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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의 오지

醉月 2010. 11. 27. 07:57

추락하는 노동자는 날개가 없다

해마다 늘어가는 타워크레인 산재 사망자…
‘위험한 작업 아웃소싱’ 따른 부작용에 관리·감독 소홀 겹친 ‘인재’ 성격 짙어
 
» 지난 10월6일 서울 마포구의 서교자이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T자형 타워크레인의 상단부인 가로축이 회전 중 떨어져나가면서 바닥에 처박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다. 운전 기사와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숨졌다.한겨레 류우종

지난 10월6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서교자이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타워크레인 사고는 산업재해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인재’로 꼽힌다.

당시 사고가 난 타워크레인과 함께 작업을 진행했던 한 관계자가 경찰에 진술한 내용을 보면, 오조작보다는 장비 노후화나 정비 불량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장 관계자는 경찰에서 “4호기(사고 크레인)가 콘크리트 작업을 위한 장비를 8층에서 5층으로 이상 없이 내려놓았으며 바로 인근의 작업자에게 건축자재를 옮겨달라는 요청을 받아 자재를 싣지 않은 상태로 회전을 하던 중이었다”며 “30도 정도 돌더니 갑자기 타워크레인의 T자 형태 가로축과 세로축을 연결하는 부위에서 탕 소리가 나면서 타워크레인 가로축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는 애초 경찰이 원인으로 지목했던 타워크레인 간의 충돌이나 와이어의 엉킴이 아니라 장비 자체의 결함으로 사고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OECD 산재 사망률 최고

 

이밖에도 복수의 현장 관계자들은 “사고가 난 크레인이 지난해 8월부터 잦은 고장으로 작업이 중단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타워크레인 작업 중단은 공사 기간을 맞추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매우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이뤄진다는 점에 대해서도 입을 모은다. 그만큼 사고 기종에 문제가 있었음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은 10월8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에 사고가 난 타워크레인은 지난해 창원 GS 건설현장에서 같은 종류의 사고가 났던 기종과 동일하다”며 “정비 부실로 인한 피로 파괴가 가장 유력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타워크레인 사고는 곧 대형사고를 의미한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집계한 자료를 보면, 2007년 15건, 2008년 10건, 2009년 16건으로 꾸준히 사고가 발생해왔다. 주목할 만한 것은 사망자 수가 8명, 10명, 17명으로 사건 수와 관계없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박종국 민주노총 산하 건설노조연맹 노동안전국장은 “건설현장에서 타워크레인 한 대에 의존해 일하는 인력이 늘면서 그만큼 사망자 수가 늘어난 것”이라며 “최근 경기 침체로 공사현장 자체가 줄었으면 사고 건수도 줄어야 하는데 타워크레인의 경우에는 꼭 그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타워크레인 사고는 곧 대형 사고를 의미한다. 주목할 만 한 것은 이로 인한 사망자 수가 8명, 10명, 17명으로 해 마다 늘고 있다는 점이다.

 

 

건설현장에서 부상이나 사망을 당한 산업재해의 전체 규모는 2007년 1만9050명에서 2008년 2만835명, 2009년 2만998명으로 증가세다. 2003년 2만2천여 명에서 줄기 시작해 2005년 1만5천여 명까지 줄었다가 이번 정부 들어 다시 급증했다.

산재는 전체 산업으로 범위를 넓혀도 증가세다. 최근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산업재해 현황을 살펴보면, 재해자 수는 2007년 9만147명, 2008년 9만5806명, 2009년 9만7821명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올해 7월까지만 5만7천 명으로, 20년 전의 10만7천여 명 수준에 접근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망자 비율은 단연 세계 1위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OECD 국가의 산업재해 비교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말 현재 10만 명당 사망률이 무려 20.99명으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다음으로 높은 멕시코(10명)의 2배가 넘고 미국(4.01명)에 비해서는 5배가 넘는 사망률이다.

 

최저가 입찰 경쟁으로 안전관리 여력 없어

 

이 수치가 전부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범관 한나라당 의원이 최근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지난 5년간 고용노동부에서 사업장의 산재 은폐를 적발한 건수가 9013건에 달했다. 특히 올해 6월 말까지 적발된 건수는 1767건으로, 이미 2009년의 1591건을 넘어섰다. 문제는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은폐하는 횟수가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50인 이하 사업장의 은폐는 5년 동안 적발된 사례 가운데 79%인 7121건에 달했다. 이 의원은 50인 이하의 영세사업장에서 산재 은폐가 많이 발생하는 원인과 관련해 건설현장을 지목했다. 대형 건설사들은 산재 사망사고로 처벌을 받거나 재해율이 높아지면 입찰자격심사에서 불리해지기 때문에 하청업체에 책임을 전가하거나 더 조직적으로 산재를 은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산재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황을 이유로 한 안전관리 비용 축소, 관리자에 대한 경미한 처벌, 감독기관의 관리 소홀 등이 꼽힌다. 사실 산재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될 때마다 매번 반복되는 주제다.

최근 건설현장의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하다. 과거 대기업들이 불황을 이유로 산재 위험이 높은 부서를 아웃소싱하게 됐고, 그 부작용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건설노동조합연맹 박종국 노동안전국장은 “IMF 직후인 1990년대 후반 건설현장에서는 여러 부문을 쪼개서 아웃소싱을 시작했다”며 “2000년대로 접어들어 다시 건설 붐이 일면서 상황이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경기와는 상관없이 부문별로 최저가 입찰 경쟁이 붙으면서 하청업체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서라도 보수관리 비용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타워크레인·굴착기 등 대형 기계의 정기적인 장비 점검이나 부품 교체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어 늘 사고 위험을 안고 있다. 박 국장은 “아웃소싱한 부문을 대기업이 다시 환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안전관리 영역에서는 원청업체가 책임을 지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요인으로는 사업주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든다. 실제로 지난 2008년 사망 등 중대 재해로 처벌받은 사업주 2368명 중 구속된 사람은 단 1명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벌금형을 받거나 기소유예 또는 무혐의 처분됐다. 고용노동부는 2007년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한 12만8611건 가운데 96.2%에 대해 시정조치만을 내렸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은 사망 등 중대 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에게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도록 하고 있지만 대부분 벌금형에 그치고 있다.

 

 

‘기업살인법’ 도입 목소리

 

해외 사례를 들어 처벌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캐나다 등지에서 시행하는 ‘기업살인법’ 도입을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안전조치가 미비한 사업장에서 노동자 사망사고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를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처벌토록 하는 내용이다. 또한 산재를 일으킨 개인뿐만 아니라 법인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사람에 대해 전과를 보관하는 것처럼 기업의 산재 발생 전과를 보관해 개인과 같이 가중처벌하자는 내용이다.

또 산재 문제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감독기관의 관리 소홀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통계치를 잡을 수는 없지만, 사례를 통해서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지난 10월6일의 타워크레인 사고가 대표적인 예다. 사고가 난 건설현장은 2009년 10월 타워크레인에 대한 집중 점검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 노동부의 점검을 목격했던 한 현장 관계자는 “점검을 나왔다고 해서 가보니 몇 개월째 고장이 잦았던 타워크레인이 아닌 2009년 최신 기종에 올라 점검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홍희덕 의원의 자료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당시 노동부는 성능 유지, 작업관리 상태 등 21개 조항에 대해 안전점검을 시행한 뒤 2건의 시정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 사고가 난 타워크레인은 시정 지시 대상이 아니었다.

 

위험한 대지의 깃발

70m 타워크레인에 사다리로 기어올라 안전벨트도 없는 조종석에 앉아서 외롭게 세상을 내려다보다
 
669m 지하에 갇혀도 미국의 항공우주국에서 훌쩍 날아와 구조를 돕는 세상이다. 사하라사막은 일주여행을 즐기는 곳이 돼가고, 아마존은 벌목으로 인간에게 자리를 내준다. 도시 곳곳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 24시간 비추며 사각지대를 없애간다. 지리산 산골은 걸으며 둘러보는 사람들로 붐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 두메를 일컫는 ‘오지’라는 단어는 의미만큼 낯설다. 세상의 끝 어디에도 오지는 없어 보인다.

그럴까. 지난 10월6일, 60m 높이의 타워크레인을 운전하던 한 기사가 추락해 사망했다. 타워크레인의 가로축은 땅에 고꾸라지며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기사가 타고 있던 운전석 일부는 60m 꼭대기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뒤집어지는 타워크레인의 가로축을 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 스스로 “하늘의 막장”이라고 부르는 곳. 출퇴근길 우리 곁에 늘 있지만, 그 한 평도 안 되는 꼭대기 공간에서 어떤 삶이 숨쉬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무관심 때문에 또는 특별한 공간적 격리로 인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지’와 ‘오지의 삶’은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한겨레21>은 ‘우리 곁의 오지’들을 찾아가는 연재를 시작한다. 첫 번째 공간은 고공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그곳, 타워크레인의 꼭대기 조종석이다. _편집자

 

» 70m 타워크레인에서 바라본 전경. 아파트들이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 함께 탄 박아무개 기사는 지평선 끝에 솟아오른 건물을 가리키며 “저것도 내가 지었다” 고 말했다. 그는 아내와 단둘이 아파트에 산다. 한겨레 김정효

 

지난 10월12일, 먼지를 뒤집어쓴 70m 높이의 타워크레인 앞에 섰다. 동행한 박아무개 기사는 36살의 가장으로, 타워크레인을 탄 지 6년째다.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박 기사가 앞장섰다.

“좀, 많이, 꽤 힘들 거예요.”


올라가는 요령이 있긴 한데 알려줘도 쓸모가 없다고 했다. 요령이란 팔을 곧게 펴고 팔의 힘을 비축하면서 최대한 다리 힘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효율적으로 딱 한 사람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 뼘이 겨우 넘는 넓이로 만들어진 철제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안전장비는 없었다. 요령의 적용을 방해하는 것은 공포감이었다. 공포에 익숙해지는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인간에게 느껴지는 공포감이 극대화되는 높이는 15m라고 알고 있었지만, 지식은 현실 앞에서 무력했다. 오를수록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공포가 더해졌다.

 

안전 장비 없이 오른 70m

 

사다리를 정확하게 디디려면 아래를 보면서 올라야 했다. 여러 개의 사다리를 잇대어 놓은 탓에 아래위 사

다리의 아귀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다. “아래를 보면 안 돼”라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사는 “아래를 반드시 봐야 안전합니다”라는 현실 언어로 바뀌었다. 아래를 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공포를 참아야 했다. 공포가 밀려올수록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너무 힘을 준 탓에 팔근육이 굳어오고 경련이 날 듯 씰룩거렸다. 그 고통으로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악순환이다. 손힘으로 사다리를 단단히 잡아야 덜 무서울 듯한데 쥘수록 고통스러워 손에 힘이 빠지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결국 사다리를 품에 안았다. 무릎이 사다리에 부딪히면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법규상 3m마다 있어야 하는 안전 쉼판이 10m 정도 간격으로 설치돼 있었다. 공중 30m에서 느끼는 다음 쉼판의 거리는 10km보다 더 멀었다. 결국 양팔에 상처를 가득 내고, 무릎을 제대로 펴기 힘들 정도로 멍을 단 채 조종석 바로 아래 철골로 올라섰다. 35분이 걸렸다.

 

공중 30m 사다리에서 느끼는 쉼판의 거리 10m는 10km보다 더 멀었다.

결국 양팔에 상처를 가득 내고, 무릎을 제대로 펴기 힘들 정도로 멍을 단 채 조종석 바로 아래 철골로 올라섰다.

35분이 걸렸다.

 

 

조종석 문을 열었다. 박 기사가 전원을 올렸다. 윙~. 330V의 전원이 흐르면서 타워가 숨 쉬기 시작했다. 한 평도 안 되는 공간, 힘들게 올랐지만 앉을 자리도 없다.

박 기사도 처음 올랐던 때를 기억했다. “저도 무서워서 사다리를 하도 꽉 쥐는 바람에 팔뚝에 쥐가 올랐어요. 무릎도 너무 아파서 엉덩이를 뒤로 빼고 우스꽝스럽게 한 칸씩 겨우 올랐죠.” 지금은 사다리를 두 칸씩 뛰어오른다. 공사 현장에서는 타워크레인이 돌아야 삽질이 시작된다. 아침 7시에 무조건 작업을 시작해야 하니 이를 악물고 악착스럽게 올랐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생기고 사다리를 손으로 감싸쥐는 대신 손바닥을 갈고리처럼 구부린 채 턱턱 걸치면서 오를 만큼 단단한 팔을 갖게 된 건 두 달이 지나서다. 지금은 조종석까지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바람이 부는 날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다. 공포가 일상이 된다고 해서 무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듣는 동료의 사망 소식

 

올라오고 나서야 알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맨몸으로 맨손으로 오르지만 사다리에서 사고가 난 경우는 최근 몇 년간 한 건도 없었어요.” 박 기사는 타워크레인 노조의 조합원이라 크레인 사고가 날 때마다 사고 직후 문자메시지로 소식을 받는다. 하지만 박 기사는 모르고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순수하게 타워 크레인을 오르내리다가 난 사고가 3건 있었다.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크게 다쳤다.

땅속으로 3m가 박히고 하늘로 70m가 올라온 철기둥에서 본 하늘은 땅에서 본 색깔과는 달랐다. 노랬다. 바람이 불면서 크레인이 좌우로 유연하게 흔들렸다. 많이 무서웠다. 그래서 자꾸 묻게 됐다. “무섭지 않으세요?”

“무서운 건 익숙해지는데, 외로운 건 익숙해지지 않아요.”

 

문을 열고 조종석에 오르자마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발을 꼼지락거린다. 그리고 바람에 따라 돌기 시작한 타워크레인 가로축의 끝단을 본다.

“작업자와 무전을 통해 주고받는 게 근무 중에 듣는 사람 목소리의 전부일 때가 많아요. 그러니 무인도에 와 있는 느낌이죠.”

늘 아래의 작업 요청 무전에 신경을 써야 하니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조금만 늦어지면 아래에서는 일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안전사고도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건물의 기초를 잡는 3개월간은 정신이 없다. 타워크레인 한 대가 책임지는 영역은 1만 평 정도. 적게는 건물 한 동, 많게는 네 동의 넓이다. 한 개의 타워크레인이 날라준 철근 등 자재로 100명에서 400명까지 일을 해간다.

“무전이 아우성처럼 들려요. 양손을 쉴 수가 없죠. 전화는 걸 수도 받을 수도 없고요.”

 

“하루 적게는 10시간, 많게는 14~15시간 혼자 멍하니 앉아서 들어오는 무전대로 기계를 움직이면 내가 기계 인지, 기계가 나인지….” -박아무개 타워크레인 운전 기사

 

 

순간의 착오가 대형 사고를 가져오는 건설현장에서 무전을 통해 개인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하루 적게는 10시간, 많게는 14~15시간 혼자 멍하니 앉아서 들어오는 무전대로 기계를 움직이면 내가 기계인지, 기계가 나인지….”

누군가와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래에서 동료끼리 웃고 떠들면서 일하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공중에 매달려 고정돼 있다는 답답함은 작업 중간중간 쉴 틈이 생길 때 오히려 더 커졌다.

이런 느낌은 동료의 사고 소식을 접하면 더 심해진다고 한다. “서교 자이 현장 타워 전도, 사망 2명, 부상 1명.” 지난 10월6일 타워크레인 노조에서 문자메시지가 전송됐다. 작업 도중이라 한참 뒤에서야 확인하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줄담배를 넉 대나 피웠다. 70m 상공에서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 놓였던 동료의 죽음에 대해 듣는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박 기사의 타워크레인도 사고 기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어서 불안감은 극에 달해 있다.

지난해 받은 사망사고 문자메시지는 16건. 사망자는 17명이다. 박 기사는 광산 사고와 자신들의 사고를 비교하기도 했다. 사고 순간 원인을 찾을 수 없고, 예측하기도 힘들다. 광산 사고가 집단적이라면 타워크레인 사고는 개별적이다. 허공과 지하로 공간이 갈리지만, 가장 큰 차이는 사고 순간이다. 고꾸라지는 순간, 허공의 조종석은 끝이다. 박 기사의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말은 그래서다. 일어서서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디딜 수 없고 기지개도 켤 수 없는 좁은 공간, 그 공간이 하늘과 가까워지면서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은 그들에게 공포와 긴장을 불러와 더욱 힘들게 한다.

 

그는 왜 타워크레인 일을 시작했을까? 5년 전 1t 트럭으로 채소·과일을 납품하는 일을 했다. 불황이 왔고 더는 버틸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누구나 그렇듯 공사현장 일을 시작했다. 그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노가다의 꽃’이 타워크레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현장 작업의 중심은 타워크레인이다. 폼이 났다. 꼭 “기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주는 것도 한몫했다. “인생이 좀 피겠거니하고 시작했죠.”

» 쉼판에서 숨을 돌렸다. 3m마다 총 24개가 있어야 할 쉼판은 10m마다 6개가 있었다. 안전 장비는 없다. 지난 5년간 통로를 오르내리다 난 사고는 3건이다. 한 사람은 죽고 두 사람은 크게 다쳤다.한겨레 김정효

생명줄을 보호하는 법규도 없다

 

박 기사의 자리에 직접 앉아봤다. 이제서야 유리로 앞이 트인 강철상자라는 게 느껴진다. 머리위를 가로지른 선반은 쏟아질 듯 가깝다. 팔을 한 껏 벌려봤다. 양팔이 어렵지 않게 닿는다. 전면의 유리에는 먼지가 뿌옇다. 먼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앞에 펼쳐진 풍경에 현실감이 떨어져서인지, 시야가 트여 시원하기보다 갇혀있다는 답답함에 가슴이 막혀왔다. 가을임에도 오후 내 강철지붕을 달군 열 때문인지 후텁지근한 느낌까지 더해진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 본다. 전면이 트여 있으니 공중에 붕 떠 있다는 것이 실감난다. 묘하게 불안하다. 20층 고층 빌딩같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는 느낀 적이 없는 불쾌함이다.

그러고 보니 조종석에도 안전벨트 등 안전장치는 없다. “사고가 났을 때 전투기처럼 낙하산 펴고 뛰어내리는 게 아니라면 안전벨트가 사실 별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이 역시 박 기사는 잘 모르고 있었다. 지난 10월6일 타워크레인 사고에서는 조종석과 기사를 연결시켜주는 안전장치만 있었다면 추락을 막을 수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만에 하나 벌어질 상황을 대비해 이어놓는 마지막 생명줄에 대해 정부는 법률로 규율하고 있지 않다.

의자가 별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뒤를 보니 기아 마크가 찍혀있다. 박 기사가 말을 건넨다.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는데 원래 운전석은 아니고, 중형차 운전석이에요.”

아무렇게나 끼워넣은 운전석처럼 부품도 어떤 부품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사실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했다. 타워크레인이 건설기계가 된 것은 불과 3년 전이다. 그 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유해위험기구’로 분류돼 단순한 철 구조물로 취급됐다. 자동차 번호판 같은 등록번호도 없었다.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고철덩어리에 의지해 공중에 매달려 하루 10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지금도 등록되지 않은 타워크레인이 꽤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 탓에 각각의 기계들이 어느 정도씩 결함을 갖고 있다. 그 결함을 기사들이 미리 알아야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가 많다. 일할 곳이 생길 때마다 기사 개인이 타워크레인 임대업체와 개별적으로 계약을 해야 하는 탓에 그 결함을 모르고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박 기사는 자신이 프로야구 선수라고 했다. “프로야구 선수처럼 건설현장이 끝나면 다시 연봉계약을 해야 하고, 혹시나 그때 부러진 야구방망이를 지급받으면 첫 타석에서 죽을 수도 있죠.” 박 기사가 이번에 만난 타워크레인은 두 바퀴 반까지 회전이 가능한 다른 크레인과는 달리 한 바퀴를 겨우 돈다. “처음에는 이걸 몰라서 큰일 날 뻔도 했어요. 당시 뭔가 이상해 바로 조치를 하지 않았으면, 뭐, 그렇죠?”

 

휴대전화에도 깨지는 바닥 유리

 

조종석 한켠에 ‘1995 현대중공업’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박 기사가 지금까지 올라탄 타워크레인 가운데 가장 낡았다. 최근 사고가 난 서교동 자이 건설현장의 타워크레인이 10년간 사용으로 노후화됐다는 지적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박 기사의 불안을 짐작할 수 있다. 박 기사의 타워크레인에도 결함은 곳곳에 있었다. 우선 ‘리미트’라는 장치가 파손돼 있었다. 리미트는 물건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올라오면 자동으로 멈춰주는 작용을 한다. 리미트의 결함은 곧 들어올리는 물체와 타워크레인 가로축과의 충돌을 의미한다. 며칠 전 가로축 일부가 건축자재와 충돌해 찌그러졌다. 더 큰 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바깥을 둘러보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전면·좌우·천장까지 유리였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는데, 아래에서 볼 때와 달리 바닥도 유리로 돼 있었다. 뻥 뚫려 있는 느낌이 공포감을 더했다. 유리 아래로 새끼손가락 굵기의 철근 두개만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섭기보다는 불안하니까 좀 찝찝하죠.”

 

심리적인 어려움에 앞서는 것이 물리적인 근무 여건이 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지만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겨울 난방은 발 아래 온풍기가 전부여서 시린 발을 겨우 면할 정도다.

 

유리를 발로 굴러봤다. 박 기사가 다른 때와는 달리 곧바로 만류했다. 강화유리가 아니었다. 상당수 기사들이 일어나거나 기지개를 켜다가 잘못 밟아 유리가 깨지는 일이 빈번했다. 박 기사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는데 유리가 깨진 적도 있다고 했다. 깨지면 비용도 발생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새 유리를 갖고 올라오는 일이다. “어느 유리가게 사장님이 유리를 메고 70m를 올라오려고 하겠어요. 그냥 갈아끼웁니다. 제가 갖고 올라오기 쉬운 걸로.” 아크릴로 갈아끼우기도 하지만 선명해야 아래 작업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니 가급적 사비를 털어 유리로 갈아끼운다.

박 기사에게 다시 자리를 내줬다. 습관인지 유리판 위의 발을 꼼지락거린다. 그리고 전원을 올려 운전을 시작한다. 타워크레인은 330V의 전기를 케이블로 끌어올려 움직인다. 타워크레인은 기본적으로 ‘마스트’라고 하는 기둥(세로축)을 세우면서 높이를 높이고, ‘지브’라고 하는 가로축을 회전하면서 작업한다. 그리고 그 가로축에 ‘훅’(고리)이 달린 와이어를 연결해 물건을 들어올리거나 내리고 가로축을 따라 당기기도 하고 밀기도 한다. 운전은 10cm 정도의 스틱을 좌우에 배치해 왼손으로는 회전과 들고 내림, 오른손으로는 밀고 당김을 조절한다. 세밀한 조절이 필요한 일이어서 처음 시작한 뒤 1년 정도는 아래에서 자재를 받는 인부들로부터 원망을 산다고 한다. 이날 아래의 인부들과 공동작업을 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날은 리미트 점검을 의뢰한 날이다.

“조종석에 앉아 있는 시간을 계산해보고 학교 다닐 때 이렇게만 앉아 있었어도 지금쯤 어느 학교 교수를 하고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죠.”

와이어를 움직이는 시범을 보인다. 왼손 앞에 버튼 두 개가 있다. 왼편은 브레이크, 오른편은 브레이크 해제 버튼이다. 오른손 앞의 버튼은 전원을 넣는 버튼이다. 이렇게 손을 까딱까딱하는 작업이 전부이다 보니 엉덩이와 등 쪽 땀띠는 기본이다. 치질이나 하지정맥류도 그들의 직업병이다.

박 기사가 이날 갖고 올라온 것은 세 가지다. 휴대전화, 담배 세 갑, 무료 신문 2부. 휴대전화는 정해진 시간에만 받을 수 있다. 양손을 움직이는 작업을 하는 탓이다. 쉬는 시간에는 주로 담배를 피운다. 하루 두세 갑은 기본이다.

심리적인 어려움에 앞서는 것이 물리적인 근무 여건이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지만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겨울 난방은 발 아래 온풍기가 전부여서 시린 발을 겨우 면할 정도다. 박 기사의 무전기 ‘ETECH’가 울린다. “기사님, ○층 ○○입니다. 이동 바랍니다.” 주문이 쉴 새 없이 이어지지만 알고 보니 박 기사를 부르는 무전이 아니었다. 옆 타워크레인의 주파수를 맞춰놓고 있었다.

» 폐차한 중고차에서 옮겨단 좌석이 조종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곳에서 박 기사는 하루 10시간을 보낸다.한겨레 김정효

“넘어지기 전까지 넘기지 않는다”

 

원래 타워크레인의 1회 작업 용량을 기준으로 t당 100만원 정도가 원청업체에서 하청업체에 지급하는 적정금액이다. 보통 타워크레인의 용량은 10t 안팎이다. 타워크레인 기사는 하청업체의 직원으로 월급을 받는다. 업체에서 최소한 월 800만원을 받아야 기사의 월급도 보장되는데, 최근에는 월 500만원 정도에서 낙찰되고 있다. 그래서 박 기사가 매달 손에 쥐는 돈은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월급이 적은 건 당연히 불만이지만, 불안한 건 회사를 운영할 여건이 안 될 만큼 대금을 받으니 정비 비용을 줄이는 거예요. 부품이 워낙 비싸기도 하고.”

현장에 설치할 당시에만 국토해양부의 검사를 받으면 되고 그 뒤 검사는 2년마다 한다. 대부분 공사가 그 기간 안에 끝나고 타워크레인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감안하면 타워크레인은 안전 검사에서 방치 상태나 다름없다. 게다가 박 기사처럼 15년이나 된 타워크레인을 탈 경우에는 더 불안할 수밖에 없다. 박 기사와 함께 올라오면서 볼트 결함을 두 군데나 발견했다.

“타워크레인은 넘어지기 전까지는 넘기지(폐기시키지) 않는다는 말을 해요. 어쩌겠어요. 그냥 해보는 수밖에요.”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다. 집 청소는 못해도 조종석 청소는 한다고 했다. 가장 먼저 올라와 하는 일이 간이 전기청소기로 바닥의 먼지를 치우는 일이다. 그래도 조종석 뒤에 달린 에어컨은 녹을 뒤집어쓰고 있다. 먼지를 닦으니 대우라는 글자가 보인다. 벽에는 각자가 좋아하는 걸그룹을 시대순으로 적어놓은 듯 S.E.S, 핑클… 원더걸스까지 각자의 필체로 어지럽다.

사실 올라올 때부터 가장 궁금했던 용변통은 여기저기를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 방에다 똥오줌을 해결하는 사람은 없죠.” 대변은 대부분 아래에서 해결하고 소변도 웬만하면 참는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집 못지않게 긴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에 대부분 강박적으로 청결을 유지하려 한다. 혼자 일하면서도 담배는 조종석 밖으로 나가서 피우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무인도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한 몇 가지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래도’라고 단서를 달아 물었다. “저는 검은 비닐봉지를 써요. 어떤 때는 갖고 올라오기도 하는데….” 박 기사는 절대 먹지 않는 음식이 있다. 찬 우유와 달걀은 속이 불편할까봐 먹지 않고, 꿀이나 인삼 등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음식도 타워크레인에 올라오기 전에는 삼간다.

 

오늘도 3천 대에 3천 명이 매달려

 

30분쯤 뒤 박 기사는 내려가자고 청했다. 내려오는 길, 다시 아득하다. 여전히 팔은 굳어 있다. 내려가는 길도 20분이 걸렸다. 엘리베이터에 대해 다시 물었다. 3천여 대 중 단 1대에서 시범적으로 운용되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데 600만원이 든다. “볼트 정비도 안 되는 상황에서 엘리베이터라니요. 발 아래나 잘 보세요.”

가끔 내려다보며 오르는 길과는 달리 내려오는 길은 70m에서 땅에 발을 디딜 때까지 아래를 계속 봐야 했다. 그는 사뿐 땅에 발을 디뎠다. 툭툭 발을 굴렀다. 광부들이 갱도에 내려갔다 올라오며 맑은 숨을 내쉬듯, 철제사다리를 올라갔다 무사히 내려온 박 기사만의 의식이었다.

최초의 타워크레인은 1920년 미국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쌓아올렸다. 벡텔이라는 건축기사가 발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서울 조선호텔 재건축에 처음으로 쓰였다. 발명가의 이름을 딴 미국의 벡텔주식회사가 들여왔다. 전성기 때는 노태우 정부 시절 200만 호 주택 건설과 함께 전국 건설현장 여기저기에 흔하게 꽂혔다. 이제는 고층 아파트를 중심으로 공장, 댐, 철탑 등 광범위한 건설현장에 사용된다. 현재는 한국산업안전공단의 완성품 검사 대수를 기준으로 매년 3천 대 정도가 설치·운용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오늘도 단 한 사람만이 올라가 있다.

지하 3m, 도시를 살리는 노동의 시궁창
악취·오물과 싸우며 깨끗한 강을 지키는 도로 바로 밑 오수차집관거 작업 현장
» 보이지 않는 곳, 그들이 있어 도시의 하천은 맑아진다. 오수가 콸콸 흘러드는 오수차집관거에서 모래 제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80kg짜리 대형 맨홀의 뚜껑은 열려 있었다. 그 주위로 빨간색 안전봉이 세워져 있다. 그 앞에 공사 트럭이 서 있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한 쇼핑센터 인근 도로 한쪽. 철제 사다리가 맨홀 아래로 놓여 있다. 가끔 봤던 작업 현장, 그러나 가본 적 없던 3m 땅 밑으로 내려갔다. 10월20일 수요일 오후 2시10분.

컴컴했다. 서늘했다.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네요.” 첫 느낌은 그랬다. 맨홀 아래 지하, 가운데로는 계곡에서 내려온 깨끗한 물이 3m 폭의 우수관로를 따라 흐른다. 도로 폭에 따라 우수관로는 2개가 되기도 하고 4개가 되기도 한다. 이곳은 녹번천 위로 도로를 놓은 복개천이다. 우수관로가 지나는 양쪽 옆 시멘트 차단막 너머로 오수가 흐른다. 너비와 높이 각 60cm의 콘크리트 구조물인 ‘오수차집관거’, 시궁창이다.

 

 

“밝아서 다 보이면 더러워서 못해”

 

똥과 오줌이 정화조로 들어가 ‘건더기’만 남기고 이곳으로 빠져나온다. 샤워하고 설거지하고 생선을 씻은 온갖 폐수가 골목과 도로에서 흘러든 빗물과 함께 섞여든다. 이렇게 3.2km 복개구간을 흘러 불광천을 만난다. 하천을 덮어 도로를 깔지 않은 자연하천은 주로 자전거도로 밑에 이런 오수차집관거가 묻혀 있다. 1980년대 한강개발 사업을 하면서 설치하기 시작해, 순차적으로 설치하면서 서울에는 거의 100% 설치됐다고 난지물재생센터 박용범 시설관리팀장은 설명했다. 우수(빗물)는 바로 한강으로, 오수는 서울의 경우 4개 물재생센터로 모여 정화된다. 박 팀장은 “이렇게 오수를 걸러주니까 악취 나던 서울 시내 하천에 고기가 살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내려간 작업자를 찾아 우수관로를 따라 걸었다. 조정갑 반장이 손전등을 들고 안내했다. 희미했다. 취재 메모를 위해 가는 볼펜 대신 굵은 사인펜을 준비하길 잘했다 싶었다. 쏴아아~.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덜커덩, 덜커덩. 가끔 맨홀 위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땅 밑에 있음을 깨닫게 했다. 우수관로 바닥은 떠내려온 자갈과 돌덩어리들로 울퉁불퉁했다. 머리 위로는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다. 물이 흐르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우수관로 중간중간 너울을 만들어, 약 50cm 높이를 딛고 올라서기도 했다. 손전등 불빛을 따라 100m 넘게 걸었을까. 이렇게 어둠 속을 걷다가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땅 아래에서는 그곳의 언어가 위치를 알려준다. ‘녹번L1240.’ 녹번천 상류의 하천을 덮은 복개 시작 지점부터 왼쪽 아래로 1240m 지점이라는 뜻이다. 이런 표시는 통상 20m마다 붙어 있다. 조 반장은 “하도 다녀서 빠꼼이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니, 영화에서처럼 미로 같은 하수구를 헤맬 일은 없다. 앞서던 조 반장의 말에 따라, 허리를 굽히고 옆 우수관로로 건너갔다. 멀리서 번쩍번쩍 빨간불이 깜박대는 안전조끼를 입은 작업자들이 걸어 내려왔다. 비추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그들은 자체 발광 조끼를 입는다.


그 습하고 깜깜한 곳에 그들이 내려간 이유는 노동을 위해서, 돈벌이를 위해서다. 작업은 오수차집관거에 쌓인 모래를 제거하는 일. 이 관로에 떠내려온 모래가 쌓이면 맑은 우수관로 쪽으로 오수가 넘치게 된다. 서울의 권역별 4개 물재생센터로 가서 정화돼야 할 물이 우수관로를 따라 한강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 오수차집관거를 따라가며 막대나 발로 모래가 쌓인 지역을 점검한다. 작업자들은 ‘가래질’을 했다. 삽으로 한 사람은 퍼올리고 한 사람은 삽에 묶은 줄을 끌어당긴다. 이렇게 퍼올린 모래는 우수관로로 넘긴다. 철벅~, 철벅~. 퍼낸 모래는 하루 뒤 마대자루에 담아 밖으로 옮긴다. 어둠 속에서 난지물재생센터의 한 직원이 말했다. “차라리 어두운 게 나아요. 밝아서 다 보이면 더러워서 일 못해요.” 작업자들이 잠시 삽질을 멈췄다.

 

 

삽질의 연속

 

“힘들지 않으세요?”

“삽질하는 게 힘들지요. 가슴까지 땀에 젖으니까. 삽질을 하면 허리가 아프고 당기면 팔이 아프고.”

“힘들다 생각하면 진짜 못해요. 마음 편하게 생각해야지.”

“마음의 위안을 삼는 거지요.”

“손자가 뛰어다닌다”는 이한옥(62)씨는 김재도(60)씨와 같이 작업한다. 바닷가 어부처럼 가슴까지 와닿는 ‘가슴장화’에 안전모를 썼다. 팔뚝까지 오는 고무장갑도 끼었다. 삽에 묶인 끈을 당기는 사람은 높이 당겨줘야 한다. 그래야 삽질하는 사람이 덜 힘들다. 삽질하는 사람은 바닥부터 긁어 들어가야 한다.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삽질은 번갈아 한다. 교대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허리가 아프면 역할을 바꾼다. 굳이 따지자면, 30~40분마다 바꾼다. 세어봤다. 54번의 삽질을 하고 허리를 한 번 폈다.

“‘왜 하필 이렇게 컴컴하고 더러운 곳에서 일하고 있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바깥에서 일하면 먼지 나고 지나가는 사람 구경거리나 되잖아요.”

“하루 종일 놀고 화투나 치는 사람도 있는데…. 집에 들어가면 떳떳하잖아요. 놀고 먹는 것하고 일하는 것 차이지.”

“위험하지는 않나요?”

“엎어지면 돌멩이니까 조심해야지요.”

“막걸리 한잔하시고는 못하겠네요?”

“아이고, 술 한잔도 못해요. 미끄러워서 엎어지고 큰일 나니까.”

인터뷰가 길어지자 이씨가 말했다. “자, 우리 몫을 해야 돼요.” 이들은 “노가다로 단련됐다”는 몸으로 3년째 해온 일을 다시 시작했다. 가끔 저 멀리서 다른 작업자의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허리야~.” 잠깐 쉬고 있던 김종화(61)씨에게도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힘들지요. 손자 자식들 살리고, 나이 먹고 할 일 없으니까 하는 거지요. 할 버릇 하다 보니 면역이 됐어요.” 환갑을 훌쩍 넘긴 유원수(66)씨는 혼자 작업했다. 어둠 속 손전등에 유씨의 얼굴이 비쳤다. 땀에 흠뻑 젖었다.

“힘들지 않으세요?”

“어느 일이든 안 힘든 게 어디 있어요. 사람 하는 일이 다 힘들지.”

“여기 어두운 데서 일하는 것 누가 알까요?”

“일반 시민들은 모르겠지요. 직업이 천태만상이잖아요. 운명이다, 천직이다 생각해야지요. 이렇게 하니까 물도 맑아지잖아요.”

이들은 보통 점심을 먹은 뒤 오후 2시께 지하로 내려와 오후 5시께까지 일한다. 기간제 노동자인 이들이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은 한달에 140만~150만원. 박 팀장은 “4대 보험 별도에 주 5일”이라고 알려줬다. 겨울에는 비가 적게 오다 보니 모래가 그다지 쌓이지 않아, 3~11월 9개월만 기간제로 일한다. 우기에는 통상 2~3일에 한 번씩 작업을 한다. 올해는 비가 잦아서 그만큼 모래 제거 작업도 많았다. 지하에서 작업하지 않는 날은 하천변에서 혹시 오수가 바로 흘러들지는 않는지 순찰한다. 이날 작업 현장은 그나마 천정 높이가 2.5m 남짓이어서 다행이다. 구간에 따라서는 머리를 숙이고 작업을 해야 한다. 오수관로를 따라 작은 기계가 불도저처럼 밀어가면서 모래를 밀어낼 수는 없을까? 권순회 차집시설물 담당이 말했다. “경제성이 있으면 벌써 누가 만들었겠지요. 그보다는 인력이 싸니까….”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기자의 제안에 박 팀장이 말렸다. “아이고, 하지 마세요. 똥물이 다 튀기는데, 씻을 데도 없고.” 오수차집관거에 발을 담갔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장화에 찰랑거릴 만큼 올라왔다. 혹시 저 더러운 물이 장화로 흘러들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오수의 깊이는 낮을 때는 2~3cm, 높을 때는 15cm 정도 된다. 지점에 따라서는 30cm가 넘는 곳도 있다. 오수의 물 높이는 하루에도 시간마다 달라진다. 물을 많이 쓰는 아침저녁이 다르다. “세탁기를 쓰는 10~11시께가 가장 높다”고 조 반장이 알려줬다. 먼저 삽에 묶인 줄을 당겼다. 삽은 쉽게 올라오지 않았다. 팔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젖은 모래가 무거웠다. 가벼운 모래는 떠내려가고 무거운 자갈과 돌이 많이 포함된 탓이다. “높이 들어줘야 해요. 그래야 푸는 사람이 힘이 덜 들지. 그렇지.” “잘하네. 일할 데 없으면 와요. 젊은 사람 하나 있으면 좋지.”

스무 삽 정도 당겼을까, 팔이 아팠다. 이번엔 삽을 떴다. “바닥을 긁어줘야 돼요. 그래야 모래가 잘 올라오지.” 앞에서 줄을 당기는데 삽질로 제대로 모래를 푸지 못하다 보니, 거의 헛삽질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더러 삽질을 해봤건만, 비좁은 곳에서 오랜만에 잡은 삽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래가지고는 일당 못 받겠는데.” 금세 목장갑이 물에 젖었다. 흠칫했다. 으~. “고무장갑 안 끼면 피부병이 생기는데”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열 삽 남짓, “아이고, 힘드네요”라며 삽을 넘겨줬다. 이 때문에 환경미화원을 뽑듯 20kg 자루를 들고 옮기는 체력시험을 거쳐 일꾼을 뽑는다.

 

» 시궁창과 땅 위를 이어주는 것은 철제 사다리다. 김순배 기자가 취재를 마친 뒤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구간에 따라 달라지는 악취

 

“생각보다 덜하네”라고 느꼈던 냄새는 구간구간 달랐다. 더러 지름 1m 가까운 하수로에서 오수가 쏟아져나왔다. 그 바로 옆에서 그들은 작업을 계속했다. 조금 지나자 지름 30cm 크기의 또 다른 하수로에서 오수가 쫄쫄 흘러든다. 악취는 생선 냄새처럼 비릿하다가, 튀김 냄새인지 무엇이 썩어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냄새까지 뒤섞였다. 조 반장이 말했다. “주택가는 상대적으로 깨끗해요. 시내 식당가 쪽은 악취가 훨씬 지독해요.” 병원들이 있는 쪽은 냄새가 더 지독하다. “별걸 다 씻으니까.” 가뜩이나 고약한 냄새는 삽으로 바닥을 푸면서 뒤집자 더 심해진다. 작업자들은 “냄새가 배어서 모른다”면서도 “아무리 씻어도 냄새가 안 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마스크를 쓰고 일할 수도 없었다. 삽질에 땀이 줄줄 흐르는데, 마스크까지 끼기는 힘들다.

예상만큼 독하지 않던 냄새는 갈수록 자꾸 코를 찔렀다. 왜 화장실에서처럼 냄새를 잊어버리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탁한 공기가 자꾸만 폐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둠 속 먼지는 보이지 않았다. 권순회 담당은 “손전등 비춰보면 먼지가 자욱해요. 도로 위로 차가 지나가고 아래서는 바닥에서 마른 것들이 위로 뜨니까.”

이곳에 가스가 가득 차지는 않을까? 전날 친구와 통화하다가 이날 취재 일정을 얘기했더니, “중독 조심해라. 우리나라가 워낙 엉망이라서”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메탄가스에 취해 숨진 노동자들도 생각났다. “여기서 담배에 불 붙여도 되나요?” 안내하던 직원들은 영화에서처럼 폭발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좌우로 뻥 뚫린 곳에서 가스가 차지는 않을 듯싶었지만,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가끔 가스 농도를 조사한단다. 가스 폭발이 떠오르더니, 다시 또 다른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시체가 발견된 적은 없나요?” 권순회 담당이 대답했다. “누가 80kg이나 되는 맨홀 뚜껑을 열고, 차도 다니면서 다 보는데 버리겠어요? 강가가 더 쉽지. 죽은 고양이나 쥐는 많아요.” 시끄러워 가버렸는지, 쥐는 보이지 않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우수관로에는 더러 게가 살고 뱀도 산다.

한 직원이 가래를 뱉었다. 잠시 뒤 그 직원이 오줌을 눴다. 다시 오수차집관거 쪽을 택했다. 나는 눌까 말까 망설이다 누지 않았다. 그리 마렵지도 않았지만, 일부러 더러운 시궁창을 찾았어도, 오수에 몇 방울 보태고 싶지 않았다.

시궁창에서 일하면서 신경 써야 할 것은 더러움이 아니다. 박 팀장은 “일기예보를 제일 중요시한다”고 말했다. 상류에서 비가 쏟아지면, 갑자기 물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계곡수라 언제 불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난 추석 때 서울 시내처럼, 갑자기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면 키 높이 넘게 물이 넘쳐 흐른다.

 

 

한때는 고기 잡는 개천이던 ‘오지’

 

오후 4시10분께. 수시로 작업 현장을 옮기는 이들을 따라 은평구 녹번동에서 불광동 주택가까지 지하를 1.2km 가까이 돌다가 빠져나왔다. “제가 여기 2시간 들렀다고 뭘 알겠습니까. 그래도…”라고 자백하고 뚜껑이 열린 맨홀로 향했다. “수고하세요~.”

센터 직원들이 취재를 위해 사준 어두운 남색 태화 장화를 벗었다. 양말이 땀에 젖었다. 그렇게 ‘쇼’는 2시간 만에 끝났다. 공사 현장 옆을 지나던 여고생에게 물었다. “저 아래서 사람들이 모래 퍼내는 것 알고 계세요?” 수줍은 여고생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중년의 아주머니에게도 물었다.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박 팀장은 “공무원들도 담당자만 안다”고 말했다. 잠시 뒤 ‘왜 남의 가게 앞에 차를 세워놓고 공사를 하느냐’고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불만을 터뜨렸다. 공사 현장 인근에 사는 류영목(69)씨는 아스팔트 도로 아래가 개천이던 시절을 기억했다. “고기 잡고 가재 잡고 그랬지요. 저기 조그마한 다리가 있었는데, 애들이 놀던 곳이지요.”

우리는 승용차를 타고 떠났다. 이씨와 두 김씨, 유씨는 개천이 있던 저 어딘가 도로 밑 시궁창에서 다시 작업을 계속했다. 그들을 태우고 온 트럭도 뒤에 남았다. 진짜 ‘천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동행한 사진기자는 자꾸 눈이 따끔거린다고 했다. 속이 자꾸만 니글거렸다. 머리도 계속 띵했다. 좀체 낮에는 가지 않는 화장실에 가 대변을 봤다. 푸드득. 하~. 마침 점심 약속 때 먹은 해산물 크림 스파게티. 다시는 가지 않을 발밑 땅속, 그 우리 곁의 오지로 흘러가겠지.

 

아무도 모르게 ‘아침’을 만들다

한겨레신문사 청소 노동자를 따라다녀본 밤,
새벽부터 입에 단내 나게 뛰어다녀 걷어내는 종이만 350kg, 17자루·12상자
» 모든 이들이 퇴근한 심야의 도심 빌딩은 아무도 없는 죽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늦은 밤 그 안에서는 또 다른 빌딩의 주인들이 왕성한 노동을 한다. 그들은 낮의 주인들보다 더 많이 그 공간을 이해하고 사랑한다. 한겨레신문사 8층의 쓰레기를 걷고 있는 신진섭씨. 한겨레 박승화 기자

새벽 2시, 7층 편집부 기자 2명이 나란히 가방을 챙겨들고 나간다. 마감을 끝낸 문화부 기자도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내려간다. 몇몇 야근자를 빼놓고 한겨레신문사는 텅텅 비었다. 이 시간에 신동창(72)씨는 출근을 한다. 신씨는 한겨레신문사 빌딩 건물 청소도급업체 동남서비스의 사장이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버리면 안 되나

 

신동창씨가 맨 처음 하는 일은 화장실의 핸드타월을 갈아끼우는 것. 신씨가 아들 진섭(35)씨를 6층에서 만난다. 진섭씨는 새벽 1시에 나왔다. 6층을 다 ‘걷은’ 진섭씨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간다. 바퀴가 달린 하늘색 쓰레기통과 함께다. 하늘색 쓰레기통의 윗부분엔 전선이 묶여 있고, 거기서 땋아낸 전선의 끝에 비닐봉지 두 개와 하얀 통이 달려 있다. 100ℓ짜리 사각 쓰레기통도 같이 걸어간다. 한 손에는 100ℓ짜리 쓰레기봉투도 들었다. 전등 스위치를 켠다. 사람이 사라진 사무실이 형광등 불빛 아래 창백하게 나타난다.

총무부 자리 쪽으로 ‘쓰레기통 컴플렉스’를 밀고 간다. 프린터 밑 박스를 비운다. 파쇄기 뚜껑을 연다. 가늘게 잘린 종이가 가득하다. 파쇄된 종이를 비우고 나니 하늘색 쓰레기통 속에 있는 포대가 2분의 1가량 찼다. 통을 눕혀서 포대를 꺼낸다. 그 포대를 엘리베이터 앞에 갖다놓는다. 새 포대를 집어넣는다.

종이는 세 종류로 분류된다. 흰 종이와 색깔 있는 종이, 그리고 두꺼운 종이다. 신문사라 ‘색깔 있는 종이’(신문지)가 많다. 색깔 있는 종이는 큰 하늘색 통에, 흰 종이는 사각 통에, 두꺼운 종이는 쓰레기통에 붙은 비닐에 넣는다. 플라스틱과 유리, 스티로폼은 하얀 통에, 비닐은 쓰레기통에 붙은 비닐봉지에 넣는다.


이번엔 개인 휴지통들을 가져다가 비운다. 총무부의 개인 휴지통은 전부 8개다. 정수기 옆의 휴지통을 비우고, 정수기 물받침 물을 물 버리는 쓰레기통에 비운다. 그 쓰레기통을 화장실 앞에 가져다 놓는다. 나중에 물을 비우고 씻을 터다. 정수기 옆 ‘위생종이컵을 분리배출하면 규제 대상이 아닙니다’라고 쓰인 문구가 눈에 띈다. 종이컵은 ‘색깔 있는 종이’ 통으로 들어간다.

“저 진짜 바쁜데… 얘기할 시간이 없어요.” 진섭씨가 총무부 옆 재경부 자리로 쓰레기통을 굴리면서 말한다. 말을 시킨 죄의 사함을 받을 요량으로, 파티션 옆 전략기획부의 휴지통 두 개를 가져다준다. “안 하셔도 돼요. 어디서 갖고 온지 아시겠어요?” “그럼요.” 자신 있게 다 비운 통을 받아서 갖고 가는데, 파란 체크무늬 휴지통이 이 자리였는지 빨간 휴지통이 이 자리였는지 헷갈린다. 정확한 위치도 헷갈린다. 의자 사이이긴 했는데, 이쪽으로 가까웠는지 뒤쪽으로 가까웠는지. 이에 비해 진섭씨는 갖다준 휴지통을 다 비운 뒤 제자리에 척척 놓는다. 파란 체크무늬 휴지통과 빨간 휴지통을 바꿔놓는다. 자신이 갖고 가서 비운 게 아니라 실수가 ‘생긴다’. 녹색 체크무늬 휴지통을 들고 자리로 갔는데, 녹색 체크무늬 휴지통이 이미 놓여 있다.

인재개발부 자리 뒤에 있는 큰 종이박스를 밀면서 내왔다. 진섭씨는 힐끗 본 뒤 “이거 쓰레기 아니에요”라고 한다. 겉에 ‘영어성적표-보훈증명서’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박스에 든 것은 신입사원들의 지원 서류를 꺼내고 난 봉투들이다. 제자리에 갖다둔다. “어떤 게 버릴 건지, 어떤 게 아닌지 어떻게 아세요?” “제가 이 일이 7년째인걸요. 알쏭달쏭한 것은 안 버리는 게 낫죠.”

신씨가 한겨레신문사 빌딩에서 일한 지는 만으로 7년이 됐다. 아버지가 청소용역업체를 떠맡고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전 청소용역업체인 J사에서 일했는데, 계약이 완료됐을 때 부부를 눈여겨본 총무부 직원이 회사를 차리면 용역을 맡기겠노라 했다. 가족 사업인 셈이다. 원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집이 있었지만, 회사 부근으로 이사를 왔다. 회사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다. 낮에도 필요하면 나온다. “얼마나 좋아요? 회사 사람들은 알아주고, 오래 일하니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고.”

어머니 김남관(65)씨가 새벽 2시30분에 나온다. 무릎 연골 수술을 해서 한동안 못 나왔는데 이제 쉬엄쉬엄 다닌다. “아들이 너무 힘들어. 일이 너무 많아. 사람 1명 빠지면 일을 다 못해요.”

» 신동창씨가 사무실 바닥을 닦고 있다. 한 층을 닦는 데 1시간 정도 걸린다. 넓은 곳은 2시간 가까이 걸린다. 시계가 새벽 3시45분을 가리키고 있다.한겨레 박승화 기자

어머니는 사장실에 매일 ‘출근’하신다

 

3명의 가족 외에 새벽 5시30분에 출근해 오후 4시까지 화장실을 담당하는 직원이 2명 있다. 그리고 층마다 ‘걷는’ 3명의 아르바이트가 있다. 각각 4층, 5층, 7층을 담당한다. 한겨레신문사 빌딩은 8층이다. 2층과 3층 기계실은 화장실 담당자가 맡는다. 아르바이트는 새벽 5시30분에 출근해 3시간 동안 일한다. 정해진 시간이 그렇지, 보통 더 일찍 나온다. “이전에는 새벽 6시에 나와서 오전 10시까지 일했어요. 그런데 직원들이 출근할 때 쓰레기들이 나가고 있으면 보기 안 좋잖아요. 저희는 오전 7시30분 전에 쓰레기를 전부 내요.” 신동창씨가 말한다. 쓰레기를 걷는 일 외에도 일이 많다. “원래 청소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잖아요.” 옥상 청소, 건물 외부 쓸기, 4층 주차장 청소, 설비실·경비실 청소, 재떨이 씻기, 내부 계단 닦기, 바닥 닦기, 화장실 거울 닦기 그리고 유리 닦기. “예전에는 유리문이 딱 하나 있었거든요. 2층 현관문만 유리문이었어요. 그런데 이것 좀 봐요. 문이 새로 생길 때마다 유리문인 거예요. 일이 자꾸자꾸 많아져요. 예전에는 화장실 종이타월도 없었는데 생겼죠. 치약도 갖다놔달라 해서 갖다놓고….”

생긴 일 중 가장 큰 게 ‘분리수거’다.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생겼지요.” 진섭씨는 말한다. “집에서는 대충 분리해도 갖고 가잖아요. 그런데 한겨레신문사 쓰레기는 허투루 분리하면 절대로 안 가져가요.” 예전엔 걷은 쓰레기를 1층에 다 부려놓고 분리를 했지만, 지금은 걷을 때 분리수거를 바로바로 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분리수거통을 두고 직원들이 분리수거를 하면 일이 편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지 않아요. 예전에 6층에 ‘캔만 버려주세요’ 해서 통을 갖다놓은 적이 있지요. 거기에 온갖 쓰레기들이 다 모여요. 아마 분리수거를 해도 어차피 일일이 다시 다 해야 할 겁니다.”

아들이 8층을 걷는 사이 어머니는 사장실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사장실에 매일 ‘출근’하는 사람이다. 휴지통을 비우고 소파를 닦고 책상을 닦고 문을 잠그고 나온다. 어머니는 8층에 있는 총괄상무실, 접견실, 대표이사실, 비서실 등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다 쓸어낼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하루이틀 해보고는 안 와요”

 

“뭐가 없어지면 청소하는 사람부터 제일 먼저 의심하잖아요. 우리는 책상 위에 있는 것은 하나도 안 버려요.” 아까 다 먹은 종이컵을 내가 휴지통의 ‘색깔 있는 종이’ 통에 넣었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예전에 중요한 서류가 없어졌다고 해서, 쓰레기 업체에 가서 모아놓은 쓰레기를 다 뜯은 일이 있어요. 책상 위에 있던 게 바닥에 떨어지고, 그걸 누가 휴지통에 집어넣거나 했겠죠. 하도 오래 일해 실수는 별로 없는데, 지난해 조선족 동포가 일을 한 7층에서 일이 있었어요. 기자분이 녹음기랑 가방이랑 카메라를 다 잃어버렸대요. 아침에 와서 그런 일이 있다기에 묶어놓은 것을 다 풀었어요. 몇 번이나 쏟고, 또 쏟고. 지켜보고 서서 ‘그만합시다’를 안 하더라고요.”

작업을 보고 있으면 그런 큰 물건이 섞여들 리가 없다.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으니까. 별것 아닌 것도 없어지면 먼저 우리한테 전화를 해요.” 다 쓸어낼 수도 있는 사람한테 ‘도난’이라니. 바닥에 버릴 책을 쌓아놓아도 그대로 이틀사흘 지난 뒤에야 버린다. 이들은 ‘쓰레기의 흐름’을 본다. “휴지통에서 나온 것도 이건 버릴 물건이 아닌데 싶으면 보관해둬요. 이틀 정도 뒀다가 안 찾으면 버려요.”

편집국을 청소하러 7층으로 내려갔다. 야근 책상 위에는 닭과 튀김 따위가 널브러져 있다. “일주일이면 다섯 번 정도는 이렇게 야참을 드세요. 처음에 일할 때(10년 전)는 회사에 음식물을 못 들여왔지요. 그런데 지금은 음식을 사갖고 와서 먹는 사람이 많아요. 편의점이 생기고 카페가 생기면서 많아졌지요.” 음식물을 버릴 때 조심하자고 당부한다. “라면도 국물은 변기에 쏟고 내용물만 놓으면 좋겠어요. 쓰레기를 비울 때 일단 쏟잖아요. 쏟고 보면 더러운 국물이….” 국물이 쓰레기를 다 버리게 된다. 쓰레기도 다 같은 쓰레기가 아니다.

어머니가 화장실 치약·비누 등 비품을 갈아놓는다. 작아진 비누를 큰 비누에 붙인다. “이렇게 아껴써야지요.” 치약이 조금 남은 것은 앞쪽으로 밀어놓는다. 쪽쪽 밀다가 “남자 화장실과 바꿔놔야겠다”고 한다. 여자는 하루를 못 쓸 양인데, 남자는 되겠다 싶은 것이다. 그사이 아버지 신동창씨는 바닥을 닦는다. 한 층을 닦는 시간은 1시간이 조금 넘는다. 8층은 넓어서 2시간 가까이 걸린다.

새벽 4시30분, 4층을 걷는 김윤희(56·가명)씨가 도착했다. “오늘은 서둘러야 해요. 7시에 다른 데 출근해야 하거든요.” 4층의 독자센터를 청소하면서 “여기는 먹을거리 천국이애요” 한다. “콜센터라서 자리를 뜰 수 없어서 그런가 봐요.” 식사를 주로 하는 회의실의 휴지통에서는 컵라면, 귤 껍질, 도시락 등이 쏟아져나온다. 쓰레기가 그들의 생활을 말한다. 그들의 성격도 말해준다. 음식 냄새 나지 말라고 그걸 바리바리 싸놓았다. 일일이 벗겨서 분리를 해야 한다.

 

 

여름엔 냄새, 겨울엔 추위와 싸움

 

거의 비슷한 시각, 7층을 걷는 김재덕(67)씨가 나왔다. 김재덕씨는 활기차다. 야근하는 기자를 가리키며 “애국자여”라고 큰 소리로 치켜세우고 “옛날에는 얼마나 기가 막히게 살았어. 천석꾼도 밥풀을 주워 먹었어. 이런 일이야 신선놀음이지”라며 침을 튀기며 말한다. 공장을 운영하다 은퇴한 그가 운동 삼아 하는 일이라고 했다. TV 앞에 쓰레기통들을 두고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증권 관련 뉴스가 화면으로 나오고 있다. “딸들이 용돈을 많이 줘. 그건 하나도 안 건드리고 내가 벌이를 하는 거지. 내가 뻔드(펀드)가 얼마나 많은지 알면 애들이 깜짝 놀랄 거야. 하하하.” 7층은 워낙 종이 쓰레기가 많이 나와 2시간30분에서 3시간씩 걸린다. 정씨는 3개월째 일하고 있다.

어머니 김남관씨는 젊은 사람들은 일하러 오지 않는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이 오면 하루이틀 해보고는 안 와요. 벼룩시장에 (구인 광고) 내는 것도 3만8천원, 4만원 드는 일인데….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이 오시면 오래 일하시니, 나이 드신 분과 일하려 하죠.”

 

일하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5층을 걷는 한정미(50·가명)씨는 하늘색 쓰레기통 안에 분리 통을 모두 넣어놓고 쓰레기를 걷는다. “오전 9시에는 식당에 나가요. 애들은 다 컸어요. 대학 졸업하고 취직했어요. 남편도 일하고, 나는 두 군데서 일하고, 돈 많이 벌겠죠?”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데 애들 버는 돈은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르니까. 아들은 원래 다 그런 거예요?” 집에는 쓰레기 걷는 일을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냥 신문사에서 광고지 넣는다고 했죠. 애들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할 거라서요.” 여기서 일한 지 3년째다.

화장실 청소 담당인 김진자(69)씨는 5시에 나왔다. “하는 일이 많아서 뛰어댕겨야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종종거린다. 쫓아다니기가 버겁다. 2층 기계실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잉크 냄새가 심하게 난다. 기계가 꽉 찬 어두컴컴한 곳을 휘적휘적 걸어간다. 싱크대 있는 곳의 불만 켜고 쓰레기를 치운다. 기계실 내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간다. 기술자들의 휴게실이다. 정수기 물받침의 물을 화분에 준다. “정수기 옆 물받침 통은 제가 온 뒤 놓은 거예요. 워낙 정수기 옆이 지저분해서.” <한겨레21> 사무실에 물받침통이 놓인 것도 얼마 되지 않았음을 기억해낸다. 작은 혁명. “그 뒤로는 쓰레기들이 물로 찰 일도 없고 깨끗해졌지요.” 또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다. 기계실 내 사무실을 닦는다. “기계실이라 기름기가 많습니다. 닦아도 잘 지저분해져요. 이렇게 뛰어댕기다 보면 여름에는 땀이 지근거리는데 샤워할 데가 없어요.”

기계실이 끝나면 1층부터 올라가며 화장실을 청소해야 한다. “바닥 닦고 변기 닦고 거울 닦고 나면 입에서 단내가 나지요.” 아침8시30분까지 청소를 다 마치고 중간중간 일을 보다 오후 4시 퇴근한다. “화장실은 하루에 세 번 치워요. (휴지통에 휴지량이) 적을 때는 눌러주고 많을 때는 비우고. 화장지도 보고 바닥도 닦고.”

한정미씨는 중앙 계단을 닦는다. 5층에서 내려가며 닦고, 다시 8층에서 닦아 내려온다. 한정미씨의 밀대가 1층에 도착하는 6시쯤, 1층에는 하루의 쓰레기가 거의 다 모인다. 엘리베이터는 쓰레기 수거차량이 된다. 층을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1층에 부려놓는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은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을 본다. 쓰레기에 밀려 벽에 바싹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런 모양을 서로 쳐다보며 깔깔대고 웃는다.

쓰레기도 일주일의 리듬이 있다. 월요일이 가장 적고 화요일이 가장 많다. 월요일은 일요일 새벽이다. 일요일에는 신문 제작 인원이 평일보다 적다. 전날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이지만, 이들은 새로운 날을 센다. 오늘, 화요일 새벽인 줄 알고 왔는데 수요일이다. 명실상부하게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쓰레기봉투에 모인 쓰레기도 다시 본다. 재활용이 될 만한 것을 골라낸다. 종이 쪼가리, 끈, 필름….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다. 골라내는 쓰레기봉투 안은 눅눅하고 자잘하다. “여름에는 냄새가 말도 못해요. 겨울에는 야외니까(1층은 신문이 묶여나와 전국 배달 차량에 실리는 주차장이다) 춥고…. 이렇게 일해서 우리 식구 전체가 받는 돈이 부장 월급 정도밖에 안 돼요.” 총무부에 물어본 ‘도급비’로 짐작하건대, 이 부장은 대기업 부장은 아닌 것 같다.

 

 

전날의 쓰레기를 치우는 새로운 날

 

6시30분 ‘새마을’을 붙인 폐지수거 차량이 온다. 흰 종이, 색깔 있는 종이, 두꺼운 종이들이 모두 실린다. 하루에 나오는 양은 색깔 있는 종이 200~300kg, 흰 종이 100kg. 포대로 17자루와 12상자. 그 외 꾹꾹 눌러담은 100ℓ 쓰레기봉투 9개, 통통하게 담은 스티로폼·플라스틱 자루, 비닐 한 자루, 음식물쓰레기 10ℓ 한 봉이 나왔다. 진섭씨가 농담을 한다. “오늘 쓰레기 진짜 안 나왔네.” 날이 밝는다.

쓰레기가 정리되면 아들은 건물 바깥을 쓸러 가고, 신동창씨는 바닥을 닦고, 김남관씨는 유리를 닦는다. 8시30분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가 밥을 먹는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아침에 직원들이 출근을 한다. 다시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하루가 시작됐다.

 

방이 아닌 방에 살기]

다방·PC방·만화방 등에 사는 ‘비숙박 다중이용업소’ 거주자들…
인구주택총조사에서도 파악되지 않는 신주거빈곤층
스타벅스에서는 4100원짜리 카페라테가 팔리고, 역 앞 별다방에서는 3천원에 하룻밤 잠자리를 판다. 밤 9시가 넘으면 만화방에는 신간만화를 원하는 사람보다 해진 소파에 눈치껏 낡은 담요를 까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농촌·중소도시에서 컨테이너가 새롭게 등장한 집없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주거 형태라면, 도심 한가운데에서는 다방·PC방·만화방 등이 그 자리를 맡고 있다. 사람이 살 수는 있지만 살지 않아야 마땅한 곳은 종류와 수를 늘려만 간다.

 

다방 3천원, 만화방 5천원, PC방 6천~7천원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사단법인 한국도시연구소에 의뢰해 결과를 낸 ‘비주택 거주민 인권상황 실태조사’는 빈곤계층의 주거 형태에 대한 종합보고서다. 뜻하지 않은 가을 추위와 곧 닥칠 겨울은 실태조사 속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 안에서 빈곤 주거의 형태는 과거 비닐하우스, 쪽방촌 등에서 더 세분화되고 다양해졌다. 그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지는 듯하다. 서울(서울역·영등포역), 대전, 대구 등 세 지역에서 ‘비주택’이라는 낯선 용어로 정의되는 공간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은 3289명이다. 노숙인을 제외한 수치다. 이들을 보고서는 ‘비주택 거주민’이라고 부른다.

비주택 거주민 실태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비숙박 다중이용업소’로 불리는 다방, PC방, 만화방, 찜질방, 사우나 등의 주거 실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의 삶은 제각각이지만 목적은 하나다. 싼 곳을 찾아 사는 것이다.

가장 저렴한 곳은 다방이다. 3천원이면 커피를 마시고 소파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영등포역 인근에만 두 곳이 있다. 조사보고서는 “당일(9월께) 영등포 지역 다방 두 곳에서 숙박한 인원은 34명이나 겨울이 오면 수가 더 늘어난다”고 밝힌다. 다방은 커피전문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대부분 문을 닫았다. 남은 곳은 숙박시설로 기능할 뿐이다. 대개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 서울역 앞 한 만화방 모습. 하룻밤 5천원으로 잠을 잘 수 있다. 15만원이면 한 달을 지낸다. 한켠의 낡은 만화들이 만화방의 흔적을 보여준다.한겨레21 류우종 060815


만화방에서도 산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방 다음으로 싸기 때문이다. 영등포역·서울역 등 조사 지역에서 발견된 만화방은 7개소로, 5천원이면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거주 기능을 하는 서울역 앞의 한 만화방을 들여다보면, 2개 층 가운데 아래층은 주로 만화를 보거나 하루씩 자는 사람이, 위층은 장기 거주하는 사람이 이용한다. 석 달 이상 장기 거주자는 20여 명인데, 숙박료로 한 달에 15만원을 낸다. 장기 거주자들끼리는 가족관계와 유사한 위계질서도 잡혀 있다. 샤워가 가능하며 빨래는 한 번 할 때마다 2천원을 낸다. 이들은 대부분 건설현장이나 이삿짐센터 등의 일용직 노동자다.

PC방도 잠자리로 이용된다. 이유는 역시 간단하다. 그다음으로 싸기 때문이다. 세 지역의 PC방 수를 합하면 24곳으로, 하룻밤 평균 비용이 6천~7천원이다. PC방 거주민은 일본에서도 공론화됐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넷카페 난민’으로 부른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2007년 넷카페 난민이 5400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인구주택조사는 물론 인권위 조사에서조차 국내 ‘PC방 난민’ 수는 파악하지 못했다.

다중이용업소 가운데 정상적인 삶과 가장 근접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찜질방·사우나 등이다. 세 지역을 통틀어 13곳에 달하고 하루 비용은 평균 7천원, 한 달 비용은 17만원 내외다. 한 달 비용으로 치면 다른 곳에 비해 3만원 정도 비싸지만 이곳에서 상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찜질방·사우나를 두고 조사보고서는 “비주택 거주민들이 밖에서 버티다 안 되면 들어가서 잠을 청하는 거주지라고 볼 수 있다”고 추정했다.

 

노동을 희망하는 젊은이 많아

비숙박용 다중이용업소 비주택 거주민들의 특징은 이전의 전통적인 빈곤층 주거 형태에 비해 젊은 고학력층이 많다는 것이다. 가장 저렴하지만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는 환경이어서 체력적으로 버티지 못하는 사람은 거처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사에 응한 26명을 기준으로 평균연령은 41.4살이다. 비주택 거주민 전체의 평균연령인 52.1살(전체 206명)보다 11살 정도 젊다. 또 전문대졸 이상이 38%로, 다른 곳(고시원 22%, 비닐하우스 16% 등)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현 거주지에서 거주해온 기간이 짧은 것도 특징이다. 응답자 가운데 19명(73%)이 6개월 이하다. 이들이 이동하는 곳은 주로 다른 종류의 비숙박용 다중이용업소다. 일하는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짧게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1년 사이 PC방(15회), 사우나·찜질방(10회) 등을 주로 순환하는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젊은 고학력층이고 일자리를 따라 임시 거주를 하고 있지만 다중이용업소 거주민의 한 달 노동 일수는 월 15일 미만이 76.9%에 달한다. 응답자 가운데 6명은 아예 무직이다. 무직자를 제외하고 2008년 월평균 소득이 50만원 이하라고 응답한 비율이 75%에 이른다. 그들은 2008년 한 해 동안 1인당 최저생계비(46만3047원)에 못 미치는 벌이를 한 것이다. 이는 다른 빈곤층 주거 유형과 비교해도 형편없는 소득이다. 비닐하우스 거주민의 월평균 소득인 91만원의 절반도 안 되고, 고시원(66만원), 여관·여인숙(59만원) 등의 거주민에도 미치지 못한다. 여기에 부채비율도 73%로 쪽방(40%)이나 비닐하우스(53%)보다 월등히 높다. 연령이 낮고 고학력이지만 통계지표만 봤을 때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다른 주거 형태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희망이 없지는 않다. 이들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취업 알선 및 창업’을 선택했다(61.5%·16명). 이들 가운데 정작 저렴한 주택 제공을 원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생계급여를 받는 사람이 단 1명도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사보고서에서는 이를 두고 “노동을 희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밝힌다.

 

비닐하우스 거주민 8668명

통계청이 인구주택총조사를 실시하고 있지만 이는 ‘주택’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 주택 이외의 삶은 외면돼왔다. 그 수치 또한 실제와 거리가 너무 멀다. 4년의 간극이 있다지만,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파악된 영등포 지역의 여관·여인숙 등 숙박업소 장기 거주자는 119명에 그친 반면, 2009년 인권위 조사 결과는 역 인근 업소만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239명이다. 두 배가 넘는 수치다. 고시원도 마찬가지다. 통계청에서 파악한 현황은 영등포 전체 438명인데, 인권위 조사에서는 역 인근만도 665명이다.

아예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항목도 있다. 대표적 비주택 유형인 비닐하우스는 1980년대 말 불량주택 재개발사업으로 저소득층 주거지 철거가 대단위로 시작되면서 집중적으로 생겨나 그 역사가 20년을 넘지만 여전히 실태 파악은 오리무중이다. ‘주거권 실현을 위한 비닐하우스 주민연합’에서 발표한 게 그들의 현황을 파악하는 전부다. 비닐하우스촌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32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거주민은 8668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전히 국공유지와 체비지를 무단 점유한 무허가 건물에서 철거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간다. 인권위 조사에서 그들의 70%가 주거 문제로 지적한 것은 ‘악취’다.

 

보이지 않는 난민

외딴곳에 갇힌 ‘컨테이너 난민들’…
불지옥 여름과 두려운 겨울 사이에 방치된 가난을 만나다
» 박순정씨는 5년 전부터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이전엔 인근 천막에서 살기도 했다. 방을 보여주길 꺼렸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치악산은 모른다. 산 언저리마다 물든 가난. 낡아빠진 단풍처럼. 재 넘어 오는 겨울은 두렵다. 강승준(65·가명)씨는 말했다. “지난해 겨울 같으면, 아주 난 진짜 밧줄 갖고 산에 가, 소나무 많겠다, 목매달아 죽으려고까지 작정했어요. 못 살겠더라고 정말. 살고 싶은 의욕이 추호도 없는 거여….”

바깥바람이 컨테이너 안으로 닥쳤다. 버릇없이 노인의 말을 잘랐다. 강씨는 허벅지 밑으로 손을 당겨넣었다. 올가을 들어 가장 춥다는 11월3일이었다. 강원도 원주 오리현마을 842번지. 주거지가 들어설 수 없다. 산자락이다. 그곳에 컨테이너 하나 앉아 있고, 그 안에 강씨 홀로 살고 있다. 올해로 7년째다. 가로 6m, 세로 4m. 세상이 노인에게 허락한 유일한 거처다. 일컫자니 ‘컨테이너 난민’이다.

장롱과 TV가 컨테이너 안 두 면을 두르고 남은 공간이 그의 잠자리다. 전기장판이 깔려 있고 그 위로 요가 놓였다. 컨테이너 공간의 3분의 1은 시멘트 바닥이다. 주방이고 욕실이며 빨래터다. 취재진이 그를 처음 찾은 11월2일, 가스레인지 위엔 식은 김치찌개 하나만 올려져 있었다.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막걸리로 배를 채웠다. 3일도 정오까진 공복이었다. 그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다. 훈기는 자잘하여 퍼질 리 없다.

강씨가 연탄난로를 만졌다. “허, 또 꺼졌네. 연탄가스 좀 나가라고 문 열어둔 건데.” 뱉은 말도 차가워졌다.

 

가로 6m, 세로 4m짜리 집

» 박순정씨는 5년 전부터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이전엔 인근 천막에서 살기도 했다. 방을 보여주길 꺼렸다. 사진에 보이는 풍경이 이유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여름은 불지옥이다. 한낮 달궈진 쇳덩이는 밤 11시까지 후끈거린다. 빗물이 샌다. 녹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강씨는 빗물 받는 그릇 사이로 몸을 접고 눈을 감는다. 여러 날 칼잠이다. 올여름 장마가 시작되기 전 처음 비닐을 씌웠다. 이곳에서 강씨의 어머니도 함께 살았다. 더 고통스러워했다. 4년 전 기력이 쇠해 세상을 떠났다. 여든셋, 긴 가난을 마쳤다.

진짜 가난은 늘 어제가 낫다. 오늘이 어제보다 더 가난하기 때문이다. 강씨는 1945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강원도 원주로 이사왔다. 아버지가 원주에서 운전을 했다. 집을 팔아 개인 버스를 샀다. 당시로선 부자다. 거진까지 승객을 실어날랐다. 오는 길에 가족이 먹을 생선을 실어왔다. 얼마 못 가 버스에 불이 났다. 전 재산을 날렸다. “그야말로 운수(運數) 사업이더라고요. 그때부터 가난이 온 거야.” 노인은 쓰게 웃었다.

야간고 학생 때 지게를 메고 치악산을 올랐다.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나무도 져왔다. “다들 노는 일요일인데 난 쉴 시간이 없었어요.” 부모와 외할머니, 다섯 동생(여동생 셋·남동생 둘)이 한방에서 지그재그 잤다. 아버지는 강씨가 21살 때 입대하기 전 숨을 거뒀다.

강씨는 중학교 미술반이었다. 실력이 좋았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진관에 취직해 사진 기술을 배웠다. 실력이 더 좋았다. 필름 원판에 칼을 대 대머리 손님의 머리칼을 그려주고, 눈 못 뜬 손님의 눈을 새겼다. 요즘 말로 ‘포토숍’이다. 오라는 사진관이 많았다. 밤낮없이 일했다. “여자들도 많이 따르더라고. 원주여고 학생들이 집에 가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사진관) 의자에 가방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나 하나만 보는 거야. 난 일만 하는데.” 19살 임신한 여고생이 처가 됐다. 노인의 나이 21살이었다. 결혼 보름 만에 군에 입대했다.

사고치신 건가요?

(표정이 전혀 바뀌지 않은 채) 그렇죠. 결혼할 때가 아니었는데.

(한참을 웃고서) 그렇게 인기 좋고 실력도 좋았는데,왜 돈을 못 버셨어요?

(같은 표정으로) 그게… 돈이 모이지 않았어요.

 

추우면 떠오르는 밧줄의 악몽

» 강승준씨는 인물도, 실력도 좋은 사진기사였다. 그는 “컨테이너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막걸리와 담배가 마지막 벗이라고 했다.한겨레 원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가난은 때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 그 설명이 너무 뻔하다. 춘천·목포·대구·부산 등지를 돌며 일했다. 원주의 대가족과 제 가정을 바라지하기에도 벅찼다. “평생 죽도록 남(사진관)의 돈만 벌어주고 그래 한 거지” “식구들도 많으니 난 정말 10원 하나 제대로 못 써봤어, 나 돈 정말 못 써봤어”라고 노인은 말했다. 아내는 결혼 10여 년 만에 편지 한 통만 써놓고 집을 떠났다.

마흔이 넘어 대구에서 시작한 식당이 실패했다. 점점 사진사로도 취직이 어려워졌다. 부산으로 가 막일을 했다. 아들 대학 등록금을 댔다. 1988년 원주에 있던 매부(건축업자)가 분재용 나무를 관리해보겠느냐고 제안했다. 야산 인근에 조립식 주택을 지어줬다. 그러나 사업이 잘 안 돼 매부도 쪼들렸다. 은행빚을 지면서, 큰 땅을 팔고 작은 터로 옮기고 옮겼다. 지금 강씨가 있는 곳이다.

강씨는 20여 년 동안 선친의 제사를 직접 모셔본 적이 없다. 지하수를 끌어올려 물을 쓴다. 한겨울에도 찬물이다. 화장실은 재래식이다. 1년에 두 차례 직접 퍼서 밭에 뿌린다. 그런데도 가난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지난해 말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연탄난로를 올 10월 말 처음 구입했다. 8만원을 썼다. 한 달 생활비의 4분의 1이다. 바닥에 가스보일러가 설치돼 있긴 하다. “가스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정말 추우면 한 번씩 튼다.” ‘정말 춥다’는 날은 ‘밧줄의 악몽’을 꾸는 날인가. 묻지 못한 기자는 손이 차고 발이 시렸다. 그도 떨면서 말했다. “겨울엔 추워서 못 있어. 겨울 잠바를 두 개씩 껴입고 있어도 귀가 시려 못 있어. 하루 종일 떠는 거야. 저 밑의 비닐하우스가 방보다 나아.”

동생들이 가끔 반찬을 갖다준다고 노인은 말했다. “(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도 형편이 못 되니…”라며 말을 흐렸다. ‘가끔’의 빈도를 기자는 묻지 않았다. 대구 식당을 차릴 때 매부에게 빌린 돈을 강씨는 이제 10만원씩 갚는다. 다달이 기초생활수급비를 쪼갠다. “땅 다 팔면 딱 은행빚 갚는다고 해요. 그쪽 처지도 뻔히 아는데 안 줄 수가 없어요.” 상식은 가난을 감당 못한다.

노인은 말했다. “이래 살아서 뭐하나, 혼자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나라는 최근 노령연금(매달 9만원)도 주기 시작했다.

 

원주에만 30가구 50여 명이 살아

» 비주택 거주 유형별 환경만족도

11월2~3일 원주에서 만난 가난은 끔찍하다. 냄새만으로 잔인하다. 컨테이너를 거주지로 삼는 이가 원주에서만 30가구(5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강원주거복지센터가 지난해 말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다. 그러나 이웃 상당수는 그들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취재진은 이틀 동안 컨테이너 난민 6가구를 만났다. 가난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절반은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었다. 다들 5년 안팎으로 한자리에서 삶을 버텨왔다. 오랫동안 곁에 있으나 철저히 시선 밖이다.

실제 국가인권위원회의 ‘비주택 거주자 인권실태 보고서’(이하 보고서)를 보면, 컨테이너 난민(움막·판잣집 등 포함 15가구)은 고립의 고통이 특히 심하다. 이들 중 주거지역에 위치한 이는 13.3%에 불과했다. 대신 외딴지역 40%, 농촌지역이 46.7%를 차지했다. 비닐하우스·고시원 등 각종 주거빈민의 거주 위치별 평균을 보면, 주거지 47.1%, 상업지 32.8%, 외딴지역 12.3%, 농촌지역은 3.4%였다.

보고서는 “(외견상 유사한) 비닐하우스가 예전부터 마을을 이뤄온 것과 달리, 컨테이너 등 거주자는 홀로 떨어져 있어 사람들 간 교류가 없고 외부에서 존재 자체를 알기 힘든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고립은 비문명적 풍경을 빚고 만다. 박순정(77·가명)씨도 컨테이너 난민이다. 강승준씨 쪽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었다. 마찬가지 부지엔 집이 들어설 수 없다. 무허가다. 양일에 걸쳐 박씨를 방문했다. 둘쨋날 취재진은 라면 한 상자를 준비했다. 노파는 인사를 던졌다. “쌀은 안 가져왔어요?”

컨테이너 안은 흡사 쓰레기 창고다. 온갖 폐품이 쌓아올려져 한 명만 겨우 지나고 누울 정도다. 전기도, 빛도 들어가지 않았다. 박씨는 “저녁엔 등잔불을 쓴다”고 했다. 왼쪽 발 절반은 터진 양말 밖에서 움직였다.

할머니, 겨울에는 안 추우세요?

많이 깔고 덮고 자면 돼요.

집 안 좀 봐도 돼요?

그런 거, 뭘 봐요?

물은 어떻게 드세요?

(바로 옆) 개울에서 떠다 마셔요.

그냥요, 안 끓이고요?

그냥 먹지요. 끓여먹어 뭐해요. 그런 건 염려 말아요.

하루 몇 끼나 드세요?

몰라요. 먹는 만큼 먹지요. 아무렇게나 먹지요.

오늘 아침엔 뭘 드셨어요?

호박죽요.

나라에서 받는 돈 있으세요?

그런 거 없어요. 품팔이 다녀서 번 돈으로 살아요. 근데 요새는 일이 없어요.

쌀 같은 건요?

(동사무소에서) 추석 때 10kg짜리 하나 주고 안 줘요.

 

수급권도 없는 컨테이너 독거노인

노파의 강원도 억양에 기자의 질문은 계속 맥 풀렸다. “뭘 자꾸 깐깐하게 묻느냐”며 노파는 야외 양동이에 채워진 물을 바가지로 퍼 들이켰다. 옆엔 낡은 솥단지가 있었다. 밑엔 타다 만 나무가 있었다. 마당에는 밭에서 떨어진 것만 주웠다는 고추가 널려 있었다. 함께 찾아간 강원주거복지센터 변상훈 사무국장은 “지난해에 처음 파악했는데, 정신장애가 조금 있으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의 의사표현은 대개 또렷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다. 노령연금도 없다. 변 사무국장은 “주소지가 불분명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수당 수급자도 물론 아니다.

박씨는 한참 뒤에 컨테이너 안을 보여줬다. 가난이 불뚝 코끝을 찔렀다. 오래 볼 수 없었다.

그의 가난은 온전히 추적되지 않는다. 북녘 함흥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전 고종사촌 가족을 따라 월남했다.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29살 남편을 만났다. 헌병대 인사계였다. 결핵으로 숨졌다. 부부는 강원도 양구 3전차 부대 앞에서 다방도 운영했다. 30년 전 원주로 왔다. 아이를 낳았는데 몇은 죽었다. 아들 장아무개씨가 컨테이너를 마련했다. 박씨는 아들의 결혼사진을 보여줬다. 아들만 지난가을 마지막으로 노모를 찾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연락처는 갖고 있지 않았다. 올해 노파를 찾은 다른 지인은 없다고 했다. 바로 옆 개울엔 올여름 홍수에 뿌리 뽑힌 나무가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서 산 지 5년째다. 원시 생활을 닮았다. 건강·화재·수해 따위 위험 요소가 줄섰다.

영희(가명)는 10살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아빠 친구 둘과 2007년 4월 컨테이너로 이사왔다. 시내에서 얹혀 살던 집터가 팔렸다. 영희 가족은 산자락에서 개 사육을 시작했다. 버려진 컨테이너 두 개를 붙이고 밖으로 조립식 방 하나를 덧댔다. 다른 집을 구할 형편은 못 됐다. 엄마는 식당일도 나갔다.

이듬해부터 영희는 기침이 심해졌다. 감기를 달고 살았다. 엄마(차아무개씨·48)도 그랬다. 저녁이면 방바닥에 하얀 먼지가 수북했다. 손바닥에 묻어났다. 컨테이너 지붕 단열재에서 떨어졌다. 석면가루란 걸 안 지는 한참 뒤다. 지난해 아빠(홍아무개씨·44)는 구멍난 천장 곳곳을 실리콘으로 발랐다. 보일러를 틀면 방 안에 물방울이 맺힌다. 석면에서 맺힌 것이다.

 

집이라 임대주택도 못 받는다

결국 아빠는 컨테이너 유리창도 텄고, 밖으로 방 하나를 더 덧댔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공기 좋은 방이 하나 생겼으나, 컨테이너 난방은 더 무기력해졌다.

영희네 역시 무허가 건물이다. 이웃이 빌린 공공부지를 나눠쓴다. 이웃에게 부지 사용료로 매해 100만원을 낸다. 산마루 골짜기에서 물을 끌어다 쓴다. 아껴써야 한다. 호스가 얼거나 열선이 고장나면 낭패다. 지난해에도 며칠 동안 물을 쓰지 못했다. 눈이 많이 오면 엄마 손을 잡고 학교까지 걸어간다. 양말과 신발 한 켤레를 더 챙겨 학교에서 갈아신는다.

영희는 말했다. “박스집이 싫어요. 난 왜 친구들도 집에 못 데리고 와?” 영희네는 강원주거복지센터의 도움으로 올해 영구임대주택을 신청했다. 떨어졌다. 변 사무국장은 “주거복지재단이 컨테이너를 집으로 간주한다더라”고 말했다. 고약한 모순이다. 집이 아니라 늘 퇴거당할 불안으로 사는데, 집이라서 퇴거할 수 없다.

갈수록 내성적이 되던 영희는 지난해 보습학원을 다니면서 조금씩 나아진다. 학원비가 한 달 30만원이다. 가족은 개를 팔아 올여름 500만원이 안 되는 돈을 벌었다. 11월 통장엔 딱 120만원이 남아 있다. 영희 엄마는 “올겨울엔 (돈을) 빌려서 살고, 내년 여름에 벌어서 갚고 해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도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다.

보고서는 “(파악한) 컨테이너 거주자 등 경우, (기초생활) 비수급자 전원이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전체 비주택 거주자 가운데 최저생계비 이하 비수급자는 50.1%다. 표본은 적지만, 추세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보고서는 “컨테이너 등 거주자 경우, 지역 서비스 정보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거, 영희는 잘 모른다. 영희는 추위만 무섭다. 언젠가 아빠 친구들이 머무는 방에 종이를 붙였다. “이 방은 겨울에 추워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출입금지.”

 

가난의 종착역, 컨테이너

» 박순정씨의 발이 시꺼멓게 텄다. 바로 옆 개울가에서 떠온 물을 끓이지도 않은 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컨테이너 난민 중엔 체념형 빈민이 많다. 노숙에 버금간다. 때론 노숙도 택할 수 없어 찾는 종착지다. 10년가량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아무개(79)씨는 “이제 안 아프게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씨는 취재진이 만난 컨테이너 난민 가운데 사회적 돌봄을 가장 잘 받았다. 기초생활수급자(32만원)에 노령연금(7만2천원)을 받는다. 국가보훈처가 한국전쟁 참전유공자 수당(9만원)도 주고, 시도 참전용사 위로비(2만원)를 준다. 마을 안에 거주하는 덕에 봉사단체의 도움도 적이 받는다.

앨범 속 지씨의 과거는 가난과 거리가 멀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연대장이던 시절 운전병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나주비료, 남해화학에서 일했다. 1970년대 중반, 서울 한남동에 320만원짜리 단독주택을 갖고 있었다. 아내가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날리기 전까지다. 빈손으로 혼자 친형이 있는 원주로 내려온 게 1980년대 말이다. 중앙고속도로 건설 당시 경비(1995~2000년)로 일한 게 마지막 돈벌이였다. 당시 건설사 과장이 소개해준 임시 주거용 컨테이너가 지씨의 유일한 거처가 됐고, 삶의 마지막 거처가 될 듯싶다.

다른 이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두 가지 특징이 이유가 될 수 있다. 보고서를 보면, 컨테이너 등의 거주자는 비주택 거주민 가운데 평균소득이 최저이면서 연령은 최고였다. 월평균 소득 34만4천원은 전체 평균 59만원의 6할이 안 된다. 반면 평균연령은 64.8살. 전체 평균(52.1살)보다 13살가량 높다.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주변의 무관심과 모멸은 컨테이너의 고립을 부르고, 컨테이너의 고립은 주변의 무관심을 강화한다. 지씨는 “마을 청년들이 정말 예의 없다”며 “제대로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원주 토박이 허아무개(65)씨도 ○○마을 내 유일한 컨테이너 거주자다. 그 마을의 유일한 초가집이 7년 전 기울었다. 남편은 개·보수 할 돈이 없어 컨테이너를 들여놨다. 2008년 컨테이너에서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무엇이 가장 서러운지 물었다. “애들이 지네 키운 거, 나 좀 저거 한 거 알아주지 않을 때 서운하다 그러죠.” 허씨는 울었다. 두 딸과 두 아들도 형편이 여의치 못한 듯하다. 허씨는 장애인 아들(막내)에게 용돈을 달라고 한다. 아들은 장애수당을 쪼개준다. “우리가 이 동네에서 제일 가난하지요.” 노파를 피한 시선이 점심 때 해먹었다는 부르튼 떡볶이에 닿았다. 허씨는 올해 비로소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원주엔 현재 공가(빈집)가 1만3천 가구에 이른다. 미분양 1800가구, 임대아파트 1500가구 등이 포함된다. 급히 보호가 필요한 비주택 거주민은 1200여 명이다. 집이 있는데, 집이 없다. 주거 빈민에게 이보다 잔인한 진실은 없다. 원주만의 이야기인가.

대한민국은 2010년 센서스(인구주택총조사)를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이라고 연일 신문과 방송을 통해 말한다. 그들의 시선이 비주택 거주민에게 얼마나 가닿을지 알 수 없다.

보고서 실무를 책임진 한국도시문제연구소 서종균 연구원은 “센서스에 비주택 거주민에 대한 조사까지 포함하는 건 비효율적이라 보았는데, 유럽에서 홈리스 관련 조사를 포함한 걸 알고 부끄럽단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집은 남아도는데 살 집이 없다

지난 7월14일 서울 왕십리 뉴타운 철거 예정 빈집에서 7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주검이 발견된다. 뼈만 남았고 텔레비전 케이블이 목에 감겨 있었다. 경찰은 죽은 지 두 달 정도 된 것으로 추정했다. 비주택 난민의 잔혹한 각본이다.

변상훈 사무국장은 “반노숙 상태인데, 노숙자보다도 관리나 보호가 되지 않는 게 바로 컨테이너 거주자”라고 말한다. 취재진이 만난 이들 가운데, 실제 저마다의 ‘119’를 이웃에 실시간으로 전할 이는 많지 않아 보였다.

서 연구원은 “센서스에서 빠진 이들이야말로 정책 고민의 대상”이라며 “모든 국민의 기본적 상태를 기록하는 게 국민의 기본권·인권 차원에 부합되고, 센서스에서 빠지기 쉬운 집단들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고민하는 게 국가 인권사회의 척도”라고 말했다.

강승준씨는 “무엇보다 힘든 건 외로움”이라고 말했다. 눈이 오면 사람 구경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한참 군대 얘기를 했다. 제대를 앞두고 간첩 김신조가 침입해 복무 기간이 2개월 늘었다. 말년에 양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그래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컨테이너 난민은 배가 차면 춥고 몸을 녹이면 외롭다. 치악산 너머 겨울이 달려오고 있었다.원주=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컨테이너 난민’을 위한 주거 대책

체념을 어루만지는 정부와 이웃의 손길부터

 

컨테이너. 건축법 시행령을 보면, 가설건축물로 때로 임시숙소로 사용된다고 정의된다. 존치 기간은 최대 3년이다. 단, 전기·수도·가스 등의 새 설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 돼 있다. 취재진이 만난 컨테이너는 별도의 허가를 받지 않은 한 모두 불법인 셈이다.

주거 빈민이 컨테이너를 마지막 종착지로 삼고 있다는 추정은 근거가 있다. 보고서를 보면, 이주 의향을 묻는 질문에 컨테이너 등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40%가 “옮길 뜻이 없다”고 말했다. 비주택 거주민 전체 평균은 28%에 불과했다.

정부에 바라는 주거 지원책을 묻자, 10명 가운데 3.3명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의 주거 환경만 개선해달라고 했다. 비주택 거주민 평균은 11%다. 공공임대주택 제공이라고 답한 이들은 40%로 유형별 최저였다. 여건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보고서는 주거환경 만족도도 물었다. 컨테이너 등의 거주자는 사회복지시설·의료시설·문화시설·일자리 접근성 등 모두 최저점(5점 만점에 2점 전후)을 줬다.

포기하고 체념한 주거 빈민이란 얘기다. 이 지점에서 정부 지원 등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보고서는 △단기적으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설비를 제공하고 △장기적으로는 적절한 거처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임대주택의 제공 △현 거처의 개선 등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역사회의 협력도, 고립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이다. 수급비는 말 그대로 생활비라는 점도 별도의 주거 대책을 요구한다.

술 취한 도시를 가로지르는 삶의 드라이버들

치열한 경쟁, 취객의 행패 등을 뚫고 내일로 달리는 대리운전 노동의 거리
11월11일 밤 9시30분, 검은색 SM5 승용차는 서울 마포대교를 달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취객이 창문을 내렸다. 찬바람에 ‘벌써 겨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즈음 ‘우에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는 창으로 머리를 내민 채 토하고 있었다. 역한 냄새가 금세 차 안을 어지럽혔다. 시속 80km로 달리는 자동차를 편도 5차선인 마포대교에서 세울 곳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해 돈을 받은 뒤 다른 손님에게로 뛰어가면 그만이었다. 나머지 창을 열어 냄새가 잦아들기만 바랄 뿐이었다.

» 한밤중 대리기사들은 한 번 외곽으로 빠져나간 뒤 다시 콜을 잡지 못하면 셔틀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돌아온다. 지난 11월11일 새벽 3시께 의정부~교보타워 노선을 다니는 셔틀버스가 쏜살같이 서울 성수대교를 지나고 있다.한겨레 정용일

‘5160번 기사.’ 지난 11월10일부터 2박3일간 나를 대표하는 인식표였다. 누구를 만나도 이름을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손님에게는 ‘대리기사입니다’, 대리운전을 알선해주는 콜센터에는 ‘5160번 대리기사입니다’라는 말만 하면 됐다. 동료 대리기사를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프로그램을 쓰느냐’가 인사를 대신했다. 대리기사들은 ‘로지’ ‘아이콘’ ‘콜마너’ ‘콜마트’ ‘365’ 등 대리기사 전용 휴대전화 소프트웨어를 쓴다. 소프트웨어당 월 1만5천원의 사용료를 내는데, 지역마다 ‘콜’이 잘 뜨는 소프트웨어가 달라 2~3가지를 함께 쓰는 대리기사도 많다. 휴대전화에 소프트웨어를 내려받은 뒤 이를 통해 전달되는 대리운전 ‘콜’을 잡는 것이다. 하나의 소프트웨어에서도 어느 대리운전 업체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다시 그룹이 나뉘었다. 나는 대리기사들 사이에서 ‘로지 프로그램을 쓰는 C그룹 기사님’으로 통했다.

 

한 업체 소속 대리기사만 4천여 명

인식표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주민등록등본, 사진 1장,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됐다. 그리고 몇 시간의 교육을 받고 나면 바로 대리기사가 됐다. 11월10일 찾아간 서울 논현동의 대리운전 업체는 3시간 동안 5명에게 교육을 했다. 40대 2명과 30대 3명이었다. 이들은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 이곳에 오거나 본업 외에 아르바이트로 대리운전을 택했다. 양아무개(31)씨는 “혼자 주식을 하다 사채까지 쓰고 신용불량 위기 직전 상황이다”라며 “취업은 어렵고 조금이라도 벌려고 대리운전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40대 남성은 “대리기사를 해도 실업급여를 받는 데는 별 문제가 없죠?”라고 물었다. 회사에서 내몰리거나 스스로 그만둔 지 채 6개월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일이 없거나 있어도 가장 쉽게 돈을 벌 기회가 되는 것이 대리운전인 셈이다. 강사도 “많은 때는 30~40명씩 교육했지만 요즘은 줄었다”며 “어제, 그제는 10명씩 가르쳤다”고 말했다. 또 “겨울에 대리운전을 하려고 찾아오는 이가 많다”고 덧붙였다. 이 업체에 소속된 대리기사만 4천여 명에 달했다.

교육 내용은 ‘술 취한 고객을 이기려 들지 말라’ 등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조언을 비롯해 보험 보장 내용, 대리운전 소프트웨어 조작법 등이었다. 또 돈이 오고 가는 흐름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회사는 대리운전을 할 때마다 대리운전비 가운데 수수료 20%씩을 떼고, 매일 보험료 2천원과 소프트웨어 사용료 500원을 가져간다. 돈은 미리 입금된 계좌에서 빠져나가는데, 계좌에 잔액이 없으면 콜을 잡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서울~인천 간 3만원짜리 콜이 오면 계좌에 수수료로 뗄 6천원 이상이 들어 있어야 콜을 잡을 수 있다. 계좌에는 최소 3만원부터 입금이 가능하다.

교육을 마치고 보험 가입이 끝나면 바로 다음날 새벽 0시부터 대리운전을 할 수 있다. 그때부터 보험 효력이 발효되기 때문이다. 현장은‘0.001초’의 싸움장이다. 2~3인치 휴대전화 화면에 뜬 콜을 누가 빨리 잡는지가 돈과 직결된다. 화면에는 가격, 출발지, 목적지 등이 나온다. 이런 내용이 한 화면에 다 담기기 어려워 최종 목적지가 일부만 뜨는 경우도 있다. 막상 콜을 잡았는데 목적지를 확인해보니 너무 외진 곳이어서 돌아올 일이 막막하거나 운행시간이 지나치게 길면 낭패다. 이때 콜을 취소하면 수수료가 발생한다. 10초 안에 취소하면 500원이 벌금으로 차감되고, 10초 이후에는 강제 배차가 된다. 특히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콜을 잡기 위해서는 콜 선택 여부를 결정하는 순발력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초보자에게는 멀리 가고 돈도 적게 받으면서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기 힘든 이른바 ‘똥콜’만이 돌아왔다. 한창 바쁜 시간은 밤 12시부터 새벽 2시 사이. 이때 좋은 콜을 잡아야 수익이 늘어난다.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경쟁자들

휴대전화가 다양해진 만큼 콜을 잡는 방법도 다양했다. 가장 빨리 잡는 것은 이른바 ‘지지는’ 방식이었다. 삼성전자 옴니아폰의 경우 콜이 뜨는 난에 커서를 움직여놓고 옆의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콜이 뜨자마자 바로 잡을 수 있다. 이때 ‘따따따’ 소리가 나 ‘지진다’는 표현을 쓴다. 아이폰이나 갤럭시S 등 최신 스마트폰은 화면에 손을 대어 잡는 방식이고, 피처폰은 휴대전화 번호판에서 해당 번호를 누르는 방식이어서 버튼을 누른 채 계속 ‘지지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느렸다.

첫 대리운전은 11월11일 새벽 12시30분에 시작됐다. 그 시각 서울 여의도에서는 수시로 콜이 들어왔다. 이때는 초보라도 골라서 잡을 수 있었다. ‘3만5천원에 인천 영종도행’을 비롯해 ‘1만원에 목동행’ 등 자주 콜이 떴다. 생소한 지역을 피해 평소 잘 아는 곳인 미아리행을 택했다.

전화 통화 뒤 5분 만에 만난 여성의 차량에 올라탔다. 요란한 ‘갱스터 랩’이 흘러나왔다. 운전 내내 들어야만 했다.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총성에 놀라면서. 내비게이션이 꺼져 있어 켜겠다고 하니 직접 안내하겠다고 했다. 차를 출발시킨 뒤 지시하는 대로 원효대교~강변북로~내부순환로~월곡IC를 거쳐 미아리 주택가에 도착했다. 뒤에서 “여기서 세워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야 뻣뻣해진 목이 풀렸다. 남의 차를 운전하는 것이, 그리고 사고를 내면 내가 보상해야 하고 교통위반 등 범칙금도 물어야 한다는 사실이 30분 동안의 운전을 긴장시켰다. 내려서 1만원짜리 한 장과 1천원짜리 다섯 장을 받았다. 절로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어 유흥주점이 많은 미아삼거리역으로 이동했다. 대리기사의 눈에는 경쟁자들이 쉽게 보였다. 이 시각 길거리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은 십중팔구 대리기사였다. 이들은 길거리에 앉아 있거나 건물 입구, 지하도 등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또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혹은 PC방에서 게임을 하며 휴대전화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여성도 눈에 띄었다. 미아삼거리역 출구에서 새벽 1시30분께 만난 조아무개(56)씨는 “여기에만도 200명의 대리기사가 있을 것”이라며 “지난해까지만 해도 건너편 은행의 ATM 코너가 24시간 운영됐는데, 대리기사들이 거기에서 쉬고 담배를 피우니까 밤에는 문을 닫는다”고 말했다. 5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과거에는 새벽 2시까지만 하면 10만원을 채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워낙 대리기사도 많아지고 대리운전 가격도 많이 싸져 새벽 5시까지 해도 그만한 벌이가 쉽지 않다”고 했다. 마지막엔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이거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이라는 충고가 따라붙었다.

조씨 말대로 눈을 비벼가며 번 돈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첫날은 오히려 공쳤다. 1만5천원을 번 뒤로는 다른 콜을 잡을 수 없었다. 대신 추위를 이기느라 마신 커피(1500원)와 목말라 마신 물(700원)에, 좀더 콜이 많이 뜰 법한 강남교보타워 쪽으로 가면서 탄 셔틀버스 요금(3천원)까지 치르느라 남는 게 없었다.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수수료 20%(3천원)와 보험료·소프트웨어 사용료(2500원)를 빼면 수중에는 4300원이 남았다. 집에 돌아갈 차비를 생각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전날 교육을 한 강사는 “한 달 내내 일해서 상위 10%가 300만원 이상을 벌고, 50%가량이 200만~300만원을 번다”며 “나머지는 100만원 조금 넘게 번다”고 말했다. 그것도 수수료나 매일 떼는 돈을 비롯해 이동할 때 드는 택시비, 셔틀버스비를 제하지 않은 수치다. 2008년 대구대리운전노조에서 180명의 대리기사를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평균 수입은 월 121만8182원이었다. 이들 대부분(68%)은 대리기사를 전업으로 하고 있었다.

 

 

도심으로 날라주는 ‘셔틀버스’

» 대리운전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11월11일 새벽 12시30분께 첫 대리운전으로 1만5천원을 받은 뒤 새벽 4시까지 한 번도 콜을 잡지 못했다. 한겨레 정용일

그런데도 대리기사는 어딜 가나 찾을 수 있었다. 이튿날 밤 3만원을 받고 서울 마포 홀리데이인호텔에서 부천 송내역을 거쳐 인천 당하동에 갔다. 아파트만 달랑 있는 이곳에도 그들이 있었다. 아파트에서 1~2km 떨어진 불 꺼진 상가 쪽으로 걸어가니 운행 시간이 끝난 버스의 승강장에서도, 상가 건물 입구에서도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들이지만 서로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정보를 구하는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해줬다. 김아무개씨는 “이쪽에서 시골로 가는 콜 가운데 2만원 이상이면 잡아라”며 “돌아오는 법을 몰라 안 잡는 경우가 있는데, 픽업 서비스를 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나오면 된다”고 말했다. ‘픽업’이라고 적힌 명함도 함께 줬다.

대리기사들은 콜이 잘 잡히지 않는 곳에서는 도심 쪽으로 이동한다. 택시비보다도 싼 대리운전비를 받고 다시 택시를 탈 수는 없는 신세다. 대신 곳곳에서 이들을 도심까지 태워다주는 ‘셔틀버스’가 있다. 11월11일에는 3천원에 미아삼거리역에서 교보문고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했고, 11월12일에는 2천원에 인천 당하동에서 계양구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탔다. 형태도 다양했다. 서울 도심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는 봉고차 형태의 12인승 승합차와 25인승 버스 등이 주를 이뤘다. 또 인천 시내에서는 7인승 승합차나 마티즈 등 소형 승형차도 그 역할을 했다.

대신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미아삼거리역에서 탄 셔틀버스는 교통신호와는 무관하게 쌩쌩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심에 도착해 콜을 더 잡으려는 대리기사들과 빨리 태워다주고 또 손님을 태우려는 셔틀버스 운전사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도심 속 신호 위반이나 과속은 대형 교통사고로 이어진다. 특히 셔틀버스에는 대리기사들이 빽빽히 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한번 사고가 나면 많은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 2007년 울산에서 대리기사들을 태운 25인승 미니버스가 신호등을 정면으로 들이박아 16명이 다친 사고도 있었다.

게다가 셔틀버스가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대구에서 대리운전을 한 김진호(48)씨는 “지난해 11월 경북 경산시 하양읍으로 나갔다가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나오는데 교통사고가 났다”며 “48살 이상만 운전할 수 있도록 돼 있는 보험인데, 41살 남성이 운전한 탓에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무보험 차량에 사고를 당하면 보상을 해주는 정부의 자동차손해배상보장사업으로 일부 보상을 받았지만, 치료비에도 못 미쳤다”며 “무릎 인대가 다치는 등 장애를 입었지만 향후 생계 보상비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고객에게 밉보이면 걸리는 ‘록’

» 이정훈 기자의 2박3일 대리운전 운행 및 수입 일지

대리운전이 운전만 잘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서비스업인데다 취객을 상대하는 특성으로 모진 사람들에게 치일 수밖에 없다. 불편한 상황을 많이 겪지만 화를 낼 수도 없다. 11월11일 1만원에 서울 마포역에서 목동까지 대리운전을 요청한 손님의 경우 출발지인 건물의 지하 3층에 도착해 전화를 거니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며~”라는 안내 멘트만 나왔다. 지하층을 돌아보고 수차례 전화를 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음 콜을 받기 위해서 운행을 마친 것으로 설정하고 종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콜을 잡으면 운행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는 한 10분 동안 다른 콜이 뜨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벌지도 못한 대리운전비 1만원에 해당하는 수수료 2천원만 허비한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고객에게 제대로 항의할 수 없다. 고객이 콜센터에 항의하면 ‘록’(lock)이 걸리기 때문이다. 록이 걸린 대리기사는 콜센터에서 휴대전화로 전송되는 콜 정보를 받을 수 없다. 인천 당하동에서 만난 최아무개씨는 “지난해 국내 최대의 대리운전업체에서 일을 했는데 ‘스틱운전을 잘 못한다’는 고객 항의에 록이 걸려 아직도 안 풀린 상태”라며 “할 수 없이 다른 업체의 대리기사로 뛰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만취한 고객을 만나면 홍역을 치러야 한다. 마포대교에서 구토를 한 취객은 출발 때부터 목적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구로디지털단지역이 목적지라면서 내비게이션으로는 6호선 상수역을 찍었다. 목적지를 재차 물으니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가면 된다”면서도 “내비게이션대로 가면 된다”고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애를 먹였다. 애초 콜대로 구로디지털단지역에 도착했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한 대리기사에게 들은 대로 창문을 모두 연 뒤 흔들어 깨워서야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인천 당하동에서 만난 한 대리기사는 “서울 강남역에서 3만5천원에 여기까지 왔는데 잠이 든 뒤 일어나지 않는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결국 돈을 포기했다.

먹고 살 게 없어 잡는 핸들

때론 폭행까지 당한다. 지난 11월1일 대전 유성구에서 대리기사 박아무개(46)씨는 대리운전비를 주지 않는 승객에게 항의를 했다가 저수지에 끌려가 폭행을 당했다. 또 지난 7월에는 충남 논산시에서 손님이 낫으로 대리운전 기사를 위협해 대리운전비 5만원을 내지 않기도 했다.

대리기사 대부분이 형편이 넉넉지 않다. 지난 5월26일 숨진 이동국(52)씨도 ‘기러기 아빠’였다. 중국에서 가구공장을 운영하다 2005년 부도가 난 그는 현지에 가족을 남긴 채 홀로 귀국해 대리운전으로 돈을 벌어 가족에게 송금하며 지냈다. 그렇지만 죽음은 일순간이었다. 손님이 “왜 운전을 그렇게 하냐”는 타박과 함께 뒤통수를 여러 번 친 게 원인이었다. 차를 세우고 시비가 붙었는데, 손님이 갑자기 차를 타고 후진을 해 이씨를 치었다. 그것도 모자라 쓰러진 이씨를 다시 한번 치고 달아났다. 전국 15만 대리기사들이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밤마다 외롭게 핸들을 잡고 있다.

11월11일 새벽 3시 미아삼거리역에서 강남 교보타워로 향하는 셔틀버스에서 들은 한 대리기사의 통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집에 가스랑 쌀이 다 떨어졌어. 내가 대리 안 뛰면 먹고 살 게 없어.”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

특수고용직 신분으로 산재보험 적용 안 되는 대리기사…
관리·감독 기관 명시한 법안 통과되면 처우 개선 기대
“차주가 내려 목을 세 번 흔들고는 머리채를 잡고 차도와 인도로 오가며 개 끌고 다니듯 끌고 다니며 때리고 찼습니다. 6~7분 정도 지났을 무렵 머리카락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며 간신히 신고를 했습니다. 맞고 차이고 질질 끌려다니기를 반복하니 옆의 일행이 ‘그만해라. 이제 아주머니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맞아 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중략) 머리채를 놓으니 경비실로 도망을 갔습니다. 112 신고를 했습니다. 끌려다니다 맞고 끌려다니다 맞고 그 시간은 하루보다 더 긴 시간이었습니다.”

» 취객을 상대로 일하는 대리운전기사는 위험에 처하기 쉽지만,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돼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번화가에서 대리기사들이 콜을 기다리고 있다.한겨레21 정용일

지난 4월 대구에서 손님에게 폭행을 당한 여성 대리기사 강아무개씨가 경찰에 제출한 자술서의 일부다. 이처럼 대리기사는 항상 사고에 노출돼 있다. 하루 평균 70만 명(2008년 기준)이 대리운전을 이용하면서 자주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항상 사고에 노출되는 불안한 신분

대리기사의 전국 단위 노조를 준비 중인 전국대리기사연대회의 최영환 의장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대리기사와 관련된 사고가 발생되고 있다”며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밑바닥 경기가 최악이다 보니 이쪽(대리기사)으로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2008년 기준으로 대리운전 시장은 연간 3조원대에 이르며, 대리기사 수도 12만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현재는 대리운전 업체가 관할 세무서에 신고만 하면 영업을 시작할 수 있다. 또 신고조차 하지 않고 운영하는 업체도 있다. 최영환 의장은 “보험 가입자로 분류되는 12만 명에 더해, 무보험으로 일하는 대리기사와 업소·식당에 속해 일하는 대리기사를 포함하면 15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고 위험 속에서 일하고 있지만 정작 사고가 발생하면 산재보험을 보장받지 못한다. 현재 대리기사는 화물·덤프트럭 운전기사, 간병인, 퀵서비스 노동자, 방송작가 등과 함께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돼 산재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특수고용직은 외형적으로는 고용된 노동자처럼 일하지만 신분은 개별 사업자라서 산재보험 적용에서 제외된다.

한편 국회에는 2008년 당시 국회의원인 송영길 인천시장이 발의한 ‘대리운전업 및 운전자관리에 관한 법률안’과 2009년 한나라당 손숙미 의원과 정의화 의원이 각각 발의한 ‘대리운전업법안’이 계류 중이다. 이 법률안들은 현재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대리운전업을 경찰청이나 광역시도에 신고하도록 해 관리·감독할 장치를 갖추자는 취지다. 이에 대해 최영환 의장은 “법이 통과되더라도 대리기사들의 산재보험이 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관리·감독 기관이 생겨 산재보험 등 처우 개선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게 되니 한 단계 나아가는 것은 맞다”며 “조속히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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