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구운몽에 나타난 환생과 思念實現의 의미

醉月 2011. 12. 5. 14:53

이 강 옥
(영남대학교 교수)

Lee, Kang-Ok, 2003. A Study on the Meaning of 'Metemp sychosis' and 'Realization of Yearning' in {Kuwunmong (九雲夢)}. URIMALGEUL: The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27, 99∼132. {Kuwunmong} uses two distinctive narrative methods which can be called 'realization of yearning' and 'reincarnating'. It appears that in the process of becoming Yangsoyu from Seongjin, 'realization of yearning' triggers 'reincarnating'. In the reverse process of becoming Seongjin from Yangsoyu, only the 'realization of yearning' appears.
When Seongjin awaked, he claimed that Yangsoyu's life was only a daydream. But then Seongjin was not sure whether his life as Seongjin was a daydream. So Yukkwandaesa scolded Seongjin to wake up, for he believed that Seongjin was still dreaming. Yukkwandaesa taught that we should remove all sort of Sanna and offer charities to anything and anybody. He also thaught that we should not be obsessed with any kind of objects. Yukkwandaesa's such teachings seem very close to the teachings of {Kumgangkeong}
Seongjin before Yangsoyu and Seongjin after Yangsoyu existed almost at the same time. Yansoyu existed only in the act of Seongjin's yearnful thinking, which took only a moment. But the narrating of Yangsoyu's life took very long and his fantastic and diverse life was described in detail. Such phemomenon seems to testify a well known buddhist teaching that wealth and fame is ephemeral and dreamlike.
Painful recurrence of the metempsychosis happens throughout one lifetime of a person or sometimes throughout several lifetimes of the person. In {Kuwunmong} it took only a moment by using the narrative method of 'realization of yearning'. This narrative phemomenon enabled Seonggin to perceive the truth.
It can be concluded that {Kuwunmong} materialized the teachings of {Kumgangkeong} into reality through its distinctive narrative methods.(Yeungnam University)
▣ key words : Kuwunmong(구운몽)·realization of yearning(사념실현)·reincarnating(환생)·Yangsoyu(양소유)·Seongjin(성진)·daydream(꿈)·Yukkwandaesa(육관대사)·Kumgangkeong(금강경)·metempsychosis(윤회)·Sanna(산냐, 상)

1. 문제의 제기
환몽소설이나 몽유록이라 지칭되는 작품들은 '현실-꿈-현실'이라는 액자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액자구조는 동아시아 서사문학에서 아주 두드러진 서사방식 중의 하나이면서 우리나라 서사문학사에서도 그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어왔다. {구운몽}도 그 서사전통에서 가능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구운몽}의 핵심 구성 항목이라 할 '성진→양소유', '양소유→성진'의 단계는 단지 '입몽'과 '각몽'으로 단순하게 파악되어서는 안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구운몽}의 소설적 가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런 점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구운몽}에서는 입몽과 각몽보다는 사념(思念)의 실현이라는 맥과 환생(幻生)이라는 또 다른 맥이 공존하고 있다. 즉, 마음 속 사념의 힘은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이기에 결국 그대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사람이 환생하는 양상도 보여준다.
본고는 이 두 맥이 전개되는 양상을 근간으로 하여 {구운몽}이 활용하는 다양한 서사적 장치들의 특징을 밝히고 그것의 불교적 의미를 해명하고자 한다.

 

선행연구에서 {구운몽}을 불교와 관련시키는 데에는 양 극단이 존재한다. {구운몽}이 불교적 성향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양소유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일생을 사대부의 그것으로만 이해하려는 한 극단이 있는가 하면 {구운몽}의 모든 국면들이 불교사상의 정교한 실현이라고 보는 또 다른 극단이 있다. 전자는 불교사상을 '공' 사상 혹은 금강경 사상에 국한한 뒤 {구운몽}이 이론화되고 체계화된 그런 사상을 충분하게 담지 못하고 단지 작품 말미의 몇마디 말로써 가시화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구운몽}이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고 이해한다. 후자는 지나치게 세세한 불교지식을 {구운몽}이란 소설의 각 부분과 관련시키려 한다. 그런데 소설과 불교가 이렇게 정교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신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부처의 가르침이 인간세계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한다며 불교적 세계관을 인정하는 입장에 선다면 인간의 삶에 대한 그 어떤 언술에서도 '불교사상'을 분석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운몽}을 불교적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기 위해서는 {구운몽}의 줄거리나 서사적 장치, 그리고 주요인물의 인생역정이, 작자가 내면화했던 불교적 요소와 널리 그리고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정도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김만중은 복잡한 불교지식을 재구성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김만중이 가졌던 불교에 대한 상식이 {구운몽} 창작과정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담겨졌는가를 살피는 유연함이다. 불교사상과 작품 실상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본고는 {아함경}, {상응부}, {금강경} 등 사변화되기 이전 근본불교 경전에서 두루 확인할 수 있는 불교적 가르침과 {구운몽}에 거듭 나타나는 서사적 장치를 관련시켜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진의 깨달음 및 보살도 성취와는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선행연구들이 {구운몽}과 {금강경}의 관계를 살필 때, 주로 활용한 {금강경}은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본이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 '상(相)'은 가장 중요한 개념인데, 구마라집은 상(相)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가령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如理實見分 第五>)의 '상(相)'과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大乘正宗分 第三>)의 '상(相)'은 다른 개념인데도 '상'으로만 번역되었다. 구마라집 번역본에 근거한 선행연구는 상(相)에 대한 이해에서 혼동이 있으므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는 산스끄리뜨 원전으로부터 더 정확하게 번역한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를 근거로 하여 논의를 전개하겠다. 그리고 {금강경}은 '공(空)'을 설한 게 아니라 '산냐를 극복하라'는 부처의 말씀을 따르는 경전이라는 해석을 받아들인다.
{구운몽} 텍스트는 한문본으로서 정규복 교수가 재구한 노존본(老尊本)이다. 후대에 통속적으로 개변된 이본과 비교할 때 작자의 원본에 가장 가깝다는 판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2. {구운몽}에 대한 불교적 이해의 정당성
{구운몽}은 '수행승 성진'에게서 출발하여 '돌아온 성진'으로, 마침내 육관대사와 '깨달은 성진'으로 귀결된다. 주제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진의 처지와 의식의 변화일 것이다. 양소유의 세계를 바라보는 앞뒤 액자의 시선이 무척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양소유와 8여인의 삶은 시종 성진에 의해, 그리고 육관대사에 의해 주시되고 있다. 사대부인 양소유의 삶을 다룬 중간에 비해 성진의 삶을 다룬 부분의 분량이 짧다 하더라도 성진의 처지와 의식의 변화가 기본 골격을 이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또 양소유의 삶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성진이나 8선녀의 흔적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다음으로 결말 부분에 나오는 설법의 내용이다. 거기에는 분명 {금강경}이란 불교경전이 언급되고 {금강경}의 핵심 게송이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전도를 위하여 멀리 중국으로 왔는데 이제 법을 전할 사람을 얻었으니 떠난다.'는 육관대사의 마지막 말, 그리고 완전하게 깨달은 성진이 연화도량를 주재하며 보살대도를 얻었다는 진술을 중시해야 하겠다.
이와 같은 작품 내적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한 {구운몽}을 불교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중요한 접근법이라 본다.
다음으로 작자 차원에서 그러하다. 김만중은 불교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불교사상에 대한 학식이 깊었다. 김만중은 {서포만필}, {서포집} 등에서 {능엄경}, {전등록} 등을 언급했고 또 직접 읽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불교의 핵심 개념인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등에 대한 생각을 개진하기도 했다. '불서가 비록 번다하지만 그 요지는 진공묘유(眞空妙有) 네 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 하여 불교사상을 꿰뚫어 보았다. 특히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 육근(六根) 중 남녀정욕이 안근(眼根)에 속하는가 신근(身根)에 속하는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전개하였고 한시를 통해 윤회, 인연, 연기설, 공(空) 등을 암시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구운몽}의 사건전개와 직접 관련되는 불교사상의 핵심이다.

 

특히 불교적 윤회에 대해서 김만중은 적극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스님 따라 인연을 말하고 있네(猶從釋子話因緣) 다생의 이 삶은 불가의 업(業) 다 갚지 못하고(多生未了空門債)'라 하여 윤회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윤회의 문제에 대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만중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으며 형 김만기의 스승이기도 했던 송시열도 윤회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다. 즉 송시열은 제자 최신(崔愼)이 윤회에 대해 묻자, 모든 사물이 다 윤회한다는 불교적 윤회관은 허망하다고 부정했지만 살갗에 돼지 털이 많이 나있던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 윤회가 특별한 경우의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는 희한한 일이라 인정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안석경이 편찬한 {삽교만록}에는 안석경이 찬연(璨淵)이란 스님과 윤회에 대해 주고받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안석경이 찬연에게 윤회하여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가 하고 묻자 찬연은 "윤회가 없다면 천하에 중되려고 하는 사람이 없겠지요" 하며 수천년 전에 입적한 부처가 제왕도 되고 장상도 되어 중생을 제도해 왔다고 하였다. 그에 대해 안석경도 환생하여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이야기가 책에 실려 있다고 대꾸하고 주자(朱子)도 떠도는 혼[遊魂]이 모여 기(氣)가 일어나게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안석경은 탁생(托生)하는 것이 태(胎)가 만들어질 때인지 아니면 육신이 생겨날 때인지 묻는데 그에 대해 찬연은 태가 만들어질 때라고 대답해준다. 안석경과 찬연이 주고받은 말의 이런 내용은 김만중이 평소 승가사나 중흥사를 방문하면서 그리고 선천 귀양시에 보광사(普光寺) 스님인 설동(雪洞)과 교유하면서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과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환생이나 윤회에 대한 관심은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 일반적인 것이었고, {구운몽}은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듯하다.
또 김만중은 스스로 참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그 점이 {구운몽}에서 양소유가 말년에 한 말을 연상시킨다. 즉, 양소유는 8여인들에게 출가할 뜻을 전할 때 '밤마다 잠이 들면 꿈 속에서 내가 부들 방석에 앉아 참선을 하는데 그게 불가와 인연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불승과 교유하고 불경을 읽은 결과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고려할 때, {구운몽}의 창작은 불교사상이나 참선에 대한 김만중의 관심과 조예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구운몽}에 대한 불교적 이해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3. 사념 실현으로서의 환생-성진에서 양소유로
용왕으로부터 거푸 3잔의 술을 받아 마신 성진은 그대로 돌아갔다가는 육관대사로부터 꾸중을 들을 것 같아 연화봉 아래에 이르러 윗옷을 벗어놓고 세수를 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8선녀를 만나 수작한 뒤 연화도량으로 돌아오기까지 성진이 경험하는 감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수를 하며 그 물에서 이향(異香)을 맡는다. 향기는 8선녀란 욕망의 대상을 환기시키는 가장 앞선 감각이다. 그래서 강렬하게 이끌린다. 석교 위에 있는 8선녀를 목격한다. 눈에 포착된 모습으로서의 색(色)이다. 희롱의 말을 나눈다. 귀에 포착된 소리(聲)이다.
그외도 번다하게 열거할 수 있겠지만, 일단 이것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색 성 향 미 촉 법이란 육촉입(六觸入)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8선녀가 떠나자 성진은 우두커니 서서 목을 빼고 그 아득한 곳을 바라본다. 성진이 이 순간 육촉입에 얼마나 강렬하게 빠져들었는가를 강조한 모습인 것이다. 선방으로 돌아와서도 목소리가 귀에 은은하고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삼삼하다. 잊으려 해도 잊기 어렵고 생각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난다. 정신이 황홀하여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생각은 점점 더 나아간다.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어려서 공맹의 책을 읽고 어른이 되어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나 나아가서 삼군의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뭇 신하의 우두머리가 되어 몸에는 비단도포를 입고 허리에는 자주 인끈을 차서 임금께 읍양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며 눈으로 어여쁜 여색을 보고 귀로는 오묘한 음악을 들어 빛나는 영광이 당대에 으뜸이요 공명이 후세에 이어지니, 이것이 진정 대장부의 일이다.
성진은 자기 사념(思念) 속에서 서서히 새로운 사나이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어여쁜 여색을 보고'가 놓여있다. 그 말은 8선녀에 대한 애착이 확장되어 위와 같은 유가 사대부의 일생이 구성되었다는 뜻이 되겠다.

 

그들은 모두 여섯가지 촉입(六觸入)에 의해서 닿고 닿아서 경험한다. 이것들의 느낌[受]에 연(緣)하여 갈애[愛]가, 갈애에 연하여 취착[取]이, 취착에 연하여 [존재의] 되어감[有]이, 태어남[生]에 연하여 노사우비(老死憂悲) 고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육촉입들의 생겨남, 사라짐, 맛, 재난, 출구를 있는 그대로 여실히 안다[如實知見]. 이것이 이들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꿰뚫어 아는 것이다.
이것은 12연기법을 압축한 5지설(五支說)에 가까운 것인데, 여기서 부처의 근본 가르침을 정리할 수 있다. 부처는 과거와 미래로 우리의 마음을 가져갈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감각접촉-느낌-갈애-존재-생-노사비우 고뇌의 연속에서 이들의 생겨남과 사라짐 등을 여실지견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성진이 8선녀를 만나 갖게 된 감각접촉과 느낌은 곧 갈애를 만들었고 마침내 취착이 생겼고 이어 존재로 되어갔고 태어남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성진은 자신이 이러한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관(觀)하기는 하였다. 사심(邪心)이 생겨났다는 걸 살피고는 향을 피우고 가부좌를 틀어 정신을 수습하고 천불(千佛)을 염송하며 스스로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 여색과 부귀에 대한 성진의 집착은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갔고 성진 스스로가 자기 사심을 살핀다는 것이 그런 사념의 실현 과정에 제동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바로 이때 육관대사가 성진을 소환한다. 성진의 마음과 사념의 방향을 꿰뚫어 보았던 육관대사는 세속적 욕망에 대한 성진의 마음가짐을 꾸중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반성의 철저하지 못함을 질책한 셈이다.

 

그 질책은 점진적이다. 즉 성진은 갑자기 양소유로 환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진이 꿈을 꾸는 것도 아니다. 만일 성진이 꿈을 꾸게 되고 그 꿈 속에서 양소유라는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그 꿈에서 깨어나면서 성진으로 다시 돌아오는 투로 설정되었다면, {구운몽}은 '현실에서의 인간의 일생은 꿈처럼 허망한 것이다'라는 삶에 대한 통속적 허무감을 암시적으로 기술한 작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게 사실이라면 {구운몽}을 결코 불교적 가르침을 실천한 작품이 될 수 없고 또 명작이라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구운몽}은 그런 통속적 서사와는 분명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환생의 과정이 리얼하게 제시된다는 점에서 먼저 그러하다.
네가 용궁으로 갔다가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석교에 이르러 여자를 만나 언어수작을 하고 꽃가지 꺾어 주며 서로 희롱하였고 돌아와서도 여전히 그에 연연하고 있다. 처음 미색에 마음이 어지럽혀지고 나아가 부귀에 뜻을 두고 세속 번화를 흠모하여 불가의 적멸을 혐오하게 되었으니 이는 삼행(三行) 공부가 일시에 궤멸된 것이로다.

 

육관대사는 성진의 마음 변화를 정확하게 읽고 그 마음의 지향이 쉽게 그치지 않을 것을 먼저 지적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음을 천명했다. 수행 공간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것은 수행자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에 성진은 읍소하며 자신을 변명하고 연화도량에 계속 머물 수 있게 해달라 호소한다. 악념(惡念)이 한 찰나(刹那)간에 일어난 것이며 바로 돌이켰다고 해명한다. 그리고 12세에 부모 여의고 출가하여 육관대사에게 의탁했으니 육관대사와 자기는 아버지와 아들과 다름없다고 강조한다.
연화도량은 성진의 수행처이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라는 말은 수행자로 하여금 죽어라는 말과 다름없다. 성진이 거기서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 간절히 호소하는 것은 사람이 죽기 직전 마지막 생명에 집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더욱이 성진은 선가의 통념상 사람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을 하고 있는 수행승이지 않은가. 성진이 연화도량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성진에게는 모순적인 두 지향이 공존해 있다. 연화도량에서 계속 남아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고자 하는 지향과 죽어서 사대부로 다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지향이다. 두 지향은 성진의 사념 속에서 꿈틀거리며 뒤섞이고 있다.
대사가 성진을 연화도량으로부터 축출하려 하자 성진은 "이곳을 두고 어디로 간다 말입니까"라 물었다. 이에 육관대사는 "네가 스스로 가고자 해서 내가 가라 명했으니 네가 머물고자 했다면 누가 너를 가게 하겠는가. 또 네 스스로 '제가 어디로 갑니까' 했는데, 네가 머물고자 하는 곳이 바로 네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니라"라 답한다. 즉 성진은 자신이 가고 싶다고 생각한 곳으로 가게 되니 모든 변화나 윤회의 출발이 성진의 사념과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육관대사는 그러한 변화를 '윤회의 고통'이라 규정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성진→양소유의 서사 진행과정에는 사념의 실현과 환생의 성립이라는 두가지 원동력이 개입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한 심찰나(心刹那) 동안 온갖 사념을 다 하게 되는데, 그 사념이 그대로 실현된다. 그리고 윤회의 경우, 죽는 순간 사람이 갖게 되는 갈애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된다. 성진은 연화도량으로부터 축출된다는 통보를 받자 마지막 간절한 호소를 육관대사에게 하는데 여기서 두 모순적 방향으로의 갈애와 취착이 나타나는 것이다.

 

<노존사남악강묘법(老尊師南嶽講妙法) 소사미석교봉선녀(小沙彌石橋逢仙女)>의 후반부는 성진의 죽음과 환생을 보여주거나 암시하는 장면이 거듭 나타난다. 먼저 성진이 염왕에게 잡혀간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 다음 장면은 탄생의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즉 성진은 사자를 따라서 어느 인가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여인들의 말을 엿듣는다. 양처사 부인이 50이후에 아이를 낳았는데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신이 탄생하였는데 아직 혼은 붙지 않은 단계이다. 그 말을 듣고 성진은 다음과 같이 묵상(默想)한다.
지금 내가 윤회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고 있는데 이 형신(形身)을 살펴보니 다만 정신 뿐이구나. 그렇다면 골육(骨肉)은 연화봉에 있다가 이미 화장되었을 게지. 나는 연소한 고로 제자도 못 길렀으니 그 누가 나의 사리를 수습해줄거나
성진의 혼은 연화도랑의 자기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다음 생의 육신에 깃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 단계에서도 사념은 계속된다. 그러나 사념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 연화도량의 육신은 화장되어 재가 되었지만 이 세상의 새 육신은 이제 막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죽는 과정에 대한 불가의 설명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사자는 성진에게 전생의 인연으로 이 집안에 태어났음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성진은 아기의 몸으로 태어난 뒤에도 여전히 연화도량의 일을 기억하지만 점점 자라매 전생의 일은 잊어버리게 된다. 이 말은 성진의 전생이 양소유의 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그 뒤로도 작자는 양소유로의 환생이 성진의 사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따금 지적한다. 그래서 양소유는 성진으로부터 완전하게 단절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도 양소유의 인생역정을 따라가면서 거듭 성진을 환기하게 된다.
요컨대 성진→양소유의 과정에는 성진의 사념 실현이란 맥과 성진의 환생이란 맥이 공존하고 있다. 그중 성진의 사념 실현이란 면이 더 포괄적이어서 환생을 포함하고 있는 형국이다. 성진은 한 심찰나의 자기 사념 속에서 스스로 양소유로 환생하였다고 하겠다. 이것은 이 세상을 이끄는 것은 마음이라는 {상응부}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설정이다.

4. 환생 극복으로서의 사념 실현-양소유에서 성진으로
양소유는 궁벽한 시골의 서생(書生)으로 자라났다가 입공하여 승상이 되고 천자의 사위가 된다. 양소유의 부귀공명은 이미 예정되어 있어서 양소유 자신도 거부할 수 없다. 승상과 부마라는 두 직위는 그가 신분상승과 애욕충족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양소유의 삶에 대한 서술의 거의 대부분은 양소유가 8여인과 만나 육처입에 몰입하여 애욕을 성취가는 과정에 할애되었다. 그것은 양소유의 삶이 8선녀를 흠모한 성진의 사념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양소유로의 일생은 성진의 사념대로 실현된 것이다. 양소유도 그런 성진을 대신하여 태어난 존재이기에 자기 마음대로 욕망을 이룰 수 있다.

 

<부마벌음김치주 성주은차취미궁(駙馬罰飮金 酒 聖主恩借翠微宮)>에서 작자는 벌주 마시기로 가정의 화락한 분위기를 장황하고도 다채롭게 연출한 뒤 그렇게 일가(一家)가 조화롭게 살게 된 것은 '당초 9인이 남악에 있을 때 그 발원이 이와 같았던 까닭이다'라며 비로소 사념 혹은 발원이 양소유와 2처6첩의 삶을 초래했음을 확인하였다. 작자 자신도 양소유의 삶을 서술하면서 시종 성진의 사념과 발원을 의식했다는 증거이다.

 

애욕의 성취는 양소유에 국한되지 않고 8명의 상대여성들에게 그대로 나타나고 심지어 양소유를 낙유원(樂遊原) 잔치에 초대하는 월왕(越王)에게서도 과장적으로 나타난다. 월왕의 초대장을 읽어본 난양공주는 월왕이 유한공자(遊閑公子)로서 좋아하는 것은 오직 미색(美色)과 풍악(風樂) 뿐이라고 소개해준다. 그러니 낙유원 잔치는 색(色) 성(聲) 미(味) 등 육처입을 통한 욕망 추구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계이며 성진의 사념에서 시작된 8선녀와의 인연이 세속적으로 실현된 모습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성진이 간절히 꿈꾸던 욕망을 다 충족한 양소유는 이제 반대로 성진이 대변하는 승가의 삶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미 양소유는 꿈 속에서나마 용궁과 남악형산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특히 남악형산은 성진이 살던 곳이다. 천암만학이 어우러져 있는 남악형산을 바라보며 양소유는 '전쟁 통에 고통이 쌓여 정이 피폐해지고 정신도 피곤해졌도다. 이몸이 티끌 세상과 맺은 인연은 이리도 무거운고. 어찌하면 공을 이루고 물러나 초연히 물외의 사람이 될 수 있을고.'라 한탄한다. 양소유의 사념 속에서 서서히 세속을 벗어나서 남악형산의 연화도량으로 돌아가려는 지향성이 생겨난 것이다. 양소유는 그때 육관대사를 만나게 되는데, 육관대사는 '오늘은 원수께서 영원히 돌아올 날이 아니지요.'하며 돌려보낸다. 성진 세계에 대한 양소유의 사념 정도가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같이 양소유는 조금씩 성진의 세계를 사념하는데, 그 말년에 가까이 갈수록 더 자주 삶을 반성하고 세속 초월 의지를 드러낸다. 먼저 걸퇴소(乞退疏)를 올렸다. 그러나 천자는 양소유의 풍채가 더 새로워지고 정력도 여전히 왕성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서술자는 양소유가 그렇게 보이는 까닭 중의 하나로 '승상이 전세의 불문 제자였'기에 수련법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 뒤 양소유는 천자의 배려로 옛날 현종(玄宗)의 피서지인 취미궁(翠微宮)으로 옮겨간다. 거기서 만년의 청한지복(淸閑之福)을 누린다. 어느 중추 보름날 밤에 여러 자녀들이 잔치를 열어 헌수했는데, 그들이 다 돌아간 뒤 양소유는 옥소를 구슬프게 분다. 여인들이, '옥인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역시 인생의 즐거운 일 텐데 퉁소소리가 심히 애닯'은 이유를 묻자 양소유는 그간 살아온 날들을 회고한다. 그것은 완전한 자기진술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철저히 되돌아본 양소유는 유독 여러 여인들과 만나 깊은 정을 나누었으며 늙어갈수록 그 정이 더 돈독해지는 것을 전생 인연의 힘으로 보았다. 이는 양소유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자신이 성진과 8선녀와의 전생 일을 기억하기 시작한 데서 온 진지한 표현일 것이다.
양소유는 지나온 삶에 대한 완전한 자기진술을 근거로 하여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인 성찰에 들어간다. 양소유는 유가의 '명윤기(明倫紀)'를 최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양소유는 세상을 이념과 윤리의 척도로 재단하고 거기에 맞게 개조하려는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뒤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러 유가적 삶을 넘어서려 한다. 양소유는 그곳 취미원으로 온 뒤부터 밤마다 잠이 들면 꿈 속에서 자기가 부들 방석에 앉아 참선을 하는데 그게 불가와 인연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고백했다.그것은 양소유로 환생하기 직전의 성진이 망상을 극복하기 위해 향을 사르고 부들방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부처를 염하던 장면에 대한 환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소유의 자세는 '빛나는 영광이 당대 으뜸이요 공명이 후대에 이어진다' 하는 대장부의 삶을 간절히 연모했던 성진의 생각과는 정반대가 된다. 마침내 양소유는 불가적 삶을 선택한다.

 

양소유가 이런 생각을 굳히고 2처 6첩의 동의를 얻는 순간 육관대사가 나타난다. 세속세계의 인물인 양소유와 초세속세계의 인물인 육관대사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양소유의 사념이 세속과 초세속의 경계를 허물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양소유는 처음 육관대사를 못 알아보고 "사부께서는 어디서 오셨오"라 묻는다. 그러자 육관대사가 "승상께서는 평생 고인을 못 알아보시오? 귀인은 무얼 잘 잊어버린다더니 과연 그렇군요"라며 주의를 환기한다. 양소유가 그를 자세히 본다. 그제서야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분명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토번 정벌에 나섰을 때 꿈 속에서 용궁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노승을 만났는데 육관대사가 바로 그 노승이라는 사실만을 깨닫는다. 양소유가 여전히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기에 그 노승이 성진 자신을 꾸중하던 육관대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에 육관대사는 "옳지 옳지. 그러나 다만 꿈 속에서 단 한번 본 것은 기억하고 (생시에) 10년 동안 함께 산 것은 기억 못하구나."하고 대꾸한다. 이 충격적인 말에 대해서도 양소유는 여전히 자기 일생만 되돌아볼 뿐이다. 환생하기 전 성진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양소유를 향해 육관대사는 "승상은 아직 혼몽에서 깨어나지 못했군"라는 말을 던진다. 그리고 지팡이로 난간을 두드려 흰구름을 일으켜 암흑의 세계를 만든다. 여전히 양소유는 '취몽(醉夢)' 중에 있는 듯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사부께서는 정도로 저를 가르치시지 않고 어찌 환술로써 희롱하십니까!"라 소리친다.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소유'라 지칭한다.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주위 사람들이 사라지는데 그제서야 놀라고 당황한 양소유는 자신이 연화도량에 있는 성진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성진은 양소유의 세계를 '회념(回念)'한다. 이는 환생 전 성진이 양소유의 세계를 '사념(思念)'한 것과 반대 방향이다.
회념의 결과 성진은, 육관대사에게 불려갔다 풍도로 끌려가고 인간세상에 '환생(幻生)'하여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가 되어 삼군의 장수가 되고 뭇 신하들을 거느리다 걸퇴소를 올리고 두 공주 여섯 낭자들과 나눈 신혼행락(晨昏行樂)이 모두 '일장춘몽(一場春夢) 중의 일'이었다 판단한다.
요컨대 양소유→성진의 과정에는 양소유의 사념의 실현이란 성격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진의 사념 속에 존재하던 양소유의 사념이 실현된 것이다. 반면 환생의 성격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성진→양소유 단계에서 성진은 아주 젊은 청년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성진에게서는 생을 이끌어가는 자신감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런 성진을 죽게 만든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양소유→성진 단계에서 양소유는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늙은이다. 이때의 양소유에게서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쓸쓸함과 허무감이 베여난다. 그러나 이 단계는 환생보다 사념 실현의 분위기를 더 강하게 풍긴다. 그래서 양소유는 죽지 않는다. 젊은 성진은 죽지만 늙은 양소유는 죽지 않고 젊은이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는 통념과 반대되는 상황이다. 사념의 실현과 환생이라는 두 서술의 맥이 만들어낸 이런 상황은 작자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선입견이나 통념적 기대와는 반대로 꾸려지는 이야기는 그만큼 독자들에게 큰 자극을 주어 통념과 선입견을 깨뜨리고 한 차원 더 높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 이 부분은 현실 인물로 설정된 성진을 초월적 인물로 느껴지게 만들고 비현실 인물로 설정된 양소유를 현실적 인물로 느껴지게 만든 작자의 기법과 이어지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술한다.

5. 깨달음을 위한 서사적 장치
돌아온 성진과 육관대사의 대화는 {구운몽}의 사념 실현과 환생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돌아온 성진은 자기가 꿈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윤회를 겪었다 하기도 한다. 성진 스스로에게도 양자는 혼동되고 있는 것이다. 성진은 먼저 육관대사가 자신으로 하여금 하룻밤의 꿈을 꾸게 하였다가 깨어나게 해주어 자신을 깨닫게 해주었다며 육관대사에게 감사한다. 이에 대해 육관대사의 설법이 시작된다.
대사 가로되, 네 흥에 따라 갔다가 흥이 다하자 왔으니 내가 무슨 간섭을 했겠는가.
이 대목은 양소유로의 환생이 성진의 사념이 실현된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한 부분이다.
네가 또한 '제자 윤회의 일을 꿈꾸었습니다' 했는데, 이로 보면 너는 꿈과 인세를 구분하여 둘로 본 것이니, 너는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 같구나.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고 나비 또한 변하여 장주가 되었다. 이에 장주는 '장주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가, 나비가 꿈을 꾸어 장주가 되었는가'라 하며 끝내 구분치 못했으니 어느 것이 꿈인지 어느 것이 진인지 그 누가 아리오. 지금 너는 성진을 너의 육신이라 생각하고 또 꿈을 그 육신의 꿈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너 역시 육신과 꿈으로 [분리시켜] 일물이 아니라 했다. 성진과 소유 중 어느 쪽이 꿈이고 어느 쪽이 꿈이 아니냐?

 

먼저 이 구절에서 육관대사는 꿈과 인세(人世)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바람직한 것도 아님을 밝혔다. 다시말해 양소유(꿈)와 성진(인세) 모두 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설파했다. 그러나 사유와 판단의 주체인 성진은 스스로가 꿈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이라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또 성진은 자기가 양소유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양소유의 실재를 부정했지만 자기 자신도 덧없는 꿈 속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성진이 '자아라는 산냐'[我相]와 '개아(個我)라는 산냐'[人相]에 집착해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런 성진의 미망을 육관대사가 꾸중하였다.
이것을 {금강경}에서 확인해보자.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어떠한 중생도 완전히 열반에 든 자는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만일 수보리여, 보살에게 중생이라는 산냐가 생긴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자아(自我)라는 산냐가 생기거나 중생이라는 산냐나 영혼이라는 산냐나 개아(個我)라는 산냐가 생긴 자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는 분명히 있다.' '나는 어떠한 존재이다.' '내가 궁극적 이상이다.'는 인식에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인식하는 나와 인식 그 자체조차도 찰나찰나 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무상(無常)에서 무아(無我)로 나아가고, 법이라는 산냐[法相]까지 벗어나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일체 산냐를 버리고서 위없는 정득각에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않아야 하며 어떤 것에도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머무름이라는 것 그것은 참으로 머무르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설했다. '머무름 없이 보살은 보시를 행해야 한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무름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라고"
성진을 깨닫게 해준 육관대사가 연화도량을 떠난다는 설정은 궁극적인 가르침에도 머물지 않을 조건을 마련한 것이다. 떠나간 육관대사를 이어서 대중 교화를 하는 성진은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불법을 베푸는 '법보시'야말로 최고의 보시이기 때문이다.

 

육관대사가 돌아온 성진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 '산냐를 극복하고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가까이 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육관대사의 관점은 작자의 관점을 대변한 것이다. 작자는 성진을 현실 인물로, 양소유를 사념 속에 환생한 인물로 설정하였다. 피상적으로보면 독자에게 그렇게 읽힌다. 그러나 {구운몽}의 서사적 장치들은 현실 인물인 성진이 비현실적 인물로, 환생한 인물인 양소유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독자들에게 느껴지게 한다. 가령, 성진은 육관대사로부터 동정용왕에게 가서 사례를 하고 오라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나는데 그가 용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유리같은 파도를 가르고 수정궁으로 들어가니 용왕이 크게 기뻐하며 궁문 밖으로 나와 맞이했다.'라는 대목에서 성진을 현실 인물이라 느끼기는 어렵다. 성진은 또 복사꽃을 명주로 만드는 요술을 부리고 그 파트너인 팔선녀들은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가기까지 한다. 이들은 독자들에게 환상적 인물로 먼저 느껴지는 것이다. 이처럼 피상적 설정과 실질적 느낌이 상반되게 만든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서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작자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환상 혹은 꿈을 반대로 경험하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이 가진 현실 집착, 즉 현실이 실재하고 있다는 통념에 충격을 가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로 양소유가 당하는 수많은 '속임수'라는 서사적 장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드러진 사례로 정경패, 가춘운, 정사도가 모의를 하여 양소유를 속이는 서사단락을 살펴보자. 양소유는 여장을 하고 정경패의 집으로 들어가 정경패를 만나보는데 정경패는 양소유에게 속은 분을 풀기 위해 양소유를 다시 속이고자 한다. 정사도가 양소유를 절승지로 유인한 뒤 사라지자 가춘운이 나타난다. 가춘운은 자기와 양소유의 전생이라고 꾸며진 이야기를 해준다. 즉 자기는 왕모(王母)의 시녀였고 양소유는 자부(紫府)의 선리(仙吏)였는데 중선(衆仙)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 눈이 맞아 선과(仙果)를 던지고 희롱하다 적발되어 인간 세상에 환생(幻生)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기한을 다채워 요지(瑤池)로 올라가야 하는데 양소유를 만나보고 가기 위해 하루를 미루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서로 동침을 하게 되는데 양소유에게는 '선녀와 결연을 맺는 게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진인 듯 진이 아닌 듯' 하였다. 그로부터 양소유는 가춘운을 장녀낭(張女娘)으로 안다. 그녀가 죽어 귀신이 되었다고 해도 '(사람과 귀신의) 근본의 하나고 그 이치도 같습니다. 어찌 사람과 귀신을 구분하고 유와 명의 세계를 나누리요' 하며 계속 관계 맺기를 간청한다.

 

이 서사단락을 가춘운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의 위선위귀(爲仙爲鬼)는 <實­假­實>의 변환을 나타내고, 양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迷­幻­覺> 혹은 <迷惑­幻妄­覺醒>의 심리체험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구조는 <성진­양소유­성진>이라는 전체구조와 비슷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성진­양소유­성진>에서는 경험의 주체와 상대 양쪽 모두가 다른 이름과 형체로 환생하여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 비해, 여기서는 경험의 주체인 양소유와 상대인 가춘운은 그대로인데 가춘운의 실상을 양소유가 착각할 따름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작자와 독자의 관점에서 보면, 작자는 전체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양소유­가춘운 관계를 통하여 가상에 대해 경험의 주체가 얼마나 깊이 집착할 수 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주려 하였다. 그것은 육근(六根) 중 특히 이(耳)와 목(目)이 불완전한 것임을 먼저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경패, 정사도, 가춘운 등 음모의 주체들과 독자들은 그것이 가상적으로 설정된 상황임을 분명히 알지만 유독 양소유 혼자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보인 양소유는 결국 자기가 속은 줄 알게 되고 마침내 '정상적'으로 관계를 보게 된다. 승천하거나 죽은 줄 알았던 가춘운이 사실은 죽지 않았으니 얼마나 반가웠는가. 양소유는 살아있는 가춘운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자기 자신은 실재한다고 믿었다. 또 정경패가 죽었다는 속임수가 진행되고 있는 궁중에서 가춘운-진채봉-난양공주 사이의 말을 엿듣고 있는 양소유의 모습에서 자기가 더 이상 속지 않고 있다고 우쭐댈 양소유의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양소유야말로 확실히 환상 속의 인물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그게 작자의 시선이고 독자의 시선이다. 그런 양소유의 행각을 바라보는 독자는 경험의 가상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작자가 이같이 속고 속이는 가상 상황을 거듭 설정한 것은 이런 효과를 가져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구운몽}에 거듭 나타난 서사장치로서의 '속임수'와 연관시켜 이해해야 할 것이 양소유의 '꿈'이다. 양소유는 토번을 무찌르기 위해 출정했다가 잠시 동정용궁으로 가는 꿈을 꾼다. 꿈 속에서 백능파를 만나 전생의 인연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남악형산을 찾아가 예불까지 한다. 그러다 깨어나서 옆의 장수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같은 꿈을 꾸었고 또 꿈 속에서 백능파가 마실 수 있는 것으로 변할 것이라 알려준 백룡담(白龍潭) 물을 떠 먹고 쾌차하게 되었다 한다. 그외 정경패가 양소유의 꿈에 나타나 자기가 죽어서 천상으로 갔다고 말하는 꿈도 이와 유사하다. 이렇듯 꿈에서 깨어난 양소유는 꿈 속의 일들이 자기 현실로 이어지는 징조들을 확인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환몽 속 존재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속임수에서 벗어난 양소유는 지금까지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꿈속에서 부정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된 양소유도 깨어나서 그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속임수와 꿈을 작자가 계속 설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소유는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도 계속 속고 있으며 꿈에서 깨어난 그 순간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양소유의 세계는 돌아온 성진에 의해 '꿈'이라 규정되어야 할 환몽세계이다. 성진이 '양소유가 된 꿈을 꾸었다'고 말하여 양소유의 존재를 부정해주기 전에 독자들 스스로가 조금씩 양소유의 가상성을 먼저 관찰할 수 있도록 작자는 '속임수'와 '꿈'이라는 서사적 장치를 거듭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찰은 독자들의 시선이 마침내 돌아온 성진에 집중되도록 만들었다. 양소유로서 일생을 살다가 돌아온 성진이 양소유의 삶이 '일장춘몽'임을 깨닫지만 성진 자신의 존재도 역시 무상하여 꿈 속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에 빠져있다. 지금까지 비슷한 상황을 거듭 경험한 이상적 독자라면 이런 성진이 가진 망상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육관대사의 관점을 터득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속임수'와 '꿈'이라는 서사적 장치는 독자들로 하여금 돌아온 성진이 아직도 스스로가 꿈 속의 존재일 수 있으며 또 모든 것이 꿈일 수밖에 없는 삶을 계속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암시이거나 예비 훈련인 셈이다.
그것은 '자아라는 산냐', '개아라는 산냐'를 버리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법에 머무는 마음도,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않고 머무름 없는 보시를 행해야 한다는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을 서사적으로 활용한 서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성진→양소유의 과정과 양소유→성진의 과정을 함께 응시한 육관대사의 존재는 서술자, 나아가 작자의 시선을 대변한다. 그의 시선을 통하여 성진은 자기 사념 속에서 양소유로 환생했고 환생한 양소유는 성진이 사념한 대로 온갖 현실적 욕망을 순조롭게 다 충족시킨 것이다. 그런데 양소유 이전의 성진과 양소유 이후의 성진은 거의 동시적인 존재다. 양소유로 환생하기 전 성진이 한 심찰나(心刹那)동안 세속 부귀영달을 생각했듯, 양소유의 일생도 한 심찰나동안 영위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에 실현된 양소유의 삶은 지극히 다채롭고 장황하다. 한 심찰나 동안 성진의 사념 속에서 이루어진 양소유의 일생을 그렇게도 장황하게 묘사한 뒤 그것을 성진의 입을 통해 부정하고 그런 성진을 마침내 육관대사의 설법을 통해 꾸중하게 한 데에야말로 작자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소설적 미학이 들어 있다. 즉, 사람이 추구하는 현실의 부귀영달이 한 찰나 꿈같은 것이며 그렇게 판단하는 판단하는 주체 자신과 그 가르침까지도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꿈같은 존재라는 깨달음을 독특한 서사적 장치들을 통하여 잘 보여준 것이다. 그 점은 다음과 같은 오늘날의 선승의 가르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꿈 속에는 아무리 밝게 따지고 하더라도 꿈 밖의 얘기는 되지 않습니다. 꿈 밖의 얘기는 꿈을 깨지 않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자나깨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수천만 겁의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사는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오리무중으로 왔다갔다 하는 자기의 그런 인생을 자각하지 못하고 꿈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시대 최고 선승의 핵심 법문이라 일컬어지는데, 이와 비교할 때 {구운몽} 결말 부분에서 육관대사가 베푼 설법은 작품 전체를 마무리하는 불가적 설법으로서 충분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설법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는 서사적 장치들이 그 이전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구운몽}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서사적으로 실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양소유의 세계를 소상하게 서술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본다. {구운몽}은 사변화된 불교사상을 조목조목 진술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속의 욕망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한 수행승으로 하여금 세속의 욕망을 경험하게 만들어줌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속의 경험은 깨닮음의 원동력과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양소유의 세계는 성진의 사념 속 욕망의 실현이란 점에서 큰 고난이나 갈등없이 마음 먹은대로 욕망이 충족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런 양소유의 일생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세속을 철두철미 경험하게 만들어준다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경험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백능파의 앞날을 예언하는 데서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즉 장진인(張眞人)은 백능파의 장래를 다음과 같이 점쳐준다.

 

① 백능파의 전신은 선녀다.(此娘子前身 卽仙女也)
② 죄를 지어 적강하여 용왕의 딸이 되었지만 곧 사람 형체를 얻을 것이다.(因罪謫降 爲王之女 而畢竟復得人形)
③ 귀인의 희첩이 되어 부귀영화의 즐거움을 다 누릴 것이다.(爲人間貴人之姬妾 享富貴榮華之樂)
④ 이목심지(耳目心志)의 즐거움을 다 할 것이다.(悉耳目心志之娛)
⑤ 끝내 불가에 귀의하여 영원히 대선(大禪)을 이룰 것이다.(終歸佛家 永爲大禪矣)

 

백능파의 환생과 깨달음은 양소유의 그것과 궤도를 같이 한다고 보아도 좋다. ③에서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을 강조했고 ④에서 즐거움을 '다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불가 귀의'는 그것과 바로 이어져있다. 세속 즐거움을 다하였기 때문에 불가에 귀의하게 되고 마침내 대선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신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신몽]에서 조신은 김흔공의 딸과의 결연을 간절히 원하다가 꿈 속에서 그녀와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몸서리치다 이혼을 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깨어나 수행에 정진한다. 충분하지는 못하나마 세속 삶의 경험이 득도나 수행에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점에서 {구운몽}과 유사하다.
{구운몽}에서 작자는 육관대사의 마지막 법문을 통하여 불교사상을 진술하는 쪽보다는 작품 전체의 서술 과정에서 독특한 서사적 장치를 활용하여 등장인물들의 경험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그것이 거듭 성찰되게 함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를 이끌어내었다고 하겠다. 세속의 애욕 경험을 통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조신몽]과 {구운몽}은 서사문학사의 맥락에서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꿈'이 사념과 윤회로 치환되었다는 것, 등장인물이 늘어나고 그들이 겪는 현실 경험이 더욱 다채로워졌다는 것, 작품의 서술구조가 불교철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등은 [조신몽]에서 {구운몽}으로 나아가면서 우리 소설사가 이룩한 비약이라 할 수 있다.
12연기에 의한 윤회 고통의 연속은 사람의 한 생애나 몇 생애에 걸쳐 나타나게 마련이다. {구운몽}은 '사념의 실현'이란 서사적 장치를 활용하여 윤회를 포함한 12연기의 각 단계가 한 찰나에 나타나게 하였다. 연화도량에서 부들방석을 깔고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지금 여기의 성진의 사념과 마음 속에서, 양소유의 일생이 연기의 법칙에 따라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독자는 12연기를 한 순간에 경험하며 또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찰을 통하여 지금 여기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한다. 마침내 그 연기의 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을 거쳤기에 성진도 연화도량 대중에게 교화를 베풀고 보살대도(菩薩大道)를 얻어 극락세계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6. 결 론
논의의 과정과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운몽}에서 성진이 양소유가 되는 과정에는 성진의 사념 실현이란 맥과 성진의 환생이란 맥이 공존하고 있다. 그중 사념 실현이란 맥이 더 포괄적이어서 환생을 포함하고 있는 형국이다. 성진은 한 심찰나의 자기 사념 속에서 양소유로 환생하였다. 양소유가 다시 성진으로 되는 과정은 양소유의 사념 실현으로만 볼 수 있지 환생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젊은 성진은 죽지만 늙은 양소유는 죽지 않고 젊은이로 되돌아온다. 이런 설정은 독자들의 통념에 충격을 주는 중요한 서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통념에 충격이 가해질 때 삶에 대한 근본 반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돌아온 성진은 양소유의 실재를 부정했지만 자기 자신도 덧없는 꿈 속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것은 성진이 '자아라는 산냐'[我相]과 '개아(個我)라는 산냐'[人相]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런 성진을 육관대사가 꾸중하였다. 일체의 '산냐'를 버리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법에 머무는 마음도,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않고 머무름 없는 보시를 행해야 한다는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과 육관대사의 가르침은 근접한다. 성진을 깨닫게 해준 육관대사가 연화도량을 떠난다는 설정은 궁극적인 가르침에도 머물지 않을 조건을 마련한 것이다. 떠나간 육관대사를 이어서 대중에게 법보시를 하는 성진은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환생과 사념실현 이외에 {구운몽}에서 두드러지는 서사적 장치는 '속임수'와 '꿈'이다. 이 서사적 장치들은 돌아온 성진이 아직도 스스로가 꿈 속의 존재일 수 있으며 또 모든 것이 꿈일 수밖에 없는 삶을 계속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암시이거나 예비 훈련인 셈이다.
양소유 이전의 성진과 양소유 이후의 성진은 거의 동시적인 존재다. 양소유로 환생하기 전 성진이 한 심찰나 동안 세속 부귀영달을 생각했듯, 양소유의 일생도 한 심찰나 동안 영위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에 실현된 양소유의 삶은 지극히 다채롭고 장황하다. 한 심찰나 동안 성진의 사념 속에서 이루어진 양소유의 일생을 그렇게도 길게 장황하게 묘사한 데에야말로 작자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소설적 미학이 들어 있다. 즉, 사람이 추구하는 현실의 부귀영달이 한 찰나 꿈같은 것이라는 불가적 가르침을 아주 정교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진실이라고 판단하는 주체와 그 가르침까지도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꿈같은 존재라는 것이 자연스레 드러나게 하였다.
양소유의 세계를 소상하게 서술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구운몽}은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한 수행승으로 하여금 세속의 욕망을 경험하게 만들어줌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속의 경험은 깨달음의 원동력과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작자는 육관대사의 마지막 법문을 통하여 불교사상을 진술하는 쪽보다는 작품 전체의 서술 과정에서 독특한 서사적 장치를 활용하여 등장인물들의 경험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그것이 거듭 성찰되게 함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를 이끌어내었다고 하겠다. 세속의 애욕 경험을 통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조신몽]과 {구운몽}은 서사문학사의 맥락에서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꿈'이 사념과 윤회로 치환되었다는 것, 등장인물이 늘어나고 그들이 겪는 현실 경험이 더욱 다채로워졌다는 것, 작품의 서술구조가 불교철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등은 [조신몽]에서 {구운몽}으로 나아가면서 우리 소설사가 이룩한 비약이라 할 수 있다.

 

12연기에 의한 윤회 고통의 연속은 사람의 한 생애나 몇 생애에 걸쳐 나타나게 마련이다. {구운몽}은 '사념의 실현'이란 서사적 장치를 활용하여 윤회를 포함한 12연기의 각 단계가 한 찰나에 나타나게 하였다. 연화도량에서 부들방석을 깔고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지금 여기의 성진의 사념과 마음 속에서, 양소유의 일생이 연기의 법칙에 따라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독자들은 12연기를 한 순간에 경험하며 또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찰을 통하여 지금 여기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한다. 마침내 그 연기의 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을 거쳤기에 성진도 연화도량 대중에게 교화를 베풀고 보살대도(菩薩大道)를 얻어 극락세계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구운몽}은 '산냐를 극복하고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서사적으로 실현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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