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올레길’이었습니다. 바쁘게 뛰던 여행지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늦췄고, 그제야 제주 곳곳에 숨어 있던 아름다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올레길은 단순히 제주를 여행하는 방법을 ‘걷는 것’으로 바꿔 놓은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닥이 환히 비치는 해안을 따라가는 산책로에서, 처마 낮은 마을의 오솔길에서, 중산간의 숲길에서 사람들이 비로소 제주의 진면목을 보는 법을 깨닫게 해 준 것이지요. 그러므로 ‘걷기’란 제주를 보는 시선을 바꾸게 한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 여행의 진화는 이제 올레길에서 ‘오름’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제주의 들판에 솟아 있는 크고 작은 오름들은 그 자체로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자, 제주다움을 느낄 수 있는 목적지이며, 제주를 바라보는 전망대이기도 합니다. 녹색 천과 갈색 천을 기워 만든 듯한 들판 아래로는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그 들판이 끝나는 곳에선 바다가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제주의 올레길을 처음 두 발로 걸었을 때 느린 속도가 보여 준 제주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면, 제주 오름 능선에 올랐을 때의 감격 또한 그 못지않을 것입니다. 다 비슷한 듯 보여도 오름은 저마다 다른 풍경과 느낌을 제 안에 새기고 있습니다. 오름을 찾는 관광객들도 근래 들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크고 작은 오름들은 다 저마다의 독특한 풍광과 느낌을 선사합니다. 제주의 오름은 모두 368개. 한 해 두어 번 여행으로 제주를 찾는다 해도 평생을 다녀도 다 못 오를 숫자입니다. 아직도 제주가 남겨 놓은 것들이 차고 넘칩니다. # 가을, 제주를 아름답게 여행하는 법… 오름 제주를 여행하는 최고의 계절은 언제일까. 대개 유채꽃 환하게 피는 봄을 첫손으로 꼽겠지만, 제주를 속속들이 안다는 이들은 대부분 늦가을을 든다. 제주에 올레길을 낸 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의 설명이 이렇다. 제주의 봄은 온통 바람의 세상이다. 기온이야 따뜻하다지만 어찌나 바람이 심한지 한기가 파고든다. 겨울은 황량하고, 여름은 더위와 끈적한 습도로 견디기 힘들다. 반면 제주의 가을은 한 해 중 가장 바람이 적다. 습도는 낮고 비도 거의 오지 않는다. 이맘때는 관광객도 줄어 어딜 가나 한적하다. 제주를 여행하는 최적의 계절이 가을이라면, 가을 제주 여행의 최적의 목적지는 바로 오름이다. 제주의 오름은 올라보지 않고 그 매력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들판 위에 봉긋하게 솟은, 그다지 높지 않은 능선에 오른다고 뭐 별다를 게 있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그야말로 ‘모르는 말씀’이다.
오름에 올라서 보는 제주는, 아래에서 보던 제주와는 전혀 다르다. 오름에서 만나는 건 이런 것들이다. 녹색과 갈색의 천을 기워 만든 융단 같은 들판, 오름 정상에 당도했을 때 머리 위로 펼쳐지는 끝 간 데 없이 맑은 하늘, 멀리 굽어보이는 바다의 화려한 색감…. 게다가 지금은 11월. 오름의 빛이 초록에서 갈색으로 변모해 가는 시기다. 이때는 오름이 그려 내는 부드러운 곡선이 더욱 또렷해지고, 능선마다 자라나는 솜털 보송한 억새들이 볕을 받아 환하게 반짝이며 물결친다. 한 해 중에서 가장 간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시기다. 크고 높은 오름 몇 곳을 빼놓고는 제주의 오름은 오르는 데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불과 10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는 표고 60m 안쪽의 자그마한 오름도 도처에 있다. 비슷비슷한 자리에 솟아 있는 오름이라도 제각기 느낌은 다르다. 허리 아래쪽에 우람한 삼나무 숲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너른 초지의 능선으로만 이뤄진 것도 있다. 분화구의 흔적이 깎아지른 벼랑처럼 파인 것이 있는가 하면,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막 떠낸 듯한 부드러운 곡면을 그리고 있는 것도 있다. 오름에 올라서 보는 경관도 저마다 다르다. 해안가에 바짝 붙어 바닥이 환히 비치는 제주의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드넓은 목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도 있다. 이런 오름들이 제주에는 무려 368개가 있다. 제주의 관광지야 몇 번 방문으로 다 돌아볼 수 있고, 제주의 올레길도 자주 드나들다 보면 다 걸을 수 있겠지만, 오름은 다 가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매 주말마다 하나씩 오른다 쳐도 7년이 더 걸릴 정도이니…. 그러니 오름이야말로 제주 여행의 새로운 지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 단칼에 ‘제주의 오름 중에서 가장 빼어난 오름’을 묻는다면 여간해서는 답하기 어렵다.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질문을 좀 더 구체화해야 한다. 예컨대 ‘능선의 유려함이 가장 빼어난 오름’이라든지 ‘오르는 길의 정취가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망이 빼어난 오름’을 묻는다면 단연 동거믄오름을 맨 앞에 세울 수 있다. 동거믄오름은 오름들이 줄지어 모여 있는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있다. 깔때기 모양의 원형분화구 두 개와 삼태기 모양의 발굽형화구가 함께 있는 이른바 ‘복합형화산체’다. 복잡하게 설명하지만 그냥 ‘비대칭’의 오름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동거믄오름은 다른 오름들과 달리 능선의 한쪽이 원뿔처럼 솟아 있다. 그러니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사진 한 장 들고 찾아 나섰다가는 필시 못 찾고 헤맬 것이 분명하다. ‘동거믄’이란 이름은 오름 한복판에 깊은 분화구가 있어 거미집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고, 신(神)을 뜻하는 ‘검’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고도 전한다. 용눈이오름처럼 매력적인 선을 갖춘 것도 아니고, 표고 340m에 불과하니 다랑쉬오름처럼 우뚝 선 높이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지만, 동거믄오름은 위엄 있고 신비스러운 느낌으로 가득하다. 동거믄오름의 압권은 능선에 섰을 때 동쪽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드넓은 하도목장이 발아래 있고, 그 뒤로 자그마한 알오름들이 수없이 솟아 있다. 군데군데 담벽처럼 세워진 삼나무 숲 너머로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손에 잡힐 듯하다. 전방 270도 각도의 시야로 바다가 펼쳐지는데, 그 광활한 풍경의 스케일에 가슴이 다 저릿해질 정도다. # 바다의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 지미오름 동거믄오름이 초지와 알오름을 굽어보는 최고의 전망대라면 바다를 내려다보는 오름 중에서 최고는 단연 지미오름을 들 수 있다. 제주의 오름은 대부분 내륙 쪽에 있지만, 해안에 바짝 붙어 솟아오른 것들도 드물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흔히 서쪽의 송악산이라 불리는 ‘솔오름’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빼어난 경치를 품고 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 있으니 바로 구좌읍 종달리의 지미오름이다. 지미오름은 소나무와 활엽수가 섞여 자라고 있다. 제법 가파른 비탈을 따라 쉬엄쉬엄 30분쯤 오르면 오름 정상에 닿는다. 등 뒤로 해안의 절경을 두고 오르는 길이라 풍경이 자꾸 발목을 잡는 바람에 수시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우뚝 솟은 지미오름의 정상에 서면 제주의 대표적 명소인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아래로는 수시로 우도행 여객선이 오가는 두문포 마을이다. 마을 뒤쪽으로는 돌담을 두르고 있는 초록의 밭이 마치 잘 기운 조각보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 내륙의 선명한 초록의 밭, 그리고 바다의 환한 코발트빛 물색이 어우러지니, 그 풍경을 굽어보는 마음도 절로 경쾌하고 맑아진다.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바라보는 데, 이만한 자리가 또 있을까. ‘풍경에 취한다’는 말이 이처럼 딱 맞는 곳이 또 있을까. 오름 능선에서 오래도록 바다를 굽어보며 우도와 성산포를 오가는 여객선이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필시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모를 것이 틀림없다. # 오름 왕국의 특급 전망대… 손지오름 오름은 능선이 보여 주는 유려함도 빼어난 볼거리다.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오름 능선의 아름다움은 요절한 사진작가 김영갑이 남긴 사진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의 사진에 담긴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이 저리도 강렬할 수 없다. 그건 바로 색은 다 지워진 채 어둠과 밝음, 그리고 형체만 남은 선들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을 직접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송당리의 손지오름이다. 손지오름은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조용한 오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명세를 누리는 다랑쉬오름이며 용눈이오름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손지오름은 억새로 가득 덮인 스스로의 풍광도 풍광이지만, 무엇보다 다른 오름의 형태를 온전하게 바라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거기에 올라 다른 오름을 바라보는 맛이 최고니 한마디로 ‘오름 전망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손지오름은 워낙 인적이 드물어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깨높이로 자란 억새와 가시덤불을 헤치고 희미한 길의 자취를 찾아 올라야 한다. 그래 봐야 20분이면 오름의 능선에 닿게 된다. 여기서 바라보는 주변의 모습은 가히 ‘오름의 왕국’이라 할 수 있을 만하다.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용눈이오름의 곡선미와 우뚝 솟은 다랑쉬오름, 그리고 그 앞의 아끈다랑쉬오름, 동거믄오름과 높은오름 사이로 구름을 이마에 이고 있는 한라산 정상이 올려다보인다. 이름난 오름을 몇 발짝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노라면 오름의 풍경이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다가온다. 부지런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오전 일찍 여명이 밝아 올 무렵이나 오후 늦게 사위가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어 갈 무렵에 찾으면 여기에 색채까지 더해져 더 감격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다랑쉬오름과 용눈이오름이야 일찌감치 잘 알려진 곳. 다랑쉬오름은 웅장하게 솟아 있는 자태에다, 바로 앞에 노른자를 떠낸 계란 프라이 형상의 아끈(작은)다랑쉬의 분화구 능선 억새길의 매력이 더해진다. 4·3사건 때 학살된 마을 사람 11명의 유해가 발견됐던 다랑쉬굴이 지척에 있다. 다랑쉬 위로 뜨는 보름달이 아름답다는데, 마침 찾아간 날이 그믐밤이어서 오름 위의 밤하늘에는 별만 가득 쏟아졌다. 용눈이오름은 사진작가 김영갑이 제주에서 가장 선이 아름다운 오름으로 꼽은 곳이다. 가장 아름답다는 능선의 선을 따라 바람을 맞으며 걷는 맛이 일품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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