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_걷고 싶은 길 12선

醉月 2011. 10. 16. 06:45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걷고 싶은 길 12선

[표지이야기1] 자신과 대화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길이 되는 걷기… 숨겨진 주옥같은 길들을 두루 아우른 ‘걷고 싶은 길 12선’

» » 진안고원 마실길 1-1 코스 중간에 위치한 신광재의 고랭지 채소밭 곳곳에서 농부들이 일하고 있다. 걷다 보면 잊고 사는 삶과 만난다. 한겨레21 이종찬

걷기(Ambulo)가 사유(Cogito)에 선행했다. 200만 년 전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선 원시인류에게 걷기는 숙명이자 축복이었다. 먹기 위해, 먹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이동해야 했던 그들이 동물계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올라서기까지는 두 발로 걷는 능력이 결정적 사다리가 됐다. 직립보행은 두 손을 해방시켜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했고, 도구 사용은 두뇌 용량의 증대와 지능 향상을 가져와 사고와 소통 능력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호모사피엔스(사유인)에 앞서 호모에렉투스(직립인)가 있었다는 고인류학의 발견도 이런 발생학적 추론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의식의 독립 선언은 다음과 같은 인간학적 진술로 번안될 수 있다.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라

 

걷기는 인간 본연의 행위 양식이지만 그것이 때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되기도, 성애의 열락을 능가하는 절정의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채찍과 감시병을 동반한 정치범의 유배길이 절대 성지를 향한 순례자의 걸음처럼 가벼울 수 없는 것은 걷기라는 행위에 수반된 목적과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걷기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일깨울 요량이라면, 그에 걸맞은 좋은 길을 찾는 것이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왕도가 된다.

» »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오대산 옛길. 두 절을 잇는 군용 작전도로가 뚫리기 전, 절을 오가는 승려들과 화전을 일구던 민초들이 이용했던 이 길의 양편에는 소나무, 참나무, 당단풍나무 등 수목들이 빽빽하다. 한겨레21 박승화
<걷기의 철학>을 쓴 크리스토프 라무르는 걷기와 길의 관계를 이렇게 기술한다. “길은 나의 발걸음을 지탱한다. 길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허공에 허우적거리거나 진창에 처박히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저항을 내 발걸음에 제공한다. 걷기는 발과 땅의 일치를 보여주고 인간과 땅의 오랜 공모를 드러낸다.” 사람은 길을 걸음으로써 잊고 있던 자신의 몸을 직접 느낀다. 대지에 밀착한 두 발과 척추를 통해 육체에 가해지는 중력의 하중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탓이다. 그래서 걷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몸무게에 의해 실존주의자도 되었다가 유물론자도 된다.

걷기에 좋은 길이 반드시 풍광이 뛰어난 명소일 이유는 없다. 걷기의 쾌락은 시각적 자극보다는 걷는 행위 자체가 빚어내는 심리적 행복감에 의해 그 강도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걷기의 고수들은 구경거리를 찾기보다 ‘즐거운 기분’을 찾아 길을 떠난다고 입을 모은다. 걷기는 삶을 짓누르는 근심을 잠시 멈추게 하고, 자신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되살아나게 하며, 쳇바퀴 같은 일상에 가려 있던 가치들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운다는 얘기다. <걷기 예찬>을 쓴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말한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걷기에 반드시 동행이 있어야 할 필요 또한 없다. 혼자 걷는 것은 명상과 성찰의 필요조건이다.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걷기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혼자여야 한다”고 썼다. 동반자가 있다면 자유로운 걷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그에게 단체로, 심지어 둘이서 하는 걷기는 산책이 아니라 소풍일 뿐이다.

그래도 혼자 걷는 고독이 부담스럽다면 데이비드 소로가 쓴 <걷기>의 한 구절을 읽어봐도 좋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함으로써 얻게 되는 저 심오하고 신비한 그 무엇과도 작별이다.”

 

 

먼저 가는 옛길과 마실길

 

<한겨레21>이 산림조합중앙회와 함께 선정한 ‘걷고 싶은 길 12선’은 산길과 계곡길, 마을길을 두루 아우른다. 최근의 걷기 열풍을 주도하는 제주 올레길나 지리산 둘레길만큼 풍광이 화려하거나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결같이 걷기의 매력과 희열을 맛보기엔 부족함이 없는 주옥같은 길들이다. 이번호에는 여름휴가철을 맞아 찾기에 적합한 3곳을 먼저 소개한다. 깊은 계곡과 울창한 원시림이 백미인 화엄의 성지 오대산 옛길(강원 평창군)과 화전을 일궈 살아가던 고단한 민초들의 삶이 오롯이 깃든 소백산 자락길(경북 영주시), 삼남지방 최대의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진안 마실길(전북 진안군)이다. 길을 나서는 데 필요한 건 하루의 시간과 튼실한 두 다리뿐, 이제 떠날 시간이다. 암불로, 에르고 숨.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 연재 순서
1. 오대산 옛길·소백산 자락길·진안 마실길
2. 왕피천길(경북 울진)
3. 사려니숲길(제주)
4. 퇴계 오솔길(경북 안동)
5. 덕풍계곡길(강원 삼척)
6. 분주령 야생화길(강원 태백)
7. 정약용 유배길(전남 영암·해남)
8. 남명의 길(경남 산청)
9. 강화 나들길(인천)
10. 북한산 둘레길(서울)

 

 

신발코를 보며 옛길을 걷다-①소백산 자락길

[걷고 싶은 길 12선] 조금 가팔아도 나무와 꽃으로 눈과 코가 즐거운 소백산 자락길…죽령옛길이 포함된 길에도 4대강 사업의 흔적은 남아

» 소백산 자락길은 '걷는 길'이라기보다는 가벼운 등산로에 가깝다. 근대화 이전 영남 사람들이 이용했다는 죽령옛길처럼, 길마다 역사·문화적 이야기가 숨어 있는 점이 자락길의 특징이다. 한겨레21 김경호

전날 늦게까지 여자월드컵 결승전을 봤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공이 두세 차례 골대를 맞고 나온 미국 여자축구대표팀이 승부차기에서도 실축하는 장면을 본 게 불과 밤 10시께 아니냔 말이다. 게다가 새벽 공기는 시원하고 달았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시원한 모텔에서 7시간 넘게 잤다. 가방에 든 건 소형 디지털카메라와 작은 생수 한 병이 전부다. 7월19일 오전 10시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므로 걷기 시작해 1시간 만에 등과 다리가 땀에 젖은 이유는 다른 데 있음이 분명했다.

 

 

주막거리가 번성하던 길

 

경북 영주시 소백산 자락길 3코스는 제법 경사가 가팔랐다. 장마가 끝나 숲 바깥은 30℃를 넘었지만 자락길은 시원했다. 소백산 자락길엔 신갈나무, 졸참나무 등이 무성하다고 자락길 안내책자는 소개했다. 책자에 따르면 붓꽃과 솔나리도 분명 널려 있을 게다. 7월18일에 이어 소백산 자락길 산행 이틀째인 외지인에게 아직 나무와 꽃을 분간할 눈은 열리지 않았다.

자락길 3코스 입구에서 만나 30분째 나와 동행하고 있는 50대의 경상도 등산객도 꽃과 나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말에 사람으로 미어터져요. 아, 여기 길 좋그릉. 사람이 아주. 난 오늘 딱 와요. 사람 없을 때 운동하기 좋그릉.” 본능처럼 나오는 경상도 말투와 된소리를 눌러가며 그는 어색한 서울말로 소백산 자락길에 대해 쉴 새 없이 말했다. 오전 10시30분 그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이끼와 풀로 뒤덮인 돌담이 있었다. 돌담 옆에 영주시에서 만든 안내판이 보였다.

“상권의 통로, 죽령옛길-죽령옛길은 경상도 동북지역에서 서울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로서 당시 과거를 보러가는 유생·장사꾼·나그네 등이 많이 이용하던 매우 큰 길이었다. 그래서 이 길 곳곳에는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는 주막과 떡집, 짚신가게, 그리고 먹고 잘 수 있는 객점과 마방이 성행하던 주막거리가 크게 번성하였다. 죽령옛길에는 당시 4개의 큰 주막거리가 있었는데 소백산역 앞 ‘무쇠다리’ 주막거리, 과수원 끝에 위치한 ‘느티정’ 주막거리, 죽령 정상의 ‘고갯마루’ 주막거리가 있었고 그중 규모가 가장 작은 이곳이 ‘주점’ 주막거리였다.”

 


 

» 한겨레21 김경호

4.6km에 이르는 터널인 용부원길이 개통되기 전 옛사람들이 다녔던 길이 소백산 자락길 3코스의 죽령옛길이다. 소백산 자락길은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에 걸쳐 소백산 주위에 거대한 마름모꼴로 형성돼 있다. 초암사에서 시작하는 1코스부터 12코스까지 개발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09년 자연과 문화·역사 자원을 특성 있는 스토리로 엮은 걷기 중심의 길인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시범사업지로 소백산 자락길 등 7곳을 선정했다.

소백산 자락길 문화생태 탐방로는 2009년 소수서원부터 죽계구곡, 초암사, 달밭골, 비로사, 삼가호, 풍기온천, 죽령옛길을 거쳐 죽령고개까지 34km가 먼저 개발되었다. 이후 2010년부터 소수서원에서부터 소백산 자락을 따라 단산면~부석사~봉화 오전리~남대리까지 연결 작업을 진행해 올해 안에 끝마칠 계획이다. 죽령옛길이 포함된 3코스는 ‘소백산역~죽령주막~연화봉(해발 1383m)~희방사’로 이어진다. 천천히 걸으면 약 6시간이 걸리는 트레킹 코스다.

 

 

부석사, 조선 제일 사색로

 

오전 11시30분이 되자 길이 더 가팔라졌다. 고개가 전방을 주시하는 대신 등산화 신발코를 지켜보는 일이 잦아졌다. 신발코와 전방을 번갈아보다 갑자기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한옥 지붕을 얹은 정자가 나타났다. 죽령옛길의 마지막은 죽령이었다. 길을 다 걷자 죽령을 가로질러 충북 단양과 이어지는 5번 국도와 휴게소가 나타났다. 시야 왼편에 ‘충청북도 단양’이라는 표지가, 오른편에는 ‘경남관문 죽령-여기까지 경상북도 영주시입니다’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었다. 잠시 끊겼던 자락길은 죽령휴게소 근처에서 다시 시작됐다. 연화봉과 희방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시멘트로 포장돼 걷기 편하지만 등산로에 버금가는 경사도는 마찬가지다. 여행안내서 (전기환·시공사)는 소백산에 대해 ‘겨울 산행을 즐기기에 좋은 산’이라고 소개했다. “산세가 웅장하면서 부드러운 것이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산행’이라는 여행안내서의 표현대로, 소백산 자락길은 평탄한 ‘올레길’과 결이 다르다. 7월18일 걸어본 ‘초암사~비로사~삼가야영장’(자락길 1·2코스)도 제법 가팔랐다. 등산화는 필수다. 허약한 어린이가 오르기에 무리가 있어 보인다. 대신 다종다양한 나무와 꽃의 보고다. 눈과 코가 즐겁다. 소백산 자락길은 지난 7월14일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한국 관광의 별’ 생태관광 부문에 선정됐다. 탐방객의 이해를 돕는 안내판도 세심하게 만들어졌다. 가족 단위로 오되, 편하게 쉬기보다 땀 흘리며 활동하고 즐기는 데 초점을 맞추면 될 것 같다.

소백산 자락길이 연인의 휴가지보다 가족의 휴가지로 맞춤한 이유는 또 있다. 역사·문화 관련 볼거리가 널렸다. 자락길 10코스 주변에 있는 부석사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이 여기 있다. 부석사는 서기 676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량수전 옆에 선묘낭자의 의상대사를 향한 애틋한 사랑의 전설이 깃든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가 아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다고 해서 ‘뜬돌’이라 부른 데서 절 이름이 연유한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길,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9품 만다라’가 일품이다. 유홍준이 ‘조선 땅 최고 사색로’라고 칭송한 길이다.

 

» 자락길 1코스인 초암사 근처 길옆에는 계곡이 계속 이어져 있다. 한여름에도 손이 시릴 정도로 물이 차다. 2코스에 있는 삼가야영장은 계곡 옆에 위치해 찬 공기가 아래로부터 불어온다. 한겨레21 김경호

자락길 1코스 출발 지점에는 소수서원이 있다. 16세기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사액받은 뒤부터 운영에 국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일종의 국립대학인 셈이다. 입구 오른쪽으로 죽계천이 흐른다. 뒤편에 ‘선비촌’이라는 이름으로 식당, 주점, 찻집이 줄지어 있다. 천천히 걸으며 돌아보는 데 1시간이면 족하다. 이 밖에도 솔향기 농촌체험마을, 옥녀봉 자연휴양림 등 가족이 이용할 만한 쉼터가 적지 않다. 7월18일 지나쳤던 삼가야영장에는 장마가 끝나자마자 발 빠르게 캠핑하러 온 가족들의 대형 텐트가 많았다. 야영장 바로 옆 계곡에서 찬 바람이 올라와 시웠했다.

쇼핑거리가 다양하지는 않다. 영주시의 특산물로 풍기인삼, 영주사과, 영주한우, 풍기인견(비단), 단산포도 등이 꼽힌다. 지역 음식으로는 단연 묵밥이 손가락에 든다. 묵밥은 멸치 육수에 도토리묵과 썬 김치를 담고 통깨와 참기름으로 양념해 만든다. 죽령휴게소에 위치한 ‘죽령주막’(054-638-6151)의 산나물 등이 좋았다. 1인분에 1만2천원인 정식에 묵은지, 파전, 취나물, 산채비빔밥 등이 한 상 가득 나왔다.

 

 

“길은 모두 일가친척”

 

생태관광지로 꼽히는 소백산 자락길도 4대강 사업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소백산 자락길 2번째 자락 금계호 주변이 수자원공사에서 시행하는 둑 높이기 사업으로 통행에 제한이 있습니다. 이 구간을 이용하시려면 금계리 입구에서 욱금동 펜션마을까지 차도를 이용해야 합니다’라고 소백산 자락길 안내 홈페이지에 공지글이 올라 있었다. 영주 시민들은 지난해 6·2 지방선거 때 4대강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한나라당 소속 김관용 현 도지사에게 74.8%의 찬성표를 줬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후보는 각각 11.49%, 4.44%, 8.38%를 득표했다.

“죽령 시원하지요? 바람 불면 한여름에도 춥다니까.” 죽령옛길을 같이 오른 경상도 남자와 연화봉 가는 길 초입에서 헤어졌다. 오후 1시 연화봉 근처에서 하산하는 길에 그가 화투판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4대강 사업을 하자는 한나라당을 찍었을 확률이 높다. 그와 둑 높이기 사업에 대해 대화하지는 않았다. 자락길 기사에 소개하고 싶다고 이름을 물었다. “에이, 저는 그런거 안 해요.” ‘길은 모두 일가친척, 걷는다는 것은 가까운 친척을 만나는 것입니다’라는 입간판이 서 있는 죽령옛길에서 만난 그는 스스럼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소백산 자락길을 무척 좋아하고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 소백산 자락길

 

■ 교통편
서울에서 소백산 자락길 가는 길
자가용: 서울∼경부(중부)고속도로∼신갈(호법) IC∼영동고속도로∼남원주 IC∼중앙고속도로∼풍기 IC(영주 IC) 소요시간 2시간30분
버스: 영주여객(문의 054-633-0011)
철도: 철도공사(문의 054-639-2256)

 

■ 여행 정보
소백산 자락길 정보
영주문화연구회: 054-636-5636, 소백산 자락길 홈페이지 www.sanjarak.or.kr, cafe.daum.net/sbsrle
영주시청: tour.yeongju.go.kr

볼거리 관련 정보
선비촌 관광안내소: 054-637-8586
소수서원 관광안내소: 054-639-6259
부석사 관광안내소: 054-638-5833

 

노루, 고라니 기척과 함께 걷다-②진안고원 마실길
[걷고 싶은 길 12선] 잃어버린 고향길의 원형을 간직한 진안 마실길… 숲길 지나 만난 마을 할머니가 “뭣 하는 양반이여?” 묻네

» » 전북 진안 백운면 영모정에서 고원으로 오르는 길 옆 비사랑마을. 한겨레21 이종찬
도시인들이 시골 마실길의 정취를 알지는 모르겠다. 고개를 넘어가면 한 마을이 나오고 또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마을이 나오는…. 전북 진안의 고원 마실길은 어린 시절 내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잃어가는 고향, 우리 농촌의 삶이 오롯이 보인다. 시속 110km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이 있다.

차는 내륙으로 내륙으로 달린다. 교과서에 나온다지만 까마득하다. 진안도 대관령처럼 고원이다. 평균 해발 400m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가다 진안을 20km 남짓 남겨뒀을까. 에어컨을 켠 차가 힘겨워한다. 길은 줄곧 오르막이다. 멀리 마이산(해발 686m)이 보일 때가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름처럼 두 봉우리의 모양이 말의 귀를 빼닮았다.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는 마이산이 더 설레게 만든다. 진안읍내 모습이 소박하다.

 

마을을 8개나 잇는 1코스

 

진안고원 마실길은 4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읍내에서 13km 가까이 떨어진 백운면 평장보건진료소 인근 영모정에서 출발해 원덕현마을에 이르는 10.2km가 1코스 ‘고개 넘어 백운길’(약 3시간30분), 영모정에서 신광재를 거쳐 신전마을로 가는 19.48km가 1-1코스 ‘신광재 가는 길’(약 7시간)이다. 2코스 ‘내동산 도는 길’(4시간30분)은 원덕현마을에서 중평마을로 가는 11.75km다. 마지막 3코스 ‘섬진강 물길’(약 5시간40분)은 중평마을에서 반용마을을 지나 오암마을에 이르는 16.94km다. 1-1코스 일부를 빼면 한 구간의 끝이 다음 코스의 출발점이다.

코스 가운데 최고를 뽑으라면 1번 코스다. 다른 코스도 마을을 잇지만 이 길은 마을을 8개나 잇는다. 세운 지 140년이 넘는 영모정에 오르면 아래 미재천 계곡의 물소리와 매미 소리가 귀를 울린다. 미계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고자 1869년(고종 6년)에 세웠다. 아담한 크기에 너새(돌너와)를 얹은 지붕이 눈에 띈다. 바로 옆에 신의련 효자정려각 등이 세워져 있다. 미룡정을 지나면 바로 산길이 나타난다. 한적한 산길을 한참 가다 보면 참깨밭, 고구마밭, 옥수수밭이 보인다.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신전마을이다. 농부들이 트랙터를 세워놓고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조금 더 걷자니, 한 노인이 옻나무에 거름을 주고 있다.


» » 전북 진안 백운면 영모정을 지나 '신광재 가는 길' 들머리의 하미치마을에서 마을 노인들이 쉬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이게 무슨 나무예요?” “참옻 아니여. 닭에 넣어서 해먹잖여.” 고추밭에 고추가 벌써 빨갛게 익어간다. 상백암마을을 지나 백암교 아래 계곡이 부른다. 흘린 땀을 씻기에 충분히 깊고 넓다. 한참을 쉰다. 닥실고개로 가는 흙길을 걷다 뱀 한 마리가 스르륵 지나 깜짝 놀랐지만 산딸기가 달래준다. 검은 막이 쳐진 인삼밭을 한참 지나니 은번(은안)마을이 보인다. 허물어진 빈집이 여럿이다. 감나무가 있는 돌담집에 강아지가 경운기 옆에서 컹컹 짖는다. 원반송마을에 이르니 아기가 요란하게 울어댄다. 돌을 갓 지났을까? 할아버지가 고추를 내놓은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느티나무 천변숲으로 나온다.

지팡이를 든 할머니가 묻는 말이 난감하다. “뭣하는 양반이여? 우리 집에 테레비가 안 나와. 잘 나왔는데…. 못 고치는가?” 할머니 옆에 만육 최양 선생을 기리고자 130년 전에 세운 구남각이 있다. 그 옆에 100년이 넘은 학남정과 개안정이 서울 손님을 맞는다. 그 아래 계곡에서 놀러온 청년 7~8명이 수영을 한다. 나도 뛰어들고 싶다. 할머니들이 낯선 사내를 한참 쳐다본다. “어디서 온겨? 아따, 쪼까 앉지 그래. 앉아….”

백운천이 흐르는 석전·무등 마을을 지나 원덕현마을로 접어드는데 차가 씽씽 달리는 큰길이다. 1코스의 마지막 원덕현마을에 이르니, 마을회관 앞에 어르신 4명이 앉아 있다. 다시 묻는다. “뭣하는 양반이여?” 한 어르신이 일러준다. 풍혈냉천에도 가보라고. 찬 바람이 술술 나온다고. “밥을 넣어두면 쌀이 돼.”

 

 

고랭지 채소, 멧돼지 주의

 

1-1코스는 1코스보다 훨~씬 길고 험하다. 영모정을 지나 계곡을 따라 왼쪽으로 걷다 보면 하미치마을이 나온다. 얼마 뒤 노촌호가 나오는데, 섬진강 유역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당산바위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는 비사랑마을을 지나면 성수산(해발 1059.2m)이 깊어진다. 한참을 가도 마을은 없고 숲길이 이어진다. ‘멧돼지 출현주의’ 지역이라 긴장했는데, 대신 노루인지 고라니인지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다. 산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이 멋지다.

» » 전북 진안군 성수면 반용마을 섬진강 물길 위로 놓인 옛 반용교를 한 아낙이 걷고 있다(위쪽 사진). 전북 진안군 진안읍내에서 마이산을 향해 한 시민이 아침 산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걷기에는 산이 깊은 1-1코스는 신광재가 보상해준다. 진안고원의 제맛이 느껴지는 고랭지 채소밭이 나온다. 해발 740m의 탁 트인 신광재에 배추, 무, 씨감자들이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한 달 된 무는 좀 크고 심은 지 열흘 된 것은 갓 난 작은 입이 땅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땡볕 아래 아낙네 두 명이 잡초를 매고 있다. “고랭지 농사할 만한 곳은 강원도 대관령을 빼면 여기뿐이지요.” 40대 농부는 전북 전주에서 여름 한철 진안으로 나와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농부의 팔과 얼굴이 온통 짙은 구릿빛으로 탔다. 땡볕에다 태풍의 영향으로 씨감자 줄기가 많이 뒤집혔다. “여기도 이제 많이 따뜻해져서 농사가 잘 안 돼요. 농약값도 많이 들고. 중장비가 있어도 무 솎기 같은 것을 하려면 인부가 필요한데 사람도 없고.” 낯선 사내와 말을 나누는 아빠 옆으로 5살 딸이 달려온다. 맨발에다 옷에는 온통 흙이다. 튼실하다. “친구가 없으니까 저기 밭이랑 왔다갔다 하면서….” 신광재를 지나면 다시 줄곧 산속이다. 길은 차가 다닐 만큼 넓지만 다니는 것은 날짐승과 산짐승뿐이다. 그때쯤 멀리 마이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를 꺼내 마이산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는다. 덕태산이 깊어지면 다시 ‘멧돼지 출현주의’ 표지판이 보인다. 산속을 언제 벗어나나 싶지만 그나마 계속 내리막이다. 신전마을이 반갑다.

2번 코스는 원덕현마을을 지나 구신치를 넘으면 원구신마을이 기다린다.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한 뒤 개성으로 돌아가던 중 신하를 구하는 혈의 형국이라 하여 구신리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모정 옆에는 바위가 갈라져 백마가 나왔다는 노적바위가 있다. 하염북마을 앞 742번 지방도는 옛날 전북 고창에서 장수까지 등짐으로 소금을 나르던 행상길이었다. 상염북마을을 지나면 한참이나 마을이 없는 숲속 산길이 이어지지만 저만치 내동산(해발 887.5m) 풍경이 한적함을 달래준다. 내려오는 숲길이 시원하다. 중평저수지가 보이면 중평굿으로 유명한 중평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1코스만큼은 아니어도 상염북마을을 지나서는 걷기에 험하다.

 

 

여성 3~4명이 함께 가길

 

3번 코스는 섬진강 물길을 자주 만난다. 찻길도 자주 만난다. 점촌마을에서 길을 잃고 헤맬 즈음 “그쪽으로 가면 길이 없어. 저쪽으로 가야지, 저쪽으로.” 소에게 여물을 주던 아주머니가 길을 가르쳐준다. 반용마을 옛 다리에서 마을 청년이 낚시질을 한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포동마을이다. 300년 된 정자나무가 있는 양화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사흗날 당산제가 올려진다. 바로 옆이 풍혈냉천이다. 종점인 오암마을에 이르니 그동안 봤던 마을보다 훨씬 크다. “멧돼지·노루 땜에 뭣을 못혀. 다 뜯어먹어.” 한 아낙네의 시름이 깊다.

7월30일 4개 구간 개통식을 여는 진안고원 마실길을 걷는 사람은 아직 드물다. 제주도 올레처럼 그림 같은 풍치를 찾는다면 진안고원 마실길은 어쩌면 실망할지 모른다. 혼자 걷는다면 전 구간이 해발 300m를 넘지 않는 3구간을 빼면 즐기며 걷기에는 산이 깊거나 한적하다. 작고 듬성듬성한 이정표에 가끔 길을 헤맨다. 그래도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여성이라도 3~4명이 함께라면 추억에 남을 길이다. 길 따라 걷기만 하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모른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 » 진안고원 마실길

 

■ 교통편
서울에서 진안고원 마실길 가는 길
서울·대전 방면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장수·익산고속도로~진안IC~국도 30호~진안읍·마이산 도착
버스: 서울→진안 10:10, 15:10. 진안→서울 10:30, 14:35(진안버스터미널 063-433-2508)

 

■ 여행 정보
진안고원길 063-433-5191
진안군청 063-430-2331~2333

 

■ 여행 팁
걷는 도중에 물이나 음료수를 살 곳이 없으니, 미리 사거나 동네 작은 슈퍼가 나오면 사두는 게 좋다.
걷는 길에서는 여행 정보가 따로 제공되지 않아, 인터넷이나 진안군청 등에서 숙박 및 인근 관광 정보를 미리 챙겨야 한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숲길을 걷다-③오대산 옛길
[걷고 싶은 길 12선] 울창한 숲길과 오대천 줄기를 번갈아 만나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 옛길… 스물다섯의 가을을 보냈던 그곳엔 화전, 일제 등 역사의 흔적이 남아
» » 오대산 전나무 숲길에서 바라본 월정사 일주문. 수령 100년 안팎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양편으로 도열한 이 길에 서면 사위에서 풍겨오는 신비스런 기운에 걷는이의 마음은 저절로 숙연해진다. 한겨레21 박승화
오대산은 육산이다. 산은 높고 골은 깊되, 등성이가 완만하고 몸피는 풍성하다. 북쪽으로 마주한 설악산이 남성적이라면 오대산은 여성성이 두드러진 산이다. 예로부터 오대산을 백두·지리·묘향·덕유산과 더불어 한반도의 ‘5대 덕산’으로 꼽아온 것도 이 산의 후덕한 자태와 무관하지 않다.

옛길은 산의 초입인 월정사에서 상원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20리(8km) 오솔길이다. 넉넉잡아 3시간이면 완주할 수 있다. 길은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거쳐 두로령으로 이어지는 옛 446번 지방도(2009년 폐쇄)와 나란히 진행된다. 애초에 군사작전용이던 지금의 도로가 개설되기 전(1960년대 말) 상원사의 승려들과 화전을 일궈 살던 민초들이 이 길을 오갔다.

 

 

겸손히 신발을 벗고 걷자

 

옛길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판은 월정사 제재소가 운영 중인 회사거리에 있다. 하지만 옛길 걷기의 첫걸음은 더 아래쪽인 월정사 일주문에서 떼는 것이 좋다. 오대산이 자랑하는 1km 길이의 전나무 숲길이 일주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수령 100년 안팎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양편으로 도열한 이 길 앞에 서면 사위에서 풍겨오는 신비스런 기운에 걷는 이의 마음은 저절로 숙연해진다. 마사토가 깔린 부드러운 흙길에 두 발을 내디딜 때면, 겸손히 신을 벗어 대지의 자애로움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나무 숲길을 빠져나와 월정사 주차장을 지나면 상원사로 이어지는 옛 지방도다. 도로변 부도밭에 멈춰 마음을 가다듬고 재차 걸음을 재촉한다. 멀리 왼편으로 높다란 나무 울타리가 보인다. 월정사가 불사에 쓰일 목재를 조달하려고 운영 중인 직영 제재소다. 일제강점기 이곳에는 일본인 소유의 목재 회사가 있었다. 오대산에서 베어낸 나무를 자르고 가공하던 곳이다. 회사거리라는 명칭도 그때 생겼다.

회사거리 앞 옛길의 시작점에서 본격적인 탐방에 들어간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다. 인간이 발명해낸 가장 원시적인 교량이다. 옛길과 만나는 오대천에는 6개 징검다리가 있다. 성인 두 사람이 올라설 만큼 육중하고 평평한 돌을 골라 바닥을 다졌지만 큰물이 지면 기울고 떠내려가 다시 놓는 수고를 반복해야 한다. 징검돌 사이로 흐르는 물이 수정처럼 맑다. 이 물의 주인은 버들치, 금강모치, 열목어 같은 1급수 물고기들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울창한 숲 사이로 완만한 오솔길이 펼쳐진다. 우기를 거치며 한층 촘촘해진 나뭇잎 사이로 반가운 여름 햇살이 은빛으로 부서져내린다. 부서진 빛줄기는 조릿대의 윤기 나는 잎새에 부딪쳐 숲 전체로 퍼져나가는데, 이로 인해 오솔길 주변은 온통 상서로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 빛을 뚫고 한참을 걸어가면 ‘화전 금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시멘트 표지석을 만난다. 40여 년 전 산자락의 화전민들을 소개(疏開)하며 세운 것이다.

» » 오대산 옛길은 돌과 흙과 물과 바람과 숲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걷기 여행의 보고다. 옛길이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는 오대천의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고 얼음처럼 차가워 물속에 담근 손이 5초를 견디기 힘들다. 한겨레21 박승화

한때 옛길 주변에는 300가구가 넘는 민가가 있었다. 모두가 화전민은 아니었다. 식민지 시기부터 벌목업이 성행하다 보니 산림 벌채에 종사하던 사람 수가 오히려 많았다. 화전민들은 조개골, 동피골, 신선골 등 오대천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곳곳에 귀틀집을 짓고 살며 조와 콩, 메밀 따위의 작물을 길렀다. 이들이 언제부터 오대산에 터를 잡고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반도 화전의 역사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학계의 연구 결과로 미뤄 그 시기를 월정사 창건기인 7세기 전후로 추정할 뿐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급감했던 화전민은 전후 식량난이 가중되자 다시 늘어나다가 1968년 정부가 화전정리법을 공포한 뒤 자취를 감췄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직후의 일이다. 화전민이 살던 귀틀집과 척박한 화전의 자취는 옛길 주변에 널린 돌무더기 위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낙엽층이 쌓인 양탄자 같은 길

 

화전민의 흔적을 뒤로하고 발길을 재촉하니 길은 다시 오대천을 만난다. ‘보메기’란 푯말이 서 있는 이곳은 과거 오대산에서 벌목한 나무들을 모아두던 곳이다. 월정사 법철 스님에게 지명의 유래를 물었더니 이런 설명이 돌아온다. 운반 수단이 마땅찮던 시절, 오대천 계곡물은 베어낸 나무들을 산 아래로 실어나르던 유일한 운송로였다. 하지만 육중한 통나무를 운반할 만큼 계곡물의 양이 사시사철 풍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보를 쌓아 가둔 물에 나무들을 띄워놓은 뒤 수량이 늘어난 우기에 보를 터뜨려 한꺼번에 하류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보메기의 기원이 ‘보막이’였음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숲길을 뚫고 한참을 진행하니 하천을 가로지른 목조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1960~70년대 농촌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섶다리다. 통나무로 교각을 세우고 잔가지로 상판을 엮은 뒤 흙을 덮어 보행의 안정성을 높인 가설 교량이다. 허약한 구조와 부실한 부재 탓에 우기가 오면 유실될 수밖에 없는 1년짜리 다리였다. 옛길의 섶다리는 상판을 높이고 교각 사이를 넓혀 우기에도 떠내려갈 걱정이 없다는 게 오대산공원사무소의 설명이다.

섶다리를 지나면 선재농장이 나온다. 절집에서 먹을 무, 배추 등을 재배하는 상원사의 텃밭이다. 주변에 넓은 개활지가 드문 탓에 이곳은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때 오대산지구 대간첩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숙영지로 사용됐다. 당시 군인 신분이던 기자는 이곳에서 30일 넘게 텐트를 치고 스물다섯 살의 가을을 보냈다. 숙영지 생활은 단조로웠다. 아침을 먹은 뒤 UH-1H 헬기를 타고 산 정상으로 이동해 계곡을 한바탕 훑고 내려오면 짧은 해가 졌다. 어둠이 깔리면 D형 텐트에 몸을 눕히거나 오대천변 매복지로 ‘근무’를 나갔다. 작전의 긴장감은 갈수록 떨어졌다. 20일을 넘기자 우리는 산자락에 은거해 있을지 모를 북한 정찰국 요원보다, 불시 점검을 나오는 군기 감찰반의 존재에 신경을 더 곤두세웠다. 차단망은 뚫렸고, 정찰국 요원은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타고 휴전선을 넘었다. 부대로 복귀한 뒤 포상은커녕 숙영지 군기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사흘간 연병장을 포복해야 했다.

군 시절의 우울한 기억을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길은 동피골을 거쳐 상원교로 이어진다. 호령봉의 가파른 동쪽 사면을 따라 이어진 이 길은 오대산사무소 쪽이 길을 트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었다는 구간이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수목의 줄기들을 무섭게 자란 다래덩굴이 뱀처럼 휘감았다. 좁고 굴곡이 심한 길이지만 바닥은 썩은 초목 부스러기와 켜켜이 쌓은 낙엽층 덕분에 양탄자 같은 푹신함이 느껴진다. 오대산 자연환경안내원 최승화씨가 노루오줌, 물레나물, 십자고사리 등 생경한 야생풀의 이름을 하나하나 일러준다. 용평스키장이 있는 강원도 평창군 횡계면 발왕산 자락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을 제외하곤 줄곧 고향에 머물러왔다는 최씨는 어린 시절 3시간 거리의 초등학교까지 산길을 걸어 통학한 강골 산처녀다. 2006년부터 오대산사무소에서 일하며 숲길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마침내 다다른 무릉도원

 

신선암 입구를 지나 종착지인 상원탐방지원센터까지는 평탄한 흙길에 폭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이 구간에는 1930년대 목재를 수송하려고 일본인들이 부설했다는 협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법철 스님 말로는, 상원사 주변에서 벌목한 나무를 궤도 차량에 실어 월정사 아래로 가져오면 소달구지를 이용해 진고개 너머 주문진항으로 옮겼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주로 베어간 수종은 박달나무였다. 목질이 단단한 오대산 박달나무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보병의 주력 화기였던 99식 소총의 개머리판을 깎는 데 사용됐다. 협궤는 해방 뒤 방치되다가 1950년대 후반 철거됐다.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보행자들 민원이 빗발쳤던 탓이다.

종착지가 가까워질수록 공기의 서늘함은 강도를 더해간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넘어온 건조한 산바람이 차가운 계곡물과 접촉해 만들어낸 냉각 효과 덕이다. 마지막 징검다리 위에 올라 계곡물에 손을 담근다. 뼛속까지 아려오는 냉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선다. 상원탐방센터의 수은주는 한낮임에도 21℃를 가리킨다. 여기가 무릉도원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 오대산 옛길

 

■ 교통편
승용차: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진부IC~월정사
동서울터미널~진부시외버스터미널(배차 간격 30~40분), 진부터미널~월정사(군내버스, 배차 간격 약 1시간)

 

■ 여행 정보
오대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033-342-6417
오대산 월정사 033-339-6800

불편함으로 아름다움을 즐기다-④ 왕피천길(경북 울진)
[걷고 싶은 길 12선] 자연환경과 풍광 빼어난 생태·경관보전지역 경북 울진 왕피천…
사람의 손길 닿지 않아 천만다행인 ‘시원’의 아름다움
» 경북 울진군 왕피천 학소대 근처에서 물을 건너며 계곡 트레킹을 하고 있는 탐방객들.
윤대녕 때문이다. 맥주, 빌리 홀리데이, 호피인디언 같은 단어는 천구백구십몇년 스무 살 언저리의 감성을 전율시켰다. “세계는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져 있지. 자넨 지금 저쪽으로 와버린 거야”라든가, “정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아주 낯선 곳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삶의 사막에서, 존재의 외곽에서”라든가,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 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같은 문장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대도 좋았다.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평을 받았던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을 읽던 날부터, 소설에 등장하는 경북 울진 왕피천은 ‘로망’이었다.

 

물, 바윗길, 금강송의 반복

 

왕피천은 경북 영양군 일월산 동쪽 기슭 수비리에서 발원해 울진군 왕피리 등을 거쳐 동해까지 66km를 흐른다. 대령산, 통고산, 천축산에 둘러싸인 계곡이다. 소설처럼 은어와 연어가 산란을 하려고 찾아들며, 쏘가리·산천어·꺽지 같은 물고기, 산양·고라니·담비·수달 같은 멸종위기 동물도 왕피천 주변에 산다. 그래서 이 일대는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오랫동안 품었던 로망에, 자연환경과 경관이 뛰어나다는 정보까지 더해지니 왕피천을 향해 가는 내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7월26일 오전 10시 드디어 그곳에 발을 디뎠다. 왕피천을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S자로 흐르기 때문에 때때로 5~8m 폭의 물을 건너며 계곡 트레킹을 하든, 계곡 옆으로 난 생태탐방로를 걷든. 생태탐방로는 지난해 개방했는데, 울진군 근남면 구산3리 상천동부터 서면 속사리까지 5km 구간이다. 그 사이엔 도로가 없다. 나는 계곡 트레킹을 선택했다.

출발 전 울진군청에 문의하니, 구산3리 굴구지 산촌마을(구고동)의 옛 구고분교(지금은 조청 공장)에 주차를 하고 트레킹을 시작하란다. 가서 보니 이곳은 사유지라 마음대로 차를 대서는 안 된다. 다행히 주인장의 배려로 주차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윗마을인 상천동까지 올라가 대구지방환경청 왕피천 환경출장소 상천초소 앞에 차를 두는 게 좋겠다.

 

옛 구고분교 옆길로 내려오니 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귀는 즐겁지만 2~3일 전 비가 온 탓에 물빛이 그리 곱지는 않다. 표지판은 보이지 않는다. 아랫마을 쪽에서 시작했으니 위쪽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또한 처음부터 건너편으로 물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상황이다. 이 구간은 허벅지 깊이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물살이 제법 세다. 바닥의 돌 몇 개는 미끄럽기도 하다. 트레킹화를 신었지만 잠깐씩 몸의 균형을 놓친다. 지리산·설악산·한라산 같은 큰 산도 탔고, 제주 올레·지리산 둘레길·청산도 슬로길 같은 트레킹 코스도 제법 다녔다고 왕피천을 만만하게 여긴 건 오만이었다.

 

왕피천 계곡 트레킹은 물, 바윗길, 모랫길과 대령산 자락에 쭉쭉 뻗은 금강송의 반복이다. 금강송에 눈이 맑아지지만, 바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땀이 나면 걷고 있는 이 길에 그늘을 만들어주기엔 먼 거리가 아쉽다. 물이 깊지 않은 곳은 가장자리를 따라 왕피천을 거슬러 오른다. 물 밖에서 걷는 것보다 힘은 더 들지만, 시원한 쾌감은 인공 냉매가 만들어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허리 깊이의 물을 건널 땐 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일행과 등산용 지팡이 양쪽을 나눠잡고 서로의 몸을 지탱했다. 고마움이 솟구친다. 로프를 준비해가면 좀더 안전하게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 왕피천 속사마을에서 상천마을 쪽으로 내려온다면, 구명조끼 등을 준비해 물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취사, 야영, 낚시할 수 없어

거슬러 오르며, 알을 낳고 죽으려고 마지막 힘을 다해 왕피천을 거꾸로 오르는 은어를 떠올렸다. ‘존재의 시원’ 같은 건 예술가의 감수성으로나 느낄 수 있는 법. ‘일반인’인 나는 그저 수박 향을 풍긴다는 은어를 한번 보고 싶었다.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그 대신 손가락 한 마디 길이만 한 물고기떼를 두어 번 만났다. 유치원·초등학교 때 방학마다 가 있던 외가 마을이 생각났다. 경남 김해의 작은 그 마을엔 도랑이 흐르는데, 추울 때가 아니면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빨래도 하고 멱도 감았다. 나도 여름방학 땐 외할머니를 따라가 물장난을 치고, 1~2cm 밖에 안 되는 물고기를 두 손 안에 가뒀다 풀어주며 놀곤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을에 화학공장이 들어서자 도랑이 하수도처럼 변한 탓이다. 왕피천 주변은 대형 버스가 진입할 수 없고, 오지라고 불릴 만큼 교통이 불편해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그 덕분에 깨끗하고 뛰어난 생태 환경을 자랑할 수 있다. 불편함이 아름다움을 즐기는 대가인 셈이다. 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목소리를 키울까 괜한 걱정이 든다.

 

“고라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던 내게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농수로 위쪽으로 고라니 한 마리가 신나게 뛰고 있다. 난생처음 본 고라니가 신기했다. “우와!” 자연히 입이 벌어진다. 고라니는 마치 몸값 비싼 연예인처럼 잠시 제 모습을 보여준 뒤 금세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아쉬움이 남아야 지켜주고 싶고, 또 보고 싶지 싶다.

상천초소를 채 못 가 사람 소리가 들린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여행객 20여 명이었다. 일행 말고는 이날 왕피천에서 처음 만난 이들이었다. 속사마을에서 아침 6시에 출발했단다. 구명조끼를 챙겨온 이들은 물속에 온몸을 담근 채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래프팅 못지않아 보인다. 배 아프게 부럽다. 구교동이나 상천동에선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을 안 해준 울진군청이 잠깐 야속했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똑같다”는 말은 왕복 코스라면 결과적으로 맞다. 조금 편하게 물을 즐기고 싶다면 속사마을 쪽으로 갈 땐 생태탐방로로, 상천동 쪽으로 갈 땐 물을 따라가면 된다.

상천초소를 지나니, 그곳에서 일하는 자연해설 안내원 도민호씨가 벌써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해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터였다. 대구지방환경청 왕피천 환경출장소에 문의하면, 자연해설 안내원의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 별도로 신청하지 않아도, 인원이 많거나 위험 구간을 지날 때는 안내원이 도와주기도 한다. 도씨는 “하루 평균 두 차례 상천~속사 구간을 왕복한다”고 했다.

용소까지 내처 걸었다. 용소는 수심이 5m가량으로 구간 가운데 가장 깊고, 양쪽 암벽 사이의 폭은 가장 좁다. 구명조끼와 튜브를 준비해 용소를 건너는 이가 간혹 있지만, 생태탐방로로 우회하는 게 안전하다. 용소를 둘러싼 암벽은 절벽 수준이기 때문에 바위 탈 생각도 접는 게 좋다. 생태탐방로로 들어서기 전 준비해간 김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왕피천에선 취사, 야영, 낚시가 금지돼 있다.

» 왕피천 생태탐방로

아무런 흔적도 없이 돌아와야지

 

생태탐방로로 올라서 용소를 바라보니 물빛이 검다. 깊어서다. 왕피천이라는 이름의 서러움을 품고 있는 듯하다. 왕이 피신한 곳이라는 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데, 누구인지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다. 그는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하자 반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이곳으로 피신을 왔다가 어머니가 죽자 혼자 금강산으로 갔다고 한다. 또 하나는 고려 공민왕이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받자 이곳으로 피신했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건 이성계다. 마의태자든 공민왕이든, 다른 나라의 내정간섭과 침입으로 국운이 다했음을 느끼며 첩첩산골로 숨어드는 지경까지 이르렀을 땐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왕피천을 왼쪽에 끼고 1m 남짓 폭의 생태탐방로를 걸었다. 우리보다 더 늦게 출발한 탐방객 예닐곱 명이 왕피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게 보인다. 이들을 발견한 도민호씨가 “생태탐방로로 올라오도록 안내해야겠다”며 바람처럼 그쪽으로 내려갔다. 우리 일행은 가던 길로 계속 걸었다. 주변은 주로 금강송과 굴참나무다. 두어 차례 가파른 고개를 올랐다 내려가니 학소대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속사마을까지는 아직 3km를 더 가야 한다. 벌써 오후 2시가 다 됐는데, 속사마을까지 갔다가 구고동까지 되돌아오기는 빡빡하다. 아쉽지만 여기서 발걸음을 되돌리기로 했다.

상천초소까지 생태탐방로를 이용했다. 1시간30분 정도 걸렸다. 초소에 올라 왕피천을 내려다보니, 저 길을 걸었나 싶다. 초소의 감시원이 “고생하셨다”는 인사와 함께 커피 한 잔을 건넨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한숨을 돌리니 도민호씨가 뒤따라 도착한다. 구고분교까지 차를 태워주겠다고 배려해줘 일어서니 앉았던 자리가 땀인지 물인지에 조금 젖어 있다. 금방 마를 테다.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고 돌아와야 왕피천이 계속 왕피천일 수 있을 테다.

 

 

■ 교통편

서울에서 왕피천 생태탐방로 가는 길

-상천초소: 경부·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국도 36번(봉화~울진 구간 굴곡 심함), 또는 영동고속도로~동해고속도로~국도 7번 이용해 성류굴교차로(북)에서 오른쪽 도로로 빠져나와 군도 9번
-속사초소: 국도 36번에서 통고산 자연휴양림 지나 삼근리에서 우회전~박달재~왕피리~속사마을
-대중교통: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아침 7시9분부터 저녁 8시5분까지 28차례 운행. 삼근리까지는 아침 7시30분부터 1시간20분 간격으로 6차례 운행.

 

■ 여행정보

-대구지방환경청 왕피천환경출장소 054-783-9377
-울진군청 문화관광과 054-789-6902
-울진군청 서면사무소 054-789-4321
-굴구지 산촌 생태마을 054-782-4294

 

■ 여행팁

-마을에는 마실 물을 살 곳이 없으니, 미리 충분히 사두는 게 좋다.
-계곡 트레킹을 한다면 허리 위까지 깊은 곳도 있으니 등산복 등 잘 마르는 옷을 입고, 배낭·카메라·손전화는 레인커버나 비닐 등으로 잘 감싼다. 등산화나 물이 잘 빠지는 트레킹화를 신는다.
-사전 여행정보 문의는 필수다. 불영사와 불영사계곡, 죽변항 등 주변 볼거리도 쏠쏠하다.

 

이 숲을 걸을 자격이 있을까-⑤ 사려니숲길(제주도)
[걷고 싶은 길 12선] 도도함으로 아름다운 생태자원의 보고 제주 사려니숲길…
‘올레 마무리’로 각광받아 탐방객 급증해 훼손 우려 일어

» 제주도 한라산 동쪽 경계에 있는 사려니숲길. 길 양쪽으로 삼나무 숲이 빽빽하다. 윤승일 한겨레21 기획위원

2009년 방송담당 기자를 할 때였다. 그해 유난히 드라마의 제주 현지 촬영이 많았다. 취재가 끝나면 부지런을 떨어 ‘올레’(‘집대문에서 마을길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말)에 한 걸음을 더했다. 올레가 트렌드였으니까, 새 길이 생길 때마다 완주를 다짐했다. 같은 시기 보존을 위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던 숲길 하나가 열렸다. ‘사려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숲길은 올레 다음’이라는 섣부른 판단에 사려니 숲길을 만나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다.

 

등산용 지팡이도 사용 금지

 

사려니 숲은 넓고 깊다. ‘산의 안’이라는 뜻의 ‘솔아니’가 변한 말이 ‘사려니’가 됐다는 설도 있지만 난대산림연구소, 한라일보사 등에서 공동으로 펴낸 제주산림문화체험 <사려니 숲길>이라는 책에는 ‘살’ 혹은 ‘솔’은 ‘신성한’ 또는 ‘신령스러운’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 사려니는 ‘신령스러운 곳’을 의미한다고 돼 있다.

지난 8월3일 사려니숲에는 비가 왔다. 숲은 자연스럽게 안개를 품고 있었다. 제주시 봉개동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 쪽 물찻오름 입구가 바로 사려니숲의 입구다. 원래 사려니숲은 물찻오름 입구에서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 부근까지 15km의 숲길과 물찻오름에서 붉은오름을 가는 10km 숲길을 말한다(표 참조). 사려니라는 이름은 한라산국립공원 동쪽 경계인 성판악 휴게소 동남쪽에 형성된 ‘요존국유림지대’에 위치한 사려니오름의 명칭에서 왔다. 요존국유림은 ‘국토보존, 산림경영, 학술연구, 임업기술개발과 사적· 성지 등 기념물 및 유형문화재의 보호 기타 공익상 국유로 보존할 필요가 있는 산림’을 가리킨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물찻오름에서 사려니오름까지의 길은 숲 보존을 위해 통제한다. 그 길을 일반인이 걸을 수 있는 때는 1년에 한 번, 5월의 열흘 정도다. 숲을 관통하는 게 아니라면 탐방 2일 전까지 난대산림연구소에 예약해 사려니오름을 서귀포시 방향에서 들를 수 있다. 무작정 해안도로를 걷기 시작하면 만나는 올레에 비해 까다롭다. 까다로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야 한다. 숲길이지만 음식을 사먹거나 해먹을 수 없다. 보존을 위해서다. 등산용 지팡이도 사용이 금지된다. 이 정도면 까다로운 게 아니라 도도하다.

평일인데도 이미 관광객 30여 명이 들머리에서 웅성거린다. 제주도청에서 관계자가 나와 ‘세계 7대 경관’ 투표에 참여해달라며 목청을 높인다. 2009년에는 발걸음이 뜸하던 게, 올레 마니아들 사이에서 “올레의 마무리는 사려니숲길에서”라는 말이 번져 올해에는 주말이면 2천 명이 북적인다. 숲한테는 좋은 일이 아니다. 그 발걸음이 자제되지 않고 숲을 헤집는다면 통제 구간은 더 길어질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

길 들머리의 마뜩잖은 인상은 30분을 채 걷기도 전에 사라졌다. 우선 참꽃나무 숲이 반긴다. 안개를 망토 삼아 너울너울 춤춘다. 강송화(43) 숲해설사의 목소리가 들뜬다. “참꽃에 동백꽃까지 피어 5월이면 환상적” “가을이면 서어나무, 단풍나무 등이 장관” “겨울이면 삼나무 숲에 내리는 눈이 절정” 따위 자랑이 끊이지 않는다. 사계절의 매력을 모두 품고 있다는 이야기다. 극상림 형태가 잘 보존된 물찻오름까지의 길은 5.2km, 그 안에는 때죽나무·단풍나무·서어나무·졸참나무·꽝꽝나무 등이 혼생한다.

 

» 물찻오름 정상의 모습. 검은 기운까지 감돌아 신비스럽다. 현재는 보존을 위해 연말까지 통제돼 있다. 윤승일 한겨레21 기획위원

푸릇한 생명 담아 멋진 천미천

 

물찻오름에 가까워지자 입구에서 보이던 북적임이 거의 사라졌다. 길을 ‘구경’ 온 사람들은 30분 정도를 걷다가 돌아선다. 2km 정도 지점이다. 거기서 돌아서지 않으면 10km를 완주하거나 시작점까지도 10km를 걷는 셈이다. 지름길은 없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돌리는 지점이 바로 ‘적색’의 송이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송이’는 송이버섯이 아니다. 바로 ‘스코리아’(Scoria), ‘분석’(噴石)이라고도 하는 화산재, 곧 잘게 부서진 용암 덩어리를 뜻한다. 흑색이나 적색을 띤다. 사람들의 발을 덜 타서인지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정도로 입자가 크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건강에 좋다는 말에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현무암을 생각하면 찌를 듯 날카로울 것이라는 짐작에 조심조심 내딛던 발은 금세 자신감이 붙을 정도로 송이에는 거친 부드러움이 있었다. 비스킷을 밟고 선 듯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2km 정도를 걸었지만 무리가 없었다. 눈앞에 나타난 천미천에서 발을 헹궜다. 진흙처럼 달라붙지 않고 물속으로 녹아든다. 천미천은 건천으로,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날은 내린 비로 발도 호강한 셈이다. 천미천은 건천이지만 한라산 정상부 동쪽 사면에서 발원해 중산간 마을에 식수를 대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경계 삼아 휘돌아 흐르는 제주도에서는 가장 긴 하천이다. 물찻오름까지 네댓 군데 지류가 등장하는데, 그 지류는 거의 말라 있다. 제주의 건천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푸릇한 생명을 담아 멋진 정원으로 변모해 있다. 검은 돌 위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은 숨 돌리고 가라며 발길을 잡는다.

“골프 약속이 있는데, 길을 걷다 보니 좋아서 여기까지 왔네요.”

천미천을 지나 4km 지점쯤 쉼터에서 만난,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40대 후반의 4명은 등산객 차림이 아니다. 그들은 “오늘 골프 치기는 힘들게 됐다”고 말했다. 들어선 길에 욕심내다 보니 완주를 하자고 모의한 모양이다. 골프를 위한 여행이 숲길 여행으로 바뀐 셈이다. (숲길 칭찬은 좋은데, 담배는 피워서는 안 됩니다. 뒤로 감추는 것 다 들켰어요.)

오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인사를 한다. 제주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유를 물었다. 안개를 가득 머금은 사려니숲길의 새벽을 경험한 사람은 그때만 찾는다는 설명이다. 새벽길을 마다하지 않는 애정으로 그들은 숲길 지킴이를 자처하기도 한다. “출근 시간을 피해 새벽에 산악자전거를 거칠게 타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분들을 말리고 신고하는 게 새벽 숲길을 걷는 주민들이에요.” 강송화 해설가까지 3명의 공무원이 숲해설에 관리까지, 이 숲을 다 지키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초입에서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지만 모두가 10km 코스, 15km 미공개 코스를 무단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숲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산악자전거를 타기 좋은 길이다. 원래는 자전거 출입도 허용됐다. 현빈도 이 길에서 산악자전거를 탔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다. 그 뒤 자전거가 몰려들었다. 한 달 전부터는 자전거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그 자체로 사려깊은 자연기념관

 

물찻오름에 다다르니 발을 쉬는 무리가 10여 명 있다. 모두가 물찻오름이 보존을 이유로 공개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어쩔 수 없다. 송이로 이뤄진 오름은 올라갈수록 무너진다. 그 안의 동식물은 그 변화를 감당할 수 없다. 오름 정상의 분화구에 연중 물이 가득 차 있어 ‘물찻오름’이라고 부른다. 숲이 검다고, 신성한 곳이라고 ‘검은오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름처럼 매력적인 곳이다. “저기!” 그때 오름 쪽에서 노루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 다리가 여물지 않은 어린 녀석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도리어 신기한지 도망가지 않고 다가온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뿔 한쪽은 떨어져나갔다. 끔벅거리며 눈을 맞춘다. 진귀한 경험이다. 물찻오름까지 주로 극상림이 좌우로 펼쳐져 있어 길 안으로 동물이 뛰어드는 경우가 꽤 있다. 노루는 물론 최근에는 멧돼지도 출몰했다. 멧돼지는 제주도가 고향이 아니다. 농장에서 뛰쳐나온 녀석이 이쪽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뛰쳐나온 녀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찻오름 정상의 물에 방생한 금붕어와 거북은 어찌할 것인가. 수백만 년의 시간을 담고 있던 오름의 호수가 몇 년 새 생태계 파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이 숲을 걸을 자격이 있을까.

물찻오름에서 나머지 무리들이 다시 돌아간다. 나머지 길은 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럴까. 발을 옮겼다. 사려니오름이 아닌 붉은오름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부터는 송이의 색깔부터 검었다. 일반 자갈이 섞여 있어 아쉬웠다. 맨발이면 탈이 날 듯했다. 1km 정도를 걸었다. ‘월든’으로 명명된 삼나무 숲이 펼쳐진다. 어둡던 하늘도 환하게 열린다. 그 숲을 걷는 사람들은 말수를 줄였다. 경기도 분당에서 왔다는 딸 둘을 둔 가족도 환한 얼굴과 달리 이심전심, 말을 걸어도 수줍게 웃기만 한다. 그렇게 5km를 걷는 동안 삼나무 숲은 계속된다. 일제 때 들어온 삼나무는 뒤늦게 이 숲에 자리를 잡았고,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치산녹화사업으로 한라산과 중산간·오름의 주인이 됐다. 일제와 박정희를 성찰하는 자연기념관으로도 사려니숲길은 그 자체로 사려깊은 곳이다. 삼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가 코를 감싼다.

제주=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nagneyoon@hani.co.kr




» 제주도 사려니숲길 안내도


■ 코스 및 소요 시간
비자림로(1112번 도로) 물찻오름에서 출발
물찻오름 구간 왕복 9.4km 2~3시간
붉은오름 입구 편도 10km 3시간
사려니오름 편도 16km 6시간(행사 기간에만 탐방 가능)

 

행사 기간 외 사려니오름 탐방 안내
난대산림연구소(064-730-7272)에 탐방 2일 전까지 예약한 뒤, 서성로 방면 출입구를 이용해 입장.

 

■ 가는 방법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시간 28분에 출발하는 번영로선 시외버스를 탄 뒤 물찻오름 입구에서 하차. (붉은오름 쪽 남조로로 나와 20분 간격으로 있는 버스를 이용해 제주시나 서귀포시로 갈 수 있음)
97번 도로(번영로) 이용. 남조로 교차로까지 간 뒤 제주돌문화공원 방면으로 우회전, 교래사거리에 도착하면 다시 우회전해 4.5km 정도 가면 길 왼쪽으로 사려니숲길 주차장이 보임.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⑥ 퇴계 오솔길(경북 안동)
[걷고 싶은 길 12선] 푸른 숲 옆에 끼고 낙동강 굽이 따라 펼쳐진 길, 조선 선비라면 생애 한 번 걸어보고 싶었던 길… 안동 퇴계 오솔길

» 퇴계 오솔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한겨레21 윤운식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烟巒簇簇水溶溶)/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曙色初分日欲紅)/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溪上待君君不至)/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擧鞭先入畵圖中).”

퇴계 이황이 친구인 이문량에게 써서 건넨 시다. 봉긋 솟은 청량산 봉우리 사이로 걸어 들어가며 퇴계는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걷고 싶은 길’ 기획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어디로? 그림 속으로.

 

은빛 자갈, 붉은 바위, 푸른 산의 조화

 

그림은 경북 안동 도산면에 걸려 있었다. 안동시에 들어서고도 봉화 방향으로 30분 넘게 달리면 안동 도산면 단천리에 다다른다. 시처럼,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강 뒤로는 누군가 초록색 물감을 붓에 묻혀 뚝뚝 찍어놓은 것 같은 산이 봉우리를 이뤄 하늘을 이고 있다. 강과 산 사이로는 가르마처럼 반듯하고, 때로 구불구불한 길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개울에 놓인 단천교 옆의 표지판이 여기서부터 퇴계 오솔길이라 알려준다.

퇴계는 13살 때 학문을 배우려고 집에서부터 숙부 이우가 청량산 중턱에 지은 오산당(현 청량정사)까지 50리 낙동강변을 오르내렸다. 퇴계는 유난히 청량산을 아꼈는데, 산과 강 사이를 따라 난 그 길을 걸으며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흰 기러기 너뿐이니…”로 시작하는 ‘청량산가’를 비롯해 청량산의 운치를 찬탄한 여러 편의 시를 남기고,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칭하기도 했단다. 퇴계가 밟아 다져놓은 이 길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마치 순례길처럼, 생애 한 번 걸어보길 바라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 유학자들에게 가장 ‘핫’했던 길인 거다.

퇴계 오솔길은 단천교에서 청량산 전망대를 지나 농암종택까지 3km 구간을 주로 일컫는다. 혹자는 퇴계가 출발했던 퇴계종택에서부터 도산서원을 지나 단천교~농암종택~고산정까지 18km를 말하기도 하는데, 퇴계종택에서부터 단천교까지는 차가 함께 다니는 아스팔트길이라 걷기가 조금 불안하다. 물론 자동차에 몸을 싣고 초록이 만들어내는 풍광을 구경하다 보면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긴 하겠지만.

 

» 퇴계 오솔길에서 만나는 그림같은 풍경. 필자는 그림속 한 풍경이 되었다. 한겨레21 윤운식

단천교에 내려서는 차도, 인적도 드물다. 자연에 폭 싸인 공기가 이제부터 마음 놓고 걸으라며 등을 떠민다. 왼쪽과 정면에는 산, 오른쪽에는 강이다. 강 저편에는 이름 모를 강태공이 홀로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다. 강태공이 서 있는 맞은편 은빛 자갈밭과 달리, 걷는 길 강가의 돌이며 자갈은 온통 불그레한 갈색이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마을 뒤에 뻗어 있는 산맥의 흙이 붉은 점토질이라서 그렇단다. 그러고 보니 단천리의 ‘단’(丹)자도 붉다는 뜻이다.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짧은 구간이지만 중간중간에 쉬어 가라고 의자도 마련해뒀다. 잠시 쉴까 의자에 몸을 기대니 반기는 사람은 없고 시큼한 땀냄새를 맡은 날파리 떼만 들러붙는다. 극성을 못 이기고 얼른 다시 일어나 걷는다. 조금 더 걸으니 농가 두어 채가 나온다. 인적 없이 창문 안이 새까만 것이 빈집 같은데, 해가 쨍쨍한 낮이라 그런지 스산하진 않다. 집 옆의 작은 밭에 총총히 고추가 자라는 모습을 보니 오가는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하다. 농가를 지나쳐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퇴계 오솔길 전망대가 나온다. 낙동강 물길과 뽀얀 자갈밭, 기세등등한 청량산, 깎아지른 절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흙과 나무와 물과 하늘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조화로울 수 있다니. 퍼즐을 끼워맞추듯 인공적으로 계산된 자리에 놓인 나무며 물이며 바위들을 보아온 도시인의 눈에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사유지에 막혀 길을 되돌아오다

 

전망대에서부터 콘크리트길이 끝나고 흙길이 시작된다. 반갑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길이 막혀 있다. 전망대 표지판에도 누가 매직펜으로 ‘×’ 표시를 잔뜩 그려놨다. 안동으로 떠나기 전 찾아본 여행책에서 일부 구간이 사유지라 때때로 길이 막히기도 한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때때로가 아니라 한참을 막아놓은 듯하다. 철책을 치거나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놓은 건 아니어서 흙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봤다. 좁은 폭이 딱 ‘1인용’인 것이, 그야말로 오솔길이다. 옆으로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잔뜩. 함께 간 사진팀 이종찬 선배는 이것은 상수리나무, 이것은 산딸기, 이것은 칡이라며 나로서는 같이 보이기만 하는 풀이며 나무를 구분해준다.

 

» 농암종택은 낙동강을 앞에 두고 뒤로는 소나무 숲에 폭 안겨 있다. 종택 내 건물인 '강각'과 산이 만드는 풍경이 그림 같다. 한겨레21 윤운식
몇 발짝 옮기니 커다란 바위가 하나 나오는데, 땅주인은 여기에다 래커로 ‘통행금지’라 써놓았다. 땅주인에게 마음속으로 ‘죄송하지만, 그래도 조금만요’라고 말하며 걸어 들어가니 기우뚱한 오두막이 한 채 나온다. 할머니와 아주머니 한 분이 마루에 앉아 있다. 사람 사는 집이 있는 걸 보니 영영 못 다니는 길은 아닌가 보다. 가까이 들어서자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널린 이불 빨래를 털기 시작한다. “다니면 안 되는 길인가요?” 물으니 반쯤 무뚝뚝하고 반쯤 수줍은 표정으로 묵묵부답이다.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사유지라 그래요. 예전에는 그냥 사람들 다녔던 길인데…. 그래도 주인 눈 피해서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긴 해. 한데 지금은 풀이 너무 자라 길을 찾기 힘들 거예요.” 산중에 혼자 지내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경북 경주에서 왔다는 아주머니는 우리보다 더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오솔길의 흔적이라도 어루만져볼까, 아주머니가 알려준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보니 들은 대로 다니는 사람이 없어 풀이 무성하게 자란데다 올여름 내린 많은 비 때문인지 강물이 불어 길의 행방이 묘연했다. 이에 안동시청이 산자락으로 돌아가는 우회로를 개설해놓긴 했는데, 그 길을 따르자면 강변 오솔길의 풍광을 포기해야 한다. 동네 노인들이 기억을 더듬어 새로 낸 길도 있다. ‘가송리 예던길’이다. 가파른 바위절벽을 타고 들어가 강을 낀 숲 속을 걷는 길인데, 오르내리는 경사가 있어 퇴계 오솔길보다는 걷기가 힘들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끊어서 걷되 감상은 이어 하기로 했다. 이날 숙소로 정한 농암종택으로 가 우리가 걸어온 방향의 반대편에서 길을 다시 걸으며 사유지를 제외한 나름의 퇴계 오솔길 걷기를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묘미란 계획을 세우고 출발해도 짐작 못한 변수가 생긴다는 데 있지 않을까. 이날 우리는 밤이 새까매서야 농암종택에 도착했다. 그사이 그럼 무얼 했느냐면…, 농암종택으로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른다고 모두 퇴계종택에 잠시 내렸다. 상냥한 표정의 개 두 마리와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 가족이 우리를 반긴다. 종택에 들어서니 방방마다 수업 중인지 툇마루에 신발은 그득한데 인기척은 없었다. 차에서 내린 참에 퇴계종택과 근방의 도산서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퇴계종택 뒤로 난 야트막한 산길은 콘크리트로 다듬어져 있다가 자잘한 자갈길로 이어진다. 뽀드득뽀드득, 자갈길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난다. 이 고개를 지나면 도산서원이 나온다. 퇴계종택에서 도산서원까지는 2km 정도 거리다. 매표소에서 도산서원까지도 좋은 산책로인데, 작은 키의 소나무를 울타리 삼아 길 오른쪽으로는 안동호가 펼쳐져 있다.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는 오솔길

 

한밤에 도착한 농암종택은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의 가송리에 있었다. 농암 이현보는 퇴계의 숙부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이로 그가 쓴 ‘어부가’는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진 시로 잘 알려져 있다. 퇴계는 선배 농암과 교류하기도 했지만 그의 아들과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연을 맺었다. 기사 들머리에 퇴계의 시를 받은 이문량이 농암의 둘째아들이다.

농암과 퇴계의 연은 현재까지 닿아 있다. 퇴계 오솔길은 ‘녀던길’ 혹은 ‘예던길’(‘예다’는 ‘가다’의 옛말)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퇴계의 ‘도산12곡’ 중 9곡에 나오는 시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예던길 앞에 있네/ 예던길 앞에 있으니 아니 녀고 어쩔고’에서 따온 것이다. 농암 이현보의 후손으로 현재 농암종택을 지키고 있는 이성원 선생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다음날. 농암종택에서 다시 퇴계 오솔길을 걸어본다. 농암종택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단천교에서 바라봤던 강보다 훨씬 그 폭이 넓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강이 되었다”고 말했다는데, 그대로다. 길을 나서니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굵어지는 빗방울에 흙 냄새가 짙어진다. 아득한 절벽이 보이는데, 학소대란다. 수직절벽 학소대는 천연기념물인 먹황새가 서식하던 곳이다. 저 멀리 청량산 선학봉과 자란봉 사이를 잇는 하늘다리도 부연 공기 사이에서 또렷이 보인다. 처음에 두 갈래 길이던 길은 나중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힘든 좁은 폭으로 바뀐다. 길이 끝났나 싶으면 표지판이 나타나고, 잘못 들었나 싶으면 벤치가 나타나 지표 역할을 해준다. 오솔길은 둥그렇게 굽이친 강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인적 드문 길에 툭툭 풀을 헤치고 걷는데, 잠이 덜 깬 개구리가 후다닥 숨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이 풀숲을 지켜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 좋은 곳에 살 곳을 마련했다니 네가 참 부럽다.

안동=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참고 도서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이성원·푸른역사·2008), <구석구석 놀라운 우리나라!>(권원태 외·터치아트·2008), <경북의 아름다운 걷기여행>(한국여행작가협회·상상출판·2011)

 

 


» 퇴계 오솔길 안내도
■ 가는 길
자가용
서울~영동고속도로~만종JC~중앙고속도로(남원주IC)~영주~서안동IC, 소요 시간 3시간30분
버스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6시~밤 11시1분까지, 20~30분 단위로 안동시외버스터미널까지 버스가 간다. 2시간50분 소요, 요금 1만5700원. 안동에 내려서는 67번 버스 중 오후 2시50분, 5시50분 차를 타면 가송리 마을회관 앞에 선다.
철도
서울(청량리)~안동, 첫차 아침 6시, 막차 밤 9시, 일 8회 운행, 무궁화호, 3시간40분 소요, 요금 1만5800원.

 

■ 여행 정보
안동은 지역이 넓고 두루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초행이라면 안동관광정보센터(054-856-3013, tourandong.com)를 통해 미리 안동여행 책자를 신청하고 안동관광택시, 시티투어버스 등을 예약해도 좋다. 문화관광가이드를 미리 신청할 수도 있는데, 퇴계 오솔길만 따로 안내하는 코스는 없지만 도산서원, 하회마을 등 권역별로 나눠 안동 역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산길과 물길이 사이좋은 길-⑦ 내변산길(전북 부안)
[걷고 싶은 길 12선] 평지와 오르막으로 밀고 당기고, 빽빽한 숲이 지루해지면 호수와 폭포가 나타나네… 전북 부안 내변산길

» 관음봉에서 내소사로 내려오는 길 어디쯤. 내변산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산이다. 비가 내려 비옷을 꺼내 입었다. 한겨레21 정용일

내변산에 파도가 쳤다. 물은 급하게 쏟아졌고 길은 사라졌다. 길을 통째로 막은 ‘입산 금지’ 간판을 건너뛰어 올라간 산길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와야 했다. 8월9일 전북 부안은 폭우로 물에 잠겼다. 내변산은 산길, 물길을 가리지 않고 물을 토해냈다.

일주일 뒤 서울에는 비가 내렸다. 내변산을 다시 찾았다. 해가 반가웠다. 내변산 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해 내소사로 내려가는 코스를 잡았다. 직소폭포를 거쳐 재백이고개, 관음봉을 지나야 한다. 거리는 6.2km 정도. 3시간 코스다. 요즘 운동 삼아 스포츠센터에서 트레드밀을 열심히 한다. 1분 걷고 1분 뛰고 1분 걷고, 경사를 높여 2분을 또 걷는다. 이걸 10번 정도 반복한다. 심박수가 오르내리고 몸이 데워지면 땀이 난다. 내변산길이 그랬다. 심박수가 올라갈라치면 기분 좋은 평지가 나타났다. 땀이 나면 호수와 폭포가 들어오고, 바다가 들이닥친다. “이런 산도 있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30여m 직소폭포의 장쾌한 울림

 

길은 평지로 시작한다. 지난번 비로 길이 여기저기 파였다. 잔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뿌리째 뽑힌 나무도 보였다. 잘 정돈된 탐방길보다 오히려 운치가 있었다. 좀 걷자니 꽝꽝나무라는 재밌는 이름의 나무가 보인다. 불에 넣고 태우면 꽝꽝 소리가 나서 꽝꽝나무란다. 천연기념물 124호인데 변산에 군락지가 있다. 직소폭포로 가는 길에 흐르고 꺾이는 계곡이 일품인 봉래구곡이 있다. 한국전쟁 때 전북 순창과 임실을 가르는 회문산에서 군경의 토벌작전에 밀려난 빨치산들이 이곳 내변산 봉래구곡까지 왔다. 빨치산 수백 명과 군경 수십 명이 봉래구곡에서 숨졌다.

산행에는 부안군청 송병조 대외협력팀장이 함께했다. “혼자 걸으면 재미없죠잉.” 눈을 찡긋한다. 그래도 내변산은 보는 재미가 많다. 산중 호수가 떡하니 나타났다. 직소보다. 1995년 부안댐이 생기면서 물이 찼다. 물가를 따라 나무로 만든 탐방로가 이어진다. 비로 불어난 물이 등산화 바로 아래까지 찰랑거린다. “캐나다 어느 산속 호수 같네요.” 가보지도 못한 캐나다 얘기를 꺼낼 정도로 이국적이다. 지금 생각하니 오스트리아로 바꿔도 되겠다.


» 직소폭포. 한겨레21 정용일
갑자기 우릉우릉 소리가 들리더니 변산 사람들이 “꼭 봐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직소폭포가 나타났다. 변산 음식점 어디를 가나 직소폭포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30여m의 장쾌한 높이에서 쏟아지는 물이 시원하다. 역시나 지난번 비 때문에 수량이 늘었다. 마른 날이 이어지면 이런 장면을 보기 어렵다. 폭포 아래쪽에 선녀탕이 있다. 왜 선녀들은 계곡을 돌며 옷을 벗고 선녀탕이라는 이름을 여기저기 남겨놓았을까. 야릇한 생각을 하는데 마침 송 팀장이 들고 있던 MP3 플레이어에서 아바의 <댄싱퀸>이 흘러나왔다.

가파른 길을 오르면 직소폭포를 내려다볼 수 있다. 아래에서 올려보고 눈높이에 맞춰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맛이 각별하다. 탐방지원센터에서 2.4km를 걸었고, 내소사까지는 3.4km가 남았다.

폭포를 지나자 또다시 평탄한 길이 나온다. 산속이니 곧 끝나겠지 했는데, 순한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걷기가 편하다. 나무가 우거져 햇볕도 잘 들지 않는다. 분위기가 끝내준다. 게다가 가는 길 왼쪽으로 계곡물이 따라간다. 내변산길은 산길이 물길인 셈이다. 한 아이가 뛰어서 나를 앞질렀다. 계속 뛰어가더니 숲길 끝으로 사라졌다. 조금 걷자니 아이가 물가에서 땀을 식히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인데 내소사에 산단다. 내변산이 동네 뒷산인 셈이다. 좋겠다. 탐방지원센터로 오는 길에 식사를 했던 초원가든 주인이 챙겨준 물병을 꺼냈다. 경남 밀양정수장 수돗물을 페트병에 담아 만든 케이워터다. 맛이 밍밍했다. 송 팀장은 그새 물을 다 마시고 계곡물을 담는다. “이거 마셔도 돼요잉. 깨끗해여잉.” 서울 사람 티를 내는지 수돗물도, 계곡물도 선뜻 입이 가지 않았지만 계곡물은 차고 맑았다.

 

“코끼리도 다닐 수 있는 길이구먼”

 

30여 분간 이어지던 순한 숲길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힘 좀 써서 걸어야 한다. 해발 160m 재백이고개를 지나면서 곰소만이 보인다. 곰소염전으로 유명한 바로 그 곰소다. 재백이에서 관음봉 가는 길은 난코스다. “아이고 죽겠네잉” 하는 소리가 아래에서 들린다. 트레드밀이 주는 인공적인 느낌 없이 산이 출렁인다. 건너편으로 바위 절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곡괭이로 찍어 팬 듯한 광경이 여기저기 펼쳐진다. 바람이 우 하는 소리를 내며 쓸고 지나간다. 바람에서 곰소염전의 짠맛이 느껴지나 했더니 흐르는 땀이다. 더 올라가니 너른 바위중턱이 나온다. 곰소만이 더 크고 넓게 보인다.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멀리 전북 고창 선운산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산이 줄줄이 달려온다. 산들은 곰소만에 발을 뻗고 허리를 풀었다. 힘이 달린 산은 바다에 닿지 못했고, 힘있는 것들은 갯벌에 코를 박았다. 겹쳐서 내달린 산들은 앞쪽은 진묵, 뒤쪽은 담묵이었다. 변산은 산도 좋고 바다도 좋다더니 정말이었다.

관음봉삼거리에 이르렀다. 해발 370m. 관음봉으로 가는데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직소보가 한 뼘 보인다. 정말로 오스트리아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소나기 같았지만 지난번 비가 떠올랐다. 서울 사람은 산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가던 발길을 돌려 내소사로 바로 내려가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멈췄고 후회가 됐지만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합리화가 필요했다. “이건 걷기 좋은 길 소개 기사지 등산 기사는 아니니까.”

 

» 관음봉삼거리와 직소폭포 가는 이정표. 한겨레21 정용일
관음봉 못 가고 내려오는데 빨간 배낭을 멘 20대 여성이 헉헉거리며 땀을 식히고 있다. 손에는 한입 깨물어 먹은 복숭아가 들렸다. “폭포 다 왔나요?” “아뇨. 1시간은 더 가야 하는데요.” “휴….” “여기서부터는 갈 만해요.” “네….” 내소사에서 올라오는 길은 무지 가파르다. 거리는 1.3km밖에 되지 않는데 100m 달리기를 전속으로 13번 한 느낌을 준다. 내소사 전나무숲길에서 시작하면 초반에 힘을 빼게 된다. 같은 길도 시작점이 중요하다. 내소사 대신 근처에 있는 원암통제소에서 시작하면 훨씬 편하다. 원암통제소 코스는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김응룡 감독이 자주 다녔다고 한다. 이런 대화를 들었다. “김응룡이가 다니던 길이여. 완만해.” “코끼리? 코끼리가 다니던 길이네. 코끼리도 다닐 수 있는 길이구먼.” 덩치 큰 김 감독의 별명이 코끼리였다. 그만큼 험하지 않다는 얘기다.

빨간 배낭 아가씨가 결국 포기하고 내려온다. “아깝네요. 힘든 길은 다 끝났는데.” “갑자기 비가 오고 그래서요.” 내소사에 닿았다. 백제 무왕 34년(633)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대웅보전의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꽃문살을 구경하고 나오면 내소사 전나무숲길이 400m 정도 이어진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비옷을 입고 걸었던 길이다. 찌를 듯이 솟은 전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침엽수의 맑은 향이 살아났다. 내변산길에 펼쳐지는 수종은 다양하다. 걷다 보면 이름표가 걸려 있다. 산벚나무, 작살나무, 팥배나무, 쇠물푸레, 다릅나무, 검양옻나무, 까치박달, 개벚나무, 쥐똥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노간주나무, 당단풍나무, 노린재나무, 덜꿩나무, 굴피나무, 갈참나무….

 

해변의 변산 마실길도 강추

 

요즘 부안군에서는 해안가를 따라 도는 변산 마실길을 강력 추천한다. 해안초소가 있던 길을 따라 4구간 8코스, 200리길이다. 일부 코스를 걸어봤는데 “역시 변산”이라는 말이 나온다. 썰물 때는 갯벌을 따라 걸을 수 있다. 발밑에 느껴지는 갯벌이 마치 카스테라처럼 폭신하다. 코스 하나를 선택해 설렁설렁 걸어보길 권한다. 적벽강, 수성당, 채석강, 모항, 곰소, 줄포 등을 두루 볼 수 있다. 변산 하면 바지락죽이 유명하다. 백합죽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새만금방조제가 들어선 뒤 백합이 잘 자라지 않는다. 수입한 백합이 많단다. 변산일품(063-582-3388)에서는 맛있는 바지락죽과 함께 주인이 모아놓은 수석도 구경할 수 있다. 곰소천일염으로 만든 젓갈도 빼놓을 수 없다. 곰소젓갈센터에 자리한 곰소만젓갈(063-581-9700)에서는 낙지젓, 가리비젓, 바지락젓, 어리굴젓, 아가미젓, 갈치속젓, 황석어젓, 멍게젓, 창난젓, 명란젓 등을 맛보고 살 수 있다. 주인 이향단씨가 친절하게 맞아준다.

» 산림조합중앙회
부안=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 내변산길 안내도
■ 코스 및 소요시간
내변산 탐방지원센터~직소폭포~재백이고개~관음봉삼거리~내소사 6.2km 3시간

 

■ 가는 방법
부안버스터미널에서 내변산 탐방지원센터로 가는 버스는 2시간마다 있다. 사자동에서 내리면 된다. 승용차가 편리하지만 내소사로 넘어간 뒤 다시 넘어오는 일이 간단치 않다.

 

■ 탐방 안내
내변산 탐방지원센터 063-584-7807
부안관광안내소(변산 마실길) 063-580-4434

 

네가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⑧ 분주령 야생화길(강원 태백)
[걷고 싶은 길 12선] 사람의 손길 덜 타서 더 매력적인 강원도 태백 분주령 야생화길…사연 많은 들꽃이 내뿜는 생명의 활기로 충만한 귀한 길

» 길의 끝인 대덕산 정상은 야생화의 보고다. 야생화 마니아들은 이곳을 '산상화원'이라 부른다. 한겨레21 박승화

강원도 태백시는 젊은 도시다. 젊다 못해 어린 도시다. 태백산맥의 거대한 산줄기에 몰래 숨어 있던 화전민 마을은 1930년대 들어서야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태백시 누리집을 보면, 일본의 전력업체가 당시 500만원의 자본금으로 1933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총독부의 광업권을 인수받아 석탄 개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전국의 힘깨나 쓴다는 일꾼들이 태백의 산자락으로 모여들었다. 태백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태백 혼자서 전국 석탄 생산량의 30%를 맡았다. 석탄을 머금은 탄광은 화수분이었다. 지나가는 개도 1만원 한 장씩 물고 다닌다는 시절이었다. 도시의 전성기는 짧았다. 1989년부터 시작된 석탄산업합리화사업으로 50개가 넘던 광산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사람들도 떠났다. 1987년 12만 명을 넘던 도시 인구는 2008년 5만 명으로 줄었다. 어린 도시는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다.

 

꽃들처럼 야생한 고려 유신들

 

태백시의 행정조직도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문화관광과’는 태백에서는 ‘관광문화과’다. 관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시가 최근 들어 눈독을 들인 분야가 두 가지다. 하나가 스포츠 행사 유치다. 해발 650m 분지에 위치한 태백에서 여름은 짧다. 한여름에도 해가 지면 서늘해서 모기가 없다. 운동하기에 더없이 좋다. 지난 8월8일 태백시를 찾았을 때도 도시에는 전국학생태권도대회가 열렸다. 도시의 골목과 식당에는 어린 ‘무도인’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농구 등 프로스포츠 구단들에도 태백은 인기 있는 전지훈련지다.

또 하나의 관광자원이 ‘산길’이다. 금융위기에도 아웃도어 업체만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등산과 트레킹은 인기다.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이들의 행렬이 태백에도 늘었다. 사람의 손을 덜 탄 만큼 태백의 산길은 매력적이다. 여러 길 가운데서도 태백시가 특히 관심을 두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분주령 야생화길이다. 이미 야생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을 많이 탄 곳이다. 지난 8월9일 이 길을 걸었다.

아침 8시30분, 태백시 터미널 근처에서 김상구 문화해설사를 만났다. 시청 관광문화과가 소개해준 자원봉사자다. 입심이 구수했다. 그는 “문화해설이라는 게 70%가 구라”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와 함께 택시를 탔다. 20분 남짓 달리니 ‘백두대간 두문동재’라는 대형 표지석이 길가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표지석 바닥에는 ‘해발 1268m’라는 표지가 있었다. 공기가 서늘했다. 반팔 티셔츠만 입고 온 것을 잠시 후회했다. 두문동이라. 옆에 서 있던 김상구 해설사께서 ‘구라’를 푸셨다. 두문이란 ‘두문불출’에서 나온 말이다. 문을 걸어잠그고 세상을 등진 이들은 누구였을까. 500년 전 임금을 쫓아낸 이성계와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고려의 유신들이었다. 이들이 찾은 곳이 두문동이었다. 유신들은 당시 지리적 상식으로는 조선의 통치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로 떠났을 것이다. 깊숙한 산골짝에서 유신들은 이곳의 꽃들처럼 ‘야생’했다.

나중에 기록을 확인해보니, 고려 유신들이 자리잡은 곳은 지금은 북한 땅인 경기도 개풍군 두문동이었다. 구전은 역사와 상관없이 떠돌았다. 어쩌면, 나라 잃은 신하들의 고집은 경기도보다 태백의 숲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 길에서 마주친 귀한 식물들. 넓은잎노랑투구꽃, 나도씨눈난(왼쪽부터). 한겨레21 박승화

이름 모를 들꽃도 달리 보여

 

산길의 초입부터 가로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일단 멈춤’이다. 환경부가 생태관광보존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길 입구에 수다스럽게 놓인 표지판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중의 하나가 ‘동부지방산림청장’이 내건 ‘입산통제안내’ 표지판이었다. 귀한 길이긴 한가 보다. 1년에 두 차례 야생화길은 출입통제다. 2월15일~5월15일 석 달 동안, 11월1일~12월15일 45일 동안 산길은 폐쇄된다. 온갖 식생을 머금은 숲길이 인간의 우악스러운 발길을 쉴 수 있는 시간이다. 다른 표지판에도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는 카메라 삼각대를 쓰지 말라는 당부도 있었다. “예쁜 꽃 사진 찍는다고 하다가, 정작 앞에 있는 더 귀한 야생화를 푹푹 찍어 누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죠.” 김 해설사의 말이다. 전문가와 동행한 것이 다행이었다. 등산객들은 보통 길 초입에서 환경 담당 공무원들에게 일장 훈시를 들어야 한다. 지자체는 길을 꽤 살뜰하게 챙겼다.

 

» 길에서 마주친 귀한 식물들. 넓은잎노랑투구꽃, 동자꽃. 한겨레21 박승화

길에 들어섰다. 날씨는 가뜩이나 흐렸다. 팔뚝과 목덜미로 숲의 공기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2m 남짓한 길의 양쪽으로 늘어선 수만 가지 이름 모를 나무와 풀이 일제히 내뿜는 기운에 잠시 정신이 아찔했다. 지금은 여름꽃이 한창 끝물인 참이었다. 성질 급한 가을꽃도 띄엄띄엄 자리를 잡았다. 참취며 곰취, 어수리, 흰물봉선, 큰까치수염, 떡취, 참나물꽃 사이로 사향호랑나비가 우아하게 날개를 폈다. 동자꽃도 길가에서 얌전하게 고갯짓을 한다. 주황색 꽃잎이 가지런한 이 꽃은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옛적, 설악산의 한 암자에는 한 노승과 동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암자에는 쌀이 떨어졌다. 스님이 시주를 하러 마을에 내려간 사이 산에는 눈이 높게 쌓였다. 수심 어린 며칠 밤이 지나고 찾아간 암자에는 어린 스님의 주검만 남았다. 스님은 동자의 주검을 암자 뒤쪽에 묻었다. 이듬해 무덤가에는 주홍색 꽃이 피어올랐다. 사연을 듣고 나면 이름 모를 들꽃도 달리 보인다.

남아메리카 밀림의 가부장이 벗어놓고 간 모자 같은 관중도 볼거리다. 거의 정확히 성인 머리통만 한 둘레에서 직경 1~2m씩 사방으로 뻗어나간 면마과의 식물은 독특한 구경거리였다. “부잣집들에서 좋아하는 (관상용) 식물”이라고 김 해설사가 덧붙였다. 산일엽초도 볼거리다. 신갈나무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식물이다. 김 해설사가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길가의 풀과 나무는 하나씩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듯했다. 그렇게 낯선 등산객과 이름 모를 숲은 조금씩 친해졌다.

꽃이 예쁘다고 무턱대고 만졌다가는 큰코다친다. 쐐기풀 얘기다. 잎이 톱니바퀴 같은 쐐기풀에 잘못 걸리면 피부는 한참 괴롭다. 김 해설사님은 “적어도 10분 동안은 설설 맨다”고 했다. 나중에 김 해설사님의 블로그를 보니 얼마나 아픈지 어림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전문가도 쐐기풀을 다루다가 큰 코를 다치기는 하는가 보다. “순간적으로 너무 강력한 통증이 느껴진다. (쐐기풀에 쏘인) 한 손가락을 아무리 빨아도 통증이 대단하다. 마치 바늘로 계속 쑤시는 듯 5시간이 지나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아흐으~~~~~! 아고야~! 아파라.~~~ㅠㅠ;” 조심할 일이다.

 

개망초, 억울한 이름의 야생화

 

두문동재에서 금대봉을 가는 길 옆에는 옛 헬기장 터가 있다. 1968년 북한군 31명이 산길을 따라 청와대로 돌진한 ‘1·21 사건’ 이후, 정권은 두메산골에 자리잡은 화전민들을 산 아래로 몰아내고 곳곳에 헬기장을 조성했다. 그 뒤 오래 방치된 헬기장에서는 큰 삼림이 자랄 수 없어 유독 야생화가 많았다. 특히 이곳 헬기장에는 아예 야생화들의 ‘올림픽’이 열렸다. 큰까치수염, 참나물꽃, 박지나무, 쇠며느리밥풀꽃, 말나리, 독활 등이 어지럽게 피었다. 김 해설사의 말은 빨라지고, 이를 받아적는 펜은 바빠진다. 이번 올림픽의 주인공은 ‘나도씨눈난초’였다. 키가 20cm 남짓한 식물은 억센 야생화들 속에서 가냘픈 줄기를 내놓고 있었다. 그리 별나 보이지 않은 야생초지만, 김 해설사는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귀한 난초”라고 귀띔했다.

 

» 야생화 취재에 바쁜 필자. 한겨레21 박승화

헬기장 옆 길가에는 개망초도 자리를 잡았다. 김 해설사가 소개하는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 하필 여기저기서 많이 피어서 ‘망초’라 일컫던 들꽃은 줄기를 누르면 폭신했다. 그래서 줄기를 층층이 쌓아놓으면 푹신했다. 일제는 도자기를 가져갈 때 상자 속에 망초 줄기를 잔뜩 넣었다. 졸지에 문화재 약탈의 공범이 된 셈이었다. 망초라는 이름 앞에 하필 ‘개’가 붙은 사연이었다. 궂은 역사 속에서 애꿎은 들꽃만 억울한 이름을 얻게 됐다.

금대봉을 지나쳐서 고목나무샘을 지나자 비가 쏟아졌다. 다시 돌아오기로 한 택시에 우산을 남겨두고 온 것이 후회막심했다. 산속에 비가 오면 속수무책이다. 도시에서 익숙한 처마 따위는 없다. 잎이 많은 나무 밑에서도 비를 단지 덜 맞을 뿐이다. 노트북을 담은 기자의 배낭도, 사진기자인 박승화 선배의 카메라를 덮은 수건도 흠뻑 젖었다. 등산객의 사정 따위야 아랑곳없이, 비가 오는 숲길에는 생명이 내뿜는 활기가 퍼져나간다. 빗물이 건드리는 잎사귀며 꽃마다 일제히 깨어나서 몸을 흔든다. 산꿩나무나 일월비비추 같은 이름만큼이나 예쁜 꽃들도 빗속에서 반짝인다. 옛날 굴피집 지붕의 재료로 쓰이던 굴참나무도 빗물을 나눠 맞으며 등산객을 굽어본다.

비는 야트막한 분주령에 접어들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좁은 산길에는 빗물이 흘러 물길이 만들어졌다. 분주령을 지나 대덕산 비탈을 오르니 비는 잦아들었다. 비탈을 오른 끝에는 대덕산 정상(1307m)이 있다. 바람이 억센 정상은 온갖 야생초로 가득 차 장관을 이뤘다. 층층꽃, 일월비비추, 솔나리, 산비장이, 떡취, 마타리, 돌마타리, 노박덩굴…. 고도가 높아지니 처음 보는 야생화들도 눈에 들어온다. 야생초 애호가들이 이곳을 ‘산상화원’ ‘천상화원’이라 부를 만했다. 김상구 해설사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귀하다는 넓은잎노랑투구꽃이 산 정상 곳곳에서 우아하게 자세를 잡았다. “이 귀한 꽃이….” 김 해설사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바람이 거셌다. 간간이 뿌리는 빗물은 바람을 타고 볼과 목을 때렸다. 따끔거릴 정도였다. 바람은 꽃도 가만두지 않았다. 귀한 꽃을 화면에 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카메라를 든 채 꽃 앞에서 한참 동안 부동자세를 취하던 김 해설사가 만족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산길은 금방이었다. 한 30분 정도 비탈을 내려오자 검룡소에 이르렀다. 한강의 발원지다.

 

태백의 주인은 야생화일지도

 

태백은 척박한 땅이다. 역사시대 이후로도 사람이 정착한 시절보다 풀과 나무만 무성한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그러니 이곳은 사람에게만 척박한 땅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오랜 시간 금대봉과 분주령, 대덕산을 지킨 야생화들일지도 모른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산림조합중앙회





 


» 분주령 야생화길
■ 코스 및 소요시간
두문동재∼금대봉∼고목나무샘∼분주령∼대덕산∼검룡소(4~5시간)

 

■ 가는 방법
교통은 불편하다. 태백시 터미널에서 두문동재 또는 검룡소까지 오가는 대중교통 수단은 없다. 택시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승용차를 타려 해도 출발지와 도착지가 달라서 골치 아프다. 야생화를 ‘알현’하려면 품이 든다.

 

■ 탐방 안내
태백관광안내소 033-550-2828

 

■ 여행 관련 팁
야생화에 조예가 깊지 않다면,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는 것이 필수다. 비전문가가 혼자 가면 이름 없는 풀과 들꽃만 실컷 보다 오게 된다. 태백시 관광 누리집(tour.taebaek.go.kr)이나 태백시청 환경보호과(033-550-2061)로 신청하면 일정에 따라 문화해설사가 동행해주기도 한다.

 

인문학으로 가는 길-⑨ 정약용 유배길(전남 강진·영암)
[걷고 싶은 길 12선]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밴 다산유배길… 정약용과 김영랑의 흔적을 좇으며 정겨운 풍경에 위안받는 행복한 길

» 전남 강진의 다산수련원을 출발하는 다산유배길은 처음부터 넉넉한 흙길로 길손을 맞는다. 걸음을 뗄수록 색다른 풍경과 역사의 흔적이 오롯이 묻어난다. 한겨레21 정용일

길은 산을 가로지른 뒤 마을을 만난다. 소담스러운 돌담을 지나면 다시 산이 나오고 다른 마을과 풍경을 이어준다. 그 안에는 역사의 숨결과 한이 서려 있다. 전남 강진과 영암을 잇는 ‘다산유배길’은 가는 곳곳에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품고 있다. 이야기에는 유배에서 알 수 있듯, 강진의 자랑거리인 고려청자의 색깔처럼 푸르스름한 서러움이 묻어난다.

강진은 조선 태조 때인 1417년 광주시 광산구에 있던 전라도 병영을 왜구를 막으려고 이곳으로 옮기며 땅 이름이 생겨났다. 당시 영암 땅이던 도강마을과 장흥 땅 탐진마을을 합쳤고, 두 마을의 한 글자씩 따서 ‘강진’이 됐다. 이곳은 ‘북 개성 남 병영 상인’이라는 말이 있듯 상업이 발달했다. 심지어 “병영 사람이 아기를 낳을 때 뱃속 아이에게 ‘아나 동전’이라고 말하면 금방 나온다”는 말까지 있었다.

 

다산의 유배지, 영랑의 고향

 

병영의 풍요함은 사라진 지금 ‘길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자랑으로 갖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영랑 김윤식의 고향이고,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자신의 학문을 세운 곳이다. 이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길은 설렘을 선물한다.

긴 장마 끝에 햇볕이 내리쬐던 8월23일 다산유배길을 걸었다.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월출산을 지나면 야트막한 산과 과거로 돌아온 듯한 풍경을 지닌 강진읍이 나온다. 강진만을 따라 바다로 나가면 다산수련원을 만난다. 이곳이 출발지다. 수련원은 길손들에게 싼값(2인 기준 1만8천원)에 방을 내주거나, 정보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문화해설가를 연결해준다. 취재진은 지난해 서울에서 강진까지 다산유배길 약 420km를 걸은 윤동옥 문화해설가와 동행했다.

시작은 정호승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고 부른 흙길이다. 소나무 뿌리가 바닥에 모습을 드러낸 채 혈관처럼 얽혀 있다. 정 시인은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고 읊었다.

 

»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후반기 10년의 지낸 곳으로 이 곳에서 <목민심서> 등 대표적인 저서를 펴냈다. 한겨레21 정용일

만덕산 중턱의 흙길과 계단을 몇 걸음 지나면 다산이 학문을 집대성한 다산초당이 나온다. 다산은 1801년부터 시작한 유배생활 가운데 1808년부터 1819년 해배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 다산은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저작을 남기는 한편으로 계단밭을 만들어 미나리 등 농작물을 직접 재배했다. 1955년 복원된 다산초당은 여전히 흔적을 간직한다. 바위에 글을 새겼다는 정석(丁石) 바위, 찻물을 받았던 약천, 차를 우려 마셨던 다조와 잉어 두 마리가 노니는 연지석가산 등 ‘다산 4경’이 나온다.

다산초당을 등지면 바로 천일각을 만난다. 다산 유배 시절에는 없었지만, 이곳에서 여성의 자궁을 닮았다는 강진만을 굽어볼 수 있다.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상당 부분 뭍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짠내를 간직한 강진만은 넉넉한 갯벌과 바닷물을 자랑한다.

백련사로 향하면 사람의 손때가 덜 묻은 녹차밭과 꽃이 핀다는 동백숲이 마중 나온다. 8월 하순이라 꽃은 졌지만, 꽃대궐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동백나무 수천 그루가 자태를 뽐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은 11월 말에서 이듬해 4월까지 두 번 꽃을 피운다. 소설가 조정래는 <한강>에서 “동백꽃의 절정의 아름다움은 낙화에 있었다. 꽃이 지되 벚꽃처럼 꽃잎이 낱낱이 흩어지지 않고 꽃송이 그대로 무슨 슬픔이나 서러움의 덩어리인 양 뚝뚝 떨어져내렸다. 변색하지 않고 떨어진 그 꽃송이들은 또 땅 위에다 새로운 꽃밭을 현란하게 이루어놓았다. 사무친 한을 풀 듯 동백꽃은 나무에서 한 번, 땅 위에서 또 한 번, 두 번 피어나는 꽃이었다”고 썼다.

 

옛 풍경과 역사를 살펴본 보람

 

백련사를 거쳐 도로를 만나면 바로 강진만이다. 갈대와 갯벌이 어우러진 강진만은 겨울에는 청둥오리, 도요새, 백로 등 철새를 볼 수 있다. 아예 이들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철새 관찰 지점을 만들어 망원경까지 마련했다. 여름 뙤약볕은 강진만의 물결 위에서 부서지며 지나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남해 바다의 입구와 탐진강의 끝자락에 갈대밭이 흐드러져 있다. 갈대를 끼고 걸으면 어느새 마을이다.

남포마을과 목리마을은 금방이라도 마을 이장이 마이크로 “○○댁, 서울서 전화 왔소. 언능 전화받으쇼”라는 안내를 하던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텃밭에서 자라는 호박과 옥수수, 콩, 깻잎 등도 정겹다. 여유로움을 지나면 부산스러운 강진 5일장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민물새우로 만드는 토하젓을 비롯해 많은 농수산물을 살 수 있다.

장터를 지나면 다시 다산의 흔적을 만난다. 처음 유배 와서 머물렀던 곳인 ‘사의재’다. 죄인인 다산을 반겨주는 이가 이곳 주모밖에 없었다. 다산은 주막집에서 4년 동안 지내며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방을 사의재라고 지었다.

 

» 전남 강진의 다산수련원을 출발하는 다산유배길은 처음부터 넉넉한 흙길로 길손을 맞는다. 걸음을 뗄수록 색다른 풍경과 역사의 흔적이 오롯이 묻어난다. 한겨레21 정용일

또 다른 자랑인 영랑 생가도 이웃하고 있다. 남도의 말로 가냘프고도 질긴 서정을 노래한 순수 낭만주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김윤식이 나고 자란 집이다. 가는 길에 만나는 영랑사진관, 모란마트, 모란세탁소, 모란아구찜 따위는 이곳 사람들의 영랑 사랑을 가늠케 한다. 이곳을 관리하는 박선덕씨는 “영랑 생가에 오는 사람들은 편안함과 명당 기운을 느끼고 간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곳까지 도달하면 산을 거치며 난 땀은 기분 좋게 식고, 옛 풍경과 역사를 살펴본 보람이 남는다. 다산유배길 1코스로 15km인 ‘다산오솔길’이다.

영랑 생가 뒤쪽으로 다산이 사의재 이후 머무른 고성사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길은 강진읍을 껴안은 보은산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윤동옥 해설가는 “맏아들 학연이 다산을 찾아오자 입이 늘어 사의재에 머무를 수 없어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옮겼다”며 “그때 끼니를 걱정하며 걸었던 길”이라고 소개했다. 가장의 책임이 어깨를 짓누르지만, 그것을 다하지 못하는 무거운 발걸음이 이 길에 새겨진 셈이다. 가는 도중에 ‘보은산 약수터’가 있다. 목마름을 넉넉히 감싸주는 시원함과 함께 색다른 ‘천연 샤워장’을 선물한다. 아니 선물했다. 윤 해설가는 “이곳에 돌담으로 만든 샤워장이 있어 바깥에 수건을 걸어두면 안에 누가 있다는 표시로 알고 기다리며 씻던 곳”이라며 “지난달까지 있던 목욕탕이 5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사라진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고성사는 바로 아래 강진읍과 멀리 강진만까지 굽어본다. 오랜 절들이 그렇듯, 산을 배경 삼아 자연을 마당으로 내려다보는 경치다. 다시 길을 시작하면 넉넉하던 길이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비켜서야 할 만큼 오솔길이다. 늘씬하게 뻗은 삼나무를 비롯해 참나무, 편백 등을 벗삼아 걷는 길은 좁은 만큼 호젓한 맛을 선사한다.

 

‘어쩌면 그리 도봉산 같아’

 

숲길이 끝나면 다시 마을이다. 강진에 “1금당 2향촌”이라는 말이 전할만큼 최고 명당으로 꼽히는 금당마을이다. 그만큼 많은 문인과 지사를 배출했다고 자랑한다.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은 금당 백련지는 연꽃이 흐드러진 사이에 두 개의 섬이 있다. 다시 평지로 이어진 길은 이웃 마을과 닿는다. 달마지마을은 매일 낮 12시와 밤 9시에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호랑이 울음소리로 마을에 멧돼지가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영랑 생가에서 이곳까지가 2코스로 13.4km인 ‘시인의 마을길’이다. 다산수련원에서 오전에 시작했다면 이곳에 도착하면 하루가 지난다.

 

»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후반기 10년을 지낸 곳으로 이곳에서 <목민심서> 등 대표적인 저서를 펴냈다. 한겨레21 정용일

이곳부터 월출산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밋밋한 산 사이로 중뿔나게 튀어오른 산의 남쪽은 차밭과 넉넉한 농지를 제공한다. 한 발짝씩 떼면 소담하고 한적한 맛으로 잘 알려진 무위사가 나온다. 극락보전은 대표적 목조건축물로 국보 13호로 지정돼 있고, 아미타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가 보존돼 있다. 하지만 새 절당이 세워지고 여전히 공사 중이어서 ‘무위’라는 본연의 맛은 희미해졌다.

월출산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더욱 풍성해진다. 무위사를 등지면 녹차밭을 만난다. 초록바다인 녹차밭은 보성 녹차밭에 비해 경사가 완만해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이어 등장하는 백운동 계곡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정과 함께 호남의 3대 원림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과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이 갈 길 바쁜 행인들의 발을 붙잡는다.

월출산 남쪽을 거슬러 올라가면 북쪽으로 향하는 고개가 나온다. 조선시대 영암과 강진의 경계인 누릿재다. 도로가 생긴 뒤 쓰이지 않은 이 길은 최근 새로 뚫렸지만, 여전히 나무와 넝쿨이 빽빽하다. 누릿재는 다산이 유배 오며 돌아보지 말기를 스스로에게 당부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넘으며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라고 당시 심정을 노래했다. 이곳을 지나면 영암이고 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천황사와 만난다. 이곳까지 3코스로 16.6km인 ‘녹색향기길’이다.

다산유배길은 이곳에서 월출산을 감싸고 서쪽으로 향한다. 최근 개발한 ‘월출산기찬랜드’ ‘기건강센터’가 있고, 영암이 자랑하는 도갑사, 왕인박사 유적지 등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유배길의 원형은 서쪽이 아닌 동쪽이다.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길

 

이 길은 코오롱스포츠가 후원한 ‘삼남대로’의 일부 혹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열고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불린다. 같은 길이 주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다산 선생의 흔적을 찾는 길이거나, 옛 한양에서 해남과 제주까지 이어지는 조선대로의 가장 긴 구간인 삼남대로를 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걸어보면 명칭은 중요치 않다. 누구에게는 실연의 아픔을 달래는 위안길이고, 누구에게는 가족과 함께 사랑을 꽃피우는 행복길이 될 테니까. 다만 걷는 내내 행선지를 안내하는 띠와 문패에 박힌 ‘코오롱 스포츠’가 상업적인 냄새가 나 불편하게 한다.

» 산림조합중앙회
강진=글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ungil@hani.co.kr





 

» 유배길
■ 코스 및 소요시간
1코스(다산오솔길): 다산수련원~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남포마을~목리마을~강진5일장~사의재~영랑생가 15km 5시간
2코스(시인의 마을길): 영랑생가~보은산방(고성사)~솔치~금당마을(백련지)~성전달마지마을 13.4km 4시간30분
3코스(녹색향기길): 성전달마지마을~무위사~안운마을(백운동)~강진다원(녹차밭)~월남사지3층석탑~월남마을~누릿재~천황사 16.6km 5시간30분

 

■ 가는 방법
강진버스터미널에서 다산수련원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1시간마다 있다. 30분 정도 걸린다. 승용차는 편하지만, 한 방향으로 길이 진행돼 다시 돌아와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 탐방 안내
강진군관광안내 061-430-3224
영암군 관광안내 061-470-2114
강진군다산수련원 061-430-3786

 

■ 먹거리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에서 추천한 ㅎ 식당은 며느리가 물려받은 뒤 맛을 잃었다는 얘기도 있다. 유 전 청장도 <나의문화유산답사기 3>에서 정정했다. 다산수련원 쪽은 한정식 집으로 종가집, 예향, 명동식당 등을 추천한다. 가격은 4인 기준으로 한 상에 10만원이다.

 

초가을 산촌의 숲에 취하다-⑩ 함양 상림(경남 함양)

[걷고 싶은 길 12선] 천 년이 넘는 역사, 신라시대 최치원이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 ‘상림’을 걷다… 탁족하며 막걸리나 들이켜면 참 좋겠네

 

» 국내 최초의 인공림인 상림에는 120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란다. 지난 1100년 동안 상림은 함양 사람들의 휴식처였다. 한겨레21 김경호

심오한 뜻이 담긴 이름은 아니었다. ‘위에 있는 숲’이라서 상림(上林)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 경남 함양 상림을 찾은 것은 추석을 일주일 앞둔 9월5일이었다. 평일 오후라서였을까. 관광 온 외지인들만 어쩌다 눈에 띌 뿐 한적한 숲은 새소리와 물소리만 가득했다.

 

함양 사람들의 애착으로 키운 숲

 

윗숲이 있는데, 아랫숲은 없었을까. 동행한 숲해설사 배정경(34)씨한테 물었더니, 있었단다. 원래는 하나의 숲이었는데, 중간에 마을이 파고들어 위아래로 나뉜 뒤 상림·하림으로 불렸다. 하림은 한국전쟁 당시 정찰기 비행장이 생기면서 사라졌고, 지금은 군부대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 진성여왕 말기 지방관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하니, 숲의 역사는 1100년이 넘는다. 분지의 중앙을 가로지르던 위천이 자주 범람하자,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린 뒤 둑을 보호하려고 나무를 심은 것이 숲의 기원이다.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과 용도가 같다. 흥미로운 것은 1천 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숲치고는 눈에 띄는 거대목이 드물다는 점이다. 상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가 지난 8월 강풍으로 쓰러졌는데, 나이테로 수령을 측정해보니 ‘고작’ 102년이었다고 한다. 배정경씨에게 연유를 묻자, 자연 상태의 숲에선 극심한 경쟁 때문에 나무들이 100년 이상 살기 어렵다는 설명이 돌아온다. “팔팔한 놈들이 자기도 살겠다며 눈 부라리고 파고드는데 늙은 것들이 우짜겠어요? 스트레스 받으면 나무도 오래 몬 산다 아입니꺼?” 가혹한 경쟁이 야기하는 고통은 나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란 얘기다.

상림에는 120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다. 때죽나무, 사람주나무, 쪽동백, 당단풍, 나도밤나무 같은 소교목과 느티나무, 서어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같은 대교목들이 섞여 자란다. 최치원이 숲을 조성할 때 지리·덕유·가야산의 나무들을 옮겨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오지만, 도로가 변변찮고 운송 수단도 마땅찮던 시절에 과연 그랬을까, 의심이 가는 건 별 도리가 없다.

 

숲의 조성자가 최치원이다 보니, 상림이란 이름 대신 최치원 공원으로 개칭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경주 최씨 문중이 주도해 함양 군민들을 상대로 여론조사까지 벌였지만, 다수가 상림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익의 정치가 장소의 역사성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상림에 대한 함양 사람들의 애착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상림 초입에서 만난 강상진(46)씨는 “하루라도 안 나오면 ‘큰일’ 보고 뒤 안 닦은 것처럼 개운치가 않다”고 했다.

 

» 연암 박지원이 처음 설치해 함양의 상징이 된 물레방아. 한겨레21 김경호

주차장을 출발해 5분쯤 걸으니 누각과 공연 무대 등이 있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누각의 이름은 함화루(咸化樓). 옛 함양읍성 남문의 문루를 옮겨놓은 것이다. 누대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고 해서 원래 이름은 망악루(望岳樓)였단다. 숲 속 공터는 한국전쟁 당시 군부대가 주둔하며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3년의 전쟁 기간을 통틀어 이곳이 정규군끼리 맞붙은 주전선이었던 적은 없으니, 군이 주둔했다면 십중팔구 지리산과 덕유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을 소탕하려고 편성된 토벌대였을 것이다.

함양에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데는 지리적 환경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서쪽으로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경남 서부의 산악분지인 함양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데다, 행정구역 안에 1천m를 넘는 고봉이 17개나 되다 보니 산자락에 은거하며 유격전을 펼치기엔 최적이었다. 전설적인 빨치산 지휘관 남도부(본명 하준수·1922~55)가 함양 출신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함양 부호의 아들인 그는 일제 말 학병 징집을 피해 함양 괘관산에 은거하며 비슷한 처지의 학병 기피자를 규합해 보광당이란 무장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1948년 5·10 총선을 앞두고는 함양군 야산대를 조직해 지리산 천왕봉에서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남한 빨치산의 발상지가 함양인 셈이다. 남도부는 이병주 소설 <지리산>에 등장하는 주인공 박태영의 실존 모델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군사독재의 역사 고스란히 품어

 

공터를 지나 숲의 중심부로 들어가니 콘크리트 기단 위에 목조 누각을 얹은 키치풍의 누정이 눈에 들어온다. 화수정(花樹亭)이다. 1972년 함양의 파평윤씨 종중에서 세웠다고 하는데, 상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11년이 지난 뒤다. 사유지도 아닌 국가지정 기념물 안에 종중의 이름을 단 건축물을 세우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군 관계자에게 물으니, “정자를 건립하던 당시 파평윤씨가 함양경찰서장으로 있어 가능했던 일”이라고 귀띔한다. 궁금증이 도져 인터넷을 뒤져본다. 정자 건립 시기가 윤아무개 총경의 서장 재임 기간(1971~74년)과 겹친다. 전후 사정이 대충 그려진다.

그런데 1973년 5월 윤 총경의 이름으로 검색되는 진주발 <동아일보> 기사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해 4월 윤 총경을 태운 함양경찰서 지프차가 산청의 도로에서 취객을 친 뒤 달아났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는데, 산청 경찰이 상황을 뒤집으려고 신고자인 유조차 운전자를 고문해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은 박원순 변호사가 쓴 <야만시대의 기록>에서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고문조작 사례로 기록돼 있다. 진범이 누가 됐든 윤 서장이 평범한 경찰간부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개운찮은 기분을 씻어내려 걸음을 재촉하니 또 다른 누정인 사운정(思雲亭)이 나온다. 1906년 경남 유림들이 최치원을 추모하려고 세운 것이다. 요즘도 지역 시우회원들의 시조창을 비롯해 각종 문예행사가 자주 열린다. 지난 8월 강풍 때 고목이 쓰러지며 지붕을 덮쳤으나, 다행히 기와 몇 장만 깨지고 큰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사운정 옆으로는 작은 물길이 지난다. 상림을 관통하는 인공수로다. 숲을 만들 당시 원활한 배수와 수분 공급을 위해 조성한 것인데,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도 정겹다. 탁족하며 막걸리라도 들이켜면 제격이겠다.

 

» 상림에서 이어지는 필봉산 산책로. 한겨레21 김경호

“지금은 줄 쳐서 막아놨지만, 옛날엔 여기 전부가 노는 디였어. 어찌나 장구 치고 노래를 불러대는지, 마음이 심란해서 일을 몬했어.” 상림 옆 죽장마을에 60년째 살고 있는 박분순(76) 할머니의 회상이다. 흰 고무신에 몸뻬 차림으로 숲길을 걷던 할머니는 “풀 뽑는 일 하러 공원사무소 가는 길”이라고 했다. “놀면 뭐하노? 걸을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나가 용돈 벌어야지.”

물소리, 새소리에 취해 걸음을 옮긴다. 죽장마을로 이어지는 소로변에 물레방아가 돌고 있다. 물레방아는 함양군의 상징물이다. 연암 박지원이 1792년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지금의 안의면 안심마을에 물레방아를 설치한 데서 연유했단다. 그래서 군의 축제 이름이 물레방아축제다. 물레방아는 거창·산청·함양 등 서부 경남에서 전승되는 민요 <질꾸내기>에도 등장한다. “함양·산청의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쉴 틈 없이 아내를 안고 돌았을 함양 남자들의 노고에 존경심마저 든다.

상림과 이어진 필봉산 산책로로 접어든다. 지난해 함양군은 상림 숲길과 필봉산 오솔길을 묶어 ‘최치원 산책로’라 이름 붙였다. 산책로 길이가 짧은 상림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아이디어를 짜낸 것인데, 걸어본 이들의 반응이 좋단다. 평지의 숲길과 구릉의 오솔길을 이어놓으니 지루함도 덜하다. 상림의 북쪽 끝과 맞닿은 대병저수지를 끼고 돌아 필봉산 자락으로 들어서니, 순해진 초가을 햇살이 죽죽 뻗은 솔가지 사이로 기분 좋게 부서져내린다. 능선에 오르자 남쪽의 삼봉산(1186m) 능선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1915m)이 시야에 잡힌다. 북쪽으로는 백암산(621m)과 괘관산(1252m) 너머 남덕유산(1507m)의 완만한 능선이 펼쳐진다. 덕유산과 지리산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평지와 구릉 조화로운 ‘최치원 산책로’도 추천

 

장쾌한 산세에 넋 놓고 있는 사이 운동복 차림의 날렵한 여성 1명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말을 붙였더니 수줍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인접한 전북 남원 아영(阿英, 이름 정말 예쁘다!)에서 30년 전 함양으로 시집을 왔다는 박종임(53)씨다. 1년 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운동 삼아 상림과 필봉산을 걷기 시작했는데, 상서로운 숲 기운 덕인지 요즘은 아픈 곳이 없단다.
구릉을 오르내리며 1시간쯤 걸었더니, 다시 상림의 남쪽 끝이다. 산촌의 초가을, 참 좋다.
*취재 일정과 현지 사정으로 인해 애초 예정됐던 선청 남명길 대신 함양 상림으로 연재를 대체합니다.

함양=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 걷고 싶은 길
■ 교통편
승용차로는 대전~통영 고속도로에서 함양IC로 빠져 함양읍내에서 상림을 찾으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까지 하루 11회 왕복 운행한다. 편도요금 1만7200원. 예상 소요시간 3시간

함양고속버스터미널에서 상림 주차장까지는 택시로 10분 안팎, 걸어서는 20분 정도 걸린다.

 



■ 여행 정보
상림공원관리사무소 055-960-5756
함양군청 문화관광과 055-960-5160

 

누구나 길을 걷는 이유가 있다 -⑪ 강화 나들길(인천)
[걷고 싶은 길 12선] 자연과 역사, 숲길과 뚝방길, 산과 바다가 한 코스에 모두 있는 강화 나들길… 길의 끝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가족이 있는 곳에 이르다

 

» 강화 나들길에 간다면 해질 무렵에 해안가에 도착하는 일정을 짜는 것이 좋다. 황지우 시인의 표현대로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는 쓸쓸하게 아름답다.
먼저 연꽃이 행인을 맞았다. 인천 강화군의 강화터미널을 출발해 외포리로 가는 강화 나들길 제5코스 ‘고비고개길’ 들머리, 국화저수지에 손바닥만 한 연꽃이 피어 있었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쳐진 국화마을 앞에 소담하게 앉은 저수지는 포근했다. 9월20일 화요일, 평일 오후의 고즈넉한 저수지를 돌아가는 길에서 중년의 부부를 만났다.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부부는 “일을 하다가 잠시 산책을 나왔다”고 했다. 이렇게 숲길을 걷다 보면 뚝방길로 이어지고 숲길과 뚝방길 사이에 마을이 나오는 강화 나들길은 ‘생활에 가까운’ 길이다. 인천에서는 1시간, 서울에서는 2시간이면 이르는 길을 강화 사람, 서울 사람, 인천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다. 이날 길잡이로 동행한 고근정 강화군 관광개발사업소 개발팀장은 “낮은 산 허리를 도는 코스가 많은 강화 나들길은 중·장년이나 어린이가 있는 가족이 걷기에 좋다”며 “혹시나 산에서 헤매게 돼도 조금만 내려가면 마을이 나오니 길 잃을 걱정도 없다”고 소개했다.

 

 

길을 벗어났다 돌아오는 묘미

3km 되는 국화저수지 길을 돌면 숲길로 이어진다. 다리가 살짝 불편한 어른이 걸어도 무리가 없을 숲길을 걷다 보면 국화리 학생야영장이 나온다. 등에 살짝 땀이 배면 야영장 계단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제5코스에서 그나마 ‘난코스’에 속하는 고비고개를 지나다 보면 고려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4월이면 온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진달래축제가 열리는 산이다. 해마다 상춘객 40만 명이 진달래 장관에 취한다. 고려산은 제5코스 경로는 아니지만, 완만한 숲길을 걷기에 조금 심심한 이들은 코스를 잠시 벗어나 산행하는 것도 좋겠다. 실제 강화 나들길에 익숙한 이들은 반드시 코스를 따라 걷지 않는다. 잠시 경로를 벗어나 강화 도처에 산재한 유적지를 보고 다시 코스로 돌아온다. 이렇게 나들길에서 정해진 길에서 벗어났다 다시 길로 돌아오는 인생길 같은 묘미도 있는 것이다.

» 적석사 낙조대에서 내려다본 강화의 풍경.
다시 걷는다. 고천리를 지나 오상리 고인돌에 이르기 전, 약간의 수고를 더하면 잊지 못할 풍경을 얻는다. 제5코스 오른쪽의 적석사를 따라 올라가면 낙조대 전망대에 이른다.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일단 올라가면 강화도 들판부터 바다 건너 석모도, 교동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을 보면 멀리 마니산 등성이가 보이고, 오른쪽 아래에 펼쳐진 논은 평야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다. 고근정 팀장은 “논이 넓어서 저기에 미곡 처리장도 있다”고 전한다. 가히 산과 물과 논과 집이 어우러진 장관이다. 날이 맑아 시계가 좋았던 이날은 멀리 경기도 일산의 아파트 단지도 보였다. 오후에 보아도 장관인데, 낙조대란 이름처럼 서해 바다로 해질 무렵의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풍경에 취해 있을 즈음, 한 무리의 장년들이 낙조대에 올라왔다. 어김없이 한 아저씨가 “아이고~ 여기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네”라고 탄식하듯 뱉는다. 가을 바람에 놀란 풍경 소리가 ‘쨍’ 하는 적석사는 역사가 깊었다. 고구려 장수왕 시절에 천축도사가 고려산에서 오색 연꽃을 날려 그 꽃이 떨어진 곳마다 절을 지었는데, 붉은 꽃이 떨어져 ‘적련사’라 불렸다가 ‘적석사’로 바뀌었다고 절의 안내문은 전했다.

오상리 고인돌을 지나 숲길을 내려오면 내가 저수지에 이른다. 풀이 발밑에 폭신하게 밟히는 저수지 뚝방길을 걷는데 물가에서 ‘후두둑’ 소리가 들린다. 야생 오리떼 수십 마리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저수지 물 위를 뛰어간다. 고근정 팀장은 “겨울이면 철새들이 알곡을 쪼으러 논밭에 몰려든다”고 전했다. 뚝방길 오른쪽 아래 길에는 가을 코스모스가 늘씬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저수지 바람을 맞으며 뚝방길을 돌아가면 내가면 마을이 나온다. 마치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린 것 같은 낡은 단층 건물들이 나란한 내가면에는 시장도 있다. 5시간여를 걸어왔으니, 여기서 허기를 달래도 좋다. 마을길에서 구수한 된장찌개를 내놓는 시골 밥집들이 행인을 맞는다.

마을을 잠시 지나면 다시 숲길이 나온다. 길은 덕산삼림욕장 입구를 지나는데 해질 무렵까지 시간이 남았다면 삼림욕장을 한 바퀴 돌아도 좋다. 어느새 물드는 삼림욕장 들머리 나무들이 가을이 왔음을 알렸다. 굳이 삼림욕장으로 들어서지 않더라도, 외포리로 넘어가는 길은 삼림욕장 부럽지 않은 숲길이다. 풀냄새에 취해 가다 보면 숲길은 자연스레 마을로 내려가는 길로 이어진다. 시골 민가의 뒷산인 셈인데, 여기에 외포리 굿당이 있다. 반농반어의 시골답게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굿을 지내는 곳이다. 여기의 곶창굿을 이끌던 만신은 무형문화제로 지정됐고, 요즘도 2~3년에 한 번씩 음력 2월에 굿판을 벌인다. 사흘간 진행되는 굿은 매일 오후 4시까지만 진행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밤을 새운다. 공동체적 특징이 유난히 살아 있는 굿이다.

 


» 김진숙씨 언니네 가족이 운영하는 외포리 버스정류장 옆의 슈퍼.
민근부씨의 차부수퍼를 찾아서

변덕스런 바다에 목숨을 맡겨야 하는 현실의 거울인 굿당이 바다가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아니나 다를까, 굿당을 지나면 바다가 보인다. 굿당에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 백발의 촌로가 홀로 앉아 낯선 이에게 “방금도 (사람들) 많이 지나갔소” 하며 인사를 건넨다. 외포리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혹시 차부상회 아세요?” 답을 크게 기대치 않았는데, 촌로가 아래로 보이는 마을 왼쪽을 가리키며 “저기야”라고 한다. 혹시나 잘못 전달됐나 싶어 다시 묻지만 역시 대답이 같다. 정말로 그곳이 있다는 말인가?

저마다 길을 걷는 목적이 있다. 애초 ‘걷고 싶은 길 12선’ 가운데 강화를 가겠다고 한 이유는 뚜렷했다. 강화가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부산에서 깃발처럼 휘날리는 크레인에 올라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그의 책 <소금꽃 나무>에는 ‘차부상회 민근부의 고백’이란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 “30년 넘도록 수리를 한 적도, 청소를 한 적도, 문을 닫아본 적도 없는 강화도 외포리 ‘차부상회’의 민근부. 쉰아홉 살의 우리 큰언니다”라고 나온다. 정말로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갔는데 정말로 있었다.

내려가서도 헤매지 않을까 했는데 쉽게 찾았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어림잡아 찾아가자 차부수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외포리 버스정류장 바로 옆이었다. 그런데 김진숙과 민근부, 자매지만 성이 다르다. “월북한 남편을 잃고, 월남한 새 남편을 맞아야” 했던 어머니가 낳은 첫 딸이라고 책에 이유가 나온다. 김진숙씨는 글에서 “‘근부 팔자는 지발 내 팔자 안 닮게 해주시겨.’ 우리 엄마 기도도 보람 없이, 결혼식 날 마신 술에서 35년 동안 단 하루도 깬 날이 없는 남자에게 (언니가) 시집을 갔다”고 했는데, 이날도 그 ‘남자’가 불콰한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캔커피를 사며 “김진숙씨 언니 댁이 맞느냐”고 하자 경계하는 눈빛으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신분을 밝히자 김진숙씨의 큰형부는 “그 사람 목적은 노동자 살리자는 것뿐”이라며 “우리도 3차 희망버스 타고 부산에 갔잖아”라고 말했다. 남동생 장례식 날에도 “가게를 보던 조카에게 ‘엄마, 와사비 얼마야?’라고 묻는 전화가 오면 ‘큰 거? 짝은 거?’ 묻고는 ‘짝은 건 820원’ 대답하고는 다시 우는” 언니는 이날도 바빠서 가게에 없었다. 강화에서 태어난 김진숙씨는 부산으로 가기 전까지 여기서 자랐다. 서해 포구에서 자란 소녀가 남해 조선소 크레인에 올랐으니, 그와 바다의 기막힌 인연이 새삼 기막혔다.

 

 

머리 위까지 물들인 석양

강화 나들길 제5코스 ‘고비고개길’의 여정은 망양돈대에서 끝난다. 항몽의 기운이 서린 돈대는 포를 쏘려고 쌓은 성곽이다. 그 옛적에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은 돈대에 서니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은 머리 위의 구름까지 붉게 물들이며 숨 막히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강화도 나들길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길이다. 숲길을 걸으면 갯벌에 이르고, 소박한 시장에 발길을 멈추면 다음엔 삼별초 유적이 나온다. 이렇게 강화의 자연은 당신을 보듬고 역사는 말을 걸어올 것이다. 바다에 이르면 해안을 떠도는 상념도 있다.

 

 

강화 나들길 소개

8개 코스 골라 걷는 재미

강화 나들길은 8개 코스가 있다. 강화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는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부터 초지진에서 시작해 갯벌길에 이르는 제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까지 역사·숲길·갯벌 등 주제에 따라 선택할 여지가 많다. 매주 둘째·넷째 토요일에는 길잡이가 코스를 인도하는 ‘정기도보’도 진행된다. 8개 코스에 대한 설명과 정기도보 공지 등은 강화 나들길 카페(www.trekking.go.kr)를 참고하면 된다. 걷기의 성취감을 더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해두었다. 강화군은 도보여권을 만들어 코스별로 출발점과 도착점에서 도장을 찍어준다. 8코스 도장을 모두 받으면 완주 인증서도 보내준다.

 

■ 제5코스 및 소요시간강화버스터미널~남문~서문~국화저수지~홍릉~오상리고인돌군~내가시장~덕산산림욕장~곶창굿당~망양돈대~외포여객터미널 20.2km, 6시간40분

 

■ 가는 방법서울 신촌에서 3000번 버스를 탄 뒤 강화버스터미널에 내린다. 15분마다 버스가 있다. 인천에서 강화로 가는 70, 700, 700-1번 버스 등도 있다. 자가용으로 가도 일단 강화터미널로 가는 편이 좋다. 제8코스 도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외포버스터미널에서 강화버스터미널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면 된다.

 

■ 탐방 안내

강화군 관광개발사업소 032-930-4331

외포리관광안내소 032-934-5565

 

그 산의 뒷모습을 보았네 -⑫북한산 둘레길
한해 200만 탐방객을 부르는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길~우이령길 구간을 걸으며 전설과 역사, 봉우리의 숨은 얼굴을 만나다

» 북한산 둘레길은 한 해 200만 명이 넘는 탐방객이 다녀가는 둘레길의 명소다. 둘레길을 걷는 둘레꾼들의 모습.
북한산 둘레길은 앞사람의 그림자를 밟고 가는 길이다.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156만 명이 둘레길을 다녀갔다. 한 해 200만 명을 훌쩍 넘기는 수다. 둘레길이 열리기 전에도 그랬다. “이러다 저 산이 무너질라.” 주말이면 인수봉, 백운대로 오르는 사람 행렬에 탄식이 컸다. 둘레길이 열리며 분산효과가 커졌다지만, 전체적으론 오히려 찾는 사람을 늘렸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 7월1일 새로 열린 도봉산 쪽 둘레길만 해도 두 달 새 11만7천 명이 다녀갔단다. 호젓한 산길을 걷고 싶은 마음, 어디서 채울까? 내시묘역길에서 충의길 구간은 둘레길 탐방 행렬이 가장 적은 편이다. 충의길에서 다시 우이령으로 이어지는 15.9km의 북한산 뒷길을 숲해설가 박찬희씨와 동행했다.

 

뒤돌아보게 하는 길

둘레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사람을 피해간 이 길에서 사람의 흔적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방패교육대에서 시작한 내시묘역길은 집과 집 사이, 밭과 산 사이에 놓인 작은 길로 이어진다. 북한산에 드나든 지 35년을 넘겼다는 박찬희씨는 “여기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지 5년도 안 된다. 좁았던 길이 넓어지고 옛 모습도 많이 지워졌다”고 말한다. 과연 내시묘역길 초입에서는 풀보다는 채소를, 터잡은 산자락 나무들보다는 곧 팔려나갈 관상수들을 더 흔하게 마주친다. 농원과 집을 피하느라 11구간 내시묘역길은 한껏 구불구불하다.

둘레길은 뒤돌아보게 하는 길이다. 내시묘역길을 10분쯤 걸으면 짝사랑하던 님을 기다리던 기생이 몸을 던져 죽었다는 전설 속 연못이 있던 여기소터를 지난다. 그러고는 내시묘역이다. <북한산 둘레길에서 숨은 서울 찾기>(나름북스 펴냄)를 쓴 박재경씨는 지난해 백화사로 가는 길에 있는 45기 묘역을 답사했다는데, 지금은 농원이 가로막아 묘역을 보기는 어렵다. 내시들의 무덤은 길 뒤로 물러나고, 세도가들이었다는 이씨 문공파 묘역은 여전히 위세가 높다. 조선시대에는 내시가 되려고 자원해서 시술받는 이도 많았으며 살아 있을 때는 거세한 성기를 나무로 된 갑에 넣어 보관하다가 죽으면 그것을 몸에 바늘로 기워 맨 뒤 장사지냈다고 한다(<북한산 둘레길에서 숨은 서울 찾기>). 내시들의 묘에는 왕궁의 비밀과 그들의 애환도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좀 떨어져 있지만 효자길도 역사에 전설이 보태진 길이다. 숲해설가 박찬희씨는 “3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효자동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참배를 다니던 박태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효성에 감동한 고종이 비석을 내리고 동네 이름도 효자동이라고 칭했다”고 했다. ‘박태성정려비’에도 박태성의 효성에 북한산 호랑이도 감동해서 그를 등에 태우고 다녔다는 전설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박재경씨는 박태성에게 비석을 내린 것은 영조라고 한다. <이향견문록>에 따르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부모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던 박태성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무덤 주변에 촌락을 이루고 살며 효자동이 시작됐단다.

둘레길은 곁눈질하게 하는 길이다. 효자동으로 접어들자 등산객들과 자주 마주친다. 이대로 등산객들을 따라 오르면 백운대까지 2시간이면 닿을 텐데. 왜 굳이 6시간 넘게 둘레길을 걸어야 할까? 박태성묘를 지나 사기막골에 닿았을 때 망설임이 끝났다. 사기막골에선 뒤돌아봐야 한다. 오른쪽엔 백운대, 왼쪽에 인수봉, 가운데는 숨은벽이 또렷이 드러난다. 인수봉은 어머니가 아이를 업은 모습 같다고 해서 삼국시대에는 부아악이라고 불렸단다. 사기막골에서 보는 인수봉은 자애로운 형상이다. 숲해설가 박찬희씨는 숨은벽 예찬론자다. 숨은벽은 암벽 오르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가파른 바위산인데 다른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이름이 ‘숨은벽’이다. 그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이 길이란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봉우리의 숨은 얼굴이 다가온다. 박찬희씨는 “산의 뒷모습을 발견하는 곳이 둘레길”이라고 하고, 박재경씨는 “자꾸 위로만 향하는 수직적인 마음을 다잡고 수평적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 둘레길의 힘”이라고 했다.

 

 

죽은 길은 산 길로 이어지고

사기막골은 충의길로 이어진다. 충의길은 원래 자동차와 함께 걷는 길이라서 가장 인기 없는 구간이었다. 지난 8월 말까지 충의길을 다녀간 사람들이 1만7800명으로 21만 명이 다녀간 순례길 구간의 10분의 1도 못 됐다. 그런데 9월10일부터 충의길이 산길을 따라 새로 열렸다. 사기막골에서 흔들다리를 건너면 가파른 산길이 시작된다. 평탄하고 넓게 다져졌던 길이 끝나고 투박하고 좁은 길이 시작됐다. 북한산 둘레길 곳곳이 넓은 까닭은 사람의 발길 때문이다. 혼자서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던 좁은 옛길이 발길을 타며 2~3m로 넓어졌다. 박찬희씨는 자꾸 사람들이 드나들어서 넓어진 길을 ‘죽은 길’이라고 불렀다. 풀이 숨 쉬기 어려운 죽은 길이다.

사람의 발길이 적은 길이 ‘산 길’이다. 산 길가에서는 꽃도 하나, 열매도 하나인 애기나리가 한창이다. 향유와 꽃향유는 내시묘역길에도 흔했지만 산 길에선 한층 봉오리가 굵다. 향유를 살짝 손으로 훑어내리면 그윽한 향이 퍼진다. 내친김에 누리장 나뭇잎을 비벼서 냄새를 맡아본다. 땅콩 냄새 같기도 하고 연한 된장 냄새 같기도 하다. 옛사람들은 누리장 나무를 주로 뒷간 근처에 심었단다. 누리장 나무 냄새가 뒷간에서 풍기는 독한 냄새를 달래준다는 것이다. 산초잎은 모기들이 싫어하는 향을 풍겨 모기를 쫓는다. 박찬희씨 설명을 듣다 보니 쓸모있는 것이 지천이다. 고마리도 만났다. 돼지 50마리가 내뿜는 분뇨도 고마리가 사는 70㎡ 둔덕을 거친다면 깨끗하게 걸러진단다. “30년생 나무 두 그루만 있으면 사람이 평생 동안 숨을 쉴 수 있다”는 말도 매한가지다.

나무는 또 어떤가. 지나온 길 어디쯤에서는 주목을 만났다. 원래 고지대에서만 살던 주목은 항암 성분을 품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너른 농원에서 대량으로 키운다. 가을이 시작된 둘레길에선 햇볕이 스쳐간 듯 잎이 바래는 단풍나무가 한창이었지만 단풍나무도 원래는 중부지방의 나무는 아니었단다. 사람이 손대지 않은 산길에는 당단풍나무가 아직 푸른빛을 가지고 있다. 단풍나무의 잎은 5개로 갈라지지만 당단풍나무의 잎은 9개에서 11개로 갈라져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낮에 둘레길에서 주로 마주치는 산 것들은 주로 청설모다. 청설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북한산엔 등산로와 둘레길 말고도 360개 샛길들이 얽혀 있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샛길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둘러놓은 높은 보호 철책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만 못 드나드는 것이 아니다. 고라니도 토끼도 못 지나다닌다. 생태 통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손댈수록 망가지니 새로 생긴 충의길을 반가워해야 할지 마음이 어정쩡하다.

 

» 9월10일 새로 열린 충의길엔 4개의 흔들다리가 설치됐다. 군부대 사이로 난 이 길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란다.
여럿이 걷기 좋은 우이령길

솔고개를 넘으니 우이령 가는 길이다. 서둘러야 한다. 21구간 우이령길은 탐방예약제로 운영되는 길이다. 게다가 오후 2시가 지나면 나올 수는 있어도 들어갈 수는 없다. 독수리 사격장과 오봉유격대 군휴양지 등 군부대 시설이 지켜선 초입을 지나면, 북한의 국화인 함박꽃나무(흔히 목란이라 불린다)가 줄을 선 길을 만난다. 남북한이 얽혔던 이 길의 역사가 그랬다. 출입이 까다로운 덕분에 자생 희귀식물도 많이 살아남았다. 관리사무소는 어떤 식물인지는 절대 비밀에 부쳐달라고 했다. 사람들의 손을 타는 게 두려운 까닭이다. 우이령 바위에 얼룩진 지의류는 이 고개의 환경 지표다. 아황산가스 측정에 지표가 되는 지의류는 매연을 타지 않는 건강한 공기에서만 피어난단다.

우이령길은 여럿이 걷기에 좋은 길이다. 박찬희씨는 우이동에서 오르는 길보다 교현리에서 오르는 쪽을 권한다. 올라가는 길 경사가 만만한 때문이다. 예전에 경기도 양주 상인들이 서울로 물건 팔러 갔던 길이다. 오봉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소귀 모양처럼 생긴 터가 있다는데, 그 터에 있는 사람들은 이 길이 무엇을 닮았는지 알 길이 없다. 대신 작살나무, 국수나무, 참나무가 손을 스쳤다가 다시 멀어진다. 작살을 닮은 작살나무, 껍질을 벗기면 국수가 나오는 국수나무, 산의 중심을 잡는 참나무를 더듬다 보면 살아오며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질문이 귓전에 떨어진다. “소나무도 낙엽이 질까?” 과연 그랬다. 오래된 소나무 가지가 누런색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벌개미취와 구절초가 왕성한 길을 내려오니 가을이 바로 코앞이다.

 

 

21개 구간, 70km의 긴 길

천천히, 걷고 싶은 길 따라

북한산 둘레길은 21개 구간 70km의 긴 길이다. 어디에서 출발해도 결국은 만나는 둥그런 길이지만 거리는 녹록지 않다. 탐방안내소에서는 ‘둘레길 하루 만에 걷기’ 같은 초인적 프로그램보다는 하루 20km 정도씩 천천히 돌아보기를 권한다. 탐방객들 사이에는 도심 위를 걷는 듯한 구름정원길, 우국지사들의 묘역이 줄지어 있는 우이동 쪽 순례길, 시내와 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흰구름길의 빨래골 전망대 등이 인기다. 새로 생긴 충의길에는 중간중간 흔들다리 4곳을 지날 수 있다. 우이령길을 탐방하려면 국립공원 관리공단 홈페이지(http://www.knps.or.kr/)에 예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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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시간 및 코스 정보 -10구간 내시묘역길(방패교육대~내시묘역~둘레교~효자동 공설묘지) 3.5km 1시간

-11구간 효자길(효자동 공설묘지~밤골~국사당~사기막골 입구) 2.9km 50분

-12구간 충의길(사기막골 입구~흔들다리~엔젤농원) 3.9km 1시간 30분

-21구간 우이령길(교현 우이령길 입구~오봉산 전망 테크~대전차 장애물~우이 탐방 지원센터) 6.8km 2시간

 

■ 가는 방법 10구간 내시묘역길에서 출발하려면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로 나와 704·34번 버스를 타고 입곡삼거리역에서 내린다. 12구간 충의길로 가려면 같은 버스를 타고 사기막골 입구에서 내려 팻말을 따라 샛길로 들어와야 한다. 21구간 우이령길 입구는 120·153번 버스를 타고 수유역으로 간다.

 

■ 탐방 안내 교현탐방지원센터 031-855-6559

우이탐방지원센터 02-998-8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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