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 것이 일상의 문제에서 ‘전쟁’으로 발전할 기미가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 기준이 실물에서 화폐로 변화된 시점 이후로 꾸준한 하향곡선을 그리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만 가는 ‘농업-농산물’들이 이제는 더 이상 간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커다란 문제가 되어 우리 곁에 서있습니다.
지금 당장 집 근처 마트에서 원하는 먹거리 쉽게 구입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왠 뜬금없는 식량전쟁 같은 말로 있지도 않은 위기감 조성하는 잉여 짓거리 하고 있냐고요?
매번, 조금 앞서 문제점을 지적하는 분들이 누차 하는 이야기 다시 한 번 리바이벌 하자면
“조금만~ 많이도 말고 아주 조금만 멀리 바라봅시다”
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참으로 많습니다. 꾸미고, 즐기고, 돈으로 사람을 노예로 만들기도 하고, 돈 때문에 남의 똥꼬도 빨아댑니다. 그래도 역시 가장 중요한 화폐 사용처는 언제나 먹을 것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꾸미고 즐기는 일도 먹어서 목숨 연명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조금 눈치 빠른 사람은, 눈치 빠른 기업과 국가들은, 그 대단한 ‘돈’으로 ‘식량’을 확보하는 데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지 쌀을 사재기 해 놓는다는 말이 아니지요. 근본적인 식량문제 해결... 즉 농사에 관련된 자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문제의 시작점
시장에는 여러 예측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 2050년경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량생산이 각각 30%와 21%씩 줄어
세계인구의 30%이상이 극심한 기아에 시달릴 것이다.
- 인구증가 속도를 고려할 때 식량문제는 세계대전 모두를 합친 것 보다 큰 재앙이될 것이다.
- 무분별한 산업화로 인한 경작지감소, 인구과잉, 환경문제, 기상이변 등을 고려하면 식량문제가 좋은 방향으로 해소될 가능성은 0%.
등등.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 당장 마트에서 쉽게 채소를 구입할 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진정성있게 다가오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 간식거리 보다 못한 정도의 식량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TV프로그램의 단골소재일 뿐, 어떠한 긍정적 실천으로도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나, 우리 가족들, 내 자식의 자식은 절대 이런 일 없을 것 같은 기분.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생존의 걱정 보다는 오히려 ‘그렇다면 농업관련주(종묘회사,약재회사 등)에 투자를 고려해 봐야겠군’같은 생각들이 앞서지는 않을까 합니다.
지금 곤란함이 없으니 나중에 찾아올지 모를 곤란에는 별로 관심들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생각엔 이러한 문제가 우리 자신이나, 혹은 우리 자식들에게 찾아올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몇 가지 사례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작년에 발표한 대한민국의 식량 자급률은 25.3%입니다. 하루 세 끼 중 한 끼를, 일 년 중 석달 정도만을 우리 농산물로 끼니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나머지는 모두 미국, 프랑스, 칠레, 중국 등 이른바 농업 선진국의 곡물과 채소들을 수입해서 충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OECD회원 국가 30개국 중 27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자급률 1위인 프랑스의 329%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는 수치입니다. 일본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들은 모두 최소 100%의 자급률 수치를 유지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낮은 22.4%)
다만 일본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라도 깨닫고 다양한 측면의 개선책을 내놓으며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게 우리나라와 다른 점입니다.
이 상황에서 정부는 낮은 쌀 가격의 해결책으로 쌀 생산량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쌀 자급률은 100%에 육박하니 그리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농지전용이나 쌀 생산량 감소 등이 아닌, 농산물 생산량을 늘리고 그에 걸맞는 수출이나 가공에 대한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는 방향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스스로 식량문제 해결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 어느 곳보다 더 발전해야하는 곳이 농촌임에도 불구하고, 평균연령 51세를 넘어서는 현재의 농촌은 인프라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비교적 일손이 덜 필요한 논농사(벼농사)에 의지해 경제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죠.
‘쌀이 남아도니 그만 기르라‘는 게 아니라, 쌀이 남아도는 동안 채소 과일 등이 부족하게 된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는 방향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직까지는 정부차원에서도 식량문제에 대한 위기감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바로 ‘종묘회사’문제 말이죠.
농사의 시작은 씨앗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좋은 종자를 얻는 것은 농사의 성공을 반 이상 확보하고 시작하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의미 그 이상의 문제입니다.
현대농업이 발전되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크게 짓는 가문엔 가문 고유의 종자를 육성해 집안의 자랑거리로 여길 정도로 종자는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농사의 끝을 수확이라 여기지 않고 씨앗을 채취하는 것으로 삼았던 것이죠.
씨앗을 심어 작물을 기르고 그 작물에서 내년 농사의 씨앗을 갈무리하는 것은 세상 이치라 말하는 것들 중 첫 손가락에 꼽을 만큼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이 이치를 이용해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는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 각국의 식량자원독립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 첫째가 자본을 이용한 ‘각국의 종묘회사 인수’입니다. IMF 이전까진 우리나라엔 우량 종묘회사가 4개 정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흙에 뿌릴 씨앗만큼은 우리 스스로 해결하고도 남아 해외에 수출할 정도로 튼튼한 기반의 종묘회사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IMF 위기를 기해 해외의 다국적 종묘회사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IMF의 뼈아픈 상처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 국내 시장 부동의 1위 <홍농종묘> : 세미니스社가 인수 (맥시코) -> 몬산토社가 인수 (미국)
- 중앙종묘 : 세미니스社가 인수 (맥시코) -> 몬산토社가 인수 (미국)
- 서울종묘 : 노바티스社가 인수 -> 신젠타社가 인수 (스위스)
- 농우 바이오 : 현재까지 유지
- 농진종묘 : 노바티스社가 인수 -> 신젠타社가 인수 (스위스)
- 청원종묘 : 사카다종묘社가 인수 (일본)
농우 바이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을 빼고는 국내 종묘회사의 리더그룹 모두가 외국의 다국적 종묘회사에게 인수-합병 되었습니다. 소규모의 종묘회사들이 이어져 오거나 새로 생겨나기도 했지만 시장점유율이나 소비되는 양에 있어서 다국적기업의 상대가 되질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이로서 국내 종묘시장의 패권은 완벽하게 외국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죠.아직까지 종묘상에 가보면 씨앗 봉투에서 위의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냥 이름뿐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드시는 고추의 대부분이 외국에 돈을 지불하고 사오는 고추씨앗으로 자라난 것들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실례로 맵기로 유명한 맛있는 ‘청양고추’는 중앙종묘에서 육성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앙종묘가 세미니스社를 거쳐 몬산토社로 인수된 후로는 지금 우리가 먹고있는 모든 청양고추를 몬산토社에 돈을 내고 수입해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암꽃과 숫꽃을 화분시켜 씨앗을 얻는 채종지(採種地)는 중국으로 옮겨진 상태이고요. 고추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작물들이 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 씨앗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공급으로 조절되는 가격’을 무기로 시장과 세계를 주무를 다국적 종묘회사들의 횡포에 아무 힘없이 당해야만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게 순진하고 멍청한 생각일까요?
‘오히려 씨앗 따위 가지고 그리할 수 있겠어?’하는 생각이 순진하고 멍청한 것이겠지요. 돈 앞에선 장사 없는 법이란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 각국의 종묘회사들을 인수해 몸집을 키우는 다국적 종묘회사들의 꿍꿍이가 선하고 순수한 것이라 생각하기는 너무 힘든 일입니다.
다국적 종묘회사의 대표격인
몬산토에 대한 책들도 많이 있으니 한 번쯤 읽어 보심이.
그런 다국적 종묘회사들에겐 이루고 싶은 ‘커다란 목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의 모든 농부들이 자신들의 씨앗을 구입해야만 농사를 지울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 바로 그것이죠.
헌데 농사를 지은 농부는 어김없이 수확과 동시에 씨앗을 갈무리 합니다. 농부들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종묘회사들의 꿈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종묘회사들의 간계가 바로 우리 농업이 직면한 두 번째 문제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씨앗을 만들어낼 수 없는 씨앗. 그러니까 ‘불임성 씨앗’을 만들어내는 일이죠.
씨앗을 심어 열매를 맺어도 씨앗을 얻을 수 없는, 정확히 말하자면 씨앗이 맺히긴 하는데 그 씨앗을 거둬다 다음해에 심어보면 다시 그 열매가 맺힌다고 보장할 수 없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씨앗’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고추 수확해서 씨앗 받았는데 그 씨앗 심으니 고추가 나지 않거나, 고추가 잘 자라지 못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요? 하지만 초우량 다국적 종묘회사들은 과학의 힘으로 그 일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완벽하게 씨앗을 불임으로 만들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임씨앗이 완벽하게 기능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씨앗의 유전자를 조작하고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씨앗을 소독물과 각종 화학약품에 목욕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죠. 바로 그러한 씨앗들을 가르켜 통칭 ‘F1종자’라 부른답니다.
식량전쟁에 있어서 핵폭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무서운 무기, F1종자의 어두운 그림자가 세계를 덮어가기 시작하는데...
- 저희 마을 아침풍경입니다. 작년 겨울에 귀농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봄농사를 시작으로 생전 처음의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봄채소가 무엇인지 알아본 다음에 그것들의 씨앗을 구하는 것으로 제 농사의 첫 발은 디뎌졌지요.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종묘상에서 매년 씨앗을 구입하는 방법보다는, 내 손으로 종자 받아 이듬해, 그 이듬해에도 내 씨앗으로 농사짓고 싶었습니다.
귀농하기 전, 농삿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무렵 저는 당연히 씨앗을 심어 열매를 얻은 뒤 열매에서 씨앗 거둬다 이듬해 농사 때 파종하는 그런 농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임은 귀농준비하며 책을 통해 알고는 있었고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직 실감하지 못해 반신반의 했던 정도랄까요.
'수박에서 수박씨 얻어 다시 키우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지속 가능한' 환경 농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을 접했습니다.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사람이 주인이라고 누가 그래요?] [짚 한오라기의 혁명]
[기적의 사과] [신비한 밭에 서서] 등등.
그 책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현대 농업의 근본적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이른바 '불임성 씨앗'이라는 별칭을 가진 'F1 종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열매에서 씨앗을 얻지 못하는 농업. 그 농업이 스스로 지속될리 만무하다는 선배 농부들의 걱정. 이러한 이야기들을 접하며 저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결심하였습니다.
첫째. 가능한만큼 최대한 토종(돌종) 종자들을 구하고 그것들 중심으로 농사를 진행한다.
둘째. F1종자로 농사지었을 경우, 그 열매에서 씨앗을 받아 이듬해에 그것으로 농사를 진행한다. 혹시 소출이 없을지라도 대를 거듭해 심고 얻어 원형의 기억을 되살려 내보자.
이렇게 마음먹고 주변의 재래시장을 다니며 토종 종자를 구하는 것으로 생의 첫 농사를 시작 했습니다. 토종종자는 유전자가 고정되어 있는, 다시 말해 ‘O심으면 O나는’ 그 당연한 이치가 통하는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별다른 설명 필요 없이 지금껏 이어져 온 종자들이 그 존재 자체로 입증해 주지요.
먼저 종묘상에 들렀습니다.
"병충해에 강하고 고수확을 보장하는 F1 종자가 좋습니다!"
“정말 병충해에 강한가요? 씨앗 채종도 가능한가요?”
“같은 양의 약을 써도 개량종자가 약빨이 더 잘 서지요~ 채종은 하지 않으시는 게.”
설마 했지만 역시나 였지요.
눈을 돌려 길바닥에 앉아 고무대야와 비닐봉지에 손수 농사지은 것들 담아 팔고 계신 주름 가득한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여쭤보기 시작 했습니다.
"직접 농사지으신 것들 인가요?"
"암~ 모두 내손으로 지은 것들이지"
"그럼 그것들 다시 심어서 농사지을 수 있는 건가요?"
"되는 것도 있고, 안되는 것도 있다"
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여쭤본 다음 그것들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렇게 구한 것들이 참깨, 들깨, 가지, 콩, 옥수수, 호박, 오이 등의 토종씨앗들이었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위의 토종 씨앗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
다음으로 친환경농업 관련 사이트나 개개인의 블로그를 다니며 수소문해 약간의 토종종자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구한 것들이 고추, 콩, 옥수수, 기장 등이었고요.
마지막으로 우리가 원하는 작물들의 토종씨앗이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상추, 아욱, 청경채, 열무 등. 상추 아욱은 동네 어르신들 중 몇 몇 분들께서 나눔해 주셔서 구할 수 있었는데, 청경채와 열무는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동네 어르신들과 재래시장의 어르신들께 이유를 하나하나 여쭤보니 대략의 답변이 '농사 짓기 까다로운 작물일 수록 종자받아 농사짓기 힘들다'는 것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일테죠.
농사짓기 까다로우니 수확에도 힘이 들 것이고 수확이 어려우니 종자 갈무리가 쉬울리가 없을테니까 말이죠. 하지만 뭔지 모를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종자를 ‘갈무리 하는 대상’에서 ‘구입하는 대상’으로 변화시킨 주된 원인이 마치 ‘편리’ 같이 느껴졌습니다. 다른 이를 통해 싼 값에 얻은 편리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물론 여기엔 다른 사실(시각)이 존재합니다. 이 부분은 절대 한 방향의 측면만을 주장하며 오도할 문제가 아니지요. 바로 종자 개량을 통해 우수한 작물을 다수확하게 된 점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우수형질의 개량을 통해 대한민국도 배고픔과 가난함에서 벗어나고
많은 이들의 입에 먹을거리가 풍족하게 들어가게 된 부분도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이 부분은 이 주제 하나를 가지고 다른 글에서 길게 풀어가야 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굉장히 중요하면서 민감한 부분이니까 말이죠.
아무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토종종자를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종묘상을 통해 F1 종자를 구입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청경채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동그란 모양에 파란색 물감으로 물들여 놓은 듯한 그 모습이 말이죠.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아닌 듯 했습니다.
제 선입견 때문에 그 파랑이 더욱 미워보였겠지만, 아무튼 저는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들 중 ‘그렇게 인위적인 모습’을 한 존재를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공부해보니 그러한 것들은 모두 소독약으로 코팅한 모습들이 대부분이라고 하더군요.
- 봄에 파종한 청경채 씨앗 사진.
코팅의 주원료는 해충방지와 항바이러스를 위한 화학약품이라고 합니다.
‘씨앗일 때부터 소독약에 빠져 코팅 되는 것인가.’
그렇게 뼛속까지 약품에 길들여진 씨앗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작물로 자랄 수 있을까? 그 싹은 인간의 갖은 보살핌(농약, 화학비료 등)을 받으며 자라야 하고, 녀석들이 그렇게 자라는 동안 흙은 인간의 보살핌 없인 작물하나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자연 그대로의 능력'을 잃어가며 병들어 가는 흙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흙이 약해지니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아 더욱 많은 비료와 농약을 뿌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왠지 그 모든 악순환의 중심에 저 새파랗고 반짝 거리는 코팅이 입혀진 작은 씨앗이 주인공 처럼 서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족 - 그 씨앗 심어 청경채 기른 뒤 씨앗 거둬 보았더니 청경채 씨앗은 파란색도 번쩍 거리지도 않는 갈색의 작고 귀여운 녀석이더군요.)
과연 'F1 종자'가 무엇인지 궁금해져 버렸습니다! F1 종자를 이야기할 때의 'F'는 'filial generation'의 약자라고 하더군요. 해석하자면 '자식세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고 F1은 '자식 1세대'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F1종자는 우수한 형질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다른 두 작물의 교잡을 통해 만들어진 종자를 통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 두 작물이 같은 종의 다른 형질일 수도, 아니면 애초에 다른 종(수박+호박 등)일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우수한 형질을 한데 모으기 위해 인위적으로 교잡된 작물의 씨앗(자식)이 바로 F1 종자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너부리네 집엔 달고 맛있지만 크기가 작은 참외종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맛있는 참외지만 늘 크기가 아쉬웠는데, 이웃마을 돌고래네 밭에서 당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크기가 크고 다수확이 가능한 참외를 발견한 것입니다.
농삿일을 제법 잘 하는 너부리는 서둘러 돌고래네 참외꽃과 자신의 참외꽃의 가루를 섞어 수분시킵니다. ‘이 둘을 결혼시키면 달고 맛있으며 크기도 큰 참외를 많이 수확할 수 있겠지!’하는 생각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내 달고 맛있으며 크기도 큰 참외를 다수확하여 큰돈을 벌고 딴지를 퇴사해 독립하게 되는데... (후략)
이렇게 같은 종의 다른 형질을 가진 녀석들끼리 교잡을 하여 얻은 것도 F1종자입니다.
놀음판에서 큰돈을 벌기 직전에 파토가 나버려 울분을 삼키던 파토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고추가 말이야... 가지만큼 크고 튼튼하면 얼마나 좋을까? 둘이 교잡 시키면 어떤 녀석이 나올지 결과가 궁금하군.’
생각한 바는 꼭 실천에 옮기는 파토는 가지와 고추를 교배 시켰고 의외로 우수한 형질의 고추를 얻게 되어 큰 부자가 되고 딴지를 퇴사 하게 되는데... (후략)
이렇게 다른 종을 서로 교잡시켜 얻은 열매에서 거둔 종자 역시 F1종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흔히들 알려져 있는대로 ‘화학약품으로 치장한, 나쁜 의도의 산물 F1종자녀석!!!’ 이라는 일방적인 비방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청양고추 역시 이런 생각과 과정을 통해 우수 형질의 고추들을 부모로 둔 F1으로 탄생된 작물이니까요. 아무튼 F1종자 이야기 계속 이어갑니다. ^^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F1 종자에겐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F1 종자의 성질이 F2에까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F1 종자는 화학비료와 농약 없이는 병충해를 견딜 수 없을 만큼 허약하다는 것.
F1 종자 만들기로 탄생한 달고 맛있으며 크기가 큰 참외에서 씨앗을 받으면 그것이 F2 종자가 됩니다. 그 F2 종자를 심으면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형질로 다시 분리되어 달고 맛있는 참외와 크고 다수확이 가능한 참외로 다시 나누어진다고 하고요. 거기에 적당히 달고 적당히 큰 참외가 함께 태어나고,
전혀 달지도 크지도 않은 녀석들도 함께 태어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F1 종자를 '후대를 이어갈 수 없는' ‘불임성 종자’라고 부르는데,
제 생각엔 전혀 이어갈 수 없다는 의미 보다는 '다음해의 수확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이는 유전적 형질이 고정되지 않아 ‘O심은데 뭐가 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교잡을 통해 원했던 결과물이 F2, F3, F4를 거치며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불확실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리된 형질이나 퇴화를 걱정하는 농부들이 F1 종자에서 씨앗 받기를 포기하게된 것이고, 덕분에 매년 종묘상을 통해 F1종자를 구입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것이죠.
- 자고로 자식은 부모를 닮는 법일진데
토종종자가 생명력이 강하다고 인정받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오랜 시간동안 그 지역의 환경적 여건을 견뎌가며 대를 이어온 그 생명력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 오랜 생의 반복을 통해 유전형질을 고정하였기 때문에 자기 닮은 자식을 일정 확률 이상으로 출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지역의 기후조건이나 그 지역의 병충해에 (낯선 곳에서 온 종자에 비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토종종자 좋다는 말이 단순히 ‘우리 것이 몸에도 좋은 것이여~’ 하는 동기유발을 원하는 따위의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저희 밭에 옥수수를 기르며 더욱 강하게 얻은 확신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우수한 형질을 지닌 통영지방의 옥수수와 동네 어르신들께서 나눔해 주신 우리지역 옥수수를 함께 심어 보았는데, 눈에 띄는 차이를 보이며 동네 옥수수가 훨씬 더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통해 접한 정보를 경험을 통해 익혀간다는 건 언제 겪어도 희열 넘치는 재미있는 일이더군요.
- 옥수수에게서도 배울 점은 많더군요
아무튼 다시 F1종자 이야기로 넘어와서...^^;
이러한 이유로 F1종자는 당연히 토종종자에 비해 자생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구입해 사용하는 봉투에 든 그 F1종자들은 포장에 담기기 전부터 소독약에 담궈지고 화학약품 코팅을 당합니다.
도통 스스로 일어나 볼 생각을 할 기회주차 주질 않는 것이죠. 그러니 종자채종의 어려움을 이유로 매년 F1 종자를 구입한 농부들은 병충해에 약한 씨앗을 구입한 이유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세트로 구입해야 하지요.
그렇게 약주고 화학비료주며 힘들게 농사지어도 씨앗도 받지 못하고, 흙도 제 기능을 못하도록 점점 약해져만 가니 이듬해 어김없이 씨앗 구입해야 하고 다시 비료 구입해야 하는, 좋지 못한 악순환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 이런 악순환 만큼이나 나쁜 악순환이죠...
이쯤되면
'인간의 손이 닿아 남아나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 중 농사가 제일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설혹 열매가 원하는 만큼 크지도 달지도 못한 녀석이라 하더라도, 고정적 형질을 유전시킬 수 있고 화학약품이 덜 필요한 건강한 종자를 확보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우리 농사를 이어가기 위해 더 없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씨앗이 농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뻔한 말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을 우리 힘으로 농부들의 힘으로 키워낼 수 있는 상황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두운 농업의 미래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장사꾼들은 똑 같거든요.
신발 만들 줄 아는 사람에게 신발 장사는 아주 싸게 신발을 팝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직접 만드는 것 보다 사는 것이 훨씬 더 비용이 적게 들고 신발도 멋집니다. 그래서 신발 만들기를 접고 구입해서 신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신발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되면, 신발장사는 질 낮은 신발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팔기 시작합니다.
신발이 필요 없으면 모를까, 신발이 꼭 필요하다면 울며 겨자먹기로 질 나쁜 신발을 비싼 돈 주고 사서 신게 됩니다. 이를 두고 장사꾼이 나쁘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장사꾼들은 다 똑같습니다. 그리 하는 것이 장사꾼의 덕목일 수도 있는 것이고요.
제 생각엔 스스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리’를 쫓아 만드는 방법마저 잊어버린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지난 글에서도 다국적 종묘회사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직접적인 공격을 피한 것도 모두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은 장사꾼이니까요. 문제는 언제나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종자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져 버렸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흙’으로 이어갈까 생각해 봤습니다. 졸렬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밭에 오를 수록 궁금증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생전 처음으로 ‘농사’라는 것 지어 보겠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공부 해야겠다 마음먹고 나니 역시 예전의 기질이 그대로 남아있어 무턱대고 책들만 열심히 들이파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정보 검색하고, 책 읽고, 필기하고 복습하고... 그 모든 것이 전혀 쓸모없는 일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시간들 조금 줄여 손에 쟁기와 호미 들고 밭으로 나가는 것이 공부로 치면 10년 공부를 더한 것과 같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늦은 깨달음으로 이제는 책을 들고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밭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어설프기 비할 데 없는 왕초보 농군의 밭엔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한숨 돌리며 쉴만한 곳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근력도 달리고, 무엇을 심어야할지도 잘 모르는 농군의 밭엔 작물이 심어져 있지 않은... 듬성듬성 보이는 땜통같은 빈 땅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들 중 하나를 골라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으로 제 실습시간을 채워갑니다.
주저앉아 바라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온통 초록빛의 풀 아니면 파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흙’이 눈에 들어옵니다.
- 대략 이런 풍경이죠.
농사 짓겠다고 씨앗에 대해 공부하고 나니 이제 그 씨앗 뿌릴 우리밭의 흙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날씨야 내 맘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좋은 씨앗 준비하고 흙을 건강하게 해주는 일은
농군의 길을 선택한 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이어온 농사일로 허리가 휘어버린 어르신들께서 뙤약볕에 진땀 흘려가며 비료포대 들어 나르고 뿌려주는 것도 모두 흙을 건강하게... 흙에 양분을 가득 채우기 위함이 아닌가...' 건강한 흙과 건강한 씨앗으로 농사를 짓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매일 매일을 밭에 앉아 책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만져보고 바라보고 관찰하여 느낀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흙의 할아버지는 바위입니다.
바위가 모진 세월 견디며 닳고 닳아 부서지면서도 자신 살다간 흔적 남기려는 의지로 ‘자갈’을 남겨놓고 떠납니다. 그 자갈 역시 아비와 마찬가지로 풍화되고 산화되며 세월의 풍파 맞서다 보면 어느새 ‘흙’이라는 이름의 자식을 남기고 사라지게 되지요.
할아버지와 손주가 만나려면 대략 60년 내외의 세월이 지나가야 하듯이 바위가 흙이 되는데 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이 걸리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흙은 토양의 표면층에 쌓여 작물들의 터전이 되어줍니다.
모든 동식물들이 땅에 다리 딛고 태어나 살아가다 죽습니다.
식물이 뿌리내려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자, 생을 마감한 식물을 썩히고 부수어 흙으로 만드는 것 또한 흙입니다. ‘모든 것이 흙에서 비롯되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실감 되더군요.
그 소중하고 고마운 흙이 만들어 지는 데에는 수만년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데, 그 흙이 사라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통계자료가 있습니다. 1핵타르의 땅에서 1년 동안 유실되는 토양의 양이 자그마치 30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인지 차근차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보통... 농사를 위해 밭에 새 흙을 구입하여 부으려면 10cm 정도 쌓이도록 합니다. 더 높이 쌓이도록 하면 좋겠지만 돈이 들어가니 최소한의 필요만큼만 구입하는데, 그 높이가 10cm 라는 것이죠.
책을 통해 접한 정보로는 300평의 땅에 10cm 높이의 새 흙을 채워 넣는데 대략 120톤 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전용적밀도를 1.2로 잡았을 때의 경우)
1핵타르가 대략 3000평이니 1핵타르의 밭을 10cm 높이려면 1200톤 정도의 흙이 필요한 것이고요.
앞서 1핵타르의 1년간 토양유실량이 30톤이라 하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1핵타르 밭의 흙이 10cm 낮아지는 데 40년이란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40년이면 1200톤이라는 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이 속도는 자연이 스스로 흙을 만들어 내는 속도의 8배가 넘는 것이라 합니다. 바위가 제 몸 깎아 열심히 흙 만들어내는 동안 8배 빠른 속도로 흙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미 전 세계는 토양유실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와 실천이 진행하고 있지요.
우리나라 역시 연간 4억 3천여 톤의 토양유실을 겪고 있는...
토양유실의 피해가 우려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는 ‘장마’라는 집중 호우 기간이 있고, 산이 많으니 자연히 경사지도 많아 토양유실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편이지요.
흙은 양분을 고정하여 식물에게 먹을거리를 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흙 알갱이와 알갱이 사이의 틈으로 물과 공기를 고정하여 식물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토양이 유실된다는 것은 흙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다양하고 거름진 양분이 함께 사라진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름진 겉흙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엔 모래와 자갈 등만 남게 되어 농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그런 땅이 되는 것이지요.
마치 사막과도 같은...
- 이런 땅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사진은 처음 만났을 때의 우리밭의 모습.
과연 무엇 때문에 ‘창조’ 보다 8배나 빠른 속도로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지닐 때 어렴풋이 머릿속에 지나가는 단어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정답일 확률이 100%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 단어...
‘인간’이 맞지요? ^^
토양침식, 토양유실, 사막화...
모두 같은 의미이고 이 모든 것들의 원인은 ‘인간의 과도한 욕심’ 입니다.
‘과도한’ 욕심 말입니다.
‘과도한’에 주목하여 주십시요.
어찌 욕심 없이 살겠습니까...
집 지으려면 터도 만들어야 하고, 농사 지으려면 밭도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들 다닐 학교도 만들어야 하고 공장이 있어야 공산품도 구입할 수 있을 것이고요. 다만... 필요에 의해 개발을 선택했다면, 그 개발에 의해 사라질 자연을 다른 곳에라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개발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곳에도 개발을 시작합니다. 온통 모두 개발할 곳들이라 자연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실제 토양침식의 주된 원인은 무분별한 삼림벌채와 대규모의 가축사육, 괴도한 도시화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문제의 원인에서 해결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분별한 삼림벌채 -> 분별 있는 삼림벌채
대규모의 가축사육 -> 소규모의 가축사육
과도한 도시화 -> 도시 농촌의 공존, 균형발전
어렵지 않죠? 글자 몇 개만 바꿔 생각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것이 꽤나 어려운 일입니다. 글자 몇 개 바꾸려면 포기해야할 ‘편리함’이 너무 많아지니까...
우리의 욕심은 언제나 ‘과도’하니까...
이쯤 되면 문득 어느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인간을 모두 죽이기로 결심하면서도 인간이 죽으면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걱정을 하던 너구리들...
그 너구리들은 우리 모두의 욕심을 비추는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헤이세이 너구리 전쟁 폼포코...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케 하는 애니메이션...
위에 심각하게 적어 놓은 토양유실의 해결책은 정말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나무를 심으면 된다!’입니다.
우선... 나무를 심으면 빗물이 직접 흙과 닿는 일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빗물의 충격으로 흙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되지요.
게다가 나무들의 뿌리는 튼튼한 모습으로 넓게 뻗어 흙을 강하게 움켜 쥐어주니 빗물이 모여 땅위를 흘러도 흙이 함께 쓸려가는 일을 미연에 방지해 줍니다. 전문가들이 밤낮없이 연구하여 얻은 그 토양침식의 방지책이 바로
‘나무 심기’입니다.
조금 싱겁지요...^^
도토리 나무와 너도밤나무 심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나무를 심는 사람’의 그 노인은 진정 지구를 구할 줄 아는 슈퍼 히어로였던 것입니다.
- 프레드릭 벡의 '나무를 심는 사람'은 무조건 감상해야 하는 명작중의 명작
논은 벼를 키우는 곳이고 밭은 작물들 자라는 곳인데 온통 나무를 심을 수는 없는 일일테니, 그런 곳엔 무엇이든 ‘식물’들이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작물이든, 풀이든 상관없이 맨 땅 자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작물과 풀을 동시에 키울 수는 없는 일이라서 농부들은 작물 심은 곳에 제초제를 뿌립니다. ‘풀과의 전쟁이 농사의 전부’라고 하는 이야기는 과언이 아닙니다. 시골서 농사 지으시는 어르신들 거의 모두가 풀이라면 넌덜머리 내는 분들이라 제초제 사용은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감소할 일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초제 뿌린 밭은 작물이 자리한 곳 외엔 맨 땅이 드러나 버려 집중호우 때 토양유실을 심하게 겪게 됩니다. 흙도 흙이지만 양분도 함께 많이 유실되어 버리죠. 양분이 쏙쏙 빠져나가 버리니 작물들을 위해 더욱 많은 비료를 줘야하고...
- 경사진 밭에서 자생초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차이... 사진은 우리밭^^;
이것역시 종자와 비료, 농약 때와 마찬가지로 고질적인 악순환입니다.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는 자생초(풀)와의 ‘적당한 공생’과 ‘피복’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답은 자연스러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억년이 지나도록 없던 문제가 왜 지금에 와서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가...
이는 모든 ‘발전’의 흐름이 자연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연의 모습을 관찰하고 자연과 닮아 가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 생각하고 있고요.
아무 곳에나 흙을 한 무더기 모아 놓아 보시길 권합니다.
실내가 아닌 실외에 이렇게 아무 흙이나 한 무더기 모아 놓으면 금새 그 자리에서 자생초(풀)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흙이 지나치게 오염되어 있다거나 흙 위에 무언가를 씌워주지 않는다면 거의 100%의 확률로 그 자리엔 자생초가 자라날 것입니다.
그게 자연의 본 모습이죠.
삶의 터전을 발견하면 아무 의심 없이 그곳에 자리 잡고 생을 이어가는 것이
자연이 선택한 삶의 방법이니까요. 그리되고 나면 자생초의 뿌리가 흙을 붙잡아 그곳의 흙은 쉽게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밭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작물을 심은 곳이 이랑이든 평지이든 작물을 심은 곳 외엔 적당히 자생초들도 자라고 있어야 그곳의 흙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생초가 우거지면 작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니 적당한 방법을 통해 자생초를 관리해주긴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피복’이죠.
자생초는 빛을 받지 못하면 금새 시들하다 죽어버립니다. 빛에 영향을 받는 정도가 일반적으로 작물보다 자생초가 훨씬 강하다고 합니다. 그 점을 이용한 방법이 바로 피복인데, 자생초가 자라면 그 자생초 베어내 그 자리에 덮어 둡니다. 그리하면 밑에 깔린 자생초들이 빛을 받지 못해 죽어가고, 흙은 맨 몸을 드러내지 않게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독한 약으로 씨알까지 녹여버리는 것 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건강한 방법입니다.
더구나 피복물로 사용한 자생초들이 썩어가면서 유기물로 변환됩니다.
그 유기물은 토양에 훌륭한 거름 노릇을 해주며 흙을 비옥하게 만들어주지요. 자생초 베어 두텁게 깔아준 곳을 며칠 지나 들춰보면 검은 유기물이 가득한 훌륭한 흙이 되어 있는 것을 금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복물이 수분의 증발을 억제해주어 땅에 고슬고슬 습기가 맺혀 있을 것입니다. 건강한 땅의 수호신이라는 지렁이들도 우글우글 할 것입니다. 이는 올해 처음 농사지어보는 왕초보 농군이 가장 먼저 실험으로 얻은 확신이자, 앞으로의 농사를 지금의 의지로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기도 합니다.
나무심기, 자생초와의 공생, 땅의 피복 등으로 훌륭한 거름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를 실천하여 토양이 좋아지는 정도에 따라 점차 비료도 줄이고 농약도 줄여가며 더 건강한 농사에 조금씩 다가갔으면 하는 것이 제 작은 소망입니다. 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이 나를 건강하게 해주니 고맙게 여기며 말이죠.
‘흙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지요.
그 어머니의 옷을 발가벗기기 위해 독한 농약 뿌려대며 어찌 진정한 마음으로 ‘어머니’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께 비단 옷 입혀드리는 정성으로 밭을 피복해갈 생각입니다.
흙 이야기가 어째... 풀어놓다보니 점점 길어져버린 기분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글 쓰는 재주는 없으니 벌어지는 현상인가 봅니다. 다음엔 이런 일이 없어야 할텐데...^^;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피복과 공존을 택한 저의 선택이 옳은 길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귀농 첫 날 아침에 바라봤던 우리 마을 풍경
오늘은 제가 겪은 작지만 의미 있는 ‘시선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처음 귀농을 결심했을 때는 정확히 한 단어로 설명하긴 힘들겠지만 대략적으로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누려보자‘는 마음이 컸습니다.
도시에서 광고-홍보영상 연출과 프로듀서일을 했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의 제 꿈은 영상 감독이었고 몇 편의 애니메이션(나무를 심는 사람, 모노노케 히메)을 본 뒤로 애니메이터를 꿈꾸게 되었다가 사회생활은 광고 프로덕션 조감독으로 시작하게 되었지요.
워낙 오랜 기간 동안 꿈꿔왔던 일을 내 직업삼아 일하고 있다는 즐거움과 몰입도가 극심하다는 업종 특유의 성격 덕분에 정말이지, 일에 미쳐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즐겁게 일 했습니다.
귀농한 뒤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서 ‘귀농하고 나니 행복해 지던가?’ 라는 뉘앙스의 질문들을 받곤 합니다. 그 때마다 힘주어 이야기 하지만 저와 저희 가족의 도시생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
늘 바쁜 남편의 쉼터가 되어주는 사랑스런 아내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며 그 자라는 크기만큼 애교도 자라나는 예쁜 딸아이가 함께 하는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는 그곳에서도 지금의 이곳에서도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었습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쉽고 어려운 문제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생겼다기 보다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란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첫째로 적성에 맞는 ‘맞춤옷’같은 일을 즐겁게 하고 벌이도 그럭저럭 괜찮으니 불만 갖을 만한 게 없을 것 같긴 한데 문득 문득 제 삶의 시간들을 사용하는 주체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전 세워 놓은 계획이 광고주 전화 한통에 와르륵 무너지는 것을 한두 번도 아닌 일상다반사로 경험하면 할수록 그것을 참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 졌습니다. 물론 ‘일이 장난이냐’ ‘누구는 그러고 일 안하는 사람도 있냐’ 등의 핀잔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이 받아 봤구요. ^^;
또한 기업과 정부부처 등의 홍보영상을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것들에 대한 광고와 홍보영상을 만들어야할 때가 종종 찾아오는 것 또한 힘든 일이었습니다.
물론 정부의 정책홍보 영상일을 의뢰 받은 적도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니 어쩔 수 없지!’하며 쉽게 마음 정리가 되실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에 전혀~ 뭐라 할 생각도 뭐라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고요.
헌데 반대로 그런 생각 하시는 분들께 핀잔은 많이 받아 봤습니다. ‘배가 불렀구먼’ ‘먹고 살만 하니까 저 지랄이지’ 등등. 이상하게도 전 그들에게 무어라 하는 말이 없는데 그들은 제 고민과 선택에 너무도 많은 핀잔을 선물합니다. ^^
요즘 천안함 조사결과 만화를 그린 만화가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높습니다.
어용만화가니 뭐니 하는 강도 높은 비판이 오고가는데 저도 똑같은 일을 경험했을 뿐이고 다른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일을 많이 하는 메이저 업체일수록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영상에 대한 의뢰는 비례적으로 많이 접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시는 그 일들. 그 일들의 제목을 쭉쭉 열거하면 훨씬 더 실감나는 글이 될 것 같은데 겁이 많고 걱정이 많아 그리하진 못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의 사람에게 이런 일의 광고일이 의뢰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여러분 같으면 쉽게 할 수 있겠나요? 저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거부했고 앞으로도 그러한 일이 계속 이어질 것이란 사실 때문에 많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습니다.
가치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지, 그 기준을 세우고 나면 힘든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런 영상 만들어 놓고 아내와 딸아이에게 보여주면... 나중에라도 혹시 창피해 얼굴이 붉어지진 않을까?‘
금방 답이 나오더군요.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답을 찾아내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답을 ‘틀렸다’고 이야기 하지 않고 ‘다르다’고 이야기 합니다. 틀렸다와 다르다는 분명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혹은 귀농을 반대하는 주변의 분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임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더군요. 그리고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두고 전 ‘시선의 변화’라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배가 불러서 또는 집안이 재벌이라서, 도시에서 행복하지 못해서, 그래서 귀농하였으니 “너는 핀잔 좀 먹어도 돼”가 아니라, ‘하고 싶었나 보다’ ‘경제적 안정 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좋은가보지 뭘’ 등등처럼 그냥 “그런가 보네”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선의 변화’를 통해 이득을 얻는 건, 평가받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남들을 평가하고 있는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마음이 평화로워 지거든요. ^^
이러한 구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변화된 시선’으로 농사를 바라보기 시작한 후의 느낀 점들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시선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일인지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굉장히, 굉장히 창피한 이야기지만 귀농을 결심하였을 때의 저는 농사일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각인
‘농사로 돈 벌어 먹고 살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자’가 확고한 신념이어서,
수입은 외부 수입원을 찾기로 결정하였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그림 같은 우리 집 짓고 문전옥답에서 우리 먹을 것 손수 키워내며 정시 출퇴근 생활을 만끽해보자, 대략 이런 그림만을 그려보고 있을 때였지요.
오히려 저희 아내에게서 처음으로 ‘환경 농업’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기 시작했었습니다. 자연과 호흡하는 자연스런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는 이야기들,그 당시 제 귀엔 호화찬란한 상상의 나래처럼만 느껴지던 그 이야기들을
아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매일 밤마다 제 귀에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나, 문제는 ‘어설픈 사전 지식’이 만들어 내곤 하지요. 제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아내가 제게 하는 이야기들은 어렸을 적부터 외갓집 어르신들 농사일 가끔 도와드리며 얼핏 얼핏 알아왔던 농사 이야기와는 너무도 다른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에이~ 말도 안돼” “ㅋㅋㅋ말로는 뭐를 못해” 등등의 반응들을 했었던 기억입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들을 하고 저의 그런 반응들을 대하면서, 의외로 조금도 답답해하거나 짜증내 하지 않는 아내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후후훗! 보나마나 자기도 제대로 알아보기 시작하면 좋아하게 될 껄!!!” 늘 이런 반응이었지요.^^ 아내의 그 ‘여유’가 하도 궁금하고 신기해 이런저런 정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유기농, 자연농, 태평농, 생명농. 이름은 제각각 이지만 한결같은 이야기들, 점점 그 이야기들에게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관련 도서들을 싹쓸이 하듯이 사다가 읽어보고 인터넷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고 보면 볼수록 대단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렵지 않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이다!’
지금까지는 영상연출이라는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꿈을 쫓으며 즐겁게 달려왔다면 앞으로는 ‘자연스런 농사’짓기 위해 즐겁게 달려 가보자! 이런 결심이 서게 되었습니다. 절대 ‘희생을 통한 숭고한 의지를 실천한다’는 등의 사탕발림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흥미로웠고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선택한 길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자연을 이야기하고, 자연의 농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꽤나 뜬구름 잡는 듯 하고 고리타분하며 대책 없는 ‘원칙’만 이야기할 것처럼 느껴지는데 실제 공부하며 느낀 바로는 그와 정반대 였습니다.
굉장히 과학적인 실험들이 이어져왔고 그 결과를 토대로 한 체계적인 이론이 성립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해~’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이러이러 하니 자연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이러이러 해~’ 라는 식의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그러니 읽고 접하는 이들로 하여금 계산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더군요. 과연 가능한 일인가, 어디까지 믿을 수 있겠는가, 등의 계산 말이죠.
하지만 그 계산도 사실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방법’ 보다도, 그들이 말하는 ‘이유’가 너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치 서로 친한 친구들이어서 한 자리에 모여 짜고 그러는 것처럼 한결같이 이야기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지속 가능한’ 이라는 말이죠. 시선을, 관심을, 그리고 생활을 보다 조금만이라도 더 먼 곳에, 큰 곳에 두고 생각해보면 지금 하고 있는 행위들이 ‘오래가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들.
자연과 농사를 생각하고 그 자연 속에서의 농사를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싸워 왔던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호소는, 정말이지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내 삶의 행복을, 그리고 앞으로 나의 일로 삼고 살아갈 우리 농사를,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틀린 결정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설령 결과가 좋지 못해도 과정과 취지가 아름다우니까 미련 없이 도전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에게 완전히 KO패 당한 순간이었습니다. 아내의 도움으로 제 시선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고마운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시선으로 다시 농사를 바라보았습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농사일을 배우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했습니다. 그동안 안된다고 여겨왔던 그 많은 ‘불가능’들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기 시작했습니다.
‘백날 궁리만하면 뭐 하나... 하루라도 빨리 실천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드니 도저히 참아낼 수 없어서 귀농시기도 예정보다 앞당겼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하나씩 실험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이론이 턱없이 부족하니 실험과 이론공부 병행하기를 게을리하면 안되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공부하며 만나게 된 맨 처음의 곤란함은 ‘풀’이었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잡초’ 말이죠. 귀농했을 때가 겨울이라 녀석들과 직접적으로 만나고 인사 나눈 적은 아직 없었을 때인데, 모든 책들이 한결같이 그 녀석과의 관계가 농사일의 전부라고 이야기하니 ‘대체 어떻길래 그러는가’ 하는 궁금증이 가시질 않았었습니다. 그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왕초보 농사꾼이었단 증거이죠. ^^;
아무튼 환경농업 도서들은 ‘자생초를 죽이려 약을 쓰면 안된다’하고 관행농관련 도서들은 ‘잡초를 잡아야 농사가 산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개의 이야기들 사이에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는 잡초라 하고, 누구는 자생초라고 하는구나~’
잡초. 선택받지 못한 식물들에게 주어지는 낙인 같은 이름. 지구상엔 대략 35만여 종의 식물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중 인간이 필요로 하는, 그래서 작물로 인정받고 키워지는 식물은 대략 3천여 종이 있다고 하고요. 이는 전체 식물의 1%도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그 1% 미만의 존재 때문에 인간들은 99%가 넘는 식물들을 ‘잡초’라 부르며 미워합니다. 잡것, 잡놈 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입에 게거품 물며 덤벼들 사람들이 말이죠.
‘잡’초니까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약을 쓰고 뿌리 채 뽑히는 수난을 겪으며 잡초들은 그렇게 어려운 생을 이어갑니다. 그러다가 어떤 잡초는 ‘몸에 좋더라~’ ‘피부에 좋더라~’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면 곧장 녀석은 ‘잡초’라는 이름표를 떼고 황송한 대접을 받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니라 할 수 없겠지요.
시선의 변화를 통해 다시 한 번 풀들을 바라본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리고 그들은 풀을 두고 ‘자생초’ 혹은 ‘들풀’ 등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自生草. 스스로의 힘으로 생을 살아가는 식물. 그렇게 다른 이름 붙이고 나서 그들의 생을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왜 우리 밭의 토마토는 잘 자라라고 그리도 많은 정성과 노력 쏟아 부어도
비리비리한데... 자생초들은 죽이려 죽이려 해도 어찌 이리 끈질기게 삶을 이어갈까?‘
그렇게 다른 시선으로 자생초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답’을 찾아갑니다. 이러한 ‘애정 어린’ 시선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콩과 자생초의 공존 같은 것도 결심할 수 있었지요
달라진 시선으로 흙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한없이 약하기만 해서 온갖 ‘약’들 처방 해줘야만 하던 존재가 놀라울 정도로 건강하고 생명력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약’을 줘야 한다는 나의 생각이 흙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죠.
이런 이야기 하면 동네 어르신들에게 ‘미친놈’ 취급 받기 쉽죠. 그래서 적당히 둘러대고 거짓말 하며 위기를 모면하고 있습니다. ^^ 그 정도의 유도리 조차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게 유도리 부리며 마을에서의 삶 이어가고,
유도리 부리느라 못 한 이야기. 편한 마음으로 유도리 있는 사람들이 모인 이 곳 딴지에 글로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
제가 선택한 길은 이른바 ‘태평농법’ 혹은 ‘자연농법’이라는 이름의 길입니다. 그래서 ‘농사 이야기’를 그러한 농법을 소개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보단 그 농법들을 생각해내고 실천해온 분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고 유익한 일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글들은 내공고수가 넘쳐나는 이곳 딴지에 엄청난 내공의 농부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해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구음진경따윈 백만번도 더 익혔을 것 같은 내공의 고수들.
태평농법의 이영문 선생과, 자연농법의 기무라 아키노리 선생. 그리고 후쿠오카 마사노부와 가와구치 요시카즈 선생 등등.
농업강호의 절대 고수들의 이야기로 다음에 찾아 뵙겠습니다.
지구에 급격한 환경의 파괴가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탐욕이 낳은 세기말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어느 한 소녀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실험하고 또 고민하기를 반복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 지구, 그리고 지구의 모두를 위한...
말 그대로의 이유를 묻기가 난감할 정도의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죠.
하지만 소녀의 꿈은 번번히 관습과 타성이라는 인간들만의 아집으로인해
넘기 힘든 벽에 부딪힙니다.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일 뿐 주인이 아니라는 겸손함을 실천하기위해 버려야할 과욕, 편리함, 이기심등이 만들어낸 거대한 벽.
하지만 소녀는 그러한 인간의 탐욕이 종국에는 인간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수반하는 무기가 될 것임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세상은 조금씩 '변화'를 맞고 인정해가게 되는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내용입니다. 리얼하게 현실을 묘사했으면서도 왠지 동화 속 이야기처럼 조금은 허황되게 느껴지는 이야기. 아마도 이유는 '결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이야기 속 인간들보다 더 '현실적'인 사람들 이니까... 누구 하나의 노력이나 희생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모두들 생각하니까...
우리 곁에도 나우시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늙어 얼굴 가득 주름뿐인 머리 흰 노인이지만, 젊은 시절의 열정을 불태우며 달려온 길은 세상을 구한 그 소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착한 농부'...
바로 <기적의 사과> 신드롬의 주인공 ‘기무라 아키노리’씨도 그런 분들 중 하나입니다.
기무라 아키노리
사과밭을 가꾸었던 아버지와 장인의 뒤를 이어 큰 농장의 주인이 된 기무라.
기계를 좋아하여 농기계들에 대해 공부했고 그러한 그의 취향은 이른바 '관행농법'을 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부분으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기계를 이용해 밭을 가꾸고 농약을 뿌리고...
그의 삶은 이와키마치의 다른 사과 농사를 짓는 농부들과 다를 것 없었던 것이지요. 다만 두 번의 전환점을 맞기 전까지의 이야기 입니다만...
기무라는 자주 들르던 도서관에서 우연히 한 권의 낡은 농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한 농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고 기무라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를 가업으로 이어오던 그였기에 마사노부의 말들이 조금 허황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죠(실제 그는 후에 <자연재배>라는 자신의 저서에 '마사노부씨의 정신을 계승하지만 팔기 위한 농사에 적용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음.).
하지만 반대로 농사를 잘 알고 있던 그였기에 마사노부가 말하는 '자연농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도 함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부터 그는 마음 속 가장 깊고 부드러운 자리에 '자연'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게 되지요.
꿈을 갖게 되었지만 그 꿈이 너무 허황되게 느껴져 실천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며 꿈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수많은 고민을 하던 시절... 차라리 누군가 등을 떠밀어 주었으면 하고 바랬을 법할 정도로 간절했을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아내의 농약 과민반응 증상이었지요.
농약을 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과농사를 지으며 농약 알레르기 증상이 있다는 것은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겐 단순한 악재, 그 이상의 의미였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으니까 말이죠.
농약이 아내를 죽여가고 있다는 데 무엇을 고민할까...
"시작하자!"
그렇게 기무라와 그의 가족들은 10년이라는 긴 시간의 고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날이 갈수록 약해져만가는 사과나무, 극성인 해충, 경제적 곤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는 고통 속에서의 나날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와 그의 가족 모두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로 다른 사과밭의 농부들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농약을 안 쓰고 사과를 기른다는 시도 자체를 자신들의 사과 재배 방식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기무라씨가 영웅시되면 될수록 농약을 안 쓰고도 사과를 기를 수 있는데 왜 농약을 쓰느냐고 비난받는 듯한 기분이 드는 사과 농가의 심정을 헤아리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기무라 씨 본인에게 그런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다만 자기 사과나무는 농약을 안 쓰고 기르려 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주위 밭에 피해를 끼치는 걸 가장 두려워했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손으로 해충을 잡은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 <기적의 사과> 中
세상은 보다 편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편리함'보다 '자연스러움'이 앞서 나가는 것을 본적도 배운적도 읽어 본적도 없습니다.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그건 언제나 소수의 '깨어있는 사람들'의 몫 이었지요. 그런 세상을 깨어있는 채 살아가자면 참으로 많은 시선들을 견뎌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욕하고 파괴하기 위해 하는 '노력과 실천'이 아닌 데도, '노력과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 노력과 실천 자체가 자신들의 도덕성을 향한 날카로운 화살처럼 느껴져서일까...
괜시리 무시하고, 조롱하며, 짓누르고 비웃곤 합니다.
무언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실천하지 않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무언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의 발목에 '조롱과 야유'라는 족쇄를 채우는 것...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다만 자신과 ‘다른’ 생각과 노력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 그 자체는 분명 잘못된 생각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농가의 소출을 올리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던 농약과 화학비료로 대표되는 선진 농법(관행농법)의 역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보아왔던 폐해, 그리고 예견되는 참담함.
설사 검은 미래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 덧 '자연스러움'과는 멀어져버린 우리네 삶에 대한 성찰의 의미에서라도 이제는 변화해야할 시기가 왔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다른 이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삶도, 정치도, 그리고 농사도.
아무튼 기무라씨는 일순간 패배하게 됩니다. 갈수록 병들어만 가는 사과나무에 좌절했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현실에 패배 했습니다. 밤마다 나이트 클럽 웨이터로 일하며 생계비를 벌어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였고, 그마저도 야쿠자에게 얻어맞아 이빨이 부러지는 사고로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며 더욱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사람들의 조롱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아이의 지우개를 마련할 정도의 돈도 마련하지 못해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밧줄을 하나 가지고 산으로 올랐다고 합니다.
이 모든 악순환을 끊는 방법으로 선택한 '죽음'을 맞이 하기 위해. 현실로 부터 도망친다는 자책감 보다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같은 것 마저 느끼면서 말이죠...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극적인 것.
인간의 의지와 사랑은 언제나 극적인 기적을 만드는 것.
그가 죽음의 장소로 선택했던 '산'은 착한 농부였던 그에게 새로운 시선을 선물하게 됩니다. 나뭇가지에 줄을 묶고 자신이 죽을 자리를 마련하던 그의 눈에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도토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순간 그것이 사과로 보일만큼 '사과'에 집착해있던 그에게 그 건강한 야생 도토리 하나가 큰 시선의 변화를 선물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하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곳에서 도토리 나무는, 그리고 많은 종류의 나무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죠. 그들이 맺은 열매가 탐스럽고 건강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건강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우리 사과나무를 그렇게 약하게 만들었을까?'
기무라 씨의 자연농법은 여기서 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무를, 작물을 키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대자연(大自然)이었다는 사실을 아프고 진하게 가슴 깊이 새겨 넣게 된 것이죠.
그렇게 새로운 눈으로 자신의 사과밭을 다시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해충은 보이는 대로 잡아주었지만 나무 가득히 번성해 있었고, 그리도 막으려 했지만 완벽하게 막을 수 없는 잡초들의 번식이 듬성듬성 보이는. 무언가 안타까운...
"자기는 이제껏 농약 대신 벌레나 병을 없애 줄 물질만 찾아 헤맸다. 퇴비를 뿌리고 잡초를 깍으며, 사과나무를 주변 자연으로부터 격리시키려 했다. 사과나무의 생명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농약을 쓰지 않았어도 농약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병이나 벌레 때문에 사과나무가 약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것만 없애면 사과나무가 건강을 되찾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벌레나 병은 오히려 결과였다.
사과나무가 약해졌기 때문에 벌레와 병이 생긴 것이었다.
도토리나무 역시 해충이나 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토록 건강한 것은 식물은 본래 농약 같은 게 없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의 본모습이다. 그런 강력한 자연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과나무는 벌레와 병으로 고통 받았던 것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자연을 되찾아 주는 일이었다."
- <기적의 사과> 中
뒤늦게 깨달은 '자연'이라는 존재의 힘을 배워가며 그렇게 고집스런 농부의 자연농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벌레들에 의한 피해에 효과가 있는 '식초희석액'에 대한 연구도 결실을 맺었고, 나뭇가지의 방향을 따른 '전지'도 그만의 방법을 찾아 내었다고 합니다. 자생초는 그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수확철인 가을이 오면 자생초들을 한 번 베어내 그 자리에 두는 것으로 자생초들과의 싸움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자연농법이라는 실체에 다가서면서 말이죠.
무농약 재배를 시작한지 9년째 되던 어느 날...
드디어 몇 송이이긴 하지만 건강한 꽃이 피었음을 알게 됩니다. 몇 년째 사과 하나 얻어오지 못하던 기무라씨 사과 밭에 찾아 온 반가운 손님이었습니다. 어찌나 반가운 손님인지 이웃 사과재배농가의 농부가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무라씨에게 알려줬다고 합니다.
정말 몇 송이 뿐이었지만 기무라씨와 가족 모두가 기쁨의 환희에 울고 웃느라 밤잠에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은 몇 개의 건강한 사과를 선물하고 곧 이어질 기적을 예고하며 땅위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이와키마치의 고집스런 농부의 밭 전체가 건강하고 향기로운 사과꽃으로 뒤덮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무라씨의 그 사과들이 ‘기적의 사과’라는 이름으로 황송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농사를 배우고 싶어하는 저와 같은 후배들에게 커다란 기쁨이자 희망입니다.
좋은 취지를 실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좋은 취지의 실천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희망스런 사례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씨의 인생역정이 잘 담겨있는 재미있는 책
기무라씨가 말하는 ‘자연농법’은 말 그대로 ‘자연’에서 배우는 농사법입니다. 나무 주변의 풀들을 죽이지 말고 나무와 풀, 그리고 동물들과 벨레들이 함께 살아가는 ‘자연스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자연농법이라도 말합니다. 거기에 작물들의 특성을 이해한 ‘공생’의 장을 만들어주면 더욱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기무라씨는 사과나무 주변으로 대두(콩)를 파종하여 함께 기르는데, 이는 콩과 작물들이 뿌리에 ‘뿌리혹 박테리아’라는 질소양분저장소를 만드는 것을 이용해 질소비료의 시비 없이 나무들에게 질소양분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과해서 좋을 것이 없기에 충분한 질소양분이 공급되었다고 판단하면, 2년에서 3년 정도 대두 파종을 멈추는 형식으로 공급을 조절 하고요.
또한 기무라씨는 사과농사에만 그치지 않고 쌀과 기타 채소 작물들의 자연농법도 함께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는데, 주변의 상가에서 빈병들을 모아와 실린더로 활용해 벼를 심어 키워보는 등 참으로 꾸준하고 다양한 실험들을 이어오며 자신만의 농법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어느 병의 흙은 곱게 갈아주고, 어느 것은 거칠게 써레질만,
어느 것은 전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등등...
채소 작물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다양한 실험을 거듭해 지금은 쌀과 채소 모두 관행농과 견주어 전혀 뒤지지 않는 소출을 올리며 자연농법의 대가로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미흡했던 이론과 실체적 방법들을 보완하며 ‘예술자연농’이라는 농법을 창안해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기무라씨에 대해 공부하며 '기적의 사과'를 따며 지었을 그의 미소가 생생히 느껴지는 듯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자주 등장했었고 특히 <기적의 사과>라는 책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귀농'의 길을 가려하는 자에게 참으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던 좋은 책이었다는 게 <기적의 사과>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마치 한 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와 영화를 감상한 듯 감동적인 시간을 선사해주신 분.
늙은 나우시카 '기무라 아키노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연은 따로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렁이, 애벌레, 무당벌레, 두더지, 산짐승, 나방, 수많은 자생초들과 사과나무.... 그리고 나와 우리가족, 모든 인간이 함께하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자연 아닐까요."
- 기무라 아키노리
태평 [太平/泰平]
(명사) 1.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 걱정 없고 평안함
2. 마음에 아무 근심 걱정이 없음
경남 사천 비토리에는 ‘별학섬’이라는 작은 섬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들고 나며 학과 자라의 모습을 하여 별학섬이라고도 하고, 벼락을 맞은 섬이라 하여 ‘벼락섬’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작은 섬입니다. 그 섬은 현재 태평농법의 ‘고방연구원’이 자리한 곳이며, 태평농이 연구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태평농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엔 태평농을 창안해낸 이영문 선생이 머물고 있습니다.
- 비토리 선착장에서 바라 본 별학섬의 모습
몇 번의 교육을 받기 위해 별학섬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선착장에서 내려 연구원으로 오르는 길에 ‘마영’이라는 커다란 말도 만날 수 있었고, 자유롭게 자라나는 자생초들과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다양한 종의 작물들이 건강한 모습을 뽐내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계를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 때문인지, 섬 곳곳에 스스로 만든 많은 기계들이 자리해 있었는데, 태양열-태양광 발전기부터 인공 부화기, 통통배, 각종 엔진과 수제 보일러 등 자칫 농업 연구원이 아닌 기계 기술 연구원처럼 느껴질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섬 이곳저곳을 두리번 거리다 보면 이내 이영문씨를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호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갈까 합니다. 태평농을 따르는 많은 분들이 공개적인 글이나 언사에서 이영문씨를 ‘선생’으로 지칭하지 않는 데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제 글에 ‘이영문씨’라는 호칭을 쓰는 것 또한 지적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공개적인 글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적인 호칭을 따르는 것임을 이해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 태평농부들이 계실까봐 조심스런 마음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선생님이고 스승님이지 불특정 다수의 선생님은 아니니까. 오히려 개인적인 자리에서의 이야기는 편안한 마음으로 선생님이라 부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글은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한 기우일지 모르는 걱정, 잠시 늘어 놓았습니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태평농법. 나라가 안정되고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하게 해주는 농법. 마음에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짓는 농사.
태평이라는 뜻을 헤아리면 태평농법의 뜻은 대략 위와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따른 태평농의 정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태평농은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농사꾼들이 선택하는 길이며, 또한 행복한 게으름뱅이 농부들이 선택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힘을 믿고 그 질서를 따르며 하는 농사이기에 힘도 덜 들고 비용도 덜 투입되는 ‘행복한 게으름뱅이’ 농사꾼을 가능하게 하는 탁월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영문씨는 어렸을 적부터 기계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그 취미가 지속되어 어지간한 것들은 손수 만들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현재에도 다양한 기계 기술에 대한 교육도 함께 진행하고 있는 중이고요. 그런 그의 성향을 살려 젊은 시절 농기계 사업을 했었다고 합니다. 농기계를 수리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다보니... 유난히 농기계가 쉽게 자주 고장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처음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농기계를 보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농사를 시작한 것이죠.
당시 (혹은 지금까지도) 농기계는 주로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기계들의 고장이 잦은 것이 일본과 우리나라의 토양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우리 땅에 적합한 농기계를 개발하기 위해 더더욱 농사에 매진하였다고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농사에 대해 알아갈 수록 농기계 보다는 농사 자체에 대한 애정이 커진 듯 합니다. 점점 더 깊이 연구하고 실험하며 그는 현행(관행)농법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갔고, 종국에는 그것의 폐해가 지닌 심각성을 직감하여 대안을 찾는 일에 온 정신과 시간을 쏟아 붓게 됩니다.
지프 한 대를 몰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우리 농사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며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농약 없인 힘들다’ -> ‘농약이 없던 시절엔 어떻게 농사 지었을까?’
‘비료와 거름은 꼭 필요하다’ -> ‘그런 것 없이 자라나는 돌종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일련의 질문들에 대해 잃어버린 퍼즐 조각들을 맞춰가듯 하나씩의 답을 전해주시는 전국의 어르신들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서서히 자신만의 농법을 완성해나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년의 세월이 흘러 자신의 농법으로 농사지어 주변의 관행농부들과 비교해 전혀 부족할 데 없는 결과를 얻어낸 뒤 그는 자신의 농사에 ‘태평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 태평농부 이영문 선생.
그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태평농’은 개발한 것이 아니라 ‘복원’한 것이라고. 우리네 조상들이 모두 그리 농사지어 왔고, 앞으로도 그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태평농은 나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라고. 참으로 겸손한 생각이 아닐 수 없는데, 그 겸손한 자세로 자연을 대하니 그리도 해박한 농사꾼이 되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영문씨를 실제로 만나보면 생각 외로 굉장히 유쾌하고 즐거운 느낌의 사람임을 금새 알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조금의 지루함 느낄 새가 없고, 태평농에 반하는 주장들을 접하고 답할 때에도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여유가 넘칩니다.
하지만 일련의 대가(大家)들이 모두 그러하듯, 자신의 생각을 전할 때에는 막힘이 없고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상당하게 느껴졌습니다. 태평농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저와 같이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관행농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만만치 않은 경력의 농부들도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당신이 틀렸소”라는 이야기 하고 싶어 그 먼길을 달려오진 않았을 것입니다. 태평농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농사가 지금껏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일까 하는 의문과 회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였기에 가능 여부를 따지고 싶어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태평농 교육의 질문시간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되곤 했던 기억입니다. 그리고 결국 교육장 문을 나서며 함박웃음 짓는 농부들의 표정 뒤엔 언제나 막힘없는 답변으로 궁금증을 풀어주는 이영문씨의 해박함과 솔직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곤 했고요. 또한 그의 이야기들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한 것이라는 점도 함께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자신의 존재 자체가 태평농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의 말엔 더욱 신뢰가 가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밭과 논은 그 자체가 ‘증거’가 되어 주니까.
더구나 농사 이야기 <1>에서 이야기한 종자 문제에 있어서 역시 그의 능력은 발군 그 자체입니다. 지난 봄 농진청 주최의 토종종자 기증 캠페인에세 그가 기증한 토종종자는 그 수와 품목 등을 따져 보아도 이미 개인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엔 고방연구원의 태피(태평농부)들의 노고도 함께한 것이지만, 이영문씨의 외롭고 고된 싸움의 결과임은 태평농을 아는 사람들 모두가 이야기하는 현존하는 ‘사실’입니다.
- 2010년 3월 농진청 우리종자 기증 캠페인에서 기증된 씨앗들.
종자 문제도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가며 자연을 따르는 농사꾼이라니. 어찌 태평농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부했습니다.
태평농의 원칙은 의외로 단순명료합니다.
三無원칙.
무경운(땅을 갈아 엎지 않고), 무비료, 무농약의 농법.
경운기나 트렉터를 이용해 땅을 갈아엎거나 심토파쇄하여 땅을 벌거벗기거나 흙속의 자생초 씨앗들을 끄집어 올리는 일 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경운되어 흙이 부드럽게 되도록 하자는 것이 ‘무경운’입니다. 이 때 흙을 부드럽게 경운해 주는 자연의 역할은 각종 식물의 뿌리와 지렁이 등의 흙속 생물들과 미생물들이 담당하게 됩니다. 억지로 갈아주지 않아도 이것들의 활동이 활발하기만 하면 땅은 인간이 경운한 것 보다 훨씬 부드럽고 건강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죠. 인건비와 기계운용비가 절감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흙은 스스로가 작물 키울 수 있을 만큼의 거름기를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무비료’입니다. 태평농은... 단순히 화학비료를 시비하지 말자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가축의 배설물 등으로 만든 거름 또한 굳이 만들어 밭에 뿌려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건강한 흙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이 부분은 자생초와의 공생과 흙을 피복하는 것으로 대안을 이야기 합니다. 흙을 벌거벗겨두지 않으면 지렁이 등의 생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되고, 그들이 번성하여 배설물과 시체 등을 남기면 그것들이 양분이 되어 흙이 거름지게 된다는, 이 부분에서는 비료 구입비가 절감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렁이 등의 다양한 땅속 생물들을 죽이지 않으려면 농약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바로 ‘무농약’의 원칙입니다. 농약은 해충과 함께 익충들 또한 모두 죽이게 되니, 생태계 파괴의 주범임은 굳이 새삼스레 이야기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더불어 인간에게도 무척 해로운 것이 사실이고요. 태평농에서는 농약의 역할을 천적이 대신하게 됩니다. 거미, 무당벌레 등이 진딧물, 노린재 등의 해충들을 잡아먹는 자연스런 생태계의 순환 속에서 농약을 대신할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자생초들을 죽이기 위해 뿌리는 약들도 모두 흙과 그곳의 생물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니 그리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생초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머리를 써야지, 자생초 말라 죽이는 방법으로 농사지으면 안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득 보다 실이 크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죠. 이를 통해 농약 구입비와 인건비 절감의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경운, 무비료, 무농약의 원칙을 따르면 일단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부담을 덜게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현재 관행농가의 걱정거리가 제 값을 받지 못하는 작물들과, 점점 높아지고 있는 인건비와 약재 투입비 문제인데,
3무원칙은 이러한 문제의 새로운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농사지을 수 있느냐가 문제이긴 합니다. ^^
그럼 과연 어떤 이유로 경운과, 시비, 농약살포를 하지 않고 작물들을 건강하게 키워낼 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들은 이영문씨의 저서와 교육들을 통해 배울 수 있으며
제 나름의 정리를 이곳에 남겨보니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이영문씨가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농사는 가을에 시작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농사의 시작은 봄이라 여기기 쉬운데, 그는 언제나 가을농사가 한해 농사의 성패를 결정짓는다고 힘주어 주장합니다.
가을이 오면 일교차가 심해지며 서서히 서리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서리는 서서히 들판의 푸르름이 사라질 것을 예고하며 자생초들의 생을 마감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서리가 내리면 자생초들은 서서히 죽어가며 땅은 점점 얼어 갑니다. 이렇게 땅이 벌거벗은 채 겨우내 얼어 있으면 봄 농사를 지을 때 흙이 딱딱해 경운을 필요로 하게 되며, 벌거벗은 땅에 가장 먼저 자생초들이 자리잡아 풀관리를 제대로 하기 힘든 그런 밭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겨우내 비어있어 놀고 있는 곳 없이 마늘과 양파, 보리, 호밀, 시금치 등의 월동작물을 심는 것이 방법이라고 합니다.
특히 맥류(보리 등)파종은 흙을 부드럽게 해주며 토양의 양분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늘과 양파는 지금도 거의 모든 농가에서 가을에 심는 작물이지요. 다만... 태평농에서는 작물 심는 이랑에 비닐멀칭을 하지 말고 공생할 수 있는 작물을 심어주는 것으로 대신하라고 하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자생초가 발아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지온을 높여준다는 명목하에
온 산하의 들판에 검은 비닐 물결이 가득히 출렁입니다. 하지만 비닐은 그 자체가 환경오염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뿌리가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지온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는 역효과가 극심해 작물에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이 태평농의 생각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늘을 가을에 심었습니다. 마늘 이랑들을 검은 비닐로 멀칭하지 않으면 봄이 되어 이내 자생초들이 가득 자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태평농은 멀칭 없이 마늘을 심고 그 사이사이에 상추씨를 파종하라고 합니다. 상추는 싹을 틔우지만 추운 겨울에 몸집을 키우지는 못합니다. 다만 봄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싹을 틔우려는 자생초들 보다 일찍 몸집을 키워 자생초들에게 가는 빛을 차단해 자생초와의 경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면 농부는 자생초 걱정없이 마늘 농사지어 거두고 더불어 풍부한 상추를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식으로 자생초들이 생을 마감하는 가을에 밭 전체를 월동작물들로 채워주면 이듬해 봄에 자생초와의 경합에서 손쉽게 승리하여 보다 건강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소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태평농법은 언제나 ‘농사의 시작은 가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더불어 위의 마늘과 상추 예시에서 엿볼 수 있듯이 태평농법은 궁합이 잘 맞는 작물끼리의 혼작과, 윤작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직사광선을 통해 자외선을 접하는 것을 싫어하는 고구마는 키가 큰 참깨와 함께 심고, 양파 곁에는 시금치, 감자는 콩과 함께 심으면 서로가 서로를 돕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야기이지요. 이대로 한다면 자생초들과 작물이 직접 맞닥뜨릴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콩의 뿌리혹 박테리아에 모여 있는 질소양분이 주변의 작물들을 돕는 식의 상생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혼작과 윤작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작부체계를 세우면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큰 노동력 들이지 않고 밭농사를 지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파종의 방법도 독특합니다. 흙을 파내어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어주는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흙을 파낸 골에 씨앗을 놓고 흙을 덮어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씨앗에 흙을 덮어 빛이 닿지 못하면 씨앗은 빛을 받기 위해 싹을 올리는 일을 먼저 서두르게 되어 뿌리가 깊게 내리지 못하고 키가 커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흙을 덮지 않으면 뿌리를 먼저 내려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 때문에 비바람에 버틸 수 있는 강인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저희 밭에 열무와 감자 등을 심어 보았는데, 흙을 덮지 않으면 생길 수 있는 새에 의한 피해나 바람에 의한 씨앗 유실 등의 문제는 별로 겪지 못했던 기억입니다. 오히려 흙을 덮어주는 일손은 덜은 것이라 힘이 덜 들어 좋았던 기억이었고, 소풀도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특히 감자는 동네 어르신들께서 자른 면이 아래로 향하게 하고 깊이 묻어 주어야만 한다고 하셨었는데, 태평농에서는 자른 면이 위로 향하게 하고 흙을 덮어줄 필요 없다고 하여 그리 해보니 소출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요. 태평농의 태평은 또 다른 의미로 ‘태평(게으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
보다 알기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영문씨가 말하는 태평농의 밭작물 작부체계 중 일부를 예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늦가을에 마늘을 심습니다. 태평농의 밭은 부드러우니 굳이 경운하지 않아도 됩니다. 태평농을 지어오지 않은 밭이라도 괜찮습니다. 이전에 심었던 작물이 있다면 거둘 때 작물을 뽑지 말고 베어내 땅속엔 뿌리가 그대로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 뿌리는 흙에게 산소를 공급하며 추운 겨울 동안 그것들에 의지해 살아갈 땅속 생물들의 훌륭한 삶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비닐 피복도 필요 없으니 이랑만 조금 높여준 다음 구멍을 파고 마늘을 얹어 놓습니다.
비닐 멀칭을 하면 뿌리에 산소가 제대로 닿지 못해 좋지 않고, 겨우내 따뜻한 곳을 찾는 벌레들의 서식처가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이래저래 좋지 않습니다. 흙으로 덮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대로 두어야 뿌리먼저 내리고 튼튼히 자리 잡아 비바람에 버틸 힘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늘은 뿌리 두 개 정도만 땅에 내려도 얼어죽지 않고 거뜬히 겨울을 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늘 심은 사이사이로 상추를 파종하면 더욱 좋습니다. 그 상추가 싹을 틔워 겨울을 난 뒤, 이른 봄을 맞아 그 어떤 자생초들보다 빨리 자라 그 넓은 잎으로 빛을 가려 자생초들을 이겨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옆에는 양파를 심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양파 역시 마늘과 마찬가지로 씨앗을 그대로 두고 흙을 덮지 않으면 됩니다. 마늘과 상추 처럼 양파에게도 시금치라는 친구를 함께 해주면 좋습니다. 상추의 역할을 시금치가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은 땅엔 호밀이나 보리 등을 파종해 줍니다. 완두콩이나 자운영을 파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땅 속 깊이 뿌리 내리는 보리 등이 겨울의 땅을 얼지 않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봄에 밭을 덮을 피복물도 충분히 제공해줄 것이고요. 특히 완두콩 같은 경우는 가을에 수수를 거둘 때 대를 남겨 놓은 자리에 심으면 키가 큰 수숫대를 타고 완두콩 넝쿨이 자라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겠지요.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 왔습니다. 봄의 끝자락이 느껴지면 여름이 다가오고 슬슬 마늘 수확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동안 태평농부는 마늘밭 한가득 자란 봄 상추를 먹느라 살이 피둥피둥 쪄있을 것입니다. ^^ 겨울의 추위를 이겨낸 상추는 그 톡 쏘는 맛이 일품이어서 하우스 상추와 비교하여 생각할 수도 없는 그만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컫 먹고 난 뒤 마늘 수확하기 전에 상추 잎을 모두 거둡니다. 뽑지 말고 상추대는 그대로 남겨둔 채 잎만 모두 뜯어 냅니다. 그러면 역시 자생초에게로 가는 빛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 마늘을 수확합니다. 일반 밭에서는 호미로 캐내지만 겨우내 얼지 않고 자연경운된 태평농의 마늘밭은 부들부들하기 그지 없어 손으로 살짝만 당겨도 마늘이 쑥 하고 잘 뽑힙니다.
그렇게 마늘 거둔 자리에 감자를 심어 봅니다. 감자는 씨감자에서 자른 면이 하늘을 향하도록 하여 구멍에 놓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흙을 덮어주지 않습니다. 그 다음 감자 사이사이에 콩을 심어 줍니다. 콩의 뿌리혹 박테리아가 감자에게 훌륭한 질소양분을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감자잎에 달려들 벌레들을 콩잎으로 모이게 해주는 역할도 함께 해줍니다. 콩 잎은 뜯기고 자극 받을수록 콩 꼬투리가 실하게 맺히니, 농약을 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뿐입니다. 콩과 감자의 팀워크 덕분에 분명히 실하고 맛있는 감자와 콩을 한아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양파 뽑은 자리엔 고구마를 심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구마는 자외선에 약해 햇빛에 직접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니 고구마 곁에 참깨를 파종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키가 큰 참깨는 고구마에게 가는 직사광선을 막아주고, 고구마의 넓은 잎은 주변에 자생초가 싹트는 것을 막아주니 상생도 이런 상생이 없는 듯 느껴집니다.
- 고구마와 참깨 혼작한 우리 밭의 풍경. 오른쪽은 수수와 옥수수.
물론 마늘 심었던 곳에 고구마 심거나, 양파 심었던 자리에 감자 심어도 아무 상관없으니 편한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헌데... 고추가 빠지면 섭한 것이 농사 아니겠습니까! 고추밭엔 고추 사이사이에 열무를 파종하면 좋겠습니다. 열무의 빠른 성장이 고추밭에 자생초가 나는 것을 막아주고, 고추가 만드는 그늘에서 자란 열무는 뙤양볕을 받은 녀석들보다 연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열무로 자라기 때문이죠.
열무를 거둘 때가 되면 미리 새 열무 씨를 파종하고 2~3일 뒤 수확합니다. 이렇게 하면 고추를 모두 거둘 때 까지 3~4번의 열무 수확을 맞을 수 있으니
여름의 별미라는 열무김치와 열무물김치를 먹다 질려 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 하셔야 합니다. ^^ 더불어 고추밭 가장자리를 따라 가지를 심어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가지과 식물인 고추는 수분할 때 가지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가지 특유의 건강한 생명력에 영향을 받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해서 거둔 열무로 담근 물김치.
여름 내내 질리도록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여름을 보내고... 김장용 배추와 무 파종하여 대파와 쪽파와 함께 혼작하여 키우고 거두고 나면 또다시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인 가을이 찾아옵니다.
이해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고 손쉬운 농사가 바로 태평농입니다.
쌀농사는 더욱 독특합니다.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쌀농사 풍경의 으뜸인 ‘모내기’를 하지 않습니다. 마른 논에 씨앗을 직파 하는 방법으로 농사를 시작하는데요, ‘무경운 2모작 건답직파’에 모든 답은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을에... 논에 자운영이나 보리를 심어 겨울을 나고, 봄이 찾아와 모내기철이 되면 다른 논들은 모내기 하느라 한참인데 탱평농의 논엔 아직도 보리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보리를 수확할 때가 되면 보리 수확과 동시에 볍씨를 마른 논에 뿌리고 보리 베어낸 것들을 그 위에 피복해 줍니다.
물론 트랙터를 이용한 깊이갈이(로터리)는 해주지 않고 말이죠. 그러면 다른 논에 비해 늦게 벼 싹이 오르게 되는 것이지만, 모내기(옮겨 심기)에 비해 튼튼하게 내린 뿌리 덕분에 성장은 금새 따라잡게 된다고 합니다. 장마철을 맞으면 아직 키가 멀쑥하지도 않고 뿌리도 튼튼하게 자리잡아 관행농의 벼들보다 쓰러지는 일도 드물다고 합니다.
경운을 하지 않았으니 흙속의 자생초 씨앗들이 위로 올라올 일이 없고, 촘촘하게 해 놓은 보릿대 피복 덕분에 자생초들이 기를 펴지 못하게 되면, 이른바 농부가 할 일이 별로 없다는 ‘태평농 쌀농사’가 이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자란 쌀 거둘 때 마찬가지로 보리 파종하여 수확한 볏짚으로 덮어주면 보리농사 시작. ‘무경운 2모작 건답직파’는 이러한 구조로 순환하는 벼농사를 이르는 말입니다.
태평농을 공부하며 접한 책은 이영문씨 저서 [태평이가 전하는 태평농 이야기]와 [사람이 주인이라고 누가 그래요] 이렇게 두 권이었습니다. 이 책들은 단지 농사 이야기에서 머물지 않고 건강, 식단, 자연과 인간, 주택, 난방 등 주제를 한정하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책들이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심을 권하고 싶습니다.
무언가 자세히 태평농법을 설명하고자 시작했는데, 세세한 작물 사례들 이야기 꺼내보지도 못하고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긴 글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3무원칙(무경운, 무비료, 무농약)과 혼작과 윤작,
흙을 덮지 않는 씨앗 파종과, 피복 등을 지켜나가는 농법이라면 어떤 자신만의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도 태평농과 닿아 있다고 여기면 될 것 같습니다.
이름이 꼭 태평농법일 필요는 없지요. 어떻게 짓더라도 그런 정신으로 짓고 싶기에 태평농을 따르는 것 뿐입니다.
오히려 어쩔 때는... 처참한 저희 밭을 남들에게 보여줄 땐 태평농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도 않고는 합니다. 그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서. 그건 ‘자연농법’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 이고요. 그래서 저는 곧잘 ‘자연스런 농사’ 혹은 ‘환경농업’이라는 말로 애둘러 표현하곤 한답니다. 자연농법의 기무라씨 등도, 태평농법의 이영문씨 등도 모두 저처럼 처참하게 농사짓고 계시진 않으니까.^^;
태평농은 지금껏 제가 만난 많은 농법 중에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과 실천’을 가장 자세하고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는 그런 ‘철학’과도 같은 농법이었습니다.
제 글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때문에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꼭 직접 책이나 교육을 통해 태평농의 정수를 경험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 글은 너무 부족합니다.^^ 태평농을 직접 접해보신다면 분명 보다 쉽게 도시 농사의 길을 결정하실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태평농법 전파하는 농사꾼 이영문
"쟁기질 써레질을 왜 합니까"
'논 팔아 굿하니 맏며느리가 춤춘다’는 속담이 있다. 며느리가 덩실거리는 것은 굿이 흥겨워서가 아니라 힘들고도 지겨운 노역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게 됐다는 데서 오는 홀가분함 때문일 것이다. 농사란 전래적으로 ‘뼛골 빠지는’ 일로 인식돼왔다. 모처럼 농촌 들녘 나들이에 나선 도회인들이 “나도 이런 농촌에 와서 씨 뿌려 가꾸며 살고 싶다”고 뇌까리곤 하는데, 땅을 일궈 농사를 짓는다는 일이 어디 도시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처럼 목가적이기만 한 생활인가. 귀농을 하겠다고 마음 다잡고 내려간 도시 젊은이들 중에 1년을 못 참고 다시 보따리를 싸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만 봐도 농사의 어려움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경상도 하동 땅의 한 농촌에 갔다. 농사가 기계화됐다고는 하나 망종(芒種)을 눈앞에 둔 시기라 밀·보리 수확하랴, 모 쪄서 논에 내랴, 부지깽이도 달려나와 거들어야 할 만큼 바쁜 때였다. 그런 때 가장 민망스러운 사람은 모처럼 볼 일이 있어서겠지만 멀쩡하게 차려입고 마을을 찾은 외지인이다. 유유자적 논둑길을 걸으며 땀 흘리는 사람들을 구경하자니 뒤통수가 스멀거리고, 그렇다고 구두 벗어던지고 남의 논바닥으로 빠져들 수도 없잖은가.
그런데 농번기에도 이 사람의 논을 지날 때에는 그 미안함이 덜하다. 갈고 엎고 물대고 심고 하느라 정신없는 다른 논들과는 달리, 그의 논에는 아직 평화롭게 밀·보리가 익어간다. 양말까지 챙겨 신고 논둑을 어슬렁거리며 걷는 주인의 표정 어디에도 ‘재 너머 사래 긴 논을 언제 갈아’ 모를 낼까 따위의 걱정 한 주름 없다. 밀과 보리도 딴사람들 모내기가 다 끝나갈 무렵에나 슬슬 거둘 생각을 하고 있다. 그뿐인가. 벼농사 짓겠다는 사람이 못자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쯤 되면 필시 금년 벼농사를 포기한 사람이거나, 동네에서 아예 내놓은 게으름뱅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논바닥이 손바닥만해서 서두르고 말고 할 건덕지가 없는 경우리라.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이 사람이 1년에 짓는 논농사만 줄잡아 3만5000 평이다. 보리나 밀을 빼고 쌀만 400가마 넘게 수확하고, 순전히 쌀농사만으로 연간 억대에 가까운 매출을 올린다. 그는 대농(大農)에 속하는 그 많은 일을 혼자서 거뜬히 해치운다. 그렇게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집 안에 비료포대, 농약포대 하나 보이지 않는다. 무슨 마술이라도 동원하는 것일까?
어쨌든 필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 모내기철을 맞아 바삐 돌아가는 다른 들녘과는 달리 그의 논에는 걱정스러울 만큼 태평스럽게 밀과 보리가 하늘거리고 있었고, 그 들판을 바라보는 주인의 표정도 한정없이 태평스러워 보였는데, 바로 이 ‘무사태평’이 농사꾼 이영문씨 (45)의 농사철학과 그의 독특한 영농법을 설명해줄 화두다.
경남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에 있는 그의 농기계수리점 겸 태평농법을 전파하는 사무실에는 ‘태평농업’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미안스럽게도 들에 나갔던 그가 서울에서 방문객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고 소형 승합차를 몰고 서둘러 돌아왔다.
―태평농법으로 농사 짓는 사람은 다른 사람 모내기가 한창인 요즘 오히려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들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오셨습니까?
“특별히 할 일은 없습니다. 작년 홍수로 무너진 논둑을 좀 손보고 있던 중이었어요.”
―태평농법이라… 그러니까 무사태평으로 게으름 피워가면서 농사 짓는 방법입니까?
던져놓고 나니 너무 무례한 질문인 성싶었다. 사전 귀동냥에 의하면 요즘 그는 농사 짓는 데 쓰는 시간보다 전국 각지에서 그 농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농사 요령을 설명하고, 정부기관이나 대학, 크고 작은 농민·사회단체에 불려가서 강연하느라 빼앗기는 시간이 더 많다고 했다.
“한번 따져봅시다. 옛날의 부자를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을 다 소작 주고 몇 백 마지기만 지었다고 쳐보자고요. 경지정리도 안 된 쪼가리 논이어서 일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텐데, 과연 소 몇 마리하고 머슴 몇 사람 데리고 일일이 쟁기로 갈아엎고 써레질해서 농사를 짓는 게 가능했겠느냐고요. 불가능합니다. 지금처럼 기계화 영농이 일반화하고 경지정리가 잘 된 상황에도 한 가구에서 수백 마지기 농사 짓는 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옛날 우리 조상들이 모두 항우 장사나 홍길동 같은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를 가졌거나 신출귀몰한 사람들이 아니었을 바엔, 지금 방식으로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뭔가 다른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뭐냐….”
―그럼 쟁기질이나 써레질을 하지 않고 벼를 재배했을 거란 얘긴가요?
“언제부터 쟁기질을 했고 언제부터 써레질을 했는지를 여기저기 다 뒤져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내 나름으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경사진 땅을 파서 편평한 논을 만들 때 안쪽의 흙을 바깥쪽으로 끌어내서 평탄작업을 하지 않습니까. 그랬을 때 흙을 깎아냈던 안쪽은 바닥이 단단해서 농작물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단 말이에요. 그곳만 쟁기질 써레질로 일궜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그가 개발한 농법(그는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했던 농법을 되찾은 것이라 했다)이 바로 태평농법이다. 태평농법을 짧게 설명하면 이렇다.
논에 보리나 밀을 파종한다. 6월 중하순쯤에 밀과 보리를 베어내고, 그 자리(쟁기질을 하지 않은 마른 논바닥)에 볍씨를 뿌린다. 그런 다음 보릿짚이나 밀짚으로 덮는다. 그걸로 파종이 끝난다. 화학비료도 뿌릴 필요 없고 농약과 제초제는 더더욱 필요없다. 물? 열흘이나 보름 간격으로 2∼3일 동안만 대주면 된다. 가을이 되면 벼가 익는다. 보리파종도 간단하다. 벼를 수확하고 난 마른 논바닥을 갈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보리 씨앗을 뿌리고 벼 수확하면서 생기는 짚을 논바닥에 덮어두면 보리가 저 알아서 잘 자란다. 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으면 땅을 갈 필요가 없으니 쟁깃날도 필요없고 써렛날도 필요없다. 보리 베고 그 자리에 마른 볍씨를 뿌리기만 하면 되니 못자리도 필요없고 장화를 신을 일도 없다. 수만 평 농사를 혼자서 지어도 여유가 있으니 인건비도 필요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장난같이만 들리는 이 농사법을 처음 듣고 ‘정신나간…’ 운운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필자도 그랬고, 현장을 보고 온 지금도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씨는 한정없이 한갓진 듯 보이는 그 농법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20년 동안이나 끈질긴 실험을 해왔고, 지금 그는 한두 뙈기의 논에 실험적으로 해보는 게 아니라, 3만5000평의 자기 논 전부를 바로 그 태평농법으로 경작하고 있다. 아니 경작의 ‘耕’은 ‘논밭을 간다’는 뜻이니 괭이질 한 번 하지 않고 벼를 재배하는 태평농법에 ‘경작’이라는 말은 걸맞지 않은 표현이다.
태평농법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따져보기 전에, 그가 어떤 연유로 ‘쟁기질하고, 써레질하고, 못자리 만들고, 비료 주고, 농약치는’ 고전적인 쌀농사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농사꾼 이영문은 1954년 경남 사천의 농촌에서 빈농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름으로 된 농지는 한 뼘도 없었고, 얼마 안 되는 종중논을 일궈서 간신히 끼니를 잇고 살았다. 외아들이었으니 어지간하면 고등교육을 시켜보겠다는 엄두를 냈을 법도 한데, 그의 아버지는 자식 교육은 물론 보릿독 바닥 드러나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한량’이었다. 어머니의 호미품팔이로는 중학공부마저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중1 중퇴. 중학교 문턱에 들어가자마자 나와버린 셈이다. 서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을 안고 무작정 상경길에 올랐으나 어렵게 들어간 야간 중학마저 다시 그만둬야 했다. 발육이 제대로 안 돼 왜소한 체구인 그를 받아줄 일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고생만 ‘엄청시리’한 끝에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두 번씩이나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1학년 때 그만둔 게 그의 학력 전부다.
그 무렵 부친도 ‘정신을 차리고’ 세 식구를 이끌고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으로 이사를 했으나 비빌 언덕이 없었던 탓에 이영문은 기술을 배워보겠다고 나섰다. 뭐든 뜯었다 맞췄다 하는 데에는 남다른 재주를 타고난 그가 농촌에서 소질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다름 아닌 농기계였다.
기술 서적을 갖다놓고 밤낮 없이 기계에 매달린 끝에 드디어 어떤 농기계에도 자신이 붙었다. 때마침 정부에서 기계화 영농을 농업 근대화 정책으로 내걸었고, ‘기계로 논밭을 간다’는 것은 당시 모든 농사꾼의 소망이었기 때문에 농기계 보급이 빠른 속도로 확산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만 해도 농기계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던 시기라 농민들은 나사 하나만 죄면 될 일을 가지고도 큰 고장이 난 줄 알고 수리점을 찾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심하게 고장이 난 기계도 그의 손에만 오면 해결됐으니, 그의 농기계 수리점은 수지가 맞았고, 찌든 ‘가난의 때꼽재기’도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농기계 수리공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계가 완제품을 수입해서 조립한 겁니다. 그런데 왜 이게 자꾸 고장이 나느냐, 우리 토양에 맞지 않기 때문 아니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과연 소로 쟁기질하고 써레질하던 전래 농사법을 팽개치고 기계에다 쟁깃날 달고 써렛날 달아서 마구 파헤치는 농사법이 과연 옳은 것이냐, 이런 의문에 봉착한 것이지요.”
이씨는 영농현장에 적용시켜보지 않고는 농기계를 제대로 알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외국산 농기계를 쓰는 영농과 소를 이용한 경작의 차이를 논에서 직접 실험하고 관찰했다. 실험 관찰 끝에 내린 결론은 기계에 의한 영농방식이 ‘틀려먹었다’는 것이었다.
벼의 '무경운(無耕耘)재배' 선언
“소로 갈 때는 말입니다. 소가 쟁기를 끄는 힘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깊이 갈 수가 없습니다. 쟁기를 보면 끝부분에만 금속이 붙어 있지 않습니까. 많이 갈아야 20cm예요. 20cm 밑에 있던 흙이 위로 올라오고, 온갖 잡초의 씨앗이 떨어져 있던 표면의 흙이 그만큼의 깊이 아래로 들어갑니다. 거기다가 써레질은 기껏해야 5cm 정돕니다. 그런 상태에서 모를 심으면 뿌리가 직근(直根)합니다. 왜냐고요? 20cm 아래에 잡초 씨앗이나 뿌리가 달린 흙덩어리가 그대로 있어서 산소가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수입 농기계로 갈고 써레질을 하는 경우는 땅을 무지막지하게 파헤치는데다, 흙을 믹서에 야채 갈 듯 완전히 파괴시키기 때문에 무게별로 지층이 형성됩니다. 맨 위에는 점토질이 형성되면서 흙보다 가벼운 잡초 씨앗도 모두 위로 떠올라요. 그 상태에다 작물을 심으면 뿌리가 착근하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서 뻗기 때문에 성장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제초제라는 것도 기계화 영농이 본격화하면서 보급됐는데, 제초제가 단순히 김을 맬 일손을 덜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라, 그걸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잡초가 무성하다 보니까…
“딱 맞는 얘깁니다. 논바닥의 흙을 마치 체로 흔들 듯이 해놓으니까 잡초 씨앗이 모두 위로 올라오게 되잖습니까. 옛날 소로 농사 지을 때에도 잡초는 났지만 사람이 손으로 뽑아도 될 정도였어요. 게다가 기계로 파헤치는 경우 뿌리가 수직으로 착근하지 못하고 옆으로 퍼지니까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제대로 성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령 날을 짧게 한다든가 하는 방식 등으로, 기계를 이용하면서도 예전에 소로 경작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농기계를 만들어보시지 그랬어요? 농기계에 ‘도사’시라면서요?
“만들어봤지요. 우리 환경에 맞는 농기계를 만들어보자고 작심하고, 써렛날이 현재 일반 농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의 1/8에 불과하고 동력 손실도 1/5밖에 안 되는 한국형 농기계를 시제품까지 만들었는데, 그걸 받아서 생산할 업체가 있어야지요.”
―왜 그랬을까요? 동력 손실이 적으니 기름값도 덜 들고, 제초제나 화학비료도 덜 쓸 수 있어서 효율적이었을 텐데.
“물정 모르는 말씀 마세요. 농기계 제작·수입 업체로서는 엔진도 크고, 파손도 잦고, 가격도 비싸야 자꾸 신형으로 교체할 것이고, 그래야 장사가 될 것 아닙니까. 제가 만든 것처럼 작은 엔진에다 고장도 잘 안 나고 간단하기 짝이 없는 기계, 그거 만들어봤자 수지가 안 맞아요. 농민들 사이에도 비싼 수입 농기계를 써야 최고인 줄 아는 인식이 확산됐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바로 그런 농기계에 의한 영농이 표준농법인 양 지도를 한 농업 지도기관의 영향도 크지요.”
실망한 그는 농기계 수리업을 포기했다. 자신이 개발한 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지 맞는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에 농기계 수리점이 생겨났고, 80년대 들어 소 파동에다 작물 파동 등이 잇따라 자꾸 외상만 깔리는 등 운영에 어려움이 닥친 탓이었다. 이제 그는 농사를 짓기로 작심했다. 다른 사람의 논을 임차하고 일부는 구입도 해서 벼농사에 돌입하는데, 수입 농기계를 중심에 두고 진행되고 있는 관행적인 영농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지을 것인지가 문제였는데, 그는 벼의 ‘무경운 재배’를 선언한다. 무경운(無耕耘), 논을 아예 갈지 않고 벼농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한 해 농사를 그르치면 손해가 막심한데, 무턱대고 그런 생소한 농법을 실험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으로 보이는데요?
“주먹구구식으로 덤벼든 게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충분히 확신이 섰어요. 갈고 써레질 하는 이유가 뭡니까. 흙을 부드럽게 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리나 밀이 자라고 있는 땅의 흙을 만져보세요. 대단히 부드럽습니다. 보리나 밀을 한 번이라도 베어본 사람이면 다 압니다. 낫질 서투른 사람은 자꾸 뿌리째 뽑아놓지 않던가요. 그러니까 인위적으로 갈아 엎어서 부드럽게 하지 않아도 자연 스스로 미생물에 의해서 충분히 제 살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는 거예요.”
잡초만 무성한 도깨비밭
―화학비료는 그렇다 쳐도 퇴비도 줄 필요가 없습니까?
“식물이 퇴비를 먹고 자란다는 인식부터 버려야 합니다. 유기물을 먹는 게 아니라 무기물을 먹는 거예요. 흙 위에 유기물을 얹어놓으면 토양 속의 미생물이 그걸 먹고 무기물을 분비하는데 식물은 그 무기물을 먹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무기물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라인이 이미 흙 속에 갖춰져 있어요.”
―그렇다면 물은 왜 댑니까? 옛날에는 산간지역에서 밭벼를 재배하기도 했잖습니까?
“벼는 물에서도 잘 자라고 물 없는 데서도 잘 자랍니다. 아마 아열대 식물인 벼를 처음 도입했을 때에는 마른 땅에서 했을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왜 논에 담수를 했느냐, 물이 있는 곳에서 재배를 해보면 잡초가 훨씬 덜 납니다.”
―태평농법에서는 물을 보름 간격으로 2∼3일만 넣어주면 된다고 했는데, 순전히 잡초를 없애기 위한 방편인가요?
“아닙니다. 소출을 높이기 위해섭니다. 2~3일 동안 물을 대주면 그 물을 토양이 다 가져가기 때문에 일부러 빼줄 필요가 없습니다. 물에는 혐기성(嫌氣性:산소를 싫어하는) 미생물이 많고, 마른 논에는 호기성(好氣性:산소를 좋아해서 공기 중에서 잘 자라는) 미생물이 많습니다. 그 미생물들이 살아 있을 때 분비하는 물질이 바로 식물의 먹이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물을 넣어줬다 빼줬다 하면 혐기성 미생물과 호기성 미생물의 분비물이 풍부해져서 작물 성장이 더 활발해지지요.”
그러나 한국의 기후는 몬순 기후여서 쌀농사를 짓는 데에 물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적당한 시기에 비가 와서 담수 됐다 말랐다를 저절로 해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인위적으로 파 헤집어놓은 논바닥은 조금만 가물어도 거북등처럼 갈라지지만, 자연에 의해서 부드럽게 유지돼온 흙은 아무리 가물어도 아래쪽에 수분이 있어서 멀쩡하다는 얘기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는 필자로서도 그의 빈틈없는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래서 처음 그런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서 보란 듯이 성공했나요?
필자의 질문에 이영문씨가 씁쓸하게 웃었다. 결과는 참패. 웃음거리였다.
“될 것 같았어요. 아니, 이론적으로 반드시 돼야 했어요. 그때가 아마 87년도였던 것 같은데, 자신만만하게 볍씨를 뿌렸던 논에는 잡초만 무성했지요. 도깨비밭이었어요. 그래도 드문드문 벼가 있긴 했는데….”
알 만했다.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그를 향했을 건 뻔하다. 히야아, 그 잡초숲을 뚫고도 자란 벼가 있긴 하네 그려. 아예, 산에다 볍씨를 뿌리지 그래. 제초제 뿌리는 법 모르면 내가 가르쳐 줄까?
방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관행으로 굳어져 온, 농기계로 파헤집는 식의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굳어져만 갔다.
“그러나 나도 완강했지요. 너희들이 잡초 없애겠다고 10년간 제초제를 뿌렸으면 풀이 완전히 없어져야 옳은 것 아니냐. 그런데 한 해만 농사 안 지으면 무성하게 우거진다 이 말이지. 이건 제초제로 잡초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패배예요.”
그의 실험은 계속되었다. 잡초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짚으로 논바닥을 덮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이모작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그때 발견했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마른 논에 그냥 볍씨만 뿌려놓고 말았는데, 다음 실험으로 그는 밀과 보리를 심어서 수확해낸 다음에, 그곳에 볍씨를 뿌리고 밀짚과 보릿짚을 덮었다. 그렇게 하니 새가 주워 먹지도 않았고, 잡초도 거의 돋아나지 않았다. 성공이었다. 태평농법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수입 농기계로 갈아엎고, 화학비료나 농약, 제초제를 뿌려서 농사 지어온 농토에도 어느 해 갑자기 보리 재배했다가 마른 논에 볍씨 뿌리고 짚풀을 덮어주기만 하면 태평농법으로 농사 짓는 게 가능하다는 얘긴가요?
“가능합니다. 첫해부터 갈지도 않고, 비료도 안 치고, 농약도 안 치고 해야 지력이 금방 회복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쳤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은, 첫해에는 제초제와 비료를 조금은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워낙 그런 농법으로 단련된 토질이기 때문이죠. 저는 애당초 70%의 소출만 올리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시도했었거든요.”
제대로 해볼 양이면 수확량 걱정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제초제나 비료 따위를 쓰지 말고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고 그는 말한다. 독한 제초제를 쓰다가 한 해만 안 써도 잡초가 무성하게 치올라오는 것은 자연이 스스로를 복구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 그걸 보고 인간은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파괴해버린 자연을 원상으로 돌린다는 차원에서라도 한 해쯤은 잡초를 맘껏 자라도록 방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이 얘기도 잘 안 믿겠지만….”
필자가 워낙 못 미더워하자 이씨는 답답해하며 그런 사족을 달았다.
“논에 피가 많이 나서 너도나도 피사리를 하느라 땀을 흘렸지 않습니까. 그러나 피는 뽑아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한 해만 농사를 안 짓고 방치해보세요.”
―그러면 다음해엔 논이 온통 피밭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씨가 엄청나게 떨어져서 피가 많이 나지요. 그러나 그 다음해에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잔디처럼 논바닥을 뒤덮을 것 같지요? 천만에요. 훨씬 줄어들고 3년째엔 피가 한 포기도 안 납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태평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이나 보리를 병작(竝作)해야 한다는 얘긴데, 같은 땅에다 이 작물 저 작물을 번갈아 심으면 지력이 쇠해서 소출이 줄어든다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전혀 잘못된 상식입니다. 이것 저것 많이 심어줄수록 지력은 좋아집니다. 물론 단작(單作)일 때에는 지력이 떨어집니다. 단작을 되풀이하면(같은 작물을 거듭 파종하면) 미생물의 종류가 다양해지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러 작물을 파종하게 되면 미생물의 종류가 다양해져서 흙이 한결 부드러워집니다. 산(山)의 토양을 생각해보세요.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자라는 산의 흙은 기름진 부엽토지만, 한 가지 나무만 자라는 곳의 흙은 그렇지 않습니다. 논밭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논리가 유수 같은데 그렇다면 어째서 초기에는 참패를 면치 못했을까? 이유가 있었다. 보리나 밀을 베어낸 자리에 볍씨를 뿌려놓기만 했을 뿐 덮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보릿짚 밀짚을 덮으면 잡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때가 1987년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수확을 하는 둥 마는 둥했었는데, 이때부터 제대로 소출을 올리게 된 셈이다.
“제가 ‘이상한’ 농사법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부의 연구기관에서 찾아왔더라구요. 이 사람들이 와서 정말로 논을 안 갈고 파종을 하는지, 비료나 제초제를 안 주는지, 물을 안 대주는지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실험도 했어요. 그런데 자기들이 땅 갈고 농약치고 비료 주는 방식으로 한 켠에다 시험농사를 했던 곳보다 내 방식으로 지은 곳에서 오히려 수확이 더 나온 겁니다. 300평당 488kg이 생산됐어요. 이렇게 되니까 내 방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지요.”
'농비 제로 직파기'
이 무렵 이씨는 이미 자신의 농법에 맞는 농기계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이름하여 ‘농비 (農費) 제로 직파기’다. 보리나 밀을 수확하면서 동시에 볍씨를 논바닥에 자동으로 뿌려주는, 또는 벼를 수확하면서 보리나 밀의 씨앗을 동시에 파종하는 기계였다. 그러니까 보리 베는 작업 따로 하고 볍씨 뿌리는 작업을 따로 하는 게 아니라 베어내면서 바로 다음 작물의 씨앗을 뿌리는 기계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기계를 가지고 정부 연구기관의 작물시험장에 찾아가 파종을 해주기도 했다.<ㅔ> “그런데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 농사법을 ‘무경운건답 이모작 직파농법 (無耕耘乾畓二毛作直播農法)’이라고 이름을 붙여서는 자신들이 연구 개발해낸 농법인 양 보고를 한 겁니다. 제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 방식을 실험해온 것을 빤히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남의 연구성과를 가로챘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분개했지만, 저는 참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일개 농부인 내가 아무리 획기적인 농사법을 찾아냈다고 해봤자 정부 기관으로부터 검증이 안 된 상태인데 농민들이 그 농법을 도입하겠습니까? 그리고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농기계업체나 비료·농약제조업체 등)의 조직적인 반대가 있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부의 연구·지도기관에서 권장한다면 차원이 다르거든요. 어쨌든 저는 농민들이 이 농법을 많이 도입해서 토양이 살아나고 국민들이 무공해 쌀을 먹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물론 지금은 정부기관이나 학계에서도 이 농사법을 ‘이영문의 태평농법’이라 부른다. 동네 농민들이 이씨를 부르는 별명도 ‘태피이’다. 남들은 장화 신고 온몸에 흙칠해가면서 논을 간다 모내기를 한다 야단일 때(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논둑길로 흰고무신에 양말까지 갖춰 신고 천하태평으로 돌아다닌다 해서 ‘태평이’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태피이는 태평이의 경상도식 발음이다).
태평농법이 일반에 알려진 데에는 경상대학교 농과대학측에서 이 농법에 관심을 갖고 이씨와 더불어 지속농업산학연구회를 만든 게 계기가 되었다. 이제 태평농법이 안정적인 농사법의 틀을 갖췄다고 생각되자 이씨는 그동안 하고 싶던 말을 쏟아놓았다. 농민들이 쓰는 화학비료의 인산(燐酸) 때문에 우리 농토가 다 죽어간다는 등의 주장을 공공연하게 내놓은 것이다. 그러자 무서운 협박이 날아들었다. “목숨이 두 개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겠다”는 전화폭력이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된 것이다.
―농기계 업체 쪽에서도 달갑잖아 하겠는데요?
“물론입니다. 아마 8월쯤 되면 현재의 농기계 업체들이 신제품이라고 하면서 또 다양하게 수확기(收穫機)를 수입할 겁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구형으로 밀려난 것들이에요. 그러면 작년에 구입했던 것은 또 창고로 밀려나게 되지요. 엄청난 낭비입니다. 제가 개발한 농비 제로 직파기가 지금 전국에 800대 가량 보급돼 있습니다. 그런데 IMF로 그 기계 만들던 회사가 문을 닫아버렸어요. 그래서 이번에 아예 일본이나 유럽에서 들여오는 어떤 콤바인에도 부착해서 사용할 수 있는, 호환성 있는 직파기를 다시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한 번 따져봅시다. 태평농법을 도입해서 농사를 지을 사람들한테 태평농법의 원조(元祖)가 어떤 작황을 올리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알리는 것 이상의 홍보효과가 없을 것 같은데요. 무공해 농법이고, 토양을 살리는 자연친화적인 농법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일반 농가에 뒤지지 않습니까?
“이 농법이 자리를 잡은 게 5년 전부턴데, 98년도의 경우만 보더라도 단보(300평)당 전국 평균 생산량이 413kg이었는데, 나는 그보다 85kg 많은 498kg을 수확했어요.”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집니까?
“가을 수확기가 되면 대개 금년 수확량이 얼마다 하는 게 나옵니다. 도시 소비자들이 1년간 먹을 쌀값을 미리 갖다 줍니다. 돈을 미리 받고 소비자들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올 때마다 택배로 보내줍니다.”
―태평농법으로 생산한 고유쌀이니까 품질인증을 받으면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이름도 근사하게 무슨 쌀, 혹은 무슨 미(米)라고 붙이고….
“그런 것 안 합니다. 이영문이가 생산한 쌀이 가령 태평미라는 이름으로 인증을 받았다고 칩시다. 1년에 400가마 남짓 출하하는데, 서울의 어떤 백화점에 200가마, 부산의 한 백화점에 200가마를 납품했단 말이에요. 그럼 백화점에서 그 200가마 팔고 나면 손털고 말 것 같습니까. 1년 내내 태평미 팝니다.”
―농비가 제로(0)라고 했지만 기계를 빌려 쓰는 경우 기계삯도 있을 것이고…생산비가 얼마나 듭니까?
“우선 이 지역에서 일반농법으로 농사 짓는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남의 농기계를 빌려서 짓는 경우를 기준으로 할 때, 200평 한 마지기를 기계로 갈아주는 데에 1만5000원이고, 써레질하는 데에 역시 1만5000원이 듭니다. 이앙기로 모를 심는 데 2만원이고, 수확해주는 데에 2만원입니다. 제초제며 비료값이 마지기당 1만5000원 정도 듭니다. 여기다 종자값 등 기타 경비를 합하면 200 평당 13만원에서 18만원이 듭니다. 그럼 태평농법은 어떠냐. 보리나 밀을 벨 때 기계를 빌려 쓰면 2만원인데, 밀·보리를 수확하면서 동시에 벼를 파종합니다. 기계가 한 번만 논바닥을 지나가면 끝이에요. 벼 수확할 때에는 보리파종을 동시에 해버리고… 한 번에 2만원이 드는데 그걸 수확비용에 넣어야 합니까, 파종비로 계산해야 합니까. 두 가지 중 한 번은 빼줘야 하지 않습니까.”
굳이 계산하자면 마지기당 1만원이 든다는 얘기다. 더구나 수만 평 농사를 혼자 ‘태평’ 하게 어슬렁거리며 관리할 수 있으니 인건비 부담 역시 전무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농비 제로’가 빈 말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판매가는 일반농법으로 생산한 쌀보다 약간 비싸다. 그야말로 무공해 청결미인 셈이니 품질면에서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농사 현장을 둘러본 소비자 중에는 “생산비가 전혀 안 드니 쌀값을 더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더 싸게, 혹은 같은 값으로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이씨의 행복한 고민이다.
이영문씨의 태평농법을 극히 특이한, 그리고 개인적인 한 실험으로 좁혀볼 것이냐, 혁명적인 농사법으로 받아들여야 옳으냐 하는 것을 필자로서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태평농법이 너무 황당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전국의 모든 농민이 기존 농사법을 집어치우고 태평농법으로 전환해서 성공적인 영농을 해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한국농업=쌀농사’라는 등식이 당연하게 들릴 정도로 주곡인 쌀 의존도가 높은 우리 실정에, 이 농법은 우리 농정사에 가장 획기적인 혁명이 아닐 수 없다. 농지개량조합과 수세 징수 문제로 티격태격할 필요도 없고, 전국의 농약·비료 공장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며, 비싼 돈 주고 농기계를 수입해올 필요도 없을 것이고, 농촌 일손 부족 문제도 옛 얘기가 된다. 생산비가 제로에 가까운데다 글자 그대로 무공해 농산품이니 가격 경쟁력이 현저히 높아져서 쌀시장의 전면개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된다. 또 이 농법은 이모작을 전제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운동본부까지 차려서 우리 밀을 살리자고 외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토양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자연답게 존중하면서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영문씨의 명쾌한 대답은 ‘문제가 없다’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이미 곡창인 호남지역에서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이 늘어나고 있다. 이영문씨를 찾는 농민들도 1년이면 수천명에 이른다. 여름철에 와서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갔던 농민들이 가을 수확기에 와서 보고는 ‘과연!’ 하며 돌아간다.
―그러니까 일반 농사 방법으로 벼를 재배하던 사람이 당장 내년부터라도 보리 베어내고 마른 논에 볍씨 뿌려서 농사 지을 수 있다는 얘깁니까?
“수십년 동안 땅을 갈아엎고 독한 농약 쓰고 화학비료 쓰고 해온 땅을 단번에 되돌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3∼4년 후면 땅이 본연의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그 때 땅을 향해서 ‘그동안 괴롭혀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고 큰절 한 번 올린 다음에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됩니다.”
―정부에서는 태평농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위험한 농법이라고 농민들을 말렸는데 지금은 최소한 말리지는 않고 있는 단곕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작물시험장 재배과에 전화를 걸어 태평농법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 농법을 잘 안다는 김순철 박사의 얘기는 이렇다.
“우리 실정상 벼농사는 생산성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태평농법의 생산성은 불안한 상탭니다. 이런 상황에 태평농법을 일반화하는 것은 모험이지요. 물론 토양을 살리는 환경친화 농법으로 나름의 의미는 있습니다.”
개인이 소규모로 그런 방식의 농사를 시도하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으나 일반화하기는 위험이 따른다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이씨에게는 종자를 보내달라는 주문이 쇄도한다.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지어보고는 싶은데, 땅을 갈아엎고 농약과 비료를 쳐서 수확한 벼를 종자로 하는 것보다는 태평농법으로 수확한 볍씨가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모방의 천재인 일본 사람들이 이씨의 농법을 배워가서 벼농사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씨의 무경운 이모작 직파농법(일명 태평농법)을 글자 하나만 바꿔서 ‘불경운 이모작 직파농법’으로 명명해놓고 있다. 한국에서 배워왔노라고 얘기하기가 싫은 탓일까.
이씨의 태평농법은 벼농사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그는 고추나 배추, 상추, 시금치, 파 등도 경운하지 않고 재배한다. 그는 그런 채소들을 가을철에 파종한다. 식물은 밤을 감지하기 때문에 밤에 자란다, 따라서 밤이 길어지면 결실도 크다, 그래서 가을에 심는다는 것이다. 배추며 상추가 겨울에 얼어죽지 않느냐고 이씨에게 물었다간 또 한참 동안 지청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비닐하우스가 생기면서 배추, 상추가 요즘처럼 됐지, 본시 그것들 모두가 월동식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구마나 감자를 캘 때 알맹이만 빼내고 줄기가 어지럽혀져 있는 상태에 구멍을 내고 그 자리에 마늘을 심는다. 그래야 이듬해 잡초가 적게 난다는 설명이다. 한 마디로 땅에서 자란 것 중에서 먹을 것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두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씨의 두 아들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한국농업전문학교 졸업반이다. 자식들이 가업으로 전승하기를 망설이는 사람이 농사 짓는 얘기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겠느냐는 취지에서 자식들한테 진학을 권했는데, 아버지의 농법하고는 반대되는 지식만 가르치니 공부할 맘이 안 난다고 투정이 대단하단다.
주로 벼농사 얘기만 소개했으나 사실 쌀 얘기는 그의 삶을 설명하는 데에는 그야말로 쌀 한 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파도의 힘으로 손쉽게 전기를 일으켜 축전하는 파력 발전장치를 손수 만들어 그 아이템을 대덕연구단지에 넘겨줬고, 시화호같이 썩어가는 담수호를 살려내기 위한 그 나름의 실험을 몇 년째 하고 있다. 썩어가는 호소(湖沼)를 살릴 수 있는 그의 비책을 잠깐 들어보면 이렇다.
“부력 있는 천을 물 위에 띄워놓고 볍씨를 뿌립니다. 그러면 벼뿌리가 부영양화시킬 수 있는 물질을 영양분으로 흡수하게 되니까 물이 살아납니다. 또 햇볕을 차단하게 되니 부영양화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농사 짓는 얘기와 땅에 대한 철학, 그리고 태평농법에 대한 상세한 얘기는 그가 최근에 펴낸 책 <모든 것은 흙속에 있다>(양문출판)에 담겨 있다.
이영문씨, 그는 이 진땀나는 농번기에 보리와 밀이 바람에 물결치는 자신의 들판을 태평스럽게 바라보고 서 있다. 속으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농민도 좀 쉬자.
마지막 이야기
휴일을 맞아 밭에 올라 멍하니 하늘 바라보며 마지막 농사 이야기를 구상해 봤습니다.
종자 이야기를 했고,
흙 이야기를 했고,
자생초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태평농-자연농 등의 농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느 하나 직접적이고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한 글들이지만, 처음의 뜻이 ‘이런 일도, 이런 것도 있습니다’하고 소개하는 것이었음에 나름의 위안을 삼고 마지막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종자가 문제입니다.
‘식량주권’과 ‘주도하는 삶’을 지켜가기 위해 우리종자를 아끼고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흙이 문제이니, 나무심기를 실천하고 건강한 흙을 만들기 위한 인내를 배워가야 할 것입니다.
욕심으로 점철된 우리의 시선이 문제입니다.
자생초와 공존할 수 있는 자연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양보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는 농법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턴 아주아주 즐거운 ‘생활 속 실천’을 행해보심이 어떠할까요!
우리나라 인구수를 감안할 때,
원활한 구조로 대한민국 전체가 자급자족하기 위해서는 대략 전체인구의 30% 정도가 농사를 지어야한다고 합니다.
현실은 농촌인구가 전체의 5~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또 다른 의식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당분간 우리가 우리 식량 주권의 올바른 주인행사 하기는 아마도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농촌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와 아픔들...
많은 분들이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것들이죠.
노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낙후화, 시장경제 구조에의 부적응, 유통구조 문제, 마케팅 부재, 특수 작물 집중화 현상, 기업형 영농의 독식구조 등등...
이러한 첩첩산중의 문제들은 모두 ‘농업 기피’현상에 그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힘든 농사일을 기피하고 도시의 인력이 되기를 희망하는 일방형의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이 문제는 앞으로도 쉽사리 나아질 것 같은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젊은 피가 수혈되지 못하니 농촌은 여전히 수십 년 전의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고,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비농업인들의 잘못된 손가락질이 다시 농촌으로 뼈 아픈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이 기형적 악순환의 구조는 앞으로 더욱 더 농촌의 경쟁력 약화를 가속화하는 악재가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걸까?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메아리 칩니다.
모두가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유입되어 농사꾼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며, 그럴 필요도 없는 이야기겠지요.
과도한 도시화가 현재의 어려운 농촌환경을 만든 주범인 것은 사실이니 적당한 정도의 비율로 도시의 젊은 인력이 농촌으로 유입되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현실적 해결책이 되기 힘든 것이지요.
농촌의 환경이 좋아진 다음 젊은 인력을 유혹하여도 어찌될지 모르는 일인데...
"농촌이 좋아지려면 여러분들이 오셔서 고생해 주셔야합니다"라고 이야기 해봤자 쇠귀를 스치는 경 읽는 소리 밖에 더 될 수 있겠습니까...
농촌으로의 인구유입 보다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이 바로 ‘농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귀농은 그 다음이죠.
농촌 사랑 실천과, 좋은 농산물을 대우해주는 분위기 역시 농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의 사람들은 문제 해결에 접근 하는 방식이 참으로 ‘결과론’적이고 ‘장치적’이란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얼마의 지원금, 세제 혜택, 가산점 등으로 근본적인 관심과 이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한...
저는 예나 지금이나 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오직 그 개인 자신뿐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규율이나 동기유발, 정책이나 장치가 아닌 마음에서 시작되는 변화.
그것이 아니면 인간은 진심으로 변화하지 않죠.
개인이 변화하지 않으면 집단 역시 절대로 변화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규율과 캐치프레이즈에 동조하는 듯 발 맞춰 걸어가는 ‘한 무더기의 무리’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 문제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과 토론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진심어린 이해와 사랑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여기...
농사일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실천할 수 있는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이른바 ‘도시농업’
도시농업이란 이름처럼 거창할 것도 없는 그런 개념입니다.
그냥...
‘농사를 지어보면 농사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는 간단한 생각,
‘농사에 대해 잘 알면 재미를 느끼고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다’라는 당연한 생각,
그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도시농업’입니다.
농사를 짓자니 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도시인들에겐 집은 있을지언정 작물 심을 텃밭 같은 것은 갖기 힘든 게 사실이니 이를 극복하기 위한 쉽고도 진지한 노력들이 이어져 왔습니다.
베란다 농사.
옥상정원.
자투리땅을 활용하는 텃밭 등등.
뉴욕의 도시농업 현장
시카고 시내의 텃밭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한 주택
준비물은 화분과 흙, 종자만 있으면 됩니다.
작물들의 뿌리는 되도록 넓게 뻗을수록 작물들이 건강해지니 되도록이면 큰 화분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꼭 화원에서 판매하는 화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새우나 게 등을 담는 스티로폼 상자도 훌륭한 텃밭이 될 수 있고, 작은 새싹 채소들을 기를 땐 플라스틱이나 종이 계란판도 훌륭한 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화분을 마련하고 나면 종자를 구해야겠죠.
종자는 토종 종자일 수록 좋지만 구하기 쉬운 편이 아니니, 종묘상이나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F1을 구입하셔도 무관할 것입니다.
“F1나빠요~” 라고 말만 하기보다는 그것으로 농사 한 번 지어보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자를 구하실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인근지역 전통 5일장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농부들이 직접 갈무리한 종자들을 싸게 구입할 수도 있고, 제철에 맞는 모종이나... 운이 좋으면 토종종자들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씨앗 구입하며 키우는 방법 물으면 전문가의 현장감있는 생생한 설명을 들을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최고!!
화분에 심어볼만한 작물들로는 상추, 당귀, 쑥갓, 치커리 등의 쌈채소들과, 고추와 토마토, 그리고 가지 등이 떠오릅니다.
무나 배추같은 작물들도 얼마든지 키울 수 있지만,
키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부피가 커 많이 키울 수도 없어서 수확의 재미가 덜합니다.
고추, 상추, 토마토 등은 키우는 동안 내내 거둬다 먹으며 그 재미에 흠뻑 빠지실 수 있는 작물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흙을 구할 차례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포트에 모종을 키운다든가 중요한 작물을 심을 때 사용하는 흙을 보통 ‘상토’라 부릅니다.
일부의 농가는 아직도 산에서 좋은 부엽토 퍼다가 직접 상토 만들어 쓰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종묘상이나 원예상에서 판매하는 ‘수도용 상토’라는 것을 구입해 사용합니다.
도시의 꽃집(화원)에도 모두 판매할 것입니다.
상토를 마련하여 화분에 채워 주어도 되고, 아니면 근처 아무 곳에서나 눈에 띄는 흙을 구해다 담으셔도 됩니다.
이 때 참고하실 것은...
흙은 십중팔구의 확률로 ‘검은 빛’을 띄는 흙이 양질의 양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흙의 빛깔을 검게 만드는 것은 대량의 유기질인데, 유기질이 풍부해야 땅 속 미생물 등이 그것을 먹이삼아 활발히 활동하기 때문에 흙이 건강해지고 더불어 작물이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검은 빛의 흙을 발견하시면 두 번 망설이지 말고 다가가 퍼 오시길 권장합니다. 물론 지렁이도 함께 구하여 흙에 넣어주시면 더욱 좋구요.
식물의 먹이는 유기물이 아닙니다.
유기물을 먹이로 삼는 건 곤충과 미생물들이고 녀석들의 시체나 배설물이 무기질인데, 그 무기질이 바로 식물의 먹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렁이는 땅을 건강하게 하는 ‘하늘이 내려주신 수호자’입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화분에 건강한 흙을 채우고 종자 마련하였다면
서슴없이 흙에 씨앗 뿌리면 제대로 된 농사가 시작되게 되는 것입니다.
농부가 되는 것이지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농사가 참 쉽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밥로스 아저씨
이러한 방법 외에... 보다 직접적이고 강렬한 체험을 원하시는 분들은 주말농장을 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인터넷 포털에 ‘주말농장’이라 검색하면 많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고, 많은 분들이 이러한 것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아는 것과 경험해 보는 것은 다른 것이니...
조금의 관심만이라도 가지고 계셨다면 지금이라도 실천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제가 소박한 블로그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저희 블로그 이웃들도 전업 농부님들 빼고는 거의 모두 주말농장을 운영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그곳에서 그동안 몰랐던 많은 배움과 즐거움을 얻고 계시는 듯 하구요~^^
베란다-옥상 농사이든,
주말농장이든 관계없이...
직접 파종하고 작물 가꾸는 농사일을 시작하셨다면
반드시 지켜주셔야할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도시인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의 제안과 공유’이죠.
직접 농사일하다 보면 굉장히 많은 의문과 어려움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보를 찾으며 다른 이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방법까지 찾아냈다면 이제 그 정보로 남을 돕게 될 것이고요.
요즘은 디카도 많이 보급되어 있고 개인 미디어(블로그, 카페, 미니홈피 등)들도 활발하게 운영 중이신 분들이 많으니 자세한 사진과 함께 각자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공유하다보면, 보다 쉽고 즐거운 도시농업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농사와 농업현실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와 사랑을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농촌과 농업의 미래는... 역설적이게도 도시인들에게 달려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혁명을 표절하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혁명을 표절하라] 도서출판 이후
‘트래피즈 컬렉티브’라는 이름아래 하나로 뭉친 사람들이 만든 책입니다.
‘트래피즈 컬렉티브’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 구현’이라는 쌍팔년도 소년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낯 뜨거운 구호를 기치로 삼아 세계적인 활동을 하는 단체인데요...
이들이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대안 이념’이나 ‘캐치프레이즈’ 혹은 ‘국제적인 여론몰이’나 ‘학문적 연구’ 등이 아닌, ‘개인의 평범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끄는 존재입니다.
그들의 책 [혁명을 표절하라]에는 그들의 주장대로 ‘쉽고 재미있는 생활 속 실천’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담겨 있습니다.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불합리와 세계화의 무서운 미래, 강자독식의 사회구조와 참된 교육의 부재 등에 대해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 해결방안으로 텃밭 농사와 재래식 화장실 만드는 방법, 손수 만들어 쓰는 온수 시스템과 건강하게 사는 방법 등을 이야기하는 그 엉뚱하고도 깊이 있는 ‘현실인식’이 참으로 인상 깊었던 책입니다.
여러분들도 시간 있으실 때 한 번쯤 탐독해보시길 권해드리며 그 책의 내용 중 기억에 남은 이야기를 전해 드려볼까 합니다.
감자 타이어
폐타이어를 하나 구해다 앞 마당에 놓고 흙을 채워 넣는다.
그곳에 감자 2~3개를 심고 푸른 잎이 흙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그 위에 타이어 하나를 더 얹은 다음 다시 흙을 채워 넣는다.
다시 푸른 잎이 올라오면 타이어 얹고 흙을 채우기를 반복해 타이어가 5개 정도 쌓이면 그대로 두고 감자를 기른다.
그리하면 타이어 안의 흙을 가득 채운 싱싱한 감자를 무척 많이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넓은 텃밭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실천할 수 있는
아주 재미있고 효율적인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 읽자마자 실천해보고 싶어 온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퇴비 통 만들기
- [혁명을 표절하라] 中
위와 같은 그림을 따라 철망이나 철사, 혹은 나무 상자와 경첨을 활용해 원하는 크기의 퇴비통을 만들면 도시농업에서도 훌륭한 퇴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
퇴비의 썩는 냄새는 공기가 충분치 않거나 수분이 지나칠 때 생기는 문제인데, 그럴 땐 거칠고 건조한 재료를 첨가해주고 내용물을 뒤집어 주어 공기가 잘 들어가 호기성 세균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좋다고 한다.
또한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것은 퇴비에 녹색식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질소과잉이나 탄소부족 현상이 생겨 발생하는 문제인데, 이럴 땐 지푸라기-종이-톱밥 등의 갈색물질을 넣어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다.
이 점을 잘 활용하면 비록 도시농업이라는 한계 속에서 이어가는 농사라 하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퇴비도 만들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제안하는 방법들이란 것이 죄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것들이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요즘은 씨앗을 밭에 직파하는 방식보다는 모종을 키워 밭에 옮겨 심는 방식이 주로 행해집니다.
더운 날씨를 좋아하는 작물의 새싹을 비닐하우스에서 키워내기 위한 것도 있고, 텃밭의 로테이션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그리하기도 합니다.
이전 작물을 하루라도 더 키우고 싶을 땐 다음 작물의 모종을 포트에서 키우고 모종이 자라 밭에 옮겨 심을 때가 되었을 때 이전작물 뽑아내는 식으로 말이죠.
상추나 토마토를 베란다에서 키워보고자 하실 때도 아마 다들 모종을 사다 키우기를 권장할 것입니다.
씨앗을 새싹 틔워 모종으로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 때 사용하기 적합한 아주 훌륭한 포트가 바로 플라스틱 계란판입니다.
이런 계란판 말이죠~
플라스틱 계란판에는 거의 모두 뚜껑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색이 들어가 있어도 거의 투명한 재질로 되어있고요.
계란판의 아래에 흙을 채우고 씨앗을 뿌리면 포트에 씨앗 뿌린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계란판의 뚜껑을 닫아주면 보온 보습의 비닐하우스 효과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주부들 보시는 프로그램에서 봤던 것인데, 탁월한 효과에 감탄한 적이 있는 확실한 아이디어 였습니다.
상상력과 실험정신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농사에 활용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도시농업에 관한 정보들을 검색하며 만난 많은 블로거들과 도시농부들은 컵라면 용기를 텃밭으로, 우유팩을 물조리개로, 아파트 화단의 낙엽들을 피복물로 사용하며 멋진 농사들을 짓고 있었습니다.
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선생은 빈병을 반으로 잘라 화분삼고, 나무젓가락을 경운기 삼아 그 흙을 갈고 그곳에 농사실험 했었다고 합니다.
태평농 이영문 선생은 포트에 볍씨 심어 수많은 토종 벼종자를 지켜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작고 소박한 실천에서 많은 도시 농부들이 노하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도시농부들의 대인배적 마인드로 인해 인터넷과 입소문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새내기 농부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아주 일부의 작은 시작일 뿐인데도 많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욱 많은 이들이 함께 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또한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공유된 정보와 네트워크로 많은 사람들이 도시농업을 실천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그 중 몇몇은 농사에 경제권이 달린 전업농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가롭게 F1에서 얻은 종자를 이듬해에 다시 심어볼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F2, F3를 거치며 유전자 속의 원형을 기억해내 이듬해에도 종자를 얻을 수 있는 토종종자를 복원할지 모를 일입니다.
또 다른 몇몇은 ‘환경 파괴적’이지 않은 어떤 방법으로 베란다 농사 지어봤더니, 이전의 두 배 가까운 소출을 얻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공유하고 함께 실천해보니 다른 농부들까지 모두 소출이 두 배로 늘어날지 모를 일입니다.
소수의 몇몇은 생각과는 다르게 처참한 결과로 소출 하나 얻지 못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경험을 바탕으로 농사일의 어려움을 실감하여 마트에서 채소 구입하며 왠지 모를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낄지 모를 일입니다.
그것이 농사와 농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전할지...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도 장담 못하는데 저는 왠지 그리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합니다.
찌질하게 말이죠...
혹자는 이리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인의 절반 정도라도 제 손으로 상추 길러 먹는다면,
상추를 파는 농가가 거의 전부 파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득과 실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추 농사 지어본 어설픈 도시 농부는 대신에 농사일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날씨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고, 채소 값 이야기에 그 해의 작황을 가늠하게 될 것입니다.
농사일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농촌이라는 공간에 더욱 마음을 열게 될 것이고, 그곳에 만연해 있는 문제를 더 이상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넘어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시장경제의 논리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한국 농업의 현실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연과 농사에 대해 더욱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부모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베란다, 혹은 옥상, 혹은 그 이외의 공간에 있는 자신의 작은 화분에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아는 것과 경험해 본 것은 다릅니다.
‘앎’은 ‘지식’으로 끝날 수 있지만,
지식에 ‘경험’을 보태어 사고한다면 그것은 이내 ‘지혜’가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국민이 우리 농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긴 글 지금까지 적어내려 온 이유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동안 재미없는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농사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모두들 언제나 건강하시길 소망해봅니다.
멋진 도시농부들이 되시길 기원하며...
젊은 농부.
자연에서 자라고 있는 저희 딸아이에겐 아빠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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