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인물로 본 한국역사

醉月 2012. 1. 3. 13:24

장 규 식

1. 단군과 기자 : 신화·전설과 역사
2.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3. 김부식과 일연
4. 정몽주와 정도전
5. 세종대왕과 장영실
6. 신사임당과 황진이
7. 광해군과 강홍립
8. 정약용과 이항로
9. 홍경래와 최제우
10. 흥선대원군과 김옥균
11. 김구와 안중근
12. 김마리아와 유관순

1. 단군신화와 고조선
ㅇ단군신화 : 문헌상에 나타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신화

 

ㅇ단군전승 : 강화도 마리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오는 참성단(塹城壇)이 있다. 또 전등사 뒷산에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삼랑성지(三郞城址)가 있다. 그리고 황해도 구월산에는 (고려 초기부터) 환인·환웅·단군 3위에 대해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삼성사(三聖祠) 옛터가 있다. 단군이 승천한 곳이라는 패엽사의 단군대(檀君臺), 단군의 왕도였다는 신천군 산천면의 장장평(莊莊坪) 벌판 등 단군에 관한 전승 ... 그밖에 평양에는 (세종대에 왕명으로 세워진) 단군사(檀君祠)가 있었고, 평남 강동에는 단군묘(檀君墓)라고 전하는 큰 무덤이 있었던 기록도 있다.

 

ㅇ과연 단군은 실재했고,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사의 출발점인가?
신화는 계급사회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관념형태 - 신화세계의 주인공은 신과 그 자손들, 그러나 거기에는 인간이 자연계와 맺고 있던 관계 또는 인간 상호간의 사회관계가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신화에는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이 직접 기록되어 있다기 보다는, 인간의 오랜 역사경험이 신비적 사고에 바탕을 둔 신화의 형태로 상징화되어 표현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三國遺事} 卷1 紀異 第2 古朝鮮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나간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를 조선이라 하니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 하였으며,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어 자주 나라를 다스려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지망하더니,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三危太伯) 땅을 내려다 보매 인간들에게 크나큰 이익을 줄 만한지라[弘益人間]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어 여기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오니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고 그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들로써 농사와 수명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을 맡게 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이 때 환웅은 영험있는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은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쉽게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 먹고 스무하루 동안 조심하여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조심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상대가 없으므로 매양 신단수 아래에 와서 어린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50년 경인(庚寅)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하는데, 1천 5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己卯: B.C.1122)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그 때 나이 1908세였다"라고 하였다.

 

ㅇ이승휴의 {제왕운기}(1287)에도 비슷한 내용의 단군신화가 실려 있다. 다만 단웅(檀雄)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셔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시켜 단군이 태어났다고 한 점, "신라·고구려·남북옥저·동북부여·예맥이 모두 단군의 후예이다"라고 덧붙인 점에서 {삼국유사}(1281)와 약간 차이가 있다. 또한 조선시기 역사서에는 모두 단군이 직접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역사인식의 변화에 따라 변형된 부분. 따라서 단군신화 본래의 특징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내용에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ㅇ{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의 중심 구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天神族) 환웅과 지상의 웅녀가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천강신화(天降神話)는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산동성 가상현 무씨사당 석실 화상석 - AD 147년 건립, 단군신화와 비슷한 내용의 벽화)
- 환인: 천신·태양신을 상징. 환인이라는 용어 자체는 산스크리트어의 Sakrodevendrah를 한역(漢譯)한 釋帝桓因陀羅(東方護法神)에 어원을 둔 것으로, 불교의 영향을 보여준다.
- 환웅의 하강: 외래집단의 이주 정착
- 3개의 천부인: 청동기의 사용과 정치권력자의 등장
- 풍백 우사 운사: 바람·비·구름의 관장은 농경에 대한 관심을,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 360여 사를 주관하였다는 대목은 사회분화에 의한 공적 강제력의 발생을 의미
- 신단수: 제단, 거목숭배 신앙, 애니미즘의 흔적. 단군이 뒤에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은, 후세의 산신신앙에 의해 윤색 가필된 부분
- 환웅과 곰, 호랑이의 관계: 환웅은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곰과 호랑이로 상징되는 토착집단으로 하여금 자신의 새로운 질서에 적응케 하려고 시도. 곰은 땅의 신이나 여성을 뜻하는 것으로, 환웅과 결합하게 된 선주민 정치집단을 상징 - 여러집단이 무력에 의한 정복과 통합을 행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성립하던 역사적 상황을 반영. 천손족(우세한 물질문명의 이주민)에 의한 토착집단 지배 복속
- 단군왕검: '단군'은 무당 또는 하늘을 뜻하는 몽고어 '텐그리'와 서로 통하며 '제사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임금' -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고유명사라기 보다는 보통명사).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천부인 3개를 권위의 상징으로 삼아 종교행사를 주관하면서 현실사회를 지배
- 단군의 조선 건국연대: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庚寅)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이라고 일컬었다는 주장은, 중국문화와 다른 우리 문화의 독자적 전통이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 현재까지의 연구성과에 따른다면 실제와는 1,000년 이상의 시차가 존재
- 단군신화, 오랜 세월의 전승 과정을 거치며 도교나 불교 또는 유교적 사고방식에 맞게 재해석되거나 윤색

2) '기자동래설'의 진실
ㅇ평양에는 기자묘(箕子墓)라고 전해지는 무덤과 기자가 실시했다고 하는 정전제(井田制)의 옛 터가 남아있다. 또한 한씨(韓氏)·기씨(奇氏)·선우씨(鮮于氏)의 족보에는 기자가 시조로 되어 있다. 고려·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 전설'을 그대로 믿고, 기자를 우리나라에 예의범절을 가르친 성현으로 숭배하면서, 평양에 기자묘(箕子廟)를 세워 기자의 교화를 입은 문화국가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기도 했다(小中華 의식).
ㅇ기자가 동쪽으로 와 조선에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는 최초의 책은 한(漢)나라 때 씌어진 {상서대전(尙書大全)}이다. 이후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반고의 {한서(漢書)}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렸는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은(殷)나라 말엽에 기자(箕子)라는 현인(賢人)이 있었는데, 주왕(紂王)의 폭정을 말리다가 투옥되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풀어주자, 그는 곧 조선으로 도망하였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무왕은 그를 조선후(朝鮮候)로 책봉하였다. 기자는 조선의 제도와 문화를 발전시켰고, 범금(犯禁) 8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그것을 지키도록 계몽하였다. 후에 기자는 무왕을 찾아가서 '홍범구주(弘範九疇)'를 전수하여 통치의 기본 규범으로 삼도록 권유하였다. 기원전 194년 위만(衛滿)에 의해 쫓겨난 조선의 준왕(準王)은 기자의 후예이다.
ㅇ'기자동래(箕子東來)' 전설을 기록한 중국측 문헌들은 모두 BC 3세기 이후에 씌어진 것들, 기자는 BC 1000년 전후에 살았던 인물. BC 3세기 이전에 저술된 {논어(論語)}나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주 무왕대에 '기자가 살았다'는 기사만 나타나고,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또 기자의 무덤이 하남성(河南省) 또는 산동성(山東省)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고조선 등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비파형·세형동검)는 그 계통상 황하(黃河) 유역의 그것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ㅇ'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것은 BC 3~2세기 무렵 한나라 사람들이 꾸며낸 전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그 교화를 받아 주변 오랑캐들이 문명개화하였다는 '중화사상'은 한나라 때 성립되었다. 기자동래 전설도 아마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한 무제는 BC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그 곳에 한 4군을 설치하였으나, 토착세력들의 반발로 설치 26년만에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고조선 침략을 정당화하여 고조선인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시도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목적에서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전설을 만들어 내었을 가능성이 크다.
ㅇ기자는 기국(箕國)의 제후?
기자가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의 제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 견해는 중국 고대의 문헌 내용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주나라 초기 제후국으로 '기국'이 있었고, '기자'가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장래 문제를 논한 대목이 나온다. 또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나라 고대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었다는 사실이 전한다. 한편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기자가 양국(梁國) 몽현(蒙縣)에서 죽었고, 거기에 그의 묘가 전해진다"고 하였다. 또 기후(箕候)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나라 초에 연후(燕候)를 따라 북방정복 활동에 종사하다가 후에 산서(山西)에서 산동(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고, 한때 주나라 소공(召公)을 따라 북방정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기국의 존재는 고고학 유물을 통해 실제로 확인할 수 있으며, 갑골문에서도 '기후'의 존재가 확인된다.
ㅇ기자족의 동방이동설?
1970년대 이후 한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 기자를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주나라 계통과 구별되는 동이족의 일파로 보고, 기자집단이 초기에 화북지방에 있다가 뒤에 점차 동으로 조선방면까지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형성하였다고 주장. 이들은 은이 망한 시기나 주가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를 전후한 격동기에, 기자집단이 북중국→남만주→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우고 한반도에 청동기 문화를 보급하였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황하 계통의 청동기 문화를 소유한 종족이 요동지방이나 한반도로 이동하였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다. 또한 문헌상으로도 기씨 일족이 산동반도 동쪽에 있다가 주나라 소공을 따라 북방정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동쪽으로 이동한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평양의 기자 정전 유적도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의 방리(坊里)를 구획했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은의 유민 또는 산동반도에 거주하던 동이족이 고조선으로 이동해왔을 가능성은 있다. '기자동래설'은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을 것이다.
ㅇ기자-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 국적을 따지고 국경을 따지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일 뿐, 당시에는 그러한 구분이 모호했고, 굳이 따질 필요도 없었다. 우리 역사의 초창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서 다양한 종족적·문화적 요소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로 흡수 통일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우리 민족, 우리 문화가 성립하였다.

 

2.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三國史記} 권 45, 열전 제5 '온달(溫達)'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平原王, 559~590) 때 사람이다. 용모는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고왔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발로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바보 온달(愚溫達)'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딸이 어려서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노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도 사대부(士大夫)의 아내 노릇은 못할 것같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겠다."하며 매양 말하였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上部: 東部)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려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희언(戱言)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은 그릇된 것이니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노하여 "네가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단연코 내 딸이 될 수 없다. 같이 살아서 무엇 하느냐. 네 갈 데로 가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값진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에 차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바로 그 집에 이르렀다. 앞 못보는 노모(老母)가 있는 것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아들의 행방을 물으미, 노모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또 배운 것이 없어 귀인(貴人)이 가까이 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꽃다운 향기가 나고, 손목을 잡아보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소. 필시 천하의 귀인일 터인데 누구의 꾀임을 입어 여기에 왔소? 우리 아들은 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하였다.

 

공주가 나와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속에 품은 바를 말하니, 온달은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것이니 내 곁으로 오지 말라." 하고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갔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온달의 집 사립문 밖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다시 들어가서 모자(母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니,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모친이 말하기를 "우리 아들이 지극히 천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살 곳이 못 되오." 하였다. 공주가 대답하되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재봉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부귀한 뒤에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가졌던 금팔찌를 팔아 전택(田宅)과 노비(奴婢)와 우마(牛馬)와 기물(器物)을 사들여 살림을 두루 갖췄다. 처음 말을 살 적에 공주는 온달에게 "아무쪼록 장사꾼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로 병들고 여위어 버려진 것을 골라 값을 치러야 합니다." 하고 부탁하니, 온달은 그대로 따랐다. 공주가 부지런히 사육하니 말이 날로 살이 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 되면 낙랑벌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신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을 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자신이 기른 말을 타고 따라 나섰는데, 언제나 앞에 서서 달리고 잡은 짐승도 많아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이름을 묻고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이 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요동(遼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 들판에서 맞서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래게 적군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군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들이쳐서 크게 이겼다. 전공을 논할 때 온달의 공이 제일이라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왕이 온달을 칭찬하면서 "이 사람은 나의 사위라" 하고는 예를 갖추어 맞아들인 다음, 대형(大兄)의 벼슬을 내렸다. 이로부터 왕의 은총과 영화가 더욱 두터워져, 온달의 위엄과 권세는 날로 성하였다.

 

그 후 양강왕(陽岡王:  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수(漢水) 이북의 땅을 빼앗아 저희들의 군현으로 삼았으니, 백성들이 원통히 여겨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을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내주신다면 한 걸음에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온달은 출전할 적에 "계립현(鷄立峴: 鳥嶺)과 죽령(竹嶺) 이서(以西: 以北)의 땅을 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드디어 길을 떠나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였는데,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가 이미 결판났으니, 아아! 편히 돌아가시라." 하니, 그제야 관이 들리어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 하였다.

 

ㅇ온달설화의 구성
온달설화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반부는 평가공주가 궁궐을 나와 온달과 결혼하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공주의 도움으로 무예를 닦은 온달이 무인으로 출세한 뒤 활약상을 담고 있다. 전반부가 설화적 내용이 짙은 반면에, 후반부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ㅇ온달은 실존인물인가?
적어도 신라와의 전투에서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한 온달은 역사상 실존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온달전의 기록에 따르면, 온달은 매년 3월 3일에 열리는 봄철 수렵행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여 평원왕의 눈길을 끌고, 북주의 침략 때 큰 공을 세워 마침내 대형이라는 벼슬과 함께 사위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영양왕 때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고구려가 처한 국제정세를 보면 이러한 온달의 행적은 충분히 있음직하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그는, 아마도 한강유역 회복이라는 당시 고구려의 숙원을 실현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만큼, 그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행적은 일종의 영웅담으로 윤색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 점차 하나의 설화로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ㅇ온달은 과연 공주와 결혼하였는가?
우리는 온달설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찾아내야 한다.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온달이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평원왕의 사위라는 사실도 허구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설화적으로 윤색된다고 해도, 공주와 결혼한다는 이야기가 그렇게 쉽사리 꾸며질 수 있는 성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신분제에 비추어 볼 때 온달이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명문 귀족 출신으로 보기도 어렵다. 적어도 그가 평원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낮은 신분(하급 귀족?)이었을 것이다. 이 점은 그가 북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고 정식으로 왕의 사위로 인정받은 뒤에야 겨우 7위에 해당하는 대형벼슬에 오른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온달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설화에는 온달이 공주와 결혼한 후 무공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북주와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결혼이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화제거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점차 가난한 '바보' 온달이 '울보' 공주와 결혼한 것으로 드라마틱하게 윤색되었을 것이다.

 

ㅇ온달설화의 역사적 배경 - AD 6세기 무렵의 삼국사회 : 4세기 이후 삼국사회는 철제 농기구와 소에 쟁기를 메어 논밭을 가는 우경이 널리 보급되고, 수리 관개시설이 확충되면서 커다란 사회변동을 경험하고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달하였고, 잉여생산물과 잉여노동력의 증대는 물자의 교환을 촉진시켜 상업과 수공업도 급속도의 발전을 보았다.
신라의 경우 소지마립간 때인 487년 사방으로 郵驛을 설치하고 도로를 정비하였으며, 490년에는 처음으로 왕경에 시장을 개설하였다. 또한 이 시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다양하고 호화로운 유물들은 당시 수공업의 발전 수준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농업 및 상업·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호민과 하호로 이루어진 기존의 읍락사회는 그 기반에서부터 서서히 해체되어 갔다.

 

ㅇ온달설화를 통해본 삼국항쟁기의 사회상
- 온달설화에는 왕과 공주 / 평강공주와 혼담이 오갔던 상부(上部: 東部) 고씨(高氏)같은 명문 귀족 / 온달처럼 무공으로 관직을 얻어 하급 귀족으로 진출한 계층 / 온달이 공주와 결혼하여 황금 팔찌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새로 부를 축적한 계층 / 온달처럼 밥을 빌어먹는 가난한 평민 / 평강공주의 금팔찌를 팔아 샀다고 하는 노비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 온달이 매우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독자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 :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와 우경의 보급으로 경작능력이 향상되면서 개별 가호 단위의 경제적 자립성이 이전보다 높아졌으며, 개별 가호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도 진전되었다. 그리하여 개별 경리의 주체로서 개개 가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 온달이 공주의 금팔찌를 팔아 전택과 노비와 우마 등 살림살이를 마련하였다는 이야기 : 전답이나 노비, 가축 등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어 갔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개별 경리의 성장과정에서, 소와 농기구를 소유한 계층은 이를 기반으로 상당한 토지와 부를 소유한 부호농민으로 성장해 갔으나, 그렇지 못한 계층은 토지를 상실하고 부민층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거나 노비 또는 유망민으로 전락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공주를 만나기 전, 밥을 빌어 먹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온달도 그러한 존재였다.
한편 온달이 황금을 횡재하여 부자가 된 것처럼 묘사된 대목은, 하호적 위치에 있던 농민 또는 상인들 가운데 당시 사회경제적 변동에 재빨리 적응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계층이 나타났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황금이 시장에서 공공연히 거래되는 부분은, 황금이 더 이상 최고 신분층의 권위와 위엄의 상징 내지는 향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11년(144)조에는 민간에서 金銀珠玉의 사용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황금이 시장에서 매매되고 다른 물건으로 교환되는, 신분적 의미보다 경제적 교환가치를 갖는 재화로서 민간에 통용된다는 것은 실로 커다란 변화라 아니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황금의 수요층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온달처럼 새로이 부를 축적하며 성장하는 부민층이 황금의 또다른 수요층으로 등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 무왕과 관련된 서동 설화({三國遺事} 奇異篇) : 서동이 퍼뜨린 거짓 노래 때문에 궁궐에서 쫓겨나 서동과 결혼한 선화공주가 궁에서 갖고 나온 황금을 팔아 살림살이를 마련하려 했을 때, 서동은 비로소 마를 캐던 데 산더미처럼 쌓아둔 돌덩이가 황금임을 알게 된다. 선화공주로부터 황금이 한평생을 부자로 살 수 있는 세상에 다시 없는 보물임을 깨닫게 된 서동은 그것을 장인인 신라 진평왕에게 보내 신임을 얻고, 뒤에 백제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 온달이 뛰어난 무예로 전공을 세워 출세한 이야기 :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부민층이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정치적 진출과 신분 상승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당시는 국왕이 율령의 반포 등을 통해 관료체제를 정비 확대하면서, 새로운 사회세력들을 끌어들여 집권적 지배체제를 구축해 나가던 때였다. 또한 삼국항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출중한 장수들을 다수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부민층이 국가 지배세력 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관료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만 했다.
{구당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책읽기를 좋아한 고구려 사람들은 미천한 집안까지도 거리마다 경당이라는 큰 집을 지어놓고 자제들이 결혼할 때까지 이곳에서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를 닦고 독서를 통해 유교적 소양을 길렀다고 한다. 이 경당에서 중심이 되었던 사람은 의당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민층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경당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쌓고, 온달전의 내용처럼 수렵행사나 대외전쟁을 통해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여 관료로서 진출을 꾀했을 것이다. 온달이 왕의 사위가 되었다거나 대형의 벼슬에 올랐다는 것은 적어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열려있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였다.

3. 김부식과 일연
ㅇ 김부식(金富軾 : 1075~1151)
고려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김부식은 문종 29년(1075)에 태어나, 고려 문벌귀족사회가 그 절정을 구가하던 문종·예종·인종대를 거쳐, 의종 5년(1151) 네 왕대(王代)에 걸친 77년의 삶을 마감하였다. 생애의 전반부에는 개경 문단을 좌지우지하며 문사로서 이름을 날렸고, 50대 이후 안으로 문벌귀족간의 갈등이 첨예해지고, 밖으로 여진족 금의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던 시기에는 개경파의 영수로서 묘청의 서경전역을 진압하며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였다. 만년(70세 전후)에 감수국사로서 {삼국사기}를 편찬

 

① 가계와 정계진출
김부식은 경주 김씨 신라왕실의 후예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은 태조에게 귀의하여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근(覲)이 국자감(國子監)에서 벼슬을 하면서부터였다. 김부식의 이름 끝자 '식(軾)'은 중국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던 소식(蘇軾 : 호 東坡居士, 北宋代의 문장가, 蘇洵의 아들이며 蘇轍의 형)에게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13, 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다 하여 그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포상되기도 하였다.

 

문사로서 : 1096년(숙종 1) 김부식은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로 예종·인종에게 경사(經史)를 강(講)하는 일도 맡았다. 둘째형 부일(富佾)과 동생 부철(富轍) 또한 당시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한림직(翰林職)을 맡아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는 자신이 공자·맹자의 학문을 종지로 받든다고 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교 윤리의 실천을 주장하였고 유교이념의 실현에 노력한 유학자였다. 인종 초년 이자겸(李資謙)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임을 내세워 참람한 행위를 하고 예에 어긋난 일을 하려 들자, 그는 왕과 신하 사이의 법도를 강조하며 이를 견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삼국사기}의 사론을 통해 유교 이념을 주창하였으며, 예종과 인종 앞에서 행한 강경(講經)에서도 유교 이념을 강조하였다.
정치가로서 : 이자겸의 정변(1126~27, 인종 4~5) 이후 김부식은 1140년(인종 18) 관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정치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자겸이 제거된 직후, 그는 두번째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때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송나라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중국 송나라와 금나라의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목적이 곁들여 있었다. 결국 이를 감지한 송나라의 반대로 수도까지는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1130년 12월 정당문학 겸 수국사(政堂文學兼修國史)로, 다음해 9월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로, 그 이듬해 12월에는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 개경파(開京派)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② 묘청의 서경전역(西京戰役) 진압 : 이즈음 이자겸의 정변으로 궁궐이 불타는 등 재해가 그치지 않자,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 서경인들을 중심으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북방에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의 금(金)이 새로이 등장하여 고려에 압력을 가해오는 데 대해 북진운동(北進運動)을 벌여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중국의 송(宋)이나 여진족의 금(金)과 대등한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김부식은 유신(儒臣)의 논리에 따라 천도와 칭제북벌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개경파를 규합하여 행동에 나섰다.

 

왕의 신임이 예전과 같지 않자 사태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묘청은 1135년(인종 13) 조광(趙匡) 등과 함께 서경에서 서둘러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로 정하고 일대 전쟁을 일으켰다. 이 때 중서시랑평장사로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고 있던 김부식은 평서원수(平西元帥)에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동원하여 반란의 진압에 나섰다. 그는 출정하기에 앞서 비밀리에 개경에 남아있던 정지상·백수한·김안 등 서경파 인사들의 목을 베었다. 반란은 한달도 채 안돼 묘청이 내부분열로 목숨을 잃음으로써 곧 끝나는 듯했으나, 묘청의 목을 벤 조광이 다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14개월 만에야 겨우 진압되었다.

 

그 공으로 김부식은 개경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수국정난 정국공신(輸國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었고,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檢校太保 守太尉 門下侍中 判吏部事)에 올라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묘청 일파에 호의적이었던 인종의 측근관료들이 제거되고, 김부식의 의도대로 유교 관료정치가 추구되면서 그에 맞게 각종 제도와 의례가 정비되었다.
한편 그는 서경에서 개선한 뒤 묘청의 서경전역을 진압할 때 부원수로서 커다란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 , 윤관의 아들)를 포상하기는 커녕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시켰다. 그 이유는 그가 정지상의 친구로서 이전에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을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140년에 사면령이 반포되어 윤언이가 중앙정계로 곧 복귀할 전망이 보이자, 그는 정치적 보복을 염려하여 세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윤허를 받았다.

 

③ 삼국사기 편찬 : 형과 동생이 죽고, 자신의 우익이었던 정습명(鄭襲明)이 대간직에서 탄핵을 받아 퇴임하자, 그는 이내 정치적으로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 때 국왕이 그를 도와 줄 젊은 관료를 보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을 명하였다.
그는 스스로 {삼국사기}의 편찬체재를 정하고, 그에 따라 참고직(參考職)의 조수를 시켜 사료를 발췌·정리시켰으며, 직접 사론을 집필하였다. 1145년(인종 23) 그는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을 마치고 국왕에게 바쳤다.
그에 앞서 그는 인종 초년에 {예종실록}을 편찬하였고, 의종 초년에는 {인종실록}의 편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④ 문사 김부식 : 개경의 문단을 좌지우지했던 문사로서, 김부식은 한림원에 있을 때 선배 김황원(金黃元)과 이궤(李櫃)의 뜻에 따라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보급에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유행하던 육조풍의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 대신, 당·송대에 발전한 고문체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중찬도 이러한 문체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문집은 20여권이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으며, 그 일부가 {동문수(東文粹)}와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는데, 우리나라 고문체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송나라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 인물조에서 그를 "박학강지(博學强識)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능히 그 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라고 평하였다. 만년에는 개경 근처에 관란사(觀瀾寺)를 원찰로 세워 불교 수행을 하기도 했다. 1153년(의종 7)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 김부식은 사대주의자인가?
종래 김부식은 개경 문벌귀족의 이해를 대변했던 역사가, 사대주의적인 역사가로 평가되어 왔고, 유교사가(儒敎史家)로서 역사서술 과정에서 전통 고유사상과 불교적인 내용을 소홀히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현재에는 김부식의 역사관과 역사서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즉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조선시기의 역사가들보다는 덜 사대주의적이었고(삼국의 역사를 天子의 역사인 本紀 체제로 구성), 신라 중심적인 서술(신라·고구려·백제 순으로 삼국의 역사를 서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삼국에 대하여 공평한 입장을 취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설화중심적·신화중심적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합리적 사료비판을 추구함으로써 역사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나아가 그의 사대적인 입장을 김부식 개인의 문제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 申采浩,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동아일보}, 1925) :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이 무슨 사건에 원인함인가. ... 나는 일언으로 대답하여 가로되, 고려 인종 13년(1135) 서경전역,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 한다.
서경전역은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獨立黨) 대 사대당(事大黨)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으니 ... 이 전역을 어찌 1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三國史記}(1145, 인종 23)의 편찬목적
{삼국사기}는 이자겸의 정변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난 문벌귀족들의 횡포를 제어하고 묘청의 서경전역으로 분열된 민심을 재수습하여 유교적 관료정치를 강화함과 아울러,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금(金)과 평화적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국가적 안정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다.
감수국사 김부식은 묘청의 서경전역 진압을 분열주의에 대한 통일주의의 승리로 보았다. {삼국사기}에서 중국과 겨루다가 패망한 고구려의 역사보다, 유연한 외교술과 충의(忠義)의 도덕정신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역사를 높이 평가하였던 것도 그러한 시각과 무관치 않았다. 한편 {삼국사기}의 신라 중심적 서술은 감수국사를 맡은 김부식의 본관이 경주라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더불어 {삼국사기}는 국가재정상 낭비적 요소가 많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닌 불교·풍수지리와 신화적 세계관을 배격하고,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에 기초하여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 {삼국사기}의 사학사적 위치와 김부식의 역사인식
전통사회에서 역사편찬은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문화를 집대성한 시대적 소산이다. 따라서 그 안에는 특정 개인의 주관적 역사인식보다는 시대환경이 요구한 역사관이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 - 김부식과 10명의 보조편수관, 그리고 국왕(인종)의 입장이 함께 반영
그러나 편찬의 최종 책임을 진 김부식의 사관이 {삼국사기}의 역사인식과 같은 맥락에 있었음은 틀림없는데, 이제 그 성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현재 남아 있는 사적(史籍)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역사책이자, 사관제도(史館制度) 아래서 편찬한 정사체(正史體: 紀傳體) 사서 : 본기(本紀)·(세가, 世家)·지(志)·표(表)·열전(列傳). 당대(唐代) 이후 중국에서 역사편찬에 도입한 분찬법(分纂法)에 따라 편찬

 

②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와 충실한 자료수집에 기초한 역사서술 : 김부식은 자신이 직접 쓴 본기와 열전의 논찬(論贊)에서 유교적 명분과 예법, 군신관계를 논하고 포폄.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經學의 수단으로 교훈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에서 쓰여진 역사)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는다' - 단군조선과 관련한 내용 삭제, '무징불신(無徵不信)' - 삼한의 역사 매몰
그러나 삼국을 중국과 대등한 독립국가로 서술하고 왕기(王紀)를 '세가'가 아닌 '본기'로 처리, 삼국의 국왕을 중국의 천자와 같은 지위로 승격.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적 서술자세를 견지하여 우리나라의 고유한 명칭과 방언을 그대로 서술

 

③ 신라중심의 역사서술 : 김부식은 경주인, 신라왕족의 후예로 인종대 문신귀족 전성기에 개경의 문벌귀족을 대표

ㅇ 일연(一然 : 1206~1289)
우리 고대문화에 대한 폭넓은 탐구를 가능케 해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찬술자 일연(一然)은 무신정변과 몽고의 침략 및 압제로 이어지는 혼란과 시련의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고려전기 문벌귀족체제와 깊은 연계를 맺고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였던 교종 불교는, 무신정권 성립 이후 지눌이 세속화된 교종의 기성 권위에 맞서, 선(禪)을 주로 하는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주장하며 조계종(曹溪宗: 선종 9산)의 종풍을 크게 떨치면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일연은 1206년(희종 2) 경주의 속현인 압량(押梁: 현재의 慶山)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산필(金産弼)의 활동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은 지방의 향리층으로 짐작된다. 속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견명(見明)이고, 처음 자는 회연(晦然)이었는데, 후에 일연(一然)이라 고쳤다. 호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였다.
일연은 9세(1214, 고종 1)에 해양(海陽: 현 광주) 무등산 무량사(無量寺: 九山禪門 迦智山派 소속)에 기탁되어 14세에 사미승으로 계(戒)를 받았다. 22세 되던 1227년(고종 14) 겨울, 일연은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에 오른 뒤, 비슬산(琵瑟山: 包山) 보당암(寶幢庵)에서 참선 수행에 몰두하였다. 그러기를 9년째, 일연은 몽고군이 몰고 온 전란으로 말미암아 잠시 몸을 피했다가, 이듬해 다시 비슬산으로 돌아와 무주암(無住庵)에서 '生界不減 佛界不增'이란 공안(公案)을 놓고 십수년 동안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1246년(고종 33) 선사(禪師)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20여년 동안 머물며 깊은 사색에 잠겼던 비슬산 곧 포산은 당시 다양한 불교 형태가 공존하던 지역이었다.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가 있었고, 아미타신앙 결사가 이루어졌으며, 법화경 예참이 시행되었는가 하면, 밀교 신앙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신앙 분위기는 일연이 어느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계통의 신앙과 사상을 모아 {삼국유사}를 찬술하는 바탕이 되었다.
대선사(大禪師)가 된 다음해인 55세 되던 1260년(원종 1), 일연은 남해 정림사(定林寺)에서 {삼국유사}와 쌍벽을 이루는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두 권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그는 원종으로부터 강도(江都)로 상경하라는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가 선월사(禪月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목우화상(牧牛和尙)의 법맥을 이었다. 그러나 5년 뒤 그는 왕실에서 주는 온갖 호사도 마다하고 강넘어 몽고의 침략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있는 육지의 남쪽 영일 땅 오어사(吾魚寺)로 돌아갔다.

 

홍인사(弘仁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일연은, 63세 되던 1268년(원종 9) 왕명으로 운해사(雲海寺)에서 대덕(大德) 100여 명을 모아 대장경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열었다. 그리고 비슬산(포산) 기슭에 용천사(湧泉寺)를 중건하고 불일사(佛日寺)라 이름하였다. 그가 65세 되던 1270년(원종 11)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 환도하여 이후 몽고에 대한 항쟁을 포기하였다.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그동안 대몽항쟁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三別抄)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고, 1273년(원종 14) 제주도가 함락될 때까지 전후 4년간에 걸쳐 몽고에 대한 마지막 항쟁을 전개하였다. 일연은 72세(1277)에 가지산 서쪽 운문산 운문사(雲門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이 무렵 필생의 저작인 {삼국유사}(1281)의 찬술에 들어갔다.
77세 되던 해(1282, 충렬왕 8) 10월 일연은 개경으로 불려가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도망쳐 나오듯 다시 운문사로 되돌아가, 산문(山門) 아래 가까운 곳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는 그 다음해인 1284년(충렬왕 10) 9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 해 일연은 군위(軍威)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그리고 다섯 해 뒤인 1289년(충렬왕 15) 그 또한 병든 몸이 되어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죽음을 맞이하며 그는 먼저 왕에게 글을 남기고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문답을 나눈 뒤 금강인(金剛印)을 한 채 눈을 감았다고 한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에 보각국사(普覺國師) 탑과 비가 있으며, 고향인 경산 동남쪽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 동쪽 기슭에도 행적비가 남아 있다.

 

- {三國遺事}(1281, 충렬왕 7)의 찬술목적 :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역사의식
무신정변과 몽고의 침략으로 사회가 혼란과 위기에 처하자, 일연은 그같은 위기를 극복할 정신적 근거를 우리에서 과거 전통을 재인식하는 데서 찾고, 고려왕조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전통 문화의 우위성을 드러내고자 {삼국유사}의 찬술을 기획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차적인 동기는 '유사(遺事)'라는 이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사가(史家)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등의 기존 사서(史書)에 대한 보족(補足)의 의도에서 찬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연이 {삼국사기}를 '국사(國史)' 또는 '본사(本史)' 등으로 부른 것은 그가 삼국사기를 정사(正史)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일연은 이와같은 기존 사서에서 간과해버린 고대사나 불교사의 많은 부분을 다방면의 사료를 모아 폭넓게 전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족적인 것이라고 해서 {삼국유사}의 의미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일연 자신이 기획한 의도에 따라 강렬한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각고의 노력을 하여 이룩한 것이 {삼국유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연이 특히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삼국유사}를 찬술하였다고 해서 그의 관심이 불교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일연은 고기(古記), 사지(寺誌), 금석문(金石文), 사서(史書), 승전(僧傳), 문집(文集)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함은 물론,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발굴해낸 민간 전승의 수많은 설화와 전설들을 채록하여 책에 담았다. 다시말해 {삼국유사}는 단순한 불교문화사가 아닌, 종합 사서였던 것이다.

 

-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위치
王曆, 紀異, 興法, 塔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善 등 9편목 5권으로 구성된, {삼국유사}는 전해오는 이야기, 설화, 전기적(傳奇的)인 사료를 수집 망라한, 일종의 민속지(民俗誌) 내지 민족지(民族誌)이다.
① 선승(禪僧) 일연의 사찬서(私撰書) : 사가(史家)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서술한 유사적(遺事的) 성격의 책. 관찬사서의 한계라 할 수 있는 다분히 사대적인 경향과, 설화형태로 전해지던 상고사 관련 자료에 소홀했던 점 등을 보완. 정치사, 지배자 중심의 역사에서 누락된 사실(遺事), 특히 풍부한 고대의 전승을 기록. 우리나라의 고기류(古記類)와 중국쪽 사서를 널리 참고하고 출전을 명시함으로써 주관성을 배제하였다.
② 민족의 자주성과 문화의 우위성을 내세우는 신이사관(神異史觀) ↔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
③ 한국사의 기원에 대해 고조선- 위만조선- 마한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체계를 세움 : 元 간섭하 민족적 자주의식의 표현

▣ {삼국사기}·{삼국유사}와 한민족의식의 형성
- 민족 : 정치·경제·문화·종교·언어 등의 동질성에 기초해 형성된 (역사)공동체, 혈연은 오히려 부차적, 단일민족?
생활공동체의 형성→ 운명공동체 또는 문화공동체로 동질화→ 의식공동체로 성장, 이 때 그 집단이 민족

 

1) 생활공동체 : 어문 종교 국가(정치 경제공동체)의 동질성을 기초로 형성- 대체로 철기문화가 보급되고, 그 보급이 완성되는 시기
삼국항쟁- 민족이 서로 싸운 것이 아니고, 민족형성을 위한 싸움
후기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기에 생활공동체가 형성- 신라 통일후의 '삼한일통(三韓一統)' 의식
고려의 후삼국통일 무렵 발해유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활공동체로서 민족의 형성 종결

 

2) 운명공동체 또는 문화공동체 : 고려조에 거란, 여진, 몽고의 침략을 받으며 운명공동체로 동질화

 

3) 의식공동체 : 대몽항쟁기, 13세기 이후 몽고와의 40년에 걸친 투쟁과 원의 간섭 과정을 거치며 강대한 외압으로 인한 민족적 위기를 절감, 단군을 민족 공동의 시조로 하는 독자적 역사의식과 단일민족으로서의 자각이 생겨남. <'三韓一統'→'朝鮮',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되어 한국사에 대한 인식과 역사계승의식의 지평이 고조선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민족적 차원으로 승화→ 조선초 세종대에 꽃피운 민족문화(한글...)의 밑거름

 
그 이전 고려시기 역사계승의식은 삼국 중 어느 특정 왕조의 계승자라는 의식에 그침- ① 고려국초∼후삼국 통일 :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임을 표방. ② 후삼국 통일후∼무신정권 성립 : 신라의 지배층이 고려의 새 지배층으로 변신하면서 {삼국사기}에서와 같이 신라가 정통왕조이며 고려는 이를 계승했다는 의식이 형성. 그러나 이는 대내적인 의식으로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표방. 이원적 역사계승의식. ③ 무인정권기 : 지배세력의 교체를 통해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일원적 역사계승의식으로 정착, 이규보의 {동명왕편}.

 

ㅇ전근대 민족 - 민족구성원 내부의 차등성(신분제), 국가간의 상하관계(사대교린의 중화체제, 화이관)에 기초한 중세적 보편질서가 민족주의로의 발전을 제약
→ 민족구성원 모두를 포괄하는 행동논리 또는 행동철학으로서의 민족주의는 '근대적' 개념

4. 정몽주와 정도전
- 권력이 갈라놓은 적과 동지 -

ㅇ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 연일(延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경상도 영천(永川) 출생.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정운권(鄭云權)의 아들, 어머니 이씨(李氏)는 명문 연안 차씨 집안의 외손녀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과거에 3연속 급제), 예문관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을 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였다.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으며, 전농시승(典農寺丞)을 지냈다. 이 무렵 이색(李穡)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함께 수학하며 주자학적 교양을 다지고, 그에 기초한 현실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1367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성균관 박사(博士)를 겸임하였고, 이후 성균관의 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을 지내며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강설로 이름을 날렸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와,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지냈다.
1376년(우왕 2)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으로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큐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판서(典工司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사판서(禮儀司判書)·예문관제학·전법사판서·판도사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왜구 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이듬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 商議會議都監事 寶文閣提學 同知春秋館事 上護軍)이 되었다. 1383년 동북면 조전원수로 함경도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듬해인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였다.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 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 領景靈殿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經筵事 益陽郡 忠義伯)에 봉해지고, 이듬해 인물추변도감 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을 지냈다.

 

이때 정몽주는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고 고려왕조를 지키려 하였다. 1392년(공양왕 4) 4월 이성계가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러 황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이성계의 아들 방원(芳遠)의 기지로 실패하고, 이어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집에 돌아오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철퇴를 맞고 죽임을 당하였다.

 

정몽주는 신진사류로서 개경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유교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제사의식을 정하는 등 주자학적 사회윤리를 보급하려 애썼다.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면서, 기울어가는 고려왕조의 국운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성리학- 주자학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도 뛰어나 자신의 충절을 읊은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비롯해 많은 한시가 전해진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따라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517년(중종 12)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ㅇ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학자.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조상 세거지는 경상도 봉화(정도전의 본가는 현재 奉化郡으로 가는 길목인 경북 榮州市 이산면 신암리에 위치). 봉화 정씨의 시조는 정도전의 고조부인 호장 출신의 정공미.
1342년(충혜왕 복위 3) 홍복도가 판관 정운경(鄭云敬: 1359. 형부상서 역임)과 영주의 사족인 산원(散員) 우연(禹淵,延)의 서녀 사이에서 3남 1녀 가운데 맏이로 출생(개경?, 삼각산?).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승려 김전(단양의 명문가 우현보 집안과 인척)과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딸, 뒤에 우현보와 그의 아들들이 정도전을 자기 집안 여종의 자손이라고 빈축. 정도전의 아내도 명문가 출신인 최습(연안 차씨 집안의 사위)의 서녀.(조영규, 하륜 등도 명문 연안 차씨 집안의 外裔孼族 출신)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21세 때인 1362년 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충주목의 사록(司錄)에 임명되었다. 1364년 개경으로 돌아와 전교시주부(典校寺主簿)와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66년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인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살이를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 정몽주가 {맹자(孟子)}를 보내 학문에 정진할 것을 권면하였다.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三角山) 옛 집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370년(공민왕 19) 성균관을 중수하고 이색을 대사성으로, 정몽주 등을 교관으로 하여 성리학을 강론한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에 다녀왔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와,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어 성리학을 강론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예의정랑 겸 성균 태상박사(禮儀正郞兼成均太常博士)로서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 사실을 명(明)에 고할 것을 주장하며 친원파 권신 이인임(李仁任)과 대립하였다. 이듬해 우왕 원년에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제수받고 문한직을 수행하면서 이인임 일파의 친원정책을 비판하다,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의 소재동이란 곳으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3년을 보낸 뒤, 그는 고향 영주로 가서 다시 4년간을 복거하였는데, 이 때 함께 현실 문제와 개혁을 논의했던 성균관의 친구들은 뜬구름처럼 흩어져 그를 외면하였다.

 

1380년(우왕 6) 해금이 되자, 남경(서울)으로 상경하여 삼각산 밑에 삼봉재라는 초가를 짓고 학당을 개설하였으나, 지방 유력자들의 핍박으로 부평·김포 등지를 전전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42세의 장년이 된 정도전은 1383년 가을 함경도 함주(咸州: 함흥)에 있던 당시 최고의 군벌 이성계(李成桂: 東北面 都指揮使)를 찾아가 그의 막료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임명되어, 9년 만에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에 서장관이 되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 금릉에 가서 우왕 승습의 승인과 시호를 요청하고 돌아와, 13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지제교를 제수받았다. 1387년 외직을 요청하여 남양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우왕 14, 창왕 즉위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정권을 잡게 되자, 1389년(창왕 원년, 공양왕 원년) 정도전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조준 등과 함께 전제개혁운동(田制改革運動)을 전개하는 한편, 그해 11월 이성계·조준 등과 의논하여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그는 공신(봉화현 충의군)에 책봉되고, 재정을 담당하는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른 뒤,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1(공양왕 3)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에 임명되어 병권의 일부를 장악하고, 그 해 5월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제정 반포하였다. 이 때 정도전은 반대파인 이색·우현보 등을 탄핵하다 도리어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392년(공양왕 4, 조선 태조 원년) 4월 이성계가 부상당한 틈을 타 그 일파를 제거하려 칼을 빼든 정몽주의 탄핵으로 영주에서 체포되어 예천(醴泉) 보주(甫州) 감옥에 갇혔다. 이에 위급한 처지에 몰린 이성계 일파가 곧바로 반격에 들어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정몽주가 살해되면서, 그는 개경으로 소환되어 다시 충의군에 봉해졌다. 그 해 7월 17일, 정도전은 남은·조준 등 52명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조의 국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으로서 정도전은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에 임명되었다. 이어 왕명으로 {고려국사}의 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명나라에 새 왕조의 창업을 알리고 신년 하례를 올리기 위한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사행길에 올랐다.

 

1393(태조 2) 명나라에서 돌아온 뒤 정도전은 정치·경제·군사의 실권을 장악하고, 새 왕조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주력하였다. 1394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이듬해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찬진하여 새 왕조 법제의 기본을 마련하고, 새 도읍으로 정해진 한양에 내려가 궁궐·종묘·사직·관아·시전·도로 등의 도시설계도를 만들었으며, 1395년에는 도성의 성터를 정하고, 완공된 경복궁 여러 전각과 문의 이름을 지어 바쳤다. 한편 1397년에는 일종의 무력시위로서 요동정벌을 제안하고, 사병혁파와 진법훈련을 시작하였으며,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로 동북면에 직접 가서 그곳에 부족적이고 군벌적인 사회체제 대신 조선식 지방통치체제를 이식하였다.(성을 수축하고 驛站을 신설, 태조의 친군과 왕족들의 불만 야기) 그리고 이듬해에는 {불씨잡변} 19편을 저술하여 유교(주자학) 입국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강비의 둘째 아들 세자 방석(芳碩)을 태조 이성계의 후사로 미는 정도전과 다섯째 왕자 이방원(李芳遠) 사이의 갈등이 불거져, 결국 제l차 왕자의 난 과정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당함으로써 57년간에 걸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 정도전의 사상 :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등과 교유하며 주자학적 교양을 닦았다. 우왕 원년에는 이인임 일파의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였고, 이성계의 막료로 들어가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추진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서 정치·경제·군사 방면에 걸쳐 새 왕조의 법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그 체제 이념을 제시하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의 저술을 통해 유교 이념에 기반한 국가경영의 기본 설계도를 확정하고, {심기리편(心氣理篇)}과 {불씨잡변(佛氏雜辨)}을 통해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하는 주자학적 체제이념을 제시한 데 있다.
그의 불교 비판은, 여말의 이제현이나 이색처럼 사원의 폐해나 승려의 비행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불교 사상 자체의 문제에 촛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는 유교(주자학)의 음양오행설과 이기론을 근거로 불교의 윤회설과 인과응보설을 비판하고, 불교적 전통 질서를 대신할 유교적 통치 이념으로 민본과 덕치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왕조교체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도를 어겼다고 하여, 이후 의리를 중시하는 사림들로부터 배척을 받는다.
저서로 {삼봉집(三峰集)}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으며, 시문으로 [정동방곡(靖東方曲)]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ㅇ정몽주와 정도전은 처음부터 정적이었나? - 권문세족과 신진사류
정몽주와 정도전은 모두 경상도 향리 집안 출신으로, 과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성리학적 사회개혁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나간 신진사류
고려말, 1370년(공민왕 19) 다시 중건된 성균관을 근거로 학문연구와 정치활동을 전개
1380년과 1383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왜구 토벌에 참가, 정도전은 1383년 이래 이성계의 참모로 활약
1384년 정몽주와 정도전은 성절사(聖節使)와 서장관으로 함께 명나라 금릉에 사행
친명반원(親明反元)의 외교노선을 견지하며,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에 함께 참여. 신진사류 정권의 왼팔, 오른팔로 이성계를 보좌

 

- 공양왕의 즉위 이후, 왕조재건론과 역성혁명론으로 대립 : 1392년 정몽주는 옛 동지이자 후배인 정도전을 탄핵 제거하려 했고, 정도전은 스승 이색과 선배 정몽주를 제거
권문세족과 불교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입장 차이(점진론·타협론과 급진론)
공민왕 시해 이후 1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던 정몽주와 오랜 귀양살이와 투옥으로 점철된 파란많은 역정을 거쳤던 정도전,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정치역정
죽은 뒤 두 사람의 서로 엇갈린 운명 - 정몽주가 뒤에 자신을 살해한 이방원에 의해 복권되고 '문충'이란 시호를 받은 데 대해,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은 이방원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오히려 역적으로 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방원 집권후 국가체제의 개혁은 정도전이 그려놓은 밑그림 대신, 조선 건국후 새 왕조에 참여한 권근(權近) 등 이색 계열 인사들의 주도하에 타협적으로 추진
ㅇ공양왕 즉위 이후 고려왕조의 존폐 여부와 田制改革을 둘러싼, 고려왕조 재건파 신진사류와 창업파 신진사류 사이에 벌어진 노선 투쟁(왕조재건론과 역성혁명론) - 조선전기 훈구와 사림의 이념투쟁으로 계승
정도전의 새로운 유교 국가 체제론에 대한 재평가, 신화가 되어버린 정몽주의 충절에 대한 냉철한 역사적 성찰

ㅇ 여말선초의 사회변화
ㅇ똥이 역사를 바꾸다?
여말선초 - 중세사회의 재편 : 중소지주 출신의 신진사류(新進士類) 세력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 강력한 집권관료제가 추구, 지주·전작제가 발달, 신분제도의 변동,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성리학 수용
농업생산력의 발전 : 재나 인분으로 거름을 만들어 논밭에 주고 자양분이 풍부한 다른 곳의 땅을 퍼다 뿌려줌으로써 지력을 유지 강화하는 새로운 기술이 도입 - 평지에 논밭이 개간되고 연작상경(連作常耕)이 일반화. 종자도 개량되어 환경 적응력이 강하고 생장기간이 짧은 볍씨가 도입되어 저습지와 연해지역의 논에 보급. 이러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민의 재생산 기반을 확대하고 지주제가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자연촌의 성장)

 


중소지주층의 성장 : 삼남지방의 중소지주, 강남농법(江南農法)을 비롯한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적극 수용. 수리시설의 확충과 하천수의 이용, 농지의 개간에도 노력. 지주경영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
한편 권문세가의 발호로 향촌사회에서 조세 수취를 책임지던 향리층의 사회적 지위가 전반적으로 낮아지면서, 지주경영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한 향리층 가운데 군공(軍功)이나 납속(納粟)으로 첨설직(添設職)이나 동정직(同正職)을 받아 향리의 역을 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들은 특히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첨설직을 받아 대규모로 品官이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품관층은 수령들이 향리를 폭력적으로 수탈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향리층과 구별하면서 새로운 향촌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신진사류의 성리학 수용 : 고려 말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두드러졌던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재지 품관층 가운데 일부는, 지방의 토착적 기반을 바탕으로 무예나 학문적 능력을 쌓아 군공이나 과거 급제 등을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 공민왕대에 이르러 차츰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고려후기 과거 합격자의 출신지역 분포 - 고종대까지 전체의 절반 수준이던 삼남지방 출신자의 비율이 14세기 충선왕대 이후 전체의 80%에 이르는 수준으로 현저하게 증가
신진사류들은 문과 급제자를 중심으로 결집, 자신들의 사회적 이해를 대변할 새로운 이념으로 신유학(新儒學: 성리학- 주자학. 충렬왕 15년, 1289년 무렵 安珦에 의해 고려에 처음 전래)을 적극 수용
신진사류들이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수용한 주자학(朱子學)과, 남송(南宋) 이래 수전농업을 중심으로 분전(糞田)과 객토(客土)를 통해 휴한법(休閑法)을 완전히 극복한 새로운 인공주의적 농업기술로서 강남농법은 실상 같은 뿌리
재지품관층과 신진사류들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침해하며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가와 대립 - 조선왕조의 건국

5. 세종대왕과 장영실
ㅇ 세종대왕(世宗大王 : 1397~1450, 재위 32년)
우리 역사상 가장 걸출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은 1397년(태조 6)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도(孕), 자는 원정(元正)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08년(태종 8) 12세에 충녕군(忠寧君)에 봉군되고, 1412년 대군에 봉해졌으며, 1418년 6월 큰 형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대신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22세의 나이에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1450년(세종 32) 54세를 일기로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하면서 정치·경제·문화·국방·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치적을 남겼다.

 

슬하에 18남 4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이 문종(文宗)이고, 둘째 아들이 세조(世祖)이다. 시호는 장헌(莊憲), 능호는 영릉(英陵)이며, 능침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처음에 경기도 廣州 - 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大母山 남쪽 기슭 - 부왕 태종의 능침인 獻陵 서편에 묻혔다가, 1469년 睿宗이 즉위하면서 驪州로 천장하였다.)

 

세종대왕의 치적은 다른 실록에는 없는,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수록된 방대한 분량의 '지(志)'에 잘 나타나 있다. 의례(儀禮)에 관한 [오례(五禮)], 음악에 관한 [악(樂)], 역사와 인문을 망라한 지리서인 [지리지(地理志)], 천문 역법에 관한 [칠정산(七政算) 내·외편] 등은 세종대에 완비된 문물제도의 실제와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업적이 얼마나 방대했나를 여실히 보여준다.
세종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진 시기였다.
집현전(集賢殿)을 통해 우수한 인재들이 발굴 육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각종 의례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 음악과 도량형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천문 과학기기의 발명, 농서와 의서의 편찬, 국경의 확정 등 수많은 치적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세종대의 정치는 세종 18년(1436)을 분기로 하여, 전후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세종 치세의 전반기는 태종대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통해 세종 나름의 정치를 준비하던 시기였다.(세종 4년, 1422년까지 태종이 上王으로 생존)
이 시기에 세종은 태종 14년(1414)에 시행된 국왕 중심의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정치운영의 틀을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궁중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세종 2년, 1420) 정인지(鄭麟趾) 등 소장 학자들을 발탁하여 각종 의례와 제도의 정비에 필요한, 중국의 고전과 고제(古制)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진행시켰다. 이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우수한 인적자원과 풍부한 연구성과들은, 세종대 유교정치의 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의 견인차가 되었다.

 

치세 후반기로 접어들며 왕권이 안정을 찾고, 각종 의례와 제도에 대한 정리 사업을 통해 유교정치의 기반이 점차 다져지자, 세종은 재위 18년이 되는 1436년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바꾸어 정치운영 기조의 획기적인 변화를 꾀하였다.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언관(言官)과 언론의 역할 또한 강화하였다. 그 결과 정책결정 과정에서 신료들의 참여 폭이 크게 확대되어, 세종 치세 후반기를 통해 전체적으로 군권(君權)과 신권(臣權)의 균형잡힌 조화가 이루어져 나갔다. 신료층 내부에서도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 등 원로 대신들과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소장 학사들을 양대 축으로 하는 신구의 조화가 이루어졌다.
각종 의례와 제도의 정리

 

-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집현전 ; 국가의 유교 의례인 오례(五禮 : 吉禮·凶禮·嘉禮·賓禮·軍禮)와 사서(士庶)의 유교 의례인 사례(四禮 : 冠禮·婚禮·喪禮·祭禮) 등에 관련된 중국의 옛 제도들을 수집 정리하여 연구
- 법전의 정비 :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세종 15, 1433)
- 고려사의 개수 : {고려사(高麗史)} 139권(문종 원년, 1451)
- 4대 사고의 완비(세종 27, 1445) : 춘추관 실록각·충주사고·전주사고·성주사고
- 도성의 개축(세종 4, 1422)
- 불교 시책 : 불교 종파를 선·교(禪敎) 양종으로 통합(세종 6, 1424), 궁중에 내불당(內佛堂) 설치(세종 30, 1448) / 평양에 단군사당 건립(세종 7, 1425)

 

음악과 도형의 정리
- 아악(雅樂)의 정비,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 도량형의 정비(세종 13, 1431 ; 세종 28, 1446)
수취체제의 정비
- 국세(國勢) 조사 :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세종 14, 1432)의 편찬
- 공법(貢法)의 제정(세종 26, 1444) : 풍흉(豊凶)에 따른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 토지의 비옥도에 따른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 수등이척(隨等異尺)의 결부법(結負法). 조세액은 수확량의 1/20

 

과학 기술의 진흥
- 천문 과학기기의 발명
간의대(簡儀臺: 세종 16, 1434), 혼천의(渾天儀: 세종 15, 1433) ;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 자격루(自擊漏: 세종 16, 1434) ; 천문 역서(曆書) {칠정산 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 외편(七政算外篇)}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의 편찬 ; 세계최초의 강우량 측정기 측우기(測雨器: 세종 23, 1441)
- 농법의 개량과 농서의 편찬 : {농사직설(農事直說)}(세종 11, 1429)
- 의약서의 편찬 :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세종 15, 1433), {의방유취(醫方類聚)}(세종 27, 1445)
- 금속활자의 주조 : 구리활자 경자자(庚子字: 세종 3, 1421) 갑인자(甲寅字: 세종 16, 1434), 납활자 병진자(丙辰字: 세종 18, 1436) ; 인쇄술의 개량

 

외치와 국방
-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세종 원년, 1419)
- 4군(四郡)·6진(六鎭)의 개척과 국경의 확정 : 세종 15년(1433)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의 압록강 방면 야인 정벌과 4군 설치, 세종 16년(1434) 함길도 관찰사 김종서(金宗瑞)의 두만강 유역 6진 개척
- 화약과 화기의 개발 :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 설치(세종 26, 1444), {총통등록(銃筒謄錄)}(세종 30, 1448) 편찬
훈민정음의 창제
세종 25년(1443) 12월 훈민정음 28자 창제 ; 세종 26년(1446) 음력 9월 상순 훈민정음 반포

ㅇ 장영실(將英實)
장영실은 미천한 노비의 신분으로, 세종대에 수많은 과학기기를 발명하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상호군(上護軍)의 지위에까지 오른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다.
장영실(將英實)은 1890년 무렵 중국 소·항주(蘇杭州) 출신의 귀화인 아버지와 경상도 동래현의 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관기 소생이었던 탓에 장영실은 열 살되던 무렵 동래현의 관노(官奴)로 들어갔다. 치밀한 두뇌에 사물에 대한 관찰력 또한 뛰어나, 기계적 원리의 파악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장영실은, 관노로 있으면서 수차(水車)를 개발하여 동래현의 가뭄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세종의 부왕(父王)인 태종 때 발탁되어 궐안에서 공장(工匠)으로 일하면서, 제련과 축성, 무기와 농기구 등의 제작에 두각을 나타냈다.

 

1418년 부왕의 선위(禪位)로 임금에 등극한 세종은,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천문 역법의 세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보고,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제작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평소 그 재주를 아껴오던 장영실을 발탁, 1421년(세종 3) 특명으로 중국 명나라에 파견하여 천문학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케 하였다. 그리고 1423년(세종 5)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노 출신인 그를 5품직인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에 임명하였다. 태조 때 설치된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을 만들고 대궐안의 재물과 보물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서였다.
1432년(세종 14)부터 세종의 명으로 대대적인 천문·기상의기의 제작이 시작되면서, 장영실은 공조참판 이천(李 )을 도와 천체 관측의기인 간의(簡儀)의 제작에 착수하는 한편, 여러가지 천문의기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이듬해인 1433년 장영실은 적도의 좌표를 관측하고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渾天儀, 실내용)를 완성하고,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그 공으로 장영실은 그 해 정4품 호군(護軍: 五衛 소속 무관)의 지위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1434년(세종 16) 장영실은 이천을 도와 구리활자인 갑인자를 만들고 인쇄기술을 개량하여 인쇄 능률을 향상시켰다. 이 해에 그가 만든 자동 물시계 자격루가 경복궁 안 보루각에 설치되어, 조선왕조의 표준 시계가 되었다. 그밖에 공중 해시계인 앙부일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자석을 사용하지 않고도 남북의 방위와 시간을 알 수 있는 정남일구,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 정성정시의, 그림자의 길이로 태양의 시차를 관측하는 규표 등이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장영실은 1438년(세종 20) 자격루와 혼천의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할 수 있는 옥루(玉漏)를 제작하고,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에 오른 것도 이 때였다. 1441년에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하였으며, 하천 물의 높낮이를 재는 수표를 청계천 다리에 세워 홍수에 대비하게 하였다. 측우기는 이듬해 5월 개량 보완을 거쳐 서울과 지방 각지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1446년(세종 28) 장영실이 만든 가마를 타고 종묘에 행차하던 세종이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장영실은 벼슬 자리에서 쫓겨났는데,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ㅇ세종대 창조적 민족문화의 창달을 가능케 한 문화의식의 바탕은?
- '여백'의 창조성
고정관념, 관성과 관행에서의 탈피. 노비 출신의 장영실이 발탁되어 각종 과학기기들을 발명
-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
'以存其實 以實直書' '論贊不作'의 {고려사} 편찬 원칙
집현전을 통한 방대한 중국 고전·고제(古制)의 수집 정리, 합리적 비판을 통한 주체적 수용
- 민족적 자의식
우리 민족의 글자 훈민정음의 창제, 종묘제례악에 우리의 향악(鄕樂)을 사용, 우리의 풍토에 맞는 농서 {농사직설}의 편찬과 천문 과학기기의 제작 ...

6. 신사임당과 황진이
ㅇ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1551)
조선중기의 여류 서화가(書畵家).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 思任堂, 師妊堂)·시임당(媤妊堂)·임사재(任師齋).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 음력 10월 29일 강릉 북평촌(현재의 강릉시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에서 평산 신씨 신명화(申命和)의 다섯 딸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사임당(師任堂)·임사재(任師齋) 등의 당호는 중국 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그녀가 보통 성씨로만 불리던 여느 여성들과는 분명히 다른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은 태어나면서부터 외가에서 생활을 하였다. 이 때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열녀} {소학} 등 여자의 행실을 다듬는 책을 배우는 한편으로, 7세에 이미 안견(安堅)의 그림을 사숙(私淑)하면서 서화와 자수에 재능을 나타내었다.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임을 당할 적에 낙향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살았다.

 

신사임당은 1522년(중종 17)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결혼한 뒤에도 강릉 친정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 해 11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사임당은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시어머니 홍씨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올렸다. 이후 시댁의 향리인 경기도 파주 율곡리 등지를 오가며, 이따금 강릉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는데, 1536년(중종 31) 33세에 용꿈을 꾸고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은 것도 강릉 오죽헌(몽룡실)에서였다.

 

1541년(중종 36) 38세에 사임당은 시집 살림을 맡기 위해 아주 서울로 이주하여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된 이듬해인 1551년(명종 6)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그 해 여름 남편과 두 아들이 세곡을 운반하는 일로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사를 지냈다. 셋째 아들 이이를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넷째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워냈다.

 

신사임당의 시·그림·글씨는 아주 섬세한 여성의 감수성을 아름답게 잘 표현하고 있다. 보통 신사임당을 일컬어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생활을 개척한 여성이었다. 예컨대 38세 때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사친(思親)]이라는 시에서 그녀는
"그리운 고향은 겹겹이 막히고 /

가고 싶은 마음 꿈 속을 헤매는구나 /

고향 땅 한송정에는 외로운 달빛 /

고향 땅 경포대에는 한줄기 바람 /

모래 위 백구 모이고 흩어지고 /

파도 위 고깃배들 오고가누나 /

어느 적에 강릉 가는 길 밟아 /

색동옷 입고 춤추며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 할꼬"


라고 하여, 친정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애정을 노래하고 있다. '출가외인'이라는 규격화된 유교적 윤리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것이다.
조선 제일의 여류화가로서 안견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 신사임당의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을 화제(畵題)로 마치 생동하는듯한 섬세한 사실적 표현을 그 특징으로 한다. 어린 시절 꽈리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닭이 와서 그림 속의 메뚜기를 쪼아 버렸다고 한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여섯 폭 초서는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고 있다. 말발굽과 누에머리[馬蹄蠶頭] 체법의 사임당 글씨는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여 그녀가 본받고자 한 태임의 덕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ㅇ 황진이(黃眞伊 : 1520?~1560?)
조선 시기의 시인·명기(名妓)로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악)의 기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 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만, 그녀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황진이의 어머니 현금(玄琴)의 성은 진가로, 아전 집안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진현금은 어느 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다가 마침 지나가던 황 진사와 눈이 맞아 정을 통하였다. 그래서 낳은 딸이 바로 황진이였는데, 아버지 황 진사는 그 뒤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채 사생아이자, 양반집의 서녀(庶女)로 태어난 황진이는 나이가 들며 빼어난 용모와 총명함, 그리고 예술적 재주로 뭇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황진이가 열대여섯 되던 때의 일화이다. 황진이가 글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의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진이를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다. 그 자초지종을 들은 황진이가 장롱에서 자기 치마를 꺼내 관을 덮어 주었더니, 그제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때의 충격으로 인해 그녀가 기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헛되이 일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기생이 되어 남존여비·적서차별의 신분질서에 맞서려 하였다. 그래서 개성 관아의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타고난 끼와 재주를 한껏 뽐내며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서늘케 했다. 그녀는 노래와 춤과 시로, 이름깨나 있는 선비들과 벼슬아치들을 농락하였다. 그녀의 이름이 서울에까지 널리 퍼지자, 내노라 하는 풍류객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송도(개성) 땅으로 꾸역꾸역 몰려 들었다.

 

그 때 왕족 중에 벽계수(碧溪守) 이은원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황진이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만일 내가 그 요망한 계집을 본다면 당장에 호령을 해서 쫓아 내겠다고 장담을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는 그가 얼마나 고결한지 한번 시험해 보리라 하고, 중간에 사람을 놓아 벽계수를 유인하여 만월대(滿月臺) 구경을 오게 하였다. 때는 마침 만추시절이라 중천에 월색이 교교하고 만산에 낙엽이 소소하여 누구나 감개한 회포가 일어날 즈음이었다. 황진이는 소복 단장으로 숲속에 숨어 있다 연연히 나와
"청산리(靑山里) 벽계수(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하고 노래 한 곡조를 부르니, 벽계수가 달빛에 비추인 그녀의 어여쁜 자태와 청아한 노래에 흠뻑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다고 한다.
황진이가 나누었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의 사랑이다. 두 사람은 애당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그의 발걸음을 잡아맸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

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 /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

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 /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웁고 /

피리 부는 코끝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 /

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 /

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황진이는 30년 동안 면벽참선(面壁參禪)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키기도 하였다. 황진이는 선승으로서 이름이 높던 지족선사의 도력을 시험해 보고자 지족암에 찾아가 제자로서 수도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지족선사는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다며 거절을 하였다. 이에 황진이는 며칠 있다 다시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가서 선사가 있는 바로 옆에 침소를 정하고,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 불공을 한다고 가칭하며 밤마다 불전에 나아가 청아한 목소리로 불공 축원을 드렸다. 이와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 축원을 하니 처음에는 무심코 듣던 노 선사의 마음에도 감동이 생겨, 옆에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번쩍 떠서 황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말을 붙이게 되었다. 황진이는 예의 그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으로 노 선사를 마음대로 놀리어 끝내는 그만 파계(破戒)를 시키고 말았으니, '망석 중 놀리듯 한다'라든지 '십년 공부 도루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러한 사실을 일러서 하는 말이다.


또한 황진이는 당대의 도학자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기도 하였다. 평소 화담의 명성을 흠모하던 황진이는 그를 찾아가 수학하기를 청하였다. 화담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승낙을 하였다. 하루는 황진이가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화담의 방에서 같이 공부하기를 청하자, 화담은 그 역시 허락을 하였다. 그렇게 수년간을 한 방에서 우주·인간의 이치와 인생에 대해 배우면서,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유혹을 해도, 화담은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도인답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원한 스승과 제자의 사이로 인연을 맺고, 박연폭포와 자신, 그리고 스승인 서경덕을 송도 3절(松都三絶)로 일컬었다.


스승인 서경덕이 죽은 뒤 황진이는 모든 것을 청산하고 스승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묘향산을 막론하고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 때 서울의 풍류객 이사종이 함께 살자고 설득하자 황진이는 망설이다가 마흔 살이 되는 6년 동안만이라고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6년이 지나자 황진이는 이사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림살이를 정리해서 개성으로 돌아왔다.


황진이는 이처럼 자유분방한 일생을 살다가 마흔을 앞뒤로 한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죽을 때에 그녀는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하였으니 고적한 산중에다 묻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 묻고,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으니 장사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 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녀의 무덤은 개성 동편 장단의 변두리 길가에 있었는데, 천하의 호협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평안도로 부임하던 길에 그녀의 무덤에 들러 제사를 지내 주었다가 언관의 탄핵을 받아 좌천을 당한 일도 있었다.


ㅇ신사임당은 과연 현모양처의 귀감인가?
신사임당과 황진이는 모두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며 살아갔던 독립적인 여성
ㅇ신사임당과 황진이로 대표되는 조선전기의 독립적인 여성상은 당대의 사회질서와 풍조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다.
ㅇ조선전기의 혼인제도, 상복제의 변화, 여성들의 제사 참여와 자녀 균분상속, 친손과 외손을 차별없이 수록하고 출생순으로 자녀들의 이름을 기록한 조선전기의 족보 ...

◁ 조선전기 여성들의 생활상 ▷
흔히 조선조 여성이라고 하면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보다는 억압받고 통제된 존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른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여성상은 주자학적 사회윤리가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리는 조선후기 이후의 산물이었고, 그 이전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들의 권리와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혼인과 여성생활
조선 초기에도 고려조 이래 여자 집 중심의 혼인제도인 서류부가제(壻留婦家制, 男歸女家婚)의 풍습이 일반적인 혼인형태로 행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혼(重婚)과 개가(改嫁)를 금지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규정된 의혼(議婚)·납채(納采: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사주와 청혼서를 보내는 절차)·납폐(納幣: 택일후 신랑집에서 혼서지와 예물이 든 함을 들이는 의식)·친영(親迎)의 4례대로 성례의식을 친영제도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유교관료들 사이에서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 결과 1435년(세종 17) 3월에 파원군 윤평과 숙신옹주와의 왕실혼례가 친영의식으로 치러지고, 중종·명종대에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되 처가에 머무는 기간을 2~3일로 대폭 줄인 반친영(半親迎)이 실시되기도 하였지만, 반친영의 절충안조차도 당시 사회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신사임당 집안의 사례) 그것은 혼인제도가 단지 그 자체의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례·제례·재산상속 등 일상생활의 여타 제도들과 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 조선후기에 들어 비로소 반친영의 성례의식이 보편화

 

상복제의 변화와 여성
조선 초기까지도 외조부모에 대한 상복은 고려조와 마찬가지로 친조부모에 대한 상복과 같았다(齊衰 1년). 처부는 대공(大功) 9개월, 처모는 소공(小功) 5개월, 사위는 소공 5개월(cf: 斬衰 3년)
그것은 남귀여가혼에 의해 어려서 외가에서 자라게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연 외조부모에 대한 정이 오히려 친조부모보다 더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외조부모와 처부모에 대한 복상제를 소공 5개월과 시마( 麻) 3개월로 각각 한두 등급씩 낮추어 규정 - 그러나 그 뒤에도 외조부모에 대한 소공복제가 불편하다는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초기까지의 상제에서 외조부모·처부모에 대한 상례를 후히 한 것은 '서류부가'의 혼인풍속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외조부모와 외손, 처가와 사위의 관계가 남계 중심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 매이지 않고 그만큼 밀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들의 제사 참여
16세기 중엽 당대의 거유(巨儒) 율곡 이이의 평산 신씨 외손봉사 사례는 당시까지만 해도 양자를 세워 가계를 잇고 제사를 받들도록 하는 양자제가 보편적인 습속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5세기 조선사회에서는 남계 중심의 가계계승 의식보다 남계·여계 모두를 아우르는 혈족의식이 강하였으며, 그에따라 제사와 재산의 상속이 이루어졌다. 딸의 봉사는 곧 외손의 봉사로 이어지는 것인데, 조선초기 외손봉사는 아들이 없을 경우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족보 기록에도 15~16세기의 경우에는 친손과 외손을 차별없이 모두 수록하고, 자녀들도 출생 순위로 기재하였다.(18세기 이후, 異姓者는 보통 사위만 기재, 순위도 선남후녀 방식으로 기재)
문화 유씨 {가정보(嘉靖譜)}(1562) - 문화 유씨의 친손뿐만 아니라 외손, 외손의 외손 등등까지 모두 기재

 

재산상속을 둘러싼 여성의 권리
조선전기에는 고려조 이래의 관습대로 자녀 균분상속이 일반적이었다({경국대전}의 규정, 자녀균분 상속에 승중자(承重子)에 한해 상속분의 1/5을 추가).
남자형제와 똑같이 상속받은 여성의 재산(토지와 노비)은 혼인한 뒤에도 남편 또는 시가의 재산으로 귀속되지 않고 부인의 독립적인 재산으로 존속되었다. 때문에 자녀가 없이 죽은 부인의 재산 역시 시가의 재산으로 상속되지 않고 친정 본족에게 돌아갔다.
17세기 중반부터 장자우대, 남녀차별, 남성균분 여성차별 등의 차등상속을 하는 가족이 증가, 특히 장자우대 여성차별의 경향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여성재산상속권의 위축은 유교적 윤리규범의 토착화에 따라 봉사권이 남성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봉사관념의 확대와 남계 위주 가계 계승의식의 일반화, 양자제의 보편화).

 

일상생활 속의 여성 규제
조선왕조 건국후 주자학적 윤리규범을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여성들 사이에 자유롭게 행해졌던 전통적 풍습들이 많은 규제를 받게 되었다. - 부녀자의 사찰 출입, 잡신들에 대한 사신(祀神) 행위, 여성의 복장, 남녀간의 접촉 문제 등
부녀자들의 상사(上寺)와 음사(淫祀) 금지, 평교자(平轎子)가 아닌 옥교자(屋轎子)를 타게 하는 등의 복장규제, 3촌을 넘어서는 친척과의 접촉을 규제한 내외법의 시행 등은 유교적 의미에서의 정절을 앞세워 여성들의 바깥 나들이나 유흥 등 외부활동을 규제하려 한 조치들이었다. 처벌을 수반한 여성들에 대한 생활규제는 세종 연간부터 강력히 시행되어 성종 연간까지 계속되었지만, 전대의 유습에 젖어있던 당시의 여성들은 이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 조선 중기 이후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

 

생산노동과 여성
조선시기 농가의 여성들은 집안일이나 길쌈뿐만 아니라, 농업노동의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조선초기의 농서를 통해 보면 여성들은 벼농사에서 씨 준비, 씨 뿌리기, 김매기 등 여러가지 일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며, 벼농사보다 밭농사의 참여율이 더욱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 직조업의 경우 생산물의 상품화 등으로 여성들의 비중이 오히려 높아지기는 했지만, 남성노동으로 대표되는 논농사 중심으로 농업구조가 변화됨으로써 밭농사 중심인 여성 농업노동은 그 의미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전기의 여성들은 후기와 비교해 볼 때 현격하게 다양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 유교적인 사회윤리가 사회 기층에 뿌리를 내리는 조선후기의 사회상을 조선시기 전반에 걸친 특질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러한 특질을 우리 사회 본연의 모습으로 규정하는 일반인의 통념은 바뀌어야 한다.

7. 광해군과 강홍립
ㅇ 광해군(光海君 : 1575~1641)
조선왕조 제15대 임금(재위 1608~1623). 광해군은 1575년(선조 8) 선조(宣祖)와 공빈(恭嬪) 김씨(金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공빈 김씨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혼(琿)으로,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으며, 비(妃)는 태릉참봉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선조는 일생 동안 두 왕후와 여섯 후궁을 거느리고 모두 14남 11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와의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서자들 가운데 세자를 선택해야만 했다. 1591년(선조 24) 선조의 나이가 40을 넘기자 대신들은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40세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혹여라도 선조가 미처 세자를 결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불시에 죽는다면 조정이 혼란에 휩싸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신들은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건저(建儲: 세자를 세우는 일)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 때 서인(西人)에 속한 좌의정 정철(鄭澈) 등은 동인(東人)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 東-北人),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 東-南人), 대사간 이해수(李海壽) 등과 논의하여 왕세자 책봉문제를 선조에게 건의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산해가 약속을 어기고, 정철이 왕세자 책봉을 청하면서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仁嬪) 김씨의 소생 신성군(信城君) 후(珝)를 죽이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선조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정철 등이 왕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정철의 벼슬을 깎고,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백유성(白惟成)·유공진(柳拱辰) 등 서인을 모두 외직(外職)으로 쫓아버렸다.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으로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철에게 큰 고초를 겪었던 동인이 서인에 대한 보복으로 건저 문제를 이용한 것이다.

 

그 후 세자 책봉 문제는 거론되지 못하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분조(分朝: 비상 사태에 즈음하여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해야 될 상황에 처해서야 비로소 피난지 평양에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 때 유력한 왕세자 후보였던 신성군은 이미 병사하였고, 광해군의 동복 형 임해군(臨海君)은 성격이 포악하고 임금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세자로 책봉된 뒤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고,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분조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세자책봉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아니었다. 세자를 책봉하면 명나라에 이를 알려, 명에서 고명이 내려와야 정식으로 세자로 확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1594년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였으나, 명은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때문에 광해군의 세자로서의 지위는 그때까지도 불안정한 처지였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분조의 소임을 다하여 조야의 명망을 얻게 되었으며, 명의 고명 여하에 관계 없이 모든 대신들은 그를 세자로 받들었다.
그 후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의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1602년(선조 35)에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린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가 선조의 계비가 되면서 광해군의 입지는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고, 1606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선조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적자가 태어난 것이다. 선조는 적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 눈치 빠른 신하들은 선조의 속내를 파악하고 서서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게다가 선조는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히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 분리되고 말았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小北派)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1608년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버린다.
이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大北派)의 거두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발각되었다. 이에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하였지만, 선조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인목대비는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우여곡절 끝에 1608년 2월 2일 비로소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우선 조정의 기풍을 바로 잡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광해군 재위 15년은 동·서·남·북의 당쟁으로 얼룩진 시기였다. 광해군은 1575년(선조 8)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의 파당(派黨), 곧 동서(東西)로 당론이 나뉘어진 을해당론(乙亥黨論)이 일어난 해에 태어났다. 그리고 대북파의 후원을 받아 영창대군을 미는 소북파를 제치고 집권에 성공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먼저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남인에 속한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에 등용하고,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정승에 기용하여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러한 의도는 집권 대북파의 당론에 밀려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이산해·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주장에 따라 임해군을 유배시키고, 왕위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그리고 1611년(광해군 3) 3월에 좌찬성 정인홍이 자신의 스승인 조식(曹植)과 학문적 입장을 달리하였던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다. 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옥사는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병조의 문서를 위조하다 붙들린 김경립(金景立)이란 자가 문초 도중 성균관 학유(學諭)로 있는 김직재 부자가 모반을 계획한다고 발설하여, 친국을 당한 김직재가 매에 못이겨 선조의 아들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인 진릉군(晋陵君) 태경(泰慶)을 받들고, 이이첨 등 대북 일파를 제거하려 했다고 자백을 함으로써 이에 연루된 진릉군과 100여 명의 소북파 인사가 숙청을 당한 사건이다. 1613년에는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서출들의 이른바 '칠서(七庶)의 옥'이 발생하자, 대북파는 이를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 역모사건으로 꾸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사사(賜死)하고, 영창대군을 강화(江華)에 위리안치시켰다가 이듬해 증살(蒸殺)하였다. 그리고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탈관직하였는데(癸丑獄事),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대북파는 1615년 남인 출신의 영의정 이원익을 몰아내고, 능창군(綾昌君: 인조의 아우) 전(佺)의 역모사건을 꾸며 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을 제거하였다('신경희의 옥사'). 그리고 1617년에 는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여 이항복·기자헌·정홍익 등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18년에 인목대비의 대비 존호를 폐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反正)의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내정과 외교에 있어 그의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먼저 광해군은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폈다. 즉위한 해인 1608년에 선혜청(宣惠廳)을 두고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조세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조세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1611년(광해군 3)에는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양안에 누락된 경작지를 다시 조사함으로써 국가의 재원(財源)을 확충하였다. 또 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의 중건에도 힘써 선조말에 착공한 창덕궁을 그 원년(1609)에 중건하고, 1619년(광해군 11)에 경덕궁(慶德宮: 慶熙宮)을, 1621년에는 인경궁(仁慶宮)을 새로 조영하였다.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자, 광해군은 그 강성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성지(城池)와 병기를 수리하였으며,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평안감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을 때, 광해군은 그 요청에 못이겨 강홍립(姜弘立)으로 하여금 1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원조케 하였다. 그러나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어 명이 부차(富車) 싸움에서 패하자 후금에 투항토록 하는 등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보였다. 이 때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계속하여 광해군에게 후금의 동정을 담은 밀서를 보냈는데, 그 정보에 따라 조선은 후금의 침략을 예방할 수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광해군 원년에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 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에는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여 국교를 회복하였다.
광해군의 실리적 정치관은 도성을 옮기는 계획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민간에는 이씨 왕조의 기운이 다해 정씨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또한 서울이 전란으로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복구 사업에 엄청난 재원과 인력이 필요했다. 이에 광해군은 파주의 교하(交河)로 도읍을 옮겨 민심의 안정과 국가의 새출발을 기약하고자 하였다.
교하는 임진강을 끼고 있어 물 사정에 어려움이 없고 대평야로 둘러싸여 있어 식량을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해상 교통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도 적당하였다. 군사적으로도 서울보다 북쪽에 있어 일본의 위협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고, 임진강이 가로막고 있어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천도 계획은 광해군의 실리주의 외교노선과 왕권 강화에 의한 부국강병이라는 맥락에서 추진된 계획이었지만, 명에 원군을 파병하는 문제를 비롯한 다른 현안에 밀려 연기되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밖에도 광해군은 병화로 손실된 서적을 다시 간행하는 데도 노력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중간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실록의 보관을 위해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네 곳의 사고를 대신하였다.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 때 나왔다. 외래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광해군 8)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같은 정책은 인조반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의 15년 재위 기간 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 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정치세력들은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1623년(광해군 15) 서인 출신의 김류·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綾陽君: 인빈 김씨 소생 定遠君의 아들)이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켰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명에 대한 사대의리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사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두달쯤 뒤 세자 질은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혔는데, 당시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고 한다. 황해도 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추론컨대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로 죽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유배 생활이 시작되면서 화병을 얻었다. 도저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인조 2) 10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태안으로 이배되었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그는 다시 교동에 안치되었으며,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 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를 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인조 19) 귀양생활 18년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을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은 그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양주 적성동(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공빈 김씨 묘 아래쪽 오른편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 서녀의 자손들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 강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을 완전히 꽃 피우지도 못한 채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 건 이 명분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선 이들이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의 대세를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명은 이미 기울어 가는 나라였고 청은 새로 일어서는 나라였다. 광해군은 바로 이러한 점을 읽고 중립 외교 노선을 걸었지만, 반정세력은 계속해서 대명 사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 청에게 왕이 무릎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는 대치욕을 겪게 된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비롯해 능창군, 인목대비 등의 왕권 위협 세력들을 제거한 것을 폭정으로 몰아간 부분이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제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ㅇ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나? 광해군은 영민한 자질과 능력, 그리고 천운에 힘입어, 후궁 소생의 둘째 아들이란 핸디캡을 극복하고 왕좌에 등극할 수 있었다.
ㅇ강홍립은 정말 역적·간신이었나? 강홍립과 임경업
ㅇ임진왜란후 국가재조(國家再造)의 두 노선 : 임진왜란은 중세 동아시아판 세계전쟁, 전쟁후 동아시아 3국의 사회유동성 심화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국가재조 노선 - 유형원·이익·정약용 등 북인계 남인 실학파의 사회개혁 노선 / 인조반정 이후 집권 서인- 노론세력의 주자도통주의에 입각한 국가재조 노선

 


8. 정약용과 이항로
ㅇ 정약용(丁若鏞 : 1762~1836)
다산(茶山)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음력 6월 16일 진주목사를 지낸 남인 출신의 정재원(丁載遠, 1730~1792)과 공재 윤두서(尹斗緖, 윤선도의 후손)의 손녀 해남 윤씨(海南尹氏) 사이에 4남 2녀 중 4남으로 능내리 마현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풍천 홍씨(豊川洪氏)와 혼인하였는데, 4남 2녀는 요절하고 아들로 학연(學淵)·학유(學遊)와 서랑 윤창모(尹昌謨)만이 남았다.
다산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1783~1800)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1801~1818)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1818~1836)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는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이래,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줄곧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시기이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도 암행어사·병조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총애는 그에게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박해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신유박해는 표면적인 천주교 박해라는 이유와는 달리 노론 벽파가 남인계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다산은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익(李瀷, 호 星湖)의 증손자인 이가환(李家煥)과 매형인 이승훈(李承薰)의 지도를 받으며 이익의 실학에 기울어졌다. 그리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斗尾峽) 뱃길에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李檗)을 통해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이 시기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내강중용강의(內降中庸講義)} {내강모시강의(內降毛詩講義)} {희정당대학강의(熙政堂大學講義)}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舟橋]의 준설과 1793년 수원 화성을 설계하면서 거중기와 녹로(도르래)를 도입하여 공정을 크게 단축한 것을 손꼽는다.
1791년 진산(珍山)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옥(獄: 진산사건)이 터지면서, 다산은 비록 10일만에 방면되기는 하였지만 천주교인이라 하여 충청도 해미로 첫 귀양을 갔다. 그리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를 배교하고 반년만에 내직으로 돌아왔지만 조정 여론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1797년 정조는 다시금 그를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 시절에 그는 {마과회통(麻科會通)} {사기찬주(史記纂註)}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지 채 1년도 못 되어 1800년 6월 정조가 죽은 뒤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산은 1801년 2월 체포되어 경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 18년간에 걸친 제2기의 유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된 뒤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동문밖 주막에 거처하였는데, 이 시절은 유배 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破門壞墻 不許安接)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기로 기록되어 있다. 1805년 겨울 다산은 만덕사(萬德寺) 소풍길에 만난 혜장선사(惠藏禪師)의 배려로 고성사(高聲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9개월 뒤 다시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에 자리잡을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이후 다산초당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1808년 {주역사전(周易四箋)}을 탈고하였고, 1811년 읍거 시절에 기고한 {상례사전(喪禮四箋)}을 완성하였다. 이어 {시경}(1810)·{춘추}(1812)·{논어}(1813)·{맹자}(1814)·{대학}(1814)·{중용}(1814)·{악경}(1816)·{경세유표(經世遺表)} 49권(1817)·{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1818) 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8월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과 {상서고훈} 등을 저술하여 6경4서와 1표2서를 완결지었다.
귀양에서 풀린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후 마현 고향집에서 저술생활로 평생을 보내다 1836년(헌종 2) 7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다산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대체로 6경4서·1표2서·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된다. 6경4서로써 수기(修己)하고, 1표2서로써 치인(治人)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한 것이다.

ㅇ 이항로(李恒老 : 1792~1868)
화서(華西) 이항로는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화서학파의 비조로, 1792년(정조 16) 아버지 이회장(李晦章)과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초명은 광로(光老)였으나, 철종 사친(私親)의 이름을 피하여 항로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항로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을 나타내 3세에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었으며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그리고 12세 때는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격분하여 이후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30세 때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하여 쌍계사·고달사 등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주자학 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 뒤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져 1840년(헌종 6) 휘경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이후에도 지방 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해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이어 1864년(고종 1) 당시의 권력자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였으며, 그 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비정(秕政)을 비판한 병인상소와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주장한 상소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당한 뒤 낙향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비판하고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 즉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해서 이와 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또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心卽理) 설과 심즉기(心卽氣) 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중교가 비판하였듯이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니, 그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심전주리론에 그 기초가 깔려 있다. 이같은 그의 심전주리론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조선조 말기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華西集)}, {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벽계아언(檗溪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ㅇ노론 낙론계 학맥
李端相 - 金昌協 - 李縡 - 金元行·朴胤源·任聖周 - 吳允常 - 吳熙常 - 兪薪煥 - 徐應淳
- 金昌翕 - 魚有鳳·閔遇洙·朴弼周 - 金亮行 - 李友信 - 李恒老 - 金平默·劉重敎
·崔益鉉·柳麟錫

◁ 조선후기 사상계 동향 ▷
9. 홍경래와 최제우
ㅇ 홍경래(洪景來 : 1771?~1812)
1811~12년(순조 11~12) 서북민 항쟁의 지도자. 본관은 남양(南陽).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多美洞).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봉기 당시 42세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는 알 수 없으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처 최소사(崔召史)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신분은 보통 몰락양반이라고 설명하여 왔으나,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였다.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 글을 배웠으나, 1798년(정조 22) 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한 뒤 과거를 단념하였다. 그리고 유랑생활을 하며 각종 병서(兵書)와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鄭鑑錄)}에 심취하였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풍수지리를 익혀 지사(地師)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 홍경래는 과거제도의 부패, 서북 출신에 대한 차별정책,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 삼정(三政)의 문란 등을 직접 체험하며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 나갔다.

 

이렇게 떠돌이생활을 하던 1801년(순조 1) 무렵에 홍경래는 평안도 박천의 청룡사에서 자신보다 다섯살 아래로 가산의 서자 출신인 우군칙(禹君則)과 만나 의기투합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10년 동안 각지를 다니며 향촌의 부호 유력자, 서당 훈장 등 향촌 지식인, 무술을 익힌 힘센 장사(壯士)들을 끌어들여 무장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홍경래와 우군칙을 비롯해, 가산의 이희저(역노 출신으로 대청무역에 종사하여 납속면천하고 향청 武任직을 취득한 부호), 곽산의 홍총각(장사)과 김창시(토호양반, 진사), 태천의 김사용(지사) 등으로 이루어진 진용을 꾸리게 되었다. 의주의 거상 임상옥과 정주의 부호 김약하, 그리고 송상(松商)과도 연결이 되었다.

 

1811년 12월 18일 홍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로, 가산 다복동에서 거병하여 만 4개월에 걸친 무장항쟁을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여, 정부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擧兵逆魁]'로 처리되었다. 그 뒤 홍경래는 민중들 사이에 저항과 변혁의 상징이 되었다. 민중은 자신들의 영웅인 그가 죽지 않고 정주성을 빠져나갔다고 믿으려 하였다. 그래서 봉기꾼들은 홍경래의 거사를 본받기도 하고, 홍경래가 살아 있으면서 그네들의 봉기를 도우러 온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 서북민의 항쟁[洪景來亂] : 홍경래를 비롯한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이희저 등의 지도부가 10여년 동안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일으킨 조선 봉건정부 타도운동

 

18~19세기 농업·상공업·신분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신흥 사회세력과 구제도·질서 사이의 사회적 모순 또한 전면화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평민세계의 성장으로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향촌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들의 문·무과 급제가 크게 늘어났지만, 종래의 관직체제나 인재 등용방식으로는 그들을 제대로 포섭할 수 없었다. 특히 평안도 지방은 당시 대청무역을 비롯한 상공업의 발달을 바탕으로 역동적인 사회상을 연출하고 있었음에도, 중앙 정치권력으로부터는 철저히 소외되어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실력에 걸맞는 정치적 지위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팽배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정조의 의문의 죽음 이후 일종의 보수반동으로 노론계 세도정권이 등장하자, 홍경래는 각처를 다니며 사회 실정을 파악하고 동료를 규합하기 시작하여, 우군칙·김사용(金士用)·김창시(金昌始)·이희저(李禧著)·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가산의 대정강(大定江) 인근 다복동(多福洞)에 비밀 군사기지를 세운 다음, 10여년에 걸쳐 사람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군수품 등을 준비하는 한편, 향임층을 중심으로 내응세력을 포섭해 나갔다. 그리고 1811년 10월경 다복동에 모여 1812년(壬申年) 정월에 거병할 것을 결정하고, 모든 병력과 물자를 다복동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자, 계획을 앞당겨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에서 거병하였다. 처음 거사에 동원된 병사들은 주로 운산 금광 등에서 광산노동자로 위장하여 모집한 용병들이었다.
홍경래 등 지도부는 군대를 남·북진군 두 부대로 편성하였다. 본대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 홍경래를 중심으로 모사 우군칙, 선봉장 홍총각, 후군장 윤후검 등의 진용을 갖추고 안주 방면으로 남진하고, 북진군은 부원수 김사용, 모사 김창시, 선봉장 이제초 등으로 편성되어 의주 방면을 공략하였다. 이희저는 남·북진군 모두의 군량조달을 담당하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봉기군의 본대는 가산·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봉기군은 초기에 청천강 이북의 10여개 군현을 빼앗으며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한편 관군은 12월 29일에야 비로소 체제를 정비하고, 박천 송림에서 봉기군과 최초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평안병사 이해우가 지휘한 관군에 패해 그날 밤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때 관군이 진군하는 마을마다 무자비한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자,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 대부분도 홍경래의 남진군을 따라 정주성으로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함으로써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정주성에서 항전은 12월 29일 남진군이 패배하고, 1월 17일경 봉기군의 다른 점령지역이 모두 관군측으로 넘어감에 따라 단독항전이 되었다. 이후 근 1백일에 걸쳐 홍경래의 군대는 서울에서 파견한 순무영(巡撫營) 군사와 지방 관군의 연합 부대에 맞서 전투를 계속하면서 굳게 성을 지켰다. 이에 관군은 최후의 비상대책으로 성 밑에 땅굴을 파고 폭약을 장치해서 성을 파괴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리하여 정주성은 1812년 4월 19일 마침내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 때 사로잡힌 2,983명이 가운데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이 모두 처형당하였다. 홍경래는 교전중에 전사하였고, 우군칙·이희저는 도주하였으며, 홍종각 등은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서북민의 항쟁은 평안도 지방의 신흥상공인층·서민지주·경영형부농 등 향촌사회내 재지중간층의 반봉건 지향을 대변하는 조선 봉건정부 타도운동이었다. 그러나 봉건권력에 의한 농민수탈 대신 서북민에 대한 정치적 차별을 거사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거사를 도모한다는 격문의 내용에서 살필 수 있듯이, 전면적인 반봉건투쟁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아무튼 서북민의 항쟁은 당시 사회의 발전과 평민세계의 성장을 바탕으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성장한 향촌지식인, 부호·유력자, 장사층이 주체적으로 거사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중세 봉건지배체제를 허물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ㅇ 최제우(崔濟愚 : 1824~1864)
동학(東學) - 천도교(天道敎)의 제1세 교조(敎祖).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 성장기 : 동학을 창도한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최제우는 1824년(순조 24) 10월 28일 경주 현곡면(見谷面) 가정리(稼亭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옥(崔 )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 진립(震立)이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사후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받은 이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한 유생으로 2번 상처를 하고, 과부이던 한씨를 만나 63세에 최제우를 낳았으나, 이미 동생의 아들 제녕(濟寧)을 양자로 들여 그는 서자로 자라났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하였다.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했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농사에는 마음이 없는 데다가 화재까지 당하여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3년상을 마친 뒤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에 의술(醫術)·복술(卜術) 등 잡술(雜術)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세상의 많은 가르침을 얻고자 천하를 돌아다녔다.

 

- 수련과 득도 : 1844년(헌종 10)부터 최제우는 구도행각에 나서 10년 동안 전국을 유랑하였는데, 천도교에서는 이를 '주유팔로(周遊八路)'라고 부른다. 주유팔로를 통하여 세상의 많은 가르침과 만나보았지만, 기존의 가르침들은 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할 수 있는 진정한 도(道)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의와 낙망 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이 무렵에 그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곧 자신의 처가(妻家) 동네인 울산 유곡(裕谷)에 머물던 1855년(철종 6) 3월, 최제우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왔다는 한 승려로부터 {을묘천서 乙卯天書}라는 책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더욱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 천성산(千聖山)의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숙부가 돌아가셔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하고, 다음해 다시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 경주 현곡으로 돌아온 그는 구미산(龜尾山)에 위치한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어리석은 세상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에서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바꾼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60년(庚申年) 4월 5일 최제우는 용담정에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고, 세상 사람들을 구한다는 '영부(靈符)'와 세상의 사람들을 가르칠 '주문(呪文)'을 받는다. 천도교에서는 이 날을 포덕 원년(1860)으로 삼아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로 기리고 있다.

 

- 포교와 탄압 : 득도후 1년 가까이 수행과 수련의 시간을 보낸 최제우는 1861년 6월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포덕(布德)을 시작하였다. 양인·천민의 구별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삶의 질서에 목말라 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머무는 경주 용담정은 도에 듣기를 청하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이게 되었다. 그러자 인근 유생들의 지목과 관청의 탄압을 뒤따랐다. 이에 최제우는 1861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용담정을 떠나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작은 암자 은적암(隱跡庵)으로 피신하여 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이 곳 은적암에서 그는 동학의 중요 경전인 [논학문 論學文]·[권학가 勸學歌]·[도수사 道修詞] 등을 저술하였다. 1862년 9월에는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이 몰려가 석방을 청원하자 경주진영은 어쩔 수 없이 무죄 방면하였다.

 

이렇게 그가 무죄 석방되자 사람들은 관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해 포교가 더욱 용이해졌다. 그리고 신도가 늘어나면서는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교도를 관할하게 하였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 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 해 11월 왕명을 받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고종 1)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1907년 신원(伸寃)되었다.

 

- 저술과 사상 : 최제우의 사상은 그가 처형당한 후 신도들에 의해 간행된 {동경대전 東經大全}과 {용담유사 龍潭遺詞}에 담겨 있다. [포덕문 布德文]·[수덕문 修德文]·[논학문]·[불연기연 不然基然] 등 한문으로 씌어진 4개 교의문은 {동경대전}에 실려 있고, [용담가 龍潭歌]·[몽중노소문답가 夢中老少問答歌]·[교훈가]·[도수사]·[안심가]·[흥비가 興比歌]·[권학가 勸學歌]·[도덕가 道德歌] 등 8편의 한글 가사는 {용담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한문으로 된 4개의 교의문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지었고, 8편의 가사는 한글로 구송(口誦)하기에 편하도록 쉽게 풀어썼다는 점에서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나 일반민중을 주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로서 한울님을 모시면 누구나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환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천주의 개념은 주술적인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고 우리 민족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교나 불교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운(運)이 다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봉건지배층이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 입장에서 서양을 남만(南蠻)으로 파악한 것과는 달리, 그는 서양 열강을 무사불성(無事不成)의 강대한 외래자로 보았다. 또한 왕조를 포함한 양반사회질서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는 자연적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지상천국이 건설된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했다. 그리고 적서(嫡庶)나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누구나 천주를 마음에 모시면 신분에 관계없이 군자가 된다고 하여 만민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관을 보여주었다.

◁ 조선후기 평민의식의 성장과 농민항쟁 ▷
ㅇ평민의식의 성장 : 정원외의 교생(校生)과 서당(書堂)이 늘어나 농민 자제들의 교육 기회가 확대.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는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 등장. 상업유통망의 발달에 따른 정보교류의 확대. 두레나 초군(樵軍)같은 노동조직을 통한 농민들의 공동의식 성장. 사회변동 과정에서 경제력과 신분의 불일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확대. 경제력으로 신분을 상승한 상천민들은 기존 양반사족층에 대해 평등의식을 갖게 되고, 그것이 주변의 일반 상천민에게도 파급
- 천주교와 정감록·미륵신앙·남조선설 등의 민중신앙, 탈춤·판소리·한글소설·민화 풍속화 진경산수화·민요 등은 이같은 평민의식의 반영(思亂已久)
→ 근대 민족주의 성립의 기초 : 민(民)의 자의식 고양과 그에 따른 신분제의 혁파
ㅇ농민의 항쟁
-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기 : 19세기에 들어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라 농촌사회의 분해가 가속화. 쟁송(爭訟)이 많아지고 투전(鬪 )이나 잡기(雜技)가 성행(소유권의식의 성장). 세도정권(勢道政權)의 진보적 정치세력 숙청, 봉건사회의 모순이 전면화됨과 아울러 농민의 항쟁이 잇따름.
1811년 서북민의 항쟁, 1862년 농민항쟁, 1894년 동학농민전쟁 ...
- 농민저항의 양상 : 지주층에 대한 지대납부 거부 등의 항조투쟁(抗租鬪爭). 유망(流亡)→ 명화적(明火賊, 장길산 등). 세금납부를 거부하거나 집단적으로 수령에게 정소(呈訴), 감영에 의송(議送)을 올리거나 서울로 올라가 격쟁(擊錚). 권력집단을 비방하고 타도를 선동하는 와언(訛言)·산호(山呼)·거화(擧火)·투서(投書)·괘서(掛書) → 작변(作變)
19세기 전반기 규모가 큰 作變의 시도들은 주로 황해도 이북의 서북지방에 집중
1862년 농민항쟁은 이제까지 단순한 지배와 수탈의 대상이기만 했던 농민들이 봉건 지배질서에 맞서 점차 자신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선언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근대'의 여명을 알리는 징표
cf) 1789년 프랑스혁명 - 혁명의 원인은 빈곤 때문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발전과 정치적 자유의 확장 때문이다. 프랑스의 상황이 다른나라보다 경제적·정치적으로 더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봉건제도의 잔재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놀랄만한 것은 본래 중세제도의 잔재를 폐기한다는 목적을 가진 혁명이, 그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던 나라에서가 아니라 가장 덜 느껴졌던, 그래서 그 잔재가 더욱 부담스럽고 억압스러웠던 나라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악습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그것을 참을성있게 견뎌내지만, 일단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견딜 수 없게 된다. ... 확실히 악습은 보다 적어졌지만, 악습에 대한 감수성은 한층 더 예민해진 것이다" (토끄빌)

 

10. 흥선대원군과 김옥균
ㅇ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 1820~1898)
제26대 임금 고종(高宗)의 아버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시호는 헌의(獻懿).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렸다.
이하응은 1820년(순조 20)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구(球)의 넷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명색은 왕손이었으나 그의 청소년기는 결코 순탄치 못하였다.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당시 상황이 그랬고,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그의 개인적 처지가 그러했다.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에, 24세인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진 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 대존관(代尊官)을 거쳐,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의 한직을 두루 지냈다.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세도를 잡고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하는 속에서, 그는 호신책으로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千喜然)·하정일(河靖一)·장순규(張淳奎)·안필주(安弼周)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의 생활을 하였다. 또 안동 김씨 집안을 찾아 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난세에 뛰어난 정략가로 장차 국정을 요리할 식견을 소지하고 있었던 그인지라 이렇게 호신책으로 파락호 생활을 하는 한편으로, 안동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 神貞王后)의 친조카 승후군(承侯君) 조성하(趙成夏)에게 접근하여, 궁중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와 철종의 후사에 대한 묵계를 맺음으로써 앞날을 기약하였다. 1863년(철종 14) 12월초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고종의 兒名)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여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발의를 채납하여, 12세의 명복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하였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하여졌고, 조대비로부터 섭정(攝政)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요람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 있는 대원군의 치세가 시작된 것이다.

 

집권후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출척(大黜陟), 당쟁의 본거지 정리, 국가재정의 질서확립, 행정개혁, 법전편찬 등 내수외양(內修外揚)의 과감한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왕조 중흥의 기틀을 다지려 하였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진원지이자 지방 양반토호들의 거점으로 전락한 서원(書院)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가렴주구에 몰두하는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무토궁방세(無土宮房稅)의 폐지, 양반·토호의 면세전결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징세, 무명잡세(無名雜稅)의 폐지, 진상제도(進上制度)의 폐지, 은광산의 개발 허용 등 경제·재정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군포제(軍布制)를 호포제(戶布制)로 개혁하여 양반들에게도 군역에 대한 세부담을 지도록 하였으며, 복식을 간소하게 실용화하였다. 또한 의정부 기능의 정상화, 비변사(備邊司)의 폐지와 삼군부(三軍府) 설치를 통해 정무(政務)와 군무(軍務)를 분리하는 행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대전회통 大典會通}·{육전조례 六典條例}·{양전편고 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국가의 법질서를 확립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에 착수하여,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문세(門稅)를 거두고 역역(力役)에 동원하는 등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워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더불어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또한 그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힌다. 대원군은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에 관심을 가지고 천주교도와 제휴를 꾀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적들에게 이용되어 자신의 정치생명이 위협받을 것을 염려한 그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령을 내려 전후 6년간(1866~1872)에 걸쳐 8천여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대박해를 감행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천주교도 학살을 구실로 무력을 동원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고, 미국 또한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을 구실로 개국을 강요하며 군사적 도전을 감행하였다. 대원군은 강력한 지도력을 발동하여 구미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에 대처해 나갔다. 그러나 이로 인한 쇄국양이(鎖國壤夷) 정책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대원군은 외척세력의 발호를 봉쇄하고자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 閔氏)의 천거로 영락한 여흥 민씨(驪興閔氏) 집안에서 고종의 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완화군(完和君) 문제로 민비와 사이가 갈라져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간에 화합할 수 없는 정치적 대결을 벌인다. 민비는 장성하여 친정(親政)을 바라는 고종을 움직여 대원군 축출공작을 추진하여, 마침내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탄핵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정계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한다.

 

1873년 11월 창덕궁에 출입할 때 대원군이 전용하던 문을 사전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하니, 대원군은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내 양주 곧은골[直谷]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집권에 대한 그의 집념은 꺾일 줄 몰랐다. 1881년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 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이 발단이 되어 보수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국적으로 격렬히 전개되는 가운데,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여 민씨 척족정권을 타도하려는 대원군계 안기영(安驥永)의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2년 7월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대우와 물가고가 발단이 되어 무위영 소속 구 훈련도감 군인들의 봉기가 일어났는데, 대원군은 여기에 개입하여 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청국군의 개입으로 사태가 역전되면서 대원군은 재집권 한 달여만에 청국으로 연행되어 바오딩(保定)에서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겪어야 했다.

 

1885년 2월에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부임한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함께 귀국한 뒤에도, 1887년 고종의 러시아 접근에 불만을 품은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큰아들 재황(載晃)을 옹립하려고 시도하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과 기맥을 통하기도 하는 등 대원군의 재집권에 대한 집념은 시들 줄을 몰랐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청일전쟁을 코앞에 앞두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점령하여 민씨정권을 몰아내자, 대원군은 집정(執政)이 되어 김홍집 등 개화파 관료들과 연립정권을 구성하면서 다시금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이 10월 28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공사의 부임 이후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면서 다시 축출당하였다. 1895년에 정부는 대원군 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제정하여 대원군과 대소 신민의 접촉을 제한하고, 외국 사신들과도 정부의 관헌 입회하에만 만나도록 조치하였다.

 

이후 유폐생활을 강요당하던 대원군이 다시 궁중에 나타나, 오랜 정적인 민비의 최후를 보게 되는 것은 1895년 을미사변 때의 일이다. 삼국간섭 이후 조선정부의 '거일인아책(拒日引俄策)'으로 수세에 몰린 일본은 상황의 반전을 위해 친러정책의 중심에 있던 민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입궐의 명색을 꾸미기 위해 마포 공덕리 아소정(我笑亭)에 은거하던 대원군을 끌어내 앞세우고, 경복궁에 쳐들어가 민비를 살해하고 친일 내각을 세웠다. 이 때 대원군의 행동이 자의에서였는지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잘쓰는 말로 자의반 타의반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아무튼 을미사변에 개입함으로써 대원군은 아소정에서의 연금생활을 마치고 다시 운현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도를 지나친 노욕이 탈을 부른 것일까. 뒤이은 1896년 2월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몰락하면서, 그의 정치적 운명도 끝나고 말았다. 1873년 정계은퇴 당시에 이어 다시 양주 곧은골로 은거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세인들의 관심도 멀어진 가운데, 1898년 봄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파란만장한 79 성상의 일생을 마감하고, 부대부인 민씨와 더불어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서화에 능하였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 대원군, 그는 누구인가 : 우리는 보통 대원군하면 쇄국정책을 고집했던 완고한 늙은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1866년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에 앞서 그는 한때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천주교인 남종삼(南鍾三)을 통해 프랑스와 제휴를 모색하기도 했다. 또 당시 민폐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던 서원을 구조조정하면서는 "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적어도 세계관의 차원에서 천주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공자보다 내 백성을 앞세운 점에서, 대원군은 서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국가와 민족보다 유교의 도(道), 다시말해 신분제 질서와 화이관(華夷觀)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중세적 세계질서를 앞세웠던 위정척사론자들과 분명히 달랐다. 그와 관련해서는 대원군이 조선후기 실학의 말미를 장식한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은 점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내가 있는 곳'이라는 운현궁 아재당의 당호와 한강의 풍광을 즐기며 '내가 웃는 정자'라 하여 아소정(我笑亭)이라 이름붙였던 마포 공덕리의 별장(지금의 동도중학교 자리)을 통해서는 희미하나마 '나'를 주장하는 근대적 자아의식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 허례의 상징이던 갓의 테두리를 줄이고 두루마기나 도포의 거추장스런 소매를 좁게 잘라낸 복식개혁 또한 그의 실용적 마인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간편함으로 인해 요즈음 한복의 일부가 되어버린 마고자 또한 1885년 초 중국에서 연금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 입고 와 유행시킨 패션이라고 한다.

 

사실 개항을 전후한 시기 국내에서 대원군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정치인도 드물었다. 1882년 집단행동에 돌입한 구식군인들의 발길이 자연스레 운현궁에 닿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서민들이 그나마 비빌 수 있는 몇 안되는 언덕이었다. 임오군변으로 재집권에 성공한지 한달 남짓한 1882년 7월 13일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중국 바오딩부[保定府]에서 4년간 유폐생활을 하다 돌아온 뒤에도, 그는 여전히 국정이 난맥상을 드러낼 때마다 다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정치권의 히든 카드였다. 무엇보다 서민들과 친숙한 정치가로서의 이미지,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었는데, 그것을 이해하려면 1863년 12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만 10년간에 걸친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 대원군의 집권, 60년만의 정권교체 : 당시 대원군의 집권은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를 마감한 사실상의 정권교체였다. 소수세력으로서 대원군의 집권은 세도정권 내부의 균열을 틈타 풍양 조씨 조대비 세력과 철종의 후사 문제를 놓고 얼마전 'DJP 연대'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담합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양측의 묵계대로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에 봉하여 익종(翼宗: 효명세자, 순조의 아들)의 대통을 계승케 하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하고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한 뒤 그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정권교체의 비결은 아니었다. 1998년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IMF 위기'로 인해 비로소 가능했듯이, 거기에는 1862년 진주를 비롯해 전국 70여개 군현을 파도처럼 휩쓴 농민항쟁의 도도한 물결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원군은 세력기반이 취약한 자신이 집권하는 데 세도정권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은 농민들의 저항이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농민들의 분출된 요구를 받아들여 기존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한에서 할 수 있는 민생 개혁을 과감히 추진하려 하였다.
비록 취약한 권력기반 속에서 서원 정리에 따른 보수세력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천주교 탄압과 쇄국정책이라는 정치적 카드를 꺼내들고, 왕권강화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경복궁 중건을 강행하다 민생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전정·군정·환곡 삼정(三政)에 걸친 세제(稅制) 개혁의 의미까지 덮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양반·상민을 막론하고 모든 호(戶)에 군포(軍布)를 부과한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는 관직에 나아가 국가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군역을 면제받고 있던 양반 기득권층의 조직적 반발로 200년 가까이 논의만 무성했던 것을 일거에 돌파해 낸 쾌거였다. 그로 인해 상민들의 세부담은 다소 가벼워졌고, 양반·상민 모두 군역세를 내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평등의식도 한층 확산되었다.

 

이러한 대원군의 일련의 내정개혁은 백성들의 여망과 지지에 의해 뒷받침되었는데, 바로 여기에 대원군의 대중적 인기의 비결이 있었다. 더불어 집권 이전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종친들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피하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파락호 생활을 서슴지 않으며 서민들과 정서적 유대를 다지고, 또 그러한 생활을 통해 서민생활과 백성들의 여망에 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대중정치가로서 그의 이미지 형성에 한몫을 하였다.

 

그런데 대원군의 정치는 '동교동계' '상도동계'하며 아직까지도 지속되는, 보스정치·가신정치의 구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최근에 복원한 운현궁(雲峴宮) 노안당(老安堂)의 서행각(西行閣)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운현궁 사랑채의 행각은 대원군 문하에서 그를 보스로 받들며 정치적 야망을 불사르던 대원군의 심복과 식객들이 주로 머무르는 공간이었다. DJ나 YS의 비서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들이 하나같이 회고하는, 동교동·상도동 집의 문간방에 해당하는 곳이다. 한 세기 이상을 거치면서도 미처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네 가신정치의 원조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 또한 우리 정치의 엄연한 역사적 자화상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ㅇ김옥균(金玉均 : 1851~1894)
본관 안동(安東), 자 백온(伯溫), 호 고균(古筠)·고우(古愚), 시호 충달(忠達). 조선 고종대의 정치가·개화운동가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하였다.
1851년(철종 2) 충청도 공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안동김씨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출생, 6세 때 재종숙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61년 강릉부사로 부임한 양아버지 김병기를 따라 한동안 강릉에서 생활하다가, 1866년 서울로 돌아와 북촌에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는 사람 사귀기에 능하고 글 잘하고 말 잘하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1870년경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박규수·유홍기(劉鴻基)·오경석(吳慶錫) 등의 가르침을 받으며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874년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1879년에는 개화승 이동인을 일본에 밀항시켜 그 곳의 정세와 개화문물을 살피게 하였다.
1881년에 들어 정부가 통리기문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하는 등 자강 개화에 열의를 보이면서, 1882년(고종 19) 3월 김옥균은 고종의 특명으로 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제1차 일본 시찰 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그는 세계정세와 문물제도에 대해 배우고 메이지유신의 진행 과정을 시찰하였는데, 본국에 임오군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해 8월 하나부사 일본공사가 탄 배에 동승하여 급히 귀국하였다. 군변이 수습된 뒤 그는 그 해 9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이 되어 재차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데 따른 방문이었다. 그는 수신사 일행이 귀국한 뒤에도 그 곳에 남아 일본 문명개화의 선구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과 교유하는 한편, 일본정부 요인들과 만나 개화정책 추진에 필요한 재정지원 문제를 교섭하였다. 그리고 1883년 6월 다시 국채(國債)를 모집하기 위해 고종의 위임장을 가지고, 서재필(徐載弼) 등 일본 유학생을 인솔하여 세번째 일본 방문길에 나섰다.

 

세 차례에 걸친 일본방문을 통해 김옥균은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그는 일본이 동양의 영국같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구 열강처럼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로 탈바꿈할 때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국정 전반에 걸친 대경장(大更張)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양반 신분제도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철도의 부설과 기선의 도입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신식학교의 설립과 신교육의 실시, 자주적 국방력의 양성, 도로의 개선과 정비,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구상은 청의 간섭과 민씨 척족의 견제로 방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쿠데타를 통해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 '위로부터의 근대화개혁'을 단행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는 1884년(고종 21) 3월 군대양성을 위한 300만원의 차관 교섭에 실패하고 일본에서 돌아온 뒤, 개화당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의 기회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 안남(安南: 인도차이나) 문제를 놓고 청불전쟁이 일어나, 그 해 8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3천명의 청군 병력 가운데 절반이 안남전선으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개화당 인사들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10월 말 서울로 귀임한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공사까지 종래의 태도를 바꿔 그들에게 자금과 병력을 빌려 줄 의향을 내비치면서 거사계획은 급진전하였다.

 

마침내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 인사들은 신축한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에 돌입하여 한규직(韓圭稷) 등 민비 일파의 거물 대신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이재원을 영의정으로, 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때 김옥균은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을 장악하고, 정변 이후의 신정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였다. 집권에 성공한 개화당 인사들은 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세워 회의를 열고, 청으로부터의 자주독립, 문벌의 폐지와 인민평등권의 제정, 지조법의 개혁, 국가재정의 호조 관할, 내각제의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혁신정령' 14개조를 작성하여 6일 오전 국왕의 전교 형식을 빌어 공포하였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은 청군의 신속한 무력개입과 기대했던 일본군의 일방적 철수로, 12월 6일 개화당의 신정권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을 맺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김옥균은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박영효·서광범·서재필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일본에 남아 {갑신일록(甲申日錄)}을 집필하였다. 1886년 민씨 일파가 자객 지운영을 보낸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그를 외딴 섬 오가사와라로 추방하였다. 이후 일본정부의 냉대를 받으며 귀양살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그는 1888년 홋가이도로 이송되었다가, 1890년 풀려나 토쿄로 돌아왔다. 그리고 토쿄에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중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李鴻章)과 만나 담판을 지을 결심으로 18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그러나 민씨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상하이 동화양행 객실에서 암살당함으로써(1894. 3. 28) 44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자신의 묘비명처럼 비상(非常)한 재능을 가지고 비상한 때를 만나 비상한 공(功)도 남김이 없이 비상하게 최후를 마친 것이다.

 

그의 시신은 청국과 민씨정권의 밀약에 따라 조선정부에 인도되어,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이라는 이름으로 양화진에서 다시 능지처참을 당하고 효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법부대신 서광범(徐光範)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반역죄가 사면되고, 1910년(융희 4)에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술로는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다.

ㅇ왕조 말기의 대중 정치가 대원군과 엘리트 정치가 김옥균 ...

11. 김구와 안중근
ㅇ 백범(白凡) 김구(金九 : 1876∼1949)
1876.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남. 아명은 창암
1887. 집안 어른이 갓을 쓰지 못하게 된 사연을 듣고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하리라 결심. 아버지가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다가 글방을 차려주어 공부를 시작
1888. 아버지 뇌졸중으로 반신불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고명한 의원을 찾아다님. 백범은 큰어머니 댁 등을 전전
1890. 부모와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가 서당에 다님
1892.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공부를 그만두고 관상 공부. 그 외에 병법과 관련된 책에 관심
1893. 포동 오응선을 찾아가 동학 입도. 金昌洙로 개명. 동학 입도 몇 달 후 연비가 수천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음
1894. 가을 해월 최시형에게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음. 9월 황해도 15명의 접주가 회의하여 거사를 결정. 백범은 '팔봉 접주'로 선두에 서다.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구월산 패엽사로 후퇴, 군대 훈련. 안태훈, 백범측에 밀사를 보내 상부상조하기로 밀약.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동학군 이동엽의 공격으로 대패. 몽금포로 피신. 3개월간 잠적
1895. 2월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몸을 의탁.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가르침을 받음. 5월 김형진을 만나 만주로 중국 기행. 11월 돌아오는 길에 김이언 의병의 고산리 전투에 참가하나 패배, 귀향
1896. 2월 다시 중국으로 떠났으나 안주에서 단발령의 정지와 삼남의병 소직을 듣고 돌아오기로 결심. 3월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때려 죽임. 5월 해주감옥에 투옥. 7월 인천감옥으로 이송. 옥중에서 장티푸스에 걸림. 자살을 기도하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살아남. 8-9월 3차 심문. 10월 법부에서 사형을 품신, 확정. 그러나 고종의 전화로 형집행 정지. 감옥에서 {세계역사} {세계지지} 등으로 서양의 근대 문물을 접함
1897. 강화인 김주경이 백범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
1898. 3월 백범 탈옥. 대신 부모님 투옥. 백범은 삼남지방으로 도피. 늦가을 마곡사에서 중이 됨
1899.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마곡사를 떠남. 4월 부모님 만남. 5월 평양 대보산 영천암 방장으로 장발의 乞詩僧 생활. 9월경 환속하여 해주 본향으로 돌아옴
1900. 강화로 김주경을 찾아가나 만나지 못하고 그의 동생 진경의 집에서 3개월간 훈장 노릇을 함. 김주경의 친구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을 만남. 유완무의 권고로 이름을 龜로 고침.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기 위해 고향에 돌아감. 12월 아버지 돌아가심
1902. 如玉과 맞선을 보고 약혼. 우종서의 권유로 탈상후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
1903. 약혼녀 여옥 병사. 2월 기독교에 입문. 장연읍 사직동으로 이사. 오인형의 사랑방에 학교를 설립. 장연 공립보통학교 교원이 됨
1904. 최준례와 결혼, 최준례를 서울 정신여학교에 입학시킴. 장연 읍내로 이사
1905. 11월 진남포 엡웟청년회 총무 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 전덕기, 이준, 이동녕, 최재학과 함께 을사조약 반대상소를 올리고 공개연설 등 구국운동 전개. 12월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
1906. 장연에 광진학교를 세움. 장연에서 신천군 문화로 이사. 종산의 西明義塾 교사
1907. 김용제 등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 楊山학교 교사. 여름 하기 사범강습회에 최광옥 등과 함께 강사로 참여. 첫딸 사망
1908. 양산학교 중학부 개설. 중학부는 이인배, 김홍량이 담당. 백범은 소학부 담당. 가을 최광옥 등 황해도 교육운동가들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
1909.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서 황해도 각군을 순회하며 환등회, 강연회를 열며 계몽운동 전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한달여만에 불기소 처분. 12월 양산학교 소학부와 재령 保强학교 교장을 겸임. 당시 나석주, 이재명과 만남
1910.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신민회 회의에 참석(이동녕, 안태국, 이승훈, 주진수 등) 서울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만주 이민과 무관학교 창설을 결의. 안악으로 돌아옴. 12월 안명근, 양산학교로 백범을 찾아옴
1911. 1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김홍량, 도인권과 함께 경성으로 압송. 총감부 임시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함. 종로구치감으로 이감. 어머니 옥바라지. 7월 경성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판결.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감옥에서 활빈당 간부를 만남
1912. 일본 明治王의 죽음으로 감형(7년). 다시 명치의 처가 죽어 5년으로 감형. 이름 龜를 九로 고치고 호를 백범(白凡)으로 함
1914. 인천감옥 이감. 쇠사슬에 묶인 채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됨
1915. 둘째딸 화경 죽음. 8월 가출옥,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로 감
1916. 문화 궁궁농장 간검. 셋째딸 은경 태어남
1917. 동산평의 농장의 농감이 되어 소작인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움. 셋째딸 은경 죽음
1918. 장남 인 출생
1919. 3.1운동으로 안악에서도 만세운동. 3월 29일 안악을 출발, 평양, 신의주, 안동을 거쳐 상해로 망명. 9월 상해 임정의 경무국장이 됨
1920. 아내 최준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옴
1922. 어머니도 상해로 옴. 2월 임시의정원 의원이 됨. 9월 임정 내무총장이 됨. 차남 신 출생. 10월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이 됨
1923.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 열림. 임정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림.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의경대 설치, 백범을 고문에 추대
1924. 아내 최준례, 상해에서 사망. 6월 임정 노동국총판을 겸임
1925. 3월 박은식, 임정 임시대통령에 선출됨. 임정,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제로 개조. 4월 임시의정원, 구미위원부 폐지령. 어머니, 차남 신을 데리고 귀국
1926. 국무령 홍진 등 임정 국무위원 총사직. 백범, 국무령에 선출됨
1927. 9월 장남 인을 귀국시킴. 3월 임정, 3차 개헌을 통해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 백범, 국무위원에 선출됨
1928. 3월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미주 동포에게 편지를 보내 임정의 경비의 지원을 요청
1929. 5월 {백범일지} 상권 탈고. 8월 상해교민단 단장이 됨
1930. 1월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조소앙, 이시영, 안공근, 김두봉, 엄항섭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
1931. 일본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창단. 이봉창의거를 계획
1932. 1월 8일 이봉창의거. 4월 29일 윤봉길 의거. 5월 이덕주 유진식, 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에 파견되었으나 체포됨. 상해 각 신문에 윤봉길의거의 주모자가 김구임이 발표됨. 백범, 상해를 탈출. 임정도 상해에서 항주로 옮김. 항주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개각을 단행하여 김구를 군무장에 임명. 6월 백범, 가흥 해염 등으로 피신. 10월 이봉창 순국, 12월 윤봉길 순국
1933.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1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 설치. 이청천 이범석이 교관, 영관으로 지도
1934. 4월 9년만에 가흥에서 어머님과 아들 인, 신을 만남. 가흥의 여사공 주애보를 남경으로 데리고 와서 동거. 12월 남경에서 중앙군관학교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인특무독립군을 조직
1935. 2월 남경에 학생훈련소를 설치하나 일본에게 발각되어 강소성 징광사로 이전. 7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신한민족당, 대한독립당의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을 결성. 9월 조소앙 등,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 10월 임시의정원 의원 16인, 가흥에서 船上 비상회의. 이동녕, 김구, 조완구 등을 국무위원으로 보선.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 여당으로서 한국국민당을 조직. 11월 임시정부, 항주에서 진강으로 이전
1936. 8월 환갑을 맞이함
1937. 7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인애국단 및 미주 5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를 결성. 7월 중일전쟁 발발, 남경 폭격. 호남성 장사로 피난하기로 하고 가족들은 남경을 떠남. 백범, 남경에서 주애보와 이별. 12월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3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 일본군 남경 점령. 장개석, 중경 천도 선언
1938. 5월 장사에서 3당 합당문제가 활발해져 회집, 이운환의 저격으로 의식 불명. 한달간 입원. 현익철은 절명. 7월 임정, 廣州로 이전. 10월 김원봉 등 민혁당측, 조선의용대 조직. 일본군, 한구, 무창, 광동 함락. 10월 임정, 유주로 옮김.
1939. 3월 임정, 유주에서 사천성 기강으로 옮김. 4월 어머니 곽낙원 별세. 5월 민족운동단체 연합을 위해 김원봉과 공동으로 '동지, 동포 제군에게 고함'을 발표. 7월 김원봉계인 조선민족전선연맹과 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합하여 '전국연합진선협회' 결성을 논의
1940. 5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결성. 백범, 중앙집행위원장이 됨. 9월 임정, 기강에서 중경으로 이전. 중경에서 광복군을 결성. 서안에 사령부를 두고 간부 30명을 서안으로 보냄. 10월 임시정부의 임시약헌을 국무령제에서 국무위원제로 개정. 백범, 국무위원회의 주석으로 선출됨
1941. 6월 임정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임정 승인을 요청하는 공한을 발송. 10월 임정 승인문제로 중국 외교총장과 회담. {백범일지} 하권 집필을 시작. 11월 임정,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발표.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임정, 일본에 선전포고
1942. 3월 임정, '3.1절 선언'을 발표하여 중·미·영·소에 대해 임정 승인을 요구. 4월 조선의용대 일부가 광복군에 편입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이 됨. 10월 김원봉 등 좌파, 임정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이 됨. 7월 김두봉, 최창익, 무정 등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결성
1943. 7월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장개석과 회담. 8월 임정의 헌법개정안 문제로 임정내 좌파와 갈등, 주석직 사직을 발표하였다가 갈등 해소로 복귀. 11월 카이로 회담(미·영·중 거두), 테헤란 회담(미·영·소 거두)
1944. 4월 임정,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 백범, 주석에 재선됨. 10월 장개석을 면담하고 임정 승인을 요구. 6월 연합군, 노르만디 상륙. 8월 연합군 파리 입성
1945. 1월 학병으로 끌려간 학병 50여명, 탈출하여 임정을 찾아옴. 3월 장남 인, 세상을 떠남. 4월 임정, 중국과 새 군사협정을 체결. 7월 서안과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 설치, 미군과 연합 작전을 추진.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다노베장군을 만나고, 한인 학생들의 훈련을 참관. 8월 16일 섬서성 주석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음. 9월 한국독립당, 입국에 대비하여 당면 정책, 14개항을 발표. 11월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자격으로 귀국 좌절. 임정 국무위원, 개인 자격으로 두차례로 나누어 귀국.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한 임정 환영대회 개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송진우 피살)
1946. 2월 백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됨.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됨.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한독당으로 통합, 백범은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음. 8월 연합국 원수 및 정당 대표에게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 지원을 요망하는 메시지를 발표. 10월 좌우합작 7원칙 지지성명
1947.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 전개. 2월 비상국민회의를 확대 강화하여 국민의회를 조직. 5월, 한독당 당원들에게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불참을 지시. 5월 제2차 미소공위 개최, 결렬. 10월 한독당 중앙집행위, 남북대표회의 결의. 11월 유엔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 가결(7월 여운형 피살, 12월 장덕수 피살). 12월 {백범일지} 출간
1948. 1월 유엔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의 의견서를 보냄. 2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냄.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와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 총선거 불참을 표명. 4월 북행.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 '공동성명' 발표. 5월 평양에서 서울로 귀환. 7월 북한의 단정 수립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힘. 통일독립촉진회를 조직. 11월 미소양군 철퇴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
1949.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을 세움. 6월 26일 낮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 7월 5일 국민장 거행. 효창공원에 안장

ㅇ 안중근(安重根 : 1879∼1910)
안중근(安重根)은 조선 왕조 말엽인 1879년 9월 2일 황해도(黃海道) 해주읍 (海州邑)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은 고려 말의 이름난 유학자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집안이 넉넉해서 해주(海州)에서 알아 주는 큰 부자였다.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났던 사람 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안태훈은 조(趙)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바로 안중근 (安重根) 의사이다. 안중근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 하여 응칠(應七)이라 했다.
안중근이 7세때, 아버지 안태훈이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다행히 고향으로 몸을 피한 안태훈은 벼슬에 대한 꿈을 버리고 가족을 모두 이끌고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信川郡 斗羅面 淸溪洞)으로 이사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경치가 아름다운 청계동에서 안중근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중근은 일찍부터 서당 에서 한학 (漢學)을 배웠다. 그러나 안중근은 학문에 힘쓰기 보다는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나 그 근처에서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1894년, 안중근이 16세 되던 해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안중근이 살고 있는 청계동에도 동학군이 출몰하자 안중근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사병(私兵)을 조직해 이에 맞섰다. 이때 안중근은 아버지를 도와 사병을 이끌고 청계동 일대에 나타난 동학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이듬해 안태훈은 동학군을 물리치고 얻은 물건 가운데 천여 푸대의 곡식이 나라의 대신 어윤중 (漁允仲)과 민영준 (閔泳駿)의 것이니 돌려 보내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일로 위협을 느낀 안태훈(安泰勳)은 몇 달 동안 성당에 몸을 피해 숨어 지내며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자가 된다. 그 뒤 일이 잘 해결되자 안태훈은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하여 온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된다.
이 무렵 안중근은 김홍섭(金鴻燮)의 딸 김아려(金亞麗)와 결혼했다. 이듬해 안중근은 프랑스인 홍석구(洪錫九, 프랑스 이름은 빌레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토마'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홍석구 신부로부터 프랑스 말과 서양의 학문을 배워 새로운 사상에 눈뜨게 되었다. 그 뒤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황해도 일대를 돌며 천주교를 전하는 데 힘썼다. 또 우리나라가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재를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홍석구 신부와 함께 서울에 있는 민주교(프랑스 이름은 뮈텔)를 찾아가 한국에 대학을 세우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일로 안중근은 외국인은 믿을 수가 없다며 크게 실망하여 프랑스 말을 배우는 것도 그만두었다.
1904년, 한국(韓國)과 만주(滿州)를 서로 차지하려고 러시아와 일본(日本)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일본은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전쟁이 한국을 독립시키고 동양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이 일본의 승리고 끝나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는 커녕 1905년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나라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무렵 안중근은 청계동에서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나라 안팎의 일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안중근은 아버지와 의논한 뒤, 나라를 구할 결심을 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당시 중국의 산동성(山東省)이나 상하이(上海)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옮겨가 살고 있었으므로, 안중근은 그 곳에서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일 터전을 만들고자 했다. 안중근은 중국에 도착해 산동성을 두루 둘러본 뒤, 상하이에 이르러 민영익(閔永翊), 서상근(徐相根) 등을 찾아다니며 뜻을 같이하자고 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안중근은 우연히 황해도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같이한 프랑스인 곽 신부(郭神父)를 만나게 되었다. 안중근은 조국으로 돌아가 교육을 통해 백성을 깨우쳐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곽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여 한국으로 돌아온다.
1905년 12월, 안중근이 조국에 돌아와 보니 그동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중근은 몹시 슬퍼하며 그 해 겨울을 청계동에서 보냈다. 1906년 3월, 안중근은 진남포(鎭南浦)로 이사하여 삼흥학교(三興學敎)를 세웠다. 1907년 7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명을 받은 이준 등의 밀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민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과 맺은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것임을 세계에 널리 알리려던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졌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한 뒤, 우리나라에 관한 모든 일은 일본의 감독 승인 아래 행할 것을 내용으 로하는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군대를 해산하고 산림, 광산, 철도를 빼앗는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무렵 나라안 사정을 지켜보며 안중근은 교육만을 통해서는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깨닫고, 해외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이때 안중근의 나이 29세였다.
1907년, 안중근은 진남포를 떠나 젠다오(間島) 지방을 거쳐 러시아 땅인 연해주(沿海州)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08년 봄, 안중근은 그 곳에서 김두성(金斗星)을 총독으로 하고, 이범윤(李範允)을 대장으로 하는,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자신은 참모중장이 되어 일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 해 7월, 안중근은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慶興)으로 쳐들어가 일본 군인과 경찰 50여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회령(會寧)으로 쳐들어가 일본군 수비대 5천여 명을 물리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의 싸움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안중근은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법에 따라 모두 풀어 주었는데, 이로 인해 의병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뒤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고, 안중근도 굶주림에 시달리며 산길을 헤매다 간신히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안중근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흑룡강성(黑龍江省) 등을 돌아다니며 교포들을 모아 강연을 하고 단체도 조직하면서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북돋워 주는 일을 계속했다. 1909년 2월, 안중근은 엔치아 부근의 카리 마을에서 믿을 수 있는 동지들을 모아 동의단지회(同議斷指會)를 결성했다. 안중근은 그 곳 교포사회에도 일본에 협력하는 무리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김기룡(金基龍), 강기순(姜起順), 정원주(鄭元柱), 박봉석(朴鳳錫) 등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왼쪽 약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고 쓴 뒤 만세를 불렀다.
1909년 가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뒤 중국 땅인 만주까지 빼앗을 계획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으로 보내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와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고 한국의 초대 통감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樞密院) 의장이 된 침략의 우두머리였다. 안중근은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세계에 알릴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사무실에서 독립투사 정재관, 김성무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없앨 계획을 세운 뒤, 1909년 10월 21일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동청(東淸) 철도의 종착지인 동시에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에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하(劉東夏)를 통역으로 삼았다. 또 하얼빈에 도착한 뒤에는 교포 김성백(金成白)의 집에 머무르며 다시 조도선(曺道先)을 동지로 맞았다.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밤새 여러 신문을 모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도착하는 시간과 환영행사 등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이때 안중근은 일본의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의 동청철도가 엇갈리는 채가구(蔡家溝)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를 갈아탄다는 사실을 알아 내고, 채가구에서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의거 전날밤 안중근은 자신의 굳은 뜻을 담은 시 '장부가(丈夫歌)'를 지었다.
하얼빈 역에는 벌써부터 러시아 군인들과 환영객 들이 많이 나와서 이토 히로부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역안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오전 9시쯤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들어와 멎었다. 얼마후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일본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렸다.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 찻집에서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군의장대를 사열한 뒤, 환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군대 뒤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쏠 기회를 노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10보 정도 떨어 진 거리에 왔을 때, 안중근은 재빨리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순간 안중근은 자기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일행중 의젓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3발을 더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던 하얼빈 일본총영사 가와가미 도시히코, 비서관 모리 야스지로, 남만주철도(南滿州鐵道)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 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때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덮쳤다. 안중근은 '코레아우라!(대한만세)'라고 외친뒤 순순히 체포됐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는 곧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 처치를 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곧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등의 호외가 쏟아져 나왔고, 전세계가 떠들썩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환호를 보냈으나, 친일파들은 매우 당황했다. 중국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가 마치 자기들의 원수 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러시아 기병 대위 니키프로프에게 체포되어,
하얼빈역에 있는 러시아 헌병파출소로 끌려가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그날 오후 안중근 의사는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장소가 러시아 땅인 하얼빈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재판소에서 안중근 의사를 재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안중근 의사를 일본 총영사관에 넘기고 재빨리 발을 뺀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조사를 받고 있는 동안 우덕순, 조도선 등 사건과 관련된 동지들이 하나둘씩 잡혀 들어와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에 갇혔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방에서 1차 조사를 받은뒤, 11월 3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여순(旅順) 형무소로 옮겨졌다. 여순(旅順)은 중국 북방에 있는 최대의 항구도시인 다롄(大連)시의 6구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이곳에 관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의 지휘 감독아래 형무소장을 두어 형무소를 맡아 보게 했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旅順)감옥에 갇혀있을 때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자료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정중하게 대해 주었으며 고문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월 14일 여순에서 두번째로 검찰관의 조서를 받기 시작해서 이듬해 1월 26일까지 모두 11번의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조사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검찰관의 태도는 점점 강압적으로 변해갔다. 당시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안중근 의사가 신앙심이 두터운 점 등을 높이 평가하여, 안 의사에게 무기 징역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 내의 강경파가 서둘러 안중근 의사를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보내옴에 따라 관동도독부 법원의 태도도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판정에서 안중근 의사는 다음과 같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대의명분을 밝혔다.
"이 일은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일본 천황은 러일전쟁이 동양의 평화를 지키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에 이겼을 때, 한국인은 마치 우리 나라가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협박하여 을사조약을 맺었다. 그것은 일본 천황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에 한국인은 모두 이토 히로부미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는 강제로 우리나라와 7조약을 맺어 한국인의 불이익은 더해갔다. 또한 한국의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이토 히로부미를 원수로 삼게되었고, 그래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다."
이어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 때문으로, 자신은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이 선고되자,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뒤,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1909년 12월 13일에 쓰기 시작해서 1910년 3월 15일에 끝마친 것으로, 출생에서부터 의병 활동과 하얼빈 의거, 그리고 여순에서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의 옥중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자서전을 끝마친 뒤, 3월 15일부터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을 비판하고 일본·한국·중국이 각기 자주독립국으로 힘을 합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3월 26일에 사형이 집행되어, 안중근 의사는 불과 10여 일 동안에 [동양평화론]의 머리말과 제1장인 전감(前鑒)의 일부분밖에 쓸 수가 없었다. 사형 집행 전날, 안중근 의사는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보냈다.
내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행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 독립을 되찾으면 죽는 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
12. 김마리아와 유관순

ㅇ 김마리아(金瑪利亞 : 1892, 고종 29∼1944)
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서 한학자인 아버지 광산 김씨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세 딸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김윤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공동체로,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소래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삼촌인 김윤오와 김필순은 김구 안창호 등 민족지사들과 막역하게 교류하며 계몽운동에 힘쓰던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모인 김구례(서병호의 부인)·김순애(김규식의 부인)·김필례와 언니인 김함라(남궁혁 목사의 부인)·김미렴 또한 모두 정신여학교를 나와 민족운동에 헌신한 여성지도자들이었다.
소래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김마리아는 1895년 아버지가 세운 소래교회 부속 소학교(4년제)에 들어가 10세에 졸업할 때까지 사내처럼 남장을 하고 고모, 언니들과 함께 한글·산술·위생·성경·역사와 지리 등을 배웠다. 1895년에 아버지를, 1904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김마리아는 외국에 유학시켜 대학공부까지 시키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노백린(盧伯麟)·김규식(金奎植)·유동열(柳東悅)·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은 삼촌 김필순(金弼淳)의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처음에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였으나, 1906년 고모와 언니들이 다니던 장로교파의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의 전신)로 전학하여 1910년에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다니며 그녀는 유각경 등과 의자매를 맺기도 하였다.
그 뒤 김마리아는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다가,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하여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수학한 뒤,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졸업을 얼마 앞둔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재일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 이화학당 출신으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원에 다니고 있던 황에스더(黃愛施德) 등과 동지가 되었다.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 졸업시험을 포기하고 국내에서의 거사를 위해 [2·8 독립선언서] 사본을 변장한 일본 옷 허리띠에 숨긴 채 차경신(車敬信) 등과 함께 2월 15일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뜻밖에 큰고모부 서병호와 둘째고모 김순애를 만났다.
귀국후 김마리아는 대구·광주·서울·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곳 교계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사전준비에 진력하였다. 황해도 봉산에서 독립운동 거사를 논의하던 중 3·1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상경하여 3월 5일 모교인 정신여학교를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튿날 경무총감부로 이송되어 '보안법위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그해 8월 5일 석방되었는데, 이때 당한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과 귀뼈 속에 고름이 끼는 매스토이라는 불치병을 얻었다.
김마리아는 출소하자마자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진작시키고자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그해 10월 3·1운동 직후 최대 규모의 항일 여성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김마리아는 장차 벌어질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애국부인회에 적십자부와 결사부(決死部)를 설치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할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진력하던 중, 그해 11월 조직이 탄로나 애국부인회 간부들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 그녀는 심문을 받으며 "나는 일본 연호를 모른다"고 하여 일본제국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은 김마리아는 고문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병보석 처분을 받고 1920년 7월 상경하여 요양을 하던 중, 1921년 7월 변장을 하고 인천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여 고모부 서병호의 집에서 병 요양을 하면서도 그녀는 상해애국부인회 간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봄 김마리아는 미국에 있는 큰형부 남궁혁의 주선으로 상해를 떠나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하였다. 1924년 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한 뒤, 1928년 시카고대학 사회학과로 진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0년 뉴욕에 가서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뉴욕에서 김마리아는 황에스더·박인덕(朴仁德) 등 8명의 옛 동지들과 근화회(槿花會: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어, 재미한인들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정책을 서방국가에 널리 알리는 한편,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보내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서울 거주권을 박탈당한 채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손여자신학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3년 귀국하여, 이후 신앙으로 여성들을 각성시키는 데 여생을 바쳤다. 1943년 12월 고문 후유증으로 쓰러져 평양 기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1944년 3월 13일 5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시신은 언니 미염에게 유언한대로 화장되어 대동강에 뿌려졌다. 도산 안창호가 "김마리아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던들 한국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김마리아는 한국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독보적인 여성 지도자였다.

ㅇ 유관순(柳寬順 : 1902∼1920)
유관순은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동면 지령리(현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흥양(興陽) 유(柳)씨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은 친척인 유빈기의 전도로 기독교를 믿고 향리에서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운영하는 데 관여하는 한편, 조병옥의 아버지 조인원(趙仁元)과 함께 1908년 설립된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를 이끌었다.
어린 시절 유교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풍이 어우러진 집안 분위기 속에서 학교와 교회를 다니며 배움과 신앙에 몰두하던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를 거쳐, 1916년 4월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한 데 이어, 1918년 4월 고등과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 그녀는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와 학당의 박인덕 선생로부터 민족구원의 신앙을 배웠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은 18세 소녀의 몸으로 동료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3월 13일 고향으로 내려와 인근 천안·연기·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돌아다니며 4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만세시위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3월 31일 매봉의 봉화를 신호로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으로 유관순의 부모는 일본 헌병의 총칼에 찔려 순국하였고, 유관순도 부상을 입은채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송치되었다.
공주감옥에서 유관순은 영명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끌려온 오빠 관옥(寬玉)을 만났다. 공주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중 일제의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항변하면서 재판정에 걸상을 던져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8월 1일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이후에도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등 옥중투쟁을 계속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10월 12일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화학당 측에서 인도받아 정동감리교회 김종우 목사의 집례하에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관련 사적지로는 용두리 지령마을의 유관순 생가와 매봉감리교회, 매봉 봉화터와 아우내 장터의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등이 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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