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부가 '후천개벽' 깨달음 얻은 계룡산 향적산방
인생 살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타이밍을 잡는 일이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 언제인가? 이것을 공자는 시중(時中)이라고 말했다. 50대 후반부터 14년 동안 밥 얻어먹으면서 떠돌이 생활을 경험했던 공자도 자기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게 ‘시중’이라고 고백했다. 주식을 사고 팔 때도 그렇지만, 지금 내 인생에서 ‘치고 나갈 때인가? 아니면 스톱할 때인가?’를 수시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 내 인생이 몇 시인가를 아는 일이 어디 쉽던가! 개인사적인 측면에서도 시간표 알기가 어려운 문제인데, 이를 확대시켜 우주사(宇宙史)적인 차원에서 시간을 이야기한 인물이 있다. 구한말 계룡산 향적산방(香積山房)에서 도통한 김일부(金一夫,1826~1898) 선생이다. 일부(一夫)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우주적 시간이 선천(先天)이라면, 이제부터는 후천(後天)이라 규정했다. 우주사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된다는 시간표를 제시한 셈이다.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처럼 거대담론인 ‘후천개벽’ 이야기는 없다. 오직 한국에서만 있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 보면 독창적인 거대담론이 아닐 수 없다. 우주시(宇宙時)가 변하면 역사시(歷史時)가 변하고, 역사시가 변하면 인간시(人間時)도 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후천개벽이라는 우주시가 새롭게 열리면 우리 인간사회는 어떻게 변한다는 말인가? 필자가 1970년대에 계룡산파(正易派)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여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온다”, “앞으로 애기 낳기 힘들어진다”, “한반도는 세계사의 주역이 된다”, “기후변화가 온다” 등이다. 김일부를 계승한 정역파(正易派)의 예언 가운데 ‘수석북지(水汐北地), 수조남천(水潮南天)’이라는 내용이 주목을 끈다. ‘북쪽의 물이 빠져서 모두 남쪽 하늘로 몰려든다’는 뜻이다.
1970년대에 오대산의 탄허 스님이 국사(國事)에 대한 예언으로 유명했는데, 그때 그 양반이 심심치 않게 했던 이야기가 ‘앞으로 일본은 물에 가라앉는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물에 잠긴다’는 근거는 위의 ‘수석북지 수조남천’이다. 북극의 얼음물이 녹아 바닷물이 불어나면서 일본이 잠긴다는 추론을 한 것이다. 김일부의 독창적인 저술인 ‘정역’(正易)에서 나온 이야기인 것이다. 1970년대 일본이 가라앉는다는 예언은 작년에 일본 동북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을 보면서 ‘수조남천’이 현실적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왔다.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봐도 근세 100년 사이에 선천이 가고 후천의 개벽(Great open)이 온다는 우주사적인 변화를 예언한 예언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매일 매일의 주식시세 예측은 많다. 그 시세 예측이라는 것도 대부분 맞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계룡산에서 5만년 단위의 예측이 나왔으니 이 어찌 독특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의 영발도사(靈發道士) 문화의 유구한 축적에서 나온 예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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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라한 판잣집 신세로 전락한 향적산방이 후천개벽의 사상체계를 완성한 장소라고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계룡산 향적산방을 찾아간 이유는 김일부가 도통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매립한 난지도 같은 곳에서 도통하기는 어렵다. 영지에서 도통한다. 그래서 도사는 땅의 기운이 뭉쳐 있는 영지를 찾아간다. 계룡산은 산 전체가 영지이다. 산 전체가 통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위가 거대한 덩어리로 되어 있을수록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강하다. 바위의 기운이 강해야만 이 기운을 받아서 스케일이 큰 사상을 품게 된다.
‘계룡’(鷄龍)은 이름 자체부터가 특이하다. 어떤 의미인가. 닭은 시간이 되면 우는 동물이다. 새벽이 왔음을 알려준다. 때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용은 어떤가. 조화를 부리는 영물이다. 힘이 있다.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면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다. 이때 온갖 재주를 부린다. 닭과 용을 합했다는 것은 ‘때가 오면 힘을 쓴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계룡은 ‘때’를 알리는 산이다. 후천개벽의 교과서인 ‘정역’(正易)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계룡산에서 나왔다. 지금부터 3,000년 전에 주나라의 문왕이 ‘주역’을 만들었다면, 3,000년 후에 계룡산에서 김일부에 의해 업데이트 판인 ‘정역’이 나왔다고나 할까.
향적산방은 계룡산 국사봉(國師峰) 올라가는 6부 능선쯤에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계룡산은 앞쪽이 바위 절벽이 솟아 있어서 닭의 머리로 본다. 닭은 벼슬이 있지 않은가. 솟은 암벽이 닭벼슬 모양으로 본다. 그 뒤쪽으로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연산(連山)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연산 쪽의 산줄기는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국사봉은 닭의 대가리와 용의 꼬리로 이루어진 전체 계룡산 가운데 중간 부위에 있다. 용의 엉덩이뼈 근처라고나 할까. 이 돌출된 용의 엉덩이뼈가 국사봉이라고 생각된다.
국사봉이라는 명칭도 재미있다. 우리나라 여러 군데에 국사봉이 있다. ‘국사가 나온다’는 뜻일까.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국사(國師)나 왕사(王師)가 있었다. 조선시대로 오면서 불교는 직위해제되고 유교가 국교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국사는 ‘국지사’(國地師)를 뜻한다. 왕실 전용 지관(地官)이 국지사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고승들이 담당하던 풍수지리의 영역을 과거시험에 합격한 중인층의 지관으로 대체했다. 지관 가운데 실력 있는 고수로 인정받으면 왕실 전용 지관으로 대접받았다. 이게 ‘국지사’이다. 조선시대에 생긴 국사봉들은 대개 국지사들이 왕실의 어명을 받고 그 지역으로 내려가 전체 지세를 관망하던 ‘뷰포인트’ 들이다. 왕자의 태(胎)를 담은 태실(胎室)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서, 또는 전국에 특별한 명당이 어디에 있는지를 평소에 파악해 두기 위해서 왕실에서 국지사를 현장에 파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국사봉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계기는 풍수지리를 보던 국지사들이 올랐던 봉우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계룡산 국사봉은 전국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는 국사봉이다. 전국 ‘국사봉의 왕’이라고나 할까. ‘국사가 나온다’는 뜻과, ‘국지사가 올라간 봉우리’란 뜻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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