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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놀란 실험

醉月 2010. 11. 1. 09:00

인류는 침팬지와 1.2% 다른, ‘털 없는 유인원’일 뿐

이한음 과학평론가 lmgx@naver.com

영장류의 일종인 보노보 ‘칸지’가 여러 기호가 나열된 패드를 눌러 문장을 만들고 있다.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것을 관찰해 원대한 착상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어느 날 그는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대해 생각하다가 거울을 들고 동물원으로 갔다. 그는 오랑우탄 우리 앞에 거울을 놓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봤다. 오랑우탄들은 거울 앞뒤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윽고 거울을 향해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인 줄 알고 그랬을까. 그랬다면 그들이 자신을 인식한다는, 즉 자의식을 지녔다는 의미가 된다. 사람들은 자의식을 인간만이 지닌 특성이라고 생각해왔다. 사람은 외출하기 전에 거울을 보고 머리에 붙은 보푸라기를 떼어내겠지만, 강아지가 거울 앞에서 몸단장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은 생후 2년쯤 되면 이른바 ‘거울상’ 단계를 지난다. 거울에 비친 영상이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그 무렵부터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남을 도울 줄도 알게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갤럽은 자의식이 남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고 남의 의도와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의 토대가 된다고 믿었다. 그는 다윈의 실험이 있은 지 약 100년 뒤인 1960년대 말부터 침팬지를 대상으로 거울 실험을 했다. 침팬지는 오랑우탄과 같은 유인원이며, 오랑우탄에 비해 진화적으로 우리와 더 가깝다.

갤럽은 침팬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침팬지들을 마취시킨 뒤 한쪽 눈썹과 반대쪽 귀에 붉은 물감을 칠했다. 깨어난 침팬지들에게 거울을 보여주자 그들은 자기 얼굴에 생긴 붉은 점을 만져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손가락을 대어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 뒤 많은 과학자가 여러 동물을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했다. 반복된 시험을 다 통과한 동물은 대형 유인원인 침팬지, 오랑우탄, 인간뿐이었다. 원숭이를 비롯한 여타 종들은 거울상이 자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따라서 적어도 유인원은 자아 개념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도 남을 의식할까. 동료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보고 듣는지 알까. 감정이입이 가능할까. 감정이입은 지극히 인간적인 속성이라고 여겨왔다. 남의 감정을 이해하고 동감하는 능력은 인간관계의 바탕이 되며, 인간만이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는다고 간주했다.

하버드대 인지심리학자인 마크 하우저의 붉은털원숭이 실험은 상당히 재미있다. 실험은 이렇게 진행됐다. 레버를 당기면 먹이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끔 붉은털원숭이를 학습시킨 뒤, 그 옆에 다른 붉은털원숭이를 넣었다. 이제 레버를 조작하여 원숭이가 레버를 당기면 옆 원숭이에게는 전기충격이 가해지도록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모습을 본 첫 번째 원숭이는 5∼12일 동안 레버를 당기지 않았다. 배가 고파도 레버를 당기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원숭이는 자신이 굶으면서까지 상대를 배려한 것일까. 원숭이들은 낯선 원숭이나 토끼 같은 다른 동물이 있을 때보다, 알고 지내던 원숭이가 있을 때 레버를 덜 당겼다. 또 전기충격을 경험한 원숭이들은 그렇지 않은 원숭이들보다 더 오랫동안 레버를 당기지 않았다.

 

600만년 전의 이별, 그 후

사회심리학자인 스탠리 밀그램은 마크 하우저가 한 것과 비슷한 실험을 인간을 대상으로 했다. 권위적인 인물이 나서서 실험 대상자에게 레버를 당겨 다른 사람에게 충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자, 그 대상자는 다른 사람이 그 ‘충격’에 격렬한 반응을 보여도(사실은 배우가 연기한 것이었다) 계속해서 레버를 당겼다. 만약 우주인이 지구에 왔을 때, 붉은털원숭이와 인간 중 누구와 더 대화하고 싶을까. 내가 우주인이라면 동료를 위해 레버를 당기지 않은 원숭이쪽에 걸겠다.

   

이런 실험은 우리가 유인원, 더 나아가 영장류 사촌들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인간이 자신만의 속성이라고 여겨온 것은 매우 많다. 언어, 이성, 자의식, 자기희생, 배려, 복잡한 사회, 권모술수, 사기, 놀이, 웃음, 도구 사용, 자위행위 등. 하지만 우리의 가까운 친척인 원숭이와 유인원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인간만이 지녔다고 하는 속성 중 많은 것을 실상 그들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이 유인원인 침팬지 및 보노보 계통과 갈라진 것은 약 600만년 전이다. 예전의 견해에 따른다면, 인간의 속성은 인간이 그들과 갈라진 뒤 진화하면서 획득한 셈이다. 하지만 유인원 실험 결과는 인간과 그들의 공통 조상이 이미 그런 속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최근에 발표된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체 염기 서열은 그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전체는 한 생물이 지닌 염색체 전체를 말한다. 염색체는 DNA 염기 서열로 이루어져 있고, 염기 서열은 생물의 진화 양상을 알려준다. 인간과 침팬지의 염기는 약 30억개이며, 조사 결과 약 4%가 달랐다. 염기 서열 중에서 유전자 같은 유전정보를 지닌 부분만 따지면 겨우 1.2%만 달랐다. 이 얼마 안 되는 차이가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를 낳은 것이다.

이 유전체 분석 결과는 인간과 침팬지의 지적 능력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연구진은 침팬지와 인간의 뇌에서 발현되는 유전자들을 비교했다. 15∼18%가 달랐으며, 원인은 주로 최근 25만년 동안 인간의 계통에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과 침팬지의 뇌 기능 차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연구진은 인간의 뇌가 유달리 크고 복잡한 것은 새로운 인간 유전자가 진화한 결과라기보다는, 뇌가 발달하는 태아 때와 유아 때 기존 유전자들이 단백질을 만드는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것이 인간의 뇌가 침팬지의 뇌보다 3배쯤 큰 이유를 설명해줄까.

DNA는 언어의 기원에 대한 단서도 제공한다. 많은 동물 연구자가 유인원뿐 아니라 새도 그림이나 기호를 조합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오랜 학습을 거친 유인원들은 그림이나 문자를 조합해 일종의 문장을 만들어서 연구자와 의사소통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강 구조상 인간처럼 분절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인간처럼 조리 있게 말을 구사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인간만이 말다운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언어는 인간과 유인원을 가르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일까.

 

문법 유전자 ‘FOXP2’

1990년, 한 가족이 과학자들의 눈에 띄었다. 그들의 사생활을 고려해 ‘KE’라고 이름붙인 이 가족은 3대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식구의 절반 정도가 갖가지 장애를 안고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장애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호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했다. 그들은 말하는 데 쓰이는 입과 얼굴 근육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지능도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뇌에서 근육 운동을 조율하고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도 작거나 비정상적인 양상이 엿보였다.

연구자들은 그들의 염색체를 조사했다. 그 결과 7번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 하나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염기 하나가 바뀌어 있었다. 그 유전자에는 ‘FOXP2’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즉 유전자 하나가 인간의 언어 능력을 좌우하는 셈이었다. 한 유전자가 어떻게 근육과 지능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 유전자는 다른 여러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다양한 유전자에 영향이 미친다.

이 유전자는 다른 동물들도 지니고 있다. 침팬지, 고릴라, 붉은털원숭이의 유전자와 비교해보니 인간과 이들의 유전자는 고작 두 군데가 달랐다. 또 그 영장류와 생쥐의 유전자는 한 군데만 달랐다. 생쥐와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약 7500만년 전이므로, 그 긴 세월 동안 양쪽의 유전자는 겨우 한 군데만 달라진 셈이다.

반면에 인간의 유전자는 600만년 전에 침팬지와 갈라진 뒤로 두 군데나 변화가 일어났다. 게다가 침팬지와 생쥐에게 생긴 변화는 유전자의 기능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위에서 일어난 반면, 인간 계통에 생긴 변화는 기능적으로 중요한 부위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FOXP2 유전자가 언어 구사 능력을 결정하는 것일까. 일부에서는 이 를 ‘문법 유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어 능력이 타고난 것이라는 노엄 촘스키의 주장을 분자생물학이 입증한 것일까.

   

침팬지 연구의 대가, 제인 구달이 침팬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인간의 오만과 착각

어쨌든 지난 20만년 사이에 이 유전자가 인간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한 것은 분명하다. 그 시기에 인류가 그런 쪽으로 진화하도록 선택 압력이 가해진 것이 분명하다. 침팬지를 비롯한 유인원에게는 그런 선택 압력이 없었다. 유인원에게도 그런 선택 압력이 가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도 인간이 자랑하는 언어를 습득하게 될까. 이미 기호를 이용해 의사소통할 정도의 능력을 갖췄으니, 유전자 두 군데만 바뀌면 그 이상의 발전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왠지 언어 문제에서도 인간과 유인원 사이에 놓인 장벽이 그다지 튼튼하지 않게 여겨진다.

야생 유인원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그전까지는 주로 포획되어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침팬지 등을 대상으로 단편적인 연구가 있었을 뿐이다. 야생 상태의 유인원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드물었다.

초기 인류 연구의 대가인 루이스 리키는 1960∼70년대에 세 여성을 유인원 연구에 끌어들였다. 리키는 아프리카의 올두바이 계곡을 수십년 동안 아무 성과 없이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초기 인류의 화석을 발견함으로써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증거를 제시한 인물이다.

리키는 인류의 진화를 파악하려면 야생 유인원을 연구해야 함을 알았다. 1960년 그는 제인 구달을 끌어들여 곰베강 보호구역의 침팬지를 연구하게 했다. 이어서 다이앤 포시를 끌어들여 고릴라 연구를 맡겼고, 비루테 갈디카스에게는 오랑우탄 연구를 맡겼다.

그들은 인간만이 지닌 특징들이 사실은 인간의 오만이 빚어낸 착각에 불과함을 하나하나 밝혀냈다. 가장 먼저 연구를 시작한 제인 구달은 침팬지들이 도구를 사용할 뿐 아니라 필요한 도구를 제작도 한다는 것, 집단 사냥을 하고 먹이를 나눠 먹는다는 것, 동지를 규합해 집단적으로 싸움을 벌인다는 것, 다양한 소리와 몸짓과 표정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폭력, 위협, 강탈, 위로, 굴종, 기만, 거래, 웃음, 놀이, 유아 살해 등 인간에 못지않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도 발견했다.

침팬지는 잡식성이며 무리를 지어 영양이나 원숭이 등을 사냥하기도 하지만, 흰개미 같은 곤충도 즐겨 먹는다. 침팬지는 풀줄기를 골라서 흰개미집 구멍에 넣어 살살 구슬려서 흰개미들이 풀줄기를 타고 올라오면 훑어 먹는다. 그리고 적절한 나무줄기를 골라 중간에 있는 잎은 떼어내고 끝의 잎들은 잘 씹어서 스펀지처럼 만들어 물을 흡수시킨 뒤 빨아먹는다. 침팬지가 단순한 것이긴 해도 도구를 만들고 사용한다는 사실은 인간만이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는 정의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다이앤 포시는 인간이 고릴라에 대해 갖고 있던 왜곡된 이미지를 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33년 영화 ‘킹콩’이 나온 이래로, 아니 이전부터 고릴라는 난폭하고 사나운 동물로 인식되어왔다. 유인원 중에 가장 몸집이 크고, 검은 털로 뒤덮여 있는 데다가, 흥분하면 일어서서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행동을 보면 그런 인상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예전에는 고릴라가 인간과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고릴라는 인류와 침팬지가 갈라진 시기보다 더 앞선 약 700만년 전에 갈라져 나갔다. 사실 고릴라는 채식동물이며 지극히 온순하다. 그렇다고 유아 살해나 암컷을 둘러싼 수컷들의 격렬한 싸움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루테 갈디카스가 연구한 오랑우탄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보르네오와 수마트라에 산다. 오랑우탄 계통은 약 1600만년 전에 갈라졌다. 주로 나무 위에 살면서 채식을 하며, 대개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지내는 때가 많다. 따라서 다른 유인원에 비해 집단 사냥을 하거나 집단 싸움을 벌이거나 먹이를 나누거나 하는 일이 드물다. 도구도 거의 쓰지 않는다.

다른 유인원과 마찬가지로 오랑우탄도 모방의 천재이다. 포획되거나 길들여진 개체들은 인간의 갖가지 행동을 흉내낸다.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이 빨래도 하고 불도 지르려 했다고 말한다.

   

모방이 새로운 상황에서 응용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지능과 상황 판단력과 연관성을 파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유인원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그런 적용 능력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유인원보다 지능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일본의 마카쿠원숭이들에서도 모방 행동이 퍼지고 후손에게 전달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털 없는 유인원’

1953년 이모라는 이름을 지닌 마카쿠원숭이는 연구자들이 준 흙 묻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행동을 했다. 곧 동료들과 친척들도 이모의 행동을 흉내냈다. 세월이 흐르자 그 무리에 있는 새끼들도 어미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 뒤 고구마를 씻어 먹었다. 새로 도입된 행동이 집단 전체로 퍼지고 후손에게 대물림되는 이 현상을 문화라고 일컬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이것이 모방과 학습을 통한 문화적 전달 사례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인간만이 문화적 존재라는 정의도 불충분한 셈이다.

유인원 연구는 인간만이 애지중지하던 속성들을 하나씩 인간의 품안에서 빼냈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인간과 유인원은 점점 더 정도의 차이만 있는 듯이 보인다. 인간과 유인원을 구분하는 확연한 특징은 무엇일까.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한마디로 말한다. “인간은 털 없는 유인원”이라고 말이다.

털 없는 유인원은 두 발로 똑바로 섬으로써 자유로워진 팔로 도구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고, 이어서 뇌가 커지면서 독자적인 길로 들어섰다. 인류의 조상이라고 할 호모 에렉투스는 약 170만년 전에 등장했다. 그보다 앞서 아프리카에는 여러 인류 종이 살았다. 서서 돌아다니고 도구를 썼던 이 원인(猿人)들에 관한 이론과 가설은 인류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편견의 일면을 보여준다.

1925년 레이먼드 다트는 아프리카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라는 원인의 화석을 발견했다. 그는 함께 발견된 증거들을 토대로 이 원인이 잔인한 사냥꾼이었다고 추정했다. 데즈먼드 모리스와 노벨상을 받은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인류는 채식을 하는 유인원에서 육식동물로 돌변한 존재이며, 집단 사냥이 협력과 의사소통에 필요한 언어와 식량 분배 관습을 낳았다. 또 고기를 가져오는 남성을 붙들어놓기 위해 여성은 배란기를 숨겼다는 것이다. 즉 사냥이 없었다면 인류도 없었다는 얘기다.

이 개념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그대로 차용된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 원인이 뼈를 휘둘러 살인을 저지르고 환호하는 장면이 인류 진화의 출발점임을 알린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은 침팬지를 이런 잔인한 사냥꾼의 역할 모델로 삼았다. 동료를 끌어모으고 동맹 관계를 맺어 패싸움을 벌인 뒤 이기면 같은 편에게 먹이와 암컷을 공유함으로써 보답한다. 서열이 높은 수컷은 으르렁대면서 과시 행동을 보이고, 그렇지 않은 수컷은 낑낑대고 납작 엎드려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인간 사이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보여준다. 게다가 으뜸 수컷 모르게 불륜까지 저지르지 않는가.

 

살인은 인간의 본성?

하지만 초기 인류가 사냥에 능숙했고, 사냥에 주로 의지했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인류는 사냥꾼이 아니라 도망 다니는 먹이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런 인식이 확산되면서 1929년 새로운 종으로 밝혀진 보노보가 침팬지의 대안 모델로 급부상했다. 보노보는 피그미침팬지라고도 한다. 보노보와 침팬지는 인류 계통이 갈라지고 약 300만년 뒤에 갈라졌다.

보노보의 서식지는 아프리카에서 침팬지가 사는 곳과 강을 경계로 갈라진 콩고민주공화국 내에 있다. 부족간 전쟁이 극심했던 곳이라 그동안 거의 연구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영장류 연구자인 프란스 드 발은 보노보가 조금만 더 일찍 알려졌더라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존 개념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 사냥, 도구 제작 같은 측면 대신에 성적인 관계, 남녀의 평등, 가족의 기원 같은 측면이 더 강조됐을 것이라고 말이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모습은 비슷하지만 행동과 습성은 전혀 딴판이다. 보노보는 감정이 풍부하고 잘 싸우지 않으며 갈등을 성적으로 풀려고 한다. 흔히 말하듯 침팬지는 성 문제를 권력으로 해결하는 반면, 보노보는 권력 문제를 성으로 해결한다. 인간이 볼 때 보노보는 성적으로 탐닉하는 동물이다. 보노보의 생식기는 암수 모두 눈에 확 띈다.

보노보는 마주보고 성행위를 하며, 동성애와 자위행위를 비롯한 온갖 형태의 성적 행동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인간만이 지닌 특징이라고 여겨졌던 성행위와 애정 표현들을 고루 보여준다. 익살스러운 표정도 짓고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장난도 치고 도와주기도 한다. 또 암컷들이 결속해서 수컷을 통제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할 만한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역할 모델이 된다.

이렇게 말하니 인간만이 지닌 속성을 빼앗는 것이 유인원 연구인 양 들린다. 하지만 유인원이 적어도 우리와 600만년 전에 갈라져서 독자적으로 진화한 동물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인간은 그들이 따라오지 못할 지능과 창의력을 지녔으며, 경이로운 문명을 발전시켰다. 이 연구 결과들이 말해주는 것은 그저 인간이 유인원과 다른 차원에 사는 존재가 아니며, 똑같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잘린 손가락도 재생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 곧 현실로?

배아줄기세포는 잠재력이 아주 크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어디로 튈지 모른다. 따라서 원하는 대로 분화하도록 고삐를 죌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간세포로 분화해야 할 것이 엉뚱한 신경세포가 되거나, 아예 암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국제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의 한 대원이 아기 인형이 담긴 얼음 조각과 ‘인간 생명에 대한 특허를 중지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시위하고 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발생학자 제임스 톰슨은 1998년 11월6일 학술지 ‘사이언스’에 최초로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분리해 배양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은 발표되자마자 전세계를 격렬한 논쟁과 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일으킨 소용돌이는 잦아들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졌다. 그의 이름조차 모르던 수많은 일반 대중까지 집어삼키면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를 뒤흔든 3쪽짜리 논문

과학적 발견이 으레 그렇듯이, 그의 발견도 그저 새로운 가능성으로 향한 문을 활짝 연 것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그 가능성이 그저 그런 수준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라는 데 있었다. 그보다 2년 전에 이뤄진 복제 양 돌리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그 발견은 인류의 미래를 뒤바꿀 영향력을 지녔다. 탄식과 우려의 목소리가 큰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는 7년 뒤 한국에서 그 여파가 일그러진 형태로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겠지만.

톰슨은 시험관 수정을 시도한 사람들이 기증한, 남는 배아를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 수정란이 되고, 그 수정란은 배아를 거쳐 태아로 발달한다. 수정란은 하나의 세포인데, 그 세포는 계속 분열해 2개, 4개, 8개 식으로 증가한다.

그 세포들의 덩어리가 바로 배아다. 수정란이 분열을 시작한 지 4∼5일쯤 지나면 세포의 수는 약 100개로 늘어나며, 배아는 마치 속이 빈 공처럼 변한다. 이때의 배아를 배반포라고 하는데, 거의 텅 빈 안쪽에는 약간의 세포가 들어 있다. 그 세포들을 내부 세포 덩어리라고 한다.

내부 세포 덩어리는 계속 분열하고 자라서 나중에 우리의 몸을 이루는 다양한 세포, 조직, 장기를 만드는 기능을 한다. 톰슨은 그 내부 세포들을 꺼내어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배아줄기세포다.

줄기세포는 분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증식하면서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면 분화한 세포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줄기세포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톰슨이 분리해낸 것은 배아줄기세포다. 톰슨의 정의에 따르면, 배아줄기세포는 자궁에 착상되기 이전의 초기 배아에서 얻은 것이다. 오랜 기간 미분화 상태에서 분열과 증식을 계속할 수 있고, 오랫동안 배양한 뒤에도 분화한 온갖 세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여전히 간직한 것이다.

또 하나는 성체줄기세포다. 이는 발달한 동물의 여러 조직에서 발견되는 것을 말한다. 성체줄기세포는 배아줄기세포보다 발달 잠재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만들어낼 수 있는 세포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톰슨의 3쪽짜리 논문은 자신의 연구진이 배양한 것이 다양한 세포를 만들어낼 능력을 지닌 줄기세포임을 입증하는 분석과 실험 결과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 발견이라는 것일까? 그것은 꿈의 세포를 발견했다는 의미였다.

 

종양 속에 뼈, 이빨, 머리카락이!

배아줄기세포의 발견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기 쉽도록 암세포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암세포는 무분별하게 계속 증식한다는 점에서 정상 세포와 다르다. 정상 세포는 몸의 다른 세포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이겠지만, 대개 분열하는 횟수가 한정되어 있다.

반면 암세포는 한없이 증식할 수 있다. 암세포의 이런 능력이 몸 전체에는 해가 된다. 하지만 정상 세포가 필요할 때 그런 증식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큰 상처가 났을 때나 손가락이 잘렸을 때 그 능력은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잘려나간 꼬리가 다시 자라는 도마뱀과 달리, 잘려나간 인간의 손가락은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 병든 신장이나 심장도 재생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정상 세포는 암세포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지닌 세포가 발견된 것이다.

사실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암세포와 만난다. 1953년 미국 잭슨 연구소에서 일하던 암 연구자 르로이 스티븐스는 담배 회사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잎담배와 암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그는 실험용 생쥐들을 잎담배 성분들에 노출시켰다. 그러자 고환에 종양이 생긴 생쥐들이 나타났다. 종양을 짼 그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뼈, 이빨, 머리카락 등 온갖 신체 조직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그런 종양을 테라토마라고 한다.

그는 종양을 일부 잘라 다른 생쥐에게 이식해보았다. 그러자 이식된 종양은 다양한 세포와 조직으로 자라났다. 그런 특이한 현상을 관찰한 뒤로 그는 테라토마 연구에 매달렸다. 수십년 동안 테라토마를 연구한 끝에 그는 그 종양이 배아줄기세포에서 유래했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그 종양을 일으킨 세포를 ‘만능 배아줄기세포’라고 불렀다. 그럼으로써 줄기세포 연구 분야가 탄생했다.

스티븐스는 테라토마를 배양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세계 각지의 연구실에 테라토마와 배양 기술을 전파했다. 그 뒤로 수많은 연구자가 암의 근원을 파헤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81년 에번스와 카우프먼이라는 두 연구자가 생쥐의 배반포에서 배아줄기세포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더 지난 뒤 제임스 톰슨은 1995년 영장류의 배아줄기세포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 기술을 이용해 3년 뒤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분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테라토마는 연구자들이 분리한 세포가 정말로 배아줄기세포인지를 판단하는 용도로 쓰이게 됐다.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생쥐에게 이식하면 테라토마가 생긴다. 테라토마가 안 생기면 배아줄기세포가 아니다.

 

재생 전문가 ‘성체줄기세포’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DNA 연구만큼이나 역사가 깊은 셈이다. 사실 배아줄기세포는 훨씬 전부터 존재가 예견됐다고 봐야 옳다. 배아줄기세포가 없다면 세포 하나로 된 수정란에서 200여 종류의 수십조 개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으로 자란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포에서 다양한 종류의 분화한 세포가 만들어지려면, 발달이 이뤄지는 동안 계속 미분화 상태를 유지하면서 필요할 때 피부, 털, 뼈, 근육, 신경 등 분화된 다양한 세포와 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세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때로 진정한 원인과 기본 원리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성과를 내곤 한다. 성체줄기세포가 그렇다. 1965년 연구자들은 백혈병에 걸린 아이에게 골수를 이식해 치료에 성공했다. 당시 연구자들은 골수에서 혈액이 만들어지므로, 건강한 사람의 골수를 이식하면 혈액암인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식한 골수에 들어 있던 것, 즉 백혈병을 치료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것은 성체줄기세포의 하나인 조혈모세포였다.

골수를 이식했을 때 치료하는 것이 성체줄기세포임이 밝혀진 지금은 골수 이식 대신 조혈모세포를 사용한다. 가령 화학물질이나 방사선을 사용해 백혈병에 걸린 환자의 골수 세포를 죽인 다음, 기증받은 건강한 조혈모세포를 혈관에 주입한다. 그러면 조혈모세포는 혈관을 타고 돌다가 골수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은 뒤 건강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을 만들어낸다.

최근에는 제대혈에서 조혈모세포를 추출해 이식하기도 한다. 제대혈은 출산할 때 탯줄에서 뽑은 신생아의 피다. 그 피에는 조혈모세포 같은 성체줄기세포가 들어 있다. 신생아는 아직 면역체계가 덜 발달한 상태이므로, 제대혈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면 면역반응이 덜 일어난다.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성체줄기세포를 이용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체의 각 부위에서 성체줄기세포를 찾으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곧 간, 치아, 근육, 창자, 피부, 혈액, 뇌, 심장 등 여러 부위에 성체줄기세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찾아보면 더 많은 곳에서 발견될 것이다. 상처가 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재생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부위에는 성체줄기세포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피부나 간이 대표적이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줄기세포의 능력이 모두 똑같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성체줄기세포가 배아줄기세포에 맞먹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알려졌다. 수정란에서 발달이 진행될수록 줄기세포도 점점 분화하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세포의 종류가 줄어든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피부세포가 간세포로?

배아줄기세포는 200여 종류나 되는 몸의 모든 세포를 만들 수 있는 반면, 성체줄기세포는 만들어낼 수 있는 세포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는 듯했다. 간에 있는 줄기세포는 주로 간세포를 만들고, 창자에 있는 줄기세포는 주로 창자 세포를 만든다. 성체줄기세포 중에서 능력이 가장 뛰어난 것은 조혈모세포인 것 같았다. 조혈모세포는 주로 골수에 들어 있지만 지라, 간, 림프절, 탯줄, 혈액 등에도 들어 있으며, 아홉 종류의 혈액 세포를 만든다.

조혈모세포보다 능력이 더 뛰어난 희귀한 형태의 줄기세포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미네소타 대학의 캐서린 버페이 연구진은 다능성체전구세포라는 것을 찾아냈다. 연구자들은 맵시(MAPC)라고도 하는 이 성체줄기세포가 배아줄기세포에 버금가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최근에 국내 연구진도 맵시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외에도 성체줄기세포가 의외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가령 백혈구가 손상된 근육을 치료한다거나, 조혈모세포가 뉴런을 만든다거나, 피부에 있던 줄기세포가 골수 줄기세포로 바뀐다거나, 신경 줄기세포가 인슐린을 만드는 췌장 세포로 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기존의 발생학 원리들을 무시하는 듯 여겨진다. 발생학적으로 보면 세포에도 계보가 있다. 배반포를 지난 뒤 배아의 세포들은 세 층으로 나뉜다. 내배엽, 중배엽, 외배엽이라는 세 세포층은 족보 맨 앞에 나오는 조상과 같으며, 각자 세포들의 계보를 형성한다.

중배엽에서 나온 세포끼리는 서로 같은 계보에 속하므로 한 세포가 다른 세포로 바뀐다고 해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중배엽에서 유래한 세포가 외배엽에서 유래한 세포처럼 변한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그런 변화를 전환분화라고 한다. 예를 들면 피부세포가 간세포로 바뀌는 식이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측은 성체줄기세포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거나, 성체줄기세포가 있는 지점의 환경이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주변 환경이 바뀌면 전환분화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반박하는 측은 연구자가 줄기세포를 혼동했거나 실험할 때 여러 줄기세포가 섞였을지 모르며, 혹은 세포융합이 일어난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줄기세포 연구가 시작된 지 10년이 채 안 된 상황이니 어느 쪽이 옳은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어떤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다.

연구가 아직 미흡하다는 점은 현재 단계에서 줄기세포를 치료에 이용하는 것이 섣부르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치료법을 적용하려면 신뢰성과 안전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먼저 줄기세포의 능력이 과학적으로 검증돼야 한다. 다시 말해 줄기세포의 활동이 발생학적 및 분자생물학적으로 상세히 밝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직 분화 과정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배아줄기세포는 더욱 더 그래야 한다.

 

조급증이 낳은 ‘황우석 사태’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조혈모세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몰랐으면서도 골수 이식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구체적인 치료 과정은 몰라도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기본적으로 타당한 추론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재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은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법을 내놓기 위해 앞다투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아마도 신생 분야일수록 서둘렀을 때 선취권을 얻고 그에 따르는 이익을 향유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해 동물이나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에 들어갔다는 뉴스만 살펴봐도 연구가 얼마나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뼈질환 치료, 심장질환 치료, 척추 손상 치료, 뇌졸중 치료, 파킨슨씨병 치료, 암 치료, 요실금 치료, 유방 조직 재생, 방광 배양 이식, 뇌질환 치료, 난청 치료, 시력 회복, 당뇨병 치료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임상실험에는 긴 시간이 걸리므로 실제로 검증된 치료법이 나오기까지는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 경쟁에 치중하다보면 안전성을 소홀히 할 우려가 있다. 거기에 법과 제도의 허점이 버무려지면 탄식을 내뱉던 사람들이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재현이 불가능한 일회성 치료 효과를 과장하는 사례도 나타난다.

어쨌거나 그런 조급증이 ‘황우석 사태’를 빚어낸 한 축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연구자의 조급증에 정부와 대중의 조급증이 버무려져 상승 작용을 일으킨 셈이었다. 황우석 사건 이후로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 사건이 반성하고 뒤돌아볼 시간적 여유를 준 셈이다. 그 시간이 아주 짧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식용 장기 제작

제임스 톰슨은 자신의 발견이 신약 개발, 장기 이식 등에 유용하리라는 것을 간파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발생학이었다. 선천성 기형, 불임, 유산처럼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발생학적인 사건을 실제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배아를 대상으로는 연구할 수 없다. 그는 배아줄기세포가 그런 원인을 규명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착상 이후 단계의 발생 과정은 연구할 배아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른 종(種)을 연구해서 그 결과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에도 인간 배아줄기세포는 아주 유용하다. 게다가 생쥐와 인간의 발생학적 차이를 밝히는 데에도 유용하다고 봤다. 물론 이식용 장기를 만들고, 병든 조직을 대체하고, 신약과 새 치료법 개발에도 쓸모가 있으리라는 점도 언급했다.

톰슨이 제시한 연구 방향은 이후 얼마나 진척됐을까. 그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윤리 논란에 얽매여 사실상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는 시험관 수정을 하고 남은 배아를 기증자의 동의 아래 실험에 썼다.

그런 조치를 취한다 할지라도 배아줄기세포는 생명윤리 논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배아줄기세포를 얻으려면 배아를 파괴하고 내부 세포 덩어리를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배아를 온전한 생명이라고 본다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배아라는 생명을 파괴하는 셈이다.

미국은 생명과학 연구비의 대부분이 정부기관에서 나온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새로운 배아줄기세포를 분리해 배양하는 연구에는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리 확보해둔 기존의 배아줄기세포의 수는 얼마 되지 않고, 게다가 생쥐 세포에서 배양했기에 이식용으로 쓸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배아줄기세포 자체의 문제도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잠재력이 아주 크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세포이다. 따라서 원하는 대로 분화하도록 고삐를 죌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간세포로 분화해야 할 것이 엉뚱한 신경 세포로 분화하거나, 아예 암으로 바뀔 수도 있다.

고삐를 죄려면 그 분화 과정을 분자생물학적으로 상세히 연구해야 한다. 따라서 기초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기 전까지는 배아줄기세포를 치료용으로 쓴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배아줄기세포는 이식 치료용보다는 발생 과정 같은 생물학적 기초 지식을 규명하는 데에 쓰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식용으로는 부작용이 적은 성체줄기세포 쪽이 더 나을 수 있다.

 

난치병 치료 막는 이분법 사고

그래도 배아줄기세포는 강력한 연구 도구가 될 수 있다. 환자에게 맞는 신약이나 치료법 개발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톰슨 같은 연구자들은 아예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라는 이분법을 폐기하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하려면 양쪽을 다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분법에 얽매여서 한쪽에만 치중하다가는 반쪽 지식밖에 얻지 못하며, 제대로 된 지식을 얻어야만 진정으로 난치병 치료와 수명 연장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배아줄기세포가 발견되기 2년 전, 복제 양 돌리가 탄생했을 때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장기 이식을 위해, 혹은 후손을 보기 위해 복제 인간을 만든다면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될 것이라며 탄식과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다른 한쪽에서는 복제 기술이 생물학 기초 지식을 확충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된 끝에 인간 복제는 금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복제 배아 연구는 금지하거나 엄격한 지침과 관리 하에 이뤄져야 한다는 쪽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어쨌든 현재 동물 복제 기술은 생물학 지식과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복제와 줄기세포는 체세포 핵 이식이라는 기술을 통해 서로 만난다. 복제를 하려면 난자의 핵을 없앤 뒤 거기에 체세포의 핵을 이식해야 한다. 그 기술이 바로 체세포 핵 이식이다.

이른바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세포를 얻으려면 같은 기술을 써야 한다. 환자 자신의 체세포를 난자에 이식해 배아줄기세포를 만들면 이식했을 때 거부 반응이 없다. 둘은 배반포 단계까지는 동일하다. 줄기세포를 얻을 때는 그 배아를 파괴하고, 복제를 할 때에는 그 배아를 그대로 발달시키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톰슨의 실험은 복제 실험과도 이어진다. 현재 둘은 사실상 생물학과 의학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정치, 사회, 윤리 등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이 미치고 있다. 하나의 실험이 엄청난 파급 효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사이보그 2.0’ 시대, “텔레파시로 말해봐∼”

무선통신을 활용해 심장 상태를 점검, 위급할 때 병원에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 짝사랑하는 애처로운 심정을 말 없이도 연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리모컨 찾느라 헤맬 필요 없이 생각만으로 TV를 켤 수 있다면?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사이보그가 되시겠습니까? 인간과 기계가 결합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진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생각의 속도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른다.

사이보그, 로봇, 안드로이드의 출현이 미칠 영향과 그들이 함께하는 신기한 또는 암울한 미래 세계의 모습은 과학소설을 통해 오래전부터 다뤄져왔다. 그런 소설들은 청소년에게 꿈을 심어줌으로써 로봇공학, 인공지능 등 관련 분야에서 그 꿈을 실현시키려는 세대를 낳았다. 그런 한편으로 과학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의 특성상 과학소설도 그것에 푹 빠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갈라놓았고, 양쪽은 미래에 대한 인식과 기대 수준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그런 차이를 좁히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블록버스터 SF 영화들이다. ‘터미네이터’ ‘쥐라기 공원’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일반 대중의 기대 수준을 한껏 높여놓았다. 반면에 실제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오히려 신중한 목소리를 냈다. 아직 그런 미래가 오려면 멀었고, 연구를 진척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찬물을 끼얹곤 했다.

하지만 기대 수준과 찬반 논의를 떠나 사이보그, 로봇, 복제인간 등이 미래 사회의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데는 거의 견해가 일치한다(핵전쟁이나 환경재앙으로 문명이 퇴보한다는 예측을 제외한다면).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의 한스 모라벡은 아예 로봇이 인간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뇌에 담긴 정보를 다 컴퓨터로 내려받아 금속으로 된 몸에 넣어 본래의 의식을 고스란히 지닌 채 살아갈 것이라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 기동대’는 그런 미래상을 인상적으로 보여줬다.

그런 생각은 몸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지, 의식이란 무엇인지,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하는 다양한 의문을 낳았다. 로봇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지금의 산업용이나 오락용 로봇은 그렇다. 지식의 양과 계산능력에서는 인간을 이미 초월하고 창의적인 문제해결 능력까지 보여줄 정도로 발전한 컴퓨터도 인간의 병렬처리 능력과 감정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직 인간 흉내를 낼 수 없다. 인공지능, 인공생명, 양자 컴퓨터, 신경망 회로 등 인간의 능력을 모사하거나 초월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컴퓨터 관련 분야의 연구가 계속 이뤄지고 있지만, SF 영화를 현실로 만들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반면에 인간을 기계화하는 분야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체를 흔히 사이보그라고 한다. 대개 뇌를 제외한 신체 부위를 기계로 보강하거나 대체한 형태를 가리킨다. 넓게 보면 이미 인류의 상당수는 사이보그다. 심장 박동기, 의수나 의족, 임플란트 치아 등 몸에 각종 기계 장치와 보철물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사이보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후인간(posthuman)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우선 과학소설이나 SF 영화를 통해 완성된 형태로 접하는 후인간의 모습과 은연중에 일상생활에 배어드는 과학기술의 형태로 접하는 모습은 그 거리감이 다르다. 어느 날 한 벤처기업이 사고를 당해 만신창이가 된 사람을 수술해 뇌만 빼고 전신을 기계장치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그 로보캅 같은 존재는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발표될 것이고, 사람들은 대체로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즉 인간이 아닌 과학기술의 산물로 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자기 식구나 친한 친구가 몸이 서서히 썩어가는 불치병에 걸려 있고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신체 부위를 조금씩 기계장치로 대체한다고 하면 어떨까. 오늘은 이가 다 빠져서 인공치아를 해 넣고, 한 달 뒤에는 발가락이 못쓰게 되어 인공 발가락을 달았다가 두 달 뒤 무릎까지 의족으로 바꾸고, 며칠 뒤 심장이 멈추는 바람에 서둘러 인공심장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진행되다가 결국 뇌를 제외한 몸 전체를 바꾼다면?

그렇게 서서히 진행되는 변화는 비록 완결된다 해도 당사자가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더 나아가 온전한 인간이라는 인식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로보캅 같은 육중한 금속 덩어리가 아니라 인공피부 등을 통해 본래의 모습과 흡사하게 바뀌었다면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어느 날 별안간 튀어나온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와 달리, 우리 친구는 몸이 기계로 대체됐다는 데 좀 충격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 예전과 별다르지 않은 인간으로 여겨질 것이다.

   

‘1998년 사이보그 1.0’

자신을 직접 사이보그 실험 대상으로 삼은 영국 리딩대 케빈 워릭 인공두뇌학 교수.

주변의 사이보그를 후인간으로 보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런 인공 보철물을 단순히 신체 기능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의수는 그저 손의 대체물이고, 인공심장은 그저 심장의 대체물일 뿐이다. 첨단 컴퓨터 장치가 달려서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몹시 흥분할 때 몸의 상태에 맞추어 심장 수축을 조절하는 심장 박동기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그저 보조장치로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치에 무선통신 기능이 있어서 인터넷을 통해 박동 조절 프로그램이 갱신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래도 그냥 보조장치로 여길 것 같다. 구형 장치를 신형 장치로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좀더 기능이 향상되어 인터넷으로 심장 상태를 상시 점검하면서 위급할 때 전기충격도 가하고 약물도 주입하며, 병원과 소방서에 자동으로 신호도 보낼 수 있다면? 그래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기능이 더욱 향상되어 심장 상태를 스스로 점검, 뇌에 신호를 보내 흥분을 가라앉히거나 활동을 자제하도록 호르몬을 조절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심장 상태를 실시간으로 전달함으로써 그와 언쟁을 벌이던 것을 그치게 할 수 있다면? 혹은 원한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그것을 악용해 그를 자극하거나 심장마비를 유도한다면? 이 정도 상황이 되면 어디까지를 보조장치로 봐야 할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심장 박동기라는 특정한 용도로 쓰이는 하나의 장치를 기준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그런 기능 향상의 의미와 영향을 파악하는 시각도 거기에 맞추어져 협소해진다.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보자. 어떻게 달라질까. 인공 보철물이나 보조장치를 장착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사이보그를 만든다는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본다면? 노골적으로 그 관점을 취한 사람이 바로 영국 리딩대 인공두뇌학 교수인 케빈 워릭이다.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나’라는 책을 쓴 그는 자신이 직접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실험 계획을 세웠다.

‘사이보그 1.0’이라는 첫 계획은 1998년 8월24일에 이뤄졌다. 그는 자신의 팔에 실리콘 칩 중계기를 이식했다. 칩은 그가 어디에 있음을 알리는 신호를 내보냈다. 신호는 그의 학과에 설치된 컴퓨터로 전송됐고, 컴퓨터는 그가 문 앞으로 가면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전등과 난방기를 켰다. 즉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컴퓨터를 통해 여러 장치를 작동할 수 있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사이보그 실험이었다.

실험이 성공하자 그는 ‘사이보그 2.0’이라는 두 번째 계획에 착수했다. 2002년 3월14일, 그는 왼팔의 안쪽을 따라 쭉 뻗어 올라가는 큰 신경인 정중신경에 100개의 미세 전극이 꽂힌 장치를 이식했다. 이번 실험의 목적은 자신의 신경계와 컴퓨터 사이에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 실험도 성공적이었다. 그는 손을 움직여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인공 팔을 조종하고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었다. 신경의 전기신호가 전극으로 전달되면 그 신호가 무선으로 컴퓨터로 전달되고, 컴퓨터가 그 신호에 따라 인공 팔을 움직인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아내인 이레나에게도 칩을 이식했다. 이레나가 손가락을 폈다가 오므리자 신경의 전기신호가 그녀에게 이식된 칩으로 전달됐고, 신호는 인터넷을 통해 그에게 이식된 칩으로 전달됐다. 그 칩은 수신한 신호에 따라 그의 신경계를 자극했다. 그는 아내의 손 움직임을 느꼈다. 인터넷을 통해 두 사람의 신경계가 접속된 것이다.

 

사이보그가 돼야 생존한다?

이 실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칩을 이식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령 신용카드번호, 주민등록번호, 혈액형, 진료 기록, 출입증 등 갖가지 신상 기록을 담은 아주 작은 칩을 팔목 같은 곳에 이식할 수 있다. 무선으로 정보를 갱신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런 칩은 지갑에 넣고 다니거나 휴대전화에 부착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신체기능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워릭의 칩은 신경계와 융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것은 미약한 전기신호만 지나다니는 신경계에 외부로부터 온 이질적인 신호를 주입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 실험은 장애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인위적으로 감각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척추 신경이 끊어져 마비가 온 사람의 다리를 움직일 수도 있다.

   

시각장애인의 신경을 자극함으로써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감지하게 할 수도 있다. 또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같은 퇴행성 뇌 질환이나 간질, 정신분열증을 치료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거꾸로 신경계로 전달되는 신호를 약화시킴으로써 즉시 통증을 줄이는 진통제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침술에도 혁신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의학적으로 전망이 밝다.

반대로 신경계의 신호를 외부에 내보낼 수도 있다. 그 신호를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처리하면 다양한 장치들을 쉽게 작동할 수 있다. 굳이 리모컨을 찾느라 헤맬 필요 없이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마우스와 키보드 없이도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다.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자동차를 운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굳이 워릭처럼 칩을 이식하지 않고서 가능한 것도 있다. 가령 뇌파를 이용해 컴퓨터를 작동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는 실험들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워릭의 두 번째 실험이 지닌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개인 간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인간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내 신경계와 연결된 무선 송수신기로 내 감정과 생각 또는 행동이 일으키는 신경계의 전기 신호를 컴퓨터로 보내 인터넷을 통해 남에게 그대로 전달한다면, 그의 몸에 이식된 칩은 그 신호를 받아 그에게서 똑같은 감정이나 생각 또는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굳이 전화를 걸어 말할 필요가 없이, 인터넷을 통해 내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다. 짝사랑하는 애처로운 심정을 전달할 수도 있고, 내가 아프다는 것을 식구들에게 신속히 알릴 수도 있다.

그것을 ‘텔레파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한 사람의 사고, 말, 행동 따위가 멀리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현상이 바로 텔레파시 아닌가. 그러면 의사소통의 수단이 말이나 글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좀더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거리 유세나 텔레비전 연설을 할 필요 없이 집 안에 앉아 생각만으로 유권자를 설득할 것이고, 주식시장에서는 생각의 속도로 거래가 일어날 때 빚어지는 대혼란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타인의 온갖 생각들, 광고, 악감정, 기대, 설득, 강압, 세뇌 등에 대처하느라 뇌의 활동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고,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활동도 구체적인 작품 없이 이루어질지 모른다. 문학에서는 제임스 조이스류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초현실주의가 다시 부흥하지 않을까.

이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슈퍼맨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기억과 정보처리 능력은 증진시킬 수 있다. 뇌가 컴퓨터망에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나 영화 ‘매트릭스’가 현실이 된다고나 할까. 굳이 가상 공간에 접속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꼬챙이를 뒷목에 꽂거나 머리에 장치를 쓸 필요도 없이 말이다. 또 우리가 이용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들도 쓸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전기뱀장어의 전기, 박쥐의 초음파, 곤충의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보는 능력을 활용할 수도 있다.

케빈 워릭은 우리가 기술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화할 시기가 됐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기계들에 맞서려면 인간도 사이보그로 새롭게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이보그 기술은 인간에게 대안을 하나 더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냥 순수한 인간으로 남든지, 사이보그가 되어 능력을 강화하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컴퓨터를 거부한다고 해도 컴퓨터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듯이, 우리가 이미 사이보그가 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시대에 와 있을 수도 있다. 케빈 워릭의 사이보그는 그저 개량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술적 한계, 그러나…

워릭의 사이보그가 실용화하려면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기술적으로는 먼저 이식되는 장치에 대한 몸의 거부 반응을 해결해야 한다. 몸은 이물질에 대해 면역반응을 일으킨다. 그의 장치도 나중에 꺼냈을 때 생체조직으로 뒤덮여서 기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또 신경은 아주 미세하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뇌의 뉴런들이 기억이나 감정을 어떻게 만들고 떠올리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손의 움직임 같은 단순한 신호를 전달하는 것과 달리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을지 모른다. 이런 문제점은 나노기술이나 조직공학 분야에서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른다.

뇌가 이질적인 정보에 어떻게 대처할지도 문제이다. 뇌는 그런 정보를 받아들일까, 거부할까. 받아들인다면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갑자기 밀려드는 정보의 홍수에 신경이나 뇌가 손상을 입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런 손상을 의도적으로 일으키려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원한이 있거나 강도짓을 하려는 사람이 상대방의 신경계와 뇌를 공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컴퓨터를 이용한 대규모 공격도 벌어질 수 있다.

   

생각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신호를 변환해 전달하고 처리하는 칩과 컴퓨터가 관여한다. 즉 실제로는 인간과 기계, 뇌와 컴퓨터의 의사소통이 개입한다. 인간과 기계의 의사소통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뇌를 감염시켜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지적 기계가 인간의 뇌를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뇌와 컴퓨터의 융합은 자유의지를 지닌 독립된 존재로서의 개인이라는 개념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다. 컴퓨터와 융합됨으로써 강화된 뇌의 기억, 정보 처리, 자원 활용 능력은 교육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교사의 생각을 수월하게 전달하는 방안이 강구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교육은 특정한 사상, 종교를 주입하는 용도로 변질되기가 쉽고, 방화벽을 뚫는 컴퓨터 악성 코드 같은 것을 교육할 때 심어둠으로써 세뇌 효과를 영구히 지속시킬 수도 있다. 혹은 팬덤 현상(특정 인물이나 분야에 빠진 사람 혹은 문화)을 통해 특정한 인물이나 컴퓨터의 의지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인간 사회는 여왕 같은 존재를 정점으로 한 꿀벌이나 개미 사회처럼 진화할지 모른다.

 

인간과 기계는 한몸으로

사이보그 연구가 이제 막 시작된 단계이므로 이런 문제는 아직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당장 깊이 살펴봐야 할 것도 있다. 바로 윤리 문제다. 사이보그, 인간과 기계의 융합은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므로 당연히 윤리 문제를 야기한다. 케빈 워릭이 목표로 하는 것은 그저 보철물을 장착하는 수준의 사이보그가 아니라 인간 이후의 존재, 후인간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자 캐서린 헤일스는 물질보다는 정보를 중시하고, 의식을 부수적 현상으로 여기고, 몸 자체를 보철물이라고 보며, 인간과 지적 기계가 하나로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후인간의 관점이라고 말한다. 케빈 워릭의 사이보그는 그런 후인간을 직접 창조하려는 첫 시도에서 성공을 거둔 사례에 해당한다. 인간의 윤리체계는 인간의 몸과 거기에 담겨 있는 이성과 감정을 전제로 구축된 것이므로, 생물학적 몸과 컴퓨터와 기계가 융합되고 뇌의 정보가 컴퓨터로 옮겨질 수 있는 상황에는 대처하기가 어렵다. 윤리체계는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앞을 내다보고 미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케빈 워릭의 실험은 많은 후속 연구가 진행되도록 자극했다. 2000년 미국 듀크대의 미구엘 니코렐리스는 원숭이의 뇌에 미세한 전극들을 이식했다. 전극은 원숭이의 움직이려는 의도를 뉴런의 전기 신호를 통해 포착하여 컴퓨터로 보냈고, 컴퓨터는 그 신호에 따라 로봇팔을 움직여서 물건을 쥐는 움직임을 보였다. 니코렐리스는 최근 연구에서 원숭이가 실험을 할수록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점점 더 익숙해짐으로써, 나중에는 아예 팔을 움직이지 않은 채 기계를 작동할 정도가 됐다고 했다. 그것은 뇌가 기계와의 융합을 무리 없이 다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게다가 그는 뇌에 이식한 칩을 통해 환자의 몸에 이식한 로봇팔을 움직이는 실험에도 성공한 바 있다.

아직 칩을 뇌에 이식하는 수술은 위험성이 있으므로 연구자들은 뇌파를 이용해 컴퓨터나 장치를 작동하는 쪽으로도 연구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레이너 괴벨은 뇌파 신호를 이용해 탁구 게임을 하는 장치를 개발했으며, 거꾸로 뇌파 게임을 이용해 마인드 컨트롤 장치를 개발하려는 사람도 있다. 특정한 뇌파를 유지할 때 게임이 잘되도록 함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뇌파는 뇌의 전반적인 활동의 산물이므로 신경 신호에 비하면 잡음이 많고 정확하지 못하다. 그리고 칩 이식 실험을 접하고 나니 왠지 뇌파 실험은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 듯하다.

 

동물복제 양 ‘돌리’ vs 인간복제 양 ‘폴리’

소설과 영화 속에만 존재하던 인간복제는 ‘괴짜 연구자’들의 거짓말과 사기논문 충격에도 점차 현실로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인간복제는 그 가능성을 열기도 전에 생명윤리의 덫에 걸렸다. 이제 과학자들의 관심은 번식용 복제의 지뢰밭을 피해 질병 치료용 복제로 향하고 있는데…. 과연 과학은 복제를 통한 ‘인류 개량’에 성공할 것인가. 최초의 성체 체세포 복제를 통해 탄생한 복제양 돌리와 그를 탄생시킨 이언 윌머트 박사. 인간유전자를 가진 복제양 폴리 자매(아래)는 그 과학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돌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복제는 과학소설 작가들이 자주 써먹는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이다. 인류의 미래상과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복제를 다룬 소설은 역사가 꽤 깊고, 꾸준히 인기를 누려왔다. 게다가 영화로 각색하기에 아주 적당하다. 최근 들어서는 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동아일보사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주관하는 과학기술 문예 공모전에서 3회에 이르기까지 예선 심사를 해보니,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복제를 다룬 소설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상상에서 현실로

복제를 소재로 한 소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멋진 신세계’일 것이다. 복제 인간을 인공 배양으로 대량 생산하면서, 성장 조건을 조절해 누가 엘리트가 되고 누가 하층 계급이 될지를 결정하는 전체주의 미래 사회를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에 그려진 복제 인간의 미래상은 복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복제는 획일적이고 예속적이며 자유의지가 결핍되고 자각하면 불행에 빠지는 존재를 만드는 기술’이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헉슬리는 분자생물학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의 사람이기에 ‘멋진 신세계’에서 일란성 쌍둥이가 생기는 방법을 이용해 복제 인간을 만든다고 설정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긴 수정란이 분열해 세포 수가 늘어나면 세포별로 분리하고, 그 세포들이 분열하면 다시 분리하는 식으로 수십명, 많으면 만명이 넘는 쌍둥이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 뒤 DNA의 구조가 밝혀지고 분자생물학 연구가 급격히 진전되자 쌍둥이의 수를 늘리는 식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복제인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다. 다 자란 인간의 몸에 있는 세포를 하나 떼어내어 똑같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동양에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개념이다. ‘서유기’의 손오공은 머리카락 모근 세포를 이용해 끝없이 분신들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1970년대 초 데이비드 로빅은 그 개념을 토대로 ‘복제인간’을 펴냈다. 책의 내용은 허구였지만, 로빅은 그것이 ‘논픽션’이라고 주장했다. 로빅은 비밀리에 자신의 클론을 복제하고 싶어 하는 어느 부유한 인물을 위해 전문가를 섭외하고 해외에 비밀 연구소를 마련하는 한편, 복제 아기를 낳을 대리모를 구하는 일을 했다는 것. 복제 인간이 탄생했다고 말하는 그의 책은 큰 화제가 됐고, 인간복제를 둘러싼 갖가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과학계가 한결같이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내용이 허구임이 드러남에 따라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그 무렵에 과학계는 ‘인간복제가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로빅이 말한 방법을 써서 복제하는 데 성공한 동물은 개구리밖에 없었다. 그것도 올챙이의 몸에서 떼어낸 세포로 복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개구리의 몸에서 떼어낸 세포를 썼을 때에는 실패했다.

그 뒤로 여러 연구자가 복제 실험에 뛰어들었지만 실패만 거듭했다. 결국 과학자들은 성체 동물을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그 무렵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양을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복제 양 돌리는 그렇게 의외의 순간에 세상에 등장하면서 복제를 상상에서 현실로 바꿔놓았다.

    

동물복제의 기린아 ‘돌리’

체세포 복제로 탄생한 개 스너피. 당시 황우석 교수(가운데)의 연구에는 미국의 제럴드 새튼 교수(왼쪽)도 자문위원으로 참가했다.

20세기 초에 독일의 한스 슈페만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그는 어린 아들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으로 도롱뇽의 초기 배아를 묶어서 둘로 나눴다. 나뉜 반쪽 배아에는 둘 다 세포핵이 들어 있었고 잘 자라서 정상적인 도롱뇽이 됐다. 인위적으로 쌍둥이를 만든 것이다. 또 슈페만은 세포핵이 한쪽에만 있고 반대쪽에는 세포질만 있도록 배아 중간을 느슨하게 묶은 뒤, 세포핵이 좀 자라도록 기다렸다가 그것을 반대쪽 세포질로 밀어넣었다. 핵이 없는 상태의 세포질은 변화가 없었으므로 사실상 좀더 분화한 핵을 수정란의 세포질로 이식한 것과 같았다. 그 배아는 정상적으로 자라났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슈페만은 당시 실험 기술로는 불가능한 환상적인 실험을 고안했다. 난자의 핵을 빼낸 뒤 완전히 자란 성체의 세포핵을 거기에 넣는다는 것이었다. 그 난자는 정상적으로 발달할까?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뒤인 1952년 미국의 브릭스와 킹이 그 실험에 도전했다. 그들은 표범개구리의 난자에 있던 핵을 없앤 뒤, 배아에서 빼낸 핵을 거기에 넣었다. 핵 이식 실험은 성공했다. 하지만 배아까지만이었다. 그들은 성체를 복제하지 못했다. 수정란은 배아로 자라고 배아는 새끼로, 새끼는 성체로 자란다. 그러면서 몸의 세포들은 점점 더 분화해 특정한 일만 전담하게 된다. 따라서 배아세포에 비해 성체세포는 발달 잠재력이 훨씬 떨어진다.

10년 뒤 영국의 존 거든이 그 실험을 이어받았다. 그는 발톱개구리 올챙이의 창자에서 꺼낸 세포핵을 이식했다. 실험은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률이 낮았으며, 다 자란 개구리의 세포핵을 이식했을 때에는 실패를 거듭했다. 즉 그의 성공도 절반에 그친 셈이다.

그 뒤로 오랫동안 복제 연구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포유류의 복제 실험에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9년 제네바 대학의 카를 일멘제가 생쥐의 배아 세포핵을 이식해서 세 마리를 복제했다고 발표했다. 드디어 포유류 복제에 성공했다니, 과학자들은 몹시 흥분했다. 여러 연구자가 그의 연구를 재현하고자 달려들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만 거듭했다. 그를 초청해 실험 기법을 전수받으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멘제는 실험하는 광경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연구자들은 점점 회의적이 되어갔다. 과학은 재현성이 생명이다. 다른 연구자가 재현하지 못한다면, 그저 우연히 얻어진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멘제의 연구 결과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이윽고 학자들은 포유류 복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덴마크 출신의 스틴 윌러드슨이었다. 순수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은 생쥐를 연구했지만, 가축을 연구하는 응용과학 분야의 연구자였던 윌러드슨은 양으로 실험을 했다. 그는 초기 배아의 핵을 난자에 이식한 뒤 대리모에 착상시켰다. 두 마리는 사산됐고 한 마리가 살아서 태어났다. 응용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기에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상 핵 이식으로 태어난 최초의 포유동물이었다. 몇 년 뒤 윌러드슨과 미국의 다른 연구진은 각각 소의 배아 복제에도 성공했다.

 

인간복제의 허상

배아세포 핵 이식에 성공했으니 이제 성체세포 핵 이식이라는 과제가 남았다. 그 일은 영국 로슬린 연구소의 이언 윌머트와 키스 캠벨이 해냈다. 그들은 초기 배아가 아니라 배양 접시에서 이미 분화를 시작한 9일 된 배아의 핵을 이식해 1995년 메건과 모랙이라는 양 두 마리를 탄생시켰다. 그것은 이미 분화한 세포를 분화하기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복제 기술의 진정한 발전은 이때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이언 윌머트는 더 나아가 성체를 복제하기로 했다. 연구진은 어느 양에게서 떼어내 냉동해둔 젖샘세포를 복제하기로 했다. 그 양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들은 그 세포의 핵을 난자에 이식해 대리모 양에게 착상시켰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복제 양이 그 유명한 ‘돌리’다.

돌리는 성체세포에서 복제한 최초의 양이었다. 그것은 동물복제의 장벽이 사실상 모두 제거됐음을 의미했다. 그 뒤로 그의 실험 방법을 따라 동물을 복제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됐다. 생쥐, 소, 고양이, 말, 돼지, 개 등. 이제 어떤 동물도 복제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인간도 복제할 수 있지 않을까?

   

1996년 복제 양 돌리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전세계가 들썩거린 것은 바로 그 질문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눈앞에 닥쳤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세계 각국에서 인간복제를 주제로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인간복제는 가능한가? 복제 인간은 인간의 존재 의미, 가족 관계, 법적 지위, 사회 관계 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것은 아닐까? 우수한 혈통만 골라 복제하는 통제 사회가 출현하지는 않을까? 병들었을 때 장기를 교체할 예비용 복제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 때, 아예 인간을 복제하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리처드 시드나 세베리노 안티노리 같은 괴짜 의사들이었다. 게다가 외계인을 믿는 라엘리안이라는 종교단체도 가세했다. 더 나아가 그 단체는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복제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주장까지 했다.

인간복제가 과연 가능할까? 다른 동물들도 속속 복제되고 있으니 인간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영장류를 복제할 수 있다면 인간복제도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2000년 미국의 제럴드 새튼은 붉은털 원숭이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핵 이식 기술이 아니라 초기 배아를 세포별로 분리해 쌍둥이를 만드는 방법을 쓴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핵 이식을 통한 원숭이 복제를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만 거듭했을 뿐이다. 핵 이식으로 배아를 만들어서 대리모에 이식했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연구자들은 배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분열 때 염색체 분리를 담당하는 단백질이 없어 분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난자의 핵과 함께 단백질까지 제거한 것이다. 그 결과 새튼은 2003년 원숭이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어조의 논문을 썼다. 하지만 그 뒤 황우석 연구진의 도움을 받아 2004년에 성체세포의 핵을 이식해 배아 단계까지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배아를 착상시켰지만 유산되고 말았다.

따라서 원숭이 체세포 핵 이식을 통해 배아까지 키우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 배아는? 황우석 교수 연구진이 체세포 핵 이식을 통해 인간 배아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지만, 논문 조작이 드러나면서 철회되고 말았다. 따라서 성인을 복제할 수 있는가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생명윤리 규정과 지침이 강화되면서 인간복제 실험이 이뤄질 여지도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복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구용이나 치료용으로 배아 단계까지 복제하는 실험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허용되는 추세에 있다. 영국은 두 연구진에게 이미 당뇨병 치료와 연구 목적의 배아 복제를 허용했다.

 

복제인간도 존엄하다. 그러나…

돌리의 탄생은 새로운 과학적 가능성을 열었을 뿐 아니라, 생명윤리 논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사실 돌리 탄생 직후에 인간복제 가능성을 놓고 떠들썩하게 벌어진 논쟁들 중에는 1970년대에 최초의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을 때 벌어진 논쟁의 재탕인 것도 많다. 당시에도 인간복제가 임박했다는 주장이 난무했고, 시험관 아기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또 인간의 몸 바깥에서 수정되고 자라는 배아의 지위를 놓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그 배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당시의 논쟁은 돌리 이후에 벌어진 논쟁과 상황이 달랐다. 돌리 탄생 직후에 벌어진 논쟁의 대상인 복제 인간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지만, 당시 논쟁의 대상이던 시험관 아기는 논쟁이 벌어지든 말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귀여운 아기가 태어나자 논쟁은 김이 빠지고 말았다. 태어난 아기를 앞에 놓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다거나, 가족관계에 혼란을 가져온다거나,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진 것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로 향한 출발점이 된다거나 하는 말을 한다는 것이 멋쩍어졌다.

자연적인 성(性)관계로 아기를 갖든, 인공 수정이나 시험관 아기 같은 보조 생식 수단을 써서 아기를 갖든 다를 바 없었다. 그저 아기를 원하는 부모가 사랑하는 아기를 가진 것일 뿐이었다. 시험관 아기는 친자 관계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부정적 측면보다는 불임 부부에게 행복을 안겨준다는 긍정적 측면이 더 강했다.

돌리 탄생 직후 벌어진 논쟁에는 충격과 두려움 같은 감정적인 요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를 복제한 병사들로 군대를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는 식의 터무니없는 주장도 나왔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한 형태였다. 인간의 형성에 유전자와 환경이 둘 다 관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외의 상황이 닥치면 그런 주장이 고개를 든다. 게다가 시험관 아기든 복제된 아기든 태어난 아기는 고유의 인격을 지닌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실도 망각하곤 한다. ‘멋진 신세계’의 영향 탓인지, 복제인간을 다룬 영화들 탓인지, 복제 인간은 자유의지가 결핍된 로봇 같은 존재라는 등식이 맨 먼저 떠오른다.

시간이 흐르고 논쟁이 심화되면서 그런 어설픈 주장들은 사라지고,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들이 펼쳐졌다. 그러면서 번식용 복제와 치료용 복제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번식용 복제는 말 그대로 새로운 개체를 탄생시킬 목적으로 복제를 시도하는 것이며, 치료용 복제는 유전병 같은 각종 난치병을 연구하거나 치료하기 위한 복제를 말한다.

   

복제로 태어난 아기도 존엄하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번식용 복제는 리처드 시드처럼 공개적으로 인간을 복제하겠다고 나선 사람들 외에는 대부분 반대한다. 가장 큰 이유는 복제 기술의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복제가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복제를 한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다수 국가가 번식용 복제를 금지하고 있고, 인간을 복제하려면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번식용 복제라는 주제는 좀더 시간이 흐른 뒤에야 활발하게 논의될 듯하다. 물론 시드 같은 전문가들이 규제가 없는 외딴 섬에서 어느 날 갑자기 복제 인간을 탄생시킨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번식용 복제와 달리 치료용 복제를 놓고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된다. 치료용 복제에서는 핵 이식을 통해 만든 배아를 배반포 단계까지만 배양한 뒤 파괴해 줄기세포를 얻어, 이를 치료용이나 연구용으로 쓰는 것이다. 치료용 복제는 척추 마비나 유전병처럼 현재 의학 기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한다.

 

인간 유전자 가진 복제 양

하지만 줄기세포를 얻으려면 배아를 파괴해야 한다는 점에서 생명윤리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치료용 복제를 허용해야 한다는 쪽은 배아는 인간이 아니며, 배아를 파괴해 줄기세포로 인간을 치료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반면 치료용 복제를 금지해야 한다는 쪽은 배아도 인간으로 봐야 하며, 따라서 인간을 치료하기 위해 배아를 파괴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말한다. 치료용 복제를 반대하는 쪽은 배아를 파괴하지 않으므로 생명윤리 문제가 아예 없는 성체줄기 세포를 연구하자고 주장하는 반면, 허용하자는 쪽은 배아 줄기세포의 잠재력이 더 크다는 점을 역설한다.

장기 이식용 복제인간들이 등장하는 최근 영화 ‘아일랜드’에서처럼 번식용 복제는 여전히 영화의 단골 소재이지만, 복제와 생명윤리 논쟁의 초점은 치료용 복제와 줄기세포 쪽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돌리라는 동물복제로 시작된 이야기는 자의식을 지닌 새로운 인간을 복제할 것이냐 하는 쪽으로 잠시 흘렀다가, 인간 자체를 복제하는 것과 좀 거리가 먼 세포나 조직이나 기관을 만들어서 인간을 치료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셈이다. 어찌 보면 복제동물인 돌리와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돌리 자체가 바로 그렇게 곁다리로 흐른 동떨어진 존재였다. 돌리를 탄생시킨 로슬린 연구소는 생쥐를 복제하려고 헛수고를 거듭한 연구자들이 일하던 곳과 달리 순수과학을 연구하는 곳이 아니었다. 수의사와 가축 연구자들이 일하는 응용과학 연구소였다. 다시 말해 연구소의 주된 목적은 생명 현상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이었다.

로슬린 연구소가 돌리를 복제한 이유는 체세포 핵 이식 기술을 얻기 위해서였다. 체세포를 배양할 때 인간의 유전자를 주입한 뒤 그 변형된 체세포로 동물을 복제하면, 인간의 호르몬이나 단백질을 생산하는 동물을 얻을 수 있다. 즉 돌리는 원래 그런 유용한 동물을 만들기 위한 중간 단계의 성과물이었다. 로슬린 연구소는 그렇게 갈고 닦은 기술로 돌리가 태어난 다음해에 모든 세포에 인간의 유전자가 들어 있는 폴리라는 양을 복제했다. 따라서 치료용 복제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 돌리가 아니라 폴리라야 했다.

하지만 세상은 돌리가 세계 최초의 체세포 복제 양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인간은 실용성이나 유용성보다는 최초라는 쪽에 더 끌리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 뒤에 인간복제 분야에서 ‘최초’라는 영예를 얻기 위해 벌어진 소란스러웠던 일들의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쳐 가야 할 징검다리에 불과했던 돌리가 최초라는 수식어와 함께 세상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면서 ‘거만한 양’이 되고 로슬린 연구소를 세계에 알렸듯이, 최초라는 영예를 얻은 사람은 그에 걸맞은 돈과 권력과 명성을 얻는다. 이야기의 흐름대로 폴리가 주인공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인간의 숨겨진 식스센스, 놀라운 실체를 드러내다!

인간 페로몬의 발견은 그동안 무시되어온 화학적 의사소통에 관심을 갖게 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화학적 의사소통을 제대로 이해하면 의학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 가령 ‘전자 코’ 같은 것을 개발한다면, 환자의 소변이나 숨에 섞인 물질을 감지해 암 같은 질병을 쉽게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통신물질로 알려진 페로몬의 실체를 연구하고 있다(왼쪽). 페로몬을 통해 여성의 월경주기가 비슷해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의사소통 수단은 여러 가지다. 짚신벌레나 아메바 같은 미생물은 화학물질을 이용한다. 식물은 다양한 화학물질을 통해 서로 의사소통한다. 복잡한 형태의 감각기관이 발달한 동물은 그 감각을 이용해 의사를 전달한다. 눈이 발달한 동물은 주로 시각을, 귀가 발달한 동물은 주로 청각을 이용한다. 감각에는 우리가 오감이라고 부르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기, 자기, 진동을 느끼는 동물도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감각을 활용하는 동물도 있을 것이다.

 

기숙사 여학생들의 월경주기 일치

인간은 주로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언어는 대체로 시각과 청각에 의존한다. 그 때문에 후각은 상당히 퇴화했다. 음식 냄새, 뭔가가 타는 냄새, 유독한 냄새를 맡을 때처럼 생존이나 위생과 관련된 상황에선 후각을 많이 쓰지만, 의사소통의 도구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우리는 필요할 때 눈짓이나 혀를 차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으나 의도적으로 어떤 냄새를 풍겨서 의사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시각과 청각에 너무 의존하는 탓에 후각의 진짜 기능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아닐까? 동물이 냄새나 페로몬(체외분비성 물질)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듯이, 우리에게도 후각이나 화학 감각이 중요한 의사소통 도구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화학물질이 콧속으로 들어와서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다른 동물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냄새나 페로몬에 반응하듯이 인간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떤 통신물질에 반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 물질의 발신자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전달된 것이다.

1971년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생이던 마사 매클린톡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여학생들의 월경주기가 동조현상을 보인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자료를 수집해보니 처음에는 제각기 다르던 생리일이 7개월이 지나자 33% 더 가까워졌다. 같은 방을 쓰지 않는 여성들에게선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와 딸, 자매, 레즈비언 커플 등 함께 생활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속설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녀는 그런 동조현상을 친구들이 서로 접촉하면서 페로몬이 전달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 연구 결과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페로몬은 개미나 나방 같은 곤충이나, 사향고향이 같은 동물에게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에게 페로몬이 있다니. 페로몬 하면 으레 성욕을 부추기는 미약(媚藥)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사기를 쳐서 한몫 볼 좋은 기회가 왔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페로몬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페로몬에 영향을 받는다면 성(性) 페로몬에도 영향을 받지 말라는 법이 있냐고 말이다. 아무튼 월경주기 동조현상은 그 뒤로도 가끔 연구 결과를 통해 알려졌고, 통계적으로 그 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논문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논문도 있다. 전자 쪽이 좀더 많은 편이다.

 

‘화학통신물질’

페로몬은 동물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쓰이는 화학물질을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물의 체외로 배출되어 같은 종(種)의 개체에게 전달되어 행동이나 발달 측면에서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는 화학물질이다. 기능에 따라 성 페로몬, 집합 페로몬, 길잡이 페로몬으로 세분된다.

페로몬은 같은 종의 개체 사이에 의사를 전달하는 물질이기에 믿을 수 있다. 또 발신자와 수신자 양쪽에게 혜택을 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페로몬이 주는 정보가 믿을 수 없고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수신자는 그것을 무시할 것이고, 발신자도 굳이 힘들여 그런 페로몬을 계속 분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하고 상호 혜택을 주는 페로몬만이 진화 과정에서 존속할 수 있다.

   

반면에 포식자와 먹이처럼 서로 다른 종 사이에는 가짜 신호가 전달될 수 있다. 포식자는 먹이의 암컷이 분비하는 페로몬과 똑같은 물질을 발산, 먹이 수컷들을 유인해 잡아먹을 수 있다. 거꾸로 먹이가 엉뚱한 페로몬을 분비해 포식자를 속일 수도 있다. 이렇게 동물들 사이에는 다양한 화학적 신호들이 오가며, 그렇게 의사소통의 도구로 쓰이는 화학물질들을 통틀어 화학통신물질이라고 한다. 페로몬은 화학통신물질의 일종이다.

인간은 시각과 청각에 주로 의지하기에 의식하지 못하지만, 동물은 이런 통신물질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다. 동물은 이를 통해 가족과 동료와 적을 식별하고, 자신의 세력권을 설정하고, 먹이와 짝을 유인하고, 적을 피하기도 한다. 인간은 그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며, 그다지 관심도 없는 편이었다. 사실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길이가 얼마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지만, 냄새가 얼마나 강하고 어떤 종류라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생물이 시각이나 청각을 갖게 된 것은 후각이나 화학감각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지구에 먼저 출현한 미생물은 화학적 자극을 감지해 먹이를 찾고 위험을 피했다. 그러니 진화의 정점에 섰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후각이나 화학감각보다 시각이나 청각을 우위에 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인간의 후각이 크게 퇴화했다는 것도 그런 관점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페로몬을 감지하는 기관이라고 알려진 보습코기관이 성인에게서는 흔적만 남아 있다는 것도 그렇다.

보습코기관은 대다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의 후각계에 딸린 감각기관의 일종이다. 대개는 코사이막 아래쪽이나 입천장에 있다. 보습코기관에는 페로몬 수용체가 있다. 생쥐나 햄스터의 암컷이 발산하는 화학물질은 수컷의 보습코기관을 자극해 수컷의 남성 호르몬 농도에 변화를 일으킨다. 보습코기관은 페로몬 외에 다양한 화학적 신호에도 반응한다.

 

인간도 페로몬 분비

사람의 보습코기관은 태아 때는 있으나 태어난 뒤 퇴화한다. 하지만 성인에게 보습코기관이 있는지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현재의 해부학적 연구 결과들은 성인의 보습코기관은 있다고 해도 흔적만 있을 뿐 ‘기관’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기능을 못한다고 말해준다. 그 흔적은 뇌와 신경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다.

분자유전학적 연구 결과도 같은 결론을 시사하는 듯하다. 연구자들은 몇몇 포유류 종에서 페로몬 수용체 유전자라고 할 만한 유전자들을 발견했다. 인간도 비슷한 유전자들을 지니고 있지만,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유전자를 조사한 것은 아니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비슷한 예로 인간은 후각 수용체 유전자의 약 70%가 제 기능을 못하지만 필요한 냄새를 맡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보습코기관이 페로몬을 검출하는 기관이라면, 그것이 퇴화했으니 인간은 페로몬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월경주기 동조현상에서처럼 인간 사이에 화학적 의사 전달이 이뤄진다는 증거와 모순되는 듯하다.

따라서 인간이 보습코기관이 아닌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 페로몬을 감지한다고 봐야 모순이 해결된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토끼 새끼가 페로몬에 반응해 어미의 젖꼭지를 찾는 것이나 돼지 암컷이 수컷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것은 진짜 후각기관을 통해 이뤄진다. 따라서 인간도 진짜 후각기관을 통해 페로몬을 감지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제6의 감각기관이 있든지.

대다수 동물이 페로몬을 다방면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인간만이 그 능력을 아예 잃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월경주기 동조현상을 연구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98년 매클린톡은 제자와 함께 인간 페로몬이 있음을 시사하는 더욱 구체적인 실험 결과를 내놓았다. 그들은 냄새로는 검출할 수 없지만, 배란 시기에 영향을 끼치는 페로몬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연구진은 월경주기가 규칙적인 20∼35세 여성 29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그들은 9명을 골라 깨끗이 씻도록 한 다음 겨드랑이에 패드를 붙였다. 패드는 적어도 8시간 이상 붙이고 있도록 했다. 그런 식으로 월경주기의 단계별로 시료를 채취하면, 거기에 알코올을 섞어서 냄새를 없앤 뒤 나머지 20명의 코 밑에 그 혼합물을 발랐다.

   

아시아 코끼리의 암컷은 페로몬을 분비해 수컷을 유혹한다.

그러자 상당수의 여성에게서 배란주기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배란 이전의 난포기에 있을 때 채취한 겨드랑이 분비물에 노출됐을 때는 월경주기가 짧아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즉 예정 배란일보다 더 일찍 배란이 됐다. 반면에 배란기에 있을 때 채취한 분비물을 발랐을 때에는 배란일이 늦어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여성이 페로몬을 분비한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았다. 그보다 앞서 매클린톡 연구진은 쥐의 암컷이 다른 암컷들의 임신을 억제하는 페로몬과 촉진하는 페로몬을 분비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들은 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여성도 두 종류의 페로몬을 분비한다고 추론했다. 하나는 배란 전에 만들어지는 것으로 배란 주기를 짧게 하며, 다른 하나는 배란 때 생산되는 것으로 배란 주기를 길게 한다는 것이다.

공포와 불안도 전염?

이 실험으로 여성이 페로몬을 분비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 페로몬이 어떤 것인지는 앞으로 밝혀낼 과제이다. 남성도 여성의 월경주기에 영향을 끼치는 페로몬을 분비할까? 그것도 앞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배란주기를 일치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쥐들은 같은 시기에 새끼를 낳고 키우는 편이 유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태어난 새끼들이 먼저 태어난 다른 암컷의 새끼들에게 밀려나 죽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 해석을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진화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조상들이 살던 선사시대에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먼 옛날에 여성들이 동시에 배란을 함으로써 유전자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이론이 있긴 하다. 한 남성이 모든 여성을 임신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른 이론도 있을 수 있다. 인간 페로몬 연구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동물처럼 페로몬이 남녀의 짝 선택에도 영향을 끼칠까. 영향을 끼친다면 어느 정도일까. 아직 대답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매클린톡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짝짓기 쪽으로는 페로몬에 별 영향을 안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연애 상대를 고를 때는 온갖 요인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은 대개 문화와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들에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페로몬의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고 단정짓는 것도 섣부르다. 배란기나 겁에 질렸을 때 인간의 체취가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런 체취 변화가 일어날 때 페로몬이 분비되지 않을까. 가령 공포 페로몬, 불안 페로몬 같은 것들이 있어서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퍼뜨리는 데 관여하지 않을까.

매클린톡 연구진은 후속 연구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기분을 변화시키는 화학물질이 있음을 밝혀내고 그것들이 페로몬일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토끼 새끼가 페로몬으로 어미의 젖꼭지를 찾듯이, 혹시 인간의 아기도 엄마의 젖가슴과 페로몬으로 맺어져 있는 건 아닐까. 매클린톡은 인간 페로몬의 활용 가능성도 제시한다. 페로몬은 월경주기의 길이를 조절하고 배란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더 자연스러운 불임 치료법이나 피임법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 코끼리의 경우

매클린톡의 실험이 인간 페로몬의 존재를 증명했다면, 코끼리를 대상으로 실험한 라스무센 연구진은 페로몬의 보편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페로몬이 처음 분리된 것은 1956년이다. 독일의 부테난트 연구진이 누에나방을 대상으로 무려 20년 동안 고생한 끝에 성공했다. 그들은 누에나방 암컷의 배마디에 있는 특정한 분비샘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그렇게 무려 50만마리의 분비샘을 모아서 혼합물을 추출했다. 그 혼합물이 조금만 있어도 나방 수컷은 미친 듯이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춤을 추었다. 페로몬이 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연구진은 그 혼합물에서 상관없는 물질들을 하나하나 제거한 끝에 마침내 순수한 페로몬을 얻었다. 그들은 그것을 ‘봄비콜’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성 유인물질이었다. 미국의 의사이자 수필가인 루이스 토머스는 나방 암컷 한 마리의 몸에 든 봄비콜을 한 번에 확 뿌리면 이론상 수컷 1조마리가 즉시 몰려들 것이라고 말했다.

   

곤충은 페로몬에 노출됐을 때 틀에 박힌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므로 페로몬을 찾아내기가 쉽다. 하지만 포유류는 다르다. 포유류의 행동은 페로몬과 무관한 많은 요인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어떤 혼합물에 노출시켰을 때의 반응을 보고 거기에 페로몬이 있는지 여부를 알기 어려울 때도 많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미국 오레곤 과학기술대학원의 라스무센 연구진은 아시아 코끼리를 대상으로 실험했다. 그들은 코끼리 암컷의 오줌 약 4000ℓ를 분석한 끝에 암컷이 배란 직전에 페로몬을 분비한다는 것을 알았다.

수컷은 암컷의 오줌에 코를 담가 냄새를 맡곤 하는데, 거기에 페로몬이 섞여 있으면 윗입술을 말아올리는 이른바 ‘플레멘 반응’을 보인다. 페로몬 농도가 진할수록 플레멘 반응도 더 잦아진다. 그 페로몬은 수컷에게 암컷이 짝짓기를 할 준비가 됐음을 알린다.

라스무센 연구진은 1996년 그 오줌을 분석해 마침내 코끼리 성 페로몬의 정체를 밝혀냈다. 놀랍게도 그 물질은 앞서 약 140종의 나방 암컷에게서 발견된 성 페로몬과 같았다. 엄청난 몸집의 코끼리와 작디작은 나방이 똑같은 페로몬으로 수컷을 유혹한 것이다.

그렇다고 나방 암컷의 페로몬에 코끼리 수컷이 발정한다거나 코끼리의 페로몬에 나방 수컷들이 떼지어 몰려든다는 말은 아니다. 나방의 페로몬은 코끼리에게 기별도 안 가며, 나방은 종별로 다양한 페로몬들을 섞어 ‘칵테일’을 만들어 쓰기 때문에 코끼리의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는다.

 

발정기의 달콤한 냄새

트리스트램 와이어트는 ‘페로몬과 동물 행동’이라는 책에서 코끼리와 나방의 성 페로몬이 똑같다는 발견이 아주 흥미롭다고 말한다. 그것은 포유류와 곤충뿐 아니라 동물 전반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해준다는 것이다.

첫째는 페로몬이 동물계에 아주 흔하며, 다른 신호들보다 페로몬이 더 많은 상호작용을 매개한다는 의미다. 둘째는 똑같은 물질을 신호로 사용하는 것은 서로 먼 종들 사이에 수렴 진화가 이뤄졌다는 의미다. 모든 동물이 공통 조상에서 유래한 동일한 기본적인 효소 경로를 활용하기 때문에 그런 우연의 일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곤충처럼 포유동물도 작은 분자를 성적 신호를 전달하는 페로몬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포유류의 페로몬은 곤충의 페로몬보다 분리하기가 더 어렵지만, 그렇다고 더 복합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라스무센 연구진은 아시아 코끼리 수컷도 페로몬을 분비하는지 살펴보았다. 발정기에 어른 수컷은 관자놀이샘, 오줌, 숨을 통해 프론탈린이라는 물질이 포함된 지독한 냄새가 나는 화합물을 분비한다. 대조적으로 이제 10대에 도달한 수컷은 발정기에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코끼리가 성숙할수록 프론탈린 농도는 짙어진다. 아시아 코끼리는 성별, 발달 단계, 동료의 생리적 상태에 따라 프론탈린 농도에 대한 반응이 달라진다. 프론탈린은 페로몬의 기능을 한다. 어른 수컷은 대개 프론탈린에 반응하지 않는다. 반면에 덜 자란 수컷은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반응을 보인다.

암컷의 반응은 호르몬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배란 직전 단계에서 가장 강한 반응을 보인다. 프론탈린도 곤충에게서 이미 발견된 페로몬이다. 따라서 코끼리 수컷도 곤충과 똑같은 페로몬을 이용하는 셈이다. 이런 페로몬들을 이용해 코끼리의 짝짓기를 유도한다면 멸종 위기에 있는 코끼리의 수를 늘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포유류의 페로몬은 어떤 기능을 할까. 세력권을 표시한다거나, 번식을 돕는다거나, 어미와 새끼나 동료 같은 개체 식별에 쓰인다거나 하는 다양한 가설이 있다. 하지만 곤충의 페로몬 연구와 달리, 포유류 페로몬은 연구하기가 어렵고 이제 시작 단계이다. 인간 페로몬 연구는 더 미비하다. 매클린톡의 실험이 보여줬듯이 인간의 겨드랑이는 다른 포유류의 냄새 분비샘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듯하다. 다른 부위들도 그럴까?

 

도둑맞은 미래

인간 페로몬의 발견은 그동안 무시되어온 화학적 의사소통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화학적 의사소통을 제대로 이해하면 의학 등에 활용할 수 있다. 가령 전자 코 같은 것을 개발한다면, 환자의 소변이나 숨에 섞인 물질을 감지해 암 같은 질병을 쉽게 진단할 수도 있다.

더 넓게 보면 그것은 인간이 서로, 그리고 다른 동물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새삼 일깨워준다. 코끼리와 나방이 같은 페로몬으로 짝을 유혹한다는 점에서 한통속임을 보여주듯이, 페로몬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한통속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눈과 귀로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 즉 화학적 세계가 우리 주위에 펼쳐져 있다는 것도 말해준다.

테오 콜본은 ‘도둑맞은 미래’에서 화학적 세계가 우리의 미래를 파괴할 수 있다고 했다. 환경 호르몬이라고 하는 내분비계 교란물질이 인간의 정자 수 감소, 양서류 멸종을 불러온다고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또 다른 종류의 화학적 의사전달이다

 

노예 없인 못 살아!” 개미 사회의 냉혹한 ‘카스트 제도’

어린 시절 ‘개미와 베짱이’를 읽은 사람이라면 개미가 남들이 놀 때 열심히 일해 겨울을 나는 성실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미 중에는 인간처럼 노예를 부리며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베짱이류도 많다. 노예를 얻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 개미와 인간의 노예제는 얼마나 닮은꼴일까. 주인 개미를 대신해 먹이활동을 하는 불개미(위)와 상대방 군체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싸움을 하는 여왕개미들.

개미학자 최재천 교수의 책 ‘개미 제국의 발견’에는 개미들의 갖가지 흥미로운 행동이 나와 있다. 개미들은 농사를 짓고, 전쟁을 벌이고, 왕권 강화에 골몰하고, 노예를 부리고, 노동 분업도 하고, 과감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등 인간만이 할 법한 다양한 행동을 보여준다. 인간이 자랑하는 인간다운 특징들을 동물이, 그것도 기어다니는 아주 작은 동물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개미가 우화 한 편의 주인공 역할을 맡는 정도라면 봐줄 만하지만, 그 이상 기어오르면 왠지 주제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뤄진 수많은 연구 결과는 개미 사회를 인간 사회의 모형으로 삼을 만하다고 말한다. 개미들은 인간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과학자들은 개미뿐 아니라 벌, 말벌, 흰개미 등 사회성 곤충들에게서 인간 사회에서나 볼 법한 다양한 행동양식을 찾아내고 있다. 아마존 밀림을 뒤지면 인간의 또 다른 행동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개미 종(種)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더 나아가서 인류학자들이 인간 사회의 특징이라고 열거하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윤리적 요소들이 사실은 고도의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좁쌀만한 뇌를 지닌 개미에게서 인간과 유사한 것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자랑할 것이라고는 심심찮게 자기 파괴 성향을 드러내는 ‘고도 지능’과 애매한 의사 전달로 불화를 일으키곤 하는 ‘언어’만 남은 꼴이 아닌가.

그러나 인간과 개미의 유사성은 겉으로만 닮은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사려 깊은 행동과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개미의 행동이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예 제도다.

 

처절한 노예 쟁탈전

개미는 인간의 그것에 못지않은 노예 제도를 발전시켰다. 1975년에 윌슨이 노예제를 택한 개미가 적어도 35종은 될 것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그보다 더 늘어났을 것이다. 노예가 없으면 굶어죽을 정도로 노예제가 필수불가결한 개미 종류가 있는 반면, 노예가 없을 때는 열심히 일하다가 노예를 잡아오면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는 부류도 있다.

노예를 구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남의 개미집을 습격해 애벌레를 강탈해온 뒤 노예로 삼는 종도 있고, 아예 남의 개미집에 들어가서 여왕을 죽이고 대신 여왕 행세를 하는 종도 있다.

미국의 개미학자 하워드 토포프는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개미의 노예획득 과정을 살펴본 바 있다. 사실 개미 실험은 야외에서 관찰하면서 몇 마리 잡아다가 투명한 통에 넣은 뒤 이렇게저렇게 간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유전물질이나 페로몬 같은 미량 화학물질들을 분석하는 과정이 추가된다.

토포프가 살펴본 개미는 아마존개미류와 불개미류다. 아마존개미는 스스로 생계를 꾸릴 능력을 완전히 잃고 노예 노동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노예들이 돌보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다. 노예들은 꿀과 죽은 곤충 같은 먹이를 구해오고, 여왕과 새끼를 돌보며, 집을 청소하고 수선하는 등 생명유지를 위한 모든 활동을 도맡는다. 그래서 아마존개미는 정기적으로 근처의 불개미 집을 습격해 여왕과 일개미들을 내쫓고 번데기들을 강탈해온다.

번데기에서 깨어난 불개미 일꾼들은 주인인 아마존개미를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마존개미의 수가 늘어나서 분가할 필요가 있으면, 다른 곳에 집을 만들고 아마존개미의 여왕과 알, 애벌레, 번데기 등을 정성껏 옮겨주기도 한다.

   

그런데 막 짝짓기를 끝내고 새로 일가(一家)를 창시해야 하는 아마존개미 여왕은 노예를 어떻게 구할까. 토포프는 속이 보이는 투명한 통을 여러 개 준비한 다음, 각 통에 불개미 여왕 한 마리에 일개미와 번데기 15마리씩을 넣었다. 그런 다음 막 짝짓기를 끝낸 아마존개미 여왕을 굴 근처에 풀어놨다. 그러자 아마존개미 여왕은 금세 굴 입구를 찾아내어 들어갔다. 일개미들이 그 무단 침입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으려 했지만, 여왕개미는 무지막지하게 밀쳐내면서 불개미 여왕에게로 향했다. 침입자는 불개미 여왕을 움켜쥐고는 25분 동안 머리, 가슴, 배를 무자비하게 물어뜯었다. 물어뜯으면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체액을 핥아먹었다. 그동안 일개미들은 계속 달려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불개미 여왕이 숨을 거두자 갑자기 상황이 변했다. 불개미 일꾼들은 유순하게 침입자에게 다가가 몸단장을 시키기 시작했다. 침입자를 새 여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토포프는 일개미들이 그렇게 쉽게 굴복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침입자가 불개미 여왕을 살해하면서 체액을 핥아먹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일개미들이 그 체액에 든 화학물질을 감지해 자기 여왕인 줄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토포프 연구진은 불개미 여왕을 얼려 죽인 뒤 해동시켜놓았다. 아마존개미 여왕은 상대가 죽은 줄 모르고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그러면서 체액을 핥았고 결국 일개미들은 그 침입자를 여왕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불개미 여왕을 아예 다른 곳으로 치우자 상황이 달라졌다. 침입한 아마존개미 여왕은 일개미들의 공격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저항하는 노예 개미도 있다

토포프가 연구한 불개미는 한 집에 여러 여왕개미가 살기도 한다. 그래서 토포프는 여왕개미가 여럿 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살펴보기로 했다. 그는 각 통에 여왕개미를 2마리에서 25마리까지 넣고 살펴보았다. 아마존개미 여왕은 침입하여 불개미 여왕 한 마리를 살해했다. 그렇게 일단 여왕의 자리를 획득하자, 서두르지 않고 남은 여왕들을 한 마리씩 찾아내 죽였다. 불개미 여왕을 다 죽이는 데 몇 주가 걸리기도 했다.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개미 여왕 주위에 강한 일개미들이 버티고 있으면 오히려 공격을 받아 죽기도 했다. 아마존개미 침입자는 여왕 자리를 찬탈하고 나면 알을 낳아 자기 자손들과 노예로 이뤄진 군체를 형성한다.

노예 획득이 반드시 이렇게 유혈 정복을 통해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다. 프레드 레이그니어와 에드워드 윌슨은 아세테이트의 일종인 화학물질을 이용해 상대방을 정복하는 불개미류를 발견했다. 그 종은 노예획득을 위한 공격을 하면서 저항하는 개미들에게 화학물질을 뿌린다. 화학물질은 같은 종의 공격자를 더 많이 끌어들이는 기능을 하는 동시에, 저항하는 개미들을 혼란 상태로 몰아넣는 역할을 한다. 원래 아세테이트는 개미들이 경고 신호를 보낼 때 쓰는 아주 강력하고 효과가 오래 가는 ‘불온선전’ 물질이다.

한편 호리가슴개미류에 속한 미국의 한 종은 마치 멀리서 온 친척인 양 숙주로 기생할 종의 군체를 찾아가서는 그냥 눌러앉는다. 남의 나라 여왕 옆에 빌붙어서 그 나라 국민을 제 종인 양 부리는 셈. 아시아와 유럽에 사는 이빨개미류의 한 종도 같은 방식을 쓴다고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종은 진화 과정에서 일개미 계급을 잃었다. 즉 일개미를 낳지 못한다. 일개미가 있어야 유혈 정복에 나설 텐데 그렇지 못하니 빌붙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노예제라고 부르기가 애매할 수도 있다.

 

개미 노예제 진화의 수수께끼

개미의 노예제는 노예가 없어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을 받지 않는 종부터 노예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극단적인 종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개미의 노예제는 어떻게 진화한 것일까. 개미의 노예제는 기생체와 숙주가 상호 작용을 하면서 기생 관계가 유지되는 사회적 기생이다. 개미의 기생 양상은 1909년 이탈리아 개미학자 카를로 에메리가 말한 규칙에 잘 들어맞는 듯하다. 그는 기생하는 개미 종이 숙주가 되는 개미 종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척 관계라고 했다. 실제 개미의 노예제는 주로 가까운 종들 사이에서 일어나며, 그것은 노예제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알려줄 단서가 될 수 있다.

찰스 다윈은 노예제가 단순한 포식 관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어떤 종의 개미가 비슷한 종을 공격해 알이나 애벌레, 번데기를 약탈해서 먹기 위해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일부가 가까스로 먹이 신세를 피해서 깨어났다. 깨어난 일개미들은 갓 깨어난 오리 새끼가 처음 본 사람을 자기 어미인 양 졸졸 따라다니듯, 주위에 있는 여왕개미, 일개미, 알 등을 자기 동족으로 착각하고 열심히 봉사했을 것이다. 그 일개미들의 봉사를 받는 쪽이 그들을 먹이로 먹는 쪽보다 더 강했다면, 포식에서 노예제로 진화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다윈은 생각했다.

   

개미의 노예제가 단순한 포식관계에서 시작했다고 주장한 찰스 다윈.

윌슨은 다른 가설을 제시한다. 먹이보다는 세력권 방어가 노예제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그는 호리가슴개미류의 종들이 자연 상태에 있을 때는 노예 노동에 의존하지 않지만, 다른 군체들을 가까이 몰아넣을수록 큰 군체가 작은 군체를 공격해 여왕과 일개미들을 몰아내거나 죽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다음 공격자들은 번데기를 들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약탈해온 번데기에서 일개미가 깨어났을 때, 같은 종의 개체들이면 살려둔 채 일손을 돕도록 했고, 다른 종의 개체들이면 죽였다. 따라서 사로잡힌 개체들이 공격자와 가까운 종일수록 살아남아 그 군체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윌슨은 미국 오하이오 근처에서만 발견되는 한 호리가슴개미류 종이 막 노예제라는 문턱을 넘어섰다고 추정한다. 그 종은 일개미들은 노예 획득에 알맞게 모습이 약간 변형되어 있고 공격과 싸움에 능숙하다. 다른 종의 군체를 가까이에 놓자 그 종은 공격에 나서서 번데기를 전부 약탈했다. 그 종은 일상적인 일들은 거의 다 포로들에게 맡기고 지낸다.

윌슨은 그 군체에서 노예들을 제거해 봤다. 그러자 게으름을 피우던 일개미들이 즉시 부산하게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어설펐다. 애벌레에게 제때 먹이를 주지 않았고, 청소도 엉망이었다. 군체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일인 죽은 곤충이나 먹이를 가져오는 일조차 제대로 못했다. 먹이가 있어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윌슨은 그들이 굶어죽기 직전에 다시 노예 개미들을 넣어봤다. 그러자 집안일이 제대로 돌아갔고 주인들은 다시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독일의 부싱거는 여왕개미와 굴이 여럿 있는 군체에서 애벌레나 번데기를 이리저리 옮기는 행동이 다른 군체나 종에게까지 확장되면서 노예화가 이뤄졌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최근의 학자들은 DNA를 분석해 진화 과정을 추론함으로써 어느 가설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불안정 체제 vs 유전적 적응

그렇다면 개미의 노예제는 인간의 노예제와 얼마나 비슷할까? 이에 대해 윌슨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강조한다. 개미 사회에서 노예들은 원래 자유생활을 하는 다른 종이며, 인간 사회는 더 이상 노예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예 개미는 사실 가축에 가깝다. 노예에게 번식이 허용되지 않고, 노예의 사회조직이 주인의 것과 대등하거나 우월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말이다.

윌슨은 인간의 노예제는 대다수 사회의 도덕체계에 반하는 불안정한 사회체제인 반면 개미의 노예제는 특정한 종들에게서 나타나는 유전적 적응 양상으로, 그런 적응을 거친 종들이 노예제를 채택하지 않은 종들에 비해 더 성공했는지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개미의 노예제를 토대로 정치적, 도덕적 교훈을 얻으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같은 종의 군체끼리 충돌해 노예를 삼는 사례가 발견됐다. 꿀단지개미는 양 군체의 개체들이 마주보고 쭉 늘어서서 상대의 병력을 가늠한다. 병력 차이가 크면 한쪽이 다른 쪽의 애벌레를 약탈해 노예로 삼기도 한다. 꿀단지개미 군체의 충돌은 유혈 전쟁이 아니라 마치 경기를 벌이는 듯하지만, 아무튼 그들의 행동은 주인과 노예가 같은 종이냐 다른 종이냐가 개미와 인간의 노예제를 구분하는 핵심 요소가 아님을 시사한다. 개미들의 노예 제도가 종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인간의 노예제와 비슷한 제도를 채택한 종도 언젠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윌슨의 생각과 반대로 개미의 노예제 진화 과정을 고스란히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한 사람도 있었다. 소설가이자 사회 비평가인 허버트 웰스다. 그의 저서 ‘타임머신’이 출간된 연도는 1895년. 비록 웰스는 개미의 노예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기 훨씬 이전에 ‘타임머신’을 썼지만 그래도 그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거기에 실린 개미의 노예제 진화 과정을 통해 미래 인간의 노예제를 추론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먼 미래로 간 주인공은 인간이 두 종으로 분화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나는 지상에 사는 연약하고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에 사는 추악하게 생긴 인간이었다. 폐허가 된 옛 도시 건물에서 살아가는 지상 종족을 보면서 인류 문화의 쇠퇴를 안타까워하던 주인공은 나중에 그 지상 종족이 지하 종족의 먹이로 사육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주인공은 지상과 지하 종족이 분화한 과정을 추측해본다. 먼 옛날 지상 종족은 귀족이었고, 지하 종족은 그들의 하인이었을 것이라고. 오랜 진화 과정을 거친 끝에 전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종족으로 퇴보했고, 후자는 햇빛을 못 본 채 세대를 거치면서 지하 생활을 하다 결국 지상에서 살 수 없는 존재가 됐다고 봤다. 지하 종족은 오랜 습성 탓에 지상 종족에게 필요한 옷가지나 물품을 제공했지만, 세월이 더 흐르자 둘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됐다. 먹이 부족에 시달리던 지하 종족이 어느 순간 옛 선조들의 식인 습성을 다시 갖게 된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타임머신’의 주인공이 추측한 미래 인류의 진화 과정은 개미 노예제의 기원 가설을 뒤집은 듯 보인다. 개미 노예제에서 기생체와 숙주는 원래 한 종이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가 우월한 군체가 약한 군체를 공격해 종으로 삼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한쪽은 주인으로, 한쪽은 노예로 진화했다. 그 중에는 아마존개미처럼 극단적으로 분화해 노예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부류도 생겨났다.

그러한 분화는 생물의 상호 의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진화의 막다른 골목이 될 수도 있다. 숙주에 심하게 의존하기에 숙주 종의 개체수가 줄어들거나 숙주가 강력한 방어 수단을 진화시키는 순간 몰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숙주 쪽이 방어 수단을 갖춤으로써 노예화가 용이하지 않게 된 사례들도 있다. 그 방어 수단이 기생체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진화할 가능성은 없을까. ‘타임머신’에서처럼 지상 종족과 지하 종족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은?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멸종한 동물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강력한 살상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자신을 위협하는 포식자를 말살시키고, 이제는 감기 바이러스 같은 또 다른 위협 요인까지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그런 한편으로 기생 관계에서는 이른바 ‘붉은 여왕’ 개념이 적용되는 사례가 많다. 붉은 여왕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말로, 주위가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제자리에 있으려면 계속 뛰어야 한다는 의미다. 즉 모든 진화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개념이다.

숙주가 진화하면 기생하는 종도 대응해 진화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기생생물을 물리칠 전략이 진화했다면 숙주에게는 진보다. 하지만 기생생물에게서 그에 맞서 새로운 기생 전략이 진화한다면, 숙주와 기생생물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말짱 도루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붉은 여왕 개념이다. 하지만 숙주와 기생생물의 물고 물리는 싸움은 쳇바퀴 돌기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 약점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이 과도해지면 종이 몰락하기도 하지만.

 

시·청각과 화학감각

개미의 노예제는 개미 사회가 보여주는 수많은 측면 중 하나이며, 개미 사회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한 요인이다. 기생은 숙주가 될 종이 진화한 뒤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관련 생물들의 진화가 복잡한 양상을 띤다는 한 증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노예제를 폐지했다. 노예제는 개미를 비롯한 사회성 곤충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에게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노예제를 사회의 한 속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그것이 사회 발전의 한 증표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노예제가 사회의 필수불가결한 속성은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노예제는 협동보다는 갈등의 요소가 더 많은 제도이므로 노예제 폐지는 인류 역사에서 협동과 갈등의 균형추가 협동 쪽으로 크게 이동했음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개미와 인간의 사회는 크게 다른 듯도 하다. 감각기관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 사회는 시각과 청각을, 개미 사회는 화학감각을 토대로 한다. 그것이 두 사회의 계급 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과거에는 개미 사회의 구성원들이 획일적으로 여왕에게 봉사한다고 여겨졌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왕이 아닌 일개미들도 때로 자기 알을 낳으려고 시도하며, 여왕을 추종하는 다른 일개미들은 그런 알을 먹어치우거나 알을 낳으려는 낌새를 보이는 일개미를 처벌하는 치안 활동을 벌인다. 그렇게 보면 역시 개미는 인간을 닮은 듯도 하다.

과연 개미의 노예제는 그들의 자의식적 사회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본능적 진화의 산물일까. 아직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환경을 보호하려면 우선 파괴해야 한다?

창조적 파괴’가 자연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환경을 파괴하면서도 실험에 매달리는 못 말리는 과학자들 덕분에 인간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환경 보존의 방법을 찾는다. 조금만 넘어서면 위태로울 법한 줄타기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과학자들, 그리고 그들의 놀라운 실험 결과. 물속에 뿌리를 내리며 생존하는 맹그로브 나무(위). 생명의 보고로 꼽히는 아마존에서 생활하는 원주민 아이들. 인간의 손이 닿을수록 아마존이 파괴된다는 쪽과 그렇지 않다는 쪽의 의견 대립이 팽팽하다.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설파했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경제 구조를 말한 것이고 환경의 처지에서 보면 큰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작은 숲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지만, 큰 숲은 장엄하지 않은가. 게다가 숲이 크면 더 다양한 생물이 더 많이 살지 않겠는가. 호랑이는 작은 산에서 살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환경 보존 측면에서 큰 것이 좋은지, 작은 것이 좋은지의 문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생태학계의 논쟁거리다. 연원을 따져보면 그 논쟁은 하나의 이론과 그것을 검증한 한 실험이 계기가 되어 촉발됐다.

 

천재 생태학자의 혜안

1969년 대니얼 심벌로프와 에드워드 윌슨은 이정표가 될 실험 논문을 내놓았다. 지금 같으면 환경파괴 행위라고 싸잡아 비난을 받을 만한 실험이었다.

아메리카의 열대 해안에는 맹그로브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맹그로브는 굵은 뿌리를 뻗대고 일어서려는 듯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자주 물에 잠기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기 때문에 그런 생김새로 진화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굵은 뿌리의 끝을 바다 밑에 박은 채 물 위로 높이 솟아올라 있다. 맹그로브는 서로 뿌리가 얽히고 붙은 채 자라기도 하지만, 얕은 바다에서는 한 그루씩 멀리 떨어져 자라기도 한다. 그렇게 물 위로 솟아 있는 맹그로브 나무 하나하나는 일종의 섬을 이룬다.

심벌로프와 윌슨은 플로리다 만에서 맹그로브 섬 6개를 골랐다. 그들은 맹그로브 나무 주위에 가설물을 세우고 나무를 잘 둘러싼 뒤 브롬화메틸이 주성분인 살충제를 뿌렸다. 자칫하면 맹그로브가 피해를 볼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농도를 조절하면서 시간을 두고 뿌렸다. 그렇게 해서 섬에 살던 동물들(주로 작은 절지동물들)을 다 죽인 뒤 감쌌던 막을 풀었다. 화산 활동으로 막 형성된 섬처럼 동물이 전혀 살지 않는 새로운 섬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1년 동안 섬의 동물상(動物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했다. 새 섬의 주위에는 절지동물이 우글거리는 섬과 숲이 펼쳐져 있으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 동물들이 새 섬으로 이주할 것이 분명했다.

먼저 날벌레들이 들어올 것이고 진드기처럼 새의 몸에 붙어서 들어오는 동물들도 있을 터였다. 먼저 정착한 동물들은 포식자와 경쟁자가 없으므로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다가 새 동물이 들어오면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잡아먹힘으로써 수가 크게 줄어들기도 했다. 전멸하는 종류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종이 계속 들어오면서 섬의 동물상은 서서히 주위의 섬들과 비슷해졌다. 250일이 지나자 가장 멀리 있는 섬을 제외한 나머지 섬들은 살충제를 뿌리지 않은 주위 섬들과 종(種)의 수와 조성이 비슷해졌다. 단지 전반적으로 개체수만 적을 뿐이었다. 그 뒤로는 종 조성에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일종의 평형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그 실험은 몇 년 앞서 천재적인 생태학자인 로버트 맥아더와 윌슨이 세운 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했다. 맥아더와 윌슨은 한 섬에 있는 종의 수는 본토와의 거리 및 섬의 크기라는 두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른바 평형 이론을 제시했다.

   

자연보호구역과 관련한 탁월한 논문을 발표한 제레드 다이아몬드. 그의 저작 ‘총, 균, 쇠’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본토에서 멀수록 섬으로 이주하는 종의 수가 적기 때문에 섬의 종 수는 적다. 한편 섬이 작을수록 피신처가 적기 때문에 살던 종이 전멸할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 멀리 떨어진 작은 섬일수록 종의 수는 적다. 그리고 새 섬이 생기면 동물들이 이주해 경쟁하고 먹고 먹히면서 자리를 잡고 멸종하는 과정이 진행되다가 이윽고 역동적인 평형 상태에 도달한다. 그것이 그들의 이론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맥아더와 윌슨은 그 이론으로 사실상 섬 생물지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창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이론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이 정식으로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으려면 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실험이 필요했다. 심벌로프와 윌슨의 논문은 바로 그 부분을 채웠다. 그 논문으로 섬 생물지리학은 확고한 실험 과학으로 자리매김했다.

심벌로프는 연구를 계속함으로써 그 이론을 검증해 나갔다. 그는 크기가 서로 다른 맹그로브 섬들을 골라서 같은 실험을 했다. 그러자 종의 수는 섬의 크기가 클수록 많아지며, 섬 내의 서식지가 다양한지 여부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평형 이론은 점점 더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 섬은 생물 다양성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제주도와 울릉도엔 육지에 없는 자생종들이 살고 있는 것처럼, 섬은 어느 정도 외부와 격리돼 독특한 종들이 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의 생물 다양성을 늘리는 기능을 한다.

섬 생물지리학은 새로운 과학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자마자 곧 의외의 방향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자연보존이다. 섬 생물지리학에서 말하는 섬은 바다로 둘러싸이고 흙과 바위로 된 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외부와 어느 정도 격리되어 독자적인 생물상을 이룰 수 있는 곳은 비유적으로 모두 섬이라 할 수 있다. 사막 한가운데 고립된 오아시스도 일종의 섬이며, 외부와 격리된 식물원이나 동물원도 일종의 섬이다.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심의 녹지도 하나의 섬이며, 저지대에 둘러싸인 높은 산도 섬이다.

따라서 섬 생물지리학은 사실상 생물의 서식지가 단절되고 격리된 곳이라면 어디든 적용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이 확산되면서 곧 그들의 논문을 인용하고 확대 적용한 연구 결과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보호구역의 설계 문제와 연관지은 논문도 등장했다.

그 분야의 주역은 나중에 ‘제3의 침팬지’와 ‘총, 균, 쇠’ 같은 걸작을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이다. 1975년에 다이아몬드는 섬 생물지리학을 자연보호구역 설정 문제와 연관지은 논문을 발표했다. 자연보호구역은 인간이 본래 있던 자연환경을 개발하면서 선심 쓰듯이 남겨놓은 지역이다. 계획적이거나 무계획적으로 개발이 진행될 때 한 구역을 덩그러니 떼어놓거나 우연히도 개발을 비껴간 공간을 그런 보호구역으로 설정한다. 도심에 있는 공원도 마찬가지다.

다이아몬드는 평형 이론을 역으로 적용했다. 자연보호구역이나 자연공원은 인위적으로 고립된 일종의 섬이다. 그런 구역은 원래 더 넓었던 면적을 일부 잘라낸 것이므로, 처음 설정될 때에는 종의 수가 평형 상태보다 더 많다. 구역이 설정되고 나면 외부와 단절되다시피 하기 때문에 유입되는 종의 수는 전보다 훨씬 줄어든다.

 

‘넓을수록 다양하다’

반면 좁아진 공간 때문에 안에 있는 종들이 사라질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서 구역 내 종의 수는 점점 줄어든다. 즉 종의 수는 평형 이론이 말하는 섬의 크기에 알맞은 수준까지 줄어든다. 평형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구역의 크기가 작을수록 멸종 속도도 빠를 것이므로 평형에 도달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종마다 생활공간의 크기가 다르다. 호랑이 같은 상위 포식자는 넓은 서식지가 필요한 반면 진드기 같은 곤충은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살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이런 점들을 근거로 보호구역이 클수록 더 많은 종이 살 수 있다는 보호구역 설계원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대니얼 심벌로프는 이를 반박했다.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면적이 작은 서식지에 있는 종이 큰 서식지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면적이 커질수록 거기에 새로운 종이 추가된다는 견해다. 심벌로프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가령 총면적이 같을 때 숲만 있는 하나의 큰 서식지보다는 숲과 연못으로 이뤄진 작은 서식지 둘이 종의 수가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못에는 숲에 살지 않는 생물들이 있을 테니까.

큰 서식지 하나가 나은지, 작은 서식지 여럿이 나은지의 논쟁(SLOSS·Single Large or Several Small)은 1975년부터 많은 생태학자가 참여하면서 열기를 더해갔다. 토머스 러브조이 같은 학자는 아예 아마존 열대우림에 다양한 크기의 격리지역을 만들어놓고 대규모 실험을 했다. 포유류와 조류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조사와 실험 결과도 쏟아졌다. 이 논쟁의 진행 과정은 데이비드 쾀멜의 ‘도도의 노래’에 상세히 나와 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생물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심벌로프의 초기 실험에서는 종의 수가 면적과 비례 관계에 있고 서식지의 다양성과는 별 연관이 없다고 나왔지만, 육지 등에서 이루어진 후속 실험에선 서식지의 다양성이 종의 다양성과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인식은 경관을 여러 구성 요소의 조각보로 파악하는 경관생태학과 보존생물학에 반영됐다. 도시처럼 인간의 간섭이 심한 공간에 있는 자연과 식생은 일종의 섬처럼 고립되게 마련이다. 주택단지, 건물, 도로 등으로 조각난 자연 공간은 공원이나 생태 공간으로 아무리 잘 가꾸고 보존한다고 할지라도 섬 생물지리학의 평형 이론을 적용할 때 종의 수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파괴자 vs 보호자

경관생태학은 그 문제를 ‘생태통로’라는 개념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즉 인공물들 사이에 고립되고 단절된 자연 공간들을 생태통로를 통해 서로 연결하면 전체적으로 면적이 넓어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통로를 도시 너머의 산이나 숲 같은 파괴되지 않은 자연 환경과 연결하면 도시 내의 조각난 식생으로 종의 이주가 가능해지므로 종 다양성이 유지될 수 있다.

생태통로는 도로의 위나 아래를 가로지르도록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도로변을 따라 죽 뻗은 덤불이나 생울타리도 생태통로가 될 수 있다. 거기에다 마당이나 옥상에 정원 같은 소규모 생물 서식 공간인 비오톱을 조성하면 종들이 자리를 잡고 건너다닐 수 있는 징검다리 노릇도 할 수 있다.

섬 생물지리학을 응용한 이런 개념은 1990년대부터 국내에 활발하게 적용됐다. 생태통로를 설치하려는 노력이 선행됐고, 최근엔 생물 서식 공간을 늘리고 연결해 전반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잘못 설치되거나 관리 부실로 무용지물로 전락한 생태통로도 많긴 하지만, 도시 내까지 자연을 끌어들이려는 이런 개념은 이제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언뜻 보기에 경관생태학 관점은 SLOSS 논쟁에서 작은 서식지 여럿이 낫다는 쪽의 손을 들어준 듯도 하다. 하지만 생태통로와 비오톱은 사실 인간 활동 때문에 필연적으로 조각날 수밖에 없는 자연 환경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측면이 강하기에 SLOSS 논쟁을 해결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공간이 아예 조각나지 않았다면 종이 더 다양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물에 따라 필요한 공간의 넓이와 서식지의 특성은 제각기 다르다. 육지에 살다가 번식할 때는 물로 돌아가야 하는 개구리 같은 양서류에는 서식지의 면적뿐 아니라 다양성도 중요하다. 반면 호랑이 같은 대형 포식동물은 상당히 넓은 생활공간이 필요하다.

   

SLOSS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맥아더와 윌슨이 내놓은 평형 이론이 옳은지를 놓고 지금도 논문이 나오고 있지만, 어쨌든 단절된 서식지들을 연결하는 것이 종 다양성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심벌로프와 윌슨은 지역 방역 당국의 도움을 얻어서 맹그로브 섬의 동물들을 전멸시켰다. 동물들을 전멸시킨 행위 자체도 그렇지만 그들이 쓴 살충제인 브롬화메틸은 나중에 오존층 파괴를 일으키는 주요 화학물질 중 하나로 밝혀졌으니, 지금 누군가 그런 실험을 하겠다고 나서면 환경 파괴자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寶庫를 찾아라!

하지만 서식지의 특성과 면적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가 드러나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는 등 연구가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생각할 때, 그런 비판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꼴이다. 방향은 좀 다르지만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충제 같은 약품을 뿌려 생물을 잡아서 조사하는 연구 방식이 쓰이는 분야가 있다. 바로 우듬지 생물학(canopy biology)이라는 분야다.

1982년 테리 어윈은 파나마 열대림의 종 다양성을 다룬 색다른 논문을 내놓았다. 그는 마치 심벌로프와 윌슨의 실험 방법을 그대로 갖다 쓴 듯한 방법을 썼다. 그는 열대림의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서 우산을 뒤집어놓은 것 같은 채집망을 군데군데 설치했다. 그런 다음 나무 꼭대기에 살충제를 살포했다. 그러자 거기에 살던 딱정벌레류를 비롯한 절지동물들이 죽어서 우수수 떨어졌다.

잡은 동물들을 살펴본 그는 깜짝 놀랐다.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종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사실 10m가 넘는 열대림의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전까지 숲 연구는 주로 숲 바닥을 위주로 이뤄졌다. 나무 둘레를 재고 낙엽과 토양을 분석하는 방식이 주류였고, 멀리서 식생의 조성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숲 아래쪽이나 맨 꼭대기의 생물상이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랬던 터라 어윈의 연구는 큰 충격을 안겨줬다.

어윈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지구의 생물 종 수가 이전에 추정된 약 1000만종이 아니라 3000만종은 될 것이라고 3배나 늘려잡았다. 나중에 너무 성급한 일반화라는 지적을 받긴 했지만, 살충제를 살포하는 실험 방법이 생물 다양성의 이해에 기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거실 로우먼이 ‘나무 위 나의 인생’에서 말하고 있듯이, 지금은 아예 열대림 꼭대기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이동통로까지 설치해 연구하는 등 새로운 실험 방법들이 개발되어 있지만, 살충제를 안개처럼 뿌리는 방법도 여전히 쓰인다.

지금 선진국들은 아마존 열대우림을 비롯한 생명의 보고(寶庫)를 열심히 뒤지고 다닌다. 아예 속 편하게 해당 국가의 연구기관에 연구비를 주고 계약을 맺기도 한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알려져 있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생물들의 추출물이다. 식물과 곤충을 비롯한 다양한 생물들의 추출물은 관련 연구소로 전달되고, 연구소에서는 그 물질들이 에이즈 바이러스를 비롯한 다양한 병원체에 효과가 있는지를 조사한다.

만일 그 물질들에 어떤 병원체를 억제하거나 죽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추출물을 정밀 분석해 해당 물질을 찾아낸다. 그것은 새로운 치료제가 될 수 있다. 몇 년 전 미국은 그런 방법으로 말레이시아의 밀림에 사는 한 식물에서 에이즈의 진행을 억제하는 약물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미봉책이라도…

신약 개발은 성공하면 대박을 안겨주는 사업이므로 많은 대기업과 벤처기업이 뛰어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유용한 천연 자원을 누가 먼저 발견하느냐가 중요하므로 선점하려면 남이 미처 알지 못한 생물 다양성의 보고를 먼저 뒤져야 한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그 일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그런 유용한 생물자원을 얻으려면 국가간 또는 기업간 선점 경쟁 외에 또 다른 경쟁도 해야 한다. 바로 환경파괴와의 경쟁이다. 아마존 밀림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생물 서식지들은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생물 다양성도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몇 달 전에 구한 식물 추출물이 약효가 있다는 것이 밝혀져 그 식물을 찾으러 현장에 가면 이미 숲이 농경지로 변해버린 사례도 있다. 또 환경오염으로 특수한 약물 성분을 지닌 개구리가 멸종할 수도 있다.

   

삼림 파괴, 산성비, 오존층 파괴, 내분비계 교란 물질, 지구 온난화 등 어떤 환경파괴 요인이 주된 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하는가는 때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런 요인들이 생물 다양성을 줄임으로써 인류의 장래 건강과 복지에 해를 입힌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우리가 미처 알기도 전에 사라진 생물들이 어쩌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각국은 미처 사라지기 전에 세계 각지에서 생물의 종자, 추출물, 생체 표본 등을 모으느라 애쓰고 있다.

현재 인류가 추구하는 생활수준과 삶의 질을 영위하려면 필연적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아직 과학기술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인류 번영을 지탱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가이아 이론을 내놓은 제임스 러브록은 그런 번영을 가능하게 할 기술이 핵융합 기술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언제 실용화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니 어쩌면 미봉책이라도 찾아낸 것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르겠다. 러브록은 자원 재활용, 재생 에너지, 에너지 효율 등을 염두에 둔 지속 가능한 발전조차 뒤늦은 조치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회의적 환경주의자’

섬 생물지리학은 그런 미봉책들의 이론적 및 실험적 배경이 되어왔다. 뒤늦은 조치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섬 생물지리학의 이론과 실험은 막연한 감상주의에만 의지하지 않은 과학적이고 계획적인 환경관리 방안들을 도출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 학문의 출발점이 된 실험은 당사자 두 사람의 행보에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심벌로프는 생태학 연구를 계속했고 최근에는 외래종이 어떤 위협을 하는지 연구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외래종이 위협하는 정도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고 말한다. 왠지 보수주의 냄새를 풍기는 듯도 하다.

한편 윌슨은 생물 다양성 보호에 매진하고 있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를 쓴 덴마크 통계학자 비외른 롬보르는 열대림 파괴와 서식지 단절이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킨다는 말이 헛소리라는 통계 수치를 들이댄다. 그 통계 수치들이 현실과 유리된 것이라는 점은 차치하고 현장을 자세히 조사하면 오히려 그 수치들이 생태통로의 기능과 섬 생물지리학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구가 버린 씨앗이 화성에 생명을 잉태한다?

플라스크 두 병으로 생명의 기원을 탐색하던 실험은 이제 외계에 지구의 생명체를 잉태하려는 시도로 발전하고 있다. 생물체 탄생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태양계 행성에 지구 생명체를 이식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으니까. 이런 꿈이 먼 미래의 일 같지만, 생명의 신비로운 고리는 점차 풀려가고 있다. 미국의 화성궤도탐사선에 잡힌 화성에 물이 흘렀던 흔적. 먼 옛날 화성의 생물체가 지구에 유입됐던 것은 아닐까.

생명은 무엇일까? 어떻게 시작됐을까? 이런 질문은 인간의 의식이 각성한 이래 계속 제기되고 있다. 세계 창조의 신화와 종교들이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고 있으며, 온갖 철학자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다윈은 그 질문의 방향을 과학 쪽으로 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종의 기원’에서 모든 생물이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썼다. 소심한 편이던 그는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인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암모니아와 인산염과 빛, 열, 전기 등이 있는 따뜻한 작은 연못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최초의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생겨났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최초의 생명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겨났는지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생물은 무생물과 비교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대사 활동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고, 닮은 점과 다른 점을 고루 지닌 자손을 낳고, 환경에 적응한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맞게 환경을 변화시키는 등의 복잡한 특성을 지녔다. 이런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생겨났다고?

그 어려운 문제를 풀 실마리를 처음 제공한 것은 밀러-우레이의 실험이었다.

 

초기 지구엔 누가 살았나?

1953년 미국 시카고대 해럴드 우레이 교수의 지도를 받는 대학원생이던 스탠리 밀러는 생명이 아직 없던 초기 지구에서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는 위와 아래에 플라스크를 하나씩 놓고 두 개의 관으로 양쪽을 연결했다. 아래쪽 플라스크에는 물을 넣었다. 그것이 지구의 바다였다. 위쪽 플라스크에는 여러 가지 기체를 넣었다. 지구의 대기였다.

밀러는 원시 지구의 대기가 어떠했는지 추정한 러시아 과학자 오파린을 비롯한 과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위쪽 플라스크에 메탄, 암모니아, 수소를 넣었다. 그리고 아래쪽 플라스크를 가열하면 관을 따라 수증기가 올라가서 위쪽 플라스크로 들어가도록 돼 있었다. 위쪽 플라스크에는 전극을 달아 전기 방전이 일어나도록 했다. 전기 방전은 번개였다.

밀러는 아래쪽 플라스크를 가열해 수증기를 순환시키면서, 위쪽 플라스크에 계속 전기 방전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체들끼리 반응하기 시작했다. 반응으로 생긴 산물은 관을 따라 내려와서 냉각된 다음 아래쪽 플라스크로 들어갔다. 바다와 대기 사이에 물질 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가 지나자 바다가 분홍색을 띠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짙은 붉은색으로 변했다. 밀러는 짙은 색으로 변한 바닷물을 꺼내어 성분을 분석했다. 거기에는 세포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아미노산 20종류 중 11가지가 들어 있었고, 유전물질인 핵산의 전구물질이라고 할 만한 것도 있었다. 즉 생물의 활동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의 원료인 유기물질이 생성된 것이다.

밀러의 실험은 생명체 자체가 아니라 간단한 유기물질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생명체가 초기 지구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였다. 너무나 놀라운 의미가 함축돼 있었기에 과학자들은 처음에 그의 실험 결과를 믿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머지않아 유명한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실렸다.

밀러-우레이 실험은 문제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단순하면서도 산뜻했으니까. 게다가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화학자인 레슬리 오겔은 1969년 호주에 떨어진 머친슨 운석이 우연찮게 그 실험을 뒷받침하는 기능을 했다고 말한다. 그 운석을 분석해보니 아미노산의 종류와 비율이 밀러의 실험 결과와 거의 일치했다.

   

지구 생명체는 외계에서?

1953년 스탠리 밀러가 전기방전을 이용해 아미노산을 합성한 실험장치. 원시 지구를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밀러의 실험 이후에 과학자들은 기체의 종류와 비율을 달리하면서 비슷한 실험을 해보았다. 밀러가 조성한 대기는 화학적으로 환원성 대기라고 하는데, 과학자들은 환원성 대기에서는 아미노산이 쉽게 생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정반대 특성을 지닌 산화성 대기에서는 아미노산이 전혀 생성되지 않거나 아주 소량만 생성됐다.

또 다른 과학자들은 유전물질인 핵산의 기본 단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생물의 두 가지 주요 성분인 단백질과 핵산의 원료가 초기 지구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고무적인 결과가 나온 셈이었다. 게다가 우주 공간에도 그런 물질들이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과학자들은 실험의 전제에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밀러는 원시 대기가 암모니아와 메탄처럼 쉽게 반응하는 기체들을 섞은 형태라고 보았다.

그런데 초기 지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원시 대기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초기 지구는 불안정한 상태였고 우주로부터 혜성과 유성의 세례를 받는 일도 잦았으니, 암모니아와 메탄 같은 반응성이 강한 기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응성이 약한 이산화탄소와 질소가 원시 대기의 주성분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초기 지구는 밀러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세계인 셈이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대안 가설을 제시하는 과학자들이 나타났다. 생명이 지구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외계에서 왔다는 이른바 범종설(汎種說)이다.

범종설은 사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낙사고라스로부터 이어지는 오래된 가설이다. 그는 우주에 아주 작은 씨앗이 무수히 흩어져 있으며, 그것들이 조합해 생명을 비롯한 만물을 낳는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그 견해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됐지만, 그 가설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어쩌다가 한 번씩 일었다.

제임스 왓슨과 함께 DNA의 구조를 밝힌 프랜시스 크릭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1973년 레슬리 오겔과 함께 어떤 고도로 발달한 외계 문명에서 DNA를 담은 일종의 씨앗을 지구로 보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DNA가 지구에서 진화를 거듭하면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외계 문명의 씨앗이 지구를 생명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든 셈이다. 물론 크릭과 오겔은 그 외계 문명은 무생물에서 생성되는 과정을 거쳐 진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크릭과 오겔의 주장은 다소 장난기가 어린 듯했기에 과학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가 외계 생명체를 지구로?

하지만 분광 분석법 등을 통해 우주 공간을 살펴보고 우주 먼지와 지구에 떨어진 운석을 분석한 결과, 우주에 아미노산 같은 생명의 원료가 되는 물질이 풍부하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범종설은 새롭게 힘을 얻었다. 굳이 외계 문명이 파종을 하지 않았더라도, 지구가 형성될 때인 약 45억년 전부터 생명이 탄생한 시기라고 여겨지는 약 35억년 전까지, 10억년 동안 지구에 떨어진 그런 물질들의 양을 더하면 엄청날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지구의 대기 조건이 아미노산 같은 물질을 생성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해도 생명의 원료 물질들은 운석과 우주 먼지를 통해 계속 지구로 유입돼 많아졌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생명이 출현할 유기물로 가득한 이른바 ‘원시 수프(primordial soup)’가 생겼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아예 생명체 자체가 우주에서 왔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그들은 최근 들어 급속히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행성학, 우주론, 우주생물학 분야의 연구 결과들을 논거로 제시한다.

1990년대부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해외 화제에 오르곤 하는 화성에서 온 운석들이 한 예다. 1984년 남극대륙에서 발견된 ALH84001이라는 운석이 있다. 이 운석은 약 1500만년 전에 화성에서 떨어져 나와 약 1만3000년 전에 지구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됐다. 1500만년을 우주에서 떠돈 셈이다. 1996년 미국 항공우주국의 데이비드 매케이 연구진은 이 운석에 지구의 세균과 아주 흡사하게 생긴 생명체 화석이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것이 정말로 생명체 화석인지를 놓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지만, 아직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 논쟁의 와중에 벤저민 웨이스 연구진은 다른 각도에서 그 운석을 분석했다. 그들은 자기적 특성들과 운석에 갇힌 기체들의 조성을 분석해 운석이 수백℃ 이상 가열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게다가 100℃ 이상으로 가열되지 않은 화성 운석도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우주 왕복선이 지구 바깥을 오갈 때 뜨겁게 달구어지듯이, 무언가 행성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면 대기와의 마찰열 때문에 뜨겁게 달궈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운석들은 화성에서 어떻게 달궈지지 않은 채 나온 것일까. 무언가 다른 탈출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연구자들은 혜성이나 유성이 화성에 충돌할 때 생긴 상승 충격파 덕분에 달궈지지 않은 채 튀어나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아무튼 그 운석 속에 세균 같은 미생물이 들어 있었다면 수백℃ 정도의 온도에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생물은 온도나 대기 조건이 열악해지면 휴면 상태에 들어가서 오래 견딜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 복사선은? 우주에는 태양의 자외선을 비롯해 강력한 복사선들이 있다. 자외선은 생물의 DNA를 파괴하므로 강력한 자외선은 생물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힐 수 있다. 하지만 강력한 자외선에도 견딜 수 있는 미생물이 있다. 유럽 연구자들은 곰팡이 포자를 알루미늄으로 감싸서 우주에 보내는 실험을 했는데, 80%의 곰팡이가 살아남았다.

 

생명의 요람 ‘원시 수프’

또 연구자들은 행성이 대략 수백만년마다 혜성이나 유성과 충돌해 대량의 물질을 우주로 뿜어낸다고 추정한다. 달도 그런 충돌의 산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지구와 화성은 고립된 채 마냥 태양을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물질을 주고받는 셈이다. 화성에서 튀어나온 먼지나 운석은 수백만년이 지난 뒤에 지구로 들어올 수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빨리 지구로 들어오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먼 과거에는 화성이 지금처럼 황무지가 아니라 생명이 살 만한 환경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당시 살던 생물들 중 일부가 지구로 유입됐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위에 말한 연구 결과들을 찬찬히 훑어보면 생명체가 외계에서 지구로 유입됐다는 말이 그런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접했을 때보다 덜 황당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벤저민 웨이스는 범종설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론일 뿐 아니라, 단계별로 실험을 통해 검증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설령 생명이 지구에서 출현했다고 할지라도 우주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미노산 같은 원료들을 우주에서 많이 공급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최근 미국의 화학자 제프리 바더는 전세를 다시 역전시킬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바더는 밀러가 1983년에 한 실험을 다시 해보았다. 그는 그 실험에서 아질산염도 생성되며 그 물질이 생성된 아미노산을 금방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아질산염은 물을 산성으로 변화시켜 아미노산이 생성되는 것을 억제했다. 하지만 초기 지구에는 아질산염과 산을 중화시키는 철과 탄산염 광물이 많았을 것이므로 바더는 그 물질들을 넣고 실험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미노산으로 가득한 바다가 형성됐다. 따라서 다시 아미노산이 지구에서 생성됐다는 쪽으로 견해가 기우는 셈이다.

하지만 핵산은? 여전히 우주에서 온 듯하다.

밀러-우레이 실험은 원시 지구에서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이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 뒤의 과학자들은 우주로부터도 유기물이 많이 유입됐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유기물이 바다에 쌓여서 이른바 생명의 요람인 원시 수프가 형성됐다는 데까지는 이제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RNA 세계 가설’

그 다음 단계는 유기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복제해 증식할 수 있는 분자가 출현하는 것이다. 복제와 증식을 하려면 원료가 필요하며, 유기물이 바로 그 원료다. 따라서 자기 복제 분자는 유기물을 소비하면서 증식하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한때 이 단계를 주도한 것이 단백질인지 DNA인지를 놓고 둘로 갈려서 열띤 논쟁을 벌였다. 문제는 단백질과 DNA는 서로 있어야만 복제와 증식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단백질은 DNA를 자르고 붙이는 효소 노릇을 함으로써 DNA의 복제에 관여하며, DNA는 단백질을 합성하는 주형 노릇을 한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제대로 증식할 수 없다. 그렇다고 둘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논쟁이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서서히 제3의 대안이 떠올랐다. 바로 DNA의 친척인 RNA였다. RNA가 부상한 계기는 리보자임이라는 특이한 종류의 RNA의 발견이었다. 리보자임은 자기 자신의 합성을 촉매한다. 즉 주형과 효소 기능을 동시에 하는 셈이다.

   

따라서 단백질이 먼저냐 DNA가 먼저냐 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어졌다. RNA가 먼저였고 그 뒤에 둘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RNA가 세계를 주도했다는 의미에서 ‘RNA 세계 가설’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가설에 따르면 RNA는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중에 이중 나선을 형성하는 좀더 안정한 물질인 DNA가 주형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하지만 원시 지구에서 자기 복제자인 RNA가 등장해 유기물을 소비하면서 증식했는지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RNA는 분자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단백질과 핵산이 결합한 PNA 등의 물질이 초기에 주형 노릇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밀러가 시작한 생명의 기원 실험을 둘러싼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밀러-우레이는 원시 바다를 생명의 모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다윈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다윈의 ‘따뜻한 작은 연못’이 바다로 바뀌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생명이 바다에서 출현했다고 보는 과학자들은 원시 바다의 해안가로 유기물이 밀려드는 광경을 상상한다. 유기물들은 파도에 밀려 바위 해안의 웅덩이로 들어왔다가 햇볕에 증발되면서 점점 더 진하게 농축된다. 이윽고 그 진한 유기물 수프에서 생명이 탄생한다.

하지만 이 바닷가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불안정한 바다보다는 더 안정된 곳이 생명이 출현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본다. 가령 진흙탕의 점토 입자 표면이나 암석의 작은 틈새 같은 곳이다.

미국의 지구과학자 로버트 하젠은 더 대담한 주장을 편다. 그는 암석과 광물이 생명의 기원에 적어도 몇 가지 방향으로 관여했다고 본다. 먼저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정한 보금자리를 제공했다. 둘째, 간단한 분자들이 붙었다가 서로 결합해 성장할 표면을 제공했다. 셋째, 생명이 특정한 방향의 분자들만 사용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많은 유기물 분자가 그렇지만 아미노산도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두 형태는 서로 거울상, 즉 방향이 반대다. 화학적으로는 L형과 D형이라고 한다. 밀러의 실험에서처럼 화학적으로 아미노산이 형성될 때에는 L형과 D형의 비율이 50대 50이다.

반면 지구의 생물들은 D형은 쓰지 못하며, L형만 쓸 수 있다. 따라서 생물이 만드는 아미노산은 모두 L형이다. 하젠은 방해석 같은 암석의 매끄러운 결정면들은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L형과 D형을 선택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왼쪽 결정면에는 L형만 달라붙고, 오른쪽 결정면에는 D형만 달라붙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국지적으로 L형과 D형의 아미노산이 축적됐다가 어느 한쪽이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설명을 내놓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운석에 든 아미노산들을 분석하면 D형보다 L형의 양이 좀더 많다고 말한다. 즉 우주에 원래 L형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하젠은 광물이 자기 복제자 형성을 촉진하고, 철과 황처럼 용해됨으로써 생명을 출현시킬 화학 반응의 중심 역할을 한다고도 본다. 그는 심해의 열수 분출구처럼 햇빛이 없고 압력과 온도가 높은 곳에서 생명이 번성하는 것도 녹아 나온 광물질 덕분이라고 본다. 심해 열수 분출구 같은 곳이 생명의 출현 장소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이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인류의 조상, 인류의 미래

밀러-우레이 실험과 그 뒤에 벌어진 다양한 실험과 이론은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바로 우주 개척이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물질을 갖가지 방식으로 조합해 어떤 생명 분자들이 생성되는지 연구했다. 그 결과를 달이나 화성에 적용한다면?

다른 행성의 환경을 지구처럼 바꾸는 것을 테라포밍이라고 한다. 테라포밍은 예전에는 과학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앞서 말한 연구 결과들을 보면 그것을 실현할 계획을 짠다고 해도 이제는 그리 허황되게 여겨지지 않을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자신도 모르게 태양계 행성들의 테라포밍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알랴? 인류가 우주로 쏘아대고 있는 우주 탐사선들, 지구 궤도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먼 미래에 화성과 달에 생명을 출현시킬 씨앗이 될지. 우주 탐사선을 멸균시켜 보내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인류 구하는 돌연변이는 선조들의 선물?

자연에 대든 인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사료를 먹인 결과는 부메랑처럼 인류의 뇌를 겨누고 있다. 광우병에 대한 진실 중 재미있는 사실은 문화와 인류의 진화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과거 식인(食人) 풍습이 있던 나라의 후손들은 광우병에 대항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가장 많이 광우병에 걸리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광우병에 걸린 소를 도살하기 전 소 주인이 슬픔에 잠겨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속담에는 선현의 지혜가 담겨 있지만,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엔 옛 지혜가 들어맞지 않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예전 송충이는 솔잎이 제 분수에 맞는 먹이였다. 소에겐 꼴이 제 분수에 맞는 먹이였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송충이는 ‘솔잎’을 고집하다 오히려 인간의 집중적인 방제 활동을 초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대신 솔잎혹파리가 송충이 자리를 차지해 소나무를 괴롭힌다. 소는 꼴 대신 인간이 주는 뼛가루 같은 육류가 섞인 사료를 먹다보니 이제 초식동물보다 잡식동물에 가깝게 됐다.

송충이 속담은 인간에게 제 분수를 알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인간은 분수를 모르고 송충이를 없애는 쪽으로 대응했다. 결과가 좋았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오히려 인류는 자연에 대든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갖가지 새로운 전염병에 시달리게 됐으니 말이다.

인간이 치르는 대가 중 광우병은 대표적이다. 동심을 자극하는 친근한 소를 해악의 근원으로 보게 만든 것이 사람이었으니. 게다가 광우병은 미국 쇠고기의 안전성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벌어지는 내내 주요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광우병은 ‘전염성 해면상뇌증’이라는 퇴행성 신경질환의 일종이다.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염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광우병의 원인과 발병 양상에 관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인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질병은 인류의 미래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해면상뇌증은 뇌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송송 뚫리면서 근육 경련, 발작 같은 증상을 보이는 병이다. 이 병은 사실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며, 여러 동물에게서 발견됐다. 사람에게서는 1920년대에 처음 발견돼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어서 양과 염소에게도 비슷한 병(진전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밍크, 사슴, 고양이, 소에서도 유사한 질병이 발견됐다. 또 사망자의 뇌를 먹는 풍습이 있는 파푸아뉴기니의 포레족에게 흔히 발생하는 쿠루병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는 것도 알려졌다.

과학자들은 그런 퇴행성 질병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수십년이 흘러도 별 소득이 없었다. 전염성을 띠고 있으니 그 병을 옮기는 매개체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과학자들은 포자충, 바이러스, 단백질, 다당류, 핵산, 단백질과 핵산의 복합체, 다당류로 둘러싸인 핵산 등이 매개체일 것이라고 저마다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매개체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단지 그것이 다양한 화학물질들에 잘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만 밝혀냈을 뿐이다.

 

이단적 주장이 노벨상으로

미국 캘리포니아대 신경학 교수 스탠리 프루시너도 그 병의 원인을 밝혀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1982년 자신의 연구 결과와 가설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진전병에 걸린 양과 염소의 조직을 햄스터나 생쥐 같은 쥐과 동물에게 주입했을 때 병이 전염된다는 데 착안했다. 조직 추출물을 얼마나 주입했을 때 발병률이 어느 정도가 되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햄스터의 조직에서 그 물질의 양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그런 다음 쥐과 동물의 지라 등에서 조직을 채취해 진전병 매개체를 분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다양한 실험약품과 기구를 써서 다각도로 그 매개체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마침내 그는 그 매개체가 핵산을 분해하는 약품에는 견디지만 단백질을 분해하는 일부 물질에는 분해되거나 활성을 잃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진전병의 매개체가 핵산이 아니라 단백질의 특성을 띠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는 단백질성 감염 입자라는 어구를 줄여서, 그 매개체에 ‘프리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전염병 매개체인 프리온이 단백질이라면, 그것은 이단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었다. 1954년 왓슨과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낸 뒤 이른바 정보는 DNA에서 RNA를 거쳐 단백질로 흐른다는 중심 원리가 확립돼 있었다. 어떤 매개체가 전염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생물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번식이나 증식을 함으로써 질병의 증상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흑사병을 일으키는 페스트균, 지저분한 무좀균에 이르기까지, 전염병을 일으키는 매개체는 다 그렇다.

   

번식이나 증식을 하려면 주형 노릇을 할 유전물질, 즉 DNA나 RNA가 있어야 했다. 단백질은 정보의 원천이 아니기에, 다른 생물의 몸에 들어가서 활동을 할지언정 자체 증식은 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따라서 단백질이 전염병 매개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프루시너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연구진의 자료와 다른 사람들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볼 때 두 가지 모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단백질이 핵산을 꽁꽁 감싸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핵산이 없이 단백질 자체가 감염 매개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전자가 설득력은 더 있지만 단백질 안에 핵산이 들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연구진이 찾은 후자가 사실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후자가 옳다면 단백질인 프리온이 어떻게 새 숙주에 들어가서 복제를 할 수 있는가라는 골치 아픈 문제가 남는다. 핵산이 없으면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니까. 프루시너는 프리온이 미지의 핵산을 포함하고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상정해 가능한 복제 메커니즘을 논의했다. 핵산이 있다면 그 핵산이 프리온 단백질을 만들거나 숙주의 유전체에 있는 프리온 유전자를 활성화할 수 있으므로 별문제가 없다. 핵산이 없다면 프리온 자체가 숙주 유전체의 프리온 유전자를 활성화하거나, 단백질에서 핵산을 만든 다음 복제를 하거나, 프리온 자체가 다른 프리온을 합성하는 부호를 지니고 있어야 했다. 어느 쪽도 만만한 가설이 아니었다.

여러 동물과 인간의 뇌에 퇴행성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 물질이 단백질임을 시사한 그의 논문은 과학계의 광범위한 반대에 직면했다. 하지만 프루시너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프리온이 전염병을 일으킬 뿐 아니라 유전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더 강력한 주장을 내놓았다. 이어서 프리온이 무해한 단백질 분자의 형태 변화를 유도함으로써 정상 단백질을 유해한 단백질로 전환시키는 식으로 증식을 한다는 기발한 이론까지 내놓았다. 이런 주장은 끊임없이 과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양에서 소로, 다시 사람으로

그러나 후속 실험 결과들은 프루시너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실험 증거가 하나 둘 쌓여갈수록 프리온이 정말로 기이한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 드러났고, 단백질을 변형시킴으로써 유전병과 전염병을 일으킨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프리온이 전염병도 유전병도 아닌 산발적인 질병도 일으킨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 프리온이 여러 가지이며 종류별로 일으키는 퇴행성 질환들이 다를 가능성도 제기됐다. 처음에 이단적이라고 여겨졌던 업적이 인정을 받으면서 1997년 프루시너는 노벨상을 받았다.

프리온이 유명세를 탄 것은 광우병 때문이다. 1984년 영국의 한 농장에 있는 암소 한 마리가 머리를 떨어대고 걸음을 이상하게 걷는 등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 농장의 다른 소들도 같은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목장 주인과 수의사는 검사를 의뢰하기로 했고, 검사를 담당한 병리학자는 진전병에 걸린 양의 뇌처럼 그 소의 뇌도 구멍이 송송 뚫려 있음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농장에서도 같은 증상을 보이는 소가 발견됐고, 그 소도 마찬가지로 뇌가 비정상이었다. 그 소들이 걸린 질병의 정식 명칭은 소해면상뇌증이었고, 일반적으로 광우병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첫 발병 사례가 나타난 뒤 해마다 그 병에 걸린 개체수가 늘어났고, 1992년에는 영국에서 무려 3만5000마리의 소가 그 병에 걸렸다.

문제가 소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아마 가축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처럼 소를 도살처분하고 끝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1989년 한 30대 여성이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에 걸렸다. 이 병은 대개 노인에게 나타나며 젊은층에게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문제는 그 여성이 광우병이 발생한 농장에서 살았다는 점이었다. CJD는 광우병과 증상이 비슷했으므로 사람들은 혹시 그 여성이 소에게서 전염된 것이 아닐까 우려했다. 당국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CJD 환자가 계속 나타나자 말문이 막혔다. 환자들은 주로 광우병 발생 농장과 관련이 있거나 쇠고기를 즐겨 먹은 사람들이었다.

1996년 로버트 윌 연구진은 영국 의학 전문지 ‘랜싯’에 광우병과 CJD의 관련성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최근 급증한 CJD가 기존 노인층에게 나타나는 CJD와 다른 새로운 변종 CJD이며,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것이 광우병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영국 보건당국도 결국 가능성을 인정했다.

영국 당국이 수많은 소를 도살하는 동안 과학자들은 소들이 처음에 어떻게 그 병에 걸리게 됐는지 찾아 나섰다. 그들은 진전병에 걸린 양이 원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혹시 양의 진전병 매개체가 소에게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진전병은 수세기 전부터 있었고 양과 소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 함께 방목됐는데, 그 병이 최근 들어서야 들불처럼 퍼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연구자들은 기계화한 대규모 사육 방식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했다. 풀만 베어다 먹여서는 가축을 대규모로 사육하기가 어렵다. 인공 사료를 줘야 한다. 문제는 사료에 있었다. 사료업자들은 내장, 뼈 등 도축할 때 버려지는 부위를 모아 가축의 사료로 썼다. 즉 소 같은 초식동물에게 육류를 먹인 것이다. 풀 같은 저단백 먹이를 먹던 소에게 고기와 뼛가루가 들어간 고단백 사료를 먹이자 발육 속도가 빨라졌다. 거기에다 사육되는 양의 수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양의 사체들이 소의 사료로 쓰였고, 거기에 진전병에 걸린 양이 얼마나 섞였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1988년 영국 정부는 재활용 동물 단백질을 가축에게 먹이는 것을 금지했고, 다른 나라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 결과 광우병 발생률은 크게 줄어든 듯하다. 하지만 동물 단백질을 먹이는 행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식물성 사료보다 동물성 사료가 더 영양분이 많으므로 동물성 사료를 먹이려는 시도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초식동물을 잡식동물로 개량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꾸준히 이루어질 성싶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종간(種間) 전염이 가속화한다는 사실이다. 광우병과 변종 CJD는 한 종이 지니고 있던 병이 다른 종에게로 전염된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물론 자연에는 종간 전염 사례가 가득하다. 아예 종을 옮겨다니는 생활 방식을 채택한 존재도 많다. 모기와 사람을 오가며 살아가는 말라리아 원충이 대표적이다. 기생하는 생물의 처지에서는 환경이 열악할 때 더 안정한 생활환경을 제공하는 다른 숙주를 이용할 수 있으면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례없이 의외의 방식으로 종간 전염을 가속화했다. 광우병뿐 아니라 침팬지에게서 전파된 듯한 에이즈 바이러스, 새에게서 전파되는 조류 인플루엔자 등은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자연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면서 빚어진 결과다.

 

식인풍습과 저항력

인간이 아직 면역력이나 저항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새로운 전염병과 접촉하면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다. 중세의 흑사병이나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럴 때마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렇게 대규모 전염병이 휩쓸면 주로 운이 좋거나 건강 상태가 좋거나 저항성을 지닌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다윈이 말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과정이기도 하다.

2003년 영국의 사이먼 미드 연구진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들은 쿠루병으로 유명한 파푸아뉴기니의 포레족을 찾아가서, 당국이 그 풍습을 금지하기 이전에 식인 의식에 참여했던 나이든 여성 30명의 DNA를 채취해 분석했다. 여러 차례 사망자의 뇌를 먹었음에도 쿠루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 있는 여성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쿠루병을 일으키는 프리온에 저항력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했다.

연구자들은 그 여성들의 프리온 단백질 유전자에서 독특한 돌연변이를 찾아냈다. 인간 프리온 단백질 유전자는 정상적인 형태가 두 개 있을 때(동형 접합)보다 정상인 것 하나와 돌연변이가 일어난 것이 하나씩 조합돼 있을 때(이형 접합) 프리온 질병에 더 저항성을 보인다. 그런데 그 나이든 여성들은 대부분 그 유전자가 이형 접합이었고, 식인 풍습이 금지된 뒤에 태어난 여성들은 그보다 이형 접합 비율이 낮았다. 즉 나이든 여성들은 쿠루병에 저항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내친김에 영국의 인간 광우병 희생자들의 DNA를 분석했다. 환자들은 모두 동형 접합이었다. 신이 난 연구자들은 전세계 여러 민족 집단의 유전자를 조사했다. 그러자 전세계 민족에서 같은 돌연변이 유전자가 발견됐다. 일본인은 예외였다. 일본인은 나름대로 저항성을 주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미드 연구진은 다양한 인류 집단과 침팬지의 DNA 연구 자료를 종합한 끝에 그 돌연변이 이형 접합이 적어도 50만년 전에 출현했다고 추정했다. 그것은 프리온 질병이 초기 인류에게 흔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그 병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인류가 즐겨 사냥했던 어떤 동물에게 그 병이 흔했던 것일까. 그 병에 걸려 비틀거리는 동물이라면 사냥 기술이 뒤떨어지는 사람도 쉽게 잡았을 테니까 말이다.

 

광우병에 취약한 한국인

하지만 연구진은 또 다른 가설을 제시한다. 포레족이 죽은 자의 뇌를 먹는 풍습 때문에 쿠루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초기 인류에게 식인 풍습이 흔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프리온 질병에 저항성을 부여하는 돌연변이가 그저 우연히 그렇게 전세계 인류의 유전체에 보존됐을 가능성은 작다. 그보다는 자연선택을 거쳐 확산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연구 결과는 인류가 아프리카로부터 나와 분산되기 전에 그 돌연변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과학 저술가인 니콜라스 웨이드는 일본인이 다른 돌연변이를 지닌 이유는 원래의 돌연변이를 잃었다가 나중에 프리온 저항성이 너무나 필요해지는 바람에 다른 돌연변이로 대신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식인 풍습이 흔했다는 것은 초기 인류 집단 사이에 전쟁이 흔했다는 의미라고 본다. 그렇다면 먼 과거에 있었던 식인 풍습이 현재 광우병의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셈이다.

이 논리를 역으로 적용하면 재미있는 추정이 나온다. 한림대 김용선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은 광우병에 취약한 동형 접합을 지닌 사람의 비율이 95%에 달한다. 영국인이 40%인 데 비해 대단히 높은 편이다. 우리 조상은 영국인의 조상보다 식인 풍습에 덜 몰두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식인 풍습을 훨씬 더 오래전에 금지시켰다는 뜻일까.

한국인의 역사가 전쟁으로 점철됐다는 것이 상식인데, 우리 역사와 식인 풍습은 무관했던 것일까. 아니면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돌 때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거나 면역력을 획득함으로써 살아남은 여성들을 이상하게 여겨 마녀로 몰아 화형한 것처럼, 동방의 예의지국을 자랑하던 우리 선조가 식인 풍습의 생존자를 처벌한 것일까. 그렇다면 미풍양속을 해치는 자들을 없앤 행위가 후손이 광우병에 걸릴 위험을 높이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그렇게 보면 한 나라의 소들을 아예 몰살시키거나 초식동물을 잡식동물로 바꾸거나 종간 전염을 가속화함으로써 새로운 질병을 인류에게 도입하는 행위뿐 아니라, 마녀를 화형시키는 것도 식인 풍습을 금지하거나 그 행위자에게 처벌을 가하는 행위도 좋든 나쁘든 간에 인류의 진화에 영향을 끼친 셈이 된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런 행위들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거기에다가 프리온 질병이나 에이즈나 조류 인플루엔자 같은 새 전염병도 사실상 인간 문화 활동의 산물이라고 볼 여지가 많다.

따라서 스탠리 프루시너는 프리온이라는 단백질이 전염 매개체라는 이단적인 학설을 제시함으로써 생물학계에 충격을 안겨주는 한편, 인류의 문화와 진화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마냥 둑을 쌓다가는…

프리온 질병은 그냥 전염병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활동의 산물이 인류에게 낯선 새로운 진화 압력을 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물론 인류는 그런 식의 진화를 억제할 수단도 갖고 있다. 새 전염병이 발생하자마자 신속히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역 체계와 의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광우병에 대해서는 아예 양에게서 소로, 소에게서 인간으로 전염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조치를 강력하게 취하고 있고, 천형(天刑) 취급을 받던 에이즈는 그저 만성 질환의 하나로 바꿔놓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자신의 급격한 진화를 일으킬 요인들을 한껏 찰랑거리게 해놓고 그것을 막겠다고 둑을 더 높이 쌓고 있는 셈이다. 독감이 그렇고 지진이 그렇듯이 평온한 시기가 길어질수록 막상 일이 닥쳤을 때 피해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인류는 과연 언제까지 둑을 쌓을 수 있을까.

 

‘내 남자의 여자’ ‘내 여자의 남자’의 질투심리학

똑같이 바람을 피워도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더 질투하는 반면 아내는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감정적 집착을 보이는 것에 더 질투를 느낀다.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오랜 세월 진화한 남성과 여성의 번식본능 차이 때문은 아닐까.

최근에 불륜과 질투심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인기를 끄는 드라마가 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감초 구실을 하는 한 부부의 집 앞에 누군가 아이를 놓고 간다. 아내는 바람둥이 남편이 밖에서 낳은 자식일지 모른다면서 난리를 피우고, 남편은 아니라고 하면서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이 부부는 남편이 바깥에서 다른 여성과 일회성 관계를 갖느냐 여부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듯하다. 무슨 짓을 하든 자식만은 낳아오지 말라는 투다.

한편 주인공 부부는 정반대 상황을 연출한다. 남편은 아내의 친구와 바람을 피우는데, 마음까지 줌으로써 심각한 갈등을 빚어낸다. 이 드라마는 마치 진화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생물학자들은 자기 연구 분야 쪽으로 다윈이 어떤 말을 했는지 관심이 많다. 진화론을 심리학에 적용하는 일을 하는 진화심리학자들도 다윈의 금과옥조 같은 말을 찾아냈다. 다윈은 “먼 미래에는 심리학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 토대란 바로 자신이 세운 이론인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이다.

질투심 유발 실험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뒤 다윈의 계승자들은 본격적으로 심리학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진화의 산물로 보고 질투심, 추론 능력, 언어, 지위, 짝 선택, 공격성 등 마음의 다양한 측면을 진화 원리로 풀어보고자 시도했다. 남녀 관계를 연구하는 인물인 미시간 대학교의 데이비드 버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92년 버스 연구진은 남녀의 질투심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본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진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놀아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은 상황을 둘로 나눴다. 몸을 줬느냐, 혹은 마음을 줬느냐. 그들은 다각도로 살펴보기 위해 세 가지 실험을 했다.

첫 번째 실험은 불륜에 대해 남녀가 보이는 반응이 서로 다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뤄졌다. 그들은 실험 대상자인 대학생 202명에게 다음과 같은 곤란한 상황을 제시했다.

당신이 깊이 사랑하는 애인이 누군가와 바람 피우는 것을 알았다. 다음 둘 중 어느 쪽일 때 더 심란하겠는가.
(A) 연인이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집착할 때
(B) 연인이 상대와 성관계를 즐길 때

이어서 실험 대상자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뒤 같은 지문을 제시했다. 그리고 다음의 둘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다.

(A) 연인이 상대와 갖가지 체위를 시도할 때
(B) 연인이 상대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결과는 남녀가 큰 차이를 보였다. 감정적 집착과 성관계를 대비시킨 질문에서는 남성의 60%가 성적인 불륜에 더 질투심을 느낄 것이라고 답한 반면, 여성은 고작 17%만 그쪽을 택했고 83%는 연인이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집착할 때 더 질투심을 느낄 것이라고 답했다. 성과 사랑을 대비시킨 질문에서도 비율은 좀 달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상대의 성관계에 더 심란할 것이라고 답한 남성이 여성보다 32% 더 많았고, 여성은 다수가 연인이 상대와 사랑에 빠질 때 더 심란할 것이라고 답했다.

두 번째 실험은 생리적 반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연구진은 남자대학생 21명과 여자대학생 23명의 몸에 자율신경계 흥분 상태와 맥박수를 측정하는 장치를 붙인 뒤 두 가지 상상을 하도록 했다. 하나는 연인이 다른 누군가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상상이고, 다른 하나는 연인이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집착한다는 상상이었다.

결과는 남녀가 큰 차이를 보였다. 남성은 감정적 집착보다 성관계를 상상했을 때 자율신경계가 훨씬 더 흥분했다. 반면에 여성은 성관계보다 감정적 집착을 상상했을 때 더 흥분했다. 맥박수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남성은 연인의 불륜 성관계를 상상했을 때 맥박수가 더 높아진 반면, 여성은 양쪽 상상 때 맥박수가 비슷하게 올라갔다.

   

남자 짓누르는 ‘선택압’

심리학자 데벤드라 싱은 전세계 남성들이 허리와 엉덩이의 비율이 0.7인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그 비율이 여성의 번식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세 번째 실험에서는 남성 133명, 여성 176명 총 309명으로 실험 대상자를 더 늘려서 앞의 실험을 검증하는 한편, 성관계 경험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서 답이 달라지는지를 살펴보았다. 여성은 성관계 경험 유무가 답에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성관계 경험이 있는 남성은 55%가 감정적 불륜보다 성적 불륜에 더 심란해한 반면, 성관계 경험이 없는 남성은 그 비율이 29%로 훨씬 낮았다.

이 실험 결과는 연구진이 세운 진화심리학 가설에 들어맞았다. 포유류가 다 그렇듯, 인간의 정자와 난자도 여성의 몸속에서 수정된다. 따라서 여성은 낳은 아기가 자신의 자식임을 100% 확신할 수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 못하다. 난자를 수정시킨 것이 자신의 정자인지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니까. 이 불확실성은 남성에게 진화적으로 꽤 골치 아픈 문제를 안겨준다.

여성이 불륜을 통해 낳은 아이를 자기 아이인 줄 알고 기른다면, 유전적으로 볼 때 그 남성 처지에서는 여간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는커녕 엉뚱한 유전자를 퍼뜨리는 일에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쏟는 셈이니까. 그에 비하면 여성이 멋진 남자 배우에게 홀딱 반해 팬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는 행위는 별문제가 안 된다.

따라서 남성은 오쟁이 지는(아내가 외간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막는 강력한 선택압(選擇壓)을 받아왔어야 한다. 오쟁이 져도 허허 웃고 마는 인품 좋은 남성들이 있었다면 그 남성들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남성이 성적인 질투심을 강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그런 선택압의 결과라고 본다. 성적 질투심이 약한 남성은 후손을 적게 남기는 바람에 세월이 흐르면서 대가 끊겼을 것이고, 질투심이 강한 남성은 후손을 많이 남겨서 주류가 됐다는 것이다.

한편 여성은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자식을 키우기가 편하다. 남성이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육아에 쏟을수록 그만큼 여성 자신의 유전자가 살아남아 후대로 전달될 가능성이 커진다. 일부일처제에서 남성이 바람을 피울 때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 닥칠 위험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냥 딴 여성과 가볍게 바람을 피운다면 자신과 자식에게 투자될 비용 가운데 일부를 잃는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딴 여성에게 아예 홀딱 반해 집착한다면 혼인 관계는 파탄나고 육아 투자를 전혀 못 받을 가능성이 높다(그런 위험을 막기 위해 이혼한 아버지에게 양육비를 의무적으로 내도록 하는 법 조항이 있긴 하다). 일부다처제하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다른 부인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감정적으로 그 쪽에 홀딱 빠지면 육아 투자분이 더 많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연구진은 남성은 여성의 감정적 불륜보다 신체적 불륜에 더 심하게 질투심을 느끼고, 여성은 남성의 신체적 불륜보다 감정적 불륜에 더 심하게 반응하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실험 결과는 가설과 들어맞았다.

 

질투의 심리

연구진은 이 실험에 한계가 있다고 인정한다. 실험 대상자가 대학생들이기에 연령과 문화가 한정돼 있으며, 이 남녀의 반응 차이가 정말로 오쟁이 지는 것 대 투자 상실을 가리키는 것인지, 남성이 섹스 자체에 더 관심이 있고 여성은 사랑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지 불명확하며, 남녀 각 성별 내에서의 개인별 반응 양상을 더 상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여성은 성경험 유무와 질투심이 별 상관관계가 없는 반면 남성은 왜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연구진은 이 실험이 성별과 질투심이 상관관계가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했다. 진화심리학을 뒷받침하는 경험 증거인 셈이었다.

버스를 비롯한 진화심리학자들은 후속 연구를 통해 질투의 심리와 그것이 진화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상세히 밝혀냈다. 다양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설이 제기됐고 각각에 대한 경험 증거를 찾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데이비드 버스와 마티 하셀튼은 남녀의 질투심 차이에 관한 가설들을 이렇게 정리했다.

성적 불륜 신호들에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질투심을 느낀다.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가 맞는지 불확실해지고 여성이라는 번식 자원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성은 감정적 불륜 신호들에 더 질투심을 느낀다. 남성이 제공하는 자원이 경쟁자에게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자가 질투심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경쟁자가 육체적 매력을 지닌 사람일 때는 여성이 더 질투하고, 부나 지위처럼 조건이 더 좋은 사람일 때는 남성이 더 질투한다.

   

한편 질투심은 자기 짝을 지키려는 행동도 유발한다. 남성은 자기 짝이 매력적인 여성일 때 질투심이 더 발휘돼 지키려 애쓰며, 여성은 연인이 조건 좋은 남성일 때 지키려 더 애쓴다. 그리고 여성의 배란기가 가까워지면 성적 불륜의 위험이 커지므로 남성이 짝을 지키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남녀는 불륜의 단서를 눈치채고 마음에 담아두는 성향도 다르다. 남성은 성적 불륜에 관한 단서들을 더 잘 기억하며, 여성은 감정적 불륜의 단서들을 더 잘 기억한다.

불륜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드라마에서처럼 처음에는 날카롭게 감정 대립을 하다가, 용서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서하든지 헤어지든지 할 것이다. 하지만 남녀는 거기에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토드 섀클포드와 버스 연구진은 앞서 말한 버스의 첫 번째 실험에 어느 행동이 더 용서가 안 되고 갈라설 마음을 더 먹게 하는가라는 질문들을 추가했다. 그리고 자신의 짝이 누군가와 열정적인 성관계를 갖는 동시에 감정적으로도 몰입할 때에는 어느 측면이 더 용서가 안 되고 갈라설 마음을 먹게 하는가라는 질문도 던졌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남성은 짝의 감정적 불륜보다 성적 불륜이 더 용서가 안 된다고 답한 반면, 여성은 감정적 불륜이 더 용서가 안 된다고 답했다. 몸도 주고 마음도 준 상황에서도 여성보다는 남성이 몸이라는 측면이 더 용서가 안 된다고 답했다. 즉 불륜을 알아차렸을 때 남성은 감정적 불륜보다 성적 불륜을 더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성적 불륜이 일어났을 때 결별할 가능성이 높다.

불륜을 용서할 것인지에 대한 남녀의 이런 반응 차이도 인류 진화의 산물이다. 성적 불륜이 저질러졌을 때 다른 누군가의 자식을 키울 위험이 커지는 쪽은 남성이며, 따라서 남성 쪽이 더 큰 비용 부담을 안게 된다. 그런 진화적 역사를 거쳤기에 남성이 성적 불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반면 여성은 감정적 불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쪽이 남성이 장기간에 걸쳐 제공할 자원을 빼앗길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사실들을 그냥 나열한 듯하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지겹도록 보아온 연애나 불륜 이야기들이지 않은가. 하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은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럽게 보이기도 하는 그런 현상들이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 전략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파했다. 질투심 같은 심리적 현상들이 감정적으로 미숙해서 생기는 것도, 자제를 못해서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것도, 인성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생기는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허리와 엉덩이 비율 0.7의 비밀

진화심리학자들은 질투심뿐 아니라 남녀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다른 성향 차이들도 문화적 구성물이 아니라 선택을 거쳐 진화한 생물학적인 것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버스는 전세계 남녀의 성적 취향을 조사한 끝에 남성들은 원칙적으로 무한히 많은 자식을 가질 수 있으므로 여성보다 바람기가 더 다분한 반면, 여성은 평균적으로 한 해에 한 명밖에 자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짝을 선택할 때 더 신중한 경향을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와 소득 수준과 지능이 높고 건강하며, 착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남성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버스는 남성의 그런 특징들이 가족을 잘 부양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남성이 젊은 여성을 선호하는 현상도 본능적으로 여성의 번식 잠재력을 가늠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심리학자 데벤드라 싱은 전세계의 남성들이 허리와 엉덩이의 비율이 0.7인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그 비율이 여성의 번식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보면 질투심도 바람기도 상대의 조건을 따지는 속물근성도 멋진 몸매를 선호하는 성향도 다 이유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때로 정도를 벗어나서 날뛰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드라마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종종 보듯이 질투심은 때로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드잡이질을 하는 수준을 넘어서 상대를 살해하는 지경으로 치닫곤 한다. 바람기는 심심치 않게 집안을 파탄내곤 하며, 요모조모 따지는 근성은 때늦은 후회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멋진 몸매를 따지다가 사회 전체가 비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본래 그것들이 진화의 산물로서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과하지 않도록 막는 수단도 진화했어야 하지 않을까?

진화심리학은 현대 사회에서 그런 병적인 증상들이 나타나는 이유를 우리의 심리적 성향이 인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원시시대 환경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원시시대에는 그렇게 때로 과하다 싶은 행동을 하는 것이 나름대로 도움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시시대 이후로 인류는 급격히 발전해 수많은 사람이 우글거리는 현대 도시들을 건설했다. 질투심 같은 뇌의 특정 기능들은 그 변화를 미처 따라잡지 못했을 수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연인이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하면서 뇌를 촬영했다. 그러자 성적 행동 및 공격 행동과 관련이 있는 편도핵과 시상하부가 흥분하는 것을 발견했다. 즉 질투심은 공격성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우리 뇌에 새겨진 본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 둘러싼 논란

남녀의 성향 차이를 진화의 산물로 보는 관점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것이 기존의 불평등한 관계를 합리화하는 논거로 쓰일 수 있고, 사회나 문화나 교육을 통해 남녀의 성향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자 새러 블래퍼 르디는 현대 여성의 경제활동 기회가 적으니 경제적으로 더 능력 있는 짝을 고르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과학철학자 데이비드 불러는 진화심리학이 언뜻 볼 때는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 많다고 말한다. 남성이 번식 잠재력이 큰 젊은 여성을 선호하고 여성이 지위가 높은 남성을 선호하는 쪽으로 진화했다거나, 남성이 성적 불륜에 더 질투하고 여성이 감정적 불륜에 더 질투한다거나, 부모가 친자보다 의붓자식을 더 학대한다거나, 둘째가 첫째보다 진취적이고 모험적이라는 등의 연구 결과들이 다른 가설들을 배제시킬 만큼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브루스 윌리스처럼 나이를 꽤 먹은 할리우드 남자 배우들이 젊은 여자를 끼고 다니고 ‘플레이보이’ 모델이던 안나 니콜 스미스가 20대에 90세가 다 된 석유재벌 하워드 마셜과 혼인한 사례를 보면 진화심리학적 주장이 옳다고 여겨지지만, 젊은 남자 배우가 브루스 윌리스의 전처인 40대의 데미 무어와 사귀고 유명 배우이면서도 평생 반려자와 늙어가는 배우도 많다.

첫째로 태어난 사람이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는 반면 둘째는 자유분방한 경향을 보이는 식으로 출생 순서에 따라 성향이 달라진다는 연구로 유명한 프랭크 설로웨이는 진화심리학적으로 볼 때 첫째는 부모의 자산과 유전자를 독차지하고 있었기에 둘째가 태어나면 잃을 것이 많으므로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고 말한다. 따라서 첫째는 권위에 수긍하는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반면에 동생들은 처음부터 부모의 기대 수준도 낮고 기대에 어긋나도 잃을 것이 별로 없으므로 변화와 모험을 선호한다. 그래서 세계를 혁신시킨 사람들은 대부분 첫째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혁신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은 설로웨이도 첫째가 아니다. 하지만 반박하는 사람들은 반대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첫째였다.

구체적인 사례마다 논란이 분분하긴 하지만 진화심리학은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았고, 인간의 심리적 적응 양상들을 새롭고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인 틀을 제공한다. 제프리 밀러는 ‘메이팅 마인드’에서 진화심리학이 지나치게 억지 해석을 한다는 견해를 반박하면서, 오히려 인간 특유의 창의적인 능력들을 소홀하게 다루는 등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본다.

그는 음악, 미술, 지능, 학습 등도 진화의 간접적인 산물이 아닌 짝 선택에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선택된 형질들이라고 말한다. 진화심리학자마다 인간 마음의 다양한 특성들을 해석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곤 하지만, 진화심리학이 언제까지나 알 듯 모를 듯한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처럼 여겨졌던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진화론과 생물학을 기반으로 한 자연과학과 인문학 및 사화과학의 통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성장과 장수, 번식과 노화의 희비 쌍곡선

지금도 지구촌 실험실에선 ‘장수’에 관한 숱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선충의 수명을 6배나 늘리는 데 성공했으니 조만간 인간의 수명도 700세까지 늘어나지 않을까. 젊음을 유지하면서 수명도 늘어난다면 그건 금상첨화. 인류의 꿈인 수명 연장과 노화 지연에 관한 대단한 실험들, 그리고 그 가능성.

늙는 것을 반길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세기에 이뤄진 의학의 발전 덕분에 인류의 평균 수명은 크게 늘어났지만, 사실 그것은 인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

평균 수명은 늘어났지만 인간의 최고 수명은 그다지 늘어나지 않았다. 의학이 덜 발달하고 평균 수명이 30여 년에 불과했다던 먼 옛날에도 100세 넘게 장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천수를 누렸다고나 할까. 인간의 타고난 수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늘어난 것 같지 않다. 여전히 120세 정도가 최고 기록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삼천갑자동방삭’처럼 절대적인 수명이 늘어나는 것인데 말이다.

젊게 더 오래 사는 법

또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10~20대의 젊음을 유지하면서 늙어가는것이지, 지금처럼 기운 빠진 늙은 육신으로 오래 버티는 것이 아니다. 현재 늘어난 평균 수명은 젊음을 연장시킨 것이 아니라, 늙음을 연장시킨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과학은 노화와 장수 쪽으로는 아직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저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식단을 조절하고, 과식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적절히 스트레스를 가하고, 즐겁게 생활하고, 명상하고, 술이나 담배처럼 몸에 해로운 것을 피하면 노화와 장수에 보탬이 된다는 일반적인 믿음을 간간이 확인시켜 주는 결과를 내놓는 정도다.

1990년 의학자 조레스 메드베데프는 노화를 설명하는 생물학 이론이 무려 300개가 넘는다고 말한 바 있다. 노화에 관한 연구가 일관된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단편적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최근 들어 노화와 장수의 비밀을 밝히려는 노력이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하다. 사람은 왜 늙는 것일까. 젊게 더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1980년대 초, 마이클 로즈는 초파리를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을 했다. 그중에 노화를 다룬 고전적인 실험도 있었다. 그는 진화의 관점에서 노화 이론들을 실험을 통해 검증하겠다고 나섰다. 실험은 아주 간단했다. 그는 시험관에 초파리를 키웠다. 초파리가 알을 낳으면 그 알을 수거해 다시 새 시험관에서 부화시켰다. 초파리를 배양하는 사람들이 으레 매일같이 하는 일이었다.

초파리는 한 세대가 거의 2주에 불과하므로 짧은 기간에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는 초파리를 두 집단으로 나눴다. 한쪽 집단에서는 맨 처음 낳은 알들을 수거해 부화시키고 그 초파리들이 자라면 마찬가지로 맨 처음 낳은 알을 수거해 다시 다음 세대를 부화시켰다. 다른 한쪽 집단에서는 가장 나중에 낳은 알들을 골라서 번식시켰다. 결과는 놀라웠다. 후자 집단의 평균 수명이 암컷은 33일에서 43일로 약 30% 증가했고, 수컷은 30일에서 44일로 약 13% 늘어났다. 후자 집단의 초파리들은 더 오랫동안 살아 있어야 후손을 남길 수 있으므로 수명이 늘어났다.

로즈의 이런 실험은 그전까지 주로 이론상으로 논의되던 노화와 수명 연구에 경험적 증거를 제공한 거의 최초의 사례였다. 로즈는 노화의 진화 이론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전까지 생물학자들 중에는 자동차 같은 기계 장치가 오래 쓰면 쓸수록 점점 고장 나는 부품이 많아져서 결국 폐기해야 하는 것처럼, 생물의 노화도 나이가 들수록 손상된 것들이 점점 쌓이면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자동차를 많이 쓸수록 더 빨리 낡는 것처럼 몸도 많이 쓸수록 더 빨리 늙는 것일까. 몸의 활동은 세포 수준에서 보면 각종 생화학 반응들을 토대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생화학 반응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면 더 빨리 늙지 않을까. 큰 동물에 비해 작은 동물은 체적에 비해 표면적이 넓으므로 신진대사가 더 활발해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

 

세균은 영원히 산다

그렇다면 작은 동물이 더 빨리 늙는 것일까. 곰 같은 동물은 겨울잠을 잘 때 신진대사가 느려진다. 그러면 그만큼 더 수명이 늘어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몸의 활동이 어떻게든 노화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동물의 수명을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프리카 코끼리의 수명은 60년, 개의 수명은 34년, 집쥐의 수명은 2.5년이다. 지렁이의 수명은 6년이고, 재갈매기의 수명은 41년이다. 흡혈박쥐의 수명은 20년이다. 큰 동물이 작은 동물보다 더 오래 사는 듯하다.

   

2005년 당시 부부 나이가 205세여서 기네스북에 오른 미국인 허버트 브라운씨와 매그너 여사.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민물에 사는 히드라는 늙지 않는다. 단세포 생물로 가면 아예 노화와 수명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기회만 생기면 둘로 나뉘어 한없이 증식하는 세균은 영원히 산다고도 할 수 있다. 다세포 생물의 몸에서도 늙지 않는 세포들이 있다. 생식세포가 그렇고, 줄기세포가 그렇다. 그런 세포들은 장기간 열심히 일할수록 손상이 축적되어 노화가 일어난다는 이론에 들어맞지 않는다.

물론 그 이론들이 아예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그 이론들은 자유 라디칼, 그중에서도 이른바 활성산소라고 하는 유해 물질이 DNA와 단백질을 비롯한 세포 성분들을 손상시켜서 동맥 경화, 관절염, 암 등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퇴행성 질환에 관여한다고 본다. 많은 연구 결과는 그렇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활성산소는 세포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을 하는 미토콘드리아를 손상시킨다. 미토콘드리아 손상은 당뇨병, 치매 같은 퇴행성 질환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러니 호흡을 깊게 하여 호흡 수를 줄이면 장수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호흡을 적게 하면 산소 공급량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미토콘드리아의 활동도 줄어들고 활성산소의 생산량도 줄어들며 신진대사도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단편적이다. 생식세포처럼 활성산소로 설명이 안 되는 현상도 있다. 그것이 바로 노화 이론이 수백 가지나 되는 이유이다. 광고에 자주 등장하여 널리 알려진 엘리 메치니코프는 장내 세균이 유해 물질을 생산해 노화를 일으킨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산균을 열심히 먹어서 장내 세균을 억제하면 노화를 늦출 수 있을까. 그 이론은 지금도 광고를 통해 계속 설파되면서 소비자에게 혹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있다.

노화는 적어도 다세포 생물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 모든 현상을 일관적으로 설명할 일반 이론이 없을까.

마이클 로즈는 진화 관점에서 보면 해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추론했다. 그는 초파리가 번식 연령이 되어 알을 낳고 나면 그 초파리 개체가 받는 자연선택의 강도는 약해진다고 보았다. 이미 후손이 생겼으니 알을 낳은 개체가 어찌 되든 자연은 관심을 덜 보인다는 의미다.

 

번식 뒤 노화?

자연선택은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주시하면서 해로운 돌연변이를 지닌 개체들을 솎아낸다. 하지만 개체가 이미 번식을 끝냈다면 감시가 좀 느슨해질 수도 있다. 양육을 하거나 돕는 개체가 아니라면 말이다. 따라서 그 개체는 해로운 돌연변이가 쌓이고 몸에 손상이 축적돼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번식이 일어난 뒤에 노화가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벨상을 받은 피터 메더워 같은 학자는 그 견해를 지지했다. 아니면 해로운 유전자들이 발현되지 않고 있다가 말년에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다. 조지 윌리엄스 같은 학자가 주장한 이 견해는 한 유전자가 여러 방면으로 복합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유전자가 번식이 이뤄질 때까지는 유익한 영향을 끼치지만 번식이 끝난 뒤에는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면 자연선택은 그 유전자를 선호할 것이다. 가령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은 성적 성숙을 자극하지만, 나중에 유방암에 걸릴 확률을 높인다. 따라서 에스트로겐 관련 유전자들은 윌리엄스 이론을 뒷받침하는 사례일 수 있다.

로즈는 메더워의 이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실험이 윌리엄스의 이론을 지지한다고 보았다. 전자가 옳다면 초파리의 번식 시기를 늦췄을 때 해로운 돌연변이들의 영향이 심하게 나타나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번식 시기를 늦추자 오래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졌고, 그에 따라 장수 유전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즉 자연선택이 심하게 작용하는 시기를 늦추자 초파리의 수명이 늘어난 것이다.

수명과 번식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는 많이 나와 있다. 1950년대에 메이너드 스미스는 초파리의 암수를 격리시키거나 불임으로 만들면서 번식과 수명이 상관관계가 있는지 조사했다. 그러자 번식을 적게 하거나 불임인 초파리가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은 어떨까. 최근에 미국에서 결혼한 사람에 비해 독신으로 사는 사람의 수명이 더 짧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독신자는 식생활이 불규칙하고 정신적으로 위안도 덜 받고 해서 더 일찍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초파리와 정반대인 셈이다. 그래도 사극을 보면 젊은 환관보다 늙은 환관이 등장하는 쪽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거세(去勢)나 금욕(禁慾)이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오랜 속설이 아니던가.

스티븐 어스태드는 마이클 로즈의 고전적인 연구에 자극을 받아서 노화의 진화 이론이 포유류에도 들어맞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자연선택이 극심하지 않은 곳에 산다면 동물도 좀 느긋하고 여유 있게 살아가지 않을까. 동물원에서 보살핌을 받는 동물들이 자연 상태의 동물들보다 더 오래 사는 경우가 많듯이, 같은 동물이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곳에 살면 더 오래 살지 않을까.

   

진화적으로 말하면 포식자 같은 위험 요인이 많은 환경에서 살면 장수하는 데 에너지를 투자할 여유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생물들은 빨리 성장하고 빨리 번식하는 전략을 택하기 쉽다. 그러나 상황이 정반대라면?

어스태드는 미국의 주머니쥐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온갖 위험 요소가 있는 육지에 사는 주머니쥐와 포식자가 거의 없는 섬에 사는 주머니쥐를 비교했다. 예상대로 환경이 좋은 섬에 사는 주머니쥐는 육지 주머니쥐에 비해 25~50% 더 오래 살았고 노화 속도도 훨씬 느렸다. 반면 번식률은 떨어졌다. 그 외에도 다양한 동물을 대상으로 비슷한 연구 결과들이 나왔다.

 

느리게 사는 전략

마이클 로즈의 실험은 일찍 혜택을 제공한 뒤 해를 끼치는 유전자들을 인위적으로 없애는 방법이었다. 번식 혜택을 더 늦게 제공하는 유전자들을 선택하면 그 유전자들이 해를 끼치기 시작하는 시기도 그만큼 더 늦어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혹시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인위적인 현상인지 자연적인 현상인지를 떠나 현재 여성의 초경 연령은 빨라지고 첫 출산 시기는 늦어지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일종의 자연 실험인데 그것이 수명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파악하기가 좀 까다로울 듯도 하다. 동물들에게서는 출산율 저하와 번식 시기의 지연이 수명 연장과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나타나고 있으니, 혹시 인간도 그렇지 않을까.

마이클 로즈가 집단유전학적 방법으로 초파리를 실험하던 시기를 지나서 이제는 장수에 관련된 유전자를 탐색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로즈의 실험은 장수가 번식 시기 및 노화와 관련된 현상이며, 한 유전자가 아니라 여러 유전자가 관여하는 복합적인 현상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장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도 혹시 있지 않을까.

마이클 클래스와 톰 존슨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1988년 예쁜꼬마선충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찾아냈다. 예쁜꼬마선충은 길이가 1mm에 불과하고 수명이 2~3주에 불과한 아주 작은 벌레다. 그들이 발견한 돌연변이 유전자는 선충의 수명을 무려 65%나 늘렸다.

이어서 1993년 신시아 캐넌 연구진은 선충의 수명을 두 배로 늘리는 ‘daf-2’와 ‘daf-16’이라는 유전자를 발견했다. 캐넌은 이 유전자가 호르몬과 관련된 연쇄적인 생화학 반응들을 촉발한다고 말한다. 그후 여러 연구진은 그 생화학 반응이 열, 스트레스, 중금속, 자외선, 미생물 저항성, 항산화 작용에 관한 유전자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내놓았다. 그래서 캐넌은 ‘daf-2’ 유전자가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다고 말한다. 캐넌은 선충의 수명을 현재 6배까지 늘려놓았다.

이 연구 성과를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캐넌의 연구는 초파리와 생쥐 연구에 적용된 바 있고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예쁜꼬마선충과 인간의 유전체는 둘 다 완전히 해독되어 있으며, 둘은 유전자의 약 50%를 공유한다. daf-2 유전자는 인간의 인슐린 수용체, 인슐린유사성장인자(IGF-1)라는 호르몬의 수용체를 비롯한 세 가지 수용체 유전자와 비슷하다. Age-1 유전자는 인간 세포의 표면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수용체 유전자와 비슷하다. 또 daf-16 유전자는 전사인자를 만드는데, 그 전사인자는 포유동물 세포의 인슐린과 IGF-1에 조절되는 전사인자들과 비슷하다.

 

700세까지 산다고?

1996년 안드레이 바트케는 정상보다 수명이 50% 더 늘어난 생쥐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어서 다른 연구진이 비슷한 생쥐들을 찾아내거나 유전공학적으로 만들어냈다. 이 생쥐들은 저마다 다른 호르몬 계통에 이상이 있었는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IFG-1이라는 호르몬을 만들도록 자극하는 또 다른 성장 호르몬이 없거나 그 호르몬에 반응을 안 한다는 점이었다. IGF-1은 세포 분열과 성장에 관여하는 호르몬이다. 두 호르몬은 정상적인 발달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

역설적으로 바트케의 ‘수명이 긴 생쥐’는 몸집이 보통 생쥐의 절반에 불과하다. 성장을 대가로 긴 수명을 얻은 듯하다. 성장 호르몬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며, 그래서 근육과 뼈가 약해지는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기존 상식이었다. 그래서 노화 억제를 위해 성장호르몬을 주사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의 생쥐들은 성장호르몬을 못 만드는 돌연변이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몇 가지 다른 중요한 호르몬도 만들지 못했으며, 불임인 개체도 많았다. 그래서 바트케는 성장호르몬 주사가 장수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이론을 편다.

이 돌연변이 생쥐들은 백내장, 관절염 같은 노화에 따른 질병에 덜 걸리며, 세포를 배양해 실험했을 때 열이나 산화제 같은 스트레스에 저항성이 더 강했다. 따라서 예쁜꼬마선충과 생쥐의 노화 억제와 수명 연장 방식은 유사성이 아주 많다.

이런 유사점들에 초점을 맞추면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선충의 수명이 6배 늘어났으니, 인간의 수명도 약 700세로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캐넌은 지극히 낙관적이다. 그는 아예 ‘일릭서(Elixer·불로불사약)’라는 이름의 제약회사까지 설립했다. 캐넌은 논문과 인터뷰에서 노화 과정이 유연하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점이 자기 연구의 큰 성과라고 말했다. 노화 과정은 쓸수록 닳는 자동차의 노후화 과정과 다르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명이 늘어난 예쁜꼬마선충은 늙은 단계가 연장된 것이 아니라 젊은 단계가 연장된 것이다. 즉 노화가 지연된 것이다. 그것은 노화에 따른 퇴행성 질환들의 발병 시기도 그만큼 늦출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수명을 연장시키는 유전자가 발견됐다고 노화와 수명 연장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 연구는 이제 겨우 도약할 발판을 마련한 것에 불과하다. 당뇨병 치료제로 쓰이는 인슐린은 수명 및 노화와 어떤 관계일까. 인슐린은 피 속의 포도당 농도를 조절하는 구실을 하니까 혹시 식단과 노화 사이에도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발견된 유전자는 노화와 장수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이지 해답은 아니다. 앞으로 어떤 연구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이 분야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엉뚱한 질문이겠지만 그런 연구 성과에 집착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굳이 진화생물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대 문명이 인류가 일찍이 접하지 못한 유별난 환경이라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다. 인위적으로 온갖 영양물질과 합성물질을 첨가한 음식, 어디에서나 접하는 각종 오염물질, 운동 부족, 항생제를 비롯한 온갖 약물, 스트레스를 주는 사회관계 등. 이런 유례없는 색다른 환경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명을 연장시킬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 어쩌면 불합리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생물은 진화를 거치면서 한정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생존과 번식 양쪽에 배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생존에 더 많이 투자하고 위험한 환경에서는 번식에 더 많이 투자하며, 번식을 끝내거나 양육 의무를 다하면 급격히 늙는 경향은 그런 적응 양상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리 사회는 그런 생물학적 적응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회가 안정되고 풍족해지자마자 번식보다는 생존 쪽에 자원을 더 많이 배분하는 경향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수명 연장의 꿈

인구 증가율은 급격히 떨어지고 출산 연령대는 급격히 높아졌다. 평균 수명 증가 속도도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삼박자가 고루 들어맞는 셈이다. 거기에다가 노화 현상을 늦추기 위한 운동, 음식, 약 등 갖가지 방안이 쏟아지고 있다. 과연 이 추세가 노화가 지연되고 절대 수명이 연장되는 쪽으로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아직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수명을 연장하는 자연 실험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노화의 진화 이론이 말하듯이, 번식을 늦추어 자연선택의 강도를 약화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치매, 관절염, 백내장 같은 노화에 따른 질병의 발생 빈도도 낮아지고 발생 연령도 늦어질 텐데 말이다. 마이클 로즈 같은 과학자는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보다 그쪽을 선호할 것 같다.

 

화성에 ‘축소판 지구촌’ 건설할 수 있을까?
밖은 공기가 없는 외계 행성. 당신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돔형 거주지’ 안에서 2년을 살아야 한다. 돔 안의 대기, 땅, 숲, 바다도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들이다. 인공 생태계는 특정 생물의 증가 등 약간의 변화에도 커다란 위기에 빠질 수 있어 이를 유지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는다 해도 거주자들에게는 답답함, 우울증, 공격적 성향이 나타날 수 있다. 당신은 이 밀폐된 식민지에서 행복하게 2년을 보낼 수 있을까. 미국 애리조나주에 건설된 ‘바이오스피어(Biosphere)2’ 전경.

입자 가속기, 인간 유전체 계획, 우주 탐사선, 허블 망원경 등은 엄청난 비용과 자원이 소요되는 대규모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실험은 인류의 지식을 크게 늘리며, 그런 지식은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밑거름이 된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가용 자원이 많아지면서 실행 가능한 실험의 규모도 그만큼 커졌다. 앞선 시대의 사람들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만한 실험들을 다음 세대는 별 거리낌 없이 해내고 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공상으로 치부돼온 ‘우주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도 다음 세대는 건설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만일 엄청난 돈과 자원이 소요된 거대한 실험이 실패한다면? 실패의 충격도 규모의 함수인지라 그 여파 역시 쓰나미처럼 커서 인류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과학의 역사가 보여주듯 그런 실패는 한 분야의 발전을 수십 년 동안 지체시킬 수도 있다. 더구나 정부 지원을 받아서 수행된 대규모 실험의 실패는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실패로부터 얻은 것이 있다’는 교훈은 ‘피 같은 세금을 낭비했다’는 비난의 방패막이로 내세우기에는 좀 약하다. 주로 민간 기금으로 충당했다면 그나마 나을지 모르겠다.

1987년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서 거대한 실험이 시작됐다. 지구 생물권의 축소 모형을 만들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이었다. 그 실험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 실패한 실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선사했다.

바이오스피어(Biosphere·생물권)는 지구에서 생물이 살아가는 공간을 말한다. 예전에는 지하의 암반이 끝나고 토양이 나오기 시작하는 곳부터 하늘에서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까지, 지구 전체에서 얇은 껍질에 해당하는 영역에만 생물이 산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하늘을 미생물이 날아다니고, 심해 바닥이나 지하 10km의 바위 속에도 생물이 살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생물권은 대폭 넓어졌다. 탐사가 진행될수록 더 넓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지구를 1.25㏊로 축소하다

‘바이오스피어2’는 폐쇄된 공간에 그 생물권을 축소시켜 건설해보자는 야심찬 계획의 이름이다. 본래 인간의 조상이 탁 트인 사바나에서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비좁은 공간에 있으면 갑갑함을 느낀다. 심하면 폐쇄공포증을 일으키고 정신착란도 나타날 수 있다. 영화 ‘어비스’나 ‘스피어’ ‘포세이돈 어드벤처’ ‘패닉룸’ 등에서 보듯 폐쇄된 공간에서 인간이 겪는 광적인 심리상태는 영화, 드라마, 소설의 소재로 흔히 활용되곤 한다. 사고로 엘리베이터에서 몇 분만 갇혀 있어도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기 십상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험심은 끝이 없는지라, 그런 폐쇄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사람이 내뱉은 이산화탄소를 소비하고 사람이 들이쉬는 산소를 내뿜는 녹조류가 가득 담긴 통에 들어가서 얼마나 오래 사는지 직접 실험한 사람도 있었고, 밀폐된 통 속에 들어가서 바다 밑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한 사람도 있었다. 이런 실험들을 괴짜들의 모험이라고 비웃은 사람도 많았겠지만, 인류가 비좁은 우주 탐사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날아가고, 잠수정을 타고 컴컴하기 그지없는 수km 심해까지 탐사할 수 있게 된 것은 다 그런 괴짜들 덕분이기도 하다.

1984년 미국 애리조나주의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에 자체 유지되는 축소판 생물권을 조성해보자는 계획에 따라 기획자들은 벤처회사를 설립하고 투자를 유치했다. 마거릿 어거스틴과 존 앨런이 생물권을 만드는 일을 맡았고, 에드워드 바스는 투자 유치를 담당했다. 그들은 여러 과학자와 공학자를 불러 학회를 여는 등 분위기를 조성했고 소규모 예비 실험도 수행하면서 차근차근 바이오스피어2 계획을 추진했다. 1987년 그들은 1.25㏊ 의 부지에 강철과 유리로 거대한 구조물을 세웠다. 겉으로 보면 유리 온실을 확대한 것과 비슷했다. 이어 그곳에 전세계의 생물종(種)을 들여넣었다.

그들은 구조물 내부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내부에서 공기와 물과 자원이 순환되면서 자족적인 생태계가 유지되도록 한다는 게 목표였다. 그들은 내부 면적을 나눠 바다, 사막, 사바나, 우림, 습지 등 지구의 다섯 가지 주요 생태계와 농경지, 인간 거주지를 조성했다. 지구의 다양한 생물이 고루 포함될 수 있도록 3000종을 넣었다. 우림에는 아마존 밀림에서 300종이 넘는 식물을 가져와 심었고, 카리브해에서 산호초를 뜯어오기도 했다. 습지를 조성하기도 했고, 다양한 지역의 다육 식물들을 모아서 섞어 심기도 했다. 그리고 논, 밭, 과수원과 닭 등을 키우는 농장도 조성했다.

수년이 지난 1991년 9월 남녀 8명이 바이오스피어2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굳게 닫히고 그들은 외부와 고립된 채 자족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농사를 짓고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하면서 2년을 지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은 그 안의 생태계가 자체 유지되면서 진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미래에 ‘거주형 우주선’은 인간의 또 다른 활동무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영화 ‘스타워즈’의 한 장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균형

무려 1억5000만달러가 투입된 엄청난 계획이었기에 당연히 많은 전문가가 이 계획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저명한 생태학자, 생물학자, 공학자 등의 자문을 거쳤고, 예비 실험까지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물과 환경은 그들이 기대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연구자들이 들어가고 시설을 밀폐시키자마자 곧 산소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기 중 산소 농도는 21%가 정상인데, 15% 이하로 떨어졌다. 반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외부보다 3~7배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다. 예상보다 산소를 소비하는 생물이 많은 것이 분명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날씨가 흐려서 식물의 광합성 활동이 줄어드는 바람에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기능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무튼 그래도 광합성이 일어나는 낮에는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뱉으므로 대기 조성이 좀 완화됐지만, 밤에는 식물도 산소 호흡을 하므로 대기 조성이 밤낮으로 급격히 요동쳤다.

초기에 산소 농도가 급격히 떨어진 것은 토양 미생물의 활동 때문임이 드러났다. 농경지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유기물 함량이 높은 흙으로 조성했는데, 흙 속의 미생물이 그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한 탓이었다. 너무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한꺼번에 배출되는 바람에 식물들이 미처 흡수하지 못할 지경이 됐다.

바다는 원래 이산화탄소를 저장함으로써 대기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하지만, 바이오스피어2의 작은 바다는 지나치게 증가한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기엔 용량이 부족했다. 너무 많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바닷물이 산성으로 변했고, 이 때문에 애써 조성한 산호가 녹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연구자들은 중탄산염을 넣어서 바다를 중화시켜야 했다.

게다가 식물의 생장 속도도 더뎠다. 원래는 숲에서 나온 잔해들을 썩히거나 퇴비로 만들어서 재순환시켜야 했지만, 그러면 이산화탄소도 재순환될 터였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가지치기를 하고 솎아줌으로써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한편으로, 수거한 식물 잔해들을 지하에 쌓아뒀다. 그리고 사바나의 건기를 없애고 사막의 강수량을 늘림으로써 식물 생장을 도모했다. 그 과정에서 사바나의 식물이 사막으로 침입하면서 원래 사막에 조성했던 많은 식물이 사라지고 말았다.

기후가 이렇게 변하자 꽃가루받이를 매개해야 할 곤충들이 죽어버렸고, 대신 해충은 늘어났다. 그에 따라 밭의 수확량이 줄어들어 식단이 부실해졌다. 밀폐된 돔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불개미를 없애고 잡초와 바닷말을 뜯어내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영양 부족으로 사람들은 말라갔다. 결국 운영자들은 인위적으로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식량도 공급했고, 조명도 추가 설치했다.

또한 연구자들은 폐쇄된 공간에서 환경이 열악해질 때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서로 티격태격 다퉜고 파벌을 짓기도 했으며, 결국에는 와해 상태에 이르렀다. 어쨌든 그들은 계획대로 2년을 버티고 비쩍 마른 피폐한 몰골로 바깥세상에 나왔다.

산소는 줄어들고, 동물은 죽어가고…

1차 실험이 끝난 후 운영진은 1994년에 2차 실험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전체를 유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생태계별 연구로 방향을 수정했다. 하지만 연구의 목적과 운영을 놓고 사람들 간에 충돌이 생겼다. 결국 누군가 밀폐된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실험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2차 실험은 계획된 10개월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끝났다. 운영을 맡았던 벤처기업은 청산됐다. 그 뒤 이 시설은 생태계 연구와 교육의 장으로 활용됐다. 2007년 바이오스피어2는 주변 땅과 함께 부동산 개발회사에 팔렸다. 당분간 사라질 위기에서는 벗어난 처지라고 한다.

바이오스피어2 계획은 실패에 가깝다. 많은 생물종이 사라졌고, 바다는 산성으로 변했고, 대기는 엉망이 됐다. 그리고 불개미를 비롯한 해충들이 번식했다. 인간이 살 계획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환경의 생태계가 나타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장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족적인 생명유지 장치를 만든다는 목적에 비춰볼 때는 실패다. 그런데 사실 이 실험은 실패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자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인간은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토양 미생물, 바다, 식생이 대기의 산소 및 이산화탄소 농도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성 탐사선 ‘피닉스 마스 랜더’가 화성 표면으로 접근하는 상상도. 2007년 7월 미국 NASA 제공.

이 황폐해진 낙원의 관리를 위탁받은 컬럼비아 대학은 바이오스피어2를 정반대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족적인 생물권을 유지하는 일에 애쓰기보다는 파탄이 난 바로 그 세계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가령 엉망이 된 대기를 이산화탄소 증가로 말미암은 지구 온난화 문제를 규명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컬럼비아대 연구진은 거주 실험의 결과를 상세히 분석한 바 있다. 산소 농도는 21%에서 14%로 떨어졌고, 이산화탄소 농도와 질소산화물 농도는 급등했다. 뇌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환경 변화로 나무들이 약해지면서 쓰러졌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도록 나팔꽃 덩굴을 심었더니 엄청나게 자라면서 다른 식물들을 뒤덮었다. 특히 작물들이 피해를 보았다. 척추동물 25종 가운데 19종이 사라졌다. 기온이 예상보다 높아졌고, 대기 수분 함량도 높아지면서 유리가 뿌옇게 변해 햇빛 유입량이 줄어들었다.

열대우림은 어떻게 된 것일까. 열대 우림을 흔히 ‘지구의 허파’로 일컫지 않는가. 그렇다면 바이오스피어2의 열대우림은 산소를 내뿜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허파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일까. 바이오스피어2의 열대우림은 자랄 만큼 자라서 생장이 거의 멈춘 상태였다. 이 때문에 산소 공급이 더 늘어나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 그 충격적 예언

스탠퍼드 대학의 조 베리 같은 과학자들은 바이오스피어2의 우림을 연구해 지금처럼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계속 높아갈 때 우림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연구했다. 그들은 경악할 만한 예측을 내놓았다. 현재 추정하는 것처럼 금세기 중반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지금의 두 배로 높아진다면 우림이 더 이상 지구의 허파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림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내뿜는 쪽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이오스피어2의 우림 생태계가 있는 공간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현재의 2배, 3배로 올리는 실험을 했다. 2배로 올리자 숲의 이산화탄소 흡수율이 낮아졌고, 3배로 올리자 거의 일정한 상태로 유지됐다.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였다. 기존 상식으로 보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식물의 광합성이 더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생장이 빨라져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소비되고 산소가 더 많이 방출돼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광합성 활동이 호흡 활동보다 더 왕성하게 일어나지만, 그 이상이 되면 광합성이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에 더는 반응하지 않는 반면 호흡률은 계속 증가해 결국엔 숲이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쪽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2004년 데이비드 챈들러는 ‘와이어드’지에 ‘바이오스피어2의 열 가지 교훈’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실었다.

첫째, 너무나 규모가 크고 복잡해서 대규모 실험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생태학이 실험 과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둘째, 생태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 산호초를 보호하고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셋째, 복잡하다는 것이 더 이상 연구의 장애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넷째, 거대한 우주 탐사선에 공기를 넣을 만한 밀폐 구조물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다섯째, 미치지 않고 장거리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여섯째, 인간이 좀 덜 먹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일곱째, 폐기물이 재순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여덟째, 의외의 생물이 환경에 피해를 줄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아홉째, 밀봉 생태계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열째, 의외의 일에 대비하라는 교훈을 일깨워줬다.

누구도 불개미가 번성하고 나팔꽃이 우림을 덮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거대한 우주선을 만들거나 화성이나 달, 혹은 지구 궤도에 거주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챈들러는 지구 온난화에 관한 거대한 실험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시사했다. 이미 규모의 한계는 극복했고 자연의 복잡성도 실패를 교훈 삼아 어느 정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존층 파괴나 산성비 등 환경 문제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하기 때문에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처럼 합의를 보기가 어렵다.

‘화성 식민지’와 ‘거주형 우주선’

지구 온난화 문제도 그렇다.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화창한 날이 이어질 때면 누구도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전세계가 폭염과 물난리 등 지구 온난화의 여파에 실제로 시달리는 와중에도 여전히 “지구 온난화의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화석연료 사용에 의한 온난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국지성 호우가 잦아지고, 철새들이 떠날 시기를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북극해와 남극대륙의 빙하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녹고, 알프스 산맥의 눈이 녹고, 곤충들이 극성을 부리고, 전국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는 나라가 생기고, 한반도가 아열대로 바뀌는 것은 그저 ‘자연현상’일 뿐이다. 아마도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바이어스피어2 실험에서 나타나듯, 이제 기후변화 실험도 가능한 수준에 와 있다.

2007년 시설 관리를 넘겨받은 애리조나 대학도 바이오스피어2에서 기후 연구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비록 바이오스피어2의 계획자들이 처음 구상한 주된 목표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이런 유사한 계획이 계승되고 있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바이오스피어2 계획자들은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꿈도 품고 있었다. 외부와 격리된 채 장기 거주가 가능한 밀폐된 환경, 미치지 않고 2년을 버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면 인간은 화성이나 달, 혹은 그보다 먼 행성에서도 거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아니면 바다 아래에도 인간의 거주지를 만들 수 있다. 혹은 아서 클라크의 과학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에서처럼 장기 항해를 하는 거대한 거주형 우주선도 가능하다.

1997년 시작한 영국의 ‘에덴 계획’은 바이오스피어2의 후속편이라 할 만하다. 버려진 채석장에 돔 구조물을 짓고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을 모두 모아놓는다는 계획이다. 종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닫힌 세계도 미래의 한 모습이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남자+여자+α’, 제3의 性 가진 인류 출현할까?
인류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문명은 ‘남녀’라는 이분법적 성별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의 구분은 인간의 본성인 ‘성욕’과 ‘욕망’을 잉태했다. 그런데 성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인간의 실험은 이제 생물학적 성별의 ‘절대성’을 허물어뜨리는 효과를 내고 있다.

성(性)은 정치, 사회, 윤리 등 온갖 분야에서 복잡다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안타까움, 애틋함, 기쁨, 슬픔, 절망, 분노라는 감정을 낳고 이성(理性)까지 좌지우지한다. 성의 대상에 대해 좋을 때는 한없이 좋다가도 싫을 때는 차라리 없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만일 성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혹은 지금과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면? 남녀, 즉 암수의 이분법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깊이 배어 있다. 그러나 성이 두 가지가 아니라 서너 가지, 수십 가지 형태였다면 어떠했을까. 또한 생식기가 지금처럼 배설기관 주변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면? 예를 들어 발가락이나 손가락 끝에 달려 있었다면?

‘성별 결정’ 유전자 발견

이런 질문은 지구의 생물들에게 가해진 제약을 무시할 경우 환상적이다. 그러나 성을 비롯한 우리의 일상은 생물의 기원과 진화사에 얽매여 있고, 적어도 당분간은 그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한계에 따르면 성에 관한 의문은 성의 기원 문제로 이어진다. 성이 어떻게 생겨났고 왜 지금과 같은 형태를 취하게 됐을까.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흥미롭고 색다른 이론들을 제시해왔다. 성은 다양한 생물에게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그리고 인간은 성에 수반되는 심리 및 행동 양상을 다른 생물보다는 더 가시적으로, 때로는 극단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성의 진화에 기여하고 있다.

인간의 성은 생물학적으로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란이 생길 때부터 구분된다. 성염색체의 조합이 XY이면 남자이고, XX이면 여자다. 그러나 염색체 하나로부터 시작되어 남녀의 수많은 육체적 차이가 파생되는 과정은 아직까지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Y 염색체가 있고 없음에 따라 남녀가 구분되니, Y 염색체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과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 성 발달 연구의 계기가 된 실험은 프랑스에서 이뤄졌다. 동물실험이었다. 1940년대 독일군에 점령당한 파리에서 알프레드 조는 토끼를 대상으로 여러 가지 창의적인 실험을 했다. 그는 토끼의 자궁에 있는 수컷 배아를 거세했다. 그러자 그 배아들은 유전적으로는 수컷임에도 암컷으로 자라났다. 그는 암컷 배아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수술도 했는데, 그 배아들은 그대로 암컷으로 자랐다. 그는 정소(精巢)에서 색다른 호르몬들이 만들어지며, 그 호르몬들이 수컷의 성을 분화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봤다.

이 실험들은 정소가 수컷의 성 분화에 필수적인 기능을 하는 데 반해 난소(卵巢)는 암컷의 성 분화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보여줬다. 정소와 난소는 근원이 같다. 둘 다 배아의 생식샘에서 발달한다. 배아의 생식샘은 정소가 될 수도 있고 난소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토끼의 성 결정은 생식샘에 어떤 영향이 미치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생식샘이 정소가 될지 난소가 될지 결정된 뒤 성 분화가 이뤄진다.

이 실험은 인간과 포유류의 성 결정과 분화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Y 염색체가 성 결정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추측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유전자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알프레드 조가 토끼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많은 연구가 그렇듯이 과학자들은 결함이 있는 사람, 즉 성 분화 양상이 특이한 사람을 찾아 나섰다. 예를 들어 남녀의 특징이 한몸에 있는 중성인 사람은 인간의 성 결정과 분화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에 대한 단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별, 조작할 수 있다?

사실 처음에는 X 염색체의 수에 따라 성별이 결정된다는 가설도 있었다. 그러다가 XXY인 남성과 XO인(X 염색체 하나뿐인) 여성이 발견되면서 X 염색체의 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성별 결정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Y 염색체의 유무였다. 그 뒤 과학자들은 Y 염색체 내에서도 ‘특정 부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정소가 발달할지 난소가 발달할지가 결정된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갔다. 가령 XX임에도 남성인 사람은 X 염색체에 Y 염색체의 특정 부위가 삽입되어 있었고, XY임에도 여성인 사람은 Y 염색체 내에 특정한 부위가 없었다. 따라서 이 특정 부위에 ‘성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구자들은 이 특정 부위의 실체를 찾아 나섰다. XX임에도 남성인 사람들의 X 염색체에 삽입된 Y 염색체 조각에서 생식샘을 정소로 결정하는 데 관여하는 인자를 만드는 유전자를 추출하려 한 것이다. 1990년 피터 굿펠로 연구진이 마침내 ‘SRY’라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SRY에 상응하는 유전자는, 조사한 모든 포유동물에 들어 있었다. SRY가 만드는 단백질은 DNA에 결합할 수 있었고, 그것은 SRY가 다른 유전자들의 발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현대 사회에선 동성애 등 남녀 성별을 넘어선 다양한 형태의 성적 선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전자가 정말로 성을 결정한다고 확정 지으려면 한 가지를 더 확인해야 했다. 즉, XY이면서 여성인 사람들에게는 이 유전자가 없거나 제대로 발현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조사 결과 XY이면서 여성인 사람들 중 일부에게서 이 유전자가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 이 유전자는 정소 형성에 필요했다. 그러나 이 유전자만이 성 결정에 관여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다른 연구자들은 생쥐를 대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생쥐에게도 비슷한 유전자(SRY)가 있었다. 연구자들은 생쥐의 암컷 배아, 즉 XX인 배아에 SRY 유전자만 든 DNA를 삽입했다. 그러자 그 배아는 수컷으로 자라났다. 그 배아는 정소와 수컷의 생식기를 가진 채 성장할 뿐 아니라 암컷과 교미까지 하는 진정한 수컷이 됐다. 그러나 정소의 크기가 일반적인 수컷보다 작고 정자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정자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은 Y 염색체에 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실험은 Y 염색체의 SRY가 유일한 성 결정 유전자라는 것을 보여줬다. SRY의 발견은 성 결정과 발달 연구의 기폭제가 됐다.

Y 염색체는 사람의 염색체 46개 중 크기가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유전자 수도 가장 적다. 1992년 미국 MIT 대학의 교수 데이비드 페이지는 사람 Y 염색체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했다. 그는 다른 염색체는 평균 100개 정도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데 반해, Y 염색체에는 40~50개밖에 없다고 추정했다.

Y 염색체의 유전자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배아의 생식샘이 난소가 될지 정소가 될지를 결정하는 SRY 유전자, 둘째는 X 염색체의 유전자들과 짝을 이루는 유전자(Y 염색체 유전자의 약 절반에 해당), 셋째는 정자 형성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Y 염색체에만 있는 유전자로서 정소에서 발현)이다.

Y 염색체의 유전자들 중 약 절반이 X 염색체의 유전자들과 짝을 이룬다는 것은 다른 염색체들이 둘씩 짝을 이루고 있듯이, X와 Y도 원래 한 쌍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원래는 둘이 크기와 모양이 비슷했으며, 지금과 같은 성염색체도 아니었을 수 있다. 페이지는 X와 Y라는 두 성염색체가 진화하기 시작한 시점이 약 3억년 전이라고 본다. Y 염색체의 일부가 크게 잘려서 뒤집혀 붙음으로써 두 염색체가 서로 제대로 짝을 지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그 결과 두 염색체 사이에 유전자 교환 비율이 줄어들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X 염색체는 여성에게서 XX 형태로 짝을 지을 수 있기에 서로를 참조해 유전자에 생긴 이상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반면, Y 염색체는 그런 교정 수단이 없기에 원래 있던 유전자들을 점점 잃어서 지금처럼 작아졌다고 볼 수 있다.

남성 Y염색체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세월이 더 흐르면 어떻게 될까. Y 염색체가 아예 없어지지는 않을까. 실제로 그렇게 예측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호주의 제니퍼 마셜 그레이브스는 Y 염색체의 유전자가 100만년에 평균 3~6개씩 없어지므로, 500만~1000만년이 지나면 사람의 Y 염색체가 아예 사라질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500만~1000만년 뒤의 남성은 어떻게 되나? Y 염색체에 있는 SRY 유전자가 남성을 결정하므로, Y염색체가 없어지면 남성도 없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인류는 여성만 남는 것일까. 연구자들은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Y 염색체의 소멸이 남성의 종말은 아니라는 것.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서부에 사는 두더쥐들쥐(mole vole) 두 종류는 Y 염색체가 아예 없다. 한 종은 암수 모두 X 염색체 하나만 가졌고, 또 다른 한 종은 암수 모두 XX 염색체를 가졌다. 그래도 수컷은 잘 살아간다. 그들은 SRY를 대신할 다른 성 결정 기구를 진화시켰다. 그레이브스는 인류도 Y 염색체가 사라지기 전에 다른 형태의 성 결정 기구가 진화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데이비드 페이지는 Y 염색체가 사라진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Y 염색체가 유전자를 잃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전자를 얻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자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은 새로 얻은 것들이다. 페이지에 따르면 Y 염색체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갱신되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Y 염색체는 짝이 없는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자체적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최근 Y 염색체의 정자 형성 유전자들이 하나씩 있는 것이 아니라 2개, 4개씩 중복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짝을 다른 염색체가 아니라 자기 염색체에 구비해놓고 있는 셈이다.

페이지는 Y 염색체가 마치 거울의 방 같다고 말한다. Y 염색체에는 서로 마주보고 배열된 염기 서열이 많다는 것이다. 즉 ‘다시 합시다’ 같은, 거꾸로 해도 똑같은 배열을 이룬 염기 서열들이 빈번하게 관찰된다. 이런 배열은 Y 염색체 연구를 어렵게 하지만, 한편으로 유전자가 마주 보는 서열을 참조하여 오류를 교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Y 염색체는 자체적으로 오류를 교정하는 방식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양측의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레이브스는 ‘유전적 자위행위’가 해로운 돌연변이를 막아주기는커녕 다른 유전자에 까지 이상을 일으킴으로써 쇠퇴를 가속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페이지는 그런 주장이 실험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는 말장난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Y 염색체를 잃은 두더쥐들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은 원래 여성”

성별 결정에 관여하는 X염색체.

지금까지 인류와 포유류의 성 결정과 발달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다 남성과 수컷에 관한 것들이다. 즉 아직까지 성은 내용면에서 ‘수컷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의 성 결정 유전자와 남성 호르몬, 정소의 형성 과정과 역할 등은 어느 정도 규명됐지만, 여성의 성과 난소 형성 과정 및 발달 과정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과학자들은 여성의 성이 기본형(default)이라고 말한다. 즉 수컷으로 자라게끔 하는 요인을 배제한 채 그냥 두면 인류와 포유류의 배아는 기본적으로 암컷으로 자란다는 것이다. 기본형에는 능동적인 요인이 관여한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다. “원래 그렇다”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태도다. 원래 그런 것에 의심을 품는 것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배아는 첫 6주 동안 해부학적으로 볼 때 XY든 XX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7주째에 남성으로 자랄지 여성으로 자랄지가 결정된다. 생식샘이 정소 혹은 난소가 될지 정해지고, 외부 생식기의 형태를 정하는 호르몬들이 분비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적 발달은 수많은 사건이 망을 이루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며 여기에는 다양한 능동적인 활동들이 관여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대학의 에릭 빌랭은 성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고 강조한다. 그는 “SRY는 XY 염색체임에도 여성이 된 이유의 15~20%밖에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별 결정에 있어 또 다른 유전자들도 관여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는 X 염색체에서 ‘DAX1’이라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DAX1은 SRY의 작용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SRY가 직접 남성 쪽으로 발달 과정을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항정소 유전자인 DAX1을 막음으로써 작용한다고 본다. 따라서 SRY가 있어도 DAX1의 활동이 더 왕성하면 XY여도 여성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빌랭 연구진은 SRY 없이도 남성으로 자랄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줬다. 그의 연구는 여성의 성이 수동적인 형태의 기본형이 아님을 시사한다. 실제로 빌랭 연구진은 여성을 빚어내는 ‘WNT4’라는 유전자도 발견했다. 이런 연구를 토대로 빌랭은 남성을 선호하는 유전자와 반대하는 유전자, 여성을 선호하는 유전자와 반대하는 유전자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성별이 결정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여성의 성 결정도 능동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여성이 기본형이라고 보는 연구자들은 여전히 많다. 또한 난소 결정 유전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생물학적 지식이 지금보다 적었던 시대엔 남녀를 구분하기가 무척 쉬웠다. 용모, 태도, 목소리, 옷차림 등으로 웬만하면 구분할 수 있었고 외부 생식기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조 때의 사방지처럼 남녀 한 몸으로 세상을 농락한 인물은 예외적 사례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예외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빌랭은 오늘날 신생아 4500명에 1명꼴로 생식기에 혼동이 일어난 사례가 나타난다고 추정한다. 환경오염으로 개구리 같은 양서류의 성별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부터 그 정도의 혼동 비율이 있었음에도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4500명당 1명은 상당히 높은 발생빈도다.

또 올림픽 경기 같은 경쟁 분야, 군대 징집, 상속 등 성별이 중요시되는 분야에선 어떤 인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하는 논란이 가끔 발생한다. 생물학적 성의 모호성을 둘러싼 화제들은 본인이 스스로를 남성으로 생각하는지 여성으로 생각하는지의 성적 정체성,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성적 선호 등을 둘러싼 논란과 맞물리면서 현대 사회에서 논쟁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이를 통해 인류가 수천, 수만년 동안 굳게 지켜왔을 관습적인 제약은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다. 이 관습은 생물학적 성에 대한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생각과 행동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암묵적인 성 역할이 그것들이다.

미래는 ‘多성별 사회’

우리는 이미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을 별개의 것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성적 정체성이라는 것도 따로 떼어놓았다. 성적 정체성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적어도 인식 측면에서는 둘 밖에 없던 성이 여러 유형으로 확대되고 있다. 성적 선호도의 다양성도 용인되는 추세다.

이 모든 모호함과 다양화의 밑바탕에는 생물학적 성 자체의 모호함이 놓여 있다. 몇 년 전 동성애 성향이 생물학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성에 관한 연구들은 비정상적인 사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현재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사례들이 별도의 정상적인 성별로 분류될 날이 올 수도 있다. 이러면 미래의 인류는 남녀라는 두 성별이 아닌, 여러 개의 성별을 가질 수도 있다.

포유류의 Y 염색체는 약 3억년 전에 출현했으며 남성을 결정하는 핵심 유전자인 SRY는 1억7000만 년 전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에 출현한 동물들은 성 결정 기구가 달랐다. 주변 환경, 온도에 따라 성별이 정해지는 파충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성을 바꾸는 어류도 있다. 조류는 성 염색체를 지니지만 성 결정 방식은 인간과 다르다.

이렇듯 생물계 전체로 보면 X와 Y 염색체를 토대로 성을 결정하는 방식이 보편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SRY 유전자가 생기고, Y 염색체가 줄어들거나 사라진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성 결정 방식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레이브스의 말처럼 사람의 Y 염색체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성 결정 방식이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에는 ‘다(多)성별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손가락이 8개였다면 인류는 8진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성별이 둘이 아니라 여러 개가 된다면 인류의 삶과 문명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바뀔지 모른다.

 

창조주에 도전하는 유전자 조작 ‘말하는 생쥐’ 출현한다면?
유전공학과 컴퓨터가 인류의 삶을 바꾸고 있다. 특히 유전자 연구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인 ‘젊고, 아름답게, 오래 살기’를 실현해줄 수단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우려도 있다. 지구는 거대한 ‘유전자 집합체’다. 모든 유전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섣부른 유전자 조작 실험은 인간 생명의 연장이라는 의도와 달리, 전혀 예기치 못한 파국을 부를 수 있다. 진핵생물의 유전정보 복사 과정을 규명한 공로로 2006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로저 콘버그씨가 2007년 4월9일 건국대에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10월8일, 올해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마리오 카페치, 마틴 에번스, 올리버 스미시스가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해 생쥐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원리를 발견한 공로로 공동 수상자가 됐다. 선정기관인 스웨덴의 카롤린스카 연구소가 내놓은 공식 자료를 살펴보자. 수상자들이 이룩한 업적의 핵심은 ‘유전자 적중법(gene targeting)’이다. 이 방법은 원하는 유전자를 선택하여 없애거나 변형시키거나 대체하는 기술이다. 생명 현상을 규명하는 기초 연구에서 새로운 치료법 개발에 이르기까지 생물학과 의학의 전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저 둥근 공에 불과한 배아가 어떻게 눈, 코, 입을 비롯한 온갖 복잡한 기관을 갖춘 동물로 자라는지 알고 싶다면 중요한 기능을 할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들을 하나하나 유전자 적중법으로 없애거나 망가뜨린 뒤 결과를 지켜보면 된다. 이를 통해 어떤 유전자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치료에도 활용된다. 실험을 통해 선천성 이상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찾아내면 이상이 생긴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대체할 수 있다.

노벨상과 ‘유전자 적중법’

새로운 유전자를 도입해 생물을 변형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어 자신의 유전자를 숙주의 유전체에 넣어서 번식하는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이 바이러스를 이용해 원하는 유전자를 집어넣는 방법이 개발됐다.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수단이 갖춰진 것이다. 문제는 효율과 정확성. 집어넣은 유전자가 원하는 자리에 제대로 끼워졌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오 카페치와 올리버 스미시스는 상동 염색체 사이에 이뤄지는 DNA 재조합 과정을 이용하면 유전자를 삽입하는 과정의 정확성과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포의 염색체들은 부모로부터 한 벌씩 물려받기에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것들이 둘씩 쌍으로 들어 있다. 그 비슷하게 생긴 쌍을 상동 염색체라고 하는데, 상동 염색체 사이에는 DNA의 교환이 가끔 일어난다. 또 한쪽 염색체가 끊겼을 때 상동 염색체를 참조해 수선하기도 한다. 카페치와 스미시스는 이 상동 재조합 과정을 이용해 유전자를 원하는 자리에 끼워넣고, 제대로 끼워진 세포들만을 골라 배양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수상자인 마틴 에번스는 생쥐의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해, 집어넣은 새 유전자를 지닌 후손들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배아줄기세포를 꺼내 유전자를 조작한 뒤 다른 배아에 이식하여 이른바 ‘모자이크 배아’를 만들었다. 그 배아를 대리모에 착상시켜 태어나게 한 뒤 교배시켜서 이식된 유전자를 지닌 후손들만을 골라냈다.

이 두 연구 흐름이 합쳐진 결과는 놀라웠다. 인간은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바꾼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1989년에도 배아줄기세포의 유전자를 상동 재조합으로 변형시킨 생쥐를 만들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잇달아 발표됐다. 실험 방법은 지금까지 말한 그대로였다. 상동 재조합을 통해 생쥐의 배아줄기세포에 있는 특정한 유전자를 바꾼 뒤 다른 배아에 그 줄기세포를 이식했다. 그 모자이크 배아를 착상시켜 태어나게 한 뒤에 교배해 유전자가 바뀐 생쥐 혈통을 만들었다.

생쥐에 생쥐 유전자만 집어넣으라는 법은 없다. 연구자들은 생쥐를 인간의 질병 치료제 개발에 활용했다. 인간의 각종 질병 원인인 유전자들을 생쥐의 배아줄기세포에 집어넣어 생의학 분야의 연구 및 치료제 개발에 이용하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실험은 ‘창조주’ 행세를 하는 오만한 행위일까.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는 자연을 흉내 내는 것이다.

자연은 늘 실험한다

사실 자연은 온갖 유전학적 실험을 한다. 당하는 기존 생물들의 처지에서는 희생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이러한 실험을 통해 새롭고 우월한 생물이 나타날 수 있다. ‘진화’는 자연 실험의 대표적 산물이다.

찰스 다윈은 ‘종(種)의 기원’에서 비둘기 교배 실험부터 시작해 인간이 자연을 흉내 낸 실험들을 열거한다. 농경과 유목도 자연선택을 모방한 인위 선택의 결과였고 이는 인류 문명의 토대가 됐다. 다윈은 자연 선택이 생명의 다양성을 빚어낸 원동력임을 간파했다. 그를 계승한 많은 과학자는 ‘선택의 단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논란을 벌였다. 생물종인가 개체인가. 자연은 종을 선택하는 것일까, 개체를 선택하는 것일까.

   

이화여대 이원재 교수팀은 유전자가 사람과 60~70% 비슷한 초파리에게서 ‘공생 유전자’를 찾아 사람에게도 있는지 확인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의식을 지닌 존재의 처지에서는 개체라는 쪽이 더 와 닿을 듯하다. 서부영화의 한 장면에 비유해보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길 때, 선택은 개체 수준에서 이뤄진다. 당사자의 사격 실력, 바람, 우연히 눈에 들어간 티끌 하나, 총구에 묻은 모래알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 죽은 자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며 산 자는 자손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가 그 장면에서 멀어지면서 멀리 우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서부로 오는 행렬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관객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개체 수준의 선택은 잊힌다. 보다 본질적인 선택은 집단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양 느껴진다.

동물학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종 개념은 사실 서부 개척자 집단과 비슷하다. 개척자 집단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성공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다. 크게 보면 자연은 한 개체의 생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연이 염두에 두는 것은 집단, 더 나아가 종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커다란 알을 쑥쑥 잘 낳는 닭들을 선택해 교배시키는 행위와 호랑이를 멸종시켜서 멧돼지가 어부지리를 얻도록 하는 행위 중 어느 쪽이 자연을 제대로 모방하는 것일까.

유전자가 규명되고 생물의 행동을 유전자와 관련지어 설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면서 발상의 전환이 이뤄졌다. 자연 선택의 단위는 종도 개체도 아닌 ‘유전자’라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영국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가 장수, 다산성, 복제의 정확도라는 측면에서 개체나 종보다 자연 선택의 단위로 더 알맞다는 논리를 펼쳤다. 자연 선택의 단위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한 채 자신의 사본(寫本)을 퍼뜨리면서 계속 존속할 수 있어야 한다. 개체나 종은 그렇지 못하다.

이 시기에 인위 선택 실험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자연에 대한 지식수준이 높아지면서 인위 선택의 단위도 달라진 것이다. 자연을 잘 모르던 시절에는 개체나 종 수준에서 인위 선택이 이뤄졌다. 사람들은 더 많은 낟알이 열리는 벼나 더 많은 젖이 나오는 소를 골라 교배했다. 동시에 약한 개체나 종은 박멸했다.

그러나 생명의 다양성이 지구 환경과 우리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약한 종도 필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 종을 박멸하는 행위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인위 선택의 단위가 종에서 유전자로 바뀌었다. 병충해에 강한 품종을 교배하는 것이 아니라, 병충해에 강한 유전자를 집어넣는 방식이 동원됐다.

유전자 적중법은 유전자 선택의 방식을 극단적인 수준까지 끌고 갈 수 있다. 인간은 원하는 성질의 유전자만 넣고 원하지 않는 성질의 유전자는 빼내어 전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인간에게 유익한 물질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넣은 동물들도 만들어지고 있다. 유전자와 발생, 종별 차이에 관한 지식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유전자가 동식물의 유전체에 삽입될 것이다. 또한 인간의 유전자를 지닌 동식물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인위 선택의 정점은 인간의 생식세포나 배아의 유전자에 직접 손을 대는 일이다. 현재로서는 생쥐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각종 혈통을 만들어낸 것과 같은 행위는 인간의 배아를 대상으로 실행될 수 없다. 인간 배아 유전자 조작은 커다란 윤리적 논쟁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전적 요인이 있는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인간의 생식세포나 배아를 대상으로 유전자 적중법을 활용하는 일은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분화’와 ‘종합’의 법칙

유전자 적중법을 통해 인간 질병 유전자를 지닌 생쥐 혈통이 500종류 이상 만들어져 있다. 인간과 생쥐의 유전자는 약 2만개다. 그러니 앞으로도 인간의 유전자를 지닌 또 다른 생쥐들이 만들어질 여지가 많다. 생쥐만이 인간 유전자를 지니라는 법은 없다. 인간과 가까운 침팬지를 비롯하여 다른 여러 동물도 인간의 유전자를 갖게 될 것이다. 이미 소, 양, 돼지 등을 대상으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섬뜩한 상상이 들 수 있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 신화 속에 등장하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생명체도 나오지 않을까. 그것은 일종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다양성은 주로 분화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분화를 통해 새로운 종이 갈라져 나와 아무도 진출하지 않은 곳으로 이동해 새로운 서식지를 조성함으로써 생명은 지구 곳곳을 푸르고 활기찬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분화가 전부는 아니다. 자연은 몇 차례 기존 생물들의 종합을 도모했고, 그때마다 자연계는 새로운 격랑에 휩싸여 변혁의 시대가 열리곤 했다. 린 마굴리스는 이러한 종합을 ‘공생 발생’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에 따르면 처음에는 원핵생물만 있었다. 그러다 어떤 원핵생물이 다른 원핵생물을 삼켰다가 소화를 시키지 못해 공생관계를 맺게 됐다. 그것이 바로 세포핵을 지닌 진핵세포의 출발점이다. 그 뒤 어떤 진핵생물이 산소 호흡을 하는 세균을 삼켰다가 공생관계를 맺었다. 그 세균은 나중에 ‘미토콘드리아’라는 세포 내 발전소가 됐다. 마지막으로 광합성을 하던 세균이 진핵세포로 들어와서 공생관계를 맺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식물과 조류 세포에 있는 ‘엽록체’가 됐다.

이런 종합은 단순한 종의 분화와는 차원이 다른 파급 효과를 낳았다. 진핵세포의 출현은 다세포 생물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생물 진화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며,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의 공생도 마찬가지다. 동물과 식물은 그런 종합의 산물이다. 그런 종합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직 단세포 원핵생물들만 우글대는 곳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종합은 지금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마굴리스는 흰개미의 창자에 들어 있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라는 미생물을 즐겨 예로 든다. 이 생물은 친척들보다 몸집이 약 500배나 크며, 전자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려 수십만 개체에 달하는 5종류의 생물이 모인 것임이 드러난다. 지의류나 산호 등 지구에는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생물이 많다.

   

유전자 변형의 위험성

인간의 몸도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몸 속에는 자체 세포수의 10배에 달하는 미생물이 살고 있다. 입에는 500~600종, 창자에는 400여 종의 미생물이 있다. 우리 몸은 ‘미생물들의 도시’나 다름없다. 몸 속 미생물들은 소화를 돕고 필수 비타민을 만들어내는 등 다양한 일을 한다. 그 가운데 우리가 현재 파악한 미생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가 정체조차 모르는 수많은 미생물이 지금도 우리 몸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좋은 일, 혹은 나쁜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외계인이 볼 때 인간은 하나의 개체가 아닐 수 있다. 수십 조 또는 수백 조 개체의 집합체다.

더욱이 인간의 유전체에는 외부에서 온 DNA가 섞여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부 학자는 우리 유전체 중 세균에서 온 유전자가 100~200개 된다고 주장한다. 바이러스에서 온 DNA가 약 8%를 차지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연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곳곳에서 종합을 도모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생명체 종합 속성까지 모방하려 한다. 자연에는 자손에게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물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이른바 ‘수평 유전자 전달’ 방식이 존재한다. 세균 같은 원핵생물들은 그 방식을 널리 활용하고 있다. 세균들은 플라스미드 같은 원형 DNA를 주고받는 방법을 써서 항생제 내성(耐性)을 금방 획득한다. 이들은 힘든 시기에는 서로 결합해 유전자를 주고받기도 한다. 박테리오파지나 바이러스도 수평 유전자 전달을 매개한다. 인간은 이런 수평 유전자 전달 방식을 활용해 의약 분야에서 각종 유용한 약물을 개발하고 있다.

원핵생물과 달리 진핵생물들에게서는 수평 전달이 드물다는 것이 기존 학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학자가 늘어나고 있다. 유전체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진핵생물에서의 수평 유전자 전달 사례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생을 통해 진핵세포로 들어온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핵 속의 염색체에게 넘겨왔다. 공생이 시작됐을 때 서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든지, 아니면 공생체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든지 간에 두 세포소 기관은 많은 유전자를 세포핵으로 넘겼다. 그 과정이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일부 연구자는 여러 식물의 미토콘드리아 DNA에 수평 유전자 전달이 일어났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공생과 수평 유전자 전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하나의 줄기가 뻗어 올라가면서 가지들이 하나씩 갈라져 나가고 그 가지가 더 작은 가지들로 갈라져 나가는 식의 생명의 나무를 그린다. 수평 유전자 전달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왕성하게 일어났다면 발견되지 않은 유전자가 많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방식의 원핵생물 분류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진핵생물의 수평 유전자 전달에 관해서는 연구가 미진한 상태다. 그러나 연구가 계속될수록 사례가 늘어날 것이다. 수평 유전자 전달은 환경 및 건강 측면에서 관심의 대상이다. 병충해에 저항성을 띠는 외래 유전자를 넣은 이른바 ‘유전자 변형 작물’ 논란도 사례 중 하나다.

삽입된 유전자가 수평 유전자 전달을 통해 토양 미생물이나 다른 작물로 넘어간다면? 어쩌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미 미국에서는 병충해에 저항성을 띤 유전자가 제왕나비의 먹이가 되는 유즙식물로 전달되어 해충이 아닌 제왕나비에게 피해를 준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한 연구자는 수평 유전자 전달 빈도가 현재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상태에서도 환경에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전자 변형 작물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것도 자연 현상의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어쨌든 양쪽 모두 ‘특정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하면 예상치 못한 다른 생명체로 수평 유전자 전달이 일어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듯하다.

‘지적 생물체’를 합성하나

유전자 적중법 등을 통해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삽입하는 것은 넓게 보면 수평 유전자 전달에 속한다. 그러니 인간은 또 다시 자연을 흉내 내고 있는 셈이다. 현재 대중의 판단은 그것이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시도하는 어설픈 모방이라는 쪽이 우세한 듯하다.

인간의 유전체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면서 10만 개로 추정되던 인간의 유전자 수는 어느새 2만 개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중 절반은 어느 정도 파악된 상태다. 나머지 절반을 파악하는 데에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전자들이 서로 그리고 RNA, 단백질 등 다양한 세포물질과 상호 작용하는 양상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연구에는 인간의 유전자를 지닌 생쥐 같은 실험동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유전자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여 넣는 과정에서 인간의 재능, 특히 지적 재능을 지닌 동물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인류가 없애버린 네안데르탈인처럼 인류에 맞먹는, 혹은 버금가는 능력을 지닌 생물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말하는 생쥐를 앞에 놓고 “인류의 위생을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고 이유를 설파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까?

인류의 자연 모방은 끝이 없을 것이다. 자연의 실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 유전자를 통째로 바꾸는 엉성한 수준을 넘어 DNA에 콕 찍어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방식이 동원될 수도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합성하는 단계가 된다. 인간 유전체 계획에 뛰어들어 경쟁을 부추긴 바 있는 크레이그 벤터는 인공 염색체를 합성하여 새로운 세포를 만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합성 생물학’이라는 이름하에 말이다.

지구가 생성된 뒤 자연이 실험을 통해 생명을 탄생시키기까지는 10억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 뒤로 다세포 생물이 생성되는 데에도 그에 못지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 기나긴 세월과 비교하면 인류는 조급증에 걸린 것 같다.

 

물고기도 지능 있고 고통 느낀다…생선회 먹는 것은 동물학대?
물고기도 고차원의 지능이 있다. 물고기는 소리 내어 대화하고 집단문화가 있으며 경작을 하기도 한다. 동물은 알면 알수록 지적 존재이며 인간과 비슷하다. 미래의 인류는 스테이크, 생선회, 치킨구이 등 ‘동물 신체의 일부’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먹는 지금의 ‘식(食)체계’를 포기할지 모른다.

우리는 알면 알수록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갈 때도 그렇고, 친숙한 무언가를 더 자세히 살펴볼 때도 그렇다. 그런 지식은 틈새를 좁혀주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지식은 반대의 기능도 한다. 외국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한국인임을 알면 가까운 느낌을 받다가 그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경계선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떤 대상이든 상세히 파헤칠수록 틈새와 경계선은 점점 더 벌어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소한 그 틈새들이 때로는 통합을 거부하는 강력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물론 연속성을 원하면 전체를 보고 단절을 원하면 세부 경계선을 보는 식으로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관점을 바꿀 수도 있지만,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도 생기게 마련이다.

‘지(知)적 존재’를 먹는 부담

사람에게 친숙한 일정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종(種)을 먹이로 삼을 것인지의 문제도 그렇다. 개는 가축이 된 이래로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사람의 친구도 되고, 파수꾼도 되고, 구조자도 되고, 화풀이 대상도 되고, 식량도 된다. 하지만 개를 방에 들이고 친구나 자식으로 삼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개의 역할 중 하나를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개는 알면 알수록 지능, 행동, 감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인간과 비슷한 면이 많으니 ‘식량’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에 대한 지식은 개와 인간이 어떤 면에서는 동질적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로 활용되며, 그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도 꽤 많아졌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떨까. 진화 단계로 볼 때 어류와 인간은 그리 가깝지 않은 편이다. 둘 사이에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가 놓여 있으니까. 진화적으로 좀 먼 친척이니 먹이로 삼아도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거기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어류도 나름대로 영리하며, 그 지능에 걸맞은 대접을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1990년대 초 생물학자 리 듀거킨은 관상어로 애용되는 거피를 야생에서 잡아다가 키우면서 재미있는 실험들을 했다. 그는 칸막이를 넣어 어항을 세 부분으로 나눈 뒤, 양쪽 끝 방에 크기와 무늬가 비슷한 수컷을 한 마리씩 넣었다. 가운뎃 방에는 암컷을 놓았다. 적응 기간을 거친 뒤 그는 한쪽 칸막이를 열었다. 암컷은 그 방에 있는 수컷과 구애 행동을 했고, 그 광경을 다른 암컷이 지켜보게끔 했다.

그런 다음 원래 암컷을 빼내고 지켜본 암컷을 풀어서 마음대로 짝을 선택하도록 했다. 놀랍게도 그 암컷은 모델이 됐던 암컷이 선택한 수컷을 선택했다. 20번 실험을 했는데 같은 결과가 17번 나왔다. 거피는 짝을 선택할 때 다른 암컷의 행동을 보고 모방한 것이다. 그것은 거피가 수컷 개체의 특성을 구분할 수 있고, 모델 암컷이 선택한 수컷을 기억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거피의 뇌는 콩알만하지만 ‘고등동물’ 못지않은 인지능력을 갖고 있었다.

듀거킨은 후속 실험을 통해서 이 모방 요인과 유전적 요인의 상대적인 세기를 비교했다. 그가 잡아온 강의 거피들은 유전적으로는 밝은 오렌지색 수컷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관찰자 암컷에게 모델 암컷이 더 칙칙한 수컷을 선택하는 광경을 지켜보도록 한 뒤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러자 수컷이 다른 수컷에 비해 훨씬 더 칙칙할 때에는 모방 요인보다 유전적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했지만, 칙칙한 정도가 덜할 때에는 모방 요인이 상당하게 작용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모방은 문화 현상이자 사회적 현상이다. 물고기 거피의 세계에서도 소위 ‘문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고기도 기억력 있다

그렇다면 어류의 기억력은 어떨까. 사람들은 어류의 기억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해왔다. “금붕어는 3초면 잊는다”고 했다. 하지만 동굴의 물속에 사는 눈먼 동굴 물고기들을 연구한 학자들은 다른 결론을 내린다. 토마스 테이케는 눈먼 동굴 물고기가 익숙한 환경에 있을 때와 낯선 환경에 있을 때 헤엄치는 행동이 달라진다고 했다.

   

상당수 물고기종은 작은 뇌 속에 집단생활을 위한 지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신체 절단에 따른 물고기의 고통감지능력은 고등동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낯선 환경에 풀어놓거나 익숙한 환경에 변화를 주면 이 물고기는 감각기관인 옆줄에 환경 정보가 더 많이 와 닿도록 헤엄치는 속도를 빨리 한다. 그리고 경계지점의 특징들을 파악하기 위해 그 주변을 더 자주 돌아다닌다. 테이케는 이 행동을 이용해 물고기가 낯선 환경을 탐사하는 횟수와 지속시간을 측정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격리시켰다가 다시 집어넣는 실험을 했을 때, 처음 그 환경에 넣었을 때보다 탐사 시간이 짧았다. 격리 시간이 그보다 더 길어지면 처음 넣었을 때만큼 오랫동안 탐사했다. 탐사 시간은 지형에 따라 달라졌다. 어항이 좌우대칭일 때 탐사 시간이 더 길었다. 작은 막대 같은 것을 한쪽에 붙여서 대칭성을 파괴하면 탐사 시간도 줄어들었다. 이런 실험 결과들은 눈먼 동굴 물고기가 탐사를 통해 뇌 속에 환경의 인지 지도를 작성하며, 그 지도를 이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곧 어류의 기억력이 형편없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테레사 버트 드 페레라의 실험은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많은 동물이 자신이 지각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먼 곳까지 제대로 찾아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껏해야 자기 주변밖에 감지할 수 없는데 어떻게 멀리까지 돌아다니는 것일까. 그녀는 멕시코 눈먼 동굴 물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 물고기의 지각 범위는 5cm에 불과하지만, 서식 공간은 30m나 된다. 그 넓은 공간을 어떻게 제대로 돌아다닐까.

스페인의 크리스티나 브로글리오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드 페레라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그들은 어류가 원시적이므로 뇌가 덜 발달하고 학습능력도 떨어질 것이라는 기존 견해를 반박했다. 그들은 발생학 및 신경해부학적으로 뇌의 진화는 더딘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어류나 육상 척추동물이나 학습 및 기억과 관련된 부위의 능력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즉 학습 및 기억을 담당한 뇌 부위는 일찌감치 진화했고 그 뒤로 별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류도 신경학적으로는 포유류나 조류처럼 복잡한 공간을 학습하고 기억할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테이케는 어류가 주변 환경의 인지 지도를 작성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문제는 지각 범위보다 더 넓은 공간의 지도를 어떻게 작성하는가에 있었다.

머리에만 고통감지기 22개

테레사는 육상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어류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봤다. 침팬지, 쥐, 비둘기, 꿀벌에 이르기까지 육상동물들은 특징적인 이정표들을 순서대로 연결해 서식 공간을 기억하는 능력을 지녔다. 어류도 그렇지 않을까?

그는 어항에 원형 통로를 만들어놓고 모양이 서로 다른 이정표 네 가지의 거리, 순서, 조합을 변화시켜봤다. 물고기들은 낯선 환경을 접하면 더 빠른 속도로 헤엄치면서 새로운 인지 지도를 작성하려 애썼다. 실험 결과 물고기들은 이정표의 절대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위치와 순서 변화에도 반응했다. 즉 뇌 속 공간 지도에 지형지물의 순서를 기입했고 각 공간을 순서대로 연결지음으로써 전체 서식 공간을 파악한 것이다.

이렇듯 어류는 집단 문화가 있고, 기억력과 학습력이 있으며, 지형지물을 이용해 넓은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도 갖췄다. 인간과 물고기의 거리가 꽤 가까워진 듯하다. 그래도 아직 둘 사이에는 미지의 계곡이 있다. 이를테면 고통은 어떨까? 물고기도 우리처럼 고통을 느낄까? 물 밖으로 꺼냈을 때 물고기가 펄떡거리는 행동은 덫이 발목을 꽉 물었을 때 아파서 펄쩍펄쩍 뛰는 사슴의 행동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물고기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고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원론적 문제에서부터 논란을 빚었다.

그런데 최근 영국의 한 연구진은 물고기가 고통을 느낀다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냈다. 린 스너든 연구진은 무지개송어가 해로운 물질에 노출됐을 때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모르핀을 투여하자 무지개송어의 비정상적인 행동의 강도가 약해졌다. 최초의 비정상적 행동은 그저 반사반응이 아니라 해로운 물질을 접했을 때 느끼는 통증임이 분명했다.

이어 연구진은 몸에 손상이 가해졌을 때 고통을 느끼는 ‘통각 수용기’가 물고기에게 있는지 살펴봤다. 그들은 마취시킨 물고기의 머리에 기계적 자극, 열 자극, 화학적 자극을 주면서 신경 활동을 기록했다. 그들은 물고기의 머리에서 적어도 한 가지 자극에 반응하는 수용체를 58개 찾아냈는데, 그중 22개가 기계적 압력과 고열에 반응한다는 점에서 통각수용기라고 보았다. 그 가운데 18개는 화학적 자극에도 반응하는 다형 통각수용기였다. 그 수도 양서류, 조류, 포유류와 비슷했다. 통각수용기를 충분히 갖췄기에 물고기도 고통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동물의 권리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육상 동물이나 어류나 비슷한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면, 광어나 우럭이 입을 벙긋거리며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날것으로 그 신체를 먹어들어가는 ‘생선회’는 논쟁의 대상이 돼야 하지 않을까. 바늘로 물고기의 입을 꿰는 낚시 역시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다는 결코 고요하지 않다

어류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눈다. 주로 행동과 몸짓으로 대화한다. 우리 눈에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이는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이용하여 구애, 놀람, 두려움 등을 표현한다. 또한 서로 몸을 비벼대거나 꼬리를 건드리거나 씰룩거리거나 특이한 자세로 헤엄치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지느러미를 뻗음으로써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물고기는 소리를 이용해서도 대화를 나눈다. 물고기는 입만 뻐끔거릴 뿐 소리를 내지 않는 듯하지만, 특수한 청음기를 갖다대면 바닷속에서 물고기들이 내는 온갖 소리가 들린다. 물고기들은 음파가 뼈를 진동시키는 현상을 이용해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속귀로 소리를 듣는다. 또 옆줄로도 소리를 듣는다. 부레의 도움을 받아 소리를 더 명확히 듣는 종류도 있고, 척추를 이용해 진동을 전달하는 섬세한 방식을 쓰는 어류도 있다. 대부분의 물고기가 내는 소리는 진동수가 낮아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바다는 인간에게는 고요하지만, 정작 물고기에게는 온갖 소리로 가득 찬 곳이다.

2003년 영국의 컬럼 브라운, 케번 랠런드, 젠스 크라우스 등 세 과학자는 어류의 지능을 연구한 500편이 넘는 논문을 조사했다. 그들은 최근 들어 연구자들이 어류의 심리·신적 능력에 관해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고 했다. 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류가 훨씬 더 뛰어난 지능을 지닌 동물이라고 지적했다.

어류는 물풀이나 돌을 모아 둥지나 피신처를 만드는 등 도구를 사용할 수 있고, 장기 기억도 지녔고, 복잡한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있고, 자기 집단에 소속된 개체를 구별할 수도 있다. 어릴 때 다른 물고기들이 그물에 잡히는 것을 본 물고기는 그물을 피하기도 한다. 또 갈등을 조정하고 처벌하고 화해하는 등의 전략을 쓸 수 있으며, 서로 협력해 포식자를 감시하고 먹이를 잡는 문화 전통을 유지한다.

연어처럼 민물에서는 후각을 이용해 자기 고향을 찾고, 바다에서는 자기를 이용해 멀리 항해하는 능력을 가진 종도 있다. 입맛에 맞는 바닷말은 키우고 맛이 없는 바닷말은 솎아내면서 경작을 하는 종도 있다. 컬럼 브라운은 나아가서 어류가 몇몇 분야에선 고등한 척추동물보다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컬럼 브라운과 빅토리아 브레이스웨이트는 어류의 뇌도 좌뇌와 우뇌의 기능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또 하나 색다른 점은 야생에서 포식자들을 접하며 자란 물고기는 새로운 대상을 볼 때 왼쪽 눈을 사용하는 반면 실험실에서 자란 물고기는 오른쪽 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뇌와 눈은 서로 반대로 이어지므로 실험실에서 자란 물고기는 좌뇌가 새로운 대상에 관한 정보를 처리한다. 야생의 물고기는 더 경계하면서 살고 실험실의 물고기는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또 그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어류도 좌뇌와 우뇌가 처리하는 정보가 서로 다름을 뜻한다. 야생의 물고기에 있어 새로운 대상은 대개 신기하거나 수상쩍은 것을 의미하므로 그 정보는 정서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야생의 물고기는 이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정서를 관장하는 우뇌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 직접 섭취’의 윤리성

왜 동물은 좌뇌와 우뇌가 구분돼 있을까? 컬럼 브라운은 포식자를 근본적 원인으로 든다. 포식자의 위협이 큰 환경에서 살아온 물고기는 우뇌의 기능이 발달했다. 한편으로는 포식자를 감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들을 주시하거나 먹이를 찾는 편이 생존에 도움이 됐기에 그런 편향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포식자의 위협이 크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온 물고기는 좌뇌와 우뇌의 역할 분화가 뚜렷하지 않았다. 좌뇌와 우뇌의 기능은 유전적으로 내려올 수도 있지만 환경의 변화에 따른 학습으로 변화될 수도 있는 듯했다.

이상의 실험 결과 어류는 적어도 육상 고등동물이 지닌 지성적, 감성적 속성들을 거의 다 지닌 듯 여겨진다. 손발이나 날개 대신 물속 생활에 맞게 적응한 지느러미가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망둑어처럼 지느러미를 발처럼 쓰는 물고기도 있고 등불을 달고 다니는 심해어류도 있으며 날치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종류도 있기는 하다.

어류의 지능 연구가 계속될수록 또 다른 놀라운 속성이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하찮고 뒤떨어진다고 여겨지는 존재 안에 섬세하고 고등적인 구조가 들어 있는 사례를 우리는 자연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어류와 인간 사이의 거리는 크게 좁혀졌다. 양서류, 파충류, 조류와 인간의 거리도 어부지리로 그만큼 좁아진 셈이다.

어류는 고통, 호기심, 두려움을 아는 감정의 소유자라는 문턱을 넘었다. 좌뇌와 우뇌의 구분이라는 문턱도 넘었다. 모방과 문화라는 문턱도 넘었다. 소리를 이용한 대화라는 문턱도 넘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어류와 인간 사이에 작은 틈새가 여전히 많다는 것이 보인다.

온갖 해부학적, 진화적 차이가 있다. 어류의 지능이 뛰어나다는 주장이 가소롭게 들릴 정도로 씨가 마르도록 그물과 낚시에 걸려드는 단순한 물고기들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지금은 통합의 정신이 우세한 시대다. 인간의 오만함이 약해지고 관대함이 늘어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일반인도 이제는 양자론에서 말하는,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또한 미시세계는 거시세계와 다른 법칙이 통용되니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재단하지 말라는 말까지 관대하게 이해한다.

동물들은 점점 더 인간과 비슷한 ‘지적 존재’가 되어간다. 이에 따라 동물을 먹잇감, 식량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부담은 인간의 내면에서 점증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연구가 더 깊이 진행될수록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미래 음식은 형체 없는 ‘에너지’?

이는 ‘개의 식용 논쟁’이라는 개별적 이슈 차원을 넘어서는 인류의 문명과 관련된 문화인류학적 문제가 될 것이다. 미래의 인간은 ‘삶의 지속에 필요한 단백질의 섭취’와 ‘지적-도덕적 품위 유지’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는 식생활에 있어 근본적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 ‘동물 신체의 일부’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직접 먹는 현재의 인류 문명체계가 미래에는 너무나 ‘야만적인’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류는 무엇을, 어떠한 형태로 섭취해야 할까. ‘채식주의’는 해답이 못 된다. 식물도 생물인 이상 그 안에도 상당히 고차원적인 지적 체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 인류의 음식은 가시적 형체가 없는 ‘에너지(열량)’와 ‘정보(맛과 질감)’의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놀라워라, 생명의 의외성
옥수수 색깔도, 암세포와 HIV도 ‘전이인자’의 장난?

화석연료 문제를 해결할 대체연료로 각광받던 옥수수가 뜻밖에도 식량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생명은 들여다볼수록 새롭고 오묘하며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염색체의 전이인자가 유전체에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런 복잡성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진화하려면 더 강력한 전이인자의 자극과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옥수수는 오랫동안 인류에게 식량과 뻥튀기라는 간식거리를 제공했고, 최근 들어 화석연료를 대체할 연료 공급원으로 각광 받고 있다. 그런데 환경주의자들에게 찬사를 받던 이 바이오 연료 때문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바이오 연료인 에탄올용 옥수수 재배가 수익이 나자 식량으로 쓰일 옥수수가 줄어들었고, 콩 등 다른 작물을 재배하던 밭까지 연료용 옥수수 재배에 잠식되면서 각종 곡물 가격 상승에 한몫을 하고 있다. 게다가 옥수수 생산을 위해 비료와 물을 쏟아 붓고 있으니 환경친화적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에 이르렀다.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옥수수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의외성을 보여준다. 수십년 전에 그 의외성에 주목한 과학자가 한 명 있었다. 바버라 매클린톡인데, 공교롭게도 그의 연구가 학계에서 인정을 받기까지 걸린 세월에서도 의외성이 엿보인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옥수수의 염색체를 염색하는 법 개발, 옥수수 염색체 지도 작성 등 새로운 세포유전학 연구 성과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학계에서 인정을 받아 미국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1940~50년대에 걸쳐 좀 뜬금없다 싶은 색다른 연구 결과들을 내놓아 과학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의 연구는 난해하고 복잡했다. DNA의 구조가 밝혀지기 전인데 논문이 주로 세포유전학 용어로 서술되어 있었기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 법도 하다. 어쨌든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연구 대상인 옥수수와 함께 학계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옥수수 실험

옥수수 껍질을 벗기면 연노랑 낟알들이 드러난다. 그런데 간혹 자주색이나 보라색 등 색깔이 다른 낟알들이 섞여 있다. 바늘로 콕콕 찔러 넣은 듯이 색깔이 점점이 묻은 낟알도 있고, 거의 전체가 색깔을 띤 낟알도 있다.

매클린톡은 오랜 세월 옥수수를 재배하면서 색깔이 나타나는 양상에 주목했다. 그 양상은 대단히 복잡했다. 그는 그것이 유전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간파했고, 초파리 같은 다른 생물에서도 본질적으로 똑같은 양상이 나타난다고 봤다.

그는 옥수수를 자가교배시키면서 발생 초기의 배아세포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살펴보는 등 다년간 실험을 계속했다.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다. 관찰 결과가 워낙 방대해 그는 그 현상의 특성을 간단히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염색체 일부가 잘려서 다른 염색체에 붙기도 하고, 일부가 뒤집혀 붙기도 하고, 염색체의 양끝이 붙어서 고리 모양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는 그것이 염색체가 끊겼다가 붙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염색체의 특정 부위가 끊겼다가 잘못 붙곤 하면서 그런 복잡한 양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염색체 지도. 염색체는 전이인자에 의해 변이를 일으킨다.

그는 끊겼다가 붙은 부위를 약 40개 찾아냈다. 그 부위를 ‘Ds’라고 불렀다. Ds는 그냥 끊겼다가 붙는 곳이 아니었다. Ds는 염색체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 있었다. 즉 Ds는 고정된 지점이 아니라 옮겨다닐 수 있는 DNA 조각이었다. 그는 Ds가 옮겨다니면서 다른 유전자의 활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특정한 유전자가 있는 곳에 삽입되면 그 유전자의 활성이 없어지거나 약화되는 식이었다. Ds가 일으키는 변화는 그것이 전부였지만, Ac라는 또 다른 조각이 있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Ac가 있으면 후속 변화가 일어나면서 옥수수의 잎이나 낟알의 색깔이나 무늬, 모양 등이 달라졌다.

매클린톡은 Ds와 Ac의 행동에 규칙성이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그는 옥수수의 조직과 낟알의 색깔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선택했다. 유전자가 열성 조합일 때는 낟알이나 식물 조직에 색깔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열성 조합은 Ac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유전자가 우성 조합이고 염색체에 Ds와 Ac가 있는 옥수수들을 재배했다. 유전자가 열성 조합이고 Ac가 없는 옥수수들도 따로 재배했다. 그런 다음 열성 개체의 꽃가루로 우성 개체를 수정시켰다.

이 교배로 만들어지는 옥수수 낟알들은 모두 유전형이 우열 조합이므로 색깔을 띠어야 했다. 만일 색깔이 일부 사라짐으로써 얼룩덜룩한 낟알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Ds가 그 유전자 자리에 삽입되어 유전자의 활성을 전부 또는 일부 억제하고, Ac가 후속 영향을 미침으로써 색깔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험 결과 매클린톡의 예측이 들어맞았다. 얼룩덜룩한 낟알이 생긴 것이다.

매클린톡은 Ds가 유전자 자리에 삽입되어 그 유전자의 활성에 변화를 일으키고, Ac는 Ds가 일으키는 변화를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고 봤다. 그는 그 외에도 억제인자-돌연변이 유발인자 조절 체계도 제시했다.

매클린톡의 이 연구 결과들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과학사가인 이블린 폭스 켈러는 매클린톡이 여성이기 때문에 무시당했다는 견해를 피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설명이 안 된다. 매클린톡은 이미 혁혁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고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등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앞선 이론

그가 이런 연구 결과들을 내놓은 1950년대 초는 DNA 구조가 발견되고 유전암호 연구가 시작되려던 분자생물학의 태동기였다. 복잡한 생명현상을 단순한 개념과 요소로 설명하고자 하던 환원론적 열기가 분출하던 시기였다. 연구대상도 번식속도가 빠르고 실험결과를 금방 볼 수 있고 검증할 수 있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초파리 같은 것들이 선호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매클린톡의 논문은 장황하고 난해했다. 이해하기 쉽도록 짧게 설명할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였다. 그것은 그가 연구하고 있던 내용이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직 유전자, DNA, RNA의 기본 구조나 기능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시기였으니, 그가 관찰한 복잡한 현상을 쉽게 설명할 만한 용어나 체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그는 Ds와 Ac가 이동할 수 있는 조절요소라는 주장을 실험 결과를 죽 나열하면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약 10년 뒤인 1960년에 프랑수아 자코브와 자크 모노가 세균의 유전자 조절기작을 설명하는 오페론 가설을 내놓았다.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앞에 조절하는 부위가 있어서, 거기에 다른 인자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유전자의 활동을 조절한다는 개념이었다.

   

이 획기적인 개념이 등장함으로써 유전자의 활동이 조절되는 양상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했을 때 매클린톡은 오페론 체계와 자신의 억제자-돌연변이 유발인자 조절체계를 비교한 논문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오페론은 기본적인 조절체계였고, 매클린톡의 체계는 오페론체계를 토대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진 뒤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 성과는 1970년대 초가 돼서야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진핵생물의 복잡한 유전자 조절기작이 서서히 밝혀지고 염색체를 옮겨다닐 수 있는 전이인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였다. 매클린톡이 말한 Ds와 Ac는 전이인자였다. 즉 그는 분자생물학이 약 20년에 걸쳐 급속히 발전한 끝에 알게 된 내용을 그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파악했던 것이다.

1980년대 초에 Ac와 Ds의 염기 서열이 밝혀졌다. 전이인자는 자신을 분리시켜서 옮길 수 있는 트랜스포사아제라는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Ac는 그 효소 유전자를 온전하게 지닌 반면, Ds는 그 유전자의 염기 서열이 일부 없어져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변이체였다. 그래서 Ds는 Ac가 없으면 제 기능을 못했던 것이다.

매클린톡은 장수한 덕에 약 30년이 지난 뒤인 1983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DNA 대부분은 ‘잡동사니’

전이인자는 도약 유전자, 트랜스포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있던 곳에서 오려내어 다른 곳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이동하는 종류와, 원본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사본을 만들어 다른 곳에 끼워 넣는 종류가 있다. 전자는 DNA 트랜스포존이라고 하며, 인간 유전체의 약 3%를 차지한다. 매클린톡의 Ds와 Ac도 DNA 트랜스포존이었다. 후자는 레트로트랜스포존이라고 하며 RNA를 만든 뒤 그 RNA로 다시 DNA를 만들어 염색체에 끼워 넣는다. 레트로트랜스포존은 적어도 인간 유전체의 약 40%를 차지한다. 전이인자의 특성을 이용하면 원하는 유전자를 염색체에 끼워 넣을 수 있다. 즉 필요한 유전자를 전이인자에 삽입한 뒤 염색체에 통합시킴으로써, 연구와 유용한 물질생산 등에 쓰일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전이인자는 또 다른 측면으로도 관심대상이다. 우리의 염색체에 전이인자가 있어서 여기저기 마구 옮겨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전이인자가 유전자 중간에 삽입되면 적어도 그 유전자의 기능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또 유전자를 조절하는 부위에 삽입되어 다양한 유전자에 동시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아니면 매클린톡이 관찰했듯이, 염색체 중간을 뚝 끊어서 다른 염색체에 갖다 붙이거나 뒤집어 붙일 수도 있다. 그러면 상당히 심각한 결과가 빚어지지 않을까? 실제로 전이인자는 혈우병, 포르피린증, 암 등 여러 질병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전이인자는 유전체에 잡다한 흔적을 남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 복잡한 진핵생물의 유전체를 보면, 유전체 전체에서 유전자가 차지하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DNA 중 대부분은 제 기능을 하는 유전자가 아닌 잡동사니들이며, 그중에 상당수는 전이인자의 흔적이다. 특히 일정한 염기서열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부위가 그렇다.

한 예로, 결함이 있어서 스스로 옮겨다니지 못하는 전이인자인 Alu라는 짧은 반복 서열은 인간의 유전체에서 사본이 100만개 이상 존재하며, 인간 유전체의 약 11%를 차지한다. 유전자처럼 제 기능을 하는 부위는 약 5%에 불과한 데 반해 말이다. 전이인자나 그 잔해들이 인간 유전체의 거의 45%, 생쥐 유전체의 약 38%, 개 유전체의 약 41%, 옥수수 유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이 일찍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 매클린톡의 개념이 일찍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아스럽게 느껴질 법도 하다.

   

난장판에서 살아남다

전이인자는 유전체에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유전자의 활동을 저해하거나 강화할 수도 있고, 염색체 조각을 이동시키거나 엉뚱한 재조합을 일으킬 수도 있다. 또 자신의 사본을 계속 만들어 염색체 곳곳에 끼워넣음으로써 유전체의 크기를 엄청나게 확대할 수 있다. 그런 변화가 생물의 진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전이인자가 많은 생물들에서 유전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만큼 큰 영향을 미쳤을 법도 하다. 그 정도라면 유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사례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현재의 생물들은 그런 난장판에서 살아남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전이인자 자체도 진화한다. 전이인자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 생물계통에서 전이인자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이인자가 유전체에 존재하는 일종의 기생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특히 레트로트랜스포존은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 같은 RNA 바이러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 바이러스의 유전체에서 껍데기를 만드는 유전자들을 없앤 것이 레트로트랜스포존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시점에 새로운 전이인자가 생겨나면, 그것은 마치 기생체처럼 급격히 증식하면서 수천만년에 걸쳐 유전체 곳곳으로 퍼진다. 그러다가 자체 돌연변이가 생기고 세포 분열을 방해하는 등의 부정적인 영향이 심해지면서 활동이 억제되고 중단되는 단계에 들어선다. 이미 삽입된 전이인자들은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기생체가 대체로 별 해를 끼치지 않고 몸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어쩌다가 숙주에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유익한 도움도 주면서 말이다.

활동하지 않는 전이인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돌연변이를 거친다. 활동한 지 오래된 것일수록 돌연변이가 더 많이 쌓이므로, 어느 전이인자가 언제 들어와 왕성하게 활동했는지 대강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한 예로 인간의 레트로트랜스포존 중 하나인 Alu는 약 5000만년 전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가 최근 들어 활동이 약해지고 있다. 또 인간의 DNA 트랜스포존도 영장류가 신대륙과 구대륙의 영장류로 갈라지는 등 급격히 팽창할 무렵에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그 뒤 인류로 이어지는 영장류 계통에서는 적어도 지난 4000만년 동안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미국의 프레스콧 데이닝어와 마크 뱃저는 현재 100~200명에 1명꼴로 새로 삽입된 Alu를 갖고 태어난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전이인자 전체로 보면 추정값의 편차가 심하다. 3~30명에 1명꼴로 새로운 전이인자를 갖고 태어난다고 추정한 학자들도 있다. 이 비율이 높은 듯도 하지만, 전이인자가 인간 질병에 기여하는 비율은 다른 돌연변이들이 일으키는 비율에 비하면 낮다. 이렇게 인간의 유전체에서는 전이인자의 활동이 몹시 약해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동물들도 있다. 생쥐 유전체에서는 돌연변이 중 레트로트랜스포존의 삽입에서 비롯된 것이 10%에 달한다. 인간의 유전체에서는 0.2%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쥐의 유전체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셈이다.

유전체와 전이인자

인간의 유전체 염기서열 전체를 파악하는 인간 유전체 계획이 시작됐을 때 전이인자의 특징인 반복 서열은 분석을 지체시키는 성가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처음에 10만개로 추정했던 인간의 유전자 수가 2만여 개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전이인자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것이 드러나자, 전이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전이인자가 세세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유전자 발현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진화적인 측면에서도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전이인자는 어떤 식으로 해롭거나 유익한 기능을 해왔을까. 현재 전이인자가 질병을 유발하는 해로운 돌연변이를 일으킨 사례가 10여 건 파악되어 있다. 한편 전이인자는 새로운 유전자나 의사유전자를 도입하거나 유전자 중복을 일으킨다. 또 비정상적인 염색체 재조합을 일으킴으로써 유전체를 재배열하는 구실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염색체를 크게 끊어서 이리저리 옮기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방식으로 전이인자는 유전체의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다.

   

이렇게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측면을 열거할 수는 있지만, 유전자 수는 얼마 안 되는데 왜 유전체는 그렇게 큰가라는 수수께끼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게다가 아메바, 도롱뇽, 갑각류, 속씨식물 중에는 인간보다 유전체가 훨씬 더 큰 것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들의 유전자 수는 인간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유전체가 클수록 유지하고 분열하는 데 에너지도 더 많이 들고 엉키는 등 성가신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은 분명하다. 그런 문제들에 시달리면서도 포유류를 비롯한 많은 생물이 전이인자로 가득한 큰 유전체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점보다 장점이 더 많다는 의미가 된다. 그 장점이 무엇일까.

그쪽으로의 연구는 이제 겨우 시작된 단계다. 어쨌든 캐나다의 라이언 그레고리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가 지적하듯이, 전이인자는 유전체가 그냥 염기서열을 죽 나열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전이인자를 이기적 DNA나 기생체로 본다면, 유전체 자체는 하나의 생태계인 셈이다. 우리의 몸이 피부, 창자 등에 수많은 생물들이 기생하고 공생하는 하나의 생태계이고, 세포가 세포핵, 미토콘드리아, 리보솜 등 수많은 세포소기관이 활동하는 생태계이듯이, 유전체도 유전자, 조절부위, 조절인자, 전이인자, 바이러스의 DNA 등으로 이루어진 생태계인 셈이다.

DNA 탈을 쓴 RNA

생태계라면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반응할 것이다. 매클린톡은 스트레스가 이른바 조절요소를 활성화한다고 주장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초파리 등에서 스트레스에 전이인자가 활성을 띠는 사례를 찾아냈다. 아직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연구가 덜 돼 있긴 하다. 혹시 위기를 느낀 전이인자라는 기생체들이 달아나려고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전이인자가 기생체이고 RNA에서 DNA를 역전사하는 레트로트랜스포존이 주류라면, 색다른 이론도 제기될 수 있다. 지구에 생명이 발생하던 시기에 DNA 세계에 앞서 RNA 세계가 있었다고 보는 과학자들이 있다. 불안정한 RNA를 더 안정한 DNA가 대체한 뒤 현재의 생물 세계가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유전체라는 생태계를 보면 아닌 듯도 하다. 여전히 RNA 기생체가 주류 아닌가. 이기적인 RNA가 DNA의 탈을 쓰고 번식함으로써 유전체 크기를 계속 늘린 것은 아닐까. 언젠가 인간의 유전체에도 더 강력한 새로운 RNA 기생체가 등장하지 않을까. 혹시 HIV나 조류독감바이러스 같은 RNA 바이러스는 그들의 척후병이 아닐까.

이렇듯 생명은 들여다볼수록 새롭고 오묘하며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석연료 문제의 해결책 같았던 옥수수가 식량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어쩌면 인간은 그런 복잡성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진화하려면 더 강력한 기생체의 자극과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연 모방하기와 그 너머
형광 토끼부터 매트릭스까지… 조작 가능한 ‘인공 생명체’?

인간이 원하는 대로 염기서열을 조작할 수 있다면? 합성생물학은 유전자를 활용해 생물체를 재설계하는 학문이다. 이 학문은 생물 조립은 물론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 생명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유전체를 합성해 만든 새로운 생명체는 생명일까, 아닐까? 먼 얘기지만 ‘생명’의 정의에 대한 명쾌한 설명 없이는 어떤 인공 생명체라도 장수하기 힘들 것이다. 틀림없이 불거질 ‘윤리논쟁’의 등쌀에 못 이겨서 말이다.

정부 예산을 받아 순조롭게 진행되던 인간 유전체 계획에 뛰어들어 특허권을 갖겠다는 둥 평지풍파를 일으킨 바 있는 바이오 벤처사업가 크레이그 벤터가 2007년 중반부터 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소식을 슬쩍슬쩍 흘리고 있다. 몇 주 내로 인공 생명체를 합성할 것이라고 했다가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것이라고 번복하더니, 또 말을 바꿔 몇 달째 인공 생명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회적 파장을 줄일 충격완화 요법을 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기사를 보면 벤터는 플라스틱, 옷, 의약품, 자동차 연료 등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생물체를 이용해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컴퓨터로 플라스틱, 섬유, 약물, 연료 등 필요한 것을 만드는 유전자를 지닌 염색체를 설계한다. 그 설계에 따라 자동으로 DNA를 조립해 새로운 염색체를 만든다. 그 염색체를 세균에 넣어서 대량 증식시킨다. 그러면 석탄과 석유 같은 탄소 연료를 대신할 연료를 생산하는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생물은 광합성을 통해 만든 당(糖)을 연료로 변환시킨다. 광합성은 대기의 이산화탄소에서 얻은 탄소로 당을 만드니까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은 재생 가능한 방식으로 새로운 연료를 다량 생산하는 것이므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인류가 유전체의 염기서열을 읽는 수준을 넘어 원하는 대로 염기 서열을 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컴퓨터로 원하는 서열을 설계해 화학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작위 돌연변이를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나는 다윈 진화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작위가 아니라 계획적인 설계를 통해 한순간에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의 연구진은 이미 한 세균의 염색체를 다른 세균에 넣어 종 자체를 바꾸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이런 식으로 생물체를 재설계하는 분야를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이라고 한다. DNA를 재조합하는 유전공학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 용어가 쓰인 적이 있지만, 지금의 합성생물학은 자연계에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합성한다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쓰인다. 스티븐 베너와 마이클 시스모어는 합성생물학자를 두 부류로 나눈다. 인공 생명체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성분자를 이용해 자연적인 생물의 창발적 행동을 재연하는 부류와 자연적인 생물에서 교체 가능한 요소들을 찾아서 인위적인 기능을 지닌 생물을 조립하려는 부류가 있다. 합성생물학은 이미 에이즈 바이러스 검출 도구 등 감염병 진단에 활용되고 있으며, 항(抗)말라리아제를 저렴하게 대량 생산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장난감’도 만들어낼 수 있다.

합성생물학 실험

2000년 미 프린스턴대의 마이클 엘로위츠와 스터니슬러스 레이블러는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lacI’, ‘tetR’ ‘cI’이라는 세 유전자를 이어 붙였다(간단히 A, B, C라고 하자). 세 유전자는 각각 단백질을 만드는데, 그들은 세 유전자 앞에 적당한 조절인자를 붙여서 각 단백질이 다음 유전자의 활성을 억제하도록 했다. 즉 A의 단백질은 B를 억제하고 B의 단백질은 C를, C의 단백질은 거꾸로 A를 억제한다. 따라서 음의 되먹임 고리가 완성된다.

그들은 초록빛 형광을 띠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포함된 회로도 따로 마련해 B의 단백질이 억제되도록 했다. 그런 다음 둘을 대장균 속에 넣었다. 그러자 B의 단백질 농도가 변하면서 세포의 형광 현상이 주기적으로나타났다.

   

규소를 토대로 한 생명체, 컴퓨터에 정보형태로 든 생명체 등 상상 속의 생명체는 다양하다. 영화 ‘매트릭스’의 포스터.

그들은 세포 내의 수많은 분자로 이뤄진 무수한 상호작용망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이 단순한 회로를 설계했다. 이 회로는 단백질과 mRNA의 농도와 분해 속도 등을 정량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자연계에서 본래 다른 맥락에서 쓰이는 유전적 요소들을 조합해 새로운 기능을 지닌 인공 유전자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조절이 가능한 회로의 한 사례다. 또 형광 물질을 분해하는 효소와 유기 화합물을 이용해 인간과 틱택토 같은 간단한 게임을 하는 논리회로를 만든 사례도 있다. 상호 억제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두 유전자를 이용해 스위치를 만든 연구도 있다. 한쪽의 활성을 자극하는 물질이 들어가면 그쪽 유전자의 단백질이 만들어지면서 다른 유전자는 억제되는 식이다.

세포 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려면 이런 단순한 회로의 연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통합된 전체 계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의 세포 자체는 너무 복잡하다. 게다가 유전체에는 과거에 쓰였다가 용도 폐기된 유전자의 잔해나 그다지 필요 없는 염기서열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런 것들을 다 제거하면 꼭 필요한 것만을 지닌, 기능적으로 통합된 산뜻한 최소한의 유전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생명 현상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연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현재의 유전체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없애는 위로부터의 방식과, 유전자 등 필요한 요소를 하나씩 추가해가면서 유전체를 합성하는 아래로부터의 방식이 있다. 현재 대장균 같은 미생물의 유전체를 대상으로 크기를 줄이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최소 유전체는 환원론적 과학이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의문을 해결해줄지 모른다. 세포를 이루는 성분들을 낱낱이 해체했다가 조립하면 그 세포는 다시 살아서 활동할까. 최소한의 유전체를 지닌 최소한의 세포는 그 의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료 생산하는 인공 미생물

크레이그 벤터가 장담했듯 최소한의 유전체를 지닌 인공 생명체가 조만간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생명 분자의 표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소 유전체에는 DNA 복제, RNA 전사, 단백질 해독에 필요한 요소들, 최소한의 대사 활동에 필요한 요소들, 손상을 수선하고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 요소들은 기계 부품처럼 표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제약회사들이 실험에 쓰이는 다양한 생체분자들을 제조해 판매하듯, 세포 합성에 필요한 것들도 구입해서 원하는 맞춤 세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아예 맞춤 세포를 시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벤터가 말하듯이 자동차에 연료를 싣고 다니는 대신, 연료를 생산하는 미생물이 가득 든 통을 싣고 다닐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생물은 특정한 기능을 맡고 있으면서 대체와 변형이 가능한 모듈 구조를 많이 쓰고 있다. DNA도 아미노산도, 뼈도, 몸마디도, 부속지도 그렇다. 유전자들도 기능적으로 연관된 것들이 모여서 한 단위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인간의 정신이 모듈 방식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합성 유전체를 그렇게 모듈 방식으로 구성한다면 표준화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이런 미래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벤터의 말이 나오자마자 치명적인 바이러스나 세균 같은 생물학적 무기를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강력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거나 치명적인 독성물질을 생산하는 세포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생명의 존엄성 문제는? 인공 합성 맞춤세포가 늘어날 때 생길 문제들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유전공학의 산물들이 대개 자연계에 본래 있던 생물들보다 자연 환경에서 취약했다는 점을 근거로 안전성 문제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만일 아니라면? 배아줄기세포를 둘러싼 윤리 논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또 다른 윤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생물학이 워낙 급속히 발전하는 통에 생명윤리는 대처하기가 버거울 지경이다.

   

생명체를 합성한다는 전망은 지구 생명이 우주에서 보편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과도 이어진다. 지금까지 발견돼 연구된 지구의 생물들은 모두 DNA와 RNA에 담긴 유전 정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정보 측면에서 말하면 다음 세대로 대물림하는 것은 바로 유전 정보이며, 생물종들이 서로 다른 것은 각각의 유전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히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그 유전 정보는 A, T, G, C라는 네 종류의 염기 서열에 담겨 있다. 염기들은 셋이 모여 하나의 유전암호를 이루며, 그 유전암호에 따라 아미노산들이 결합돼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이 염기들이 어떻게 조합되어 늘어서 있느냐에 따라 유전자의 종류와 조절 양상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 네 종류의 염기와 유전암호가 과연 우주에서 보편적인 것일까. 아니면 지구 생물들만이 지닌 특성일까. 극히 예외가 있긴 하지만, 현재 생물에 쓰이는 아미노산은 20종류다. 그것을 필수 아미노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세상에 존재하는 아미노산은 그보다 종류가 훨씬 더 많다. 그 수많은 아미노산 가운데 20개가 선택된 것은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 지구 초창기에 많았던 것들이 우선적으로 쓰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주로 나가면 다른 아미노산이 쓰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아미노산의 화학은 아주 복잡하다. 우리는 아미노산들을 일렬로 죽 연결했을 때 어떤 식으로 꼬일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지구 생명이 필수 아미노산 20종류를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명확히 알기 어렵다.

지구생명과 우주생명체

DNA는 좀 다르다.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의 발견을 알리는 논문에 썼듯이 DNA는 구조에 어떤 식으로 기능할지가 암시되어 있다. A는 T, G는 C와만 짝을 짓고, AT는 수소결합 두 개로 연결된 반면 GC는 수소결합 세 개로 연결돼 더 강하므로 GC가 많은 DNA 이중나선은 더 잘 안 벌어질 것이며, A와 G는 큰 분자이고 T와 C는 작은 분자이므로 큰 분자와 작은 분자가 짝을 짓기 때문에 DNA 이중나선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매끄럽다는 등등 DNA 화학은 단백질 화학에 비하면 너무나 규칙적이고 명백해 보인다. 그러니 네 염기로 이루어진 유전 체계가 형성된 것도 당연한 듯하다.

하지만 우주에서도 그럴까. 스티븐 베너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의 연구진은 왓슨-크릭 DNA 모형에 들어맞는 염기들이 더 있는지 찾아보았다. 배타적인 염기쌍을 형성하면서 DNA 이중나선의 모양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염기들이 더 있을까. 그는 4쌍, 즉 8종류의 염기를 더 찾아냈다. 따라서 현재 이론상으로는 총 12종류의 염기가 가능한 셈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실제 중합효소를 통해 복제될 수 있을까. 베너 연구진은 기존 중합효소에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그랬더니 새 염기 중 두 가지가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수준으로 복제됐다. 새 염기의 변형을 억제하고 중합효소와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해야 하는 등 과제가 남아 있지만, 새 염기가 기존 유전 체계에 통합될 가능성은 엿보인다.

따라서 DNA 이중나선이 유전 정보의 기본 토대라고 가정해도, 지구 바깥의 생명체는 우리와 다른 종류의 염기와 유전암호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 셈이다.

모방을 넘어서

이 확장된 염기를 이용해 새로운 유전체를 합성한다면? 합성생물학은 자연계에 없는 생명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본래 목적은 그런 과정을 통해 자연계의 생명 현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의학 등 유용한 쪽으로 활용하는 것이지만, 그 너머를 내다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유전공학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유전자 변형과 조작 과정도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자연계에 존재하는 기능을 활용하는 쪽이다. 이 식물이 지닌 항생제를 만드는 유전자를 저 세균에 집어넣거나, 인체에서 인슐린을 생성하는 유전자를 대장균에 집어넣어 대량 생산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조작만으로도 우리는 종종 두려움이나 위험을 느끼곤 한다. 살충 능력을 지닌 바실루스균에서 뽑아낸 Bt 유전자를 삽입해 형질전환시킨 옥수수, 콩, 감자, 목화 등 유전자 변형 작물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간의 장기를 지닌 돼지 등도 한편으로는 유용할 것이라고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꺼림칙하다. 형광 유전자를 넣은 형광 토끼를 보고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형질전환에 쓰이는 유전자는 이미 다른 생물에게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유전자 변형으로 한순간에 새로운 생물을 만든다고 해도 대체로 자연의 모방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유전자 변형에 쓰이는 재료나 방법도 기존 생물에서 나온 것들이니까.

   

그런데 새로운 인위적 기능을 지닌 새로운 생물을 만든다면? 아예 새로운 유전체를 지닌 생물을 만든다면? 거기에 기존 생물에 없던 새로운 염기까지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자연의 산물이나 활동을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생체 분자나 생화학적 과정을 스위치나 논리가 적용되는 단순한 게임에 활용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볼 때 논리 체계가 적용되는 모든 과정에 이용할 수 있다. 인간이 세균으로 이뤄진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들여다보면서 세균을 상대로 아주 복잡한 규칙을 지닌 장기나 더 나아가 바둑까지 둘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세균이 의식을 지니고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구의 자연이 지금까지 한 실험보다는 더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의 실험은 대개 장기간에 걸쳐 다윈 진화라는 형태로 이뤄졌다. 다윈 진화는 급격한 변화를 싫어한다. 급격한 변화는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죽음으로 마감되기 쉽다. 그런데 합성생물학은 대단히 급격한 변화를 도입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명체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환경에서는 살아갈 수 있겠지만, 자연 환경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한 생물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중에 기존 생물을 능가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종의 대체가 이뤄질 수 있다. 합성 생물이 자연 생물을 대체하는 날이 올까.

인류는 우주탐사선을 보내는 등 이미 지구의 경계를 넘고 있으니, 생각을 지구 환경에 고정시키지 말라고 우길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우주에는 합성 생물에 더 가까운 생물들이 살고 있을지 누가 알랴.

이런 논의들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생명이 물리화학적인 것, 다양한 물리화학 반응의 집합체라는 것이 환원론적 사고방식의 핵심이며 현대 생물학은 그 토대 위에 서 있다. 최소한의 유전체를 지닌 최소한의 세포는 그 관점을 직접적으로 실물로 구현할까.

생명의 경계

생물학에서 흔히 말하듯이 생명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그저 생명이 성장하고 적응하고 대사 활동을 하고 환경과 물질을 교환하고 번식을 하고 진화하는 등의 특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것들도 그런 특징들을 지니고 있기에 생명의 경계는 모호하다.

생물의 기본 단위가 세포라는 데에는 견해가 일치한다. 세포는 구조적 및 기능적 최소 단위다. 세포는 생명의 특징들을 고루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세포는 어떤 것일까.

앤서니 포스터와 조지 처치는 그 의문의 답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최소 세포가 양분인 작은 분자들을 이용해 스스로 복제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거대분자들과 경로들을 갖춘 것이라고 본다. 거대분자들은 핵산과 단백질이며 세포막에 해당하는 지질 이중층 안에 들어 있다. 작은 분자들은 확산되어 막을 통과해 들어간다. 거대분자들은 최소 유전체를 통해 합성되고 복제된다. 최소 유전체는 작은 분자들을 이용해 스스로를 복제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만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다양한 사항을 검토한 끝에 최소 세포에 들어갈 최소 유전체는 151개의 유전자로 이뤄진다고 보았다.

그렇게 합성한 최소 세포는 환경 변화에 아주 취약하겠지만, 어쨌든 생명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규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포스터와 처치는 우리가 그런 생명체를 합성할 수 있을 때까지는 생명의 비밀을 이해하고 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 질문을 뒤집으면 어떨까. 그런 생명체를 합성했다고 과연 생명을 이해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 세포가 과연 최소한의 생명체일까. 그것은 기존 생물의 유전자들을 기준으로 삼은 최소 세포다. 새로운 맥락에서 새로운 기능을 지니도록 새로 설계된 유전자들을 이용한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어쨌거나 그런 최소 세포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인류가 생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얻었다고 흡족해할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면서도, 생명에게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의외성을 기대한다.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을 말이다.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길이가 1억5000만㎞에 달하는 우주의 거대한 검은 구름이 생명체라는 소설을 쓴 바 있다. 탄소가 아니라 규소를 토대로 한 생명체를 상상하는 사람도 있고, 컴퓨터에 정보 형태로 든 생명체를 상정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매트릭스’ 같은 영화 속에서 아무리 위협적으로 나와도 우리는 현실에서는 그런 생명체를 공상으로 치부한다. 현실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생명체는 주로 호랑이나 상어 같은 거대한 포식자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또 하나가 등장할 모양이다. 바로 인간이 창조한 인공 생명체 말이다. 얼마 전에 우리를 위협할 것 같던 복제 인간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는데, 인공 생명체는 어찌될까. 우선 한바탕 윤리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생명체도 디지털화 가능…그럼, 되살릴 수도 있다?
염기와 아미노산이라는 생명의 양대 기본 물질은 일정한 대응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컴퓨터가 0과 1을 조합해 정보를 표현하듯. 생명체 형성 규칙인 유전암호는 본질적으로 디지털 정보다. 유전학과 디지털의 만남은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가상 세계의 창조를 가능케 할까. 생김새가 DNA와 꼭 닮아 ‘인공 유전자’라고도 불리는 PNA.

크레이그 벤터 연구진은 1월25일자 ‘사이언스’ 인터넷판에 “인공 생명체 합성을 향해 한 단계 더 나아갔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미코플라스마 게니탈리움(Mycoplasma genitalium)’이라는 세균의 유전체를 화학적으로 합성하여 조립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연구소의 연구자 17명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 논문을 보면 유전체는 마치 장난감 블록 조립하듯이 만들 수 있는 것인 양 느껴진다. 생체분자를 다루는 기술이 발전했다는 의미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체가 지닌 신비감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도 된다.

인공 유전체 합성 소식은 인간의 무분별한 생명체 창조가 어떤 위험을 가져올 것인지, 인간이 과연 새로운 생명체를 빚어낼 자격을 갖추었는지 등 여러 윤리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 그에 따른 미래상을 놓고도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다. 여기서는 크레이그 벤터와 ‘이기적 유전자’의 대변인인 리처드 도킨스가 나눈 대담을 중심으로 인공 유전체 합성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연구진의 실험을 간단히 요약했다.

인간, 2만2000개의 유전자 조합

미코플라스마 게니탈리움은 사람의 생식기와 호흡기에 사는 기생 세균으로서, 세균 중에서도 가장 작은 유전체를 지닌 축에 속한다. 유전체의 염기 개수는 약 58만에 달하며 유전자는 약 480개다. 30억의 염기 개수에 2만2000개의 유전자로 이루어진 인간 유전체에 비하면 매우 작다.

그렇다고 합성하기가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전까지 합성에 성공한 DNA 가닥 중 가장 긴 것이라고 해봐야 염기 개수가 수만에 불과했으니, 수십만개의 염기로 이루어진 DNA 가닥을 합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진은 부품을 만들어 조립하는 방식을 쓰기로 했다. 유전체를 염기 5000~7000개 단위로 끊어서 각각을 합성한 뒤 조립하는 식이었다. 거기에 포유류의 세포를 감염시키지 못하도록 별도의 염기를 삽입하여 핵심 유전자에 이상을 일으키도록 했다.

연구진은 각 단위의 합성을 각기 다른 회사들에 맡겼다. 합성된 염기 서열에 오류가 있는지 검사한 뒤 효모 세포에 넣어서 조립했다. 그런 다음 회수하여 다시 오류가 있는지 검사하는 과정을 거쳐 세균의 유전체를 인공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유전체를 세포에 넣어 스스로 활동하고 증식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가야 인공 생명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연구진이 그 방향으로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은 분명하다.

벤터는 한 세균에 있던 유전체를 제거한 뒤 다른 세균의 유전체를 그 안에 넣는 이식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배아줄기세포 실험 때 핵을 이식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핵이 아니라 유전체만 넣는 것이니 그보다 더 정밀한 방식이다. 비록 세균의 염색체가 훨씬 더 작긴 하지만.

   

‘인공 생명체’ 합성 실험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의 신체는 ‘디지털화’되어 특정 지점에서 해체됐다가 다른 지점에서 원형으로 조립된다.

벤터의 실험은 유전체와 생명체가 너무 복잡해서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통념을 깨뜨렸다. 낱낱이 해체한 뒤 다시 조립하면 되지 않을까? 그는 모든 생명과학 연구자가 한 번쯤 생각했을 그 의문을 직접 실험해보려는 의지로 가득한 듯하다. 인간 유전체 계획 때에도 그는 그런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인간 유전체 계획 연구자들이 전체 설계도를 보면서 이쪽 부품을 뜯어내 분해했다가 다시 끼우고 다음에는 저쪽 부품을 뜯어내는 식으로 접근할 때, 그는 전체 설계도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태도로 접근했다. 전체가 염기라는 똑같은 단위로 이루어져 있으니 대강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분석한 뒤 나중에 끼워 맞추면 된다는 식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컴퓨터의 능력을 믿은 셈이다. 수천, 수만 개의 조각으로 된 퍼즐이라도 컴퓨터는 가장자리를 비교하여 얼마든지 제대로 끼워 맞출 수 있다고 봤다. 다른 연구자들은 조합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져서 힘들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는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그런 과감한 생각으로 그는 인간 유전체 계획에 뒤늦게 뛰어들었으면서도 그 계획을 앞당기는 데 큰 몫을 해냈다. 벤처 사업가다웠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분석했으니 다시 종합하고, 해체했으니 다시 조립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듯도 하다. 벤터는 생명체를 낱낱이 해체해보았으니 이제 합성하고 조립하여 새로 만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새로 조립할 수 있다면 굳이 원래 있던 대로 복원할 필요는 없다. 원하는 대로 맞춤 조립을 해도 무방하다. DNA를 복제하고 RNA를 만들고 세포의 기초 대사 활동에 필요한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등을 포함한 최소한의 유전자에다 원하는 유전자를 추가하여 맞춤 유전체를 합성할 수도 있다. 그 유전체를 세포에 넣으면 원하는 생명체가 만들어진다. 벤터가 화석 연료의 대체물을 생산하는 생명체를 만들어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유전체를 원하는 대로 합성하여 조립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그 개념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그것은 생명체를 보는 또 하나의 주된 관점의 산물이다. 바로 생명의 본질을 정보라고 보는 시각이다.

신체가 무형의 ‘정보’로 바뀐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를 발견한 직후 과학자들은 DNA가 아미노산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단백질을 조립하는 과정을 알아내고자 애썼다. DNA의 염기는 4종류인 반면, 아미노산의 종류는 20가지였다. 따라서 단순히 생각하면 그 문제는 4종류를 조합하여 20가지를 만들어내라는 간단한 수학 문제나 다름없었다.

염기와 아미노산이 1대 1로 대응한다면, 염기 4종류로 만들 수 있는 아미노산의 종류는 4가지밖에 안 된다. 염기와 아미노산이 2대 1로 대응한다면, 16가지 아미노산을 만들 수 있다. 3대 1로 대응한다면? 64가지를 만들 수 있으므로 여유분까지 있는 셈이다. 실제로 염기와 아미노산은 3대 1로 대응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염기와 아미노산이라는 생명의 양대 기본 물질이 일정한 대응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생체분자라는 매체에서 떼어내 추상적인 규칙만 살펴볼 수도 있다. 게다가 컴퓨터가 0과 1을 조합하여 정보를 표현하듯이, 네 종류의 염기를 조합하여 유전 정보를 표현하니 디지털 형식에 딱 맞았다. 염기와 아미노산의 대응 규칙인 유전암호는 본질적으로 디지털 정보였다.

그러면 그것을 컴퓨터로 옮길 수도 있지 않을까? 생명체가 지닌 정보를 고스란히 컴퓨터로 옮기면, 컴퓨터와 네트워크로 연결된 가상의 세계에서 살면서 번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은 끝없이 펼쳐지면서 수많은 과학소설과 ‘매트릭스’를 비롯한 온갖 블록버스터 영화를 낳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실현 가능한 일일까?

   

전자현미경으로 본 가장 작은 생명체 ‘나노브(NANOBE)’.

예전에는 생명체가 지닌 정보량이 엄청나다는 점을 근거로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많았다. 가령 유명한 SF 드라마 ‘스타워즈’에는 우주선에서 행성으로 혹은 그 역으로 사람을 전송하는 장면이 흔히 나온다. 원리상으로 보면 그것은 현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분자와 그 분자들의 상호 작용에 관한 정보를 모두 읽어서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원하는 장소에서 그 정보를 이용하여 주위의 분자들을 모아 사람을 고스란히 복원하는 식이다. 연구자들은 그 정보량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청난 것이어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곤 한다.

그에 비하면 유전체의 정보를 컴퓨터로 옮기는 것 자체는 쉽다. 컴퓨터 기술과 정보 저장 능력의 급격한 발전에 힘입어, 연구자들은 이미 인간의 염기 서열 30억개를 비롯하여 여러 생물의 유전체 정보를 컴퓨터에 저장해둔 상태다. 지금은 인류 집단의 유전적 다양성과 유전병을 연구하기 위해 1000명분의 유전체 정보를 저장하려는 새로운 계획이 진행 중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생각할 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도 얼마든지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다.

벤터는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이 생명을 디지털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전체 서열 분석을 통해 생물학이 아날로그세계에서 디지털세계로 진입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그 정보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미래를 생각한다. DNA 정보와 활용 능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함으로써 다윈 진화가 아닌 인류가 이끄는 진화가 이루어지는 미래를 내다본다.

인간이 빛이 되어 날아간다?

생명체를 정보로 보는 관점을 전파한 또 한 사람은 리처드 도킨스였다. 1976년 그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 중심적 견해를 주창했다. 그 책에서 그가 유전자의 장점으로 꼽은 것이 바로 복제의 정확도, 장수, 다산성이었다. 그것은 컴퓨터의 저장 장치에 담기는 디지털 정보의 속성이기도 하다. 얼마든지 오래 저장할 수 있고, 필요하면 여기저기 복사할 수 있으며, 거의 오류가 없는 정확한 사본을 만들 수도 있다. 게다가 자주 복사하다 보면 한두 비트씩 조금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그것은 유전자에 이따금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또 세포 내 유전자의 복제 오류를 막는 수선 장치가 있는 것처럼, 컴퓨터에도 복제나 전송시 오류를 검출해 수정하는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그래도 오류는 이따금 생긴다. 오류는 때로 심각한 장애를 일으켜 생명 활동과 컴퓨터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든다.

하지만 어쩌다가 ‘바람직한 괴물’이라고 하는 유익한 오류를 지닌 변이체가 생성될 수도 있다. 그 변이체는 환경에 원형보다 더 잘 적응하여 번식할 수 있다. 도킨스는 그렇게 변이를 거치면서 진화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며, 실제로 컴퓨터 바이러스 중에 그런 양상을 보이는 것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유전학과 정보과학은 점점 더 같은 모습을 띠어가고 있다. 도킨스는 유전학이 정보기술의 한 분야가 되고 있으며 유전 정보를 인쇄하거나 기타 매체로 옮길 수 있는 순수한 정보로 파악하는 것은 역사에 큰 혁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전 정보를 순수한 정보 형태로 가공할 수 있다면, 이기적 유전자는 신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다. 그 정보는 종이든, 디스크든, 광선이든 어떤 매체에도 담을 수 있으며 기술이 허용하는 만큼 시간과 거리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 우주선에 실어 먼 행성까지 보낼 수도 있고, 아예 빛이나 전파를 이용하여 우주로 쏘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면 이기적 유전자는 지구라는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그러니 이기적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지능을 그렇게 활용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몸을 수단으로 삼기를 잘한 셈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과학 지식은 심화하고 일반 대중이 잘 모르는 전문 분야는 늘어간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첨단 상품이라는 형식으로 그 첨단 과학기술의 집약체를 접한다. 휴대전화와 얇은 화면을 비롯한 첨단 전자 장치들, 병원에서 쓰이는 알 듯 모를 듯한 진단 장비들, 약봉지에 적혀 있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온갖 처방약이 그들이다.

   

다윈 진화론의 종식

거기에 생명과학 기술도 포함될 날이 온다면? 초등학생이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에 수시로 등장하는 DNA 장치들을 갖고 실험할 수 있다면? 노란 국화를 키우는 주부가 빨간 국화나 파란 국화를 보고 싶어서 간단한 장치로 집에서 국화의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견한다(웹사이트 www. edge.org). 그는 더 나아가 부모에게서 후손으로 전달되는 유전자에 자연선택이 가해지는 다윈 진화의 시대가 끝나고 인류가 유전자를 수평으로 전달하는 양상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투의 대담한 논리를 펼친다. 누구나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옮길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리눅스 진영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맞서 누구나 고치고 개선할 수 있도록 컴퓨터 프로그램 코드를 공개하듯이, 공개되어 돌아다니는 유전자 부호를 활용하여 누구나 자신의 특성을 자유롭게 고치고 이용할 수 있는 시대 말이다.

인류는 지금처럼 알게 모르게 찔끔찔끔 진화에 개입하는 식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럴 경우 허버트 웰스가 ‘모로 박사의 섬’에서 창조한 온갖 잡종이 등장할 법도 하다. 토마토, 인간, 송이버섯 등 수십 종의 유전자를 한몸에 지닌 돼지를 과연 돼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날이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합성 생물이 등장하는 상황이라면 핵심 유전자를 기준으로 삼는 새로운 분류 체계가 개발되어야 할 법도 하다.

실제로 일부 학자는 “식물과 동물의 차이는 미생물들 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식의 과학기술의 보급이 과연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인간은 한계가 설정되어 있으면 그것을 넘고 싶은 욕구가 끓어 넘치는 존재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고려해야 할 대안이 더 많아진다고 했다. 숨죽인 채 나무 열매를 따먹던 인류가 지금의 장엄한 문명을 건설하기까지 걸어온 과거를 돌이켜보며 우리는 자긍심을 느끼고 경탄한다. 전쟁과 파괴를 일삼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을 이뤘다. 인류는 어느 종(種)도 따라오지 못할 문명과 문화와 윤리와 언어를 빚어냈다. 그것은 인류가 커진 뇌를 선택한 결과였다.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그러나 과학이 지금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미래의 여러 대안을 접하면 우리는 왠지 움찔한다. 두려움과 무력감에 사로잡히고, 그냥 과거에 하던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데닛의 말처럼 그것은 우리가 실수를 저지를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대한 새 모험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즉,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해지는 상황이 대안이라면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도킨스는 네안데르탈인처럼 지능이나 능력 면에서 호모 사피엔스에 맞먹는 또 다른 인류 종이 발견된다면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인류 비슷한 존재가 왠지 음험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 다가올 때, 우리가 환영하는 표정을 지을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은 인공 심장을 달고 피부 밑에 실리콘을 주입하고 이빨에 금을 덧씌우고 턱에 금속을 박아 넣는 등 서서히 사이보그가 되어가고 있다. 뇌파와 의지력으로 컴퓨터와 로봇을 작동시키는 등 기계 장치와의 더 완벽한 융합도 도모하는 중이다. 그런 한편으로 컴퓨터와 인터넷 망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언젠가는 자신을 고스란히 그 안으로 옮겨놓겠다는 포부를 안고서 말이다.

최근 인류학자 그레고리 코크의 연구진은 유전체 자료를 조사하여, 문화가 인류의 진화에 속도를 더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농경과 가축으로 식단이 변하고, 인구 밀집으로 전염병이 강해지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고 인류는 그런 환경에 적응하면서 빠르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기술은 그 변화를 더 가속시키고 있다.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도록 말이다. 그것이 유전자가 부과한 명령이든 아니든, 생명의 디지털화가 인간의 유력한 미래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기후변화, 그 대재앙의 끝은?
“육지와 바다는 사막으로…극지방에서 소수 인류만 생존”

기후는 혼돈 특성을 지닌 복잡계다. 작은 변화가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 제대로 예측할 수 없다. 정말로 지금 인류가 자신과 수많은 동료 생물을 벼랑 끝까지 몰았는지, 새로운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지 알 수 없다. 기후변화의 마지막은 어떤 것일지 예측해봤다. 빙벽에서 떨어진 빙하가 북극 바다에 흩어져 있다.

인류 역사를 볼 때 만고의 진리 중 하나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희로애락이든 세월이 지나면 무뎌진다는 것을 잘 안다. 이성과 감정은 따로 움직일 때가 많으며, 감정에 빠져 있을 때 지나간 세월은 까마득히 멀리 있는 듯하다.

감정만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면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상식이든 물건이든, 손때 묻고 닳고 닳은 것일수록 애착을 느낀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과학자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머릿속에서야 과학적 진리는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면 번복될 수 있다고 되뇌고 있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다. 그들도 반증 사례가 무수히 쌓이고 누군가 탁월한 논리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때까지 기존 진리를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일정 정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인류가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쓰는 방법 중 하나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과거 속에 미래가 있다는 말은 잘 들어맞을 때가 많다. 인간은 좀 더 정확히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여러 기법을 창안했다.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과거의 추세를 파악한다. 그 다음 추세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선을 죽 긋는다. 그것이 미래다. 표본 조사, 확률, 통계는 미래를 예측하는 과학적 기반이다.

그러나 상식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거부감이 발동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직관과 감정을 더 믿는다. 막연히 현 상태가 좀 더 오래 유지될 것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기후 추세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남극대륙의 얼음 기둥

1999년 장 로베르 프티를 비롯한 프랑스, 러시아, 미국의 공동 연구진은 남극대륙의 얼음 코어를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남극대륙 동쪽에 있는 러시아 보스토크 기지에서 드릴로 얼음을 뚫어 원기둥 모양의 얼음 덩어리를 채취했다. 소련의 붕괴, 혹독한 추위 등 갖가지 사정 때문에 10년이 넘게 걸렸지만 그들은 무려 3600m 깊이까지 얼음 기둥을 캐내는 데 성공했다. 42만년에 걸쳐 쌓인 눈이 짓눌려 생긴 얼음이었다.

눈이 내려 쌓이기 시작하면 떠다니던 먼지, 에어로졸 입자, 주위의 공기도 그 안에 갇힌다. 처음에 육각형 모양이던 눈은 짓눌리면서 싸락눈처럼 변하다가 이윽고 얼음으로 바뀐다. 연구진은 원기둥 모양으로 파낸 얼음을 녹지 않도록 하면서 톱으로 잘랐다. 그런 다음 오염이 안 된 중심부에 있는 얼음을 떼어냈다. 그 얼음을 진공 용기에 넣고 잘게 부쉈다. 그러자 갇혀 있던 공기가 빠져나왔다. 연구진은 그 공기를 채취해 분석했다.

얼음 코어로 분석할 수 있는 항목은 먼지와 에어로졸 입자뿐 아니라 이산화탄소와 메탄 같은 대기의 미량 기체, 각종 동위원소, 금속 성분 등 다양하다. 그 분석 자료는 과거의 기후 변화 양상을 알려준다.

프티 연구진의 논문은 지구의 기후가 장기간에 걸쳐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줬다. 42만년 동안 지구 기후는 추워졌다 더워졌다가 하는 주기를 네 번 되풀이했다. 한 주기는 10만년 정도였고, 그 주기 내에서는 추운 시기인 빙기가 80% 이상을 차지했다. 따뜻한 시기인 간빙기는 짧을 때도 있고 길 때도 있는 등 변화가 심했다. 현재의 간빙기인 홀로세는 약 1만년 전에 시작됐다.

이 논문은 기후와 대기 온실기체의 농도가 거의 완벽한 동조 현상을 보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빙하기에는 기온이 낮고 온실기체 농도도 낮았다. 온실기체인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빙하기에 180ppm이었다가 간빙기 때 280~300ppm까지 높아졌다. 현재의 간빙기에서 산업사회로 들어서기 전까지 대기 이산화탄소 농도는 거의 280ppm을 유지했으며 가장 높았을 때도 300ppm이었다.

   

식물 플랑크톤의 반란

이산화탄소와 메탄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다.

그린란드 등 만년설이 쌓여 얼음층이 높이 형성된 다른 지역에서도 얼음 코어 시추 작업이 이뤄졌다. 2004년에는 남극대륙의 돔C라는 곳에서 시추 작업을 하던 유럽 연구진이 74만년 전까지의 기후 기록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기후 주기가 두 번 더 추가되어 있었다. 그 연구도 보스토크 연구 결과를 확인시켜줬다. 기온과 온실기체가 놀라울 정도로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1850년경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점점 더 많은 화석연료를 태웠다. 숲을 비롯한 자연 생태계를 없애고 개간하면서 생활공간을 넓혀나갔다. 이에 따라 기온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구의 장기 평균 기온보다 1℃ 더 높은 상태에 도달했다. 하루에도 기온이 몇 도씩 변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대단치 않게 보이지만, 이 장기적인 변화 추세가 우리를 거의 전멸시킬 기폭제라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기후 변화를 우려하는 과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문제는 양의 되먹임이다. 작은 변화가 좀 더 큰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가 더 큰 변화를 일으키는 식으로 점점 더 변화가 가속되는 양상을 말한다.

기온이 올라가면 바닷물의 온도도 올라간다. 주로 햇빛이 닿는 표면층의 온도가 더 올라가며, 표면층과 그 아래에 있는 바닷물 사이에 밀도 차이가 생기면서 양쪽이 층을 이룬다. 그러면 표면층과 그 아래층의 바닷물이 섞이지 않게 된다. 바다의 생산자는 식물성 플랑크톤이며, 그들은 주로 햇빛이 비치는 수면 근처에 산다. 한편 플랑크톤이 필요로 하는 영양염류는 아래쪽의 차가운 물에 많다. 따라서 위와 아래의 바닷물이 섞이지 않으면 곧 플랑크톤들은 죽고 바다는 사막처럼 변한다.

식물성 플랑크톤은 공기에 든 이산화탄소를 흡수, 광합성을 통해 동물들이 먹을 양분을 만든다. 플랑크톤이 사라지면 바다가 대기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능력이 줄어든다. 또 식물성 플랑크톤은 공기 중의 수분을 모아 구름을 만드는 응결핵 노릇을 하는 물질을 배출한다. 응결핵을 통해 생긴 구름은 태양에서 오는 햇빛을 반사시켜서 지구 기온을 낮추는 기능을 한다. 플랑크톤이 사라지면 구름도 줄어들어 온실 효과는 더 강해진다.

기온 상승은 빙하에도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 이미 남북극지방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빙하와 만년설은 녹아내리고 있다. 양의 되먹임을 통해 그 현상은 가속될 것이다. 새하얀 눈과 얼음이 땅 전체를 뒤덮고 있을 때에는 햇빛이 반사되어 기온이 낮은 상태로 유지된다. 하지만 얼음 가장자리가 녹아 거무스름한 땅이 드러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곳은 햇빛을 흡수하여 따뜻해지면서 주위의 얼음을 녹인다. 얼음이 녹는 속도는 빨라진다.

유럽과 시베리아에서 벌어질 일들

대서양의 표면에서 바닷물은 북쪽으로 흘러간다. 흘러가면서 바닷물은 점점 증발해 염분 농도가 높아진다. 그러다가 북극해의 차가운 얼음과 만나면 갑자기 밀도가 커지면서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 침강이 대서양의 따뜻한 물을 북쪽으로 계속 흐르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해류 덕분에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 지역은 같은 위도대의 다른 지역에 비해 평균 기온이 8℃ 정도 높게 유지된다.

그런데 현재는 남북극지방에서 녹은 얼음이 바다로 흘러들어 바닷물의 염분 농도를 낮추고 있다. 이처럼 북극해 주변의 염분 농도가 낮아지고 수온도 올라간다면 북극해에서 표층수의 침강이 중단된다. 대서양 해류도 멈추면서 기후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가이아 이론의 주창자인 제임스 러브록은 이 가설을 논의하면서 “그래도 서유럽의 기온이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좋을 듯하다”고 말한다. 그때쯤이면 이미 지구 온난화가 그 효과를 상쇄시킬 정도로 서유럽의 기온을 올려놓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같은 양의 되먹임 효과는 육지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시베리아를 비롯한 동토대(凍土帶)에는 많은 이탄과 메탄이 얼음 속에 갇혀 있다. 온난화로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이 녹으면 엄청난 양의 메탄이 대기로 방출될 수 있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24배 더 강력한 온실기체다. 또 이탄 늪은 불이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다. 땅속에서 계속 불이 옮겨 붙으면서 이탄이 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대기로 방출될 수 있다.

   

2007년 9월29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에너지시민연대가 ‘자전거 타기를 통한 이산화탄소 배출 줄이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는 인간이 예상한 범위이며 그 외 미처 생각지도 못한 기후 변화 가속 요인들이 더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자연 생태계 파괴는 기후변화에 큰 몫을 한다. 숲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함으로써 온난화 효과를 줄이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인간이 마구 쓰고 있는 화석연료도 먼 옛날 숲이 저장해둔 이산화탄소였다. 따라서 숲을 파괴해 개간하는 행위는 온난화를 억제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자리에 논을 조성하고 소 같은 동물들을 기른다. 논과 소는 온실기체인 메탄의 주된 배출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행위 대부분이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는 듯하다. 물론 먼지, 에어로졸 등 공기를 뿌옇게 만드는 오염 물질들은 햇빛을 반사시킴으로써 온난화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지만, 온난화를 막겠다고 어두컴컴하게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며 사는 것이 대안일 수는 없다.

온난화가 유전자도 바꾼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뒤 불과 150여 년 동안 인간은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와 메탄을 대기로 쏟아냈다. 현재 대기에 있는 온실기체의 농도는 지난 65만년을 따졌을 때 유례없는 수준이다. 이산화탄소 농도는 380ppm으로 그 기간의 최대치보다 30% 더 높은 수준이다. 메탄 농도는 300%를 넘는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지만 신경이 무뎌진 탓인지 이제는 화석연료 소비를 줄이려는 기색이 별로 없다. 게다가 유가가 더 오르면 채산성이 없던 유전에서도 원유를 뽑아낼 수 있으므로 원유 채굴량은 더 늘어난다는 예측에 힘입어 석유가 고갈된다는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석유 고갈을 말하던 학자들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침울하게 “그래도 석유는 고갈된다”고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환경 변화에 반응하는 양상과 정도는 생물마다 다르다.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큰 생물도 있고,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해 환경이 조금만 바뀌면 죽는 생물도 있다. 대개 고도로 적응한 생물은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 한 가지 먹이에만 의지해 사는 생물들이 그렇다. 환경 변화로 먹이가 사라지면 죽을 수밖에 없다. 반면 급격히 진행되는 지구 온난화에 벌써 유전적 대응을 하는 생물들도 있다.

2001년 미국 오레곤 대학교의 윌리엄 브래드쇼와 크리스티나 홀자펠은 색다른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사라세니아 푸르푸레아라는 식충식물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모기를 연구했다. 이 모기는 유생 때 식충식물의 잎들로 둘러싸인 고인 물에서 자란다. 유생은 겨울이 오기 전에 휴면 상태에 들어갔다가 봄이 되면 깨어난다. 모기들은 지구 기온이 높아지고 생육 계절이 길어짐에 따라, 휴면에 들어가는 날이 더 늦어졌다. 즉 낮의 길이가 더 짧아진 뒤에 휴면에 들어갔다.

그 기간에 북아메리카의 남쪽보다 북쪽의 지표면 기온이 더 상승했다. 따라서 연구진은 모기의 변화가 생육 계절이 길어진 데 대한 반응이자, 지구 온난화가 계절에 미친 영향에 대한 반응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런 반응은 유전적이므로 연구진은 지구 온난화에 따라 모기들이 진화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이 연구는 지구 온난화가 생물의 유전자에 미치는 영향을 처음으로 검출한 사례다.

기온이 상승하면 식물들은 분포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한반도의 평균 기온이 올라가면서 사과나무, 대나무, 동백나무 등의 분포지가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식물들을 먹이로 하는 동물들의 분포 범위도 덩달아 넓어질 수 있다. 또한 기온이 상승하면 추운 겨울이 줄어들기 때문에 깨어나 활동하는 기간도 늘어난다. 그러면 더 많은 알이나 새끼를 낳을 수 있어서 개체수가 더 불어날 가능성도 있다.

뜻밖의 이유에 의한 멸종

앞서 말한 모기를 비롯해 다람쥐, 새, 곤충 등 여러 동물이 지구 온난화에 유전적인 반응을 보인다. 일부 연구자들은 생물들이 유전적 적응을 보이면서 서식 공간을 늘려간다는 연구 결과를 볼 때, 급격한 온난화가 생물의 멸종을 가져온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서식 공간이 더 넓어지니 지구 온난화가 오히려 생물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반응은 생물마다 다르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환경에서는 수명이 짧고 번식률이 높은 종이 유리하다. 반면에 한 세대가 길고 자손을 적게 낳는 몸집 큰 포유류 같은 동물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어느 쪽일까.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양서류의 대량 멸종은 온난화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양서류 수천 종은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멸종 위기에 직면한 종은 수백 종이며, 100여 종은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양서류가 이렇게 몰락하고 있는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서식지 파괴, 자외선, 환경 오염물질, 질병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2006년 앨런 파운즈 연구진은 멸종 위기에 직면한 코스타리카의 두꺼비들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병원체인 진균류가 두꺼비 사망을 일으키는데, 지구 온난화로 진균류에는 최적 조건이 형성되어 진균류가 대량 발생하고 그 결과 두꺼비에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다고 추정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이 연구는 양서류 멸종이 지구 온난화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줬다.

임계점 넘어서면 파국의 시작

제임스 러브록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온난화가 생물에게 좋다는 말에 일침을 가한다. 기온이 더 올라가면 생물들은 극지방으로 더 이동하고, 현재 적도 양편에 형성되어 있는 사막이 훨씬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육지뿐 아니라 바다도 거의 사막이 된다.

환경 변화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파국이 찾아온다. 일부 과학자들은 우리가 그 지점에 가까이 있다고, 아니 이미 넘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문턱을 넘어서면 돌아올 수 없다. 지구는 지금과 다른 새로운 상태로 넘어갈 것이다. 그 뒤 다시 평형이 이루어지면서 기후가 안정을 되찾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지금처럼 수십억 명이 복작거리며 대규모 문명을 이루고 살아갈 가능성은 낮다. 지금보다 따뜻해진 남극대륙이나 북극지방에서 빈약한 식량으로 극소수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최근 일부 과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곤충을 식량으로 삼으면 좀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인류의 낙관론과 위기 대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지금의 고도 문명을 낳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래 예측 능력은 별로 나아지진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벼랑에서 떨어지면서도 서로 옳다고 논쟁을 벌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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