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_11

醉月 2011. 11. 5. 10:51

개인적 책임에 몰두한 이상적 자유주의자 황순원, 사회적 책임 실천한 현실적 진보주의자 리영희

황순원과 리영희

황순원의 시대정신은 인간주의와 자유주의에 가깝다.
리영희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와 진보주의에 기울어 있다.
자유를 중시하되 황순원은 ‘개인적 책임’을, 리영희는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
 

 

나는 4월혁명이 일어난 1960년에 태어나 1979년 대학에 입학해서 198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92년부터 모교 사회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으니, 연구자로서의 삶도 20년이 넘었다. 이른바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가로질러 온 셈이다.

그동안 다양한 지식인이 쓴 책들을 읽고 그들의 삶을 지켜봐왔다. 이번 호에서 다룰 지식인들을 선정하는 데는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을 골랐다. 황순원과 리영희가 그들이다.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도 없지 않을 듯싶다. 무엇보다 황순원과 리영희는 뚜렷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없는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고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작가를 한 사람 다루고 싶었는데, 황순원, 최인훈, 김수영, 고은 가운데 황순원을 선택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황순원, 최인훈, 김수영, 고은은 그 기여가 사뭇 다르다. 최인훈이 중도주의를, 김수영이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라면, 고은은 전통주의와 현대주의를 결합한 작가인 데 반해 황순...   

 

 

일본 유학시절 소설가로 변신

 

1953년 11월 ‘협동’지에 ‘소녀’라는 제목으로 실린 황순원의 ‘소나기’.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를 수학하고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일제 말기에 그는 평양과 대동군에서 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광복이 되자 북한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1946년 월남했다. 서울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7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됐으며 1980년 정년퇴직을 맞았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문학과지성사에서 1985년에 ‘황순원 전집’ 전 12권으로 완간됐다. 이후 작품들을 더러 발표하던 그는 2000년 세상을 떠났다.

황순원은 처음에는 시를 썼으나 일본 유학시절 소설가로 변신했다. ‘황순원 전집’의 순서는 단편, 장편, 시, 그리고 연구논문들로 이뤄져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소설가 황순원을 거의 모두 알고 있는데, 그것은 ‘소나기’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황순원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작품에 반영된 어떤 정신 또는 사상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의 장편소설이 꼽힌다. 이 작품들은 그 제재가 각기 다르다. ‘카인의 후예’가 북한의 토지개혁을 주목한다면,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6·25전쟁이 남긴 상처를 다룬다. ‘일월’은 백정을 통해 소수자 문제와 존재의 고뇌를, 그리고 ‘움직이는 성’은 우리 한국인의 심성 구조를 살펴본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카인의 후예’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에 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광장’ 등과 함께 선정된 이 소설은 광복 직후 북한에서 이뤄진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한다. 지주 아들인 박훈과 마름 출신인 도섭영감의 갈등, 그리고 박훈과 도섭영감의 딸인 오작녀의 사랑을 축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한편으로 토지개혁의 진행과정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다양한 인물의 대응과 고뇌, 그리고 사랑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장편소설 못지않게 황순원의 문학세계가 잘 드러난 것은 단편소설이다. ‘국민 단편소설’이라 할 수 있는 ‘소나기’를 위시해 ‘별’ ‘목넘이마을의 개’ ‘학’ ‘잃어버린 사람들’ 등 그가 쓴 단편들은 우리 겨레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며, 그 속에서 살아간 이들의 삶을 격조 높게 그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황순원의 이런 작품들이 근대적 ‘소설’ 이전의 전근대적 ‘이야기’라고 지적하지만,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보기에 소설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은 삶이자 그에 대한 증거다.

 

 

‘기러기’, 식민지 시대의 광휘

황순원의 단편소설에서 중요한 변화는 첫 번째 단편집 ‘늪’과 두 번째 단편집 ‘기러기’ 사이에서 관찰된다. 일제 말에 쓰였음에도 ‘기러기’는 광복 직후에 쓰인 세 번째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보다도 늦은 1950년에야 출간됐다.

내 시선을 끈 것은 ‘기러기’의 서문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은 ‘별’과 ‘그늘’을 제외하고는 발표되지 못했다. 우리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황순원은 이를 거부하고 고향 대동군에 칩거하면서 ‘기러기’에 실리게 될 소설들을 써뒀다. 다수의 문인이 친일로 전향한 당시 현실을 생각할 때, 비록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황순원은 원고지 위에서, 언어를 통한 독립운동을 조용히 전개한 셈이었다. 이육사, 윤동주의 시와 함께 ‘산골아이’ ‘황노인’ ‘독짓는 늙은이’ 등 ‘기러기’에 담긴 소설들은 겨레의 더없이 소중한 유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책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되는대로 석유상자 밑에나 다락 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기는 했습니다. 그렇건만 이 쥐가 쏠다 오줌똥을 갈기고, 좀이 먹어들어가는 글 위에다 나는 다시 다음 글들을 적어 올려놓곤 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명이 그렇게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명멸하는 내 생명의 불씨가 그 어두운 시기에 이런 글들을 적지 아니치 못하게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서문을 읽은 것은 대학을 다닐 때였다. 한쪽 반 정도 분량의 이 서문은 황순원이 남긴 글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글이다. 아래서 다시 말하겠지만, 황순원은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권력 비판이 아니라 인간 탐구에 있었다. 작가는 과연 무엇을 하는, 또 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비록 발표를 기약할 수 없다 하더라도, 소중한 겨레의 언어로 오랜 시간을 견뎌온 겨레의 이야기를 전승함으로써 명멸하는 생명의 불씨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지식인이 보여준 최고의 정신적 광휘(光輝) 가운데 하나였다.

황순원의 문학 사상을 잘 보여주는 소설은 ‘움직이는 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작품은 ‘카인의 후예’ ‘일월’ 등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움직이는 성’은 황순원이 오랫동안 생각해 온 한국인의 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회학 연구자인 내 시선을 끌었다.

 

   

 

 

‘움직이는 성’, 한국인의 심성 구조

한국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오랫동안 토론돼왔다. 우리 민족은 구석기시대 이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거주해왔다. 고려시대부터는 영토가 한반도에 제한돼 있었지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일궈왔다. 동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이 그러하듯이 농경생활이 기본을 이뤘으며, 따라서 유목민(遊牧民)이 아닌 정주민(定住民)의 특징을 간직해왔다. 누구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심성을 ‘한(恨)’에서, 다른 이는 ‘은근과 끈기’에서 찾기도 했다.

황순원의 답변은 이와 다르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가 제시하는 한국인의 심성은 ‘유랑민 근성’이다. 이 소설은 각각 개성이 다른 세 명의 주인공인 농업기사 준태, 목사 성호, 민속학자 민구가 펼치는 삶과 생각을 다루고 있다. 소설을 통해 황순원은 한국인의 종교적 삶을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기독교와 샤머니즘, 구체적 삶과 추상적 관념,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내가 이 소설에서 주목한 것은 이상섭도 지적한 바 있는 ‘유랑민 근성’에 대한 탐구다. 사회학적으로 유랑민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피란민과 유목민이 그것이다. 피란민이 전쟁을 피해 멀리 옮겨간 사람들이라면, 유목민은 일정한 거처 없이 이동하며 사는 이들을 말한다. 둘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게 공통점이라면, 피란민에겐 전쟁과 같은 외부적 영향이 두드러진 반면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 자발적 선택을 중시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피란민 사회의 그늘이다. 이곳은 잠시 머물러 있는 공간이기에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게 피란민의 자의식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망과 권력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연줄망을 극대화하는 게 피란민의 전략적 선택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피란민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일 것이다.

황순원은 주인공 성호의 선택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또 모색한다. 이 작품은 산업화 시대가 절정으로 치닫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쓰였다. 전쟁과 산업화가 우리 사회에 미친 중대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의 파괴였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한번 훼손된 공동체 의식을 복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황순원이 제시하는 구원의 가능성, 다시 말해 기독교적 사랑과 정의의 수용은 유랑민 근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황순원 자신은 아마도 인식하지 못했을 터인데, 유랑민이 갖는 또 하나의 측면인 유목민(nomad)의 특성이 오늘날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메시지를 어떻게 평가하든 이 작품은 한국인의 존재적 특징을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선 자리와 갈 길을 돌아보게 한다.

 

 

구속과 해직 반복

 

리영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우상과 이성’.

 

리영희는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19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입학했지만 광복을 맞아 학업을 중단했고, 1946년 국립한국해양대학에 다시 입학해 졸업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입대해 1957년 제대한 다음, 곧 합동통신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64년 조선일보로 직장을 옮겼고, 이해 필화(筆禍)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2년에는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구속과 기소, 해직과 복직을 거듭했으며, 1995년 한양대를 정년퇴임하고 2010년 세상을 떠났다.

리영희가 펴낸 책들은 2006년 한길사에서 ‘리영희저작집’ 전 12권으로 출간됐다. 그의 첫 저작은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이후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편역)’ 등을 발표해 ‘문제적 지식인’으로 부상했다. 이 책들 탓에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지만, 당시 젊은 세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그는 진보 세력의 ‘사상적 은사’로서 평가됐으며, 이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등의 저작들을 발표했다. 2005년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나눈 자전적 대담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출간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리영희는 신영복과 함께 민주화의 상징적 지식인이다. 한 사람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켰으며, 다른 한 사람은 구속과 해직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펼쳐 보였다. 책과 담론이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면, 리영희보다 오른편에 설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인은 없는 듯하다. 그는 여러 조사에서 광복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선정됐으며,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서 언제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 땅에서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리영희만큼 생생히 보여준 지식인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끼친 영향

1970년대와 80년대에 ‘전논’이라 불리던 ‘전환시대의 논리’는 리영희의 대표작이다. 1974년 유신독재 상황에서 출간된 이 책이 당시 지식사회에 준 영향은 충격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아시아, 중국, 한국’의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 책은 6·25전쟁 이후 우리 사회를 특징지어온 냉전분단체제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짧은 ‘머리말’은 겸허하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동설을 증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의 출판을 위탁 맡은 신학자 오리안더는 교회 권력과 신학 도그마와 그에 사로잡혀 있는 민중의 박해 때문에 그 책을 ‘사실’로서가 아니라 ‘가설’이라는 궤변을 서문에 삽입하여 출판했다.… 격에 안 맞는 코페르니쿠스와의 비교를 자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정치적 신학’의 도그마가 지배하는 날까지는 가설인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는 것이다.”

가설이라는 겸양의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 책에는 냉전분단체제라는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통찰과 의지가 담겨 있다. 책의 구성을 보더라도 리영희의 생각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크게 6부로 이뤄져 있다.

‘제1부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제2부 중국 외교의 이론과 실제, 대륙 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 권력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 사상적 변천으로 본 중국 근대화 백년사, 중국 지도체제의 형성과정, 제3부 조건반사의 토끼, 현해탄, 텔레비전의 편견과 반지성, 외화(外貨)와 일본인, 사하로프-동정과 반성, 제4부 미군 감축과 한일 안보관계의 전망, 일본 재등장의 배경과 현실, 한국 유엔 외교의 새 국면, 베트남전쟁(Ⅰ), 베트남전쟁(Ⅱ), 제5부 직업 수필 4제, 기자풍토 종횡기, 그리고 제6부 한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은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변화하는 동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중국에 대한 재인식을 중심으로 닉슨 독트린과 미국의 대외정책,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화,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역사와 현실 등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분석과 날카로운 통찰을 통해 냉전체제에 갇혀 있던 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리영희는 자신의 견해가 단지 가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가설은 이제까지 대외의존적인 사유에서 주체적인 현실인식으로 전환할 것을 열렬히 요구하고 있다. ‘전환의 시대’에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려는 데 이 책의 목적이 놓여 있다.

리영희는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랜 외신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다. 주지하듯이 한반도는 동아시아 지정학(geopolitics)과 지경학(geoeconomics)의 중심을 이룬다. 해양 세력(미국, 일본)과 대륙 세력(중국, 러시아)의 교차지점에 놓여 있으며, 더욱이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돼 있다. 리영희는 두 가지를 주문한다. 냉전적 보수주의에서 벗어난 균형적 현실주의의 시각이 그 하나라면, 외세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관점에 기반을 둬 평화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리영희 연구의 현재적 의미

‘전환시대의 논리’ 이후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을 필두로 사회평론집을 여러 권 출간했다. 그는 합리적 이성의 관점에서 우상 파괴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의 시각에서 우상이란 다름 아닌 냉전분단체제와 군사독재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는 미국의 패권적 동북아 정책,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주목하고, 중국의 새로운 부상과 분단시대의 현실을 분석하고자 했다.

이러한 리영희의 지적 활동은 진보와 보수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그 자신의 회고에서 볼 수 있듯이 진보세력에서는 ‘사상의 은사’로 추앙받았지만 보수세력으로부터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비판받았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활동했던 다른 진보적 지식인들과 비교해 그는 진보적 성향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공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권력 비판을 멈추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비판적 지성의 표본이었다.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 리영희가 제시한 ‘가설’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동아시아의 변동은 중국의 부상과 G2체제의 등장,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점진적 쇠퇴, 그리고 남북 평화공존의 노력과 북한의 핵무기 개발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냉전에서 탈냉전으로의 변동, 그리고 탈냉전 속에서 열전의 부상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동아시아의 현재를 이루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전환시대의 논리’ 등 오래된 그의 책들을 다시 펼쳐보니 다소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비록 세세한 가설은 틀렸을지 몰라도 주체적인 대외정책을 모색하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증진해야 한다는 리영희의 주장은 더없이 선구적이었다.

1970년대에 리영희가 제시한 기본 프레임은 냉전적 프레임에 맞서는 탈냉전적 패러다임이었다. 돌아보면 우리 현대사는 그가 예견한 방향으로 진행돼왔다. 한 지식인의 사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세세한 나무의 관점이 아니라 전체적인 숲의 관점이 온당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부상한 ‘동북아시대론’도 냉전분단체제론을 넘어서고자 했던 리영희의 사상적 고투의 성과 위에서 제출될 수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정부 훈장 거부

이제까지 이 기획에서는 유사하거나 차이가 뚜렷한 동시대 지식인 두 사람을 함께 다뤘다. 이번에 살펴보는 황순원과 리영희는 같은 시대를 살아왔음에도 유사성과 차별성을 넘어서 서로 다른 지층을 걸어온 듯한 지식인들이다. 황순원은 평생 잡문을 쓰지 않고 순수문학에 몰두한 반면, 리영희는 현실 한가운데서 그 현실에 의연히 맞섬으로써 작지 않은 곤욕을 치렀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사람의 사상보다는 지식인의 태도다. 먼저 리영희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임헌영과 나눈 ‘대화’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이 ‘자유’와 ‘책임’이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리영희는 살아오면서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유예, 세 번의 징역”을 겪었다고 회고한다. 필자 역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있기에 이러한 리영희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고통스러웠을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권력의 끝없는 탄압은 그의 건강을 해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연구를 자주 중단시켰다. 상황이 이러했음에도 리영희가 남긴 저작집을 보면 글쓰기에 그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리영희의 글은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 주장이 선명할 뿐만 아니라 문체 또한 명징하다.

한걸음 물러서 볼 때 그는 연줄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동료와 후학은 많았다 하더라도 어쩌면 적잖이 고독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지식인 리영희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집권 초반 이라크전 파병 반대에 적극 참여했을 때였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이른바 책임윤리 논리에 맞서 심정윤리의 관점에서 파병의 부당성을 강조했다. 그때 나는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리영희다운 모습이자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라고 생각도 했다.

황순원은 이와 사뭇 다르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을 통해서만 말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는 잡문은 물론 언론의 인터뷰도 거절했고, 정부가 주는 훈장까지 거부했다. 그가 작품 속에서 다루는 세계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공간이었다. ‘카인의 후예’는 그 적절한 사례다. ‘카인의 후예’에서 황순원이 주목하는 것은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개혁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급격한 사회변동을 마주한 인간 군상의 고뇌에 있었다. 그 고뇌는 현실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망설임과 결단의 실존적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황순원은 광복 직후 북한에서 월남했지만 1949년 ‘보도연맹’에 가입해야만 했다. 그의 삶과 작품들을 돌아볼 때 학창시절부터 이념에 가깝지 않았던 황순원에게 이러한 불편한 현실은 그의 탈이념적 성향을 강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분단과 전쟁, 다시 분단체제의 강화로 이어진 엄정한 현실 아래서 그는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상황은 그로 하여금 순수문학에 더욱 기울어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작가나 시인이 자기는 문예사조의 어느 주의를 신봉한다든가 무슨 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가가 정말로 자신을 어떤 틀 속에 옹색하게 가둘 리가 없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나 자신을 로맨티시스트라 부른 적이 있지만.”

 

칠순을 맞이해 황순원이 쓴 에세이 ‘말과 삶과 자유’의 한 구절이다. 이 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황순원은 예술가로서 자유를 가장 소중히 했다. 그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삼사문학’ 동인으로 참여한 적이 있지만,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자유를 얻기 위해 월남했으며, 이후 어떤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도달한 ‘유랑민 근성’은 바로 이 점에서 황순원 자신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유랑민의 본질에는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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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자유를 중시했다고 해서 황순원이 이를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은 아니다. 자유를 얻은 대신 작가로서의 책임을 그는 묵묵히 수행했다. 판을 달리할 때마다 작품들을 수정했으며, 전집을 출간할 때는 젊은 시절 쓴 시들을 과감하게 빼버리기도 했다. 작가로서 자신에 대해 황순원은 한없이 엄격했다. “자기 속에 최상의 독자를 키우는 것이 작가가 해야 할 의무의 하나”라고 황순원은 ‘말과 삶과 자유’에 적고 있다.

황순원과 리영희의 이러한 삶은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막스 베버가 강조하듯이 현대 사회는 유일신이 아니라 다신(多神)의 시대다. ‘옛날의 많은 신이 자신의 무덤에서 걸어 나와 우리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는’ 시대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념과 시대정신들의 경쟁이 현재의 사상적 풍경을 구성한다.

 

   

 

 

이러한 다신론의 시대에서 어떤 시대정신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 못지않게 시대정신에 어떻게 접근해갈 것인지의 문제도 중요하다. 굳이 구별하자면 황순원의 시대정신은 인간주의와 자유주의에 가깝고, 리영희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와 진보주의에 기울어 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시대정신 못지않게 인간과 현실, 그리고 시대정신에 대한 태도 또한 중요했다. 자유를 중시하되 황순원은 ‘개인적 책임’을, 리영희는 ‘사회적 책임’을 최선을 다해 실천했다.

시각에 따라서 이러한 개인적, 사회적 책임은 ‘소극적’, ‘적극적’ 책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서 볼 때, 지식인이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가운데 어떤 것에 더 주력할 것인지는 그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맡겨둬야 한다.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갖는 문제는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그 책임을 오히려 방기하는 데 있지 않은가. 이 점에서 황순원과 리영희의 삶과 책들은 우리 후학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던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다. 이 노래는 황순원의 작품 ‘소나기’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이 땅에서 학교를 다닌 이라면 누구나 ‘소나기’를 읽었을 것이다.

두 해 전 여름 나는 일본 교토와 도쿄를 방문한 적이 있다. 도쿄에 갔을 때는 긴자 주변에 머물렀다. 도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영화의 한 장면 때문이다. ‘싸이보그 그녀’라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이런 멜로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본 이 영화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한 장면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미래에서 온 싸이보그와 함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때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의 일본어 버전이 흐른다.

 

도쿄에서 떠올린 ‘소나기’

화면 속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 주인공 앞에는 고향 마을 축제가 펼쳐진다.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마을 풍경이었다. 거기엔 동아시아 모더니티가 펼쳐지고 있었다. 매미채를 든 아이들이 골목길을 뛰어가고, 낮술에 취한 어른들의 흥겨운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 장면은 내 어린 시절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동구 앞에서 할머니가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자 힘차게 달려가던 과거의 자신을 현재의 주인공이 바라보던 모습이 무슨 까닭인지 선명히 각인돼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도쿄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지만 유독 이 여행에선 동아시아 모더니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우에노공원을 산책하면서 여의도공원을 떠올리고, 유락쿠초 주변을 배회하면서 명동 거리를 생각하고, 오다이바로 가기 위해 레인보브리지 위를 넘어갈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광안대교에서 바라본 부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황순원의 ‘소나기’의 장면과 영화감독 곽재용의 ‘싸이보그 그녀’의 장면이 동시에 떠오르기도 했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보기에 한국과 일본의 같음과 다름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다. 황순원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가졌던 궁금함 가운데 하나는 그가 일본 유학을 했음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 소설집 ‘늪’에서 더러 다뤄질 뿐 두 번째 소설집 ‘기러기’ 이후 그는 곧장 겨레의 이야기로 나아갔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황순원이 남긴 ‘소나기’의 모티프는 비록 일본어 버전이지만 일본을 무대로 펼쳐지는 또 다른 이야기에 예기치 않게 등장함으로써 동아시아 모더니티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지금 나는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원고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잠시 좌판을 두드리다 말고 황순원의 소설에 나오는 장면들을 떠올려보고 있다. 만주로 떠난 남편의 편지를 받아든 ‘기러기’의 쇳네, 주인 없는 개 신둥이를 돌보는 ‘목넘이마을의 개’의 간난이할아버지, 폭풍으로 석이가 죽은 바다로 나가는 ‘잃어버린 사람들’의 순이의 이야기를 통해 황순원은 유종호의 지적처럼 ‘겨레의 기억’을 전수하고자 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바로 우리 역사를, 아주 오래된 우리 겨레의 삶을,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기억하게 한다.

 

김호기
1960년 경기도 양주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미국 UCLA 사회학과 방문학자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Korea Democracy Project 공동편집인
저서: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등 다수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들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소나기’의 첫 부분이다. 훼손되지 않은, 시간의 구속을 벗어난 영겁회귀의 영원성 위에 놓인 이야기다.

모노레일을 타고 레인보브리지를 건너갈 때 펼치진 도쿄만의 저녁 풍경을 바라보며 ‘소나기’를 떠올렸던 것은, 지금 이 글을 끝맺으며 소녀를 등에 업고 물이 불은 개울을 건너가던 소년을 떠올리는 것은 황순원의 독백처럼 나 또한 로맨티시스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역사의 한 부분은 낭만적 열정에 의해 이끌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일까. 그가 남긴 작품들이 우리 겨레에게 아주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

 

황순원은 누구인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 태생. 2000년 사망. 1930년대부터 시와 소설을 발표해온 그는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고 있음. ‘소나기’를 포함한 주옥같은 단편들과 격동하는 현실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음.

리영희는 누구인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태생. 2010년 사망. 민주화 시대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성인 그는 486세대와 민주화 세력의 사상적 은사로서 심대한 영향을 끼친 지식인임. 주요 저서로는 문제작 ‘전환시대의 논리’를 위시하여 ‘우상과 이성’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