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민속학은 민간에 전승되는 잔존문화(survival culture)를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민속은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의 공간적인 면과 역사적 조건의 시간적인 면이 어우러져 형성되어진다. 우리의 문화나 신앙은 자연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산악지대에서는 산신신앙이, 해안지방에서는 용신신앙이 형성되는 것은 자연의 영향이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하느님[환인]의 아들[환웅]이 땅으로 내려와 단군을 낳고, 단군이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신화는 그대로 한국인의 종교적 뿌리가 되었다. 단군신화로 불리는 한국종교의 바탕에는 환인·환웅·단군의 삼신일체의 신격[三神]으로 자리잡고, 삼신이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인세에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또한 이 신화에는 한국인이 하느님의 후손이며 단군은 1500년 간이나 세상을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낙천적 인생관도 엿볼 수 있다.
삼신신앙으로 대표되는 한국종교는 샤머니즘의 형식을 빌어 민중사이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잔존문화 전반을 연구하는 것이 민속학의 임무이고 그 중에서 민간신앙은 신앙적인 요소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민속의 밑바닥에 흐르는 정신성은 민간신앙에 의하는 경우가 많다. 즉 민간신앙의 본질을 파악하면 민족문화의 내면성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불교와 유교·도교가 중국에서 이 땅에 유입되고, 17세기 이후로는 서양의 가톨릭과 기독교가 들어와 한국종교의 외모를 많이 바꾸어 놓았지만,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는 여전히 샤머니즘의 정서가 남아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민간의 세계관 및 신앙 체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본고에서는 사찰에 잔존해 있는 삼성각을 중심으로 삼신신앙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민속의 일단을 살펴보겠다. 삼성각은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설명하는 핵심대상이기 때문이다.
Ⅱ. 불교민속의 대상과 불교의례
불교민속은 불교가 주체가 되어 민중에 의해 전승되어 온 민속을 수용·융합한 형태를 지닌 것이라면, 민속불교는 재래의 민속이 불교와 습합 또는 혼합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불교민속의 대상을 홍윤식은 다음의 4가지로 대별하고 있다.
첫째, 신앙의례의 면에서 自行儀禮와 他行儀禮로 구분할 수 있다. 자행의례는 수행을 목적으로 스스로 행하는 신앙의례인데 반해 타행의례는 불교신앙인이 민속신앙적 관심사를 불교의 출가자에 의뢰하여 행하도록 하여 그 공덕을 회향받음으로써 신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신앙형태이다.
넷째,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同信共同體로 염불계(萬日念佛結社, 백년결사), 지장계, 관음계 같은 신앙인의 공동체 전승을 그 대상으로 들 수 있다.
둘째, 구비전승의 면에서 타행의례에 의한 신앙행위의 결과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신앙영험담이 많이 전승하고 있다. 관음영험, 지장영험, 칠성영험, 독성영험, 산신영험이 대표적인 것이다. 신앙의 대상을 신앙한 결과로 얻어졌다고 전하는 영험담과, 법화경영험, 천수경영험, 아미타영험 등 경전 자체의 영험이나 경전을 독송한 영험담이 그 대상이 된다.
셋째, 예능적인 면에서 보면 불교민속극, 불교민속음악, 불교민속무용 등이 예능적 요소를 많이 전승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민속예능은 신앙의례구조에서 전승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넷째,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同信共同體로 염불계(萬日念佛結社, 백년결사), 지장계, 관음계 같은 신앙인의 공동체 전승을 그 대상으로 들 수 있다.
불교의례의 형태를 보면 불교 본연의 불사, 내세·명복을 비는 재, 현세복락을 비는 각종기도들로 구성된다. 민중들은 사찰출입의 대부분을 이러한 이유에서 하고 있다. 우리의 사찰에서 행하여지는 의례들은 다음 3가지로 대별된다.
1) 부처님의 탄신일·출가·성도·열반을 기념하는 4대 명절과 부처님께 드리는 기도
2) 사자의 명복을 비는 49재나 100일재, 고혼의 위령제인 수륙재와 생전에 미리 왕생극락의 길을 닦는 생전예수재 등의 사령재.
3) 현세복락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각종의례, 곧 자식발원과 장수연명을 기원하는 칠성기도, 사업성공과 번창을 비는 산신기도, 풍어를 비는 용신제 등.
2) 사자의 명복을 비는 49재나 100일재, 고혼의 위령제인 수륙재와 생전에 미리 왕생극락의 길을 닦는 생전예수재 등의 사령재.
3) 현세복락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각종의례, 곧 자식발원과 장수연명을 기원하는 칠성기도, 사업성공과 번창을 비는 산신기도, 풍어를 비는 용신제 등.
1)의 부처님께 드리는 예불과 법회 등의 불사는 전문적인 승려와 독실한 불교 신도들의 정규적인 의례인 반면, 2)와 3)에 해당되는 각종의례는 민간에서 신봉되는 기도형 의례로 비정규적 의례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불교의례 속에는 적지 않게 무속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무속과 깊은 교섭관계를 지닌 것이 신도대중의 신앙형태이며, 그 반영으로 표현된 것이 사찰과 거기에 모셔진 神格들이다.
삼국시대에는 七祭 五廟라는 복잡한 제의를 거국적인 행사로 치렀다. 始祖祭와 풍백·우사·사직·영성 등에 대한 제사인 농신제, 그리고 기자·기우·제액·수호 등 目的祭儀, 일월성신에 제사하는 산천제 등 다양하였다. 이와 같은 제의들은 삼국 초부터 불교가 지배했던 신라 말까지 거의 변함없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면서 고대 제천의례 형식으로 행해졌던 각종 국가의례들은 점차 불교의식으로 변화한다. 통일 신라 때에 교학이 완숙기를 지나 불교의 민중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불교신앙과 의례들이 정착된다. 초기에는 미륵신앙과 관련된 의례가 성황을 이루더니, 후기에는 밀교와 선이 확산되면서 염불·게송·참선 등의 불교의례들이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팔관회, 백고좌회, 점찰법회, 밀교의례 등이 정착되는 면모를 보인다.
우리 선인들은 위로는 천지·일월·성신·풍우에서 아래로는 산천·암석·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물에 대해 외경심을 가졌다. 고대인의 초기신앙은 자연환경과 생활을 반영하여 자연의 신비력을 믿는 자연신앙과, 자연현상을 조정한다고 하는 정령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고대신앙은 인간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기능 분화를 진행했다. 초기 단계에서 단순했던 정령신앙은 인간에게까지 미쳐 조령신앙을 낳았고, 농경생활을 정착과 더불어 곡령신앙으로까지 변모함으로써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여러 농경의례를 생성케 하였다. 또한 이러한 관념을 바탕삼아 국가에서는 국태민안의 종교적 기능을 위해서, 민중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를 목적으로 자연물을 신앙대상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고대 제의들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의례와 융합되어 갔다. 산문근처나 사찰입구에 보이는 장승과 돌무더기며, 가람 내의 명부전·시왕전·산신각·독성각·칠성각 등은 바로 그런 융화의 모습이라 하겠다.
그러면 이러한 의례문화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살펴보자.
삼국시대에는 七祭 五廟라는 복잡한 제의를 거국적인 행사로 치렀다. 始祖祭와 풍백·우사·사직·영성 등에 대한 제사인 농신제, 그리고 기자·기우·제액·수호 등 目的祭儀, 일월성신에 제사하는 산천제 등 다양하였다. 이와 같은 제의들은 삼국 초부터 불교가 지배했던 신라 말까지 거의 변함없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면서 고대 제천의례 형식으로 행해졌던 각종 국가의례들은 점차 불교의식으로 변화한다. 통일 신라 때에 교학이 완숙기를 지나 불교의 민중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불교신앙과 의례들이 정착된다. 초기에는 미륵신앙과 관련된 의례가 성황을 이루더니, 후기에는 밀교와 선이 확산되면서 염불·게송·참선 등의 불교의례들이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팔관회, 백고좌회, 점찰법회, 밀교의례 등이 정착되는 면모를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가 국가의 연중행사로 자리잡는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까닭이고, 팔관은 천령과 오악 그리고 명산대천과 용신을 섬기는 까닭이라 밝혔다. 고려불교는 음양과 지리·도참이 혼합된 의례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는 팔관회·연등회·인왕도량·기복도량·소재도량·신중도량·기우도량·화엄도량·제석도량 등 불교법회와 관련된 많은 기록을 전한다. 여기에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적 초재가 많이 보인다.
도교는 또한 무속·산악신앙 등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중요한 산천에 대한 숭배관념을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특히 인종 때에는 묘청의 주장에 따라 서경에 八聖堂을 짓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백두산을 비롯하여 한반도의 큰 산에 대하여 신선과 부처·보살 이름을 붙여주고 숭배한 것이었다. 이와같은 도교·불교·민간신앙이 결합된 종교행사는 고려인의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고려 숙종이후로는 평양에 箕子사당을 세우고 그를 '교화의 임금'(敎化之主)으로서 제사하였다. 檀君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제사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는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三聖堂이 있어서 민간인들의 숭앙을 받고 있었다. 흉년이 들거나 질병이 있을 때 그리고 어린애를 낳지 못할 때 삼성사에 가서 기원하는 민간 풍습이 성행하였다. 이 신앙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이다.
이같은 고려의 종교의례는 여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급진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유교적인 예교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조선은 초기에 유·불 사이의 공존 시대를 지나 16세기에 이르면 불교를 '淫祠'라 하여 탄압한다. 그 즈음 불교적인 의식들은 민간으로 파고들고, 국가에서 행해지던 儀制는 유교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 예론의 발전에 따라 유교의 관혼상제가 민간에 보급 확산되고, 각종 농경의례와 관혼상제가 유교적 형태를 띠게 된다.
Ⅲ. 三神信仰과 巫佛習合
불교가 전해질 때의 다양한 역사적 기록들을 우리들은 많이 알고 있다. 그것은 고유의 신앙형태, 곧 무속과의 대결을 흥미롭게 전한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기존의 사상이나 신앙형태를 배타적 입장에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포용의 종교이자 상생의 종교라 하겠다. 공자가 {논어}에서 생사의 문제를 다루고 귀신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면서 예리하게 비판하는 가운데서도 불교는 중국인들의 중요한 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었으며, 오히려 인도의 불교가 아닌 禪이라는 중국화된 불교를 창안해 낼 수 있었던 것도 불교가 지닌 포용력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우리의 사상종교로 토착화하는 데는 불교 자체가 지닌 포용력에 기인한다 하겠는데, 그 구체적 양상을 여러 형태로 확인해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삼신신앙과의 관련성 속에서 살피려 한다.
1. 山神信仰
산신은 본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우리민족 고유의 토속신이다. 마을마다 산이 있고 산마다 山神이 있어 산신을 숭배했다. 그러다 불교가 재래신앙을 수용할 때 호법신 중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의 일부를 산신에게 부여하였다.
이처럼 삼악·사악·오악 또는 대악이라 해서 대산·명산을 나라에서 지정하여 정기적으로 제사한 것은 산신신앙이 그만큼 강했음을 뜻한다. 한편 마을에서는 일정한 장소를 정하여 수호신으로 받들면서 그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고래로 산신숭배신앙은 천신신앙과 같은 관념에서 출발하였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은 천신에, 환웅은 산신에 해당된다. 산신은 곧 천신의 代行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선인들은 나라를 세운 개국주나 용맹스런 장수들이 사후에 산신이 되어 국가를 보호하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명산을 정하여 호국신으로 숭배하였다. 이는 단군신화에서 단군이 사후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과 신라 헌강왕 때 북악신이 나타나 呈舞한 사례와 경덕왕 때 五岳三山神에 제사드린 사례가 잘 말해주고 있다. 고려 때 역시 덕적산·白岳·松岳·木覓山등 四岳을 무녀로 하여금 춘·추로 대제를 올리게 했고 大岳이라고 해서 지방관원과 민간인에 의해 제사케 했다.
이처럼 삼악·사악·오악 또는 대악이라 해서 대산·명산을 나라에서 지정하여 정기적으로 제사한 것은 산신신앙이 그만큼 강했음을 뜻한다. 한편 마을에서는 일정한 장소를 정하여 수호신으로 받들면서 그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산신은 시대와 종교에 따라서 그 性도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선도산 성모>, <치술산 신모>, <지리산 위숙 성모>, <가야산 정견모주>, <영취산 변재천녀>, <운제산 운제성모>, 김유신(金庾信)에게 나타난 골화·나림·혈례 등의 산신은 모두 女性神이었다. 그러나 유교적 합리주의에 의하여 산신은 남성적 존재로 변하고 산신숭배도 왕조보존을 위한 호국사상의 형태로 바뀌었으며 산신각에 모시는 산신도 수염을 드리운 노인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산신신앙은 민족 심층 내면으로 파고들어 신화·전설·민담 등의 구비문학으로 자리잡았고, 한편 민간에서의 산신신앙도 전국적으로 행해졌으며 크게 2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각 가정에서 행한 古祀가 있고, 다른 하나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행하는 산신제 또는 都堂祭가 그것이다. 즉 의례 속에 유형적 존재로 잔존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산신숭배는 원시적인 자연숭배 신앙에서 유래된 것으로, 장엄하고 험준한 산악은 식물과 금석 등은 물론 맹수의 서식지로 주민의 생활에 있어 경제적인 이익 추구와 더불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또 그 지방 설화 주인공의 출생지로 인정되어 일정한 지역이 문화의 발상지로 숭배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환웅은 태백산의 산신이 되었으며, 단군은 구월산(혹은 아사달)산신이 되었고, 수로는 구지봉의, 해모수는 웅심산의 산신이 되었다. 신라 6촌장은 표암봉과 형산 산정에 하강하여 박혁거세를 맞이하였고, 탈해왕은 토함산에서, 사소성모는 선도산에서 여산신으로 각각 숭배되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선도산 성모설화는 고대의 산신신앙에 불교사상과 신선사상이 모순없이 융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진평왕 때 안흥사의 여승 지혜가 佛殿을 수리하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불전수리를 기특한 일이라면서 "내 자리 밑에서 금 열근을 꺼내 쓰라"고 하였다. 다음날 지혜가 무리를 데리고 신사의 자리밑을 파보니 황금 100냥이 나왔다. 이로써 불전수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도산 성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로 이름을 娑蘇라 하였는데 일찍이 신선술을 배워 신라에 와 머물렀다. 아버지인 황제가 소리개(독수리)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고 하였다. 사소가 그대로 하였더니 소리개가 선도산에 앉았으므로 사소는 그곳의 地仙이 되었다. 이로써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 하였다. 그 뒤 선도산 성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그동안 신비스런 일이 자주 일어나 三祠의 하나로 삼고 차례를 망제의 위에 두었다. 선도 성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대체로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을 말함일 것이다. 그러므로 계림이니 백마 등으로 일컫는 바 닭은 서쪽 방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 때 숭배되던 산신이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기록으로, 산신신앙과 불교가 융화하고 있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다음과 같은 찬시를 지었다.
來宅西鳶幾十霜 招呼帝子織霓裳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위의 시에 '金仙'은 부처를 이름이니 사찰연기설화에 신모의 신이함을 등장시킴으로 불교적 신앙효과도 높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같은 산신숭배 신앙은 가정에서도 뿌리깊이 신봉되어 오고 있다. 즉 후사를 얻기 위한 기자치성을 드리러 산을 찾았으며[山川祈禱] 혹은 절을 찾아 치성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 불공에 산신각이나 칠성각이 기도처가 되고,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미륵불·마애불 등에 공양을 바치고 기원하였다. 가장 오랜 기록으로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왕이 후사가 없어 산천에 기도한 사례가 {삼국유사}에 전해지며, 우리 고소설 주인공 탄생 모티프에 대부분이 산천[산신]에 기구 발원하는 출생담으로 묘사되어 있다.
호법신중 신앙은 중국의 자기(仔夔)가 1150년에 편찬한 {水陸祭儀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을 조선후기인 1724년(경종4년)에 聖能이 수륙제의 의식문을 수정 보충하여 엮어서 혜인사에서 간행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토속신앙 형태와 융화시켜 새롭게 편찬한 책이 {仔夔文節次條例}이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모든 민간신앙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시대적인 신앙형태의 변화에 따라 의식문도 많은 변천을 거쳤다.
민간에서 일찍부터 신앙하던 산신을 여성으로 생각한 것은, 여성의 회임과 출산에 따른 생산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토지신이나 곡신을 여성으로 상상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사고였다. 박혁거세의 모후를 선도산 성모로 상정하고 신라의 수호신으로 믿은 것이나, 고구려의 주몽왕의 모후인 유화를 邃神이라 하여 곡물신으로 숭배한 것은 같은 의미를 띤 신화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와같은 산신숭배 신앙은 가정에서도 뿌리깊이 신봉되어 오고 있다. 즉 후사를 얻기 위한 기자치성을 드리러 산을 찾았으며[山川祈禱] 혹은 절을 찾아 치성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 불공에 산신각이나 칠성각이 기도처가 되고,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미륵불·마애불 등에 공양을 바치고 기원하였다. 가장 오랜 기록으로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왕이 후사가 없어 산천에 기도한 사례가 {삼국유사}에 전해지며, 우리 고소설 주인공 탄생 모티프에 대부분이 산천[산신]에 기구 발원하는 출생담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교에서 산신이 신앙되는 예는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뒤꼍 한 옆에 있는 산신당(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에서 발견되며, 거기에는 산신 탱화가 봉안된다. 또한 불공을 드릴 때, 도량을 지키는 神衆을 맞아들이는 의식인 신중작법에서 산신을 신중의 한 신으로 맞아들여 제의를 행하기도 한다.
산신도(산신탱화)의 기원은 신중도의 도상에 등장되는 인물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신중신앙의 호법선신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또 같은 중단인 명부신앙의 중심격인 지장보살도나 시왕도 등에서도 산신도의 성립을 추리할 수 있게 한다.
호법신중 신앙은 중국의 자기(仔夔)가 1150년에 편찬한 {水陸祭儀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을 조선후기인 1724년(경종4년)에 聖能이 수륙제의 의식문을 수정 보충하여 엮어서 혜인사에서 간행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토속신앙 형태와 융화시켜 새롭게 편찬한 책이 {仔夔文節次條例}이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모든 민간신앙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시대적인 신앙형태의 변화에 따라 의식문도 많은 변천을 거쳤다.
{자기문절차조례}에는 수륙제를 행할 때 받들어 모시는 옹호단의 배치와 자기문 目規, 재의 절차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옹호단에는 제석단, 범천단, 시왕명왕단을 비롯하여 토지가람단, 당산용왕제신단, 당산국사단, 제대산신단 등 10여개의 단이 있는데,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과 순수 민간신앙형태의 것이 있다. 이러한 신중이나 신중단의 내용들은 화엄신중신앙에 바탕을 둔 신중탱화와 결합되어 자연스럽게 불교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신신앙을 오래전부터 전래되어 오는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으로 불교 전래 이후 이들 산신을 三段分壇法에 의해 불법에 귀의케 함으로써 호법선신으로 불교적 수용을 했던 것이다. 그 중, 하단신중탱화의 밑 位目에 '봉청만덕고승 성개한적주산신(奉請萬德高僧 性皆閑寂主山神)'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런데 호법선신으로서의 산신이 불교화한 모습으로 다시 독립된 신앙을 갖게 되어 사원 내에 산신각을 짓고 산신탱화를 봉안하게 된다. 이들 신앙형태를 의궤 내용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南無萬德高僧 性皆閑寂 山王大神
南無北山局內 恒住大聖 山王大神
南無十王法界 至靈至聖 山王大神
南無北山局內 恒住大聖 山王大神
南無十王法界 至靈至聖 山王大神
산신탱화의 도설은 산신의 인격신과 그 화신인 호랑이가 그 내용이다. 산신의 화신으로서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일은 재래의 민간신앙이나 설화({삼국유사} 金現感虎條)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일이고 이 같은 발상법을 불교에서는 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2. 七星信仰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전각이다. 그곳에는 인간 생명의 장수를 주재하는 신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는 도교신앙과 연관이 깊고 중국에서 형성되어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이다. 칠성은 104위 신중탱화에서 보면 상·중·하단 신중 가운데 중단신중으로 여타의 신중과 같이 불법수호에 참여하는 신중 가운데 하나이다.(불보살을 모신 상단에 22위, 호법선신이 주를 이루는 중단에 38위, 기타 신중을 모신 하단에 44위, 이들 각 신중의 성격은 다양하며 인도의 토속신, 중국의 도교의 신격, 한국의 민간신격 등이 함께 배열되어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수호신으로 수용되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다시금 칠성이 독립하여 대중의 신앙대상으로서 수명신 본래의 모습으로 인식되었던 것일까? 그 신앙의 일단을 칠성단 의식의 청사(請詞)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북두 제1은 자손에게 만덕을 주고, 북두 제2는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고, 북두 제3은 업장을 소멸시켜주고, 북두 제4는 구하는 것 모두를 얻게 하고, 북두 제5는 백가지 장애를 없애주고, 북두 제6은 복덕을 두루 갖추게 해주고, 북두 제7은 수명을 오래도록 연장시켜준다. 파군성군은 왼쪽에서 보필하고 오른쪽에서 보필하며, 삼태육성 이십팔수(天球의 28자리)가 두루 하늘에서 빛을 발한다.
칠성은 중단의 44위에서 50위까지 위치하는데, 북극성과 북두칠성에 관한 관심이 자손번영과 수명장수였던 민중의 도교적 신앙이 그대로 불교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력(神力)이 있기에 일반 민중들은 칠성을 신봉하게 되었고, 이런 민중의 염원을 구체화된 부처님의 모습으로 수용하여 불교적으로 변용시켰다. 나아가 도교의 칠성을 불교의 칠여래(七如來)로 신앙하고 있음을 칠성신앙의궤(七星信仰儀軌)나 칠성탱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칠성탱화의 도설 내용을 보면 중앙주불(中央主佛)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그 좌우보처에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 그리고 칠성의 불교화를 나타내는 칠여래와 철원성군, 그 이외 三合六星二十八宿 등으로 되어 있다.
신앙의 형태로 보면 칠성불공을 드린다. 칠성불공은 신도들의 발원에 의하여 시주한 제물로 승려가 불단에 드린 공덕으로 복을 기원하고 재앙을 없애는 것이다. 칠성기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칠성을 주신(主神) 주불(主佛)로 모시고 정진하는 것이다.
위 도표에서 보여 주듯이 칠성신앙의 주불은 치성광여래이다. 치성광여래상은 불신의 毛孔에서 大光明을 발하여 日·月·星·辰 등 諸天曜宿을 굴복시키고 天 ·地異 때 수법하는 본존불로 삼는 불상이다. 보처보설하는 해와 달 그리고 별이 하단개념으로 求福하면 상단구조인 치성광여래 즉 불교 본질인 자비와 지혜를 향하여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불교작법귀감(佛敎作法龜鑑)}에 의하면 칠성불공의식은 칠성각(七星閣)이나 칠성전(壇)에 법주(法主)가 칠성을 청할 때 의식을 간략하게 하기 위해 칠성을 모두 함께 청하는 것을 가리키며, 보다 장엄하게 할 경우에는 일곱 여래를 각각 청하게 되는데 이는 칠성각청(七星閣請)이라 이름한다.
이 기도는 대개 발원한 신도가 직접 참여하거나 해당 사찰 승려가 대신하는 수도 있다. 칠성불공이나 칠성기도를 드리는 시기는 음력 5월 7일, 7월 7일이 제일 많고, 그밖에 귀한 자녀가 병약하여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을 예측할 때는 수시로 날짜를 잡아서 한다.
{불교작법귀감(佛敎作法龜鑑)}에 의하면 칠성불공의식은 칠성각(七星閣)이나 칠성전(壇)에 법주(法主)가 칠성을 청할 때 의식을 간략하게 하기 위해 칠성을 모두 함께 청하는 것을 가리키며, 보다 장엄하게 할 경우에는 일곱 여래를 각각 청하게 되는데 이는 칠성각청(七星閣請)이라 이름한다.
한편 민간신앙에서 칠성신앙은 산신신앙과 함께 중요한 신앙이 되고 있다. 산신신앙이 집안의 재앙을 덜고자 한다면, 칠성신앙은 인간의 수명·자녀생산과 장수를 바라는 목적을 지닌다. 이러한 칠성신앙은 약간씩 형태는 다르지만 전국적으로 통용된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안치하는 것을 칠성판(七星版)이라 하고, 거기에 인간의 명적(名籍)을 관리하는 칠성을 그리거나 구멍을 뚫어놓는다. 또한 열두거리 굿 가운데 핵심부분인 '제석거리'는 인간의 수명을 기원하는 부분으로, 이 가운데 칠성님께 자녀의 수명을 기원하는 내용도 나타난다.
동두는 칠성에 서두(西斗)는 칠성이라. 남두(南斗)는 칠성에 북두칠성님 한가운데 천(天)에 칠성님 여칠성(女七星)님 남칠성(男七星)님이라. 바가치루 넝쿨칠성님 항아리루 옥황칠성님 미륵칠성님이 아니시랴. 칠성님이 받들고 역들어서, 아들애기 열업허구 딸애기 서렵허구 무쇠끈(무쇠줄)에 돌끈 달어서 동방서게 명을 달어서 오이 붓듯 눈 붓듯 도와 주시구 이 정성 디려놓고 자손에 흠헌일 없구 악헌일 없이 도와주시마.
조선시대에는 특히 기자(祈子)신앙과 연관되어, 자녀 낳기를 원하고 수명장수를 비는 사람들이 주로 칠성에 불공을 올렸다. 그 많은 칠성계(七星契)는 이런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칠성을 불교에서 재빨리 흡수했던 것이다. 바로 불교 토착화의 패턴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칠성신앙이 불교에 포섭된 시기에 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신라·고려시대에도 세워졌으리라 추측되지만, 조선조 현종 이후 사찰의 승려들이 전조(田租)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齋)·불공(佛供)·축복(祝福)·의식(儀式)에 의해서 생활을 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산신각·독성각·칠성각이 반드시 사찰에 부설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칠성각은 이미 정종조 때에 도교적인 속신이 불교로 포섭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이 칠성신앙을 믿음으로써 여러 세속적 효과를 기대했다. 첫째는, 인간 수명 연장이고, 둘째는, 생자득남(生子得男)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대인(大人)이나 위인(偉人)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칠성님이 부처님의 명(命)을 받아 인간의 죄업과 재액을 주관하여 천복소재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칠성신앙으로 호국을 하고 국토의 재앙을 양재하며 병재를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칠성신앙은 오늘날까지 불교신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민중들에게도 자연스러운 신앙형태로 수용되어져 왔던 것이다. 그것은 매우 독특한 한국 불교 문화의 한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한국 민중의 세속적 기원을 불교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전승되었다 하겠다.
3. 獨聖信仰
하얀 머리카락에 기다란 눈썹의 노인을 우리는 사찰 한 귀퉁이의 독성각(獨聖閣)이란 데서 바라볼 수 있다. 이 독성각은 불교 본래의 독성신앙에 단군신앙을 결합시킨 공간이다. 곧 독성각은 불교의 토착화를 설명하는 좋은 대상인 것이다.
독성은 일반적으로 천태산(天台山)의 나반존자(那般尊者)라 한다. 범어로는 빈두로파라타(賓頭盧頗羅墮, Pindolabharadvaja)라고 하는데, 인도에서는 소승절에서 그를 상좌로 하는 풍습이 있으며, 중국 동진의 도안(道安)이 처음으로 신앙하고 송나라 태조 말기(471)에 법현과 법경 등이 그의 형상을 그려 공양했다고 전한다. 빈두로존자님의 사명은 영구히 이땅에 머물면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그들의 재액을 덜어 주라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아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석문의범(釋門儀範)}에는 '천태산상(天台山上) 독수선정나반존자(獨修禪定那畔尊者), 천상인간응공복전나반존자(天上人間應供福田那畔尊者), 천인열반대사용화나반존자(天人涅槃待 龍華那畔尊者)로 설명되어 있다. 그는 원래 나한계(羅漢界)에 속했으나 16나한과 더불어 열반에 들도록 부처님이 허락하지 아닌한 까닭에 홀로 남인도 천태산(天台山)에 머무르며, 홀로서 수도하고 있는 성자(聖者)로 말법(末法)시대의 중생이 복덕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여겨지는 존재이다. 내세(來世)에 사람들이 독성에게 빈다면 도를 빨리 깨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반'이란 존재나 용어는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 사전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로 보아 이것은 賓頭盧와는 달리 한국 고유의 신명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를 특히 독성(獨聖)이라고 한 것은 무불세(無佛世)에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獨覺佛)'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한국에서의 독각불은 다름 아닌 단군왕검이라 믿어 그를 독성님이라 했다고 한 것은 독성 이해에 좋은 실마리로 보인다.
Ⅲ. 맺음말
이상의 삼신신앙 체계는 도교적인 칠성과 고유의 산신신앙 그리고 불교적인 독성을 함께 모신 한국적 종교혼합주의의 전형적 사례로 알려져 있다. 곧 무불선(巫佛仙) 삼교융합의 상징으로서 민중의 외래 종교 수용 형태라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삼신신앙 체계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삼신신앙(三神信仰)이 도교나 불교의 이름만 차용한 채 사찰에서 전승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단군계 교단의 학설이 있다. 이는 동학을 위시하여 대종교, 증산교 등 신종교 운동의 신앙체계와 관련하여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한국불교의 토착화는 일반 土俗信仰의 대상을 무조건 배척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삼단분단법에 의하여 佛法에 歸依케 함으로써 불교적인 수용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세에 이르러 한용운 선사는《朝鮮佛敎維新論》에서 독성을 小乘의 성자라 숭배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여 비판하였고, 산신, 칠성 등의 신앙 대상물들 역시 철폐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靑潭스님도 三聖佛畵를 불태웠다고 하며, 性徹스님 역시 칠성과 산신에 대한 禮敬儀式을 비판하고 폐지하였다.
결과적으로 불교는 인도·중국·한국의 각 민간신격들을 혼용하여 민중의 현실적 욕구를 해소하면서 그들을 불법에 귀의시키고자 했다. 그 실천적 방법으로 민간의 산신불공·칠성불공·용왕불공 그리고 중단의 신중불공을 포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불교의 토착화는 일반 土俗信仰의 대상을 무조건 배척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삼단분단법에 의하여 佛法에 歸依케 함으로써 불교적인 수용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세에 이르러 한용운 선사는《朝鮮佛敎維新論》에서 독성을 小乘의 성자라 숭배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여 비판하였고, 산신, 칠성 등의 신앙 대상물들 역시 철폐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靑潭스님도 三聖佛畵를 불태웠다고 하며, 性徹스님 역시 칠성과 산신에 대한 禮敬儀式을 비판하고 폐지하였다.
과거의 민속사항이나 고유사상이 현재 퇴색되어간다는 이러한 주장은 불교 내적인 시각이며 삼신신앙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한 인식 때문이라고 본다. 불교의 자비정신 구현을 위해선 聖과 俗을 민중들이 깨우칠 수 있게끔 이끄는 것이 종교의 책무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世俗事의 욕구를 승화시켜 불법에 귀의케 되면 聖事가 되지 않겠는가.
한편 종교문화면에서 한국은 전통적인 민간신앙에 불교·유교·기독교 등을 수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민간신앙은 주산업이었던 농경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 왔다. 지금도 국가 공휴일 총 13일 중 종교신앙 관련이 5일이 된다. 개천절·추석·설날 등의 세시풍속을 계승한 것과 불교의 석가탄일과 최근의 기독교 성탄절을 지키는 것이 그 반증이 되겠다.
주제어: 삼신신앙, 삼성각, 산신신앙, 칠성신앙, 독성신앙, 토속신앙, 삼단분단법, 민간신앙, 불교의례, 불교민속, 한국불교의 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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