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춘천의 가을은 짙은 안개와 함께 옵니다. 가을이 하루하루 깊어지면 춘천의 의암호와 소양호, 춘천호에는 무시로 안개가 피어 오릅니다. 이른 아침 짙은 안개로 가득한 의암호에 캐나다산 적삼나무로 지은 카누 한 척을 띄웁니다. 노 젓는 찰박이는 물소리와 함께 배는 고요한 호수 위를 미끄러집니다. 인기척에 놀란 물오리 떼들이 안개 속에서 깨질 듯 파란 가을하늘로 푸드덕 날아오릅니다. 탱탱한 부력으로 떠있는 카누의 기분 좋은 흔들림, 노를 잡고 밀어낼 때마다 손으로 전해지는 물의 느낌, 호수 한가운데 자맥질을 하는 물새들이 만들어내는 물소리, 붉고 노란 가을빛으로 변해가는 수몰나무 가지마다 반짝이는 잎들…. 온 몸의 감각들이 일제히 깨워지는 순간들입니다. 잠시 노를 쉬고 버드나무 척척 늘어진 고요한 호수에 떠있자니 이내 ‘나’와 ‘자연’이 구분되지 않는, 이른바 ‘자연과의 합일’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제주에는 올레길이 있고, 지리산에는 둘레길이 있듯이 춘천의 호수 위를 저어가는 물길에 ‘물레길’이 놓였습니다. 물레길이란 말 그대로 ‘물 위의 길’이지만, 물길이란 그저 저 스스로 노를 젓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건 특정한 길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길을 가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가을색이 하루하루 짙어지는 호수 위에 배를 띄워 길을 내는 물레길이야말로 이 계절에 ‘가장 낭만적인 길’이라 자신합니다. 호수를 끼고 있는 독특한 중소도시 춘천에서는 물레길 말고도 명징한 가을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한강을 끼고 달리는 경춘국도 드라이브가 그렇고, 차가워진 대기 속에서 가을볕을 받으며 즐기는 중도에서의 캠핑이 그렇습니다. 경춘선 신선(新線)이 놓이면서 열차운행이 중단된 강촌역의 쇠락한 풍경이나 가을 해가 설핏 기울 무렵에 어깨가 닿을 정도로 좁디 좁은 골목길로 들어 찾아가는 ‘망대골목’의 오래된 풍경도 가을날에 어울리는 추억의 아릿한 정취를 보태줍니다. # 걷는 길보다 더 느리게 갈 수 있는 길이 여기 있다 길은 길이되 걷는 길이 아니라 물 위를 저어가는 길. 춘천에 새로 놓인 ‘물레길’은 춘천의 한복판에 그득 고여있는 의암호를 카누를 타고 노 저어가는 길이다. 물을 젓는 길이니 육로의 길처럼 딱히 코스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목적지만 정해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노를 저으면서 풍경을 즐기는 길이다. 걷기열풍으로 자고 나면 새로 생기는 ‘걷는 길’이 느림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물레길이야말로 그 느림의 정점에 서있다. 노를 잡은 손을 재게 놀린다면 보행 속도보단 더 빠르겠지만, 고요한 호수에 띄워놓은 카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다. 목적지를 향해 가되 느리게 제자리를 돌 때도 있을 것이고, 노를 놓고 고요한 물살에 몸을 맡기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뱃전에 앉으면 걸을 때보다 풍경을 더 자세히 보고, 바람이 살에 닿는 느낌이나 노가 일으키는 찰랑이는 물소리까지 온몸의 촉각으로 느끼게 된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어떻게 물 위로 퍼져가는지, 그 안개를 빨아들인 가을 숲이 얼마나 몽환적으로 빛나는지도 지켜볼 수 있다. 보폭을 좁히고 걸음의 속도를 늦출 때도 보지 못했던 것이, 희한하게도 카누를 떠미는 물살을 느끼다 보면 다 보인다. 물레길은 그러나 카누의 생경함에다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대개 카누를 요트와 같은 반열에 놓고 호사취미 정도로 바라보지만 그것이야말로 오해다. 캐나다산 적삼나무를 가공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카누는 한 척에 500만원을 호가하지만, 물레길에서 카누를 두 시간 남짓 타는 데 드는 비용은 1만5000원이면 된다. 둘이 3만원만 내면 온전히 두 시간 동안 2인승 카누를 제것 삼아 의암호반에 떠있는 섬으로 내키는 대로 노를 저어갈 수 있는 셈이다. 그 정도를 ‘값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놀이시설이나 관광지 입장료와 비교해 본다면 ‘가보지 않은 길’을 경험하면서 고즈넉하게 자연을 누리는 대가로는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 물레길, 그 길 위에서 몽환의 순간과 마주치다 물레길은 붕어섬길과 두 개의 중도길 등 모두 3개 코스가 있다. 사단법인 물레길 운영사무국이 있는 송암동의 의암호반에서 카누를 타고 붕어섬에 들러 잠깐 휴식을 취하고 되돌아오는 게 붕어섬길 코스이고, 중도길 1코스는 중도 선착장을 지나서 하중도의 작은 섬들을 둘러보는 코스다. 중도길 2코스는 하중도를 지나 의암호 건너편에 내려 애니메이션 박물관을 둘러보고 되돌아온다. 이 세 코스는 어느 것이 더 낫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취가 빼어나다. 이틀에 걸쳐 새벽무렵에 카누를 타고 코스개발 중인 의암호 수로코스와 중도 1, 2코스를 돌아봤다. 첫날 돌아본 의암호 수로코스는 습지의 수몰나무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껴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호수 위로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 사이로 파고드는 황금빛 새벽 햇살은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부드러운 물 위를 미끄러지며 가을색이 짙어가는 수몰나무 사이를 지나자 자맥질을 하던 물새들이 떼를 지어 푸드덕 날아올랐다. 손이 닿지 않았던 호수 속 공간을 이렇게 마음대로 누비는 자유는 일찍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 뱃전의 한쪽에는 호수의 자연풍경을, 다른 쪽은 이제 막 깨어나는 호반의 도시를 끼고 노를 젓는 기분은 황홀했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귀한 선물을 건네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튿날 새벽에는 중도 1, 2코스를 돌아봤다. 밤새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손을 담가본 호수는 맑고 따스했다. 물과 대기의 기온차로 호수는 온통 안개의 세상이었다. 바람이 안개를 밀고 가면 수면에서 다시 몽환적인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붕어섬이며 중도의 아랫도리는 모두 안개에 적셔졌고, 안개에 뿌리를 내린 키큰 나무들만 짙은 먹의 수묵화처럼 번졌다. 자욱한 안개가 한꺼번에 밀려드는 절정의 순간에는, 노를 저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그저 고요히 떠있는 카누에 오래도록 앉아 있을 뿐이었다. # 의암호의 중도에서 마지막 가을을 만나다
흔히 춘천을 ‘호수의 도시’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호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의암호’를 말한다. 의암호는 화천 쪽에서 흘러내리는 모진강(북한강) 물줄기와 인제, 양구 쪽에서 내려온 소양강이 의암댐에 막혀 이뤄진 호수다. 호수 위로는 고슴도치섬(위도)과 중도 그리고 붕어섬이 떠있다. 한때 강변의 정취를 오롯이 간직했던 이 세 곳의 섬은 하나씩 개발의 바람에 훼손됐거나 훼손돼 가고 있다. 고슴도치섬은 고급리조트 개발이 추진 중이어서 섬 전체가 온통 파헤쳐져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붕어섬도 최근 태양광발전소를 들이는 공사가 시작돼 불도저가 섬 전체를 깎아내고 있다. 의암호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섬이 중도다. 중도는 상중도와 하중도로 이뤄져 있는데, 상중도는 주민들의 민가와 농토가 있고 하중도는 캠핑장으로 활용되는 너른 초지와 울창한 숲이 있다. 하중도의 캠핑장은 다른 계절이라면 몰라도 봄과 가을에는 ‘최고의 캠핑장’으로 꼽히는 곳. 호수 가운데 섬 안에 있다는 것도 그렇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는데다 드넓은 초지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른 캠핑장들이 대부분 구획된 사이트에 텐트를 쳐야 하지만, 중도의 캠핑장은 드넓은 초지의 나무그늘 어디든 텐트를 칠 자리가 지천이다. 워낙 부지가 넓으니 하루 제한 숫자인 250여동의 텐트가 들어선다 해도 텐트에 타프까지 넓게 쳐놓고 쾌적하게 캠핑을 즐길 수 있다. 선진국의 빼어난 캠핑장에 비교한다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중도에서는 굳이 캠핑을 즐기지 않아도 좋다. 배를 타고 들어가 자전거를 빌려타고 숲 사이를 달리거나, 초지에서 공놀이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한나절을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 특히 섬 안의 수목들이 가을색으로 물들 무렵이라면, 누구와 동행하더라도 중도에서 보낸 한나절은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기억되리라. 하지만 중도에서 가을풍경을 만나려면 서둘러야 한다. 중도 일원에 테마파크인 ‘레고랜드’가 곧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테마파크가 들어서더라도 캠핑장이 있는 하중도 주변은 그대로 둘 예정이라지만, 그렇게 될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테마파크 입성을 앞두고 상중도의 주민들은 하나둘 이주하고 있다. 떠나지 않은 주민들도 이미 보상은 다 받았고, 몇 가구만 남아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농작물 수확을 위해 섬 안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야 한다. 어쩌면 이번 가을이 중도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보내는 ‘마지막 가을’이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 쇠락한 역과 막다른 골목… 추억의 공간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춘천은 추억으로 기억된다. 그 추억의 중심에 강촌역이 있다. 강촌은 1970∼80년대 젊은이들이 경춘선 열차를 타고 몰려들던 명소 중의 명소였다. 어렵게 건너온 젊은 시절의 추억과 사랑 그리고 좌절과 방황이 거기 있었다. 구불구불한 경춘선의 철로를 곧게 편 신선(新線)의 기찻길이 새로 놓이면서 강촌역 일대의 철로는 폐선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추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강촌역 구내에는 도로포장을 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의암호 상류의 소양댐에서 수문을 열면 인근의 리조트로 이어지는 호안의 도로가 잠기는 탓에 강촌역 철로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비상도로를 만드는 중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로는 소양댐 수문을 열면 비상도로로 사용되고, 평소에는 포장도로 위에 다시 철로를 깔아 레일바이크 시설을 들일 계획이다.
춘천에서는 옛 강촌역 말고도 추억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약사동의 ‘망대골목’이다. 춘천시내 중앙시장 뒤편의 약사동은 지금도 이런 곳이 남아있을까 싶을 정도로 남루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망대란 일제강점기 다닥다닥 붙여 지어진 산동네의 화재감시를 위해 세워놓은 일종의 망루다. 인근 골목 주위의 산동네는 연립주택 단지 등으로 개발됐지만, 망대 주위의 산동네 100여 가구는 오래 전의 산동네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특히 ‘아리랑고개’로 이름붙여진 망대골목은 폭이 두 뼘도 안 될 정도로 좁아 혼자 지나도 양쪽 어깨가 시멘트 담벽과 처마에 아슬아슬 닿을 정도다. 꼭 아리랑고개가 아니더라도 망대골목 일대는 막다른 골목과 담쟁이 넝쿨이 휘감은 대문을 가진 옛 집들이 처마와 처마를 잇대고 수십년 전 중소도시의 골목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해가 질 무렵 이 골목에 들어 기우는 저녁 햇살이 망대를 비출 때쯤 이곳을 걷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년 전쯤으로 되돌아간 것같은 정서를 느낄 수 있다. # 명당 중의 명당에 올라서 호수를 굽어보는 맛 6·25전쟁 당시 격전이 이뤄졌던 탓일까. 춘천에는 역사를 되짚어볼 만한 명소는 드물다. 그러나 서면 방동리의 신숭겸 장군 묘역과 서면 안보리의 청풍부원군의 묘소는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볼만 하다. 신숭겸 장군은 함께 전장터에 나선 고려태조 왕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갑옷을 바꿔입고 자신이 왕건인 양 앞서 싸워 왕건을 구해낸 인물이다. 위기에 처한 자신 대신에 기꺼이 목숨을 던진 신하를 보고 왕건이 어찌 감명받지 않았을까. 왕건은 적장이 베어간 신숭겸의 머리를 순금으로 만들었고 훗날 자신이 묻힐 묘역에다 신숭겸의 묘를 쓰게 했다. 이런 이야기가 없더라도 신숭겸 장군의 묘역은 구불구불 키 큰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짙은 숲과 잘 단장된 묘역의 자연경관만으로도 매력적인 곳이다. 특히 비탈진 묘역의 끝에 오르면 푸른 호수와 함께 그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이 펼쳐진다. 명당으로 치자면 춘천에서 가평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에서 찾아들어가는 청풍부원군 묘소도 못지않다.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현종의 장인이자 명성왕후의 아버지다. 청풍부원군의 묘를 이곳에 쓴 데는 짧은 이야기 한토막이 전해진다. 청풍부원군이 죽자 배에 상여를 싣고 한강의 물길을 거슬러 고향인 실레마을로 향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 높이 꽂아둔 만장이 강기슭의 산중턱으로 날아가더란다. 그러곤 배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족들이 만장이 떨어진 곳을 살펴보니 천하의 명당 중의 명당이라 이를 ‘신의 조화’로 여기고는 만장이 떨어진 곳에 묘를 썼다고 전한다. 묘소로 향하는 숲길 입구의 신도비의 제목은 서포 김만중의 솜씨이고 묘에 세워진 묘비는 숙종의 어필이다. 돌담을 두른 묘소 앞에 서면 문외한의 눈에도 명당임이 느껴져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두 곳과 함께 가을날 춘천에서 찾아가봐야 할 명소로 근래 문을 연 수목원 ‘제이드가든’을 보탠다. 제이드가든은 한화호텔&리조트가 지난 5월 남산면 서천리에 16만3000여㎡ 부지에 개장한 유럽풍의 수목원. 투스카니풍의 건물과 빼어난 조경으로 그윽한 정취를 품고 있는 곳이다. 협곡 사이에 길게 들어서있는 수목원은 가을볕이 환한 날 찾아간다면 낭만가득한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해준다. 흐드러진 꽃밭은 없지만 길섶의 구절초와 벌개미취 그리고 잘 꾸며진 숲과 나무들이 가을볕에 반짝이는 모습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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