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의 ‘매화서옥도’ 19세기 중엽, 종이에 엷은 색, 32.4×36.1㎝ 국립중앙박물관 |
반가운 친구가 찾아왔을 때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는 이 글은 논어(論語)의 첫 장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두 번째 문장이다. 그런데 보석 같은 이 문장은, 바로 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라는 문장의 유명세에 밀려 만년 2인자의 자리를 면치 못했다. 중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특별히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이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해석과 함께 ‘학이시습지…’라는 원문을. 예전에는 첫 번째 문장이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두 번째 문장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더하여 혼자 느끼는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면 더욱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책을 읽다 온몸이 전율하듯 멋진 문장을 발견했을 때 친한 벗에게 전화해서 자랑하고 싶었던 순간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연둣빛에 기다림을 담다
‘배우고 때로 익히는 기쁨’이 개인적 차원이라면 ‘벗이 있어 찾아오는 즐거움’은 공감의 차원이다. 이 즐거움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이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 매화꽃이 눈꽃처럼 휘날린다. 이런 날은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감히 매화꽃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 출렁거리는 마음을 무시한 채 책만 읽을 정도로 무례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무시해도 좋다. 이 정도 외도로 자책한대서야 어디 각박해서 살 수 있겠는가. 떠밀리며 살아온 시간을 내려놓고 잠시라도 꽃을 향해 외도를 해볼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은 길을 싱싱하게 떠날 수 있다.
역시 그림 속 주인공은 아름다움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인 듯하다. 서재에 앉아 매화를 감상하던 선비가 피리를 들었다. 흥에 겨워 피리를 불자 지나온 자리마다 폐허로 가득했던 과거 위에 꽃잎이 떨어진다. 피리 소리와 꽃잎의 춤사위에 서늘한 슬픔이 따뜻해진다. 파렴치한 외로움은 허물어지고 참혹했던 그리움마저 슬그머니 빗장을 푼다. 친구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거문고를 어깨에 메고 다리를 건너는 선비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빨리 가서 피리 소리에 맞춰 거문고를 뜯기 위함이다. 백아와 종자기가 아니라도 오랜 세월 마음을 나누다보면 누구나 지음(知音)이 된다. 지음은 굳이 연인이 아니라도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사이다. 그러고 보니 서재 안의 선비가 창문을 열어 두었던 까닭이 꼭 매화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늘 찾아오기로 한 지음이 어디쯤 오고 있을까, 기다리고 있음이렸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연두색이라면 달려가는 사람의 마음은 붉은색이다. 눈 덮인 산과 언덕 곳곳에 봄의 발자국처럼 찍혀 있는 연두색은 아침부터 창문 열고 친구를 기다린 사람의 마음이다.
선비들의 매화 사랑
오른쪽 구석에 ‘역매 오경석이 초옥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亦梅仁兄草屋笛中)’라고 적혀 있어 방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 놓았다.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1831~1879)은 대수장가요 감식가였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사를 정리한 ‘근역서화징’의 저자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오경석보다 6살 많은 전기가 친분이 두터웠던 오경석을 위해 그려준 것으로 이들 모두 조희룡(趙熙龍·1797~1859)이 만든 문학동인 ‘벽오사(碧梧社)’의 회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중인으로 전문화가는 아니었다. 전기는 약재상이었고, 오경석은 역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모두 그림으로 기억한다. 직업은 잊혀지기 쉬워도 예술작품은 오래 그 여운이 남는 법이다.
조희룡을 필두로 한 조선 말기 화가들은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매화도’를 많이 그렸다. 오경석의 호가 ‘또한 매화’라는 뜻의 ‘亦梅’인 것만 봐도 어지간히 매화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희룡의 매화 사랑도 그에 못지 않았다. 조희룡은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이 걸린 방에서 매화가 그려진 병풍을 둘러쳐 놓고,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에 관한 시를 썼다. 가끔씩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매화 차를 마시며 가슴을 적시곤 했으니 이 정도가 되면 ‘매화 매니아’를 넘어 ‘매화 오타쿠’라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그런데 매화는 조선 말기의 일련의 오타쿠가 등장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최초로 매화에 관한 책 ‘범촌매보(范村梅譜)’를 쓴 송대(宋代)의 학자 범성대(范成大)는 매화를 ‘천하의 으뜸이며, 높은 품격과 빼어난 운치를 겸비한 꽃’이라 극찬했고, 동 시대를 살았던 장공보(張功甫)는 ‘자태와 운치가 외롭고 빼어나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운을 띄웠다. 그렇게 시작된 매화 예찬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흔들더니 급기야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에게서 절정에 도달한다. 매화를 극진히 사랑하여 매화 시 100여수를 남긴 퇴계 선생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남긴 유언이 ‘매화에 물을 주라’였다.
돈보다도 거문고 들고 올 친구를 만들자
매화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힘든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기 때문이리라. ‘추울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고, 찬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 속에 피어나는 설중매(雪中梅)를 보며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 때로 시련이 인생의 품위를 무참하게 떨어뜨려도 지조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얻었다. 나는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칼날같이 예리해지는데 맹추위를 밀쳐내는 무기라는 것이 기껏 연약한 꽃잎이라니. 살짝 부끄러울 때도 있다. 부끄러운 내가 나 혼자의 몫으로 추위를 외로워할 때, 거문고 들고 찾아오는 친구는 나눔과 위로다. 추위를 함께 견뎌줄 수 있는 동지이자 반려자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세 번째 문장은 무엇일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이다. 젊은 시절 배우고 익히는 기쁨을 알고 난 후 나이 들어 벗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굳이 명예가 없어도 노여워할 이유가 없다. 혼자 있을 때의 충만함 위로 마음을 나눌 친구까지 왔는데 높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한들 무에 그리 서운하겠는가. 그만하면 됐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거친 밥에 야채만 먹는 노년이라도 이 정도 삶이라면 안분지족이다. 내 맘 알고 네 맘 알 수 있으니 외로울 일 없고 고독하게 죽어갈 일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준비할 것은 돈보다도 거문고 들고 올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 아니, 내가 피리를 불며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찾아오고 싶은 그런 친구가 되는 것이다. ‘매화서옥도’를 보며 꿈꿔 본 은퇴 후 모습이다
히시다 슌소 ‘왕소군’
봄은 왔는데 봄 같지가 않구나▲ 히시다 슌소 ‘왕소군’ 1902년, 비단에 채색, 168× 370㎝, 일본 산형 선보사 소장
매화꽃이 피었다. 산수유도 피었고 개나리·진달래도 피고 있다. 이제 복숭아꽃·살구꽃이 당도할 테고 벚꽃과 이팝나무까지 개화(開花)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 비로소 봄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낙화(落花)하게 될 것이다. 아무려나 지금은 봄의 시작일 뿐. 꽃이 피고 새가 울어도 부드러운 봄바람 속에는 아직도 지난 겨울의 찬 여운이 은밀하다. 거칠게 타오를 수도 절망할 수도 없는 시간. 봄은 봄인데 봄을 희망하기에는 꽃의 맹세가 너무 허약하다. 봄비 한번 내리면 후두두둑 떨어져 버릴 무서운 생존 앞에서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뜨거운 열매를 맺겠다는 산수유의 약속은, 증거를 들이대기 전에는 믿지 못하는 현실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추상에 의지하여 생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가.
깃털 같은 옷자락 속 여인의 슬픔
봄은 왔건만 도대체 봄 같지 않게 쌀쌀할 때 사람들은 탄식하듯 한마디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로다.” 가슴속에 응어리가 맺혀 좀처럼 풀리지 않을 때도 역시 한마디한다. “춘래불사춘이로다.” 사랑하는 정인(情人)한테 소식이 없을 때도, 정치인이 낙선해서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도 춘래불사춘이다. 뭔가 세상사가 마뜩잖으면 계절에 상관없이 무조건 춘래불사춘이다.
입만 열면 사람들이 춘래불사춘을 얘기하지만 기실 그 문장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왕소군(王昭君)이다. 왕소군은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이다. 많은 화가들이 아름다운 왕소군의 초상화를 다투어 그렸는데 히시다 슌소(菱田春草·1874~1911)의 ‘왕소군’도 그중의 하나다. 감상자의 눈길을 여인들에게만 향하게 하려는 듯 배경은 흐릿하고 몽롱하다. 실물대 크기의 여인들이 무더기로 서 있는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깃털같이 가벼운 옷자락 소리를 들었음 직하다. 파스텔톤으로 차려입은 여인들은 한결같이 곱고 우아한데 자세히 보니 이들 모두 비탄에 빠져 있다. 고운 여인의 슬픔이라니. 무슨 일일까.
왕소군이 남기고 간 눈물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기원전 75~33년) 때의 여인으로 18살 때 궁녀가 되었다. 양가집 딸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기품있고 고상했다. 아무리 꽃이 예쁘다한들 벌과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던 황제는 화공이 그린 궁녀의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선택했다. 궁녀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화공에게 뇌물을 주며 원판보다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의 초상화는 한번도 황제의 간택을 받지 못했다. 그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썰렁한 방에서 날마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울적하게 살았다. 그런 어느 날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되던 흉노의 왕이 한나라 공주나 후궁에게 장가를 들고 싶다고 전해왔다. 두 나라 간의 화친을 원했던 황제는 흔쾌히 승낙했다. 연회가 베풀어졌다. 황제한테 버림받은 궁녀들이 연회장에 나왔다. 그중에는 왕소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소군을 본 흉노의 왕이 단박에 그녀를 지목했다. 흉노의 왕이 왕소군의 손을 잡고 황제 앞에 섰을 때 황제는 지상에 유배온 하늘의 선녀를 보는 듯했다. 일찍이 선녀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무심함에 가슴을 쳤지만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황제는 애꿎은 화공의 목을 치라는 명령으로 그 아쉬움을 달랬다.
조금이라도 더 왕소군과 함께 있고 싶었던 황제는 혼례 준비를 핑계삼아 사흘 동안 그녀와 함께 지냈다. 그녀가 흉노 땅으로 떠나던 날에는 ‘소군(昭君)’이란 이름을 하사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한나라 황실과 황제를 빛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일본 화가 히시다 슌소의 작품 ‘왕소군’은 이 상황을 그린 것이다. 내일이면 정든 고국을 떠나 북풍이 휘몰아치는 흉노 땅으로 가야 하는 여인은 깊이 슬퍼했다. 그녀가 울자 시녀들도 울고 황제도 침실에서 신음하며 울었다. 비 내리는 고모령만 넘어도 부엉새가 우는데 영영 고국을 떠나야 하는 여인네의 울음이 어찌 짧겠는가. 왕소군의 울음은 질기고도 길었다.
비파를 타며 노래하는 왕소군
왕소군을 그린 그림은 여러 점이 남아 있다. 명대(明代)의 구영(仇英·16세기 초엽)과 금대(金代)의 궁소연(宮素然), 청대(淸代)의 화암(華嵒·1682~1756)이 왕소군을 그렸고, 조선의 강희언(姜熙彦·1738~1784)도 동참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왕소군이 국경을 넘어 흉노 땅으로 떠날 때 비파를 뜯으며 ‘출새곡(出塞曲·변방을 나서는 노래)’을 부르는 장면을 그렸다. ‘소군출한(昭君出寒)’ 혹은 ‘명비출새도(明妃出塞圖)’라는 제목이 붙은 일련의 그림들은 말을 탄 여인이 비파를 들고 있는 캐릭터가 특징적이다. ‘봄은 왔는데 봄 같지가 않구나’로 시작하는 왕소군의 노래는 어찌나 애절하고 사무쳤던지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그 노래에 심취하여 날갯짓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낙안(落雁)’은 미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자신의 운명을 어쩌지 못하는 자의 처연함이 담긴 ‘춘래불사춘’은 원래 당나라 때의 시인 동방규(東方叫·측천무후 때 활동)가 왕소군을 생각하며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그 표현이 너무나 정확하여 마치 당사자가 부른 노래처럼 와전되었고, 시인의 이름은 왕소군의 미모에 묻혀 잊혀지게 되었다. 왕소군의 운명을 안타까워하기는 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태백, 구양수, 왕안석, 황정견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입을 모아 그녀에게 찾아오지 않은 봄을 아쉬워했다. 지금도 여전히 시가,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문학작품 속에서 왕소군의 봄을 찾아주자는 동정론이 꾸준히 힘을 얻고 있다.
봄은 쉼 없이 오고 있다
그 많은 왕소군의 초상화 중에서도 히시다 슌소의 ‘왕소군’은 매우 특별한 작품이다. 다른 화가들이 모두 비파를 들고 말을 탄 왕소군만을 생각할 때 한나라 궁정에서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때문에 화면 속에는 왕소군뿐만 아니라 왕소군에 버금갈 만큼 고운 여인들이 여러 명 등장하여 감상자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메이지(明治) 말기에 일본인들이 중국 전통에 열광했던 분위기를 감안하면 변방을 나서는 왕소군 한 명보다 여인들의 그룹초상화를 그린 이유가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여인들이 모두 갑을을 다툴 만큼 아름답다 보니 누가 왕소군인지 가늠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발표했던 당시에도 논란이 분분했다. 과연 누가 왕소군일까. 찾아보시기 바란다.
봄은 왔는데 봄 같지가 않다고 탄식했던 왕소군. 그러나 봄은 온다. 그러니 아무리 추상적인 희망이라도 의심하지 말고 믿어보자. 김용택 시인이 그랬던가. ‘저 자연을 누가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라고. 그렇다. 봄은 그렇게 올 것이다.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다고 미심쩍어 하는 순간에도 봄은 오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오고 있다
안도 히로시게 ‘다마가와 강둑의 벚꽃’
하늘은 특정한 사람만 인자하게 대하지 않는다
일요일에 약속이 있어 여의도에 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날이었다. 서강대교를 건너자마자 인도에는 벚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도로는 차들로 주차장을 방불케 했고 횡단보도며 편의점 앞에도 줄을 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연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린아이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들도 있었고 우울한 표정으로 혼자 걷는 남자도 있었다. 거대한 인파에 떠밀리듯 위태롭게 걷고 있는 노부부도 눈에 띄었다. 겨우내 집에 웅크리고 있다가 거리로 나온 듯 상춘객들은 다양했다.
벚꽃을 찾아 나선 사람들
▲ 안도 히로시게 ‘다마가와(玉川) 강둑의 벚꽃’ 일본, 1857년, 37.4×25.3㎝, 일본 개인 소장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1797~1858)의 ‘다마가와(玉川) 강둑의 벚꽃’ 또한 여의도 풍경과 다르지 않다. 강둑에는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이 붉게 사그라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줄지어 서 있다. 봄을 찾아 나온 상춘객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꽃처럼 들떠 있다. 좀처럼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일본인이라지만 가슴속에 담긴 뜨거운 흥분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명소에도백경(名所江戶百景)’이라고 적힌 제목과 ‘히로시게 작’이라는 뜻의 ‘광중화(廣重畵)’에 칠한 붉은색이 파란 강물과 대비되면서 풍선처럼 경쾌하다. 왼쪽 담장 안에 핀 홍매화와 여인들이 입은 붉은 기모노 자락이 제목과 호응하는 구도도 산뜻하다.연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린아이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들도 있었고 우울한 표정으로 혼자 걷는 남자도 있었다. 거대한 인파에 떠밀리듯 위태롭게 걷고 있는 노부부도 눈에 띄었다. 겨우내 집에 웅크리고 있다가 거리로 나온 듯 상춘객들은 다양했다.
벚꽃을 찾아 나선 사람들
‘명소에도백경’은 막부 세력이 에도(江戶)에 수립한 신흥도시의 아름다움을 우키요에(浮世繪·목판화)에 담은 내용이다. ‘새조차도 둥지를 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척박한 도시 에도가 후세 사람들의 뇌리에 아름다운 장소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와 안도 히로시게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서다. 두 사람 모두 ‘팍스 도쿠가와’로 평가받는 막부 통치체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 풍조로 자리 잡은 여행 붐에 맞춰 풍경판화를 제작했다.
여행자들은 짐을 꾸릴 때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통속소설과 함께 교토, 에도, 오사카 등 각지의 명소를 그린 풍경판화를 함께 넣었다. 우키요에 작가들은 처음에 감상자의 예민한 요구를 반영하여 풍경판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자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가츠시카 호쿠사이와 안도 히로시게의 풍경판화 시리즈는 그들이 발견한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다. 유럽에 ‘자포니즘’ 열풍을 일으킨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은 강렬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반면 후배 격인 안도 히로시게의 작품은 서정적이면서도 시적이다. ‘다마가와 강둑의 벚꽃’은 자연을 바라보는 안도 히로시게의 개성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벚꽃을 사랑하는 이유
여의도와 그림 속 상춘객들 사이에는 150여년이라는 긴 시간의 강이 흐르고 있다. 여의도와 도쿄라는 장소 또한 시간의 강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공간이 전혀 다른 두 장소의 상춘객들이 한결같이 벚꽃을 보고 행복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도 좋아하고 연인들도 좋아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벚나무는 단지 봄이 되어 꽃을 피웠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탄성을 지른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뛰쳐나간다. 꽃이라면 무조건 반색하며 환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꽃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이 가장 클 것이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꽃가지에서 일시에 피어나는 꽃 타래를 보면 아무리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생명의 경이로움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는 이유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화사함 때문이라면 뭔가 부족한 대답이다. 외면적 아름다움만 얘기한다면 성질 고약한 미인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출중한 미모는 아니지만 마음씨 고운 여인을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렇다면 꽃이 지니는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꽃이 베푸는 보시(布施)의 공평무사함에 있을 것이다. 벚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에 차별이 없다.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만 특별히 예쁜 모습을 골라서 보여주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인색하게 감추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싱싱한 연인들에게도 무뚝뚝한 중년에게도 힘없는 노인에게도 연약한 어린아이에게도 꽃은 아름다움을 선사함에 한 치의 차별이 없다. 이것이 자연의 공평무사함이고 인자함(仁)이다.
노자(老子·BC 6세기경)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런 자연의 공평무사함을 일컬어 ‘천지불인(天地不仁)’하고 ‘천도무친(天道無親)’한다 했다. ‘하늘과 땅은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고’ ‘하늘의 도(道)는 특정한 사람을 골라서 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늘과 땅은, 평생을 빈민구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마더 테레사 같은 성녀에게만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 산속 깊은 암자에 숨어 몇 년째 장좌불와(長坐不臥)하는 선승(禪僧)에게도 베풀고, 경찰서 취조실의 아동성추행범에게도 베푼다. 하늘의 도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농부하고도 친하지만 법망을 피해 불로소득을 취한 탈세혐의자하고도 친하다. 하늘과 땅의 도는 절대평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인생길이 선인과 악인으로 갈라지는 것은 하늘의 도가 불공평하기 때문이 아니다. 똑같이 태양빛을 받고 자라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땅의 도리 때문이다. 결국 선인과 악인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둔다는 하늘과 땅의 도를 따라 그렇게 살 뿐이다. 내가 어떤 씨앗을 뿌려 가꿀 것인가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 달렸다.
벗꽃에 배운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서 하늘과 땅의 도를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이 벚꽃의 공평무사함을 닮게 되면 이 세상에 다툼이 없어질 것이다. 벚꽃은 어떤 경우에도 잔소리가 없다. 간섭이 없다. 민첩한 사람에게도, 굼뜬 사람에게도 그 행동을 탓하지 않고 함구한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사람은 벚꽃이 될 수 없지만 벚꽃의 인자함(仁)은 닮을 수 있다. 더딘 사람이 넘어지고 깨지면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성질 급한 사람이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것이 인(仁)이다. 상대방이 조금만 실수를 해도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벚꽃에 배워야 한다. 회의 때 사사건건 내 의견에 토를 다는 상사가 거슬린다면 그 사람 역시 벚꽃에 배워야 한다.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 내 종교만이 최고라는 사람, 내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사람도 벚꽃에 배워야 한다. 벚꽃이 가르쳐주는 자연의 도리를 배워야 한다.
얼마 있으면 천지를 뒤덮으며 골고루 사랑을 베풀었던 벚꽃이 질 것이다. 벚꽃이 진다고 울면 안 된다. 벚꽃이 지고 나면 철쭉이 필 것이다. 철쭉이 진다해서 울면 안 된다. 모란이 피기 때문이다. 모란이 지고 나면 울어야 할까, 울 일이 아니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꽃이 피는 것이 도(道)라면, 꽃이 지는 것도 도(道)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길이다. 꽃이 피어 공평하게 베풀었듯 떨어져 열매를 맺는 것도 자연의 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을 서러워해서는 안 된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추억이라는 열매가 열리기 때문이다. 서러워하려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앉은 사람을 전폭적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해야 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노자의 이 가르침을 여의도 벚꽃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꽃같이 사는 법에 대해, 나도 꽃처럼 고민해본다
김홍도 ‘마상청앵도’
선비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 김홍도 ‘마상청앵’ 종이에 연한 색, 117.2×52㎝, 간송미술관 |
말 타고 가다 봄의 소리를 듣다
그림 속 선비도 봄을 찾아 나선 것일까? 김홍도(金弘道·1745년~?)가 그린 ‘마상청앵(馬上聽鶯·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은 이즈음 풍경이다. 시자(侍者)가 끄는 말을 타고 가던 선비가 언덕길에서 새소리를 들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올 때부터 줄곧 들려오던 새소리의 근원을 찾아보니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노란 꾀꼬리 두 마리가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그냥 스쳐 지나갈까 하다가 그 노는 모습이 하도 다정하여 잠시 말을 멈춰 서서 뒤돌아본다. 봄날의 시정(詩情)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작품이다.
나무 그늘이 만들어 놓은 공간 아래 주제가 되는 인물을 그려 넣는 구도는, 예로부터 작가들이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를 그릴 때 흔히 쓰는 고전적 수법이다. 김홍도는 이 작품에서 전통적 구도를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새롭게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이유는 화면을 운용하는 탁월한 감각 때문이다. 선비가 고개를 돌려 꾀꼬리가 앉아 있는 버드나무를 쳐다보자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선비의 시선을 따라간다. 주인공은 분명히 말 탄 선비인데 선비의 시선을 통해 교감을 나눈 버드나무와 꾀꼬리의 존재가 부각된다. 시선 처리가 그만큼 중요하다. 선비의 시선은 선비와 꾀꼬리와 관람자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기존의 소경산수인물화 속의 나무가 그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무대장치에 불과했다면 ‘마상청앵’에서의 버드나무는 주인공만큼 중요해졌다. 기존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화면 구성이다.
감탄할 것이 어디 구도뿐이랴. 필법과 묵법 또한 절묘하다. 가는 선묘로 처리한 인물과 몰골법(沒骨法·형태의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바로 먹이나 물감으로 그리는 화법)으로 그린 말의 대비가 그만이다. 선비와 시자가 입은 옷은 선으로 그려 몸을 감싸고 있는 의복의 기능을 강조했다. 반면 몰골법으로 그린 말에서는 부드러운 털의 질감이 느껴진다. 이런 대비는 버드나무에서도 반복해서 적용되었다. 두꺼운 껍질로 뒤덮인 줄기의 아랫부분을 구륵법(鉤勒法·형태의 윤곽을 선으로 그린 다음 그 가운데를 색칠하는 화법)으로 그려 연륜을 표현했다면, 연녹색 잎사귀가 돋아난 가지는 몰골법으로 그려 연약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안정된 구도 속에서 말과 버드나무와 꾀꼬리에 칠한 연한 물감이 길가에 자라난 풀과 맞물려 봄의 운치를 더해준다.
선비의 눈을 통해 본 버드나무와 꾀꼬리
버드나무 위의 꾀꼬리를 쳐다보고 있는 선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그림을 볼 때마다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길을 가던 선비가 새소리에 무심히 고개를 돌려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유자적한 선비가 봄나들이 삼아 자연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럴 때 그림 속 주인공의 행동은 넉넉한 집안 양반의 유한 취미 정도로 비쳐진다. 상단에 적힌 이인문(李寅文·1745~1821년)의 제시도 여유로운 사람의 넉넉한 삶의 운치를 암시하고 있다.
‘가인은 꽃 아래에서 천 가지 피리 소리를 듣고(佳人花底簧千舌),
시인은 술독 앞에서 한 쌍의 귤을 보는구나(韻士樽前柑一雙).
언덕 위 버드나무를 어지러이 누비는 저 꾀꼬리(歷亂金梭楊柳岸),
안개와 비를 엮어 봄의 강을 짜누나(惹烟和雨織春江).’
제시를 쓴 이인문은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를 그린 사람으로 김홍도하고는 아주 가까웠다. 김홍도는 때때로 이인문, 김응환(金應換), 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강희언(姜熙彦)의 집에 모여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니만큼 ‘마상청앵’에 제시를 쓸 때도 김홍도의 제작의도를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이인문이 쓴 제시에서는 봄날을 완상하는 선비의 넉넉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게 전부일까? 목소리 고운 꾀꼬리 소리에 반한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굳이 다른 나무도 아닌 버드나무 위에 앉은 새를 보고 있는 선비의 마음은 어떠할까. 버드나무는 한시(漢詩)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특히 이별의 장소에는 어김없이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왕유의 시에도 정지승의 시에도 정몽주, 서거정, 이정구의 시에도 버드나무는 이별의 슬픔으로 울먹거리며 측은하게 서 있다. ‘천안삼거리 흥~능수야 버들은 흥~’으로 시작되는 민요 속의 천안삼거리에도 버드나무가 있다. 세 갈래 길로 갈라지는 삼남대로의 분기점에 버드나무를 심은 뜻은 거꾸로 꽂아도 살아나는 버드나무처럼 어딜 가더라도 건강하라는 격려가 담겨 있을 것이다. 헤어지는 사람이 정인(情人)이라면 ‘잠자는 창밖에 심어 두고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라고 했던 기생 홍낭의 연정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건 어떠한가.
‘수양버들 시냇가에 비단 빨래 하노라니
흰 말 탄 선비님이 손 잡으며 정을 주네.
손 끝에 남은 향기야 차마 어이 씻으리.’
- 이제현 ‘손 끝에 남은 향기’(손종섭 해석)
비단 빨래를 하는 것을 보니 화자(話者)는 여인일 것이다. 흰 말 탄 선비가 지나가다 여인의 손을 잡았다. 길 가던 사람이야 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손을 잡힌 여인은 님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혹시 그림 속의 선비가 방금 전에 빨래터를 지나갔던 사람은 아닐까. 장난 삼아 한 행동이었는데 버드나무 위에 앉은 꾀꼬리를 보자 그녀가 떠올랐을 것이다. 유리왕(瑠璃王)이 지은 황조가(黃鳥歌)에서처럼 ‘펄펄 나는 저 꾀꼬리’가 암수 서로 정다운 것을 보고 갑자기 외로워졌는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버드나무 위의 꾀꼬리는 떠나간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오늘도 그림 속에서 인생을 만나다
버드나무를 보며 걷다 보니 냇가 곁에 뒷산으로 길이 나 있는 삼거리까지 왔다. 산에 오를까 말까 잠시 망설이며 서 있는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또래쯤 되었을까. 그는 이제 막 산을 향해 오르려는 듯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서 있었다. 삼거리 길에 심어진 버드나무에는 꾀꼬리 대신 까치가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는 스틱을 짚고 서서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평일 오전인데도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을 보니 팔자 좋은 사람이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돌아서려다 말고 나는 그 자리에 딱 멈춰서고 말았다. 아, 수심이 가득한 그의 표정이라니. 몇 년 전에 남편이 실직했을 때 봤던 바로 그 표정이 아닌가. 그때 남편은 버드나무가 피는지, 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할 사람이 하루 종일 산을 오르내리며 건조하게 봄소식을 전해주었다. 저 남자도 그러겠지. 그림 속의 인물도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어쩐지 눈빛이 슬퍼 보이더라니. 삭탈관직되어 낙향하는 길에 암담한 심정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더란 말인가. 진심으로 그림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이여. 막막한 인생을 헤쳐 나가는 것의 지난함이여. 오늘도 나는 그림 속에서 인생을 만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