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득신 ‘파적도’ 화첩, 종이에 연한색, 22.5×27.2㎝, 간송미술관 |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타났다. “벌써 몇 번째 책을 내시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좋았다. 내 책을 받아 든 남자가 갑자기 부인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누구는 말이야. 이렇게 책도 여러 권 써서 노년에 대한 걱정을 덜어주는데 누구는 평생 밥만 축내니 세상 참 불공평해. 인세 팍팍 들어오겠다, 평생 정년 없겠다, 김 이사는 지금 당장 회사 그만둬도 되겠어. 정말 부러워요 부러워. 옆에서 이렇게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줘도 살 둥 말 둥한 세상에서 나 혼자 버티려니 내가 흰머리가 안 나게 생겼냐 말이야.” 끊임없이 혼자 투덜거리는 남편을, 그의 아내는 여러 번 겪어봤다는 듯 그저 철없는 아이 보듯 하면서 웃었다. 그러나 그 속이 오죽하랴. 곤혹스러운 남편이 한마디 거들었다.
“집에 들어가시면 어떻게 뒷감당을 하시려고 그렇게 막말을 하세요?”
남편 말에 눈치 빠른 그가 너무 내질렀다 싶었던지 얼른 분위기를 수습했다.
“현관 들어가자마자 바로 손들고 서 있어야지, 뭐.”
정적을 깬 고양이 때문에
김득신(金得臣·1754~1822)의 ‘파적도(破寂圖)’는 한가로운 봄날, 한 농가에서 일어난 소동을 그린 것이다. 흐뭇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에 한 남정네가 마루에 앉아 자리를 짜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암탉이 모이를 주워먹고 있었고 어미닭을 따라 병아리 몇 마리가 종종걸음을 하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갑자기 암탉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보이지 않던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병아리를 물고 잽싸게 달아나고 있었다. 새끼가 물려가는 것을 본 어미닭은 애간장이 녹은 듯 고래고래 악을 쓰며 고양이를 쫓아가고 있고, 혼비백산한 다른 병아리들은 부딪치고 넘어지면서도 도망가느라 바쁘다.
“이놈의 고양이 새끼!”
사태를 즉각적으로 파악한 남정네가 담뱃대를 집어 들었다. 후다닥 일어나 고양이를 향해 힘껏 내려쳤다. 아, 그런데 마음이 너무 급했던 탓인가. 고양이는 잡지 못하고 자리틀과 함께 마루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머리에 쓴 탕건도 날아갔다. 남편이 낙상하는 걸 본 아낙네가 맨발로 뛰쳐나와 고양이를 잡아보려 했지만 상황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아 보인다. 고양이 한 마리의 등장으로 고요한 평화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당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작품은 책마다 조금씩 다른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런데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훔치다’라는 뜻의 ‘야묘도추(野猫盜雛)’보다는 ‘정적을 깨다’라는 의미의 ‘파적도(破寂圖)’가 더 적절해 보인다. 사건의 발단은 고양이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부부간의 애틋함이다. 마당에 떨어져 자칫 허리가 다칠지도 모르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마음이야말로 정말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든 ‘파적(破寂)’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간적인 상황을 생동감있게 포착한 작품이면서 해학적 표현미가 돋보인다.
긍재(兢齋) 김득신은 김홍도(金弘道)의 뒤를 이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다. 그의 아버지 응리(應履)와 큰아버지 응환(應煥)이 모두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었고, 동생 석신(碩臣)과 아들 건종(建鍾), 하종(夏鍾)까지 도화서 화원인 대표적 화원 집안이었다. 그의 풍속화는 깔끔하게 주제만 표현한 김홍도의 작품과 달리 꼼꼼하게 배경 묘사에 정성을 들인다. ‘파적도’도 예외가 아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모든 사태가 파악될 정도로 상황 묘사가 친절하다. 감상자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붓끝으로 직접 시시콜콜 설명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김득신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자상하다 못해 부담스럽기까지 한 그의 성격이 짐작되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덕분에 ‘파적도’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의 남편에 대한 마음이 절절이 배어 있어 ‘차마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고 만다.
‘밤이 먹고 싶으면 내게 먼저 말하시오’
부부간의 사랑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다. 퇴계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권질의 여식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권씨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겪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지켜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고 난 후 딸의 장래가 걱정되었던 권질은 퇴계가 문안 인사를 왔을 때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거둬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퇴계는 그러마고 승낙한 후 그녀에게 정식으로 새장가를 들었다.
정상이 아니었던 권씨 부인은 일마다 말썽이었다. 한번은 친척들이 다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제사상에 올린 밤을 가져다 먹었다. 이를 본 퇴계는 밤을 한 움큼 집어서 부인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부인, 앞으로는 밤이 먹고 싶으면 내게 먼저 말하시오.”
그러면서 기겁을 하는 사람들에게 태연히 말했다.
“아마 조상님들께서도 당신께서 드시는 것보다 후손이 맛있게 먹는 걸 더 좋아하실 것이오.”
이런 일화는 몇 가지가 더 전해지는데 퇴계는 한번도 권씨 부인의 모자란 행동을 나무라거나 야단치지 않았다. 한번은 문상을 가야 하는데 도포 자락이 해진 것을 알고 부인에게 꿰매 달라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빨간색 천을 덧대어서 꿰매 왔다. 퇴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도포를 입고 문상을 갔다.
부부간의 불화를 겪고 있던 제자가 있었다. 그는 10년이나 부인과 각방을 쓸 정도로 부부 사이에 골이 깊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퇴계는 어느 날 고향으로 떠난다는 제자를 아침식사에 초대했다. 스승님 내외와 겸상을 하게 된 제자는 여러 차례 놀랐다. 명성이 자자한 스승의 초라한 밥상을 보고 놀랐고, 온전치 못한 스승 사모님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 놀랐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예절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부인을 스승이 한결같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제자는 느끼는 바가 많았다. 아침식사 후 떠나는 제자에게 퇴계는 슬며시 편지 한 통을 건네주며 나중에 뜯어보라고 말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결혼은 하늘의 질서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만약 네가 너의 아내를 지금처럼 학대하고 너 스스로를 훈련할 수 없다면 무엇을 배우려느냐?’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일본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쓴 ‘미의 법문’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선인(善人)도 왕생(往生)하는데 하물며 악인(惡人)이야.’
처음에는 번역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악인이 왕생한다면 당연히 선인도 왕생한다는 표현을 착각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일본 정토종을 개창한 호넨(法然·1133~1212) 스님과 신란(親鸞·1173~1263) 스님이 남긴 유명한 이 말은 불보살(佛菩薩)의 위대한 자비심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다.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중생이 구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구제한다는 뜻이다. 모든 위대한 성인(聖人)들의 자비는 계산적인 중생이 상상하는 그 한계 너머에 있다. 그분들의 아량은 남보다 뛰어난 미모, 든든한 재력, 탁월한 능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중생의 옹졸함을 무색하게 한다. 종교적 계율, 경전의 가르침, 한 사회를 지배하는 관습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을 부처는 자비(慈悲)로 보여주었고, 공자는 인(仁)이라고 했으며, 퇴계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실천했다. 자비, 인, 측은지심 같은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남편이 다칠까봐 맨발로 뛰어가는 마음, 모자란 부인을 존경심을 다해 감싸주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현관문에 들어서면 손들고 서 있겠다고 한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기를 정선 ‘인왕제색도’
▲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먹, 79.2×138.2㎝, 삼성 리움미술관 |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가노란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신라 경덕왕 때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첫 구절이다. 이 향가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齋)를 올릴 때 부른 노래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 가는 곳 모르겠구나’로 이어지는 노래 속에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오누이의 애별리고(愛別離苦)가 눈물처럼 젖어있다. 육친(六親)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지순한 아픔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안다.
이레 동안 비가 내린 후 오후에 개다
죽음과 관련된 그림 중에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대표작이다. 비온 뒤 맑게 갠 인왕산의 모습을 포착하여 그린 그림으로 습윤한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명작이다. 며칠째 계속 내리던 비가 갠 후 물기 젖은 암벽이 육중하게 위용을 드러냈다. 바람이 불자 나무 사이에 깔려있던 안개가 맹렬하게 산허리를 향해 진군한다. 안개에 반쯤 잠긴 산 아래 나무에서는 아직도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듯하다.
인왕산은 특히 흰 바위가 눈에 띄는 산이다. 정선은 비에 젖은 암벽의 축축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 바위를 검은 먹으로 칠했다. 흰색 바위를 흰색으로 칠하면 곧 굴러떨어질 것 같은 바위의 무거운 성질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안개와 차별이 되지 않는다. 정선이 전하고 싶은 것은 인왕산의 외형적 모습이 아니었다. 그곳에서의 감동이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마치 인왕산 앞에 서 있는 듯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대상을 왜곡, 과장, 축소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한 화면에 서로 다른 시점(視點)을 적용한 것도 같은 이치다. 산 아래 나무와 집이 있는 풍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고, 산 위쪽 암벽은 저만치서 위로 쳐다보는 시점이다. 이런 점이 정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일반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런 탁월한 현장감 때문에 천암만학(千岩萬壑)의 수려함이 노련한 대가의 붓끝에서 실감나게 전해진다.
친구 이병연의 일생을 회고하며
‘인왕제색도’는 단순히 비 갠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작품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림에 스토리가 개입되면 그 그림은 특별해진다. 연구자들은 이 점에 주목했다. 인왕산은 정선이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곳이고, 정선의 옆집에는 시인 사천(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살고 있었다. 둘은 인왕산 기슭에서 평생을 절친한 친구로 살았다. 이병연이 시로 이름을 세웠다면 정선은 그림에 특장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가와 시인을 칭송하여 ‘좌사천우겸재(左川右謙齋)’라 했다.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갈 때는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을 하자고 약조했다.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 보자’는 뜻이다. 시인과 화가로서의 위대성을 서로 인정해주는 동시에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한 말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림과 시가 부지런히 오갔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금강산 화가로 알려진 겸재가 한강 주변의 명승지를 화폭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사천이라는 시인의 추임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였고, 예술적 동반자였으며, 작가와 소장가였다. 정선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판매한 사람이 이병연이었다.
그런 친구가 죽었다. 이 그림을 완성할 즈음인 윤5월 29일에 죽었다. 5월 29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병연의 부고 소식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한성 우윤 이병연(李秉淵)이 졸(卒)하였다. 이병연의 자(字)는 일원(一源)으로 한산(韓山) 사람이며, 호(號)는 사천(川)이다. 성품이 맑고 드넓었으며, 어려서 김창흡(金昌翕)을 종유(從遊)하였다. 지은 시(詩)가 수만 수(首)인데, 그의 시는 강건하고 웅장하여 이따금 옛것을 압도함이 있어, 세상에서 시를 배우려는 자들이 많은 본보기로 삼았다.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와 아경(亞卿)에 이르러 그쳤다.”
‘인왕제색도’가 이병연의 죽음과 관련되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고(故) 오주석 선생과 최완수 선생이다.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살펴보니 당시 기상 상태와 인물 동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윤5월 날씨가 ‘맑음(晴), 흐림(陰), 비(雨)’ 또는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맑음(朝陰晩晴)’ ‘아침에 맑고 저녁에 비(朝晴夕雨)’ 등으로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다. 장마철이었는지 초하루(1일)부터 열여드레(18일)까지는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그런데 정선이 제시에 적은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에 해당하는 ‘하완(下浣)’, 즉 하순(20일에서 30일 사이)의 날씨를 보면 19일부터 24일까지 엿새 동안 계속 ‘비(雨)’가 내렸다. 비는 이레째 되는 25일 아침까지 계속 내리다 저녁이 되어서야 개었다(朝雨夕晴). 그때부터 30일까지는 28일 아침에 잠깐 흐렸을 뿐(朝陰夕晴) 맑은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그린 날은 언제였을까? 24일까지는 계속 비가 내렸으니 25일 이후가 될 것이다. 오주석 선생은 그림 그린 날짜를 특별히 25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림 속에서 세 곳의 폭포가 맹렬하게 쏟아지는 장면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을 정도로 많이 피어나는 날이라면 장마가 막 끝난 시점이다. 25일에 그렸다면 생사를 알 수 없는 친구의 회복을 빌었을 것이다. 29일 이후라면 친구와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저승에 간 친구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죽기 전에 그렸든 죽은 후에 그렸든 ‘인왕제색도’에는 죽음이 담겨 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는’ 세월의 무상함과, 한 가지에서 난 나뭇잎 같은 친구와의 별리(別離)를 아쉬워하는 애틋함이 담겨 있다. 1751년 윤5월 25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17일이다.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영정을 모셔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빈소(殯所)에는 가장 싱싱한 조카들이 모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결혼해서 살림을 하고 있는 조카들이 음식을 나르고 있었고, 맨 안쪽 상석에는 집안 어른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감히 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어른들 틈에 내가 끼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결국 인생은, 태어나서 걸음마를 끝낸 다음 빈소와 식당으로 상징되는 일터에서 활동하다 집안어른들이 앉아 있는 곳까지 걸어오는 과정까지인 것 같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날 때 우리는 영정 속에 추억으로 모셔진다. 남겨진 사람에게 그리운 추억이 될지, 지우고 싶은 추억이 될지는 그 사람이 살아 온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월명사는 스님답게 ‘제망매가’의 결론에서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고 이별의 슬픔을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애별리고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그렇게 멋지게 선언할 수가 없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리에’ 들이붓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물을 물로 봤다가는 큰코다친다”
마원 ‘황하역류’
▲ 마원 ‘황하역류’ ‘12수도(十二水圖) 권 중 6’, 중국 송, 비단에 연한 색, 26.8×478.3㎝, 고궁박물원 |
황하의 물이 역류하다
물속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걸까. 강물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남송(南宋·1127~1279)대의 궁정화가였던 마원(馬遠·1189년 이전~1225년 이후 활동)이 그린 ‘황하역류(黃河逆流)’는 800여년 전에 그린 작품인데도 마치 몇 달 전에 발생한 쓰나미 현장을 보고 있는 듯 생생하다.
이 작품은 마원이 그린 ‘12수도(十二水圖)’ 중의 하나다. 현재는 두루마리로 장황(裝潢)되어 있지만 원래는 12개의 책(冊)으로 된 화첩(畵帖)이다. 그는 이 화첩에서 강, 호수, 내, 바다 등을 예리한 시선으로 관찰하여 12가지 서로 다른 물의 동세(動勢)를 포착해냈다. ‘동정풍세(洞庭風細)’ ‘장강만경(長江萬頃)’ ‘추수회파(秋水廻波)’ ‘세랑표표(細浪漂漂)’ 등 각 그림에는 형형색색으로 변신하는 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곡진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의 붓끝을 따라 물이 화면 밖으로 흘러넘칠 것 같다. 무심히 보면 물은 그냥 물일 뿐인데 세밀한 관찰과 탁월한 기량이 결합된 마원의 그림에는 물이 지을 수 있는 풍부한 표정과 다양한 움직임이 드라마틱하게 담겨 있다.
예로부터 물을 그리는 방법은 공수법(空水法), 염수법(染水法), 준수법(皴水法), 구수법(勾水法) 등 다양했다. 공수법은 수면을 흰 여백으로 남겨놓는 방법인데 반해 염수법은 검은색이나 푸른색으로 칠하는 방법이다. 공수법과 염수법은 원(元)대 이전 화가들이 즐겨 그린 기법이다. 준수법은 필선을 끌듯이 움직여 수면을 큰 조각처럼 그리는 기법으로 강둑이나 모래톱 주위의 물결을 표현할 때 쓴다. 마원이 ‘12수도’에서 사용한 기법은 구수법이다. 구수법은 필선으로 파도나 물결을 그리는 방법으로 동양화에서 가장 많이 애용하는 기법이다. ‘망건수법(網巾水法)’이라고도 부르는 구수법은 잔잔한 물, 격동적인 물결, 거친 파도 등 물이 보여줄 수 있는 천의 얼굴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이다.
왜 하필 장강이 아니라 황하일까
중국에서 가장 큰 강은 장강(長江)이다. 그런데 마원은 장강이 아닌 황하를 그렸다. 위치상으로 보더라도 장강은 남송의 수도 항주를 끼고 흐른다. 거리만 생각한다면 남송의 궁궐에서 활동한 마원이 장강을 그려야 마땅하다. 마원의 집안은 북송(北宋·960~1126) 말기부터 다섯 세대에 걸쳐 150년 동안 화원에 봉직하며 황제들을 섬겼다. 근경 중심의 인물 표현과 한쪽으로 치우친 일각구도(一角構圖), 부벽준(도끼로 나무를 찍어낸 것처럼 바위 표면의 질감을 드러내는 필법), 안개가 자욱한 시적인 분위기가 특징인 마원 화풍은, 그의 아들 마린(馬麟)에게 충실히 이어졌다. 당시 궁정에서는 마원과 쌍벽을 이루던 하규(夏珪)라는 작가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룬 독특한 화풍은 ‘마하파(馬夏派)’라는 이름으로 직업화가들의 추종을 받았다. 그러니 궁정화가이자 마하파의 거두인 마원이 장강이 아닌 황하를 그린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대 문명의 발생은 장강이 아닌 황하에서 탄생했다. 사람이 살기에는 고온다습하고 삼림이 울창한 장강보다 건조하면서도 비옥한 황토지대인 황하가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황하는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철기시대까지 줄곧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장강이 덩치 큰 강폭의 크기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면, 황하는 유서 깊은 가문의 포트폴리오로 역사 매니아들의 포토라인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황하는 자주 범람했다. 때론 역류할 때도 있었다. ‘서경’과 ‘맹자’를 보면 요임금 시절부터 황하가 역류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요임금이 신화와 전설 양쪽 진영에 다리 하나씩을 걸치고 있는 얼굴 없는 영웅이고 보면, 통치자들이 황하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역사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경’에는 요임금 때 ‘홍수가 바야흐로 폐해를 끼쳐서 거대한 세력으로 산을 에워싸고 언덕을 넘어 질펀하게 하늘까지 번지기에 저 아래 백성들이 한탄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맹자’의 기록은 더 구체적이다. ‘물이 역류하여 중국에 범람하였다. 사룡(蛇龍)이 우글거려 백성들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낮은 지역 사람들은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높은 곳 사람들은 굴을 파고 살았다’고 되어 있다. 마원이 굳이 가까운 장강을 외면하고 멀리 떨어진 황하를 그린 것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담긴 황하의 역사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올 법한 요임금부터 그가 살던 남송시대까지 강가에 산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홍수 피해의 기억이었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자연과 싸우고 토라지고 화해하면서 살아온 역사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혜롭기가 우가 물길 터놓듯이 하라
자애로운 군주 요임금이 황하의 범람으로 밤잠을 설칠 때 신하들이 적임자를 한 사람 천거했다. 그가 바로 곤이었다. 곤은 임명장을 받자마자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의 판단은 신속했고 행동은 민첩했다. 현장검사가 끝나자마자 그는 즉시 치수사업에 돌입했다. 곤이 선택한 치수사업의 골자는 흙으로 둑을 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아무리 둑을 높게 쌓아도 폭우가 한번 쏟아지고 나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지면 쌓고 무너지면 또 쌓는 일을 9년 동안이나 되풀이했다. 결국 그는 치수사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했다.
그 다음 해결사로 등장한 사람이 우였다. 우는 곤의 시체에서 튀어나온 용이 변해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사나이다. 아들의 몸으로 환생해서라도 치수사업을 완성하려고 했던 곤의 천착을 보여주는 신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는 치수사업의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답게 오로지 치수에 매달렸다. 흙을 나르고 도랑을 파느라 손발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정강이는 털이 날 새가 없어 반질반질했다. 오죽하면 13년 동안 한번도 집에 들르지 않을 정도였을까. 결국 우는 갖은 고생 끝에 치수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다.
똑같은 물을 다스리면서도 아버지는 실패하고 아들은 성공했다. 이유는 물을 이해하는 시각 차이 때문이었다. 곤은 물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자연의 힘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흙으로 물을 막으려고만 했다. 물을 물로 보다 큰코다친 셈이다. 그러나 우는 달랐다. 아버지의 실패를 오랫동안 지켜본 우는 억지로 물길을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물길을 터서 흘러가게 했다. 대신 물길을 분산시켜 힘을 약화시켰다. 현명한 우는 사람이 자연에 대항하여 함부로 맞서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한 것이다. ‘맹자’에는 현명한 우의 행동을 이렇게 찬탄했다. ‘만약 지혜롭기가 우가 물길 터놓듯이 한다면 지혜를 혐오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우가 물길을 흘러가게 한 것은, 그 무사(無事)함을 행한 것이다.’
이래저래 물 때문에 논란이 많은 우리 시대에도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사이에도 제대로 물길을 터놓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길조이거나 낙동강 오리알이거나 홍세섭의 유압도
▲ 홍세섭 ‘유압도’ 비단에 먹, 119.5×47.8cm, 국립중앙박물관 |
해한테 선물받은 그 냄새가 좋아 한낮 땡볕에 집 근처 냇가에 나갔다. 햇볕 속에서 내 몸을 말리면 장마철 습기처럼 눅눅했던 마음이 증발되고 새물내가 날까? 끝없이 내리붓는 폭우 때문에 산책로까지 잠겨 발길을 끊었더니 그동안 텁텁한 물속은 말끔히 닦여 있었다. 깊은 산속 계곡물이 연상되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수초들의 표정도 생기가 넘친다. 너무 웃자란 풀들은 여지없이 꺾여 바닥에 누워 있다. 천방지축 날뛰던 사람이 삶의 고초를 겪어보고 나서 세상 무서운 줄 알고 겸손해지는 모습 같다. 자연이라는 경전(經典)은 은유법이 아니라 직설법이다. 빙빙 에둘러 표현하는 법이 없이 살아있는 언어로 가득한 직설법이다. 그 직설법의 한가운데에서 오리 두 마리가 다정하게 헤엄을 치고 있다.
암수 서로 다정한 오리
햇볕도 물속에 들어가 멱을 감고 싶은 한낮. 홍세섭(洪世燮·1832~1884)의 ‘유압도(遊鴨圖)’ 속에서 두 마리 오리가 헤엄치고 있다. 오리 한 마리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자 또 한 마리가 그 뒤를 따른다. 오리는 유독 암수가 다정한 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마리 오리는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오리의 발짓으로 물에 파장이 일자 한낮의 고요가 뒤로 밀린다. 포물선을 그으며 뒤로 밀리는 물결은 부감법(俯瞰法·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에 의해 더욱 현장감이 생생하다. 외곽선을 생략하고 연한 먹과 진한 먹을 배합해서 그린 오리의 모습도 신선하거니와 물 위에 툭툭 떨어뜨린 듯한 진한 먹과 수초의 표현은 대담하면서도 청신하다. 작가 석창(石窓) 홍세섭은 당상관을 지낸 선비화가로 ‘유압도’ ‘야압도’ 같은 풋풋한 영모화(翎毛畵·새와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를 여러 점 남겼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의 작품을 그려 19세기 이색적인 화풍의 대표화가가 되었다. 홍세섭은 붓 끝에 생기를 달고 사는 사람인가? 냇물에 붓을 빨면서 독하고 매운 분노까지 씻어낸 듯 붓질이 청아하다. 홍세섭은 물과 수초가 어우러진 자연의 풀향기를 붓끝에 적셔 거리낌없이 사방에 흩뿌리고 있다. 오리가 발짓을 할 때마다 싱싱함이 퍼덕거린다. 오리가 일으킨 파문은 감상자의 마음에서 쉽게 잦아들지 못한다. 혼탁한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다 온 사람이라면 대번에 둔사적(遁思的) 본능이 꿈틀거릴 것이다. 개결(介潔)한 선비의 풍모와 그윽한 시정(詩情)이 담겨 있는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세상에서 강조하는 처세술이나 욕망의 덧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말한다. 냇가에 오려거든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살았던 조바심을 내려놓으라고. 더 빨리, 더 많이 이루기 위해 휘청휘청 살아온 시간도 잠시 내려놓고 그저 시원한 냇가에 풍덩 빠지라고 권한다. 마음을 짓누르던 시름일랑 잊어버리고 오리가 들려주는 냇가의 청신한 내력에 귀 기울여 보라고 얘기한다. 이런 물속에 맨발을 담근 채 한나절 첨벙거리고 나면 가뭄에 시들어가듯 팍팍했던 삶이 전율하듯 벌떡이는 에너지로 채워질 것이다. 먼지 쌓인 삶은 말끔히 헹궈질 것이고 자연이 주는 깊은 위로는 심장까지 젖어들 것이다. 뒤틀린 심기는 편안해질 테고 자글자글 끓던 불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 나그네는 삶에 대한 외경(畏敬)을 맛보리라. 마지못해 적선하듯 툭툭 내뱉던 언어 속에도 정감이 담기리라. 엉켜 있던 생각의 실타래는 가지런해질 것이고, 삶에 대해 성실해야겠다는 당위성을 얻으리라. 대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티끌 하나 쓸려나가지 않고, 달빛이 호수를 뚫고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이 남지 않듯 나그네의 마음밭도 평온해지리라.
홍세섭은 오리 그림뿐만 아니라 산수화도 잘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알려진 유작은 대부분이 영모화이다. 그의 아버지 홍병희(洪秉僖)도 그림을 잘 그려 부자가 때로 합작(合作)을 했다고 전해진다.
금실 좋은 오리가 장원급제 도와 줘
오리는 선비화가나 화원화가들이 그린 감상용 그림 외에도 민화에 자주 등장한다. 오리는 암컷과 수컷의 사이가 좋아 부부간의 금실을 기원하는 그림을 선물하려고 할 때 언제나 그림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다. 오리는 대표적인 물새다. 오리가 서식하는 곳은 거기에 물이 있다는 뜻이다. 농경 민족에게 물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 오리가 풍요를 기원하는 솟대의 장대 끝에 모셔지게 된 것은 물을 부를 수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오리는 복을 불러오는 상서로운 길조(吉鳥)다. 그러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새라서 그다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낙동강 오리알 같다’는 표현도 낙동강에 오리알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인간의 소망을 천상의 신에게 전해주는 신성한 중재자인 오리가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단지 흔하다는 이유만으로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어디 오리뿐이랴.
오리는 부부 금실과 물이 필요한 곳에서만 불러 주는 새가 아니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매력적인 새다. 오리 압(鴨)자를 파자(破字)하면 甲과 鳥로 되어 있다. 甲은 1등 혹은 A학점을 의미한다. 그러니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새를 상징한다. 오리가 두 마리 있으면 이갑(二甲), 즉 향시(鄕試)와 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함을 의미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 방에 오리 그림이 여러 점 붙어있다 한들 전혀 뜬금없는 짓이 아니다. 합격에 대한 강렬한 소원을 드러낸 것이다.
연꽃에 오리 두 마리가 그려지는 그림도 있다. 연꽃의 연밥을 뜻하는 연과(蓮顆)는 잇달아 합격함을 의미하는 연과(連科)와 발음이 똑같다. 그러니 연꽃에 오리 두 마리를 합하면 ‘연과이갑(連科二甲)’, 즉 연속해서 두 군데 시험에 장원을 하라는 뜻이 된다. 과거시험에서 장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벼슬하고자 하는 바람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이런 식의 그림이 무수히 많이 그려졌을까, 측은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수험생 부모가 학교 대문에 엿을 붙이고 빌고 있는 모습도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이런 오랜 역사와 전통의 맥락 속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길조이거나 절름발이 오리이거나
홍세섭이 ‘유압도’를 그릴 때 마음속에 어떤 의도를 품고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부간의 금실을 도모함인지, 장원을 기원한 것인지도 알쏭달쏭하다. ‘특별한 사명’을 띠고 그린 그림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감상화로서의 독창성과 예술성이 과할 정도로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아름답다. 한여름 냇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이로운 생명체에 대한 찬탄이 담겨 있다. 그가 그린 그림 속의 오리는 아무리 가볍게 행동해도 절대로 레임덕(lame duck·절름발이 오리)의 비참함은 맛보지 않을 것 같다. 물속에 들어갈 때도 아름답고 물 밖으로 나올 때도 기품 있다. 모름지기 사람도 오리처럼 한결같다면 어느 자리에 있든 결코 손가락질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리의 깃털에서도 새물내가 난다.
연꽃은 피었는데 풍류에 빠진 양반들, 그대들은 君子인가 신윤복 ‘연당야유도’
▲ 신윤복 ‘연당야유도’종이에 색, 28.2×35.2㎝, 간송미술관 |
가야금 소리 들으며 연꽃을 감상하다
여기가 어디일까. 정갈하게 석축을 쌓고 담장을 두른 걸 보니 어느 대갓집 후원이다. 연못에는 시퍼런 연잎 사이로 붉은 연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개인 집 후원에 연못을 만들 정도라면 집주인은 그 위세가 아주 당당한 정승급이거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역관(譯官)이다. 도포에 두른 붉은색과 자주색 띠를 보니 역관 같은 중인(中人)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복장은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당상관 이상만이 할 수 있다.(당하관 이하는 파란색 띠를, 벼슬이 없는 백면서생은 검은색 띠를 두른다.) 권력에 재력까지 갖춘 것인가. 백성의 심부름꾼이라는 공무원이 쥐꼬리만한 박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화려한 저택에서 여름 한낮의 넉넉함을 즐기고 있다. 이런 사람은 필시 아버지가 부자거나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권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든 남들보다 여유롭게 즐기며 사는 것을 그들은 풍류(風流)라고 생각한다.
고급 관료들이 노는 모습 한번 감상해 보자. 장마도 끝나고 연못 속의 연꽃들이 경쟁적으로 꽃대를 들어 올리던 8월 어느 날, 세 남자가 후원에서 만났다. 모처럼 하늘도 맑게 단장하고 서늘한 바람을 흘려보내는데 분위기 띄워 줄 가야금 소리가 빠질 수야 없는 법. 아리따운 기생들이 짝을 맞춰 동석했다. 소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 깔고 앉아 가야금 소리 울려 퍼지니 이보다 더 좋은 풍류가 없으렸다. 여자를 대하는 사내들의 태도가 사뭇 다르다. 한 남자는 모임의 취지에 충실하게 장죽을 물고 앉아 가야금 소리를 감상하고 있다. 뒤로 빠진 남자는 방건까지 내던지고 무릎에 앉힌 기생을 주무르기에 여념이 없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했던가. 서 있는 남자는 자기 짝 대신 다른 남자의 여자를 보고 있다. 이에 화가 난 버림받은 여자는 애꿎은 담배만 뻐끔거린다.
‘청금상련(聽琴賞蓮)’은 기생과 한량들을 많이 그린 신윤복(1758~?)의 대표작이다. 작품 제목은 가야금 소리 들으며 연꽃을 구경하다란 뜻으로 ‘청금상련’이라 부르기도 하고, 연꽃 핀 연못에서의 유희라는 뜻으로 ‘연당야유(蓮塘野遊)’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림 속에 담긴 작가의 풍자와 해학이 통렬하다. 곧 죽어도 공자 왈 맹자 왈을 들먹이며 체통을 중시하던 양반들이, 가려진 장소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폭로한 작품이다.
그런데 폭로하는 자세가 전혀 전투적이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그의 붓끝이 얼마나 교묘하던지 폭로의 현장에 있던 양반이나 현장을 목격한 감상자 모두 그림을 즐기느라 바빠 본질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신윤복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못 속에 연꽃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연꽃을 무척 사랑했던 주돈이(1017~ 1073·중국 북송의 유학자)는 ‘애련설(愛蓮說)’을 지어 연꽃을 ‘군자(君子)의 꽃’으로 치켜세웠다. 그 뒤부터 연꽃은 고결하게 살고 싶어하는 선비의 상징이 되었다. ‘군자’는 ‘높은 인격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고결하고 높은 인격을 상징하는 연꽃은 피었는데 당신들은 군자인가? 그림 속 연꽃이 세 남자를 향해 그렇게 일갈하는 것 같다.
민요 중에 ‘진주난봉가’가 있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진주에 사는 꽃다운 처녀가 ‘울도 담도 없는’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간다. 서럽고 서러운 시집살이가 3년쯤 지난 어느 날, 시어머니가 아들이 온다면서 며느리한테 진주 남강에 빨래를 하러 가란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젊은 부부가 떨어져 살았던 모양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창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난데없는 말굽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탄’ 낭군님이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서려는데 그는 ‘못 본 듯이 지나간다’. 서러웠지만 흰 빨래는 희게 하고 검은 빨래는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시끌벅적하다. 그러지 않아도 서러운데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가관이다. 네 낭군이 지금 사랑방에 와 있으니 어서 가서 인사드리고 오너라. 서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사랑방에 건너가 보니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낭군님이 앉아 있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술상을 차려놓고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는 중이었다. 이것을 본 며느리는 아랫방으로 물러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 목매달아 죽어버린다. 격정적인 성정을 지녔던 것 같다. 아님, 그동안 낭군님을 목숨처럼 그리워했든지. 그 말을 들은 진주 낭군은 깜짝 놀라 버선발로 뛰어나와 통곡하며 이렇게 울부짖는다.
‘화류계 정은 삼 년이고 본댁 정은 백 년인데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남자가 자기 배우자가 아닌 여자와 스캔들이 있으면 로맨스이고 풍류인가. 나이 들어도 여전히 자신의 젊음이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인가. 혹은 철없을 때 몰랐던 사랑을 철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진짜 사랑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냥 인생이 무료해서 생의 활력소가 필요한 건가. 어느 경우든 상관없다. 사랑이든 바람기든 당사자야 행복하면 그만이지만 때론 그 행복이 배우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진주 낭군은 백 년이나 되는 본댁 정에 비해 삼 년밖에 되지 않은 화류계 정이 짧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삼 년이 삼백 년이 될 수도 있다. 남자는 안정적인 가정은 유지한 채 어여쁜 기생이 뜯는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권주가를 부르는 것이 풍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멋들어진 풍류가 누군가에게는 풀뿌리까지 사정없이 뽑아버리는 세찬 바람일 수 있다. 신윤복이 ‘청금상련’에 그려 넣은 군자의 꽃이 그걸 얘기해 주려는 것은 아닐까.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죽는다
세월이 흘러 주름주름 늙어지게 되면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것이 별거 아니란 걸 알게 된다. 풍류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흘러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까짓 것이 입에 거품 물고 따져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목숨을 걸 만큼 절박한 사건은 더더욱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젊었을 때야 어디 그러랴.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 사소한 것 때문에 목숨이 왔다갔다 할 때가 젊음 아닌가.
모텔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연꽃만 쳐다보면서 매미처럼 비명만 지르던 때의 번민도 지나놓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싸우는 것도 시시해지는 나이가 되면 아무리 세찬 바람도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을 피우기까지 어떻게 뜨거운 여름을 버틸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