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용헌의 영지 기행_02

醉月 2012. 3. 15. 09:59
주역 천산둔의 결정 대둔산 석천암(大芚山 石泉庵)

부도가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살다 보면 절대 위기상황에 몰릴 수 있고, 이때 연탄가스로 자살하는 것보다는, 어디로라도 도망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빚도 갚는 것 아닌가! 그러자면 평소에 어디로 탈출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 


천하통일 이후에 한고조 유방이 죽이려고 하자 장자방(張子房)은 호남성의 기암절벽 기둥 수천 개가 탑처럼 솟아 있는 장가계(張家界)로 튀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기암절벽과 구름, 그리고 석이버섯밖에 없는 장가계에서 비록 배는 고팠겠지만 쫓아오는 추격자를 따돌리고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고려 중기의 이자현(李資玄,1061~1125)은 부인이 죽자 인생살이의 덧없음을 뼛속깊이 절감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춘천의 오봉산(五峰山) 자락에 있는 문수원으로 숨었던 것이다. 오봉산 자락은 당시 고려 왕실에서 무등산(無等山) 도사로 알려졌던 은원충(殷元忠)이라는 일급 술사가 평소에 보아 두었던 지점을 이자현에게 넌지시 천거해 주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둔산(大芚山)은 인생의 막바지에 몰렸던 중생들이 숨어들었던 산이기도 하다. 우선 이름 자체부터가 범상치 않다. ‘둔’(芚)자가 들어간다. ‘둔’(芚)자에서 풀 ‘초’(艸)를 떼어내면 ‘둔’(屯)이 된다. 한자는 발음이 같으면 비슷한 의미로 통하는 법이다. ‘둔’(屯)은 다시 ‘둔’(遯)과도 통한다. 둔(屯)은 군대가 진을 친다는 ‘둔’자다. 산세가 창검을 쳐들고 있는 것처럼 날카롭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대둔산은 편안한 산이 아니다. 기운이 강하고 날카로워서 무골(武骨)이 좋아할 만한 산이다. 자기 기질 따라 좋아하는 산의 스타일도 다르다. 원만한 성품은 둥글둥글 하고 흙이 많은 육산(肉山)을 좋아하기 마련이고, 과격 성품은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골산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 바위 암벽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대둔산은 주역 33번째 괘인 천산둔과 상당히 관련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도시독’ 제거에 바위산길이 특효
석천암(石泉庵) 올라가는 산길은 가파르다. 길 주위를 둘러싸는 바위절벽들이 사람을 좌우에서 압박하는 형세라, 스마트폰과 보일러 방에 익숙한 문골(文骨)들은 위협감을 느낄 만한 지세다. 아스팔트와 네온사인과 아파트로부터 쌓인 ‘도시독(都市毒)’을 뽑아주는 데에는 특효이다. 바위를 만지고, 바위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시면 아랫배까지 숨이 내려오는 것 같다. 다시 바위에 뺨을 비비대어 본다. 암벽이야말로 ‘도시독’의 해독제 아닌가! 돼지고기에 새우젓이다.


적막강산의 석천암에는 음력 동지섣달의 칼바람만 불고 있다. 앞산은 눈이 뿌려서 하얗다. 등산객도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문득 ‘춥고 배고프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렇게 추운 겨울산 암자에서 먹을 것도 없었던 옛날에는 얼마나 서러운 인생이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 배고픈 암자의 주지는 천산(天山) 스님이었다. 이 적막강산의 석천암에서 10년 넘게 살았으니, 대둔산의 산기운을 받은 셈이다.


▲ 대둔산 험한 절벽 끝에 석천암이란 암자는 인적이 드물고 숨어서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계백장군·동학군의 최후 저항지이기도
천산 스님에게 대둔산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백제 계백 장군의 오천 결사대가 최후까지 싸웠던 장소가 이 산의 수락계곡이요, 군지계곡이 아닌가 싶다. 전투는 황산벌에서 이루어졌다고 역사에 나온다. 백제와 신라의 정예 병력이 대회전을 벌였던 황산벌은 바로 이 대둔산 옆이다. 그리고 황산벌 바로 옆에 벌곡(伐谷)면이 있는데, 벌(伐)은 ‘창칼로 치다’, ‘창칼로 베다’는 뜻이 있다.


역사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임을 암시하고 있다. 석천암은 행정구역상으로 충남 논산시 벌곡면에 포함된다. 계백의 군대는 신라군에 몰려서 아마 이 대둔산 군지계곡까지 왔을 것 같다. 군지(軍止)계곡은 ‘군대가 머무르다’는 뜻이다. 계곡 양쪽이 수십 미터의 절벽으로 둘러싸고 있는 아주 좁은 협곡이다. 이 계곡 끝자락은 역시 수십 미터의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외통수 지형이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이런 지형은 소수의 병력이 자기보다 숫자가 훨씬 많은 적과 전투를 끝까지 치러낼 만한 형국이다. 병목의 앞만 방어하면 되니까 말이다. 황산벌, 벌곡 전투에서 밀린 병력들이 군지계곡으로 후퇴해 최후까지 저항하지 않았나 싶다. 수락계곡도 현재 한자는 ‘수락’(水落)으로 되어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수급(머리)이 떨어졌다’는 ‘수락’(首落)이라고 추측된다. 계백 장군의 목이 떨어진 곳이 바로 ‘수락계곡’인 것이다. 계백 장군과 백제 결사대가 신라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한 장소가 바로 이 대둔산이요, 수락계곡과 군지계곡이라고 추측된다. 석천암은 이 계곡을 통과해 올라오게 되어 있으니 의미가 심장하다.”


대둔산은 동학군의 최후 저항지이기도 하다. 10만이 넘는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동학군 일부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대둔산으로 들어왔고, 일본군은 대둔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면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마지막 동학군이 사살된 지점은 대둔산 장군봉이다. 장군봉 옆에는 윗부분이 넓적한 바위 절벽이 있다. 사람이 쉽게 올라가기 힘든 험한 절벽이다. 천산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바위절벽 위에는 약간의 물도 나오기 때문에 사람이 거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동학군 7명이 여기에서 일본군에게 죽었다. 남자 3명, 여자 2명, 어린아이 2명이었다. 일본군은 7명을 사살해서 대중에게 전시한 다음에 마지막 동학군 토벌을 끝냈다고 선포했다. 몇 년 전 동학연구 단체가 장군봉의 이 바위절벽 위에서 동학군들의 유품을 발견했다고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동학군 이후에는 6·25 때 빨치산들이 이 대둔산에서 치열하게 저항했다. 석천암 올라오는 길 초입에는 이때 전사한 경찰들의 진혼탑이 있다. 1,000명 넘는 경찰이 죽었는데, 빨치산도 이와 비슷한 숫자라고 한다. 지리산의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고향이 바로 대둔산 자락에 있는 ‘진산면’이다. 대둔산의 기운이 진산면 자락으로도 강하게 흘러갔다. 이현상도 지리산에 가기 전에는 이 대둔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 때 야당 당수가 유진산이다. ‘왕사쿠라’란 별명을 가진 유진산이었지만, 정작 본인 앞으로는 한 푼도 챙기지 않았던 협상의 귀재 정치인이었고, 고향 또한 진산면이었다. 진산면과 금산면은 1960년대 중반까지는 전북에 속했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에 충남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이현상과 유진산은 같은 고향친구였다. 초·중등학교를 같이 다녔고, 부잣집 아들이었던 유진산은 가난했던 이현상을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아주 절친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고 진산면의 촌로들은 전한다. 한 사람은 대둔산에서부터 빨치산을 하다가 결국 지리산에서 총을 맞고 죽는 팔자가 되었고, 야당 당수였던 유진산은 낮에는 박정희와 대립했지만, 밤에는 같이 술을 먹고 동생 형님을 하면서 정치협상을 하는 정치인의 길을 갔다.


▲ 우암 송시열이 석천암에서 공부하다가 바위에 새긴 것으로 알려진 침석과 수천 두 글자가 보인다.

유진산·이현상의 고향도 대둔산 인근
필자가 의산(懿山)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원래 유진산의 증(고)조부는 짚신장사를 했는데, 하도 정직하고 성실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었다고 한다. 어느 날 지나가던 지사(地師)가 짚신을 사다가, 이 짚신장사의 마음이 후덕한 것을 알고 그 보답으로 묫자리를 잡아주게 되었다. 유진산 증조부가 이 나이든 지관을 등에 업고 산을 올라가 잡은 묫자리가 대둔산 자락에 있었는데, 이 터를 쓴 뒤로 발복하여 유진산 집안이 재물을 모으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진산도 통이 커서 넓은 기와집인 자기 집에 놀음판을 제공하고, 노름꾼들로부터 구전(자릿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노름꾼으로부터 받은 구전은 동네 머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 인심을 바탕으로 유진산이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진산도 대둔산 자락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인물이 아닌가.


둔(屯)이 군사적 맥락이라면 발음이 같은 ‘둔’(遯)은 주역(周易)의 뜻을 담고 있다. 주역의 64괘 중에 33번째 괘가 바로 ‘천산둔’ 괘이다. 위에는 건(천)이 있고, 아래에는 간(산)이 있다. 하늘 아래 산이 있는 형국이다. 보통 ‘천산돈’으로 읽는다. 만약 괘를 뽑아서 이 천산돈 괘가 나오면 세상에 나오지 말고 은둔(隱遁)해야 하는 것이다.
논산에서 대둔산 오는 도로 중간에는 돈암서원(遯巖書院)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조


조 예학(禮學)의 종장이라 일컬어지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을 모셔놓은 서원이다. 왜 서원 이름이 ‘돈암’인가? 김장생이 임금으로부터 여러 번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하라고 부름받았다. 벼슬을 할 것인가, 아니면 산림에 남아 제자를 양성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주역의 괘를 뽑아 보았더니, 천산돈(둔)괘가 나왔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벼슬 준다고 해도 날름 받지 않고, 신중하게 처신을 고민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래서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 남아 제자양성에 주력했다. 사계의 제자가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이고, 아들이 김집이다.


중국의 주자도 장년기에 들어 당시의 권력 실세를 비판하는 강력한 상소문을 써서 이를 조정에 제출하려 했다. 주자의 제자들이 말렸다. “너무 세게 나가면 선생님이 다칩니다.” 제자들과 상의 끝에 괘를 뽑아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천산돈 괘가 나왔다. 주자는 이 괘를 뽑고 나서 겸허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반발효차인 ‘대홍포’라는 차로 유명한 무이산(武夷山)으로 들어가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짓고 계곡에서 죽벌(竹筏) 타고 놀았다는 것 아닌가.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1958)은 1945년 광복이 되자 괘를 뽑아 보았다. 천산돈 괘가 나왔다. 숨어야 한다. 야산은 대둔산으로 숨어 들어왔고, 대둔산에서도 하필이면 석천암으로 들어왔다. 계백 장군이나, 임진왜란, 동학, 6·25 때는 칼과 총을 든 무인들이 대둔산으로 들어왔지만, 야산은 학자였고, 도인이었고, 주역의 대가였다. 문사가 숨으러 들어온 것이다.


야산의 주역 해석은 독특했다. 미래에 대한 예측과 지명(地名)을 연관시키는 해석법이었다. 예를 들면 8·15 광복을 3일 앞두고 야산은 제자들을 이끌고 경북 문경(聞慶)으로 갔다. 문경군 문경읍 문경리였다고 전해진다. 광복 하루 전날 멍석을 깔아 놓고 제자들과 같이 막걸리를 마시면서 닭춤을 추었다. “꼬끼오! 꼬끼오!” 다음날 광복이 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경사스러운 일을 듣기 위해서 문경으로 갔던 셈이다. 문경(聞慶)은 ‘경사를 듣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필자가 석천암 주지 천산 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이 내공 쌓아
광복이 되고 좌우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과정에서 야산은 천산돈 괘를 뽑았고, 대둔산의 ‘둔’자가 바로 천산돈의 돈(둔)과 발음이 같다. 그래서 대둔산으로 왔다.


대둔산은 동쪽에 태고사(太古寺)라는 유명한 고찰이 있다. 호서와 호남에서 ‘1태고(太古), 2월명(月明), 3운문(雲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태고사는 영험한 도량이었다. 산의 8부 능선쯤에 위치해서 전망이 시원하게 나온다. 태고사 마당에 올라서서 앞을 바라보면 첩첩산중의 산풍경이 펼쳐져 보여서, 태고의 풍광을 보여준다. 뒤에는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최근까지 100세 넘게 장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신 도천(道川) 노장이 주석하던 절이다.


대둔산 남쪽에는 안심사(安心寺)가 있다. 국세가 커서 작은 암자급은 아니고 큰 절에 해당한다. 야산은 큰 절을 택하지 않고 험한 절벽 끝에 있는 작은 암자인 석천암을 택했다. 인적이 드물고 숨어서 공부하기에 더 좋다고 여긴 것 같다. 야산은 석천암에 들어와 제자를 양성했다. 석천암에서 수십 명의 제자를 받고(일설에는 108명의 제자), 유교경전과 주역을 공부시켰다. 제자들에게 함부로 세상에 나가지 말고 산속 암자에서 공부나 할 도수(度數.운수)라고 강조했다.


인생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판단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이럴 때는 혼자서 판단 못 한다. 고수의 지도가 필요하다. 한번 판단 잘못해서 길을 잘못 들어가면 빼도 박도 못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목격하지 않았던가.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은 야산의 아들인데, 10대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이 석천암에서 한문공부를 했다고 회고한다. 이이화의 이(離)는 주역팔괘의 하나인 ‘이’(離)괘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광복 이후 좌익이다 우익이다 해서 얼마나 혼란스러웠는가. 이 혼란기에 야산은 따르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석천암에 들어와 주역공부를 했으니,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얼마나 지혜 있는 행동이었는가. 그야말로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전형이다.


석천암은 이름 그대로 물맛도 일품이다.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물이 좋아야 피가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명당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물맛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이 안 좋으면 장수 못 한다. 암벽 사이로 흐르는 석천(石泉) 양 옆의 암벽에는 희미하게 한자가 새겨져 있다. 침석(枕石)과 수천(漱泉)이라는 글씨다. 우암 송시열이 새겼다고 전해진다. 우암은 대둔산 태고사 입구의 바위에도 글씨를 남겼고, 태고사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석천암으로 와서 공부했는데, 이때 남긴 글씨라고 한다. 침석이 새겨진 위치는 공부하다가 잠깐 서서 뒤로 등을 대면 머리 부분이 침석 글씨 부위에 맞닿게 되어 있다. ‘수천’은 매일 ‘양치질 하는 샘물’이라는 뜻이다. ‘침석’과 ‘수천’의 한 글자씩을 붙이면 ‘석천’이 된다. 고사성어에 ‘침석수류’(枕石漱流)라는 말이 있다. ‘돌베개를 베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 한다’는 뜻이다. 이름이 ‘석천암’이니까 ‘침석수천’(枕石漱泉)으로 뒤에 한 글자를 바꾼 셈이다.


대둔산은 주역의 33번째 괘인 ‘천산돈’(天山遯) 괘와 인연이 깊은 산이다. 돈(遯)은 은둔(隱遁)이기도 하다. 숨어서 공부를 하고 몸을 보존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세상에 나온다. 세상에 나올 싹을 기르고 보양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 새싹이 돋는다는 ‘둔’(芚)이 된다. 둔(芚), 둔(屯), 돈(遯)이 일맥상통한다.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이 광복 이후에 좌우익의 혼란과 충돌을 관망하면서 내공을 쌓던 유서 깊은 영지(靈地)가 바로 석천암이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약임상의 분류체계와 정립   (0) 2012.04.16
조용헌의 영지 기행_03  (0) 2012.04.03
음식과 藥의 道를 말하다_01  (0) 2012.03.06
불교와 민속신앙   (0) 2012.02.22
조용헌의 영지 기행_01  (0) 2012.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