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서정자아의 근대적 변모와 그 한계

醉月 2012. 4. 19. 08:20

서정자아의 근대적 변모와 그 한계
-낙하생 이학규(洛下生 李學逵)의 한시를 중심으로

 

 1. 한국한시의 학적 고찰을 위한 몇 가지 물음
한국한시는 요즈음 아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국문학 전체를 이해하기 위하여 한문학을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새삼스러운 것이 되었고, 한문학 가운데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한시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시 연구에는 그 연구를 학문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두 가지 독단이 숨어 있는 듯하다.

 

첫번째 독단은, 한시는 감상을 통해서만 가까이 할 수 있어서 한시연구란 감상을 통해 풍격과 주제를 알아보는 일에 그치기 마련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물어볼 수 있다. 한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문학작품도 우선은 감상을 통하여서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인데도 단순한 감상을 넘어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독단은 올바른 연구방법을 찾지 못하고 단편화된 인상이나 나열하는 안일한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문학은 작가 개인이나 혹은 작가가 속해 있는 집단이 그를 혹은 그 집단을 둘러싼 세계를 형상화하여 인식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문학의 양태·양식·장르는 그것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동떨어질 수 없으며, 세계의 변화와 문학의 발전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문학연구는 바로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는 일이므로, 한시연구는 역사발전과 한시양식 변화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또한 학문은 연구자를 둘러싼 세계를 그때마다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적극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한시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강요를 모른 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한시연구에 숨어 있는 또다른 독단은, 한시는 서정시 장르라서 신라시대에서나 고려시대에서나 조선전기에서나 조선후기에서나 그 본절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정에서부터 때로는 조선후기에 한문단편이 소설화하는 과정과 비교할 때 한시는 시효가 다 된 낡은 장르였다고 주장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독단에는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로, 한국한시가 모두 서정시로 규정될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한시가 모두 서정시라면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서정시이거나 아니면 한국 한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대부분의 한국한시가 서정시라고 한다 해도 그 서정성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한 사물이나 한 사태의 본질이란 그것이 역사적으로 변화해가는 과정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면, 한국한시의 서정성은 어떠한 변화과정을 자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가지는가? 조선후기에 독특한 규범을 이루어나가고자 하였던 해동악부(海東樂府) 작품들은 그 이전 시대의 영사시와 혹은 심지어 중국 서진의 시인인 좌사(左思)의 영사시와 전혀 똑같은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답변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한국한시는 역사적 진공 속에 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주체적으로 근대화하기 시작한 조선후기에 있어서도 한시작가들은 그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단지 재래의 양식만으로 개념화한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딱딱히 굳어 있는 한시형식 속에 서정자아의 놀라운 변모과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2. '시' (詩)와 한국한시
한시를 서구의 장르 개념에 비추어 보면 그 성격이 아주 모호하다. 그것은 단순히 중국문학에서나 한국한문학에서나 '시'(詩 shih)가 일정한 양식 기준에 따라 분류되지 않고서 형태·소재·주제 등이 서로 얽혀 분류되어 그 상위개념이 불확실하게 된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문제는 '시'가 역사적 개념이란 데 있다.

 

공자가 정리한 시경을 보면 그 속에는 풍(風)과 같은 서정시와 대아(大雅)와 같은 서사시가 모두 들어 있다. 이 가운데 풍은 고대사회에서 노예 생산을 토대로 생활한 자유민의 생활감정을 노래한 것으로, 비록 한계는 있지만 집단 정서를 드러낼 수 있었던 가요이다. 공자는 고대 장원경제사회에서 봉건적 토지사유제사회로 넘어가는 사기에 살아, 고대의 서사시를 '시' 속에 넣어두기는 하였지만, 고대제도에 반발하는 새로운 계층들의 정서를 표출할 수 있는 서정장르로 '시'를 부각시키면서 풍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시'란 명칭이 고작해야 순경(筍卿)에게서만 보일 만큼 '시'는 독립장르로 성립되지 않았으며,

 

이후 초사가 나타나고 한 대에 이르러 '부'(賦)와 '악부'(樂府)가 장르로 확립되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그러하였다. '시'가 독립된 서정장르로 인정받게 된 것은, 후한 말부터 급성장한 선비들이 황제 및 귀족들의 형식주의 문학인 '부'와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서정장르를 요구하면서이다. 이때의 '시'는 민간시가에서 계승 발전되어 5·7언 형식으로 확립되고, 선비들의 자기의식을 개성적 언어로 표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들 선비들이 새로운 봉건귀족층을 이루게 됨에 따라, '시'는 봉건윤리의 테두리 안에 들어맞는 보편적 정서를 표출하는 데 이용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시'의 범주는 공자의 시경 편집 때와는 달리 민간의 집단정서를 드러내는 서정가요(곧 謠)와는 뚜렷이 구별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시'는 악부체를 도입하기도 하고 잡언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지만, 선비들만의 보편화된 자기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내용 제한은 봉건제가 완전히 붕괴될 때까지 변함없었다.

 

선비-귀족층에 의해 지어진 '시'는 감성 및 감수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탐구, 사회정치 현실의 인식과 비판,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탐구, 자기를 망각한 자연에의 몰두를 내용으로 하여, 사회적 교훈적 지성적 면모를 지녔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시'속에는 서정시와 서사시가 나타날 수 있었다. 여기서 원칙적이라고 말한 것은 '시'는 신비-귀족층의 주관을 표출하기 위해 확립된 장르이므로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담고 있는 서사시의 면모는 나타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현실을 민중의 문제와 결부시켜 파악한 몇몇 선비들에 의해 소-서사시가 지어졌다는 사실은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시'가 선비-귀족층에 의해 공유된 서정시 장르이며, 때에 따라 서사시를 포괄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한국한시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한국한시의 '시'는 신라말 견당유학생이자 새로운 학자들인 최치원 등에 의해서 그들 자신의 고절감을 표현해 줄 수 있는 독립장르로 성립되었고 선비들이 독자적 계층을 형성함에 따라 그들의 주관을 드러내는 장르로서 공인되게 되었다. 최치원 이후의 한시작가들이 그의 시를 한국한시의 시조로 높였던 것은 단순히 그의 시가 다른 한시의 모범이 될 만한 풍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시가 '시'장르를 처음으로 그 개념에 맞게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신라말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는 민중 창작의 요(謠)를 제외한 서정시를 주로 가리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한시의 '시'에도 몇몇 선비들에 의해 지어진 소-서사시가 들어 있다는 단서를 달아야 하지만.

 

조선전기에 '시'에서는 대체로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주자주의를 따르는 선비-귀족층은 '시'는 곧 마음의 표현이고 마음은 곧 세계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는 작은 우주로 보았기 때문에, 서정자아와 세계 사이에는 아무런 틈이 없었으며, 서정자아는 또 언제나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개인적 체험과 체험에서 우러나는 감정은 보편적인 것으로 확신되었기 때문에 시인의 자아는 '나'와 '제3자'로 특수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시' 속에서는 구성적 요인으로서의 서정자아가 존재하지 않으며, 감정의 목소리는 들려도 자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기 표현은 곧 효용이 있거나 예교(禮敎)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되었고, 이러한 유심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시는 뜻을 말한다(詩言志)'는 창작방법이 중시되었다. 따라서 비록 현실의 살아 있는 모습을 담지는 않는다고 해도, 주자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시들은 자아를 둘러싼 세계를 의미 있게, 대가적 수법으로 개념화할 수 있었다. 그 시들은 숭고하고도 비장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녔었다.

 

조선후기에는 모든 사정이 달라졌다. 사회경제상의 변동과 그에 따른 신분제의 동요로 세계는 조화롭지 못한 것으로 되었다. 외부현실과 인간의 내적 경험은 날로 복잡해져 갔고, 또 외부현실과 내적 경험은 서로서로 갈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삶의 보편적인 의미통일에 대한 확신은 사라져갔다. 이에 따라 조선전기의 한시에서 보이는 규범이 파괴되고 새로운 규범을 모색하려는 몸부림이 있게 되었는데, 한시에서 고전성이 거부되고 '근대성'이 뚜렷이 부각된 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부류의 시인들에 의해서이다.

 

첫째로, 경제질서의 재편성과 더불어 독자적 계층을 형성한 시인들에 의하여. 둘째로, 지역적 특수성을 의식하게 된 향족 선비-시인들에 의하여. 세째로, 정치경제상의 기반을 잃고 기존질서에서 일탈된 선비-시인들에 의하여. 첫번째 부류의 시인들로는 이른바 중인계층을 들 수 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이들의 시가 그 자신들만의 사회비판의식을 보여 주지 못하고 양반계층 시의 아류로서 파악될 면도 지니고 있지만, 설화 및 현실세계에 시세계의 기반을 둔다든지, 6언시를 실험한다든지, 숫자·육갑·조수의 명칭을 연결어로 하여서 잡체시를 짓는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그들 시만의 독특한 규범을 이룩해내려는 몸부림이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부류의 시인들에 대한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개성의 향족이었던 임창택(1682∼1723)의 시는 그들 시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경전을 중시하는 정신(宗經主義)보다 공동체의식을 기반으로 한 낭만성과 해학성이 그들 시의 주요한 특징이었던 것 같다. 세 번째 부류의 시인들로는 진주민란을 주도하였던 소론과 천주교 전파를 통해 정신혁명을 꾀하였던 남인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시는 국가의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하여 많은 물음을 제기하였으며 이상적 제도를 그려 보이기도 하였다. 이들 세 부류의 시인들이 기존질서의 붕괴를 인식하고 내적 균형을 획득해 나간 과정은 이처럼 다양하면서도 어떤 줄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낙하생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표본으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낙하생 시의 감상성
우리들이 어떻게 단 하루라도 시를 짓지 않을 수 있겠나? 시를 짓지 않는다면 이렇게 긴긴 날들을 어떻게 늘어져 지낸단 말인가?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 멋진 경물, 맑고 고운 사람, 나무에서 우는 새를 마주칠 때면, 저도 모르게 기뻐서 마음이 움직이고 감정과 경물이 마주쳐 종이와 붓을 잡고서 꼭 한번 베껴내고 싶었다……남쪽으로 귀양 온 뒤 10년 되도록, 눈앞에는 마음 둘 사람이 없고, 마음속에는 마음 둘 일이 없어, 마음과 눈 닿는 데 마음 둘 만한 (미적) 경계가 없으니, 어떻게 마음 둘 만한 시를 짓겠는가?

 

낙하생 이학규(1770∼1835)는 정약용, 이벽 등과 함께 성호 이익 이후의 근기학파를 구성한 인물이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혜환 이용휴는 근기학파의 문인이었으며, 이용휴의 아들인 이가환(1742∼1801)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는 문학적 재능이 널리 알려져서 18세 때에는 "규장전운"(奎章全韻)과 "어제홍재전서"(御製弘齋全書)의 수교(讐校)를 맡기까지 하였으나, 백과사전파처럼 박학을 중시하여 편술한 "동사일지"(東史日知) 이외에는 별다른 연구저술을 찾아볼 수 없다. 신유사옥 때(1801) 이가환에게 연루되어 정약용·권철신·권일신·이벽 등 여러 근기학파 학자들과 함께 사교 신자로 체포된 그는, 배교를 선언하여 금관(지금의 김해)으로 유배를 갔다가, 1824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탐진·장기·강진 등에서 귀양을 산 정약용과는 여러 차례 서로 시문을 교환하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산과 낙하생의 시 경향은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낙하생의 시에서는 다산 시에서와 같은 직접적인 현실비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낙하생의 시가 다산 시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낙하생 시에서 나타나는 근대적 면모는 다산 시에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앞에 든 낙하생의 말은 김해 귀양 후 그의 시 창작이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름을 밝히고 있다. 서울에서 지은 시는 아름다운 경물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고 감정과 경물이 마주쳐 이루어진 시로 '마음 둘 만한 시'라 하였다. '마음 둘 만한 시'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사물에 마주함으로써 스스로 얻은 것이 있는 가운데 자아의 존재를 묘출하는 시, 사물을 통하여 자아의 평온함 곧 '본성'(本性)을 확인하는 시, 다시 말해 '물(物)→정(情)→성(聲)→음(音)'의 순서를 따르는 '자득묘사'(自得描寫)의 시를 말한다. 이러한 자득묘사는 사물의 구체적 현실성을 찾지 아니하고 각 사물들이 공통으로 갖추고 있는 보편적 추상체 곧 '이'(理)를 찾아내려는 '격물궁리'(格物窮理)의 인식방식과 통하는 것으로,

 

그러한 보편적 추상체를 시로써 형상화하려는 것을 말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자득묘사는 경제적 부와 정치적 권력을 지녀 안정된 존재기반 위에서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는 인물들이나 그들의 의식을 대변하고 그들의 존재방식을 이상으로 한 인물들, 곧 도학자―귀족층의 시창작 방식이다. 낙하생이 서울에서 지은 시들이 자득묘사를 주로 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의 그의 의식이 도학자―귀족층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러나 김해로 귀양을 온 뒤로도 그가 여전히 그들과 같은 의식, 그들과 같은 조화로운 세계관을 그대로 지닐 수는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존재기반이 뿌리째 뽑혀나가 심한 불안과 고통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승노래'(■人歎)는 이러한 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
고을 이름 길수록 坊名及道里
가슴에다 새겨두고 當膺字 具
내와 벌을 멀리 바라보며 瞋視 川原
우뚝서 아침 저녁 지났다오. 長立閱朝暮
………… …………
세운 것이 본래 뿌리가 없어 培植本無根
해가 갈수록 굳건치 못하여 年歲不自固
혹은 하늘 보며 비웃듯하고 或仰如大 
혹은 땅보며 뉘우치듯했네. 或俯如羞惡
그러다 장맛물 콸콸 흐르면 方當霖 餘
거꾸러지고 자빠져 狼狽至  
진창 새에 묻혀서는 沈淹  間
짓밟히고 만다오. 陵踏不復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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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이름과 길 수를 가슴에 써가지고 있었을 때 장승은 내와 벌을 멀리 바라보고 아침 저녁을 모두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 뽑혀져 짓밟히고 만다. 한때 자아는 세계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모두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존재기반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세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잃어버리고 만다. 뿌리 없는 장승은 곧 존재 기반이 없는 시인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

 

집에서 편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도 막상 편지가 오면 완전히 파멸하고 만 집안 소식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괴로움, 옆집 짚신 삼는 사람에게서 번번이 돈을 몇 푼 꾸어 술을 사먹지만 그 사람도 자기집에 쓸 돈조차 변변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느끼는 괴로움, 마을 사람들이 제문이나 혼사장과 같은 글을 써달랄 때 거절하면 서로 틀릴까봐 거절도 못하고 할 수 없이 머리를 썩혀야 하는 괴로움, 업보 때문에 뱀에 물린다는 악독한 사람마냥 스스로도 응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괴로움, 이러한 네 가지 괴로움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방식을 결정지우는 근본적인 아픔(病)이다. 낙하생의 시는 이러한 아픔을 짙은 우수로 표현하고 있다. "높은 노래는 세상서 할 일 아님을 이미 알았고/긴 탄식은 어리석은 일임을 이제 알았네"(已識高歌非世事 始知長歎是情癡)

 

송옥(宋玉)이 가을 슬퍼한 것과 두보(杜甫)가 나라 근심한 것을 억지로 본받는다면 이것은 베껴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어떻게 해서 꼭같이 베껴낸다고 해도 속마음이 아주 동떨어져 끝내 진실되지 못하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게 하지 못한다……그러니 그대의 원고 중에서 '바람을 무릅쓰고 절을 찾다'(阻風尋寺), '가뭄을 걱정함'(閔旱), '칡 캐는 노래'(采葛) 등 여러 편은 진정한 우수시(憂愁詩)가 아니다. 우리들이 맑은 하늘 밝은 햇살 아래 웃고 말하며 속마음을 드러내는 시가 진정한 우수시이다.

 

다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낙하생은 진정한 우수시는 다른 사람의 우수시를 모방한 시가 아니라, 언제나 내면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슬픔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시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내면 깊숙히 우수가 자리하게 된 것은 사회정치적인 기반을 상실하게 된 그의 개인적 체험 때문이지만, 이러한 개인적 체험 속에는 조선후기에 있어 재래의 질서로부터 완전히 일탈된 선비-소외층의 공통된 의식체험이 들어 있다. 따라서 감상성(우수)은 재래의 규범이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이상이 확립하지 못하였을 때 서정자아가 필연적으로 느끼게 된 불안과 고독의 정서이다.
재래의 규범이 무너지고 새로운 이상은 확립되지 못하게 된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 원인은 관념적인 문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문제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4. 자아의 물화와 그 거부
-영물시(詠物詩)와 '시장을 보고'(觀市八十韻)
1812년 이후 낙하생이 지은 영물시들은 사물의 현실적 구체성을 주로 부(賦)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러한 시들에서는 서정자아가 사물에 대한 흐릿한 경험을 직관과 표상을 써서 드러내지 못하고 사물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다. 절구 '으름'(燕覆子)에서는 사물이 형상화에 저항하고 있다.
꿀보다 달고 서리보다 차가와라 甛於崖蜜冽於霜
수풀 속 그 맛은 너무도 좋다만, 林下津津氣味長
다래와 뒷줄에 함께 두겠다만 堪與 桃爲後殿
대추와 나란히 같이 두겠나?  隨羊棗得聯行
으름 열매는 달고 맛있지만 그 나무는 볼품이 없다는 것을 노래하였다. 으름나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사용된 3-4구의 대구형식은 대상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그 대상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따라서 자아가 사물을 감각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하지만(제1-2구), 사물은 자아로부터 고립되어 형상화에 저항한다. '산새'(山鳥) 시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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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잔치 자리서 죽 마실 때 或如 粥筵
위위 여럿 모으는 입같고 ■■聚衆口
혹은 아침 상 차릴 때 或如具饍朝
확확 나물 써는 손같고   切菜手
혹은 성성 부르는 듯 或惺惺如 
혹은 절절 꾀는 듯 或切切如誘
혹은 멀리 가 시기하는 듯 或徒遠如猜
혹은 가까이와 낯익은 듯 或至近如猜
혹은 약빨라 놀리는 듯 或 巧如嘲
혹은 성내어 꾸짖는 듯 或盛怒如 
혹은 자주 옮겨 으스대고 或屢遷矜奇
혹은 흩어져 붙박혀 있고 或支離株守
같으면 혹 한 구멍 같이 쓰고 同或類一竅
다르면 혹 쪼갠 듯 갈라서고 異或判如剖
………… …………
새들은 하나하나 고립되어 자아와 대치하므로, 자아는 그것들을 총괄하여 인간과 자연의 법칙에 대해 의미 있는 상징적 형상물을 만들어 낼 힘을 잃었다. 비유법의 사용은 친숙한 사물을 낯설게 함으로써 미적 쾌감을 낳는 것이 아니라, 낯설고 알 수 없고 혼란된 사물들을 친숙한 사물들로 만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대구형식의 사용은 구심력을 지닌 자족적이고 자기조절적이며 상징적인 경험세계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대구 연들의 연속은 각 연들을 서로서로 고립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에서는 연과 연만이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구와 구도 서로 고립되어 있다. 그만큼 사물들의 고립성이 철저하다.
형상화에 저항하는 사물은 서정자아의 존재마저 위협하고 사물화한다.
'등불 앞 국화 그림자를 서술하다' (賦得燈前菊花影)
국화 남쪽 등불에 꽃 그림자는 북, 燈在菊南花影北
국화 서쪽 등불에 꽃 그림자는 동. 燈在菊西花影東
책상 책갑에 술병 둘, 一牀書■兩壺酒
둘러보니 이 모두 꽃 그림자 속.  要看渠花影中

 

등불과 국화가 만든 꽃 그림자는 동서남북을 채우고, 책상과 책갑 술병은 그 그림자 속에 갇혀 있으므로, 고립된 하나하나의 사물들을 둘러보는 시인 자신마저도 그 그림자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사물들이 거짓된 그림자 관계를 만들어 그 그림자가 세계를 채우고 있어서, 시인 자신마저도 그 속에서 하나의 사물로서 나타난다. 자아는 물리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정당화하기는커녕, 사물에 의해 지배당한다.

 

낙하생의 영물시에서 서정자아는 물리적 세계를 총괄하여 의미 있는 상징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고, 물질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정당화하여 물질적 안락에 몰두하지도 못한다. 자아와 세계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다고 확신되었을 때, 시인의 자기표현이 사회적 효용과 직접 연결된다고 혹은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을 때, 사물 속에서 삶 전체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었다. 이것이 주자주의의 영물시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아와 세계 사이에 틈이 생겼는데도 그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다고 믿고자 하였을 때, 자아가 사물들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고상하면서도 투명한 존재이고자 하였을 때, 자아는 오히려 사물의 배후로 물러나 물질적 안락을 즐기게 되었다. '사물을 탐구하여 지식을 확장한다'(格物致知)는 인식방법이 묘하게도 '사물과의 유희에서 의지를 잃는다'(玩物喪志)는 심미적 태도와 결합되었다. 이것이 참되지 못한 도학주의를 밑바닥에 깐 영물시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낙하생의 영물시는 이 두 부류의 영물시들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낙하생의 영물시에서 사물이 자아의 형상화에 저항하고 자아를 사물화 하려고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치를 먹고'(食  )가 이 물음에 답할 열쇠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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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는 하인들 같아 渣芹如輿 
아무리 많다 해도 안 귀하다. 雖多不足貴
농민들은 이걸 모아 팔아서 土人且輳買
버는 걸로 농사비 대네. 所取爲省費
상치는 가난한 선비같아   如寒士
담박한 것으로 자위한다오. 淡泊亦自慰
………… …………
상치는 사람들이 즐겨 먹는 채소다. 그러나 그것은 상품화한다. 시인자신도 정치에 쓰이고 안 쓰이고 하는 상품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은 원래 가진 가치를, 본질을 잃어버리고 상품화한다. 자아도 사물처럼 상품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시인은 자신이 여전히 '담박하다'는 것을 주장하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것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본질은 회복될 수 없다. 사물처럼 스스로도 고립되어 있다는 고독감이, 우수가 자아를 짓누른다. "아침 내내 배 문지르며/탄식하며 혼잣말 하네."(朝來坐 腹 歎息還自謂)

 

사물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상품화하는 것은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것으로, 낙하생의 영물시는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너무도 잘 반영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지배질서가 무너지고 사회관계가 새롭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17∼8세기부터 도시 및 농촌은 모두 화폐경제권 속에 들어가 도시 및 농촌 사람들의 가치관과 인식태도가 바뀌었다. 낙하생은 유배지에서 얼마 안 되는 농토를 사서 돈을 빌어 대면서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의 생활을 잘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화폐의 힘도 알게 되었다.

 

김해가 어디 좋은 데가 있느냐?……사내란 자들은……모여서 속이는 일과 빚놓는 일만 한다. 빚놓는 것이 관아에 알려져 꾸짖으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솟장으로 재판을 걸면 도리어 욕지거리를 한다. 여자들은 술과 음식은 나 모른다요 베짜기도 돌보지 않는다……풍속이 이자놀이를 좋아해서 백냥에 대한 이자가 하룻밤만에 열냥까지 된다.

 

화폐경제의 침투로 농촌 공동사회는 본질적으로 변화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돈을 매개로 한 관계로 되어 버렸다. 낙하생은 이들 농촌 사람들을 '코나 질질 흘리고 눈은 게슴츠레하며 옴투성이의 무리'(鼻 雀目及癡癬之類)라고 묘사하였는데, 이러한 형용은 사물화되어 본질을 잃어버린 농촌 사람들의 존재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처럼 되어 버린 인간관계의 실상은 시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시장을 보고'(觀市八十韻)의 일부를 든다.
………… …………
이 물건 저 물건 많기도 한데 物物豊如許
여기서 시끌 저기서 버끌   只在斯
으름장 놓아 되부르고 詐驚聊復爾
빈 맹세도 곧잘 하네. 虛誓且爲誰
도거리는 진작 겪었고  利曾經驗
낚는 짓도 잘 알다마다. 鉤情屢度思
한 점 고기 남길까 훔쳐보고 注眸量  
이문 쪼금 얻을까 손꼽아보네. 屈指破豪釐
팔아먹으려고 머리 썩고 得 虛相惱
골똘 생각다 갸웃갸웃. 沈思動自疑
농짓거리에 이리 붙고 저리 붙고  邊離合勢
알쏭달쏭한 말로 더 준다 못 준다. 謎裏減加辭
죽인다 으름장으로 외상패 몰리고 死  ■進
고래고래 고함으로 왈패들 들러붙고. 生嗔匈虜隨
………… …………
사물들은 노리개가 아니라 상품이며, 상품을 매개로 하여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서로 다투며 경계하는 아귀들이다. 시장은 이제 과거의 도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은둔할 만한 곳(市隱)이 아니다. 한문단편 작가였던 유몽인(1559∼1623)의 '시장'(市) 시에서조차도 시장이 은둔장소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낙하생의 이 시가 얼마만큼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절로 드러난다.

 

낙하생의 영물시는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자아의 물화와 인간관계의물화를 반영한다. 반영한다는 말은 그 시들이 이러한 사회관계와 존재방식을 직접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호박'(南瓜三十韻), '감자'(番藷)처럼 농민들이 즐겨 먹으면서도 언제라도 상품화할 수 있는 채소들을 노래한 시들이거나, '왕새우'(龍鰕), '곤쟁이 노래'(紫鰕行戱贈孫楗進士)처럼 어민들이 먹는 해물류를 노래한 시들이거나, 어떤 경우든 사물이 형상화에 저항하면서 시의 중핵으로 부각된다는 사실이 그러한 현상을 미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5. 형식언어의 주관화와 객관화
-영회시(詠懷詩)와 기속시(紀俗詩)
서정시는 세계와 자연이 자아의 내면에 수렴되고 자아가 세계와 자연 속에 삼투됨으로써 감각하는 자아(주관)와 직관된 세계(객관) 사이의 대립이 해소되는 문학장르이다. 그러나 낙하생의 시에서는, 영물시와 '시장을 보고'를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자아와 세계 및 자연 사이의 대립이 만족스럽게 해소되지 못하고, 자아가 죽어 있는 사물들의 세계에 둘러싸여 스스로 사물화될 위험에 마주하고 있다. 즉, 자아는 스스로 소외될 위험에 마주하고 있다.

 

1812년 이후 낙하생의 영물시에 자아의 소외가 반영되는 한편, 같은 시기 그의 다른 시들에서는 소외를 이겨내고, '자율적' 세계를 구축하려는 자아의 노력이 두드러진다. 이 자율적 세계의 구축은 한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세계가 자아의 내면에 남김 없이 수렴되지 못하고 자아는 세계 속에 빠짐 없이 삼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부현실은 날로 복잡해져가고 시인의 자기의식은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아는 소외를 완전히 이겨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정자아는 자유로운 자기의식을 바라며 세계를 자체 속에다 심정과 정서로 용해함으로써 스스로가 세계의 초점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내면화와는 반대방향으로 자아는 혼란된 자기감정과 불안한 존재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객관적인 가치질서를 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주관화와 현실반영이라는 의도된 객관화는 낙하생 시 언어의 두 근본항을 이룬다. 이 양극화는 마음속에 있는 뜻을 작가 개인의 말로 표현하는 영회시와, 풍속과 세태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기속시로 갈라져 나타난다.

 

그동안 지은 것이 대개 읊조린 것이라 술이 깨면 흐릿하여 잊어버리고 피로하면 찢어내 버려 얻은 것이 열에 서넛밖에 되지 않는다. 그밖의 관아와 절이 퇴락함을 기록하고 환곡 장부와 군정첩의 숫자가 줄어듦을 서술하였다. 모두 급히 지어내고 재빨리 해치운 것들이라 원고에 있는 것을 모두 덮어둔 지 오래다.

 

낙하생은 자신의 시를 '읊조린 것'과 '기록 서술한 것'으로 갈라 보았는데, 이것들은 각각 영회시와 기속시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시들은 모두 '되풀이해서 깊이 생각함'(反復沈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급히 지어내고 재빨리 해치운 것 즉 즉흥성을 띤 것들이다. 이러한 즉흥성은, 사물들의 배후에 있는 보편적 추상체를 포착해 내려고 하지 않고 심정을 구체적 상황에 수렴시킴으로써 자아를 개성화하는 것과 관계 있다.

 

낙하생은 시경 국풍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시는 억지로 애써서 지을 것이 아니요 편장 수를 많이 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속마음에 느낀 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우리의 평소 감정'(吾人之常情)을 중시하였다. 이때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평소 감정'(곧 本性)이 아니라, 특수하고 개성적인 '우리'(吾人)의 감정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보이는 자아는 보편화된 자아가 아니라, 스스로의 특수한 존재상태를 확인하는 자의식적인 것이다. 이 자의식은 과거적인 것을 거꾸로 지시하고 미래적인 것을 앞질러 지시하는 체험적 순간을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체험적 순간을 주관적 언어로 표현할 때 영회시가 이루어지고, 그 순간을 객관적 언어로 표현할 때 기속시가 이루어진다.

 

낙하생의 영회시들 중 주요한 작품들은 연작으로 되어 있다. 연작은 제목 하나에 짧은 시들을 여러 편 연결함으로써 마음속에 품은 복잡한 심사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글에 아무런 제약이 없음'(辭無詮次)을 특징으로 한다. '술 먹은 뒤 느낌이 있어 빨리 써나가 멈추지를 않다. 모두 105편으로, 말이 혹 너무 속을 드러낸 것과 글자가 성률에 어긋난 것은 모두 쓸어내었다.'(酒後感懷疾書不已 計凡一百五篇 詞或太露 字或失■ 澄汰之)·'한밤중 너무도 무더워 달려가 물가 주막을 찾았다. 30편을 지었는데 차례를 지키지 않았다.'(中夜苦熱 走尋沿街酒  計口占三十韻)·'무더위에 비가 온 게 17일 만이다. 28편을 짓다.'(苦熱復雨旬有七日口占二十八韻) 이러한 시들에서는, 형식상 결코 섬세함, 오밀조밀함, 감수성의 정련이 보이지 않으며, 내용상 결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날카롭고 직관적이며 단순한 관찰이 드러나지 않는다. "미친 짓은 정말 병이지만/시 짓는 데 어찌 이름 바라랴."(猖狂眞是病 詩豈須名 형식적으로는 대가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정돈되어 있지 못하고, 내용적으로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복잡한 심사가 두서 없이 얽혀 있다. '술 먹은 뒤 느낌이 있어 빨리 써나가 멈추지를 않다'의 제 29수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호사스런 집들은 큰길에 마주하고 豪華坐當路
명문가 집들은 나루에 통하였다. 閥閱走通津
파르란 가마솥에 좋은 밥상 밥 먹고 翠釜晶盤食
치켜오른 어깨에 붉은 얼굴 그 사람들. 鳶肩火色人
풍운이 엉클어져 어지러운 때 風雲紛際會
천둥이 내리침은 임금의 은혜. 雷雨摠深仁
깊은 산골은 이젯세상 아닌지 幽谷非今世
지금은 봄이 온 걸 모르겠구나. 從來不識春

 

5-6행은 벌열층의 자기방어로 폐쇄된 상황 속에서 시인의 신분상승 욕구가 좌절되고 말았던 사정을 표현한다. (풍운은 신분상승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시세의 험난함을 상징한다.) 1-4행과 7-8행에서는 벌열층과 시인의 생활이 대비되고 있는데, 시인은 이 대비를 통하여서 '봄'(임금의 은혜를 상징)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에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내면성찰은 감상성(우수)을 띠는 것으로, 같은 연작의 제31수 5-8행은 "가 버렸네 변화한 거리도/흘러갔네 백로절 좋은 시절도/물가 양지 조그만 집에/온 식구 목숨이 실낱 같구나"(去矣靑泥巷 悠哉白露期 瀕陽小卜築 十口命如絲)라고 하고 있다.

 

낙하생의 영회시는 자아의 내면의식을 내용으로 하고, 자아의 특수한 체험을 보편적 체험으로 높이지 아니한다. 그의 시는 주관적이면서 정조적이고 단편적인 것으로 해체되고 있고, 기술적이고 반성적인 요소를 끌어들이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키는 대로 읊조리다' 제6수
옆집 뽕나무 떨어진 열매는 꿀보다 더 단데 東家桑落濃於蜜
아랫시장 가물치는 푸성귀처럼 지천이라. 南市琴魚賤如蔬
우습구나 늙은 이 몸 졸렬하기 그지없어 堪笑老生生事拙
하릴 없이 빈 배엔 글줄만 가득찼네.  持空腹貯詩書
'술 먹은 뒤 느낌이 있어 빨리 써나가 멈추지를 않다' 제9수
술도 석잔은 먹고 飮酒三杯可
산도 천 걸음은 오르는데 登山千步强
늙은 욕심꾼이라 부끄럽기만 하고 老 眞自 
세상 일은 정녕 알 수 없구나. 人事定難量
병 참느라 비오듯 땀만 흐르고 力疾雨淋汗
주림 견디려니 뱃속은 부글부글. 忍飢雷殷腸
여물찌끼 보릿싸라기는 從來■與■
소 양에나 먹이던 것. 只以飼牛羊

 

앞의 시는 학문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회의는 학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일반화되는 것이 아니라, 맛있지만 떨어져 버린 오디(1행)나 푸성귀처럼 천하고 값싼 가물치(2행)란 상징에서 나타나듯, 사회정치적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던 시인 자신의 구체적 체험을 지시하고 있다. 뒤에 든 시는 시인의 현재생활(가난과 병고)을 직접 서술하면서도, 시인의 내적 역량(술 석잔을 마실 수 있다는 말은 도에 통할 수 있다는 뜻, 三盃通道)이 외부현실과 어긋나 있는 존재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 두 시에서 나타나듯, 낙하생의 영회시에서는 시인의 내적 자기성찰이 항상 구체적 현실을 직접 가리키고 있고, 구체적 현실을 항상 내적 자기성찰을 촉발하고 있다.

 

낙하생 시 가운데 외부현실을 기사한 시들은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개조하려고 하기보다는 주로 풍속과 풍물을 기사하는 기속시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객관적 서술이 의도되었다. 이 때문에 '풍토를 알린다'(譜風士)는 규범으로 하는 죽지사체(竹枝詞體)가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

 

낙하생의 죽지사체 시를 보자.
이 고장에서는 수놓은 발이 만들어진다. 6,7년 사이에 풍속이 더욱 공교해져서 대쪽 자르기를 고습도치 털처럼 가늘게 하고 물감 들이기를 아주 곱게 하며 가늘고 보드라운 실을 써서 여러 가지 꽃무늬를 짠다. 성안 사람들은 세 칸짜리 좁은 당만 있어도 다 치우고 발을 쳐서 가리니 시원하고 선선하여 또 다른 흥취가 있다.

 

내가 전에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 30여 장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금관 발은 대로 곱게 짠 것이니/서울에도 이런 게 있나 묻고 싶소/난간에 걸어 둘러치면/내동헌은 가을 마냥 서늘할걸"(金官簾子竹絲縷 借問京華有此不 四面鉤欄恰施設 內東軒上淡如秋)이라고 하였었다. 내동헌은 관아의 본채를 말한다. 그러나 관아에 바치는 것은 모두 거칠고 성근 것뿐이고 수놓은 것은 없다. 서리들이 수놓은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데, 그것은 수령이 알고 나면 갖은 폐가 미칠까 걱정해서다. 여기 '금주렴'(金州簾) 30운을 바친다. 오로지 사실을 서술하고자 했으니(專意敍實), 자질구레한 이야기(猥 )에 구애되지 말고, 서늘한 집에서 화창한 날 잠이 깬 뒤 훑어보면 좋겠다.

 

죽지사체의 시 속에는 다소 풍자적인 내용이 있지만, 그런 내용들은 '자질구레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시 속에 서술된 사실은 관찰된 사실 자체는 아니며 주관적으로 재구성된 사실이다. 또 이처럼 주관적으로 재구성된 사실들은, '금관죽지사'의 예에서 나타나듯, 시인의 생활공간과 역사공간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사실을 서술하고자' 노력한다. 사실을 재구성하는 주관의 역할은 될 수 있는 대로 억제되고 표면에 나타나지 않도록 배려된다. 낙하생은 그래서 '남을 풍간하는 뜻'(風人之旨)이 죽지사의 기본 요건이기는 하되 뜻을 세우는 것이 너무 직선적이어서는 안 되며 '신묘한 이치'(神理)를 지녀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신묘한 이치'를 '슬픈 듯하여 생각할 만한 뜻'(悽斷何念之意)이라고 다시 풀이하여, 앞서 말한 남을 풍간하는 뜻이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은연중에 드러나는 심정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심정적인 공감을 갖게 하려는 죽지사의 창작 태도는 비단 죽지사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기속시에 공통되는 것이다. '중추절 일을 쓰다'(中秋書事) 12편, '남포'(南浦) 4수, '일에 마주쳐 짓다. 배체로 지어 근심을 달래고 윤사혁을 생각하다'(卽事爲俳體遣悶兼懷尹師赫) 6수, '뱃길을 가며―전편'(前浦行) 14수, '뱃길을 가며-후편'(後浦行) 14수 등이 낙하생의 기속시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시들은 모두, 서정자아가 다층성을 지닌 외부현실 앞에서 그 복잡성을 단순성에로 치환함으로써 현실을 개념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어느 다른 시인의 기속시보다도 낙하생의 기속시는 철저한 객관화에로 치달리고 있는데, 그만큼 현실의 복잡성이 그에게 피부로 느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속시에는 토속적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물론 방언이 모두 한자어로 옮겨질 수 없기 때문에 낙하생은 음과 뜻이 비슷한 번역어를 쓰기도 하였다. 때로 방언의 번역에는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일에 마주쳐 짓다' 제6수를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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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회는 무지갯빛으로 듬뿍하고 葦魚 似霞 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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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 묘는 비오듯 잘려진다 羅祿苗如雨 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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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에 형씨 밥 싸들고 가는데  葉包歸先輩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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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류꽃은 가시내 비녀 위에 꽂혔네. 榴花揷上假男 

 

낙하생은 가시내가 '가시'(계집을 나타냄)와 '내'(사람을 나타냄)의 결합에서 이루어진 것을 모르고 가시내를 가짜 남자의 뜻으로 보아 '가남'(假男)이라고 번역하였다. 아마도 그는 활발하게 일하는 영남 처녀들에게서 사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여 그러한 모습을 시 속에서 연상될 수 있게 하려 했던 것 같다. 결국 이처럼 번역이 잘못된 것은 오히려 그가 풍속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따라서 낙하생의 기속시에 사용된 토속적인 표현은 객관화의 의도와 어긋나기보다는 그 의도를 강화한다. 토속적 표현의 사용은 의도된 객관주의를 가장 잘 드러낸다.

 

낙하생의 기속시는 눈앞에 바라보이는 사실만을 서술하려 하지만, 앞서 든 죽지사체 시의 예에서 드러나듯, 그 속에는 사실의 현실성이 숨어든다. '뱃길을 가며-전편' 제12수를 보자.
···
첫소금 일만 말을 성으로 들여가니 頭鹽千斛抵連城
눈을 팔고 서리 볶고 쓸면 또 나오네. 羅雪熬霜 復生
포구에서는 거룻배 삼만 척이 浦口  三萬隻
한꺼번에 동풍 타고 돛 올려라 소리하네. 一時純東上舷聲
'첫소금' 일만 말이란 표현은 그 양 자체가 많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끝소금'(尾鹽)은 첫소금의 세 배나 나오므로, 앞으로 더욱 분주히 일하여 많은 양의 소금을 만들어 내다 팔게 될 것이라는,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사실은 눈에 보이는 사실 차제는 아니며, 그렇다고 시인 자신이 멋대로 꾸며낸 것도 아니라, 지금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곧 나타날 현실인 것이다.
이제, 객관적으로 포착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눈앞의 사실들이 죽은 사물들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운동하는 힘에 의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이란 것이 드러나게 된다.

 

악부제 시 '세 며느리 노래'(三婦艶)를 보자.
큰 며느리 양가집 딸 大婦良家女
베짜기로 사시장철. 織作無冬春
둘째 며느린 재가한 여자 中婦雖再嫁
때마다 음식만은 새롭게 한다오. 飮食頗時新
막내 며느린 갓 물린 퇴기 小婦新退妓
눈빛으로 사람을 끌어들이지. 眼色招行人
시아버진 오똑 앉았고 丈人且安坐
곳간 쌀은 쌓이고 쌓이네.」  粟方陳陳」
큰 며느린 제멋에 우쭐댄다만 大婦自優好
고생이란 고생 모두 겪었지. 當年閱苦辛
둘째 며느린 조금 약아 中婦稍細 
고분고분 제몸을 잘 가누었다오. 承順巧持身
막내 며느린 거리낌 없이 小婦無所畏
웃기도 잘하고 성도 잘내네. 能笑復能嗔
시아버진 오똑 앉았고 丈人且安坐
이웃에겐 이 모든 게 자랑거리라.」 足以誇鄕 」

 

이 시의 악부 곡은 상화가사 청조(相和歌辭淸調)의 곡조로, 보통 하나의 연을 써서 세 며느리의 교태를 꾸며내어 보편화된 염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낙하생은  재래의 형식을 이용하되 두 개의 연을 써서 당시의 가족생활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자 하였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간결한 구문이 사실의 객관화에 효과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객관적으로 묘사된 사실의 뒷면에는 사회관계 및 가족관계의 변화하는 현실이 숨어 있다. 시아버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오똑하게 앉아 있지만, 세 며느리는 출신신분이 모두 다르고 그에 따라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므로 집안 사정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를 알 수가 없다. 가족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물상의 변화에 따라, 내적 갈등과 모순이 증가한다. 이 시에서는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의 모습이 앞으로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다. 이 현실의 힘 때문에 이 시는 원곡의 형태와는 달리 두 개의 연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정자아가 눈앞에 보이는 사실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의 일부란 것을 깨달아 감에 따라 그것을 내면화하는 자아의 의식도 점점 복잡해진다. 그런데도 영회시에서 보이는 자아의 내면화와 기속시에서 보이는 현실의 객관화가 아무런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을까? 마음이 곧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게 되었는데도…….

 

6. 자율성의 지양
-"해동악부"(海東樂府)와 '떠돌이중노래(乞士行)
영화시와 기속시를 통하여서 형식언어의 주관화와 객관화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치달렸다. 그러면서 두 방향은 서로서로 다른 한 방향에 대하여 그쪽에서 포착된 시적 진실이 완전하지 못하고 일면적이란 평결을 내린다. 서정자아가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밀려들어오는 외부세계를 개념화하는 것을 포기함을 뜻한다. 그렇다고 그 큰 세계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는 것은 서정자아로서는 힘에 벅차고 어리석은 일이란 사실도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하였다. 서정자아가 자신의 고립상태를 이겨내고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은, 정치성을 띠거나 민중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해동악부"는 민중적 보편성과 함께 정치성을 추구하는 자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낙하생의 "해동악부"는 모두 54편으로 되어 있는데, 편술에 있어 역사의 흐름을 중시하고 있고, 각 사실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해동악부계 작품들과 같다. 또한 이 작품의 각 원시는 서술 서정시의 양식을 주로 취하고 있다. 원시에서 나타나는 '의론'의 요소는 형식언어가 극도로 주관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서술'의 요소는 형식언어가 객관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서술의 요소를 통해서 역사세계가, 서정자아가 만들어 놓은 좁은 공간을 깨고 들어온다. 제26편 '양수척'(楊水尺)만을 들기로 한다.

 

양수척이여 楊水尺
너도 역시 사람의 자식이거늘 汝亦人之子
어째서 남자로 나 노예되고 胡爲乎生男爲人奴
여자로 나서 노비되나 生女爲人婢
양수척이여 楊水尺
너도 역시 하늘의 백성이거늘 汝亦天之民
어째서 남자는 시와 예를 못 배우고 胡爲乎男不爲詩禮
여자는 옷만들기 베짜기를 못하나 女不爲組 
소잡고 고리짜기는 생리다마는 屠牛織柳自生理
사람 축에 못 끼는 건 누구 때문인가  不齒人誰其使
그대는 모르나 거란이 동북쪽 쳐왔던 일 君不聞東丹織騎 東津
또 모르나 왜구 흉내로 관등연에 행패한 일 又不聞假倭燈市行掠人
양수척이여 楊水尺
진실로 하늘 백성 사람 자식이나 苟亦天之民人之子
속에 원한 품은 건 당연한 일. 中藏怨毒固其理

 

양수척은 본래 부역을 하지 않았으나 고려 명종 때 이지영이 자신의 기생 자운선에게 그들을 주어 적에 올린 뒤 부역을 시켰다. 뒤에 최충헌이 자운선을 첩으로 삼고 양수척에게 부역을 시키고 공액을 심하게 징수하였다. 원한이 쌓인 양수척들은 거란 침입 때는 길안내를 했고, 신우가 관등연을 열었을 때는 왜구로 꾸며 습격하기도 하였다. 낙하생의 이 시편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지시하고 있다. 곧 역사세계가 시 속으로 밀어들어오고 있고, 비록 설의법의 형태로이기는 하지만 구체적 사건으로 서술되고 있다.(11-12행) 이에 비하여 13-15행에서 보이는 해석은 이 시편을 최충헌의 학정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사례로서 이용하고자 한다. 곧, 시인의 역사의식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주관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더군다나 이 주관적 해석은 양수척들이 불쌍하다는 식의 심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실에 대한 단호한 비판이다. 이제 서정자아는 정치성을 띠고 나타난다. 그림으로써 서정자아는 자신이 이제까지 누렸던 좁은 공간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한다.

 

이 '양수척' 시편은 한민족의 역사를 서술하는 전체 54편 중에서 편술상 특별히 고려말의 정치현실, 즉 문번귀족에 의해서 폐쇄되었던 신분사회의 현실을 드러낼 수 있도록 배려된다. 또한 그 역사적 사실은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의 정치현실, 즉 벌열층의 자기방어로 폐쇄된 사회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이용된다. 따라서 과거의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은 당대 정치체계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으로 전이된다. 개별적인 것을 통하여 보편적인 것이 드러난다. 이 보편적인 것은 존재기반을 잃고 기존 질서로부터 일탈하게 된 소외-선비층의 보편적 의식을 담고 있다.

 

17세기 초 심광세(1577∼1624)의 "해동악부"로부터 19세기 중엽 박치복(1824∼1894)의 "대동속악부"(大東續樂府)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악부제의 연작영사시 작품들은 과거의 사실을 들어 비판함으로써 당대 정치체제의 정당성에 대해 묻는다는 하나의 규범, 곧 해동악부체 양식을 확립한다. 비록 각 작품들의 밑바닥에 깔린 역사의식은 서로 다르고 그에 따라 소재를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이러한 내용적 규범, 이러한 양식성은 모든 작품에 보편적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심지어 어떠한 편면의 배열위치는 여러 작품에서 한결같기까지 하다. '양수척'시편은 다른 모든 작품에서 다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복휴(?)의 "해동악부"에서도 같은 편명으로 같은 배열위치에 놓일 만큼 보편화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해동악부"에서 보이는 보편성은 소외-선비층의 테두리 안에서의 진리로 제한되고 객관적-인본적 진리에로 높여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기존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묻기는 하지만 이상적 지배체제나 사회관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시되는 것은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묻고 그것을 혁신해 나갈 수 있는 선비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서술의 대상은 선비나 귀족 혹은 그들의 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들(평민이거나 무인이거나 승려이거나 하층민이거나간에)이며, 비판의 내용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 안에서의 모순이고 찬영의 내용은 선비의 덕(志節)이다. 또한 형식은 일정한 규범을 갖추지 못하고 매 시편마다 실험의 성격을 지닌다. 이런 점들은 다른 모든 해동악부 작품에서도 공통된다. 곧 소외-선비층이 획득한 보편성, 낙하생의 "해동악부"에서 보이는 보편성은 여전히 참된 보편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한계는 모든 해동악부 작품들이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에 그치고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하지 못한것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해동악부"에서 드러나는 서정자아의 정치성과 보편성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자신의 개별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이제까지 누려왔던 좁은 공간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하려는 자아의 의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정자아가 자신이 만들었던 좁은 공간을 부수고 나올 때 바깥의 커다란 세계가 눈앞에 보인다. 자아는 세계와 맞선다. 그러나 자아의 힘은 아직 약하다. 단순화된 서사형식의 시 '떠돌이중노래'(乞士行)는 이때 만들어진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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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당 동당 동당       
호남 퇴기 해서 창기 潮南退妓海西娼
일개 불당이 우리 사당과 어찌 맞설까. 一佛堂何爭我社堂
간곳마다 사람들 떼지어 있는 곁 箇處人海人山傍
슬그머니 치맛속을 더듬어 본다. 暗地入手探■常
너야 돈 한 푼에 끄덕이는 계집이요 汝是一錢首肯之女娘
내야 사방 떠도는 건달이지. 我是八路不 之閑良
아침엔 김서방 저녁엔 박서방 朝金郞暮朴郞
물결따라 바람따라 멋대로 놀면 逐波而偃隨風狂
이 사람 저 사람 찻술 준다오. 一般布施茶酒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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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떠돌이중의 행각을 다섯 장면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인용부분은 그 가운데 셋째 장면이다. 중이 사당패 여자에게 수작을 건다. 주고받는 대화는 육담이다. 여기저기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떠돌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떠돌이는 민중의 모습이면서 시인 자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시인은 스스로가 민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정자아는 자신의 개별성을 부정하고 민중적 보편성을 추구한다. 이 시는 낙하생이 귀양에서 풀려난 뒤의 서정자아의 철저한 변모를 보여 주며, 동시에 폐쇄된 공간 속에 갇혀 자유를 누려왔던 모든 근대적 서정자아의 자기부정 과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서정자아가 민중적 집단자아와 함께 나누려는 연대의식은 서정자아 편에서의 바램이지 현실적으로 굳어진 것은 아니다. 민중이 다만 떠돌이로 표현된 것은 시인 자신이 사회경제적으로 아무런 기반이 없는 떠돌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다. 이 사실은 중의 행각이, 곧 민중의 생활이 일회적 특수성에 있어 인수됨으로써 양식화되지 못하고, 다섯 장면으로 '파노라마식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과 관련이 있다. 굿거리 장단과 각설이 타령, 육담만이 시 속에 도입되었을 뿐, '현실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자아의 모습 즉 구상적-사태적인 것이 이야기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

 

7. 조선후기 한시의 한계
낙하생의 시에 깔린 감상성(우수)은 기존질서로부터의 고립에서 오는, 마음이 세계 전체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확신하였던 유심론적 세계관이 깨어진 데서 오는, 서정자아의 자기감정이다. 영물시(詠物詩)와 '시장을 보고'(觀市八十韻)에서 잘 나타나듯, 자아의 고립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자아의 사물화와 연관된다. 사물은 형상화에 저항하고 자아와 맞서려 하고 있다. 사물은 고립되어 있으면서 거짓된 관계를 만들어내고 이 속에서 자아마저 사물화하려 한다. 서정자아는 자신이 아무런 존재기반을 갖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정자아는 스스로가 사물화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하여, 개별성에 따라 사물관계와 인간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주관적으로 폐쇄된 세계를 만들어 낸다. 시는 실제 사회가 요구하는 합목적성을 버리고 시적 진실을 직접 포착하려고 한다. 자율시가 성립된다. 이 자율시는 형식언어가 주관화된 영회시(詠懷詩)와 형식언어가 객관화된 기속시(紀俗詩)로 이분된다.

 

연작으로 이루어진 영회시는 시인 자신의 구체적 의식체험을 개성적 언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자아가 만든 작은 세계를 바깥에서부터 싸고 있는 커다란 세계는 다른 운동하는 힘에 의하여 넓혀져 가서 이 작은 세계가 깨로 들어오려 한다. 여기서 자아는 객관화의 몸짓을 취한다. 되도록 주관을 숨기고, 이제 막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주변세계를 들러본다. 기속시는 이러한 객관화의 몸짓을 담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형식언어의 주관화와 객관화는 양극단으로 치달리게 된다. 여기서 자아는 바깥의 큰 세계가 자신의 편에서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면 쉽게 움켜질 수 있는 죽은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빠르게 운동하는 역사적 세계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된다.

 

"해동악부"에서 보이는 서정성과 서사성의 결합은 이래서 이루어진다. 또한 자아는 역사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통하여 자율성을 포기하고 정치성을 몸에 지닌다. 이것은 재래적인 합목적성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성의 정당성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자아는 바깥의 큰 세계를 진실되게, 운동하는 것으로서 드러내지는 못한다. 여전히 자아는 아무런 존재기반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바깥의 세계가 크게 보이면 크게 보일수록, 시야는 흔들리고 불안도 커지기 마련이다. 단순화된 서사형식을 지닌 시 '떠돌이중노래'(乞士行)는 서정자아가 자신의 개별성을 넘어서서 집단자아에 동화하려 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 준다. 이 시는 여전히 주관적인 인상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장면장면의 파노라마식 묘사에 머물러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낙하생의 시에 나타나는 자아의 물화와 그 거부, 형식언어의 주관화와 객관화, 자율성의 확보와 지양 등의 문제는 조선후기의 근대적 서정시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어 갔다.

 

시적 진실 이외의 다른 목적에 예속되지 않고자 하는 자율시는 소외-선비층과 중인계층의 시에서 두르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자율시가 갖는 해방적 의의는 서정자아로 하여금 기존질서의 사슬을 벗어나 스스로의 자유로운 내면과 스스로의 법칙을 찾도록 계몽한 데 있다. 그러나 그 한계는 너무도 뚜렷하다. 폐쇄된 공간 안에서의 자유는 그 자체가 이미 구속의 성격을 지니므로, 자아를 둘러싼 운동하는 세계를 참되게 내면화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 자아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젖극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개조하려 할 때, 시는 자율성을 지양하고 정치성을 띠게 된다. 해동악부 작품들에게 보이는 정치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이라든가, 다산의 4언시에서 보이는 사회현실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의 끝에 있다.

 

조선 후기의 근대적 서정자아는 미학적 경험을 통하여 진리가 죽은 사물들 하나하나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나, 그 진리가 개별적인 '나'의 이래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은 깨닫지 못하였다. 서정자아는 물화된 자기자신을 부정할 수는 있었으나, 개인적인 '나'를 넘어서서 민중적인 '나'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 언어는 몰개성적인 것에서 개성적인 것에로 나갔으나, 이 개성적인 것에서 객관적-인본적인 것을 드러낼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 넓게 나타나는 민요조의 시들이 개성적 언어로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집단정서를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풍속의 기사에 머무른 것은 이 때문이다. 내용적 규범을 이룩하였던 해동악부체 작품들이 역사적 사실에서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였으나 이 보편적 의미가 참된 보편성을 띠지 못하고 소외-선비층의 의식 안에서의 보편성에 머무른 것도 이 때문이다. 자아는 고립된 것으로 경험되었기 때문에 공통적·초개인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형식이 확립될 수 없었다.

 

민중적인 집단정서는 '시'의 서정성과는 전혀 상반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조선 후기의 근대시에서도 여전히 그러하였다. 그러한 집단정서를 지닌 한시의 출현은 '시'의 개념을 파괴하게 된다. 김삿갓(金笠)의 한시가 그것이다. 수많은 김삿갓이 나라 안 구석구석에서 나타난 것은 민중적인 집단자아가 나타났음을 뜻한다. 자아가 고립적인 것으로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통적인 형식 즉 초개인적으로 이루어진 형식을 낳을 수 있었다. 이러한 집단자아의 출현을 통해서만 개인적인 '나'는 극복되고, 자아는 2중의 부정을 이루게 마련이다.

 

후기
이 책은 그간에 한시와 한시작가에 관하여 본인이 발표한 논문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원래의 논문이 게재되었던 발표지와 그 서지사항은 아래와 같다.

1. [鄭知常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禮部試 及第, 그리고 拗體], {韓國漢詩硏究} 3, 한국한시학회, 1995.12. pp.101∼126.
2. [及菴閔思平論], {韓國漢詩作家硏究} Ⅰ, 한국한시학회, 1995.7. pp.337∼366.
3. [麗末鮮初의 詩僧: 卍雨와 義砧], {東과 西의 思惟世界(莊峰金知見博士華甲紀念師友錄)}, 民族社, 1991. pp.435∼450.
4. [泰齋柳方善論], {한국한시작가연구} 2, 한국한시학회, 1996.12. pp.507∼543.
5. [金時習論], {한국한시작가연구} 3, 한국한시학회, 1997.12. pp.145∼191.
6. [黨伐의 場에 핀 梅花: 趙載浩와 '梅社五詠'], {한국한시연구} 4, 1996.12. pp.351∼375.
7. [아전출신 문인 兪漢緝의 {翠苕遺稿}에 대하여], {어문논집} 37, 안암어문학회, 1998.2. pp.83∼100.
8. [茶山과 詩樣式 選擇과 抒情의 一般化], {시와 시학} 창간호, 시와시학사, 1991. pp.314∼338.
9. [다산의 薇源隱士歌에 담긴 歸田園 意識에 대하여], {정신문화연구} 48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10. [茶山 丁若鏞의 古詩形式論], 김완진 외. {문학과 언어의 만남}, 신구문화사, 1996.10. pp.279∼300.
11. [조선후기 문인의 東遊 體驗과 漢詩], 한국한시학회 10주년 기념 학술대회, 1998. 6.29. 강원대학교에서.
12. [국토산하를 노래한 한국 한시의 미학적 전통에 대하여], {韓國漢文學} 18, 1995.12. pp.67∼95.
13. [韓國 漢詩와 歷史], {한국한시연구} 1, 한국한시학회, 집문당, 1993.12. pp.21∼58.
14. [조선후기 한시와 민족주의], {韓國漢文學硏究} 15집, 韓國漢文學硏究會(亞細亞文化社 간행), 1992.9. pp.125∼149.
15. [서정자아의 근대적 변모와 그 한계: 洛下生 李學逵의 漢詩를 중심으로], {韓國學報} 25집, 一志社, 1981. pp.176∼205.
16. [조선후기 한시의 자의식적 경향과 해동악부체], {韓國文化} 2집,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1. pp.19∼57.