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04

박재삼 詩가 일러주는 삼천포의 정한(情恨)

경남 사천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빛으로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시 ‘울음이 타는 가을강’ 전문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나 그런 추억이 있을라나. 산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때마침 제사라도 든 날, 아버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십리 길 읍내를 다녀온다. 지난 번 장날 어머니가 미처 마련하지 못한, 호롱불에 쓸 석유며 참기름도 사고 해서 강 건너 아득한 들판 길을 가로질러 왔건만 심부름을 잘못했다는 야단만 실컷 맞는다. 억울함에 못 견뎌 닭똥 같은 눈물을 찔끔거려 보지만 거들떠보는 식구 하나 없다.

 

부엌에서 풍기는 부침냄새의 유혹도 마다한 채 어둑한 뒷산 바위에 오르면, 내려다보이는 것은 때마침 저녁놀을 담고 흐르는 강물, 대밭 사이로 퍼져 오르는 저녁연기. 그리고 창마다 환한 꽃잎 같은 등을 켠 열차가 들판 끝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 무렵의 몹쓸 고단과 허기보다 더 모질게 치밀어 오르던 슬픔을 기억하려는가.

 

억울해서가 아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깨닫는 인생의 막막함. 사랑과 운명의 서글픔 때문이다. 읍에 갔던 길에 굳이 소방서 옆의 그 계집애 집 앞까지 가고 말았다. 마주쳐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소리를 들으며 그 골목을 오르내렸던 것이다.

 

세월은 벼락처럼 흘러갔다. 옛 동리는 그대로 남았건만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함께 골목을 뛰어다니던 동무들마저 없다. 텅 빈 옛집을 지나 해 지는 뒷산에 오르면 큰 뱀 같은 강 하나가 온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전신의 비늘로 가을 햇살을 튕기며 들판 사이로 흘러가고 있다. 읍내 살던 여자애는 캐나다에 유학 간 아이들을 따라가 지금은 몬트리올인가 어딘가 살고 있다 했던가?

박재삼(1933~1997)의 시들은 이렇듯 허량한 생애의 본원적 비애를 환기시킨다. 서럽고 막막한 유년의 회억(回憶), 언제나 찰나에 지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한탄, 자연과의 부조화에서 더욱 커지는 일상의 고단. 그는 이 정감들을 ‘순수의 슬픔’으로 드러내는 음유시인이다.

 

삼천포에 가면 아직도 시인 박재삼을 만날 수 있다. 그 눈물겹도록 어여쁜 바닷가 작은 도시가 시인 박재삼을 키웠으며 그의 시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순수의 슬픔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삼천포 가는 행로가 한결 수월해졌다. 아직 공사가 덜 끝난 탓에 진주를 벗어난 다음부터는 옛 도로를 이용해야 하지만 대전 사람들이 세 시간 차를 달려 삼천포며 통영 바닷가에서 싱싱한 회 한 접시를 먹을 수 있으리라곤 예전에 생각지를 못했다.

한데, 삼천포를 찾아가는 길에 ‘삼천포’는 없다. 전날의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합해져 사천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삼천포 사람들은 사라진 지명에 대한 향수가 지극하다. 녹색 바다가 한결같고 풍습과 인심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거죽의 이름이 내용 마저 쉬이 고칠 수 있음을 아는 탓이다.

 

삼천포란 이름이 지니는 정겨움, 애틋함, 어여쁨에 비하면 사천은 되레 각박한 느낌을 준다는 것은 물론 선입관이며 편견일 수 있다. 그래도 삼천포는 삼천포라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고집불통의 삼천포 팬들이 수두룩한데 비록 객인이지만 나 또한 삼천포 이름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운동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의 하나가 되었다.

 

도심에 든 뒤에도 굳이 어디로 갈까 하고 이정표를 보고 행인을 붙잡아 길을 물어볼 필요가 없다. 땅 끝 도시로 왔는데 어디로 가든 바다밖에 더 만날 것이 있겠는가. 제법 이국적인 풍정마저 느끼게 하는 단아한 도심을 그렇게 관통하면 조촐한 산봉 하나가 심지 깊은 정인(情人)인 듯이 수줍게 나그네를 맞아준다. 노산(魯山)이다.

 

노산은 시의 중심부에서 바다 쪽으로 돌출한 갑(岬)에 홀로 서 있던 작은 산이다. 밀물 때는 뭍에서 떨어져 섬이 되기도 했는데 시가지를 새로 형성하던 때 해안 일대를 매축해 더 이상 바다 나들이를 하지 못하게 했다고 전한다.

산 전체를 공원으로 꾸민 노산은 삼천포를 가장 삼천포답게 해주는 해안 정원이다. 주변에 기품 있는 찻집까지 거느린 운치 있는 층계 길을 통해 산정 공원에 올라서면 시가지는 물론 한려수도의 거울처럼 맑고 푸른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까닭 모를 순결성마저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보면 이윽고 여정의 종착에서 갖는 안도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 공원에도 시인의 생전 소박한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시비(詩碑) 하나가 서 있다. 솔숲은 솔숲대로 저만치 떨어져 있고 몇 그루 동백나무가 허술하니 둘레를 만들고 있는 자리다. 세월이 하 오래되지도 않았건만 돌에 새겨진 문자들은 벌써 바닷바람에 바랬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돌에는 시 ‘천년의 바람’ 일부가 새겨져 있다. 천년을 여일하게 간지럼 태우기 장난질을 하는 바람과 솔가지, 그 절대 자연에 비하면 턱없이 무상한 인간 삶. 그 대비법은 이러한 자연 속에서 더욱 명징해진다고 여기면 산 위의 돌에 새겨지는 시로서도 제격이다. 근래에는 남들은 가만있는데 제가 앞장을 서서 그리고 제 돈 들여 제 시비를 세우는 바보 같은 시인들도 없지 않은데, 가난한 시인이 살아있을 적에 그의 시를 적은 돌을 세울 줄 안 삼천포 시민들의 자랑과 긍지가 갸륵하다.

 

삼천포 앞바다

명경한 슬픔 가르친 팔포 바닷가

오솔길을 지나 마침내 이른 곳, 바닷가 암석 위에 오도카니 정자가 서 있다. 넓으나 막막하지 않고 고우나 화려하지 않은 바다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요지다. 바람이 지극히 삽상한데 파도는 또 쉼 없이 해안 바위를 올라타며 포말을 일으킨다. 허구한 날 이런 자리에 앉아 지치도록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어찌 저절로 시가 읊어지지 않으리.

 

시인 박재삼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 팔포 바닷가다. 팔포는 사천시 서금동과 동금동 사이에 있는 한내천의 중심 지역. 노산 기슭을 따라 형성돼 있던 마을은 20여 년 전 갯벌이 매립되면서 본격 상업지역으로 개발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세 살 때부터 스무 살이 넘도록 살았다. 어머니는 멍게 장사, 아버지는 부두 짐꾼이었는데 하도 가난해 중학교 진학조차 하질 못했다.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

화월(花月)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 층층대 밑에

옹송거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싸서

나를 향해 남 몰래 던져 주었다.

(중략)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많이 먹었다며

빤한 거짓말을 꾸미고

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

뜰에 나서면

바다 위에 달이 떴는데

내 눈물과 함께

안개가 어려 있었다.

- 박재삼 시 ‘추억에서. 30’

 

혹독한 가난의 아픔과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가난은 죄가 아니다. 하여 가끔 가난은 사물의 본원적인 순수성이며 미학을 포착게 하는 물기 머금은 영롱한 시선을 주기도 한다. ‘슬픔’과 ‘서러움’에서 명경(明鏡)의 미학을 얻어내는 박재삼의 안목도 여기서 유래됨은 물론이다.

 

1980년대 초, 나는 서울 광화문의 한 다방에서 시인과 처음 대면했다. 당시 어떤 문학지에서 주문받은 ‘실명소설 박재삼’을 쓰기 위해서였다. 내게 시인은 우선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선배였다. 그 무렵 시인은 불행히도 풍을 맞아 몸의 한쪽을 거의 쓰지 못하는 처지였다. 생계를 위해 정기적으로 쓰고 있는 바둑 해설 글조차 딸아이의 손을 빌려 쓸 수밖에 없는 딱한 지경이었다.

“방법이 따로 뭐 있겠어? 한의사 친구가 말하더군. 다시 어린애가 됐다 치고 천 리 길을 가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배워야 한다고.”

근황을 묻는 질문에 시인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병이 생기고 나니 새삼 절감되는 게 있더라고. 그동안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 있지, 책상이며 만년필 심지어 내가 입고 있는 옷가지 하나까지도 내 것이 아니더라고. 희한하지?”

이제 시인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한다. 그가 거닐던 노산 언덕에는 여전히 바닷바람이 솔가지를 간질이고 있고 팔포 거리에는 횟집들이 늘어서서 싱싱한 생선들을 놀리며 손님들을 부르고 있지만 그는 그 좋아하던 소주 한잔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삼천포가 온전히 삼천포로 있기에, 또 사람들 가슴에 그의 시가 남아 있기에 노산공원에서 그리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해안 거리에서 그를 만나는 일은 영 어렵지 않다. 이제 노산 언덕에는 번듯하니 박재삼문학관이 서 있다. 생전에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시인은 사후에 누리는 셈이다.

 

   

다솔사 올라가는 길목

 

시인 떠난 바닷가에 남은 문학관

삼천포에는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삼천포 시가를 병풍처럼 둘러싼 채 바다를 바라보고 선 해발 801m의 와룡산은 의연하면서도 준수하다. 하늘에서 보면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이런 산 이름이 유래됐다. 5월 철쭉이 만개하면 온 산이 진홍색으로 물들어 장관을 연출한다는데 내가 올랐던 때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임내저수지에서 산행을 시작해 도암재, 새섬봉을 거쳐 정상인 민재봉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숨이 턱에 차고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러나 전신으로 바닷바람을 맞이하며 호쾌한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바닷가 큰 산에서만 누리는 복이 됨을 절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산을 내려와 우연히 만난 작은 절 청룡사에서 마신 석간수의 상쾌함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남해고속도로 곤양 인터체인지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고찰 다솔사도 사천을 찾는 여행객들이 꼭 한 번쯤 들르는 곳이다. 절간 자체가 제법 운치 있는데다 봉암산, 봉명산, 천왕산 등 해발 300m 안팎의 주위 산들이 산행을 즐기는 이들에게 기대 밖의 풍광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에는 만해 한용운, 최범술, 김범부 등의 인사들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식민지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제법 경사가 있는 돌층계를 오르면 아담한 절 마당이 나타나고 이어 위풍당당한 대양루를 만나게 된다. 누각을 돌아 다시 층계를 오르면 적멸보궁과 부처님의 진신 사리탑을 만날 수 있다. 그 너머 산비탈은 야생 녹차 밭이다.

   

젊은 날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이곳 절간에 칩거하면서 작품 ‘등신불’을 썼다고 한다. 스스로 육신을 태워 부처의 자리에 이르는 소설의 이야기도 그 상상과 결구(結構)의 현장에서 떠올리면 되레 몽롱한 것이 되지만, 그 이완과 모호의 접점에 다솔사가 있기에 가을바람 속으로 분분히 은행잎을 날리는 절간은 그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또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