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망 물길로 연결된 물의 도시 붉은 등 식탁마다 낭만이 흘러넘치고
이 지방은 하나라 시조인 우왕(禹王)이 자신의 치수사업에 공헌했던 서(胥)라는 대신에게 식읍으로 주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서(姑胥)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러나 ‘胥’는 자주 쓰는 글자가 아니라 발음이 비슷한 ‘蘇’로 바뀌었고, 원대에 ‘郡’을 ‘州’로 바꾸면서 ‘蘇州’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지요. 지명, 국명, 족칭이나 성씨와 같은 어휘에는 쑤저우의 ‘蘇’와 같이 그에 관련된 역사와 문화가 퇴적되어 있습니다. 언어란 인류사의 화석이고, 고유명사는 역사의 DNA가 새겨진 귀중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쑤저우에서는 원림(園林)과 수향고전(水鄕古鎭)을 둘러보면 좋지요. 줘정위안(拙政園)은 중국 4대 원림(園林) 중의 하나로 명나라 때 생겼습니다. 당시 문인 묵객들이 누렸을 호사를 가히 짐작해 볼 만합니다. 누각을 따라 자연 풍광을 즐기다 보면 출출해지지요. 이때 이 지방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식당에서 쑤저우의 대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역사도 오래된 유명한 식당은 쑹허러우(松鶴樓·平江區 太監弄 72號 近玄妙觀, 0512-6770-0688)와 더웨러우(得月樓, 平江區 太監弄 43號, 0512-6523-8940)입니다. 두 식당 모두 쑤저우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관첸제(觀前街) 바로 남쪽의 타이감농(太觀弄)에 있어서 찾기 쉽습니다.
두 곳 모두 쑹수구이위(松鼠桂魚), 칭차오샤런(淸炒蝦仁), 인위춘차이탕(銀魚蒓菜湯)이 대표적 음식이지요. 쑹수구이위는 계어라는 생선을 반으로 갈라 칼집을 내어 튀기면 생선 모양이 다람쥐 모양으로 변하는데, 여기에 달콤새콤한 소스를 얹어 먹는 요리입니다.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남방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맛입니다. 칭차오샤런은 신선한 새우의 껍질을 벗겨 소금간만 살짝 해서 볶아낸 요리입니다. 한입에 쏘옥 들어가는 새우가 탱글탱글하고 맛이 깔끔합니다. 더웨지(得月鷄)도 폭신하게 씹히는 고기 맛이 일품입니다.
물길 따라 과거로의 여행
쑤저우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뭐니뭐니 해도 수향고전입니다. 크고 작은 하천과 소택지가 수없이 많고 그 사이에 인공수로까지 촘촘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물에 기대어 발전해 왔기 때문에 강남수향(江南水鄕)이라고도 합니다. 강남수향은 집 앞으로도, 뒤로도 물길이 이어진 물의 마을입니다. 물길과 뭍길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어디든 작은 배로 닿을 수 있지요. 집들이 밀집되어 있어 도시와 유사하지만 일반적인 도시와는 다르고 물이 풍부해서 농업과 어업이 발달했으나 농어촌과도 또 다른 독특한 취락 형태를 보여줍니다.
수운이 용이해서 상업이 발달했고 교역망을 따라 수공업 역시 많이 발달했으니, 이 강남수향은 중국에서 친수성(親水性)이 가장 입체적으로 발달된 취락 구조입니다. 강남수향의 물길을 따라 걷거나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다 보면, 마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없는 물의 마을에서 잠시 다른 세계로 빨려들어 간 것 같기도 합니다. 밤에 등을 밝혀 수로에 불빛이 반사되고, 물가에 놓은 테이블에서 맥주라도 한잔 하게 되면 여행객의 로망에 흠뻑 젖어들기도 하지요.
강남수향은 저우좡(周庄), 퉁리(同里), 우전(烏鎭) 등을 꼽습니다. 이 가운데 저우좡은 중소도시의 느낌이고, 퉁리는 시골스러운 정취가 그득하고, 우전은 한 마을을 통째로 리조트 단지로 개발한 곳으로 각기 특성이 달라 이들을 차례대로 둘러본다면 아주 멋진 중국 음식 기행이 됩니다.
강남수향에서 식사할 때는, 물이 흐르는 길가에 식탁을 낸 식당들이 꽤 있으니 수향에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해가 지고 집집마다 붉은 등에 불을 밝히면 식탁 주변에 낭만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강남 거부 이름 붙은 족발 요리
저우좡은 상하이 훙차오(虹橋)공항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습니다. 송대부터 문헌상에 등장하는 옛 마을이지요. 원나라 말기에는 강남 최고의 부자였던 심만삼(沈万三)이 살았습니다. 이 강남 거부는 명태조 주원장에게 군자금을 대주었으나 나중에는 주원장의 오해를 받아 윈난으로 유배를 당했던 사람인데, 그가 살았던 집터와 후손들이 살았던 저택인 심청(沈廳)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저우좡의 토속음식으로, 돼지족발로 만든 완싼티(万三蹄)가 상당히 유명합니다. 심만삼의 이름이 붙어있고, 저우좡에서는 설날이나 잔칫상에 꼭 올라야 하는 음식입니다. 한 덩어리에 40~50위안 정도 하니 서넛이 함께 주문한다면 맛볼 만합니다. 육질이 아주 부드럽고 남방 특유의 단맛이 조금 강한 편이지요.
그런데 족발 요리에 강남 거부의 이름이 붙여진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주원장이 집권 초기에 자신에게 군자금을 대주던 심만삼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탐내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때 심만삼 가문의 유명한 요리인 돼지족발 요리가 자연스레 상에 올랐고, 주원장은 심만삼에게 무엇으로 만든 요리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원장의 성인 ‘朱’와 발음이 같지만 욕설로 들릴 수 있는 ‘猪(돼지 저)’란 말을 주원장 앞에서 입 밖에 냈다가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돼지족발 요리를 무엇으로 만들었냐고 물었으니, 너를 죽이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심만삼에게는 목숨이 걸려있는 난감한 질문이었지요.
이때 심만삼은 기지를 발휘해 내 다리(万三的蹄)라고 답을 해서 죽음을 면했고, 그로부터 이 요리는 만삼제, 곧 완싼티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져 왔답니다. 물론 심만삼은 이 순간에는 죽음을 면했지만 결국 다른 일을 핑계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는데, 주원장의 황후가 직접 구명을 호소하여 죽음만은 면한 채 윈난으로 유배를 갔다고 전해집니다. 권력이란 피할 수도 없지만 가까이 할 게 아니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양입니다.
저우좡에서라면, 물가가 아니라 아예 작은 배 위에서 식사를 즐겨볼 만합니다. 저우좡의 난스제(南市街) 끝에 동쪽으로 건너가는 조금 긴 다리가 있습니다. 이 다리 근처에 작은 배를 정박해 두고는 배 위에 식탁 세 개를 차려놓은 식당이 있습니다. 번듯한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뱃머리에 작은 칠판을 세우고 ‘난후위자차이(南湖漁家菜)’라고 써놨으니 이게 식당 이름인 셈입니다. 문의 136-0626-4986.
완싼티를 포함해서 다섯 가지 요리에 58위안을 받는 세트 메뉴도 있고, 주인장이 근처 호수에서 잡은 삼백(三白)도 있고 언제나 반가운 채소 요리도 많습니다. 가격도 비싸지 않으니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객들도 수향다운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는 명소로 칠 만하지요.
타이호 주변의 민물생선 요리
저우좡을 포함한 타이호(太湖) 주변 지역의 식당에서는 타이후싼바이(太湖三白)라는 말이 자주 보입니다. 흰색 세 가지라는 말인데, 민물고기 바이위(白魚)와 민물새우(河蝦), 몸통이 하얀 은어(銀魚)입니다. 이 세 가지를 세트 메뉴로 내는 식당도 많습니다. 바이위는 잔가시가 많은 편이지만 육질이 부드럽고 맛도 담백합니다. 쪄서 발갛게 된 새우요리는 가볍게 맥주에 곁들이면 좋습니다. 은어는 자잘한 크기의 민물고기인데 계란을 넣어 볶기도 하지요.
퉁리(同里)는 저우좡에서 서쪽으로 10여㎞ 거리에 있습니다. 저우좡보다 훨씬 시골스러운 분위기지요. 마을 중심부의, 물이 교차하는 곳에 세워진 작은 세 다리(三橋)가 꽤 유명하고 퇴사원(退思園)과 같은 원림(園林)도 유명합니다. 이 마을에서는 주탄쯔판퉁(酒 子飯桶)이란 작은 식당을 찾아볼 만합니다. 퉁리 마을 입장권을 검표하고 들어서면 바로 다리를 하나 건너게 되는데, 건너자마자 좌회전해서 20여m 거리에 식당이 있습니다. 크지 않은 문 좌우로는 메뉴와 함께 갖가지 사진들을 붙여두고 있습니다.
이 식당의 대표 요리는 토종닭으로 만든 주탄쯔투지(酒 子土鷄)입니다. 식사 시간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기 일쑤여서, 조금 늦게 가면 매절되는 바람에 군침만 흘릴 수도 있으니 조금 이른 시간에 가는 게 낫습니다. 민물조개와 연두부를 뚝배기에 넣고 끓인 방러우더우푸바오(蚌肉豆腐煲)도 고소한 맛이 부드러운 두부와 잘 어울립니다. 연 잎사귀로 싸서 쪄낸 허예자러우(荷葉扎肉)도 일인당 하나씩은 즐겁게 맛볼 수 있지요.
물의 나라에 떠있는 마을, 우전
우전은 동서남북 네 마을인데, 둥자(東柵)·시자(西柵) 두 곳이 강남수향으로 잘 개발되어 있고, 남북 두 마을은 일반 주거지입니다. 저우좡이나 퉁리는 마을 안쪽으로 물이 흘러 지나가는 반면, 우전은 물의 나라에 작은 마을이 둥둥 떠 있는 느낌입니다. 경영 체계는 저우좡이나 퉁리와는 좀 달라 보입니다. 우전은 개발회사가 이 마을 전체를 사들여 체계적이고 통일성 있게 정비한 다음, 다시 원 거주자들에게 민박이나 상점 등을 위탁해서 경영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집의 주인이었고 지금도 그 집에 살지만 이제는 리조트의 직원인 셈이지요.
민박을 정할 때에도 여행객이 직접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찾는 것이 아니라 중앙의 민박 안내센터에서 일괄적으로 접수해서 배정합니다. 민박센터에서는 컴퓨터를 통해 객실 침대에서 안팎의 조망까지 실제 사진으로 미리 확인할 수 있어서 아주 편리합니다. 방값은 200위안에서 500위안 정도로 싸지는 않지만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합니다.
개개의 민박뿐 아니라 골목골목 구석구석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어서, 중국의 전통마을에 일본 사람들이 집단 이주해서 사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지요. 주민들은 위생과 서비스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는지 거북한 호객행위 하나 없이 친절하고 깨끗하며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수준 높은 서비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볼거리 측면에서도 개인 사업자가 단독으로는 할 수 없는 훌륭한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수공업 방식 그대로 누에에서 실을 추출하고, 베틀에 앉은 처자가 직접 직조를 하고, 특히 화려한 수를 놓아가며 황제의 옷을 만드는 것도 한 과정 한 과정 모두 무료로 참관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도구들을 나열해 놓은 전시가 아니고, 옛날 흉내만 내는 시연도 아니고, 실제 고급 기술자들이 직접 생산을 하는 현장을 재현해 놓고, 누구나 부담 없이 무료로 참관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만든 것이지요. 찻잔이나 부채와 같은 작은 기념품 역시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과 잘 어울리는 품질 좋은 상품들만 매대에 올라와 있습니다. 카페나 맥주바 역시 멋진 인테리어에 세련된 서비스가 휼륭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중국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리게 되는 곳이지요. 중국의 전통이 현대적 서비스와 체계적인 시스템과 잘 어우러져 있어서,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나 관광산업 관련 인사들에게 한 번씩은 답사를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
우전은 야경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물의 표면과 집을 짓기 위해 쌓은 낮은 축대와 오래된 기와지붕에 비쳐 있는 조명, 그리고 골목골목 구석구석까지 센스 있고 세련되게 비춰주는 조명은 사람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포근하게 끌어안습니다. 우전에는 몇 개의 전문 식당이 있지만 수향(水鄕)다운 식사는 역시 수십 개에 달하는 민박에서의 식사입니다. 물가에 테이블을 놓고 오붓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음식은 민박의 주인장이 만드는 탓에 민박에 따라 기복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중국 식당의 평균치보다는 좋습니다.
민박센터에서 둘러보면 민박의 음식들을 평가해서 어느 민박의 어떤 음식을 추천한다고 하는 안내자료가 걸려 있기도 합니다. 올 여름에는 민박 9동(棟)의 둬자오위터우(剁椒魚頭)가 최고로 평가받았답니다. 이 지방의 토속음식이 아니라서 약간은 아쉽지만, 매운맛이 일품인 이 후난성 요리에 가벼운 반주를 곁들여서 저녁을 한다면 환상적입니다. 특히 이 찜요리의 남은 육수에 넣어주는 삶은 면(바이멘·白面)이 아주 맛있지요
화려한 장안의 밤 ‘자오쯔’를 맛봐라! 산시성 시안
당 제국의 수도 시절 장안의 인구는 100만명이 넘었습니다. 당시 중동과 유럽 쪽에서 큰 도시를 꼽으면 로마와 바그다드, 이스탄불 정도였으나, 인구나 면적 등에서는 장안과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장안이 인구 100만명 규모의 제국 수도로 꽃을 피우고 있었을 때, 로마는 인구 10만여명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세우지 못한 채 부패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으니까요. 장안은 북방에서 새로운 기운을 몰고 내려온 선비족이 중원의 다수 한족을 융합해 개방적인 국제국가로 번영을 구가한 반면, 로마는 게르만이라는 북방 신진세력과 부딪치자 속절없이 파괴와 퇴행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진한시대 장안의 경우 멀리서 찾아온 외국인들이 일만 마치면 모두 돌아가는 곳이었지만 당시대의 장안은 달랐습니다. 서역이나 북방, 동방에서 수많은 유학생과 장사꾼들이 몰려들었고, 한번 들어오면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살려고 했습니다. 이질적이었던 호(胡)와 한(漢)이 융합하여 세워진 당나라는 누구든지 받아들였고 어떤 종교나 사상이든 관대하게 용인했으며 어떤 물자든 시장에서 교역이 되게 했습니다.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에는 8000여명의 외국 유학생이 있었고, 외국인이 거주하던 집이 장안에 1만여채나 됐다고 합니다.
이때 맛있고 멋있는 것은 주로 서쪽에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서역 고창(高昌)의 포도주가 중원에서 직접 양조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고, 우즈베키스탄에서 들어온 복숭아도, 네팔에서 들어온 시금치와 흰파도 이때부터 널리 재배되었습니다. 서역에서 온 미인들이 있는 주점인 호희주사(胡姬酒肆) 역시 장안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자오쯔(餃子)도 실크로드를 통해 활발하게 이뤄진 동서 교류 품목 중 하나였지요. 자오쯔를 중국 동북지방의 음식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연원으로 따지면 그렇지 않습니다. 1972년에 신장성 투루판(吐魯番)에서 발굴된 아스타냐 고분군 가운데에 포함돼 있던 당시대의 묘에서는 온전한 모양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자오쯔가 발굴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장안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통해 자오쯔를 비롯해 많은 음식문화가 오고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안에서 진시황의 병마용과 실크로드의 흔적들을 보면서 수천 년의 중국 역사를 음미하는 여행길에 ‘장안의 화려한 밤처럼 화려한 자오쯔’를 맛보는 것도 괜찮은 조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오쯔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얇은 만두피에 고기·채소 등으로 만든 소를 넣고 여러 가지 모양을 낸 다음에 쪄낸 음식인데, 시안에는 단순한 자오쯔가 아니라 자오쯔옌(餃子宴)이 꽤 유명합니다. 자오쯔옌은 말 그대로 갖가지 모양과 맛과 향이 총출동하는 자오쯔 잔칫상입니다. 자오쯔가 100가지라면 100가지 모두 모양이 다르고, 소도 전부 다릅니다. 맛도 100가지라 해서 ‘일교일형일태, 백교백함백미(一餃一型一態, 百餃百餡百味)’라고 합니다.
만들어 넣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로 만들고, 낼 수 있는 모든 모양을 다 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에는 일반적인 고기에 채소는 물론이요, 상어지느러미와 전복과 같은 고급 재료까지 있습니다. 익히는 방법도 증기에 찌고(蒸), 끓는 물에 익히고(煮), 지지거나(炸) 굽기도(烤) 합니다. 맛도 짜고(咸) 달고(甛) 얼얼하고(麻) 맵고(辣) 시고(酸), 또는 이상한 맛(怪)도 냅니다. 그렇게 익혀내면 향도 다양합니다. 고기향(肉香), 계란향(卵香), 과일향(果香), 장향(醬香), 또는 해산물향(海鮮香)도 있습니다. 모양도 다양합니다. 꽃이나 새, 물고기, 벌레 모양에서부터 기묘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지경입니다.
산시가무대극원(陜西歌舞大劇院, 주소 碑林區 文藝路 161號, 전화 029-8785-3295)에서 당락무(唐樂舞)를 보면서 자오쯔옌을 경험합니다. 하늘거리는 춤사위가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펼쳐지고 식탁 위에 갖가지 자오쯔가 풍성하게 올라오면 장안의 밤에 호희주사(胡姬酒肆)를 찾은 느낌이 듭니다.
공연관람을 빼고 자오쯔옌에 집중하고 싶다면 시안 중러우(鐘樓) 서북쪽에 접해 있는 ‘더파장 자오쯔관(德髮長餃子館)’을 찾으면 됩니다. 1936년에 개업했으니 66년이나 된 자오쯔옌 전문점입니다. 1층은 패스트푸드 레스토랑과 비슷합니다. 홀의 중앙에 있는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식대를 선불한 뒤 빈 테이블을 골라 앉으면 잠시 후에 자오쯔가 정확하게 자리를 찾아옵니다. 자오쯔 이외의 량차이(凉菜)는 종업원들이 카트에 싣고 다니므로 눈으로 보고 직접 고르면 됩니다.
더파장에서는 주문하기 전에 입구에 있는 모형 자오쯔를 구경하는 것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모두 먹어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자오쯔가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여행객이라면 ‘디카 놀이’를 한참이나 해야 합니다. 동행 인원이 많고 자오쯔옌의 상차림을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2층으로 올라가 방에서 식사를 하면 됩니다. 세트 메뉴를 선택하면 되는데 사람 수로 계산하는 방식입니다.
시안에서 맛볼 만한 또 다른 특색있는 음식은 파오모(泡饃)입니다. 서역을 통해 들어온 밀가루와 북방 초원의 신선한 양고기가 어우러진 독특한 음식입니다.
파오모의 ‘파오(泡)’는 거품이란 뜻 이외에 물에 담근다는 뜻도 있습니다. 모(饃)는 발효되지 않은(부풀지 않은) 반죽으로 만들어 딱딱하게 만든 빵을 말하지요. 파오모는 딱딱한 빵을 새끼손톱 크기로 잘게 뜯어 그릇에 넣은 다음 푹 고아진 양고기 또는 쇠고기 국물을 부어서 먹습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음식입니다.
이 파오모와 관련해서는 송 태조인 조광윤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조광윤이 아직 뜻을 펼치기 전, 빈곤에 시달리며 장안의 거리를 배회할 때 지니고 있는 거라고는 마른 빵 두 덩어리였으나 너무 딱딱해서 도저히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더랍니다. 마침 근처의 양고기 가게에서 양고기를 넣고 삶고 있기에 주인에게 간청해서 국물을 좀 얻어 그것을 찍어 먹었답니다. 조광윤이 측은해 보인 가게 주인이 다시 그릇에 마른 빵을 잘라 넣게 하고는 끓는 양고기 육수를 부어 주었고, 조광윤은 너무나 맛있게 그릇을 비웠답니다. 곤궁한 시절에 생면부지의 고깃간 주인의 호의로 배고픈 한끼를 잘 해결했으니 얼마나 기억에 남았겠습니까.
10년 후 조광윤은 황제가 돼, 장안으로 순행을 갔다가 그 양고기 가게가 생각나더랍니다. 행차를 멈추고 그 가게를 찾아 10년 전에 먹었던 것을 다시 청했답니다. 그러나 이 가게는 고깃간이라 준비된 빵이 없었고, 부인에게 서둘러 빵을 구우라 했으나 발효된 반죽이 없어 딱딱한 빵을 구웠답니다. 고깃간 주인이 생각하니 황제에게 소화도 잘 안 되는 빵을 올릴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빵을 잘게 잘라 그릇에 넣고는 끓는 양고기 육수를 부어 올렸습니다. 황제 조광윤은 파오모 한 그릇을 잘 먹고는 은 100냥을 하사했답니다. 곤궁했던 시절의 호의에 감사를 표시한 것이겠지요. 황제가 돌아간 뒤 장안에는 이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답니다. 그 이후 장안에서는 딱딱한 빵을 잘게 부순 다음 양고기 국물을 부어먹는 파오모가 크게 유행했답니다. 당시의 황제 마케팅은 요즘의 톱스타를 활용한 마케팅보다도 훨씬 파워가 있었겠지요.
시안에서 역사가 있는 파오모 전문 식당을 찾는다면 라오쑨자(老孫家, 주소 雁塔區 雁塔路2號 大雁塔北廣場 美食街 音樂噴泉 西側 燈具城 對面, 전화 029-8553-3855)와 퉁성샹(同盛祥, 주소 碑林區 西大街5號 중러우 근처, 전화 029-8721-8711)을 권할 만합니다. 라오쑨자는 1898년 청나라 광서제 시절에 개업한 식당이니 110년이 넘었고, 퉁성샹 역시 8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중국 정부가 공인하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라오쯔하오(老字號)입니다.
어느 지역이든 여행객에게 가장 흥미로운 곳의 하나는 야시장 먹자골목입니다. 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점인 시안에서라면 이슬람풍의 먹자골목을 찾아보는 게 그 역사적 위상과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더파장에서 식사를 했다면 그 뒤편의 베이위안먼(北院門) 후이팡제(回坊街)를 찾아보면 재미있습니다. 해가 질 때가 되면 노점상들마다 불을 켜고 장사를 시작하는데, 그 북적거리는 거리 자체가 재미있지요. 잡화상도 많지만 가장 많은 것은 역시 먹는 것, 샤오츠(小吃)입니다. 제대로 된 식당도 있지만 길거리 포장마차와 노점상들이 많습니다.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한두 개쯤은 가볍게 맛을 볼 만합니다. 이슬람교도가 하는 곳에서는 술을 팔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두시길.
호쾌한 북방의 기운 느끼며 돼지뼈 조림에 고량주 한잔!
랴오닝성 선양
▲ 돼지뼈를 장에 졸여서 익혀낸 장구터우. |
우리는 혈통으로 한민족이라 하고 국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단면에 역사의 시간 축을 길게 늘리고, ‘한반도와 부속도서’보다 더 넓은 지리적 시각으로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북방, 유목민, 만주, 동아시아 등등의 어휘가 나타나게 됩니다. 제 짧은 소견에, 중국에는 중국사(中國史)가 없습니다. 장성으로 벽을 치고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폄훼하며 안으로만 웅크리던 ‘소중국(小中國)’과, 북방 초원과 삼림에서 발흥해서 대륙을 휘달리며 일찌감치 세계사를 써왔던 ‘동아시아 북방제국’이 교대해온 것이지요.
북방제국의 거대한 흐름을 느끼다
진한(秦漢)과 전면전을 벌였던 유목제국의 선두주자 흉노족, 전면전을 탈피해서 호한(胡漢)을 정치적으로 묶고 혈연과 문화로 융합해서 일궈낸 북위(北魏)와 수당(隋唐)제국의 주인공 선비족, 송나라를 누르면서 최초의 정복왕조로 군림했던 요(遼)나라의 거란족, 세계사에 최초의 세계사를 만들어낸 대몽골제국의 몽골족, 100만의 인구로 1억의 인구와 땅을 지배했던 대청(大淸)제국의 만주족, 이들은 중국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주인공이었고 우리 조상의 사촌쯤이었습니다. 그 반대편에 있었던 중국은 사실상 진한과 남방의 후속왕조들, 그리고 송(宋)과 명(明)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선양에서는 그런 북방제국들의 거대한 흐름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선양의 고궁(故宮)에서 만주족 발흥의 거대한 서사시 대청찬가(大淸讚歌)를 써내려간 기세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선양 북부 외곽으로 가면 천년고성의 유지에 우뚝 남아있는 요빈탑(遼濱塔)을 만날 수 있습니다. 40m가 넘는 탑의 위용에서 거란의 호쾌한 대륙적 기상을 느낄 수 있지요. 어디 오랑캐라는 말을 붙일 여지가 없지요.
농경문화 기질에서 비롯된 것인가, 알게 모르게 우리가 오랑캐라고 폄하하곤 했던 그들이, 북방역사에서 우리가 근접하지도 못했던 거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겸허하게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숨겨있는 역사심리학적인 유목민 기질을 잠시 끄집어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지역의 소수 민족을 보면서도 이런 북방제국의 살아있는 흔적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선양에서 인구가 많은 소수 민족은 만주족, 조선족, 후이(回)족, 시보(錫伯)족, 몽골족 등입니다. 만주족은 여진족이 개칭한 민족으로, 만주는 그들의 언어로 현명하다는 뜻입니다. 몽골족도 많은 편입니다. 만주족이 대륙을 지배할 때 청나라 황후는 대부분 몽골여자였는데, 몽골족이 핵심적인 파트너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지요. 칭기즈칸의 후예가 이 지역에 자연스레 남아 있습니다.
두 명이 배부르게 돼지 뼈 뜯고 6000원
조선족은 바로 우리의 동포들, 주로 식민지 간난고통의 시절에 옮겨간 이민의 후예들입니다. 이미 반세기 가까이 단절되어 살아온 탓에 문화적으로도 다른 요소들이 많아졌고, 국적도 다를 수밖에 없어진, 우리의 귀한 혈족이며 동포들입니다.
시보족(錫伯族)은 우리에게 낯설지요. 이들은 북위와 수당 제국을 건설했던 선비족(鮮卑族) 가운데 북방에 남아 지금까지 그 혈통을 유지하고 있는 선비족의 한 갈래입니다. 시베리아라는 지명은 이 시보란 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울러 거란의 후예인 다워얼족(達斡爾族)도 적은 수이지만 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대청(大淸) 이후 100년이 지났고 새로운 북방제국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북방제국이 그러했듯이 적은 숫자라도 치열한 내부 경쟁을 거쳐 강하게 응집한 다음, 넓은 시야를 갖고 개방적 정신과 호쾌한 기질로 주변의 다양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앞으로 나가면 언젠가 어디선가 위대한 북방제국이 다시 발흥할 것이라는 역사심리학적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과연 한국인들은 21세기 초에 이룬 작은 성공을 발판으로 새로운 북방의 기운을 거대한 바람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겨울이라면 차가운 북풍을 맞으면서 여름에는 대륙의 강렬한 햇살을 비껴가면서, 뜨거운 탕에 독한 고량주를 기울이며 음미해 볼 일입니다.
이렇게 대륙의 심장 소리를 느낄 때에는 독한 고량주가 잘 어울리는 북방의 음식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양에서라면 왕지구터우관(王記骨頭館)을 꼽을 수 있습니다.(주소 鐵西區 滑翔路 36號, 전화 024-2589-6688) 중국의 식당 상호에 기(記)자가 들어있으면 ○○씨라는 말입니다. 이 식당 이름이 왕지(王記)이고, 구터우(骨頭)는 뼈라는 뜻입니다. 이 식당의 대표적 음식은 장구터우(醬骨頭)입니다. 살을 발라내고 남은 돼지뼈를 장에 졸이면서 익혀낸 것입니다. 커다란 그릇에 수북하게 담겨 나오는데, 둘이 넉넉하게 먹을 양으로 32위안(약 6000원)입니다. 뼈 한 접시 가격으로 이 정도면 적당한 것 같습니다. 뼈에 붙어있는 부드러운 살점을 발라가면서 독한 고량주를 한잔 곁들이면 그 호쾌한 기분이 북방의 기운을 되살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아기자기하게 먹는 그런 음식은 아니지요.
이 음식은 유래가 있습니다. 청나라 인종(재위 1796~1820) 시절에 산둥성 원덩(文登)이란 곳에 왕지(王記)라는 꽤 유명한 한의사(郞中)가 있었습니다. 이 왕지가 산속에 들어가 약초를 캐다가 그만 멧돼지에게 공격을 당했지요. 다행히도 한 사냥꾼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면했고, 이 사냥꾼이 왕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줬습니다. 이 사냥꾼의 어머니는 왕지를 위해 멧돼지 뼈를 삶아낸 탕을 매일 먹여 몸보신을 시켰고 며칠이 지나자 왕지는 회복이 됐습니다.
왕지가 이 노인에게 어떤 신묘한 처방을 했는지 물으니 이 노인은 웃으면서 사냥꾼들이 멧돼지 뼈에 몇 가지 한약재를 넣고 끓여낸 것이라 하더랍니다. 왕지는 오랜 의술 경험으로 볼 때 이게 곧 훌륭한 음식 처방이란 걸 알아차렸지요. 왕지는 집으로 돌아와 그 노인이 언급한 약재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해서 자신만의 장구터우 조리법을 만들어냈답니다. 이후 왕지는 이것을 병자들에게 먹게 했고 많은 효험을 보았답니다.
선양에도 ‘장구터우관’ 분점
이 보양식이 점점 더 유명해지게 되고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아예 이 장구터우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 구터우관(骨頭館)을 열게 됐고 식당 이름에 왕지(王記)라는 자신의 이름을 넣었답니다.
20세기 초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큰 전란이 닥치자 왕지의 후손인 왕경래(王景來)란 사람이 그 비법을 간직한 채 피란을 갔고 결국 1935년 지린성 창춘(長春)에서 다시 왕지구터우관을 열었습니다. 물론 이 왕지구터우관은 그 맛과 보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당시 만주국의 황제였던 부의(溥儀) 역시 이를 좋아해서 만주국 황실의 요리로도 유명해졌답니다.
창춘에서 계속 영업을 해오던 이 식당은 1999년 선양에 분점을 열었고 현재 선양에서는 화샹(滑翔)과 다둥(大東) 두 곳의 분점만 운영하고 있더군요. 가경 연간에 창업했다고 하니 2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음식이고, 창춘에서 개업한 것으로 보아도 75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선양에서 택시를 타고 이 식당 이름을 말하니 바로 알아듣더군요.
메뉴상에는 몇 가지 종류로 나뉘어 있습니다만, 크게 봐서 방구(棒骨), 지구(脊骨) 등 뼈의 종류에 따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음식의 종류로 보면 장구터우로 포괄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맛은? 돼지뼈를 장에 넉넉하게 담아 졸인 것 그대로입니다. 돼지고기 고유의 맛에 장의 향기가 잘 어우러집니다. 뼈에 붙은 살이 부드럽게 뜯기는 느낌도 좋지요.
정러우피(蒸肉皮)라고 하는 돼지껍데기 요리도 맛볼 만합니다. 서울에서 먹던 껍데기 구이와는 다르지만 그 부드러운 맛이 훌륭합니다. 감자를 으깬 것으로 만든 투더우니(土豆泥)도 이 식당의 대표적인 음식의 하나로 꼽을 만하고 무의 껍질을 대패질하듯 얇고 길게 벗겨 간장과 식초에 절인 장뤄보어(醬蘿卜)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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