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함석헌,
참여민주주의와 생명운동의 기수 장일순
함석헌과 장일순
두 사람 다 제도권 밖에서 활동한 들사람(野人)이다. 기독교를 넘어선 동서양 사상의 융합을 추구했다. 씨알 사상을 주창한 함석헌은 민주화를 향한 실천적 투쟁에 앞장섰다. 민주투사에서 생명사상가로 변신한 장일순은 지역 공동체운동에 헌신했다.
이기획의 이름은 시대정신과 지식인이다. 지식인이란 말 그대로 지식 생산 및 유통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지식인과 유사한 우리말이 있다. 지성인, 학인(學人), 사상가 등이 그것이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사전적 의미에서 지식인은 지성인 및 학인과 매우 유사하다. 지성인이 지식인보다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다소 강조한다면(영어로는 intellectuals로 같은 말이다), 학인은 전문적 직업성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사상가는 사뭇 다르다. 사상가 역시 지식 탐구와 생산에 주력한다. 하지만 사상가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는 지식인보다 포괄적이다. 여기서 ‘포괄적’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사상가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사고와 생각을 펼치는 이들을 지칭하는데, 여기서 사고와 생각은 지식보다는 넓은 의미를 갖는다. 둘째, 바로 그런 맥락에서 사상가를 전문화된 학문 분류체계에 가둬두기 어려우며, 이러한 특징은 사상가로 하여금 지식의 영역은 물론 경우에 따라선 종교 영역까지를 넘나드는 포괄성을 갖게 한다.
지식인이 아니라 사상가를...
함석헌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씨(씨알)’의 사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씨알이라고 불렀다. ‘씨의 소리’라는 잡지를 냈으며, 씨알의 벗임을 자임하면서 씨알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함석헌이라는 이름이 다소 낯설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오십이 넘은 이들에게 그가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흰 수염에 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권력을 준엄하게 꾸짖는 함석헌의 모습은 민주화운동의 상징 가운데 하나였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 오산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1924년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1928년 졸업해 오산학교 교사가 됐다. 1934~35년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연재한 그는 일제에 의해 두 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에 추대됐으며, 소련군에 의해 다시 옥고를 치렀다.
함석헌은 1947년 월남했다. YMCA에서 강의를 하는 등 사회활동을 벌이면서 1956년부터 ‘사상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58년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해 큰 관심을 모았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했다. 1962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둘러본 다음 미국과 영국 퀘이커연구소에서 연구했다. 1963년 귀국해 왕성하게 글을 쓰면서 한일협정 반대 등의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1970년대는 함석헌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10년이다. 1970년 ‘씨의 소리’를 창간했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시국선언, 1976년 3·1 구국선언 등을 주도해 유신독재에 맞서는 재야의 구심을 이뤘다. 그는 1979년 세계퀘이커회에 의해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으며, 1980년대 들어와서도 민주화를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1988년 ‘씨의 소리’를 복간한 그는 1989년 세상을 떠났다.
함석헌의 삶은 지난 20세기 우리 역사와 그대로 대응한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식 교육을 받았지만, 교사가 돼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6·25전쟁 이후에는 씨알농장을 운영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함께 산업화 시대 재야인사의 전형이었다. 재야란 말 그대로 벌판에 있음을 뜻하는데, 여기서 벌판이란 공적 기구가 아닌 민간 조직, 곧 시민사회를 이른다.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는 이 재야의 역할이 중요했다. 정치사회의 기본 구도가 정당 간의 대립보다는 정부와 재야 간의 대립, 다시 말해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 국가가 산업화를 주도했다면, 재야는 민주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정치구도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시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6·25전쟁 이후 형성된 냉전분단체제로 인한 정치사회의 이념적 협소화, 독립운동으로부터 이어져온 사회운동의 활성화 등 다른 요인들 또한 이러한 구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어떻게 해석하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의 구심으로서 재야의 역할은 막중했다. 재야라는 말에는 권력에 맞서는 도덕, 권위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 지배자에 맞서는 민중(씨알)의 뜻이 담겨 있었는데, 함석헌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러한 도덕, 민주주의, 민중을 상징했다.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관찰할 수 있는 특징이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면, 그 사회운동의 맨 앞자리에는 언제나 함석헌이란 이름이 놓여 있었다.
고난사관(史觀)
전문적 학자는 아니었으나 함석헌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글과 책을 썼다. 도서출판 한길사는 함석헌이 쓴 글들을 모아 저작집 30권을 출간했다. 제1권 ‘들사람 얼’에서 제30권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전문적 학자들보다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였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그의 대표 저작이다. 원본은 일제강점기 ‘성서조선’에 실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였는데, 1961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이름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했으며, 1965년 다시 개정판을 냈다. 제목에서 ‘성서’가 ‘뜻’으로 바뀐 것은 함석헌이 종교관을 바꿨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를 따르다가 퀘이커교도가 됐다. 기본적으로 그는 기독교도인 동시에 종교다원주의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다면 아니 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 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다. 그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자는 말이다.”
이 책에서 함석헌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고난의 역사로서의 한국 역사다. 함석헌에게 역사란 기본적으로 고난의 역사이며, 그의 역사철학은 고난 사관이다. 상실된 나를, 나와 너를 포함한 씨알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 역사이며, 한국역사는 바로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것은 고난의 선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책에는 식민지 시대에 함석헌이 가졌던 역사 인식이 반영돼 있다. 당시 그는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에 맞서서 기독교와 민족주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고, 고난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통해 민족적 자아를 회복하고자 했다.
‘하나님의 씨’와 ‘평민’
전문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함석헌의 역사 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이고 과잉 규범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관심은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에 있지 않았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민족적 위기라는 시대 인식을 바탕으로 삼아 상실된 자기를 찾아가는 규범적 지향으로서의 역사 서술을 그는 목표로 했다. 나는 곧 씨알이자 세계이며, 이 씨알들이 다름 아닌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역사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에게 나와 세계, 민족과 세계는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은 그의 역사 및 사회인식이 갖는 중요한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에서 유영모와 함석헌 사상을 조명하는 특별분과가 열린 적이 있다. 제도권 철학자가 아닌 재야 철학자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 분과는 당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우리말로 독창적인 철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함석헌 사상은 새롭게 평가받을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으며, 그래서 지난 10여 년간 철학, 신학, 역사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그의 철학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진행돼오기도 했다.
여기 제한된 지면에서 함석헌 사상을 충분히 다루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앞서 말한 씨알 사상이다. 함석헌은 씨알 사상을 그의 스승인 유영모로부터 배웠다. 씨알이란 말은 유영모가 ‘대학(大學)’에 나오는 ‘민(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에서 비롯한다. 씨알의 뜻에는 민중의 영적 특성, 주체성과 평등성이 담겨 있다. 이 씨알은 ‘하나님의 씨(아들)’와 ‘평민’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유영모가 전자를 중시했다면, 함석헌은 후자를 중시했다.
김경재에 따르면,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생명의 주체성, 책임성, 영성을 되찾고 평화로운 대동사회를 이루겠다는 생명·평화사상으로 특징지어진다. 철학사에서 나란, 주체란, 인간이란 누구인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현대 철학을 보더라도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기도 하고(실존주의), 구조적 수인(囚人)이기도 하며(구조주의), 상호주관적 존재(하버마스)이기도 하다.
함석헌에게 인간은 씨알이다. 그리고 이 씨알은 고유성과 독창성을 지닌 존엄한 생명의 존재 그 자체다. 함석헌 사상의 특징은 바로 존재가 타자와 언제나 동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타자란 다름 아닌 민중을 지칭하는데,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것은 민중 속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참 나’ ‘큰 나’로의 진화를 통해서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논리는 개인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주관주의와 구조적 강제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객관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은 자발적 의지와 구조적 강제가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21세기적인 사상가
이 점에서 함석헌의 사상은, 설령 그 논리 구성이 정교하지 않다 하더라도 사회적 개인과 그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참 나’로 나아가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제도로서의 인권과 민주주의였으며, ‘참 나’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생산적 공존 및 조화를 추구했다.
함석헌과 비교해 장일순은 그렇게 널리 알려진 사상가는 아니다. 일각에서는 오래 전부터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높이 평가해왔지만, 그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99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본격화되면서부터다. 내가 보기에 장일순은 20세기적이라기보다 21세기적인 사상가였다. 특히 그의 생명사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더 발하고 있다.
장일순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청강(靑江), 무위당(无爲堂), 일속자(一粟子) 등을 썼다. 1944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1945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반대운동에 참여해 제적됐다. 1946년에는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왔다. 이후 원주를 떠나지 않은 채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는 등 교육운동과 정치운동을 벌였다.
1960년 4월혁명 직후 그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중립화통일론이 빌미가 돼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그는 협동조합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77년에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결심하고 그 연장선에서 1983년 도농(都農)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했다. 이후 그는 생명사상을 탐구하고 생명운동을 활발히 벌이다가 1994년 세상을 떠났다.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돌아볼 때 지학순과 함께 먼저 기억되는 사람은 시인 김지하다. 장일순은 김지하의 사상적 스승이다. 김지하는 1965년 장일순으로부터의 첫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민중은 삶을 원하지 이론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정당이나 정치 따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종교로 우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사회변혁의 정열 이외에 영혼 내부의 깊은 자성의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연보를 보면 장일순이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깨닫고’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결심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5·16군사정변 직후 옥고를 치르고 정치활동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을 철저히 감시당해온 1960년대부터 이미 장일순은 영혼 내부의 깊은 자성을 모색하는 정신운동 또는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락 한 알 속 우주
장일순은 저작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목사 이현주와 대담을 나눈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이 장일순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책이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는 그가 직접 쓴 책이 아니라 글과 강연, 그리고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장일순이 책을 남기지 않은 것은 글이 혹시 다른 이들에게 정치적 피해를 줄지 모른다는 배려뿐만 아니라 글보다는 삶 그 자체를 더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 실린 장일순의 글과 강연은 채 100쪽을 넘지 않는다. 그 대부분 또한 한살림 모임에서의 강연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글이 적다고 해서 그 의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예수 탄생’ ‘거룩한 밥상’ ‘시(侍)에 대하여’ ‘자애와 무위는 하나’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 등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강연들이 던지는 메시지들은 결코 범상치 않다.
그의 사상적 적자라 할 수 있는 김지하는 장일순의 사상적 거처가 동서양을 아우른다고 지적한다. 유학, 가톨릭, 최시형 동학사상, 간디와 비노바 바베 사상, 그리고 노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장일순은 이러한 사상을 언제나 창의적으로 접목하고자 했으며, 그것을 생명사상으로 재탄생시켰다.
생명사상이란 무엇인가. 김종철에 따르면, 장일순의 생명사상은 모든 생명의 거룩성과 평등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는 강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락 한 알 속에도 (…) 우주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그 말이에요. 불교의 화엄경 같은 데서 보면 ‘일미진중 함시방 시방일우주(一微塵中 含十方 十方日宇宙)’, 조그만 티끌 안에 우주가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에요.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들이 생명에 대한 믿음이 좁쌀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저 바다를 비켜라 하면 비킬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그 모범이에요.”
이러한 생명사상의 의의는 한국 모더니티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계몽한다는 데 있다. 장일순 생명사상은 우리 근·현대사의 정신사에서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사상이다. 김종철도 지적하듯이, 조선 후기 이후 우리 사상의 주류는 부국강병 사상이었으며, 이는 무엇보다 효율성과 경쟁력을 강조했다. 이 기획에서 앞서 살펴본 다수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삼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부국강병이라는 모더니티의 논리가 가져온 그늘이다. 환경 파괴는 이 그늘을 대표한다. 장일순이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환경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지배와 권력의 체제로 만들어버리려고 하는 욕망의 논리다. 이 점에서 장일순의 생명사상은 심층생태론(deep ecology)과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에 잇닿아 있다. 주목할 것은 그가 도달한 이러한 결론이 다양한 동서양 사상에 대한 독서를 통한 독창적인 사유의 결과라는 점이다.
장일순은 자신의 이러한 사상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일상용어로 생동감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나온 장일순의 이야기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생성된 언어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영근 살아 있는 언어 그 자체다. 그는 현학적 담론으로 무장된 엘리트지식인이 아니라, 이현주의 말처럼 ‘초등학교에 처음 등교하는 막내의 손을 잡아 교실 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목소리로 담담하면서도 어느새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건네는 이웃의 사상가였다.
한살림운동
장일순의 사상은 이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한 게 아니라 협동조합운동에서 공동체운동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사회운동과 결합돼 있었다. 장일순은 1980년대 이후 그가 주도한 한살림운동에 헌신했다. 한살림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선구적인 공동체운동이다. 이 공동체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이른바 ‘호혜(互惠)의 원리’다. 호혜의 원리는 시장에서의 ‘경쟁의 원리’와 국가에서의 ‘권력의 원리’와 구별된다. 그것은 상호협력과 공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모색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이러한 시각에 대해 그 실현가능성과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우리가 녹색사회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국지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공동체운동은 내재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또 고도로 분화되고 복합성이 증대된 현대사회에서 호혜의 원리에 기초해 전체 사회를 재조직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는 대안적 삶의 방식과 문화에 대한 적극적 배려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유주의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파괴하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강제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문명의 일차적 피해자가 다름 아닌 하층계급, 여성, 노인, 그리고 어린이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다. 공동체운동이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대안적인 가치 및 문명을 모색하는 것을 방어적이며 낭만적인 운동으로만 평가한다면 이 운동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공동체운동은 우리 삶을 황폐화하는 경쟁을 넘어서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상생할 것인지에 관한 지속가능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시대정신의 측면에서 함석헌과 장일순의 기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지난 20세기 한국사회를 이끈 세 개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 산업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다.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셋은 각각 근대적 국민국가, 산업혁명, 그리고 시민혁명에 대응하며, 이 점에서 민족주의, 산업주의, 민주주의는 모더니티의 세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민족주의가 보수와 진보가 공유한 이념이라면, 산업주의는 대체로 보수에 의해, 민주주의는 대체로 진보에 의해 추동돼왔다.
함석헌은 이 가운데 특히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씨알 사상이란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평민 또는 시민의 중요성을 부각한 것이다.
함석헌을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등장시킨 글은 1958년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다. 이 글에서 그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표출한다. “나라의 주인은 고기를 바치다바치다 길거리에 쓰러지는 민중이지 벼슬아치가 아니다. 구원은 땅에 쓰러져도 제 거름이 되고 제 종자가 되어 돋아나는 씨알에 있지 그 씨알을 긁어먹는 손발톱에 있지 않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한국적 모더니티의 완성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함석헌의 주장이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진행돼 왔고, 민주주의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가 당연한 원리로 수용된 것은 앞선 산업화 시대에서 이뤄진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사회운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비록 정교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주체로서의 씨알의 발견과 사상적 재구성은 민주주의의 시민적 계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이 반영돼 있는 것이지만, 함석헌은 민족주의를 중시하되 그것을 향상 세계 평화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자 했다. 여기에는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기초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상이 서구 중심주의에 일방적으로 경사돼 있지는 않았다. 21세기 현재 우리 민족주의가 나아갈 길이 민족주의와 세계주의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킨 ‘민족적 세계주의’ 또는 ‘세계적 민족주의’라면, 함석헌의 사상은 그 선구적 통찰로 주목받아야 한다.
요컨대 함석헌 사상이 겨냥하는 것은 한국적 모더니티의 완성이다. 씨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사회·경제적으로 골고루 잘살 수 있으며, 다른 민족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가 함석헌이 꿈꿔온 나라였다. 이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 함석헌은 나와 타자, 기독교와 동양사상, 고난과 평화의 사이에 스스로를 세워뒀으며, 그 경계에 서서 모더니티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사상적 모험을 감행해왔다.
함석헌과 비교해 장일순은 모더니티의 극복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티가 추구하는 민족자결, 경제성장, 민주주의를 마다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티는 국수주의, 환경위기, 관료제의 심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사회의 모더니티는 새로운 계몽을 요청한다. 그 계몽은 잘못된 계몽에 대한 계몽, 모더니티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소외를 극복하는,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을 극대화하고 민주주의 영역을 확대하며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장일순 사상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더니티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삶과 사회의 방향을 장일순은 생명사상과 공동체운동에서 찾았다. 이러한 방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위기에 처한 현재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새로운 사상적,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데는 단기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장기적 시각도 중시돼야 한다. 장일순의 사상은 장기적으로 모더니티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사상이 때로는 가장 현실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장일순의 사상은 새삼 일깨운다.
함석헌과 장일순의 삶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은 모두 제도적 영역이 아니라 비제도적 영역에서 활동한 사상가들이었으며,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기독교를 넘어서 동서양의 사상적 융합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차이도 존재한다. 함석헌이 민주화운동의 구심을 이룬 반면 장일순은 지역운동에 헌신했다. 정치·사회적 민주주의의 성숙이 함석헌의 목표였다면 엘리트 민주주의를 넘어선 참여민주주의의 추구가 장일순의 목표였다.
아카데미의 관점에서 볼 때 두 사람의 사상은 여전히 거칠고 불완전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함석헌과 장일순은 전문적 지식인을 자처한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현실 속에서 민중과 함께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사상으로 대변하고자 한 데 있었다. 두 사람의 사유가 거칠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을, 불완전하다는 것은 그만큼 창조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숭동 함석헌 시비(詩碑)
무더위가 한풀 꺾인 9월 초 동숭동으로 갔다. 그곳에 함석헌 시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동숭동을 더러 갔지만 함석헌 시비는 보지 못했다. 학교에서 택시를 타고가 찾아보니 지하철 혜화역 1번 출구 바로 옆 길가에 함석헌 시비가 서 있었다. 뒷면에 쓰인 글을 읽어보니 지난 2001년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해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건립했다고 한다. 앞면에는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가 실려 있었다.
“만리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은 1947년 월남했다. 이 시는 월남한 직후 서울에서 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식민통치를 벗어나 광복이 되었건만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권력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함석헌은 이러한 현실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6·25전쟁이 일어났다. 광복이 됐어도 끝나지 않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함석헌은 공개 강연을 통해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적 격변 속에서 상심하고 상처 받는 씨알들을 위로했다.
작품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는 함석헌의 개인적 체험이 담겨 있으며, 동시에 그 체험을 넘어서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견디기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다. 너다. 그리고 그 나와 너를 포괄하는 ‘참 나’, 다시 말해 씨알이다. 나의 특수성은 씨알에 대한 인식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고, 그 씨알은 다시 역사 발전의 진정한 주체가 된다.
무엇이 나와 너를 연결하는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서구의 기독교적 사랑일 수도 있고, 동양의 전통사상적 사랑일 수도 있고, 나아가 세계사회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다. 나의 사랑과 씨알의 사랑은 서구의 근대적 개인주의도, 동아시아의 전통적 공동체주의도 품어 안으며, 또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 그 자유를 통해 다시 정결해지는 사랑을 품고 함석헌은 오직 앞만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이러한 함석헌의 쉼 없는 사상적, 실천적 투쟁이야말로 지난 20세기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 탐구에서 한 절정을 이뤘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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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를 둘러보고 주변을 잠시 걸었다. 저녁 날씨가 선선해져서인지 대학로에는 젊은이들이 제법 북적거렸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지하철 혜화역으로 갔다. 퇴근하는 사람들로 역사는 붐볐다.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하루의 일과를 끝내서인지 표정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함석헌이 그토록 사랑하던 시민들의 세계, 장일순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던 시민들의 일상이었다. 나는 성큼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1901년 평안북도 용천 태생. 1989년 사망. 사상가이자 언론인,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그는 지난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음. 1960~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음.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포함해 저작집 30권이 있음. 장일순은 누구인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1994년 사망. 서울대에서 미학을 공부하다 6·25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원주로 돌아와 평생 농민운동과 공동체운동에 헌신한 사상가. 그의 생명사상은 김지하, 김종철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 주요 저서로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등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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