과 뜸사랑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비싼 돈을 내고 수업을 들었을 리 없다.
구당과 뜸사랑 측 “침뜸부터 취재하라”
구당과 뜸사랑 측은 주간동아가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서 말미에 “잘못 알려진 사항에 대하여만 사실 여부를 물을 게 아니라 좀더 넓은 생각을 갖고 침구사에 관한 역사와 발전과정, 침구술의 장단점, 침뜸 또는 한약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을 취재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 말에 백번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과거 의혹들이 먼저 해소돼야 할 것이다.
주간동아는 구당과 뜸사랑 측의 충분한 해명을 듣기 위해 8월 25일 구당과 뜸사랑 앞으로 서면 질의서를 e메일로 보냈다. 이에 뜸사랑은 8월 28일 답변을 보내왔다. 한편 구당은 8월 31일 “국내에서 침뜸 치료를 할 수 있는 합법적 여건이 조성되기 전에는 봉사활동(시술)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구당 김남수 옹이 유명세를 타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80년의 혼이 서린’ 의술 활동 경력이다. 구당을 설명할 때 ‘열한 살에 선친으로부터 침구술을 배워 80년 동안 의술 활동을 해온’ 경력은 빠뜨릴 수 없다. 비록 뜸을 뜨는 구사자격증은 없지만 침사자격증을 취득했기에, ‘최소한 침술은 제대로 배웠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조차도 사실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침뜸 배웠나
구당은 1915년 5월 12일 전라남도 광산군 안청리에서 김해김씨 문경공파 7세손인 부친 김서중과 모친 최임곡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무극보양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 뜸사랑 침뜸의학 전상희 교수 지음).
아흔다섯. 구당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놓는 침뜸 효과와 아흔이 넘는 나이를 강조해왔다. 2008년 KBS 추석특집으로 방영된 ‘구당 김남수의 침뜸 이야기’에서 사회자가 “94세가 맞느냐”고 묻자 “나이는 많지만 몸이 건강해서 충분히 일할 수 있다. 6시에 기상해 오후 5시까지 11시간을 서 있다. 이는 침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해김씨 문경공파 대동보에 나타난 그의 출생일은 1922년 5월 12일로, 그가 말하는 나이와 차이가 크다. 구당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1915년생이 맞다. 무슨 이익이 있다고 나이를 속이겠는가. 족보는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구당의 설명대로 1915년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열한 살 때 선친에게서 침술을 배웠다”는 그의 말은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그동안 구당은 “처음에는 침을 어깨 너머로 배웠지만 어느 정도 눈이 트인 뒤엔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침술교육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었다”고 밝혀왔다(‘침사랑 뜸사랑 아~내사랑’).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열한 살 때부터 의원인 부친에게서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받았다”고 거듭 주장했다(서울신문 2008년 9월 29일자 등). 하지만 제적등본에 나타난 구당의 선친인 김서중 씨의 사망 시기는 1915년 2월 28일. 두 기록을 비교하면 구당이 태어나기 3개월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구당에게 침뜸을 가르친 셈이 된다.
이에 구당은 “호적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본인이 선친에게서 배운 것이 분명한데 부친의 사망신고일까지 파헤쳐서 말한다면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고향에 가서 알아보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기자가 직접 구당의 고향으로 가서 친척들에게 확인한 바는 구당의 주장과 차이가 컸다. 8월 27일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평산리에서 만난 친척 김모 씨는 “(구당은 부친의) 얼굴도 모른다. 기수(구당의 형, 작고) 씨가 다섯 살 때 (구당의 부친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1910년생인 김기수 씨가 다섯 살이 된 해는 1915년이다.
한때 구당이 부회장직을 맡았던 관인침구학원 동창회 및 재야 침구학계 일각에선 구당이 선친에게서 침구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광복 전후로 서울에 올라와서 침구술을 배웠다고 주장한다. “구당에게 침술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재야 침구학자 A씨는 “한자로 자기 이름 정도 겨우 쓰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배웠다. 방송이 구당을 우상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사람이 1987년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는 책을 가져와서는 봐달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관인침구학원 출신인 B씨는 “광복 전후로 구당을 만났다. (당시만 해도) 구당은 (관인침구학원에서) 휴지 치우는 일을 했다. 우리 몇 사람이 ‘김 선생(김남수) 차 좀 끓여와’ 그렇게 말했을 정도”라며 구당이 침구학원에서 침술과는 무관한 일을 했다고 말했다.
침술 경력 80년 아닌 30년?
이에 구당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모두 말하는데 침구학원에 다닌 것을 문제 삼다니 어이가 없다”며 “당시 그 학원에서 침구 강의를 양의사인 해부학 교수가 한다고 해, 해부학이 알고 싶어서 학원을 다녔다. 뜸사랑 정통침뜸교육원도 해부학을 가르치는데 의사나 간호사에게 강의를 시키고 있다. 젊은 시절에 배움의 지평을 넓히는 걸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또한 재야 침구학계의 주장에 대해 “언제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 증거를 대라”고 주장했다.
구당의 말대로 “선친으로부터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받았고, 배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침구학원을 다녔다”고 해도, 구당의 80년 의술경력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구당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1943년 자격증을 취득하여 침술원을 운영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면허를 따려고 해서 딴 게 아니라고.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사람들이 면허를 받아야 한다면서 군수인지 도지사한테 추천해주었는데, 거기 가니까 면허를 주더라고. 그때는 군수나 도지사 같은 사람이 일부러 면허를 주려고 했다”고 말했다(‘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 245쪽). 구체적으로는 “전라북도 군수서장이 침구사 추천을 해 도지사에게 올려 지난 1943년 침사자격증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브레이크뉴스 2008년 12월 19일). 80년에 이르는 구당의 의술경력은 바로 이 자격증 취득과 침술원 개설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과연 구당의 말처럼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조선인이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군수서장의 추전만으로 면허 취득이 가능했을까. 구당의 주장은 당시 침구사 면허를 취득한 이들의 증언과 상반된다. ‘일본 등 외국에서 침구학교를 졸업한 졸업증명서를 소유한 자’ ‘침구학원을 졸업한 자’ 등 특별전형에 속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시험을 치른 뒤 합격자에 한해 면허(당시에는 현재의 자격증이란 명칭이 없었고 면허증으로 불렀다)를 주는 것이 당시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4년 10월 제정된 조선총독부경령 제10호 안마술·침술·구술영업 취체(取締)규제 어디에도 ‘추천만으로 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 때 침사면허를 취득한 김학진(85) 씨는 “1년에 한 번씩 도(道) 경찰국 위생과에서 (침구사) 시험을 실시했다. 시험과목은 침구과, 내과, 경혈학과, 병리학과 등이었다”며 “나의 경우에도 충청남도, 경기도에서 두 번씩이나 떨어지고 난 뒤에야 1943년 함경남도에서 치른 시험에 합격해 면허증을 얻었다”고 말했다.
구당의 말대로 그가 뛰어난 침구 실력을 인정받아 예외적으로 지역 주민들의 추천을 받아 침사자격증을 취득했음을 인정한다 해도 석연치 않은 부분은 또 있다. 그가 공식적으로 침사자격증을 취득한 시기가 1983년 7월 25일(서울 제115호)이기 때문이다. 관할 기관에 존재하는 기록상으로도 그렇고, 그가 개원한 남수침술원에 걸려 있는 자격증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그는 이 자격증에 대해 “재판을 통해 재교부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취득한 자격증을 바탕으로 구당은 1983년 8월 2일 남수침술원을 공식적으로 개설 신고했다(신고번호 제92호). 남수침술원의 개설 신고기관인 서울시 중구보건소 관계자는 “침술원 개원 기록은 1960년 이후 것부터 존재하는데 1983년 이전에는 남수침술원 개원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즉 본격적인 침뜸 의술활동 기간은 침술원 개설 기준으로 보면 80년이 아니라 30년인 셈. 물론 공식적으로 침술원을 운영하지 않고도 침술 활동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 행적은 침술 활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구당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뜸사랑 측 관계자가 작성한 ‘무극보양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해방 이후 형제가 한집에서 살았는데 형 기수가 정미소 사업에 실패하고 재산을 탕진하자 처가로 가서 의탁, 4개 면에 담배 농사를 짓게 하면서 농가 소득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고향을 전혀 떠나지 않고 있다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 때가 1953년으로 무려 나이가 38세에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노무 사단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일을 한다. (중략)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선생은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우연히 고향 광산군 비아면에서 파출소장을 하던 지인을 만나 그의 소개로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판문점에서 창고를 짓는 일에 목수라고 속이고 참여하기도 한다.’
동직자 2명 보증자 세우고 경력 인정받아
이에 대해 구당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자격증 갱신 시기에 더 이상 침술원을 운영하기 싫어 갱신 신청을 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다시 침술원을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갱신 시간이 지나서 자격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소송을 해야 한다고 하여 소송을 통해 침사자격을 취득하였다”고 밝혔다.
구당이 언급한 소송은 1982년 고등법원에서 받은 ‘침사자격 존재확인(사건81구 549)’ 건이다. 구당은 이 재판에서 자격증 취득 사유를 인정받아 대법원 판결을 거쳐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 재판부는 구당에게 침사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이유로 “해방 전인 1943년 4월 함경북도에서 실시한 침사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해 5월 함경북도 도지사로부터 침사자격 면허를 취득한 다음 함경북도 학성군 학성면에서 금천침술원을 공동으로 개설 운영하여 오다가 해방 후 월남하면서 침사면허증을 가지고 오지 아니한 사실”을 들었다. 이때 구당은 이북5도청 사무규정에 의거해 동직자 2명을 보증자로 세우고 이들을 통해 함경북도에서 침술 활동을 했다는 경력을 인정받는 서류를 법원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재판부가 판결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구당이 그동안 공식적으로 언급했던 내용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대목이다. 구당은 지금까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43년 서울에서 남수침술원을 개설했다”며 “전라도 도지사로부터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밝혔다. 뜸사랑 측 관계자가 작성한 ‘무극보양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에선 ‘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벌어진 남북전쟁은 40여 세를 바라보는 선생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여 그때까지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선생을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해방 전 고향을 떠난 적도 없다’는 사람이 어떻게 함경북도까지 가서 자격증을 취득했던 것일까?
당시 구당의 함경북도 침술활동을 증언한 이는 지금은 고인이 된 황진서 씨와 김양술 씨다. 하지만 황씨는 본적이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으로 일본에 거주하다 광복 후 남한으로 왔다. 김씨 역시 원적은 전라남도이며 광복 전후 주 활동지역은 전라도였다. 구당이 1943년부터 광복 후까지 함경북도에서 의료 활동을 했는지 파악해주기에는 어려운 위치의 인물들인 셈이다.
이에 대해 구당과 뜸사랑 측은 “(자격증 갱신) 과정에서 소송을 변호사에게 일임해 모든 일이 처리됐고, 변호사가 어떻게 활동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문제도 당시 변호사가 아닌 본인이 이야기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해명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광복군 출신 재야 정치인 장준하 선생, 수영 국가대표 박태환 선수….
구당 김남수 옹이 인터뷰나 자서전 등을 통해 치료했다고 밝힌 인물들이다. 침구사로서 무명에 가깝던 구당이 유명해진 것은 정치·연예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명사(名士)를 치료한 사람이라 알려진 점도 한몫했다(상자기사 참조). 실제 구당의 치료를 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 측은 “한두 번 구당의 치료를 받았고 실제로 효과가 좋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간동아’의 취재 결과, 구당이 치료했다고 밝힌 명사 중 상당수가 “치료 사실이 없거나 한두 번 치료를 받았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치료했는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을 널리 알리고, 한두 차례 치료한 것을 침소봉대한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치료했다고만 알려졌을 뿐 효과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장준하 선생 큰아들 호권 씨 “구당에게 치료받은 적 없어”
구당이 치료했다고 밝힌 대표적인 인물이 재야 정치인이었던 고 장준하 씨. 구당은 월간 ‘신동아’ 2005년 5월호 인터뷰에서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치료한 사람이 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4월 28일 ‘여의도통신’, 2008년 9월 29일 ‘서울신문’에 실린 인터뷰 등에서도 장씨의 치료 사실을 밝혔다. 저서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정통침뜸연구소, 2008)에는 더욱 자세하게 실려 있다.
‘나를 찾았던 많고 많은 디스크 환자 가운데 잊히지 않는 이로 장준하 선생이 있다. 정치인이면서 언론인인 장준하 선생은 (중략) 장 선생은 디스크가 너무 심해 일어나 앉는 것은 물론이고 말도 크게 못하고 기침도 못하고 웃지도 못했다. 장 선생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한 집에 살고 있었다. 자택이 제기동 홍파초등학교 앞에 있었는데 지붕 위로 바로 고압 전류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중략) 신문을 보다가 장 선생이 산에서 실족사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납득할 수 없음을 넘어 기가 막혔다. (중략) 디스크가 심해 지팡이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집 밖에 나갈 수도 없으며 낮은 계단도 오르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수로 울퉁불퉁한 산비탈을 혼자 오른단 말인가! (중략)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장 선생을 치료한 이는 아마 나일 것이다.’(책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에서)
하지만 8월 24일 만난 장씨의 큰아들 장호권(64) 씨는 “아버지 장준하 선생은 김씨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김씨는 아버지의 디스크를 치료했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디스크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병으로 협심증은 있었으나 그 밖에 디스크 등 질병은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새벽 4시에 기상해 냉수목욕을 했던 양반이고 워낙 건강해 등산도 잘했다. 집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안 좋았다면 장남인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구당은 저서와 인터뷰를 통해 “서울 제기동 홍파초교 앞집에서 돌아가시기 보름 전까지 치료했다”고 주장하지만 장호권 씨에 따르면 장씨 가족은 1968년부터 69년까지 서울 제기동 홍파초교 앞에 살았고, 1970년부터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난 75년까지는 서울 상봉동에 살았다. 만약 장씨 사망 보름 전에 김씨가 장씨를 치료했다면 치료 장소는 제기동이 아닌 상봉동이어야 한다. 장호권 씨는 “1970년 전후로 동대문 사는 사람이면 고압선 철탑 아래 집이 우리 집인 걸 다 알았다. 원래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집인데 집값이 싸니까 가난한 우리 가족이 머물렀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는 2001년부터 장준하 선생 사망과 관련된 진상조사를 벌였다. 장씨가 12m 아래로 추락, 실족사했는데 시신의 상태가 온전한 점, 시신에서 주삿바늘 자국 3개가 발견된 것 등에 의심을 가진 것. 당시 조사관이었던 고상만 씨는 구당이 평소 저서를 통해 “장씨를 치료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고 참고인 자격으로 구당을 3차례 조사했다.
의문사위 조사관 3차례 구당 조사
고씨는 “조사 결과 김씨가 제기동에서 장씨를 치료했다고 밝힌 시기와 장씨가 제기동에 거주한 시기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김씨는 장씨의 부인, 남동생 등을 치료했다고 진술했으나 부인은 조사 과정에서 ‘치료받은 적이 없다’고 직접 밝혔으며, 당시 남동생은 미국에 이민 가 한국에 없었다. 이전에 장씨가 김씨에게 진료받은 적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모든 내용을 종합해 ‘장준하 선생은 사망 직전 김남수 씨에게 치료받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2004년 초,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린 뒤 동대문구 김씨의 진료실을 찾았던 때를 회상했다.
“의문사위의 결론을 알려주러 갔는데 그토록 사실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기억하던 양반이 약간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아, 그런가요? 제가 틀렸군요’라고 담담히 사실을 받아들이더군요.”
처음에는 관련 대응을 하지 않았던 장호권 씨는 김씨가 2008년 TV에 출연해 화제의 인물이 되고 덩달아 장준하 씨 치료 경력까지 화제가 되자 ‘사상계’ 등을 통해 ‘김씨는 장준하 선생을 치료한 적이 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 저자인 MBC 이상호 기자는 2009년 12월 9일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 댓글을 통해 ‘장준하 선생 건은 치료 당시 코흘리개에 불과하던 아드님이 무엇을 알 수 있었을까요? 구당 선생 측의 항의 서한에 대해 장준하 선생의 아드님께서는 아직 묵묵부답이라고 하는군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장호권 씨는 “항의 서한을 받은 적도 없을뿐더러, 내가 1946년생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1975년이면 서른 살이다. 서른 살 먹은 코흘리개도 있는가? 이상호 기자는 1968년생으로 아는데 당시 코흘리개였던 건 이 기자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한편 2008년판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에 실려 있던 장준하 씨 치료 내용이, 2009년 7월 개정·발행된 책에는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슬그머니 빠져 있다. 그 밖의 내용은 그대로인 것과 대비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치료했다는 것도 구당이 곧잘 하는 얘기다. 저서 ‘침사랑 뜸사랑 아~내 사랑!’(정통침뜸연구소, 2002)에 실린 내용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겨울 제14대 대통령선거 기간이었다. ‘조용히 혼자 와달라’는 비서의 부탁대로 침통만 챙겨들고 김 대통령 후보의 상도동 자택을 찾았다. (중략) 김 대통령 후보는 어깨가 심하게 굳어 있었다. 하루 종일 선거유세를 하며 만나는 이마다 악수했더니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중략)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김 대통령은 수시로 나를 불렀다.’
저서에서 그는 김 전 대통령을 치료한 인연뿐 아니라 ‘침과 뜸이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S의원을 소개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8년 10월 10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 2008년 12월 19일 ‘브레이크뉴스’와의 인터뷰 등에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을 치료했다”고 말했다.
YS 측 “대통령을 이름 이용 말라”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아들인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김현철 부소장은 “김씨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김씨에게 단 한 번 발목을 치료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부풀려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이 통일민주당 총재로 재임하던 1988년부터 32년간 김 전 대통령의 보좌를 맡고 있는 김기수 전직대통령 비서관 역시 “재임기간 김 전 대통령이 조깅을 하다 다리를 약간 삐끗해 김씨를 불러 딱 이틀간 치료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선거운동 당시에 만나 어깨를 치료받거나 국회 보사위원장을 소개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김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서울대 의대 쪽 주치의가 있었으나 주변에서 ‘발목이 삐었을 때는 침뜸으로 치료해야 더 빠르다’고 말해 단 한 번 ‘경험’한 것이다. 그걸 가지고 전 대통령님을 매명(買名)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덧붙였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의 인연은 더욱 ‘극적’이다. 구당은 저서 ‘침사랑 뜸사랑 아~내 사랑!’에서 ‘1979년 10월 25일, 박정희 서거 전날 김 부장을 치료했다’고 밝혔다.
‘그때 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꽤 가까운 사이였다. 간이 좋지 않은 데다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밤이면 가려움증이 심해 고생하던 김 부장은 나에게 치료받은 뒤 증세가 한결 호전돼 짬이 나면 늘 나를 찾았다.’
이 책에서 구당은 이 인연으로 ‘김 부장이 10월 30일 대통령과 만나는 약속을 잡아주었다’고 주장했다. 침뜸을 놓으며 김 부장과 가까워졌고, 1962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침구사 제도 부활을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10월 26일 (중략) 김재규 부장은 불과 몇 시간 전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나를 찾아와 여느 때와 같이 침을 맞으며 ‘김 선생, 이제 나흘 남았소’라며 박정희 대통령과의 약속을 상기시켜주었다.’
2005년 5월 ‘신동아’와 인터뷰에서는 ‘김재규에게 갈 때는 거의 자정 넘은 시각에 정보부 차가 날 데리러 와요. 비상등을 켜고 신호를 무시한 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라며 당시 상황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전날 나눈 대화를 전하며 ‘10·26은 극히 우발적으로 생긴 사건’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당시 김 부장을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강 변호사는 “(가족들에게) 물어봤는데 예전에 치료받은 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전날 만났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김재규는 당시 간이 나빠 서울대 김정용 박사에게 주로 치료를 받았지 김씨에게 치료받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10·26 전날 김재규 부장을 만났다고?
구당이 유명 인사들의 치료 사실을 과대포장하는 것은 비단 과거의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 및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는 등 맹활약을 하던 수영선수 박태환. 그는 2006년 12월 당시 오른쪽 엄지발가락 밑에 있는 사마귀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마귀를 칼로 절제하면 어렵지 않게 완치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한 달가량 물에 들어가지 못해 훈련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박 선수는 계속 사마귀 뿌리 부분에 주사를 맞고 고름이 굳으면 그것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응급치료만 해왔다. 하지만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응급치료를 해도 계속해서 사마귀가 자라는 탓에 어려움을 겪었다.
박 선수의 사정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한 구당은 박 선수의 아버지인 박인호 씨에게 전화를 걸어 “한두 번 침뜸 치료를 하면 뿌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고, 침뜸 치료 후에는 바로 물에 들어갈 수 있다”며 치료를 제의했다. 그해 12월 21일 박 선수는 서울 동대문구 홍릉동 김씨의 침술원에서 20여 분간 침뜸 치료를 받았다. 그 후 이뤄진 구당의 인터뷰에는 “수영선수 박태환도 구당을 찾아가 발바닥 티눈을 뜸으로 제거했다”는 내용이 대대적으로 실렸다.
하지만 박 선수의 아버지 박인호 씨는 “당시 두세 번 침뜸 치료를 받았으나 (구당의 말과 달리) 사마귀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진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박 선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원래대로 사마귀에 주사를 맞고 긁어내는 방식으로 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사마귀의 크기만 작아졌을 뿐 뿌리는 제거되지 않은 상태다. 박씨는 “구당이 나이도 많고 어려운 사람도 잘 도와주는데 공짜로 태환이를 도와준다니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갔던 것인데, 자꾸 우리 애를 데리고 (마치 뿌리를 다 제거해 완치시킨 것처럼) 자기 홍보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고 말했다.
구당과 명사들 화려한 인연 김춘진·이상득 의원…시인 박노해, 문선명 총재도 치료받아 |
구당 김남수 옹이 치료했다고 밝힌 인물 중에는 유난히 명사가 많다. 그중 한나라당 김춘진 의원이 있다. 김 의원은 2009년 2월 ‘국민건강증진을 위한 뜸시술의 자율화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의료법 제한사항을 준수하며 재산상 이익을 받지 않는다면 누구든 자유롭게 뜸 시술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 김 의원은 ‘최근 들어 뜸 등 전통적인 한방영역의 치료효과에 관해 과학적으로 입증됐으므로 뜸시술이 자연의술로서 대체의학적 가치, 비용의 경제성 등 그 효용성이 인정된다. 뜸시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의료비를 절감해 국민건강에 이바지하려고 한다’며 제안 이유를 밝혔다.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도 구당과 인연을 맺은 명사로 거론된다. 이상득 의원은 2008년 뜸사랑 산하 효행봉사단에게 500만 원을 후원했을 만큼 구당과 남다른 친분을 과시했다. 이상득 의원 측은 “피로가 잘 풀린다며 뜸하고 침을 맞으러 자주 갔었다. 외국 갔다 와서 시간 나면 (국회의원 회관에서) 맞고는 했다”고 말했다. ‘오늘은 누가 아픈가, 느린 걸음으로 찾아다니며, 따뜻한 맨손으로 어루만지는 사람.’ 시인 박노해 씨가 2004년 11월 뜸사랑 봉사 20주년을 맞아 구당에게 바친 축시 ‘우리들 나눔의 성자여’의 한 구절이다. 본문에는 ‘그는 첨단 장비를 들지 않았다네/ 가늘고 순한 오래된 침 하나라네/ 그는 비밀스런 영약을 들지 않았다네/ 이 땅의 가장 흔한 마른 쑥 한 톨이라네/ 그는 값비싼 면허장을 들지 않았다네/ 그대 자신이 의사고 병원이라고 임명해준다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감사원장,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 장관 등을 지낸 경원대학교 경제학과 전윤철 석좌교수 역시 대표적인 구당 예찬론자다. 재임시절 감사원과 재경부에 ‘침·뜸 치료실’을 열어 직원과 일반인에게 개방했을 정도다. 전 교수는 “70년대 중반, 경제기획원(현 재경부) 과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테니스를 치다 허리를 다쳤을 때 한국전기공사 모 간부의 소개로 김씨를 만났다. 이후 등산을 하면서 몸이 뻐근할 때, 특히 내가 재경부 장관 시절 국회 침뜸 봉사실을 자주 찾아 진료받았다”고 말했다. 통일교 문선명 총재는 2008년 구당에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써달라”며 1억 원 상당의 침, 뜸쑥, 향, 진료대 등 봉사물품을 지원했다. 2008년 10월 ‘오마이뉴스’는 “(2008년) 문 총재 가족이 탄 헬리콥터가 추락해 문 총재 부인이 다쳤을 때 구당 선생의 치료로 크게 개선됐다고 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밖에도 그동안 언론을 통해 김지하 시인, 조정래 작가,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남덕우 전 국무총리, 방송인 송해 등이 구당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9월 1일은 충무로 대표 여배우였던 고(故) 장진영 씨의 1주기였다. 그는 2008년 9월 17일 진행성 위암 판정을 받고 1년여 투병생활을 했지만 끝내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투병생활 당시 장씨는 항암 치료와 더불어 구당에게서 침뜸 치료를 받은 것으로 화제가 됐다. 암 투병 중인 유명 배우를 치료했다는 사실은 이후 구당의 주요 이력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장씨가 고인이 된 지 1년이 지났지만 당시 구당의 침뜸 치료 효과를 둘러싼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논란은 2009년 12월 MBC 이상호 기자가 구당의 침뜸 시술을 취재해 정리한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를 펴내면서부터 점화됐다. 책 내용 중 ‘김 옹의 침뜸 시술이 장진영 씨의 위암 치료에 큰 도움을 줬다’는 부분을 두고 갑산한의원 이상곤 원장(한의학 박사·전 대구한의대 교수)과 인터넷상에서 공방전이 벌어져 법적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구당의 침뜸 연구단체인 ‘뜸사랑’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은 검찰에서 ‘혐의 없음’으로 기각됐다.
과연 구당과 이 기자의 주장대로 침뜸 치료가 장씨에게 효과가 있었을까? 이에 ‘주간동아’는 장씨가 위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시작한 시점부터 2009년 1월 8일 침뜸 치료를 중단할 때까지의 건강진단종합소견서를 입수해 침뜸 치료 기간에 침뜸의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났는지 확인해보았다.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씨가 항암 치료를 시작한 때는 2008년 9월 25일이고, 구당의 침뜸 치료가 시작된 것은 그달 29일이라는 점이다. 책이 주장하는 대로 병원에서의 본격 항암 치료가 10월 초순에 시작됐다 하더라도, 항암 치료의 시작 시점과 불과 일주일 안팎에서 침뜸 치료가 병행됐다는 것이다. 항암제 치료만 했을 때와 항암제 치료와 침뜸 치료를 병행했을 때를 비교할 수 있는 의학적 근거가 전무한 상황에서, 침뜸 치료로 종양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실제 줄어들었다 해도 이것이 항암 치료의 효과인지, 침뜸 치료 덕분인지, 아니면 두 가지 치료가 어우러져 나타난 결과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는 이상호 기자가 지난 2월11일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고 장진영 88일간의 임상치료①’에서도 ‘항암제와 침뜸이 병행돼 어느 한쪽만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며 인정한 바다.
항암제? 침뜸? 그 효과 불확실
그럼에도 이 기자는 장씨의 침뜸 치료 과정과 효과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불과 두세 번의 치료만으로 복부의 종양이 3분의 1 정도로 크기가 크게 줄어들어 배가 푹 꺼지고 또 복수도 금세 빠지는 걸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 128쪽)
구당이 운영하는 남수침술원은 위 내부의 종양을 확인할 수 있는 위내시경이나 종양 크기를 잴 수 있는 CT 같은 첨단 의료기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장씨의 암세포 크기에 대해 ‘3분의 1 정도로 크기가 줄었다’와 같은 구체적인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이 기자는 “종양의 크기가 대략 절반,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는지는 주의력을 가지고 관찰하면 어렵지 않게 측정할 수 있다. 위암 환자의 종양을 손끝으로 만져보면 (종양이) 만져진다. 빵을 절반 먹었는지, 아이스크림이 3분의 1 정도 남았는지 꼭 측정해보지 않아도 인지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한편 이 책에 언급된 ‘두세 번의 치료’가 이루어진 시기는 9월 말이나 10월 초다. 장씨가 2차에 걸친 항암 치료를 마치고 위내시경과 복부 CT 촬영을 한 것은 그해 11월 6일. 항암제가 장씨의 몸에 잘 맞는지,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피기 위한 첫 정밀검사였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장씨의 2008년 11월 6일 건강진단종합소견에는 예전보다 종양 크기가 줄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위내시경상 특별한 변화는 없지만, 복부 CT 검사상 예전보다 많이 호전됐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이 기자는 “진영 씨의 차도를 알 수 있었던 구체적 내용은 진영 씨와 진영 씨 친구로부터 직접 청취한 내용에 근거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기자는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에서 ‘시술 시작 3개월 만에 장진영 씨는 위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몸속의 암세포가 모두 사라지는 극적인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지난 2월 12일 ‘이상호 기자의 고발뉴스’에 올린 ‘장진영 씨 침뜸 치료 둘러싼 진실’이란 제목의 글에서는 ‘2008년 12월 22일. 숨죽여온 3개월이 지난 시점에 공개된 병원의 진단결과는 실로 ‘기적’에 가까웠다. 말기 암이 ‘위암 2기’ 수준으로 호전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환자 말에만 근거해 병세 판단
하지만 장씨의 2008년 12월 22일 건강진단종합소견에는 “위내시경상 호전된 소견이다”며 “림프절 등은 정상이다”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위 내부의 종양에 대해서도 “사이즈가 준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병원 측이 이 기자의 표현처럼 ‘말기에서 2기로 호전됐다’거나 ‘위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몸속의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는 식으로 종양 크기가 어느 정도까지 줄었다는 언급은 없다. 이 기자는 이것 역시 장씨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그녀의 측근으로부터도 같은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듣지 않은 이야기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제게 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대병원 측은 이 소견서가 서울대병원에서 발행한 것임은 인정하면서도 장씨의 병세 변화에 대해선 공식 확인을 거부했다. 다만 병원 측 한 관계자는 비공식적인 답변임을 전제로 “장씨의 병세가 4기에서 2기로 준 적은 없으며, 일부 호전된 것은 항암치료제의 효과이지 침뜸 때문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종합하건대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에서 침뜸의 치료효과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내용이 전적으로 장씨의 진술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기자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구당 선생의 치료 전 과정을 제가 입회, 취재했다. 진영 씨의 모든 발언을 취재수첩에 옮겨 적었고, 주요 내용은 인터뷰하거나 사진촬영을 한 것”이라며 “양심을 걸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과연 의료인이 아닌, 과학적 검진의 결과물이 아닌 환자 본인(장진영 씨)의 말에만 의존해 침뜸의 치료효과를 단정할 수 있느냐는 것. 설사 장씨 이외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렸다고 할지라도 그 중심은 장씨의 발언이다. 결국 환자 말에 근거해 환자 상태를 판단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환자 스스로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을 말했다면 기자는 틀린 내용을 열심히 받아 적은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장씨의 남편 김영균 씨는 “주위에서 가능한 한 진영 씨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좋게 이야기를 많이 했다. 진영 씨는 이 말들을 자랑스럽게 구당 선생에게 이야기하곤 했다”고 전했다.
한편 구당은 침뜸 치료 중단 후 장씨의 몸 상태가 악화됐다는 식으로 언급했다.
‘침뜸을 해서 효과가 없었다면 당연히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하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었는데도 의사가 말하면 의사 말을 듣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의사들이 침뜸을 못하게 하면 그때부터 딱 결과가 나빠져버린다는 거야. 늘 그랬다.’(‘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 130쪽)
하지만 침뜸 치료를 중단했다고 해서 장씨의 건강이 악화된 것은 아니었다. 김영균 씨에 따르면 2009년 1월 8일 이후 구당의 침뜸 치료를 전면 중단했음에도 장씨는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김씨와 열심히 여행, 등산, 쇼핑 등을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구당 김남수 옹은 여러 저서와 언론 인터뷰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현대과학이 극복하지 못한 불치 또는 난치 질환에 대해 “침뜸으로 암을 치료한다” “침뜸으로 에이즈를 치료한다” “사스는 여름감기와 같아 인동초를 먹으면 낫는다. 뜸으로 치료할 수 있다” “암 치료의 시험 임상에 성공했다” “암은 썩지 않은 종양에 불과하다” “자폐증을 침뜸으로 치료하면 대부분 낫는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환에 대한 그의 침뜸 치료효과는 아직 과학적 인증을 받지 못했다.
전통의학이 치료의 경험칙이 쌓여 만든 귀납적 의술임을 인정한다 해도, 또 ‘낫게 된 과정’은 차후에 규명한다 해도 ‘치료 결과’만큼은 과학으로 검증돼야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즉, 그 치료 효과가 정확히 침뜸에 의한 것임을 인정받아야 한다. 환자가 주관적으로 “나은 것 같다”고 말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임상 시험’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를 해서 영상의학적으로, 혈액·종양학적으로, 검증을 받고 침뜸이 아닌 다른 치료를 받은 대조군과 비교한 뒤 관련 학회로부터 치료술로 인정받아야 한다.
치료제도 마찬가지다. 이름 모를 풀뿌리가 몇몇 사람의 불치 또는 난치 질환을 낫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식적인 ‘치료제’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과학적 검증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이 먹어서 부작용이 전혀 없는 식품이라 해도 “불치병이나 난치병을 치료한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 이는 양의학이든 한의학이든, 제도권 의술이든 비제도권 의술이든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구당은 국민들에게 ‘침뜸 잘 놓는 사람’으로 정평이 난 지 오래다. 실제 그에게 치료를 받아 “난치병이 나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엔 침뜸을 맞으려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 그에게 배운 사람에게 침뜸을 맞으려는 이도 적지 않다. 그만큼 그의 말 한마디가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다.
양방·한방, 제도권·비제도권 인사를 막론하고 범의료계에선 구당의 이런 단정적 언사와 검증되지 않는 발언에 우려를 표한다. 생명에 직접적 지장이 없는 질환이야 그러려니 해도 치명적인 불치병, 난치병에 대한 그의 과장된 말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환자에게 헛된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간동아’는 구당이 자신의 책이나 자신의 말을 인용한 책, 각종 언론 인터뷰, 기자회견에서 밝힌 불치병, 난치병에 대한 생각과 치료담을 소개하고 사실 관계를 확인해보았다. 구당 측(뜸사랑)의 의견도 들었다.
“암 치료 임상 시험 포기했다”
‘2009년 1월 미국 애틀랜타의 뉴호프 병원에서 (암 치료에 대한) 시험 임상을 성공했다. 7월 25일 본격적인 임상을 위해 미국에 입국했다. 9월 16일부터 암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말기 암 환자들을 치료했다. 모든 환자에게서 항암치료의 공포인, 구토 증세와 어지럼증이 사라졌다. 침뜸의 효과는 미국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미국인 의사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구토 증세와 어지럼증이 없어지니까 항암제 치료를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다.
침뜸 치료 덕분에 많은 환자들의 종양이 크게 줄어드는 것도 과학적으로 측정됐다. 진료는 미국인 책임자에 의해 기록됐고 주도되었다. 그는 곧 미국 암 학회에 임상 내용을 보고하겠다고 알려왔다. 미국인 의사들을 위한 침뜸 교육과정도 곧 만들어질 거라고 전해 들었다. 불행하게도 자세한 내용은 CNN이나 미국 신문을 통해 보도가 될 것이다. 미국 의사들이 미국 언론에 먼저 발표하겠다고 했다.’
구당은 2010년 1월 21일 고(故) 장진영 씨의 악성종양(위암) 침뜸 치료효과와 관련해 논란(36쪽 참조)이 일자, 미국에서 급거 귀국해 ‘뜸사랑’ 측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다. 위의 내용은 회견문에 담겼던 것으로 당시 각 언론은 이를 인용 보도했다.
구당이 ‘시험 임상(임상시험)’에 성공해 침뜸 치료로 종양이 줄어든 것을 과학적으로 측정했다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구당이 ‘시험 임상을 하고 종양이 줄어드는 것을 과학적으로 측정했다’고 한 미국 뉴호프 병원을 취재한 결과, 이 병원은 암에 대한 공개 임상시험을 실시할 만한 여건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뉴호프 병원 인근에 거주하는 한인 의사와 미국 침구사 등은 “이 병원은 호스피스 병원이라 암 치료에 대한 임상시험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도 한국에서 그런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에 따르면 뉴호프 병원에서 구당은 말기 암 환자를 상대로 침을 놓았는데 일부 환자에게서 항암 치료의 부작용인 구토 증세와 어지럼증이 사라지는 효과(환자들이 느끼는 주관적 효과)는 있었지만 병원이 침뜸 치료로 종양이 크게 감소하거나 암이 치료됐음을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구당은 “임상 내용이 암 학회에 보고되고, CNN이나 미국 신문을 통해 보도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9월 말 현재까지 세계 어느 암 학회에도 구당의 암 치료 임상 내용이 보고된 적이 없으며 CNN 등 미국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다. ‘곧 만들어진다’던 미국인 의사를 위한 침뜸 교육과정도 8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관련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구당 측도 주간동아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임상시험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미국에서 환자에 대한 임상시험을 하려면 수년이 필요하다. 그래서 암 환자에 대한 임상시험은 포기하고 수 명의 암 환자를 치료하고 그 결과를 모아서 공표하려고 한 것이다. 치료 결과를 작성한 보고서를 가지고 있다. 현지 의사가 그 결과물을 미국 신문이나 CNN을 통해 보도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뉴호프 병원에 물어봐라.”
기자회견문에서 분명히 ‘시험 임상에 성공했다’고 밝혀놓고 이제 와선 ‘수년이 걸려 임상시험은 포기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침뜸 덕분에 종양이 크게 준 것을 과학적으로 측정했다”고 밝혔지만 뉴호프 병원 측에 확인을 요구하자 답변을 회피했다. 공개질의서를 띄웠지만 “답변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상호 기자가 구당의 구술을 받아 정리한 저서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와 최근 각 언론과의 인터뷰에는 암과 사스, 에이즈 등 인류 최고의 불치병에 대한 구당의 치료담이나 치료철학이 담겨 있는데 모두가 전 세계 의학자들이 들으면 경천동지할 이야기뿐이다. 과학적 검증작업은 거의 없고 자신의 주장과 환자의 주관적인 느낌, 치료를 지켜봤다는 사람들의 진술이 대부분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 세상 모든 불치병, 난치병도 감기보다 못한 질병이 된다.
구당은 이 시대 ‘화타’?
‘암은 항생제 남용으로 인해 썩지 않게 된 종양에 불과하다. 모든 종양은 곪아서 스스로 치유된다. 따라서 암도 곪아서 스스로 치유되도록 유도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의 치료법이다. 우선 암에는 침이 최고다.’
만약 이런 구당의 말을 믿고 침 치료를 암 치료의 최선이자 최고로 생각하고 제도권의 항암치료를 포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암이 항생제 남용으로 생긴 질환이라면 항생제가 생기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종창, 적취, 옹저의 형태로 암이 존재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종양이 곪아서 스스로 치유되도록 유도해주는 최선, 최고의 치료법이 침’이라면 구당이 치료한 암 환자는 모두 완치됐다는 말인가. 올 1월 기자회견에선 분명히 “침뜸 치료 덕분에 많은 환자의 종양이 크게 줄어드는 것도 과학적으로 측정됐다”고 밝힌 구당 측은 이에 대해 공식 질의를 하자 이렇게 답변했다.
“암이 침뜸만 맞으면 낫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침뜸이 암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고 큰 효과를 본다는 말이다. 미국에서도 침뜸만으로 암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의사와 함께 양방과 침뜸으로 병행치료를 하니까 효과가 크게 나타났다는 말이다.”
2002년 말에서 2003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8096명의 감염자가 발생하고 그중 774명이 사망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에 대해 구당은 이런 말도 했다.
“사스 때문에 중국인으로 나하고 가장 친했던 위생부 장관 장문강의 목이 달아났다. 내가 중국에 전화를 해 ‘사스는 침뜸으로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서 치료해줄까’ 하니까 ‘좋다고 오라’고 했어. 그런데 주변에서 ‘그곳에 가면 다시 못 오신다’며 사람들이 못 가게 하더라고. 그래서 안 가고 대신 ‘이렇게 치료해줘라’ 얘기만 해줬지. 사스는 사실 여름감기다. 여름감기는 취한 즉, 땀나게 하면 가라앉는다. 인동의 뿌리 한 주먹 달여 먹으면 낫는다. 여름감기는 실제 그렇게 무서운 게 아냐. 내 말을 들어서인지, 나중에 중국에서 인동을 쓰더군. 사스는 그걸 쓰면 낫는 병이야.”
사스-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사스는 당시 증상 발현 후 일주일 안에 환자를 무더기로 사망케 했고, 중국과 홍콩에서는 치료에 나섰던 의료진의 사망이 계속 이어지면서 환자 진료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국내에도 3명의 의심환자가 발생한 바 있으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백신과 치료법이 개발되지 못한 질병으로 치사율 9%에 달하는 신종플루보다 더 무서운 초특급 전염병 중 하나다. 구당이 말한 인동은 민간에서 피기 전 꽃잎을 따 말려서 종기, 염증, 가려움증, 감기를 다스리는 데 써온 식물로, 중국에서 한때 사스 예방과 치료에 좋다고 알려졌지만 중국 정부가 이를 치료제로 인정한 적은 없다. 민간에서 이 식물을 감기나 염증을 다스리는 데 써서 그럴까. 구당은 사스를 전형적인 감기로 보고 ‘풍문혈’에 침 치료를 했다고 한다.
당시 사스 의심환자를 치료했던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구당의 이런 말에 대해 “대꾸할 가치가 없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노벨 의학상을 타야 한다. 치료 의사, 간호사조차 죽이는 전염병이 여름감기와 같다는데 더 할 말이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구당 측은 “사스가 침뜸으로 치료가 되는지 여부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분명한 점은 사스로 사망한 환자가 감기로 사망한 환자보다 훨씬 적다는 것과 필요 이상으로 사스나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감을 정부와 언론에서 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환자가 침뜸으로 낫는다고 말할 순 없지만 분명히 좋은 효과가 있다고 확신한다. 감기가 침뜸으로 치료가 된다는 것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의 벽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질병과 환자에 항상 겸손한가
구당은 “에이즈도 침뜸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그의 저서는 물론, 언론 인터뷰에서도 누누이 밝혔다. 잠비아 에이즈 환자들에게 침뜸을 놓았다는 사실은 많은 언론에 보도됐다.
“후천성 면역체가 모자라면 에이즈가 몸 안에 만연하게 되지. 현대과학으로는 후천성 면역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없다. 그런데 뜸이 바로 그 면역체를 만들어낸다. 에이즈가 생기기 이전부터, 과학자들이 검증한 내용이야. 뜸은 저항력을 높여주고 면역체를 생산한다고. 뜸이 후천성 면역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이름의 에이즈는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이지.”
“몇 해 전 ‘뜸사랑’의 아프리카 잠비아 의료봉사 활동을 통해 에이즈 치료에 상당히 자신감을 갖게 됐다. 장관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은 물론 많은 잠비아 국민들이 에이즈의 발열 증상이 가라앉고 면역력이 증가하는 현상을 확인했다. 잠비아 정부에서 본격적인 임상 연구와 공동치료를 요청했지만 당시 ‘뜸사랑’을 공식기관으로 인정해주지 않던 우리 정부가 거절하는 바람에 더 이상 결실을 맺지 못했다.”
“에이즈를 치료한 사례가 있다면 알려달라”고 주간동아가 요청하자, 구당 측은 “에이즈를 뜸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은 구당의 임상 소견이다. 잠비아에서 에이즈 환자를 다수 치료했고 많은 효과도 봤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 사례는 내놓지 않았다. “잠비아의 임상 연구와 공동치료 요청을 거절한 정부 부처가 어디냐”는 질의에 대해선 “공식 문서는 없다. 잠비아 보건복지부 차관과 에이즈 임상 치료에 대해 국립병원과 협진으로 연구하는 것을 논의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는 국립병원인 국립의료원 신형식 감염병센터장은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제안이 들어온다 해도 응할 생각은 없다. (구당의 치료법에)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30여 년간 환자의 심장과 심혈관을 치료해온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가 항상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이 떠오른다.
“민초들이 존경하는 진짜 ‘명의’는 환자가 얼마나 많이 찾고 진료비를 얼마나 받는지 여부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의인(醫人)으로서 자기 한계를 분명히 알고 질병과 환자에 대해 항상 겸손한 사람이 진정한 명의다.”
“지난해(2008년) 말, 중랑경찰서에서 구당 김남수 회장을 비롯해 뜸사랑 관련 계좌를 조회한 바 있지만 그 결과 ‘구당 김남수 회장의 계좌에는 1원이라도 개인적으로 입금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됐다.”
2009년 12월 말 뜸사랑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구당의 200억 착복설 사실무근’이라는 뜸사랑 측의 글이 올라왔다. 2008년 시작된 경찰수사 과정에서 침뜸 교육을 통해 120억 원과 추가로 43억여 원의 영리를 취득한 혐의에 갖가지 비공식적인 영리 취득 의혹이 더해져 200억 원(=120억+43억+α) 착복설이 시중에 나돌자 뜸사랑 측이 해명한 내용이다.
뜸사랑은 1993년 구당이 발족한 ‘애구회(愛灸會)’가 모태인 모임으로 2000년 개칭했다. 구당을 정점으로 뜸사랑 사무처, 효행봉사단, 정통침뜸교육원, 각 지부가 있다. 뜸사랑 측은 “우리의 전통 민간의술인 뜸이 탁월한 치료 효과에도 불구하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워 그 명맥을 잇기 위해 설립한 비영리 봉사단체”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 많은 사람이 뜸사랑을 무료로 침뜸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로 알고 있다. 뜸사랑은 스스로 “봉사단체로서 일체의 영업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뜸사랑은 비영리 봉사단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일반인에 대한 침뜸 교육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 현재 뜸사랑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뜸사랑 산하 정통침뜸교육원에서 학생 모집이 한창이다. 기본과정(초급반 3개월)이 55만 원, 본과정(중급반 3개월)이 65만 원으로 각 과정을 들으려면 수강료에 해당하는 침뜸 참가비를 내야 한다. 정통침뜸교육과정 중 중급 이상을 수료한 사람은 소정의 입회절차를 거쳐 일반회원이 되며, 회원이 전문과정(고급반 6개월)을 이수하려면 회비 명목으로 120만 원을 내야 한다.
초급반 55만 원, 중급반 65만 원, 고급반 120만 원
뜸사랑이 침뜸 교육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 정황은 2009년 5월 서울 중랑경찰서(이하 중랑서)가 서울 북부지방검찰청에 넘긴 수사보고서에도 자세히 나타난다. 중랑서는 2008년 6월경 중화동에 있는 모 뜸사랑 봉사실에서 무면허 의료행위를 한다는 신고를 받고 보건범죄단속에 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수사에 나섰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중랑서 지능범죄수사팀 관계자는 “수사를 진행하면서 (뜸사랑이) 침뜸 교육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중랑구 수사보고서에 따르면 구당은 2000년 7월부터 서울, 광주, 부산, 대구 등에 ‘정통침뜸교육원’ 지부와 ‘봉사실’을 열고 초급반(55만 원), 중급반(65만 원), 고급반(120만 원)으로 단계별 교육을 이수하게 했다. 전 과정을 이수하려면 한 학생당 총 교육비는 연간 240만 원. 교재비를 포함하면 그 비용은 더욱 커진다. 이렇게 1년간 교육과정을 거친 수강생 약 4000명은 응시료 6만 원씩을 내고 필기시험, 뜸 실기시험, 면접 등으로 이뤄진 ‘뜸 요법사’ 자격증 시험을 봤다. 연간 2회에 걸쳐 실시되는 이 시험에 통과하면 뜸사랑으로부터 ‘뜸 요법사 자격증’을 교부받는다. 물론 국가 공인 자격증은 아니다. 당시 뜸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약 120억 원에 달하는 영리를 챙긴 혐의’를 받았다.
구당과 뜸사랑에 대한 신뢰가 커질수록 많은 사람이 뜸사랑 침뜸 교육을 찾았고 자연히 매출도 증가했다. 한때 뜸사랑 회원이었던 A씨는 “2008년 KBS 추석특집 프로그램인 ‘구당 김남수 선생의 침뜸 이야기’가 방영된 후 수강생이 몰려들었다”며 “수강료가 꽤 비쌌음에도 (침뜸을) 배워두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중랑서는 뜸사랑 관련 계좌를 조회하는 등 1년 이상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다.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뜸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국 5개 지부와 인터넷 과정으로 수강생 1800여 명을 모집했다. 수사진은 “고급반 수강생들로 하여금 각 봉사실을 찾아온 환자를 대상으로 ‘뜸 요법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요건인 총 30회의 침뜸 임상실습 과정을 거치도록 하면서 43억2000만 원의 영리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나마 이렇게 얻은 수익도 투명하게 운영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뜸사랑 주요 간부 몇몇은 회계장부에 초급과정과 중급과정의 수강생이 납부하는 금액만 수강료로 기재하고 고급과정의 수강생이 납부하는 금액 120만 원은 ‘회비’로 기재해 조세를 포탈했다는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뜸사랑의 한 핵심 간부는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대응 가치도 못 느낀다. 이미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끝났고 횡령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뜸사랑은 개인사업자로 남아 있지만 운영은 법인과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며 “뜸사랑에서 6개월 과정의 침뜸 교육을 마치면 회원 자격이 주어지고, 따라서 전문과정은 회원의 자격으로 수료하는 관계로 회비가 맞다. 국세심판원(현 조세심판원)에서 확인해준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뜸사랑 측 “사실과 다른 내용 대응가치 없어”
조세심판원은 국세청, 관세청 등 조세 징수기관으로부터 위법하거나 부당한 조세 관련 처분을 받은 납세자가 심판청구를 제기해 잘못된 세금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는 기관이다. 조세 부과와 관련된 부분은 국세청이 담당한다. 개인사업자 혹은 비영리법인이 거둔 수익이 수강료와 회비라는 명목상의 차이에 따라 세금이 어떻게 달라지느냐는 기자의 질의에, 국세청 관계자는 “개인사업자의 경우 영리 목적이면 어떤 형태로 돈을 받든지 수강료에 해당한다. 비영리법인은 회원의 친목을 위해 영리 목적이 아닌 실비 차원에서 회비를 거둘 수 있다. 예컨대 1년치 회비를 받고 회원에 대한 반대급부로 교양강좌를 해주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비영리법인이 거둔 회비는 면세가 되지만, 비영리법인이라고 해도 실질적으로 영리사업을 통해 거둔 수익으로 판단되면 법인세, 부가가치세 등이 부과된다. 실질적인 내역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2009년 11월 18일 전후로 80여 명의 뜸사랑 전·현직 회원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구당의 조카인 김모 뜸사랑 부회장 등 3명에 대한 구속 의견과 나머지 피의자 81명에 대한 불구속 기소의견을 결정해 북부지검에 송치했다. 같은 시기 서울 수서경찰서 역시 관할 내 뜸사랑 봉사실에서 불법 의료행위가 있다는 신고를 받아 2009년 11월부터 뜸사랑 소속 자원봉사자 128명을 대상으로 조사했고 그중 일부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사건이 검찰로 넘어간 뒤로는 지지부진한 상태. 2009년 5월 당시 사건 담당이었던 북부지검 반성관 검사는 검사 지휘서를 통해 “피의자들이 뜸사랑 정통침뜸교육원의 직원으로 근무하거나 수강생들에게 침구이론을 강의하고 돈을 받았다는 것이 문제 되는 행위인 것이 아니라, 불법 임상실험(일반인이나 회원 간에 침뜸을 시술한 것)을 자행하고 그를 감독·지시한 행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2009년 7월 부산지법이 구당의 침뜸 연구단체인 ‘뜸사랑’ 회원들이 낸 의료법 제27조항(무면허 의료행위 금지조항)의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제청하자, 2009년 11월 북부지검은 “무면허 침뜸 금지 의료법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결이 있기까지 ‘시한부 기소중지’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 결과 해당 사건은 7월 29일 의료법 헌재 합헌 결정이 날 때까지 9개월가량 검찰에서 잠잤다.
하지만 뜸사랑 측의 설명처럼 사건 자체가 종결된 것은 아니다. 헌재 결정 이후 해당 사건은 1년여 만에 수사가 재개될 전망이다. 새롭게 이 사건을 맡게 된 북부지검 이상길 검사는 “2008년 북부지검이 김씨(구당)에게 의료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던 내용에 대한 김씨의 헌법소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헌법소원까지 마무리되면 수사를 재개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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