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걸다_03

醉月 2011. 11. 17. 12:47

포도알에 담은 특별한 소망

임춘의 포도초충도

▲ 임춘, ‘포도초충도’, 중국 남송, 비단에 색, 26.8×27.8㎝, 고궁박물원
매미가 울고 연꽃 피는 8월이 되면 포도 알갱이에도 단물이 밴다. 이육사는 ‘청포도’에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했다. 포도가 8월이 제철인 것을 감안하면 이육사가 언급한 칠월은 아마 음력이었을 것이다. 음력 7월이면 딱 지금이다. 포도재배지에서는 8월이 끝날 때쯤 포도축제를 열어 사람들을 유혹한다. 애썼지만 그다지 수확이 없는 여름이 지나간다. 여름이 다 지나가도록 부실한 생애의 줄기에는 포도씨만한 전설도 주저리주저리 열리지 않았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히지도 않았다. 빈약할 뿐이다. 이런 날은 결실이 주렁주렁 달린 포도밭에 가고 싶다. 미망에 사로잡힌 채 여름을 견디느라 지친 나그네가 고달픈 몸을 이끌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둔 청포도집 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설령 청포(靑袍)를 입지 않고 남루한 가방을 멘 보잘것없는 손님이라 할지라도 반갑게 두 손을 잡으며 맞이해 주었으면 좋겠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을 걷느라 퀭한 눈빛을 한 나그네를 위해 포도를 따 먹으며 두 손을 함빡 적셔 주었으면.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시의 힘은 위대하다. 이육사의 ‘청포도’를 알고 난 후 포도를 생각할 때면 묵포도보다 청포도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시에 담긴 ‘은쟁반’ ‘모시수건’ ‘푸른 바다’라는 시어(詩語)의 감동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아무리 탱글탱글한 포도를 들이밀어도 결코 청포도의 이미지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거봉이라 해도 어림없다.
   
   그러나 화가들은 청포도보다는 묵포도를 선호했다. 이육사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청포도는 그 색깔 때문인지 ‘익어도 아직 청포도에 지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이효석의 ‘청포도의 사상’ 중에서) 기왕이면 속이 꽉 찬, 제대로 여문 포도를 원했던 옛 사람들은 달착지근한 과즙이 응축된 느낌의 진한 묵포도 그리기를 좋아했다.
   
   상황이 이럴진대 송나라 때의 화원(畵院)이었던 임춘(林椿)의 ‘포도초충도’는 청포도를 그린 귀한 작품이다. 그림 속의 포도가 청포도일까? 아직 익지 않은 검은 포도일까? 그림 속의 포도가 청포도인지 검은 포도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굵은 알이나 작은 알이 모두 푸른색인 것을 보면 청포도일 것 같다. 검은 포도가 알이 굵어지면서 색이 검게 변한 것을 생각하면 모든 알갱이가 한결같이 푸른색인 것이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조금씩 변색되기 시작한 잎사귀의 색 또한 이 포도가 수확기에 이르렀음을 시사해준다.
   
   작가는 청포도의 연한 색을 강조하기 위해 잎사귀를 짙게 칠했다. 여러 송이를 한꺼번에 그려 ‘그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게 하는 대신 한두 송이만을 크게 그렸다. 그리고 포도 송이에 코가 닿을 만큼 고개를 들이밀어 세심하게 관찰했다. 여러 종류의 곤충도 불러들여 이곳이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산지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다양한 곤충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서도 느린 걸음을 옮기고 짝짓기를 할 수 있는 곳. 이곳은 모든 생명들이 할당된 시간만큼의 생로병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는 곳이다. 생몰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 임춘이라는 화가는 중국에서 순희년간(淳熙年間, 1174~1189)에 활동한 작가로 화조(花鳥), 영모(翎毛), 과과(瓜果) 등을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포도송이 곁에 잠자리와 사마귀, 메뚜기와 풍뎅이를 함께 그린 꽉 짜인 구도의 ‘포도초충도’는 베일에 가려진 화가의 이름이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임춘의 그림 속에서 청포도로 익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포도나무가 뽑힌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메뚜기와 사마귀의 짝짓기가 거세된 곳에서 출하된 포도만이 마트의 과일 코너에 무표정하게 진열되어 있다.
   
   
   건강한 아이들이 포도송이처럼 번성하기를
   
   조선시대 사람들은 포도 그림을 좋아했다. 포도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들 중에 대가들도 제법 많다. 초충도를 많이 그린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을 비롯하여, 황집중(黃執中·1533~?), 이계호(李繼祜·1574~1646 이후), 홍수주(洪受疇·1642~1704)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시대를 달리하며 좋은 포도 그림을 남겼다.
   
   사람들이 포도 그림을 좋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보기만 해도 풍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는 자식을 낳아도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홍역과 질병으로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어른들은 가지가 찢어지도록 다글다글 붙은 포도송이를 보며 생각했을 것이다. 금쪽 같은 자식들이 한 명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포도송이처럼 영글어가기를. 그 생각은 소망이 되고 기도가 되어 포도만 봐도 자손 번창이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포도는 많은 자식을 뜻하는 ‘다자(多子)’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에 좋은 의미를 하나하나씩 부여하다보니 포도나무의 생태를 예사롭지 않게 보게 되었다. 포도덩굴을 한자로 만대(蔓帶)라고 하는데 이는 만대(萬代)와 음이 같다. 자손이 끊이지 않고 계속 번성한다는 자손만대(子孫萬代)와 의미가 동일하다. 그러니 포도는 덩굴과 함께 그려야 제작의도가 확실히 반영된다.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렇게 자손의 무병장수에 대한 생래적 걱정과 기원이 담겨 있다.
   
   
   한여름 뙤약볕을 견디고 나면…
   
   이렇게 자식을 귀하게 여기고 자식 많이 낳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던 민족이 출산율 세계 꼴찌의 나라가 되었다. 원인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직장을 가진 여성이 일할 동안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데가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아이를 기르면서 감당해야 할 교육비도 만만치 않다. 월급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천문학적 숫자의 학원비도 걸림돌이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취직은 더 힘들다. 어렵사리 취직을 해도 우리나라처럼 경쟁이 치열한 나라에서 직장인으로 버텨내기는 더더욱 힘들다. 어찌어찌하여 마흔이 넘으면 이번에는 실직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아이들한테 한창 돈이 필요할 때 직장에서 잘린 가장의 비애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길러 결혼시키고 나면 이번에는 빈손뿐인 노후가 기다리고 있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길에 왜 이리 험난한 일만 기다리고 있을까. 마치 인생 자체가 장애물 경기를 하는 것 같다. 나는 기왕 태어났으니까 이런 고생을 감내해야겠지만 내 자식한테까지 이런 인생을 되풀이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아이를 낳지 않은 친구의 얘기였다.
   
   그래도 나는 아이 낳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누군가에게 완벽한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는 자식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힘든 존재를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고 길러봐야 비로소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하지 못하는 자식을 기르다 보면 나 아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생긴다. 아이를 통해 모나고 날카롭던 반쪽짜리 인격이 둥글둥글해지고 너그러워진다. 아이가 살아나가야 할 시간이 힘들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포도가 맛있게 익으려면 한여름의 뙤약볕을 견뎌야 하지 않은가. 포도가 익어가면서 견디는 뙤약볕은 고통이 아니라 깊어지는 과정이다. 큰 지혜를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미션이다. 힘든 미션을 성공시켰을 때 아이가 느끼게 될 성취감, 이것이 인생의 지혜가 될 것이다. 그 지혜를 얻기까지는 평생이 걸린다. 그러나 어렵기 때문에 더 맛있는 포도다. 더 귀한 자식이다. 이렇게 우리 동네의 7월은 포도처럼 주렁주렁 열린 아이들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마음의 고향이 된 적 있는가

장승업 미산이곡

▲ 장승업 ‘미산이곡’ 종이에 연한 색, 126.5×63㎝, 간송미술관
대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폴 발레리의 시를 읽다가 ‘바다는 나의 어머니(ma mer ma mere)’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어머니의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넉넉하다는 뜻이다. 이 구절을,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 속에 수많은 의미를 함축시켜 넣은 기막힌 시구라고 사람들은 평가했다. 나는 선뜻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해 여름 전남 완도의 명사십리에 다녀온 기억 때문이었다.
   
   대학 동아리에서 수련회를 갔는데 장마철이었다. 2박3일 동안 바닷물에 발 한번 담가 보지 못하고 잔뜩 흐린 하늘만 보고 왔다. 발레리가 생략한 농밀한 표현 속에 내가 본 바다 풍경을 채워 넣자면, 바다는 희뿌옇고 아득하고 때론 거칠기까지 해서 도저히 마음을 내려놓고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기대기는 고사하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변덕에 휘말려 내가 앓아 누울 것 같았다. 그런 기억을 가진 내게 ‘바다는 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절창(絶唱)이 아니라 펜 끝의 농세(弄世)였다. 모름지기 어머니라는 우주적 존재를 담으려면 바다 가지고는 부족했다. 적어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누구나가 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투철한 그리움에 빠져들 수 있어야 했다. 그 단어가 내게는 ‘고향’이었다.
   
   고향은 그 단어만 생각해도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엄마를 생각하면 아무리 차가운 사람의 가슴속에도 맹목적 그리움이 차오르듯 고향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고향은 아기가 태어나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손을 내민 곳이다.
   
   
   고향, 입에만 올려도 아련한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집 뒤에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집 앞에는 수령이 오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한여름이면 마을 어른들은 풀 언덕에 나귀를 풀어 놓은 채 고목의 그늘 아래 정자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대숲 울타리에 올라간 장닭은 새벽녘이 아니어도 목소리를 돋우었다. 그럴 때마다 닭벼슬은 햇볕을 받아 맨드라미처럼 붉게 타올랐다. 한낮이 되면 들밥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네 뒤로 개가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고, 뒤이어 소를 탄 아이가 나타났다. 차나무를 심어놓은 몇 이랑의 돌밭 아래로는 고기잡이배가 떠다니는 푸른 갈대밭이 시작되었다. 모든 풍경이 고즈넉함 그 자체였다. 내가 살았던 고향 이야기가 아니라 장승업이 그린 ‘미산이곡(眉山梨谷)’의 이야기다.
   
   ‘미산의 배 골’을 그린 이 산수화는 누군가의 산장을 그린 것이다. 호방한 필치의 장승업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농묵이 강조되어 있다. 축축하게 젖은 농묵을 배경으로 소 탄 목동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의 모습이 정겹다. 나의 고향을 그린 작품이 아닌데도 마치 내 고향인 듯 느껴지는 건, 그림 속 배경이 우리네 시골의 낯익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 속에는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처럼 ‘넓은 벌’과 ‘얼룩배기 황소’와 ‘발 벗은 아내’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지용이 이 작품을 보고 시를 쓴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장승업이나 정지용이 아니라도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향을 생각할 때 비슷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도 마음속에는 ‘미산이곡’ 같은 고향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산다. ‘꿀밤나무들의 푸른 살 냄새’(이기철, ‘산골에 오두막을 짓다’에서)를 맡을 수 있는 곳이라면 설령 그곳이 그림 속이라 해도 고향 같다. ‘살구꽃 핀 마을’만이 고향이 아니라 감나무와 밤나무가 심어진 마을도 어디나 고향 같다. 설령 그곳이 며느리밑씻개와 물봉선화만 자라는 폐허라 해도 고향은 고향이다.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모두 고향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객지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당산나무 같은 믿음으로 남아 있다. 가슴속에 당산나무가 자라는 사람은 타지에서 견디는 시간이 아무리 무거워도 거뜬하게 일어설 수 있다. 내 비록 지금은 힘들게 살지만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단지 고향이 있다는 그 기억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갈 수 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다
   
   나훈아의 ‘고향이 좋아’라는 노래 속에는 고향과 타향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명시되어 있다. 고향에 갈 수 없는 남자가 향수를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곁에 있던 친구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이 말을 들은 남자는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버럭 화를 내며 강하게 반박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은 타향은 싫고 고향이 더 좋다고. 마치 타향을 고향처럼 좋아하면 큰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어조는 강렬하다. 고향은 그 남자에게 감히 그 어떤 장소와도 비교되어서는 안 될 성스러운 곳이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첫사랑의 기억처럼 얼룩 한 점이라도 묻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기억은 기억일 뿐이다. 현실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서 신나게 뛰어놀던 고향 마을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집도 변하고 마을길도 변하고 그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들도 낯선 얼굴이다. 옛 친구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각자 뿔뿔이 흩어져 사는 동안 나이 들어 얼굴이 변한 것처럼 생각도 변했다. 누구는 여당을 지지하고 누구는 야당을 지지한다. 누구는 주님을 찾고 누구는 부처님을 찾는다. 믿을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며 돈을 교주로 모신 친구도 있다. 너무나 변해버린 친구들을 보며 어제까지는 문득 생판 모르던 남들이 오직 관심사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금세 한 가족처럼 친해지는 동호회 모임이 그리워진다. 이쯤에서 나훈아의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라는 구절은 ‘타향이라도 마음에 맞는 친구가 있는 곳이 좋아’로 바뀌게 된다. 결국 고향에 가서 만나는 옛친구들과의 재회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그래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보다 더 좋다. 내가 뿌리내리고 사는 곳은 어디나 고향이다.
   
   
   죽자 사자 고향으로 가는 이유
   
   내일모레가 추석이다. 사람들은 또 고향을 찾아 떠날 것이다. 도로는 귀향 차량들로 주차장이 될 것이고 휴게소는 귀성객들로 북새통을 이룰 것이다. 고향 가는 길은 이렇게 멀고도 험하다. 그걸 알면서도 길을 나선다.
   
   한때는 내 고향이 아닌 내 남편의 고향에 간다는 사실이 낯설던 시절도 있었다. 명절 때 내 고향도 제대로 찾아갈 수 없는 여자라는 서러움에 마구 화가 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 화낼 일이 아니다. 일 년 내내 나를 위해 머슴처럼 일하는 남편에게 모처럼 휴가를 주는 날이 명절이 아닌가. 그동안 고생했다고, 부초처럼 흔들리며 살아온 그에게 자신의 뿌리를 찾아 더욱 튼튼히 살아가라고 격려해주는 자리가 아닌가. 나이 들어 더 이상 찾아갈 고향이 없게 되면 부부는 서로가 서로의 고향이 된다. 더 나이 들어 육신의 옷을 벗고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날까지 부부는 서로에게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어머니 같은 고향이 된다. 그 고향을 찾아 나의 자식들과 손주들이 찾아올 것이다. 고향으로 가면서 나는, 우리는 어떤 고향으로 기억될 것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차마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인지 아니면 어서 빨리 잊어버렸으면 좋을 고향인지.
 

 

현장 법사와 누란의 미녀

작가 미상 현장삼장

▲ 작가 미상 ‘현장삼장상’ 일본 가마쿠라시대 전기, 비단에 색, 135.1×59.5㎝,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우루무치까지 역사 유적지를 다녀오는 코스였다. 맥적산 석굴을 비롯하여 병령사 석굴, 유림 석굴, 돈황 막고굴, 베제크릭의 천불동 등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되는 불교미술의 발자취를 확인해 보는 여정. 중간 중간에 만리장성의 끝자락인 가욕관에서 설산을 보았고, 사막에서 낙타를 탔으며, 서유기의 무대인 화염산을 구경했다. 사막의 지하 수로인 카레즈를 보면서 척박한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무서운 적응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때는 번성했지만 이제는 폐허로 남은 고창 고성과 아스타나 고분군을 둘러보면서 제행무상을 실감하기도 했다.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은 톈산산맥은 장쾌함과 신령스러움이 느껴졌다.
   
   여행을 다 마치고 돌아온 지금,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사막이다. 가욕관에서부터 시작된 사막은 밤새 기차를 타고 가서 다음 날 다시 하루 종일 버스로 달려도 끝나지 않았다. 가도 가도 회색뿐인 돌투성이 사막 위에는 군데군데 낙타풀이 자라고 있을 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사막은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불임의 땅이었다. 그 사막 위에서 나는 앞서 간 두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현장 법사와 누란의 미녀였다.
   
   
   현장 법사, 18년 동안 1만6000㎞를 돌아다니다
   
   한 행각승(行脚僧)이 걸어가고 있다. 등에는 덮개가 있는 대나무 책 상자를 메고, 양손에는 불자(拂子)와 두루마리 경전을 들고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목에는 해골을 꿴 목걸이를 두르고 귀에는 금귀걸이를 차고 있다. 해골은 주인공이 삶의 무상함을 잊지 않는 수행승임을, 금귀걸이는 보살이나 나한처럼 고귀한 존재임을 상징하는 표식이다. 일본 가마쿠라(鎌倉時代·1192~1333)시대 작품인 이 초상화의 제목은 ‘현장삼장(玄奘三藏)’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고승 현장(玄奘·602~664) 법사를 그린 작품이다. 현장 법사는 삼장(三藏) 법사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삼장(三藏)에 능했기 때문이다. 초상화의 형식은 현장 법사의 사리탑이 세워진 중국 시안의 흥교사 비석의 탑본을 모본으로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당나라와 백제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건설하려던 나라시대(柰良時代·710~794)부터 현장 법사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에는 현장 법사의 초상화가 유입되었는데 한 세기 뒤쯤 그려진 이 작품도 그런 인기를 반영하고 있다. 법상종의 종조(宗祖)로서 현장 법사의 탄생에서 열반까지의 일생을 12권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도회한 ‘현장삼장회(玄奘三藏繪)’가 일본 국보로 전해지고 있다.
   
   현장 법사가 일본에서만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을 떠나 천축(인도)을 다녀오기까지 현장 법사의 드라마틱한 여행 이야기는 중국에서도 수백 년 동안 인기검색어 1위였다. 평범한 인간이 성취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극적이고 풍요로운 현장 법사의 생애는 여러 사람에 의해 각기 다른 버전으로 구전되어 내려왔다. 명나라 때의 오승은(嗚承恩)은 당시까지 구전되어 오던 현장의 이야기를 채집하여 ‘서유기’라는 소설로 집대성하였다.
   
   현장 법사는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먼저 출가한 형을 따라 낙양(洛陽)의 정토사에 들어갔다. 어린 사미는 ‘현장’이라는 법명을 받은 후 불경(佛經)을 연구했다. 당시 중국에서 번역된 불경은 오역이 많아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현장은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에 직접 가서 제대로 된 불경을 구해야겠다는 뜻을 세웠다. 당시 당나라는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워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뜻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장은 627년 26세의 나이로 몰래 국경을 빠져나가 인도로 향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그는 사막을 넘고 강을 건너 56개 나라를 지난 다음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10년 남짓 체류하는 동안 날란다대학과 주요 사원을 순례하며 스승을 만나고 불경을 공부했다. 현장이 귀국길에 올라 불경 640질을 가지고 장안에 도착하기까지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왕복기간에 현장이 들른 나라는 모두 110개국이었고 여행거리는 5만리(약 1만6000㎞)였다. 귀국 후 현장은 당태종으로부터 ‘나라의 보배’라는 칭송을 받으며 불경 번역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인도 여행길에 들렀던 서역 여러 나라에 대한 내용을 담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책을 저술했다. 현장 법사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던 힘. 그것은 ‘멀리로는 석가여래의 뜻을 이어 나가고, 가까이로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빛내고자’ 했던 구법(求法)에의 의지였다. 현장 법사가 걸으면서 보고 기록한 실크로드는 현재도 수많은 여행가들이 따라 걷고 싶은 최고의 여행코스가 되었다.
   
   
   수수께끼 속의 누란 미녀
   
   우루무치에 있는 신장성 박물관에는 여러 구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다. 대략 3000년 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은 사막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수분이 증발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라가 되었다. 이곳의 미라는 톈산산맥과 쿤룬산맥에 둘러싸인 타클라마칸사막 부근의 작은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성인 남자에서 여인 그리고 어린아이의 미라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미라가 한 구 있었다. 누란에서 발견된 여인의 미라였다.
   
    ‘누란(樓蘭)의 미녀’로 알려진 그녀는 머리에 두건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깃털 달린 띠로 둘러져 있다. 몸은 마로 덮여 있고 속에는 두 장의 비단천 옷이 입혀져 있었다. 하반신 역시 여러 겹의 비단과 마로 된 치마를 겹쳐 입었고 발에는 비단으로 만든 실내화가 신겨져 있었다. 1927년 스웨덴 탐험가 스웬 헤딘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녀는 수천 년의 세월을 자신의 몸속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막의 모래 속에 누워 있었다. 큰 코에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그녀는 얼핏 보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미라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그녀의 얼굴이 컴퓨터로 복원되었다. 눈이 크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그녀는 우루무치 거리를 걷다 보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 동네 여인이었다.
   
   그렇다한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건조된 육신에 비단옷을 걸친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주었는데도 나는 그녀의 삶을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이곳에 묻혔는지 모른다. 일본의 역사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 靖·1907~1991)는 ‘누란’이라는 소설 속에서 그녀를 누란 왕국의 왕비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누란은 사막 속에 폐허로 남은 나라다. 흉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한나라의 이주정책으로 누란의 소금호수인 로프노르 곁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선선(鄯善)으로 떠난 후 모래 속에 잠긴 나라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미라의 주인공이 선선으로 떠나기 전 선왕(先王)의 왕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곳에 묻혔을 거라고 가정(假定)했다. 그러나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의 육신을 들이대며 이 사막에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외쳐도 그녀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살았으되 산 흔적이 잡히지 않는다. 그녀는 환영인가?
   
   
   신기루가 가르쳐 준 삶의 진실
   
   돈황에서 투루판으로 가기 위해 사막 한가운데를 달리는데 저 멀리 지평선 끝에 바다가 보였다. 바다 위에는 다도해처럼 작은 섬들이 여러 개 떠 있었고 바닷속으로 섬 그림자까지 비쳐 보였다. 자글자글 끓고 있는 사막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갈증을 해소시켜 줄 만큼 시원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지금 바닷가 부근으로 달리고 있나요? 가이더한테 물었더니 바다가 아니라 신기루란다. 분명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없는 것. 그것이 신기루다. 내게는 타클라마칸사막을 누비고 다녔던 현장 법사와 누란의 미녀가 신기루처럼 보였다. 누란의 미녀는 자신의 존재가 신기루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미라로 증거물을 남겼다. 현장 법사는 그마저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적을 남긴 사람의 자취는 확인할 수가 없고,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사람의 자취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금까지도 두 사람은 이름과 시신으로 남아 타클라마칸사막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가르치고 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우키요에

가츠시카 호쿠사이 붉은 후지산

▲ 가츠시카 호쿠사이, ‘후카쿠 36경’ 중 ‘붉은 후지산’, 1831년경, 다색판화, 15.6×22.7㎝, MOA미술관, 시즈오카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은 두 점이 알려져 있다. 한 점은 붉은색 바탕을 배경으로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한 점은 녹색과 파란색이 두드러진 자화상이다. 두 작품 모두 불안한 색조와 거칠거칠한 붓 터치 속에 고갱과의 불화 때문에 귀를 자른 화가의 광기가 담겨 있다. 쏘아보는 듯한 눈빛과 꼭 다문 입술에는 철저히 고독하게 살다간 한 사내의 외로움이 묻어 있어 이 그림을 한번 본 사람은 쉽게 그를 잊지 못한다. 그만큼 고흐의 작품은 인상이 강렬하고 개성이 강하다.
   
   녹색과 파란색이 강조된 자화상을 들여다보면 뒷배경에 이상한 그림 한 점이 붙어 있다. 우키요에(浮世繪·일본 풍속화)다. 배경이 없었더라면 인물이 훨씬 더 돋보였을 텐데 그걸 모를 리 없는 고흐가 굳이 그 효과를 반감시켜 가면서까지 배경에 이 그림을 붙여 놓았다. 왜 그랬을까. 이 작품에서는 우키요에가 한 장이지만 ‘탕기 영감’에서는 정도가 더 심하다. 여섯 장이나 되는 그림이 조각보처럼 붙어 있다. 이쯤되면 고흐가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그려 넣은 이유가 매우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키요에가 어떤 그림이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흐가 일본 그림을 자신의 그림 속에 간접광고처럼 집어넣었을까.
   
   일본의 산 하면 곧바로 후지산(富士山)이 떠오른다. 후지산은 외국인에게 일본을 상징하는 산으로 각인되어 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가 그린 ‘붉은 후지산’은 일본에서 지역 명소로만 알려진 동네 산을 전 세계 사람들이 찾고 싶어하는 산으로 화려하게 데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평소 일본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식집에서 한번쯤 기모노를 입은 미인의 모습과 함께 후지산을 그린 이 그림을 봤을 것이다. 그만큼 ‘붉은 후지산’은 흡인력이 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일흔을 조금 넘겼을 때 제작한 작품으로 ‘후카쿠 36경(富嶽三十六景)’ 중의 일부다. 후카쿠(富嶽)는 후지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리즈는 일본인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후지산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그린 우키요에로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구도와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돋보이는 명작이다.
   
   
   뜬구름 같은 세상을 그린 그림
   
   우키요에의 한자음은 ‘부세회(浮世繪)’다. ‘뜬구름 같은 세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끊임없는 전란과 고통 속에서 근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부질없이 떠다니는 뜬구름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늘 아래 놓인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똑같이 무너진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진리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강한 것도 약한 것도, 고운 것도 추한 것도 때가 되면 예외 없이 낡고 부서진다. 별도 나이가 들면 우주 속의 먼지로 사라지는데 사람의 일생이야 오죽하랴. 인생도 바람결에 떠다니는 뜬구름 같다. 인생이 이렇게 덧없고 무상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如夢幻泡影),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은데(如露亦如電)’.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상한 세상에서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은 어차피 쓸모없는 짓’이다. 차라리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즐겨야 한다.
   
   이것이 일본인의 미의식이다. 그들이 계절마다 ‘벚꽃과 반딧불, 단풍’을 찾아 맹렬하게 여행지를 찾아나서는 것도 ‘눈앞에서 덧없이 지고, 작은 빛을 잃고, 선명한 색을 빼앗기는’ 찰나의 아름다움 속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고 안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덧없는 세상이기에 순간에서 영원을 찾겠다는 것이다. 우키요에 속에 가로등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의 가벼운 날갯짓과, 절정의 순간에 불빛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생명체의 격정이 포개어 담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열도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江戶時代·1603 ~1867)에 만들어진 풍속화라고 해서 ‘에도에(江戶繪·에도 그림)’라고도 부른다. 에도는 도쿄(東京)의 옛날 명칭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가 쇼군(將軍)의 자리에 오른 후 만든 신도시다. 그는 ‘덴노(天皇)’가 머물고 있는 교토(京都)를 떠나 황무지나 다름없는 에도에 바쿠후(幕府)를 설치하고 관료기구를 장악했다. 바쿠후의 하부에는 조닌(町人)이라는 상인들이 그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이때부터 덴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1889)으로 권력을 다시 잡을 때까지 명목상으로만 최고 수장일 뿐 정치와 행정에는 일절 간여할 수 없었다. 황도(皇都)인 교토는 전통과 문화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반면 신도시인 에도는 문화의 불모지였다. 건설현장이나 다름없는 신도시에는 외지에서 온 남자들로 득실거렸다. 혼자 있는 남자들이 많다보니 즉석 음식이 인기를 끌었고 유곽과 가부키 극장 같은 독특한 문화가 발달했다. 상업적인 풍속화인 우키요에에 유녀(遊女)들과 가부키 배우들, 그리고 음란한 춘화(春畵)와 기괴한 귀신 이야기가 주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에도시대의 풍속을 반영한다. 대부분의 우키요에가 이 범주 내에서 그려졌다.
   
   가츠시카 호쿠사이라는 거장이 등장하면서 우키요에 세계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다. 일본 열도의 아름다움을 판화 속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에도 막부는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산킨코타이(參勤交代)라는 제도를 만들어 지방의 다이묘들을 일정 기간 동안 에도에 와서 머물도록 했다. 대신 고카이도(五街道·에도를 기점으로 한 5개의 주요 도로)를 정비하고 슈쿠바(驛站)를 설치하여 이동하는 데 불편을 최소화했다. 도카이도(東海道), 나카센도(中山道), 고슈카이도(甲州街道), 오슈카이도(州街道), 닛코카이도(日光街道) 등의 고카이도를 따라 처음에는 다이묘 행렬이 지나다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과 순례객, 그리고 여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유녀와 가부키 배우 대신 자신이 여행하면서 본 풍경을 소재로 선택하게 된 것은 이런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뒤를 따라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1797~1858) 같은 천재작가가 등장해서 서정적 울림을 주는 풍경 판화로 그 맥을 이었다.
   
   
   19C 유럽의 자포니즘 열풍
   
   유럽인들이 일본을 알게 된 것은 도자기를 통해서였다. 일본에서 전단지나 신문지처럼 가볍게 취급된 우키요에는 귀한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포장지로 사용되었다. 요즘 우리가 택배를 보낼 때 물품 사이에 신문지를 끼워 넣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작 유럽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도자기가 아니라 포장지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세기 중반, 일본 미술에 대한 호기심과 이국적인 취미로 ‘자포니즘(Japonisme)’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반응은 광적이었다.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그리는 데 지쳐 있던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 미술에서 발견되는 ‘비대칭적이고 양식적이고 풍성한 색채’에 혼을 빼앗겼다. 대담한 구도와 선명한 색채도 매력적이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일본을 후지산의 나라로 알리는 전령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 속에 일본을 상징하는 병풍, 부채, 기모노, 도자기, 족자, 우키요에 등의 알레고리를 경쟁적으로 그려 넣기 시작했다. 화가들의 스펙트럼도 넓었다. 드가, 마네, 모네, 르누아르, 로트렉, 루소, 에곤 실레, 클림트 등 19세기를 살았던 많은 작가들이 우키요에에 심취했다.
   
   그중에서도 고흐는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그는 우키요에를 단순히 그림의 배경 일부로만 집어넣는 데 만족하지 못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에도 명소 100경(名所江戶百景)’을 유화로 모사할 정도로 심취했다.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의 배경에 우키요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다.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심각한 광기에 빠져 산 고흐 또한 당시 모든 인상파 화가들처럼 그림의 형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 장의 그림 속에는 의외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처음 만난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가. 격식을 갖춘 행동 너머의 배경을 잘 살펴보시라. 얼굴 표정과 손짓, 말투와 언어, 입고 있는 옷과 걸음걸이 등 그가 하는 모든 행동 속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방식과 전 생애가 담겨 있다. 숟가락 들고 밥 먹는 모습 속에도 그 사람의 일상이 투영되어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모습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굳이 점쟁이가 아니라도 상대방에 대해 금세 파악할 수 있다. 상대방의 ‘백그라운드’를 알고 나면 상황 파악이 안돼서 주책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단풍나무 숲에서 불타는 세상을 본다

안중식 풍림정거

▲ 안중식 ‘풍림정거’ 1913년. 164.4×70.4㎝. 비단에 색. 리움미술관
온 산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설악산에서부터 점화된 불길은 계룡산을 전소시키고 내장산과 지리산을 거쳐 주왕산과 월출산에 머지않아 이르게 된다. 화마(火魔)는 땅끝마을 해남 미황사의 달마산 병풍바위 앞에 당도하고서야 비로소 뜨거운 포효를 멈출 것이다. 가을만 되면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단풍의 불길은 잿빛 나뭇가지가 앙상하게 드러날 때까지 탈 대로 다 타고 낙화한다. 낙엽은 눈비 속에서 분해된다. 낙엽은 찬란했던 단풍의 추억을 가차 없이 뒤로 한 채 바스라지고 눅진해져 거름으로 돌아간다. 형체가 변했다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낙엽의 화신인 거름은 땅을 살리고 미생물을 키우면서 겨울을 보낸 후 이듬해 봄에 다시 제 몸속으로 들어가 연둣빛 잎사귀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꽃봉오리로 혈혈하게 피어난다. 생명의 부활을 위한 자연의 순환은 죽음조차도 아름답다.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은 단풍 즐기다
   
   서리가 내렸다. 찬 공기 속에서 산맥이 느닷없이 변신한다. 교복 입은 학생들처럼 비슷비슷하던 나무들이 제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로 분장을 하고 나타난다. 가을 산의 메인 컬러는 붉은색과 주황색이다. 노란색과 갈색은 베이직으로 깔린다. 메인 컬러와 베이직이 능선에 서서 달아오르면 사람들은 색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산에 오른다. ‘이월의 꽃보다 더 붉은 단풍’ 앞에서 사람의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상기된다.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풍림정거(楓林停車)’는 온 산에 서리가 내려 은색으로 변할 즈음 산에 오른 선비가 수레를 멈추고 앉아 단풍을 구경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안중식은 메인 컬러인 붉은색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베이직을 은색으로 깔았다. 은색은 단풍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서리 내린 가을 산의 냉기를 전해준다. 눈을 통해 추위를 느낄 수 있으니 좋은 색이다. 공자님 말씀처럼 문(文)보다 질(質)이 우선이니 주제가 되는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꾸밈이 가상하다. 심하게 각지고 겹겹이 물러나는 뒷산의 주름은 안중식 특유의 산수 표현법으로 이곳이 깊은 산속임을 암시한다.
   
   제목으로 쓰인 ‘풍림정거(楓林停車)’는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803~852)의 시 ‘산행(山行)’에서 따온 구절이다.
   
   ‘멀리 늦가을 산에 오르니 돌길 비껴있고(遠上寒山石徑斜)
    흰 구름 이는 곳에 몇 채의 인가(白雲生處有人家)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은 단풍을 구경하나니(停車坐愛楓林晩)
    서리 맞은 단풍잎 이월의 꽃보다 더 붉네(霜葉紅於二月花)’
   
   
   가을 단풍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시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노래한 왕유(王維·699~759)의 절창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안중식의 ‘풍림정거’가 두목의 시를 형상화한 작품임에도 시와 그림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두목의 시에서는 수레를 멈추는(停車) 행위가 먼저이고, 단풍(楓林)을 구경하는 것이 다음이다.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작정하고 나선 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반면 안중식의 그림 제목에서는 단풍(楓林)이 멈추는(停車) 행위보다 앞에 놓였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산에 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연히 단풍나무숲을 지나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니 그 모습이 황홀하여 잠시 멈춘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은 단풍을 보며 오랜 사유 속에서 단풍의 빼어남을 묘사할 단어를 찾았다. 그 대상이 ‘이월의 꽃’이었다. 화가는 보는 즉시 이끌리듯 붓을 들어 ‘이월의 꽃보다 더 붉은’ 단풍을 그렸다. 시 속에서는 시인의 의지가, 그림에서는 자연에 대한 감탄이 먼저다. 자연이 화가의 마음에 불을 질러 어쩔 수 없이 붓을 들게 했다. 그저 화가는 자연이 시키는 대로 붓을 들어야 한다. 감동으로 무장한 자연의 충동질 앞에서 감히 무너지지 않고 대항할 자 그 누구인가.
   
   ‘풍림정거’는 ‘도원문진(桃源問津)’과 쌍을 이뤄 제작된 작품이다. ‘풍림정거’가 당대의 시인 두목의 시를 그렸다면, ‘도원문진’은 두목보다 한참 전의 선배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그린 작품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살펴보았듯 무릉에 사는 어부가 강물 위로 떠내려오는 복숭아꽃을 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내용의 ‘도화원기’는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화가들에게 붓을 들게 하는 화제(畵題)였다. 안중식은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도 ‘도원도(桃源圖)’를 가장 많이 그린 작가다. 그런 그가 가을을 그리면서 곁에 봄을 그렸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마치 우리 인생을 압축해 놓은 것 같다. 봄에 무릉도원으로 들어간 어부가 세상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도원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가을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짧은 시간, 꽃이 피었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낙엽이 지는 그 짧은 시간을 살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조바심치고, 열매를 맺었는가 하면 찬바람이 부는 짧은 생을 살면서 우리가 이뤄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무릉도원에서 단풍나무숲까지
   
▲ 안중식 ‘도원문진’ 1913년. 164.4×70.4㎝. 비단에 색. 리움미술관
정답을 안다면 인생은 조금 쉬워질지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어렵고 그래서 더욱 함부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 인생이다. 어느 누구의 삶도 아닌 오직 나만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무릉도원에서 단풍나무숲까지 걷는 동안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문학을 기웃거리며 그림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내 삶의 모델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그중의 한 사람. 도원을 함께 걷다 엊그제 먼저 단풍나무숲으로 건너간 스티브 잡스(1955~2011)는 문을 나서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타인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 타인의 의견의 소음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뒤덮도록 하지 말라. 자신의 심장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안중식이 봄, 가을을 그리면서 말하고 싶었던 뜻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다.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거름을 만드는 불길인지 아니면 생명을 태우는 불길인지 낙엽을 밟으며 뒤돌아본다. 이번 주말에는 배낭 메고 뒷산에라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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