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왜 지금 ‘백제’인가?
이 물음은 즉답을 어렵게 하는 물음이다. 답이 어렵기 이전에 물음부터 어렵다. 물음 안에 무척 넓은 괄호가 쳐 있어서다. 괄호를 풀면 이렇다. ‘신라·고구려를 제쳐두고 왜 하필 백제인가?’ 여기서 백제는 신라의 지략과 고구려의 웅혼함, 그 어느 것도 없는 ‘결여의 백제’다. 다시 말해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질펀하면서도 남루한 기억만 즉자적으로 격발시키는 바로 그 나라.
그러나 이 물음은 이미 스스로 답을 내포하고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답 역시 물음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백제가 삼국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이며, 실제 백제의 모습은 의자왕과 삼천궁녀만으로 상징될 수 있는가? 백제에 대한 후대의 역사 기록이 훼손되거나 왜곡된 집단기억이라면, 그 훼손과 왜곡이 오늘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그리고 역사가 온전히 복원된다면 오늘 우리에게 다시 어떤 지적·정서적 영감을 줄까?
백제의 역사는 패자의 역사다. 같은 패자이면서도, 고구려는 호전성에서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압도한다. 승자의 역사와 남성성의 역사는 승패를 떠나 서로 우호적이다. 백제는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다. 한민족 역사에서 승자독식·우승열패의 신화가 에누리 없이 적용되는 타자 중의 타자다. 백제의 역사는 훼손과 왜곡을 넘어 의도적으로 말소됐고, 파편적 사실에 덧씌워진 이미지만이 역사인 양 그 빈자리를 채워왔다.
하지만 승자도 땅속의 유물과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세계의 기록만큼은 어찌하지 못했다. 1400년 동안 잠자던 역사는 지금 화려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1970년대 무령왕릉에서 90년대 금동대향로를 거쳐 2009년 미륵사지 금제사리호까지,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백제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지극히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에 남아 있는 숱한 백제 유물과 기록들은 뒤틀리고 삭제된 역사를 바로 펴고 복원하는 밑절미가 되고 있다.
백제가 당대 한반도에서 가장 우수한 문물과 문화를 꽃피웠을 뿐 아니라, 고대 ‘한류’ 바람을 일으켰던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중심축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묵은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백제인들은 협애한 지역 관념을 넘어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왕성하게 교통하던 세계시민 디오게네스였다는 사실도 쉽게 믿기지 않는다. 신라와 고구려뿐 아니라 한민족 역사를 통틀어 이런 국가 공동체가 또 있었던가.
그러나 이런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는다는 건 오늘날 세계화 시대를 산다는 우리가 백제(인)만큼도 폐쇄성과 배타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방증일지 모른다. 우리는 승자가 기록한 역사에 젖어 여전히 갈등과 대립, 패권의식에 매몰돼 있지는 않은가. 왜 지금 ‘백제’인가? 그래서 지금 백제다.
백제 깨어나다_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승자가 지워버린 패자의 역사… 알수록 빠져드는 매력
세기 후반, 장기간 지속되던 중국의 분열이 끝났다. 남조와 북조, 유연과 고구려를 각기 중심축으로 삼았던 4강의 시대가 끝나고 유일 초강대국 수나라가 등장한 것이다. 4강 사이에서 세력 균형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던 고구려로서도 불가항력이었다. 이때부터 동아시아 사회는 대살육의 시대로 접어든다. 수십만의 희생자를 낸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 그리고 당과 신라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 멸망은 장기간 지속되던 세력 균형 상태가 깨진 결과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의 칼로 살해하고 전쟁에 나간 계백, 중학생 나이밖에 안 된 아들 반굴에게 전쟁에 나가 죽을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 김흠순(김유신의 아우), 적군의 칼에 잘려 말 안장에 매달려 돌아온 아들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옷소매로 닦던 아버지 김품일. 이들의 비극은 당시 사람들이 처해 있던 현실이 얼마나 절박하고 그들의 선택이 또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로 희화화하거나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애국주의 교육의 소재로 삼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광경이다.
삼국통일…의자왕과 삼천궁녀 ‘탄생’
이 잔인한 살육의 시대에서 마지막 승자는 신라였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이들보다 100년 전에 이미 신라에 통합된 가야는 역사의 패자로 인식됐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삼국통일의 뒷면에는 이런 아픔이 스며 있다. 당시 관점에서 백제는 분명히 패자였다.
서기 660년 봄부터 백제의 도성 사비에서는 온갖 괴이한 일이 이어졌다. 백제의 멸망을 예고하는 사건들이었다. 왕도의 우물이 핏빛으로 바뀌는가 하면 귀신이 궁궐로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라고 외치는 등 수많은 기상이변과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과연 이 해에 당과 신라의 대규모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맥없이 무너졌다. 성충과 흥수의 충성심도 계백 장군의 희생도 백제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도성은 불타고 왕릉은 도굴되고 백성들은 죽거나 노비로 끌려갔다. 의자왕은 충신을 멀리하고 주색을 탐한 결과 나라를 망하게 한 어리석은 왕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 최후의 모습이다.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인의 강성함과 비장함, 김유신과 김춘추로 집약된 신라인의 호국정신과 비교할 때 백제의 이미지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게다가 고대 한국사 연구의 기초 자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백제에 대한 내용은 턱없이 부족하다. 일반 대중에게나 역사 연구자에게나 백제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 존재였다.
1971년 우연히 공주에서 무령왕 부부의 무덤이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면서 고구려·신라·가야와는 다른 백제 문화의 화려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1990년대에 풍납토성의 발굴 조사가 연이어 진행되면서 비로소 백제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온조와 비류가 정착한 지점이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한복판이었고 이곳에서 백제사가 수백 년간 지속됐다는 당연한 사실은 공주와 부여만이 백제사의 무대라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2007년 창왕(위덕왕)이 먼저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든 왕흥사지 사리기가 발견됐고, 2009년에는 무왕과 선화 공주의 사연이 얽혀 있는 미륵사지에서 호화찬란한 귀금속 사리기가 발견됐다. 나약함과 무력함으로 인식되던 백제 문화의 전혀 다른 면모가 드러난 것이다. 화려한 백제 문화의 부활이었다.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번지던 한류 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 수준도 ‘우리 민족 제일주의’ ‘우리 문화 최고주의’라는 협소하고 배타적인 틀을 넘어 아시아라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세계인을 지향하고 있다. ‘다문화가정’ ‘다문화사회’라는 단어도 이제 더는 낯설지 않다. 이 모든 흐름이 단군 이래 처음 겪는 일인 양 호들갑을 떨지만 실은 이미 1500년 전 백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3세기대부터 중국 왕조와 원거리 교섭을 추진한 백제인들은 풍납토성을 비롯한 많은 유적에 수백 점의 중국 물건을 남겼다. 중국 저장성의 월주요에서 구운 청자와 덕청요에서 구운 검은색 자기는 백제의 중앙은 물론이고 먼 지방의 수장묘에서도 발견된다.
4세기 이후 백제의 선진적인 문물은 이웃한 가야와 신라, 그리고 바다 건너 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중에는 백제의 원천 기술로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고구려나 중국, 멀리 서역에 기원을 둔 것도 적지 않다. 외부의 선진 문화를 수용해 자기 것으로 만든 뒤, 주변에 일종의 보급판을 확산시키는 데 백제인들은 탁월했다.
‘다문화’, 단군 이래 최초라는 착각
이런 능력은 백제 문화의 개방성에서 기인했다. 중국 역사책을 보면 백제 땅에는 중국인, 가야인, 일본인이 섞여 거주한다고 했다. 4세기 전반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쫓겨나면서 발생한 난민 중 많은 수가 백제에 정착했다. 일본 쪽 역사책에 따르면 태어난 곳은 일본이지만 평생 백제를 위해 활동한 장군과 관료가 여럿 나온다. 이렇듯 다문화사회가 형성될 수 있던 배경에는 백제인의 열린 자세가 깔려 있었다.
비단 중국이나 일본 출신만이 아니었다. 4세기 침류왕 때 처음 불교를 전한 호승 마라난타는 그 이름을 볼 때 인도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는 서울 강남 어딘가에 세워진 사찰에 거주했는데, 이때 어떤 형태로든 인도 문화가 소개됐을 것이다. 6세기 전반 중국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양나라의 도성인 남경을 무대로 세계 각지에서 온 사신들과 조우했다. <양직공도>라는 그림에 표현된 12개국의 사신 중에는 백제와 왜 이외에도 실크로드 지역의 구자국(구차), 현재의 이란 땅에 해당하는 파사국(페르시아) 사신이 포함돼 있었다. 백제와 서역의 만남은 이미 이때 이곳에서 이뤄진 것이다.
사비기에는 동남아시아 민족과도 교섭이 이뤄졌다. 일본 쪽 사서에 따르면 성왕은 인도차이나반도에 거주하던 크메르족의 재물과 노예 2명을 긴메이 천황에게 선물로 주었으며, 의자왕대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 백제 사신이 동남아에서 온 사신을 물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났다.
백제의 이런 원거리 교섭은 유적과 유물에 반영돼 있다. 무령왕릉의 구조는 직접적으로는 중국 남조의 벽돌 무덤을 모델로 삼았지만 아치형 구조물의 원류는 멀리 서쪽에 있다. 왕비의 금제 관식 무늬는 꽃병에서 곧게 뻗은 줄기에서 화사한 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인데 ‘삽화문’이라 불리는 이 무늬는 인도와 페르시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중국을 거쳐 백제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고대국가 중 글로벌화에 가장 접근한 것은 백제라고 할 수 있다.
고대의 한류
백제를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중심축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유는 선진 문물의 단순한 수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 널리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바다 건너 일본 고대 문명 형성에는 백제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각종 제도와 사상, 기술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달력, 음양오행, 풍수, 유학과 불교, 도교와 신선 사상, 의학, 약학, 문서 행정, 회화, 정원 조경술, 기와, 불상과 탑, 건물지로 구성된 사찰, 말의 사육, 유리와 금공제품 제작 기술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과 기술이 일본에 전래됐다.
일본 고분 시대 물질문화의 변동,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의 번영은 백제를 빼고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여러 형태를 띠었다. 당대의 최고 지식인·학자·기술자가 정해진 기간에 일본에 파견돼 활동한 뒤 기한이 다하면 귀국하거나 그대로 정착하기도 했고, 때로는 수십∼수백의 무리가 일본열도 곳곳에 정착해 현지인들과 살아가기도 했다.
그 결과 일본열도 곳곳에서 백제식의 가옥과 토기가 많이 발견됐다. 특히 ‘부뚜막’이란 새로운 난방 및 조리 시설을 갖춘 가옥에서 시루를 이용해 곡물을 쪄먹는 풍습은 백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제를 고향으로 두고 일본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죽어서도 고향식 무덤에 묻혔다. 금속제 장신구를 착용한 채 목관에 모셔진 주검을 굴식돌방무덤에 부부 단위로 나란히 안치하고 모형 부뚜막과 시루, 솥 등을 부장하는 풍습이 확인되면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도래인’, 즉 한반도계 이주민의 무덤이라고 인정한다. 이들의 고향이 한반도의 어디인지가 문제가 되는데, 대부분은 백제 지역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오사카와 나라를 비롯한 긴키 지역에 이주 정착한 백제인 수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의 수를 감안할 때, 그들 스스로 지금 일본에 있는지 백제에 있는지 모를 때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에는 한국인 거주지와 시장이 있고 전철만 타면 이곳저곳에서 한국어가 들리는데 고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곳곳에 코리아타운이 서 있고 충청도·전라도 말이 불쑥불쑥 들리는 그런 정황이었음이 틀림없다. 백제계 이주민들은 점차 일본 사회에 동화해나갔지만 그들이 가져온 새로운 기술과 학문, 사상과 정보는 일본 사회를 크게 변모시켰다.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도 백제식의 옷과 음식, 놀이, 장례 풍습이 유행해 가히 백제풍이 거세게 불었던 것이다.
문화강국, 지식대국
일본에서 백제풍이 거세게 분 이유는 백제 문화의 수준이 매우 세련되고 고급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추측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에 태자인 근구수를 도와 고구려와 전투를 치르던 막고해는 확전을 꾀하려는 태자를 말리면서 “도가의 말을 들어보니 족(足)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한다”라는 멋진 조언을 하고 있다. 일개 무장에 불과한 막고해가 이 정도라면 당시 지식인들의 학문적 수준은 얼마나 높았을까?
6세기 전반 중국 양나라에서는 ‘서성’ 왕희지의 글씨를 재현했다는 명필 소자운의 명성이 대단했다. 어느 날 소자운이 동양태수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는데 백제 사신이 나타나 글을 얻기를 청했다. 소자운은 배를 멈추고 3일간 30장의 글자를 써주고 금화 수백만을 받았다고 한다. 명필의 글씨를 받기 위해 바다 건너 남경에 들어가서 부임지로 가는 그를 몸으로 막으면서 거리낌 없이 막대한 돈을 지출할 정도로 백제인들은 서예에 열심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부여에서 사택지적비가 나오고, 익산에서 유려한 글씨에 심오한 내용의 사리봉안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력은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열세였을지 몰라도 문화적인 능력과 지식의 축적 수준은 백제가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군사력이 최고의 가치였던 대살육의 시대에 백제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21세기에는 백제의 국가 전략을 새롭게 평가할 만하다. 중국의 다민족통일국가론과 동북공정, 일본의 구석기 날조 사건과 고대 한-일 관계사 왜곡, 북한의 단군릉 발견과 대동강문화론 등은 모두 배타적 국수주의의 산물이다. 인구나 군사력에서 중국과 일본에 뒤지는 대한민국이 이들과 끊임없이 군사적 갈등을 감수하며 경쟁을 벌이는 것이 과연 현명한 대처일까? 역사분쟁이 역사전쟁으로, 역사전쟁이 영토분쟁으로 확산되는 흐름을 무책임하게 방조할 것인가?
지난 참여정부 시절 제시됐던 동북아균형자론은 비록 냉엄한 현실 외교에서 실패했지만 이런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고민은 고대에도 지금도 엄존한다. 대한민국의 21세기 국가 전략을 ‘군사강국’ ‘영토대국’으로 설정할 것인가, 아니면 ‘문화강국’ ‘지식대국’으로 설정할 것인가? 비록 1400년 전 백제는 실패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백제인의 전략을 다시 한번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대백제’라는 용어는 이런 점에서 재음미돼야 할 것이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국사학
백제 깨어나다_치밀한 전술 대응…승기 잡았지만 내부 반란에 당해
삼천궁녀는 사서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조선 중기 시인 민제인의
‘백마강부’란 시에
문학적인 수식어로
처음 등장할 뿐.
그리고 일제시대
대중가요 <백마강>의
애절한 곡조가
백제 망국과 묘하게
어우러져 대중에게
역사로 각인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전성기 때 느닷없이
망한 국가는
백제밖에 없다.
요절한 국가! 백제,
그리고 역사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의자왕!
이제 ‘삼천궁녀’와
‘호색한’으로 왜곡된
의자왕을 복권시켜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역사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왕은 누굴까?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광활한 만주 벌판을 확보한 광개토대왕이 아닐까? 그런데 이 두 대왕에 버금가는 인지도를 자랑하는 왕이 있다.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이다! 의자왕에게는 '대왕'이란 수식어는 없지만 '삼천궁녀'라는 수식어가 있다! 삼천궁녀와 의자왕!
삼천궁녀는 사서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백제가 멸망하고도 1천 년이 다 된 조선 중기 시인 민제인의 ‘백마강부’란 시에 문학적인 수식어로 처음 등장할 뿐. 그리고 일제시대 대중가요 <백마강>의 애절한 곡조가 식민지 조선의 비애와 백제 망국이 묘하게 어우러져 대중에게 역사로 각인된 것이다. 삼천궁녀는 없었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쩌랴? 삼천궁녀의 허구성을 아무리 강조하고 의자왕은 당시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었음을 상기해도 우리 머릿속엔 삼천궁녀의 치마폭에 휩싸여 방탕하게 놀고 있는 장년의 의자왕이 그려질 뿐! 그것은 망국의 왕이 안아야 할 숙명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660년 6월21일부터 7월18일까지는 가장 처절한 한 달이었다. 서해는 백제에 천연의 요새다. 서해를 건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틀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군수품이 지속적으로 지원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660년 당시 중국의 국력으로 대군이 바다를 건너 지속적인 군수품 보급 속에 백제 정벌을 감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버렸다. 당나라군이 산둥반도를 출발해 인천의 덕적도에 도착한 것은 660년 6월21일이었다. 5월26일 경주를 출발한 신라군 5만 명이 북쪽으로 진군해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도착한 것이 6월18일. 신라의 대군이 북상하는 걸 백제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신라 경내에서 북상하는 경로는 당연히 고구려를 공격할 진군로였다. 비상경계령 속에 백제군은 신라군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비 방어전은 최선책
당군은 6월21일 신라 함선 100척이 싣고 온 군수품을 보급받는다. 아무리 빨라야 6월23일께야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군과 먼저 싸우자는 주장과 신라군과 먼저 싸우자는 주장이 대립하고, 의자왕은 결론을 못 내린다. 이 대책회의는 두고두고 의자왕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용된다. 그러나 의자왕의 주저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신라나 백제가 동원 가능한 군대는 최대 5만 명이었고 실제 전투 병력은 3만 명 정도였다. 백제군 5만 명은 전통적인 5방 방어 체계에 따라 지방에 주둔했다. 당군이 어디로 상륙할지 모르는 상태였고, 동서 양쪽으로 진격하는 나당 연합군의 양동전도 백제군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곤란하게 했다. 군대를 나누자니 그나마 부족한 전력이 더 부족해지고, 한쪽으로 집중하자니 다른 쪽에 치명적인 허점을 보이게 된다. 평생을 전장에서 단련된 백전노장 의자왕도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나당 연합군은 예측을 뛰어넘는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당군은 뱃길로 하루면 백제의 어디든 상륙할 수 있었고, 신라군은 매일 20km를 강행군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한국전 때 서울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오던 속도에 맞먹는 진군 속도였다. 삼국시대의 보편적 전술은 거점성 점령 뒤 주변을 평정하고 차근차근 진군하는 것이었다. 성을 두고 전진했다가는 보급로가 차단돼 싸우기도 전에 굶어 죽는다. 그러나 신라군은 고대 전투의 기본을 무시해버렸다. 수나라 100만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요동에서 평양까지 늘어선 성을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그러자 별동대 30만 명으로 수도 평양을 직공하다 전원 몰살당한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신라 5만 대군은 수나라 별동대가 사용한 전술을 구사했다. 이 전쟁의 목표는 영토 확장이 아니라 백제 멸망이었기 때문에 백제군의 중간 방어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사비성으로 내달리는 전술을 택한다. 짧은 시간 안에 의자왕을 체포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전술이었지만 당군 13만 명이 있기에 해볼 만한 작전이었다.
나당 연합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의자왕은 신라군 없이는 당군이 섣불리 싸우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한다. 지방에 있는 5방군이 사비로 집결할 때까지 신라군을 사비 외곽에 묶어두기만 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의자왕은 계백의 5천 결사대에 신라군 저지 임무를 맡긴다. 서쪽의 13만 당군 때문에 더 이상 빼내는 것은 위험했다. 계백은 백제가 이기든 지든 자신들은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충남 논산시 연산면의 황산벌에 진을 친다. 소수의 병력이 들판에서 대군을 맞이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지만 계백은 고육지책을 사용한 것이다. 10 대 1, 절대 열세지만 백제군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었다. 신라군의 진군을 막기만 하면 됐기에 계백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비장미 넘친 황산벌 전투
660년 7월9일부터 10일까지 황산벌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그러나 5만 신라군은 죽기로 버티는 백제 5천 결사대의 철벽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다. 5천 결사대의 처절한 투혼은 신라군의 파상 공세를 네 번이나 막아냈다. 이렇게 되자 7월10일 사비 남에서 당군을 만나기로 한 김유신은 다급해졌다. 김유신은 어린 관창을 사지로 몰아넣어 신라군을 충동시키는 극약 처방을 내린다. 신라군은 진법이고 뭐고 필요 없이 일시에 5만 대군으로 백제군을 덮쳤을 것이다. 말 그대로 짓밟고 진군하지 않았을까? 이 전술은 아군의 피해도 막대하기 때문에 가장 하책이지만 당시 신라군의 처지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황산벌 전투는 우리 역사에서 극적인 긴장도가 가장 높고 장엄한 비장미가 넘친다. 논산시에서 백제문화제 기간 중에 대규모 황산벌 전투를 공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대단히 재미있고 스케일도 있는 공연이었다. 잘만 다듬으면 세계적인 공연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멸망 당시 황산벌 전투보다 더 큰 전투는 당군과의 전투였다. 계백의 5천 결사대는 백제 주력군은 아니었다. 의자왕은 주력군을 13만 당군 쪽으로 배치한다. 황산벌에서 전투가 벌어진 7월9일 당군은 금강 하구의 기벌포로 상륙했다. 최전방에는 버드나무로 짠 자리를 펼쳐든 신라수군이 앞장섰다. 당군은 백제군의 저지를 뚫고 버들자리를 딛고 갯벌을 통과해 상륙에 성공한다. 7월10일 백제군은 사비 남쪽에서 다시 한번 당군과 결전을 벌이지만 1만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한다. 사실상 사비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다. 7월11일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하고 7월12일 사비의 외곽성인 나성이 무너지고 왕궁이 포위당한다. 결국 개전 5일째인 7월13일 의자왕은 사비 방어전을 포기하고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지휘부를 옮겨 2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그날 밤 사비도성은 나당 연합군에 함락됐다.
웅진성에 2차 방어선 구축
대규모 나당 연합군을 방어하기엔 웅진성은 효과적이었다. 지금 공주의 공산성인 웅진성은 험준한 벼랑과 백마강으로 삼면이 둘러싸여 농성전에는 적격이다. 또 예산의 임존성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도 유리한 상황이다. 임존성은 훗날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과 3년 동안 싸울 때 마지막까지 버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의자왕은 웅진성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임존성과 함께 나당 연합군을 견제하면서 전력이 보존돼 있는 지방군이 나당 연합군을 4면에서 포위해 공격해오기를 기다렸다. 지형지물에 익숙한 백제군이 나당 연합군을 분산시키고 유격전을 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급해진 것은 오히려 나당 연합군이었다. 개전 5일 만에 사비도성을 함락했지만 연합군 지휘부는 의자왕을 놓치는 결정적인 실패를 했다. 의자왕은 18만 대군을 깊숙이 끌어들인 뒤 웅진으로 피해버린 것이다. 나당 연합군에 또 하나 큰 위협은 18만 대군의 식량이었다. 전투 중에 사비도성의 백제군 군량은 불타버렸다. 그런데 신라에서 오는 보급품은 동쪽 백제 국경의 산성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도성을 목표로 신속히 진군한 탓에 산성에 농성 중인 백제 병력이 건재했고, 이들은 연합군의 보급 통로를 봉쇄한다. 실제 훗날 백제 부흥군이 이곳을 차단해 사비의 2만 명도 안 되는 당군이 식량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고, 이 보급로를 뚫기 위해 당군 1천 명이 공격에 나섰다가 전멸한 적이 있다. 18만 나당 연합군은 의자왕을 웅진성에 가두었지만 그들 역시 사비와 공주에 갇힌 신세가 돼가고 있었다. 이제 시간은 의자왕의 편이었다.
측근에 사로잡힌 의자왕의 자결 시도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농성전을 이끌고 있을 때 웅진방어사령부의 실질적인 지휘관은 웅진방령 예식 장군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전 10일째인 660년 7월18일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의자왕이 항복하는 상황에 대해 “의자왕 및 태자 효가 제 성주들과 함께 항복했다”(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라고 기록하고 신라본기에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다”(義慈率 太子及雄鎭方領軍等. 自雄津城來降)고 돼 있다. 그런데 <신당서>에는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고 했고 <삼국사기>보다 200년 앞선 945년에 편찬된 <구당서>에도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라고 기록했다. 특이하게도 의자왕이 항복하는 장면을 서술하는 데 <구당서> <신당서> 모두 의자왕이 주체가 아니라 부하인 예식이 주체로 돼 있다. 사서는 중요한 사람 중심으로 기록한다. 특히 왕이 관련된 기사라면 당연히 왕 중심으로 서술한다. <구당서> <신당서> 모두 왕 중심이 아니라 예식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은 예식이 뭔가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구당서> 기록의 의자왕 항복 기사 바로 뒤 융의 기사를 보자.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 太子隆幷與諸城主皆同送款”(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와서 항복했고 태자 융은 여러 성주들과 함께…)라고 태자 융이 주체로 기록돼 어색함이 없다. 그런데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독특하게 서술했다. “웅진성의 수성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여 가니라….” 의자왕이 측근인 수성대장 예식에게 잡혔다? 신채호 선생의 말뜻은 무엇일까?
‘又將義慈來降’을 분석해보자. ‘又’는 또, ‘降’은 항복하다. 그러면 ‘將’만 남는다. 모든 상황은 將이라는 글자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왕을 將해와서 항복했다? 將은 무슨 뜻일까? 將자에는 명사로서 ‘장수’, 동사로서 ‘거느리다’ ‘데리고 간다’라는 의미가 있다. 문장으로 봐서는 동사로 해석해야 한다.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 예식 장군이 의자왕을 데리고 가다? 왕을 데리고 가다? 무슨 뜻일까? 체포하다? 한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국 역사학자 바이근싱 산시대학 교수는 여기서 ‘데리고’는 ‘왕을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했다’는 뜻이라고 단언한다. 충격적인 해석이다.
당나라 대장군이 된 예식의 묘 발견
그런데 이 해석에 힘을 싣는 한 점의 묘지명이 2008년 중국 시안에서 발견됐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3품의 고위직을 지낸 예식진이었고, 할아버지 예다와 아버지 사선 모두 백제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유력 가문 출신이다. 백제 614년에 태어나 672년 58살의 나이로 사망한 예식진은 백제 웅천, 즉 현 충남 공주 출신이라고 기록돼 있다. 바로 이 예식진이 웅진의 그 대장 예식이다. 웅진 성주 예식 장군은 18만 대군의 공격 앞에 고민 끝에 의자왕을 압박해 당군에 항복하고 그 공로로 당나라에 들어가 대장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의 허망한 항복의 이면에는 하극상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많은 국가가 망했지만 모두 국력이 쇠해 망했다. 그런데 백제만이 전성기 때 느닷없이 망해버렸다. 요절한 국가! 백제, 그리고 역사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의자왕! 예나 지금이나 전력이 비교되지 않는 국가 간의 전투는 일방적인 결과를 낳는다. 굳이 의자왕의 책임을 묻자면 대국인 당나라의 비위를 거스른 정도가 아닐까? 망국의 책임이면 족하다. 이제 ‘삼천궁녀’와 ‘호색한’으로 왜곡된 의자왕을 복권시켜야 하지 않을까?
류지열 한국방송 <역사 스페셜> PD
백제 깨어나다_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금동대향로·왕흥사 사리함·미륵사 서탑 사리호 등 아름다움의 구체화
우리 문화에 조금이라도 상식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백제의 아름다움에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 품위 있고 우아하고 부드럽고 친숙한 느낌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백제 미술을 상징하는 부여 정림사터 5층 석탑 앞에 서면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 보내는 찬사보다 황량한 배경에 덩그러니 서 있는 쓸쓸함을 먼저 말하며, 백제 성왕·위덕왕·무왕 시절의 찬란한 전성기 문화보다 의자왕 시절 패망에 이르는 아픈 기억을 먼저 새기곤 한다.
그동안 백제 유물 중에는 웅혼한 기상이 깃든 고구려의 고분벽화, 화려한 금관이 있는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 신라에 걸맞은 구체적 이미지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발굴된 아름다운 향로와 사리함이라는 금속공예품들로 우리는 이제 ‘백제미’에 대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베일 헤치며 나타난 무령왕릉
베일 속에 가려진 백제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1971년에 발견된 무령왕릉이었다. 이는 해방 뒤 우리나라 고고학과 미술사의 최대 성과로, 여기서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기록(매지권)과 함께 금관을 비롯해 총 108종 2906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일제시대 도굴로 실체를 잃었던 백제 고분미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쾌거였다.
그러나 무령왕릉의 유물들은 백제 아름다움의 보편적 이미지만 전해주었지 딱히 한 점으로 백제를 대변할 유물은 없었다. 그러다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 바로 곁에 있는 능사(陵寺)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런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6세기 후반 위덕왕 때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규모가 크고 기법이 완벽한데다, 대상의 묘사가 정확하며, 상징적 내용이 풍부한 백제미의 진수로 동시대 중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향로는 높이 64cm, 무게 11.8kg으로 다른 향로보다 두 배 크기이며, 봉황이 올라앉아 있는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용이 입에 물어 올리는 모습이다.
용은 힘껏 용트림을 하고 있고, 봉황은 한껏 날갯짓을 하려는 순간을 포착했다. 대단한 동감이 일어난다. 이에 반해 몸체와 뚜껑으로 이뤄진 꽃봉오리는 풍만하면서도 팽팽한 볼륨감이 넘친다. 정(靜)과 동(動)의 절묘한 조화다. 뚜껑에는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불사조·물고기·사슴·학 등 동물이 26마리, 네댓 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25개 산봉우리. 거기에는 산길, 계곡, 폭포, 호수가 있다. 솔숲이 6곳, 바위가 12곳이다.
산봉우리에는 피리·비파·거문고·북 등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이 있고, 또 봉황·용·호랑이·사슴 등 상상과 현실 세계 동물 39마리가 들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약 100가지 도상은 백제인의 관념 속에 들어 있던 신선 세계의 모습이다.
금동대향로의 충격과 감동
이 향로는 기본적으로 한나라 때부터 유행한 박산향로(博山香爐)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박산이란 동쪽 바다 한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았다는 삼신산, 즉 봉래산·영주산·방장산을 말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런 도교적인 상징성의 박산향로를 불교적 이미지인 연꽃과 결합시키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공예는 ‘용’(用)과 ‘미’(美)로 이뤄진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쓰임새에서도 아주 뛰어나다. 향로 뚜껑의 산봉우리 뒤에는 10개의 구멍이 있어 향을 피우고 뚜껑을 닫으면 향 줄기가 구멍을 통해 피어오르게 돼 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됐을 때 일부에서는 이 유물이 과연 백제에서 제작된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에 걸맞은 백제의 다른 유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7년 부여 왕흥사터에서 금·은·동 한 세트의 아름다운 사리함이 명문과 함께 발견되고, 2009년에는 익산 미륵사 서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더없이 화려한 금사리호가 출토되면서 그런 의심은 일거에 가시게 되었다.
백마강 구드레 나루터 건너편에 있는 왕흥사터에서 발견된 금·은·동 사리함에는 577년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우고 사리를 모셨다는 글씨가 새겨 있어 누구도 백제의 유물임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미륵사 서탑 사리호에서는 총 194자가 새겨진 금제사리봉영기도 함께 출토됐는데, 내용은 무왕 40년(639)에 왕후인 사택적덕의 따님이 봉안했다는 것이다.
왕흥사 사리함은 아주 단아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동사리함은 소박하고, 은사리함은 듬직하며, 금사리함은 고귀한 자태를 자랑한다. 단순한 디자인 같지만 그 심플한 멋에서 다가오는 우아함과 품위에는 현대 금속공예도 따를 수 없는 세련미가 있다.
화려하면서 사치스럽지 않은
이에 비해 익산 미륵사 서탑의 사리호는 말할 수 없이 화려하다. 몸체에는 환상적인 인동초와 넝쿨무늬를 배열하면서 여백에는 어자무늬(魚子紋)라는 물고기 알 모양의 작은 동그라미를 촘촘히 넣었다. 무늬의 구성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새김 기법도 점·선·면의 처리를 능숙하게 구사해 더없이 세밀하고 화려하다.
왕흥사터 사리함에 고전적인 기품이 있었다면 이 미륵사지 서탑 사리호에는 바로크적인 과장과 화려함이 넘쳐난다. 이제 어느 누구도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술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름다움에 대한 재인식까지 생겼다.
1965년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에서 출토된 금사리함과 유리 사리병은 아름다운 형태미와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새김으로 그동안 우리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사리함으로 손꼽히며 대개 통일신라의 유물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사리함 몸체에 연꽃과 넝쿨무늬를 면새김으로 처리한 것과 바탕무늬로 동그라미를 장식한 것, 그리고 이파리 3개가 난 연꽃잎과 어자무늬는 미륵사 서탑 사리호와 거의 한 솜씨로 보일 정도다. 이제 미술사가들은 백제의 유물로 고쳐 생각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백제금동대향로, 왕흥사 사리함, 미륵사 서탑 사리호, 왕궁리 석탑 사리함과 사리병 등을 통해 구체적인 백제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가지며 이에 대해 무한한 경의를 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찾아낸 백제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온조왕 15년(기원전 4)에 위례성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면서 표현한 다음과 같은 여덟 글자 속에 들어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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